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오늘의 교육 잡지를 받았다. 보내 주신다는 기자님의 메시지는 받았지만, 정작 받고 니 더욱 기분이 좋다. <오늘의 교육>은 현직 교사들이 협동조합 형태로 꾸린 교육공동체 벗, 이라는 단체에서 발행하는 격월간 잡지이다. 그런데 이번 호를 받고 보니, 평소에 보던 <잡지> 답지 않고, 책 같다.(참고로 개인 정기 구독은 받지 않는다고 한다. 조합원으로 가입하고 활동해야 잡지와 회지를 정기적으로 받아볼 수 있단다.)

 

   이번호 특집은 교육 불가능 시대, 교사는 가능한가,라는 주제이다. 작년에 지금까지 발행했던 이 잡지글을 묶어 펴낸 책의 제목이 '교육 불가능의 시대' 였으니 그 연장선상에서 '교사는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여러 선생님들께 던지는 듯 하다. 핵심은, 지금은 교육 불가능의 시대이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교육 방식-'방식'이라는 말 속에는 지금껏 교육이라고 말할 때 떠올릴 수 있는 모든 개념들-은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걸 인정하고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반어적인 인식이 드러나 있는 것 같다. 

 

 

   앞으로 잡지는 차차 더 읽어봐야할 것 같고, 기획 기사로 <교육 불가능의 시대>라는 책에 대한 현장 교사들의 반응을 다룬 리뷰 두 편이 실려 있다. 그 중에 한 편, 길은 여기 있다, 라는 글이 얼마 전에 내가 쓴 글이다. 지면의 한계 탓에 앞부분의 내용이 좀 잘려나가 아쉽기는 했지만, 어쨌든 인쇄되어 나온 내 이름과 책을 가만히 들여다 보는 일은 기쁜 일이다. (사실, 글의 내용이야 한없이 초라한 수준인데다가, 또 혹시 그걸 읽는 사람들이 전부 교사들이라는 생각이 들면 정말 부끄러울 따름이다.) 부끄럽다면서 또 이렇게 알라딘에 떡 하니, 자랑질을 하는 걸 보니, 참말로 사람이 아직 덜 여물었다.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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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 이틀 동안에 도가니를 읽었다. 책은 제목과 저자만 알고 있었고, 이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가 폭발적인 흥행에 힘입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몰고 온 정도는 이미 알고 있다. 물론 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도. 그 사실이 독자들과 관객들을 분노케 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도가니를 읽을 생각은 여태껏 못 했다. 그러다가 대학병원 한 귀퉁이의 가판대에 놓인 도가니를 보고 망설이다가 집어 들었다.(가판대 앞에는 30~70% 할인이라는 광고가 큼지막하게 붙어 있었으나, 정작 계산할 때는 '신간'은 제외라는 말을 들어야했다. 어쩔까 하다가 이왕 집어든 거 '달려라 정봉주'와 함께 사들고 왔다.)

 

   굳이 리뷰를 쓸 생각은 없었으나 다른 사람들은 '도가니'를 어떻게 읽었나 싶어서 알라딘 리뷰를 눌렀는데, 리뷰가 무려 625개였다.(2012년 1월 20일 기준) 베스트셀러를 꼭 찾아서 읽는 편이 아닌 지라, 아마 지금까지 내가 읽은 책 가운데 가장 리뷰가 많이 달린 책일 것 같았다. '와, 리뷰가 엄청 여러 개 달렸네! 사람들은 이 책을 읽고 할 말이 많았나 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차례차례 리뷰를 읽어 보는데, 아쉽게도 내가 느낀 어떤 감정과 비슷한 내용은 찾을 수가 없었다. (보통은 리뷰를 쓰기 전에 다른 사람은 어떻게 썼나, 싶어서 리뷰를 읽어 보고, 내 맘에 드는 리뷰가 있으면 추천하고 나는 글을 안 쓴다. 훌륭한-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리뷰가 있는데, 굳이 내 글까지 덧붙여서 사족을 만들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이 리뷰는 제목처럼 작품의 훌륭함에 대한 칭찬이 아니라, 책의 내용에 대한 아쉬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쓴다. 알라딘에 올라와 있는 엄청난 칭찬 일색의 리뷰를 보면서 '어, 난 좀 아쉬웠는데...'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의 이 아쉬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뭔가 아쉬움은 있는데 아직 그건 지금까지도 잘 모르겠다. 뭐 어떻게든 쓰다 보면 조금은 그 실체를 드러낼 수도 있겠지!

 

   내가 읽은 공지영 작가의 전작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었다. 나는 '우행시'를 읽고는 작가가 좀 더 용감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책도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우리 사회에 사형제도에 대한 반대 주장을 폭발시켰다. 그야 책을 읽었으면 당연한 생각의 수순이 아닌가 싶었다. 법원의 판결로 사형수로 확정된 사람이 살인범이 아니라는 소설의 결말은 독자들에게 사형제에 대한 반대 논리를 의심 없이 전파시킨다. 이 책을 읽은 사람은 사형제에 대해서 회의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소설의 결론을 윤수가 살인범이라는 것으로 처리했다면 어땠을까? 윤수는 살인범이지만, 그도 여느 인간처럼 자신의 지난 잘못을 후회하고 뉘우치고 있으며, 다시 한 번 살고 싶다는 욕망을 지닌 존재이며, 사랑하고 사랑받는 어떤 한 인간으로 그려졌다면 어떤 반향을 불러왔을까? 만약에 그랬다면 독자들은 사형제에 대해 반대 논리를 의심 없이 받아들였을까? 아마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잔인하게 사람을 죽였잖아', '살인자를 똑같이 국가가 살인(사형)하는 건 야만적이야'라는 찬반 논란이 조금 더 거세게 일어났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작가는 조금 더 안전한 선택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아니라면 소설을 자신의 사형제 반대에 대한 신념을 사회적으로 확산시키는 수단으로 삼았을 수도 있겠다. 그런 태도가 좋은 사람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좀 아쉽다. 나에게 소설(책)은 내 인식의 틀의 경계를 넘나들며 '고민'하고 '갈등'하게 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내가 분명하게 본 것을 오히려 흐릿하게 만들어 보여 주는 것, 그게 소설을 읽는 이유다. 당연한 주장은 내 마음이 편안하게 하지만, 내 생각을 확장시켜 주지는 않는다.

  

   도가니를 읽은 리뷰랍시고 어줍잖은 글을 끄적거리면서 '우행시' 이야기만 냅다 하는 게 좀 이상하긴 해서 이제 책 이야기를 좀 해 볼까 한다. 여러 사람들의 찬사와는 달리 나는 도가니를 읽는 내내 좀체로 감정이입이 좀 안 됐다. 물론 독자를 소설의 상황에 끌어당기는 흥미진진한 내용과 이를 속도감 있게 펼쳐나가는 전개 솜씨야 이미 정평이 난 데로 훌륭했지만, 나는 소설의 인물들에게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읽으면 읽을 수록 점점 더 소설의 인물들 감정선 밖으로 밀려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 소설의 상황에서 자꾸 격리되는 듯 했다.(희곡에서 말하는 '소격 효과'라는 것인가?) 소설을 읽으면서 '어쩜 이럴 수가 있지? 와, 미치겠다, 어떻게 이런 나쁜 놈들이...' 이런 '감정'이 드는 것이 아니라, '음, 화가 낫겠네. 세상엔 이런 나쁜 놈도 있겠지? 기득권자들의 행태가 원래 저렇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면 왜 나는 몰입이 아니라, 격리되는 느낌이 들었을까?(그것도 제목이 도가니인데...) 위에 썼던 그런 '감정'이 아니라,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일까? 아마도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캐릭터' 때문인 것 같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은 명확하게 선과 악의 두 편으로 갈라져 있다. 나쁜 놈들에게는 근원적인 악의 야비함과 야만성'만'이 드러나 있고, 정의로운 자의 편에는 진실과 정의에 헌신하는 희생적인 면모만 드러나 있다.(강인호는 예외라고 할 수 있는가? 내가 볼 때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도 온갖 개인적인 불안과 어려움을 무릎쓰고 용감하게 진실을 추구하는 편에 뛰어들었으니까 말이다.) 나는 이런 사실이 불편하다.

 

   물론 이런 반론도 가능하다. 이 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최대한 사실에 근접한 내용으로 구성했던 것 뿐이라고. 또,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그 '상식... 그런 게 없는, 말도 안 되는' 일도 많이 일어난다고. 실제 사회에서 나쁜 놈들은 정말 소설에 묘사된 것보다 더 야비하고 파렴치한 짓을 일삼는 자들이라고. 그러니 소설은 단지 그 실체적 진실을 보여주려고 했을 뿐인데, 인물의 성격이 선과 악이 분명해서 불편하다느니 이런 투정(?)은 너무 한가한 소리라는 타박도 가능하다.

 

   그런데 이 소설이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며 검찰에 고발하겠다는 모 정당의 정치가를 소설에 대한 최소한의 개념도 없는 사람이라고 비웃는 게 당연하다면, 소설이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한편으로는, 소설가가 일부러 현실 그대로의 모습을 소설에서 묘사했을 수도 있다. 우리 사회에 얼마나 나쁜 놈들이 있는(많은)지, 그들이 어떻게 기득권을 유지해 나가는지, 그들의 연결시키는 사회적 고리들의 참모습은 또 어떤지를 보여주기 위한 의도일 수도 있다. 

 

   자, 여기서 나는 이 소설이 다시 '우행시'의 결론과 묘하게 겹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독자들에게 사형제의 찬반에 대해서 조금 더 정공법-윤수가 살인범이라는 결말로-으로 물어봤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던 것처럼, 가해자들과 그들의 편에 선 자들에게서 보이는 '어쩔 수 없음'을 들여다 보거나, 피해자들과 그들의 편에 선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어쩔 수 없음'도 함께 나타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어떤 상황에서도 정의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은 아름다워서 경외감이 들게 하지만 그만큼 독자의 고민의 영역을 줄인다. 반대로 오로지 악마의 화신 같은 모습은 추악해서 분노케하지만 그 감정은 즉자적이다.(물론 이 즉자적인 분노가 한국 사회 특유의 역동성과 결합해서 이번에는 바람직한 결과(?)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소설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무감각한 상황을 고민하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 점에서 비춰보면 도가니는 조금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공지영 작가의 현실 인식이나 거침 없는 소신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 마땅하지만, 꼭 소설의 주제까지 그래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더구나 읽는 이들에게 별다른 고민의 여백을 남겨두지 않는 구성이라면 더욱 그렇다.

 

   도가니라는 소설과 영화가 이끌어 낸 현실의 변화를 보면서 새삼 문학(예술)의 힘을 느꼈다. 이를 이끌어 낸 소설가의 집념과 노력에 존경을 보내고 있다.(그래서 책 샀다.) 그것은 그것대로 훌륭한 일이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나에게는 조금 아쉬움이 남는 그런 소설이다.

 

*사족* 원래 재미 있게 잘 읽히는 소설인데, 도가니에 대한 칭찬은 다른 리뷰어들이 무척 많이 해 놓았길래, 나는 그냥 이렇게 느끼는 사람도 있었다, 것을 알리는 정도로 쓰려고 했는데, 쓰다 보니 조금 더 나간 점도 있는 것 같다. 워낙 재주가 없으니 할 수 없는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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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22 19: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22 2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열매 2012-01-23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느티나무 님~~새해복 많이 받으세요..^0^ 새해 첫 손님이에요. 선물 없어요??ㅋㅋ

느티나무 2012-01-23 02:19   좋아요 0 | URL
조금 특별한 방학이지요? 인생에서 이런 좋은 시간들이 다시 올까요?ㅋㅋ 멋진 시간, 행복한 기억 많이 만들길 바래요...선물? 음, 다음에 학교에 오면 이모 친구랑 같이 제 자리로 찾아 오세요. 선물 줄게요.
 
장미의 이름 - The Name of the Ros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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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권력과 웃음의 상관성>

 

   승리의 2012년을 시작한 지 열흘 째! 몸은 감기로 계속 고생중이지만, 초저녁에 잠깐씩 들었다가 깨는 잠 때문에 한밤 중에도 깨어있는 일이 요즘 잦다. 책을 읽기도 하지만, 그것도 시들해지는 날이면 가끔 '다음'에서 영화를 다운받아 보게 된다. <루키>라는 영화를 보려고 했으나 다운로드 목록에 없어서 결국 고른 영화가 <장미의 이름>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예전에 읽었지만, 내가 예전에 읽어 온 책이 대부분 그랬듯이  스릴러 넘치는 소설이었다는 정도만 머릿속에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영화를 보다 보니까 조금씩 줄거리가 기억이 떠올랐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이 수도원 수사들의 죽음의 원인을 알아 낸 윌리엄 수사와 호르헤 수사와의 논쟁이었다. 호르헤 수사는 수도원의 장서관에 보관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 2편'에 관심을 보이는 수도사들을 죽인다. '시학 제 2편'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에 대한 이야기인데, 호르헤 수사는 종교(기독교)는 인간의 두려운 마음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데, 바로 웃음이 그 인간의 두려움을 없애주기 떄문에 이 책을 읽었던, 또는, 읽으려던 수사를 죽이는 것이다. 웃음은 종교(권력)의 가장 큰 적으로 생각했다. 결국 호르헤 수사는 장서관에 불을 지르고 수많은 책들과 함께 죽음을 선택한다. 

 

   이 장면의 대사를 듣는 순간 번개 같이 머릿속에 떠오른 한 구절은 한나 아렌트가 했던 "권위의 가장 큰 적은 경멸이며, 권위를 훼손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웃음이다." 라는 말이다. 확실히 웃음에는 두려움을 없애는 극복하는 에너지가 있다. 또한 웃음의 전파력은 강력한 것이라 현실의 권력은 웃음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이를 증명하는 실례가 바로 나는 꼼수다(이하 '나꼼수')가 아닐까? 

 

   사람들이 나꼼수에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나꼼수가 전달하고 있는 내용이 거대 보수 언론이 외면하던 사실인 까닭도 있지만, 그런 메시지를 전달하는 태도나 방식에 있다. 이들은 현실과 소설-합리적 추론-의 영역을 넘나들지만, 언제나 메시지를 전달하는 태도는 거침 없이 당당하다. 소위 말해서 '쫄지 않는다'. 여기에 적절한 타이밍에 웃음이 더해지면, 뭔가 조마조마하던 청취자도 그 순간 어느새 권력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다. 그러면서 스스로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눅들어 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결국 나꼼수의 힘은, 이 웃음에 있다. 이 나꼼수의 웃음은 이제 공공연히 전파되어 사람들이 더 이상 권력의 눈치를 안 보게 되었다. 나꼼수의 웃음이 사람들에게서 두려움을 없애버린 것이다. '쫄지마, 씨바',는 이제 내 친구가 새해 문자 메시지로 보내기도 하는 상황이 되었다. 답장으로, '그래 씨바!'로 답장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승리의 2012년'을 기대하고 있다. (1년 전을 생각해 보면 정말 상전벽해가 아닌가 싶다.) 이 모든 게 가카 때문이 아니라, 그 웃음 때문이다. 2012년 말에, 웃음이 우리를 승리로 이끌었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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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2012-01-18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이페이퍼에 썼던 글이지만, 리뷰로 옮기는 게 안 돼서 다시 똑같은 글을 리뷰로 옮겼다.ㅠ책이든 영화든 종류를 가리지 않는 잡식성이 되어 가는 걸까?ㅋ

2012-01-19 16: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얼간이 - 인도판
라지쿠마르 히라니 감독, 마드하반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네 재능을 좇아가면 성공이 따라온다>

 

   방금 세 얼간이라는 발리우드 영화를 봤다. 작년에 이 영화 보고 좋았다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 꽤 있었으나, 정작 나는 영화에 그다지 취미가 없는지라 건성으로 '기회가 되면 봐야지'하는 생각만 했었다. 그러다가 책읽기가 가끔씩 지겨워지는 요즘, 저녁에 컴퓨터로 내려 받아서 볼 만한 영화가 없나 궁리를 하고 있었는데, 또 누가 '세 얼간이'를 말했다.


   '강추'를 받고도 당장 영화를 보지 못했던 이유는 개인적으로 며칠 동안 이런저런 일이 있기도 했었지만, 인도 영화에 대한 나의 선입견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내 또래의 사람들은 많이 알고 있을 텐데 1990년대 중반이었나 우리나라 극장에 거의 처음으로 인도영화가 소개된 적이 있었다. 제목은 '춤추는 무뚜'. 줄거리는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상영시간 내내 끊임없이 (인도스러운(?)) 흥겨운 춤과 노래, 과장된 대사와 몸짓이 이어졌다. 이 때문에 이 영화가 재미있다는 사람도 많았으나, 나로서는 낯설다는 느낌 이외에는 헛웃음을 터트리게 하는 내용 전개 때문에 실망만 했던 기억이 있다. 이후 인도 영화라고 하면 이 '춤추는 무뚜' 이미지가 떠올라 인도 영화는 뭔가 줄거리는 엉성하고, 내용 전개가 과장된 영화가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그래도 아무튼 ‘강추’하는 사람 덕분에 세 얼간이를 보았다.


   우려와는 달리 세 얼간이는 무척 재미있었다. 물론, 세 얼간이에도 인도 영화 특유의 흥겨운 춤과 노래가 이어지고 이야기는 과장된 전개가 계속되니, 이에 따라 낭만적인 해피엔딩의 결론도 당연한 듯 했지만, 영화 '세 얼간이'의 주요 배경이 되는 인도 대학(의 현실은 우리나라의 문제와 비슷한 점도 참 많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공대(ICE)의 학장에게 대학을 '공장'처럼 운영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주인공 '란차다스(이하 란초)'의 항의는 마치 우리나라의 (대학) 교육의 현실을 두고도 할 수 있는 말인 것 같아서 아무 생각 없이 흥겨운 장면에 몰입하다가도 마냥 웃고 있을 수만은 없는, 나에게는 소위 말하는 개념 찬-게다가 재밌기까지 한- 영화가 되었다.


   영화는 대학 시절 늘 어울려 다녔으나, 졸업 후에 어디론가 사라져서 지금껏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란초'라는 친구가 만나러 가면서 그를 회상하는 줄거리이다. 란초가 있는 곳을 알아냈다는 연락을 받은 '파르한'과 '라주'는 '란초'가 있는 곳을 찾아간다. 이후 이들은 란초와 함께 보낸 대학 시절을 하나하나 떠올리게 된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란초와 파르한, 라주는 한 방을 쓰게 되면서 금세 친해진다. 이들이 세 얼간이들이다.


   치열한 입시 경쟁을 뚫고 사회적으로 성공하기 위해 인도의 명문 대학에 들어온 신입생들은 대학의 불합리한 기존 체제에 순응하는데 별다른 이의가 없지만, 오로지 공부하는 것이 좋아서 대학에 들어온 '란초'는 이 불합리한 체제를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다. 또한 지적 성취를 위해 공부를 하는 태도와 사회적 성공보다는 자기 재능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란초'의 생각은,  '란초'와 어울리는 두 친구에게 조금씩 영향을 준다. 결국 아버지의 반대로 사진작가의 꿈을 접었던 파르한은 '란초'의 도움으로 사진작가가 되고, 가난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라주'는 '란초'의 영향과 도움으로 무사히 대학을 졸업하게 되고, 또 정직하고 당당한 태도로 면접시험을 보고 나서 원하는 회사에 취업을 했다.


   이들은 여러 우여곡절 끝에 이들은 란초가 있는 곳을 찾아갔는데, 란초는 어느 시골에서 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대학 시절의 란초를 떠올린 이들은 재능을 좇아 큰 성공을 거둘 것 같았던 란초가 초라한 시골의 초등학교의 교사로 살아가는 것이 의아했지만, 사실 란초는 본명이 푼스크 왕두라는 이름의 유명한 공학자- 특허가 400개나 되고, 일본 정부가 그의 실력을 두려워하는-라는 사실이 이내 밝혀진다. 결국 란초는 대학 시절의 자기 말대로 자기의 재능을 좇아 살았고, 사회적인 성공이 그를 따라온 것이다. 


   사실, 영화를 보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 것인가,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 것인가 하는 고민은 우리나라 청춘들의 고민만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이 일치한다면야 더 없이 행복하겠지만, 그런 복 받은 사람은 그리 흔치는 않을 것 같고, 그렇다면 대부분의 청춘은 자신의 꿈과 성공 사이에서 갈등할 수  밖에 없다. 어쩌면 청춘에 이런 고민이야 당연한 일이 아닐까도 싶고! 그런데 사실, 꿈과 성공을 두고 갈등하는 정도라면 적어도 그리 불행한 상황은 아닌 것 같다. 최소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는 경우니까. 그런 고민과 불안과 방황의 시간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깨닫게 해 주니까. 그게 청춘 시절의 과업이기도 하니까. 그런 통과의례를 거쳐야 더 성장하는 것이니까.


   진짜 안타깝고 불행한 경우는 아예 하고 싶은 일이 없거나,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도통 모르는 때이다. 내가 만나는 학생들이 아직 고등학생-대학생이라고 크게 달라져 있을 것 같지는 않다-이라 더 그런 것이겠지만, 많은 학생들이 내 꿈은 무엇이다, 라고 말하거나, 나는 무엇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경우는 드물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는 대부분이 평범한 인간인지라 꼭 어떤 부분에 특별한 재능을 발견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또 모두가 '특별한' 재능을 타고 나는 건 아닌 듯하다. 그냥 다 고만고만하지 않나?) 나의 꿈이냐 사회적 성공이냐를 선택하고 싶어도 우선 내 꿈이 무엇인지를 자신도 모르는 상황이니 이보다 답답한 노릇이 어디 있을까? 그러면 우리는 정작 자신은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면서 미친 듯이 공부에만 매달려 있을까? 왜 학교에서는 오직 공부만, 성적만을 강조할까?


   학생들도 이미 성적이 잘 나오면 대학도 학과도 골라서 갈 수 있다는 교사들과 부모들과 사회의 감언이설(감언이설)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인 지 오래다. 그러니까 이제는 모두 무엇을 잘 하고 싶은지, 무엇을 잘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그냥 앞만 보고 달려가고 있다. 뒤를, 옆을, 보려는 순간 경쟁에서 탈락할 것 같은 불안감이 든다. 한번 경쟁에서 탈락하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든다.


   내가 볼 때는 언제부턴가 이런 불안감과 두려움의 유령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는 서서히 사람들에게 스며들어 이젠 공포가 내면화되어 있다. 이런 불안감과 두려움은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따라서 이런 불안감과 두려움의 근거는 무엇인지, 그 근원은 무엇인지, 무엇보다도, 그 불안함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를 찾아보려는 합리적인 사고와 판단 기능을 멈추게 만들었다. 그러니 공포에 감염된 우리는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무작정 남들이 달리는 만큼 달려야만 마음이라도 편해지는 것이다. 


   그럼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 단추는? 영화 세 얼간이에서 가장 주체적인 삶을 살고 주변 사람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는 란초는 친구들에게 두려운 상황에 맞딱뜨리면 "알 이즈 웰"을 외치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마음은 원래 겁이 많은 존재이기 때문에, (마음을) 속일 필요가 있다고 한다. ‘알 이즈 웰’이라고 외치는 게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닐지라도 문제를 해결해 나갈 용기를 주기 때문이란다.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니 미리 겁먹지 말고, <마음에 두려움이 가득하면 가볍게 마음을 속이고 외쳐> ‘알 이즈 웰’이라고 말이다.


   세상이 영화처럼 쉽게 풀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련만, 그래도 두려움이나 불안함도 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한 번쯤은 그 마음을 속여 볼 필요도 있겠다. 이 영화를 본, 모든 청춘들에게 ‘알 이즈 웰’을 외쳐볼 것을 권한다. 혹시, 불안한 우리 마음이 속을 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 때 우리는 현실에 맞서는 용기를 얻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청춘들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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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2012-01-18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보고 난 담에 한동안 '알 이즈 웰'을 혼자 열심히 외곤 했었어요^^; 특히 안 좋은 일이 생길때마다 말예요~ 이 영화는 자신의 재능을 좇아가면 성공이 따라온다, 라고 말하고 있지만 슬픈현실은 그런 재능이 모두에게 있는 건 아니라는 것!ㅠㅠ그리고 이 글에도 쓰여있듯이, 대부분의 아이들은 자신이 뭘 원하는지 어떤 일이 하고싶은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구요. 란초와 같은 사람은 사실 드문데..^^ 저는 란초와 같은 사람이 되려고 해요..(진지!!)ㅋㅋㅋ

글 쓸 의욕을 잃으셨다더니 좋은 리뷰 완성하셨네요..축하축하^^ 추천 꾸욱 누르고 갑니다.ㅋㅋ

느티나무 2012-01-18 21:30   좋아요 0 | URL
맞아요. 학교에 있어보면 꿈이냐 성공이냐를 두고 고민하는 친구도 적죠. 꿈이 없는, 꿈이 뭔지 모르는 친구들이 훨씬 많더라구요. "알 이즈 웰"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해결할 수 있는 용기를 줄 수도 있겠지요. 명심했다가 다음에 꼭 써먹을 수 있기를...ㅋ

2012-01-18 1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18 2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2-01-18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느티나무님, 영화 리뷰가 참 좋습니다.
놓친 영화인데 찾아서 보고 싶네요.
'알 이즈 웰'은 무슨 뜻인가요?

느티나무 2012-01-19 00:39   좋아요 0 | URL
주인공의 친구가 무슨 주문처럼 외우는 대사인데, All is well 입니다. 다른 친구가 "올 이즈 웰?" 하니까, 주인공이 아니라고, 꼭, "알 이즈 웰" 이라고 해야 한다네요.ㅋ 자녀가 있는 부모라면 한 번쯤 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유쾌 상쾌 통쾌한데다가 자녀 교육에 대한 철학(?)에 관한 영화로 볼 수도 있으니까요. 고맙습니다.
 

      

 

 

 

 

 

 

 

 

 

 

        주 텍스트                  부(副)텍스트 1           부(副)텍스트 2

 

이 책을 읽고 다른 자료를 참고해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오세요.

 

 

토론 과제

 

1. 원자력 (발전)의 장점에 대해서 정리해 보세요.

 가. 경제적 관점

 나. 환경적(기후적) 관점

 다. 안전성 관점

 라. 지속가능성 관점

   

2. 원자력 (발전)의 단점에 대해서 정리해 보세요.

 가. 경제적 관점

 나. 환경적(기후적) 관점

 다. 안정성 관점

 라. 지속가능성 관점

 

3. 만약 원자력 발전을 중단한다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생각해 보세요.

 가. 세계적인 차원

 나. 국가적인 차원

 다. 개인적인 차원(자신) 

 

4. <3>에서 일어날 변화를 바탕으로 '원자력 발전 시대는 계속되어야 하는가?' 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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