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해리 세트 - 전2권
공지영 지음 / 해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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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시대 가장 사랑받는 작가 공지영의 열두 번째 장편소설 『해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뜨겁다. 출간과 함께 베스트셀러 최상단에 올랐다. 불매 운동, 평점 테러 등의 좋지 않은 해프닝이 있었지만 발간 이틀 만에 초판 6만 부가 매진되었다. 최근 모 정치인 스캔들 관련 발언이나 SNS 활동 등이 이슈가 되어 여러 매체에 작가의 이름이 자주 거론되어 왔다. 더욱이 이번 소설의 소재 때문에 '아군에 칼을 겨눴다'며 정치적, 이념적 공격을 받기도 했다. 작가는 작품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이에 그 어떤 편견과 선입견도 거부한 채 작가 공지영이 『높고 푸른 사다리』 이후 5년 만에 출간한 신작 장편소설 『해리』에 깊이 침잠한다.

   『해리』는 인터넷신문 기자 '한이나'가 여러 경험을 통해 의문의 사건들을 알게 되고 그것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악이 실제는 집단의 악을 구성하거나 대표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 근원을 파헤치는 이야기를 담았다. 한 신부의 법적, 도덕적 일탈 하나조차 처리하지 못한 채 조직의 권위와 이미지를 덮기 위해 거짓으로 일관하는 가톨릭 교구의 추악한 단면을 꼬집었다. 장애인 복지를 위해 피땀을 흘리며 헌신하는 듯하지만 실상 온갖 비리와 부패로 점철되어 있는 사회활동가와 정치인들의 추한 모습도 담았다. 겉으로는 선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내밀한 곳에서는 여러 형태의 악으로 가득 차 있는 종교와 시민(복지) 단체를 고발함으로써 주변의 잘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더욱 진지하고 냉정하게 조명해야 한다는 점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이 소설은 10년 전 출간된 장편소설 『도가니』와 연결되어 있다. 『도가니』의 배경이 된 안개의 도시 ‘무진’이 또다시 소설의 시공간이 됐다. 『도가니』의 주인공 '서유진'도 재등장하여 중요한 조연의 역할을 담당한다. 『도가니』의 주요인물 장 경사가 단역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고 온갖 불편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는 점도 비슷하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는 서양 격언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작가는 선의를 위협하는 악의 카르텔이 얼마나 간사하고 조직적인 형태로 우리들 가까이에서 안개처럼 스며들어 있는지를 소설로 형상화한다. 

   작가는 인간이 얼마나 악할 수 있는지 시험하기 위해 작정한 듯 소설 속 악의 양대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이해리'와 '백진우'의 악행을 극단까지 몰고 간다. 악녀 이해리는 선함을 가장하고 끊임없이 가면을 바꿔 쓰며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카멜레온과 같은 인물이다. 가톨릭 신부 백진우는 진보와 신앙의 탈을 쓰고 있지만 이해리를 배후조종하며 악행을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야만인이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개인의 엽기적인 악행의 퍼포먼스와 이를 구조적으로 보완하고 피드백하는 공동체적 악의 카르텔의 모습에 구토가 나올 정도다. 중요한 포인트는 그 악행들이 선의 이름으로 내밀하게 포장되어 있다는 점이다. 

   작가는 우리 사회의 최전선에서 정의와 진리를 부르짖어온 가톨릭, 인권단체, 기자를 지독한 악행의 실재로 묘사했다. 물론 이러한 작가적 허구(설정)가 완전히 백지에서 펼쳐진 건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이 소설은 실화를 기초로 했다. 예컨대 천주교계의 비리와 성폭행 사건, 인권 유린 논란이 불거졌던 대구 희망원 사건, 불법 시술과 아동 학대 혐의가 제기됐던 전주 목사 봉침 사건 등의 실제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통속적으로 선과 진보, 정의와 민주주의의 편에 서있다고 수렴되어온 세력을 구조적 악행이 날 것으로 야만화된 모델로 치환했을까. 그것은 바로 악의 '성질'에 있다.

   과거 진보를 표방한 자들의 반대에 있던 세력의 악행이란 대개 단순하고 가시화된 것들이라고 작가는 규정(전제)한다. 악의 형태와 물리력을 말하는 게 아니다. 악이 존재하는 화학적 구조에 관한 것이다. 즉 저들의 악이 쉽고 명확한 그 무엇이라면 이들의 악은 어렵고 복잡하게 엉켜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 편'이라는 이념적, 공동체적, 암묵적 카르텔에 함몰되어 그것을 포착하고 인정하기가 여간 쉽지 않다는 것을 작가는 소설 속에서 끊임없이 역설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작가의 이러한 의도를 특정 세력에 대한 비판 내지는 고발로 수렴하지 않는다. 보다 넓은 천착에서 가능성의 차원으로 이해한다. 나 자신, 내 주위, 우리 주변을 돌아보자는 것이다.

   이러한 작가적 문제 제기가 소설의 소재가 된 가톨릭과 장애인 단체에만 초점이 맞춰져서는 곤란하다. 선과 정의를 외치는 모든 개인과 공동체에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과 정의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인류사의 무수한 악행들은 그 사례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불행한 역사는 용기 없는 시대의 산물이었다. 사상과 이념, 종교와 이해관계를 떠나 잘못은 오직 잘못으로만 풀이되어야 한다. 어쩌면 작가 공지영은 선악(善惡)을 인식함에 있어 현상이 본질을 전복하고 각색이 내용을 압도하는 불편한 현실과 그것을 굳이 끄집어내기 싫어하는 일부 사람들의 구조적 위선에 대해 경각을 던지려 했을지 모른다. 난 이 소설을 그렇게 이해한다.

   소설에서 간간이 포착되는 작가의 실험적 장치가 인상적이다. 최근의 SNS 시대를 십분 반영하여 페이스북 디자인을 그림 형태로 표현했다. 악의 두 모델 이해리와 백진우의 SNS 발언을 페이스북의 시각적 외관 그대로 소설에 구현한 것이다. 두 인물의 위선에 찬 거짓말을 주로 페이스북 형태로 차용한 것은 SNS의 악의적 기능, 즉 가짜뉴스와 거짓정보의 재생산 기능과 확산 능력을 비웃고자 하는 작가적 경고가 아닐까 생각한다. 소설 속에서 주요 연도와 사건, 실명이 그대로 등장하는 것 또한 작가의 의도로 보인다. '세월호', '이명박근혜', '최순실', '대통령 탄핵' 등의 단어가 수시로 등장하는데 이는 소설은 허구로 쓰여진 이야기지만 강렬하게 현실과 일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작가의 의도된 동시대적 의지로 풀이된다. 즉 소설 『해리』는 과거나 미래가 아닌 '지금 현재의 이야기'인 것이다.

   반면 한 편의 소설로서의 한계와 아쉬움을 지적한다. 과연 2권짜리로 늘어져 쓰일 만큼의 서사였는지 의문이다. 소설의 얼개는 단순하다. 주인공 이나가 해리와 진우의 악행을 추적하는 과정이 이 소설의 기본 뼈대다.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현재적 위기를 이나의 과거 상처에 겹치기 위해 회상 신이 자주 등장하지만 소설의 흐름은 기본적으로 일차원적 시간의 흐름에 크게 이탈하지 않는다. 소설의 분량은 반드시 무게와 넓이를 증명해내야 한다. 작품이 지닌 사유의 무게와 서사의 질량을 받쳐내지 못하는 분량은 독자를 힘들고 짜증나게 하기 때문이다. 앞부분은 흥미진진하지만 뒤로 갈수록 서사가 늘어지는 느낌이다. 특히 주인공 이나가 소설의 끝 무렵에 다다라서 갑자기 감정의 변화가 일어나고 회복의 동기를 찾는 장면은 너무 갑작스러워서 집중하기 힘들었다. 작가가 긴 분량을 감당하지 못한 채 급하게 이야기를 마치며 독자에게 답을 요구하는 듯했다. 아쉬운 대목이다.

   작품 바깥의 얘기를 해보자. 최근 공지영 작가에 대한 여론의 비판이 녹록지 않은 것 같다. 대개 이념적으로 진보의 가치를 공유하는, 즉 같은 편이라 여겼던 사람들에 의한 비판인 듯싶다. 반면 보수적 스탠스에 있는 몇몇 지식인들은 공지영이 드디어 혼돈에서 벗어났다고 치켜세우기도 한다. 이렇게 우스운 광경이 벌어진 데에는 공지영 자신의 책임이 크다. 나만의 개인적 신념인지는 모르겠으되, 나는 작가가 작품 바깥에서 본질과 무관한 언행을 지나치게 많이 하는 것을 경계한다. 불필요한 오해와 편견이 문학의 해석(수용)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소설가로서 공지영이 보여준 여러 발언과 행동, SNS상의 흔적 등은 낯뜨겁기 그지 없는 것들이었다. 작가로서의 정제와 절제가 아쉽다. 아끼기에 하는 말이다.

   서평을 정리하자. 작품 평과 함께 작가를 향한 애정이 뒤섞여 산만한 글이 되었다. 소설 『해리』는 문제작이다. 각 파편들은 실화를 기초로 했지만 어느 것 하나 실화라 단정할 수 없는 모호한 긴장감을 전제하고 있는 소설이다. 중요한 건 메시지다. 어둡고 무거운 소재를 고매하거나 심원하지 않은 방식으로 차분하게 독자에게 전달하는 능력은 순전히 작가 공지영의 역량이다. 나 자신, 내 주위, 우리 주변에 구조적으로 악의 가능성이 숨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일깨운 것만으로도 소설 『해리』는 읽어볼 가치가 있다. 종교, 정치, 이념과 무관하게 누구나 읽어볼 만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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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앞의 한 사람
오소희 지음 / 북하우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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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와 같이 작은 생명체는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 그 광대함을 견뎌낼 수 있다."     - 칼 세이건

  
인간은 지극히 하찮은 종족이면서 더없이 위대한 종족이다. 작지만 크고, 악하지만 선하며, 무지하지만 지혜로운 종족이 바로 인간이다. 그렇기에 모든 인간은 완전히 개별적이다. 존재적 진폭이 무한대에 가깝기 때문에 인간은 그 가능성으로 하여금 항시 거대한 긴장상태에 놓인다. 결국 이를 가늠하는(규정하는) 건 사랑이다. 사랑은 이 아이러니의 본질이다. 사랑이 인간을 인간 이상으로 만든다. 

   신(神)이 우주를 압도적으로 크게 만든 건 인간의 가능성을 염두했기 때문이다. 먼 우주로 이동할 수 있는 과학적 역량을 말하는 게 아니다. 상상하기 힘든 거대한 우주적 시공간을 고차원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이 인간에게 특별히 부여됐다는 뜻이다. 잡지 못해도 가질 수 있고 가지 못해도 도달할 수 있는 신비한 힘은 바로 사랑으로부터 발현한다. 사랑이 인간을 구원한(했)다. 칼 세이건의 말처럼 작고 작은 인간 주제에 감히 세상의 광대한 현존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우리 시대 가장 사랑받는 작가 오소희가 사랑을 말한다. 그의 신간 <내 눈앞의 한 사람>은 사랑에 관한 에세이다. 그가 지난 십수년간 오대양 육대주를 여행하면서 겪고 관찰한 여러 사람들과의 만남이 사랑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응집되었다. 작가 특유의 시적인 문체와 울림있는 문장은 책 속에 담긴 여러 에피소드와 잘 호흡한다. 시와 산문이 지그재그로 배열되어 하나의 세트를 구성한다. 언어의 운용적인 면에서 과함도 없고 족함도 없다. 여러 여행을 통해 추출된 가지각색의 글감들은 깊은 사유와 촉촉한 언어를 관통하며 단단한 네러티브가 되어 독자의 가슴속으로 침잠한다. 독자는 피로한 일상을 잠시 접어두고 작가가 준비한 푸른 초장에서 잠시 가슴을 적신다.

   책 속에는 여러 사랑이야기가 소개된다. 작가는 다채로운 모습의 이성간 사랑에서부터 자기애와 모성애, 그리고 동성애까지 여러 사랑의 테마를 들려준다. 요르단에서는 억제하고 발산하는 양극단의 대조적 사랑을 하는 남녀를 만났다. 필리핀에서는 자기애를 향해 첫발을 내딘 여인과 조우했다. 파리에서는 여행가방의 절반을 초콜릿으로 채운 젊은 여인을 통해 자기자신을 좀 더 객관화해서 바라볼 수 있었다. 콜롬비아에서는 끊임없이 표현하고 발산하는 중년 연인의 뜨거운 열정을 보았다. 에티오피아에서는 에이즈에 걸렸음에도 치열하게 살아가는 여인을 통해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탐구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난 게이 커플의 순수한 사랑을 목도하며 "여행의 목적지는 장소가 아닌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임을 반추했다. 발리에서는 열일곱 소녀에게 마음을 빼앗기기도 했다. 각기 다른 포인트를 가진 스물세 편의 이야기는 총론적으로 하나의 메시지를 향해 뻗어 나간다. 삶이 곧 사랑이고 사랑이 곧 삶이라는 것을.    

   이 책은 저자가 7년 전에 출간한 <사랑바보>의 개정판이다.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초판의 첫 원고를 서른다섯에 썼다고 고백한다. 작가의 현재 나이에서 뺄셈을 하면 13년의 시간이 흐른 것이다. 순수 텍스트적 관점에서만 보면 초판과 개정판의 차이는 크지 않다. 제목과 출판사가 바뀌었고 이야기 몇 편이 대체(추가-삭제)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초판을 읽을 때와는 무언가 다른 느낌을 받았다. 읽는 근육과 감상하는 온도가 바뀐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시간이 흐른 탓이겠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여기에는 보다 본질적인 이유가 있다는 걸 알았다. 초판과 개정판 사이에서 내가 아빠가 된 것이다. 나는 아직도 선연하게 기억한다. 첫째 딸의 출산을 앞두고 부모가 될 준비를 하며 초판을 읽어내려간 7년 전의 봄날을.

   갓 결혼해 신혼부부의 감정으로 읽을 때와 두 아이를 낳고 학부모가 된 현존으로 읽을 때는 분명 차이가 있다. 사람과 사물을 보는 시각이 전과는 많이 달라진 것을 느낀다. 사랑에 대한 내 천착은 어느덧 애매한 천상에서 구체적 실재의 세계로 내려왔다. 이제는 크고 대단한 것만이 사랑이 아니라는 걸 안다. 오히려 사랑의 디테일은 작고 낮고 가난한 곳에 더욱 숭고한 형태로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는 일부러 고개를 들어 천국을 올려다보지 않는다. 사랑은 천상에 있는 게 아니라 지상의 영역, 즉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를 키우면서 이를 명징히 깨달았다. 

   책으로 돌아가자. 책의 제목을 주목한다. 책 제목 '내 눈앞의 한 사람'은 더없이 훌륭하다. "인류를 사랑하기는 쉬워도 내 앞의 한 사람을 사랑하기는 어렵다"는 말이 있다. 사랑은 삶이고 현실이며 실재이다. 사랑을 애매하고 신비한 형태로 저 멀리 가두어 놓으려 하는 자들에 의해 세계는 피곤하고 끔찍해진다. 사랑을 판타지라는 모호함으로 각색하지 말라. '내 눈앞의 한 사람'을 성실히 사랑하는 게 사랑의 본질이자 전부이다. 어쩌면 인간에게 유일한 죄악은 사랑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삶은 곧 사랑이다. 그래서 자신있게 추천하겠다. 오소희의 사랑 예찬론 <내 눈앞의 한 사람>을 이 세상 모든 사랑바보들에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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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로의 길 - 유럽의 교훈 석학인문강좌 69
박지향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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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명예혁명(1688), 미국의 독립혁명(1776). 프랑스의 프랑스혁명(1789). 우리는 이 세 혁명을 '세계 3대 시민혁명'이라고 부른다. 영국의 혁명은 의회를 중심으로 왕권을 제한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으며, 프랑스는 절대왕정을 타도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봉건적 체제와 중세적 관념을 타파하고 시민의 자유와 평등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세 혁명은 공통점을 가진다. 

   나는 선술한 3대 시민혁명 중 2개만 긍정한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입헌군주제에 안착해 현재까지 이르게 한 영국의 명예혁명은 말 그대로 '명예로운' 혁명이다. 비록 의회가 주도했지만 영국은 명예혁명 이후 지금까지 큰 정치적 혼란 없이 입헌주의의 전통을 잘 지켜왔다. 미국의 독립혁명은 영국 국왕의 압제에 대한 저항으로 군주, 귀족의 신분과 봉건적 토지 제도의 잔재를 일소하고 3권 분립에 의한 민주적 공화제를 인류 최초로 만들어낸 위대한 혁명이다. 하지만 프랑스혁명은 다르다. 혁명의 정의에 가장 근접한, 소위 '혁명의 어머니'로 불리지만 그 전개과정과 이후 프랑스의 역사를 조망하면 종국적으로 실패한 혁명으로 수렴된다.  

   프랑스혁명에 대한 평가는 다원적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실패한 혁명이라는 평가가 많아지고 있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현대의 다수 역사가들은 한 목소리로 프랑스혁명의 부정성을 논하고 있다. 나도 프랑스혁명이 실패한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이다. 영국과 미국은 올곧은 근대혁명을 통해 근대국가의 체제를 확립하고 시민의 자유와 안정을 꽃피웠다. 하지만 프랑스혁명은 요란하고 잔혹하고 참담한 대가를 치뤘지만 끝내 나폴레옹 독재로 귀결되었다. 이후 프랑스는 유럽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나폴레옹 체제 이후 극심한 정치적 혼란기를 거치면서 유럽의 2등 국가로 전락했다. 결국 1871년 보불전쟁에서 패한 뒤 유럽의 패권을 독일(프러시아)에게 넘겨줬다. 전통적으로 유럽이기를 거부해온 영국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여기서 프랑스혁명에 관한 부정적 입장을 구체적으로 공유할 생각은 없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근대성(近代性, modernity)'의 원류이다. 근대라는 말이 오늘날 더 이상 호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 탈근대를 이야기하는 요즘에 근대는 낡고 식상한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하지만 비판을 위해서라도 제대로 아는 것은 꼭 필요하다. 인류를 근대의 문으로 연 건 분명 유럽이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유럽의 근대를 논할 때 영국과 프랑스를 양축으로 언급한다. 이는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을 함께 아우른다는 의미인데 영국과 프랑스가 각 키워드를 대표한다는 것이다. 사실 영국적인 전통과 프랑스적인 특징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예나 지금이나 영국은 유럽으로 불리길 싫어하(했)고 프랑스는 유럽의 맹주이길 갈망한(했)다. 중세 말기의 100년 전쟁 이후 두 나라 사이의 지독한 긴장관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박지향 서울대 교수는 "근대성의 전범이라 할 수 있는 나라는 영국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신간 <근대로의 길>을 통해 근대 세계의 패권을 차지한 유럽, 그중에서도 특히 최강국인 영국이 어떻게 해서 그와 같은 눈부신 성취를 이룰 수 있었는지를 역사적으로 살핀다. "개인의 자유와 자율성을 보장해주고 소유와 권력이 비교적 고르게 분산된 사회가 궁극적으로 성공한 사회"이며, 그런 "자유와 소유와 권력의 분산은 유럽, 그중에서도 특히 영국에서 처음으로 확립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저자가 2014년 12월 한 달 동안 진행했던 한국연구재단의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를 기반으로 씌어졌다. '근대로의 길, 유럽의 교훈'은 평생 저자의 연구의 핵심주제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책 전반에서 저자의 거침없는 서술과 풍성한 자료 제시가 눈에 띈다.

   저자는 국내의 저명한 영국통이다. <영국사>, <제국주의>, <슬픈 아일랜드>, <영국적인, 너무나 영국적인>, <중간은 없다. 마거릿 대처의 생애와 정치>, <대처 스타일> 등이 그녀의 영국 관련 주요 저서다.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경계와 탈(脫)근대 담론이 일고 있지만 인류가 지독한 중세적 사고에서 벗어난 데에 영국의 힘이 컸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저자는 일평생 영국사를 천착하면서 중요한 원리를 하나 발견했다. 영국이 다른 나라에 비해 자유, 소유, 권력의 분산을 빨리 확립한 원인을 찾은 것이다. 그것은 바로 '개인(個人)'이었다. 프랑스처럼 많은 피를 흘리지 않았지만 영국은 광범위한 사회집단을 대변한 의회가 왕권을 제한하는 과정을 통해 개인의 자유를 확대해갔다. 개인에게 노동과 아이디어의 대가를 확실하게 보장해 주는 영국의 제도적 장치는 기술자에게 동기부여를 했고 산업혁명을 촉발했다. 집단을 극복한 '개인의 발견'이 영국이 이끈 근대성의 초석이었다.

   개인에 관한 철학은 결코 과거완료적 주제가 아니다. '개인'과 '집단'의 대립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소련이 해체되고 동구권이 멸망한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세계는 집단주의(collectivism)에 신음하고 있다. 내 돈은 우리 돈이 되었고 내 책임은 우리 책임이 되었다. 독립적인 개별 인간에 대한 책임의식이 '공동체'라는 말랑말랑한 용어로 뒤덮여지고 있다. 오랜 유교적 전통으로 인해 공동체의식이 유독 강한 한국사회에서는 개인주의(individualism)를 이기주의(egoism)와 혼동할 정도로 개인에 대한 철학이 빈곤해 있다. 물론 공동체 자체는 좋은 것이다. 하지만 공동체는 모호한 것이다. 불분명한 것이다. 명징하고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건 개인이다. 자유로운 개별 인간(개인)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사회를 구성한다. 즉 시선과 기준은 항시 개인에서 사회로 향하는 것이지 그 역순은 바람직하지 않을 뿐더러 가능하지도 않다. 바로 이 대목에서 이 책은 여러 지적 감흥을 제공한다.

   물론 이 책의 한계가 없지는 않다. 지나치게 전문적인 내용 때문에 대중적으로 널리 읽히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 강의내용을 정리한 것이라 읽는 내내 공부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곳곳마다 등장하는 수치와 도표도 이를 대변한다. 저자의 욕심이 컷던 듯하다. 조금 더 쉽고 편안한 방식으로 딱딱한 강의를 유연하게 풀어서 기술했다면 책의 존재감은 달라졌을 것이다. 흥미로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많은 독자를 확보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처 스타일>을 위시하여 과거 그의 저작들이 대부분 대중과 호흡해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아쉬운 부분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소중하다. 근대성의 역사적 원류를 살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근대라면 경기를 일으키는, 무엇보다 개인에 관한 탐구가 빈곤해 있는 한국의 현재성을 감안한다면 이 책은 꼭 필요하다. 이런 책이 많이 팔려야 한다. 독자로서 이런 책을 가까이 해야 한다. 유독 근현대사와 관련해 지난한 논쟁에 빠져 있는 대한민국의 현주소에서 이 책의 존재가치는 매우 높다. 전문적이고 딱딱하지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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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뭇한 소식을 전한다.

   톨스토이의 대작 <전쟁과 평화> 4부작이 드디어 완간된다는 소식이다. 출판사 문학동네의 최근 공지에 의하면 금월 24일에 마지막 4권을 출간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로써 작년 10월에 1권이 출간된 이래 만 1년 만에 새로운 번역본이 완간되었다. 국내 톨스토이 번역의 최고 권위자인 고려대학교 박형규 명예교수의 노고와 열정으로 무려 만이천 매의 원고에 달하는 거대한 분량의 대작이 원전에서 단 한 줄의 누락없이 완전하게 번역된 것이다. 박 교수와 편집자, 출판사 관계자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나는 오래전 범우사(박형규 역)판으로 이 소설을 읽었다. 아주 오래전이라 소설의 내용과 맥락이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다. 사실 작년 허리수술로 한 달간 요양할 기회가 있었을 때 이 소설을 다시 읽고 싶었다. 인간에 대한 환멸과 인생의 비애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때였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때였고 삶과 인간에 대한 기존의 믿음이 송두리째 흔들린 때이기도 했다. 나에게 남은 건 하나님과 가족, 그리고 책밖에 없었다. 인간과 역사 사이의 함수관계를 힘있고 거대하며 입체적으로 묘사한 <전쟁과 평화>의 장대한 한복판에 나 자신을 침잠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박형규 교수가 새롭게 번역한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할 수 없이 완간 때까지를 기다려오게 된 것이다.

   <전쟁과 평화>를 포기하고 읽은 소설은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었다. 이 또한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소설이어서 손에 땀을 쥐고 읽어내려갔던 기억이 아직도 선연하다. 문학평론가 이현우는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는 세계문학사의 양대산맥으로서 두 작가에 의해 세계문학(소설)은 전부 덮인다"고 말한다. 즉 세르반테스 이후 우리가 '소설(小說, novel)'이라고 부르는 형태의 모든 개별성들은 두 작가의 작품으로 오롯이 커버된다는 얘기다.

   도스토옙스키과 톨스토이는 소설을 쓰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 세계관 자체에 차이가 있다. 전자는 항상 삶을 얘기했고 후자는 끊임없이 죽음을 얘기했다. 전자는 정통 기독교적이며 후자는 변형 기독교적이다. 전자는 시선이 외부에서 내부로 향하며 후자는 내부에서 외부로 향한다. 전자는 인간 내면의 디테일 속으로 끊임없이 밀고 들어가는 반면 후자는 인간을 넘어 세계와 우주의 거대함 속으로 치고 올라간다. 톨스토이의 기본 세계관은 자아에 대한 무한대의 확장이다. 그 확장 과정에서 보편 인간을 만나고 러시아를 목도하며, 종국적으로 세계(우주) 전체에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결혼을 해서 아이를 키우다보니 나도 모르게 '거대한 것'에 대해 탐구하게 된다. 이는 마음의 넓이와 정신의 크기에 관한 것인데 나 자신과 세계, 그리고 신(神) 사이의 삼각관계를 보다 높은 차원의 방정식에서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인가. 역사란 무엇인가. 타자와 세계는 나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신은 얼마나 광대한 존재인가. 그리고 역사에서 그의 역할은 무엇인가 등등. 곧 마흔을 앞둔 나에게 이 장대한 소설이 어떤 울림을 선사할 것인지 자못 흥분된다.

   데카브리스트에 관한 탐구로 계획된, 1812년 나폴레옹 전쟁을 무대로 한, 나타샤의 성장소설이자 장엄한 역사소설인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완벽한 번역으로 곧 다시 읽는다. 올겨울은 '전쟁과 평화'의 한복판에 서 있을 것 같다. 지갑을 크게 열어 양장판 셋트로 지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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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개혁 500주년이다.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자신이 시무하던 비텐베르크 성당 게시판에 "교회는 변화되어야 한다"는 주제로 95개조 반박문을 붙였다. 이후 종교개혁의 불길이 전 유럽을 뒤덮었다. 신(神)은 더이상 교황과 사제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만인의 하나님이었다. 사람들은 활자로 인쇄된 성경을 읽으며 신에 더 가까이 다가섰다. 자기자신의 진본을 발견해갔다. 유럽 곳곳에서 개인에 대한 천착이 이루어졌다. 이후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이 터졌고 서구사회는 근대로 진입했다.

   사실 종교개혁을 시도했던 사람은 루터 이전에도 존재해왔다. 대표적인 인물로 얀 후스(Jan Hus, 1372~1415)가 있다. 그는 루터보다 100년 앞서 부패한 성당을 맹렬히 비판하고 면죄부 판매를 비난해 로마 교황에게 파문당하고 화형에 처해졌다. 그의 종교개혁은 비록 실패했지만 훗날 루터를 위시한 수많은 종교개혁자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오늘날 순교자로 추앙받고 있다. 그 외에도 유럽 여기저기서 비슷한 외침으로 종교개혁을 외친 선구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후스와 루터를 갈랐던 것일까. 다시 말해서 루터의 종교개혁을 성공으로 이끈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주지하다시피 그건 바로 인쇄혁명이었다.

   후스 시대는 활자가 발명되기 전이었다. 필사의 시대였다. 모든 것을 손으로 써야 했다. 후스의 외침이 전 유럽에 퍼지지 못했던 것은 그것을 대중적으로 전달(전파)할 소통의 수단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터의 시대는 달랐다.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이용한 인쇄술을 고안한 것은 15세기 중반이다. 반세기 사이 인쇄술은 독일 여러 도시에 꽤 확산된 상태였다. 다만 인쇄할 만한 거리가 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인쇄업자들은 굶주렸다. 하지만 무명의 사제가 절대권위인 교황에게 맞붙었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뉴스였다. 멈춰서 있던 활자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독일 전역은 물론 전 유럽에까지 확산됐다. 그외 종교개혁과 관련한 여러 논쟁들이 인쇄되었고 팔려나갔다. 유럽사회의 지력이 폭발했다. 거대한 지식의 향연이었다. 이제 유럽인들은 더이상 과거의 그들이 아니었다. 세상은 바뀌었다.

   시공간을 동양의 19세기로 돌리자. 일본 메이지 시대에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라는 유명한 계몽사상가가 있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죽일 놈'이지만 일본에서는 국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일본 화폐 만엔 권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는 일본인들에게 계몽을 촉구하며 "정신의 서구화 없이 물질의 서구화는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가 쓴 <학문의 권장>이라는 책은 당시 무려 300만 부나 팔려나갔다. 19세기 후반의 일본 전체인구를 3,500만 명 정도로 추산했을 때 열에 하나가 이 책을 읽은 것이다. 일본사회는 변화했다. 메이지유신은 조선의 갑신정변과 청의 양무운동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비록 방향은 옳지 못했지만 일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를 이룩했다. 요컨대 메이지유신의 힘은 바로 책의 힘이었다.

   내가 장황하게 루터의 종교개혁과 메이지유신을 거론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바로 책과 활자의 힘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비단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사례 외에도 인류 역사상 책의 힘을 증명하는 예는 수없이 많다. 거꾸로 책을 경멸함에서 왔던 지난한 역사도 수없이 많다. 여기서 굳이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 모택동의 문화대혁명,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등을 거론하지는 않겠다.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분노와 짜증이 밀려오는 비극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한국사회에 모택동을 높게 평가하는 일부 지식인들이 잔존해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어떻게 모택동을 찬양할 수 있는가. 그야말로 미친놈들이다. 각설하자. 내가 강조하고 싶은 건 문자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책의 힘을 안 민족과 국가는 번영했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쇠락했다. 

   뱌아흐로 영상문화의 시대가 도래했다. 모든 것이 영상으로 대체되는 '도상적 전회(iconic turn)'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스마트폰, VR, 사물인터넷 등 시각적인 것을 강화(강조)하는 쪽으로 인간의 소통과 문화가 변화하고 있다. 시대의 흐름을 거역할 수 없고 영상매체가 가진 장점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문자가 가진 본래적 힘은 영상의 폭풍 속에서도 반드시 괴멸하지 않는다.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의사소통코드는 오직 문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궁극과 본질에서 문자를 대체할 코드는 없다. 문자만이 가진 고유한 '구체성'은 영상의 메커니즘으로는 발현해낼 재간이 없다. 즉 영상은 문자를 대체하는 게 아니라 보완하고 수식하는 수단으로서만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 사이의의 일차적 커뮤니케이션 코드는 문자다. 

   다시 종교개혁으로 돌아가자.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해 여기저기서 요란하다. 반대로 혹자들은 너무 무관심하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에 더 예민하게 느끼는 것 같다. 하지만 루터의 종교개혁이 비단 기독교(도)만의 것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종교개혁이 유럽과 전 세계에 끼친 영향을 감안한다면 이는 누구나 공부하고 공유해야 할 인류 보편의 자산이다. 종교개혁을 통해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의 개인을 인식하게 됐고 그것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볼 수 있게 했다. 바로 거기에 '문자의 힘'이 있었던 것이다. 

   역사의 역사는 항상 문자가 전해준 역사였다. 소크라테스는 평생 책 한 권 쓰지 않았지만 그의 사상과 정신은 제자 플라톤에 의해 기록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작금의 우리가 3D게임과 아이폰X가 주는 희열에 열광하는 스마트족이라 할지라도 죽도록 책을 읽고 글을 써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책 좀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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