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번째 산
파울로 코엘료 지음, 오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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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서재'를 자주 방문한 분이라면 내가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정통 기독교인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했을 것이다. 십수 년 전 블로그를 시작할 때 세운 원칙이 하나 있었다. 종교와 정치 색채를 최대한 배제할 것을 다짐했다. 건전한 토론을 넘어선 지나친 비방과 무의미한 논쟁을 조심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철저히 내 소양 부족이었다. 오히려 몇몇 글에서 종교적 색채를 지나치게 드러냄으로써 비기독교인 이웃들에게 거부감을 준 적도 적지 않았다. 서두에 반성스럽게 고백하곤 있으나 여하튼 나는 분명한 기독교인이다. 글이란 필자의 생각과 이념, 철학과 신념을 뼈대로 하기 때문에 글의 중요한 고비마다 종교성을 완벽히 제거한다는 건 불가능할 수밖에 없음을 토로하고자 한다.

기도의 용사를 어머니로 둔 덕분에 어려서부터 찬양 부르고 성경 읽는 소리가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어머니가 즐겨 부른 찬송가 중 '나의 사랑하는 책'이라는 곡이 있다.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헤어졌으나 어머니의 무릎 위에 앉아서..."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찬송이다. 워낙 유명한 곡이기에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이 곡의 2절에 "주의 선지 엘리야 병거 타고 하늘에 올라가던 일을 기억합니다"라는 가사가 있다. 성경을 잘 모르던 어렸을 적에는 '엘리야는 어떤 사람이길래 병거를 타고 하늘에 올라갔나' 하는 의문이 들곤 했다. 어머니에게 물어봤지만 "죽지 않고 하늘에 올라간 위대한 선지자란다"라는 난해한 답변뿐이었다. 훗날 성경을 읽고 체계적으로 성경공부를 한 이후에서야 엘리야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았다. 그때까지 엘리야는 항시 나에게 찬송가 가사로 귀에 맴돌던 인물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해외 작가 중 하나인 파울로 코엘료의 신간 소식에 귀가 솔깃했다. 『다섯번째 산』은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를 다룬 코엘료의 장편소설이다. 이미 오래전 국내에 출간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영어판 중역의 어색함과 번역 오류 탓으로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지는 못했다. 이에 문학동네 출판사를 통해 포르투갈 원전으로 재번역된 것이다. 최근 구약사를 머릿속에 재정리해야 한다는 취지 아래 열심히 구약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중이었다. 이스라엘 왕정 시대 역사상 가장 강력한 선지자로 꼽히는 엘리야의 이야기를 소설로 만난다는 건 절호의 기회이자 짜릿한 흥분이었다. 이에 단번에 책을 주문했고 한달음에 완독했다.

전술한 대로 소설의 주인공은 구약의 예언자 엘리야다. 성경의 이야기에 문학적 상상력을 더했다. 구약 《열왕기상》 17~18장의 이야기를 토대로 했다. '모세오경'과 신약 《마태복음》의 몇몇 구절이 곳곳에 인용됐다. 성경에 나오지 않는 작가적 상상력이 주를 이루고 있어 조심스럽게 읽히기도 하지만 엘리야의 인간적 고뇌와 한계를 코엘료 특유의 아름다운 묘사로 읽는 재미는 쏠쏠하다. 작가적 상상력이 인간 엘리야를 보다 입체적으로 탐구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성경의 중요한 맥락을 훼손하지 않기에 중심만 잡고 읽으면 은혜롭기까지 하다.

소설의 시점은 BC 9세기 초 이스라엘 북서쪽 지중해 연안의 시돈 땅 사렙타(사르밧) 지역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열된 상황이었는데 북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부패하고 타락한 아합 왕이 다스린 시대였다. 아합은 페니키아의 공주 이세벨과 국제결혼을 해서 유일신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세라'라는 페니키아의 신을 섬기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신(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야를 아합에게 보내 이스라엘에 오랜 기간의 가뭄을 예고했다. 이에 아합은 엘리야를 죽이려 수배 중이었다. 가뭄 기간 동안 크릿 시냇가에서 까마귀가 건네주는 먹이를 먹으며 삶을 연명하던 엘리야에게 신의 음성이 도착한다. 사렙타에 사는 과부의 집으로 이동할 것을. 바로 거기서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교회를 다닌 사람 중 사르밧 과부 이야기를 한 번쯤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드물 것이다. 사르밧에 살고 있던 과부가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의 말씀에 순종하여 기근의 때를 이기고 자신의 아들까지 죽음에서 살아나는 복을 받은 이야기는 오랜 기간 동안 전 세계 기독교인들에게 도전과 영감을 주었다. 작가 코엘료는 여기에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해 성경 바깥에서 꾸며낸 인간 엘리야의 모습을 보태고 만들었다. 훗날 850명의 이방신 예언자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선지자인 그도 신을 의심하고 한 여인을 사랑하는 평범한 인간이었음을 작가는 놀라운 상상력으로 꾸며내고 그려냈다. 

소설 속 엘리야의 고민은 극한 시련에 관한 인간적 사유다. 소설은 종교적 색채가 최대한 배제되었다. 시련을 통과하는 한 인간으로서의 엘리야의 존재론적 번민이 이야기 곳곳에 녹아 있다. 작가는 세상의 위협 속에서도 자신의 가치관, 신념,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는 인간상에 주목했다. 시련 자체는 인간을 파멸시키지 않는다. 시련은 언젠가 반드시 끝나기 때문이다. 시련을 겪어낸 인간은 스스로를 일으키는 법을 배운다. 위기의 순간에 무너지지 않고 자신을 바로 세울 수 있는 건 보편적이고 진정한 믿음과 사랑이다. 이를 깨달을 때쯤 주의 천사가 다시 나타나 이스라엘로 돌아갈 것을 명령한다. 소설은 그다음에 있을 일, 즉 선지자로서 엘리야가 행한 가장 유명하고 극적이며 강력한 사건 직전에 이야기를 끝맺는다.

성경을 읽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엘리야가 얼마나 고독하고 거대한 싸움을 했는지. 갈멜산에서 850명의 이방인 숭배자들과 맞짱을 떠 승리하는 기적과 그 일이 끝난 후 빗속을 질주하여 왕의 마차를 추월하는 모습은 과히 압권이다. 어떻게 기도하면 엘리야처럼 장대비 속을 달리는 감격을 누릴 수 있을까. 여름철 장마가 쏟아질 때마다 밖에 나가 전력 질주를 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 장본인이 바로 엘리야다. 그런 엘리야조차 영적 침체기가 있었고 로뎀나무 밑에서 자신을 죽여달라고 신에게 기도하는 신세가 된다. 시내산 동굴에서 신의 세미한 음성을 듣기까지 엘리야의 엘리야스럽지 않은 모습은 갈멜산 대결을 승리로 이끈 위대한 선지자조차도 한낱 보통 인간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려준다. 소설 『다섯번째 산』은 엘리야의 다분히 인간적인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역설적으로 더욱 신의 은총을 부각시키는 효과를 끌어낸다. 작가의 연금술이 놀랍다.

성경에는 수많은 인물이 나온다. 각 시대적 배경에서 신의 뜻에 따라 신에게 소명 받은 이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은혜롭고 가슴이 웅장해진다. 한 인간으로서 신의 소명 앞에 얼마나 거대한 고독과 번민이 있을지는 감히 가늠하기 어렵다. 가나안 땅 코앞에서 고별 설교를 하고 생을 마감한 모세, 자식의 쿠데타로 죽을 고비를 넘기며 도망자 신세가 된 다윗 왕, 죽으면 죽으리라는 뚝심으로 목숨 걸고 왕 앞에 나아간 페르시아 왕비 에스더, 예수를 세 번 부인한 뒤 그가 십자가에 처형되는 모습을 본 베드로 등등 성경에는 신의 역사를 이루는 과정에서 귀중히 쓰임을 받은 위대한 인간 군상의 모습이 아로새겨져 있다. 기적의 클라이맥스와 막전 막후의 고비 때마다 그들의 심경은 어땠을까. 그들의 외모는 어떠했고 성격은 어땠을까. 그리고 그들의 MBTI는. 엉뚱하지만 궁금하다.

소설이 전하는 위로의 결을 생각할 때 재번역(재출간)의 타이밍은 시의적절하다. 지난 3년 동안 코로나 팬데믹으로 수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했다. 21세기 근래에는 겪어보지 못한 강력한 전염병 탓으로 먹지 못했고 가지 못했고 만나지 못했다. 아이들은 배우지 못했고 자영업자들은 팔지 못했다. 심지어 6.25 전쟁 때도 닫지 않았던 교회 문을 닫기도 했다. 이제 좀 빠져나오는가 했더니 바이러스는 여전히 생동하여 우리 삶의 반경을 옥죄고 있다. 하지만 견뎌야 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시련이나 아픔은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기 위해 견디어야 한다는 작가의 메시지가 눈부시다. 견디어야 한다. 극복해야 한다. 살아남아야 한다. 견디기 위해 이기는 것이고 포기할 수 없기에 가는 것이다. 소설 『다섯번째 산』은 이 웅숭깊은 메시지를 신의 대리자 엘리야의 인간적 고뇌라는 픽션을 통해 독자에게 들려 준다.

서평을 정리하자. 코엘료의 장편소설 『다섯번째 산』은 인간적이되 신성하고 지엽적이되 국제적인 소설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3천 년 전 고대 근동의 역사와 문화를 실감나게 관통하고 있다. 종이의 발명, 알파벳의 기원, 무역로 등 당시의 역사와 종교, 정치, 경제에 관한 이야기를 생동감 있게 전한다. 그리고 그 위에서 펼쳐지는 '선지자의 전형' 엘리야의 강렬한 인간적 고뇌는 3천 년이란 시간을 넘어 우리의 가슴속으로 밀고 들어온다. 감동적인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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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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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오 이시구로는 신간 『클라라와 태양』으로 처음 만났다. 그가 일본계 영국 작가이며 부커상과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사실은 소설을 읽은 뒤에서야 알았다. 그의 소설은 지루하지 않았고 가볍지 않았으며 재미없지 않았다. 문학의 기능이 교훈과 재미라는 양대 축에 있다는 걸 주지한다면 대중성의 최전선에 위치한 소설이란 장르는 일단 재미있어야 한다. 교훈은 그 뒤에 따라오는 것이다. 유능한 작가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통해 독자에게 교훈을 선물했다. 이 기준에서 가즈오 이시구로는 가장 근접해 있는 작가다. 이에 그의 대표작들을 역주행해 보기로 했다. 『남아 있는 나날』은 그렇게 내 손에 들어왔다.

소설 『남아 있는 나날』은 『나를 보내지 마』와 함께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즈오 이시구로의 대표작이다. 소설은 재미있고 잔잔하며 교훈적이다. 마지막 장을 덮은 뒤 전해오는 울림이 상당하다. 인물과 서사, 주제와 메시지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다. 시점이 과거 현재를 수시로 오가지만 산만하지 않고 인물들의 절제된 감정이 독자에게 오롯이 전달된다. 이야기 곳곳에 묘한 긴장감이 계속해서 흐르는데 적절한 호흡으로 소설의 막장까지 독자를 흡입력 있게 안내한다. 작가의 탁월한 내공은 앤서니 홉킨스와 엠마 톰슨 주연이 열연한 영화로까지 제작되는 힘을 만들어냈다.

작품 속 일인칭 화자 스티븐스는 영국의 저명한 대저택 달링턴 홀의 집안일을 돌보는 집사이다. 최고의 집사였던 아버지를 존경하며 아버지처럼 훌륭한 집사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35년간 주인 달링턴 경을 성심성의껏 모셔온 스티븐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최고의 집사는 최고의 주인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믿는 그에게 달링턴 경이 국제 외교의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충심을 다해 돕고 보좌한다. 아버지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고, 떠나가는 사랑을 붙잡을 여유도 없을 정도로 오직 집사의 일에 집중하고 매달린다. 그러나 평생을 바쳐 일한 집사의 일이 뿌듯하지만 달링턴 경이 나치 협력자로 이용당한 여러 정황이 드러나면서 회의가 생긴다.

평생 집사 일에 여념이 없었던 스티븐스에게 과거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생긴다. 저택의 새로운 미국인 주인의 권유로 포드 자동차를 몰고 장거리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이다. 소설은 스티븐스가 6일 동안 여행하면서 추억하는 과거의 회상과 현재의 여행 시점을 교차시킨다. 오래전 자신과 함께 일한 여인 켄턴 양의 편지를 받고 여행길에 그녀를 만날 기대에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막상 오랜만에 그녀를 만났지만 표면상 서로 간 달라진 건 없다. 소설의 말미 켄턴 양과 헤어진 후 우연찮게 만난 한 노인의 말이 스티븐스의 마음을 일렁이게 한다. "즐기며 살아야 합니다.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요. 당신은 하루의 일을 끝냈어요. 이제는 다리를 죽 뻗고 즐길 수 있어요."

이 소설은 크게 세 가지 주제에서 나에게 농밀한 울림을 주었다. 주인공 스티븐스가 끊임없이 질문한 주제는, 위대한 집사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품격'에 관한 것인데 스티븐스의 철학은 명징하다. '위대한 집사'란 주인에 대한 절대적 믿음, 복종, 이를 넘어선 헌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기준에서 자신은 최선을 다했고 완벽했음을 자부한다. 또한 주인 달링턴 경이 순수한 나머지 나치 정권에 이용당한 사실에 대해서도 자기 영역 바깥에 있는 일음을 강조하며 개인의 죄의식과는 거리를 둔다. 위대함과 품격의 본질적 의미를 묻는 지점인데 이 부분에서 작가는 독자에게 답변을 강요하거나 선악의 가치판단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다.

일과 직업에 있어 '위대함'과 '품격'이란 항시 뜨거운 주제다. 스티븐스가 제기한 질문을 현재의 나에게 그대로 치환해 보자. 위대한 영업사원이란 무엇인가. 전문적 역량과 탁월한 실적을 통해 회사와 대표에게 큰 영업이익을 안겨주는 것일까. 뜨거운 동료애를 발휘함으로써 인간적으로 좋은 사람이 되는 게 우선하는 걸까. 훌륭한 조율자로서 부서와 개인 사이의 소통의 다리를 잘 연결해 주는 것일까. 물론 가장 좋은 건 이 모든 역량을 다 갖춘 것이겠지만 경쟁이 있는 곳, 특히 숫자로 실적을 다투는 곳은 감히 불가능한 얘기라 할 수 있다. 위대함과 품격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회사와 학교를 위시하여 실력과 전문성을 겨루는 모든 사람들이 한 번쯤 음미해 봐야 할 주제임은 틀림없다.

또 하나는 스티븐스와 켄턴 사이의 이뤄지지 못한 사랑의 절절함이다. 소설에서는 단 한 번도 서로에 대한 호감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말과 행동이 나오지 않는다. 에두른 심리묘사와 정황적 상상을 통해 스티븐스와 켄턴 사이의 사랑의 기류를 살포시 포착할 뿐이다. 가장 극적으로 갈등이 해소된다고 볼 수 있는 마지막의 둘의 재회에서도 후회나 그리움에 관한 직접적인 묘사가 등장하지 않는다. 참인지 거짓인지 모를 듯 묵묵하게 전하는 켄턴 자신의 결혼생활의 고백 은 애절하다 못해 서글프기까지 하다. 결국 둘은 '마지막 말'을 하지 않은(못한) 채 헤어진다. 사랑했지만 자신의 위대한 책무에 복무함으로써 들여다보지 못했고 거꾸로 그것을 알기에 다가서지 못했던 둘의 사랑은 애잔하고 서글프며 가혹하다. 독자에게 눈물을 강요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서사 하나만으로 감정을 자극하는 기술이 과히 노벨상 작가답다.

마지막 주제는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의 대비다. 소설은 여행의 현재 시점과 과거 회상의 교차 구조로 이루어졌다. 현재에서 과거를 반추하는 흐름이다. 자신의 선택과 최선에 후회 없이 살아왔다고 믿는 주인공에게 우연의 어느 노인과의 대화는 정작 잊고 있던 것을 알게 해주었다. 자기 자신에게 미래 또한 남아있다는 것을 말이다. 지금까지 어떻게 산 것과는 무관하게 앞으로도 상당히 많은 '남아 있는 나날'이 존재한 것이다. "과거는 영원히 정지해있고 현재는 총알같이 지나가고 미래는 머뭇거리며 온다"는 말이 있다. 총알같이 지나가는 현재에서 영원히 정지해있는 과거의 회상에만 빠져 있는 주인공 스티븐스에게 머뭇거리면서 다가오는 미래가 있다는 깨달음은 그뿐 아니라 정신없이 살아가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만 잠시 잊고 있는 지혜이다.

자연스럽게 내 삶과 나이로 감상을 옮겨가고자 한다. 어느덧 내 나이 사십 대 중반이다. 평균적인 기준에서 대략 반평생 정도를 산 것 같다. 불혹은 남자에게 가장 도전적이고 전회적인 연령대로 불린다. 한 남자로서 가장 빛나고 역동적인 황금기이다. 반면 과거와 미래를 동시 천착하며 깊은 존재론적 번민에 빠지는 극한의 걱정기이기도 하다. 빛나지만 남루하고 두렵지만 역동적인 나이 대다. 나이가 더할수록 시간의 속도는 더욱 빠르게 흐른다는 사실에 숙연해진다. 나는 과연 좋은 남편이고 아빠일까. 훌륭한 아들일까. 위대한 직원일까.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남은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에게 남아 있는 나날은 어떻게 펼쳐질까. 여러 진지한 사유가 머릿속을 주유한다. 이토록 인생의 심연을 깊게 탐색하게 한 것만으로도 이 소설의 가치는 충분하다.

노벨문학상 심사위원회 측은 "이시구로는 초기작에서 이미 가장 깊이 다루는 주제 '기억, 시간, 자기 기만'을 드러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의 글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든 조심스럽고 절제된 방식으로 표현한다"고 평가했다. 그렇다. 이시구로의 소설이 무거운 주제를 관통하면서도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독자의 내면에 침잠할 수 있는 건 독자를 가르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민하고 성찰하되 사유의 종국은 실존 독자의 몫으로 넘기는 것이다. 그렇기에 스티븐스가 '위대한 집사'였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오직 독자의 평가로 남아 있다. 나(독자) 자신의 '남아 있는 나날'에 대한 평가와 해석에 관해서도 말이다. 나이를 먹어가며 두고두고 읽어야 하는 소설이다. 위대한 책 더미에 한 권을 더 얹을 수 있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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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1-11-15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 좋아합니다. 안소니 홉킨스가 주연한 영화도 좋았어요. 이시구로 작품 중 클라라와 태양은 아직인데 읽어봐야겠어요. 다윗 님 좋은 리뷰 고맙습니다 ^^

다윗 2021-11-15 16:11   좋아요 1 | URL
알라딘은 거의 댓글이 달리지 않았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ㅋㅋ 영화는 하도 오래전에 봐서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엠마 톰슨의 미모가 빛났던 것 외에는... 기회가 되면 다시 한 번 찾아봐야겠습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
 
클라라와 태양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홍한별 옮김 / 민음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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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재미있을 수도 있고, 뭔가를 가르치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게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가 느낌을 나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야기가 국경과 여러 차이를 넘어서 우리가 인간으로서 공유하는 것에 호소한다는 사실입니다." - 가즈오 이시구로,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 중

이것이 노벨상 작가의 포스인가. 그렇다. '이야기'는 독자와 느낌을 나누어야 한다. 공감할 수 없는 소설은 죽은 소설이다. 소설은 공감을 통해 언어와 국경을 넘고 성별과 문화를 넘는다. 그럼으로써 이야기는 작가의 것이 아닌 진정한 독자의 것으로 전이되고 확장된다. 이 위대한 소유권의 이전은 사르트르가 '소설적 자유(romanesque liberte)'라는 멋들어진 말로 포장한 이래 문학에 대한 현대 비평의 정설이 되었다. 서두에 인용한 이시구로의 노벨상 연설 한 토막은 소설이란 문학 장르에 존재하는 '작가'와 '독자'와 '허구' 사이의 복잡다단한 함수성을 적확하고 시원하게 포괄하는 명문장이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국경과 여러 차이를 넘어 인간으로서 공유하는 것에 호소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문학의 두 가지 기능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문학의 기능이 교훈과 재미라는 양대 축에 있다는 걸 인정한다면 대중성의 최전선에 위치한 소설이란 장르는 무조건 재미있어야 한다. 한국문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궁핍했다. 문학은 무언가 젠 척해야 하고 무거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한국의 지난한 현대사와 맞물려 고리타분한 이야기만을 양산해왔던 게 사실이다. 물론 최근 다양한 주제와 기법으로 한국소설의 폭과 박력이 넓어지고 확장된 건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가야 할 길은 여전히 멀다. 그런 차원에서 다양한 우주의 폭을 보여주는 해외소설의 역동은 참고할 만하다. 여하튼 소설은 재미있어야 한다. 교훈과 감동은 그다음이다.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즈오 이시구로의 신간 『클라라와 태양』은 쉽고 재미있고 무게 있는 소설의 전형을 보여준다. 쉽고 간결하며 군더더기 없다. 감동적이고 묵직하다. 소설의 주인공 클라라는 인간이 아닌 로봇이다. 실제 인간과 비슷한 외형을 갖춘 '인공지능 친구(Artificial Friend · AF)'라는 형태의 로봇인데 클라라는 그 구형 버전이다. 로봇 매장 쇼윈도에 진열된 클라라는 비록 최신형은 아니지만 다른 AF와 달리 인간의 감정에 관심이 많고 감수성이 풍부하다. 어느 날 야위고 걸음걸이가 불편한 조시라는 소녀가 나타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둘은 서로에 끌린다. 조시는 꼭 클라라를 데리고 가겠다고 약속한다. 클라라는 다른 아이의 간택까지 거부하며 조시를 기다린다. 오랜 기다림 끝에 조시는 약속대로 다시 나타나 클라라를 선택해 집으로 데려온다.

소설 속 1인칭 화자 클라라는 인간이 아닌 소설 주인공으로는 문학사에서 손에 꼽을 만한 매력을 가진 존재다. 앞서 언급한 대로 클라라는 구형 로봇이다. 최신형에 비해 기계적인 기능이 떨어지고 부족한 것들이 있다. 그래서인지 클라라의 불완전한 인식 구조와 감정 상태가 소설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 교차된다. 하지만 자신을 선택해 준 조시에 대한 마음만은 일편단심이다. 클라라의 불완전한 기작도 조시와 진심 어린 우정을 쌓아가는 과정에서 발전해가고 안정되어 간다. 긍정적인 미래를 의심하지 않고 조시에 대한 희생과 헌신에 자신의 전 존재를 투영하는 클라라의 열정이 웅숭깊다. 클라라와 조시가 서로 간의 관계를 발전시키며 우정과 신뢰를 쌓아가는 모습은 참으로 정갈하고 아름답다.

소설의 제목을 생각한다. '태양'은 클라라에게 신적인 존재로 은유된다. 상식적으로 '로봇-신(神)' 사이의 관계 설정이 어색하지만 이야기 속에서 태양은 에너지의 근원과 신앙을 동시에 대변(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태양은 클라라의 기계적 힘을 작동시키는 동력의 원천이자 자양분이다. 클라라는 조시의 건강을 회복시킬 수 있는 힘이 태양에 있다고 믿고 강력한 태양빛을 조시에게 비출 것을 갈망하고 계획한다. 과학의 산물인 AF가 태양빛에 의한 치유라는 비과학적 기제에 경도된 아이로니컬한 설정이지만 클라라의 '믿음'은 한없이 순수하고 한결같아 마치 영혼의 숨결이 느껴지기도 한다. 결국 클라라의 열심과 수고는 소설의 마지막 이야기의 극적 반전을 만들어내며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 소설의 탁월함은 독자를 가르치려 하지 않는 점에 있다. 작가는 과학 발전과 윤리 사이의 긴장, 즉 빅데이터, 유전공학, 인공지능 그리고 이들이 불러올 윤리·도덕적 문제를 나열하지 않는다. 그저 클라라의 시선에 비친 인간 세계의 일상성과 남루함을 사색할 뿐이다. 인간 로봇이라는 타자(他者)적 관점이 관찰하는 인간 군상의 모습은 현실보다 더 실재와 같아 불편하기까지 하다. 인간이란 종족은 먹이사슬의 최상단에 위치해 있지만 동시에 오류와 한계로 가득 찬 불완전한 존재다. 특별하지만 완벽하지 않고 가능성이 넘치지만 자주 실수하는 종족이다. 이런 인간의 양면성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탐색하는 로봇 클라라의 시선이 농밀하다. 지적하거나 꾸짖지 않고 그저 바라볼 뿐이다. 그래서 더 와닿는다.

소설의 막장을 덮은 후 오랫동안 묘한 기분에 정지해 있었다. 로봇 클라라의 매력은 많은 사유의 실타래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인간은 특별한가. 인간성의 미래에 희망이 있을까. 인간 됨의 본질은 무엇일까. 여러 질문이 샘솟는다. 인간성, 과학, 사랑, 상실, 종교, 죽음, 망각(기억) 등 다양한 주제를 관통하며 여러 생각을 갖게 하는 소설이다. 쉽고 아름다운 우화이면서 행간은 넓고 질문은 깊다. 가끔 어떤 책들은 아이와 함께 읽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싶은 충동을 주곤 한다. 『클라라와 태양』은 딱 그런 소설이다. 초등 4학년인 첫째 딸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여운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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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갔었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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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신경숙의 소설을 읽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한국 소설가 중 내가 가장 좋아했던 사람이 표절 사태에 휘말리게 되어 종국적으로 어느 정도 사실로 정리되는 과정을 본 내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외딴 방』을 쓴 작가가 표절이라. 당시의 멘붕은 대단했다. 더욱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애매모호한 태도로 슬그머니 넘어가려는 신경숙의 비겁한 모습에 크게 실망했다. 그래서 당시 별도의 칼럼을 통해 "진실은 신경숙 안에 있다. 지금은 엄마를 부탁할 때가 아니다. 부디, 진실을 부탁해!"라고 일갈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8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신경숙의 『아버지에게 갔었어』는 표절 파문 이후 8년 만에 내놓은 신작 소설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아버지를 주제로 삼았다. 어머니의 입원 때문에 홀로 남은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고향을 찾은 딸이 아버지의 인생을 되짚는 내용의 소설이다. 250만 부 넘게 팔렸고 전 세계 수십여 개 나라에 번역 수출된 초대형 베스트셀러 『엄마를 부탁해』에서 어머니를 이야기했던 작가가 이제는 아버지의 삶을 조명한다. 소설 속 화자인 딸의 고백과 관찰, 회상과 사유가 아버지의 오래고 지난한 삶을 훑고 천착한다. 몰랐던 사실을 알아가고 과거 무의미하게 넘어갔던 것의 의미를 곱씹는 딸의 독백이 잔잔하다.

딸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 있다. 몇 해 전 자식을 사고로 잃었다. 그 상실의 아픔에 먼지가 묻을까봐 가족들은 딸에게 연락하는 걸 주저하고 피한다. 딸 자신도 가족과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그렇게 오랫동안 교류가 없다가 어머니의 입원을 계기로 소설 속 배경 'J시'에 혼자 남은 아버지를 돌보러 가는 장면이 바로 소설의 도입부다. 빈 우사에 갔다가 아버지가 중동으로 파견 나간 큰 오빠와 주고받은 편지를 읽기도 하고, 아버지와 관계된 여러 사람들을 통해 그동안 전혀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또 다른 내면과 객관을 발견하기도 한다. 특히 아버지에게도 은밀한 첫사랑이 존재했다는 사실과 참혹한 전쟁(6.25)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준 자책을 극복하며 재회한 친구 박무릉과의 이야기는 큰 상실에 빠진 딸에게 위안을 준다.

소설 곳곳에 아버지의 일생과 함께 흘러간 파란만장한 대한민국의 현대사의 주요한 장면들이 펼쳐진다. 한국전쟁의 참혹함부터 이승만 독재 정권에 항거한 4·19혁명,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피땀 흘려 농사짓고 소를 키운 그 시대 농촌 가장의 힘겨운 역경 등이 그려졌다. 1950년대부터 80년대 초반까지의 한국 현대사의 그림자가 오롯이 담겼다. 하지만 화자는 그 시대ㅡ산업화 시대ㅡ의 아버지를 대변하는 거대 담론에 묻히지 않는다. 개별자로서의 아버지를 인식한다. 자식을 잃은 깊은 상실감을 아버지에 관한 재해석을 통해 극복해나간다. 개별 인간으로서의 아버지란 존재를 발견하고 성찰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간다. 그 과정이 애잔하고 감동적이다.

세상에서 아버지를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는 나에게 이 소설은 특별한 감동을 전해주었다. 소설 속 아버지의 모습과 나의 아버지의 자화상은 크게 다르지 않다. 1947년생이신 내 아버지는 한국전쟁 직전에 태어나서 두 살에 아버지(나의 할아버지)를 잃고 남의 집 머슴을 하며 찢어지게 가난하게 자랐다. 가끔 듣는 아버지의 어린 시절과 성장과정은 눈물겹다. 그 시대 모든 아버지들이 공유한 보편적 훈장이라고 말하기에는 한없이 고단하고 찬연하다. 지독한 가난과 전염병, 참혹한 전쟁과 서슬 퍼런 독재 정권의 유린을 관통하며 자기 삶을 뒤로 미룬 채 처자식을 부양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위대한 헌신자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 찬양받아 마땅하다. 가끔 젊은 세대들이 자신이 겪어보지 않은 선배 세대의 노고와 희생을 가볍게 여기고 조롱할 때마다 분노가 치민다.

우리는 아버지란 존재를 평가할 때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곤 한다. 아버지는 신(神)이 되어야 본전이다. 각 시대가 갖는 시대의 특질이란 게 있다. 그 시대의 아버지들은 타락하지 않은 것만으로 위대했다. 순결하고 완벽하기에는 시대의 곡절이 너무 고약했고 지난했다. 바람피우지 않고 놀음하지 않으며 끝까지 가족을 부양해낸 것만으로 숭고하다. 에세이 작가 오소희의 말대로 그 시절의 아버지들은 "쉬운 것을 못한 게 아니라 어려운 것을 못한 것이었다." 이제 더 이상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낸 우리의 위대한 아버지들에게 신이 되지 못했다고 비난하거나 조롱하지 말라. 이 소설은 그 사유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웅숭깊다. "살아냈어야,라고 아버지가 말했다. 용케도 너희들 덕분에 살아냈어야,라고." 그렇다. 아버지도 헌신자 이전에 인간이며 개별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삶이란 '산다'가 아니라 '살아낸다'로 사는 것임을 일깨운 것이다. 그래서 위로하고 격려하겠다. 과거 어느 시절에, 그리고 지금 어디선가 "살아냈어야"라고 독백하면서 비루한 삶을 살아내고 있는 위대한 아버지들을.

표절 파문과 별개로 신경숙은 신경숙이다. 이런 소설을 써내는 작가의 "과거의 허물과 불찰을 무겁게 등에 지고 새 작품을 써 가겠다"라는 말이 부디 진심이자 진실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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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기도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댄 윌리엄스 그림, 명혜권 옮김 / 스푼북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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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을 맞이해 첫째 딸 다인이에게 몇 권의 책을 선물했다. 그중 할레드 호세이니의 신간 『바다의 기도』는 단연 눈에 띈다. 호세이니가 동화를 냈다고 해서 딸과 함께 읽어보고 싶었다. 가슴 설레는 마음으로 서점을 찾았다. 작가의 인기 때문인지 방문한 서점 대부분에서 대여섯 권 이상을 비치해두고 있었다. 신간 동화(그림책)라는 특징 때문인지 견본 없이 비닐로 둘러놓기도 했다. 국내 최대 온라인 서점의 '오늘의 책' 코너에 당당하게 오른 걸 보면 호세이니의 이름값은 여전하다 싶었다. 출판사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듯했다.

 

할레드 호세이니는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미국 작가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미권 소설가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작품은 명성만큼 많지는 않다. 『연을 쫓는 아이』, 『천 개의 찬란한 태양』, 『그리고 산이 울렸다』 단 세 편의 소설로 단숨에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슬프면서 감동적인 서사로 전 세계 5500만 독자의 심금을 울렸다. 그의 첫 소설 『연을 쫓는 아이』는 영화로 개봉돼 수많은 영화팬들의 가슴을 적시기도 했다. 그의 소설은 읽기 쉬운 문장과 복잡하지 않은 서사 구조에 조국 아프가니스탄의 굴곡진 현대사를 감동적으로 그려낸 것이 특징이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인간성의 숭고함과 여성성의 위대함을 묵묵한 문체로 그려낸 아름다운 이야기다. 『연을 쫓는 아이』는 한 남자의 성장통이라는 테마를 조국 아프가니스탄의 처절한 현실에 녹여낸 거대한 서사시다. 『그리고 산이 울렸다』는 1인칭과 3인칭 시점, 편지글, 잡지 인터뷰 등의 다양한 형식을 통해 아프가니스탄 현대사의 반세기를 훑는 숨 막힌 이야기다. 세 편의 소설은 각기 다른 주인공과 서로 다른 이야기로 아프가니스탄의 현대사적 민낯을 웅대하게 전달한다. 나는 세 편의 소설을 통해 할레드 호세이니에게 완전히 매료되었고 주변 지인에게 끊임없이 추천해왔다.

 

신간 『바다의 기도』는 동화이다. 얇은 두께의 그림책이다. 대략 10분이면 읽을 수 있다. 텍스트를 읽는 것보다 그림을 감상하는 게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될 정도다. 책 두께는 얇지만 전하는 메시지는 두껍고 무겁다. 호세이니의 간결한 문장을 댄 윌리엄스의 유려한 그림이 적확하게 수식했다. 2015년 9월 터키 해변에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세 살배기 시리아 난민 '아일란 크루디(Aylan Kurdi)'의 실화를 소재로 삼았다. 소설은 아들 마르완을 위한 아버지의 독백과 기도로 이루어졌다. 죽음의 고비에서 아들을 보다 안전한 세상으로 구출하기 위한 아버지의 간절한 기도가 처연하고 숭고하다. 감사와 기도, 사랑과 희생, 역사와 현실 등을 폭넓게 생각하게 해주는 아름다운 동화다.

 

난민 문제로 지구촌이 여전히 시끄럽다. 시리아의 꼬마 난민 크루디가 바닷가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사진이 공개되면서 유럽으로 향하는 난민들의 비극이 전 세계에 알려졌다. 이후 국가마다 물밀듯이 밀려드는 난민의 유입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 중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도와주는 게 뭐가 그리 어려운 문제일까, 생각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난민 문제의 디테일은 그리 간단치가 않다.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인종적인 문제가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의 문제이며 어른의 문제다. 어른들의 탐욕과 불관용 때문에 죄 없는 아이들만 죽어나가고 있다.

 

내가 이 짧은 그림책을 통해 딸 다인이와 나누고 싶었던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인간은 결코 완전하지 않다는 것, 어른들도 실수를 많이 한다는 것, 그리고 세상에는 힘들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 이것들을 딸아이가 알고 느끼기를 원했다. 이해하고 공감하길 원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의 자격이란 '감사'와 '겸손'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기를 원했다. 인간은 분명 뛰어난 종족이되 완전하지는 않다. 그렇기에 항상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현실적 조건이 얼마나 대단한 축복인지를 알고 그것에 진심으로 감사해야 한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돌아보고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걸 일깨우고 싶었다. 흠이 많고 불완전하지만 충분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서의 인간상을 도전해 주고 싶었다. 과연 다인이는 어떻게 읽었을까.

 

완독한 다인이가 감상평을 남겼다. "어떤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아빠 손을 꼭 잡고 있으면 잘 될 거라는 믿음을 얻었어." 깜짝 놀랐다. 내가 생각지 못한 지점이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의 생각은 어른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 놓여 있다는 걸 새삼 인식했다. 그렇다. 자식에게 부모는 신(神)과 같은 존재다. 자식이 커가면서 아빠-엄마의 힘(권력/권위)은 점점 약해지지 마련이지만 아래로 흘러내리는 영향력은 과히 압도적이다. 그렇기에 자식이 나를 믿는다면, 바라본다면, 의지한다면, 사랑한다면, 나는 어떤 마음과 책임으로 인생을 살아야 할까, 생각했다. 묵직한 사유가 내 현존을 억누른다. 마음이 거룩해진다. 예배당으로 달려가 신에게 간절히 기도하고 싶어진다. 책 한 권이 주는 기쁨에 흐뭇한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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