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4권을 읽고 있습니다. 이제 끝이 보입니다.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퇴각이 긴박하게 진행되고 주인공 피에르와 나타샤가 정신적 성숙을 이뤄가는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참으로 긴 이야기입니다. 서사적 규모 면에서 이 작품을 능가할 소설은 없어 보입니다. 정말이지 읽어도 읽어도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톨스토이는 37세에 『전쟁과 평화』를 집필했다고 합니다. 그 나이에 이런 소설을 썼다는 건 하나의 난센스입니다. 인생의 우여곡절을 충분히 경험했다고 보기 힘든 나이에 어떻게 인류 소설사를 오롯이 덮을 만한 어마어마한 소설을 써낼 수 있는지 저로서는 잘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자세한 건 별도의 서평으로 남길 테지만 관련하여 최근 드는 깨달음은 나이의 많고 적음이 인간의 정신적 크기를 규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정신력이란 완전히 개별적입니다.

   이제 끝자락이 보입니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은 후 무언가의 풍성한 긍정으로 즐겁게 서평을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동안 거작이 남긴 감동과 여운에 흥건히 젖어있을 생각을 하니 흐뭇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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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역사 - History of Writing History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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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야흐로 지식(정보)의 홍수시대다. 인류 역사에서 이토록 많은 지식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저토록 빠른 속도로 공유된 시기는 없었다. 지식인으로서 최고의 수준은 어려운 것을 쉽게 전달하는 능력이다. 난해한 것을 쉽게 변환할 수 있는 능력이란 자기 내부의 거대한 지력을 외부로 세련되게 발산(output)할 수 있는 힘을 의미하며 그것이 바로 최고 레벨의 지성이다. 그다음 수준은 어려운 것을 그저 어렵게 설명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자기 지식 안에 고착된 사람으로서 사람 간의 지식의 유동성에 무지하거나 전달할 역량이 부재한 경우다. 무엇보다 최악의 수준은 쉬운 것을 어렵고 복잡하게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이들을 지식인으로 불러야 할지 모르겠으나 우리 사회에 제법 많이 존재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유시민과 동시대를 산다는 건 즐겁다. 어려운 것을 쉽게 풀어내 타인에게 전달하는 능력에 있어 그는 한국 대중 지식인 중 단연 으뜸이다. 최소한 내 기준에서는 그렇다. 나는 과거 여러 서평과 논설을 통해 유시민의 세련된 언변과 정제된 지력에 아낌없는 찬사를 선사해왔다. 현실 정치를 접고 전업작가로 데뷔한 이래 그의 지성은 더 빛을 발하는 것 같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세계를 변혁하지 못하는 지식은 무의미하다. 자기 안에 고착된 정보는 힘이 없다. 자아를 기꺼이 벗어나 타자에게 전달할 수 있는 지식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정치적·사상적으로 보수적인 내가 여러 가지 면에서 제법 진보적인 그의 말과 글을 주목하는 이유다.

   『역사의 역사』는 유시민의 최신 비블리오그래피다. 출간된 지는 조금 됐으나 아직까지 베스트셀러에서 내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역사의 '역사'를 다루었다. 인류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역사서와 그 책을 집필한 역사가들 그리고 그들이 살았던 시대와 서술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저자는 서문에서 '히스토리오그라피(historiography)'라는 항목에 이 책을 넣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역사학의 역사'가 아닌 '역사 서술의 역사(history of writing history)'에 더 가깝다고 부언한다. 그러면서 역사학과 역사 서술의 차이를 명확히 구분한다. 역사학은 학술 연구 활동이지만 역사 서술은 문학적 창작 행위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의 성격이 후자에 가깝다고 말한다.

   저자의 이러한 전제는 독자에게 무언가 양해를 구하려는 취지로 이해된다. 이 책을 역사학 책으로 보지 말고 좀 더 유연하고 캐주얼하게 역사 르포나 문학 정도로 읽어달라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저자의 전공은 역사학이 아니다. 그는 경제학을 전공했다. 전공과 무관하게 지금까지 그는 역사와 관련한 많은 책들을 집필했다. 한국 사회에서 타협이 불가능할 정도로 뜨거운 감자인 '현대사'를 주제로 책을 쓴 적도 있다. 하지만 신간 『역사의 역사』가 그의 전작들과 구별되는 지점은 인류사를 빛낸 역사 관련 찬란한 고전들을 정면으로 소개하며 리뷰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전공 분야인 역사를 본격적으로 관통하려 했던 저자의 부담이 이해될 만하다. 저자의 바람대로 유연하고 넓은 마음으로 책장을 연다.

   역사서의 시조를 얘기할 때 항시 거론되는 두 명의 역사학자가 있다. 그들은 바로 헤로도토스(Herodotos)와 투키디데스(Thukydides)다. 저자도 두 역사학자를 책의 최전방에 소개했다. 키케로로부터 '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린 헤로도토스와 랑케로부터 '역사 서술의 창시자'로 지목받은 투키디데스는 역사를 보는 관점과 글을 서술하는 방식에 큰 차이가 있다. 전자가 '이야기'를 중시한 반면 후자는 '사실(실증)'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렇기에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분명한 역사서이면서 완전히 다른 느낌을 주는 텍스트다. 저자는 두 역사가의 차이를 조밀하게 포착하면서 그들이 훗날의 역사가들 즉 랑케, 토인비, 다이아몬드, 하라리 등에게 어떠한 영감을 주었는지를 풀이한다.

   저자는 동·서양의 다양한 역사가들을 선택했다. 그중 규모와 실증 면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업적을 남긴 사마천(司馬遷)을 건너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에 헤도로토스와 투키디데스 다음 순번으로 사마천을 배치했다. 저자는 사마천을 매우 높이 평가한다. 책 속에는 사마천과 그의 대작 『사기(史記)』에 대한 찬사가 아낌없이 등장하는데 이는 서구 역사가들이 『사기』를 잘 모르기(몰랐기) 때문에 세계적인 차원에서 객관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저자의 심정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저자는 사마천 편의 말미에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이전의 역사서가 저마다 별 하나를 그렸다면 사마천은 우주를 그렸고, 인류 역사에서 혼자 힘으로 그런 작업을 해낸 역사가는 오로지 그 한 사람뿐이었다."

   이 외에도 저자가 선택한 역사학자들의 리스트는 녹록지 않다. 과학과 역사를 처음으로 조우시킨 이슬람 역사학자 이븐 할둔(Ibn Khaldoun), 있었던 그대로의 역사를 지향한 실증주의 역사학자 레오폴트 랑케(Leopold von Ranke), 유물론과 변증법으로 공산주의 이론을 집대성한 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로 정의한 에드워드 카(Edward Hallett Carr), 그리고 슈펭글러(Spengler, Oswald)부터 하라리(Yuval Noah Harari)까지의 현대 역사가들도 폭넓게 다루었다. 또한 우리나라의 역사가들도 놓치지 않는데 민족주의 역사학의 계보라 할 수 있는 박은식-신채호-백남운 등도 자상하게 소개했다. 동·서양의 배분, 이슬람권의 반영, 현대 사학계의 폭넓은 할애, 대한민국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소개 등 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저자의 배분이 돋보인다.

   나는 지금까지 저자의 모든 저작들을 탐독했다. 그가 쓴 책 중 읽지 않은 게 없다. 그의 전작 중 나는 『청춘의 독서』를 최고로 꼽아왔다. 큰 아픔을 겪은 후 삶의 올바른 방향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저자의 고독과 의지가 『청춘의 독서』에서 진정성 있게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거기에 한 권 더 보탤 수 있게 됐다. 『역사의 역사』도 그가 쓴 수십 권의 책 중에서 가장 잘 쓴 책이라는 평가를 받는데 부족함이 없다. 내가 이 책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작가로서 물이 오를 대로 오른 저자의 절제력과 차분함에 있다. 여러 맥락에서 다분히 진보적인 저자의 색채를 절제하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쓰려고 고민한 흔적이 인상적이다. 또한 결코 만만치 않은 주제를 저자 특유의 쉽고 맛깔나는 필치로 차분하게 서술한 점도 돋보인다. 역사에 관한 특별한 배경지식 없이도 이 책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이유다.

   유시민은 이제 완전한 작가가 된 듯하다. 최근 그의 외연에서 정치인의 색채는 거의 다 빠졌다는 것을 느낀다. 최근 노무현 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해 정계 복귀의 신호탄이 아니냐는 세간의 의심 섞인 목소리가 들리곤 한다. 나도 그의 정치 복귀를 지지하지 않는다. 유시민은 정치보다 '썰전'이나 '알쓸신잡'이 더 잘 어울린다. '작가'는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글 쓰고 강연하는 게 지식인 유시민의 가장 적확한 아우라가 아닐까 한다. 정치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소신과 신념만으로 정치가 가능했다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지금까지 읽히는 고전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최근 그는 모 인터뷰에서 다음 책은 여행 에세이가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기대된다. 독자로서의 나의 소박하고 순수한 기대가 정치라는 이유로 배반당하지 않기를 소원한다.

   완전한 작가로 발돋움한 유시민의 『역사의 역사』를 인문학에 조금이나마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자신있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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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1~4 세트 - 전4권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레프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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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고 있다. 읽자 읽자 했던 계획이 2년이나 연기되어 이제서야 읽는다. 1권을 끝내고 2권 첫 장을 열었다. 오래전에 읽은 이 방대한 소설을 다시 집어 든 이유는 '거대한 정신적 크기'에 대한 갈망 때문이다. 성숙은 인간의 특권이자 의무이다. 성숙한 인간일수록 세상과 씨름하지 않는다. 내면의 크기가 큰 사람은 세상의 여러 고단함과 비루함을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서 용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큰 사람'은 동요하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전쟁과 평화』는 나폴레옹 전쟁의 한복판에서 펼쳐지는 인간 본성에 대한 대서사시다. 참혹한 전쟁을 치르면서 주인공들(안드레이, 피에로, 나타샤)이 얼마나 큰 정신적 성숙을 이뤄가는지 톨스토이는 유려한 문체와 거대한 서사로 아름답게 그려냈다. 톨스토이 특유의 전지적 작가 시점을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소설 속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느낀다. 안드레이와 피에르가 친구 같고 나타샤가 여동생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들이 여러 우여곡절을 통해 잔잔하고 명징한 영혼의 발전을 이뤄가는 모습은 한없이 찬란하다.

   이제 갓 2권을 넘어가는 시점에서 작품 전체의 총평을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과거 범우사 번역(역자 동일 : 박형규 교수)으로 읽은 적이 있지만 아주 오래전의 일이라 기억의 디테일을 모두 잊었다. 약간의 감상 정도만 남아 있을 뿐이다. 다른 독서를 제쳐두고 굳이 이 소설을 다시 집어 든 마당에 최대한 느리고 세밀하게 읽고자 했다. 어휘 하나 쉼표 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력 있게 탐독 중이다. 완독 후 서평을 남기겠다. 과거 『안나 카레니나』의 서평과 마찬가지로 최대한 진지하게 읽고 생각을 정리하여 특별한 서평으로 이웃들과 공유하겠다. 이 글은 훗날 서평의 프롤로그 정도로 이해해주면 되겠다.

   『전쟁과 평화』와 같은 대작을 완독하기 위해서는 어설픈 계획(다짐)으로는 어림없다는 것을 독서를 꾸준히 해온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사실 2년 전의 계획이 연기된 것은 역자 박형규 교수의 신번역 완간이 늦춰진 측면이 컸다. 또한 당시 회사에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건강 문제가 겹쳐 수술 후 병상에서 한 달간 휴가를 보낼 때이기도 했다. 내 인생에서 인간에 대한 환멸을 가장 적나라하게 느끼고 있을 때였다. 그때 내가 잡은 소설은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었다. 나는 과거 글에서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의 차이에 대해 가볍게 언급한 바 있는데, 솔직히 나는 톨스토이의 소설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엄밀히 말해 '나와 더 잘 맞는다'라는 표현이 적합하겠다. 물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도 매우 훌륭한 소설이며 그 작품 나름대로의 의미와 가치로 내 심연에 다가왔다.

   『전쟁과 평화』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는 완전히 다른 소설이다. 내용은 물론 인물, 개성, 문체, 관점, 철학, 향기, 소재, 지향 등 모든 것이 다르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밖에서 안으로, 세계에서 자아로 파고들며 인간 내면의 어두운 디테일에 주목하는 도스토옙스키의 인간탐구 방식은 나와 잘 맞지 않는다. 묘사보다 대화가 많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인간이 인간 외의 것을 압도한다. 마치 회를 뜨듯이 인간의 내면을 천착한다. 자아가 스스로 묘사되지 않고 항시 타자의 대비로서 비치고 조명된다. 소설이 인물에 짓눌려 있다고나 할까. 그래서 그의 소설은 피로하고 불편하다. 자아를 자아만으로 담아내고, 더 나아가 자아와 타자를 넘어 세계와 우주에까지 치켜올라가는, 그리고 인간과 배경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톨스토이의 소설이 나는 더 좋다. 

   등장인물의 차이는 가장 대극적이다. 톨스토이는 소설의 스토리에 따라 작위적으로 인물의 개성을 죽이고 꼭두각시처럼 만들지 않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인물의 개성을 살리면서 스토리를 물 흐르듯이 이끌어 나간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모든 것을 범상한 인간상을 통해 드러낸다는 점이다. 톨스토이의 인물들은 대부분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상식적인 사람들이다. 도스토옙스키와 같이 병적이거나 급진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범상성 안에서 개성을 살리고 생명력을 부여한다. 인간의 미묘한 심리를 사실적으로 표현하면서 개성을 살리는 작가는 별로 없다. 등장인물을 휘어잡고 있을 정도로 전지적이지만 어느 인물 하나 생명력을 파괴시키지 않은 마력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게 대문호 톨스토이의 위대한 역량인 것이다.

   사실 근래에 주변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다. 내 삶은 크게 세 개의 동선으로 구분된다. 가정과 회사, 그리고 교회. 최근 세 곳 모두에서 모두 인간성의 한계와 회복에 관한 웅대한 주제를 나 자신에게 질문하게 했다. 처음에는 내가 아닌 타자의 문제로 시작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 자신의 문제로 전이됐고 폭발됐다. 나이 마흔에 지나치게 진지 타령하는 것 아니냐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인간 본성에 대한 사유가 점점 더 깊고 많아지는 현상에 어쩔 줄 모르겠다. 인생의 반환점을 돈 지금 시점에서 훗날 내가 죽음 앞에 직면했을 때를 상상한다. 나의 전 일생을 하나의 점으로 축약하여 반추할 기회가 있을 때, 바로 그때 나는 나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을까,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삶의 번민 중 대부분이 사람 사이의 문제이며 그것들 중 대부분이 본질적으로 '크기의 문제'에 연원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쇼펜하우어의 말대로 이 세계는 어떤 측면에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다. 수많은 사람들의 내적 의지는 내밀한 형태로 가려져 있지만 결국 그것들이 각자의 자아를 뚫고 나오는 과정에서는 상치, 오해, 태만, 격차 등이 발생하고 이로써 인간은 고통받고 상처받는다. 톨스토이는 이것이 바로 '역사를 움직이는 힘'이라 웅변했지만 그의 입장은 언제까지나 지나가버린 시간(과거)으로서만 자격을 부여받을 수 있는 논증이다. 나는 '마음의 크기'의 내실을 믿는다. 그저 단순한 웅장함이 아닌 실질적인 힘과 내용을 가진 마음의 크기 말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양육하며 과거에 비해 많이 성장해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성장의 새로운 단층을 발견할 때마다 내 실존은 웃음을 짓고 긍정적 미래를 희망한다. 반면 '아직도 멀었다'는 탄식 또한 내 현존을 억누른다. 나는 좋은 남편일까. 좋은 아빠일까. 좋은 성도일까. 내 마음의 크기는 어느 정도일까. 과연 나는 '큰 사람'일까. 내 사위(四圍)를 감싸고 있는 세계의 다양한 디테일들을 담아낼 수 있을 만큼 내 마음속 항아리는 충분하게 클까. 아니라면 훗날이라도 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다양한 질문과 사유가 용솟음친다. 이 현상의 동기 선상에  톨스토이의 역작 『전쟁과 평화』가 놓여 있다.

   문학작품으로서 소설의 끝장을 보여준 걸작 『전쟁과 평화』를 읽으며 나와 타인, 삶과 세계에 대해 탐구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자세한 서평은 완독 후 특별판으로 남기겠다. 걸작에는 걸작에 맞는 후기가 뒤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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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활한 우주보다 거대한 우주선보다 고도의 과학기술보다 더 위대한 건 바로 인간의 내면이다. 영화 《퍼스트맨》에서의 닐 암스트롱의 달 탐사는 딸 카렌과 수많은 동료들의 죽음을 관통하는(극복하는) 여정이다. 달 표면에 도착해 우주선 문을 여는 바로 그 짧은 순간(장면)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고요하고 적막한 달의 대지 앞에서 주인공 닐은 한동안 묵직한 침묵으로 일관한다. 이 찰나의 순간은 가장 조용한 외연이었지만 가장 많은 것을 담아낸 내면이었다.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퍼스트맨》은 달과 우주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닐 암스트롱에게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다. 닐은 영화에서 명징한 한 인간으로서 직립해 있다. 미국의 영웅이자 애국심의 표상이 아니다. 60년대의 시대정신도 아니다. 달에 성조기를 꼽는 장면도 등장하지 않는다. 한 인간의 꿈, 상실, 고독, 집념, 용기, 회복 등의 숭고한 디테일이 데이미언 셔젤의 뛰어난 연출과 라이언 고슬링(닐 암스트롱 역)의 절제 있는 연기로 발산되어 러닝타임 2시간 21분을 가득 채웠다. 인간 닐의 내면은 우주선보다 높았고 달보다 신비했다. 우주보다 인간이었다.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인간의 삶은 바로 이곳ㅡ현실 지구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많은 인간들이 별과 달의 삶을 갈망하며 엄연한 일상의 편린에 주목하지 않는다. 과학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사유체계는 멀고 크고 추상적인 것에 보다 집중하는 경향을 띤다. '모호함'과 '거대 담론', '판타지'와 '애매성'이라는 현대 세계의 주요한 특징은 '진짜 나'와 '명확한 내 것'을 주목하지 않게 했다. 그러면서 인간은 인간 이상을 지향했고 결국 인간 이하가 됐다. 현대사의 비극은 대부분 여기에 연원해 있다.

   영화에서 닐은 말한다.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보는 시각은 달라집니다." 명대사다. 지구에서 하늘을 보는 것과 우주선에서 우주를 보는 것, 그리고 달에서 지구를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감상이다.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관찰자의 시각과 철학은 완벽히 달라진다. 관찰자의 입력이 달라지는 것 이상으로 세계를 향한 출력도 변화한다. '입장 차이'는 인간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신과 우주도 함께 공유하는 것이다. 다만 인간은 그 성질의 일부만을 알뿐이다. 결국 차원의 문제다. 그렇기에 닐의 명대사는 우리에게 간절히 긴요하다.

   우주를 배경으로 했던 근래의 몇몇 영화들과 비교되는 것 같다. 내 견해를 말하겠다. 《인터스텔라》가 광활한 우주와 대자연, 복잡한 물리학의 공식을 전면에 배치했다면,  《그래비티》가 적막한 우주를 떠도는 한 인간의 사투를 거대한 영상미로 발산했다면, 《마션》이 모험에 기반을 둔 영화적 재미와 지적인 즐거움을 포인트로 삼았다면, 《퍼스트맨》은 인간의 실존이 곧 또 하나의 우주라는 깨달음을 고요하고 차분한 방식으로 추적하는 작품이다. 영화적 소재와 색깔은 다르지만 인간 천착의 실재성과 공감성 면에서 나는 앞선 세 영화보다 더 잘 만들어졌다고 평가한다. 걸작이다.

   아폴로 11호에 올라타는 삶. 그것은 달에 가는 과정이기에 앞서 내 가족을 사랑하고 내 건강을 챙기며 주변 이웃을 돌아보는 삶이어야 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본질적으로 그 둘은 '같은 삶'일지도 모른다. 오래간만에 수준 있는 영화를 만났다. 잘 만들어진 영화 한 편 덕에 기분 좋은 일상을 보낸다.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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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업무차 영풍문고에 왔는데 세 분의 노인이 인문 코너에서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할머니 두 분과 할아버지 한 분인데 대화 모습이 자못 진지하다. 인문학을 주제로 양질의 지식을 주고받는다. 핵심 키워드는 최근 한국에서 큰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유태계의 젊은 인문학자 '유발 하라리'다. 그들의 대화는 하라리의 전작, 즉 『사피엔스』, 『호모 데우스』를 위시하여 최근에 출간된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까지 폭넓게 걸쳐 있다. 얼추 일흔이 넘어 보이고 외모는 포근한 동네 어르신 인상인데 쏟아내는 말들에는 여러 인문학적 지력이 디테일하게 묻어 있다. 호기심으로 계속해서 그들의 대화를 엿듣는다.

   책과 지식과 배움에 어찌 나이가 있겠냐 마는 세 분 노인의 열띤 대화를 보면서 나는 강한 도전을 받았다. OECD 국가 중에서 나이가 들수록 독서율이 떨어지는 나라는 오직 대한민국밖에 없다. 사실 우리나라의 전체 독서율은 OECD 국가 중 평균에 속한다. 하지만 5-60세 이상의 중장년층 독서율은 최하위다. 한국을 제외한 다른 모든 국가에서는 연령이 높아질수록 독서율도 따라 높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우리나라만 나이와 독서율이 반비례한다. 45세부터 꺾이기 시작해서 5-60대 이상은 만년 꼴찌 수준을 면치 못하고 있다. 부끄러운 현실이다.

   나는 이러한 세태를 꼬집기 위해 과거 「무식한 어른과 오만한 꼰대 문화」라는 제목의 싸늘한 칼럼을 쓴 적이 있다. 그 칼럼에서 나는 생물학적 나이는 인간의 천부적 권력이 아님을 지적하고 경험주의의 맹신을 주의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감각의 맹신이 축적된 교조화된 경험론은 모든 '꼰대주의'의 근간이다. 공부하지 않고 어른 흉내 내는 시대는 지났다. 오직 나이라는 권력만으로 훈계하고 잔소리하는 세상은 종말했다. 어른일수록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나는 이것이 어른의 책임이자 의무라고 단언한다.

   대형서점의 인문학 코너 한복판에서 연세가 지긋하신 수수한 옷차림의 노인 몇 분이 최신 역사학계의 뜨거운 감자를 논하는 모습은 참으로 멋지고 인상적인 것이라 하겠다. 나는 나이 드신 분들이 진지하게 책 읽는 모습을 볼 때마다 무언가의 숭고함을 느낀다. 적어도 그들은 자신의 경험(나이) 만으로 머리를 채우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칸트의 통찰대로, 직관 없는 사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경험에 바탕을 두지 않은 사유는 내용이 없어 공허하고 지성의 능동적 활동에 따른 개념이 없는 경험은 틀과 형식이 없어 맹목적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인식능력이 편견과 오만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경험과 이성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이 '지혜로운 노인'과 '꼰대'를 가르는 기준이다.

   별것 아닌 일에 호들갑을 떤다고 나무랄 사람이 있겠다. 하지만 어른들의 책 읽기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특히 육십 대 이상의 노년의 책 읽기는 선술한 바 있는 한국적 현실을 감안할 때 매우 필요한 일이다. 여기에 유교-주자학적 잔재가 일소되지 않은 한국적 현상을 하나 더 보탠다면 한국의 어른들은 더 많이 읽고 공부해야 한다. 외람된 말일 테지만 어른이 무식하면 젊은이가 피곤하다. 무지(無知)도 유산이다.

   바야흐로 전 세계적으로 젊은 리더십을 요구하고 있다. 나도 그 흐름을 지지한다. 나이 듦의 궁극을 외면하자는 건 아니다. 노년의 지혜는 꼭 필요하다. 젊은 리더십이 요구될수록 역설적으로 어른의 지혜는 더 긴요하다. 그 위대한 키케로 말대로 "위대한 나라에서는 젊은이가 망친 나라를 노인들이 구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이 책을 읽고 공부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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