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몽
황석영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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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며, 철학은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며, 과학은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학은 꼭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 조정래 『황홀한 글감옥』中

 

  그렇다. 문학은 반드시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한 시대를 풍미하며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왔던 고전들의 공통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훌륭한 문학은 꼭 알려야 하는 현실세계를 말해왔고 그로 인해 좋은 미래를 예비해왔다. 문학의 역할이자 의무인 인간의 탐구나 시대의 반영은 결국 말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을 말할 때만이 비로소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다.

  소설가 황석영을 좋아한다. 국내 최초 노벨문학상의 영광을 고은 시인보다 그에게 더 기대하고 있을 정도다. 내가 황석영을 좋아하는 이유는 간명하다. 작가로서의 그의 삶을 그가 쏟아낸 텍스트에서 온전히 받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텍스트 바깥은 없다. 본질적으로 문학에서 텍스트 안팍의 구별은 무의미하다. 어쩌면 삶과 문학은 매한가지 일 수 있다. 반추하건대 황석영의 삶은 곧 그의 문학이었다. 그의 문학사는 오욕으로 점철된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압축이었다. 항상 진지하고 묵직하게, 하지만 지루하지 않게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천착하는 황석영의 모습이 나에겐 한없이 높아만 보인다.

  황석영의 신간소식은 항상 나를 즐겁게 한다. 한 소녀의 기구한 삶을 통해 '생명수'의 본질을 탐구했던 그가, 젊은 독자와 호흡하기 위해 자신의 자전적 텍스트를 쏟아냈던 그가 이번에는 어떤 소설로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을 말하려 했던 것일까. 황석영의 최신작 『강남몽』은 언제나 그러했듯이 온갖 긍정적 코드로 점령당한 내 호기심 안으로 오롯이 안착했다.

  소설 『강남몽』은 소위 '신화話'로 불리는 서울 강남의 형성사를 다루고 있다. 허허벌판이었던 한강 남쪽 일대가 어떻게 대한민국 최고 땅값의 부자동네로 발전해왔는지 여러 등장인물들을 통해 흥미있게 그려냈다. 소설 각 장의 중심인물 다섯 명은 강남 형성 역사와 시간을 공유하고 있는 인물들이다. 작가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핵심인물로 룸싸롱 마담, 대기업 총수, 조직폭력배 보스, 부동산업자, 하위계층 등을 순차적으로 배치함으로써 한국 자본주의 형성사를 사실적이면서도 흥미롭게 그려내고 있다.

  이야기는 룸싸롱 마담 출신이자 대기업 총수의 아내 박선녀의 현재로부터 출발한다. 삼풍백화점 붕괴로 대변되는 속도 자본주의의 참혹한 결과는 소설 전체의 현재적 시점을 지배한다. 박선녀는 백화점이 붕괴되면서 콘크리트 무더기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이어 자연스럽게 그녀의 파란만장한 과거의 삶이 그려진다. 그녀가 어떻게 어둡고 험악한 접대의 세계에서 살아남았는지, 어떤 기회와 방법으로 초기 강남 부동산 세계에 발을 디뎠는지, 남자관계와 사랑은 어떠했는지 등등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소설 각 장마다 이야기 흐름방식은 비슷하다. 마치 연작소설과 비슷한 구성으로 소설의 각 장은 한 인물의 이야기가 독립적으로 펼쳐지며 다른 이야기와 연결되고 종속된다. 김진은 거대 재벌 회장으로서 한국 자본주의 역사의 오욕인 정경유착의 표상으로 그려진다. 심남수는 부동산업자로서 박선녀에게 처음으로 부동산 세계가 어떤 곳인지 알려주는 인물이다. 홍양태는 지하암흑세계의 보스이며 박선녀가 운영하는 룸싸롱과 유착관계에 놓여있다. 임정아는 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박선녀와 함께 죽음을 대비한 인물이며 그녀 부모의 이야기를 통해 자본주의 하위계층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각 인물들은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다양한 위치에서 적절히 표상한다. 접대여성들, 밀정과 군인, 정치와 유착한 기업인, 부동산업자들, 조직폭력배들, 그리고 타락과 부도덕이 관영盈한 가운데서도 꿋꿋이 희망으로 살아가는 하위계층에 이르기까지 등장인물들은 우리네 현대사 속 각계각층의 단면들을 적확히 담아낸다. 그간 황석영이 그려낸 모든 인물들이 그러했듯이 과히 입체적이며 실로 역동적이다.

  무엇보다 황석영은 역시 이야기꾼답다. 황석영의 필력은 한국 근현대사의 관통이라는 묵직한 무게감을 단 한권의 장편으로 요리한다. 소설 속 다섯개의 이야기는 각기 다른 곳을 비추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개별적 이야기는 소설의 거시성을 오히려 뒷받침한다. 시간적으로 보면 1900년대 초 만주항일운동에서부터 세기말 삼풍백화점 붕괴에 이르기까지 대략 한 세기의 역사를 그려냈다. 요컨대 작가 황석영은 강남 형성사라는 미시적 테마를 통하여 대한민국의 굴곡과 오욕의 근현대사를 속도감 있게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가 부분적이면서도 소설의 거시성과 완결성을 침해하지 않는 점은 역시 거장다운 황석영의 노련함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각 인물이 그 시대의 특정계층을 잘 표상해주고 있다. 시詩가 소설보다 한 수 위라고 평가받는 것은 짧은 분량으로 깊은 의미를 응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긴 것보다 짧고 굵은 것이 문학을 보다 묵직하게 한다. 압축과 표상은 소설의 힘을 극대화 한다. 강남 형성사를, 아니 한국 현대사의 오욕을 짚어내는데 굳이 몇 권이 아니더라도 가능하다는 점을 노련한 이야기꾼 황석영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작가후기>를 통해 중국 고전 『홍루몽』을 언급하며 지금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사람살이가 어쩌면 꿈과 같이 덧없는 가상의 현실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의 제목을 '강남몽江南夢'이라고 정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 소설의 무게를 굳이 '강남 형성사'라는 지엽적 소재에 국한시킬 필요는 없다. 황석영이 말할 수밖에 없었던 그 '굴곡'과 '오욕'은 아직도 우리사회 곳곳에 배어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몽夢' 앞에 놓여질 단어는 '강남' 이상의 카테고리도 가능하다. 보다 크고 넓은 의미의 것도 무리없이 담아낼 수 있는 소설이다. 결국 소설 『강남몽』은 비정의와 부조리가 판치는 한국사회 전반에 걸친 엄중한 지적이자 우리가 경영하고 있는 현실세계가 후세대로부터 어떻게 스케치될 지에 대한 소름끼치는 울림인 것이다. 꿈이 아닌 '현실'의 울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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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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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2 - 7月-9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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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프롤로그

  한 권의 소설을 읽고 두 번 서평을 쓰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작품이 매우 훌륭한 경우나 남들이 전부 대작이라고 하는데 내가 그 의견에 동조하지 못하는 경우에 이런 수고는 발생된다. 하지만 그 '수고로움'은 '아름다움'의 다른 이름이다. 문학에 대한 리뷰어로서의 진지한 자세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즐겨하는 내 모습에 흐뭇해 한다면 그것은 너무 지나친 자의식인가.

  하루키의 신작 『1Q84』는 현재 매우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기상천외한 선인세라든지 폭발적인 판매량과 같은 이 소설에 대한 비본질적인 수식어구를 끌어다 쓰고 싶지는 않다. 분명한 건 소위 '하루키 현상'이 일본을 넘어 한국에까지 전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20년 전 『상실의 시대』의 뜨거운 반응 이후 하루키 현상은 한국 문학계의 큰 이슈가 되어왔다. 유난스러울 것은 없다. 하루키의 신작이 출간될 때마다 발생했던 일관된 반응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지난 서평에서 『1Q84』에 대해 아낌없는 박수를 선사했다. 평단과 대중의 반응과는 별도로 지극히 개인적인 입장에서 이 소설을 찬탄했다. 한 사람의 아마추어 리뷰어로서 타인의 반응은 내게 독립적이다. 고려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서평이란 본래 객관과 주관의 싸움이다. 비평의 시스템이 적용되는 카테고리는 무조건 '주관적'이어야 한다. 비평에서 객관은 수단이 되지만 주관은 목적이 된다. 객관적 사실로 자신의 주관을 얼마나 명쾌하게 담아내는가는 모든 논설이 갖는 핵심이다. 

  지난번 올린 서평을 되돌아봤다. 미천한 사유와 볼품없는 필력으로 힘없고 매력잃은 글이 되었다. 드러내고 싶은 것을 드러내지 못했다. 다양하고 방대한 하루키의 세계관을 너무 지엽적인 관점에서 풀이했다. 결락된 것을 삽입하고 부족한 표현을 다듬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해서 지난 서평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컨덴츠를 두 번째 서평을 통해 보완하고자 한다.


  <2> 하루키의 '나'

  하루키는 자신의 문학적 과제를 환멸로 가득한 이 세계 속에서의 '존재의 정당성'에 대한 추구를 끊임없이 퍼올리는 일로 규정한다. 열정의 이데올로기 시대를 지나 무료한 고도 자본주의사회를 살아가는 개인들이 느끼는 '존재의 가벼움'이 그의 문학적 주요 관심사다. 『1Q84』에서도 자본주의를 표상하는 소재와 배경이 많이 나타난다. 하루키는 이 소설에서 매우 다양한 소재들을 독자에게 보여준다. 독자는 하루키의 소설에서 기존의 지식이나 정보나 문화가 산재해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하루키 자신의 것, 실제로 존재했던 유명작가의 것,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온갖 유통상품들, 다양한 음악들 등등의 온갖 잡동사니와 같은 것들이다. 마치 소설이 예술의 터미널이 된 것 같다. 기실 이런 방식의 집필은 타작가의 소설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하루키의 그것은 확실히 다른 차이가 있다. 그 '잡다한 것'이 세계가 아닌 개인의 것이라는 점이다. 하루키 소설에서 드러나는 오만가지 잡동사니들은 결코 세계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개인의 전유물이다. 그것들은 세계의 역사가 될 수 없는 개인의 역사나 우주, 생각이나 경험에서 존재한다. 


  소설 속 소재와 장치를 개인의 전유물로 구속시키는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들은 항상 강력한 매력을 발산해왔다. 그렇다면 하루키의 '나'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그것은 세계 속의 '나'가 아닌 자아 속의 '나'로 규명된다. 하루키의 '나'는 아무런 목적 없이 무의미한 것에 지나친 열정을 보임으로써 어떤 의미나 목적을 갖고 있는 '너'에 대한 우월성을 확보하는 자세에 존재하는 초월론적 자기의식이다. '나' 외의 객관적인 세계는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은 '나'의 내용에 지나지 않는다. 또 타인의 자아도 '나'의 의식 내용과 나란히 주어진 것에 불과하다.

  결국 하루키의 '나'는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나'가 된다. 하루키 소설 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극도 공허와 절대 고독의 자장에서 움직인다. 이해할 수 없는 판타지 사건들을 통해 이들은 기존 지식의 한계나 인식의 다양성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결국 자신이 잃어버린 무엇, 즉 결락 내지는 타자화한 내면의 또 다른 자아를 찾아 외부세계로 한걸음 내딛게 된다. 즉 다양한 자아 속에서 자신의 진본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1Q84』에서 펼쳐지는 모든 초자연적인 사건들은 10살 때 한 소녀가 한 소년의 손을 잡음으로써 시작된다. 거기에 적절하게 반응하지 못한 소년의 행동이 세계가 일그러지는 모든 판타지 현상을 추동한다. 즉 소설 속에서 끊임없이 재생되는 종교, 문화, 관념, 철학, 현실, 상실, 고독 등은 '나'라는 실존성을 보다 구체화하기 위한 통로일 뿐이다. 1권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이야기의 지류들이 2권에서는 한 줄기 본류로 통합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종내 사랑으로 귀결되고야 마는 것이다. '나'와 다른 또 하나의 '나'를 연결할 수 있는 힘은 결국 인간의 구체적인 '사랑'이다.



  <3> 사랑 I

  "단 한 사람이라도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면 인생에는 구원이 있어. 그 사람과 함께 하지 못한다고 해도."   <1권, P408>

  하루키의 작품들을 조망해보면 몇 가지 뚜렷한 특징을 추출할 수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사랑'이다. 신의 사랑이나 인류애와 같은 포괄적인 사랑이 아니라 개인과 개인 사이의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사랑이다. 하루키는 그의 작품에서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표명해왔다. 그것은 관념이 아닌 실재의 사랑이다. 근본 사랑의 본체는 태생적으로 반관념성으로 존재한다. 하루키 세계의 크기는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우주 거리로 환산된다. 하루키가 그의 작품 속에서 '한 사람'에 대한 다른 '한 사람'의 사랑을 집요하고 구체적으로 조명해왔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루키적 사랑은 얼핏 보면 관념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실재가 관념을 압도하는 사랑이다. 차원의 한계에 스스로 질문함으로써 시공간성의 구속을 초월한다. 본래 사랑은 발현체와 대상체가 같은 시공간 안에 존재해야 함을 전제하지 않는다. 동일한 실존성의 구속을 타파함으로써 사랑의 의미와 가치를 집대성시킨다. 만약 현실 세계가 11차원의 우주로 존재한다면 사랑은 11차원이라는 절대 고차원에서 그 완전성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사랑은 서로 다른 은하계를 관통하는 힘이다. 사랑은 공간을 무력화하고 시간을 굴절시킨다. 『1Q84』에서 덴고와 아오마메가 일그러진 세계를 달리 살아가면서도 결국 '어린이공원'이라는 하나의 실재하는 공간에서 만나는 모습이 바로 그렇다. 하루키적 사랑의 의미를 가장 단면화한 장면이다.

  사실 덴고와 아오마메는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한 외톨이였다. 그런 두 아이가 서로의 마음을 잠시 공유한 뒤 그 마음을 20년 내내 지속하였지만 그것을 외부에 표현하지는 않는다. 둘은 공통적으로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다. 덴고의 부모는 아들을 NHK 수금원 일에 동참시킴으로 아들에게 적지 않은 수치와 모멸감을 주었다. 아오마메의 부모는 증인회에 빠져 딸아이를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소외시켰다. 누구도 자신을 사랑의 대상으로 생각지 않았다. 그러던 어린 시절의 어느날, 둘은 잡힌 손과 잡혀진 손에서 교감한다. 그 짧은 교감의 감각만을 의지한 채 20년의 시간이 흐른다. 어느날 우연히 비상구(출구)를 통해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되지만 아오마메는 자신이 죽어야 덴고가 살 수 있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아오마메는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끝내 스스로 죽음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완성한다. 이것이 소설 속 다양한 이야기 가운데 끝까지 희석되거나 훼손되지 않았던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의 자기성氣性이다.


  <4> 사랑 II

  현실이 뒤틀린 1Q84의 세계는 불가해한 초자연적인 사건들이 끊임없이 벌어진다. 그렇다면 소설 속 1984는 어떠한가. 그리고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2009년은 어떠한가. 현재 우리들은 매일 아침마다 쏟아지는 기상천외한 사건사고들로 인해 심장을 공격당한다. 어린 소녀를 성폭행해 평생의 장애자로 만든 치악무도한 범죄자가 법에 의한 따뜻한 '배려'를 받았다. 자식이 부모를 버리고 죽이는 세상이 되었다. 거짓이 진실을 추월하고 부조리와 비상식이 정의를 압도하고 있다. 반인륜적 범죄와 온갖 부조한 현실이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야만 하는 당위적 명제가 온갖 도전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소설 속 초자연적인 판타지들보다 더 받아들이기 쉽다고 말할 수 있는가.

  결핍과 외로움의 공간인 1984와 온갖 판타지 상황이 펼쳐지는 1Q84는 서로 극과 극의 관계에 놓여있지 않다. 또한 선과 악이라는 명백한 이분법으로 가름할 수도 없다. 한 사람이 두 개의 공간에 동시로 존재할 수 있으며 개인의 각자 진입 또한 가능하다. 그렇다면 두 가지 상이하면서도 유사한 공간의 균형을 유지하는 통로 역할을 하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우리 내면의 저 어둡고 공허한 심연으로부터, 이 혼돈과 무질서의 시공간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것인가. 스스로를 치유하고 누군가를 구원하는 힘은 어디서 발현하는가. 그것은 결국, 또한, '사랑'이다.

  자신을 조종하는 보이지 않은 거대한 힘의 존재를 인식하고 거기에 대항하기 위해 내린 아오마메의 선택은 사랑이었다. 본인의 '레종 데트르'를 찾지 못하고 그저 단지 살아가고 있을 뿐인 자아의 죽음 대신 사랑을 위해 내린 그녀의 결정이 비극적이지 않은 것은 진정한 사랑이 내포하고 있는 영원성으로 물리적 시간의 유한성을 상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아오마메는 목숨을 버림으로써 사랑을 지켜냈다. 자기 자신을 부정해버리는 소모적 판타지를 뛰어넘어 자신의 저항이 패배주의로 전락하는 것을 피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20년 전 단 한 번 주고받은 짧은 온기에 모든 것을 거는 사랑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한 순간의 영원이 사랑을 완전하게 하는 단 하나의 지렛대가 될 수 있을까. 어쩌면 덴고와 아오마메의 20년을 이어온 사랑이야말로 두 개의 달보다, '리틀 피플'이나 '공기 번데기'보다 더 현실 속에서 일어나기 힘든 판타지적 요소는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거대한 이데올로기의 혼재 속에서 자신의 방향감각을 상실하지 않기 위한 하나의 나침반으로의 사랑이 바로 1Q84가 가지는 진정한 의미는 아닐까.


  <5> 하루키의 소설론

  하루키는 그의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글쓰기의 고통을 말해왔다. 소설가로서의 쓰기에 대한 원칙과 철학을 은밀한 방법으로 소설 속에 암시해왔다. 그는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실존하지 않은 소설가 '데릭 하트필드'를 창조함으로써 소설론에 대한 자신의 견해 전달 수단으로 활용한다.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는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는 명문장을 사용하며 글쓰기의 고통을 마라톤에 대입시킨다. 소설(글쓰기)에서는 천재가 없으며 모든 소설가들은 창작의 연단과 고통의 과정을 반드시 통과한다는 게 하루키의 신념이다. 이러한 그의 메시지는 『1Q84』 속에서도 은밀한 형태로 숨어있다.

  『1Q84』 내에는 또 다른 소설이 존재한다. 액자의 형태로 <공기 번데기>라는 소설이 들어가 있다. 후카에리가 말하고, 아자미가 받아쓰고, 그걸 덴고가 다시 리라이팅함으로써 <공기 번데기>는 만들어진다. 여기서 <공기 번데기>가 『1Q84』 안에서 매우 독특한 역할을 지닌 텍스트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공기 번데기'로부터 '리틀 피플'이 생성되고, 그것은 결국 소설 속 판타지를 추동하는 상징적 존재로서 위치한다. 길지 않은 한 편의 짧은 소설을 '말'로 하고, '받아서' 쓰고, 다시 '리라이팅'으로 이어지는 삼단 작법으로 탄생시킨 <공기 번데기>는 소설에 대한 하루키의 진지한 성찰과 겸허한 자세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평소 마감 기일을 철저히 지키고 마감 기한 이틀 전까지 원고가 완성되지 않으면 정서적으로 진정이 되지 않는 하루키의 글쓰기 스타일은 그로서는 당연한 것일 수밖에 없다. 일상생활은 차치하더라도 소설가로서 글에 관해서는 대단히 엄격한 하루키다.

  하루키는 "소설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소설을 쓸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온 것으로 보인다. 작품에 대한 작가의 독재성은 사르트르에 의해 제압되며 통제되었다. 사르트르의 '소설적 자유(Romanesque liberte)' 이래로 요즘은 작가의 의도보다는 텍스트 자체, 혹은 독자의 해석이 중시되는 추세다. 하루키는 누구보다 그것을 알고 있는 소설가다. 그가 그의 텍스트에서 소설가로서의 진지한 존재론적 고민을 끊임없이 제기해왔던 것도 그러한 그의 내면적 앎과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공기 번데기'나 '리플 피플'과 같은 소설 속 판타지 작동 매개체는 하루키의 소설론을 보조하며 함의하는 외재적 메타포일 수 있는 것이다.


  <8>노벨문학상

  하루키의 노벨문학상 수상 전망이 점점 힘을 얻어가고 있는 것 같다. 해마다 10월 둘째주 목요일이 되면 한국의 문학 관계자들은 스웨덴 한림원을 예의 주시한다. 고은 시인의 노벨상 수상은 이미 전 국민적인 여망이 되었다. 매년 노벨상 발표에 맞춰 안성시 고은 시인의 댁에 새벽부터 죽치고 있는 기자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이제는 지겨울 지경이다. 이는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 정부에서 하루키의 노벨상 수상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는 얘기의 사실 진위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그의 수상 가능성이 항상 최고 순위에 올라있는 것 만큼은 사실이다.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유럽과 미국, 러시아까지 뻗어있는 하루키의 명성을 감안한다면 친유럽 성향이 강한 노벨문학상 심사위원의 선택에 곧 도달하지 않을까 예측된다. 더욱이 '프란츠 카프카 상'과 '예루살렘 상' 수상을 통해 노벨상의 언저리까지 도달해있는 하루키다. 죽기 전에는 반드시 받지 않을까.

  일본의 저명한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과 하스미 시게이코는 하루키 비판의 전면에 서는 사람들이다. 고진이 절대적인 관점에서 하루키를 재단한다면 시게이코는 비평가의 의무론적 입장에서 하루키를 비판한다. 시게이코는 주창한다. 동시대 비평가의 임무는 시대를 선도해가는 소설가를 죽이는 것임을. 이는 이야기의 '해체'를 의미한다. 오에 겐자부로 이후 소설같은 소설을 보기 힘들다는 일본 내 '근대문학의 종언' 담론에서 하루키만이 그나마 가장 자유로운 위치에 있다. 어쩌면 가라타니 고진, 하스미 시게이코, 고모리 요이치 등과 같은 일류급 평론가들이 쏟아내는 하루키에 대한 지대한 비판은 소설의 종언을 바라보는 비평가로서의 안타까움인 동시에 한 줄기의 희망섞인 역설이라 할 수 있다. 그 적확한 위치에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1968년 노벨문학상 수상식에서 가와바탸 야스나리는 '아름다운 일본의 나'를 주창했다. 그로부터 26년이 흘러 오에 겐자부로가 노벨문학상 수상식에서 말했던 것은 '애매한 일본의 나'였다. 야스나리가 '아름다운 일본의 나'를 외쳤을 때 '아름다운 일본'과 '나'는 종언을 맞이하고 있었다. 겐자부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소설이 '나'를 규명했을 때 일본인 안에서 명확한 '나'가 사라지고 있었다. 만약 하루키가 노벨문학상 수상대에 선다면 그는 과연 무엇으로 '나'와 일본을 연결지을까. 자못 궁금하다. 생각만 해도 흥분되는 '만약'이다.


  <6> 하루키의 문체

  개인적으로 소설을 읽는 데 있어 소설가의 문체를 중요시 여긴다. 물론 소설이 작가의 문체만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서사와 리얼리티, 소재와 상상력, 주제의식과 학구성 등등 소설가로서의 능력과 자질은 소설 전반에 걸쳐 드러난다. 그중 일순위로 문체를 꼽는 것이다. 왜냐하면 소설을 움직이는 일련의 모든 요소들은 전부 문장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문체는 문장의 특성을 구하는 상대적 문예 양식이다. 그렇다면 문장이 소설에서 독자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문체의 중요성이 얼마나 소중한가는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하루키 문체의 가장 큰 특징은 '간결함'이다. 그의 문장은 간결하고 유려하다. 그는 쉽게 쓴다. 일부 독자들은 문장의 쉬움과 문학적 가벼움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는 문학에 대한 심각한 몰이해다. 문장이 짧고 쉽다는 이유만으로 문학성이 공격받는다면 세계 문학사에서 한 획을 그은 몽테뉴, 새뮤얼 존슨, 헤밍웨이 등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어쭙잖은 미사여구에 함몰된 만연한 문장보다는 쉽고 간결한 문장이 진리를 묘파하는데 더욱 적확한 방법이 된다. 독자로 하여금 자신이 말하는 바를 귀기울이게 하는 하루키의 힘은 바로 그의 문체로부터 원동력 되는 것이다.

  왕왕 느끼지만 하루키의 문장은 맑은 물과 같다. 불필요한 미사여구나 과도한 수식어구가 없다. 하루키의 글을 읽다보면 걸쭉한 것을 먹은 후 입안이 텁텁할 때 시원한 물 한 컵을 마시며 개운해지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장장 1,400페이지가 넘는 『1Q84』의 거대한 이야기가 시간가는줄 모르고 빠른 가독력으로 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루키의 맑고 고운 단문장은 소설 속 모든 판타지와 관념성을 압도하며 견인한다. 문장이 명쾌하기 때문에 사유나 철학에 짓눌리지 않으며 대상을 왜곡하거나 굴절시키지 않는다. 90년대 이후 수많은 한국 작가들이 하루키의 문체를 글쓰기의 전범으로 삼았던 이유를 이 대목에서 이해해볼 수 있지 않을까. 


  <9> 정리

  초반 의도와는 다르게 간결하지 못한 장황한 글이 되었다. 다시 써도 글의 난잡함은 피할 길이 없다. 어쩔 수 없는 필력이다. 서두부터 말미까지 일관되게 논설한 것은 하루키와 그의 신작 『1Q84』에 대한 찬탄이다. 『태옆감는새』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후속편이 출간된다고 한다. 문학 비평에서 가장 중요한 관점은 '본질'이다. 텍스트 자체라는 얘기다. 3편으로 돈을 더 벌기 위한 수작이 아니냐, 는 혹자들의 의구심은 무의미하다. 얼마나 잘 쓴 텍스트냐, 가 본질이다. 물론 책이 나와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루키는 소설을 잘 쓰는 소설가다. 그리고 소설을 사랑하는 소설가다. 문학평론가 남진우의 표현대로, 무라카미 하루키는 독서나 분석의 대상이라기보다 차라리 매혹 그 자체다. 한국 독자들은 글 못쓰고 실력없는 작가에게 경도될 만큼 그리 어리석지 않다. 하루키는 뛰어난 소설가다. 『1Q84』는 그러한 하루키의 현재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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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도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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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계가 아름다운 것은 별과 해와 달이 있기 때문이다. 꽃과 나무와 나비가 있기 때문이다.  강과 산과 바다가 있기 때문이다. 양과 젖소와 고래가 있기 때문이다. 비가 오고 눈이 내리며 바람이 불기 때문에 세계는 아름답다. 하지만 자연의 것들이 부족하지 않게 넘쳐흐른다 할지라도 세계의 아름다움을 근본적으로 완전화하지는 못한다. 세계가 완전히 아름답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실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다.

  세계가 세계일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존재함으로써 세계는 정의된다. 인간은 아름답다. 세계의 아름다움은 본래 인간의 아름다움에서 전도된 것이다. 움직이는 '것'들 중에서 유일하게 직립보행을 하는 이 위대한 생명체는 끊임없이 세계를 창조해왔다. 열심히 사고했고 노련하게 행위했다. 만약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면 그곳의 생명체들은 찬탄할 것이다. 이 세계의 영장 인간의 아름다움을.

  물론 인간의 아름다움은 어디까지나 총체적이며 포괄적인 관점에서 이해가 성립된다. 인간의 아름다움을 세분하면 역설적 편린들이 다양하게 발견된다. 거짓과 위선, 불관용과 비양심, 배신과 잔혹 등 아름다운 인간을 거부하는 내적 속성들이 인간의 포괄적 아름다움 속에 실재한다. 지난한 인류사는 악한 인간의 본성을 아름다움의 포괄로 압도해왔던 시간의 1차원이다.

  김훈의 『공무도하』는 바로 '인간'에 대한 텍스트다. 밀도있는 김훈의 문체가 조명하는 것은 오직 인간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김훈은 인간 삶의 먹이와 슬픔, 비열함, 더러움, 희망에 대해 담담하고 노련하게 써내려갔다. '비루함'과 '치사함'과 '던적스러움'이라는 인간이 당면한 시급한 현안문제들은 '이 세계(현실)' 안에서 소용돌이친다. 하지만 '다른 세계(이상)'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마치 옛 고조선 나루터에서 벌어진 <공무도하가>의 전설처럼, 백수 광부가 강을 건너지 못하고 물에 빠져 죽은 것처럼, 작가 김훈은 '강'을 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소설 『공무도하』는 사회부 기자 문정수의 관점을 통해 바라본 이 세계의 이야기다. 마치 신문의 사회면을 보는 것처럼 다양한 사건사고가 소설 속 이야기의 중추를 이루고 있다. 기르던 개에 물려 죽은 소년과 아들의 죽음을 버리는 그 어머니 오금자의 잠적, 소방청장 표창을 받은 소방관 박옥출의 업무상 배임과 절도, 노학연대 집행부 일급 수배자들의 은신처를 자백하고 풀려난 뒤 해망으로 떠나 바닷속 포탄 껍질과 탄두를 건져올려 파는 장철수, 방조제 도로의 교통사고로 깔려죽은 소녀 방미호와 그녀의 아버지 세습농부 방천석의 잠적 등 문정수가 기자로서 목도한 세계의 모습은 온갖 암울함으로 가득 차 있다. 그가 현실 세계를 취재하며 공급받은 지나친 피로감은 출판사 편집자 노목희와의 하룻밤을 통해 해소된다.

  소설에서 각기 독립적으로 배열된 이 세계의 인물과 사건들은 개별의 우연으로 엮여있다. 인물간의 과거 어느 지점이 현재성을 부각시키고 현재의 녹록지 않은 인연이 과거를 종속시킨다. 개별적 삶을 살아온 인물들이 새로운 지점에서 만나 특별한 의미를 공유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관계의 형성들은 본인의 입장에서는 오직 현재적 우연으로만 수용된다. 이를 조망하고 조화하며 조절할 수 있는 이는 오직 문정수 한 사람뿐이다. 이 소설에서 모든 사건과 인간 사이의 연결고리를 인지하는 전지적 관점에 서 있는 가장 주요한 화자가 바로 신문기자 문정수다.

  사실을 생명으로 여기는 기자의 입장에서 목도한 세계의 모습은 어떨까. 기자 문정수가 바라본 세계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더러운 시공간이다. 난잡하고 비열하다. 슬프고 각박하다. 현실은 칠흙같은 어둠으로 차 있다. 하지만 작가 김훈은 새로운 곳을 그려내지 않는다. 인간의 비루하고 던적스러운 현실 세계의 막막은 소설의 마지막까지 그 틀과 기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희망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희망은 현실 세계 안에 있다. 세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라는 것을 직시할 때 함구무언된 소설의 메시지는 가시광선과 조우하게 된다. 김훈은 일부로 '강'을 건너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결론은 다시 인간의 아름다움으로 환원된다. 김훈은 유독 그의 소설에서 시간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표출해왔다. 김훈 소설의 대전제는 시간 속에 아름다움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삶과 아름다움의 괴리적 충동을 유발시키는 해석이다. 시간이란 완성되지 못한 정신이 어쩔 수 없이 짊어지는 운명이자 필연이라고 헤겔은 말했다. 아름다움은 오로지 이같은 불완전성을 벗어날 때만 가능하다. 따라서 김훈은 시간을 거부함으로써 아름다움을 끄집어낸다. 그가 그의 소설사에서 그려온 '전쟁', '육체', '동물'이라는 키워드는 인간 내면의 아름다움에 대한 김훈식 접근이자 해석의 연결고리들이다. 강 건너 피안의 세계로 가자는 것이 아니라 약육강식의 더러운 세상에서 함께 살자고 했던 <공무도하가>의 여옥의 노래처럼 말이다.

  나에게 김훈의 문장을 읽는다는 것은 애틋한 사랑을 확인하는 길이자 강렬한 희열을 맛보는 시간이다. 김훈의 소설은 인간을 자연스럽게 배경 안으로 밀어넣는 마력을 보여준다. 분명히 인간이 존재하지만 그것을 풍경에서 담아내는 김훈의 마력적인 문장은 인간 탐구를 조명이 아닌 조망의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자연에서 인간을 그려내는 것이다. 더욱이 김훈의 문체는 철저한 반관념성을 견지한다. 대상을 조작하는 어설픈 관념들을 그는 그의 문장에서 완전히 추방한다. 문장이 사유를 적확히 견인하며 의미를 명징화한다. 맑고 고운 소리는 더 이상 피아노의 전유물이 아니다. 김훈의 문장이 그러하다.

  소설가에게 문체는 매우 중요한 자의식이다. 꾸준한 집필을 통해 나름의 개성있는 문체를 일궈낸 소설가들을 보라. 자신만의 문체로 인구에 회자되는 작가들의 특징은 다른 작가의 그것들을 압도한다. 김훈이나 신경숙의 '문체'가 구효서/임철우의 '서사와 리얼리티', 김연수의 '학구적 기질', 성석제/은희경의 '이야기솜씨', 박민규의 '상상력'을 압도하고 있는 것은 이미 분명한 사실이며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문체는 문장에 대한 상대적 문예 양식 기작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문장이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들이 모여서 소설을 형성한다. 내가 문학에서 유독 문체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해온 것도 바로 이 부분에서 해명된다.

  김훈식 허무주의는 결국 현실 세계의 희망을 발화시킨다. 세계가 아름다운 것은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계도 결국 인간이 사는 세계다. 그리고 그 어떤 허무도 이 명징한 진리를 압도하지 못한다. 김훈이 '강'을 넘지 않은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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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은 힘이 세다
이철환 지음 / 해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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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눈물은 힘이 세다』는 선한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를 담담한 필치로 그려낸 에세이 『연탄길』의 작가 이철환의 첫 장편소설이다. 『연탄길』시리즈는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총 360만 독자의 가슴에 감동을 불어넣었다. 개인적으로 베스트셀러를 맹신하지 않고 작가의 전작과 근작을 연결짓지 않기에 이 소설을 읽는 내내 공정과 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두껍지 않은 분량을 한달음에 마무리 지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매력적인 제목 만큼 힘있고 강렬하게 나를 견인해주지 못한 소설이다.

  이 소설은 궁핍한 가정에서 태어난 주인공 최유진의 가족애와 사랑을 그린 이야기다. 최유진은 다양한 관계맺기를 통해 자아를 찾고 인생을 배운다. 소설 전체적으로 그는 네 명의 인물들과 관계를 형성한다. 술주정뱅이로 어렸을 때 그토록 싫어했던 아버지. 힘들 때마다 하모니카 연주와 인생의 조언으로 정신적 멘토 역할을 하는 옆집 눈먼 아저씨. 첫 눈에 반해 그토록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첫사랑 라라. 가장 친한 친구로서 항상 옆에 있어주는 달수. 네 명의 등장인물들을 통해 주인공 최유진은 고난한 삶 가운데서도 세상을 긍정할 수 있는 힘을 키운다.

  작가의 문체는 간결하지만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힘은 부족하다. 소설은 전체적으로 매우 단선적인 구도을 가진다. 주인공 최유진과 각 인물들간의 대화가 이야기 전개의 중추이다. 작가는 배경과 상황을 설명하는 텍스트는 간결한 단문장으로 이끌어가지만 인물들간의 대화에는 잠언록과 같은 아포리즘들을 배치시킨다. 이런식의 집필은 결국 인물이 언어에 짓눌리는 결과를 초래하는데, 특히 눈먼 아저씨가 최유진에게 쏟아내는 잠언들은 서사 전개와 상당한 부조화를 발생시킨다. 인물성은 부재된 채 작가 자신의 목소리를 독자에게 직접 이야기하고 싶은 의지로만 전달될 뿐이다.

  소설에서 큰 줄기를 이루고 있는 유진과 아버지의 관계는 기존의 통속서사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유진이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품었던 반감과 분노는 결국 이해와 포용으로 변화된다. 아버지가 바뀐 것은 아니다. 항상 술을 벗삼고 어머니를 핍박한다. 끝내 알코올중독자로서 당신의 삶을 욕보인다. 아버지를 바라보는 유진의 시각이 변화한 것이다. 그 변화는 누구나 성장하면서 생기는 깨달음과 깊이의 영역이다. 소설의 이야기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종결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성장소설의 통속성을 그대로 대입한 작가의 진부한 접근이 씁쓸하다.

  유진과 라라의 로맨스 또한 그렇다. 첫사랑이라는 순전함 위에 두 인물은 놓여있다. 어린 시절 집안의 궁핍한 사정으로 몽당 크레파스조차 준비하지 못한 유진에게 곱게 쓰던 자기 것을 건네는 라라의 모습은 천사의 형상으로 각인된다. 그 순전한 첫사랑은 소설 속에서 지속적인 만남과 대화로 연장된다. 하지만 둘이 사랑을 이뤄가는 그림은 녹록하다. 순수함은 있지만 그 순수성을 보완하고 집대성하는 갈구와 열정은 부재하다. 둘은 성인이 된 후 카페라는 공간을 통해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헤어지고를 반복하며 소설 속에서의 서로의 관계적 운명을 묵묵히 유지해간다. 다분히 기계적인 만남의 연속으로 비춰진다. 세월이 흐르면서 꾸준한 만남을 갖는 유진과 라라의 대화 장면들은 사랑보다는 서로의 관념을 공유하는 수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이야기의 본류로 지탱될 것 같던 둘의 로맨스는 진부하게 흘러가다 맥없이 종결된다. 허무하다.

  소설을 많이 읽다보면 등장인물의 존재적 성격에 자연스럽게 주목하게 된다. 등장인물이 창조자인 작가의 절대적 손길을 벗어나는가 하면 철저히 작가의 기호에 의해 움직이기도 한다. 어떤 인물은 사유와 언어에 짓눌리기까지 한다. 인물이 소설의 화자로서 서사를 이끌어가는 중추적 존재임을 감안할 때 인격과 개성을 가진 힘있는 인물이 추동하는 소설이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눈물은 힘이 세다』의 인물들은 기존의 통속서사에 짜맞혀진 하나같이 몰개성하고 무인격적인 밋밋한 존재들이다. 이 소설이 매력없이 읽히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하다. 

  이 정도의 이야기로 제목 전면에 '눈물'이라는 감성적 대표 언어를 배치한 것이 못내 안쓰럽다. 게다가 흔한 소재와 통속서사를 이 정도밖에 끌어내지 못할까 하는 아쉬움은 매우 크다. 소설은 수필과 다르다. 수필이 경험과 고백의 언어라면 소설은 작가가 사유하는 모든 우주의 총체이다. 상상력인 것이다. 경험이 이성보다 강하고 언어보다 진실하다고 말했던 소설 속 작가의 외침을 조금 수정해주고 싶다. 상상력이 경험보다 강하고 언어를 압도한다는 것을. 

  이 소설에 대해 "탁마한 언어들은 독자들의 영혼을 세척하는 데도 탁월한 효과를 보이겠지만 세상을 썩지 않게 만드는 방부제로도 손색이 없으리라"며 유난을 떠는 소설가 이외수의 추천사가 오버스럽다. 꽤 매력적인 제목을 달고 있음에도 제목 만큼의 포스를 독자에게 제공하지 못한다. 이미 우리는 안다. 눈물이 얼마나 큰 힘을 갖고 있는지를. 이미 아는 사실에 대한 언어적 증명은 잘 쓰는 수밖에 없다. 눈물이 힘이 센 만큼 잘 쓴 텍스트 또한 힘이 세기 때문이다. 세계의 모든 언어와 문학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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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즐 - 권지예 소설
권지예 지음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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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야흐로 '여성'의 시대다. 여성의 인권이나 삶의 질을 말하는 게 아니다. 브랜드로서의 '여성'의 가치를 말하는 것이다. 이제 더이상 여성을 알지 못하고는 성공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좁게는 연애의 대상으로서 넓게는 비지니스의 핵심 키워드로서 여성이 갖는 의미와 가치는 계속해서 대두되고 있다.

  우리는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여성을 모성의 테두리 안에서 '대명사'화 했다. 여성은 모성이 되어야 했으며 모성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선善으로 귀결되었다. 모성의 다른 이름으로 여성을 해석하고 당위해야만 했던 것이다. '엄마'라는 강력한 카테고리 안에서 여성의 정체성은 단일적 의미로 구속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대는 많이 바뀌었다. 시대가 요구하는 여성상의 모습이 바뀌고 있다. '엄마'의 모습이 제 일의 선이었던 시대는 지났다. 여성 안에서 엄마의 모습뿐만 아니라 말 그대로 근본 여성의 형상을 갈구하는 시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변화는 여성의 내밀했던 삶과 욕망의 편린들을 음지에서 양지로 이끌어내고 있다. 여성도 엄연한 '인간'이라는 사실, 삶과 사랑과 정염을 내재한 분명한 실존 인간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 현실 문화 가운데서 쉽없이 탐구되고 있다.

  90년대 이후의 한국 문단이 보여준 경향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수많은 작가들이 달라진 여성성을 꾸준히 조명하고 천착해오고 있다. 최근 다시 '엄마'로 회귀하는 모습이 보이고는 있지만 예전의 모성에 갇혔던 엄마와는 존재성이 다르다. 집 안에 있던 엄마가 집 밖을 나갔다. 연애와 사랑과 결혼과 섹스를 동일화했던 기존의 사고방식은 이미 산산이 무너지고 있다. 

  한국 문단에서는 유독 여성 작가들의 활동이 돋보인다. 베스트셀러 순위권 안에 여성 저자들의 이름은 항상 즐비하다. 일흔이 넘도록 결혼하지 않고 전세계를 누비며 구호활동을 해온 한 여성 저자의 에세이가 베스트셀러 1위에 올라있다. 엄마의 내밀했던 욕구와 방황을 극히 문학적인 텍스트 위에 올려놓은 소설은 100만 부가 넘게 팔렸다. 요컨대 시대가 변했고 여성의 의미와 가치도 달리 해석되고 있으며 그 변화의 지류에 한국 문학의 변화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한국 문단에서 권지예는 귀한 존재다. 그녀는 항상 여성을 조명하고 분석한다. 그녀의 텍스트는 근본 여성의 정체성을 단면화한다. 항상 여성화자를 전면에 내세운다. 권지예의 소설에서 남성화자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권지예의 '여성'들은 방황하고 일탈하며 욕망한다. 집 안이 아닌 집 밖에서,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인내가 아닌 욕망의 코드에서 권지예가 만들어낸 여성들은 역동하며 포효한다. 그녀의 최근 소설집 『퍼즐』은 이러한 권지예 문학의 특질이 두드러지게 집대성된 작품이다.

  총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내게 소설집을 읽는 순서는 배치된 단편 순서 그대로다. 표제작을 먼저 읽거나 호감 가는 단편을 골라 읽거나 하지 않는다. 소설집 또한 한 권의 완성된 책이라 한다면 작가에 의해 의도된 태생성 그대로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것이다. 단편집의 순서에는 무언가 외면화 되지 않은 이유와 동기가 있을 것이다. 그 '믿음'으로 순서 그대로를 읽을 뿐이다.

  표제작 「퍼즐」이 눈에 띈다. 주인공 여성화자는 남편의 사랑도 시댁의 관심도 받지 못하는 외로운 여성이다.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두 번의 인공유산을 겪는다. 세 번째 아이는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6개월 만에 자연유산이 된다. 그녀에게 '퍼즐'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삶과 사랑이 산산조각되어 자신의 피부와 심장을 찌르는 아픈 통증 가운데서도 그녀는 퍼즐을 완성하고자 욕망한다. 마지막 그녀가 선택한 죽음은 퍼즐의 완성일까 미완성일까. 

  단연 눈에 띄는 단편은 「여주인공 오영실」이다. 마치 작가의 자전소설의 뉘앙스를 풍기는 듯하면서 액자소설, 환상, 기시감 등의 장치로 소설의 맛을 한껏 살렸다. 주인공 여성작가가 쓴 소설 속의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한 여성독자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믿기 힘든 한 통화의 전화로 주인공은 자신이 오래전에 쓴 소설을 기억에서 떠올린다. 소설 속 주인공과 동일인이라고 우기는 한 여성독자의 전화, 과거 미출간되었던 소설에 대한 회상, 그리고 그 여성독자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스토리라인은 아이러니하면서도 신비함을 자아낸다.

  각 단편마다 등장하는 여성들은 결혼이나 가정에 갇히지 않는다. 오히려 결혼이라는 제도를 전복하고 조롱한다. 그녀들이 추구하는 자유와 욕망은 결혼이라는 카테고리 밖에서 역동한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결국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여성성의 원형을 압제하고 핍박했던 구속을 일탈하고자 하지만 그녀들에게 진정한 행복한 요원하기만 하다. 결국 죽음만이 그녀들을 자유롭게 할 뿐이다. 단편 곳곳에 드러나 있는 '죽음'은 소설 속 여주인공들이 여성으로 살아가는 최소한의 자존심의 표현이자 근본 여성성의 본체에 대한 비극적 메타포다.

  권지예는 <작가후기>에서 소설을 쓸 당시 엄살을 부렸던 부끄러움에 대해 고백한다. 자신의 몸이 좋지 못했던 상황을 언급하며 죽음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쾌유한 후 그것이 자신의 과도한 오버였음을 인식하고 민망스러워한다. 하지만 당시 죽음을 인지하며 써내려갔던 텍스트를 재필하지 않고 그대로 출간했다고 고백한다. 해프닝과 같은 작가의 이러한 고백은 이 소설의 메시지를 더욱 당당하게 한다. 여성성의 숭고한 원형은 솔직함에서 더욱 빛이 난다는 사실을. 

  문학평론가 강유정은 말한다. 『퍼즐』 속 여성들은 하나같이 지독하다는 것을. 또한 항상 여성만을 말하고 조명하며 탐구하는 소설가 권지예 또한 지독한 소설가라는 것을. 그렇다. 권지예는 지독하다. 지독함에서 권지예 문학은 작가 자신과 등장인물이 일치한다. 어쩌면 권지예 자신의 삶이 그녀의 문학세계를 명징하게 비춰주는 거울과 같은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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