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성리학, 지식권력의 탄생 - 조선시대 문묘 종사 논쟁 읽기 지식전람회 35
김용헌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다. 건국이념이 성리학이었고 518년 동안의 지배사상으로서 단 한 번도 공격을 받지 않았다. 조선의 집권세력인 신진사대부들은 성리학적 이상세계를 만들려는 꿈과 의지가 가득했다. 정도전이 그랬고 조광조가 그랬다. 그렇기에 조선시대를 심도있게 탐구하기 위해서는 성리학에 대한 기본 이해는 꼭 필요하다.

   『조선 성리학, 지식권력의 탄생』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계보를 훑고 있는 책이다. 책의 부제는 '조선시대 문묘종사 논쟁 읽기'다. '문묘(文廟)'란 공자를 받드는 사당을 말하고 '종사(從祀)'란 제사를 지낸다는 뜻이다. 즉 문묘종사란 공자와 함께 제사를 지낸다는 의미다. 문묘의 중앙에 공자가 있고 그의 학통을 이어받은 인자·증자·자사·맹자 등 4성(四聖)을 배치한 후 수제자들인 십철(十哲)과 주희·주돈이·정호·정이 등 송나라 6현(六賢)을 좌우로 배열했다. 여기에 함께 종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리학 국가 조선에서 공자와 같이 종사된다는 건 엄청난 영예이다.

   저자 김용헌 교수는 중종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문묘종사의 논쟁사를 통사적으로 기술한다. 주지하다시피 고려 충신 정몽주는 조선건국을 반대하여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했다. 정작 정몽주를 복권시킨 건 태종 이방원 본인이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정몽주를 조선 성리학의 시조로 삼는 것에 대해 당시 사대부들은 이견이 없었던 듯하다. 결국 정몽주는 조선 최초로 중종 대에 문묘에 종사된다. 이후 선조 대에 대대적으로 집권한 사림세력은 '오현종사운동'을 펼치며 문묘종사에 대한 논쟁을 이어갔다. 그 결과 광해군 대에 김굉필·정여창·이언적·조광조·이황을 문묘에 종사하게 된다.

   조식과 이황의 라이벌 구도,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 논쟁, 이황과 이이 철학의 차이 등등. 흥미로운 주제가 책의 후반부를 장식한다. 사단칠정 논쟁의 의미와 주기론과 주리론의 차이는 한국철학사에서 가장 흥미롭지만 난해한 주제로 꼽힌다. '사색당파', '예송논쟁'과 같이 조선사를 이해하는데 꼭 필요하면서도 머리속에는 쉽게 정리되지 않는 테마인 것이다. 거침없이 서술한 저자의 요약은 명료하고 깔끔하다. 저자는 퇴계 학파와 율곡 학파의 차이를 기술하는 것으로 책의 말미를 갈무리한다.

   선술했듯이 이 책은 조선사를 성리학의 계보로써 관통한다. 문묘종사에 대한 사대부들의 논쟁을 중심으로 조선사를 훑고 있다. 그렇기에 기초적인 조선왕조사의 흐름을 개괄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읽어내는데 벅찰 수 있다. 성리학에 관한 기본 이해가 전제되면 더욱 쉽게 탐독할 수 있다. 내용 자체는 어렵지 않으나 문묘종사라는 줄기만으로 기술한 책이기 때문에 어느정도의 지적 맥락은 확보하고 읽는 게 풍요로울 것이다. 서평의 구조적 관점에서 책의 말미를 급하게 끝맺는 분위기는 아쉽다.

   21세기 자유민주주의와 고도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으로서 성리학적 관점에서 세상을 본다는 건 불가할 뿐만 아니라 고리타분하다. 나 또한 조선의 패망원인을 교조화된 성리학 체제에 매몰되어 종국적으로 애민(愛民) 없는 세상을 만든 조선 집권세력의 무능에서 찾는다. 사실 조선왕조의 붕당사와 후기의 패망과정은 성리학에 대한 이해 없이는 풍성하게 수용하기 힘든 측면이 없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유교 성리학은 한국인이라면 한 번쯤 개괄해야 할 숙명적 과제이다. 이런 차원에서 『조선 성리학, 지식권력의 탄생』은 조선 성리학사를 조망하는데 보탬이 될 책이다. 조선사에 관심있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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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정교과서 문제로 나라가 시끄럽다. 박근혜 대통령의 콘크리트 지지층인 37%정도가 국정화에 찬성하고 있다. 반대는 절반을 넘어섰다. 시간이 갈수록 무응답층의 비중이 반대쪽으로 돌아서고 있다. 국정화 문제는 최근 우리사회의 가장 큰 이슈였다. 그렇기에 공중파를 비롯한 여러 채널에서 열띤 토론이 진행 중이다. 그중 13일 방송된 JTBC <밤샘토론>은 단연 눈에 띄었다. 국정화 반대 패널로 출연한 유시민의 활약이 타 패널들을 압도하며 많은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어냈기 때문이다. 나는 이번 토론을 시청하며 "내공있는 지식인의 '말'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봤다.

   학창시절을 떠올려보자. 어느 학년이나 유독 잘 가르치는 교사가 있고 유난히 못 가르치는 교사가 있다. 대학도 마찬가지다. 강의는 말로 하는 것이다. 명강의로 학생을 압도하는 교수가 있는 반면 강의 내내 졸음과 지루함을 유발시키는 교수도 있다. 중요한 건 가르치는 자의 학벌과 이력이 '잘 가르침'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개인의 학벌과 지력이 높다고 해서 잘 가르치는 건 아니다. 말을 잘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능력이다.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해서 누구나 말을 잘하지는 않는다. 물론 똑똑한 사람이 말 잘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적 콘덴츠를 갖춘 건 맞다. 하지만 그것이 '말 잘함'의 하드웨어적 시스템까지 규정하지는 못한다. 달변에는 여러 스타일이 있지만 공통적으로 듣는 이의 동의와 공감을 이끌어내는 역량은 필수적인 요소로 고려된다. 자기 혼자 허공에 대고 지껄이는 행위를 말 잘한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화자와 페이퍼 사이의 교류는 말 잘함의 학습과정에 불과하다. 말을 잘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자신의 내면 속에 있는 감정과 정보를 외부로 잘 표출해내는 능력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이 오롯하게 형성될 수 있는 역량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페이퍼에 기록된 정보를 머릿속에 집어넣는 1차원적 행위를 참된 지식인의 역할로 보는 것 같다. 입시와 학벌 위주의 사고방식에 경도되어 있는 한국의 사정을 고려했을 때 그 동인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지식인의 역할은 공부가 아니다. 지식인의 참된 역할은 자기 내면에 'input'된 지식과 정보를 정갈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소매화하여 바깥(대중)으로 'output'해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 'output'된 지식과 정보를 타자가 어떤 긍정으로 'input'하는가에 따라 지식인의 자질과 역량은 결정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내공있는 지식인의 원형이 도출된다.

   아무리 고매한 지식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타자에게 전달되어 생동하지 않는 한 그것은 죽은 정보에 불과하다. 예컨대 공산주의가 실패한 이유가 무엇인가. 공산주의자들은 페이퍼에 기록된 지식과 정보만으로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는 오만한 착각에 함몰됐다. 인간 이성에 대한 절대적 믿음은 공산주의자들의 사상적 기초다. 그들은 '시장(market)'으로 불리는 인간 내면 속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지식과 정보의 교류 혹은 부딪힘의 장을 철저히 무시했다. 인간들 사이에 발생하는 다양한 부딪힘의 점증과정은 인간 내면에 체화된 지식으로 남는다. 페이퍼적 지식은 그것을 담지 못한다. 그렇기에 힘이 없다. 참된 지식은 반드시 사람들 사이를 휘젓고 날아다닌다.

   오래전 마르크스는 지식인의 임무를 해석에서 변혁의 차원으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지식인이 가진 지식과 정보가 자기 안에 고착된 상태로 정지해 있어서는 안 된다. 또한 바깥으로 내보내는 방식이 조악하고 경박해서 종국적으로 나가지 못하는 사태에 직면해서도 안 된다. 꾸준한 학습과 자기관리, 현실 문제에 대한 객관적 인식, 대중여론의 분석과 수렴, 극단과 거리를 두는 중용적 자세, 세련된 말과 글 등은 내공있는 지식인이 갖추어야 할 요소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은 필수조건이다.

   나는 아무런 교훈과 의미를 담지 않은 쓰레기 같은 배설물을 토해내는 우리시대의 많은 지식인들의 모습에 자주 분노한다. 얼핏 봐서는 정의를 위해 울부짖는 모양새지만 진지하게 그들의 분출물들을 천착해보면 치졸한 허위와 졸렬한 가식으로 가득 차 있다. 대개 실력 없는 사람이 태도도 꼴불견이다. 물론 공부는 많이 했다. 서울대를 나왔고 외국에서 공부했으며 박사학위를 받았다. 머릿속 지식은 녹록지 않다. 그러나 말하는 방법을 모르거나 말 할 능력이 부재하다. 즉 'output'의 역량이 보잘것없기에 그 공백을 단순적 말장난으로 감추는 것이다. 그런 싸구려 수사를 지식인의 위트와 재치로 바라보는 혹자들의 '박애주의'가 안쓰럽다.

   이런 배경에서 유시민이라는 지식인의 존재는 한국사회에서 보물과 같은 것이다. 과거 "옳은 말도 싸가지 없게 한다"는 비아냥이 그를 따라다니곤 했다. 그러나 최근 그의 언행에서 그런 모습을 찾기는 쉽지 않다. 국회의원과 장관을 지낸 국정경험과 그간의 겪은 아픈 상처들이 그를 태도까지 겸비한 완벽한 논객으로 성숙시킨 에너지였을 것이다. 당대에 유시민과 붙어서 말로 이길 논객은 없어 보인다. 나와는 인간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각과 정치·사상적 이념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그가 선택한 정치적 결단과 정책적 입장도 대부분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지식을 소매단계로 끌어올려 대중에게 적확하게 전달하는 능력 만큼은 항상 최고의 수준에서 나를 고무하며 설레게 했다. 보수에 유시민과 같은 논객이 없다는 건 서글프다.

   유시민의 말은 수정없이 그대로 옮겨놓으면 책이 될 정도로 정교하다. 그는 구어의 한계인 주술관계의 오류도 범하지 않는다. 말의 마지막을 얼버무리지 않고 정확한 서술어로 끝맺는다. 또한 자신의 'text'에 'context'를 그대로 담아낸다. 즉 말이 맥락이요 맥락이 곧 말이 된다. 그래서 논점을 흐리지 않고 항상 고밀한 논리의 수준을 유지해낸다. 표정과 어휘의 적확성도 뛰어나다. 부드럽게 말해야 할 때는 부드럽다. 힘주어 말해야 할 때는 억양을 높이며 제스처를 부가시킨다. 미리 준비하지 않은 실시간의 감각적 교정으로 감성과 이성의 조화된 언변을 토해낸다. 최고의 경지에 오른 달변가의 모습인 것이다. 응당 지식인의 말빨은 이래야 한다.
 
   글을 정리하자. 지식인이라면 유시민처럼 말해야 한다. "나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 따위를 띠고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다"는 그의 말은 그야말로 멋진 웅변이었다. 선술했듯이 말이라는 건 내 안의 감정과 정보를 꺼내 나를 뚫고 타자에게 전달하는 과정이다. 말을 잘 한다는 건 그 과정이 세련되고 정갈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말 잘할 권리'가 있다. 한나 아렌트가 역설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 타인의 입장에서 말하고 생각하지 못한 무능과 결핍의 산물이었음을 상기하자. 유시민의 사자후가 돋보인 토론을 보며 참된 지식인의 아우라와 말 잘함의 본질에 대해 궁구해봤다.

 

 


[사진출처 :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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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5-11-18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7%는 한일합방을 한다해도 찬성하지 않을까요 ㅠㅜ

다윗 2015-11-18 19:59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가슴 아픈 글을 쓴다.

   소설가 신경숙의 표절 의혹이 문학계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신경숙 본인과 출판사 창비의 해명이 있었지만 문단 내외의 비판은 점입가경이다. 안부, 쪽지, 카톡 등으로 이번 표절 의혹에 관한 내 견해를 묻는 질문이 적지 않이 쏟아지고 있다. 평소 나는 신경숙을 가장 아끼는 소설가로 자랑해왔다. 신간이 출간될 때마다 호평을 아끼지 않은 팬이었기에 이번 사건을 바라보는 내 주관이 이웃들로서는 궁금했을 것이다. 이에 적당한 선에서 솔직한 입장을 내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이 글은 그 판단의 연장선상이다.

   신경숙이 누군가.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문단 최고의 스타다. 나는 이미 여러 채널을 통해 현존하는 국내 최고의 소설가로 신경숙을 꼽아왔다. 많은 서평에서 그의 작품을 한결같이 상찬했다. 『외딴방』에 대해 작품성에 있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능가한다고 말한 백낙청의 평가에 백번 공감했다. 210만 권이나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 『엄마를 부탁해』에 대해 "차후 십 년 동안 이런 소설은 나오지 못할 것"이라며 니체가 주창한 '피의 글쓰기론'을 인용하면서까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순문학적 서정성과 발군의 시적 문체, 섬세한 감성 등은 신경숙 문학의 독특한 브랜드이자 그가 국내에서 가장 사랑받는 소설가로 우뚝 선 힘이었다. 그런 그가 창작자에게 가장 큰 수치라 할 수 있는 표절 의혹에 휘말린 것은 그 자체만으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가슴 아픈 일이다.

   이번 표절 의혹은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응준의 문제제기로 시작됐다. 이응준은 인터넷매체 '허핑턴포스트'에 소개된 <우상의 어둠, 문학의 타락>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신경숙의 단편 소설 「전설」이 일본 소설가인 미시마 유키오의 단편 「우국」을 표절했다고 주장했다. 게재된 이응준의 글을 면밀히 읽고 그의 논지를 살폈다. 그가 제시한 문제의 문단을 서로 비교했다. 기준은 '상식'이었다. 부분적인 어휘의 쓰임새와 문단의 전체적인 맥락을 살펴볼 때 원작(유키오의 단편 「우국」)과 무관한 독립적인 창작으로 보기는 어려워 보였다. 더욱이 역자 김후란의 시적 의역을 그대로 옮긴 부분은 원작과 번역을 동시에 베낀 최악의 표절 사례로 의혹을 살 만했다. 우선 이응준이 표절의 증거로 내세운 두 소설의 문단을 비교해보자.

 

"두 사람 다 실로 건강한 젊은 육체의 소유자였던 탓으로 그들의 밤은 격렬했다. 밤뿐만 아니라 훈련을 마치고 흙먼지투성이의 군복을 벗는 동안마저 안타까워하면서 집에 오자마자 아내를 그 자리에 쓰러뜨리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레이코도 잘 응했다. 첫날밤을 지낸 지 한 달이 넘었을까 말까 할 때 벌써 레이코는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고, 중위도 그런 레이코의 변화를 기뻐하였다." (미시마 유키오 '금각사, 우국, 연회는 끝나고' 233쪽. 김후란 옮김. 주우세계문학전집. 1983년 발행)

"두 사람 다 건강한 육체의 주인들이었다. 그들의 밤은 격렬하였다. 남자는 바깥에서 돌아와 흙먼지 묻은 얼굴을 씻다가도 뭔가를 안타까워하며 서둘러 여자를 쓰러뜨리는 일이 매번이었다. 첫날밤을 가진 뒤 두 달 남짓, 여자는 벌써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다. 여자의 청일한 아름다움 속으로 관능은 향기롭고 풍요롭게 배어들었다. 그 무르익음은 노래를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 속으로도 기름지게 스며들어 이젠 여자가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라 노래가 여자에게 빨려오는 듯했다. 여자의 변화를 가장 기뻐한 건 물론 남자였다." (신경숙)

  

 

   확인하듯이 두 문단은 부분적으로 거의 동일한 문장을 공유할 뿐만 아니라 의미 배열의 순서까지 완벽히 일치한다. 소설 전체의 서사와 상관없이 상기 두 문단만 봤을 때 단어 선택과 문장 맥락에서 다분히 종속적이고 연계적이다. 더욱이 이응준이 지적한 바와 같이 '기쁨을 아는 몸'이라는 문구는 김후란이 의도적으로 의역화하여 역자 재량에서 한 단계 높은 수준의 시적 문체를 구사한 것이기 때문에 순수문학적 창작력으로는 도저히 일치하기 힘든 부분이다. 나도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위 정도의 유사성은 의식적인 개입 없이는 상응하기 힘든 문장 배열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겠다.

   물론 표절의 기준은 단순하지 않다. 음악은 별도의 표절 기준이 존재하지만 문학은 아직까지 보편적으로 정립된 기준이 존재하지 않았다. 더욱이 문학 외의 텍스트들은 나름의 허용되는 지점이 있기는 하다. 예컨대 철학자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보자. 그 유명한 마지막 문장 "노동자들이 잃을 것은 쇠사슬밖에 없다. 그들이 얻을 것은 세계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실제로 마르크스가 고안해낸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를 얘기할 때 격문처럼 회자되는 문장이지만 진실은 칼 샤퍼와 장 폴 마라가 처음 사용한 문구를 마르크스가 짜집기하여 편집한 것이다. 서로 흩어진 독립적인 문장일 때는 별다른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세 개의 문장이 상기의 순서로 배열되어 『공산당 선언』의 대미를 장식하니 거대한 매력을 발산시킨다. 그러나 마르크스를 표절자라고 얘기하는 사람은 드물다. '혁명 구호'로서 각 문장의 독립된 개별성이 화학적으로 합쳐져 전혀 다른 차원의 힘과 메시지로 치환됐기 때문이다. 동시에 혁명 선언의 용도로 재배치된 구호일 뿐 창조물로서의 시간순서가 방점인 텍스트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문학은 다르다. 순수문학은 창작이 생명이기 때문에 그 어떤 텍스트보다 엄격한 표절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 모든 텍스트가 창작의 영역이라는데 이견을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은 비문학보다 작가(저자)로 하여금 창작의 양심과 그에 따른 긴장감을 훨씬 더 많이 요구한다. 모든 문학적 글쓰기의 태동이 작가의 의식적 순결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허구의 것으로 현존의 시공간을 재구성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하는 문학의 일차적 힘은 바로 '진실성'에 있기 때문이다. 남의 것을 도둑질해서 '말할 것을 말해야 하는 문학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작가는 문학 위에 진실을 쌓는 게 아니라 반드시 진실 위에 문학을 쌓아야만 한다.

   신경숙은 이번 표절 논란에 대해 신속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는 「우국」을 읽어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이런 일은 작가에게 상처만 남는 일이라 대응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라는 말이 꺼림직하지만 이번 의혹을 단칼에 부인하려는 의지는 엿보인다. 하지만 당사자의 해명과는 상관없이 온라인상에서 폭포수처럼 번지는 비난의 목소리는 줄어들 기세가 보이지 않는다. 거의 모든 언론이 의혹을 제기하고 있고 대부분의 네티즌들이 성토하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 문단의 방향을 제시해온 책임있는 작가라면 한 걸음 더 나서서 자신의 구체적인 목소리를 내줘야 하지 않을까.

   나는 이번 논란의 본질을 '신경숙의 표절'이라는 단선성에 두지 않는다. 대형 작가의 표절 의혹을 음지에서 비호한 문단과 출판사의 잘못된 관행이 본질이다. 이번 표절 의혹에 대해 대부분의 평론가와 작가들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표절의 진실 여부와 무관하게 아무런 문제제기 없이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해온 한국 출판계의 더러운 민낯은 정말 충격적이다. 소위 '메르스급'이다. 한국 문단의 발전을 좀 먹는 거대한 병원성을 침묵과 비호로 잠복해온 바이러스의 존재를 밝힌 것만으로도 이응준의 용기는 박수를 받을 만하다.

   신경숙 개인의 입장표명과 별반으로 출판사 창비의 해명은 그야말로 수준미달이다. 국내 최대규모의 문학 전문 출판사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유아적 수준의 해명을 내놓았다. 창비의 해명은 '표절되었다고 주장하는 미시마 유키오라는 작가가 극우민족주의다'라고 폄하하면서 신경숙의 글이 더 뛰어난 작품이라는 식의 논지를 펴고 있다. 논란의 중심에 있는 표절 글을 공정하고 객관적인 차원에서 대등하게 분석하기보다는 외연의 부차적 요소를 프레임화하여 본질을 희석시키려는 아마추어리즘을 보여주고 있다. 쪽팔리지도 않는가. 그나마 트위터상에 일부 직원들이 잇따라 양심선언을 한 걸 보면 출판사 자체적으로 무언가 다른 목소리를 내줘야 할 상황임은 분명하다.

   워낙 충격적인 사건이라 글이 횡설수설했다. 입장을 정리하자. 이응준의 논지를 볼 때 표절 의혹을 피해가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작가나 출판사나 침묵으로 시간을 끌며 결국 유야무야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결국엔 양심의 문제다. 모든 표절 논란이 그렇지만 '칸트의 도덕률'만이 작금의 사태를 밝혀줄 빛이 될 듯하다.

   고백한다. 『외딴방』을 벌벌 떨면서 읽었다. 『깊은 슬픔』의 여운에 장시간 경도됐었다. 『엄마를 부탁해』는 처음으로 울면서 읽은 소설이었다. 그의 글은 아직도 내 생명력 속에서 살아숨쉬고 있다. 내가 사랑한 소설가 신경숙이 거짓을 말했다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잠재적 표절도 표절이다. "우주가 도와줬냐"는 문학평론가 조영일의 조롱은 표절 논란의 중심을 관통한다. 진실은 신경숙 안에 있다. 지금은 엄마를 부탁할 때가 아니다. 부디, 진실을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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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사랑 2015-11-18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확하게 본질을 짚어 주신 것 같습니다.

다윗 2015-12-01 15:47   좋아요 0 | URL
공감 고맙습니다.
 
해나가 있던 자리
오소희 지음 / 북하우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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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본질은 고통일까 행복일까. 서양철학사의 중요한 시기는 이 질문을 정면으로 관통한다. 공리주의자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은 인간을 "고통과 쾌락의 두 군주의 지배 하에 놓여있는 존재"로 규정했다. 그러나 다수의 현대사상가들은 인간의 삶을 '고통과 쾌락'이라는 전근대적인 기준으로 탐구하는 것에 거부권을 행사한다. 인생을 사변적인 이분법으로 재단하는 것은 나도 동의할 수 없다. 사람마다 다른 고유한 삶은 그 자체로 절대선이라 믿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여행에세이로 친숙한 작가 오소희가 소설을 냈다. 그의 첫 소설 <해나가 있던 자리>는 인간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단선적으로 상실과 박탈에 대한 이야기로 보이지만 보다 입체적으로 조망하면 인간 내면의 깊은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고민하는 삶의 보편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 오소희는 이 짧은 소설을 통해 삶의 '보편적 천국'이 '개별적 지옥'을 어떻게 극복해가는지 따뜻하고 진지한 언어로 보듬고 위로한다.

소설의 서사는 간명하다. 주인공 해나는 아들을 잃은 비운의 여인이다. 아들 재인은 여섯 살의 어린 나이로 목숨을 잃는다. 어린 자식을 먼저 저세상으로 보낸 엄마는 제정신일 수 없다. 해나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붙박이장의 차가운 금속 봉에 목매달아 죽을까를 고민한다. 그러나 "엄마, 행복해"라는 재인의 말을 상기하며 생각을 거둔다. 그리고 떠난다. 목적지 없이 멀리 떠나버린다. 작가는 해나가 계획되지 않은 여행을 통해 상처를 견디고 치유하는 과정을 동화처럼 아름다운 그림으로 그려냈다.

소설의 시공간적 배경이 되는 해나의 여행지 '그린레프트'는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작가는 현실의 상처를 비현실의 치유 속으로 밀어넣는다. 이 작가적 장치는 현실에서는 해나가 위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전제한다. '깊은 슬픔'의 본질을 결론적으로 굴종시키는 비본질의 외연이 실재의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다는 걸 암시한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우리네 현실이 피곤한 건 필요한 게 없어서가 아니라 불필요한 게 많기 때문"이라는 평소 오소희식의 세상보기를 그대로 반영한다. 그렇다. 불필요한 비본질의 과잉은 항시 본질의 영역을 침해하고 배반한다. 비극이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의 집필의도를 직선적으로 드러낸다. 한꺼번에 삼백 명의 아이들을 잃은 작년 봄의 광포한 상처는 우리 모두를 해나가 되게 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해나가 아니었다. 작가는 바로 그 지점을 포착하고 있다. 상실과 박탈의 지속성을 중단할 아무런 동력장치가 우리의 현실체계 속에서 존재하지 않았음을 꼬집는다. 이 책의 시작이 바로 거기서 태동했음을 작가는 밝힌다. 즉 이 소설은,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 현실에 실재한 '진짜 해나'가 벌떡 일어서서, 자신을 되찾고, 사랑받고, 사랑하는 모습을 미치도록 갈망하는 목적으로 씌어진 것이다.

소설을 읽다가 나는 어느 한 지점에서 잠시 멈칫했다. "살아서 벌어지는 건 다 축복이다"라는 소설 속 어느 여인의 대사가 나온 장면이다. 내가 정지한 건 나이를 먹을수록 이 말이 가진 거대한 본질에 깊이 동의해가기 때문이다. 그렇다. 삶은 고단하다. 하지만 그것을 채우는 수많은 순간들의 조합은 온갖 축복으로 가득 차 있다. 삶은 곧 축복인 것이다.

아직 생을 다 살지 않은 '지금 이 순간'의 시간대는 '삶이 곧 축복'이라는 명제를 오롯이 수용할 수 없게 만드는 한계적 속성을 내재한다. 인간은 현재라는 시간대만을 인식할 수 있는 존재다. 인간의 인식론은 신(神)의 것과는 다르다. 시간은 인간을 조롱한다. 과거는 영원히 정지해있다. 현재는 총알같이 날아간다. 미래는 머뭇거리면서 다가온다. 이 굴곡된 시간의 물리력은 인간이 종국의 순간에 직면하여 자신의 내면을 쓸어내리며 신의 차원에 한발 더 다가설 수 있는 동력이 된다.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건 시간대에 대한 통섭(通涉)의 내공을 누적하는 과정이리라.

인간은 상처의 종족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여러 상처와 아픔으로 충만하다. 안타까운 건 개별 인간의 비극과 무관하게 시간은 항시 보편적으로 묵묵히 흘러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의 일관성과 건조함 앞에 인간은 더욱 번민하며 좌절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아름답다. 종국의 희극이 순간의 비극을 압도할 미래의 시간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삶은 그 자체로서 선이고 사랑이고 축복이다.

서평을 정리하자. 삶은 아름다운 것이고 소망의 기한은 무한적이라며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오소희의 소설 <해나가 있던 자리>를 우리 주변의 '진짜 해나들'에게 추천한다. 그리고 그들이 옷장 속에서 용기있게 나올 수 있기를 기다리며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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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문학은 오에 겐자부로 전과 후로 나뉜다. "문학은 꼭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역설한 조정래의 외침은 오에 겐자부로의 작가적 현존에 그대로 닿아 있다. 고백컨대 오에 겐자부로는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입체적으로 천착하는데 객관적 원형이 된 작가이기도 하다.

    오에 겐자부로의 마지막 소설 『익사』를 설레는 마음으로 주문했다. 그는 이 소설에서 아버지의 존재성을 통해 일본 전후戰後 역사를 탐구한다. 자신이 아홉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 소설가가 되었는지 모른다고 말할 만큼 그와 아버지 사이에는 무거운 여백이 존재해왔다. 그의 80년 문학인생이 이 한 권의 소설로 어떻게 갈무리되는지 느끼기 위해 나는 오늘 그의 텍스트 속으로 침잠한다. 행복한 '잠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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