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내가 책을 읽기 시작한 이래로 가장 책읽기가 부진했던 한 해가 아니었나 싶다.(훗날 그 이유를 잊을까봐 변명 겸 해서 몇 자 적어 본다면, 지난 3월부터 운동을 새로 시작한 게 가장 컸던 것 같다. 또 학교에서는 도저히 책을 읽을 수 없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올해 읽은 책을 꼽아보니 다음과 같다.(기준은 내가 알라딘에 가끔 올렸던 2011년 O월에 읽은 책,이라는 페이퍼이다.) 1월에 10권, 2~3월에 4권, 4월엔 4권, 5월엔 8권,  6월엔 12권, 7월엔 1권, 8~9월엔 8권, 10~12월엔 8권. 모두 합치니 겨우 55권이다.

 

   한 때는 해마다 거의 100권을 읽던 적도 있었는데, 펀드가 반토막 나는 것만 걱정할 게 아니라, 내 독서력이 절반으로 꺾이는 것도 함께 걱정해야 했던 것이다. 원래부터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나? 아무튼 나이 마흔에 벌써 이렇게 책읽기 능력이 쪼그라들면 앞으로 제대로 된 교사로 살기는 더욱 어렵다. 그러니, 독서는 취미이자 필수라고 할 수 있겠다.

 

   2011년 내가 읽은 책 중에서 최고의 책을 꼽는다면,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와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이다. 러시아의 스탈린 체제를 풍자한 소설 <동물동장>의 작가로만 알았던 조지 오웰의 진정한 면모를 보게 해 준 나는 왜 쓰는가, 를 읽고 그의 치열한 현실 인식을 존경하게 되었다. 이후 카탈로니아 찬가까지 따라 읽으며 신념을 실천하는 올곧은 한 사람을 알게 된 것 같아 무척 기뻤다.

 

   <닥치고 정치>는 논란이 많이 있겠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던 열망을 새롭게 불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이론가는, 골방에서 '가카 헌정 방송'이랍시고, 몇몇이 모여서 떠든다고 세상이 달라지냐고 비웃기도 했지만, 지금은 인터넷 팟캐스트 나꼼수가 현실 (정치)에 미치는 영향력을 무시하는 사람이야말로 외눈박이가 아닌가 싶다. 나에게도 나꼼수는 지난 초여름부터 일상이었고, <닥치고 정치>를 읽으며 회의적인 사람에서 조금은 더 조심스럽게 희망적인 사람으로 바뀌었다. [아까 오후에 이름이 저장되어 있지 않은 어떤 번호로 새해 덕담 문자가 왔는데 이렇다. "친구들 새해에 용처럼 승천하자^^ 행복하자고 빌지 말고 많이 만들자. 쫄지마, 씨바!"]이제, 씨바,는 전국민의 감탄사가 됐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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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1 08: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01 1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10월엔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았다. 그러다가 11월에 조금씩 기력이 나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 첫 시작은 아마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였을 것이다. 닥치고 정치는 유쾌하고 흥미로운 책이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무력감을 느낀 사람이라면, 읽고 무엇인가를 새로 시작해 보고 싶다는 욕망을 이끌어 낸다. 무엇보다도 모든 상황을 쉽게 설명하는 전달력은 최고,라고 말할 수 있다.

 

   종이책 읽기를 권함,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앞으로도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책인데 무엇보다도 책 한 권을 10년 정도 써 내려간 그 기간에 무척 놀랐다. 내용은 평범한 편인데, 책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그래도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다.

 

   나의 서양음악 순례,를 읽었다. 어? 미술이 아니라, 음악이네, 라고 갸웃하다가 서경식에 대한 든든한 믿음 때문에 얼른 사서 읽었다. 30년이 지났어도 그는 여전히 자기 정체성에 대해 고뇌하고 성찰하고 있었다. 한없이 우울하게만 전개될 수 있는 내용인데, 낙천적이고 유쾌한 그의 아내인 F가 등장해서 균형을 잡아준다. 음악에 대한 조예도 상당히 깊은 서경식 선생이 무척 부럽다. 나도 서양음악과 친해질 수 있을까?

 

   읽자마자 잊혀져버려도는 재미있는 시집(詩集)이다. 소시민적인 삶의 일상과 시인 주변의 가족들과의 관계가 오롯이 드러나 있어서 은밀한 일기장을 훔쳐보는 기분이다. 진지하지만 그리 무겁지 않고, 일상을 이야기하지만 수다스럽지 않은, 언제든 꺼내 읽으면 흐뭇하게 읽을 수 있는 시집이다. 

 

 

   

 

 

 

 

 

 

 

 

 

 

   교육불가능의 시대는 교사로서 다시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책이었다. 특히나, 오늘날 학교 교육의 불가능성에 대해 단언하는 글을 읽는 내내 마음이 쓰렸다. 폐허 위에서 새로운 모색이 필요하다는 제언에 쉽게 수긍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현실을 몸을 담그고 있을 때는, '답이 없다'는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원자력 신화로부터의 해방은 일본의 세계적인 반핵운동가 다카기 진자부로의 유언 같은 책이다. 원자력에 대한 거짓된 믿음인 신화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나로서는 거의 무지한 영역에 대한 책이라 흥미롭게 읽었다. 1월 중순에 1학년을 대상으로 독서토론 특강을 하게 되는데, 이 책을 부(副)텍스트로 골랐다. 원자력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은 다른 시각의 책과 함께 입문서로 읽어 볼만 한 책이다.

 

   김훈의 흑산은 김훈다운 소설이다. 한 페이지만 읽어도 김훈의 글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소설의 중심 인물로 순교한 정약종도, 배교한 정약용도, 아닌 그 둘 사이에서 고뇌하는 정약전을 택한 것도 그렇다. 김훈은 분명한 것에 대해선 태생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인데, 읽고 나면 좀 허무하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마음에 깊이 남은 그런 소설은 아니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박경철의 자기 혁명은 참 좋은 책이다. 인문학적인 감성도 풍부하고 청년들을 사랑하는 저자의 진정성이 가득 묻어나는 책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나는 이 책에는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어쩌면 자기개발서에 둔감한 탓도 있을 것이고, 이제는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이런 류의 책을 읽기에는 내가 나이를 먹은 탓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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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학교에 계신 어떤 선생님께 서경식의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권해드렸다.(타고 나기를 오지랖이 넓어서 그런지 남들한테 추천도 많이 하고, 간섭도 많이 하는 것 같다.) <나의 서양음악 순례>에 관심을 보이시길래, <서양미술>을 먼저 보시면, 서경식을 좀 아시게 될 것이라고 말씀드렸던 적이 있다.(물론 선생님께서는 이미 <소년의 눈물>을 읽어본 적이 있다고 하셨다.) 이후에 별 말씀이 없으시길래 잊으셨나 했더니, 오늘 "선생님은 서경식의 책이 왜 좋으신가요?" 라는 질문을 하셨다. 어제 밤에 서양미술 순례를 읽다가 소개된 그림도 잔인하고 징그러운데다가 글의 내용도 한없이 우울해서 읽고 나니 무섭고 마음이 착 가라앉아서 힘들었다고 하셨다.

 

   지난 1년 동안 같은 학년을 하면서 함께 애썼던 선생님께서 같이 점심을 먹자고 하셨다. 마침 오전에 저 말씀을 하신 선생님도 함께 하시기로 했다. 허름한 대구탕으로 점심을 먹으면서, 미술순례에 나오는 그림 이야기로 시작해서 고흐와 동생 테오 이야기, 서경식의 형들(서  승, 서준식) 이야기로 이어지고,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에 나오는 참고도서 목록 이야기로 건너갔다가, 방학 때 홀딱 빠져서 읽을 수 있는 장르소설 이야기도 잠깐 하고, 대하소설 ‘혼불’과 ‘토지’ 이야기도 곁다리로 끼였다가, 소설 갈래의 문체와 구성 이야기까지 흘러서 국어교사 셋이서 먹는 밥상이 제법 이야기거리로 풍성했다.

 

   점심을 먹고 와서 내 자리에 앉아서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또 바쁘게 학교 일을 하며 지냈다. 내일이 겨울방학식을 하는 날이라 이것저것 공문서 작성을 해서 마무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또, 겨울방학 때 독서토론 특강을 듣는 학생들에게 내 줄 과제도 만들었다. ‘원자력 시대, 앞으로도 가능할까?’라는 주제 아래 세 명의 교사가 각각 책읽기, 토론하기, 글쓰기 영역을 맡아서 특강을 진행하는데, 오늘까지 학생들이 책을 읽고 준비해야 할 과제를 미리 내주었다. (나는 책을 읽고 어떻게 내 생각을 정리할까, 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갈 생각인데, 이건 다른 페이퍼에 써야겠다.) 3시 50분부터는 도서실에서 김규항의 <예수전>으로 독서토론 동아리 모임도 했다.

 

   모임이 끝날 때쯤에 본가에서 급한 전화가 와서 허둥지둥 나섰다. 단독주택 4층인 본가는 언제나 썰렁하다 못해 냉기가 돈다. 집의 구조가 남향이 아닌데다가 난방비를 아끼기 위해서 보통 때는 전기장판만 사용하기 때문인데, 부모님의 성격상 아무리 돈이 있어도 방을 따뜻하게 데우는데 돈이 든다면 외투를 입고 지낼 것이다. 아무튼, 본가에서 저녁을 먹고 제법 늦게 집에 돌아왔다.

 

   결국, 점심을 먹고 나서는 아침에 있었던 서경식의 책 이야기는 까맣게 잊었다. 그러다가 습관처럼 컴퓨터를 켜고 알라딘에 들어와서야 선생님의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선생님은 서경식의 책이 왜 좋으신가요?" 그 때 한 마디라도 대답을 했으면 모르겠는데, 나 자신도 그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 할 수 없는 노릇인데, 한 번 떠오른 그 질문이 쉽게 잊히지 않아서 이렇게 내가 사서 읽은 서경식의 책을 쭉 펼쳐 놓았다.


 

 

 

 

 

 

 

 

 

 

 

 

 

 

 

 

 

 

 

    아마 7,8년 전쯤 나의 서양미술 순례에서 시작되었을 나의 서경식 읽기는 청춘의 사신, 고뇌의 원근법 등의 미술 분야 책으로 이어지고, 디아스포라 기행,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쁘리모 레비 등의 기행기나 인물의 행적을 기록한 책에도 관심이 커졌다.(특히, 쁘리모 레비를 읽고 나서는 마음이 먹먹해서 몇 번이나 리뷰를 쓰다가 끝내 완성할 수 없었다. 이 때만큼 내 글쓰기 능력이 참 보잘 것 없다고 생각했던 적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이후엔 조금 딱딱하게 느껴졌던 난민과 국민 사이와 고통과 기억의..도 있었고,  30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은 최근의 펴낸 서양음악 순례까지!


   내가 지금껏 본 서경식의 모든 책에서 나는 늘 ‘성찰하는 자세’를 읽는다. 방금, ‘읽는다’라고 했지만, 이건 글자로 써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글의 행간에 배어있는 어떤 분위기, 라고 말하는 게 옳다. 처음 서양미술 순례는 서양미술에 대한 일반적인 관심 때문에 읽게 되었는데, 정작 이 책에는 그림에 투영된 화자의 인식이 더 중요한 책이었다. 당시의 화자의 인식은 피지배자의 후예로서 과거의 식민지 지배국에서 소수로 살아가는 자신과 가족의 삶에 대한 정체성, 조국의 감옥 안에 있는 형들을 둔 아우로서 감당해야할 운명의 무게에 대한 성찰, 우리 민족의 감당해야 했던 고단한 삶의 흔적과 세계사에 대한 일반적 통찰 같은 것이었다.


   젊은 시절의 이런 인식은 이후 여러 방면으로 확산되는데, 첫째, 그림에 대한 관심과 그 그림을 둘러싼 사회 문화적 배경을 더 깊이 이해하려는 ‘청춘의 사신’, ‘고뇌의 원근법’ 등으로 이어진다. 둘째, 모국어를 잃어버리고 옛 지배국의 언어로 자기 생각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의 아이러니를 ‘소년의 눈물’이라는 책으로 나타내었다. 셋째,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 온 이후 그 사실을 믿지 않으려던 전 세계에 대해 ‘이것이 인간인가’ 같은 책을 통해 증언해 온 유태인 쁘리모 레비에 대한 동질감과 현대 일본의 과거 부정에 대한 암울한 전망을 내비치고 있기도 하다. 넷째, 그 자신이 ‘디아스포라’로서 자기 정체성에 대한 근원적인 탐구로 이어지고 있는, ‘디아스포라 기행’이나 ‘난민과 국민 사이’를 들 수 있다. 이 모든 책들이 내 머릿속에 새로운 개념을 만들었거나, 내 생각의 지평을 넓혀준 책이다.


   어릴 때는 잘 몰랐는데, 살아보니 어떤 문제의 원인은 대부분 나로부터 비롯되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 문제의 원인을 내 안에 있는 것으로 인정하는 일은 무척 고통스럽다. 그래서 늘 바깥에서 원인을 찾으려고 발버둥 쳤다. 시간이 지날수록 문제는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결국 내 안에 깊이 침잠해서야 문제의 원인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그 때쯤해서야 서서히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곤 했다. 그래서 나는 경험으로 ‘성찰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걸 안다.(이것을 실천하고 있느냐 하는 것은 또 다른 능력의 문제지만) 서경식의 책은 나에게 늘 자기를 들여다보는 자세를 일깨운다. 그런 자세는 자기정체성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지고, 또한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모색을 해 볼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준다.

 

   나야 이름 없는 평범한 교사로 살아갈 뿐인지라 서경식의 엄정함과 예리함을 따라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의 자세만은 오롯이 닮고 싶다. 이것이 내가 서경식을 읽는 이유라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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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도 비담임이었다. 그래서 학교에 남아서 무슨 일을 해야할 날이 거의 없었다. 일과 후에 하게 되는 보충수업 정도가 6시 반에 끝나는 날이 일주일에 두세 번이라 그 때만 늦게(?) 퇴근했다. 사실, 잠깐잠깐 학교에 남아서 시간외 근무를 하기도 했는데, 그건 시간외 근무라고 하기엔 살짝 민망한 수준이었다.(이 글 보시는 여러 직장인 알라디너님들 화내시겠다.)

 

   사실, 올해 악착 같이 시간외 근무를 안 해야겠다고 다짐-이상하지, 남들은 다들 악착 같이 시간외 근무를 하려고 난리인데-을 하게 된 데는 나름 이유가 있다. 바로 올해 1월 슬그머니 우리 학교에 도입된 지문인식기 때문이다. 초과 근무 부당 수령 사례를 줄이기 위해서 그동안 수기로 적던 초과근무대장을 없애고 개인별 지문을 등록해서 시간외 근무를 하고 퇴근할 때 인식기에 자기 지문을 찍어서 초과시간을 확인하는 시스템이다.

 

   지문인식기 도입의 취지가 업무 경감이라는 교육청 공문이 오자마자 학교는 득달같이 지문인식기를 사들이고 새 제도를 시행했다. 그 과정에서 교사들에게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도 없었고, 지문인식 제도의 주요 문제점인, 인권 침해 여부에 대한 논란도 아무런 문제 제기 없이 정착되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대응방식으로는 엉뚱하지만- 일단 지문 등록을 안 하기로 했다.(당연히 등록을 안 하면, 시간외 근무를 기록할 수 없다. 그러니 아직까지 올해 시간외 근무를 한 번도 안 한 걸로 기록되어 있다.)

 

   사실, 학생들과 함께하는 독서동아리 활동은 저녁 9시까지 하는 것이라 시간외 근무인 것이 맞지만 그냥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일이라고 생각 안 하고 지금껏 그냥 넘겼다. 이제 그것도 두세 번이면 끝나니까 홀가분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내가 1년에 꼭 한 번, 야근을 피할 수 없는 날이 있다. 바로 졸업/진급사정회 전날이다. 각 반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사정 자료를 받아서 취합하고 정리해서 다음날 사정회의가 열릴 수 있게 문서를 만드는 게 한나절 안에 다 이뤄져야 한다. 그것도 순조롭게 끝나야 한나절인데, 한 분이라도 늦게 내면 작업에 차질이 빚어진다. (생각해 보니, 작년에도 10시까지 자료를 다 만들고, 혼자 인쇄기를 돌려서 인쇄하고 여러 장을 박음쇄로 묶었던 기억이 새롭다.)

 

    올해는 그날마저도 야근을 안 하기 위해서 졸업생 자료는 지난 금요일에 90%는 정리해뒀고, 오늘 아침에 가볍게 졸업생 사정자료는 다 만들어서 담임선생님들의 확인 작업을 거쳤는데, 그런데, 딱, 그렇게 하고 나니 갑자기 모니터에 블루스크린이 뜨더니 껐다 켜도 컴퓨터가 먹통이다. 전산보조 선생님이 출근하는 날인데,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고, 선생님들께 받아놓은 자료는 쪽지로 50건이 넘는데 작업을 할 수가 없었다.

 

   급한 마음에 집에서 노트북을 가져와 작업을 하려고-야근 안 하려고- 집에서 노트북을 챙겨 다시 학교로 갔다. 그러니까 전산보조 선생님이 컴퓨터를 고치고 계신데, 결론은 윈도우를 새로 깔아야 한다는 것! 교감샘은 당장 새걸로 교체하라고 하시지만, 윈도우를 새로 까는 것이 시간이 조금 덜 걸린다고 해서 일단 수리부터 하기로 했다. 그래서 가져갔던 컴퓨터가 다시 돌아온 게 2시 20분이었다.

 

   오늘은 내년도 노조 분회장을 누구로 세울까 고민하는 사람들이 만든 점심 약속이 있었고, 2시 40분부터는 수업이 한 시간 있었고, 수업을 하고 나온 후에는 <교원능력개발평가> 때문에 좀 문제가 있어서 그 일에 잠깐 끼였다가 다시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갔다 왔다. 회의가 끝나서 내 자리에 앉으니까 그 때가 4시 30분이었다. (이 때가 공식적으로 근무시간이 끝나는 시간이다. 이 때 퇴근하는 경우는 잘 없지만!) 선생님들이 보내서 내가 안 읽은 쪽지만 다시 50건이 넘었다. 이 쪽지들을 하나하나 확인해서 자료를 입력하고 정리하는 게 오늘 내가 할 일이다.(보통 일과 중에 끝나면, 인쇄물을 맡기면 되지만, 일과 후에는 할 수 없이 내가 해야 한다.) 그 많은 쪽지 중에도 아직 자료를 안 내신 선생님도 서너 분이시다. 찾아가서 자료를 보내주십사 하고 말씀을 드리고 내려왔다.

 

   5시가 좀 넘어서 작업을 시작한다. 학교 일이 대부분 그렇듯 어렵고 복잡하지는 않은 일이다. 그저 시간만 많이 투자하고, 덜렁거리지만 않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2학년 1반부터 시작해서 2학년 11반까지 하는데 1시간 반이 걸렸다. 다른 사람은 다 저녁을 먹으러 가는데, 난 기분도 그렇고 기운도 없어서 그냥 하던 일이나 계속한다. 거의 8시가 다 돼서야 자료 취합 및 정리가 끝났다. 모니터로 보는 건 안심이 안 돼서 출력물을 뽑아서 오류가 없는지 확인한다. 자기가 만든 자료는 자기 눈으로 오류를 찾기가 쉽지 않다.

 

   행정실에서 가서 열쇠를 받아 인쇄실 문을 연다. 냉기가 훅 끼친다. 인쇄기를 다뤄 본 적이 있었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할 수 있을 것 같다. 인쇄기가 말썽을 부리지 않아야 할 텐데...... 여러 번 실패하고 인쇄를 했더니 벌써 시간이 8시 반이다. 이제 이 종이들을 분류해서 각자가 볼 수 있도록 묶으면 할 일이 끝난다. 내일이 학예전이라 교실 곳곳에서 연습 중인 아이들에게 도움을 청했더니 흔쾌히 도와준다. 이것으로 내일 오전에 돌릴 사정회의 자료가 완성되었다. 딱 8시 56분이다. 동아리 모임을 하고 나면 9시 반에 학교를 나설 때도 많은데, 오늘은 유난히 더 늦은 것 같아 마음이 춥고 바쁘다. 학교의 담임선생님들은 9시, 10시에 퇴근하는 게 일상인데, 나만 이렇게 늦게 간다고 투덜되는 꼴이 좀 우습기도 하다. (하긴 나도 담임할 땐 거의 매일 10시에 퇴근했었지.)


   내년에 담임을 하겠다고 써냈다. 거의 70명에 가까운 교사들 중에 채 20명도 안 써 내는 담임희망에 O를 쳤다. 교감선생님께서는 한 해 더 담임을 하지 말고, 업무(?)를 맡아달라고 하셨지만, 오늘 나는 웃으면서 "저는 아이들이 좋아요. 담임이 하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말은 진심이었을까, 싶지만-솔직히 반만 진심인 것 같다- 온전히 거짓말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그런데 오늘 찬바람이 쌩쌩 부는 늦은 밤, 학교에서 시간외 근무를 하고 보니 내년에 펼쳐질 시간들이 눈 앞에 선명하게 그려져서 마음이 착잡하다. (그렇지만, 담임을 하겠다고 나선 걸 후회할 정도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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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부터 20분 동안 더 썼는데 를 누르는 바람에 내용이 다 지워져 버렸다. (가끔 있는 일이긴 한데 이럴 땐 좀 허탈하다.) 자동저장 기능을 확인해 보니, 본문저장 시간이 1분 단위인데, 12시 57분에 지웠는데 왜 12시 38분까지의 내용만 임시로 저장이 되어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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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여튼 일은 9시 쯤에 다 끝냈다는 내용이고, 내년에 담임을 희망했다는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썼었다. 담임하면 이깟 야근이야 일상이고 아무 것도 아닌데, 오늘은 왜 야근 한 번 한 것 가지고 이렇게 생색을 내느냐? 아마,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그런 것일 거다. 가끔 다른 사람의 속마음이 너무 빤히 읽히는 그런 날이 있지 않느냐? 나는 가끔 그런 날이면 슬프다. 그런 날이 잦은 요즘이다.

 

   ......뭐 이른 내용을 썼는데 지워졌으니 할 수 없는 거다. 이제 잘 시간, 지났네. 이번 달에도 중간에 수영을 그만둬야 하는가? 쩝, 참, 수영 배우기 어렵다. (언제쯤 물에는 뜰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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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11-12-27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곧 방학이시잖아요 ㅎ)
느티나무 님네 복이도 많이 자랐죠?

느티나무 2011-12-27 15:28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저는 일하는 것도 좋아하고, 일이 많다고 툴툴대는 게 아닌데요. 그냥 요즘은 맘 쓰이는 일이 좀 있어서, 밤 늦게 학교 밖을 나서는데 갑자기 찬바람이 세게 불어서 그랬답니다.

2011-12-27 14: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27 15: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예수전은 읽고 계신가? 방금 전 단체문자를 보내고, 이 글을 쓴다. 벌써 이 주가 지났는데, 감기가 나를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콧물로 시작되어 근육통을 거쳐 이젠 기침이다. 언제쯤 몸이 좋아지려나 하고 기다리면서도, 평소엔 내가 내 몸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살짝 들기도 한다. 겨울 방학엔 다른 일 하지 않고 푹 쉬어야겠다.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고 모인 지난 모임을 어떻게 평가하나? 생활나누기를 할 때는 아직도 우리 사이의 간극이 무척 넓구나, 우린 참 서로가 닿을 수 있는 지점에서 각자 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좀 답답하더군. 책 읽은 느낌을 말할 때도 약간 겉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 좀 아쉽더군. 그러다 친구들 숙제를 펼쳐 읽을 때쯤 되어서야 아, 우린 같은 곳을 걸어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안도감이 들었다. 지난 1년을 되돌아보면 네가 걸어온 발자국 옆 언저리에 무수하게 많은 친구들의 발자국을 발견할 수 있을 거다. 왜냐면 우린 생각보다 오래 같은 길을 걸어왔거든.

 

   이번 모임의 생활나누기는, 조금 특별한 활동을 해 보기로 했지? 친구들을 (심층) 인터뷰 해 보는 건데, 주제는 당신의 밤이 알고 싶다, 이다. 친구들의 사생활을 캐는(?) 건데 평소 학교 다니고 있을 때 집에 가서 주로 하는 일, 자는 시간, 다음날과의 관계…… 등 집에 간 이후 잠들기 전까지의 모든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받아와서 얘기해 보는 거지. (물론 사생활 침해의 우려가 있기 때문에 발표할 때는 이니셜만 말해야겠지?)난 항상 학교에서 시체처럼 자는 아이들의 밤 생활(?)이 궁금했거든. 주로 낮에는 잠들어 있는 친구들을 중심으로 인터뷰를 정리해 오면 좋겠다. 꼭, 평소의 밤이 아니어도, 주말 저녁도 괜찮고, 야자를 안 하는 학생의 생활도 괜찮다. 대신, 좀 깊이 있는 얘기를 끌어내주면 좋겠다. 그냥 학원 갔다 와서 몇 시에 잔다, 끝! 이런 거 말고, 왜, 라는 질문을 계속 던져서 친구가 자기 속마음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해야겠지? 아무튼 기대해 볼게.

 

   이번에 읽을 책이 예수전이라고 하니까 너희들의 표정이 떨떠름하더라. 우리 동아리 친구들 중에는 기독교(개신교, 천주교, 성공회, 그리스정교회 등)를 믿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가? 아무튼 표정이 내가 마치 전도(傳道)를 하려는 건 아닌지 의심하는 분위기더라. 아마 인류 전체의 역사를 다 훑어본다면 예수만큼 사람들에게 오해받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 같다. 너희들의 첫 번째 반응이 바로 예수라는 인물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지. 보(믿)는 사람에 따라 예수를 신으로 믿기도 하고, 역사적 실존인물로 이해하기도 한단다.

 

   그러니 이 책을 읽고 김규항이라는 사람이 본 예수는 또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잘 생각해 오렴. 그래서 내가 막연히 알고 있던 예수와 책을 읽고 나서 알게 된 예수는 어떻게 달라졌는지에 대해서도 글을 써 오시라.(꼭 써 오렴) 아, 그리고 이왕에 인터뷰하기로 했던 거 이런 것도 함께 해 보면 좋을 것 같다. 주변의 친구들에게 <당신이 알고 있는 예수는 어떤 존재(사람, 신)인가요?><또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나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이런 질문을 기본으로 해서 인터뷰해 오기. 음, 그렇게 하려면 빨리 이 책을 읽고 예수의 생애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이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 모임이 다음 주 수요일(28일)이라는 사실은 다들 잊지 않았겠지? 장소는 도서실. 다른 특강이 다 끝났으니 모임 시간은 7-9교시로 할게. 겨울캠프 가는 것도 그 때 의논해 보자.


  * 이건 사족 같은 이야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성탄절 즈음에는, 이 땅에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러 오신 분이시기에 더욱 더 아기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의미를 되새겨보게 됩니다. 모든 이들에게 즐겁고 기쁜 '크리스마스'도 좋지만,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는 '예수의 탄생'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라는 카드를 썼다. 내 마음속에도 예수라는 존재가 오래전부터 살고 있는 듯하다. 감사한 일이다.

 

-2011.12.24, 겨울 느티나무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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