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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관의 살인 ㅣ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5년 8월
평점 :
(스포일러 없음!!!)
'관'시리즈 최고의 작품이라는 말은 익히 들어왔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물론 관 시리즈는 국내 재출간된 것이 두 권뿐이다. 그 두 권 '십각관의 살인'과 '시계관의 살인'이 관 시리즈의 최고 두 작품이라고 한다.
작년 여름에 '십각관의 살인'이 재출간되자마자 구입해서 읽었고, 그 때의 황홀한 충격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어째서 그 작품이 일본 신 본격 미스터리의 신호탄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알 만했다.
그리고- '관'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인 '시계관의 살인'
이 작품으로 작가인 아야츠지 유키토는 45회 일본 추리작가협회 상을 수상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책을 다 읽고 나서, 정말로, 아무리 추리소설이 엄청 발전한 일본이라고 해도, 이런 작품에게 상을 주지 않으면 어느 작품에게 상을 줄까, 싶을 정도로 대단한 작품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이 작가는 추리소설계의 케빈 윌리엄스(스크림의 작가)같은 사람이다.
말 그대로 기존의 추리소설이 가진 장르의 법칙을 너무도 잘 알고 있으며 줄줄이 꿰고 앉아서 자유자재로 인용하고 비틀고 재창조하고 전복시킨다. 그의 관 시리즈가 이룩한 위대한 업적 중 하나가 바로 '이중구조'이다. 이것이야말로 바닥을 드러낸 본격추리물의 '트릭' 및 '반전'에 있어 그 한계를 훌륭하게 극복할 수 있었던 새로운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십각관의 살인'의 경우 클라이맥스의 단 한줄이 독자들의 심장을 멎게 해버린다. (이는 작가 후기에서 작가마저도 자신을 할 정도로 기존의 고정관념을 뒤집는, 놀라운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이중구조는 '시계관의 살인'에서 절정을 이룬다고 할 수 있겠다.
사실- 우리가 가끔씩, 본격추리물을 보면서 쉽게 빠지기 쉬운 자만감 중 하나가- 나는 읽는 도중 범인이 누구인지 때려 맞췄다, 하는 것이다. 그런 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닌데도 우리는 그런 것에 집착을 하는 경향이 있다. 누가 범인인가 하는 것은 이제, 더이상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이, 어째서 그가 범인일 수 있을까, 어째서 그것이 가능했을까, 하는 것이 실제 본격추리물의 매력이기 때문이다. 생뚱맞게 범인이 누구인지만 때려맞춘다고 사건의 진상까지 다 알 수 있는 건 아니란 말이다. 그러므로 그런 자만감은 굳이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그런 자만심은 피해가는 것이 이롭다. 정말로 근사한 독서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고 들어가는 불상사를 낳을 수 있으므로. (진짜로 사건의 진상을 훤히 꿰뚫었다면 또 긍지를 가질만도 하지만,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것이기 때문에- 왠지 이사람이 범인 같은데, 하는 것 정도로 자만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봄. 그정도 예측은 사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것이니)
사설이 길었는데 작품으로 들어가서-
이 작품은 기존의 관 시리즈와 비슷한 패턴을 보인다.
시계관이라는 독특한 구조물에 9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강령회를 연다. 그리고 그후, 한 명씩 처참하게 죽어나간다. 과연- 범인은 누구이며, 유령처럼 사라지는 그의 정체는 무엇이며, 무수한 미스터리들의 진상은 무엇인가?
마지막 장을 읽기 전까지 작가가 엄청나게 풀어놓은 미스터리들의 진상을 모두 다 파악하기는 불가능하다. 때문에 그것을 알아가는 쾌감은 배가 되는 것이다.
역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극 중반의 한 여자의 죽음이다.
그녀는 너무나 놀라운 것을 보게 되고-(체험하게 된다고 해야하나)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그 '불가능함' 앞에서 경악한다.
이 경악스러운 '불가능함'이 무엇인지, 당시로선 궁금해서 미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 후에는 '작가'의 '천재적인 기발함'앞에 감탄사를 연발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신 본격 추리소설의 제대로 된 트릭과 마주하는 신선한 매력이 아닌가 싶다.
바로 이러한 재미가 책 곳곳에 산재해 있다는 것이 이 책을 위대한 추리소설의 위치에 올려놓는 것이다.
당시로서는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미스터리들, 궁금증, 의혹, 왜 그러한 행동을 했을까, 도대체 죽기전의 그는 무엇을 알아낸 것일까, 그때 그 사람이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어째서 그때 그러한 기이한 일이 일이난 것일까, 하는 것들이 거대한 퍼즐처럼 이어지며 참을 수 없는 강렬한 재미를 선사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꽤 두꺼운 책이다. 페이지 수가 550쪽에 달한다. 개인적으로 그 550쪽이 아쉬울 정도로 한 치의 지루함이 없었다. 마약처럼 빠져드는 흡입력 때문에 책장을 넘기느라 숨가쁠 정도였다. 또한 두꺼운 만큼, 사건의 구성이 상당히 탄탄한 편이며 드라마성도 강하다. 특히 라스트를 장식하는 '침묵의 여신' 에피소드는 가히 한편의 오페라를 보는 것처럼 장중하다. 아무튼 이 '침묵의 여신' 에피소드까지- 무수한 미스터리들은 치밀하게 맞물려서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놀라운 결집력을 보여준다. 이 엄청난 작품을 작가가 정말로 혼자서 생각해 낸 것이라면 천재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끝으로 이 작품에 정말로 매료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 소설을 한 편의 공포소설로 봐도 전혀 무방했기 때문이다. 이건 정말이다! 그래도 공포소설과 추리소설은 경계가 있지 않느냐니, 하는 말따윈 이 작품 앞에서 통하지 않을 말이다. 공포소설에 추리적요소를 가미할 수 있고 추리소설에 공포적요소를 가미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이 작품은 한 명씩 죽어가는 사람들의 공포심리를 너무나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그 끔찍하고 처참한 살인 장면들은 '검은집''링'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검은집'이 추리물로 분류될수도 있듯이, 이 책 역시 추리물이면서 공포소설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작가가 이 작품을 쓰기 전에 이미 '공포소설'을 많이 썼던 것이고, 그러한 전력이 이 작품에 생생히 녹아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이 작품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죽어나가는 자들의 심리, 상황, 살인 묘사는 엄청난 공포와 전율할만큼의 잔인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그냥 추리물로 치부하기에는 그 공포와 잔인함이 너무 심하다. 장난 아니고 진짜 무서웠다. 이건 분명 호러다!)
후기에 작가는 그동안 자신이 쓴 10개의 작품을 연도순으로 나열해놓는데 정말로 제목만 봐도 모두 구미가 당긴다. 더 놀라운 것은 작가가 10개의 작품을 단 4년만에 썼다는 것이다. 박민규 작가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소설을 쓰지 않는 사람은 소설가라고 부를 수 없다,고 한다. 그건 스티븐 킹의 생각과도 일맥상통한다. 하늘이 준 재능을 어째서 발휘하지 않는 것인가, 라고 말을 한다면, 몇 년이 지나서야 한권을 발표하곤 하는 작가들은 하늘이 준 재능이 없는 사람들이 아닌가 싶다. 아야츠지 유키토는 그런 면에서 하늘이 준 재능을 확실히 가진, 진정한 작가이며, 그것을 부지런히 발휘하는 성실한 작가이다. 그리고 팬들로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는 작가인 것이다!(물론 후기에서 보면 알지만, 작가는 새로운 트릭,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느라 매번 엄청 고생을 하는 모양이다. 시계관의 경우만해도 쓰다가, 이건 아냐, 해서 찢어버리기를 반복했다고 하니-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이런 정도의 노력과 부지런함이 뒷받침되어야 진정한 걸작, 재미있는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는 듯)
p.s. 조금은 만화적인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필자로선 이러한 '폭풍의 산장'식의 추리물이 정말 좋았다! 요즘 너무 '사회파' 식의 리얼리즘이 판을 치고 있다. 그런 것도 나름의 매력은 있지만 '본격추리물'을 점점 만화처럼 시시하게 보려는 경향이 불만이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사회파' 식의 리얼리즘- 현대사회의 왜곡이 낳은 비극 따위야말로 이제는 좀 질린다. 최첨단의 법의학이나 감식과학보다는 역시 명탐정, 대저택, 괴이한 사람들, 피비린내나는 참극, 불가능 범죄의 실현, 깜짝 놀랄 트릭... 이런 가공의 이야기가 좋다. 미스터리엔 역시 이런 것이 걸맞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작가의 글이 너무 좋다! 아야츠지 유키토가 가장 최근에 쓴 '암흑관의 살인'이 곧 출간예정이라고 하는데- 3권짜리라고 한다. 1500페이지 정도의 분량이라고 한다. 하지만, 매니아들의 소문에 의하면 암흑관의 살인은 별로라고 하던데... 왜 하필 이렇게 두껍고 별로인 작품을 선택한 것일까! '미로관의 살인'이나 혹은 '선홍빛 속삭임'같은 아야츠지 유키토 초창기 작품들이 훨씬 재미있다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