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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소년 - 상
우라사와 나오키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20세기 소년의 완결판인 '21세기 소년' (상,하)가 마침내 출간되어, 8년간 이어지던 20세기 소년 신화의 종지부를 찍었다. '마스터키튼', '몬스터'때도 그랬지만 이 작가의 작품은 워낙 길고 복잡해서 리뷰나 감상문을 쓰기조차 벅차다. 간략하게 줄인다면, 그저 순수하고 천진한 꿈을 꾸던 20세기의 소년들이 있었고 그 꿈들이 21세기에 현실화된다는 내용이다. 우리들의 어릴적 꿈이 그모습 그대로 현실화 되었을 때 얼마나 끔찍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우리들이 자라서 성인이 된 후에도, 아직 그 옛날 어린 아이의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에 대한 고찰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한다면 과연- 어른이 된 후에 아이의 꿈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게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말일까? 필자의 성급한 생각에 의하면 그것은- 순수한 판타지의 힘이 사라진 세상에 대한 우울한 결과라고 말하고 싶다.
순수한 판타지의 힘- 이란 것은, 그렇다면 과연 무엇인가?
사실은, 진실과 정의라고 말해도 본질적으로 그 의미는 같다. 그럼에도 어쩐지, 지금 시대에 진실과 정의를 얘기하자니, 허무맹랑한 판타지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그런 시대인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순수한 판타지의 힘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요는, 진실과 정의가 퇴색되어버린 세상이란, 순수한 판타지의 힘이 사라진 세상과 같은 의미의 해석인 셈이다.
우리는 아이였을 때 꿈을 꾼다. 그 꿈은 그 시절, 아이였을 적에만 허용되어지는 특권이다. 그 시절, 그 영혼의 순간이 지나면 절대로 두번다시 그 때의 그 꿈은 꿀 수 없다. 그래서 그것이 허용되어지는 그 시기란, 우리 생애 최고의 시간들이며, 황금시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세상의 평화를 지키는 거대 로봇의 조종사가 되리라는 꿈은, 그래서 오직 그 시절에만 꿔 볼 수 있는 '신의 선물'과도 같은 것이다.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 절대로 그러한 '신의 선물'은 찾아오지 않는다. 내신과 수능의 나날을 보내며 우리는 절대로 로봇으로 세계 평화를 지키리라는 꿈 같은 건 꾸지 않게 된다.
이외수의 소설 '벽오금학도'에는 세상을 구원하는 절대적 신의 존재로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그 인물은 다름아닌, 마을의 저능아였다. 저능아는 항상 즐겁고 황홀한 그만의 꿈에 빠져 산다. 그런 저능아에게 사람들은 돌팔매질을 한다. 그러나, 소설의 후반부에 그 저능아야 말로 신성한 힘을 지닌 신선으로 그려진다.
이외수의 이러한 사상은 20세기 소년과 일면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우리가 흔히 모자라는 사람 정도로 치부해버리는 저능아. 그러나 저능아는 어쩌면 정말로 우리가 모르는 '뭔가 소중한 것'을 계속해서 간직하고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대다수의 사람들은 '정상인'이라 분류되는 '사회인'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그것을 잃지 않고 간직하고 있는 몇몇 존재들은, '비정상인'으로 분류되어 '비사회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흔히들 저능아들은 언제나 즐겁다. 길을 걸으면서도 혼자만 이해할 수 있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황홀한 표정을 짓는다. 그 모습을 '정상적 사회인'들이라면 그저 미쳤다고 말해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과 다른 극소수의 존재'를 그런 식으로 매도함으로써 '조직'에 속해있는 스스로의 자아를 위안하고 안도하고자하는 심리일 테다. 순수한 '절대자'가 있다면, 그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은- 사실 어느 쪽이 진정으로 '실성한' 쪽인지를 알 수 있겠지만!
바로 이 절대자의 시선을 이외수는 '벽오금학도'에서 은유적으로 말하고 있다.
사실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우리들이야말로, 금밖으로 밀려나간, 비정상적인 부류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저능아를 우리들의 '모순된' 잣대로 함부로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의 모순된 법칙이나 속물적인 근성에 속해있지 않고, 그런 것들에서 초월해 있는 '저능아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신성한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시선에서 본다면 저능아지만, 하늘의 시선에서 본다면 그들은 '신선'인 것이다.
20세기 소년의 경우는 어떠한가. 벽오금학도에서 '저능아'의 예를 통해 '신선'의 의미를 구현해냈다면, 20세기 소년에서는 '성장하지 못한 어른'을 통해 '꿈'의 의미를 고찰하고 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벽오금학도에서 '저능아'는 앞서 말한대로 순수한 의미에서 '사회적 모든 통념과 모순'에서 초월해 있는 자였다면, 20세기 소년의 '성장하지 못한 어른'은 사회적 모든 통념과 모순의 폐해를 고스란히 경험했고 그로 인해 성장이 멈춰버린 어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어찌보면 이러한 사상은 우라사와 나오키의 전작 '몬스터'에서도 그대로 보여지고 있다. 요한은 전형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어른'이다. 사실 그는 누구보다 순수한 영혼을 가진 아이였지만, 누구도 경험할 수 없었던 끔찍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이 사회가, 이 시대가, 어른들의 모순된 제도들이 순수했던 요한을 '몬스터'로 만들어버린다. 요한은 그러한 끔찍한 경험들을 고스란히 끌어안고 '성장하지 못한 어른'이 되어버린다. 20세기 소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친구'로 등장하는 두 인물- 이 그러했고, '사다키요'가 그러했다. 또한, 사실은 알게 모르게 조금씩- 등장인물 모두가 그러했다고 볼 수 있다.
1권에서 켄지는 힘겹게 살아가는 30대 중년의 무기력한 아저씨로 나온다. T-REX의 20세기 소년을 학교가 떠나갈 정도로 시끄럽게 틀어놓고 빗자루를 기타삼아 두들겨대던 거칠것 없던 꿈의 소년이- 그렇게 늙어버린 것이다. 지구의 평화를 구하겠다던 소년은 가라오케 구석에서 철지난 팝송이나 부르며 스스로를 위안하는 것이다. 이거면 된 거다, 내 인생은 이걸로~!
켄지 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의 사정도 다 비슷하다. 조직사회에 길들여지며 꿈을 잊어버리고, 시대의 모순과 결탁하며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다들 그렇게 살아가며, 스스로를 위안하는 것이다. 그래, 이거면 된 것다, 내 인생은 이걸로~!
그리고-
어릴 적 그들이 꿈꾸었던 꿈의 기록들을 '아직' 잊지 않고 있는 자가 등장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잊어버렸니? 그걸로 된 거니? 너희들 인생은 그걸로? 그렇게 비웃듯이 물으며, 말한다.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놀아보자고! 켄지야, 놀자~
'친구'는 어린 시절 아이들의 꿈들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그대로 실현시키고자 한다. 너희들의 꿈이었잖아! 어째서 그것을 새까맣게 잊고 살아가는 거지? 그렇다고 한다면, 내가 기억나게 해주겠어! 거대 로봇이 세상을 파괴하고, 바이러스가 인류를 전멸시키게금 해 주겠어. 어때? 이제 기억나니? 지구의 평화를 지키겠노라고 부르짖던 너희들의 그 때 그 시절의 꿈들이?
꿈의 실현-
어째서 그것이 현실 공간에서는 그토록이나 끔찍하고 잔혹한 모습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릴 적 꿈을 깨끗이 접고 살아감이 마땅하단 말인가?
여기서 필자는 초두에 언급했던 순수한 판타지의 힘을 다시 얘기하고자 한다.
'순수한 판타지의 힘'이 사라진 시대다. 말 그대로다. 아이들의 꿈이 지켜질 수 없는 시대. 그것이 약속될 수 없는 땅. 그래서 포기해버리거나, 변질되어질 수밖에 없는 꿈-
지구의 평화를 지키겠노라는 아이들의 순수했던 꿈은 오늘날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까? 대통령? 국회의원? 종교?
20세기 소년은 곳곳에 세상이 얼마나 썩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부패한 정치인, 경찰관, 종교인들- 절대권력을 지닌 자들의 악행은 이 세상이 어떤 식으로든 절대로 '진실과 정의'가 숨쉴 수 없는 공간임을 피력하고 있다. 그 모순과 사악함의 실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가 바로 '친구'이다. 그래서 그는 '비록 변질될 수밖에 없었으나' 아직 간직하고 있던 '어릴 적 꿈'을 통해 세상의 정화를 꿈꾸고자 하는 것이다!
'친구'로 대변되는 두 인물- 그들이 어째서 그러한 '몬스터'가 되어버렸는지는 작품 내내 교차해서 보여지는 어릴 적 장면들의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몬스터의 요한처럼 그들 역시 어릴 적부터 '치명적인' 세상의 '독'을 경험하게 된다. 우라사와 나오키는 그러한 과정을 미묘하고도 절묘한 에피소드들을 통해 탁월한 심리적 해석을 선보인다. 진짜 '친구'와 그 친구의 복사본이라 할 수 있는 두번째 '친구' 그들의 어릴 적 삶의 과정과 주변인물들과의 상관관계, 스쳐지나가는 사건들, 그리고 기묘한 질투와 시기의 감정선~ 이런 치밀한 구조들을 통해 작가는 두 '친구'의 내면을 독자들에게 여과없이 보여준다. 그들이 어린 시절 입은 상처가 어떤 식으로 그들 내부를 피폐하게 만들었는지를!
결국 우라사와 나오키가 20세기 소년을 통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한 것은 이외수가 '벽오금학도'를 통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한 것과 같은 게 아닌가 싶다. 진정한 판타지의 힘이 살아 있는 시대를 그리워하는 것! 말하자면 진실과 정의가 온전히 살아 숨쉬는 사회에 대한 동경과 그런 것에 대한 경종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정말로 어렸을 때는, 무조건 착한 편이 되고자 한다. 하지만, 조금씩, 사회의 모순과 어둠의 본질을 알아나가면서 우리들은 나쁜 쪽에 길들여져간다. 그래서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이다. 착한 쪽이 되어라! 사실은 우리 모두 그것을 원하고 있다. 모두가 착한 사회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끊임없이 나쁜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 괴리는 무엇인가? 생각해보고, 답을 찾아내어라! 그것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작가의 메시지다!
때때로 살아가면서 우리들은 너무 어른스럽게만 살아가려한다는 생각이 든다. 아주 순수했던 어린시절을 떠올려보자. 그 시절에는 고민도 문제도 지금에비해 훨씬 적었다.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고민과 문제를 지나치게 고민적으로 문제적으로 바라본다. '행복해질 수 있는' 열쇠를 우리 안에서 쥐고 있음에도 그것을 애써 부정한다. '그런 것은 어른스럽지 못하잖아' 그러면서, 결국 아무 것도 해결 못할 고민과 문제에 스스로를 더욱 가혹하게 몰아간다.
가끔은 기억하자. 어린 아이의 미소를. 우리 안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을 순수했던 아이의 영혼을. 따지고 보면 우린 모두, 어른의 외투를 입고 어른스러운척 폼을 잡고 있는 '어린애들'에 불과한 것이다. 스스로가, 그리고 서로서로가 그 순수한 본질을 인정할때 우리는 정말로 어린아이로 되돌아갈 수 있으리라. 숨바꼭질에서 들킨 아이처럼, 이런 들켜버렸잖아, 그러면서 해맑게 웃을 수 있으리라.
-> 작품의 마지막 컷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일까? 어째서 고이즈미와 볼링이 등장한 것일까? 다시 오지 않을 볼링붐을 꿈꾸는 것은 바로 기적과도 같이 찾아올지도 모를 '판타지'의 향수에 대한 갈망이 아닌가 싶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작가의 목소리가 아닐까? 작가는 고이즈미라는 소녀를 통해, 불가능할 것 같은 '진실된 꿈'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행복하게 꿈꿀 수 있는 세상이라는 판타지를~! 그래서 고이즈미는 오늘도 열심히 스트라이크를 날린다~ 기적을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