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산이 울렸다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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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은 힘들다. 홉스는 말했다. 인생은 짧고 추악하고 고단하고 가난하다는 것을. 잠시 웃다가도 순간을 서글퍼하며 찰나에 좌절하는 게 인간이다. 인생은 끊임없는 고통의 연속성 위에서 펼쳐진다. 자기 앞에 놓여진 복잡다단한 일상의 시공간을 관통하는 힘은 결국 인간의 몫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항시 고단하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란 본디 그런 것이기도 하다.

   고단한 인생 가운데 인간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행복'이라는 삶의 배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행복은 이상理想이 아니다. 인간이 고통이라는 삶의 엄연한 터널을 통과하게 될 때, 그 속의 공허와 빛의 결여는 행복을 이루는 과정인 동시에 행복 그 자체가 된다. 즉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게 본질이다. 실존은 그 다음이다. 이것이 바로 유일한 인간 삶의 목적이다. 그러나 인간의 행복은 항시 고통을 포용한다. 그 점이 삶의 딜레마다.

   기다림은 본래 신神의 영역이다. 인간은 설계학적으로 기다림에 익숙하지 못한 종족이다. 인간사 모든 불행의 근원은 기다림의 부재 혹은 망각에서 비롯됐다. 인간은 기다린 만큼 행복했고 기다리지 못한 만큼 불행했다. 기다림의 마지노선을 지켜내지 못한 인간은 결국 늪에 빠졌다. 신으로부터 벌을 받은 것이다. 그 벌은 바로 '상실喪失'이라는 참혹한 슬픔이다. 결국 인간은 사랑하는 대상의 부재를 통해 끓어오르는 최극한의 슬픔에 직면하여 자신의 교만을 뒤엎게 되고야 마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채웠던 것의 반의지적 결락은 슬픔의 무한대를 통과하여 극한의 고통을 완성시킨다. 궁극의 대상이 시공간에서 이탈되는 경험은 아픔을 말할 수조차 없는 최고의 고통이자 비극이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상실의 시대'를 벗어나지 못한다. 잊고 잃으며 잃고 잊는 게 인간의 수준이다 . 상실은 회복되지 않지만 때로는 망각을 통해 구원받는다. 즉 인간은 상실을 두려워하는 동시에 망각을 지향하는 특수한 시간의 물리력으로 무장한 단 하나의 존재이다.

   할레드 호세이니의 소설은 항시 어둡고 처연한 배경 속으로 독자를 인도한다. 그러나 어두움이 어두움만으로, 처연함이 처연함만으로 존재했다면 호세이니의 소설은 별다른 감동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소설은 항상 인간의 깊고 낮은 곳을 응시한다. 절망 가운데서도 한줄기의 희망이 포착돼 이것을 긍정의 드라마, 즉 빛의 서사로 환원시키는 것은 결국 인간의 내면 속에 존재하는 무언가의 가능성이다. 그것은 '아름다움'이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 비추는 빛보다 고결하고 숭고한 본질상의 아름다움말이다. 호세이니의 소설은 항시 그 아름다움을 주목해왔다.

   호세이니의 신간 <그리고 산이 울렸다>도 바로 그 아름다움의 선상에 올라 서 있다. 그의 전작들은 한결같이 삶의 처연한 배경을 통해 찬란한 인간의 본질을 탐구했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에서는 여성성이 갖는 본질적인 위대함을, <연을 쫓는 아이>에서는 위대한 우정의 파노라마를, 작가는 탄탄하고 숨막히는 서사로 그려냈다. 새 소설은 가난 때문에 운명적인 이별을 맞게 된 남매와 가족의 사랑을 더듬어가며 아프가니스탄 60년의 역사를 관통한다.

   소설의 배경은 아프카니스탄이다. 작가의 모든 작품은 아프카니스탄을 이야기의 중심에 놓는다. 작가의 고국이기도 하지만 아프카니스탄이 갖는 현대사의 특수성과 상징성은 인간의 한계와 희망을 동시에 보여주는 적확한 시공간으로 작용한다. 아프카니스탄은 전쟁, 이념, 종교, 여성, 가난 등의 암울한 현대사의 키워드들이 오롯하게 녹아있는 배경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펼쳐지는 삶을 향한 다양한 몸부림들은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살고 있는 타국의 독자들에게 녹록지 않은 감동을 선사한다.

   신작이 전작과 다른 점은 서사구조의 복잡성이다. 소설은 총 9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952년 가을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3세대를 거치며 1949년과 2010년, 1974년을 오간다. 궁극적인 중심 인물은 파리와 압둘라이지만 9개 장의 주인공은 모두 다르다. 파리를 입양하는 진보적인 여성 시인 닐라, 닐라를 사랑하는 운전사 나비, 카불에서 전쟁 피해자들을 치료하는 그리스 의사 마르코스 등의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작품은 아프가니스탄 현대사의 반세기를 훑는다. 또한 작가는 1인칭과 3인칭 시점, 편지 글, 잡지 인터뷰 같은 다양한 형식을 구사하며 극적 재미를 배가시킨다.

   다양한 인물들이 펼쳐나가는 읽히고설킨 이야기 속에서 독자는 굵직한 단 하나의 방향성을 감지하게 된다. 오빠 압둘라에 대한 여동생 파리의 방향성이 그것이다. 파리의 나이 세 살 때 헤어진 두 남매의 비극적 운명은 60년이라는 긴 시간의 벽을 남겨놓았다. 그러나 차원을 넘나드는 무언가의 신비한 힘을 통해 두 남매는 결국 가족의 공명현상共鳴現象을 완성시킨다. 더욱이 그 공명성共鳴性은 동생의 기억을 초월하고 오빠의 질병을 넘어서는 영역에 존재함으로써 가족애가 지닌 태초적 숭고성과 완전성을 드러내는 절대고차원의 물리력이 된다.

   소설에서 숨막히는 대목은 두 장면이다. 공항에서 압둘라의 딸이 자신의 고모와 대면하는 장면, 그리고 압둘라가 딸을 통해 동생에게 전하려 했던 편지가 공개되는 장면은 과히 압권이라 할 정도로 감동적이다. 눈물없이 이 소설을 읽을 수 없다고 한 AP통신의 추천사는 전혀 오버스럽지 않다. 600페이지에 달하는 장대한 서사를 뚫고 이야기의 말미에 도달하게 되면 독자는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끓어오르는 강렬한 감동의 자장에 사로잡히게 된다.

   막장을 덮은 후 나는 한동안 정지해 있었다. "삶이란 무엇"이고 "가족이란 무엇"이며 "내 행복의 현상태는 어떠한가" 하는 내 삶의 기초 철학적 질문이 가슴속에서 폭포수처럼 샘솟았기 때문이다. 한참 뒤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새삼 깨달았고 연이어 곱씹었다. '살아간다는 것'의 엄연한 실재와 '행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의 분명한 당위가 서로 조화를 이루고 결합되기 위해서는 오직 '가족'이라는 작은 천국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이다. 이 명징한 진리를 반추하게 한 것만으로도 할레드 할레이니의 <그리고 산이 울렸다>는 별 다섯 개를 받기에 충분한 소설이다.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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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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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 이게 바로 소설이다. 무릇 소설은 이래야 한다. 하루키는 문학으로서 소설이 갖추어야 할 전범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가다. 문학의 궁극은 인간이다. 소설의 목적은 인간에 대한 세밀하고 입체적인 성찰 위에 놓여 있다. 하루키 소설의 두드러진 특징인 "'나'라는 존재에 대한 정당성의 부여"는 '인간 탐구'로 정리되는 소설의 목적론적 원형에 가장 성실한 의무이자 키워드라 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하루키의 힘이다.

   하루키의 신작 장편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긴 제목과는 달리 간결하고 명료한 문장으로 채워져 있다. 한 편의 소설을 평가하면서 인물과 플롯보다 문장을 먼저 논하는 게 매끄러운 순서가 아닐 수 있다. 본래 소설의 힘은 우선적으로 등장인물의 생명력과 탄탄한 구성으로부터 나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하루키의 소설만은 예외다. 하루키 문학의 고유하고 독특한 주제인 '세계를 외면하며 자아 속으로 침투하는 나'를 표현하는데 있어 간결한 문장만큼 적확한 재료는 없다. 애매모호한 표현법이나 지나치게 만연한 문장은 하루키 스타일이 아니다. 딱딱 끊어지는 명료한 단문장이야말로 하루키 세계의 인물들에게 내재된 '우주 위에 존재하는 초월론적 자기애'를 가장 잘 발현해 낼 수 있는 기술이자 방법인 것이다.

   소설은 36세의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가 잃어버린 과거를 찾아나서는 순례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 작가는 쓰쿠루의 여정을 통해 개인과 개인 간의 거리, 자아와 타자 사이의 여백, 과거와 현재가 연결된 시간의 종속성, 내밀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회복 과정 등을 매우 담담하게 그려냈다. 어떤 장면에선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엄연하게 배리되어 있는 꿈의 세계를 통해, 또 어떤 곳에선 잃어버린 과거를 현재와 미래라는 전혀 다른 시간대의 배경으로 치환시키는 차원 이동의 놀이터로, 또 다른 곳에선 진실과 거짓이 뒤섞여 더이상 진실됨의 유의미성을 보증할 수 없는 '본질된 참'의 애매성으로, 작가는 한 개인이 반드시 짊어져야만 하는 숭고한 순례의 길을 입체적이고 감각적으로 담아냈다.

   주인공 쓰쿠루는 극도 공허와 절대 고독의 자장에 허덕이는 하루키적 인물의 전형이다. '삼십대 중반의 평범한 직장인'이라는 현재의 시점과 학창시절의 잃어버린 과거의 시점이 반복적으로 교차되며 이야기는 전개된다. 그때는 세계의 전부로만 여겨졌던 학창시절의 네 친구들로부터 이유도 모른 채 버림받은 쓰쿠루의 아픈 상처와 이로 야기된 극강의 외로움은 소설 전체의 질감을 규정해버리는 중요한 밑바탕이 된다. 대학시절 잠시나마 쓰쿠루의 외로움을 달래주었던 하이다와 현재의 유일한 친구이자 연인인 사라는 쓰쿠루에게 긍정의 아이콘이다. 그토록 절친했던 친구들로부터 절교를 당한 쓰쿠루에게 하이다와 사라는 쓰쿠루 자신의 삶을 재차 돌아보게 하고 원했던 죽음을 포기하게 하는 희망의 동력이 된다.

   외연적으로 보자면, 이 소설은 '색채'에 대한 이야기다. 쓰쿠루를 버렸던 나고야 학창시절의 네 친구들은 모두 이름에 색채를 담고 있다. 아카(赤), 아오(靑), 시로(白), 구로(黑) 등 색채가 들어가 있는 네 친구들과 달리 쓰쿠루는 색채가 없다. 남자 친구 둘은 성이 아카마스(赤松)와 오우미(靑海)이고, 여자 친구 둘은 성이 시라네(白根)와 구로노(黑野)였다. 오직 쓰쿠루만이 색깔과 연결되지 않는다. 이러한 쓰쿠루의 컴플렉스(?)는 차후 그가 인간관계에서 아이러니한 민감성을 갖게 되는 내밀한 원인이 된다. 이후 그가 만나는 사람마다 한결같이 이름에 색채를 띠고 있는 것이다. 이는 쓰쿠루에게 매우 큰 정신적인 부담으로 작용하는데, 이름에 국한된 것임에도 색깔의 결여를 자신의 고유성에 대한 존재론적 위험으로 규정하고야 마는 것이다. 쓰쿠루의 이 불편한 착각이 소설의 분위기를 한층 더 어둡게 만드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네 친구들로부터 그룹에서 버림받았을 때, 그것은 마치 쓰쿠루의 '무색채'가 증명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수영을 통해 사귄 하이다와의 짧은 만남과 친구이자 연인인 사라와의 관계를 통해 쓰쿠루는 자신에게도 색채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나간다. 사라의 제안에 따라 16년만에 네 친구들을 직접 만나는 용기의 과정을 통해 자신이 절교당한 이유와 이와 연관된 에피소드들을 하나둘씩 알아가게 된다. 이 순례의 여정은 쓰쿠루 자신의 내면 속에 존재했던 '본질된 참 나'로서의 색채가 지니고 있던 고유성과 명징성을 발견하는 통로였던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소설은 하루키 문학의 전형성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이는 소설 속 장치들을 통해서도 잘 드러나는데 '음악'과 '섹스'는 그중 단연 눈에 띄는 것들이다. 하루키는 그의 비블리오그래피에서 일관되게 음악을 틀어왔고 끊임없이 섹스를 표현해왔다. 소설에서 베르만이 연주하는 <순례의 해>가 끊임없이 재생 반복되는데 이는 쓰쿠루의 내면을 정돈시키는 핵심적 장치로 작용한다. 또한 빈번하게 등장하는 섹스씬과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성행위 묘사는 개인과 개인 사이의 방향성과 현재성을 담아내는 중요한 메타포가 된다. 즉 음악을 통해 평정을 얻는 인간상의 설정과 거듭 반복되는 구체적인 섹스장면의 배치는 인간의 내면와 외연을 이어주는 통로로서의 기능을 할 뿐만 아니라 그 모든 것이 결국 하나로 합치될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에 대한 소중한 이미지인 것이다.

   한 가지 의문해보자. 소설에서 하루키가 제시한 '순례'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걸까. 이에 대한 사유는 이 소설을 오롯하게 흡수하는데 꽤 중요하다. 왜냐하면 쓰쿠루의 순례가 외연적으로는 절교당한 이유를 찾는 과정으로 보이지만 종국의 내포적 의미는 '나'를 객관적으로 천착하기 위해 나서는 열정적인 자기발견과정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쓰쿠루가 잃어버린 과거를 회복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참된 내면 속으로 끊임없이 침잠하며 진정한 자기자신이 되어가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렇다면 하루키의 '나'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그것은 세계 속의 '나'가 아닌 자아 속의 '나'로 규명된다. 하루키의 '나'는 아무런 목적 없이 무의미한 것에 지나친 열정을 보임으로써 어떤 의미나 목적을 갖고 있는 '너'에 대한 우월성을 확보하는 자세에 존재하는 초월론적 자기의식이다. '나' 외의 객관적인 세계는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은 '나'의 내용에 지나지 않는다. 또 타인의 자아도 '나'의 의식 내용과 나란히 주어진 것에 불과하다.
결국 하루키의 '나'는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나'가 된다. 자신이 잃어버린 무엇, 즉 결락 내지는 타자화한 내면의 또 다른 자아를 찾아 외부세계로 한걸음 내딛게 된다. 즉 다양한 자아 속에서 자신의 진본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은 그의 모든 소설을 관통하는 흐름인 동시에 전작 『1Q84』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부분이다. 사실 새로울 건 없다. '나'에 대한 끊임없는 객관성의 부여, 그리고 그 유일한 매개로써 '사랑'이라는 가장 완전한 형태의 선善을 제시한 이야기 구도는 항시 하루키가 그려왔던 방식이기 때문이다.

   『1Q84』에서 펼쳐지는 모든 초자연적인 사건들은 10살 때 한 소녀가 한 소년의 손을 잡음으로써 시작된다. 거기에 적절하게 반응하지 못한 소년의 행동이 세계가 일그러지는 모든 판타지 현상을 추동한다. 즉 소설 속에서 끊임없이 재생되는 종교, 문화, 관념, 철학, 현실, 상실, 고독 등은 '나'라는 실존성을 보다 구체화하기 위한 통로일 뿐이다. 『1Q84』의 초반부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이야기의 지류들이 후반부에서는 한 줄기 본류로 통합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종내 사랑으로 귀결되고야 마는 것이다. '나'와 다른 또 하나의 '나'를 연결할 수 있는 힘은 결국 인간의 구체적인 '사랑'인 것이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도 『1Q84』의 주제를 그대로 재청한다. 결국 쓰쿠루를 억누른 극도의 공허와 불안은 현실의 유일한 도피처이자 해결책으로 존재한 사라와의 관계맺기를 통해 해소되고 부서진다. 쓰쿠루가 순례의 길을 통해 가장 핵심적으로 깨달은 것은 사라를 사랑하고 있는 엄연성에 대한 명확한 자기인식이었다. 사라가 자신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이후 그녀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결국 자신의 미래는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에 대해 쓰쿠루는 선연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됐다. 결국 '사랑'이었던 것이다. 인간 삶의 모든 혼란의 실타래를 종국적으로 사랑이 끝맺음시킨다는 하루키적 메시지의 보편을 그대로 이어나가고 있다.

   서평을 정리하자. 하루키의 신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개인 간의 거리를 천착하는 과정을 통해 자아 속으로 침잠하여 자신의 진본을 명징화해 나가는, 그러나 결국 사랑으로 귀결되고야 마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다. 참 잘 썼다. 역시 하루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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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림길 - 누구나 생애 한 번은 그 길에 선다
윌리엄 폴 영 지음, 이진 옮김 / 세계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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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소설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삼위일체三位一體의 하나님, 즉 기독교의 교리가 밑바탕된 분명한 기독소설입니다. 동시에 비기독교인이 읽어도 무방할 정도의 공간성을 확보한 판타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소설이 주는 근본적인(종교적인) 메시지가 선명하기 때문에 기독교적 관점과 교리적 입장에서 서평을 쓸 수밖에 없었음을 밝혀둡니다.


   홉스는 말했다. 인생은 짧고 가난하고 추악하고 고단하다는 것을. 인간이 살아있는 목적은 분명 행복하기 위함일텐데 그러지 못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이 절대다수인 것 같다. 행복은 만인의 목적이다.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그러나 원하는 만큼 얻지 못한다. 이는 대부분의 인간이 행복을 추동하는 근원적인 에너지가 어디서 발현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바로 이점이 인간을 불행하게 한다.

   신神에게 행복이라는 용어는 통용되지 않는다. 신은 스스로 존재한다. 인간의 지성과 과학으로는 신의 실체를 가늠할 수 없다. 신은 신만의 세계가 있다. 인간은 인간일 뿐이다. 물론 두 존재 사이의 교차점은 있다. 그러나 그 지점은 매우 작고 부분적이며 일시적이다. 인간은 신이 보여주는 만큼만 볼 수 있고 허락하는 만큼만 느낄 수 있는 지극히 미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면 행복의 획득은 신의 차원에서 이뤄질 수 있다는 기대를 가능케 한다. 신이 세상을 창조하고 섭리해가는 초월자라는 점이 믿어지면 행복을 이루는 궁극의 요소들이 신성에서 발현돼 인간에게 전도된다는 초고차원적 진리에 다가설 수 있게 된다. 인간의 행복은 언제나 이 기준에서 왔다 갔다 해왔다.

   윌리엄 폴 영의 신작소설 『갈림길』은 신비한 기적의 이야기를 통해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 탐구한다. 이 소설은 전편 『오두막』과 마찬가지로 큰 고난을 당한 주인공이 특별한 계기를 통해 삶을 되돌아보면서, 상처와 오해로 인해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스스로 쌓아놓은 벽을 허물고 관계를 회복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주인공 앤서니 스펜서는 외로운 인물이다. '토니'라 불리는 스펜서는 부유하고 오만하기 그지없는 이기적인 삶을 영위한다. 그는 자신밖에 모르고 자신이 전부인 세계를 살아간다. 그러던 중, 갑자기 길에서 넘어져 뇌사상태에 빠진다.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자신의 내면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곳은 아무런 지도나 안내판도 없는 황폐화된 곳이다. 아일랜드인 남자 잭과 농장에 살고 있는 남성 '예수', '오두막'에 살고 있는 인디언 할머니 등을 만나면서 토니는 내면을 회복시키기 위한 여정에 나선다.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신과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토니는 그 여정을 통해 신의 숨결에 깊이 다가가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고독과 상처를 치유받는다.

   작가는 전세계적인 사랑을 받은 전편 『오두막』과 마찬가지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전면에 내세운다. 주인공은 삶에서 받은 고난과 상처들을 온전한 삼위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치유한다. 작가는 기독교라는 하나의 종교적 카테고리에 함몰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전적으로 주목한다. 분명한 신앙적 메시지임에도 불구하고 종교와 무관하게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판타지적 요소가 적확하게 가미됐다. 이 소설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이다.

   작가는 끊임없이 '성부聖父·성자聖子·성령聖'이라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三位一體的 속성을 주목해왔다. 하나님의 본성은 '관계'에 있는 것이며 이는 신성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는 기독교적 신관神의 전제에서 소설을 이끌어가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삼위일체관은 세련되고 현대적이며 파격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초대교회 때 아타나시우스가 확립했던 기독교의 정통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되, 삼위로 존재하며, 세 위격은 하나로 통일된다, 는 기독교 교리에 완벽하게 일치되어 있다. 작가의 작품세계에서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에 대한 지독한 강조는 기독교의 핵심교리와 근본정신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근거가 되며, 그의 소설이 가진 가장 주요한 특징이 된다.

   삼위일체는 '관계'이다. 동시에 '희생'이다. 그리고 결국, '사랑'이다. 모든 것은 여기서 출발한다. 만약 신이 삼위일체로 존재하지 않았다면, 신은 인간이 되지 않았을 것이며, 그로써 신과 인간은 관계적으로 차원이 이동되는 일체적인 찬탄을 이뤄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신의 본성은 더욱 구체화된다.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고, 인간 삶의 세세한 부분까지 관여하며, 인간의 슬픔과 어둠 속을 파고들어 선함과 상냥함과 진실함을 키우며 고취시킨다. 이는 바로 하나님의 삼위일체성 속에 내재된 인간을 향한 절대적 사랑의 디테일인 것이다.

   서두에 언급한 '인간의 행복'은 바로 이 디테일을 알고 느끼며 체감하는 여정 위에 놓여 있다. 소설 속 토니의 변화 과정이 그랬다. 그의 변화는 '관계' 안에서 발생했다. 하나님과 자기자신 사이의 관계, 동시에 나와 또 다른 인간, 즉 타자 사이의 관계를 통해 아픈 상처를 치유하고 본질적인 행복을 맛보게 된 것이다. 또한 토니가 선택한 종국적인 결정, 즉 '달리다굼(Talitha cumi, "소녀여 일어나라")'의 기적은 자기자신은 물론 인간이라는 가치와 소중함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결국 신성의 발현이 작동시킨 신비스러운 '관계맺기'였다.

   소설 『갈림길』의 메시지는 명징하다. 우리 자신이 회복되면 달리다굼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로하고 안내하며 실행하는 이는 바로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헤가 어떻게 사람을 변화시키는지를 신비로운 판타지로 그려내면서, 동시에 독자에게 어떤 길로 걸어가야 할 지를 질문하고 있다. '갈림길'은 우리의 상처투성이 내면을 정화하고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선택의 여로인 것이다.

   어느 누구나 갈림길을 만난다. 소설의 제목 '갈림길'은 인간의 선택을 질문하는 작가의 상징적 메시지다. 삶은 끊임없이 선택을 요구한다. 인생은 결국 선택의 역사다. 나 자신을 깨닫고, 신의 사랑에 이르며, 행복에 다다르는 길은 신의 섭리 안에서 인간의 의지가 작동된 매커니즘의 아웃풋이다. 즉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진행과정 위에서 인간의 상대적인 선택이 만들어내는 초우주적 시공간의 화학현상인 것이다. 이 비밀을 믿고 따르는 자에게만 신적인 평온이 부여된다. 갈림길은, 바로 '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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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찾아서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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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王)'은 무엇인가. 사전은 왕의 의미를 "군주 국가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우두머리"로 풀이한다. 왕에게 대항할 자는 없다. '백수의 왕' 사자에게 덤벼들 동물이 없듯이 왕의 권위는 강력하고 절대적이다. 인간의 정치제도 안에서도 왕의 권한은 무한대다. 입법 사법 행정을 한 손에 주무를 수 있는 초월적 권력자인 것이다. 그렇다. 왕이란 존재는 심히 매혹적이다.

  왕의 매력은 인간의 내면적 속성과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다. 권력을 향한 인간의 강한 집념이 왕을 선망케 했고 결국 만들어냈다. "짐은 곧 국가"라고 외쳤던 프랑스 절대왕정의 어느 군주처럼 왕은 인간성을 넘어선 신의 위치에 서길 원하는 인간의 교만이 아이콘화되어 있다. 인간의 끊임없는 권력 추구의 속성이 만들어낸 산물이기에 왕이라는 존재는 '두려움'과 '의심'을 기본적으로 함의한다. 인간이 왕을 만들어냈고 왕이 된 인간은 인간 이상의 초월성을 끊임없이 누리려 했다. 그러다 결국 파멸되기도 했다. 파멸된 왕은 다시 인간이 됐으며 그 파멸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왕이 가진 힘은 충분히 매혹적인 것이었지만 그 매혹만큼이나 위험했다. 그랬기에 인류사 이래로 대부분의 왕은 결국 '파멸'을 맞이했다.

  우리 시대가 낳은 최고의 입담꾼 성석제는 자신의 첫 장편소설을 통해 힘과 권력에 집착된 인간의 본성을 깊이있게 탐구한다. 15년 만의 개정판으로 독자를 찾은 소설가 성석제의 거침없는 서사는 왕의 매력만큼이나 매혹적이다. 도시를 벗어난 한 지역사회 건달들이 뿜어내는 거칠고 굵직한 이야기가 성석제 특유의 재치있고 유머러스한 문체로 독자의 가독력을 속도화한다. 

  소설가 성석제의 『왕을 찾아서』는 제목 그대로 왕을 찾는 이야기다. 그 '찾음'의 일차적인 의미는 주인공 장원두가 어린 시절에 영웅으로 추앙했던 동네 건달두목 마사오를 향한 경외와 그리움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보다 입체적으로 소설을 조망해보면 등장인물 대부분의, 어쩌면 모든 인간의 내면 속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왕을 향한 욕망의 방향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힘과 권력을 갈구하는 인간의 태초적인 속성과 그것의 사회적 인과성, 그리고 권력의 비영속성에 이르기까지 독자는 소설을 읽는 내내 가벼우면서도 묵직한 성석제표 입담에 시간의 흐름을 망각하게 된다.

  어느 날 갑자기 주인공 장원두는 자신이 어린 시절에 그토록 경외했던 고향의 건달두목 마사오의 부고를 접한다. 개인적인 상처로 고향을 떠났던 원두는 마사오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다시 고향을 찾는다. 장례식에서 그는 마사오와의 추억과 자신의 친구였던 몇몇 건달들의 과거와 현재를 되돌아보게 된다. 아무도 넘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마사오의 빈 자리를 다른 사람이 채우고 또 다른 사람이 다음을 채우는 권력의 지속성에 원두는 놀란다. 그는 깨닫는다. 왕으로 대변되는 힘과 권력의 양태는 그 주체만 바뀔 뿐 계속적으로 순환되고야 마는 것을.

  인간은 힘을 갖고 있는 상태를 유지할 때만 온전한 왕이 될 수 있다. 소설 속에서 유신조, 마사오, 조창용, 박재천으로 이어지는 왕권 교체를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잠기는 원두의 모습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원두가 그토록 사랑했던 여인 세희도 이 남자 저 남자를 거쳐 결국은 최후의 왕 재천의 여자가 된다. 권력의 가장 강력한 속성은 소유욕을 장악하는 데 있다. 돈과 인간뿐만 아니라 사랑까지도 소유하고야 마는 강력한 힘이 인간의 권력 속에는 존재한다.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어렵게 한 걸음 한 걸음 사랑의 발걸음을 내디뎠던 세희를 향한 원두의 성실함은 왕이 될 가장 능동적인 '세자'였던 친구 재천의 권력성 앞에서 처절하게 짓밟히고 만다. 그렇다. 왕은 힘이 세다. 그리고 매혹적이다. 사랑의 진실과 성실을 뒤엎고 호도시킬 만큼.

  소설은 마사오 이후 권력의 소용돌이에 빠지는 한 지역 건달들의 야욕과 패권싸움을 적나라게 그려나간다. 조폭세계에 대한 스케치는 비단 문학뿐만 아니라 한국 대중문화가 수없이 그려왔던 레퍼토리이다. 잔인하고 비인간적이며 신뢰성을 상실한 건달세계의 모습은 인간이 지향해야만 하는 '아름다운 세상'의 조건들과는 철저히 대척점에 서 있다. 성석제는 태생적으로 권력욕에 지배당한 인간세계의 한계를 가장 낮은 바닥의 이야기를 통해 묵묵히 그려내고자 했을 것이다. 거짓과 파괴, 간교와 악의가 득실대는 깡패세계의 모습이야말로 왕의 영광과 파멸의 대극(對極)을 가장 역동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이 소설의 가장 큰 강점은 성석제 특유의 문체에 있다. 선굵은 지역 건달들의 이야기가 건조하지 않게 한 숨에 읽히는 것은 순전히 작가의 역량 덕분이다. 가독력이 가히 발군이다. 독자는 시간가는줄 모르고 성석제의 이야기에 몰입하게 된다. 작가는 주인공 장원두를 통해 자유자재로 시점을 이동시키며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를 이끌어낸다. 유머, 재치, 익살, 해학으로 점철된 개성있는 문체는 가벼우면서도 서사의 권위를 흠집내지 않고 독자에게 여운을 남기는 힘이 있다. 쉽게 읽히지만 흡입력 있는 서사는 흐트러지지 않은 채 소설의 말미까지 안전하게 당도한다. 쉼없이 이야기에 몰두한 독자의 집중력은 소설의 막장을 덮은 후에는 무언가의 깊은 여운을 확인하는 에너지로 자연스럽게 대체된다. 성석제의 힘이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지역사회는 그곳 건달들이 힘의 논리로 겨루는 작은 공간이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은유가 담긴 곳이기도 하다. 그곳은 인간세상 전체를 풍자해놓은 공간이다. 권력에 대한 욕망은 비단 지역 깡패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류 보편에 해당되는 엄연한 약점이기 때문이다. 그곳은 곧 '지구'였던 것이다. 동시에 소설의 제목 '왕을 찾아서' 또한 인간 본성에 대한 날카로운 암시를 함의한 배치일 것이다. 왕 마사오에 대한 원두의 방향성은 인간이라면 어느 누구나 갖고 있는 '강한 것'에 대한 야심을 메타포한다. 왕을 찾아서. 그렇다. 인간은 자기 안에 존재하는 '왕을 찾아서' 헤매며 갈등하는 바로 그런 존재인 것이다.

  간만에 성석제의 소설을 만나서 즐거웠다. 놀랐던 것은 성석제가 이토록 소설을 매력적으로 쓰는 작가였나 하는 점이다. 그간 몇 편의 작품에서 그의 가벼운 입담에 거리감을 느꼈던 내가 그의 첫 장편소설에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누린 것은 어쩌면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을 게다. 좋은 작품은 언젠가는 독자를 찾아가게 되어 있다. 소리 소문 없이 절판된 소설이 15년 만에 개정판으로 다시 독자를 찾은 필연이 그것을 넌지시 증명한다. 한 작가에 대한 오해가 오늘로서 풀리게 됐다. 독자로서 흐뭇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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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천연기념물 제조가
조대호 지음 / 아름다운사람들 / 2010년 11월
평점 :
판매중지


  우리는 소설을 왜 읽는가. 이 질문에 대해 사람들은 가지각색의 답변을 늘어놓을 것이다. 하지만 다양한 답변들은 대부분 큰 두 가지의 본류로 정리된다. 그것은 바로 '재미'와 '감동'이다. 소설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인간을 탐구하는 산문문학의 한 장르이다. 이유 없이 만들어진 소설은 없다. 모든 소설은 작가의 의식과 가치관을 담은 허구의 이야기이다. 독자는 픽션의 세계를 통해 현실을 보다 냉정하게 바라보고 인간을 입체적으로 성찰할 수 있게 된다. 그 과정에서 좋은 소설은 독자에게 반드시 재미와 감동을 선사한다.

  나에게 소설을 왜 읽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말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내면적으로는 인간에 대한 성찰을 위해서고 외연적으로는 재미와 감동을 위해서다. 그렇기에 나는 재미와 감동(교훈)을 함께 주는 소설을 좋아한다. 잘 쓰여진 소설은 현실을 적절히 비틀어서 세계의 변혁을 요구한다. 소설 창조의 목적은 결국 인간인 것인데 좋은 소설은 독자로 하여금 인간의 본성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심미안의 지혜를 이끌어낸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소설을 읽는다.

  한국소설에 애착이 많은 편이다. 최근 한국문학에 흥미를 잃은 독자들이 많은 듯하다. 한국소설의 매력이 외국의 것들에 비해 객관적으로 부족함이 많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난 한국소설을 멀리하고 싶지 않다. 자국인의 정서로 가공된 상상력을 자국어로 전개해나가는 한국소설에 녹록지 않은 연대와 기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 팔구십 년대의 후일담 문학을 넘어서 한국소설도 이제는 다양한 소재와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참신한 변화를 이뤄가고 있다. 난 믿는다. 한국어의 위대함과 한국문학의 진보를.

  한국소설을 두루 읽다 보면 가끔씩 놀랄 때가 있다. 출간은 됐지만 유명세가 없어 서점 구석에 쳐박혀 있는 보석과 같은 소설을 만났을 때가 그렇다. 그럴 때 리뷰어의 숨은 가빠진다. 수없이 많은 책들 가운데 옥석을 구분하여 이웃에게 양서를 소개하는 의무가 리뷰어에게 있기 때문이다. 프로든 아마추어든 리뷰어의 역할은 책을 선택하고 소개하는 일이다. 좋은 소설은 재미와 감동을 주는 소설이라고 했던가. 어느덧 가빠진 숨을 몰아내고 리뷰어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마음을 가다듬는다. 그리고, 쓴다.

  반가운 소설을 만났다. 간만에 시간의 속도를 잊은 채 읽었다. 소설 『천연기념물 제조가』는 매력적인 제목 이상으로 나에게 흥미진진한 재미와 가볍지 않은 교훈을 선사했다. 85년생 소설가 조대호는 첫 작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탄탄한 구성으로 매력적인 장편소설을 완성시켰다. 장편소설은 그 형태적 특징으로 인해 독자로 하여금 작품 속 인물과 사건을 더욱 깊이있게 들여다보게 한다. 단편보다 훨씬 긴 호흡을 요구하기 때문에 독자는 이야기를 총체적으로 들여다보고 소설의 메시지를 살피게 된다. 이러한 구조론적인 관점에서 소설 『천연기념물 제조가』는 흠을 찾아볼 수 없는 매우 잘 쓰여진 소설이다.

  작가는 꽤 무거운 주제를 도저하고 엄숙한 방식에서 벗어나 매우 흥미로운 서사로 만들어냈다. 주인공 신관우가 겪는 믿기 힘든 경험을 통해 인간과 자연 사이의 오묘한 관계를 소름 돋는 픽션으로 그려냈다. 제목 '천연기념물 제조가'는 말 그대로 천연기념물을 제조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소설 속에서 '진벽회'라는 단체로 명명된다. 소설을 읽다 보면 그들이 어떤 일을 하는 단체인지 알게 되는데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충격적이다. 그들은 TV드라마 <아이리스>, <아테나>와 같이 국적과 민족을 초월하는 비밀조직이다. 무엇보다 인간이 파괴한 자연을 되살리기 위해 어떤 행동도 서슴지 않는 무서운 집단이다. 소설 『천연기념물 제조가』는 바로 그들의 이야기다.

  소설 속에서 진벽회는 매우 무서운 집단으로 존재한다. 그들은 인간 자체를 증오하고 불신한다. 인간의 이기심과 악한 본성이 자연의 질서를 훼손해왔고 이를 복원할 능력이 인간 스스로에게 내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인간을 불신하기 때문에 그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들은 지구상 곳곳에 은밀한 형태로 숨어 임무를 수행한다.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개체를 멸종시키기도 하고 그것을 방해하는 다른 개체를 살상하기도 한다. 이 괴기한 진벽회의 행위는 엽기를 넘어서는 근원적인 무서움에까지 닿아 있다. 그 무서움은 바로 인간의 진본眞本에 대한 질문이다.

  인간을 제외한 지구상의 모든 동물은 딱 생존을 위해서만 움직인다. 생존은 지구상 모든 생명체의 존재를 규정한다. 하지만 인간만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생존 이외의 것을 추구하는 욕심을 위해 이성理性을 작동시킨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어준 그 위대한 이성으로 인해 오히려 인간은 '악마'가 되었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연과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인가. 인간이 자랑스럽게 발전시켜온 과학기술의 편리성이 애초의 우주 자연의 순환성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엄연한 현실에서 인간은 인간 스스로 자연의 본래성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일까. 과연 인간에게 그만한 자정능력이 있는 걸까. 작가는 이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내리지 않는다. 인간을 멸종시킴으로써 자연을 지킬 수 있다는 진벽회와 인간의 본성 속에 지켜낼 수 있는 힘과 희망이 있다는 신관우의 대결을 암시하는 것으로 소설의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결국 작가는 자신이 고민했던 부분, 즉 소설의 결론을 독자에게 토스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의도는 본인의 메시지에 대해 깊게 경청하고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은밀한 외침을 독자에게 호소하는 장치가 된다. 환경에 대한 위기의식은 비단 어제오늘의 경고가 아니다. 국제사회 곳곳에서 환경파괴에 대한 염려와 예방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들이 눈에 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이 위기를 대하는 경각警覺의 밀도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인간이 위대한 것은 이성을 지닌 존재라는데 있다. 오직 인간만이 갖고 있는 고결하고 고등한 이성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인간은 천사가 될 수도 있고 악마가 될 수도 있다. 인간의 순전한 이성이 현실인식의 디테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고도의 경각으로 세계 변혁의 원동이 된다면, 그렇다면, 인간에게는 분명 희망이 있을 것이다.

  에드워드 카의 말대로 인간의 정신문명은 반드시 진보한다. 그리고 그 진보에 대한 믿음은 어떤 자동적인 또는 불가피한 진행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인간 능력의 계속적 발전에 대한 믿음에 연유한다. 어쩌면 지구상 대부분의 인간들은 유전자 속에 태생적으로 그것을 인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경각하고 행동하지 않을 뿐. 작가 또한 그 일말의 희망과 기대 가운데 펜을 들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자신의 소설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짐으로써 심각한 지구병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소설이 좋은 것은 그것이 허구의 세계라는 데 있다. 허구는 사실의 참혹한 단면을 효과적으로 인식하게 한다. 현실을 벗어난 세계이기 때문에 독자는 '만약'을 상정하고 현실을 보다 냉정하게 들여다보게 된다. 더 나아가 독자는 문제의 단면을 인식하고 인지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태도를 설정하고 견지하게 된다. 소설의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소설이 상정한 허구가 엄연한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지나친 가정법 위에서 독자는 당혹하고 심장을 두근거리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소설적 사고의 긴요성이다.

  서평을 정리하자.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소설가 조대호의 『천연기념물 제조가』는 재미와 감동을 두루 갖춘 잘 쓴 소설이다. 모처럼 좋은 소설을 만나 고개를 주억거렸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작가는 다음 작품으로 빈민 아동들을 위한 소설을 집필 중이라고 한다. 완벽하지 않은 인간의 이기심과 무관심으로 야기된 지구상 곳곳의 어두운 문제들을 파헤치는 작가의 기백이 멋지다. 벌써부터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지금보다 더 진보된 상상력과 진지함으로 우리세계의 암연暗然을 밝혀주길 소망한다. 괴테는 말했다. 작가는 여든의 나이에도 소년의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소설가 조대호의 순수한 초심이 변질되지 않기를 바라며 그의 펜 끝에서 세계의 변혁이 추동되기를 응원한다. 화이팅!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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