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펙트 블루
콘 사토시 감독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04년 6월
평점 :
품절


세상사에 시달려가듯 자꾸 흐려지는 내눈이 싫어!

 

"내가 이제부터 이야기하는 사건은 교묘하게 꾸며진 살인사건입니다. 나는 그 사건의 탐정입니다. 그리고 증인입니다. 또한 피해자입니다. 게다가 범인입니다. 나는 네 사람 모두 입니다. 그럼, 대체 나는 누구일까요?"

프랑스의 천재 추리 소설 작가 세바스티앙 자프리조의 미스터리 소설 '신데렐라의 함정'의 홍보문구이다. '신데렐라의 함정'은 <퍼펙트 블루>와 비교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작품이며 위 홍보문구야 말로 <퍼펙트 블루>의 혼란스러운 이미지를 대변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표현이다. 후지TV에서 시나리오 대상을 수상한 바 있는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 무라이 사다유키가 '신데렐라의 함정'을 보았는지는 의문이나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미스터리의 성향이 세바스티앙 자프리조가 '신데렐라의 함정'에서 추구하고자 했던 그것과 닮아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두 작품의 직접적인 스토리 라인은 다르다. 자아 혼돈을 다루고 있지만 <퍼펙트 블루>는 보다 더 사이코드라마적이다. 또한 오늘날 현대인들의 의식세계의 일부를 지배하고 있는 거대 시스템, 연예산업의 병리를 날카롭게 해부하고 있다는 것이 이 영화만의 매력일 테다.

여성 3인조 댄스 그룹 '참'은 귀엽고 청순한 이미지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아이돌 스타이다. 그러나 맴버들 중에서 특히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미마가 '참'에서 빠지게 된다. 다른 맴버들에 비해 나이가 제일 많았던 그녀는 아이돌로서의 생명이 다했기 때문이다. 이에 소속사는 그녀를 본격 성인 배우로 탈바꿈시켜 또다른 상업적 가치를 꿈꾼다. 미마로선 아이돌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 힘들었지만 스스로가 선택해야 할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고 신인 배우로서의 길을 열심히 걷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배우로 지명도를 높이기 위해 그녀는 강노높은 노출씬이나 강간씬 마저 감수해야 했다. 이에 언론과 각종 연예계에서는 그녀의 파격적 변신에 침을 흘리며 반기지만(상품화 가치로서), 예전의 그녀를 사랑했던 미마 마니아들은 섹스 코드에 어필하려는 그녀의 성인 신고식에 야유와 질타를 보낸다. 그러한 이중적 반응에 미마는 이미 연기자의 길로 들어섰기에 인내하고 감수해야 할 과정이라고 스스로를 위안시킨다. 그러나 그것은 나약한 자기 암시였을 뿐 그녀는 순간순간 푸르게 빛났던 아이돌로 되돌아가고픈 격렬한 감정에 휩싸인다. 그럴 때마다 ! 그녀는 스스로의 감정과 의식마저 제어할 수 없는 무중력의 상태가 되어 또 다른 자아와 마주치게 된다. 그 즈음 인터넷에 '미마의 방'이라는 홈페이지가 개설되고 그곳은 아이돌이었던 미마의 일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공간이다. 성인 배우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현실의 미마는 예전의 순수했던 모습 그대로 남아 여전히 미마 마니아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초현실 속의 미마를 바라보며 악몽과도 같은 실상과 허상의 대립에 괴로워한다. 때를 같이 해서 그녀가 출연중인 범죄 드라마 '더블 바운드'의 제작진들이 한 명씩 잔인하게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미마는 현실의 자아, 초현실의 자아, 배우로서의 자아, 드라마 속 캐릭터로서의 자아, 미마 마니아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자아, 등 수없이 나뉘어지는 자아분열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그녀는 혼돈에 빠진다. '나는 과연 누구인가, 무엇이 진짜 나인가, 나는 지금의 내 모습을 저주하는가, 그래서 살인을 저지르는가'

이러한 자아 혼란은 비교적 최근에 개봉되어 걸작의 반열에 오른 <아이덴티티>를 연상시킨다. 카메라가 다중 인격 소유자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버려 제 3자의 이야기인양 이야기를 전개시켜나가며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를 허물고 그 모호함 속에서 불안한 공포를 효과적으로 자아냈다는 점이 두 작품의 공통된 정서이다.

<퍼펙트 블루>는 추상적 공포와 현실적 공포 모두를 효과적으로 잘 나타내고 있다. 미마가 그녀의 초자아와 대립하며 겪게되는 끔찍한 악몽들은 이 영화의 백미로 영화 <야콥의 사다리>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기도 한다. 쉴 새 없이 뒤바뀌는 현실과 환상의 교차는 보는 이로 하여금 거부할 수 없는 진실마저 의심해 보게 만드는 놀라운 최면 효과를 발휘한다. 그것은 <매트릭스>의 현실 공간이 사실은 모두 허구이며 '장자의 호접몽'에서 사실 나비가 인간의 꿈을 꾸고 있다는 사상과도 일치한다. <공각기동대><오픈 유어 아이즈>등 최근 동서양을 막론하고 초미의 화두로 떠오른 '정체성 혼란'의 문제를 <퍼펙트 블루>역시 현란한 시각적 장치로 담아내며 보는 이를 전율케 한다. 또한 <퍼펙트 블루>에서 다루어지는 끔찍한 살인 장면, 강간 묘사, 누드 촬영 씬 등은 실사 영화를 능가하는 사실적인 충격을 안겨다 준다. 송곳으로 눈을 찌르고 눈알을 파내고 망치로 머리를 내리치는 등의 고어적인 묘사는 이 영화가 잘 만들어진 호러 영화로서도 손색이 없음을 증명해 준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러한 살해 장면 조? 宕?영화 속에서 내내 진행되는 드라마 속의 이야기와 교묘하게 맞물리며 그것이 진짜 살인인지 드라마 속의 가짜 살인인지를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든다. <아쿠아리스>의 초반 무대 살해씬이 살짝 떠오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추상적 미학으로 승화 시켜 감탄사를 연발하게 한다. 무엇보다 강렬한 사운드와 파격적인 영상미가 감각적으로 조화를 이루며 영화를 시종일관 흡입력있게 이끌어 간다는 것이 이 영화의 힘이다. (그러한 조화로움이 가장 장엄하게 빛을 발하는 부분이 라스트의 추격씬이다. 실사, 애니를 막론하고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 시퀀스 씬으로 손색이 없을 듯!)

영화는 라스트에 이르러서 의외의 반전을 내세우지만 아주 예측할 수 없었던 반전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이 애거스 크리스티식의 정교한 퍼즐 플레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미마가 겪게 되는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가공할 악몽과 혼돈이야 말로 이 영화의 진정한 미덕인 것이다. 때문에 이 추상적 퍼즐 맞추기의 진면목은 결국 누가 범인인가 하는 단순 추리기법인 아니라 영화를 보는 관객들마저 미마의 자아 속으로 녹여버리는 경이로운 충격, 그 자체에 있다.

한가지 필자가 흥미로웠던 것은 7년 전에 만들어진 이 일본 애니메이션의 주제와 스토리 라인이 지금의 국내 연예계 현주소와 너무 닮아 있는 듯했다는 것이다. 청순한 이미지의 아이돌로 출발해서 청순미가 바래질 때쯤 파격적 성인 코드를 내세우며 이미지 변신을 시도하고 더 나이가 차서 가수로서의 상업적 가치를 잃게 되면 누드 집, 에로 배우, 혹은 다른 연예분야로 끊임없이 옮겨 다니며 새로운 상품가치를 얻어내려는 몸부림들이 영화속 미마와 너무나도 닮아 있는 듯하다! 상품화를 위한 착취에 희생되는 스타들의 뒷모습에 이토록 정면으로 메스를 들이 댔다는 것에서 <퍼펙트 블루>의 또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문득 '하늘색 꿈'의 가사들이 미마의 외침으로 다가온다! 청초한 하늘빛 고운 눈망울! 잃고 싶지 않았던 완전무결한 청색자아! 세상사에 시달려가듯 자꾸 흐려지는 내눈이 싫어! 너무 쉽게 낡아가는 세상에 또 시간 속에 난 지금 어디에 서 있지, 어디에서 날 찾을 수 있을지! 어린 나를 자라게 하던 푸른 꿈 속으로 그 푸른 시간 속으로 가고 싶어! 지금의 나는 진짜 내가 아냐! 날 죽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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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 - 양장본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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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시대에 과연 진정한 신은 존재하는가. 인간 세상에 던져진 모든 선과 악, 그리고 고뇌
와 절망은 누구의 창조물인가. 그것이 만약 신의 창조물이고 신이 정해놓은 프로그램에 지
나지 않는다면 인간사에 던져진 그 모든 역경은 결국 신의 의지란 말인가. 따라서 어떤 죄
악도 상처도 결국은 신에 의해 예정된 일부이며 우리의 구원과 몰락도 그 예정에 따를 뿐인
가. 그렇다면 어찌하여 신의 하수인에 불과했던 카인은 신의 이름으로 저주받고 심판 당해
야 하며 배고픈 민중들은 미래가 없는 가난에 허덕여야 하는가. 그것이 신의 무책임한 방임
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절대자(권력을 가진 자)의 횡포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작가 이문열
은 이 물음에 대한 고찰을 '사람의 아들'로 대신한다.
'사람의 아들'은 작가 이문열이 이십대 초반이라는 나이에 쓰기 시작하여(이런 어마어마한
작품을 그렇게 젊은 나이에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실로 놀라울 따름이다) 이십대 중반에
중편으로 완성했다 이후 장편으로 개작한 작품이다. 이문열은 79년 이 작품 '사람의 아들'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장편 활동을 시작했다. 그래서 '사람의 아들'은 이문열
의 작가적 출발점과 이후 작품 활동의 추이를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라 할 만하다.
어찌하여 그는 그렇게 젊은 나이에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종교적 신성의 근간을 뒤흔드는
문제작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은 그의 처절했던 인생사와 맞물려 있다. 남로당계 간부였던 아버지의
월북과 가족의 이산, 월북자 가족에 대한 감시와 그에 대한 피해의식이 빚은 가혹했던 어린
시절의 삶, 이러한 유랑과 방황의 유년기가 청년 이문열로 하여금 사회와의 소통을 차단하
고 홀로 침전하여 관념의 늪 속에 빠져들 수밖에 없게 했던 것이리라. 그에게 있어 그를 둘
러싸고 있는 현실은 바람직한 가치가 상실되어 버린 회의와 환멸과 상실의 정서 그 자체였
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릴 적부터 독서를 좋아했고 책 세계 속에서 방대한 지식을 축척
하며 그 선험적 비판철학으로 인간과 삶의 탐구에 골몰했다. 그것은 그의 기구한 성장기에
서 어찌할 수 없는 선택에 불과했다. 때문에 '사람의 아들'의 탄생 역시 청년 이문열에게 필
연적인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사실 '사람의 아들'에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처음에 이문열이 이 작품을 완성시켜 출판
사를 찾았을 때 무수히 퇴짜를 맞았다고 한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그 이유를 세 가지 정도
로 생각해보았다. 첫 번 째로 70년대의 문단 상황을 고려해볼 때 유신 독재에 대한 사회학
적 상상력을 드러내는 작품에 대한 거부 반응을 들 수 있겠고 두 번 째로 종교 문제를 정면
에서 다루었다는 것에 대한 거부 반응을 들 수 있겠다. 그리고 세 번째 이유는 어쩌면, 이
작품이 가진 강렬한 '추리'소설 적인 색채와 '판타지 무용담'적인 면모가 당시 '순수문학'(예
술로서의 작품 자체에 목적을 둔 문학 - 필자는 아직도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모른다)
만을 고집해온 국내 문단에 달갑지 않은 사생아로(관념주의의 옷을 입은 통속소설 정도로)
비쳐졌기 때문이리라.
정말로 이 소설은 굉장히 '추리소설'적이다. 지금으로 치자면 공전의 히트를 거둔 '다빈치
코드'와 닮아 있다고 하겠다. 실제로 사건 전개나 두 이야기가 교차되는 구성 방식, 종교 문
제를 다룬 지적 스릴러의 요소 등이 상당부분 닮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닮은 점이라면
방대한 지식을 에너지원으로 하고 있음에도 '굉장히' 재미있다는 점이겠다. 이문열은 이 작
품을 쓸 때 그 자신의 엄청난 독서량에 의해 이미 베스트셀러의 공식을 꿰차고 있었으며 그
노하우가 응축된 작품이 바로 '사람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독자들에게 정
말 잘 읽힐 수밖에 없는 정교한 오락적 장치들의(추리 소설적 요소를 가미, 미스터리를 증
폭시킨 것, 그리고 신화적 인물의 재해석과 그 파란만장한 여정 등이 치밀한 액자형 교차적
구성으로 강렬한 흡입력을 제공한다) 경지를 보여주며 출간 즉시 엄청난 판매 부수를 기록
했다. 그리고 밀리언셀러로 등극하여 지금까지 현대 고전으로 꾸준히 읽히고 있다.
그러나 독자들의 흥미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오락적 측면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 이 작
품에는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이 작품의 위대함이다. 필자는 아직 이문열의 모든 작품을 읽
지는 못했다. 지금까지 읽은 작품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비롯한 단편 몇 편, 그리고
'젊은날의 초상'이 전부다. 하지만 이문열 연구가들이나 평론가들이 대부분 '사람의 아들'을
이문열의 대표작으로 꼽고 있고 가장 많이 팔린 책도 역이 '사람의 아들'이다. 그리고 필자
역시 이 작품 '사람의 아들'을 이문열의 최고 작품으로 보는데 이견의 여지가 없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가장 간단한 이유를 말한다면 이 작품에 내재된 작가의 형이상학적이고 사변적인
색채, 그리고 인간과 사회에 대한 폭넓고 이채로운 성찰은 사실 이후 그의 모든 작품에서
일면적인 모습으로 반복해서 다루어지는 것이다. 때문에 이 작품이야말로 이문열 문학의 뿌
리요 모체인 것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듯, 모든 이문열 작품은 '사람의 아들'로 통하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크게 두 가지 이야기가 액자 형식으로 맞물려서 진행된다. 액자 속의 '아
하츠 페르츠' 이야기와 액자 밖의 민요섭 살인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진행된다. 민요섭은 비상한 두뇌와 세상을 보는 탁월한 안목을 지닌 신앙심 깊은 청년이다.
하지만 그는 언제부턴가 민중 구제라는 실천 신학에 빠져들게 되고 그후 홀연히 자취를 감
추었다가 의문의 살인을 당한다. 살인사건의 수사를 담당한 남 경사는 민요섭의 자취를 더
듬어가다 그가 남긴 노트에서 '아하스 페르츠'에 대한 소설을 접하게 된다. 민요섭이 쓴 소
설 '아하스 페르츠'의 이야기와 남 경사가 수사하는 민요섭 살인사건이 서로 맞물리며 소설
이 전개되어 감에 따라 점진적인 방식으로 단서와 비밀들이 공개되어진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작가가 아하스 페르츠와 민요섭을 거의 일대일의 방식으로 대응시
키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이인 일역을 하는 것처럼 생각과 행동이 닮아 있고 그래서
어느 한 쪽을 탐색하면 저절로 다른 한 쪽까지 탐색되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민요섭의 행적
속에 묻어 있는 의문은 아하스 페르츠의 행적을 통해 알 수 있고, 아하스 페르츠의 행적 속
에 묻어 있는 의문은 민요섭의 행적을 통해 알 수 있는, 독특한 구성이 형성되어진다.
그러나 흥미와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러한 구성을 압도하는 것이 바로 폭발하듯 쏟아지는
강렬한 주제의식이다. 이 주제의식은 이문열 스스로가 성장기를 통해 억제하기 힘들었을 사
회와 자아에 대한 심각한 성찰의 결과물이기도 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앞서 언급한 이 작
품의 위대함이고 필자는 이 위대함에 전율했다.
무엇보다 필자를 전율시킨 것은 민요섭과 아하스 페르츠가 주장하는 신의 존재에 대한 근
원적인 물음이었다. 이것은 소설 속 두 주인공의 여정 중 신에 대한 회의, 방황, 반항에 해
당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들은 묻는다. 신의 말씀에 개인의 자유를 포기하는 대다수의 군
중을 '죽음' 말고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어째서 그들을 죄인으로 만들어 오로지 '죽음'으로
만 구원하려 하고, 공허한 천국의 약속만으로 굶주림과 모진 고난을 겪게 하는가. 그것이 신
의 자비인가. 신의 사랑인가. 또, 원수를 사랑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그 모든 가르
침의 실천이 인간에게 가능하다고 믿는가. 그 교훈은 대부분의 인간들에게 오직 감당할 수
없는 영혼의 짐, 영원히 헤어날 길 없는 죄책감과 절망의 원인이 될 따름이 아닌가. 신으로
인해 율법은 완성될 것이지만 그것은 사실 인간과는 별 상관없는 독선의 완성일 따름이 아
닌가. 그렇다면 신이 존재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절대자의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째
서 피 흘리며 죽어 가는 불쌍한 인간을 구원하지 않으며 어째서 사악한 무리가 사악함을 품
지 않도록 하지 않으며 어째서 세상의 모든 고통이 사라지게 하지 않는가. 그것은 방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물음들은 당시까지 누구나 절대적 진리라고 믿어왔던 종교적 위대함에 대한 강한
반기였다. 작가는 아하스 페르츠와 민요섭, 그리고 예수를 비롯한 무수한 신적인 존재들을
내세워서 신과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고찰을 한다. 그래서 그때까지 무조건적으로 맹신했던
신과 종교에 대한 근간을 뒤흔들며 무엇이 진실이며, 그 진실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에
대한 다각도의 생각을 하게 했다. 어쩌면 작가는 아버지의 부재를 그런 식으로 얘기하고 싶
었던 지도 모르겠다. 혹은 당시의 견고했던 독재 권력을. 아무튼, 필자는 이러한 물음을 필
자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과 결부시켜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필자가
무신론자임을 감안하더라도) 아하스 페르츠의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다빈치 코드'에서 다
루어진 신화와 역사의 날조는 역시 절대적 권력가들의 횡포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의혹이 더
욱 짙어졌다. 정말로 신이 절대적 선의 존재라면, 어째서 악은 만들었는가. 어째서 오늘날
가난에 허덕이며 자살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하는가. 열차 전복 사고를
구경만 하는가. 전쟁으로 죽어 가는 무수한 인명들을 구하지 않는가. 어떤 신성한 이유들을
내세워도 이것은 정말 신의 방종이며 모순이다. 신화와 역사는 권력과 힘을 가진 자들의 것
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물음이나 의혹이 아닌 절대적인 맹신인 것이
다. 때문에 아하스 페르츠는 예수를 유혹하려 했던 사탄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
만 소설 속의 아하스 페르츠는 결코 사악한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민요섭도 마
찬가지다. 그들은 신앙에 의혹을 품었을지언정 배고픈 민중 속으로 몸소 뛰어들어 그들에게
빵을 제공했다. 두드리는 자에게 현실 속에서 구원의 문을 열어준 이는 신이 아니라 그들이
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신은 신의 이름으로 돌을 던질 수 있는가. 세상의 모든 것을 창
조한 신, 심지어 그가 사탄으로 몰아세운 모든 악마들도 사실 그가 창조한 것이 아니고 무
엇이란 말인가. 이 이해할 수 없는(신의 아들이라면 이해했겠지만, 사람의 아들인 필자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을 인상적인 비유와 현란한 수식의 말씀으로 덮어버리려는가.
작가는 책의 마지막에 민요섭의 종교로의 회귀를 조금은 갑작스럽게 결정짓는다. 그러나
아하스 페르츠의 최후는 분명하게 결론짓지 않는다. 그것은 독자들에 대한 몫일 테다. 작가
는 신의 존재에 대한 부정과 그 부정에 대한 부정을 방대한 지식과 깊이 있는 사유로 펼쳐
보인다. 그리고 최종 선택은 책을 읽는 이들의 판단에 맡긴다. 때문에 '사람의 아들'은 작가
의 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부정과 의심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물질적 구원과 정신적 구원의
간극을 열어 보이고 신과 인간에 대한 환기를 통해 맹신에 대한 경종을 울린 것까지가 작가
가 제시한 전부다. 그 다음으로 제기될 수 있는 무수한 문제들은 독자들에게 전적으로 열려
있는 셈이다.
필자는 이 작품을 읽으며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떠올랐다. 난장이 가
족이라면 어땠을까. 사회가 정해놓은 테두리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 그래서 사회와 어떤 방
식으로도 소통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면 물질적 구원과 정신적 구원 중 어느 것을 택했을까.
그리고 그 테두리의 중심을 지키고 있는 절대적 권력자들이라면 테두리 밖의 인간들에게 무
엇을 선택하게끔 종용할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아하스 페르츠가 살았던 시대와 지금의 현실이 크게 다를 것은
없다는. 절대자와 맹신자, 카인, 그리고 헐벗고 배고픈 '사람의 아들'들은 여전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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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티 리포트 필립 K. 딕의 SF걸작선 1
필립 K. 딕 외 지음, 이지선 옮김 / 집사재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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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가가 천재라는 것에 필자는 판돈 전부를 내걸 자신이 있다.

그의 놀라운 상상력은 상상으로서의 상상을 넘어선 신비한 힘이 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그는 신의 예지력을 가진 타고난 천재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60년대에 이러한 소설들을 써냈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다. 그가 초능력자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초능력자의 능력에 버금가는 능력의 소유자임은 인정해야 한다. 필시 그는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이며 획기적인 논문의 소유자 일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타고난 천재에다 후천적으로 방대한 지식까지 습득함으로서 신과 내통하는 예지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나비 효과'와도 비슷한 과학적 이론에 그는 탁월한 재능과 감각을 지녔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는 그가 활동하던 당시의 국제정세와 과학적 지식들, 그리고 사회와 우주 전반의 문제들까지 완전히 섭렵한 후 그것들이 빚어내는 크고작은 파장효과들을 정확하게 예측해 내고 그것을 소설에 투영했던 것이다.

여덟편의 단편들은 모두 그러한 그의 예지 능력에 기인한 예언 리포트인 것이다.

그는 40년 후, 혹은 그보다 더 미래의 일을 신기할 정도로 맞추어 내었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은 대부분 정체성 혼란과 이중 자아에 시달리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표제작 '마이너리티 리포트'만 보자.(영화로도 유명한 이 작품은 사실 영화와는 상당부분 틀린 이야기다. 또한 영화의 각본상에는 무수한 오류가 있었지만 이 단편에는 일체의 오류가 없는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는 이야기이다) 하지도 않은 살인에 좇기는 주인공 엔더턴은 곧 오늘날 현대인들의 심리를 정확하게 대변하는 것이다. 무수한 자아의 혼돈과 시스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함, 위기 등을 그는 40년도 전에 이미 예언했던 것이다.

이 외에도 '퍼키팻의 전성시대''완벽한 대통령'등이 인상적이다.

'퍼키팻의 전성시대'는 인터넷 아바타, 게임 캐릭터 등에 빠져 현실을 잊고 사는 젊은이들의 작금의 현실과 너무나도 닮아 있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현실을 잊고자 '퍼키팻'이라는 인형 캐릭터를 자식처럼 키우며 그것에 삶 전부를 빼앗기고 사는 사람들은 결국 '정체'와 '안주'가 아닌 '성장'과 '시련'의 의미와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완벽한 대통령'은 로봇이 완전무결한 판단과 지휘를 맡는 정치사회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정체불명의 우주모선의 침략을 받게 되자 로봇 시스템이 마비되고 그로 인해 로봇 대통령의 대리인(인간)이 임시 대통령직을 맡게 된다. 그 과정에서 한 명의 인간이 정치의 대표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모자람이 많은지를 우스꽝스럽게 그려낸다. 그의 판단은 대부분이 감정적이며 성급하다. 그는 제 멋대로 폭격을 명령하고 전쟁도 마다하지 않는다. 결국 시스템이 복구되고 로봇이 정치를 맡게 되자 다시 사회는 안정을 되찾는다. 이 작품을 읽으며 필자는 오늘날 국내 정치는 물론 미국, 세계 정치 전부를 생각하게 되었다. 40년을 넘나드는 천재의 조롱이었던 것이다.

그 외에도 '스위블''고소공포증에 시달리는 사나이''우리라고요''물거미'그래 블로벨이 되는거야' 등의 작품에서 인간의 정체성 혼돈과 시스템 오류의 아이러니는 끝없이 재기된다.

SF가 부재인 나라에서 이 책은 너무나도 교과서적인 책임에 틀림없다. 다만 이러한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작품을 국내에서 기대하기란 무리일 듯싶다. 국내 SF는 아직 초보단계에도 올라서지 못하는 실정이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재미이다. 재미가 결여된 미래 리포트는 독자들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 그것은 동서고금, '소설'의 기본 덕목이자 진리이다!

흥미도 - 3.8

작품성 - 4.5

종합평점 - 4.15 (5점만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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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

 

박민규 지음

300페이지. 8500원.

 

 

프로가 지배한 세상에서 살아가기, 혹은 날아오는 공을 바로 잡기

 

1982년 필자는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고 당시 국내에 거대한 변화가 일고 있음도 감각하지 못했던 아이였다. 그 변화의 물결이 프로야구의 탄생과 더불어 다사다난하게 지각변동을 예고하고 있었음도 지각하지 못했었다. 그만큼 어렸었고 무엇을 몰랐었고 지금으로선 기억이 없었던 때다. 그랬거나 말거나 작가의 눈은 바로 그 시절 한 프로야구 창단의 황홀함과 전율의 기억속으로 독자들을 안내하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야구에 대한 이야기를 질펀하게 늘어놓는다.

 

이 책은 대단히 재미있게 읽혀진다면 읽혀진다고 말할 수 있는 책이다. 고는 하지만, 한편으론 지나치게 가벼운 농담투의 이야기와 말장난 식의 문체들이 문제삼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문제삼기 좋을 법한 모양새이다. 고도 하지만, 실제로 그 가벼움과 말장난의 조합은 결국 인생의 질곡과 그 무거운 해법을 국내 어느 문학에서도 다루어지지 않은 유쾌한 방법으로 통렬하게 은유하고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재미있게 읽히면서 개성있는 비판의식을 담아낸 작품이야말로 어렵게 읽히면서 보편적인 비판의식을 담아내는 작품보다 인정을 받아야함이 옳은 것이 아닐까 싶다. 그것이 순수문학이 위대했던 시절에 살았노라며 근엄한 자긍심의 외투 단추를 단단히 채우려고만 하는 기성문인들에 대한 배신이자 배반형이라고 해도. 그것을 수용하지 않으면 우리들은 영영 순수문학이 위대했던 시절에 살았노라는 이들의 오래된 외투 단추만 무료하게 바라보다 지치고, 그네들은 막힌 출구에서 비집코 튀어나온 기형적 돌연변이, 일명 외계소설이 순수문학이 위대했던 시절의 끝자락 문학을 비웃듯이 앞지르며 수십만부의 판매고를 올리는 모습을 비통하게 바라보다 헛웃음만 지어야 할 것이다. 이 난국을 타개하고자한다면 그나마 순문학의 의식을 담고 있는 개그적인 만담가가 그들 편이 되어 주는 것이 그들로선 위안이었을 테다. 해서, 이 작품이 제 8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했던가 아닐까 싶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며 순항 중이고 지난 일년간 출간된 순문학 중 이 책보다 많이 팔린 책은 아마도 한 두 권, 혹은 거의 없지 않나 싶다. 그네들의 위엄과 그네들의 불안은 이런 식으로 타협을 하며 그것이 하나의 가교가 되어 그네들에게도 구원의 눈길이 비쳐지길 살며시 두근거리며 기대해볼테지... (그래서 제 9회 한겨레문학상은 '싸이코가 뜬다'라는 책을 또 뽑지 않았던가. 뽑기에서 한 번 좋은 것 걸리면 그 번호로 또 하고 싶어지는 심리처럼 말이다. 하지만 한 번 뽑힌 번호는 다시 뽑히지 않는 법이다. 그건 실수다!)

 

라고, 장황하게 서두를 늘어놓았지만 아무튼 이 책은 책장을 펼치면서부터 박민규 작가 특유의 입담에 빠져들며 한편의 개그, 시트콤, 만담, 만화, SF판타지 같은 독특한 재미에 폭격당하게 된다. 정말로 말하기 좋아하는 학교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갑자기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져 종이 울릴때가지 정신없이 맛깔스런 수다를 떠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면 학생들로선 즐겁다. 그것은 정부가 지침한 교과 수업에는 없는 내용들이며 하지만 선생님의 산경험에서 묻어나오는 참인생이니.

 

필자는 특이하게도 남자이고 군대를 갔다왔지만 군대에서 축구한 얘기를 별로 하고 싶지 않은 타입이다. 비슷한 이유로 대다수의 남자들이라면 열광을 하는 야구도 원채 흥미가 없다. 굳이 스포츠라면 격투를 즐겨보는 편이다.(특히 K-1) 때문에 야구에 관한 소설이라면 필자에게 그다지 흥미롭게 다가올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책은 비교적 잘 읽히는 편이었고 흥미로운 대목이 많았고 전체적으로 재미있었다. 마치 얼마전 화제리에 방영되었던 '구성애의 아우성'을 보듯 거침없는 입담의 향연에 빠져들었다. 이는 박민규 작가의 필체가 얼마나 재치와 특유의 오락성을 지녔는가 하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야구에 ㅇ자도 흥미없었던 필자를 그만큼 즐겁게 해 주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평론가들과 독자들이 입에 침이 마르고 닳도록 극찬을 하는 것과는 달리 필자에겐 이 작품의 두 번째 챕터가 조금 마음에 차지 않았다. 이 작품은 총 세 챕터로 나누어져 있고 첫 번째는 주인공의 소년 시절, 두 번째는 청년 시절, 세 번째는 장년 시절을 담고 있다. 아주 개인적인 견해지만 사실상 두 번째 챕터 자체가 거대한 사족처럼 느껴졌다. 더구나 이 작품의 스토리에 계속해서 따라붙고 있는 '삼미'라는 것이 두 번째 챕터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았고 그럴 필요성도 없었고 있었다면 그것은 끼워 붙인 것이 아닌가 싶었다. 즉 두 번째 챕터는 첫 번째 챕터와 세 번째 챕터 사이에서 삼미와는 별 상관없는 '그저 청춘의 무상을 담은 젊은 날의 초상' 쯤에 불과했고 좀 다르게 말하자면 성장 소설류의 흐름상 '청춘기'는 있어야 하니 있는 것이었고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장편으로서 지면을 맞추기 위해 있어야만 했던 대목이 아닌가 싶었다. 물론 이야기상의 색깔이나 느낌이야 작가의 일관된 문체로 해소시켰기에 하나의 덩어리인듯한 인상이야 든다지만 아무래도 두 번째 이야기는 그저 뚝 떼어다 다른 이름을 붙여서 중편으로 내놓아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오히려 더 어울릴 것 같았다. 왜냐하면 첫 번째와 세 번째에서 전혀 종잡을 수 없는 스토리 텔링 능력을 과시했던 이 스토리 텔러는 두 번째 에피소드는 너무 뻔한 스토리로 깔아버린 것이었다. 몇 장을 넘긴 순간 이 청춘무곡의 중, 후반이 모두 보였고 그것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다분히 한국 청년들의 가슴속에 있을 법한 '환상 멜로'에 관한 이야기였고 현대인들의 가슴속에 있을 법한 '환상 섹스'에 관한 이야기였고 그것은 기존 순문학에서 많이 보았음직한 그런 부류의 남녀 관계와 남녀 사랑, 남녀 섹스였다.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딱 '무라카미 하루키'식의 애정 소설 류였다. 적당히 바람의 노래를 들으며 적당히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며 적당히 태엽을 감는 새의 이야기였던 것이 필자를 조금 실망시켰던 부분이다. 참 기발하고 참 유쾌하고 참 독특한 작품에 왜 이런 '386세대 혹은 이런 류의 애정소설에 길들여진 이들을 위한 팬 서비스' 같은 진부함을 끼어 넣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것이 작가의 손에 굳어진 스타일이라면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끼어 넣고 안 넣고는 쓰는 사람 마음이고 그것을 사고 안 사고는 읽는 사람 마음이니. 그것 참.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작가만의 개성과 세계관을 이야기로 뽑아내는 일일테니 그 작가만의 개성과 세계관에 흡수되지 않는 이상 전적으로 입맛에 꼭 맞는 작품을 기대하기란 원래 어려운 법이다.

 

라는 생각을 하지만, 사실 이 작품은 비교적 필자의 입맞에 맞는 작품이고 간만에 재미있게 읽은 순문학이며 문학이 위대한 시절의 끝자락에서 위대함의 정의를 바꾸어 놓기에 충분한 위대함을 지닌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프로야구라는 거대한 고래 같은 은유가 각양각색의 바닷 물고기의 향연같은 비유들과 절묘히 조우하며 회 같이 맛깔스런 개그소설을 탄생시킨 것이다. 그 회에는 바다 깊숙이 숨쉬고 있는 인류와 사회와 사람의 삶에 대한 고귀한 인생론이 배어 있고 그 개그소설에는 이제껏 국내 문인 누구도 이루어내지 못한 개그의 절대 철학이 담겨 있다. 웃다 울다 웃는 것처럼 이 소설은 하나의 거대한 원을 그리며 수많은 삶의 에피소드들을 오밀조밀 유쾌하고 절절하게 그리다 결국 뒤통수를 치는 듯한 결말로 해학적 교훈을 던져놓는다. 

 

언제부턴가 세상은 프로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버렸고 아마추어들은 살 수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그 속에서 과연 우리는 어떻게 플레이 볼을 외쳐야 할까. 이 책이 그 답을 제시해주고 있다. 아주 넉살스럽게.

 

 

p.s. 이 작가는 성석제와 마찬가지로 입담넘치는 문장력의 소유자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이 두 작가는 '수학 정석의 유리함수'에 대한 이야기를 써 보라고 해도 특유의 말장난 같은 재치와 글솜씨로 지루하지 않은 글을 만들어낼 위인들이다. 그것이 이 작가의 절대적 힘이다. 때문에, 그것이 물리거나 그 세계관에 너무 익숙해져버리면 싫증이 찾아오지 않을까 염려가 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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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빈치 코드 - 전2권 세트
댄 브라운 지음, 양선아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전세계적으로 1200만부가 팔려나가며 지금도 도서계의 폭풍의 핵으로 그 위력을 과시하고 있는 이 초메가 베스트셀러는 이미 국내에서도 출간 3개월여만에 70만부에 육박하는 판매량을 기록하며 몇 주째 각 출판집계 1위를 고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세계 언론에서 내기라도 하듯 앞다투어 '단순 지적 스릴러 물의 수준을 뛰어넘는 엄청난 걸작' 혹은 '<장미의 이름>에 버금가는 걸작'이라고 칭찬일색을 보였다. 물론 그 인기를 반증이라도 하듯 '안티 다 빈치 코드'와 '다 빈치 코드 혹평하기'도 만만치 않다. 심지어 '다 빈치 코드는 멍청하기 그지 없는 책이며 기본적인 지식마저도 모르고 제 멋대로 써낸 말도 안 되는 억측들이다' 혹은 '작가 댄 브라운은 이 분야에 대해 지독히 공부를 하지 않았다'라는 극단적인 비평도 있다. 어쨌거나 이 책이 전세계적으로 거대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셈이다.

이런 정도로 전례없는 화제를 일으킨 책이기에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책에 가지는 기대치는 크고 또한 그 폭풍속으로 빨려드는 속도도 거세다. 그 만큼 이 책에는 마약같은 위력이 존재하기는 하다.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취하듯이 빠져들어 홀린듯이 두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걸작임을 호소하려 든다.

필자의 경우도 이 책에 대한 미사여구를 충분히 감안했지만 이 놀라운 책에 거는 기대치가 엄청났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요근래 필자를 가장 완전한 무아지경으로 몰고갔던 두 걸작 <아웃>(기리노 나츠오, 일본 추리소설)과 <적의 화장법>(아멜리 노통, 프랑스 블랙코미디스릴러)에 필적하는 재미를 안겨다 줄 것이라는 만만한 기대를 가졌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 빈치 코드>는 필자에게 굉장한 재미를 주었고 분명 추리 스릴러의 걸작으로 볼 수도 있지만 세대를 초월한 불멸의 걸작이 되기에는 어딘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선 이 책의 스토리는 굉장히 흥미롭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의 관장이 누군가에게 쫓기다 살해당하며 시작한다. 관장은 죽기 직전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끊어지게 될 인류역사의 엄청난 비밀의 수수께끼를 암호로 남긴다. 이 암호를 풀기 위해 유명한 기호학자 로버트 랭던이 루브르 박물관을 찾게 되고 관장의 손녀딸인 소피와 만나게 된다. 그들은 어마어마한 비밀에 얽힌 긴박한 모험을 함께하게 되고 마침내 충격적인 진실과 맞닥뜨리게 된다.

작가는 빼어난 스토리 텔러로서의 능력을 과시라도 하듯 한편의 헐리웃 스릴러 영화를 보는 듯한 긴박한 구조를 앞세워 독자들을 꼼짝 못하게 만든다. 관장의 살인범의 누명을 쓰고 쫓기는 랭던과 그를 돕는 소피, 그들을 쫓는 프랑스 수사기관의 파슈형사, 인류역사의 판도를 뒤바꿀 엄청난 비밀을 손에 넣고자는 비밀 집단, 비밀 결사, 비밀 킬러, 그리고 숨가쁘게 이어지는 반전의 반전. 작가는 이 모든 근사한 이야기들을 치밀한 교차 편집의 방식으로 끊어서 이어붙이기를 반복하며 독자들이 결코 도중에 책장을 놓지 못할정도로 안달나게 하는데 성공한다. 비밀이 한꺼풀 풀릴때 마다 더욱 거대한 비밀과 맞닥뜨리고, 위기를 한번 벗어날 때마다 더 큰 위기에 봉착하고, 전혀 예측지 못한 반전 이후 더 충격적인 반전이 더해지고, 이러한 흥미로운 설정은 근래 보기 드문 완벽한 읽는 재미를 선사하는데에는 더할나위 없는 경지를 선사한다.

또 이 작품이 흥미로운 것은 (신나게 떠들어대는 언론보도에 의해 이제는 이미 유명해졌을) 엄청난 가설 때문이다. 작가는 인류역사의 중대한 사건을 완전히 재해석하며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킬 음모이론을 주장한다. 그것은 마치 바다에는 물이 있고 땅위에는 흙이 있다는 지극히 당연하다고 믿어온 상식들을 완전히 뒤엎는 듯한 충격과 쾌감을 제공한다. 바로 이러한 작가의 놀라운 역사적 상상력이 이 책을 눈부실정도의 화제작으로 이끈 일등 공신임은 두말할 나위 없는 것이다. 이 대단하고도 충격적인 상상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어서 보는이들로 하여금 감탄과 의혹을 동시에 재기시키며 입에서 입으로 끝없는 입소문을 만들어내게 하는 작용을 일으켰다.

이 의도된 계산은 책의 엄청난 히트라는 예상된 결과를 낳았고 작가의 번득이는 아이디어를 경외감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하지만 종종 비교되곤 하는 <장미의 이름>과 이 작품을 비교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우선 이 작품이 <장미의 이름>같은 불멸의 걸작이 되기에는 깊이가 얕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는 치밀한 조사와 방대한 자료들로 스토리의 신빙성을 덧칠해 나가고 있지만 그것이 조금은 부산하고 작위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많은 지식들이 등장하지만 그것이 작가적 세계관, 철학적 지식으로서의 사유가 아닌 단순 자료량에 의한 지식의 열거에 급급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작가는 엄청난 자료 조사를 했고 그것을 스토리 중간중간에 자랑스럽게 배치하는데 만족했을 테지만 적어도 필자의 견해는 그것이 스토리의 몰입을 오히려 방해하며 산만함을 부추기는(깊이 있게 녹아들었다기보다는 어딘지 붕떠서 따로 놀고 있는) 듯했다는 것이다. 작가는 자료 조사를 통해 놀라운 가설 - 그것을 임의로 연금술이라고 지칭하자 - 연금술의 비밀을 알아냈고 그것을 떨리는 가슴으로 세상에 공개하고픈 마음이 앞섰던 것일 게다. 그 놀라운 연금술의 비밀은 세상에 풀어놓기만 하면 관심의 집중포화를 받을 것이고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은 따 놓은 당상이었을 테니. 때문에 작가로서 철학적 깊이가 부족했던, 아니 간과해버렸던 그런 것은 그다지 문제될 것이 아니었을 게다. 그는 헐리웃 스릴러 영화의 매력적인 공식들을 가져와 근사한 주형을 만들어 내고 그 위에다 말하고 싶어 근질근질했던 연금술의 비밀을 과시하듯 풀어놓았던 것이다. 때문에 무언가 급하고 서두르는 인상과 함께 나열된 지식의 반복에서 오는 피곤함도 함께 맛보아야 했다.(작가가 <장미의 이름>을 의식했던 하지 않았던 이 책은 처음부터 <장미의 이름>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작품이라고 본다. 이 책은 그저 잘 빠진 헐리웃 식의 스릴러 물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필자는 이 책의 스토리상의 단점 하나를 지적하고자 한다. 

우선 도입부와 초반부는 더할나위 없이 너무 근사했다. 의문의 죽음과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수수께끼의 기호들, 그리고 랭던을 돕는 소피라는 여성의 신비한 매력, 예상치 못했던 누명과 기막힌 탈출. 그러나 탈출 이후부터 1권 마지막까지 필자는 약간의 루즈함과 산만함을 느껴야 했다.(보는 관점에 따라 틀리겠지만 필자에게는 그러했다) 이유는 거대한 비밀을 풀기 위해 선행되는 고만고만한 비밀풀기의 과정이 작가의 스노비즘적인 지식 열거와 맞물려 답답한 피로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너무나 근사했던 도입부의 스릴에 미치지 못하는 더딘 스릴을 낳았고 상대적으로 업뎃되는 스릴을 기대했던 심리에 약간의 심심함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 할애한 200여 페이지를 과감하게 50페이지 정도로 압축시켰다면 굉장히 타이트한 스릴이 분출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을 가져본다.(솔직히 조금 길지 않았나 생각한다. 어딘지 틈메우기 용 에피소드와 설명이 있었던 듯하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대략 450페이지 정도로 해서 한권짜리 책이었으면 더 알짜배기같은 근사함을 맛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 부분을 제외하고 나면 스토리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재미를 제공했다는 것에 두 손을 다 들수 있다. 1권의 말미에 쏟아져 나오는 어마어마한 역사적 반전부터 2권 마지막까지 논스톱으로 이어지는 파워넘치는 스릴과 반전의 미덕은 메가 베스트셀러의 흡입력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출판계의 판도를 바꾼 <장미의 이름> 이후 역사 음모 이론을 다룬 스릴러 물들이 유난히 인기를 끌고 있다. 반덴베르크의 예를 굳이 들지 않더라도 비교적 최근 작품인 <단테 클럽>은 국내에서 <다 빈치 코드>의 인기를 등에 업고 꽤 괜찮은 판매고를 올리고 있다. <다 빈치 코드>가 <장미의 이름>이나 반덴베르크에 빚을 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특히 반덴베르크는 이미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진실>이라는 작품을 내기도 했었다. 그는 그 작품에서 다 빈치의 '장미원의 성모'라는 명화에 숨겨진 비밀과 '제5복음서'의 역사적 가설을 스릴과 서스펜스로 풀어냈었다) 그러나 <다 빈치 코드>를 굳이 그들 작품들과 비교해 본다면 그들 작품보다 읽는 재미가 더 있다는 것에 장점을 둘 수 있다. 그 읽는 재미에는 잘 짜여진 헐리웃 스릴러에서 느낄 수 있는 극대치의 쾌감과 핵폭탄급 역사 비밀에서 느낄 수 있는 극대치의 흥분이 다 들어 있다. 이 두가지 요소를 이만큼 자극적으로 솜씨좋게 엮어낸 작품은 없었던 것이고 때문에 이 작품은 1200만부라는 핵폭탄급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불멸의 걸작으로 남기에는 앞서 말했던 것처럼 2% 부족한 부분이 있다.(그 2%에는 최근 불거져 나온 <다 빈치 코드> 표절논란도 제외할 순 없다. 댄 브라운이 20년 전 발간된 역사 논픽션 <성혈과 성배>에서 중요한 모티브의 대부분을 가져오지 않았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성혈과 성배>는 당시 재판에까지 회부될만큼 논란을 일으켰고 그 놀라운 재판 결과때문에 전세계 언론을 경악에 빠뜨렸던 사건이었다)  이 작품은 <장미의 이름>이 되기에는 작가만의 확고한 철학이나 세대를 통찰하는 문학적 깊이가 모자라지만 분명 '읽는 재미'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작품임에 틀림없다. 때문에 지적 스릴러라는 거창한 말보다는 그저 흥미진진한 추리 스릴러의 걸작이라는 칭호를 붙인다면 그것에 더 부응할 작품이다.

 

p.s. 번역 부분에서는 상당히 만족하는 편이다. 나름대로 원어를 써야 할부분에는 원어로 처리했고 오타도 거의 없는 편이었다. 또 이 책은 각권 350페이지가 넘는 책임에도 각권 7800원이라는 요 근래 보기드문 저렴한 가격으로 승부를 냈던 것은 개인적으로 대단히 칭찬하고 싶다. 이 책이 국내에서 날개돋힌 듯이 팔려나간 데에는 그러한 가격 서비스도 한몫을 하고 있을 테다. 대표적으로 비교하고픈 것은 '황금가지'에서 출간된 <단테클럽>이다. 이 책도 훌륭한 책임에도 출판사의 졸속 출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타가 너무 많고 다듬어지지 않은 번역이 원작의 많은 부분을 훼손시키고 있었다. 또한 각권 360여 페이지로 <다 빈치 코드>와 별반 다를게 없는 두께임에도 각권 9500원이라는 엄청난 가격으로 구매자들에 부담을 주고 있다. '황금가지'에서 번역하는 책들이 대부분 원작이 훌륭한 작품들임에도 이런식의 얍삽한 편집의 두께 부풀리기 식 전략과 졸속 제작이 마음에 들지 않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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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yonara 2004-10-14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스크롤의 압박이... ^_^
'장미의 이름'과는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 20%쯤은 부족한 것 같은데.. ㅎㅎㅎ

살인교수 2004-10-14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부터 언론이 너무 <장미의 이름>쪽으로 몰고가려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두 작품은 장르적인 관점에서만 봐도 확연히 틀린 작품들인데. 여기저기 역사 스릴러 나올때마다 <장미의 이름> 덕 보는 작품들이 많은 듯 합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장미의 이름>과 비교될 작품은 아직 없죠~ <다빈치 코드>의 경우는 개인적으로 너무 기대를 하고 봐서인지 성에 차지 못했다는 느낌을 조금 받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