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일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평점 :
품절


나에게 소설가 김연수는 어려운 존재다. 한국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었던 시절 유독 김연수의 소설만은 잘 읽히지 않았다. 주제나 소재의 문제는 아니다. 내가 그의 소설을 싫어한 이유는 오직 문장 탓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젊은 여성 독자들이 문장을 이유로 그의 소설을 즐겨 읽는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문장 때문에 그의 소설을 멀리한다. 관찰과 사유의 깊이는 제법인데 그것을 문장력이 못 받친다고나 할까. 예나 지금이나 그의 문장을 읽는 내 평가는 여전히 냉소적이다.

『소설가의 일』은 2014년에 출간된 김연수의 소설론을 정리한 산문집이다. 작가의 창작론 정도로 보면 되겠다. 책 속에는 국내 거의 모든 문학상을 휩쓴 중년 작가의 집필 내공이 구체적으로 소개되어 있다. 소설의 구조, 플롯, 인물, 주제 등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의 거의 모든 설명서가 기록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 폴 오스터, 무라카미 하루키, 레이먼드 카버, 오르한 파묵 등 작가가 평소에 좋아하고 영감받아온 세계적인 소설가들의 명문장이 곳곳에 소개되며 작가의 주관을 돕는다.

김연수에게 소설 쓰기란 '무조건 닥치는 대로 쓰는 일'이다. 초반부터 완벽히 와꾸를 잡고 쓰는 게 아니라 쓰다 보면 소설의 길이 열린다는 게 김연수의 논리다. 그가 이 깨달음의 절정에서 쓴 소설이 바로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이다. "내가 소설을 쓴 게 아니라 소설이 나를 쓴다는 느낌이 들었다"라는 작가의 고백을 통해 글쓰기(특히 소설 쓰기)에 대한 운명론적 견인을 엿본다. 그리고 자신을 소설가로 이끈 다음 문장을 소개하는 대목은 일류 소설가 다운 걸쭉한 집념을 확인하게 한다. '왜 어떤 사람들은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그 길을 걸어가는가? 그 이유는 그 길이 죽음의 길이기 때문이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작가가 본격문학과 장르문학의 차이를 '캐릭터'와 '플롯'의 견인으로 설명한 대목이다. 동기를 중요시하는 캐릭터가 이끄는 소설이 본격소설이고, 사건 중심의 플롯이 이끄는 소설이 장르소설이라는 얘기다. 작가는 전자(본격소설)를 더 좋아한다고 고백하는데 소설에서 사건보다 인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소설 인물의 전형성이라는 측면과 맞닿아 있는데 외부 상황에 의해 이끌려가는 인물보다 자기 내면의 천착과 성찰을 통해 꾸준히 성장해가는 인물이 더 매력적이고 생명력이 크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으리라. 바로 그것이 본격문학의 위대함 아니겠는가.

소설의 시점을 얘기한 부분도 인상적이다. 소설가는 전지적 시점으로 소설을 써야만 하며 전지적 작가가 될 때까지 최대한 느리게 소설을 써야 한다고 작가는 강조한다. 일인칭 소설이라 해서 작가가 일인칭 안에 구속돼서는 안 된다. 일인칭 안에는 일인칭의 시선만 존재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일인칭 시점에는 이인칭 시점이 숨어 있다. 늘 타인의 시선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상정하는 인간관계의 본질을 부정하지 못한다면 '너로서의 나'와 '내가 보는 나' 사이의 간극과 균열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궁극의 힘이라는 사실에 어렵지 않게 동의할 수 있다. 헤르만 헤세의 유명한 소설 제목이 '싱클레어'가 아니라 '데미안'이 된 것을 가장 좋은 예로 소개한 작가의 설명은 탁월하다.

작가의 말을 계속해서 빌리자면, 종국적으로 소설가는 전지적 시점에서 소설을 쓸 수 있어야 한다. 일인칭과 이인칭의 시점이 '너-나'의 관계를 넘나드는 공간적 관점의 입체성을 부여한다면 전지적 시점이란 소설 안팎의 구분을 넘어서 절대적인 시간의 차원을 확보한다는 걸 의미한다. 작가는 이를 신(神)의 존재와 등치시킨다. 즉 시간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세계를 창조하되 자신은 그 시간 바깥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작가가 전지적 작가가 될 때 비로소 그 작품은 수십 년, 아니 수백 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객관적 예술성을 확보하는 고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게 바로 귀스타브 플로베르나 레오 톨스토이나 제임스 조이스가 한 일, 그러니까 '소설가의 일'이다,라고 끝맺는 작가의 마지막 문장은 감동적이다.

이제 이 서평의 첫 문단으로 돌아가자. 나는 서두에서 작가의 문장력에 호감을 갖지 못한다고 고백했다. 작가의 거의 모든 작품에서 교정되지 않은 난잡하고 장황한 장문장에 대한 거부감을 발산해왔다. 작가는 이 책에서 생각(사유)보다 문장이 우선한다고 수없이 강조한다. 일단 생각하지 말고 그냥 쓰라는 것이다. 오히려 생각이 아니라 감각이 필요하다고까지 말한다. 소설을 쓰지 않을 때에도 이 세계를 감각하라고 일갈한다. 하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나는 작가의 작품에서 유독 생각이 많은 소설의 전형을 발견해왔다. 화려하고 무언가 있는 것 같지만 정작 문장 자체는 제대로 잘 읽히지 않는 역설이랄까.

많은 독자들이 김연수의 문장을 좋아한다. 하지만 나는 그의 문장에 대한 대중적 찬사에 동의하기 힘들다. 김연수의 문장은 확실히 현란하다. 하지만 그 현란함은 문체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언어와 사유가 철저히 호혜적인 관계를 이룰 때 성립될 수 있다는 점을 주지한다면 김연수의 문장은 사유의 빈곤을 감추려는 수사가 아닌지 의심스럽다. 김연수의 문장에 뭔가 있어 보이는 것은 우선 의미 파악이 쉽게 안 되기 때문이다. 평론가 조영일은 이에 대해 '문장이 사유에 짓눌렸다'고 비평했다. 즉 생각이 너무 많아 문장을 억누르고 파괴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조영일의 입장에 있다.

서평을 정리하자. 김연수의 문장에 관한 내 개인적 호오와는 별개로 『소설가의 일』은 탁월한 산문이다. 오직 '소설 쓰기'라는 창작론을 주제로 이만큼 실제적이고 집중력 있는 책을 찾기란 쉽지 않다. 플롯 포인트, 불안과 무기력, 욕망(혹은 사랑)과 결핍이 채워주는 핍진성, 퇴고의 중요성, 캐릭터와 플롯 중심 소설의 차이, 30초 안에 소설을 잘 쓰는 법 등등 작가의 20년 내공이 담긴 많은 충고들이 돋보인다. 소설을 위시한 창작 글쓰기를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안내서가 되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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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0-02-10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김연수 소설집은 재미없었는데 이 책은 재미있었어요. 에세이와 소설 문장의 온도 차 무엇...
 
눈물의 생각
김호랑 지음, 김리연 그림 / 바른북스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포근한 시집을 만났다. 신간 『눈물의 생각』은 작가 김호랑의 따뜻한 시선과 화가 김리연의 수준 높은 그림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시집이다. 책에 실린 시는 작가가 대학생 때부터 쓴 습작시를 묶은 것이라 한다. 책 곳곳에는 삶과 자연, 인간과 사랑에 대한 작가의 따뜻하고 낭만적인 통찰이 가득하다. 작가는 우리 일상에서 쉽게 포착되는 평범한 소재들로 아름다운 시를 읊어준다. 

 

누군가 시인을 '천상의 영역에서 글을 쓰는 자'로 정의했던가. 그렇다. 시는 언어를 넘어선 세계이며 언어 이상의 우주이다. 세상의 수많은 소설가와 수필가들은 시인이 되지 못한 자신의 범상함을 한탄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엉덩이의 힘으로 글을 쓰고 있다. 문학에 계급은 없지만 시는 모든 글쟁이들의 이상이자 로망이다. 시 쓰지 못하는 사람이 소설 쓰고 소설 쓰지 못하는 사람이 비평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이러한 시의 위상을 증명이라 하듯이 작가는 몇 개 되지 않는 단어의 조합으로, 즉 극한의 압축으로 독자의 마음을 노크하며 농밀한 감동을 선사한다.

 

수록 시 중 가장 탁월한 시는 단연 「그리움」이다.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좋은 일인 것 같습니다"라는 후렴구를 가진 이 시는 '그리움'에 대한 작가의 심원한 통찰을 의도된 산문체로 들려준다. 함께 있어도 알지 못하고, 멀리 떠나와도 모르며, 아무리 그리워도 보이지 않는다,는 작가의 사색은 그리움의 본질을 관통하는 놀라운 천착이다. 이 시를 통해 작가의 과거를 엿본다. 작가 스스로 그리움의 끝장을 겪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삶에 무언가 '부재(不在)'한 것이 있었던 걸까. 부재는 '비존재(非存在)'와는 달라서 자신 곁에 없이도 그리워할 수 있는 것이기에.

 

표제작 「눈물의 생각」도 인상적이다. '눈물의 생각'은 기묘한 제목이다. 눈물도 생각할 수 있을까. 눈물에도 생각이 있을까. 여러 사유가 쌓인다. 시를 곱씹으며 나름으로 풀이했다. 눈물과 눈물 사이의 간극에 대한 의미라는걸. 눈물 자체만으로는 큰 의미를 갖지 못하지만 눈물과 눈물 사이의 여백과 시간까지를 담아낼 때 그 눈물은 관찰자로 하여금 수많은 생각을 포착할 수 있게 해준다. 어쩌면 우리 인간은 눈물 자체만을 보려 하고 눈물 앞뒤로 존재하는 시공간의 의미를 탐색하는 것에는 인색한 존재일지 모른다. 눈물과 눈물 사이를 탐색할 때 눈물 자체의 순도는 더욱 농밀해진다. 

 

이 시집이 더욱 매력적인 것은 화가 김리연의 수채화들 덕분이다. 책에 수록된 그림들은 거의 대부분 풍경과 자연을 대상으로 했는데 화가 자신이 직접 가지 않고서는 절대로 그릴 수 없는 느낌이 들 정도로 명징하고 생동하다. 시집 절반의 생명력은 김호랑의 시를 발군의 터치로 수식한 화가 김리연의 내공에 있다. 시와 그림이 시집 안에서 정겹게 조화한다. 시집 『눈물의 생각』은 김호랑의 시가 김리연의 그림을 견인하고 김리연의 그림이 김호랑의 시를 재해석하는 관계로 아름답게 포개져 있다.

 

고백하지만 시 읽기를 즐기지 않는다. 시가 가진 고밀성과 탁월성을 인정하면서도 텍스트에 관한 개인적 호오 탓으로 시를 멀리하는 편이다. 시의 운명론적 구조, 즉 압축의 무게를 감당할 자신(역량)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에게 있어 시는 무겁고 억압적이다. 반면 산문은 가볍고 자유롭다. 소설가 황순원은 "시는 젊었을 때 쓰고, 산문은 나이 들어서 쓰는 것이다. 시는 고뇌를, 산문은 인생을 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나의 문학적 감성은 다분히 늙은 것일까. 고뇌 없는 인생을 살기 때문일까. 이 진지한 정체성을 질문하게 한 것만으로도 시집 『눈물의 생각』은 탁월하다.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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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가 예전 같지 않다. 양과 질 모두 총각 때와는 전혀 다른 독서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다. 아이들이 좀 크면 방해받지 않고 독서를 즐길 수 있겠지, 생각한 건 큰 오산이었다. 아이들의 성장과는 무관하게 내 스스로 점점 나이를 먹어가며 체감하는 시간의 지독한 부족 현상이 내 독서를 방해하는 궁극의 요인이었다. 한 달에 스무 권씩 읽어냈던 좋은 시절은 끝났다. 이제 오늘만 지나면 내 나이 마흔둘이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시점이다. 요컨대 꼭 필요한 책만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2020년에 무조건 읽어야 할 책을 두 편 골랐다. 첫 번째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다. 과거 한차례 읽기를 시도했다가 중도에 포기한 이력이 있다. 내용 자체가 어렵다기보다 집중하기 힘든 프루스트 특유의 미로찾기 식 만연체에 초반부터 녹다운 됐던 기억이 선연하다. 가령 잠들기 전 뒤척이는 장면을 묘사하는 데에만 30페이지를 할애한다. 오죽하면 프루스트의 동생이 "이 소설을 읽으려면 중병이 들거나 한쪽 다리가 부러져야만 한다"라고 말했겠는가. 여하튼 새로운 번역으로 곧 재도전하려 한다. 내가 이 난해한 소설을 다시 읽으려 하는 이유는 시간과 인생 사이의 고밀한 함수성을 프루스트 식 조망으로 통찰해보기 위함이다. 나이가 들면서 '시간'의 의미를 보다 폭넓게 천착해보려는 버릇이 생겼다.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러간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가장 매끄러운 번역으로 평가받는 김희영 교수 번역(민음사 판)은 아직 완간이 되지 않아 古 김창석 시인의 완역본 세트(10권)를 물망에 올려놓는다.

 

   또 다른 책은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 강>이다. 소설가 박경리가 그토록 추천해 마지않았다고 알려진 유명한 소설이다. 그래서 예전부터 읽기를 갈망했던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마땅한 번역본을 찾지 못해 차일피일 해왔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가볍게 완독한 작년 말의 기억을 긍정하며 또다시 러시아 대작에 침잠해보고자 한다. 개인적으로 러시아 소설에 잘 감응하는 편이다.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투르게네프, 파스테르나크, 솔제니친 등 지금까지 만난 러시아 작가들은 모두 내 기호와 부합했다. '방대한 서사를 유려한 문체로 힘 있게 이끌어가는 힘'이야말로 러시아 문학이 가진 매력이 아닐까 한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동서문화사 판으로 만날 예정이다.

 

   고전은 하나의 거대한 산맥이다. 시대가 흐르고 문화가 바뀌어도 변질되지 않는 거대한 산맥 말이다. 작품 자체의 스케일이 크고 웅장할수록 독자로서 받는 정신적 확장의 사이즈가 커진다. 큰 작품이 큰 독자를 만든다. 2020년에는 시공간은 물론 정신과 의식의 확대 영역에서 굉장히 큰 사람이 되고 싶다. 크게 생각하고 크게 사랑하고 크게 꿈꾸고 크게 일하고 싶다. 내가 두 편의 고전을 예약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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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손글씨다. 손으로 직접 쓰셔서 어머니에게 전달한 편지라고 한다. 글씨도 명필이지만 내용도 아름답다. 단순히 사변적인 글이 아니라 자신의 일평생에 걸쳐 증명해온 글이기에 더욱 찬연하다. 저 짧은 편지 속에는 아버지의 삶과 철학과 인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지난한 고통의 나날을 지불해야만 되돌려 받을 수 있는 연륜의 축적이 정직하게 손글씨를 떠받치고 있다. 그것이 아들인 나를 감동시킨다.

 

훌륭한 아버지를 둔 건 한 사람 일생의 가장 큰 축복이 아닐까 한다. 자신의 아버지를 차마 존경하지 못하는, 혹은 존경할 수 없는 주변의 친구들이 여럿 있다. 그들은 젊었을 때부터 나에게 부러움을 표했다. "친구야, 너는 정말 좋은 아버지를 두었다. 나는 그런 네가 부럽다." 그때는 확 와닿지 않았던 말이 왜 나이가 들수록 더 선명하게 깨달아지는지 모르겠다. 인생의 진리가 대개 시간차를 통해 각인된다는 사실은 유한한 인간으로서는 서글픈 비극이다.

 

남자에게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라는 게 있다.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에서 처음 발표한 이론으로 "남성이 부친을 증오하고 모친에 대해서 품는 무의식적인 성적 애착" 정도로 정의된다. 프로이트는 모든 사람에게 존재하는 무의식적 소망을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에 나오는 고전적 신화의 내용과 연결했다. 그의 학설의 과학성과 면밀성은 차치하고, 내가 정말 감사한 것은 나에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 할 만한 경험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부모님을 동시에 인정하고 사랑했지만, 나에게 있어 아버지는 아버지였고 어머니는 어머니였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과하게 미워하지 않았고 어머니에게 과하게 애착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핵심이 되는 여러 개념들이 멘델의 법칙, 유전자에 관한 염색체 이론, 선천성 대사 장애, 호르몬의 존재, 신격 자극 장치 등의 생물학의 원리 앞에 무기력하게 기각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일면의 원리만은 남아서 아직도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갈등구조를 해석하는 연결고리가 되어 있다. 여자의 뇌구조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골 때린 알고리즘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버지의 존재론적 크기를 넘어서야 한다. 여기서 넘어선다는 건 앞서거나 누른다는 의미가 아니다. '관통'해야 한다는 뜻이다. 아버지의 현존을 관통하지 못한 아들의 실존은 대개 슬프고 절망적이다.

 

세상의 많은 아들들이 아버지라는 존재를 부정하고 아버지와의 틀어진 관계로 인해 인생을 좀먹는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아 내적으로 소화하지 못한 채 밖으로까지 흘러내려 가족과 지인에게 영향을 미친다. 특히 자기 자식에게 수직으로 흘러내리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유산은 과히 지독한 것이어서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는 공식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전술한 바 있지만 나는 내 주변 친구와 지인의 예를 통해 '보통 남자'가 갖는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 인상의 디테일을 수없이 목도했다. 그들은 대개 어둡고 건조하고 폭력적이었다. 슬픈 일이다.

 

고백하겠다. 나는 아버지를 통해 아버지라는 존재를 극복했다. 만약 그가 내가 인정할 수 없는 존재였다면 나는 나의 여느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술자리에서 분노를 표출하며 내 영혼을 좀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아버지가 너무 크고 웅장했기에, 그것을 순수히 인정함으로써, 자연스럽고 안정적인 방법으로, 그를 관통하고 넘어설 수 있었다. 그렇다. 아버지가 '참 아버지'가 될 때 아들은 아버지를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어느 것에 속박되지 않는 '진짜 남자'가 되어 자유롭게 세계와 타자를 주유(舟遊)할 수 있다. 그것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내밀한 방정식이다.

 

나는 아버지가 너무 멋있고 사랑스럽고 존경스럽다. 올해로 아버지의 연세가 일흔셋이다. 그의 일생의 말년이 건강하고 멋지고 품격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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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지옥으로 추락하는 이들을 위한 신학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지음, 손성현 옮김, 김진혁 / 포이에마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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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고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유신론자인 작가 도스토옙스키가 작중 인물인 무신론자 이반을 완전히 극복한 것인지 잘 정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반이 쓴 소설 속 소설 「대심문관의 전설」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에 대해 도전한다. 이는 자유와 빵의 문제로 주제화되는데,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본질적으로 긴요한 건 빵의 문제이지 자유의지에 관한 감당할 수 없는 선택적 문제가 아니라는 걸 무신론자 이반은 짧은 액자소설을 통해 강하게 웅변한다.

 

「대심문관의 전설」편이 기독교에 대한 역설적인 패러디라는 세간의 일반된 평가를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을 수용하고 이해함에 있어 내 속에서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은 찝찝함이 남아있다는 얘기다. 왜냐하면 기독교를 옹호하는 입장과 비판하는 입장 모두 도스토옙스키를 애정 있게 차용하기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는 톨스토이보다 정통 기독교 교리(및 신학)에 더 가깝게 읽히기 때문에 목회자와 신학생 사이에서 탐독이 권장되는 작가다. 그러나 그 반대편에서 더 찬양받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보자. 니체, 마르크스와 함께 기독교를 가장 고약하게 기각하려고 한 프로이트는 도스토옙스키를 셰익스피어에 견주면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지금까지 쓰인 가장 장엄한 소설이고 대심문관의 이야기는 세계 문학사의 압권이다"라는 아이로니컬한 찬사를 남겼다. 기독교를 허구와 망상으로 조롱한 프로이트가 도스토옙스키를 찬양했다는 점은 나에게 아이러니다. 사르트르의 선언 이후 독자의 해석권이 작가의 창작권을 압도하는 세계가 되었지만 작품의 핵심에 관한 이 다양한 해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처하기만 했다.

 

현대 신학자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의 『도스토옙스키, 지옥으로 추락하는 이들을 위한 신학』은 앞서 말한 나의 고민을 충족시키기 충분한 책이다. '칼 바르트의 『로마서』가 쓰이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 작품'이라는 소개가 눈에 띄었다. 그전까지 저자를 알지 못했던 나로서는 그 강렬한 소개 문구에 혹했고 더불어 출판사 '포이에마'에 대한 믿음도 있었다. 또한 평소에 좋아하고 신뢰하는 석영중 교수의 추천사도 한몫했다. 나는 오랜 기간 동안 석 교수의 여러 저작과 강의를 통해 러시아 문학의 조예를 넓히고 강한 도전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책의 두께는 상당히 얇다. 순수 분량만 따지면 한두 시간이면 읽을 수 있을 듯 보인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완독하는데 무려 한 달이 넘게 걸렸다. 기본적으로 도스토옙스키의 대표작들을 사전에 읽어두어야 진도가 나갈 수밖에 없고 저자의 문체가 문학과 신학을 동시에 담아내는 독특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 작품에 대한 유려한 주석으로 읽히지만 어떤 면에서는 가장 은혜로운 기독교 철학 에세이로 읽히기도 한다. 한 문장 한 문장이 주옥같고 아름답다. 명언의 나열이며 아포리즘의 향연이다. 이런 책을 이제서야 만났다는 게 부끄러울 정도다.

 

저자는 도스토옙스키의 대표작들, 가령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을 수시로 인용하며 자신의 신학론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특히 도스토옙스키의 말년의 역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대해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인간은 인간이다'라는 웅대한 주제를 관통하는 작품이라고 해설한다. 저자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소설 속 소설 「대심문관의 전설」에 대한 주석이라 할 수 있는 「이반 카라마조프, 대심문관, 그리고 악마」라는 편을 아예 별도의 장으로 꺼내 32페이지에 걸쳐 구체적으로 해설한다.

 

나는 기존까지 「대심문관의 전설」을 '기독교 제도권 내의 오류와 모순을 은유한 작품'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즉 이반을 발칙한 무신론자로 인정한 뒤에 그가 쓴 패러디 안에서 기독교의 허실이 무엇인가를 탐색했다. 소설 속에서 이반이 상징하는 바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명확히 해설한다. 이반은 하나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음이다. 그 어떤 인생도 피해 갈 수 없는 절박한 질문, 즉 하나님에 관한 질문을 애써 외면함이다. 바로 이것이 악마의 장난이요, 인생을 지옥으로 만드는 힘이다." 그리고 저자는 정리한다. 자기의 인생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부정하며 스스로를 속이는 인생이 곧 지옥이라는 것을.

 

「대심문관의 전설」에서 이반은 자신의 모든 지식과 사상을 총망라하여 기존 종교와 교회를 겨냥한 가장 무시무시한 공격을 감행한다. 문제는 하나님이란 존재를 신의 영역이 아닌 인간의 현실 속으로 구속시키려는 우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반이 단순한 무신론자가 아님에 주목한다. 소설 속에서 이반은 절대악을 대표한다. 이반은 『죄와 벌』의 스비드리가일로프, 『악령』의 스타보르긴과 키릴로프, 『백치』의 로고진과 같이 지옥을 은유하는 인물이되 이들의 정신 파괴와 자기모순을 대표하고 집대성하는 악의 화신이다. 이에 배치되는 인물로 동생 알료사가 있지만 그는 이반의 도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거나 반발하지 않는다. 도스토옙스키가 소설의 2부를 알료사의 이야기로 채우려 했다는 건 이 공백의 의미를 독자에게 이해시켜준다. 요컨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미완이기에 여러 다양한 해설(결론)이 난무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완벽한' 작품이 되었을지 모른다.

 

사실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이 잘 읽히지 않는다. 전지적 작가의 완벽한 묘사로 독자를 자신의 작품 속으로 자상하게 끌어들이는 톨스토이와는 달리 등장인물 간의 장황한 대화에 거의 대부분의 묘사를 할애하는 도스토옙스키 식의 소설 전개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 3년 전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을 때도 그러했는데 무언가 교정이 되지 않는 문장, 인물의 과한 표현과 언행, 어색한 상황 설정 등에 '이거 대문호가 쓴 위대한 역작이 맞아?'라고 의문을 가졌던 기억을 떠올린다. 저자는 나의 이러한 감상을 알기라도 하는 듯 "그의 소설이 터무니없다 싶을 정도로 무질서한데도 고전의 반열에 오르는 것은 그의 소설이 표방하는 과격한 부정(否定)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부정에서 나온 훨씬 위대한 긍정 때문이다."라고 강변한다. 계속된 서술에서 저자는 도스토옙스키의 월등한 인간 존재에 대한 치열한 질문을 소개하고 해설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어떤 관점으로 읽어야 하는지 도전받은 건 이 책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수확이다. 톨스토이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조만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다시 읽을 것이다. 3년 전 허리 수술을 앞두고 병상에 누워 인간에 대한 환멸과 삶의 녹록함에 지쳐있을 때 읽었던 소설이다. 감정을 절제하고 객관적으로 읽기 어려운 시기였다. 차분히 다시 읽어보려 한다. 이 고된 도전의 동기로 『도스토옙스키, 지옥으로 추락하는 이들을 위한 신학』이라는 보물 같은 책이 존재한다. 러시아 문학을 좋아하는 기독교인이라면 한 번쯤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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