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친애하는 적
허지웅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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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갑내기 방송인 허지웅에 대해 나는 여러차례 신랄하게 비판해왔다. 편견에 빠진 무지, 자본주의에 대한 몰이해, 짓까부는식의 소통방식, 나이에 걸맞지 않은 훈계조의 언행 등은 그가 가진 비호감스러운 개성들이다. 정치적 사안뿐 아니라 절반의 찬반을 가진 무거운 주제에 대해 자기 말이 절대적 진리인양 질타하는 그의 어법은 그야말로 밥맛이다. 

   허지웅의 말을 가만히 듣다 보면 내용과 실력은 갖추지 못한 채 이미지로 뜬 전형적인 군상이라는 느낌을 받곤 한다. 어떻게 해서 방송에 자주 출연하게 됐는지 모르겠으나, 지식인 코스프레를 하고 있지만 헛똑똑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최근 면접방식으로 토론하는 공중파의 모프로그램에서 대선후보 패널로 출연한 이재명 시장에게 넉다운 당하는 그의 모습은 꼴불견 그 자체였다. 면접관이 후보를 심문해야 하는데 논리와 지력이 딸리니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우기고 주장하는가. 핏대는 왜 세우는가. 무지는 태도 때문에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허지웅은 그 대표적인 예다.

   허지웅이 신간을 냈다. '한겨례'와 '씨네21'에 기고한 글에 새 글을 보탰다. 나는 이미 그의 전작 『버티는 삶에 관하여』를 읽고 "대책없는 포스트모더니스트의 시끄러운 소리"라고 혹평한 바 있다. 그는 전작에서 진지한 여러 사안에 대해 정통좌파식 억양으로 "자본주의(시장경제) 자체가 인간의 삶을 억압하는 기제"라는 싱거운 논리를 줄기차게 쏟아냈다. 그의 신간 『나의 친애하는 적』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시기와 소재만 바뀌었을 뿐이다. 그간 이런저런 사건을 거치면서 논리와 태도의 변화가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그의 신간을 집어들었지만 역시나 였다. 

   허지웅의 에세이 『나의 친애하는 적』은 전작 『버티는 삶에 관하여』의 2부이다. 내가 볼 땐 그렇다. 소재와 내용은 다르지만 난잡한 구조와 가벼운 맥락은 동일하다. 논조와 태도 또한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제목 '나의 친애하는 적'은 훼이크다. 제목만을 보자면 자신의 안티에게 온화한 제스쳐를 취하거나 지금까지 대중으로부터 누적되어온 오해의 담론들을 진지하게 탐색할 것이라는 기대를 자아낸다. 하지만 책 내용은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다. 달라진 것 없고 새로운 내용도 없다. 전작의 수준 딱 거기에 정지해 있다. 문학동네 정도의 출판사가 왜 이런 책을 출간했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평소 저자는 선배세대에 대해 뜨악한 입장을 자주 표출해왔다. 논란이 된 <국제시장> 발언도 그 연장선상이다. 이 책에서도 그 경향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저자는 아버지로부터 등록금 요청을 거절당한 일과 스물두 살 아르바이트 당시 믿었던 부장에게 월급을 뜯긴 일을 글감으로 삼아 책에 소개한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좋은 어른을 많이 만나보지 못했다고 토로한다. 최악의 어른이 늘 갱신되고 있다,고까지 말한다. 이해할 수 있다. 감정과 인식은 기본적으로 경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잊고 있는 게 있다. 사람과의 관계는 철저히 상대적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가 좋은 어른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상대 어른은 좋은 청년을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내가 상처받았다는 것은 거꾸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것과 동의어다. 사람 간의 문제를 타자만의 문제로 넘기는 그의 오해가 불편하다. 그에게 "이 세상에 좋은 어른은 많다"는 내 경험적 신념을 강요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굳이 조언한다면, 한나 아렌트가 역설한 '악의 평범성'을 타인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책의 뒷부분에서는 최근 불거진 주요 사회적 이슈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말한다. 국정교과서, 세월호, 최순실 게이트, 촛불 시위, 대통령 탄핵 등 마치 고양이가 생선을 만난 것처럼 호들갑이다. 책의 말미는 다음 세대에게 더 좋은 나라를 물려주기 위해 우리는 "싸워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며 끝맺는다. 선배세대가 흘린 피와 땀을 모욕해온 그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유산을 고민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아랫세대를 위한 따뜻한 세상은 윗세대가 물려준 유산을 겸허히 수용하는 것에서부터 만들어진다고 나는 믿는다. 

   책은 전체적으로 가볍고 조잡하다. 균형감각과 목적의식이 결여된 수준 낮은 에세이의 전형을 보여준다. 영화리뷰가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그 외에는 전체적인 맥락과 무관한 여러 잡문을 보탰다. 타 매체와 블로그의 글을 짜집기해 이런저런 잡문으로 엮은 난삽한 에세이를 15,000원이나 받는다는 건 불편하다. 저자의 허영인지 출판사의 오만인지는 모르겠으되, 종국적으로 내 지갑이 회개할 일이다. 


   한 문단 더 보태겠다. 저자에게 충고한다. 작가와 방송인은 공인이다. 공인은 대중의 사랑을 먹고 산다. 대중을 의식해서 헛소리하는 건 문제지만 대중을 무시하며 개소리하는 것도 문제다. 공부가 많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잘 모르면서 떠드는 무식이 가장 큰 문제다. 무거운 주제에 대해 가볍게 툭툭 던지는 경박한 태도도 문제다. 본인의 경험만으로 선험적 명제를 도출하지 말라. 자신의 프로필을 '글쓰는 허지웅입니다'라고 제시했다면, 무겁고 진지한 주제에 대해 깊이 공부한 뒤 겸손히 말하고 겸허히 쓰라. 그것이 '어른스러운' 순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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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에 가장 감동적으로 읽은 소설을 꼽자면 단연 윌리엄 폴 영의 『오두막』이다. 당시 이 한 권의 소설에 나는 녹록지 않은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렸다. 소설의 주인공 맥은 딸의 참혹한 죽음 앞에서 극한의 분노와 상처로 내면을 파괴당한다. 바로 그때 삼위일체 하나님은 맥을 찾아온다. 숭고한 자상함으로 맥을 위로하고 격려한다. 소설의 구조가 흥미로운데, 이야기는 픽션이지만 메시지는 팩션이다. 이 놀라운 소설이 영화화된다는 소식이 나를 자못 흥분시킨다.

   책 소개를 조금 더 하자면, 작가 폴 영은 하나님의 존재성을 삼위의 신으로 완벽하게 소개한다. 소설에서 맥이 오두막에서 만난 파파, 예수, 사라유는 그대로 성부, 성자聖子, 성령의 하나님과 연결된다. 세 위격이 하나의 실체로서 근본 하나님의 본체라는 기독교의 핵심 교의를 끌어내 한 사람의 영혼을 치유하길 원하는 신의 사랑을 구체적이고 진정성 있게 풀이한다. '오두막'에는 삼위의 하나님이 항상 함께 있었다. 서로 토의하고 기도하며 맥의 구원을 성취시킨다.

   원작의 메시지는 간결하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실존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는 우리가 흔히 오해하고 있는 하나님의 인성人性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근본적인 교제에 대해 깊이 있으면서도 밀도있게 접근한다. 주인공 맥이 오두막에서 만난 인간 형상들은 하나님의 인성을 아주 잘 묘사한다. 제도나 규칙이 아닌 관계를 통해 자신의 피조물과 호흡하려는 신의 성품이 이야기 곳곳에 잘 드러나 있다. 상처받은 한 명의 인간에게 구체적이고 진실된 심정으로 진리와 평안을 전달하고자 하는 신의 수고로움을 오두막이라는 표상적 시공간을 통해 작가는 따뜻하게 녹여놓는다. 정말 아름다운 소설이다. 

   모든 영화는 원작에 못 미친다. 잘 만들어야 본전이다. 소설은 텍스트고 영화는 영상이다. 텍스트는 독자의 머릿속에 특정한 이미지를 일원화하지 않는다. 독자는 문장을 읽고 자기만의 자유와 개성으로 작가의 제시를 상상한다. 구속력보다 상상력이 앞서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다르다. 영화는 영상으로 모든 걸 다 보여준다. 표정과 색채, 배경과 분위기까지 완벽히 보여준다. 영상의 구속력이 관객의 상상력을 압도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영화가 원작(소설)에 필패하는 이유다.

   물론 아직 개봉도 하지 않은 영화에 대해 선입견을 갖는 건 불필요할 것이다. 원작이 훌륭하기 때문에 기대하는 것이다. 저예산 밀실 스릴러 영화 <이그잼>으로 유명한 스튜어트 하젤단이 연출했고 <아바타의> 샘 워싱턴이 주인공 맥의 역을 맡았다. 지나치게 종교적인(기독교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어 대중적으로 널리 흥행할 영화는 아니다.

   나는 원작자 윌리엄 폴 영이 내한했을 때 독자 사인회에 참석해서 그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현대적 감각으로 다루는 것에 대해 두렵거나 힘들지는 않았습니까" 내 질문에 그는 "매우 좋은 질문"이라고 운을 뗀 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두렵거나 어렵지 않았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렇다. 그 간결한 작가의 메시지가 소설 『오두막』을 창작할 수 있는 신성한 동기이자 영화로까지 제작될 수 있는 근원의 힘이었을 것이다.

   워낙 감명깊게 읽은 원작이라 영화 개봉 소식에 나도 모르게 들떠서 횡설수설 글 몇 줄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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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류시화 지음 / 더숲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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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를 좋아하지 않는다. 시를 제외한 모든 종류의 텍스트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시보다 산문이 좋은 이유는,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시의 구조가 가진 불명확한 압축에 묘한 결핍과 피로를 가진다고나 할까. 요컨대 나에게 시는 피곤한 세계다.

   물론 시는 위대하다. 시인이 되지 못해 소설 쓰고 소설가가 되지 못해 평론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시는 언어의 정점인 동시에 언어를 넘어선 세계다. 시인은 최정상의 글쟁이인 것이다. 시인이 되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초라하게 관조한 적이 있다고 고백했던 소설가들이 있다. 톨스토이도 그랬고 공지영도 그랬다. 시는 넘사벽의 세계인 것이다.

   시는 좋아하지 않지만 시인이 쓴 산문은 좋아한다. 산문 자체를 좋아하기 때문에 '시인이 쓴 산문'이라는 역설적인 기대감을 무의식적으로 전제한다. 그리고 실상 시인이 쓴 산문은 달랐다. 유려하고 군더더기 없으며 핵심적인 낱말로 문장을 구성했다. 연이어지는 짤막한 문장들로 삶과 인간과 우주에 관한 중요한 토막들을 웅변했다. 시인의 시는 별로였지만 시인의 산문은 아름다웠다. 내 수준이 딱 거기까지다.

   류시화의 신간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는 시인이 쓴 산문집이다. 여러 삶의 단편들을 시인의 언어로 담았다. 작가는 총 51편의 산문 속에 삶과 인간에 대한 내적 담론을 녹여냈다. 시인 특유의 울림과 시선이 잘 담겨 있다. 주로 여행을 통해 추출한 여러 삶적 디테일이 문장 속에 오롯이 녹아 있다. 과히 아름다운 글의 향연이다. 독자만 즐겁다.

   수록 산문 중 상당의 글들은 이미 페이스북에서 여러 독자들에게 소개한 바 있다. '퀘렌시아', '찻잔 속 파리', '혼자 걷는 길은 없다', '마음은 이야기꾼', '장소는 쉽게 속살을 보여 주지 않는다' 등의 글들이 그렇다. 특히 표제작인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의 내용 중에는 "나무에 앉은 새는 가지가 부러질까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는 나무가 아니라 자신의 날개를 믿기 때문이다"라는 명문장을 담아 작가 자신의 인생철학을 오롯하게 드러냈다. 
 
   작가는 글감의 주된 소재를 여행에서 얻은 듯하다. 수록 산문의 절반 이상이 여행에서의 경험 혹은 여행이 준 깨달음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해마다 이어지는 인도여행에서의 경험은 책 곳곳에 빼곡히 들어서 있다. 작가에게 인도는 특별한 시공간이다. 그에게 인도는 명상의 나라이자 깨달음의 공간이며 시적 창작이 만개하는 곳이다. 작가 자신의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장소를 사랑할 수 있는 건 여행자 자신이 그곳의 혼에 닿았기 때문이다. 장소의 혼에 다가간 작가의 고결한 사랑이 정갈한 글을 낳았다. 아름다운 피드백이다.

   문학평론가 로자(필명) 이현우는 시와 소설은 존재론적으로 완전히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소설은 일상성에 대한 예찬이다. 하지만 시는 일상을 충돌하고 거부한다. 말랑말랑한 일상의 디테일을 시의 언어가 수렴할 수 있다는 건  애초에 불가하다는 것이다. 시와 소설의 세계는 완전 분리되어 있고 서로를 완전 배반한다. 이것이 바로 시인의 운명적 고립이자 위대한 고독이다. 작가가 항시 일상을 떠나 여행길 위에서 삶과 인간을 천착한 데에는 이러한 시적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오롯한 자기반영이었을 것이다.

   서평을 정리하자. 시인의 산문은 달랐다. 미사여구를 배제한 절제의 언어가 아름답다. 형용사와 부사를 자제한 담백한 문장이 인상적이다. 언어의 낭비없이 진정성과 메시지를 동시에 담았다. 수월하게 읽히면서도 적정량의 무게는 잃지 않았다. "내가 묻고 삶이 답하다"라는 매혹적인 문구로 띠지를 두르고 있는 류시화의 신간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를 지난한 일상에 지친 이 시대 모든 피로한 자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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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내공 - 육아 100단 엄마들이 오소희와 주고받은 위로와 공감의 대화
오소희 지음 / 북하우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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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시대 가장 사랑받는 여행작가 오소희가 신간을 냈다. 기존의 여행에세이와는 다른 '엄마들의 이야기'를 주제로 삼았다. '육아 100단 엄마들이 오소희와 주고받은 위로와 공감의 대화'라는 인상적인 수식어구를 전면에 배치한 <엄마 내공>은 엄마와 여자 사이에서 존재론적 번민에 빠져 있는 이 시대 모든 엄마들에 관한 이야기다. 저자 오소희는 이 얇은 에세이를 통해 녹록지 않은 현실에서 아이를 양육하며 자신의 삶을 지탱해가고 있는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 진지하게 사색하고 공유한다.

   이 책이 다른 육아집과 구별되는 지점은 저자 혼자만의 설명이 아닌 여러 팔로워들과의 교류과 공감에 있다. 저자의 블로그에 많은 고민과 질문이 제기된다. 여기에 여러 이웃의 조언과 경험담이 댓글로 달린다. 이를 저자가 종합적으로 조화하고 조정하면서 각 주제에 대한 '엄마론'은 갈무리된다. 신간 <엄마 내공>은 이러한 연대의 방식으로 현실 엄마로서 가지는 실제적인 육아 고민들을 한 권으로 묶은 책이다.

   책의 구성은 간명하다. 네 개의 큰 주제에서 총 27개의 질문을 뽑았다. 사교육, 대안학교 등의 눈에 보이는 현실의 영역부터 관계, 관심 등의 보이지 않는 정서적 영역까지 크고 작은 육아적 담론을 관통한다. 육아라는 분명한 카테고리를 주제로 다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기존의 에세이적 감수성을 잃지 않았다. 책 곳곳에서 따뜻함이 느껴진다. 선술한 바와 같이 일방적인 설명이 아닌 서로 간(팔로워-저자)의 위로와 공감의 소통에 방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통계와 해외적 사례를 제시하며 일방적인 정답을 제시하는 기존의 육아집과는 궤를 달리하는 부분이다.

   이 책이 특별한 이유는 저자 특유의 유려한 문체 만큼이나 아름다운 경험이 뒷받침된 데 있다. 저자는 아들 중빈이 36개월일 때부터 터키를 시작으로 세계 여러나라를 여행하며 경험을 쌓았다. 그 경험은 저자만의 것이 아니었고 중빈에게도 그대로 흘러내려 지금의 중빈을 만든 동력이 됐다. 무엇보다 여행의 기계적 기능보다 내재적 과정에 중심을 두는 저자의 여행관은 독자의 가슴을 어루만지는 글을 추출하는 원동력이다. 이러한 저자의 작가적 힘은 이번 신간에서도 유감없이 발현하고 적용됐다. 저자에게 있어 '삶', '여행', '육아'는 본질의 영역을 공유하고 피드백하는 '연결된 우주'인 것이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정말이지 힘든 일이다. 특히 공교육의 초점이 오직 '대학입시'에 맞춰져 있는 한국적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다. "조부모의 경제력,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이 아이를 성공으로 이끄는 요건이다"라는 얼토당토않는 말이 강남 엄마들 사이에서 유행이 될 정도로 대한민국의 교육담론은 많은 부분 고장 나 있다. 이런 배경에서 올바른 육아의 원형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끊임없이 자기자신을 반추하는 여러 엄마들의 대화는 아름답고 찬연하다.   

   저자는 과거 자신의 첫 에세이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건 고마움을 배운다는 것과 동의어다"라고 육아를 멋지게 정의한 바 있다. 그렇다. 아이를 키울수록 나 자신은 점점 더 낮아진다는 걸 느낀다. 어떨 때는 낮아질대로 낮아져 더이상 내려갈 수 없는 나의 최저점에 다다르기도 한다. 그러나 낮은 곳에 위치해 있음을 자각하면서도 결코 비루하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극한의 최저점에서 객관화된 '참 나'를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몰랐던 나의 감추어진 이면을 발견하는 건 경이롭다. 요컨대 아이는 부모로 하여금 삶과 우주를 객관적이고 입체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숭고한 동기이자 신의 선물인 것이다.

   작가 오소희를 만난 지 어느덧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책만을 좋아했던 총각시절이었다. 그와 나는 작가와 독자로 우연히 만났다. 그는 사석에서 내게 사랑을 찾는 용기에 관해 조언했다. 이후 나는 내 사랑을 다시 찾았고 결혼에 골인했으며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동시에 그는 나를 터키와 라오스로 안내했고, 아프리카와 남미로 데려갔으며, 사랑을 가르쳤고 아름다운 동화를 들려주었다. 국가적 비극으로 깊은 슬픔에 빠져있을 때에는 감동적인 소설로 '삶은 곧 축복'이라는 걸 일깨우기도 했다. 작가적 일면성을 초월한 따뜻한 위로자이며 조언자로서 내 영혼의 일부분을 차지해왔던 것이다.

   그는 항상 썼고 나는 꾸준히 자랐다. 그가 쓰는 만큼 나는 성장했다. 작가와 독자라는, 서로 다른 존재론적 스탠스에 맞물려 있지만, 그와 나는 고밀한 영혼의 영역에서 서로를 피드백하며 성장해온 것이다. 그와 동시대를 공유하고 그의 글에 감동을 누적해왔다는 것. 그것이 나를 고무하고 성장시킨다는 사실에 나는 아낌없는 영광을 헌사한다. 

   오소희의 신간 <엄마 내공>을 이 세상 모든 위대한 엄마들에게 자신있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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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와 우상 - 전원책의 정치 비판
전원책 지음 / 부래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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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원책의 신간 <잡초와 우상>을 힘들게 읽었다. 어렵지도 않은 책을 힘들게 읽은 이유는 간단하다. 너무 재미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민주주의의 오류가 어떻고 정치인의 위선이 어떻고 하는 등의 공염불과 같은 얘기를 어마어마한 분량의 각주와 함께 지난하게 설명한다. 현실적으로 크게 와 닿지 않는 정치학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따분한 내용을 왜 글감으로 삼았는지 모르겠지만 이마저도 자기만의 매력적인 언어로 풀어내지 못하고 있어 따분한 글을 읽어야 하는 독자만 곤욕이다.

   사실 그간 출간된 몇 안 되는 전원책의 책들은 한결같이 무료하고 재미없다. 재미없는 주제를 더욱 재미없게 쓰는 게 전원책표 필력의 현주소다. 과거 시인으로 데뷔했다던 그의 시적詩人 유전자는 온데간데없다. 정치 관련 책을 재미로 보느냐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겠다. 그러나 한국에서 정치만큼 뜨겁고 재미있는 주제가 어디 있나. 예컨대 강준만의 책들은 한결같이 재미있지 않나. 지나친 비교평가일 수 있으나 그의 텍스트 생산능력이 [썰전]에서 겨루는 유시민의 절반만 되었더라도 형편없이 재미없는 책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식인 전원책에 대한 내 견해는 긍정과 부정이 공존하는 입장이다. 긍정은 그가 내세우는 보수적 가치에 대한 오롯한 공감에 있고, 부정은 깊이있는 지식의 발굴 노력과 그것을 축적하여 자기만의 브랜드를 만드는 데 힘을 쏟기 보다 우선 목소리 높여 상대에게 일갈하고 보자는 꼰대식 태도에 대한 불만에 있다. 흥분하고 목에 핏대를 세운다고 본인의 주장에 탄력이 붙는 건 아니다. 진보·보수, 니편·내편을 떠나 솔직히 그가 유시민의 토론 상대가 되는가. 그나마 유시민에게 버티기라도 하려면 논리적 맥락과 이성적 차분함을 잃지 않으면 안 된다. 

   지식인으로서 전원책의 고질적인 한계는 책을 많이 읽은 건 알겠는데 그 지력의 발산이 타자적 언어의 나열에 불과하다는 데 있다. 예컨대 이번 신간에서도 '그의 언어'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어마어마한 각주는 저자의 성실한 인용표기로 볼 수 있지만 반면 그의 텍스트가 타자적 지식의 병렬적인 나열에 함몰되어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내공있는 지식인의 언어는 'output' 되기 전에 자기 언어로 치환되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 그 다음에 논리적이고 평이한 보편의 언어로 독자에게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 그가 한국 보수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생각한다면 여러 담론에 대해 자기만의 매력적인 언어로 풀어내지 못하는 한계는 참으로 아쉽다.

   대북관계, 복지정책, 병역제도, 노사문제 등 우리사회의 여러 이슈에 대해 나는 전원책과 같은 입장을 공유하고 있다. 여태까지 그가 미디어에서 보여준 내·외면적 아우라는 제법 강렬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존재가 한국 보수의 자산으로 수렴되어 왔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세계를 변혁하는 지식인의 종국적인 역할이 활발한 집필활동을 통해 지적 자산을 남기는 것이라고 했을 때 전원책의 책과 글은 아쉬워도 너무 아쉽다. 그가 그토록 싫어하는 칼 마르크스는 인류역사상 가장 매혹적인 선동집 <공산당 선언>을 집필했고, 버트런드 러셀은 살아생전에 발군의 필력으로 68권이라는 기념비적 저작들을 남겼다.

   작금의 한국 보수는 큰 위기에 봉착해 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보수가 '수구' 혹은 '꼴통'과 등치된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일베'를 보수의 한 분파로 인식하는가 하면 '성추행'과 '부정부패'를 한국 보수의 독특한 특질로 규정하는 이들도 있다. 서점가에서는 보수적 담론은 거의 팔리지 않는다.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읽은 대학생은 거의 없고 로버트 노직의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라는 책은 있는지조차 모른다. 미국에서는 거의 팔리지 않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200만 부 이상 팔린 것과는 대조적인 현상인 것이다. 이러한 지식의 편향은 마치 정의의 문제인양 프레임되고 있어 더욱 암울하다. 이런 상황에서 보수 지식인의 책이 일반독자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있는 점은 아쉽고 안타깝다.

   그는 여러 강연에서 유독 좌파 지식인들에 대한 예민한 감정을 표출해왔다. 예컨대 마르크스, 러셀, 프로이트, 사르트르 등 그가 두들겨 깐 사상가들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그의 표적이 됐던 지식인들은 일관되게 어마어마한 저작을 남긴 불세출의 필력가들이다. 그들을 깔 시간에 자신의 텍스트 수준은 어떤지 냉정하게 돌아보는 소크라테스적 이성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다면 어땠을까. 전원책에 대한 나의 이러한 냉소는 그가 한국 보수계의 소중한 보석이라고 생각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애정의 독설인 것이다. 제발 책 좀 매력적으로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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