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림산방 앞 정원

   운림산방은 소치 허련이라는 화가가 만년에 서울 생활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거처하며 그림을 그리던 화실의 당호인데 달리 운림각이라 하기도 했다. 운림산방 앞에는 네모난 연못이 있는데 못에는 흰 수련이 피고 연못 안에 만들어 놓은 둥근 섬에는 배롱나무가 보기 좋게 자라 있다고 하는데, 나는 이것 역시 볼 수가 없었다.

   진도읍에서 깨어난 아침, 날이 잔뜩 흐렸다. 게다가 바람까지 쌀쌀하게 불어대고... 영 봄맞이 하러 나온 기분이 아니었으나, 사람의 손길로 깔끔하게 치운 듯한 운림산방의 깨끗함이 좋았다. 비록 복제품이 대부분일 산방과 기념관 안의 그림일지라도, 잠시나마 아무 생각 없이 그림 구경한 것으로도 거액의 입장료를 낸 값은 충분히 치뤘다는 생각이다.

 


진도 쌍계사 들어가는 길

   대웅전과 명부전, 요사체 등으로 이루어진 아담한 규모의 절인데 100년쯤 된 조선 향나무를 비롯하여 벚나무, 감나무 등 제법 큰 나무들 사이로 넓적넓적한 돌을 깔아 길을 내 놓은 대웅전 앞뜰이 인상적이다.

   언제나 절집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드라마틱하다. 절입구에는 절대로 절이 바로 보이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 길이 바르면 절 입구를 약간 비스듬하게 만들어 놓거나, 아예 굽은 진입로를 만들기도 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설계로 진입로의 공간감은 더욱 깊어지고, 짧은 길도 걷는 사람이 충분히 빨려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놓는다. 쌍계사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또 한 번 들었다.

 

 


진도, 신비의 바닷길

   해마다 음력 2월 그믐에서 3월 보름 사이의 영등살(영등사리)날이면 진도 동남쪽 바닷가의 고군면 회동마을과 그 앞바다의 의신면 모도 사이에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이 일어난다. 물이 빠지면서 폭 30-40m, 길이 2.8km 가량 되는 바닥이 드러나 길이 생기는 것이다. 바닷길이 갈라지면 물가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왁자하게 뛰어들어 자연의 신비를 맘껏 즐기지만 한 시간이 채 안 되어 바다는 도로 닫혀 버린다.

   음력 2월 얼마만 빼면 언제나 한가한 진도의 동남쪽 바닷가이다. 실제로 그 기적 같은 일을 내 눈으로 본다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차라리 그 날이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빗방울은 후두둑 떨어지고, 하늘은 낮게 내려와 웅크리고, 진도 해안을 달리는 내내 괜한 상념에 젖을 수 있어 좋았다.

 

 


진도대교

   망금산 전망대에서 본 진도대교. 전망대에서는 진도 일대와 바다 건너 해남 땅, 그리고 다도해의 푸른 바다 위에 수없이 떠 있는 섬들을 볼 수 있고 또한 해남과 진도를 연결하는 길이 484m의 진도대교가 한눈에 내려다보여 시원하기 그지 없다.

   그러나 그 시원한 전망은 저 사진 한 장도 겨우 찍을만큼 밖에 보이지 않았다. 진도 밖으로 나오다가 오른 전망대. 게다가 비까지 뿌리고, 땅끝마을에서 타야 할 보길도행 배 시간이 너무 빠듯했기 때문이다. 비구름을 잔뜩 머금은 하늘. 아마도 마지막 겨울 심술을 부려대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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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기 저 산, 달 뜨는 산!

   강진에서 무위사로 들어가는 길, 오른편으로 우뚝 솟은 저 산, 월출산이다. 월출산은 두 번 다 밤기차를 타고 새벽에-달이 떠 있을 때- 영암에 내려 산에 올랐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산세 험한 월출산 능선이 처져 내려간 곳 아래에 있는 소담한 절, 무위사로 향했다.

   남도 어느 들에나 마늘싹들이 올라와 파랗지만, 월출산 아래 들판은 더욱 파래 보인다. 봄이 여기쯤에 이미 와 있나 보다.

 


무위사 극락보전(정면)

   검박하고 단정한 건물이다. 이 집에서 풍겨나는 소박한 아름다움은 절 안을 은은하게 채우고 있다. 고려 시대 건물인 수덕사 대웅전이나 부석사 조사당을 많이 닮은 맞배지붕 겹처마에 주심포 집인데, 세종 12년(1430)에 지어졌다.

   비탈진 지세를 따라 앞쪽에만 얕은 축대를 쌓은 기단 위에 아무 조각도 없는 주춧돌을 놓고 배흘림 기둥을 세워 지은 정면 3칸 측면 3칸 건물이다. 정면의 가운데 칸이 양 옆 칸보다 오히려 조금 좁은 것이 특징이다. 또 전체적으로 보아 기둥 높이에 비해 기둥 사이 간격이 넓어 안정감이 있다.

 


무위사 극락보전(측면)

   한 점의 허세나 치장, 허튼 구석 없이 단정한 그 모습은 무위사(無爲寺), 인위나 조작이 닿지 않는 맨 처음의 진리를 깨달으라는 절 이름과 잘 맞아 떨어지는 듯하다. 이 번잡하고 시끄러운 세상에서 담담하고 소박한 것의 아름다움을 어느 곳보다 잘 보여 준다. 그러나 여느 절처럼 여기도 공사중이었고, 극락보전 앞에 소박하던 화단도 없어져 버렸다. 아쉽다.

 

 

백련사 동백숲 속, 부도

   백련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 물론 동백숲이다. 절을 애워싸듯 1,500여 그루가 자라고 있으며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되어 있다. 절 앞의 숲도 대단하지만 백련사  사적비에서 더 서쪽으로 가서 허물어진 행호토성 너머에 펼쳐지는 동백숲은 더욱 장관이다. 이곳의 동백나무들은 해묵어서 둥치가 기둥만큼이나 굵다. 잎이 짙어서 침침한 숲속 여기저기에는 단정한 부도 네 기가 흩어져 있다. 3월 말을 전후한 꽃필 철이면 이 동백숲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또 그 무렵이면 백련사 앞길 가에 붉은 밭흙과 새파랗게 자라 올라오는 보리 그리고 샛노란 유채꽃이 저마다 선명한 색으로 어우러지고 길가 집의 흰둥이, 누렁이까지 어울려 정다운 '고향의 봄'을 이루곤 한다.

   나는 유채꽃, 흰둥이, 누렁이는 못 봤지만 어둑어둑한 숲 속에서 바람따라, 후두두둑, 부도 앞으로 떨어지는 동백꽃만 보고 있어도 감동적이고 감탄이 절로 나왔다.

 

 


다산초당에서[丁石]

   초당도 없고, 다산도 없고, 고요함도, 유배의 고통과 외로움도 없었다. 12년 전에 대학 동기 녀석이랑 이 곳에 들렀을 때-그 때도 2월의 끝무렵이었다-와는 너무 달랐다. 동네 앞 수퍼에서 겨우 방을 얻어 잠을 잤었는데... 아, 그리고 그 때는 아무도 없었지(찾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했던 수퍼 주인 아주머니께서는 요즘 행복하실까?). 다산이 유배지를 떠나오기 직전,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 새겼다는 글씨에서 그 결기를 읽을 수 있으면 좋았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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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발~* 2004-03-02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님이 얼마전 가보고잡다 하던 곳인데, 느티나무님이 먼저 다녀오셨군요. 월출산은 지난해 말인가 올 초인가 지나가면서 언뜻 보았는데, 낮에 보아선지 달이 과연 떠오를지 잘 모르겠대요. 아, 좋습니다. 덕분에 더 가고 싶네요.

nrim 2004-03-02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저도 다시 가보고 싶군요.. 강진에서 칠량, 마량으로 이어지던 그 길이 생각나네요. 참 아름다운 곳이죠...

kimji 2004-03-02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위사 극락보전의 맞배지붕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수덕사에서 만나는 맞배지붕의 측면도 아름다우나, 저는 수덕사보다는 무위사의 정경이 더 오래 기억에 남더군요. 지난 여름 강진과 해남을 여행하면서 걸었던 그 길을, 님도 걸으셨는가 봅니다. 사진이 곱습니다.

비로그인 2004-03-02 0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그때 저 혼자서 다녀왔는데 기억이 새록새록합니다. 백련사 동백숲길 오르다 박새소리에 눈을 감고 감히 물아일체의 경지를 맛봤더랬습니다. 다산초당의 검소하지만 멋스러움. 무위사의 햇살과 탱화들도 정말 좋았구요, 남녘의 바람도...아, 또 사진이 내 역마살을 돋구는구만...크아악...
 


보성 녹차밭

   보성 녹차밭은 두 번째다. 3년 전에 부산에서 땅끝까지 걸어갈 때 보성에서 녹차밭으로 빙 둘러서 장흥으로 갔던 곳이다. 이번에 차를 몰고 쌩쌩 달리면서도 그 때 두 발로 밟았던 기억이 뚜렷해서-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도 분명하게 기억이 났다- 옛날 생각이 많이 났다.

   보성의 녹차밭은 아직, 동면 중인가 보다. 아니, 겨울잠을 깨고 기지개를 한참 켜는 중인가 보다. 가지런한 차나무들 사이를 걷다보면 겨울 햇살은 너무나 다사롭고, 바람은 너무 보드랍다. 이 햇살과 바람의 힘으로 이제 곧 차나무의 새순이 기운차게 돋아 오를 것이다.

   원래 차밭 사진은 차밭 꼭대기쯤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찍으면 좋고, 또 크게 굽이치는 곳에서 찍으면 더 예쁘게 나온다. 새벽 안개가 살짝 낀 늦봄이나 여름이면 금상첨화! 이 사진은 거기에 해당사항이 전혀 없다.

  // 1939년 차 재배의 적지를 찾아 우리 나라 곳곳을 다니던 일본인 차 전문가들은 보성의 활성산 봇재에서 발을 멈추었다. 차나무가 잘 자라려면 날씨가 따뜻하고 연평균 강우량이 1,500mm 이상 되어야 하는데 이곳은 강우량은 좀 모자라지만 대륙성 기후와 해양성 기후가 교차하는 곳이어서 아침저녁으로 안개가 끼어 습기를 보충해 준다.

   이곳의 차밭은 일본인 회사인 경성화학주식회사가 1941년에 야산을 개간하고인도산 차나무를 심으면서 조성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기업식 재배를 시작했을 뿐, 이곳에서 차가 재배된 것은 훨씬 전부터였다. [동국여지승람]과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이미 이곳이 차의 산지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 답사여행의 길잡이 5-전남편,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엮음,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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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 2004-03-03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행기 페이퍼를 따로 만드시는건 어떠세요? ^^

연우주 2004-03-04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여기도 다녀왔는데, 전 늦은 시간에 가서 녹차 한 잔도 못 마시고 왔답니다. 전라남도가 작년을 계기로 너무 좋아졌지요.

수련 2004-03-07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을 올려주시니 참 좋군요.
남도여행이라....저는 그곳이 고향이라서 여행이라는 단어보다는 방문이라는 단어가 어울릴것 같습니다. 땅끝마을의 사진은 제 가슴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그곳에 아버지 산소가 있으닌깐요. 저도 5월이면 그곳에 가볼거 랍니다. 진도의 운림산방 앞 연못의 작은섬에 있는 나무가 배롱나무라고도 하는 백일홍이랍니다. 초봄이라서 아직 잎이 나지 않은 상태라서 매끈한 몸매만 자랑하고 있네요. 배롱나무를 못보셨다고 하셨는데.....작은섬을 가득 채우고 서 있는 매끈한 몸매의 나무가 바로 배롱이죠....훗...다시 보시옵소서...총총..

느티나무 2004-03-08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련님, 반갑습니다. 제 서재에 글 남기시는 건 처음이시죠? 고향이 전라도 그 어름... 혹시 보성이신가요? 배롱나무...저도 나무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영 까막눈은 아니라서... 배롱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찾을 수는 있답니다. 배롱나무를 못 봤다는 말씀은 아직 꽃 필 시기가 아니라서... 그렇게 말씀드린 것인디요? ㅋㅋ 암튼 다음에 꽃 핀 배롱나무가 정자 가운데 서 있는 운림산방도 멋있을 것 같네요. 진도까지는 너무 멀어서... 언제 다시 발걸음이 닿을런지...

수련 2004-03-10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훗..괜시리....아눈척 했다가.....이젠 봄이니...하루빨리 배롱나무 꽃을 보았음 좋겠습니다. 다시금 운림산방의 전경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쌍계사가 많이 바뀐 모습이네요. 주지스님께서 일주문을 포함해서 천왕문을 지으신다고 몇년전 말씀하시더니...
다 지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늦은봄에 다녀오면 소식드릴께요....안녕히~
 

   날적이가 무엇이냐? 음.. 날적이는 일기장이다. 대학에 다닐 때 우리 과에서는 모두 날적이라고 불러서 나는 그게 입에 붙어버렸다. 일기는 날마다 적는 것이니까... 생각이 젊은 누군가가 '날적이'라는 말을 만들었겠지? 아무튼 지난 1년 동안 우리반 아이들은 돌아가면서 공책 두 권에 그 날의 일상들을 기록해 둔 날적이를 가지고 있다.

   날적이는 홀수와 짝수로 나누어서 홀수 번호 학생은 홀수 번호 학생끼리 쓰고, 짝수 번호 학생은 짝수 번호 학생끼리 썼다. 한 명이 쓰고 나에게 내면 내가 간단한 코멘트를 달고 그 다음 차례 학생에게 전달한다. 그 다음 학생은 또 그 날의 일기를 쓰고 다음날 나에게 날적이 공책을 내는 것이다. 우리반은 이렇게 날마다 돌아가면서 일기를 썼다.

   나는 날적이 공책을 통해 아이들의 삶을 합법적으로, 필요한 만큼만-또는 아이들이 보여주는 만큼만-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늘 관심을 가지고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부단히 일깨우는 좋은 상징물이었던 것 같다.

   이제는 1년 동안 우리 반 모두의 손때가 묻은 이 날적이와도 안녕할 시간이다. 마지막날 날적이 공책을 받으면 어떻게 해야할 지 걱정이다. 방학 때 컴퓨터에 기록으로 남겼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역시 게으름이 문제다.

 


우리반 날적이 공책

   학기초에 거액(?)을 들여서 공책을 샀다. 1년 동안 꼭 이 공책에 소중한 우리의 일상을 담았으면 했는데, 4월에 한 번 잃어버리고 다시 산 공책도 있다. 이제는 공책 속지를 다 쓰고, 맨 뒷장에 공책을 덧붙여서 날적이를 쓰고 있다.

 

 


공책 속에 당부하는 말

   공책 안쪽에 작은 메모를 붙여 두었다. 아이들이 날적이를 쓰기 싫을 때 한 번쯤 읽고 날적이를 쓰는 의미를 되새겼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날적이는 이렇게 쓴다

   가능하면 한 페이지 정도에 내용을 써 오라고 해도 공책의 반이나 2/3정도에서 그만두는 것이 보통이다. 내가 날마다 읽으면서 빨간 펜으로 코멘트를 달아준다. 야간자율학습이 너무 지루할 때, 날적이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는 재미도 쏠쏠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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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발~* 2004-02-18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동입니다.....

▶◀소굼 2004-02-18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인쇄본을 만들어서 하나씩 가지면 좋을거 같은데 말이죠^^

nrim 2004-02-18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중학교때 이런 날적이를 썼던 기억이 나네요. 그때에는 날적이라 부르지는 않았고(이 단어는 대학와서 알게된 단어인듯..) 무언가 다른 말로 불렀는데 그 말이 생각이 안나네요.. 돌려보는 일기장이라는 그런 뜻이었을텐데... 교실 앞 탁자위에 그 일기장을 두고 쓰고 싶은 사람이 쓰고 싶을때 쓰고, 담임 선생님도 가끔 글을 쓰시곤 했는데...

당시에는 개인 일기장 검사가 있었기에(지금도 있나요? 중학교때까지 일기장 검사가 있었고 잘 쓰면 상도 주고 -_-;; 했었는데;;) 반강제적으로 개인 일기도 쓰고 있었는데, 그런 일기와는 다른 의미를 지니는 이 같이 쓰는 일기장은 꽤나 인기가 있었죠. 그때 그 일기장에 나와 내 친구들이 어떤 글들을 남겼는지 지금은 도무지 생각이 나지가 않아요. 만약 지금 그 일기장들을 다시 볼 수 있게 된다면.. 흠.. 어떤 기분이 들까요...

대학 다닐때도 과방에 날적이가 있었는데 지금은 웹사이트의 게시판이 그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죠. 그래도 그때 손에서 손으로 오가며 사람냄새 물씬 풍기던 그 날적이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노트를 준비해서 과방 한 쪽에 놓아두고 함께 쓰기도 하고 하더군요. (웹상의 게시판과는 확실히 그 냄새가 차이가 나니;;;) 과방 한구석에 모아져 있는 90년대부터의 날적이들을 뒤적거려보는 것도 큰 재미였는데...

그러고 보니 요즘은 따로 일기란 것을 쓰고 있지가 않군요. 웹에 따로 끄적거리는것이 있긴 하지만 그것도 일기라 하기에는 애매하고.. 더군다나 손으로 쓰는 일기는 언제부터 쓰지 않게 되었는지 기억도 나지않는...이 기회에 일기장을 마련하여 일기나 다시 한번 써볼까요...

혼자 추억에 잠겨 괜시리 글이 길어져버렸네요. ^^;


nrim 2004-02-18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내가 주절주절 코멘트 쓰는 동안 소굼이 왔다갔군..
복사해서 제본하게 되면, 그 매무새 자체가 너무 조잡해져버리지... 그렇다고 <엽서>처럼 멋지게 만들기에는 비용이;;;

느티나무 2004-02-19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모둠일기장'이라고 부르지 않았을까요? 요즘 중학생들은 일기 안 쓸텐데...아마도 일기 검사하는 학교는 없을 겁니다. 저도 군대 갔다 온 후에 과방에서 우리 학번 날적이를 찾았을때 참 기뻤지요. 지금도 제 책꽂이에 있거든요. 그리운 시절이 생각나지요. ^^ (그러면 글도 길어지고~!)
 

   주말에는 밀양에 다녀왔습니다. 학급운영모임 '모두아름다운아이들' 선생님들과 모꼬지를 겸한 여행이었습니다.

   토요일 아침, 매운 날씨에 마티즈 한 대에 5명이 타고 밀양으로 향했습니다. 저녁 7시 30분에 연극을 보기로 한 것과 연극이 끝나고 모임 운영에 대한 회의가 필요하다는 것. 이 두 가지 외에는 가서 무엇을 해야 한다는 뚜렷한 목적 없이 향한 길이었습니다. 당연히 느긋하고 여유있는 출발이 되었답니다.

   주남저수지에 들러, 넓은 저수지에서 겨울을 지내고 있는 기러기와 재두루미를 살펴보았습니다.차 문을 열고 나가면 몹시 춥지만, 바람은 들어오지 않고 햇살만 비치는 차에 앉아 있으니 더없이 포근하고 따뜻한 여행입니다. 밀양군 무안면에 들러서 늦은 점심을 먹고,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땀을 흘린다는 표충비를 덤덤하게 구경했습니다. 밀양 시내의 들어와 영남루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장화홍련'의 모태가 된 설화 아랑의 전설이 담긴 아랑각과 무봉사, 박시춘생가, 밀양시립박물관... 무엇보다도 보석처럼 반짝이는 밀양강의 물빛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영남루 전경


햇빛을 잔뜩 담은 밀양강

   오후에 밀양으로 바로 온 선생님들과 만나서 표충사 앞에 민박을 정하고 다시 차를 타고 밀양연극촌으로 나왔습니다. '문화게릴라' 이윤택씨를 중심으로 한 연희단거리패 단원들이 꾸민 연극연습장겸 연극공연장에서 '맨발의 청춘, 이찬전'을 보았습니다. 흥겹고 유쾌한 코미디극이었는데, 제가 좋아하는 연극배우 정동숙씨의 개인기가 마음껏 발휘된 연극이라 저는 더 좋았습니다. 끝나고는 연출가, 배우들과의 난장토론... 취지는 참 좋았지만, 진행이 서툴고 내용도 산만한 데다가 배우들도 이야기를 짧게 짧게 끊지 못하는 지라 시간에 비해 소득은 많이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딴 세상을 사는 배우들과 같이 이야기를 해본 경험만으로도 아주 소중했습니다.


연극이 끝나고 무대에 올라간 선생님들

 

   민박집에 돌아와서는 본격적으로 개학하면 운영할 모임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습니다. 중요한 결정들이 정해졌고, 올해도 일년동안 열심히 하자는 다짐도 함께 하고... 밤이 깊어서야 잠이 들었습니다. 아침에는 민박집 앞 냇가에서 얼음지치기를 하며 동심으로 돌아간 선생님들과 신나게 놀았습니다. 의욕만 앞서다 넘어져 다치기도 했지만, 온 동네 가득 시끌벅적한 소리를 피운 재미난 놀이였습니다. 결국 표충사에는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언양으로 넘어가 석남사를 구경하고 오는 길에 늦은 점심을 먹었습니다.


석남사 처마 밑에서:하늘 참 파랗지요?

 

   돌아오는 길, 우연하게도 흥얼거리게 된 노래 덕분에 우리 모임이 생긴지 2년 만에 두 번째로 가 보는 노래방. 노래방에서는 또 다를 장난 아니게 놀더군요. 무지 신나게 뛰어놀다가 나와서 집으로 돌아간 주말여행 겸 모꼬지였습니다. 역시 좋은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아주 기분이 좋아지네요. 다니는 내내 유쾌하고 웃음이 끊이지 않는 여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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