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가요 언덕
차인표 지음, 김재홍 그림 / 살림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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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소 단편소설과 거리감을 두고 있다. 솔직히 단편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단편작가는 '글쟁이'로서의 존재감에서 그리 큰 믿음을 보내지 않는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글재주만 있다면 누구나 쓸 수 있는 게 단편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단편도 엄연한 문학이며 그것 나름의 특질과 매력이 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단편은 무언가 결락되었고 무언가 허전하다. 이는 분량의 문제 이전에 서사 자체의 완전성의 문제이며, 소설이라는 형태의 근본 골격에 대한 문제이다.

  단편과 장편을 동일한 잣대로 비교하여 각각의 맛을 재단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단편은 범상에서도 충분히 생산될 수 있는 세계라는 점이다. 하지만 장편長篇은 다르다. 전업작가가 아니고서는 완성되기 힘든 오묘하고 거대한 인고를 반드시 감내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장편은 깊고 풍성하다. 농밀하고 섬세하다. 거대하면서도 입체적이다. 인간의 삶의 총체성, 사건에 따라 변하는 인물의 입체성,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 즉 사상성性, 거대한 서사와 복잡다단한 얼개 등 장편소설은 단편소설과는 수준을 달리하는 근본적인 태생적 요건이 있다.

  소설을 업으로 하지 않는 사람이 장편소설을 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선천적인 재능이나 천재성과는 다른 차원의 얘기다. 이 대목에서 소설가 공지영은 고백한다. 유독 천재가 없는 장르가 있는데 그게 바로 소설이라는 것을. 모든 소설가들은 시간과 체력과 고통과 인내를 폭포수처럼 쏟아내야 한다는 것을. 두꺼운 종이들을 다 글자로 채워 넣어야 하는 손가락의 끈질김과 엉덩이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요컨대 소설의 힘과 소설가의 인고의 양은 대부분 정비례 함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영화배우 차인표가 장편소설을 썼다는 소식은 솔깃했다. 물론 연예인의 책 출간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하지만 포토집이나 에세이가 아닌 소설――그것도 장편――을 집필했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브라운관과 스크린에서 개성있는 연기를 펼치는 것과 소설이라는 완전한 형태의 상상력의 세계를 탄생시키는 것은 전혀 다른 작업이다. 책을 읽는 데 있어 평소 차인표 부부의 잉꼬같은 부부애나 잦은 선행으로 굳어진 긍정적 이미지는 모두 던져버리기로 했다. 오직 텍스트만을 보기로 했다. 얼마나 잘 쓴 소설인가, 하는 주관적 냉철만이 차인표의 첫 장편소설 『잘가요, 언덕』을 읽는 내 유일한 기준이었다.

  작가는 독자의 시공간을 1931년 가을, 백두산의 어느 자그만 마을로 옮겨놓는다. 호랑이 마을로 불리는 작은 마을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일제 식민지배를 당하고 있던 오욕의 때였다. 그곳에서 평화로운 삶을 사는 순진하고 마음씨 착한 처녀 순이, 포수 아빠와 함께 엄마를 죽인 원수인 백호 사냥을 떠났다가 호랑이 마을에 안착한 용이, 일본제국주의 군인으로서 소대장의 지위로 호랑이 마을에 도착하는 가즈오, 이 세명의 인물이 이야기를 추동하는 주인공들이다. 세 주인공들의 애절한 사랑과 엇갈린 운명이 뒤섞이면서 비극의 서사는 조합된다.

  나는 소설 속에서 일본군 대위로 등장하는 가즈오 마쯔에다라는 인물에 강한 호감을 느꼈다. 작가는 따뜻한 문체로 표현된 이야기의 본류와 각 장마다 반복되는 어머니에게 보내는 가즈오의 편지를 교차해서 들려주고 있다. 순수한 애국심에 자원 입대했지만 가즈오가 목도한 전쟁의 현실은 반인륜적 폐륜의 생생한 현장이었다. 하지만 가즈오의 내면에서도 어머니에 대한 효심과 한 여인을 뜨겁게 사랑하는 진정성이 있었다. 양심의 문제에 직면하여 번민하는 모습과 한 여인을 절실히 사랑하여 죽음에까지 이르는 가즈오의 기구한 운명을 작가는 애절하면서도 차분하게 잘 그려냈다.

  무척 흥미로운 관점이 있다. 소설 안에서 인간의 시공간을 초월한 두 개의 시점이 존재한다. 순이가 용이에게 알려주고자 했던 밤하늘의 '엄마별'이라는 상징적 존재와 이야기 곳곳에 등장하며 신적 권능으로 등장인물들의 시공간을 조망하는 '새끼 제비'가 바로 그것들이다. 순이는 볼 수 있었지만 용이는 볼 수 없었던 '엄마별'은 일차적으로 모성의 상징적인 현현을 나타내지만, 서사의 총체적 관점에서 '용서'라는 찬란한 절대선을 이끌어내는 메타포가 된다. 이야기의 뒷부분, 살아서는 용이가 볼 수 없었고 이해할 수 없었던 '엄마별'의 실재가 자신의 죽음을 넘어 70년의 세월이 지나서 순이에게 "따뜻하다, 엄마별."이라는 짤막한 고백으로 전해지는 명장면은 이 소설이 선사하는 가장 강렬한 카타르시스다. '엄마별', 그것은 '용서'의 다른 이름이었던 것이다.

  '새끼 제비'의 존재 또한 소설 속에서 특이하게 작용한다. '새끼 제비'는 서사 안에 갇혀 있지만 위에서 서사를 조망하는 관찰자의 입장에 서 있는 독특한 캐릭터다. 일본군의 동태를 살피기도 하고, 순이와 용이의 러브 스토리를 응원하기도 한다. 인간의 악한 성품에 실망하기도 하고, 한순간 하늘로 치솟아 서사 속의 시공간을 광각화하기도 한다. 어쩌면 '새끼 제비'는 작가 차인표의 서사 속 개입일 수 있으리라. 소설의 말미, 70년만에 고향 호랑이 마을 찾은 쑤니(순이) 할머니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그때 파란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는 제비떼들을 눈에 담는다. 어디엔가 있을 따스한 나라를 찾아 멀리멀리 날아가는 제비떼의 모습은 이 세상 모든 치유되어야 할 자들을 향해 날아가는 또 다른 차인표의 다른 형상일 것이리라.

  작가는 이 소설에서 의도적으로 존어체를 사용했다. 엄마가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선생님이 학생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듯이 포근하고 따뜻한 문체를 사용하여 이야기를 전달한다. 만약 작가가 존어체를 탈피했다면 소설이 주는 감동은 많은 부분 희석되었을 것이다. 용서하지 못해 고뇌하고 비굴하게 살아가는 깨어지지 못한 이 땅의 수많은 인류에게 전하는 메시지로서 숭고와 경건이 차인표의 문체 속에 오롯이 녹아 있는 것이다. 

  포근한 문체와 흡입력 있는 전개, 잘 짜여진 서사와 명확한 메시지 전달 등 작가 차인표의 첫 소설 『잘가요, 언덕』은 성공한 소설의 매력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차인표의 문장은 공손했고, 따뜻했으며, 평온했다. 차인표는 작가후기에서 소설의 초고를 손볼 때 어머니로부터 들은 조언을 소개한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일갈한다. 상상력은 중요하다. 그러나 사실을 배제한 상상력은 모래로 성을 쌓는 것과 같은 것임을.

  어쩌면 상상력과 사실은 종이 한 장 차이일지 모른다. 나는 작가 차인표의 상상력이 정지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그가 원하고 갈망하는 모든 상상력이 사실이 되어 우리 앞에 현현現할 때까지, 우리 모두 한 마리의 '새끼 제비'가 되어 깨어져야 할 모든 용기없는 자들의 전도자가 될 때까지, 그의 상상력은 계속해서 춤추고 역동해야 한다. 

  뛰어난 기술로 빚어낸 차인표의 처녀작 『잘가요, 언덕』에 나는 별 다섯 개를 선사한다. 그리고 내 주변 어느곳에 위치하고 있을 '잘가요, 언덕'을 찾아 밖으로 향한다. 동시에 내 안에 결핍된 용서의 용기를 충전하며 '엄마별'이 감싸는 안정감으로 마음의 평온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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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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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리뷰]


  주변에서 재미있고 감동적인 소설을 추천해달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책읽기 수준이 주마간산(走馬看山)이요, 문학을 읽는 깊이가 변변치 못함을 알기에 섣부른 추천과 조언을 아끼고 있다. 우매하고 일천한 사람이 어찌 문학을 논하리요. 옛부터 분수를 아는 삶은 행복한 인생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자신있게 추천하는 소설이 있다. 바로 신경숙의 장편소설 <엄마를 부탁해>다.


  베스트셀러에 진입한 지 몇개월이 후딱 지났지만 내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랜 시간 동안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소설의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며 사랑을 받는 걸까. 나는 지난 서평에서 아쉽게도 다루지 못했던 <엄마를 부탁해>의 경이적인 창조성에 대해 부언하고자 한다.

  한국문단에는 실력있는 여성작가들이 많다. 흔히 90년대를 밝힌 4대 여성작가로 공지영, 신경숙, 은희경, 조경란을 꼽는다. 그녀들은 각기 특색있는 문학적 기술과 색깔로 한국문단을 이끌어가고 있다. 얌전하고 차분한 문장으로 대중의 가슴에 가장 따뜻한 공감을 선물하는 우리시대의 대표작가 공지영. 문학적 색깔에 있어 공지영과 대척점에 서서 '은희경표 냉소주의'라는 자신만의 브랜드를 완성시킨 은희경. 섬세한 감각과 치밀한 문체로 자아의 존재론적 탐구를 추구하는 조경란. 한국에서 가장 섬세하고 완벽한 문체를 구사하는 혁신적인 작가 신경숙. 그녀들이 있기에 한국문단은 행복하고 희망이 있다.

  개인적으로 신경숙의 문학적 색깔을 좋아한다. 신경숙 문학의 핵심코드는 바로 '문체'다. 자신은 소설가 중에서도 문체에 집중하는 작가라고 스스로 고백할 만큼 소설가 신경숙은 문체의 특이성에 집중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신경숙의 문체는 소설 각각의 문장들이 갖는 함축적 속성, 비유적 울림 등이 시적 문체의 효과를 거둘 정도로 세밀하다. 또한 신경숙의 글쓰기는 억압받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런 현실에 있는 사람들이 견디어 나가는 모습을 담담하게 서술한다. 자신의 내면에만 있는 비밀 이야기를 꺼내어 냄으로써 산다는 것이 곧 말하는 것이고 글쓰기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경숙의 모든 소설에는 문체에서 묻어나오는 그녀만의 개성과 아름다움이 일관되게 반영되어 있다.

  최신작 <엄마를 부탁해>는 신경숙 문학의 특징이 매우 잘 드러난 소설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을 모성의 위대함과 이에 빚진 자식들의 원죄에 대한 이야기로 갈무리한다. 이 정도의 감상으로 끝난다면 <엄마를 부탁해>가 말하고자 했던 찬탄스런 모성의 단면과 소설 자체의 문학적 가치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모성에 대한 경외의 피상성과 자식들의 원죄성 확인만으로 읽기에는 너무 아까운 소설이다. <엄마를 부탁해>는 지극히 '문학적'인 소설이기 때문이다.

  '부모'는 문학에서 언제나 뜨거운 감자였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소재로 한 소설은 우리 문학사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엄마를 부탁해>는 그 범상성
常性과는 궤를 달리한다. 기존 통속서사의 틀을 완벽히 무너뜨리고 있다.

  만약 이 소설이 남편과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자신은 텅 비어가는 엄마의 모습을 통해 '완벽한 헌신자의 죽음과 남은 자들 간의 죄의식의 공유'로 끝을 맺었다면, 다시 말해서 '어머니'로 대변되는 여성성의 위대함을 모성의 신성적性的 일면만으로 조명했다면 그리 위대한 소설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한 스토리는 이미 수많은 소설과 드라마를 통해 그 통속성을 충분히 확립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백낙청의 말대로 '마지막 한방의 충격'을 선사한다. 어머니에게도 엄연히 실재했던 욕구와 고뇌와 방황이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한국사회는 오랜 유교적 문화와 습속으로 여성은 곧 '어머니'여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해왔다. 여성성은 곧 모성이었고, 모성의 발현으로써 여성의 아름다움은 설명되었다. 인내와 희생은 여성이 갖추어야 할 필요조건이 되었고, 이는 곧바로 현숙한 여성이라는 이미지 미화로 둔갑하여 수많은 여성들의 존재감을 압박시켰다. 여성은 곧 모성이었으며, 모성의 주체는 성모였고, 그 성질은 신성이었다. '온전한 헌신자'는 어머니에 대한 존재론적 사유의 출발이자 종결이었다. 소위 '아가페(agapē)'로 명명되는 무조건적·일방적·절대적 사랑은 신의 소유물을 넘어 인간 여성에까지 전도된 것이다.

  어머니라는 존재는 신이기 이전에 인간이며 여성이다. 어머니는 한 사람의 여자다. 모성의 탄생 이전에 이미 한 명의 여성으로 세계에 태어났다. 신이 되기 이전에 실존 인간이었던 것이다. 신으로 살아야 했고 신이 될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란 존재의 운명적 번민에 대해 우리는 얼마만큼의 이해와 고개숙임이 있었는가. 어머니의 실존 속에 내재한 신성과 인성의 태동 순서를 인식한다면 여성성의 위대한 본질이 어떠한 것인지 더욱 선연히 깨닫게 되리라.

  신경숙은 작가후기에서 그동안 내밀하게 묻혀있었던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에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려 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어떤 리뷰어는 피에타상을 매개삼아 엄마를 성모로 만들어 승천시키는 게 사회적 의미를 부여한 것이냐며 빈정거린다. 하지만 이러한 이죽거림은 단선적 감상에서 기인한 오류다. 백낙청의 말대로 '어머니에게도 존재했던 욕구와 고뇌와 방황'이라는 마지막 한방마저도 가볍지 않은 세련된 기법으로 표현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세상 모든 어머니가 발현해내는 '신성'과 한 여인으로서 감춰야만 했던 내밀한 '인성性'을 공존시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성과 인성의 합일을 통해 항시 찬란한 태양으로 존재하는 어머니에 대한 오마주를 더욱 극적이고 입체적으로 완성시키고야 만다. 소설 <엄마를 부탁해>의 문학적 찬탄스러움의 백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여태까지 신경숙 소설의 최고봉은 <외딴방>으로 꼽혀왔다. 백낙청은 <외딴방>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작품성에 있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능가한다고 말했다. <외딴방>은 분명 뛰어난 소설이다. 나는 <엄마를 부탁해>에 <외딴방>의 영광을 선사하고자 한다. 또한 <엄마를 부탁해>를 한국문학 근 10년 역사상 최고의 소설로 꼽는다. 신경숙의 문학적 역량과 예술혼이 집대성된 걸작 중에 걸작이다. 앞으로 동일한 소재로는 이 정도의 문학적 중량감을 가진 소설은 나오기 힘들 것이다.

  니체는 말했다. 글은 피로써 써야 한다는 것을. 이는 곧 글쓰기의 '성의意'와 '집중中'을 의미한다. 신경숙의 글에는 '피'가 느껴진다. 최고의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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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2-21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윗님, 님의 리뷰는 늘 그렇듯 참 신실합니다.
신경숙의 이 소설에 대한 질타를 하는 분들이 많던데
어떤 작품이든 그렇게하진 못하는 거라 생각합니다.
특히 님의 두번째 리뷰를 읽어보니 그 작품의 문학적가치를 찾는 고밀도의 눈을
나눠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물과 돌의 기억들
현고진 지음 / 포럼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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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간의 위대함 중 하나는 사랑을 하는 방식과 수준에서 다른 종과 확연히 구분되는 고차원적 상이함에 있다. 인간만큼 사랑의 이름으로 자아를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종족은 없다. 인간에게는 사랑의 노출과 내재적 발전은 정비례한다. 인간의 사랑에 대한 지극한 경도됨은 인간 종족의 숭고한 속성을 그대로 단면화한다. 이성적이고 현명한 종족이라는 '호모 사피엔스(sapiens)'라는 거대한 학명은 '사랑'이라는 명제 앞에서는 심히 초라할 뿐이다.

  인류사를 반추하면 공간과 시간, 문화와 습속에 따라 본성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게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느곳에서나 사랑은 존재했으며 어느 시간대에서나 사랑은 발현했다. 사랑이 없는한 인간의 존재성은 외면적이기만 하다. 내포적 의미와 가치를 지닌 존재로서 인간의 영혼에는 반드시 사랑이라는 찬란한 빛이 내재한다. 인간의 역사는 곧 사랑의 일차원적 흐름이다. 세상의 물리학은 우주의 태곳적부터 지금까지 사랑이라는 이름 안에서만 성립되고 동작되었다.

  인류가 만들어낸 수없이 많은 문화의 실타래 속에서도 사랑의 테마는 단연 돋보인다. 셰익스피어는 사랑을 비극의 코드로 풀이하여 천재적인 극작술을 보여줬다. 괴테는 시로써 사랑을 탐구했고, 헤르만 헤세는 소설로써 사랑을 천착했다. 비단 문자문화의 영역에서만 국한되지 않았다. 영상도 사랑을 조명했고, 음악도 사랑을 궁구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펜은 사랑을 기록하고, 카메라는 사랑을 촬영하며, 레코더는 사랑을 녹음한다. 문화와 사랑은 '너나들이'였던 것이다. 

  출판사 포럼에서 출간한 『물과 돌의 기억들』은 사랑을 이야기한 소설이다. 이 소설은 5만 년 전의 사랑을 그렸다. 작가는  아득히 먼 옛날의 원시인류를 배경으로 고결한 사랑의 의미와 가치를 담아냈다. 요란하지 않은 단선적인 서사로 사랑의 원형을 담백하게 그려냈다. 이야기는 복잡하지 않고 특별하지도 않으며 쉽게 읽히기까지 한다. 하지만 가볍지는 않다. 막장을 덮은 후의 가슴을 억누르는 적절한 무게감은 어렵고도 어려운 사랑의 진정성에 대해 새삼 겸허한 마음을 추동한다.

  "불의 발견보다 더 위대한 사랑의 발견"이라는 뒷표지의 붉은색 문구는 이 소설에서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강조점을 적확히 함축한다. 작가는 인류사를 조망함에 있어 불보다 사랑에 주목하고 있다. 불로 대변되는 인류의 과학과 기술, 도약과 발전보다 사랑이 내포하는 인간의 본질적 행복을 더 위대한 순위에 배치한다. 즉 인류 발전이라는 '현상'보다는 그것의 근원이 되는 본질적 '가치'를 먼저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오래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랑이야기는 예전부터 많이 소개되어 왔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무료하지 않고 나름의 감동을 선사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작가가 그려낸 사랑의 정의가 심히 찬탄스러웠고, 동시에 그것을 개인의 공간으로 고착하지 않고 인류애로까지 확장시켰기 때문이다. 소설의 말미, 소설 속 주인공은 사랑의 정의에 대해 곱씹고 또 곱씹는다. 그리고 깨닫는다. 사랑은 외로울 수도 있고 비참할 수도 있지만 아름답지 않으면 결코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사랑의 형태는 다양할 수 있지만 사랑의 본질은 단 하나뿐이라는 것을.

  또한 작가는 너와 나의 사랑을 넘어 '우리'의 사랑까지를 내다보고 있다. 소설 속 주인공 '하늘바람'의 분노는 자신이 평생 사랑했던 여인 '물보라'와 그녀를 빼앗은 천치의 원수 '푸른지네'의 행복을 진심으로 기원하는 것으로 소멸된다. '하늘바람'의 '물보라'를 향한 강렬한 사랑의 방향성은 점점 다듬어지고 확장되어 '푸른지네'에 대한 용서와 축복으로까지 전도된 것이다. 여기서 사랑의 확장성을 엿볼 수 있으며 이는 곧 인류애로 명명될 수 있다.

  그렇다. 진정한 사랑은 아름답다. 그리고 확장성을 가진다. 사랑의 이름으로 발현되는 모든 빛은 눈부시고 찬란하며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의 절대성은 어느 누구도 훼손시킬 수 없고 폄훼할 수도 없다. 세상에 넘쳐 흐르는 수없는 사랑의 모양과 형태는 제각각이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아름답다'는 하나의 형용사 안에서 통합된다. 그렇기에 사랑이 풍성해질 때, 더욱이 전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전도될 때 세계는 아름다운 천국으로 변혁될 수 있다. 사랑은 절대선인 것이다.

  사랑은 어떠한 경우에도 아름답다는 작가의 메시지는 책을 덮은 후 꽤 오랜 시간 동안 나를 정지시켰다. 5만 년 전에도 그랬고 5만 년 후에도 그러할 것이다. 창조될 때부터 인간 속에 내재한 사랑이라는 DNA는 결코 변이되지 않는다. 사랑한 만큼 행복하고 사랑하지 않은 만큼 불행할 뿐이다. 나는 사유한다. 현재의 내 사랑지수는 얼마만큼의 수치일까. 깊은 사유의 세계에서 내 이성은 압도된다.

  새로울 것 없는 뻔한 스토리임에도 불구하고 전하려는 메시지가 간명하여 꽤 인상깊게 갈무리한 소설이다. 내가 책을 읽는 이유의 8할은 사랑의 탐구이다. 버트런드 러셀의 고백처럼 사랑에 대한 갈망은 곧바로 책읽기의 필요성을 전제시킨다. 사랑을 얼만큼 잘 조명했고 탐구했느냐에 따라 양서의 기준은 확립될 수 있다. 『물과 돌의 기억들』은 사랑의 근본 성질을 정의했고, 인류애라는 넓은 사랑의 의미를 질문하고 있다는 점에서 참 좋은 소설이다.  

  세상에 넘쳐 흐르는 것이 사랑이다. 그렇지만 물어보자. 사랑이란 무엇인가? 달콤하고 화려해 보이는 사랑의 신화들이, 속을 까보면 욕망과 이기심의 추악한 덩어리에 불과한 경우를 우리는 수없이 본다. 사랑은 달콤하거나 쓸쓸하거나 허무한 것일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축복받은 사랑일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비밀스런 것일 수도 있다. 검은 사랑도 있고 하얀 사랑도 있다. 그러나 이거 하나는 확실하다. 아름답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   <p. 248, 작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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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1-31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워야만 사랑이다..
인류애를 말하는, 좋은 책 같아요.
다윗님 새해에도 꾸준히 읽고 쓰시는 일 게을리 하지 않으시군요.
본받아야겠어요, 전.^^
 
유성의 인연 1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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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하자면 싫어한다는 표현이 맞다. 가라타니 고진이 제기한 근대문학의 종언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오에 겐자부로 이후 일본문단이 보여준 문학적 퀄리티는 심상한 수준이다. 하루키와 류의 소설들은 읽을 만하다. 나는 일본 현대문학의 종언을 하루키까지로 잡는다. 요시모토 바나나, 에쿠니 가오리 등 현재의 일본문학을 주도하는 작가들의 텍스트에 호평을 주기에는 민망스럽다. 가볍고 밋밋하며 건질 게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소설에 공복감일 느낄 때가 있다. 최근 일본소설의 경향은 스토리 위주로 정리된다. 행간의 의미를 읽어내는 수고로움은 필요없다. 번뜩이는 아이디어, 다양한 소재, 흥미진진한 스토리 라인, 다채로운 플롯의 형태 등 빠른 가독성을 보증한다. 깊은 문학적 정수를 뽑아내는 동력을 머리와 가슴에 덜 요구하기에 부담스럽지 않다. 이러한 편안함이 내가 종종 일본소설을 찾는 이유라면 이유이다.

  오기와라 히로시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들은 꾸준히 읽는 편이다. 그들은 소설을 참 재미있게 쓴다. 고향을 살리기 위한 산골 청년들의 고군분투는 흥미있었고, 추리 형식에 사랑의 테마를 녹여낸 이야기는 감동적이었다. 특히 추리물의 대가로 꼽히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읽힌다. 그의 대표작 『용의자 X의 헌신』을 비롯하여 『붉은 손가락』, 『방황하는 칼날』 등은 나를 충분히 즐겁게 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신작 『유성의 인연』을 읽었다. 제목의 낯섬과 표지 비쥬얼의 신비스러움에 반응되어 낚은 책이다. 두 권의 양장본의 이 소설은 살해당한 부모님의 범인을 찾아나서는 세 남매의 이야기를 그렸다. 작가는 일본 추리소설의 대표 아이콘답게 시종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독자의 가독성을 이끌어낸다.

  유성을 보기 위해 밤에 몰래 집을 나서는 세 남매의 어렷을 적 이야기로부터 소설은 시작된다. 갑작스레 내린 비 때문에 유성을 보지 못하고 집에 들어온 세 아이들은 부모의 살해 현장을 목격하며 충격에 빠진다.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두 명의 담당 형사가 투입된다. 하지만 아무런 단서도 얻지 못한 채 14년의 세월이 흐른다. 어른이 된 세 남매. 14년 전의 살인 사건은 어떤 일을 계기로 세 남매의 현실 앞에 부활한다. 그리고 벌어지는 일들. 몰랐던 사실들. 충격적인 사건들. 마지막 범인의 존재가 밝혀지기까지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계속해서 펼쳐진다.

  흡입력 있는 전개, 생각지 못한 반전, 깔끔한 마무리까지 추리소설이 가져야 할 요건들을 무리없이 갖추었다. 중후반부까지 일정한 이야기 전개로 독자들에게 긴장을 놓게 하다가 후반부부터 갑작스레 몰아치는 게이고 특유의 결말 처리 방식은 단연 돋보인다. 밝혀지는 범인의 존재와 범행 동기에 대해 너무 단시간에 풀어놓고 있어 핍진성이 조금 떨어지기는 하다. 하지만 작품 자체의 완성도까지 흠이 될 만한 부분은 아니다.

  이 소설은 출간되자마자 드라마로 제작되어 시청률 1위를 기록했고, 2008년 일본에서 가장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일본소설의 약점과 강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일본소설의 경우 대개 드라마나 시트콤, 영화로 바로 제작할 수 있는 넉넉한 공간을 확보한다. 일본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한 편의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마치 작가가 이를 미리 염두해두고 쓴 것인양 다른 매체로 전환할 수 있는 확장성을 내재했다는 점에서 일본소설은 흥미롭게 읽힌다. 다만 그것이 깊은 문학적 수준과 함께 나아가지 못한다는 점은 아쉽다.

  문학은 문학다워야 한다. 잘 읽힌다고, 쉽게 읽힌다고 좋은 문학이 아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쉽고 잘 읽히는 문장만 찾는다. 그들에겐 하루키도 버겁다. 하지만 거꾸로 난해한 문장과 작가만의 소우주에 함몰된 어려운 사유의 세계가 열거되었다고 해서 좋은 문학이라고 할 수도 없다. 문학이 독자에게 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어떨 때는 한 편의 시트콤을 보듯한 뛰어난 가독성으로 한달음에 읽고픈 소설이 땡기게 마련이다. 히가시노 게이고. 이에 가장 적확한 작가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신 장편소설 『유성의 인연』. 정말 '잘' 읽히는 '재미'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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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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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1 (반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 다소 기독교적 관점에서 썼음.



새롭지 않다. 재미는 그저 그렇다. 핍진성이 떨어진다. 상상력의 한계가 보인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 『신』은 내게 그리 대단한 재미를 주지 못했다. 기존의 베르나르표 서사가 뛰어난 상상력과 흥미있는 이야기 전개로 독자들에게 '재미'를 선사했다는 점에서 금번 신작에 대한 기대는 결코 녹록지 않았다. 하지만 기대는 기대였을 뿐이다. 전작 『파피용』보다도 못한 미지근한 몰입도로 흥미없게 두 권을 소화했다.

  『신』은 제목 그대로 '신神'에 대한 이야기다. 집필기간이 9년에 이를 만큼 베르나르 자신의 에너지를 집약하여 쏟아부은 작품이다. 그중 1부인 '우리는 신'이 금번에 번역 출간된 것이다. 총 두 권으로 구성된 1부는 144명의 신 후보생들이 본래의 지구를 본 떠 만든 '18호 지구'를 대상으로 신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그렸다. 전작 『타나토노트』와 『천사들의 제국』에서 각기 인간과 천사로 주인공 역할을 한 미카엘 팽송이 금번 작품에선 작중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추동한다.

  소설의 구성이 이채롭다. 미카엘 팽송을 위시하여 144명이 펼치는 신이 되기 위한 이야기와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백과사전'이라는 제목의 이야기 보완 테마가 교차된다. 본래 인간이었다가 천사가 된 미카엘 팽송. 이젠 신이 되기 위한 과정을 밟는다. 하지만 인간이었던 때와 같이 시공간의 구속에서 자유롭지 못한 채 아에덴이라는 섬에서 신을 향한 학습과 모험을 경험한다 . 여러 선배 신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신의 비밀을 향해 나아간다. 

  미카엘 팽송과 함께 각기 다양한 인물들이 신의 후보생으로 등장한다. 작가는 미카엘의 동기생으로 매우 흥미있는 인물들을 설정했다. 아나키즘의 시조격인 프루동, 영화배우 시몬 시뇨레, 비행기구 발명가 클레망 아데르,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 물리학자 마리 퀴리, 스파이로 활약했던 비운의 댄서 마타 하리 등 수없이 많은 유명인사들을 포진시켰다. 144명의 신 후보생들은 각기 다양한 성품과 철학으로 자기 앞에 주어진 18호 지구를 경영한다. 각 테스트가 끝날 때마다 탈락되는 후보생들이 생기면서 144명이었던 후보생 숫자는 점점 줄어든다.

  마치 흥미있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최저 수준의 핍진성으로 읽는 내내 내 고개는 좌우로 설레설레했다. 나는 이 소설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작가가 그려낸 형편없는 신적 세계를 지적한다. 매작품마다 누구나 생각지 못한 발군의 상상력으로 이야기꾼의 면모를 과시했던 베르나르는 금번 작품에서만큼은 초라한 소재 차용에 그치고 만다. 베르나르가 그린 신의 세계는 전적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에 기초했다. 아프로디테, 헤르메스, 크로노스, 아레스 등이 선배 신으로 등장하며 신의 후보생들을 가르친다. 새로울 게 전혀 없는 기존 신화에서의 소재 차용에 불과하며 부족한 부분은 유대교, 기독교, 불교 등의 교리를 조금씩 접목했을 뿐이다. 상상력은 온데간데 없다.

  무엇보다 베르나르식 신성神性은 초라함의 극치다. 본래 신은 전지知와 전능에서 인간과 선연히 구별된다. 신은 모르는 게 없고 하지 못하는 게 없다. 그렇기에 '신'임을 증명한다. 하지만 베르나르가 그린 신은 인간의 수준에서 차원만 조금 높였을 뿐이다. 상식적으로 신의 차원은 인간의 과학에서 불가해하다. 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르나르는 신이 아닌 인간의 세계를 그렸다. 베르나르가 그린 신들은 결코 신이 아니다. 시공간과 초월, 과학과 의지에 구속된 존재를 어찌 신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그가 그린 신의 세계는 그저 인간 세계의 또 다른 스케치일 뿐이다.

  베르나르는 또한 다신교敎의 세계를 그렸다. 즉 신은 하나가 아니며 굉장히 많이 존재함을 전제한 것이다. 소설 속에서 이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그 인용 수준이 함량미달이다. 신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명사 <엘로힘>이 단수가 아니라 복수이기 때문에, 다시말해서 하나밖에 없는 신을 복수로 가리킨다는 것은 최초의 유일신 종교가 보여주는 역설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엘로힘>의 의미를 표피적으로 이해한 무지의 소산이다. '엘로힘'의 복수형은 다신의 의미가 결코 아니다. 삼위일체三位一體의 표현이자, 힘과 탁월성의 존엄이 함의된 것이다. 요컨대 '엘로힘'이 내포한 복수형은 숫적 다수가 아닌 신의 신되심을 더욱 강력하게 드러낸 의미이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교리에 대한 기본 학습조차 결락된 작가의 지식이 씁쓸하다.

  신비스럽고 고차원적인 초월의 세계를 보여주지 못한 게 아쉽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필두로 기존의 종교와 전설을 짜집기한 밋밋한 판타지 서사에 흥미는 반감됐고 체력은 지쳤다. 전제적으로 신성의 불가해성을 인정한 후 지엽적으로 신의 절대성을 그렸으면 어땠을까. 보다 높은 차원의, 보다 깊이 있는, 과히 상상키 어려운 신성을 담아냈으면 어땠을까. 신의 창조성, 전지전능함, 피조물과의 관계, 신성의 발현, 인간의 위치, 신적 세계 스케치 등 모든 것이 초라하고 실망적이다. 과히 '신성모독' 수준이다.

  시작이 반이라 했다. 총 3부작 중에서 갓 1부만을 읽었을 뿐이다. 하지만 벌써부터 무료하다. 읽기 전 기대는 읽은 후 허탈로 치환됐다. 차후 출간될 2부를 손에 잡을 지 미지수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문학에서 감동과 깊이를 원하진 않는다. 그저 작은 상상력과 재미만 있으면 된다. 책을 읽은 후 남는 건 프랑스어 문장을 매끄럽게 한글화 한 이세욱의 다듬어진 번역밖에 없다. 최소한 내 문학적 취향에선, 그의 전작 『파피용』보다도 상상력이 빈곤하고 재미없는 소설이다.

 

http://blog.naver.com/gilsamo
Written bY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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