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급생
프레드 울만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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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세계대전을 다룬 매체ㅡ책,영화,방송,기사 등ㅡ를 만날 때는 한결같이 마음이 아프다. 비단 5천만 명이 사망한 역사상 가장 잔악하고 처참한 전쟁이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2차 대전은 세계전쟁 이상의 의미를 가진 지옥의 아이콘이다. 유태인 600만 명 학살뿐 아니라 전쟁 앞뒤의 전개과정에서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메커니즘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의 대숙청, 스페인 내전, 아프리카의 참상, 공산주의의 만개 등은 2차 세계대전 앞뒤의 참상을 인과적으로 연결짓는 사악한 사례들이다. 

   거대한 참혹성은 이야기로서의 매력을 가진다. 소재화되고 재구성되어 스토리텔링의 마력을 내뿜는다. 그렇기에 책과 영화를 위시한 거의 모든 매체에서 2차 세계대전은 단골 소재가 됐다. 스필버그는 2차 대전의 한 복판에서 라이언 일병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군인들의 모습을 그린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로 전세계적인 흥행을 이루었다. 권터 그라스는 나치 점령부터 2차 대전 종전 후까지의 파행적인 독일 역사를 그린 소설 『양철북』으로 1999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스베틀라나 알롁시예비치도 2차 대전 당시 여군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르포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로 노벨상을 거머쥐었다. 전쟁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프레드 울만의 중편소설 『동급생』도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다. 1930년대 독일을 배경으로 유대인 의사의 아들 한스와 독일 귀족 소년 콘라딘의 우정을 그렸다. 두 소년의 만남과 이별, 재회를 통해 나치즘과 홀로코스트 시대의 슬픔을 비극적으로 담아냈다. 이 소설에 대해 작가 아서 케스틀러는 '작은 걸작'이라고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고, '르 피가로'의 주필 장 도르메송은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울었다"고 상찬했다. 프레드 울만은 70세의 노령에 이 소설을 발표했다. 1971년 출간 당시에는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1977년 아서 케스틀러의 서문과 함께 재출간되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소설이 특별한 이유는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하지만 그것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두 주인공 소년 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서사를 이끌어간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소설의 종국적인 메시지는 '2차 대전의 비극'이다. 참혹한 전쟁을 소설의 시공간 뒷편으로 밀어서 배치한 듯하지만 이야기의 완료시점에서는 2차 대전이 얼마나 잔혹하고 비극적인 전쟁이었는지를 역설적인 방식으로 고발하고야 만다. 작가의 이 놀라운 전개 기술 덕분에 독자는 막장을 덮은 후 묘한 감동과 전율을 느낀다.

   작가의 기술이 놀랍다. 전쟁의 소용돌이 한가운데를 보여주진 않지만 두 소년 사이의 마음의 거리를 포착하는 것만으로도 잔인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이 소설의 생명력으로 수렴되고 있는 마지막 한 문장에 대해서는 반드시 모르고 읽는 것이 유익하다. 대단한 반전은 아니지만 그 한 문장 속에 두 소년 사이의 우정과 오해, 그리고 2차 대전의 참혹한 비극이 모두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동급생』은 중편소설이다. 중편의 분량은 이 소설의 서사 구조와 잘 호흡하는 탁월한 외적 장치이다. 본래 중편은 장편처럼 긴 호흡이나 거대한 드라마를 갖지는 못한다. 또한 삶의 한 테마를 사진 찍듯이 터치하는 단편의 그것과도 궤를 달리 한다. 장편의 구조를 추구하면서도 한달음에 서사를 압축시키는 힘이 중편소설의 매력이다. 만약 작가가 이야기의 전개를 늘어뜨려 거대한 파노라마 한복판으로 끌고가려 했다면 소설의 마지막 한 방은 약했을 것이고 감동과 재미는 반감됐을 것이다. 작가의 노련한 기술이다.

   문학작품에서 작가가 전하려는 메시지의 밀도는 사용하는 언어의 양이나 자극적인 표현의 총량과 무조건 비례하지는 않는다. 작은 네러티브 속에서도, 소소한 에피소드를 통해서도, 전혀 다른 이야기 구도 가운데서도 작가는 독자에게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작가의 기술이며 실력이다. 그런 차원에서 소설 『동급생』에 대한 긍정은 어렵지 않게 수렴된다. 한두 시간이면 읽을 수 있는 중편의 외연 속에 '두 소년의 우정'과 '나치즘의 발흥'을 농밀하고 입체적으로 엮어낸 『동급생』은 참 재미있는 소설이다. 일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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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나가 있던 자리
오소희 지음 / 북하우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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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본질은 고통일까 행복일까. 서양철학사의 중요한 시기는 이 질문을 정면으로 관통한다. 공리주의자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은 인간을 "고통과 쾌락의 두 군주의 지배 하에 놓여있는 존재"로 규정했다. 그러나 다수의 현대사상가들은 인간의 삶을 '고통과 쾌락'이라는 전근대적인 기준으로 탐구하는 것에 거부권을 행사한다. 인생을 사변적인 이분법으로 재단하는 것은 나도 동의할 수 없다. 사람마다 다른 고유한 삶은 그 자체로 절대선이라 믿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여행에세이로 친숙한 작가 오소희가 소설을 냈다. 그의 첫 소설 <해나가 있던 자리>는 인간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단선적으로 상실과 박탈에 대한 이야기로 보이지만 보다 입체적으로 조망하면 인간 내면의 깊은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고민하는 삶의 보편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 오소희는 이 짧은 소설을 통해 삶의 '보편적 천국'이 '개별적 지옥'을 어떻게 극복해가는지 따뜻하고 진지한 언어로 보듬고 위로한다.

소설의 서사는 간명하다. 주인공 해나는 아들을 잃은 비운의 여인이다. 아들 재인은 여섯 살의 어린 나이로 목숨을 잃는다. 어린 자식을 먼저 저세상으로 보낸 엄마는 제정신일 수 없다. 해나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붙박이장의 차가운 금속 봉에 목매달아 죽을까를 고민한다. 그러나 "엄마, 행복해"라는 재인의 말을 상기하며 생각을 거둔다. 그리고 떠난다. 목적지 없이 멀리 떠나버린다. 작가는 해나가 계획되지 않은 여행을 통해 상처를 견디고 치유하는 과정을 동화처럼 아름다운 그림으로 그려냈다.

소설의 시공간적 배경이 되는 해나의 여행지 '그린레프트'는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작가는 현실의 상처를 비현실의 치유 속으로 밀어넣는다. 이 작가적 장치는 현실에서는 해나가 위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전제한다. '깊은 슬픔'의 본질을 결론적으로 굴종시키는 비본질의 외연이 실재의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다는 걸 암시한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우리네 현실이 피곤한 건 필요한 게 없어서가 아니라 불필요한 게 많기 때문"이라는 평소 오소희식의 세상보기를 그대로 반영한다. 그렇다. 불필요한 비본질의 과잉은 항시 본질의 영역을 침해하고 배반한다. 비극이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의 집필의도를 직선적으로 드러낸다. 한꺼번에 삼백 명의 아이들을 잃은 작년 봄의 광포한 상처는 우리 모두를 해나가 되게 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해나가 아니었다. 작가는 바로 그 지점을 포착하고 있다. 상실과 박탈의 지속성을 중단할 아무런 동력장치가 우리의 현실체계 속에서 존재하지 않았음을 꼬집는다. 이 책의 시작이 바로 거기서 태동했음을 작가는 밝힌다. 즉 이 소설은,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 현실에 실재한 '진짜 해나'가 벌떡 일어서서, 자신을 되찾고, 사랑받고, 사랑하는 모습을 미치도록 갈망하는 목적으로 씌어진 것이다.

소설을 읽다가 나는 어느 한 지점에서 잠시 멈칫했다. "살아서 벌어지는 건 다 축복이다"라는 소설 속 어느 여인의 대사가 나온 장면이다. 내가 정지한 건 나이를 먹을수록 이 말이 가진 거대한 본질에 깊이 동의해가기 때문이다. 그렇다. 삶은 고단하다. 하지만 그것을 채우는 수많은 순간들의 조합은 온갖 축복으로 가득 차 있다. 삶은 곧 축복인 것이다.

아직 생을 다 살지 않은 '지금 이 순간'의 시간대는 '삶이 곧 축복'이라는 명제를 오롯이 수용할 수 없게 만드는 한계적 속성을 내재한다. 인간은 현재라는 시간대만을 인식할 수 있는 존재다. 인간의 인식론은 신(神)의 것과는 다르다. 시간은 인간을 조롱한다. 과거는 영원히 정지해있다. 현재는 총알같이 날아간다. 미래는 머뭇거리면서 다가온다. 이 굴곡된 시간의 물리력은 인간이 종국의 순간에 직면하여 자신의 내면을 쓸어내리며 신의 차원에 한발 더 다가설 수 있는 동력이 된다.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건 시간대에 대한 통섭(通涉)의 내공을 누적하는 과정이리라.

인간은 상처의 종족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여러 상처와 아픔으로 충만하다. 안타까운 건 개별 인간의 비극과 무관하게 시간은 항시 보편적으로 묵묵히 흘러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의 일관성과 건조함 앞에 인간은 더욱 번민하며 좌절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아름답다. 종국의 희극이 순간의 비극을 압도할 미래의 시간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삶은 그 자체로서 선이고 사랑이고 축복이다.

서평을 정리하자. 삶은 아름다운 것이고 소망의 기한은 무한적이라며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오소희의 소설 <해나가 있던 자리>를 우리 주변의 '진짜 해나들'에게 추천한다. 그리고 그들이 옷장 속에서 용기있게 나올 수 있기를 기다리며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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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쏴라 - 2009년 제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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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문학상은 1회 수상작부터 꾸준히 읽어오고 있다. 세계문학상은 다른 문학상과는 다른 뚜렷한 개별성을 갖고 있다. 텍스트의 가독성과 재미를 중시하는 게 주된 특징이다. 한국판 나오키상(直木賞)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읽기에 쉽고 몰입도가 높은 대중적인 소설이 꾸준히 선정이 되어 왔다. 도발적인 소재와 개성있는 문체, 빠른 속도감과 흡입력 있는 서사를 갖춘 작품이 세계문학상의 표적이 된다.

   1회 수상작 김별아의 『미실』은 여태까지 생각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여성상을 만들어냈다. 박현욱의 『아내가 결혼했다』는 보수적인 한국사회에 '비독점적 다자연애'를 질문함으로써 꽤 충격적인 도발을 시도했다. 신경진의 『슬롯』은 도박을 소재로 자본주의의 바다를 헤엄치는 인간의 정체성을 흥미있게 그려냈다. 백영옥의 『스타일』은 신세대 한국여성의 진화된 원형을 익살스럽게 담아냈다. 잘 읽히고 흥미있고 도발적이고 신선한 점이 세계문학상 수상작들의 공통적 분모다.

   제 5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내 심장을 쏴라』는 제 1회 세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로 대중에게 낯설지 않게 자리매김한 소설가 정유정의 장편소설이다. 이전작들과 마찬가지로 굉장히 재미있는 소설이지만 보다 '문학적'이라는 점에서 강한 매력을 가졌다. 요컨대 소설 『내 심장을 쏴라』는 재미와 무게를 함께 지닌 힘있고 감동적인 소설이다. 최근에는 영화로 제작되어 기존에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다시 한 번 재조명되고 있다.

   이 소설은 폐쇄된 정신병원에서 만난 두 남자가 서로를 알아가면서 각자의 삶으로부터 교차되어 얻는 깨달음과 열정을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가위만 보면 공황장애를 일으키는 1인칭 화자 이수명과 그와 같은 날 정신병원에 입원한 시력장애인 유승민과의 첫 만남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첫 만남의 데면데면함이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친밀한 우정으로 변화하기까지의 과정을 흥미있고 생동감 있게 담았다.

   수명과 승민은 각자 삶을 대하는 태도가 상이하다. 수명이 내면 속으로 자신을 축소화한다면 승민은 외연을 향한 방향성에 집착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한다. 수명과 승민은 공히 과거의 비밀을 가슴에 품고 지낸다. 작가는 두 인물의 과거 트라우마와 그것에 함몰되어 일상을 둥개는 현실의 긴장감을 잘 그려냈다. 소설의 뒷부분으로 가면서 과거에 봉착되어 있던 수명과 승민의 내밀한 비밀은 밝혀진다. 타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자신에 의해 고백되고 깨달아졌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소설의 앞부분은 서사의 진척이 느리고 미지근한 몰입도를 보인다. 하지만 중반을 넘어 후반에 이르게 되면 여태까지 소급되어 응축된 이야기가 한꺼번에 터지면서 독자의 가독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소설의 말미, 주인공 수명이 오랫동안 가슴 깊숙한 곳에 봉인해두었던 삶의 참된 진실을 인식하고 용기를 표출하는 장면, 그 순간은, 이 소설이 선사하는 가장 강렬한 울림이자 카타르시스다.

   이 소설의 핵심 키워드는 두 가지로 정리된다. 그것은 바로 '자아'와 '자유'다. 폐쇄된 정신병동이라는 외면의 벽을 탈출하려는 몸부림은 자아를 제대로 인식하기를 원하는 내면의 열정에 닿아있다. 두 인물의 과거의 아픔과 이에 구속된 일그러진 현재상은 자신의 인생에서 자아의 지정학적 위치를 잘못 두었을 때를 그대로 은유한다. 자아의 본질에 대한 성찰은 결락된 채 비본질에 대한 집념과 고집만이 반복되고 있을 뿐이다. 자유를 간절히 소망하지만 정작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행동방식은 자아의 역동과는 거리가 먼 외적 환경의 파괴, 또는 내적 울림과의 단절에 불과하다.

   이러한 두 인물의 자유 성취와 자아 성찰에 대한 공전(轉) 행태은 승민이 병원을 탈출하여 글라이더를 타고 하늘을 활공하는 바로 그 순간, 앎과 행복의 실현으로 급반전된다. 승민은 종내 죽는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소설의 마지막 수명이 정신병원을 퇴원하는 장면과 연결된다. 죽은 승민은 수명에게 질문한다. 너는 누구냐고. '새' 아니면 '비행기'냐고. 이에 대한 수명의 답은 단호하고 명확하다. 내 인생을 상대하러 나선 놈. 바로 '나'라는 것을.

   한 사람의 자유는 타자의 간섭이나 외부의 구속으로 조정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인생 또한 타자가 아닌 자아의 추동, 즉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생(生)의 강렬한 욕망은 항시 자유의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내 인생을 '나'로서 사는 것은 분명한 진리다. 이 타협할 수 없는 절대명제 앞에서 우리 삶은 때때로 외부를 의식하고 타자에 주눅들며 방황한다. 진정한 자유의 가치는 내가 내 삶의 주어로서 존재하며 약동할 때 빛을 드러낸다. 내 실존은 누구도 욕망하지 못한다. 이 말이 진리라면, 외부를 향해 가슴을 열고 자신있게 외칠 수 있을 것이다. 내 심장을 쏴봐.

   굉장히 잘 쓴 소설이다. 서사를 풀어가는 능숙함과 재치있는 입담이 돋보인다. 순간순간의 감동이 녹아있고 시종 재미를 잃지 않는다. 정교하고 정제된 묘사와 독자의 호흡을 쥐었다 놨다 하는 작가의 내공이 훌륭하다. 우리는 이런 소설에 박수를 보낼 수 있어야 한다. 내적 자유와 자아의 고찰에 번민하는 수많은 영혼들에게 이 한 권의 소설이 위로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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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광활한 인간 정도전 1 소설 조선왕조실록 1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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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이란 무엇인가. 혁명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 사회를 진보시키는가. 왜 역사상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혁명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는가. 혁명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가. 혁명은 선한가. 숭고한 것인가. 요컨대 '혁명'이란 단어는 이런저런 질문을 실타래처럼 엉키게 하며 깊은 사유 속으로 밀어넣는 힘을 가졌다.

   우리시대 가장 사랑받는 소설가 김탁환이 '혁명'을 말한다. <불멸의 이순신>, <열녀문의 비밀>, <나, 황진이> 등 그간 역사소설로 사랑을 받아왔던 그가 조선왕조 500년 전체를 소설로 재구성하는 거대한 작업을 위해 펜을 들었다. 김탁환의 신작 <혁명>은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와 정도전, 그리고 끝까지 고려왕조를 지키려 했던 정몽주의 내면세계를 그린 장편소설이다. 소설은 이성계가 해주에서 낙마하는 순간(1392년 3월 17일)부터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암살당하는 순간(1392년 4월 4일)까지 18일간의 비망록이다.

   소설의 구성은 일관적이다. 매 장마다 이성계, 왕(공양왕), 정몽주, 정도전의 순서로 화자가 교차되며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더욱이 문체의 변화무쌍함과 편재성은 소설의 재미를 입체적으로 폭발시키는 원동력이다. 작가는 편지, 가전체 등 당시 신진사대부들이 애용한 다양한 문체를 통해 각 인물의 내면을 관통한다. 특히 유배지 영주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심화자 정도전의 유쾌한 내면을 엿보는 맛은 이 소설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작가는 특유의 공력으로 '이성계-정도전-정몽주' 사이의 공통된 꿈과 이상, 그러나 분명히 달랐던 혁명의 방법론적 성격에 대해 탐구한다. 동시에 앞선 세 사람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꿈꾼 또 하나의 혁명가 이방원의 외면을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소설의 시종을 일관되게 지배하고 있는 네 인물들 사이의 공통과 대척의 내외면적 대비는 이야기의 긴장감을 증대시키는 일차적인 구조가 된다.

   주지하다시피 정도전과 정몽주는 혁명 동지다. 같은 스승에게 배웠고, 같은 곳을 바라봤으며, 같은 뜻을 품었다. 두 사람은 맹자의 민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성리학적 이상국가, 누가 왕위에 오르든 건강하게 돌아가는 재상 중심의 정치체제를 이루려 했다. 왕이 아닌 백성을 위한 국가여야 한다는 점에서 정도전과 정몽주는 하나였다. 정도전이 정몽주였고 정몽주가 정도전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이상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정몽주는 고려라는 체제 안에서 그것을 이루고자 했고 정도전은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고자 했다. 소설은 동일한 것 같으면서도 확연히 다른 두 혁명가의 대조점을 극히 절제된 내적 번민의 언어로 박진감있게 그려낸다.

   소설의 주인공은 단연 정도전이다. 정도전 자신의 내면을 공개하는 일기체가 정도전 외의 인물들을 이끌어가는 편년체를 압도한다. 소설의 시공간적 시점과 사건의 전개방식은 유배지에서 혁명 과업의 디테일을 사유하는 정도전의 내면세계에 종속되어 있다. 그만큼 소설 속에서 정도전의 아우라는 독보적이다. 이성계, 정몽주, 이방원 등은 한참 뒤로 밀려나 있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다. 작가는 주인공인 정도전을 유독 부각시키며 그에 대한 애착을 직선적으로 내뿜는다.

   그래서인지 소설 <혁명>은 인물 갈등에 있어 구도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정도전과 정몽주의 대비를 지나치게 강조한 탓에 혁명의 본질적인 대척점이라 할 수 있는 이방원의 존재감을 후퇴시킨 것이다. 본래 혁명의 균열은 정도전과 이방원의 대비에 있다. 왕이 아닌 백성이 주인되고 재상이 정치하는 나라, 이를 위해 법과 제도를 정립시켜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나라를 건설하려 했던 '정도전 혁명'에 대한 궁극의 보이콧은 절대왕권주의를 역설한 이방원이었다. 정몽주의 죽음까지만으로는 정도전 혁명의 명암을 입체적으로 천착하기 힘들다. 최소한 '1차 왕자의 난'과 함께 정도전의 죽음까지 다뤘다면 훨씬 더 세밀한 혁명성의 전후를 살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서평의 서두에서 제기한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혁명은 무조건 좋은 것인가. 혁명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고 사회를 발전시키는가. 김탁환은 왜 지금 혁명을 말하고 있는가. 21세기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작금의 상황에서 과연 혁명은 누구를 위한 주제인가. 소설 속에서 정도전은 혁명은 '절망을 먹고 자라는 것'으로 규정한다. 이어 그는 "혁명을 도모한다는 건 절망의 끝에 다다랐다는 뜻일세. 지금 여기의 사람과 제도로는 도저히 희망을 발견할 수 없다는 안타까운 확인."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절망에서 싹튼 혁명이 무조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건 아니다. 그렇기에 정도전은 일갈한다. 혁명의 성공에는 힘이 필요하기에 시간을 기다리는 인내가 혁명가에게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혁명의 본질에 관한 이러한 여러가지 질문들은 우리의 머리를 복잡하게 한다. 그러나 혁명의 태동에 관한 분명한 진실이 있다. 역사적으로 반복 입증된 결론은 명징하다. 어지러운 세상일수록, 가진 자가 교만할수록, 사회가 부조리할수록, 그래서 그것에 '분노'하고 '실패'하며 '절망'하는 자들이 많을수록, 사람들은 혁명을 원했다. 명확한 사실이다. 소설 <혁명>의 시의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혁명이 무엇을 먹고 자라는 줄 아는가. 절망이라네. 분노에 뒤이은 실패 그리고 절망. 이 셋을 반복하는 동안 혁명은 싹이 트고 뿌리와 줄기가 뻗고 가지가 펼쳐진 뒤 꽃이 피고 열매가 매달리지." (1권, 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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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고 푸른 사다리
공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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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아니, 불가능한 무언가를 만날 때 작가는 번민한다. 실존의 분명한 인식과 이를 향유하는 엄연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언어에 갇혀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서글프다. 언어는 모든 걸 정의하지 못한다. 존재의 본래적 성질이 가지는 다양한 층위를 언어는 대등적으로 연결해내지 못한다. 정의定義의 메커니즘 속에도 '시간과 공간'이라는 직관적 형식이 있다. 언어가 무언가를 풀어내려고 할 때, 바로 그 찰나의 지점에서 시공간상의 불일치를 띠게 되면 의미 전달은 굴곡되고 수용受容은 본연성의 파괴를 낳을 수밖에 없다. 언어가 인류의 위대한 발명작이면서도 뚜렷한 한계를 지닌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언어가 가진 역량의 역부족은 '사랑'을 만날 때 확연한 기조를 띤다. 언어는 사랑의 본질을 추출해 정리할 재간이 없다. 근본적으로 사랑은 언어 위에 존재하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무언가다. 사랑은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 말할 수 있다. '아가페([그리스어]agapē)'로 명명되는 신성적 사랑의 디테일은 바로 이 지점을 관통하면서 생성된다. 사랑의 언어는 오직 사랑뿐이다.

   신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은 서로 병렬적으로 위치해 있지 않다. 인간의 사랑은 신의 속성에서 파생된 에너지의 극히 작은 함량의 일면이다. 인간의 본래적 실존은 신의 형상에서 연원한다. 이 지점에서 '신'과 '사랑'은 동의어가 된다. 그리고 인간의 궁극을 이탈한 비본래성의 비극은 오직 신과의 종속성을 통해 회복될 수 있다. 그렇다. 사랑은 바로 '그런 것'이다.

   우리시대의 가장 사랑받는 소설가 공지영은 새로운 소설을 통해 사랑을 예찬한다. 그의 신간 <높고 푸른 사다리>는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랑을 대등한 구도에 상정함으로써 종국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곱씹는다. 한국을 위해 일생을 바친 이방인 성직자들의 삶과 이별에 괴로워하는 젊은 수사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서술된다. 진정한 사랑의 의미와 인간 본연의 모습에 대해 고뇌하는 작가의 진지함이 인상적이다.

   소설의 배경은 수도원이다. 신부 서품을 앞둔 젊은 수사 '정요한'은 휩쓸려 오는 한 여인의 사랑과 성직자라는 자신의 본분 사이에서 괴로워 하는 인물이다. 친구인 미카엘은 인텔리전트하지만 교회와 교회 장상들에 대해 극도의 비판의식을 갖고 있다. 안젤로는 모든 일에 부박해보이면서도 사랑스러운 언행과 특유의 매력으로 수도원 사람들의 애정을 한몸에 받는다. 세 인물은 농밀하게 교제하면서 수도원 내에서 특별한 우정관계를 형성한다. 그러나 갑작스런 두 친구(미카엘, 안젤로)의 죽음과 한국 전쟁의 한복판에서 일어났던 기적적인 일을 겪으면서 요한은 점점 달라져 가는 자신의 내면의 색상을 발견해나간다.

   요한이 심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며 본질상의 내적 변화를 이뤄가는 시점은 한국 전쟁 때 일어났던 어느 한 기적적인 실화를 알게 되면서부터다. 그것은 흥남 철수 때 목숨을 걸고 기적적으로 12명 정원의 미국 화물선으로 1만 4,000여명의 한국인을 구조한 선장 마리너스의 이야기이다. 마리너스는 미국 뉴튼 수도원에서 수사로 평생을 살다가 뉴튼 수도원을 인수하러 간 요한을 위시한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사람들을 우연히 만나 구조 과정을 극적으로 털어놓는다. 그리고 이틀 만에 세상을 떠난다. 당시 화물선의 갑판에서 부두로 던진 그물은 피난민들에게 '높고 푸른 사다리'였다. 이 사다리는 구원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이었고 분명한 삶이었으며 치열한 희망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의 '전부'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소설은 사랑의 본질을 관통하기 위해 노력한다. 작가는 신과 인간 사이에 고민하는 한 젊은 성직자의 내적 번민을 집요하게 탐구한다. 또한 '발현發現'과 '대상對象'을 모두 포함하는 사랑의 입체적 구조에 대해 강도높게 질문한다. 어쩌면 작가 공지영의 말대로, 인간은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이 지상에 머무르는 존재, 일지도 모른다. 너를, 나를, 우리를, 신을, 그리고 우주에 존재하는 궁극상의 모든 것들을 사랑하기 위해 창조된 피조물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배반에 봉착할 때가 있다. 신이 존재한다는 숭고한 가정이 무색할 만큼 현실에서 벌어지는 처참한 악의성 앞에서 체념하고 좌절한다. 작가는 '작가의 말'을 통해 지난 한 해 "하나님 대체 왜?"라는 오래된 물음과 격렬하게 씨름하기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인간이 세계와 대면하며 가지는 적나라한 고통의 대부분은 작가가 언급한 '오래된 물음'의 내밀한 구조 안에 뒤섞여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 신을 향해 "왜?"라는 질문을 남발할 수밖에 없는가. 왜 인간은 세상사의 무지와 몰이해 속에서 발버둥치는가. 답은 간단하다. 바로 사랑이 결핍되었기 때문이다.

   삶은 고통이다. 인생은 끊임없는 고통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삶은 짧고 추악하고 고단하고 가난하다. 인생은 피곤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행복한 것이다. 참으로 고약하면서도 명징한 역설逆說이다. 고통과 행복은 서로 이간질하는 사이가 아니다. 둘은 서로를 긍정한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에 우리는 동의한다. 사랑 때문이다. 신이 먼저 우리를 사랑했다. 그리고 신은 자신이 선점한 사랑을 근거로 인간에게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했다. 결국 사랑의 불꽃은 신과 나를 넘어 타자와 전 인류를 포괄하는 거대성의 발현으로 확대 증거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신과 사랑은 동의어가 된다. 이 소설이 제기하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은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소설의 제목을 생각했다. 소설 주제와 이야기 흐름상 '사다리'는 구약성서의 '야곱의 사다리'에서 차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야곱이 꿈 속에서 만난 사다리는 지상과 천국을 잇는 통로이다. 우리와 우리, 너와 나를 연결하는 용서, 화해, 사랑을 의미한다. 그곳은 오직 신을 통해서만 오를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신으로 다가가는 길이다. 신을 통해서만 신에게 도착할 수 있는 것이다. "높고 푸른"의 의미는 그 길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의 메타포다. 또한 "하나님 왜?"라는 작가의 오래된 물음도 사다리의 진실된 의미 속에 녹아 있다. 즉 '높고 푸른 사다리'는 신성에서 발현된 태동적 사랑의 통로로서 인간 본질의 모든 고통과 문제에 대해 근원적인 답을 선사할 수 있는 신비롭고 절대적인 힘을 지닌 그 무언가인 것이다.

   서평을 정리하자. 공지영 문학은 끊임없이 진보해왔다. 이제는 여기까지 도달했다. 그의 신간 <높고 푸른 사다리>는 극히 아름다운 소설이다. 서평을 지극히 기독교적 주관으로 일관한 면이 있다. 그러나 어찌할 도리가 없다. 신을 떠나서는 이 소설이 가진 아름다움의 극치를 풀어낼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아닌 것 같으면서도 지독하게 종교적인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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