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박민규를 처음 만난 건 대부분의 독자가 그러했듯이 바로 '그' 작품을 통해서였다. 제8회 한겨레문학상은 매우 신선하고 유쾌한 작품에게 돌아갔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통해 2003년 혜성처럼 등장한 박민규는 한국 문단에 큰 충격이었다. 어느덧 그 충격은 한국소설의 기대와 미래로까지 진보했다. 그리고 그는 지금의 박민규가 되었다.

  그를 지금에 있게 한 작품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소위 '삼미'는 여느 소설가의 처녀작들보다 인상적이다. 독특한 소재와 개성있는 문체로 술술 읽히면서도 절대 가볍지만은 않은 박민규식의 이단아적인 텍스트는 그에게 '무규칙이종소설가'라는 희한한 닉네임이 붙는 계기가 되었다. 김애란과 더불어 '한국 문단의 미래'라는 태제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그가 이번에는 로맨스를 들고 왔다. 박민규와 로맨스라는 어색하면서도 반가운 조합에 그의 신작 장편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있다.

  이 소설은 위대한 사랑의 이야기다. 하지만 사랑 그 자체만을 조명하지 않는다. 작가 박민규는 1980년대 이후 자본주의가 양산한 부조리의 산물을 소설 소재의 전면에 내세운다. 여성 권력의 핵심으로 포효하고 있는 '외모'라는 테마를 통해 위대한 사랑의 가치를 이끌어내고 있다. 소설 속 화자의 독백은 기존 박민규 문체의 특징이었던 유쾌함과는 다소 거리를 둔다. 술술 잘 읽히지만 이야기 전반에 걸쳐 흐르는 무게감 있는 독백 서술은 독자의 몰입도를 더욱 깊이있게 이끈다.

  작가는 20대 성장소설의 형식으로 못생긴 여자를 사랑했던 평범한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렸다. 각기 다른 상처를 갖고 있는 세 명의 인물이 이야기 전개의 핵심이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80년대 중반의 서울, 아버지로부터의 트라우마를 지닌 소설 속 화자 '나'와 백화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알게 된 못생긴 '그녀', 그리고 '나'의 정신적 멘토 요한, 세 명의 인물이 만들어가는 이야기다. '그녀'에 대한 '나'의 변함없는 사랑과 철학 강의하듯 '나'에게 자신의 사유들을 풀어놓는 요한의 멘토링이 화자 '나'의 독백적 서술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된다. 

  소설의 전체적인 구성이 특이하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서사 구도와 멀티 엔딩을 통한 반전 효과는 수준급이다. 독자의 의지로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2개의 이야기, 혹은 3개의 이야기로 해석이 가능하다. 소설의 뒷부분, 독자의 선택에 따라 이야기 흐름이 바뀔 수 있게 한 박민규의 의도는 소설의 간절한 메시지를 고려해볼 때 매우 적절한 장치이다. 장장 400페이지가 넘는 적지 않은 분량의 독백 서사를 인내했다면 마지막에는 뒤통수를 후려치는 이야기 구도의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독자에게 시원한 한 방을 날리는 작가의 결말 처리 방식은 고도의 센스로 이해할 만하다.

  박민규는 역시 마이너리티의 편에 서 있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만들어낸 부와 아름다움의 권력에서 소외된 이들의 편에 서 있는 것이다. 작가는 미 가 곧 선善을 결정하는 세계, 외연의 미적 퀄리티가 곧 존재의 크기를 결정하는 굴절된 세계에 대한 적나라한 비판을 가한다. 소설을 읽는 내내 행복의 근원과 사랑의 본질마저도 왜곡시키는 미의 권력화가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우리 삶 곳곳에 점점 진보되고 공고해져 왔음을 상기하게 된다.  

  자본주의의 바퀴는 부끄러움이고 자본주의의 동력은 부러움이었다고 박민규는 말한다. 부끄러움과 부러움의 벽을 넘지 못하고서는 인간은 근원적인 불행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그는 꼬집는다. 내 행복의 절대적 가치 기준은 바로 나 자신임이 분명한데 자본주의 시스템의 과도한 맹신은 종내 자아의 행복을 타자의 현재성에 견주는 오류를 양산한다. 부끄러워하면 할 수록, 부러워하면 할 수록 내 행복의 척도를 가늠하는 최저점의 마지노선은 상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호도된 자아상에 대한 올바른 예방법은 부끄럽고 부러워해야 할 모든 것들을 '시시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박민규는 일깨운다. 그것들이 내 안에서 시시해질 때야 비로소 외연보다는 내면이, 비본질보다는 본질의 가치가 우선하는 진정한 행복의 세계의 문이 열릴 수 있는 것이다.

  박민규는 이를 사랑의 가치로까지 발전시킨다. 우주의 모든 좋은 것들을 단 하나의 절대선으로 축약한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무조건 '좋은' 것이며 타협과 토론이 필요없는 절대적 선善이다. 이 거대한 본질은 너무 거룩하고 강력하기 때문에 그 어떤 외연의 요소들에 의해 변질될 수 없다. 그게 진리다. 작가 박민규는 거대하고도 오묘한 사랑의 카테고리 안에서 부富와 미美라는 외형성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인지를 간절한 메시지로 증거하고 있다. 사랑을 통해서만이 진정 인간은 아름다울 수 있고 안정감을 누릴 수 있다는 명징한 진리를 설파하는 박민규의 서사에 한없이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독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쏟아내는 다듬어진 구어적 문체, 주옥과 같이 정제된 사유와 철학적 메시지들, 과거와 현재의 시공간을 오가며 주제의 간절함을 극대화하는 탄탄한 얼개, 독자의 입장에서 질문과 답변을 가질 수 있게 만드는 멀티 엔딩 등은 이 소설의 완전성을 더욱 오롯하게 하는 요소들이다. 위대하고 거대한 사랑의 이야기를 독특한 소재를 통해 중량감 있게 전달한 박민규식 서사에 박수를 보낸다. 술술 잘 읽히면서도 녹록지 않은 사유를 이끌어내는 매력적인 소설이다. 일독을 권한다. 역시 박민규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 문단에서 공지영은 아이러니한 존재다. 대극적인 사랑과 비난을 동시에 받고 있는 소설가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한국에서 공지영 만큼 많은 독자들과 호흡하는 작가는 없다. 가장 많이 읽히고, 가장 많이 피드백되며, 가장 많이 평가받는 작가이다. 관심의 대상이란 얘기다. 최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작가임에는 분명한데 아직도 적지 않은 평단과 대중은 그녀에게 시원한 박수를 거부하고 있다.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공지영을 비판하는 이들이 일관되게 주장하는 일차적 논거는 두 가지다. 감상적이며 가볍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2000년대의 한국소설의 위기 가운데 공지영이 쳐올린 공의 높이는 결코 낮지 않다. 여기서 핵심은 바로 그 공높이의 수준을 평가하는 양극화에 있다. 한국소설의 미래인가 과거인가, 다시 말해 한국 독자의 진보인가 퇴행인가의 중요한 기로점에 소설가 공지영의 존재가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자못 진지한 질문으로 서평의 시작을 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녀의 최신 장편소설 『도가니』는 공지영 문학의 현재성을 가장 적절하게 드러내는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한국 문학의 위기를 2000년대로 한정한다면 공지영은 서사의 가난에서 우리를 구원한다. 그녀의 의식은 현실 고발(『동트는 새벽』), 후일담(『인간에 대한 예의』), 페미니즘(『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삶과 죽음(『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시대와의 화해(『즐거운 나의 집』)을 거쳐 더 넓게 진화하고 있다. 그 연장선상에 바로 『도가니』가 있는 것이다.

  서두부터 장황하게 언급한 공지영 문학에 대한 배경 설명은 그녀의 텍스트를 편견과 선입견을 탈피하여 있는 그대로 읽어보자는 내 의지적 표현에 다름 아니다. 문학을 위시한 모든 예술적 장르에서의 판단과 비평은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제발 소설가 공지영의 본질을 탐구하는 데 비본질적 잣대를 들이대지 말자.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텍스트 바깥은 없다고 했다. 텍스트 밖은 안과 같아서 안팎의 구별이 무의미하다는 얘기다. 공지영 소설을 감상하는 데 인간 공지영의 외연은 접어두자. 소설가 공지영, 그리고 그녀의 텍스트 『도가니』만 보자.

  공지영은 이 소설을 통해 진실과 거짓의 문제를 제기한다. 무진이라는 마을에서 끔찍하게 벌어진 장애아 성폭행 사건과 이를 둘러싼 정의와 비정의의 대결을 진지하면서도 섬세하게 담아냈다. 거짓이 보수화되어 썩은 권력으로 공고해지기 시작하면 그것을 바로잡기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이 소설은 개탄스러운 이야기를 통해 충고한다. 처참한 이야기는 인간의 악한 본성과 사회적 이기의 암울함을 혐오스러울 정도로 사실스럽게 관통하고 있다. 

  소설은 주인공 강인호가 기간제교사로 일하기 위해 향하는 무진시의 안개 낀 풍경을 제시하면서 시작된다. 작가는 안개로 뒤덮여 있는 무진시의 적막함과 그곳 대형교회의 주일예배 풍경, 그리고 철길에서 자살을 선택하는 어느 소년의 죽음을 소설 전면에 단 세 페이지의 짧은 분량으로 교차해서 보여준다. 작가가 전면에 배치한 세 군데의 시공간에 동일하게 존재한 것은 '안개'였다. 작가는 소설 곳곳에 안개의 존재성을 부각하며 주기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무진시를 뒤덮고 있는 안개는 과연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지방의 청각장애인 학교에서 벌어지는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과 이를 밝히고자 하는 소수의 진실과 덮으려는 다수의 거짓이 대결하는 구도가 이 소설의 기본 얼개다. 이야기의 절반 가까이가 법정을 배경으로 할 정도로 치열한 대결이 펼쳐진다. 진부할 수도 있는 선악의 대결을 작가는 독자 자신이 마치 법정에 있는 한 명의 분노자인 착각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생명력있게 담아냈다. 공지영의 노련한 감수성은 읽는이의 오감을 자극시키며 온 정신을 처참한 서사에 몰입시킨다.

  소설을 읽어나가며 나는 주인공 강인호라는 인물에 강한 연민을 느꼈다.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의 무능력, 자애학원에서 목도한 충격적 진실,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자 하는 결단, 쉽지 않은 싸움에 뛰어들어 고군분투하는 용기, 대의를 위한 이상과 가족 행복의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는 인간상 등 인간 강인호의 입체성은 이 소설을 읽는 가장 큰 묘미라 할 수 있다. 소설의 마지막, 과연 나는 강인호의 선택에 대해 자신있는 비난을 던질 수 있을까. 작가의 연금술에 의해 또 하나의 강인호가 된 내 자신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잠긴다.

  이야기는 종내 정의의 승리로 종결되지 않는다. 얼핏 보면 악의 보수화로 점철된 거짓의 단합이 승리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작가는 정의가 비정의를 오롯하게 제압하지 않는 결말을 보여줌으로써 독자에게 무거운 해석의 의무를 토스하고 있다. 책장을 덮은 후 독자는 강인호가 된다. 또한 서유진이 된다. 그리고 끝내 이기지 못한 처절한 싸움의 결말을 응시하며 이 소설의 간절한 메시지를 우리네 현실성에 대입하게 된다.

  공지영이 제시한 '도가니'는 도덕과 양심의 폐허가 수구화되고 단합되어진 공간을 상징한 것이기도 하고, 인간의 내면 속에 존재하는 악마적 본성에 대한 메타포이기도 하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 세계의 암울한 단면에 대한 축소판일 수도 있다. 이 소설이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분명한 정의가 비정의의 카르텔을 오롯이 재단하는 데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에너지가 지불된다는 현실성의 한계를 소름이 돋도록 재인식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당위와 존재 사이의 괴리는 인간의 현명함과 악마성이라는 모순된 이중성을 이끌어내며 인간 본성에 대한 보다 웅숭깊은 곱씹음을 유도한다.

  참담한 실화를 다루었음에도 차분함을 잃지 않고 독자의 머리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공지영의 힘이 놀랍다. 이제 더이상  공지영은 징징대는 이야기만을 만들어내는 감성 과포화 소설가가 아니다. 공지영의 서사와 문장 어느곳에서도 감정 과잉과 가벼움은 찾아볼 수 없다. 뼈아픈 실화를 담담하고 섬세하게 다듬어 유려한 문체로써 독자에게 전달한 냉정함이 돋보인다. 또한 독자 한사람 한사람을 도덕과 상식의 폐허라는 광란의 도가니에 집어넣음으로써 진실과 정의가 재단된 엄연한 실재의 세계를 조망하고 이에 대한 자아의 현재상을 궁구하게 하는 의무감을 각인시킨 작가의 마력에 전율을 느낀다.

  소름이 돋도록 너무나 잘 쓴 소설 『도가니』에 나는 아낌없이 별 다섯 개를 선사한다. 이 소설을 통하여 공지영을 거부했던 이들의 비판논거는 더욱 궁색해질 것이다. 어려운 소재를 냉정하고 담담히 서술한 소설가 공지영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정말 잘 쓴 소설이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백년 전 악녀일기가 발견되다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6
돌프 페르로엔 지음, 이옥용 옮김 / 내인생의책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도발적인 제목을 지닌 이 소설은 독백의 주인공 마리아의 평범한 일상을 다루고 있다. 작가 페르로엔은 산문시와 같은 간결한 문체로 일상적이면서도 충격적인 이야기를 능숙하게 전개해 나간다. 많은 텍스트를 사용하진 않는다. 적은 문장으로 많은 사유를 끌어낸다. 한 시간 안에 읽힐 만한 소소한 분량으로 무섭고도 충격적인 질문을 독자에게 던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의 존재성은 녹록지 않다.

  19세기 남아메리카 수리남 지역의 부유한 농장주의 딸 마리아의 열네 번째 생일을 배경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진주 목걸이, 성경, 향수, 핸드백 등 가족으로부터 생일선물을 받은 마리아는 행복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녀에게 아빠가 준 선물만큼 놀랍고 매력적인 것은 없다. 그건 바로 어린 흑인 노예 꼬꼬였다. 작은 채찍과 함께 마리아에게 전달된 생일선물 꼬꼬는 한 존재의 '인간'이었다. 

  노예와 다른 피부 색깔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마리아는 상대적 우월감을 가진다. 검은색이 아닌 흰색의 피부로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고 행복하다. 딸아이의 생일을 진심어리게 축복해주는 마리아 가족의 순박한 모습 속에는 흑인 노예들을 물건처럼 거래하고 채찍으로 때리는 악행의 이면이 함께 존재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소설 속에서 이에 대한 문제제기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시대의 당연함으로 비춰질 뿐이다.

  마리아에게는 갈망하는 두 가지 소원이 있다. 하나는 엄마와 아줌마들처럼 큰 가슴을 가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루빨리 사촌오빠 루카스와 결혼하는 것이다. 열네 살이 지나 성년이 되었음에도 마리아의 가슴은 커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가슴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한 남자에 대한 애절한 사랑이 마리아의 일기 전반에 걸쳐 독백된다. 얼핏 보기엔 열네 살의 마리아는 이상할 것 없는 평범하고 순진한 소녀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은 평범한 외연적 이야기의 흐름 속에 무섭고 심오한 내면적 외침을 담고 있다. 동일한 인간을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동물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는 악의적 사고와 행동이 태연하게 펼쳐진다. 작가는 악을 판단하는 지성과 이를 바로잡을 용기를 지닌 인물을 등장시키지 않는다. 악으로 느끼지 못할 정도로 평범하기만 한 마리아의 일상이 묵묵히 독백되어질 뿐이다.

  이러한 작가의 의도는 꽤 무게있는 의무를 독자에게 전가한다. 그것은 역사와 진실과의 관계, 그리고 무지와 절대선의 관계를 반드시 되새겨야 한다는 암묵적인 권고다. 우리가 '역사'라고 말하는 것이 항상 진리로만 귀결되었던 것은 아니다. 한 시대의 진실이 다른 시대의 거짓이 되었고, 한 시대의 천사가 다른 시대의 악마가 되기도 했다. 그렇기에 역사는 끊임없이 반추되었고 진화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절대선을 인간 스스로 깨닫고 쟁취해야 하는 지성의 필요와 책임이다. 모든 인간은 아는 만큼 보고 아는 만큼 행동한다. 앎의 크기가 존재의 크기를 결정한다. 과연 우리는 인간의 지각으로 감지하는 3차원의 시공간을 얼마나 제대로 알며 느끼고 있는가. 혹 무지와 무관심으로 인해 호도된 세계를 조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지가 인간을 얼마나 비참하게 하는지 인류의 역사는 매우 구체적으로 방증한다. 무지로 인해 발생된 모든 귀결은 철저히 자기 자신의 책임이다.

  그 어떤 악의와 양심도 인식하지 못하는 마리아와 그녀의 가족 이야기는 2백 년 전 남아메리카 수리남이라는 시공간의 차이를 초월하여 지금 이 순간 이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 많은 시사를 던진다. 그것은 호도된 역사에 대한 책임일 수도 있고 양심과 용기의 문제일 수도 있다. 인류에게 필요한 절대적 도덕률일 수도 있고 인간의 내면 속에 존재하는 보편적 사악함일 수도 있다. 사유와 판단은 오직 독자의 몫이다. 이 소설이 주목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세계문학상은 1회 수상작부터 꾸준히 읽어오고 있다. 금년으로 다섯 번째를 맞이하는 세계문학상은 다른 문학상과는 다른 뚜렷한 개성이 있다. 무엇보다 텍스트의 '가독성'과 '재미'를 중시한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읽기에 부담없는 대중적인 소설들이 선정이 되어 왔다. 도발적인 소재와 개성있는 문체, 빠른 속도감과 흡입력 있는 서사를 갖춘 작품들이 세계문학상의 표적이 된다.

  1회 수상작 김별아의 『미실』은 여태까지 생각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여성상을 만들어냈다. 박현욱의 『아내가 결혼했다』는 보수적인 한국사회에 '비독점적 다자연애'를 질문함으로써 꽤 충격적인 도발을 시도했다. 신경진의 『슬롯』은 도박을 소재로 자본주의의 바다를 헤엄치는 인간의 정체성을 흥미있게 그려냈다. 백영옥의 『스타일』은 신세대 한국여성의 진화된 원형을 익살스럽게 담아냈다. 잘 읽히고, 흥미있고, 도발적이며, 신선하다는 점이 세계문학상 수상작들의 공통적 분모가 된다.

  제 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내 심장을 쏴라』는 제 1회 세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로 대중에게 낯설지 않은 소설가 정유정의 장편소설이다. 이전작들과 마찬가지로 굉장히 재미있는 소설이지만 보다 '문학적'이라는 점에서 강한 매력을 지녔다. 요컨대 소설 『내 심장을 쏴라』는 재미와 무게를 함께 지닌 힘있고 감동적인 소설이다.

  이 소설은 폐쇄된 정신병원에서 만난 두 남자가 서로를 알아가면서 각자의 삶으로부터 교차되어 얻는 깨달음과 열정을 감동적으로 그렸다. 가위만 보면 공황장애를 일으키는 1인칭 화자 이수명과 그와 같은 날 정신병원에 입원한 시력장애인 유승민과의 첫 만남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첫 만남의 데면데면함이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친밀한 우정으로 변화하기까지의 과정을 흥미있고 생동감있게 담았다. 

  수명과 승민은 삶을 대하는 태도가 상이한 인물이다. 수명이 내면 속으로 자신을 축소화한다면 승민은 외연을 향한 방향성에 집착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한다. 수명과 승민 모두 과거의 비밀을 가슴에 품고 지낸다. 작가는 두 인물의 과거 트라우마와 이에 종속된 일상에서의 해소되지 않는 현실적 긴장감을 잘 그려냈다. 소설의 뒷부분으로 가면서 과거에 봉착되어 있던 수명과 승민의 내밀한 비밀은 밝혀진다. 남에 의해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의해 고백되어지고 깨달아진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소설의 앞부분은 서사의 진척이 다소 느리고 미지근한 몰입도를 보인다. 하지만 중반을 넘어 후반에 이르게 되면 지금까지 농밀하게 응축되었던 이야기들이 한 번에 터지면서 독자의 가독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소설의 말미, 주인공 수명이 오랫동안 가슴 깊숙한 곳에 봉인해두었던 삶의 참된 진실을 인식하고 용기를 표출하는 장면, 그 순간은, 이 소설이 선사하는 가장 강렬한 울림이자 카타르시스다.

  이 소설의 핵심 키워드는 '자아'와 '자유'이다. 폐쇄된 정신병동이라는 외면의 벽을 탈출하려는 몸부림은 자아를 제대로 인식하고자 하는 내면의 열정과 닿아있다. 두 인물의 과거 아픔과 이에 구속된 일그러진 현재상은 자신의 인생에서 자아의 지정학적 위치를 잘못 두었을 때를 그대로 은유한다. 자아의 본질에 대한 성찰은 없고 비본질에 대한 집념과 고집만이 반복되고 있을 뿐이다. 자유를 간절히 소망하지만 정작 그 소망을 실현하기 위한 행동방식은 자아의 역동과는 거리가 먼 외적 환경의 파괴, 또는 내적 울림과의 단절에 불과하다. 

  이러한 두 인물의 자유 성취와 자아 성찰에 대한 공전轉 행태은 승민이 병원을 탈출하여 글라이더를 타고 하늘을 활공하는 바로 그 순간, 앎과 행복의 실현으로 급반전된다. 승민은 종내 죽는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소설의 마지막 수명이 정신병원을 퇴원하는 장면과 연결된다. 죽은 승민은 수명에게 질문한다. 너는 누구냐고. '새' 아니면 '비행기'냐고. 이에 대한 수명의 답은 단호하고 명확하다. 내 인생을 상대하러 나선 놈, 바로 '나'라는 것을.

  한 사람의 자유는 타자의 간섭이나 외부의 구속으로 조절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와 동시에 한 사람의 인생 또한 타자가 아닌 자아의 추동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생에 대한 강렬한 욕망은 언제나 자유의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내 인생을 '나'로서 사는 것은 명확한 진리다. 이 타협할 수 없는 절대명제 앞에 우리의 삶은 때때로 외부를 의식하고 타자에 주눅든다. 진정한 자유의 가치는 내가 내 삶의 주어로서 존재할 때 빛이 난다. 내 존재성은 누구도 욕망하지 못한다. 이에 동의한다면 자신있게 외칠 수 있을 것이다. 외부를 향해 가슴을 열어놓고 내 심장을 쏴보라고.

  서사를 풀어가는 능숙함과 재치있는 입담이 돋보인다. 순간순간의 감동이 녹아있고 시종 재미를 잃지 않는다. 정교하고 정제된 묘사와 독자의 호흡을 쥐었다 놨다 하는 작가의 내공이 훌륭하다. 내적 자유와 자아의 고찰에 번민하는 수많은 영혼들에게 이 한 권의 소설이 위로가 되길 바란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란제리 소녀시대
김용희 지음 / 생각의나무 / 2009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서평을 쓸 때 가장 큰 고민이 있다. 개인적 기준에서 별 한 개 주기도 아까운 텍스트를 만날 때다. 이럴 때 리뷰어의 번민은 크다. 저자나 작가가 응당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작품일진대, 독자의 주관적 평가라는 이유로 텍스트를 향한 조소와 비판을 함부로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뇌가 든다. 하지만 이러한 고민은 종국 냉정함으로 회귀된다. 어차피 서평은 글쓰는 자의 주관적 판단으로 쓰여지는 게 아니던가. 서평으로 쓰여진 글에 글쓴이의 주관적 판단이 배제된 채 일방적인 긍정 문구만 있다면 간접광고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다시 냉철한 주관으로 돌아가 텍스트를 씹는다.

  비평의 역할은 소중하다. 비평은 비평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피드백 시스템(Feedback System)이다. 작품에서 잘 된 부분을 부각하여 격려하고 미흡한 부분을 비판하여 후에 보다 나은 창작물을 만들어달라는 요구와 기대가 비평 속에 오롯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세계적인 평론가 해럴드 블룸의 글을 즐겨 읽는다. 하지만 그의 모든 논지가 내 신념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평론만큼 '주관'의 만개가 전제된 곳은 없다. 이는 어느 장르에서나 마찬가지다. 책도 당연하다. 책이 작가의 손을 떠나 독자의 손에 들어온 이상 그 책은 독자의 것이다. 작가는 없다. 독자만이 있을 뿐이다.

  나는 소설을 읽을 때 인간에 대한 구체적인 천착을 매우 중요한 포인트로 삼는다. 문학은 결국 인간 성찰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런 차원에서 인간의 구체성을 잘 그려낸 소설은 분명 좋은 소설이다. 인간의 총체성과 사상성은 내가 소설을, 더 나아가 문학을 읽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

  형편없는 소설들이 있다. 나는 소설 같지 않은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는 소설의 형태나 구성 등의 외연적 뼈대와는 거리가 있는 얘기다. 흔히 문학의 기능으로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되는 '유희'와 '교훈'의 교과서적 문구를 인용치 않더라도 소설은 독자에게 무언가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독자에게 전달해야 하는 최소한의 '울림'은 소설이라는 장르가 갖춰야 할 최소한의 의무다. 최저점의 무게감이 결락된 소설들로 인해 종이는 낭비되고 독자는 불쾌하다. 

  문학평론가 김용희 씨의 첫 장편소설 『란제리 소녀시대』는 밋밋하고 별 볼 일 없는 텍스트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 어떤 재미와 감동도 없다. 더욱이 공감조차도 없다. 70년대에서 80년대로 넘어가는 한국 내의 굴곡진 시대를 담고 있지만 시대성은 온데간데 없고 극도의 가벼운 상황들만 연이어 펼쳐진다. 한 시대를 담아내는 수고로움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1970년대를 2009년의 방법과 색채로 포장해놓았을 뿐이다.

  이 소설은 분명 성장소설이다. 작가는 한 여인의 사춘기를 솔직하고 발랄하게 담아내려고 한 듯하다. 1인칭주인공시점의 화자 정희의 학창시절이 서사의 본류를 이룬다. 가정과 학교에서의 일, 친구들과 남자아이들과의 관계, 고3 수험생 시절과 대학 입시 등이 소설의 주된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굴곡진 시대적 상황에 대한 최소한의 진정성이나 그 시대를 거쳐야 했던 사춘기 소녀의 원형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마치 작가의 과거 일기를 현재의 문체와 방식으로 덧칠한 듯하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어설픈 성장소설과 싸구려 칙릿을 짬뽕해놓은 수준이다.

  각 장이 시작될 때마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알 수 있는 짤막한 문장 몇 개가 굵은 글씨체로 삽입되어 있다. 작가가 왜 이와 같은 장치를 해놓았는지 의문스럽다. 소설의 내용이나 얼개 등 그 어떤 것과도 매치되지 않는 불필요한 요소다. 어차피 이 소설은 시대적 배경인 1979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문체와 분위기를 담고 있지 않은가. 시대의 구체성을 짤막하게 표현하려는 작가의 의도로 보기에는 너무나 부자연스럽고 부적합하다.

  이런류의 소설을 논거로 하여 문학의 가치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다소 민망스럽다. 중요한 것은 소설의 역할이다. 가벼워도 좋고 밋밋해도 좋다. 하지만 소설은 인간과 시대에 대해 매순간 고민해야 한다. 최소한의 의미와 가치를 궁구해야 한다. 이것이 결락된 소설은 한낱 종이 쓰레기에 불과하다. 독자들은 바보가 아니다. 

  작가는 작가후기에서 수상한 소녀들의 사소한 사생활을 밝히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웃기면서 슬프고 유쾌하면서도 쓸쓸한 이야기. 때로 질투거나 동지애, 자유거나 혹은 솔직함에 대한 것들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고 한다. 작가의 이러한 의도는 소설에서 전혀 반영되지 못했다. 수상한 소녀들의 사소한 사생활은 찾아보기 힘들다. 공감되지 않는 이야기를 자신의 일기처럼 묵묵히 풀어내는 한 소녀의 의미없는 아우성만 요란하다. 한 시대를 소녀로 살아야 했던 그녀들의 원형도 없다. '란제리 소녀시대'는 소설 어느곳에도 없다. 작가의 내공 부족만 있을 뿐이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