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 & 줄리아 - Julie & Ju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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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를 위해 맛있는 음식과 분위기 좋은 장소를 준비한 것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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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 & 줄리아 - Julie & Ju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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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라 애프런 식의 영화는 이제 됐다,고 생각했다. 감독의 스타일이겠지만, 매번 보기에 조금은 지겨운, 지나치게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볍고, 여성적이고, 따뜻하고 아기자기한 매력이 있는 영화는 이제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줄리&줄리아>라는 노라 애프런의 영화를 선택한 것은, 단지 메릴 스트립 때문이었다. 그녀의 영화는 메릴 스트립이라는 배우만으로도 볼 만한 가치가 있다. 그렇게 기대없이 시작한 영화는 15분쯤 지나자 사랑스러운 대사로 나를 완전히 넘어가게 만들었다. TV로 요리 강습 중인 줄리아는 (요리사들이 솜씨를 발휘할 때 많이 보여주곤 하는, 프라이팬에 든 음식을 뒤집는) 뒤집기에 실패하고 떨어진 음식들을 프라이팬에 다시 주워담으면서 말한다. "다시 담으면 돼요. 주방에 혼자 있는데 그걸 누가 알겠어요?" 

 이렇게 사랑스러운 줄리아, 특이한 말투와 시원시원한 웃음을 가진 거대한 여인 줄리아를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다. <선샤인 클리닝>에서 인상에 강하게 남았던 에이미 애덤스는 니콜 키드먼과 흡사한 스타일로 변모해 이 영화에 출연한다. 하지만 우리가 짐작하다시피 이 영화는 사실 '줄리아(혹은 메릴 스트립!)'를 위한 영화다. '줄리'는 줄리아를 지나치게 흠모하며 요리 뿐 아니라 삶까지 닮고 싶어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데, 영화의 다른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한 주인공이 자신의 개성을 내세우기 보다 자신의 인생이 줄리아처럼 풀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짜증만 내고 있으니, 나처럼 메릴 스트립을 좋아해서 영화를 선택한 사람은 '줄리아'만 유심히 보게 되는 것이다.  

 사실 '줄리아'의 인생은  열정과 웃음, 사랑으로 가득하다. 남편의 사랑을 받으면서 그 사랑에 감사하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강하게 추진해가는 줄리아의 인생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남편의 사랑을 당연히 여기고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더 애쓰는 줄리의 인생보다 훨씬 빛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줄리의 인생이 훨씬 더 인간적이고 현실적이다. 이미 위대한 사람인 줄리아는, 이미 우리와는 다른 사람인 것이다. 그렇기에 좌절하고 노력하고 울고 짜증내고 기뻐하고 방방 뛰는 줄리도 사랑스럽다.  

 전형적인 노란 애프런의 작품이다. 줄리와 같은 여성들, 특히 자신의 인생이 생각처럼 잘 굴러가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는 현대 여성들에게, 무언가를 끊임없이 해내면서 자신의 꿈을 찾았던 줄리아를 인생의 본보기로 제시한다. 실제로 줄리 역시 '줄리아'를 완벽한 자신의 롤모델로 삼았고, 성공하지 않았던가. 그런 의도 하에 진행되는 이야기므로 따뜻하고 유쾌하고 결국엔 기분이 좋아지는 영화가 완성되었다. 크나큰 역경없이 진행되므로 지루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런 영화가 진짜 따뜻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줄리&줄리아>를 쓴 줄리의 시선이 아닌, 혹은 영화를 만든 노라 애프런의 시선을 거치지 않은, 온전한 '줄리아'를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커지는, 조금은 아쉬운 영화라고도 생각한다. 그 이쉬움을 달래기 위해, 실제 주인공인 줄리아 차일드가 쓴 책을 좀 찾아봐야겠다.

 이 영화를 보고 나니 무지하게, 요리가 하고 싶어졌다. 더불어, 누군가와 요리의 과정을 나누며 같이 먹고 싶어졌다. 본 에퍼티(많이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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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천가족>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유정천 가족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4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권일영 옮김 / 작가정신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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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정천 가족>을 읽으면서 내내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이라는 영화를 떠올렸다. 재치만점의 캐릭터들 하며,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인간과 대립하는 모습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 만화 영화의 이미지가 아직 남아있기 때문인지, 작가의 솜씨가 좋은 건지, 여하튼 머릿속으로 캐릭터를 그려가며 읽는 데에는 별 무리가 없었다. 일본 작가가 쓴 책을 읽으면 가끔씩 이렇게 너구리가 변신하는 소재가 등장할 때가 있는데(확실하지 않지만, 최근에는 미미여사의 어느 책에서 둔갑한 너구리를 소재로 한 미스터리를 본 것 같다), 항상 너구리는 해로운 쪽보다는 친근감을 주도록 묘사되는 듯 하다. 이 소설에서도 '바보의 피'가 흐르는 너구리 네 형제의 모습이 재미있고도 친근하게 느껴지도록 표현되었다.  

 너구리 세계의 지배자였던 위대한 아버지와 천둥만 치면 두려움 때문에 둔갑술을 부리지 못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네 형제는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것 없는 너구리들이다. 큰 형은 책임감을, 작은 형은 무료함을, 나는 바보스러움을, 동생은 나약함을 내세울 수 있을 뿐인 것이다. 때문에 큰 형은 책임감만 앞서고 침착함을 잃어 일을 그르칠 때가 많고, 형은 아무 것도 하기가 싫어 개구리로 둔갑한 다음 그냥 지내다가 다시 돌아오는 방법을 잊어버린 우물 안 개구리 신세가 되었고, 동생은 두려움을 느끼기만 하면 꼬리를 나타내버리는 불명예를 이름표처럼 달고 다니게 되었다. 주인공인 '나' 역시 뭐하나 나을 것 없이, 바보스러움 때문에 여기저기 다니며 사고만 일으키는 말썽쟁이가 되어버렸다. 이들은 아버지를 '금요구락부'의 너구리 냄비요리로 인해 잃게 되었는데, 언젠가 자신들도 이러한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리며 살고 있다. 더구나 아버지와 적대 관계에 있는 작은 아버지와 사촌들인 금각, 은각으로 인해 항상 함정에 빠질 위험에 시달리고 있기도 한다.  

 <유정천 가족>의 매력은 이야기에 있지 않다. 이야기는 예상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다.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이나 여타 일반적인 가족 소설을 통해 볼 수 있었던 이야기 전개와 결말을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그것에 불만은 없다. 그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캐릭터들이 모두 톡톡 튀기 때문이다. 중심이 되는 너구리 가족 뿐만이 아니라, 사자성어를 과시용으로 외우기 좋아하는 금각, 은각 형제나, 방귀 뀌는 것이 취미이고 목욕은 싫어하는 아카다마 선생이나, 팜므파탈이라 할 수 있는 벤텐, 얼굴은 보이지 않고 항상 어둠 속에서 잔소리를 해대는 전약혼자 가이세이 등, 모든 캐릭터들이 전형성에서 벗어나 각기 다른 개성을 뽐내고 있다. 마치 요즘 사람들이 즐겨보는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의 너구리편을 보는 것과 같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고나 할까.  

 읽으면서 작게 킥킥거리며 웃을 수 있는 즐거움, 문장 한 줄에 빵빵 터지는 웃음을 얻고 싶다면 이 책이 좋을 것 같다. 다만, 매 챕터마다 반복되는 인물에 대한 '친절한' 설명을 참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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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속삭임 - Red Like the 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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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봤던 <블랙>과 같은 영화를 떠올렸다. 사실 눈물을 잔뜩 흘릴 준비를 하고 시작한 영화였다. 하지만 내 착각이었다. 이 영화, <천국의 속삭임>은 '그런' 영화가 아니었다('그런' 영화라 함은 장애를 소재로 사람의 마음을 쥐었다 놓았다 하는 힘든 영화를 말한다). 주인공 미르코, 따뜻한 친구 펠리체, 첫사랑 프란체스카, 그리고 그 친구들이 한바탕 벌이는 그들의 축제 이야기를 다룬 행복한 영화다. 그러니 미르코나 펠리체가 가진 시각장애인이라는 불편함은, 키가 큰 사람이 농구를 잘하고 다리가 긴 사람이 달리는 것에 유리한 것처럼, 오히려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이점을 가져다 준 축복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우리는, 앞으로도 세상의 모든 것을 눈으로 볼 우리는 후천적 시각장애인을 대할 때에 '그래도' 얼마 동안은 보았으니 다행이다,는 반응을 보인다. 미르코가 그렇게 시각을 잃었다. 어린이의 호기심이 불러온 우연한 사고였다. 목숨을 건진 것도 다행이라고들 하지만, 책에 대한 욕심도 많고 영화를 좋아하고 TV도 보고 싶은 미르코에게 그것은 큰 불행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보였던 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절망감. 정든 고향 친구들과 헤어지고 울타리같은 가족과 헤어져, 머나먼 곳, 타향에서 살아야하는 외로움. 어른들 모두는 미르코를 환자 취급하고, 장애인을 대하듯 '특별하게' 대한다.  

 하지만, 변하지 않았다. 보이던 것이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펠리체는 태어날 때부터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색깔도 모르고, 모양도 모른다. 그의 세계는 처음부터 그런 모습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다른 사람들 생각처럼 그렇게 이상하지 않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들었다. 소리의 세계-. 자신들을 특별하게 취급하는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어린이'로서의 순수함을 만끽할 수 있는 소리의 세계 말이다. 연극을 한들 재미가 없고, 볼 수가 없는데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단지 소리를 듣고 즐기기 위해 학교를 탈출해 영화를 보러 가기도 하고,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만들고 즐기기 위해 새로운 소리들을 끝없이 만들어 녹음하기도 하고. 그러는 동안 그들의 세계는 반짝,하고 빛났다. 잊고 있었던 꿈이 되살아났다. 잊고 있었던 웃음도, 즐거움도, 자신감도. 보통의 세계에서 그들은 남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야하는 존재, 그래서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학교에서 배워야하는 존재였지만, 그들의 세계에서는 '그저' 어린아이들이었다.  

 누구든 그런 시절이 있다. 어른의 잣대로 모든 것을 재어보지 않던 시절, 말이 통하고 같이 놀면 즐거운 친구와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프란체스카는 눈이 보이지 않는 미르코에게 자전거 운전을 맡기고 자신은 뒷자리에 타기도 하고,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들과 '마치 눈이 보이는 것처럼', 혹은 '마치 눈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어울린다. 어른들의 잣대에 휘둘리지 않는 친구들은 미르코를 놀리지도 않고, "보고 싶었어"라며 따뜻하게 받아들인다. 사람을 만날 때, 직업이 뭔지, 얼마나 배운 사람인지, 지위가 어느 정도인지 따지고 재는 어른과는 아주 많이 다른 어린시절이 생각났다. 돌아갈 수 없을 만큼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려서 그리웠다.  

 미르코와 친구들이 만든 소리의 세계를, 눈가리고 경청하던 어른들이 감동한 것은 결국은 돌아갈 수 없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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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라의 계곡 - In the Valley of El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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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영화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보았던 시절이 있었다. 총을 쏘고, 폭탄을 터뜨리고, 사람이 죽어나가는 상황이 즐거워서는 절대 아니었다. 좀더 어린시절의 나는, 모든 상황이 끝나고 '영웅주의'가 승리하는 그 순간에(한때 전쟁 영화의 대부분은 '미국'이 정의의 편이었으니까) 감정 이입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서, 전쟁 영화가 단순히 선과 악의 대립으로만 보이지 않게 되었고 전쟁 영화라는 장르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고, 참혹하기만한 현실을 '영화'에서까지 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엘라의 계곡>은 본격적인 전투신이 등장하지도 않고, 전쟁이 끝난 후의 이야기를 담은 '반전영화'라길래 보기 시작한 영화였다. 배우들에 대한 호감도도 어느 정도는 작용했지 싶다. 영화를 보기 시작하고 영화의 중반에 이르렀을 무렵까지는 괜찮았다. 전쟁에 관련된 영화라기 보다는, '군인'이었던 아들의 살인사건을 쫓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그린 스릴러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도대체 범인이 누굴까,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왜 마이크는 그렇게 죽어야만 했을까, 와 같은 질문을 끝없이 되뇌이며 영화를 보는 내내 흥미진진했다. 하지만, 역시, 중반 이후부터 이 영화가 본색을 드러냈다. 그래서 보는 내내 힘겨웠다.   

 아버지 행크는 아들의 죽음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집을 떠나 모텔에 머물면서 생활하고 있다. 그는 헌병대 출신의 퇴역 군인으로 나라를 위해 복무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아들인 마이크 역시 그러한 집안 분위기에 떠밀려 자원입대한 것으로 표현된다. 행크는 모텔에서도 신발을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고, 침대를 말끔하게 정리하고, 아들의 행적을 조사하기 위해 찾아간 술집에서도 예의를 차리는 원칙주의자이다. 그런 그가 사건의 진상을 밝혀나가면서 서서히 변하기 시작한다.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게 되고,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되뇌이며 후회하고, 자책한다. 그런 그에게 낡디 낡은 성조기는, 거꾸로 매달린 성조기는 아들의 죽음과 맞바꾼 구시대의 유물일 뿐이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낡아가며 자신에게는 잊혀지길 바라는, 나라에 대한 '쓸데없고 뒤틀린' 애국심 말이다. 

 아들인 마이크는 밝고 착하며 유머러스한 아이였다. 하지만 가혹한 전쟁의 현실에서 그는 변할 수밖에 없었다. 비극적이고 비참한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여러가지 방법 중에 가장 큰 것이 자신을 버리는 것. 마이크는 자신을 버리고, 전쟁에서의 상황을 즐기는 유쾌한 '덕'이 되어 미국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그에게 남은 것은 자괴감 뿐이었고, 너무나 다른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마이크는 영화에서, 행크가 보는 사진과 영상으로만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참전하기 전의 마이크 모습을 생생하게 그릴 수 있었다. 영화 후반부에서 아버지에게 전화를 하며 눈물짓던 마이크가, 영화가 끝난 후에도 너무나 그리웠다.   

 <엘라의 계곡>이란 제목은 다윗과 골리앗이 싸우던 장소를 의미한다. 그 누구도 이기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거인 골리앗을 물리친 꼬마 다윗. 그러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했겠느냐는 행크의 말이 아직도, 귓가를 맴도는 듯하다. 전쟁, 그것 좀 안 하면 안 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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