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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사람 - 알츠하이머의 그늘에서
샌디프 자우하르 지음, 서정아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8월
평점 :
과학적 통찰과 인간적 경험이 결합된 독특한 회고록입니다. 알츠하이머라는 병의 잔인함 속에서 가족 간의 관계와 인간의 존재를 새롭게 정의해 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심장내과 의사이자 문학적 감각을 겸비한 작가 샌디프 자우하르. 그의 아버지, 프렘 자우하르는 성공한 과학자로서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이후 기억과 자아를 잃기 시작했습니다.
이 책은 저자가 아버지를 돌보며 7년간 겪은 개인적 여정을 중심으로, 기억이 무엇이고 인간 존재란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 의학적 성찰을 엮어냅니다. 아버지와의 관계를 추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와 새로운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 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억을 잃은 삶도 삶일까? 알츠하이머는 아버지를 무기력하고 혼란스러운 상태로 몰아넣었습니다. 오래 알고 지낸 친구들의 이름을 잊고, 새로 산 물건을 잃어버리는 소소한 건망증에서 시작된 증상은 점차 가족의 얼굴을 몰라보거나 길을 잃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알츠하이머로 인해 아버지가 기억을 잃어갈수록, 저자는 아버지의 관계를 새롭게 재구성해야 했습니다. 기억은 단순히 과거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연결고리입니다.
특히 감동적인 장면은 저자가 유년 시절의 기억을 재구성하며 아버지와의 관계를 새롭게 정의하는 부분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 자전거를 배우던 날의 기억을 떠올립니다. 원래 기억 속에서 아버지는 관심을 잃고 사라졌지만, 새로운 기억 속에서는 아버지가 그와 함께 달리고 있습니다. 수정된 기억은 그가 아버지를 자신의 마음 속에서 영원히 남게 하기 위한 은유적 방식입니다.
이 과정은 존재를 새롭게 창조하는 방식으로 묘사됩니다. 기억은 개인의 정체성을 온전히 결정할 수 없지만,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정의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는 말이 인상 깊었습니다.
저자의 회고는 알츠하이머 간병의 현실을 냉철히 보여줍니다. 가족 구성원들은 때로 상반된 의견으로 충돌하며, 간병 과정에서 윤리적, 감정적 갈등을 겪습니다.
형제들은 아버지를 달래기 위해 거짓말을 할지, 진실을 말할지 논쟁합니다. 저자는 진실과 신뢰를 고수하지만, 그의 형제들은 실용적인 방법을 선호합니다. 이런 논쟁 장면들은 간병인이 느끼는 죄책감, 분노, 사랑의 복잡한 감정을 솔직히 드러냅니다.
간병인으로서의 역할은 단순한 돌봄을 넘어섭니다. 저자는 아버지에게 책을 읽히고 퍼즐을 들이미는 등 기억의 붕괴를 막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그는 고백합니다. 자신이 아버지를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미워했다고 말이죠. 아버지를 기억 속에 붙잡아 두려는 아들의 노력은 결국 자신의 정체성까지 흔드는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습니다.
저자는 심장내과의로서 의학적 지식을 동원해 알츠하이머의 본질을 깊이 파고듭니다. 치매를 망령으로 여겼던 고대부터 알로이스 알츠하이머가 병의 메커니즘을 밝힌 현대에 이르기까지, 뇌와 기억의 역사를 흥미롭게 풀어냅니다.
책에서는 알츠하이머의 역사, 병리학적 메커니즘, 치료법 연구의 한계를 상세히 다룹니다. 의학적 논의에서 끝나지 않고, 과학적 사실을 가족의 경험과 연결하고 있어 더욱 깊은 공감을 줍니다.
<내가 알던 사람>이 던지는 질문은 “우리를 우리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입니다. 기억은 단순히 개인의 과거를 저장하는 기능을 넘어, 개인의 정체성과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중심축입니다. 그러나 기억의 상실로 인해 정체성이 흐려질 때, 우리는 존재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저자는 기억이 단순히 뇌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기억은 가족의 뇌 사이에서 공유되기도 하고, 때로는 책, 사진, 이야기 속에 보존됩니다. 가족 구성원들이 아버지의 기억을 대신 짊어지고, 그를 새로운 방식으로 기억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알츠하이머는 단순히 기억을 잃는 병이 아닙니다. 환자와 가족 모두에게 삶의 종말을 반복적으로 겪게 만드는 잔인한 병입니다. 특히 저자가 강렬하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치매가 가져오는 정체성의 붕괴와 그로 인한 관계의 변화입니다.
저자는 아버지가 더 이상 자신의 삶을 기억하지 못할 때조차, 그는 여전히 내 아버지였다고 말합니다. 관계의 근본은 기억을 초월한다는 이 통찰은 깊은 울림을 줍니다. 치매 환자를 단순히 기억을 잃은 사람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존엄성을 가진 존재로 바라보게 합니다.
샌디프 자우하르의 <내가 알던 사람>은 기억과 존재에 대한 철학적 성찰과 간병의 현실을 감동적으로 풀어냅니다. 기억이 단순한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관계와 정체성을 연결하는 중요한 매개체임을 깨닫게 합니다.
진솔하고 감동적인 이 회고록은 알츠하이머라는 병의 잔혹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것이 가져오는 관계의 재발견과 성장을 보여줍니다. 치매 환자와 보호자뿐만 아니라, 기억과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이들에게 위로를 선사하는 책입니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