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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우울 - 내면의 어두운 그림자 우울의 모든 것
앤드류 솔로몬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그런 것들을 보게 한다.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종류의 회복력과 힘과 상상력이 존재하는지 들여다봄으로써 우리는 우울증의 끔찍함 뿐 아니라 인간의 생명력의 복잡성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 받을 수 있다.
우울증을 겪는 동안 꼭 명심해야 할 점은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아무리 기분이 저조하다고 해도 삶을 지속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저자의 말을 경청하게 되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지독한 우울증 환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결점투성이의 사람이지만 우울증을 겪고 나서 전보다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했다. 우울증을 겪지 않았더라면 이 책도 쓰지 않았을 것이며, 우울증을 통해 가난하고 짓밟힌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심없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다고.
간추리면 이렇다. 글쓴이가 스물다섯 살 나던 1989년 8월, 어머니가 난소암 진단을 받으면서 그의 흠잡을 데 없던 세계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는 말한다. 어머니가 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인생은 지금과 완전히 달랐을 것이라고. 그 사건이 조금만 덜 비극적이었더라도 어쩌면 발병은 없이 우울증이 성향들만을 지니고 살거나 아니면 나중에 중년의 위기 때 발병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어머니는 실용주의를 당신의 통제 불가능한 슬픔을 막는 힘의 장으로 이용했다. 그러나 그것은 기껏해야 부분적인 효과만 있다. 어머니는 당신의 삶을 엄격히 통제하는 방법을 통해 우울증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있었으리라. 이제 생각하니 어머니가 질서에 그토록 맹렬하게 집착했던 것은 고통이 겉으로 표출되지 못하도록 억누르기 위해서였던 듯하다. 내가 약물의 도움으로 쉽게 피할 수 있는 고통에 어머니가 평생 시달려 온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프다.
한편으로는 동요성 우울증이 따분할 정도로 전형적인 증상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특히 불안 증세는 끔찍해서 증오, 고뇌, 죄책감, 자기혐오로 가득한 것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평생 그토록 덧없는 느낌에 사로잡혔던 적이 없었다. 잠도 못 잤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무섭게 화를 냈다. 그때 절교한 친구가 여섯 명이 넘는데 그 중 하나는 사랑의 감정을 느끼던 여자였다.
167쪽
정신은 뇌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지만 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것은 생물학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실용주의적이고 형이상학저긴 문제이다. 미시간 대학교의 신경 과학과 명예교수인 엘리엇 벨런스타인의 말이다. 경험적인 것이 물리적인 거에 영향을 미치도록 이용될 수 있다. 이에 대해 사우스캐롤라이나 의과대학 제임스 밸린저는 이렇게 말했다.
“심리치료가 생물학을 변화시킨다. 행동치료가 (아마도 약물과 같은 방식으로) 뇌의 생물학을 변화시킨다. 불안증에 효과가 있는 특정 인지 치료들은 약물 치료와 마찬가지로 뇌의 대사 수치를 낮춘다.
밤마다 잠이 안 오면 잡념을 잊기 위해 빨래를 하기 시작했다. 모기에 물리기라도 하면 피가 날 때가지 잡아뜯었고 딱지가 앉으면 기어이 뜯어냈다.
218쪽
수면은 생체 주기의 주요 결정 요소이며 수면 패턴이 변화하면 신경전달물질과 호르몬의 분비에 혼한이 온다. 우리는 수면 중에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해 상당 부분 밝혀냈고 수면이 우리의 감정을 일시적으로 하강시킬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그것들의 직접적인 상관 관계는 알지 못한다. 수면 중에 갑상선 호르몬의 수치가 내려가는데 바로 그 때문에 기분이 저조해지는 것일까?
나는 우울증 시기에 낮잠의 욕구에 시달리곤 했었는데 낮잠은 깨어 있는 동안에 나아진 것을 무효로 만드는 역효과를 낸다.
277쪽
어린이들의 경우, 우울증이 성격 발달을 저해한다. 우울증과의 싸움에 전력을 기울이다 보니 사회적 발달이 지연되고 삶은 점점 더 우울해진다.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이 당연시 되는 세계에서 자신만이 그런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350 쪽
사실 난 술에 취한 밤에 글이 잘 써지고 코카인에 도취해 있을 때 멋진 아이디어들이 떠오른다. 물론 항상 그런 상태에 있는 건 원하지 않는다. 내 임의대로 나의 상태를 조절할 수 있다면 어느 정도 쯤이 좋을까? 지금 상태보다는 몇 단계 높여야 할 것은 분명하다. 나는 무한한 에너지와 빠른 정확성과 확실한 탄력성을 소망한다.
361~363쪽
자살은 힘겨운 삶의 정점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과 의식을 넘어서는 미지의 장소에서 나오는 것이다. 나 자신이 체험했던 유사 자살 시기를 돌아보면 당시엔 온당하다고 믿어 마지않았던 논리가 지금은 몇 해 전에 내게 폐렴을 안 겨 세균처럼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마치 강력한 세균이 내 몸에 들어와 나를 점령했던 듯한 기분이다. 이상한 것에 공중납치라도 당했던 듯 하다.
죽음을 원하는 것과 죽고 싶은 거소가 자살하고 싶은 것 사이에는 미세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따금 죽음을, 존재하지 않는 것을, 슬픔을 넘어서는 것을 원한다. 그리고 우울증에 빠지면 많은 이들이 죽고 싶어 한다. 현재 상태에서 적극적인 변화를 시도하기를, 의식의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살하고 싶어 하는 것은 특별한 에너지와 특정한 방향성을 띤 폭력성을 요한다. 자살은 수동성의 결과가 아닌 행동의 결과이다. 자살을 하려면 현재의 고통이 영원할 것이라는 믿음과 최소한 약간의 충동에 덧붙여 엄청난 에너지와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자살자는 네 부류로 나뉜다.
1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자살을 시도한다. 이들에게 자살은 숨쉬는 것만큼 긴박하고 피할 수 없다. 이 부류는 가장 충동적이며 특정한 외부 사건에 의해 자살에 이르기가 가장 쉽고 이들의 자살은 갑작스럽다. 수필가 앨버레즈가 자살에 관한 빛나는 명상서인 <야만적인 신>에 듯이, 자살은 삶을 통해서는 점차적으로 무디어질 수밖에 없는 고통을 “귀신을 쫓아내듯 몰아내려는 시도”이다.
2. 안락한 죽음과 반쯤 사랑에 빠져 있으며, 자살이란 것이 철회 가능한 행도이기라도 하듯 복수하기 위해 자살을 기도한다. 이 부류에 대해 앨버레즈는 이렇게 설명했다. “여기에 자살의 어려움이 있다. 이것은 야망을 넘어서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야망에 찬 행위이다.” 이들은 죽음을 향해 달려갈 때 삶에서 멀리 달아나지 않는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존재의 종말이 아니라 소멸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3. 죽음이 견딜 수 없는 문제들로부터의 유일한 탈출구라는 그릇된 논리에서 자살을 기도한다. 이들은 선택 가능한 방법들을 고려하고 자살 계획을 세우고 유서를 쓰고 외계로의 여행이라도 계획하는 것처럼 관련 실무자들과 접촉한다. 이들은 죽음이 자신의 상황을 개선해 줄 뿐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짐도 덜어 줄 것이라고 믿는다. (사실은 대개 그 반대인데도 )
4 합리적인 논리에 따라 자살을 기도한다. 이들은 육체적인 질병이나 정신적인 불안정이나 환경의 변화로 인한 괴로움을 겪고 싶어 하지 않으며 삶의 기쁨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현재의 고통을 보상하기에 충분하다고 믿는다. 이러한 미래에 대한 예단은 정확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지만 망상에 빠진 것이라고 할 수 없으며 아무리 많은 항우울제의 사용으로도 그들의 마음을 바꾸지 못한다.
사느냐 죽느냐 . 글의 주제로서 이것보다 더 많이 쓰인 것도 없지만, 이것처럼 사람들의 입에 올리기를 꺼리는 화자도 없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그 결정은 그곳에 들어서면 아무도 돌아올 수 없는 미지의 땅 에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미지의 세계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도, 이상한 체험의 영역으로 기꺼이 모험의 발을 내딛고자 하는 이들도, 전혀 알려진 것이 없는, 두려운 것이 많으면서도 모든 것을 희망할 수 있는 상태로 가기 위해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견뎌야 한ㄴ 이 세계를 그리 기쁘게 떠나지는 않는다. 햄릿의 말처럼 ’분별심은 우리 모두를 겁쟁이로 만들며 결단은 창백한 사색으로 인해 본래의 색조를 잃고 흐릿해진다. 여기서 분별심은 의식을 의미하며 겁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존재하고 통제력을 갖고 행동하고자 하는 잠재적인 의지를 통해서도 소멸에 저항한다. 더욱이 스스로를 인정한 정신은 그것을 다시 부정할 수 없고 이것은 자기 성찰적인 삶이 파멸을 부른다는 견해와 반대된다.
“창백한 사색‘은 우리 안에서 자살을 막는 것이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은 아마도 절망에 빠졌을 뿐 아니라 순간적으로 자의식을 잃은 것이었으리라고 볼 수 있다. 만일 자살이 목적이라면 진정으로 의식적인 자아는 옆으로 젖혀 놓아야만 한다. 존재하는 것과 무가 되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라고 해도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존재는 체험의 부재는 이해할 수 있지만 주배 그 자체는 이해할 수 없다. 생각이라는 것을 한다면 그건 존재하는 것이니까. 건강한 상태에서의 내 견해는 죽음 저편에는 영광이 있을 수도 평화가 있을 수도 공포가 있을 수도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으며 그것을 알기 전에는 모험을 걸지 말고 우리가 거주하는 세계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는 이렇게 말했다. “진정 심각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뿐이며 그것을 바로 자살이다.” 실제로 20세기 중반에 많은 프랑스인들이 이 문제에 대한 탐구에 생을 바쳤으며 실존주의라는 이름으로 과거에는 종교가 충분한 대답을 제공했던 질문들에 매달렸다.
606쪽
우울증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들 가운데 가장 설득력이 강한 것은 우울증이 유익한 기능들을 수행하는 메커니즘의 불발이라는 주장이다. 우울증은 대개 슬픔에서 생겨나는 슬픔의 변종이다. 멜랑콜리를 애도와 분리해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우울증의 원형은 슬픔 속에 있다. 우울증은 우리에게 유익한 매커니즘인 슬픔이 장애를 일으킨 것일 수 있다. 심장은 우리가 다양한 환경과 기후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온몸에 피를 공급한다. 우울증은 손가락과 발가락에 피를 공급하지 못하는 심장처럼 더 이상 고유의 장점을 갖지 못한 극단 상태이다.
슬픔은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다. 나는 슬픔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애착의 형성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두려움을 느낄 만큼의 상실감을 겪지 않는다면 강한 애정을 가질 수 없다. 사랑이 깊고 넓어지려면 슬픔이 개재되어야 한다. 사랑하는 존재에게 해를 입히지 않으려면 (더 나아가 그들을 도우려는) 마음은 종의 보존에 기여한다. 사랑은 우리가 세상의 고난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계속 살아 있게 만들어 준다. 만일 우리가 자의식만 키우고 사랑은 키우지 않았더라면 인생의 돌팔매와 화살을 견딜 수 없었으리라. 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결과를 본 적은 없지만 사랑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삶에 대한 집착도 강하고 사랑 받기도 쉬우리란 것이 나의 믿음이다. 케이 제미슨의 말을 들어보자.
“많은 사람들이 천국을 문제가 없는 곳이라기보다는 무한한 강렬함과 다양성이 있는 곳으로 여긴다. 우리는 감정이라는 연속체의 극단을 제거하고 싶어 하긴 하지만 그것을 두 동강 내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고통을 겪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과 감정의 폭을 갖지 않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 사이에는 미세한 차이만이 존재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처받기 쉬운 상태가 되는 것이고, 그런 상태를 거부하는 것은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다.
631쪽
나는 이 책에서 내 친구들의 약혼자와 남편 같은 사람들에 대해 거의 다루지 않았다. 자료 조사 과정에서 나는 부정적인 느낌을 주거나 아무 느낌도 주지 않는 우울증 환자들을 많이 만났지만 그들에 대해서는 쓰지 않기로 했다. 칭찬하고 싶은 사람들에 대해서만 쓰기로 했다. 그래서 이 책에는 대부분 강인하거나 똑똑하거나 끈질긴 인물들이 등장한다. 나는 표준적인 인간이란 것이 존재한다거나 소위 원이란 것이 모든 진실을 아우른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중략) 나는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는 한 노인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우울증 환자들에게는 이야깃거리가 없어요. 우리는 할 얘기가 없어요.”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이야깃거리를 갖고 있으며 특히 진정한 생존자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제공할 수 있다. (중략) 어떤 이들은 가벼운 우울증에도 완전히 무능력자가 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인생에서 무언가를 이루어 낸다. 컬럼비아 대학에서 물질 남용에 대해 연구하는 데이빗 맥도웰은 이렇게 말한다. “어떤 고난 속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그런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덜 고통스러워서가 아니다.” 절대적인 평가를 내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638~639 쪽
사실 실존주의는 우울처럼 진실하다. 인생은 헛되다. 우리는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사랑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육체적인 개체성으로 인한 고립은 피할 수가 없다.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이루든 우리는 결국 죽게 된다. 이런 현실들에 굴하지 않고 인생의 다른 면들을 보면서 계속 추구하고 모색하고 꿋꿋이 견디는 것이 진화에서의 선택적인 이점이다. 나는 르완다에서 학살당하는 투치 족과 방글라데시의 굶주린 무리들을 본다. 그들은 가족과 친구들을 모두 잃었고 돈도, 먹을 것도 없으며 고통스러운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그들이야말로 개선의 가망이라곤 없는 이들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내가 보지 못하는 미래상 때문일 수도 있고 존재를 위한 싸움을 지속하게 만드는 맹목적인 생명력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울증 환자들은 세상을 너무도 명료하게 보기 때문에 맹목성이라는 선택적 이점을 상실하고 만다. (중략)
우울증을 겪은 뒤 안정을 되찾은 사람들은 일상의 즐거움에 대한 감수성이 강한 경향이 있다. 그들은 삶의 긍정적인 면들이 지닌 진가를 절실히 느끼고 그것들에 대해 쉽게 희열에 젖는다. 원래 너그러운 인물이었다면 우울증을 겪은 후에는 더욱 관대해진다. 물론 다른 질병에서 회복된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겠지만 말기 암에서 기적적으로 희생한 이라도 중증 우울증을 체험한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해 주는 ‘기쁨을 느끼고 주는 능력’은 갖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