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안,지날 때까지>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피안 지날 때까지
나쓰메 소세키 지음, 심정명 옮김 / 예옥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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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쓰메 소세키의 이름은 익히 들어왔으나 작품을 읽기는 처음이다. 일본 근대 문학의 선구자라고는 하나, 한국의 독자인 내가(우리나라 근대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광수의 작품도 제대로 읽지 않는 내가) 소세키의 작품을 찾아 읽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1910년대 작품을 찾아 읽기엔 새로이 출간되는 따끈따끈한 책이 너무 많았다. 또 한가지, 고정관념 때문이기도 했다. 이광수의 책이 그러하듯, 지금은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들을 새로운 듯이 서술해나가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약간은 식상하고, 뻔한 이야기가 되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에 읽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내게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은, 수십번 패러디되고 있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나 <도련님>과 같은 이름으로 기억될 뿐이었고, 혹은 영화 <미래를 걷는 소녀>의 남자주인공이 동경하는 대상 정도로 생각될 뿐이었다. 때문에 이번 작품 <피안, 지날 때까지>는 국내에 처음 번역되는 작품이라고는 하나, 내게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다.  

 이 작품의 좋았던 점은, 식상하지 않았다는 것과 옛스러움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식상하지 않았다는 것은-문화적 차이를 감안해야겠지만- 고스란히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진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거의 100년 전의 소설을 읽을 때 느껴지는 진부함이 많이 없었다(물론 그 시대에 소세키가 처음 사용했다는 단어 "고등유민"이 가리키는 지식인은 현대에 그리 놀랄 것도 없지만 말이다). 그것은 <피안, 지날 때까지>가 탐정 소설 형식을 취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게이타로는 친구인 스나가의 소개로 그의 이모부 다구치를 만나게 되는데, 그가 의뢰한 일이라는 것이 '이마에 점이 있는 중절모를 쓴 남자를 미행해 달라'는 것에서 본격적인 사건이 시작된다. 게이타로 역시 탐정이라는 직업에 매력을 느끼고 있던 터라 수락을 하게 되는데, 남자는 게이타로의 관심을 끌고 있던 여자와 만나서 저녁을 함께 보낸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흥미진진하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나 정체, 다구치는 이런 일을 의뢰한 이유, 스나가와 여자의 관계, 집안의 분위기 등 조금씩 밝혀지는 스나가 집안의 이야기는 읽는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밖에 없다. 더구나, 뒷부분으로 가면서 이야기 구성 형식도 조금씩 변화를 주어, 스나가가 1인칭 서술자가 되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마쓰모토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의 이야기도 있어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 작품이 100여년 전에 쓰여졌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옛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은, 1900년대 초의 일본의 분위기가 잘 살아있다는 점 때문이다. 주인공들이 사용하는 말투나 그들의 생각이나 가치관, 손님을 접대하는 모습과 같은 것들이 상당히 격식을 차린 듯하고 문어체로 표현되어 있어 옛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많이 주었다. 많은 분량의 소설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도가 나가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나쓰메 소세키의 서문에 의하면 제목에서의 '피안'이 의미하는 바는 절기(춘분 또는 추분 절기의 전후 7일간)라지만-그래서 솔직히 '피안'의 다른 의미를 생각하고 있던 내게 조금 실망스러운 시작이었지만-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은 절기를 의미하는 '피안'만은 아닌 듯하다. 옮긴이의 말대로, 게이타로가 그냥 관찰할 수 밖에 없고 개입하지는 못했던, 스나가 집안 자체가 피안, 그 너머가 아닐까. 그래서 게이타로 조차 보지 못한 그 이후, 스나가 집안이 어떻게 되었는지, 책을 다 덮은 지금 몹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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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균형>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적절한 균형 아시아 문학선 3
로힌턴 미스트리 지음, 손석주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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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 작가, 로힌턴 미스트리의 장편 소설 <적절한 균형>. 읽지 않았으면 정말 후회했을 좋은 작품을 만났다. 880여 페이지에 이르는 상당한 분량의 소설이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기 때문에 들고 다니면서 읽기에 상당히 어려움이 많았지만, 그 정도의 불편함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었다.  

 남편을 잃고 혼자 살아오다 큰 회사에 옷을 만들어 납품하는 일을 맡으면서 재봉사를 거느리게 된 디나, 디나의 관리 하에서 재봉일을 하게 된 이시바와 그의 조카 옴프라카시, 디나의 집에서 하숙을 하게 된 동창생의 아들 마넥. 이 네 사람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지만, 이 소설은 네 사람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그들의 부모님, 형제, 남편, 친구, 동료 등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얽혀 있다. 그래서 처음 읽을 때는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디나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면, 그녀의 어린시절부터 부모님의 이야기, 오빠의 이야기, 남편의 이야기,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들이 쭉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시바와 옴, 마넥의 이야기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들이 살아온 삶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들이 살고 있는 삶의 현재를 보여주는 이야기들이기 때문에 어느 하나도 헛되이 읽어 내려갈 수가 없다.   

 슬펐다. 놀라웠다. 안타까웠다. 사라졌다고 했지만 사라지지 않은 카스트 제도의 관습, 인간다운 삶이라고 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서 살아가는 빈민촌의 모습, 거지들의 세력화, 서구의 문명이 들어오며 파괴되어 가고 있는 전통, 지식인의 집합체라 할 수 있는 대학의 현실, 거짓과 폭력과 보여주기로 일관하는 정치세력, 권리는 없고 강제만이 존재하는 가족 계획 등. 내가 전혀 알지 못했던, 혹은 막연히 알고 있던 인도의 현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그러한 현실은 확실히 알 수 없는 먼 옛날부터 시작되어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어내기가, 힘들었다.  

 소설의 주인공들이란, 어떤 고난이나 역경을 만나더라도 이겨내기 마련이다. 행복해져야 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이다. 하지만 <적절한 균형>의 인물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삶일지라도 열심히 살아가고 있고, 자기에게 여유가 없어도 남을 도와줄 줄 알고, 결혼을 하거나 가게를 꾸리거나 독립하는 등의 꿈을 꾸고 있기도 한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행복이란 사치, 잠깐의 행복은 곧 찾아올 불행을 암시할 뿐이다. 잠깐의 행복을 맛보았기에 뒤이은 불행이 너무나 안타깝고 그렇게 아플 수가 없었다. 그래도 너무 신기한 것이, 이 사람들이 그러한 불행에도 '곧' 적응하며 그 생활에서 또 웃음을 찾는다는 것이다(물론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모습이 또 마음을 아프게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한 삶의 방식을 가지게 되지 않았나 싶어서 말이다. 그러니, 가진 자의 편이고, 가지지 못한 자를 절망의 구렁텅이에 몰아넣는 정부가 미울 수밖에 없다.  

 옮긴이의 후기를 읽으니, <적절한 균형>이란 개인과 역사, 개인과 국가와의 관계에서의 균형을 의미한다고 한다. 나는 그렇게 거창하게까지는 모르겠다(물론, 개인의 인생에 '법' 혹은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끼어들어 이래라저래라 하거나, 인생의 길을 바꿔놓는 정부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기 이전에, 그냥 '사람'의 이야기로 읽고 싶었다). 표지로 쓰인 다리오 미티디에리의 사진 '장대 위의 소녀'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원숭이 주인이 두 어린 조카를 데리고 부리는 묘기를 연상시킨다. 장대에 두 아이들을 묶고 엄지 손가락 위에 올리는 묘기를 부리는 원숭이 주인은 '살아가기 위해' 그렇게 위험한 일을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받게 된다. 삶이란, 원숭이 주인의 모습처럼 위태위태한 것이 아닐까. 부유함과 가난함, 선과 악, 행복과 불행, 진실과 거짓, 저항과 복종. 그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맞추며 살아가야 덜 불행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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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위의 포뇨 - Ponyo On The Cliff By The S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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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시작되려나 싶었더니 끝이란다. 그냥 포뇨의 탈을 쓴 인어공주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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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 Sisters on the ro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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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쯤, 영화 제목이 와닿아서 탄성을 내지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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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이스트 - The Solo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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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이미 폭스가 음악가로 등장하고,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는 점에서 <솔로이스트>를 처음 대했을 때는 <레이>와 비슷한 작품일 것이라 생각했다. 제이미 폭스가 시각장애인으로 등장하여 혼자만의 외로움과 다른 사람들의 편견을 이겨내고 세계적인 가수로 성장한 레이 찰스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레이>와, 역시 제이미 폭스가 정신분열증(?) 환자 나다니엘로 등장하고, 자신만의 세계에서 노숙자로 살아가며 재능을 펼치지 못하는 것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영화 <솔로이스트>는 사실 얼핏 생각하면 닮은 꼴인 듯도 하다.  

 하지만 그러한 예측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이 영화는, 재능을 펼치지 못한 나다니엘의 고난 극복기나 성공기가 아니라, 그를 만난 스티브 로페즈(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성장기'였다. 영화의 제목이 '솔로이스트(The Soloist)'인 것은, 단순히 보면 나다니엘이 거리에서 혼자 연주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일 테지만, 좀더 비약해서 생각하면 '인생'이라는 거대한 음악 속에서 홀로 자신의 삶을 연주해가는 사람들을 의미할 수도 있다. 노숙자 공동체에서 생활하지만 정신 분열증 때문에 홀로 살아가는 것과 다름없는 나다니엘이나, 일에 빠져서 가족이든 자신의 건강이든 돌볼 여력이 없는 로페즈나 모두 '솔로이스트'인 것이다.    

 나다니엘은 더나은 삶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혹은 자신의 정신이 안정을 찾는 지금의 세계를 벗어나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로페즈의 호의를 거부한다. 나다니엘이 바라는 삶은 '베토벤'과 같은 삶이다. 적막과 광기로 얼룩졌지만 위대한 음악을 만들어낸 베토벤과 같은 삶. 나다니엘은 자신의 또다른 목소리들이 계속 말을 걸어 혼란스러운 생활이 반, 말을 걸지 않아 적막할 때는 음악을 연주하는 생활이 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베토벤과 가까워지는 길을 알려주는 로페즈가 점차 자신만의 신으로, 자신의 친구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사실은 그렇다. 나다니엘에게 필요한 것은 성공하기 위한 길이 아니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실체를 가진 친구였다. 노숙자이든 정신분열증 환자이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줄 수 있는 친구 말이다. 로페즈가 생각하는 것은 치료와 성공이지만, 나다니엘이 생각하는 것은 친구이기 때문에 둘 사이는 점점 벌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 영화는 음악영화의 '전형적인' 감동 코드가 등장하지 않는다. 줄리어드 음대를 중퇴한 나다니엘의 인생 자체가 '음악'이기 때문에, 로페즈가 나다니엘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관계를 지속하게 되는 계기가 '음악'이기 때문에 줄기차게 등장할 뿐이다. 이것은 곧, 현재를 극복하고 위대한 음악가로 성공하는 나다니엘의 모습이나, 제이미 폭스가 연주하는 음악의 활홀경에 빠지고 싶은 사람은 이 영화를 보면 실망할 것이라는 말이다. 다만 이 영화에서는 흔히 성장영화에서 맛볼 수 있는 감동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자신이 우위에 있기 때문에 부족한 사람을 도와주겠다는 생각을 하고 나다니엘의 인생에 뛰어든 남자, 로페즈가 나다니엘로 인해 어떻게 변해가는지 친절히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제이미 폭스가 만들어내는 아우라는 충분히 감탄할 만하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좀더 성숙해졌고 능글맞아졌으며, 제이미 폭스는 여전하다. 세상에 어느 배우가 이마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5:5 가르마를 하고도 자연스러워 보이겠는가. 나다니엘이 오랜만의 연주회를 관람하면서 느끼는 감정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 역시 인상적이었다. 마치 내가 나다니엘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보는 적나라한 느낌을 받았으니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나다니엘과 로페즈, 두 사람의 이야기로 끝냈으면 좋았을 텐데 '노숙자'와 관련된 사회 문제를 제기한 점이다. 그로 인해 영화 내내 나름대로의 인생을 꾸리고 살던 나다니엘의 삶이 한순간에 '노숙자의 삶'으로 전락하고 만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직도 나다니엘은 노숙자 공동체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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