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소년 - 상
우라사와 나오키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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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0세기 소년의 완결판인 '21세기 소년' (상,하)가 마침내 출간되어, 8년간 이어지던 20세기 소년 신화의 종지부를 찍었다. '마스터키튼', '몬스터'때도 그랬지만 이 작가의 작품은 워낙 길고 복잡해서 리뷰나 감상문을 쓰기조차 벅차다. 간략하게 줄인다면, 그저 순수하고 천진한 꿈을 꾸던 20세기의 소년들이 있었고 그 꿈들이 21세기에 현실화된다는 내용이다. 우리들의 어릴적 꿈이 그모습 그대로 현실화 되었을 때 얼마나 끔찍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우리들이 자라서 성인이 된 후에도, 아직 그 옛날 어린 아이의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에 대한 고찰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한다면 과연- 어른이 된 후에 아이의 꿈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게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말일까? 필자의 성급한 생각에 의하면 그것은- 순수한 판타지의 힘이 사라진 세상에 대한 우울한 결과라고 말하고 싶다.


순수한 판타지의 힘- 이란 것은, 그렇다면 과연 무엇인가?

사실은, 진실과 정의라고 말해도 본질적으로 그 의미는 같다. 그럼에도 어쩐지, 지금 시대에 진실과 정의를 얘기하자니, 허무맹랑한 판타지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그런 시대인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순수한 판타지의 힘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요는, 진실과 정의가 퇴색되어버린 세상이란, 순수한 판타지의 힘이 사라진 세상과 같은 의미의 해석인 셈이다. 

우리는 아이였을 때 꿈을 꾼다. 그 꿈은 그 시절, 아이였을 적에만 허용되어지는 특권이다. 그 시절, 그 영혼의 순간이 지나면 절대로 두번다시 그 때의 그 꿈은 꿀 수 없다. 그래서 그것이 허용되어지는 그 시기란, 우리 생애 최고의 시간들이며, 황금시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세상의 평화를 지키는 거대 로봇의 조종사가 되리라는 꿈은, 그래서 오직 그 시절에만 꿔 볼 수 있는 '신의 선물'과도 같은 것이다.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 절대로 그러한 '신의 선물'은 찾아오지 않는다. 내신과 수능의 나날을 보내며 우리는 절대로 로봇으로 세계 평화를 지키리라는 꿈 같은 건 꾸지 않게 된다.

이외수의 소설 '벽오금학도'에는 세상을 구원하는 절대적 신의 존재로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그 인물은 다름아닌, 마을의 저능아였다. 저능아는 항상 즐겁고 황홀한 그만의 꿈에 빠져 산다. 그런 저능아에게 사람들은 돌팔매질을 한다. 그러나, 소설의 후반부에 그 저능아야 말로 신성한 힘을 지닌 신선으로 그려진다. 

이외수의 이러한 사상은 20세기 소년과 일면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우리가 흔히 모자라는 사람 정도로 치부해버리는 저능아. 그러나 저능아는 어쩌면 정말로 우리가 모르는 '뭔가 소중한 것'을 계속해서 간직하고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대다수의 사람들은 '정상인'이라 분류되는 '사회인'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그것을 잃지 않고 간직하고 있는 몇몇 존재들은, '비정상인'으로 분류되어 '비사회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흔히들 저능아들은 언제나 즐겁다. 길을 걸으면서도 혼자만 이해할 수 있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황홀한 표정을 짓는다. 그 모습을 '정상적 사회인'들이라면 그저 미쳤다고 말해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과 다른 극소수의 존재'를 그런 식으로 매도함으로써 '조직'에 속해있는 스스로의 자아를 위안하고 안도하고자하는 심리일 테다. 순수한 '절대자'가 있다면, 그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은- 사실 어느 쪽이 진정으로 '실성한' 쪽인지를 알 수 있겠지만!

바로 이 절대자의 시선을 이외수는 '벽오금학도'에서 은유적으로 말하고 있다.

사실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우리들이야말로, 금밖으로 밀려나간, 비정상적인 부류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저능아를 우리들의 '모순된' 잣대로 함부로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의 모순된 법칙이나 속물적인 근성에 속해있지 않고, 그런 것들에서 초월해 있는 '저능아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신성한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시선에서 본다면 저능아지만, 하늘의 시선에서 본다면 그들은 '신선'인 것이다.

20세기 소년의 경우는 어떠한가. 벽오금학도에서 '저능아'의 예를 통해 '신선'의 의미를 구현해냈다면, 20세기 소년에서는 '성장하지 못한 어른'을 통해 '꿈'의 의미를 고찰하고 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벽오금학도에서 '저능아'는 앞서 말한대로 순수한 의미에서 '사회적 모든 통념과 모순'에서 초월해 있는 자였다면, 20세기 소년의 '성장하지 못한 어른'은 사회적 모든 통념과 모순의 폐해를 고스란히 경험했고 그로 인해 성장이 멈춰버린 어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어찌보면 이러한 사상은 우라사와 나오키의 전작 '몬스터'에서도 그대로 보여지고 있다. 요한은 전형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어른'이다. 사실 그는 누구보다 순수한 영혼을 가진 아이였지만, 누구도 경험할 수 없었던 끔찍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이 사회가, 이 시대가, 어른들의 모순된 제도들이 순수했던 요한을 '몬스터'로 만들어버린다. 요한은 그러한 끔찍한 경험들을 고스란히 끌어안고 '성장하지 못한 어른'이 되어버린다. 20세기 소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친구'로 등장하는 두 인물- 이 그러했고, '사다키요'가 그러했다. 또한, 사실은 알게 모르게 조금씩- 등장인물 모두가 그러했다고 볼 수 있다.

1권에서 켄지는 힘겹게 살아가는 30대 중년의 무기력한 아저씨로 나온다. T-REX의 20세기 소년을 학교가 떠나갈 정도로 시끄럽게 틀어놓고 빗자루를 기타삼아 두들겨대던 거칠것 없던 꿈의 소년이- 그렇게 늙어버린 것이다. 지구의 평화를 구하겠다던 소년은 가라오케 구석에서 철지난 팝송이나 부르며 스스로를 위안하는 것이다. 이거면 된 거다, 내 인생은 이걸로~!

켄지 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의 사정도 다 비슷하다. 조직사회에 길들여지며 꿈을 잊어버리고, 시대의 모순과 결탁하며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다들 그렇게 살아가며, 스스로를 위안하는 것이다. 그래, 이거면 된 것다, 내 인생은 이걸로~!

그리고-
어릴 적 그들이 꿈꾸었던 꿈의 기록들을 '아직' 잊지 않고 있는 자가 등장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잊어버렸니? 그걸로 된 거니? 너희들 인생은 그걸로? 그렇게 비웃듯이 물으며, 말한다.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놀아보자고! 켄지야, 놀자~
'친구'는 어린 시절 아이들의 꿈들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그대로 실현시키고자 한다. 너희들의 꿈이었잖아! 어째서 그것을 새까맣게 잊고 살아가는 거지? 그렇다고 한다면, 내가 기억나게 해주겠어! 거대 로봇이 세상을 파괴하고, 바이러스가 인류를 전멸시키게금 해 주겠어. 어때? 이제 기억나니? 지구의 평화를 지키겠노라고 부르짖던 너희들의 그 때 그 시절의 꿈들이?

꿈의 실현-

어째서 그것이 현실 공간에서는 그토록이나 끔찍하고 잔혹한 모습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릴 적 꿈을 깨끗이 접고 살아감이 마땅하단 말인가?

여기서 필자는 초두에 언급했던 순수한 판타지의 힘을 다시 얘기하고자 한다.

'순수한 판타지의 힘'이 사라진 시대다. 말 그대로다. 아이들의 꿈이 지켜질 수 없는 시대. 그것이 약속될 수 없는 땅. 그래서 포기해버리거나, 변질되어질 수밖에 없는 꿈-
지구의 평화를 지키겠노라는 아이들의 순수했던 꿈은 오늘날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까? 대통령? 국회의원? 종교?

20세기 소년은 곳곳에 세상이 얼마나 썩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부패한 정치인, 경찰관, 종교인들- 절대권력을 지닌 자들의 악행은 이 세상이 어떤 식으로든 절대로 '진실과 정의'가 숨쉴 수 없는 공간임을 피력하고 있다. 그 모순과 사악함의 실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가 바로 '친구'이다. 그래서 그는 '비록 변질될 수밖에 없었으나' 아직 간직하고 있던 '어릴 적 꿈'을 통해 세상의 정화를 꿈꾸고자 하는 것이다! 

'친구'로 대변되는 두 인물- 그들이 어째서 그러한 '몬스터'가 되어버렸는지는 작품 내내 교차해서 보여지는 어릴 적 장면들의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몬스터의 요한처럼 그들 역시 어릴 적부터 '치명적인' 세상의 '독'을 경험하게 된다. 우라사와 나오키는 그러한 과정을 미묘하고도 절묘한 에피소드들을 통해 탁월한 심리적 해석을 선보인다. 진짜 '친구'와 그 친구의 복사본이라 할 수 있는 두번째 '친구' 그들의 어릴 적 삶의 과정과 주변인물들과의 상관관계, 스쳐지나가는 사건들, 그리고 기묘한 질투와 시기의 감정선~ 이런 치밀한 구조들을 통해 작가는 두 '친구'의 내면을 독자들에게 여과없이 보여준다. 그들이 어린 시절 입은 상처가 어떤 식으로 그들 내부를 피폐하게 만들었는지를!


결국 우라사와 나오키가 20세기 소년을 통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한 것은 이외수가 '벽오금학도'를 통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한 것과 같은 게 아닌가 싶다. 진정한 판타지의 힘이 살아 있는 시대를 그리워하는 것! 말하자면 진실과 정의가 온전히 살아 숨쉬는 사회에 대한 동경과 그런 것에 대한 경종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정말로 어렸을 때는, 무조건 착한 편이 되고자 한다. 하지만, 조금씩, 사회의 모순과 어둠의 본질을 알아나가면서 우리들은 나쁜 쪽에 길들여져간다. 그래서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이다. 착한 쪽이 되어라! 사실은 우리 모두 그것을 원하고 있다. 모두가 착한 사회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끊임없이 나쁜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 괴리는 무엇인가? 생각해보고, 답을 찾아내어라! 그것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작가의 메시지다!

때때로 살아가면서 우리들은 너무 어른스럽게만 살아가려한다는 생각이 든다. 아주 순수했던 어린시절을 떠올려보자. 그 시절에는 고민도 문제도 지금에비해 훨씬 적었다.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고민과 문제를 지나치게 고민적으로 문제적으로 바라본다. '행복해질 수 있는' 열쇠를 우리 안에서 쥐고 있음에도 그것을 애써 부정한다. '그런 것은 어른스럽지 못하잖아' 그러면서, 결국 아무 것도 해결 못할 고민과 문제에 스스로를 더욱 가혹하게 몰아간다. 

가끔은 기억하자. 어린 아이의 미소를. 우리 안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을 순수했던 아이의 영혼을. 따지고 보면 우린 모두, 어른의 외투를 입고 어른스러운척 폼을 잡고 있는 '어린애들'에 불과한 것이다. 스스로가, 그리고 서로서로가 그 순수한 본질을 인정할때 우리는 정말로 어린아이로 되돌아갈 수 있으리라. 숨바꼭질에서 들킨 아이처럼, 이런 들켜버렸잖아, 그러면서 해맑게 웃을 수 있으리라. 


-> 작품의 마지막 컷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일까? 어째서 고이즈미와 볼링이 등장한 것일까? 다시 오지 않을 볼링붐을 꿈꾸는 것은 바로 기적과도 같이 찾아올지도 모를 '판타지'의 향수에 대한 갈망이 아닌가 싶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작가의 목소리가 아닐까? 작가는 고이즈미라는 소녀를 통해, 불가능할 것 같은 '진실된 꿈'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행복하게 꿈꿀 수 있는 세상이라는 판타지를~! 그래서 고이즈미는 오늘도 열심히 스트라이크를 날린다~ 기적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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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인명구조대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박재현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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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이치는 절벽을 오르고 있다. 오르고 또 올라도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 어째서 이런 곳에서 암벽타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절벽의 정상에는 세 명의 사람들이 유이치를 기다리고 있다. 이제야 오는군, 우리도 다 했던거라네. 대체 무슨 일이? 라고 생각해보기도 전에 유이치는 자신이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재수생이었던 그는 입시의 중압감을 견디다 못해 목을 매어 자살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하고 생각해볼 것도 없이 나머지 세 명의 사람들 역시 자살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해서 그들- 재수생 유이치, 권총자살한 야쿠자 야기, 사업실패 비관으로 음독자살한 이치카와, 투신자살한 홍일점 미녀 미하루- 네 명은 운명같은 조우를 하게 된다. 자살 유경험자로서 서로 자신들의 방식으로 죽는 것이 제일 고통스럽다고 왈가왈부할 새도 없이 그들 앞에 신이 나타난다. 신은 낙하산을 타고 등장해 그들에게 묘한 제의를 한다. 지금 당장 세상으로 내려가 자살하려는 사람 100명의 목숨을 구해라. 그럼 모두 천국으로 보내주겠다.

 

뭐라고 불평해볼 새도 없이 그들은 세상으로 뚝 떨어진다. 그리고 유령인명구조대의 활약은 시작된다. 정해진 기일은 단 49일. 그 안에 꼭 100명의 자살자 목숨을 구해야만 한다. 그들은 유령이기 때문에 인간과의 정상적인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하며 어떤 물리적인 접촉도 허용되지 않는다. 다만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오렌지 색 구조복과 고글, 휴대전화와 메가폰, 그리고 헤드셋이 달린 무전기가 전부다. 우왕좌왕하는 사이 첫번째 자살자가 눈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리는 중년의 남자. 그는 이제 막 자살을 하기로 결심했다. 일초가 급한 상황, 어떤 식으로든 막지 못한다면 그는 죽는다. 그들은 과연 그 남자를 구할 수 있을까?

 

역대 에도가와란포상 수상작 중 최단기간 100만부 돌파라는 기록을 세운 일본 추리소설 '13계단'의 작가가 쓴 또 하나의 걸작 '유령인명구조대' 이 작품은 국내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의외의 수작이다. 실제로 필자는 '13계단'보다 이 작품에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13계단은 좋은 작품이긴 하지만 필요이상으로 요란한 유명세를 받은 작품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반명 이 작품 '유령인명구조대'는 작품이 가진 가치에 비해 너무 소외된 듯해, 그것이 안타깝다. 물론 일본내에서는 상당한 흥행과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만화 및 드라마로도 제작되어 꽤 많은 인기를 얻었다. 아주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다카노 가즈아키는 어쩌면 이러한 작품에 더 각별한 재주를 발휘하는 작가가 아닐까 싶다. 추리라는 틀을 벗어나 좀더 디테일한 인간갈등과 사회적 모순을 다룬 극의 형태 속에서 빛나는 에피소드들을 빚어낼 줄 아는 능력의 소유자라고나 할까. 그런 면에서 본다면 '유령인명구조대'는 거의 만점에 가까운 작품이다. 유령인명구조대라는 독특한 캐릭터들이 빚어내는 다양한 사건과 갈등들은 재미와 웃음, 감동은 물론이고 스릴과 액션, 긴장감 그리고 보석같이 빛나는 주제의식까지 그 어느 것 하나 빠뜨리지 않고 완벽한 서사의 탑을 구축해낸다. 말 그대로 독자들로 하여금 신나게 웃고, 신나게 즐기며, 때론 손에 땀을 쥐게 하고 때론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게 하면서 종국에 이르러서는 가슴을 파고드는 감동과 울림을 전달한다.

 

작가는 '자살'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일본 사회는 물론 오늘날 현대를 깊숙이 해부한다. 불치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강도나 살인마가 죽이려는 것도 아니고- 자살자들은 그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어째서- 그들은 죽으려고 하는 것일까? 어째서 목숨의 위협을 스스로 느끼는가. 작품 속에는 실로 100여명의 자살자가 등장하고 제각기 다른 100여가지의 이유가 등장한다. 문제는 그들에게 처한 현실의 어려움이나 개개인이 갖고 있는 스트레스와 우울의 문제를 떠나서- '자살'은 어떤 경우에도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없다는 것에 있다. 이미 죽어본 유령구조대들은 그것을 충분히 인지하게 되지만, 죽으려고 하는 이들은 아직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만이 구원이라는 어리석은 착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러한 착각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것일 테다. 살아있는 한 미래는 어떻게 될 지 아무도 모른다. 대예언자 노스트라다무스조차도 보기좋게 빗나가버린 게 '미래'이다. 그러니- 미래가 결정되지 않은 이상 모든 절망은 착각인 것이다. 소풍을 가는 것처럼, 마라톤을 뛰는 것처럼, 우리는 힘들고 어렵더라도 도중에 포기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다시말해 '이러이러한 기준이 되지 못하니' 나는 죽어야 해, 하는 것은 어리석은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애초에 삶에 '이러이러한 기준' 따위는 없다. 삶이란 그저 살아가는 것이다. 어떤 이유도 목적도 '그저 살아가는 것'이라는 대의명분에는 비할 것이 못된다.

 

책을 읽어가면서 무수한 자살자들의 지켜보면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순수한 느낌'을 재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아주 어린 아이일때 그저 엄마가 안아주면 그것이 삶의 전부가 된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아주 순수하고 고결하면서도 근본적인 이유가 아닐까 싶다. 우리는 그 단순한 삶의 가치에 살아가면서 점점 더 많은 혼탁한 이유들을 덧씌운다. 덧씌우고 덧씌워서 스스로의 발목을 잡아버린다. 영혼을 구속시킨다. 그것들을 벗어던지는 것은 아주 쉽고 간단하다. 어렵지 않다.(어렵다고? 그렇게 쉬운 것만은 아니라고? 그렇다고 한다면, 이라부 의사와 만나보길 권한다. 그것이 얼마나 쉽고 간단한 것인지를 알려주리라) 언제라도 자신이 만들어낸 그 가식의 껍데기를 자신의 손으로 벗어던질 수 있다. 우리는 그럴 수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러질 못한다. 대신 자살을 선택하려 한다. 기꺼이 죽으려고 한다. 하지만- 유령들은 말한다. 살아라! 라고. 살아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다. 죽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다. 무엇보다 죽으면, 살아갈 수 없다. 살아갈 수 있었음에도 스스로 그것을 포기해버려, 유령이 되어 뒤늦게 후회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이야말로, 지옥 그 자체다! 그래서 유령들은 깊이 후회한다. 그리고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해내려 고군분투한다. 죽어본 자들이기에 무엇이 소중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살아라! 천국이란 천상의 어딘가, 신비로운 어떤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들이 발붙이고 있는 그곳이 바로 천국이다. 살아갈 수 있으니!

 

정말로 마지막 장까지 한 순간도 지루할 틈이 없이 읽혀지는 작품이다. 자살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시종일관 유머러스하고 유쾌하다. 그럼에도 시시각각 긴장과 스릴이 넘쳐난다. 그리고 삶에 있어서 진실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묵직한 감동과 여운을 선물처럼 안겨준다. 지금 자살하려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주위를 둘러봐라.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라. 그들의 진심을 느껴라. 죽고싶어하는 그들은 사실 죽고싶어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다가가 그저 작은 말 한마디라도 해 주어라. 시시한 우스갯소리라도 상관없다. 이를테면 '사과가 웃으면 풋사과다', 정도의 유머라든가, '정 죽고 싶다면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처박아라' 따위의 농담이라고 해도 이런 경우엔 소중하다. 그 작은 말 한 마디에 자살자들은 웃는다. 죽으려는 마음을 돌린다. 살아보려고 마음을 다잡는다. 인간은 그렇게 나약하지만 또 강인한 존재다. 지금의 현실이 그대를 울리더라도 결코, 슬퍼하거나 우울해하지 마라. 그대 주위엔 안 보이게 그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누군가가 분명히 있다. 그 존재가 비록 유령들일지 몰라도- 그대의 영혼에 간절히 외치는 목소리는 분명히 있다. '살아라' 라고 외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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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 동화
오츠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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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소녀를 위해 까마귀는 사람들의 눈알을 뽑아온다. 그 눈들을 통해 소녀는 세상의 다양한 모습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유리병 가득 눈알이 쌓일 수록 소녀는 차츰 세상의 어둡고 무서운 모습들도 보게 된다. 그리고... 검은 악마의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한 쪽 눈을 잃은 소녀가 새로운 눈을 이식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소녀는 과거의 기억을 몽땅 잃은 상태. 기억이 백지이므로 완성되어지지 못한 자아는 혼란스럽기만 하다. 나는 지금의 '나'인가, 과거의 '나'이어야 하는가. 아무리 해도 과거의 자아가 돌아오지 않는다. 소녀는 소녀를 둘러싼 환경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한다. 그 환경 속에서 그녀는 예전의 그녀가 될 수 없었기에. 그리고... 언제부턴가 이식 받은 한 쪽 눈에서 기묘한 영상들이 펼쳐진다. 그것은 과거 그 눈동자의 주인이 본 영상들. 소녀는 이제 그 눈동자의 주인과 자신의 자아를 동일시 한다. 그리고 길을 떠난다. 그 눈동자가 본 영상 속에 감추어진 잔혹한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일본 문단에서 의심할 여지 없는 천재로 불리는 오츠이치의 첫 장편소설. 

암흑동화는 기본적으로 저 유명한 일본 공포만화가의 대부, 우메즈 카즈오의 '검은 그림책'과 비슷한 설정으로 시작된다. 캐릭터나 분위기, 극의 전개 등이 무척 닮아 있다. 주요 키워드로 놓고 본다면- '잔혹동화', '사이코 살인마', '감금된 소녀', '원격 투시' 등이 닮아 있다. 또, 여 주인공이 낯선 마을을 방문해서 살인사건의 비밀을 파헤치려 한다는 설정도 유사하다. 무엇보다 두 작품이 닮은 것은 플롯이다. 주인공과 살인마의 시점을 교차로 내보내며 적절한 시기에 '잔혹동화'를 액자구성 형태로 삽입하고 있다는 것!

아마도 오츠이치는 어린 시절 우메즈 카즈오의 작품을 보며 알게 모르게 '호러적 내공'을 쌓아갔는지도 모르겠다. 필시 그럴 것이다. 우메즈 카즈오가 후세의 공포작가들에게 끼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테니...

아무튼 비슷한 설정이야 어쨌든- 암흑동화는 역시 오츠이치다, 라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잘 빠진 걸작 공포소설이다. 그동안 작가의 중, 단편에서 보여진 센세이셔널한 감각들이 이 장편 속에도 고스란히 녹아 있다. 작가의 전매 특허와도 같은 '잔혹 묘사'가 일품이며, 그것을 아우르고 있는 으스스한 도시괴담적 분위기가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그러다가 라스트에 이르러서-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반전을 터뜨리며 확실한 '체감공포'를 선사한다.

과연 호러소설에 있어서 타고난 천재작가임에 틀림없다.

이제 시작되는 여름 무더위- 이 한편의 공포소설로 뼈속까지 서늘해지는 전율을 느낄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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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섬 퍼즐 학생 아리스 시리즈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김선영 옮김 / 시공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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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하는 퍼즐을 푸는 자가 다이아몬드의 상속자가 되리라.

퍼즐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거부가 남긴 마지막 수수께끼. 유일한 단서는 섬 곳곳에 세워진 25개 모아이 거상들. 거부의 손녀이자 에이토 대학 추리소설연구회 홍일점인 마리아는 팀원 둘과 함께 섬으로 향한다. 섬에는 먼저와서 상주해 있는 열 명의 친척들이 있다. 마리아 일행이 섬에 숨겨진 퍼즐을 푸느라 고군분투하는 사이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불가사의하기 그지없는 밀실에서의 살인사건. 자살이 아니고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불가능 범죄. 그러나 그것은 참극의 시작일 뿐- 고립된 섬을 무대로 기묘하고도 불가능한 연속 살인이 연이어 발생한다.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한 모아이 거상의 시선. 고립된 섬에 불어닥친 폭풍. 그리고 더없이 아름다운 풍광위로 뿌려지는 살인귀의 피빛 소나타!

 

자타가 인정하는 일본의 엘러리퀸,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두번째 작품. 데뷔작 '월광게임'에 비해 화려하게 진화한 작품이다. 월광게임이 화산 폭발과 함께 고립된 산 속에서 벌어지는 서바이벌 추리게임이었다면, 이번에는 다이아몬드가 숨겨진 보물섬에서 벌어지는 서바이벌 추리게임이다. 엘러리퀸을 철저히 신봉하는 만큼 작가는 철저한 페어플레이와 완전한 논리게임을 선보인다. 명명백백한 진리겠지만 그것이 본격물의 미덕이자, 이 소설의 보석같은 장점이다. 일본 신본격 1세대를 화려하게 장식한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역시 '고전추리'의 향수를 잊지 못하는 '정통추리광'이다. 그는 '스크림'의 각본을 쓴 캐빈월리암스처럼, 추리소설의 법칙을 꿰뚫고 있는 열혈매니아이자, 역시 그 향수를 잊지 못하는 팬들에게는 더할나위없이 만족스러운 작가이다. 작가는 본격이 가지는 미덕과 한계를 모두 간파하고 있는 듯하다. 작가의 그러한 자의식은 작품 곳곳에 인물들의 입을 통해 나타난다. 밀실트릭이란 것 자체가 불가사의하기 그지 없는 것처럼, 완전한 논리적 추리란 것도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작가도 독자도 본격의 매니아라면 이미 그러한 점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러한 불가사의함과 환상에 목말라 한다. 날이 갈수록 사회파와 과학수사가 도배를 해버리는 덕에 고전의 향수는 전설처럼 아련해지고 있으니... 

 

아야츠지 유키토와 함께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본격의 영광을 계속 이어가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들은 본격의 팬들이 영원히 목말라하는 '폭풍의 산장' 식의 테마, 불가능한 범죄, 논리적 추리, 마지막에 밝혀지는 의외의 범인- 이런 것들을 계승, 진화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 욕심과 열정의 발로가 바로 신본격의 걸작들로 나타난 것이다. 관 시리즈는 말할 것도 없고,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학생 아리스' 시리즈도 일본 내에서 독자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작가와 독자 모두가 원했던 직소 그림이 모두가 원했던 모습으로 조합되어 나타났기 때문이다.

 

아야츠지에 비해 아리스가와는 더욱 엘러리 퀸에 집착한다. 마치 엘러리 퀸에게 시험이라도 받으려는 듯, 그의 추리는 한 치의 빈틈을 허용하지 않는다. 모든 단서를 정당하게 공개하고 라스트에 이르러서 그 단서들의 조합을 통해 완전한 논리적 추리를 이루어낸다. 이 작품 역시 그러한 추리가 눈부시게 빛을 발한다. 특히 종이 한 장을 가지고 엄청난 양의 논리적 추리를 쏟아내며 한 치의 빈틈없이 범인의 정체를 밝혀내는 클라이맥스는 단연 압권이다. 그러한 추리적 성과 말고도 이 작품이 좋은 것은 주인공 아리스의 대학 생활을 스케치하듯 보여주는 청춘물로서의 구조다. 작가의 간결한 문장과 가끔씩 드러나는 우수젖은 시적 표현과 맞물려 한 편의 청춘소설로서도 깔끔한 재미를 선보인다. 무엇보다, 이 시리즈가 좋은 단 하나의 이유는, 탐정 캐릭터가 너무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섬을 둘러싼 끔찍한 연속 살인과 기괴하기까지 한 불가능 범죄들, 그리고 25개 모아이 거상이 숨기고 있는 보물에 대한 수수께끼- 이 모든 직소 퍼즐들이 라스트에 이르러 철저한 논리적 규명으로 밝혀질 때, 그 전율적인 진실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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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외수 오감소설 '광기'편
이외수 지음 / 해냄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남자는 무기력한 인생을 살아왔다. 그리고 모순되고 피폐한 사회를 정화하기 위해 인간의 영혼이 담겨있는 '신검'을 만들고자 한다.

언제나 그러하듯 이외수는 이 작품에서도 현실에 대한 판타지를 갈구한다. 작가의 메시지는 늘 한결같다. 지독히 혐오스럽게 변해버린 모순된 현실세계를 신비한 판타지의 힘으로 치유하고자 한다. 들개에서는 '들개'가, 벽오금학도에서는 '신선'이 치유의 대상으로 그려지듯, 이 작품에서는 '신비의 칼'이다. 그 칼은 영혼이 깃든 신검으로, 완성되면 세상을 치유하고 정의를 바로세울 강력한 힘을 지닌 칼이다. 

세상이 언제부터 일그러지기 시작했을까, 라는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곧 인간이 언제부터 존재했을까, 를 생각하는 것과 같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시니컬한 주장을 펼치는 스미스 요원의 이론에는 어느정도 일리가 있다. 모든 포유류 및 생물들은 본능적으로 지구와 친화적인 삶을 영위하고자 한다. 반면 가장 진화한 생물체인 인간은 본능적으로 지구에 대해 파괴적 행태를 보여왔다. 그로 인해, 인간이 존재하는 그 시기부터 세상은 일그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작가 이외수는 이런 말을 남긴 적이 있다. 지구의 입장에서본다면 인간의 문명은 치명적인 암덩어리 같은 존재라는.

같은 맥락의 글귀가 떠오른다. 이사카 고타로의 단편소설 '피쉬스토리'에 이런 구절이 있다. '큰 문제가 있다. 사악한 것이 번창하고 올바른 것이 짓밟힌다는 흔해빠진 사실이다. 악은 응징된다고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언젠가는 파멸한다는 일반적인 경우의 일례에 지나지 않는것이 아닐까. 선한 자가 승리를 얻었다는 예는 최근 듣기 힘들지 않은가.'

거의 비슷한 이야기가 '칼' 속에 등장한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무기력한 주인공은 세상을 지독히 혐오한다.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말 그대로 사악한 것이 번창하고 올바른 것이 짓밟히는 세상이다. 주위를 둘러보자. 어떠한가? 아름다운 세상인가?

확실히 세상은 조금만 더 나빠지면 종말에 이를 만큼 나빠져 있다. 악의 유희는 독버섯처럼 인간과 사회와 인류를 잠식하고 점령한다. 지금 이시각에도 지구 어딘가, 인간이 있는 곳에는 전쟁이 있고, 피와 칼부림이 난무하고, 아이들과 여자들이 죽어가고 있다. 기름기 번들거리는 정치인들은, 달콤한 권력의 비곗살들을 잃을까봐 목에 핏대를 세우며 더러운 입냄새나 풍긴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하나다. 향락과 부패의 바이러스가 어느날 분노와 파괴의 바이러스로 폭발하는 일! 우리는 그렇게 종말을 향해 전력질주중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타락의 땅을 구원해줄 메시아는 무엇이란 말인가?

대통령? 경찰? 미국정부? 교황? 수능시험?

자명한 사실이지만 그런 것이 절대로 이 땅을 구원할 수 없다.

작가 이외수는 대담하게도 그에 대한 해답으로 '신검'을 내놓는다.

무슨 무협 소설 이야기인가 싶기도 할 것이다. 아니면 판타지 소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소설은 지독히 현실적인 이야기다. 현실에 깊숙이 천착해서 인간과 사회에 찌든 때와 어둠의 분자 하나까지도 들추어내어 인간의 이기심과 공포, 사회에 만연한 모순과 절대 해결되지 않을 갈등의 실체들을 고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그 리얼리즘의 날 위에 판타지적인 구원의 메시지를 풀어놓는다. 묘하게도 이 기이한 대비는 '현실을 담아내는 그릇으로서의 소설'의 기능을 완벽히 이행하는데 탁월한 효과를 보이고 있다. 한마디로 천재적인 솜씨다. 단언컨대 이외수가 아니라면 누가 이러한 천재적 상상력을 '소설' 속에 발현할 수 있을까!(아무도 못한다. 워낙에 국내 문단은 상상력은 빈곤하고 겁은 많아서! )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힘없고 나약한 소시민의 입장에서 전개된다. 때문에 이 소설이야말로 시대를 살아가는 보편적 대다수 '현실적 인간'들을 위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한 사람의 소시민이 세상을 올바르게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일까? 성실한 봉급쟁이가 되면 되나? 돈을 많이 버는 실업가가 되면 되나? 언변에 능한 정치인이 되면 되나? 척 보기에도 그런 것이 절대 답이 될 수 없어 보인다.

작가는 희망을 말한다.

소시민 가슴 속에 아련히 숨쉬고 있는 희망과 판타지를 이야기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꿈과 희망을 버리지 않고 그 판타지적 에너지를 계속해서 태워나갈 수만 있다면- 단지 그럴 수만 있다면-

그렇게 자신만의 판타지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만 있다면- 그렇다, 단지 그뿐이다. 단지 그렇게, 판타지가 현실보다 강함을 믿을 수만 있다면!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그런 마음만 가질 수 있다면- 세상은 분명 변할 수 있을 것이다.

자명한  사실인 것처럼- 우주의 궤는 판타지적인 방법으로 세상을 치유할 것이다!

논리적이고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우스울지도 모른다. 신검 따위라니, 하면서 쓴 웃음이나 짓고 말 것이다.

그렇지만 세상과 우주의 이치를 일찌기 깨우쳤다고 짐작되는 인류의 모든 현인들은 놀랍게도 그 판타지의 힘이 얼마나 강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진실로 순수하고 아름다운 판타지를 간절히 희망할 때- 자연은, 우주는, 신은- 그 소망을 반드시 이루게 해 준다는 '만화같은' 진리를!

그대는 믿는가?

판타지의 힘을?

부정한다면- 우주는 그대를 부정하리라. 그대가 발붙이고 선 이 땅을, 이 세상을 부정하리라. 그리하여, 오늘날 세상은 사실, 판타지가 죽어버린 땅인 것이다. 아무도 믿으려하지 않으니 죽을 수밖에.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할 수밖에!

작가 이외수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1년동안 하루 두 시간만 잠을 잤다고 한다. 나머지 깨어있는 모든 시간동안 근육이 굳어질 정도로 꼼짝도 않고 글만 썼다고 한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칼'이다. 세상을 치유하고 정의를 바로세울 전설의 '신검'은 그렇게 완성되었던 것이다.

82년 출간당시 작품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현재까지 누적 잠정집계 60만부를 기록하고 있다. 이 놀라운 베스트셀러의 힘이야말로 작품 속 구원의 메시아인 전설의 '신검'과 독자들 영혼속에 갈망되어진 '판타지적 믿음'이 환상적으로 일치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일테다. 이런 상징적인 찬사를 차치하고서도 이 작품은 엄청난 흡입력과 현란한 스토리텔링을 선보인다. 한 편의 무협지보다 재미있게 읽혀진다. 무섭도록 날카로운 문장력에 압도당한다. 모름지기 소설이 지녀야할 미덕 중에서 어느 것 하나 빠짐없는 작품인 것이다.

전설의 신검을 만들기 위해 길을 떠난 남자는 과연 정말로, 신검을 완성할 수 있을까? 세상을 구원할 정의의 검을 손에 넣을 수 있을까?

궁금하다면 당장 책을 들어라. 그리고 부정적인 영혼을 치유하라. 판타지의 힘을 받아들여라!

세상을 바꿀 신검은 이미 그대 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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