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깃과 인연

어제 구매한 전기 오븐이 도착했다.


직원이 설치해준다고 했는데 기존 전자렌지 놓여있던 자리에 놓아달라하니 안된다고 했단다. 좁다고.. 그래서 베란다 선반에 놓아달라 했더니 그 선반은 약하다고 했단다. 일단 베란다에 있는 선반용 식탁 위에 놓아두었고, 잠시후 직원은 돌아가고 남동생이 왔을 때 아무래도 저기 될 것 같은데, 하고 엄마는 전자렌지 있던 자리에 전자렌지를 빼고 넣어달라 했단다. 남동생이 넣어보니 완전 안성맞춤 이었다고 엄마가 기뻐하며 전화하셨다.


어제 퇴근 후에 엄마는 안계셨고 어머 정말 쏙 들어가네, 하고 나도 좋아하던 터라, 설명서를 읽어보는데 일단 처음 샀을 때 사용전에 15분정도 빈 상태로 돌려봐야 한단다. 그래서 그렇게 작동시켜두고 설명서를 다시 읽는데, 아아... 오븐은 그렇게 맞춤하게 선반에 넣으면 안된다고 설명서에 써있다. 위로 20cm, 좌우로 10cm 정도의 공간이 여유가 있어야 하고 뒤에도 마찬가지. 아아... 그 직원분이 좁다고 말한 건 그런 의미였구나 싶은거다. 그래, 다 이유가 있었겠지... 그러자 저렇게 좁은 공간에서 뜨겁게 돌아가고 있는게 좀 무서워졌다. 15분이 지나 열을 잠시 식힌 후, 나는 작업에 들어갔다. 일단 혼자 들 수 있나, 하고 들어보니 무겁지만 들어지기는 해. 나는 베란다로 향하는 문을 열어두고 베란다에 불을 켜고 식탁 위에 자리를 만든 뒤에 멀티탭을 찾아 이케이케 부엌에서 연결하고, 그 뒤에 오븐을 들고 영차영차 가는데, 아아, 베란다로 가는 문 앞에서 턱 막힌다. 왼쪽 손은 오븐의 왼쪽을 들고 있었는데, 그 모두가 함께 문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걸리는 거다. 아뿔싸..나는 다시 돌아가 오븐을 식탁 위에 올려둔 뒤에, 왼쪽 손으로 상단을 잡자, 했더니 아직 좀 뜨거워서 위험하게 느껴졌다. 이걸 어쩐담..반죽해둔 빵은 발효중인데... 이렇게 시간을 계속 끌면 안되는데..


자, 방법을 찾자.


그렇게 나는 오븐을 일단 식탁 의자 위로 옮겨서 의자를 베란다 문 앞까지 가져가고, 그리고 내가 먼저 베란다로 나간 다음에 위를 들어서 끙차끙차 옮겨 베란다 식탁위에 놓아두었다. 만세! 그리고 코드를 멀티탭에 꽂아가지고 똭 했더니 전원도 들어왔어. 나이쓰. 해냈다! 짱이야, 난 멋져!!

나는 해낼 수 있어!!







내가 만들고 싶었던 것은 발효빵이라 어림잡아 세시간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그러니 나는 어제 퇴근 후에 그냥 도착한 오븐을 보면 만족하고 그쳐야 할 것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 ...... 그렇게 반죽을 시작하고 발효를 체크하고... 그런데 뭐가 잘못된건지 내가 보았던 영상속 레서피 만큼 부풀지 않아서 더 기다려야 했던걸까, 싶었지만....시간은 한정적이고 나는 잠을 자야 해, 시키는대로 한시간 발효 했잖아, 하고 채 부풀지 않은 반죽을 다시 공기 빼가며 치대고 또 발효하고...아무튼 시키는대로 다 해서 세시간 이상이 걸려 발효빵을 만들었다.





딱히 성공이라 볼 순 없었다. 제대로 발효가 되지 않은 탓인지 사이즈가 너무 작았고 겉이 너무 딱딱해서 칼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힘을 엄청 줘야했다. 내가 물을 적게 넣어 애초에 반죽 자체에서부터 어긋난걸까...

게다가 세시간 이상 걸려 만든건데 고작 이런 빵이라니, 쳐다보면서 내가 뭘한걸까 싶었다. 퇴근후에 내가 지친 몸을 이끌고 꼭 이렇게 해야했나? 돈 주고 사먹는 게 맛도 좋고 가성비도 훨씬 좋은 것 같았다. 내가..무슨 짓을 한걸까? 퇴근 후에 세시간 이상 걸려 만든게 왜 이렇게 작고 ... 하아.



그래도 토요일엔 식빵에 도전해볼까 싶다. 다음주에 조카들 오면 해줘야지.

조카들이 이모가 만든 빵을 좋아해줘야 할텐데..그러려면 내가 맛있게 만들어야겠지.

여러가지를 도전할 생각은 없고 밋밋한 빵들을 잘 만들어보도록 하는 걸로... 아아, 이게 다 진 필립스의 우물과 탄광 때문이다. ㅠㅠ 세상에.. 책 읽고 오븐 사서 빵 만드는 여자가 어디있지요? 여기 있다, 왜!!!!!!!!!!!!!!!! (자세한 건 페이퍼 상단 먼댓글 링크를 따라가면 됨)



그래서 어제 책을 하나도 안읽었는데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래도 구매한 책들은 자꾸 도착한다.













리베카 솔닛의 신간은 아일랜드 여행기라고 하니 너무 기대가 된다.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에는 스피박의 글이 실려있다 해서 읽어보고 싶었다. 그레이스는 언제나 숨겨진 소설들까지 찾아내어 리뷰 쓰시는 F 님의 리뷰를 읽고 .. 이래서 알라딘 서재의 글을 읽는 것은 좋으면서 싫다. 자꾸 살 책이 많아지니까... 하아. 유혹하는 글쓰기는 오만년전에 구판으로 읽었었는데-처음 쓴 문장이 가장 좋다고 했던 스티븐 킹의 말은 내게 정말로 딱 들어맞는 말이다, 처음 그 단어와 그 문장이 괜히 생각난 게 아니라니까?!-, 다시 읽어보고 싶어서 개정판을 샀다. 힐빌리의 노래는 영화로 만들어졌다고 해서 영화 보기 전에는 원작이지! 하고 구매하였고, 저기 뜬금없는 할리퀸 발레리나를 사랑한 남자...는, 발레리노와 노발레리나의 사랑 이야기를 읽고 싶은데 도무지 그런걸 찾을 수가 없어서 아쉬운 마음에 대신 골라본 책이다. 그런 한편, 최근에 할리퀸 읽고 뭔가 쌍욕 나와서 아아, 나는 이제 할리퀸을 읽을 수 없는 몸이 되었구나, 했던 기억 때문에... 저걸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 여튼, 발레리노와 노발레리나의 사랑 이야기 너무 궁금하다. 사실 뭐 한 사람과 또 한 사람이 만나 사랑하는게 발레리나 라는 직업 때문에 더 특별해지는 건 아니고, 그 개인 때문에 특별해지는 것이긴 하겠지만.... 그런 거 보고 싶어. 발레리노가 항상 발레리나들 번쩍 번쩍 들어서 위로 올리다가, 노발레리나, 이를테면 나같은 여성 만나 가지고 별 생각없이, 늘 하던대로 번쩍 들어올리려다가, 땅에서 들어올려지지 않아 개당황하는......




마침 며칠전에 본 영화, 《먼 훗날 우리》에서 남주가 여주 안고 계단을 오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 장면 보면서 생각했다. 나는 평생 저럴 일은 없겠구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뭐, 내가 혼자 걸어갈 수 있지마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뚜벅뚜벅 내가 내 다리로 올라가면 되니까 괜찮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근데 왜... 영화에 가끔 남자들이 여자 안고 계단 오르는 장면이 나오는걸까? 뭘 위해서? 나는 계단이라고 하면, 스티븐 킹의 소설 중에(스포일러가 될테니 어떤 소설인지는 말하지 않겠지만), 유혹적인 아내에게 다가가기 위해 계단을 오르던 남자를 계단 위에서 밀어가지고 그 남자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죽었던, 그 장면이 생각난다.... 킁킁.



아무튼 열심히 플랭크해서 전신 운동해서 강해져야지. 아주아주 나이 들어서도 계단은 나 혼자 씩씩하게 오르는 스트롱하고 파워풀한 여인이 되겠다. 스쿼트해서 허벅지에 졸라 큰 근육도 만들어야겠다. 여자들은 나이들수록 근육운동을 해야하고 특히나 하반신 근육이 중요하다더라. 요즘 요가도 영 손 놓고 있는데 다시 으쌰으쌰 해야겠다. 나를 지킬 수 있는 건 나뿐이여!!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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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10-22 09: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 사람 벌써 빵을 만들어버렸네...........! 빵 만들겠다는 포스팅하자마자 오븐 사고 빵 만들고 실천력 짱입니다. 존경합니다. ㅋㅋㅋㅋㅋㅋ 근데 저 빵 맛은 알고 싶지 않아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레이스> 정말 흥미진진해요. 재미있게 읽으세요. 다락방 님은 이 작품 읽고나면 할말 많으실 듯 ㅎㅎㅎ

다락방 2020-10-22 15:05   좋아요 0 | URL
빵이 빵맛은 난다구요! 겉이 딱딱해서 그렇지.... 하아-
저도 생각하면 너무 바로바로 다 해버려서 돌아버리겠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인생이 피곤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가 재미있다는 여러분들의 감상에 사둔 책이 몇 권인지 아십니까? 저도 몰라요... 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0-10-22 10:1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저 빵맛이 매우 궁금합니다!!! 무엇보다 다락방님의 그런 도전정신 있잖아요.

˝..... 내가..무슨 짓을 한걸까? 퇴근 후에 세시간 이상 걸려 만든게 왜 이렇게 작고 ... 하아.
그래도 토요일엔 식빵에 도전해볼까 싶다. 다음주에 조카들 오면 해줘야지....˝

의 그래도 정신. 저는 진짜 그 그래도 정신이 엄청 좋아요. 이렇게 글로만 읽어도 그 강렬함이 뚫고 온다고 해야할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님의 그래도 정신, 제가 사랑합니다!!!
서발턴 벌써 구매하셨군요. 리베카 솔닛 책 엄청 좋다고 제가 아직 이야기 안 했던가요. 그 분 책 모두 좋았지만, 특히나 이 책 앞부분 읽는데, 너무 좋아서 먹던 과자도 옆으로 치웠습니다. 혹 과자 가루 날릴라..... 그레이스는 저의 2018년 올해의 책 중 하나. 다락방님 다다닥 페이퍼 기대할께요.

다락방 2020-10-22 15:07   좋아요 1 | URL
오늘 아침 드셔본 엄마는 고소해서 커피랑 먹기 딱 좋다고 하셨어요. 엄마는 다 식어버린 빵을 드셨지만 갓 구워내면 더 맛있게 드실 수 있겠지요. 엄마 호강시켜드리는 게 제 꿈입니다. 빠샤!

저는 제가 모르는 저를 가끔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어 알게 돼요. 오래전에 친구가 저한테 욕심이 많다고 했거든요. 저는 친구로부터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제가 욕심이 1도 없는, 베풀기 좋아하는 착하고 순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가 깜짝 놀랐어요. 그보다 더 전에는 아빠기 친척 어른들께 저를 소개하시면서 ‘제엄마 닮아 하고 싶은말 따박따박 하고 산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때도 소스라치게 놀랐어요. 저는 제 할 말 다 못하고 살아 답답하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오늘 단발머리님의 댓글로 저에게 도전정신이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저..도전하는 사람이네요... 도전 같은 거, 정말 싫다고 생각해왔는데....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역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서 살아야해요. 그게 곧 자기를 알게 되는 길인것 같습니다.

아, 세상의 이 많은 책들을 대체 다 언제 읽나요, 단발머리님 ㅠㅠ 마음만 바쁩니다 ㅠㅠㅠ

syo 2020-10-22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분빵!! 생긴 건 맛있어 뵈는데???

다락방 2020-10-22 15:08   좋아요 0 | URL
맛있는 건 아니지만 먹을만은 해요. 반복해 만들다보면, 그렇게 시간과 노력이 쌓이면 제대로 맛있는 빵이 탄생하겠죠. 움화화핫!! 나중에 따뜻하고 맛있는 빵을 제법 만들줄 알게 되면 초대할게요. 움화화핫.

hnine 2020-10-22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효빵, 만만치 않아요 ㅠㅠ

다락방 2020-10-22 15:20   좋아요 0 | URL
만만치 않은 빵에 제가 너무 겁없이 덤벼들었나요 ㅠㅠ

수이 2020-10-22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락방님의 식빵! 손 번쩍! 맛이 궁금합니다.

다락방 2020-10-22 15:36   좋아요 0 | URL
으으 제가 식빵을 성공할 수 있을까요?
여튼 열심히 노력해보고!! 식빵 장인이 되면 친애하는 여러분들 초대해 대접하겠습니다. 빠샤!!

바람돌이 2020-10-22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년전에 오븐을 샀으나 빵 2번 쿠키 2번 굽고 지금은 전자렌지용으로만 쓰고 있음다. 부디 건투를 빕니다. ㅎㅎ

다락방 2020-10-23 07:48   좋아요 0 | URL
아마도 저는 쿠키 두 번까지도 가지 못하고... 빵 두 번에 렌지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ㅠㅠ

나와같다면 2020-10-22 22: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배경음악이 ‘우린 하나되어 이겼어‘ 에서 웃음이 나네요
아주 큰 오븐을 사셨나봐요?
빵 🍞 🥯 많이 만드셔야 되겠네요
빵과 원두커피의 조합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다락방 2020-10-23 07:49   좋아요 1 | URL
전자렌지보다 좀더큰 사이즈의 오븐입니다. 계획은 미니 오븐을 사서 쭐레쭐레 들고오는 거였는데 막상 샵에 가보니 큰 것에 욕심이 나버리는 바람에 그만..

배경음악은 저의 유머였는데 그걸 알아봐주시고 웃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엉엉 ㅠㅠ

han22598 2020-10-22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빵 축하드립니다 ^^ ㅎㅎ 그런데..˝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간다˝ 책.....법의학자 책이네요...저.. 법의학 덕후인데, 아니 정확하게 이야기 하면 문국진 선생님 덕후인데, 그분은 더이상 책이 내지 않으신것 같아서 아쉬워하고 있엇는데...이런 분도 계셨네요. 역시 다락방님은 저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시네요 ㅋㅋㅋ

다락방 2020-10-23 07:50   좋아요 1 | URL
오, 법의학 덕후..라니. han22598님의 이 댓글을 읽고 나니, 퍼뜩 <뉴욕 검시관의 하루>라는 책이 생각납니다. 혹시 읽어보셨을까요? 저는 참 좋게 읽었던 책입니다. 혹시 모르니 링크 드릴게요!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53373037

han22598 2020-10-25 13:03   좋아요 0 | URL
역시 저는 법의학 덕후가 아니라 문국진 선생님 덕후였어요. ㅎㅎ
문국진 선생님책에 일본법의학 이야기가 많이 나와서 일본책은 몇권읽었는데,
먼나라 ㅋ 미국 법의학자들에 대해선 전혀 관심이 없다는걸 이제서야 깨달았네요 ㅋㅋㅋ

다락방님!어머리칸 법의학자 소개시켜주셔서 감사해요 ^^

딸기홀릭 2020-10-23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계단 로망이 있지만...저역시 평생 그럴일이 없어 운동합니다 ㅋ

다락방 2020-10-23 09:57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로망은 역시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저에게도 당연히 로망이 있지만(!!) 그것은 19금이므로.... 아무튼 저도 열심히 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2007년.


'팡샤오샤오'와 '린젠칭'은 기차안에서 우연히 만난다. 린젠칭은 대학생 친구들과 고향에 가는 중이었고 팡샤오샤오 역시 아버지가 사는 곳을 방문하러 가는거였는데, 폭설로 인해 기차가 멈추고 그들은 내려서 눈밭을 걷고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아는 사이가 되고, 고향에 도착해서는 팡샤오샤오가 린젠칭의 집으로 가 춘절을 함께 보내며 친구가 된다.

그들은 베이징에 돌아와서도 친하게 지내면서 사이좋은 친구가 되는데 린젠칭은 친구로 지내는동안 팡샤오샤오의 애인이 여러차례 바뀌는 것을 보게된다. 팡샤오샤오는 베이징에서 정착하고 싶었고, 그건 혼자만의 힘으로 되지 않는 것이었기에 안정적인 직업과 돈 있는 남자들을 애인으로 사귀어 왔던 것. 그러나 좋은 직업의 남자는 집에서 팡샤오샤오를 반대하고, 팡샤오샤오에게 물질적으로 잘해줄 것 같았던 남자는 유부남이었다. 팡샤오샤오의 연애는 뜻대로 되지 않고 린젠칭과 팡샤오샤오 모두 베이징에서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채, 서로에게 힘을 주고 우정을 나누다가 연인이 된다. 그렇게 이 가난한 연인의 사랑은 시작된다.


나이대도 비슷하고, 젊었으나, 자리 잡지 못하고 늘 가난한 상태로 함께 사는건 쉽지 않았다. 가난은 이들을 휘청거리게 했다. 팡샤오샤오가 좋은 집에서 살고 싶었던 것, 베이징에 자리 잡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린젠칭과 함께 보금자리를 꾸미고 있는 시간들이 불만인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또다시 춘절이 되고 고향에 가는 일들이 반복되는 동안, 그리고 친구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자리잡고 돈을 버는 동안, 여전히 베이징에서 가난하게 지내는 것은 결코 행복하지 못했다. 린젠칭은 계속 계속 가난해서 좁은 단칸방에서 사는 자신의 삶이, 성공했다고 거짓말해야 하는 삶이 지겨워졌고 말수가 적어지고 사랑을 표현하는 것도 예전같지 않다. 가난은 사랑을 이겼다. 그렇게 팡샤오샤오는 떠나버린다.




2018년.

베이징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그들은 우연히 그러니까 아주 오랜만에 재회한다. 린젠칭은 비즈니스석에 팡샤오샤오는 이코노미 석에서 짐을 올리다가 마주한다. 또다시 폭설은 내리고 비행기는 출발하지 못한다. 항공사 측에서는 운항이 가능해질때 출발하겠다며 승객들에게 호텔을 제공하는데, 비즈니스석과 이코노미석 승객에게 제공되는 호텔은 다르고, 린젠칭은 팡샤오샤오를 자기 방에 묵게한다. 그렇게 그들은 과거의 이야기를 하나씩 둘씩 풀어놓는다. 린젠칭은 말한다. 그 때, 나는 너랑 자면 우리가 결혼할 줄 알았어, 라고 말했더랬다. 그 때, 린젠칭은 열심히 컴퓨터 게임을 만들었었고, 그 게임의 스토리와 주인공 이름은 팡샤오샤오와 함께 정했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게임이었고, 그들이 만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라고 물으면서 세상은 무채색이 되는거지, 라고 이 커플은 대화를 나누었더랬다. 훌쩍 어른이 되어버린 그들 앞에는 긴 시간이 쌓여있었고, 그렇게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린젠칭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전화를 받는 린젠칭의 수화기 너머로 "아빠" 하는 아이의 외침이 들려오고, 팡샤오샤오는 당황하며 얼른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수화기 너머의 아이는 호텔 방을 한 번 보여달라고 한다. 린젠칭의 아들의 요구대로 전화기를 한 번 휘익 돌리는 사이사이, 팡샤오샤오는 그 전화기 속에 등장하지 않기 위해 여기에서 저기로 저기에서 여기로 자꾸 몸을 움직여야 한다. 그녀는 지금 이 시간, 숨어야 한다. 들키지 말아야 한다. 숨겨진 존재가 된다.



그녀는 결국 호텔 바깥으로 나가고, 호텔 바깥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린젠칭은 그녀의 손을 잡고 다시 호텔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마침 린젠칭의 회사 사람을 마주친다. 린젠칭의 손에는 여전히 팡샤오샤오의 손이 있었고, 린젠칭과 동료 사이는 어색해진다. 동료와 헤어지고나서 팡샤오샤오는 잡힌 손을 빼고 방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렇게 차를 타고 베이징에 가기로 하는데, 그 차안에서 팡샤오샤오는 웃으며 말한다.



"나는 한 때는 너의 연인이었는데 이제는 내연녀 취급을 받고 있네."




아으- 너무 싫다 진짜 ㅠㅠ 내가 드러나면 안된다는 거. 나 여기 있는데 왜 드러나면 안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나를 드러나면 안되는 자리에 놓지마.



이 재회가 있기 전에, 팡샤오샤오는 린젠칭의 성공을 알고 있었다. 린젠칭이 팡샤오샤오와 헤어지고나서 만든 게임은 린젠칭이 열심히 열심히 가난에서 탈피하고자 이 일 저 일 거듭하는 동안 많은 사용자가 생겼고, 그렇게 큰 회사랑 계약하게 되면서 부자가 되는거다. 그런 린젠칭이 텔레비젼에 나와서 인터뷰를 하는데, 그 때 팡샤오샤오의 존재를 언급한다. 나를 진심으로 응원해주고 지켜봐주던 존재가 있었고, 그 존재와 함께 이 게임의 스토리를 만들었다, 고. 팡샤오샤오는 혼자 있던 어느 날 우연히 식당에서 틀어둔 티비를 통해 그 장면을 보게 되는거다.



2018년 그들의 재회가 있고 나서, 함께 돌아와 베이징에서 헤어지고난 후, 린젠칭과 팡샤오샤오는 과거를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과거가 정리되면서 비로소 무채색이던 세상은 본래의 색을 찾는다. 팡샤오샤오는 린젠칭이 만든 게임을 연다. 게임의 끝, 남자와 여자가 재회하면서 게임 속의 세상도 무채색에서 벗어난다.



지독히도 가난했던 연인이 사랑하다 헤어졌는데 한쪽이 크게 성공할 확률, 그 성공이 티비에까지 나올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가 티비에 나왔을 때 내가 그 티비를 시청할 확률과, 그 안에서 내가 언급될 확률은 또 얼마나 될까. 온갖 곳에 영화적 설정이 너무 들어가 있어서 결코 내가 좋아할만한 영화는 아니었다. 또한, 내가 영화속의 팡샤오샤오 였다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나는 만들어낼 수도 볼 수도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게임을 할 줄 모르니까. 헤어지고난 후 그가 게임의 언어로 말을 걸어온다면 나는 그것을 제대로 들을 수도 없을 뿐더러 들어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는데, 그렇다면 나의 세상은 결코 제 색을 찾을 수 없는걸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앞으로 살면서 게임하는 남자를 만나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응?) 헤어져도 무슨 말 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 (  ")

나와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을 만나 연애해야 먼훗날 티비속에서 인터뷰해도 그 말이 내게 닿을 것이며 어떻게든 보내는 사인을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가난은 힘이 세다. 가난은 젊음과 사랑을 짓누른다. 서로만 있으면 될 줄 알았고, 그렇게 함께 살 수 있을 줄 알았던 이 커플은 가난 앞에 무릎 꿇고만다. 팡샤오샤오는 베이징에 와 대학도 안가고 일하고 살면서 언제나 집있는 부자 남자 만나 정착할 수 있기를 바랐지만, 2018년까지도 남자 만나 정착하는 건 되지 않았다. 그나마 혼자서 예전보다 조금 나은 집에 살게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부자는 어떤 사람들이 되는걸까. 부자로 태어나야 부자가 되는거지만 그러나 살다 보면 어떤 사람들은 아주 운이 좋게도 갑자기 부자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속에 나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겠다.


나야말로 돈, 돈 거리는 세상 속물인데, 그렇게 외치는데도 돈이 없는 걸 보면 나는 진정으로 돈을 원하지는 않는걸까? 라는 생각도 든다. 돈, 돈 거리지만 로또도 안사는걸...돈 너무 좋은데, 나 돈 좋아하는데 그런데 왜 돈은 나를 딱히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을까? 얼마전에는 나도 한 번, 하고 주식도 조금 시작해보았는데 그 날 이후로 지금까지 계속 폭망하고 있다... 내가 왜 주식을 샀을까... 히융- 애시당초 돈 없는 내가 돈 많은 사람을 만나 연애한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도 꿈꾸지 않는다. 입버릇처럼 책 값 다 결제해주는 사람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지만, 딱히 그걸 원하지는 않는다. 내 돈으로 내가 책 사는게 제일 마음 편한걸 아는 까닭이다. 다만, 내 돈 뜯어가지만 않으면 된다고 나는 진심으로 룰을 정해놨기 때문에, 그래서 내 돈 뜯어가지는 않는, 그러나 가난한 이들과만 연애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가난한 자들과의 연애이든 부자와의 연애이든, 결코 변하지 않는 사실은 내 스스로가 돈을 벌어야한다는 것. 내가 누누이 얘기하지만, 아나스타샤도 그레이 믿고 돈 안벌고 집에 눌러 앉으면 경력단절되고 나중에 그레이랑 헤어지면 멘붕온다니까? 그러니까 아나스타샤여, 열심히 일하라! 커리어 쌓고 연봉 높여야 돼!! 그래야 나중에 그레이랑 헤어져도 어느 일터에서도 경력있는 일꾼으로 돈 벌고 살고 있지. 내가 내 돈 번다면 헤어져도 내 삶에 큰 타격이 없다. 부자 남자 만나 연애할 때 그 연애가 힘들지 않을 수 있지만, 그리고 돈 없는 것보다야 확실히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좋은 데도 많이 갈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이 언제까지 갈지 알 수 없어, 돈 벌어야 돼! 내가 내 돈 벌어야 된다. 헤어지고 나서도 나는 이 땅에 두 발 단단히 붙이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므로! 그리고 한쪽에서만 돈을 쓰면 그 돈은 그 상대에게 힘을 준다. 그것은 둘 사이에 권력 관계를 형성해버려. 그래서 애트우드도 시녀이야기에서 여자들 경제력 먼저 뺏어버린 거 아녀, 남자들한테 의지하게 만들라고. 그러니까 돈 벌어야 된다. 그레이가 드레스 이천벌 사 주는 것만 믿고 있으면 안돼, 헬리콥터 태워주는 것만 보고 좋아하면 안돼, 돈을 벌어야 된다!!!

















야... 중국영화 《먼 훗날 우리》보면서, 세상에 누가 시녀이야기랑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함께 언급하는 페이퍼를 쓸 수 있나...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다!!



역시 돈돈 거리는 나이군... 흐음....

나는 늘 내가 원하는 걸 갖게 된다고 생각해왔는데... 왜때문에 돈은 없지? 어젯밤에도 알라딘에서 책과 커피를 주문하고 잠들었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내 돈은 다 어디로 갔지? 알라딘에 간것인가... 인생.... 나의 돈벌이 무엇인가...




그리고 너희 둘... 어째서.... 왜 때문에...... 2007년에 만났는가....................왜죠.................2007년은 세기의 로맨스가 시작되는 해인가.................. 2007년 시작된 사랑 각인되는 사랑인가, 그런 사랑들 중의 하나인가 너희들도.............

왜 하필이면 2007년이야, 왜, 왜..... 왜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2007년에 사랑이 찾아온 사람은 무채색의 세상을 살게되는 것인가. 그것이 그 해의 저주인가...




사랑이 찾아오면 알 수 있을거야~ 하는 노래 가사가 왜 떠오르지? 왜때문에?

사랑이 찾아오면 알 수 있을거야 라고 커피소년은 노래하는데, 그런데 때로는 사랑이 느닷없이 갑작스럽게 훅 덮치기도 하잖아. 뭐 그렇다는 거다.

점심 메뉴 생각이나 해야겟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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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20-10-21 2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는 구렁이 꿈으로 부자 될 거예요!! ㅎㅎㅎㅎㅎㅎㅎ

저 영화 왠지 땡긴다.... 쟤네 뽀뽀하는 자세도 뭔가 귀엽고.

다락방 2020-10-22 08:46   좋아요 1 | URL
복권 샀어요? 복권 사야돼. 복권을 안사면 가능성은 0프로지만 사면 가능성은 일단 0프로 보다는 높다!!!

혹시 저 영화 보게 되면 어땠는지 말해줘요, 쇼님!!
 















이 책의 22페이지 본문 하단에 실린 각주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무한히 긴 삶에 대한 욕구는 무한한 인식에 대한 욕구이기도 하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소설 『모든 인간은 죽는다』의 주인공은 불사不死의 삶이라는 가능성 앞에서 주저하는데, 그때 그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그와 같은 삶이 무한한 배움을 가능하게 하리라는 사실이다. 실로, 무한히 오래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언어와, 그 언어들로 전승되고 기록된 인류가 쌓아 올린 지식 전체를 배울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을 종합하여 단 한 권의 최종적인 책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 책은 전 세계의 도서관을 합친 것과 맞먹을 것이며, 우주와 자기 자신을 향한 인류의 기나긴 탐구의 여정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이는 절대정신이 자신의 기원이자 목표로 귀환함을, 그리하여 거대한 자연사적·세계사적 원운동을 완성함을 의미한다. (p.22)


















찾아보니 국내에도 번역된 책이다. 보부아르는 '제2의 성'으로만 알고 있다가 이렇게 소설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불사의 삶이라는 것에 대해 나도 자주 생각해왔다. 내가 불사의 삶을 생각한건 단순하게도 죽음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종종 사람들에게 죽음이 두렵고 그래서 불사의 삶을 원하노라, 고 말하면 이내 '아프고 병들면서 살아있는 건 고통이지 않냐'고 반문한다. 그럴때면 나 역시 고민하게 된다. 내가 원하는 불사의 삶이란 것은 구체적으로 떠올려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늙고 병들지 않은 채로 영원히 사는 삶을 의미했던 것 같다. 가능성 없는 일이다. 그러나 죽음이 두려운 건 언제나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죽지 않을 수 있다면 뭐든 할 것 같은 마음이 된다.


보부아르와 이 하찮은 나 따위...의 생각은 바로 여기서 갈린다. 내가 영원히 살기를 바란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라는 이유 말고는 딱히 없다. 그러니까 계속 살아서 무엇을 이루고 무엇을 쌓고..하는 것에 대한건 없다는 거다. 단순히 죽기 두렵다 →영원히 살고싶다로 이어졌을 뿐. 그러나 보부아르는 불사의 삶이 무한한 배움의 가능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단하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하지? 오래 살아서 오래 공부하다보면 결국은 최종적으로 모든게 담긴 책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라는 생각이라니.. 너무나 대단하지 않은가. 내가 얼마나 하찮은 쪼꼬미 인간인지를 보부아르를 보며 깨닫는다.



이런 보부아르로부터 영감을 받은걸까. 나는 불사의 삶으로부터 무한한 배움의 가능성을 보게됐다는 보부아르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자 마자, 크- '블레이크 라이블리' 주연의 《아델라인:멈춰진 시간》이란 영화가 떠올랐다.




영화속에서 주인공 아델라인은 큰 사고를 당했는데, 그 사고 후에 늙지 않은 채로 그 모습 그대로 계속 살게 된다. 그녀에게는 어린 딸이 있는데 시간이 흘러 그녀의 딸이 할머니가 되도록 그녀는 여전히 젊은 모습을 유지하게 되는 것. 그렇게 오래 살아오면서 현재, 그녀는 한 남자를 만나 데이트중이다. 영화는 그런 현재를 중점적으로 보여주면서 진행되는데, 아아, 그녀가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뭘했을까? 외국어를 익혔다!! 그래서 포르투갈어도 막 해! 와, 저게 가능하겠구나, 저게 가능하겠어. 오래 살면서 그녀가 계속 젊으니 그녀는 외국어를 공부한거다. 너무 멋지지 않은가. 오래산다고 다 그렇게 살 순 없을텐데, 이거야말로 아델라인이 선택한 아주 멋진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델라인이 해를 거듭해 살아오면서 외국어를 익혔다면, 보부아르가 말한 것처럼 무한한 배움에 대한 것도 가능성 있지 않을까. 그러나 젊음을 유지하는게 더 유리할 것 같다. 나이 들어 책읽고 공부하니 예전같지 않아서, 젊을 때 막 듣고 보고 배우는 게 너무 중요할 것 같은 거다. 외국어를 이것저것 하게 된다면 내 능력치가 커지는 것일테고, 그렇다면... 더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더 많은 월급을 받는 것도 가능해지지 않을까. 그러니까 내가 만약 지금 한 500년쯤 살고 있으면서 외국어 여러개를 마스터했다면 지금쯤은 미국에 가서 마리 루티 강의도 들어보고 뭐 그럴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내가 500년을 살면서 열심히 외국어를 공부하느냐 아니냐는 전적으로 나에게 달린 것이지만...


아무튼 무한한 삶에서 무한한 배움의 가능성을 생각하는 보부아르님이 진짜 대단하다... 나는 그런 생각 안해봤어.. 나는 역시 쪼꼬미 인간이야..쭈구리다.....


영화 아델라인을 보고 썼던 페이퍼는 여기 ☞ https://blog.aladin.co.kr/fallen77/9661834



이 책, 《사람, 장소, 환대》는 얼마 읽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나를 건드리는 부분들이 툭툭 튀어나온다. 사실 가장 먼저 나를 건드리는 문장은 ''공공장소에("대낮의 햇빛 아래")'라는 문장이었다.



그림자는 물론 몸과 다르다. 하지만 몸이 아니면서도 몸의 일부인 것처럼 몸을 따라다니며 몸의 연기를 돕는 물건들이 많이 있다. 가발이나 지팡이나 틀니처럼 말이다. 이런 소품들은 개인에게 신체적인 완전성을 부여하며 그가 공공장소에("대낮의 햇빛 아래") 오점 없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게 해준다. 사실 일상의 연극은 언제나 분장을 요구하기 때문에, 자연적인 몸과 인공적 부속물(또는 훼손되지 않은 순수한 몸과 인공적 부속물들을 필요로 하는 불완전한 몸)을 구별하려는 시도는 부질없는 것이다. 공공장소에서 나체의 전시가 금지되어 있다는 단순한 사실이 말해주듯, 순수한 몸 그 자체는 언제나 불완전하다. (p.17-18)



위의 구절에서 공공장소에, 대낮의 햇빛 아래 라는 문장만이 나에게 확 볼드체로 형광펜 쳐져서 들어온 것이다.



살다보면 누구나 한번쯤은 숨겨진 존재가 되어야 했던 때가 있을 것이다. 때로는 그보다 많이. 마찬가지로 내가 누군가를 숨겨야 했던 때도 있을 것이고. 나에게도 그런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렇게 숨겨진 것, 숨겨야 하는 것, '들키면 안되는 것'에 대해서 너무 스트레스를 받는 편이다. 그건 나 자신에 대해 쪽팔린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만나면서 내 존재를 바깥으로 드러내지 않는 사람을, 내가 좋다는 이유로 계속 그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수시로 생각해야 했고, 은유적으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얘기하자면 '대낮에' , '공공장소에서' 나를 만나기를 꺼려하는 사람이라면 나의 존재는 그에게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나 역시 상대를 그런식으로 대한 적이 있다. '대낮에' , '공공장소에' 그를 드러내는 걸 피하려고 했던 순간들이 내게도 있었다. 대낮에, 햇빛 아래서 만날 수 있지만 어둠을 선택하는 것과, 어둠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다르다. 나는 누군가 나를 햇빛 아래서 만나기보다는 어둠에서만 만나려고 해서 상심했던 시간이 있었다. 그 때의 나를 내 인생에서 도려내고 싶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그 당시에도 그걸 못견뎌했다. 심심풀이 땅콩이 된 것 같은, 그러니까 김현경의 이 책에서 말한것처럼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것 같은 그 느낌이 나의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했다. 그건 아프다기 보다는 상하고 다치는 거였다. 다시는 그런 상황 속으로 나를 몰아넣지 않겠다고 수십번 다짐을 했던 시간이 내게 있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그런 기미가 보이면 나는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내가 살면서 굳게 결심하고 끝까지 가져가자고 다짐한 게 있다면, 그건 '내가 나 자신한테 쪽팔리게 살지말자'는 것이다. 누군가 나를 햇빛 아래가 아닌 어둠에서만 불러내려 한다면, 나는 그 사람의 손을 놓을 것이다. 내가 나에게 그것을 허락할 수 없다. 그것은 나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 또한, 나 역시 누군가를 그렇게 대하려고 했던 시간들에 대해서도 내가 행복하지 않았다는 것 역시 떠올린다. 누가 나를 어둠속에서만 불러내려 했을 때 절망했던 것처럼, 내가 누군가를 어둠속에만 불러내려 했을 때, 나 역시 행복하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우리가 숨지 않는 것, 대낮의 햇빛 아래에, 공공장소에서도 웃으면서 활짝 만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라면 오늘은 어둠에서, 라고 조건을 붙여 만나도 행복할 터였다. 저 볼드체의 문장은 순식간에 나를 과거의 여러시간으로 데려다놓았고 그래서 나로 하여금 아아, 불후의 명곡, <Color Of The Night>를 찾아 듣게 했다. 다시 들어도 로렌 크리스티의 목소리는 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 사람 가슴을 후벼판다.






로렌 크리스티도 대낮에 그를 만나지 못하고 숨어서 만나야 했나부다... 크-



You and I moving in the dark

Bodies close but souls apart

Shadowed smiles(그림자!!)

And secrets are unrevealed

I need to know the way you feel


I'll bive you everything I am

And everything I want to be

I'll put it in your hands

If you could open up to me

Oh cna't we ever get beyond this wall


Cause all I want is just once

te see you in the light

But you hide behind

the color of the night


I can't go on running from the past

Love has turned away this mask

And now like clouds, like rain

I'm drowning and I blame it all on you

I'm lost, God save me



가사가 더 있지만 이쯤하겠다. 나는 이 노래를 들을 때 갓 세이브미~ 에서 울고, 내가 원하는 건 한번이라도 너를 밝은 곳에서 보는 것이라는 말에 운다. 울자. 이 아침 울자..가을은 원래 울라고 있는 거다.... 울자. 크라이, 크라이... 나한테 밤에만 전화하지마... 내가 밤에만 픽업더폰 하게 하지마..... 그런건 이제 다 끝났어...........








You call me at night and I pick up the phone.....

over it


밤에만 전화하는 남자 닥치라고 하자.....수화기를 들지마!!




사람에 대해 얘기하면서 태아,군인,사형수에 대해 언급할 때도 번번이 복잡한 마음이 되었지만, 2장에서 외국인에 대해 언급할 때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사람이라는 말은 사회 안에 자기 자리가 있다는 말과 같다. (p.64)



여행객으로, 관광객으로 찾아가는 외국과 자리를 잡고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외국에 대해서, 그 낯선 사회 안에서 자기 자리를 만들기 위해 분투해야 할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어딘가의 누군가에게는 자기 자리를 찾는 일이 힘겨워야 할까.



조건부의 환대 역시 환대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주어진 환대가 언제라도 철회될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환대되지 않은 게 아닐까? (p.25-26)



자기 자리를 찾기 위해 애쓰고 있는 사람에게 나만큼은 철회되지 않을, 무조건적인 환대를 해주는 사람이고 싶다. 나에게 당신은 언제나 사람이었고 앞으로도 그럴거라고, 조건 따위 없다고, 대낮에 햇빛 아래에서 언제든 볼 수 있다고.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당신도, 그리고 자기 자리를 찾기 위해 애쓰는 모든 사람들도.



좋은 책이다. 자꾸자꾸 페이지에 눈길을 멈추게 되는 책이다. 아직 75쪽까지밖에 못읽었지만 그렇다.

오래전에 누군가가 내게 어떤 책에 대해 얘기하면서 '이 책 나는 지루했지만 네가 읽어준다면 끝까지 읽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사는동안 달콤한 말 참 많이도 들었지..다 끝나버렸지만. 어쨌든 이 책은 내가 환대하는 이에게 읽어주고 싶은 책이다. 매일매일 읽어주고 결국 한 권 다 읽어내고 싶은 그런 책. 읽어주다가 어떤 문장들에서는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도 좋을 것 같다. 사람이라는 말은 사회 안에 자기 자리가 있다는 말과 같대, 정말 그렇지? 사회 안에 내 자리가 없다고 생각했을 때 너무 외로웠잖아? 같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겠지.



그럼 이만..



이 책 읽는 동안 '너멀 퓨워'의 《공간 침입자》를 같이 읽으면 좋을 것 같다.

















드워킨은 낙태에 대한 처벌이 곧 태아가 사람임을 함축하지 않는다면서, 완고한 낙태반대론자라도 강간에 의한 임신의 경우 낙태에 찬성한다는 점을 그 근거로 들었다. 만일 태아가 사람이라면, 이는 강간에 의해 잉태된 사람은 살 권리가 없다고 말하는 셈이다(로널드 드워킨, 『생명의 지배영역』, 박경신·김지미 옮김, 이화여자대학교 생명의료법연구소, 2008., p.104). - P32

유교적 가부장 사회에서 기혼 여성은 친족이 없는kinless존재라는 점에서 노예와 비슷하다. 조선 시대에 기혼 여성에게 적용되었던 출가외인出嫁外人이라는 말은 여자들이 혼인과 동시에 부계 친족 집단에서 영구히 성원권을 상실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출가한 여자는 부모의 제사에 참여할 수 없고, 재산을 물려받을 수도 없다. 그리고 친정 일에 관심을 가져서도 안 된다(출가외인이라는 표현은 여자가 친정 일에 개입하려 할 때 이를 저지하기 위해 주로 사용되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시집에서 쫓겨나도 친정으로 돌아올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친정에 대해서 ‘외인外人,‘ 즉 아웃사이더가 되었다고 해서, 그녀가 남편의 친족 집단에서 그에 상응하는 자리를 얻은 것은 아니다. (아래 계속) - P37

그녀는 시집의 족보에 이름이 오르지도 않고, 제사에 참여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두 집단 중 어느 쪽에서도 성원권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시집살이가 종살이와 비슷하게 체험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친족이 없다는 것은 자기를 위해 나서줄 제삼자가 없다는 것이다. 출가한 여자는 원래 자기가 속해 있던 친족 집단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그녀의 운명은 이제 전적으로 시집 식구의 손에 달려있다. 하지만 그녀와 노예의 공통점은 여기까지이다. 노예는 아무 명예도 갖지 않지만, 그녀에게는 명예가 중요하다. 또 그녀는 아들을 낳음으로써 시집과 혈연으로 이어지게 되며, 권력을 행사할 기회를 갖는다. - P37

『순수와 위험』에서 더글러스는 더러움을 자리place에 대한 관념과 연결시켰다. 더럽다는 것은 제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신발은 그 자체로는 더럽지 않지만 식탁 위에 두기에는 더럽다. 음식이 그 자체로 더러운 건 아니지만, 밥그릇을 침실에 두거나 음식을 옷에 흘리면 더럽다. 마찬가지로 목욕 도구를 옷장에 두거나 옷을 의자에 걸어두는 것, 집 밖에서 쓰는 물건을 실내에 두는 것, 위층의 물건을 아래층에 두는 것, 겉옸이 있어야 할 자리에 속옷이 나와 있는 것 등은 더럽다." Mary Douglas, Purity and Danger, New York:Routledge, 2002. pp.44~45 - P73

실제로는 여성의 사회적 성원권을 부정하면서도, 으먕론에 의거하여 여성과 남성에게 대칭적이고 상호보완적인 위치를 부여하는 성리학적 세계관이 좋은 예이다. 공간적인 차원에서 이 세계관은 여성에게 안을, 남성에게 밖을 할당한다. 그러면서 여성이 집 밖을 마음대로 나다니는 것을 금기시한다. 하지만 여성의 자리가 집 안이라는 말이 곧 집이 여성에게 속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여성은 공적으로 성원권이 없기 때문에 사적인 공간을 가질 수도 없다. 다만 남성의 사적 공간인 집에 그의 소유물의 일부로서 속해 있을 뿐이다.
(···)
이 이데올로기적 구별의 핵심적 기능은 여자가 자기 집을 갖는 것-자기 이름으로 된 재산과 자기만의 공간을 갖는 것-을 막는 데 있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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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0-21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깊이 읽고 많이 느끼시는 다락방님!! 전 조금 뒤의 우정 파트를 읽고 있어요. 이 책은 갈 수록 더 좋아요. 무조건 적인 환대를 갈구하는 마음으로~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렵니다 클킁

다락방 2020-10-22 08:47   좋아요 1 | URL
아아, 우정 파트라니, 너무 기대돼요! 우정 파트 읽고 싶어요! 열심히 읽어야겠어요.
북플 보니까 공쟝쟝님 이 책 완독했던데, 고생했습니다. 꺅 >.<

- 2020-10-22 12:15   좋아요 0 | URL
뒤로갈 수록 그나마 잘 넘어가서 ㅋㅋㅋ 으히히 팔로팔로미
 
하리오 드립필터 - 3~4인용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16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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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마시는 똑같은 커피를 집에서 내려마시면 묘하게 불쾌한 향이 났다. 강한 향은 아니었고 커피향도 여전했지만, 뭔지 모르게 계속 거슬리는 향이었다. 회사에서 마시는 것과 같은 종류지만 로스팅 날짜가 달라서 그런걸까 싶어 며칠전에는 회사의 커피를 그대로 들고 가 내려마셨는데도 그 거슬리는 향은 여전했다. 이상하다, 커피는 똑같은데...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 하다가 여과지를 의심하게 됐다. 그렇게 여과지만 꺼내어 냄새를 맡아보니 여과지에서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흐음, 아닌데, 하고 다시 내렸는데도 역시나 불쾌한 향이 났다.


나는 고민끝에 알라딘에서 이 여과지를 주문했다. 1-2인용을 사무실에서 쓰고 있는데 3-4인용을 집에서 쓰기 위해 새로 주문한 것. 토요일 오전, 여과지를 배송받기 전에 집에서 내려마시면서 아, 역시나 거슬리는 향이 난다.. 했는데, 오후에 이 여과지를 받고 다시 커피를 내려 마시는데, 그 거슬리는 향이 전혀, 전혀 나지 않았다. 아, 역시나 여과지 문제였구나. 아니, 그런데 여과지 자체만 맡으면 아무 냄새도 안나는데, 왜 내려서 마실 때는 뭔가 거슬리는게 섞인 것 같은걸까? 알 수 없지만, 몇 장 남지 않은 그 여과지는 버렸다. 그 향을 또 견디기가 싫었다. 새로운 여과지로 상큼하게 커피를 내려마시면 되는데, 왜 그것을 견디는가.


알라딘의 이 하리오 드립필터는 커피를, 커피맛을 그리고 커피향을 제대로 즐기도록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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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새로운 책을 늘 사는데도 책장 앞에 서면 읽고 싶은 책이 없을까? 어제도 책장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이 책을 꺼내왔다. 그래, 뜨거운 로맨스를 읽자! 주군의 여인 이라니 제목이 너무나 그 뭣이냐.. 너무...... 아무튼 뭔지 알죠? 여튼 제목이 흐음... 좀 그렇지만..주군의 여인이 뭐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나 이것이 창비 세계문학 시리즈인만큼 작가가 다 뜻이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냈겠지. 어디 한 번 읽어보자.


그렇게 작가 소개를 먼저 읽기 시작하는데, 작가 '알베르 꼬엔'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주군의 여인은 작가의 쏠랄 시리즈 중 제일 인기 있었던 작품이라고. 그래. 잘 알겠다. 시작.


하고 읽는데 처음부터 좀 읭? 스럽다. 그러니까 쏠랄이란 이 남자가, 늠름하고 잘생기고 프랑스에서 주는 훈장도 받은 이 남자가 한 여인의 사랑을 얻기 위해 용기를 내고자 한다. 무릇 사랑을 얻기 위해서 용기를 내는 것은 얼마나 당연한가. 아직 용기를 내기 전이고 이제 용기를 낼건데, 그 여인에게 아직 고백하기도 전이면서 '오늘, 이 5월의 첫날에 그는 용기를 낼 것이고, 그녀는 그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p.11) 라고 포부도 당당하다. 자뻑이 대단하군. 그는 하인을 시켜 말 두마리를 지키게 하고 여인의 집에 도착한다. 그렇다면 독자로서, 그리고 평범한 사람으로서 짐작하는 것은, 이 남자가 여인의 집에 도착했다면 벨을 누르고 여인을 만나고 내가 너를 보고나서 반했는데 너랑 교제할 수 있겠니, 만나볼 수 있겠니? 묻는게 아닌가. 그러면 여자가 응 그래, 하던가 아니 싫은데 하든가.. 뭐 여러가지 반응이 있겠지. 여튼 그런 걸 생각하고 읽는데 이 미친 유럽 또라이가 글쎄 여자의 방이 있는 2층으로 가 발코니를 타고 3층 창문을 넘어서 여자의 방에 몰래 숨어드는거다. 이런 개 좆같은... 이게 뭐하는 짓이여? 이 책이 두꺼우면서 두 권에 이르니 아마도 남자와 여자는 사랑을 하겠지마는, 아니 .. 여자도 어느 순간 남자에게 반했을지도 모르고 앞으로 그렇게 되겠지마는.... 방안에 숨어드는 남자라니. 대단히 돌아버린게 아닌가.


여자의 방으로 몰래 숨어들어 그는 심지어 분장을 한다. 흰 턱수염을 붙이고 너덜너덜한 외투를 입고 이빨에 검은색 스티커 붙여서 이빨도 없는 늙인이인것처럼 분장하는 거다. 그리고 여자의 시어머니(그렇다, 유부녀인 것이다!)의 통화를 듣고는 이 집에 잠시후에 여자 혼자 남게 될것임을 짐작하고, 여자의 방안에서 여자가 써둔 일기를 훔쳐 읽는다. 진짜 가지가지한다, 가지가지해...



'아리안'은 피아노 연습을 하고 있었고 시어머니가 아들과 통화하면서 전화를 바꿔주겠다고 하지만 ㅋㅋㅋㅋㅋㅋㅋㅋㅋ피아노 연습중이라 안된다고 하며 전화를 안받는다. 이 장면에서 아, 남편을 싫어하는구먼...하고 알 수 있었는데, 어쨌든 시어머니도 외출하고 남편도 직장에 가서 혼자 남았다고 씐나가지고 자기 방에 들어가서 욕조에 몸 담그고 샤워도 하고 거울 보면서 혼잣말로 난 정말 예뻐 너무 예쁘지~ 막 이러는데-나중에 남편도 거울보고 자기가 자기 잘생겼다고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책 속의 등장인물들은 다들 나보다 자뻑이 심하다-, 그 장면을 다 커튼 뒤에 숨어서 쏠랄이 보고 있는거다.



그는 다시 커튼 뒤에 숨었고, 여인이 나타나자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 우아한 나이트가운 속의 황홀하도록 멋진 몸매를 경탄하며 바라보았다. (p.47)




너무 끔찍하지 않은가. 그리고 목욕하고 나온 아리안은 그 늙고 추한 남자를 자기 방 안에서 발견하는거다. 이 얼마나 깜짝 놀랄 일이고 무서운 일이란 말인가. 누군가 나 몰래 내 방에 들어왔다는 것만으로도 끔직한데, 그런데 이 늙고 추한 남자가 자신에게 반했다고 사랑을 고백하는거다. 며칠전 연회에서 너를 보았지, 나는 그때 너에게 반했어, 이러면서 사랑 고백을 하는데, 어느 미친 여자가 오오, 당신의 나이와 겉모습이 뭐가 중요하겠어요, 내 방에 몰래 들어온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당신의 사랑이 그렇다니 나는 당신의 여자에요, 이러겠는가. 그걸 상상한 것 부터가 또라이 끼가 너무 심하게 들어있는거 아닌가 말이다.


당연히 아리안은 끔찍해한다. 방문을 잠갔는데 들어와있다니 바들바들 떤다. 당연히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괜히 소리질렀다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침착하게 상대의 말을 그저 들어주자고 생각한다. 남자는 그 연회 이후로도 너를 보았고, 너는 나를 위해 수태된 연인이고, 사랑은 원래 오래 걸리는 일이겠지만 나는 너를 사랑하고 그러므로 너로부터 사랑을 받기를 기대한다, 내 사랑을 받아주겠냐, 묻는다.



내가 왔습니다, 늙었지만, 그대로부터 기적을 기대합니다. 내가 왔습니다, 허약하고 가난하고 수염이 허옇게 셌고 이는 두개밖에 남지 않았지만,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그대를 사랑하고 그대를 잘 아는 내가, 더없는 사랑으로 그대를 찬미하겠습니다. 이는 두개밖에 없지만, 그 두 이를 내 사랑과 함께 그대에게 바치겠습니다, 내 사랑을 받아주겠습니까? (p.57)



이러고 무서워서 알겠다고 하는 여자에게 키스를 하기 위해 다가가는거다. 아리안은 너무 무서워서 뒷걸음질 하다 침대 협탁에 부딪치고 마침 거기 있던 잔을 들어 그 노인에게로 던진다. 노인은 유리잔은 얼굴에 맞고 피가 나고 이 일로 빡이쳐서 여자에게 돌아서라 한다. 여자는 시키는대로 돌아섰고, 아아 나는 총맞는가, 나는 이대로 죽는가 두려워하는데, 잠시후 남자는 다시 돌아서 앞을 보라는거다. 그렇게 아리안이 앞을 보니, 거기엔 외투와 분장을 지운 잘생긴 남자가 서있었다...는 이야기다. 하아- 어쩌라고 진짜.


그리고 남자는 여자의 방을 떠나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때, 머지않아 찾아올 그 때, 나는 두시간 안에 그대의 마음을 빼앗겠다, 모든 여자, 더러운 여자들이 좋아하는 방식, 더러운 방식으로 유혹하겠다. 그대는 어처구니없이 어리석은 사랑에 빠지게 될 테고, 그렇게 나는 늙고 추한 남자들, 그대들의 마음을 빼앗을 줄 모르는 순진한 남자들의 복수를 할 것이다. 그대는 황홀경에 젖어 넋 나간 눈길로 나와 함께 떠나게 되리라! (p.59)



하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이것은.... 유럽 또라이? 프랑스 훈장 받았는데 여기는 스위스인데 그렇다면 스위스 또라이? 미친거아냐 진짜? 그러니까 그녀가 얼마나 '개.념.있.는' 여자인지 테스트 해보려고 늙고 추하게 분장했고, 그러나 너는 나의 겉모습 때문에 내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늙고 추한 남자들의 복수를 너에게 하겠다! 이러는 거 아녀 지금... 그런데 이 상빠가야, 너도 아리안의 겉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해서 방에 몰래 숨어들었잖아. 와 이거 진짜 순수결정체 100프로의 또라이네. 니가 그여자랑 말을 해봤냐? 대화를 해봤어? 지도 연회에서 처음 보고 쑝 갔으면서, 그러면 뭘 보고 쑝갔냐, 얼굴이랑 몸매보고 쑝갔잖아..그래놓고 무슨 자기는 늙고 추하게 분장해서 여자가 자기 사랑을 받아주길 바라는거야. 내 순수한 마음만은 알아줘, 라는건가. 그러면 나는 당신의 겉모습은 필요없어요, 당신의 내면이 중요하죠, 이러면서 덥썩 받아들일거라고 생각한거야? 외모가 소용이 없어지는 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나서이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데 무조건 나 좋아한다고 네, 해야 되냐. 그리고 거기서 뭐야 난 너 싫어, 이러면 무조건 늙고 추한 남자를 혐오하는 게 되는거야? 개념없고 싸가지 없는 여자 되는거야? 진짜 미친 또라이네. 게다가 너는 심지어 여자의 방에 몰래 들어갔다고, 여자도 모르게! 그래서 여자를 놀라게 했다고! 야, 경찰에 신고해서 유치장 들어갈 새끼가 잘도 복수 운운하네. 남자들은 진짜 복수를 뭐라고 생각하는거야? 여자친구와의 섹스 동영상도 '리벤지' 포르노라고 유출하고 공유하질 않나. 니네는 복수가 뭐니? 어휴..  어릴 적에 내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찾아 복수하겠다, 이런 게 복수 아니여? 무슨 흉측하게 꾸며서 방에 몰래 침입한 다음에 내 사랑을 안받아줬어? 복수닷! 이러고 그래. 마침 어제 기사에는 짝사랑하던 여성이 자기 사랑 안받아줬다고 사제폭탄 만들어 찾아갔다가, 여자의 아버지를 보고 놀라 달아나다가 폭탄 터져 손목 나간 27세 남성에 대한게 있던데... 남자들에게 복수라는 것은 매우 이상하게 정의되어 있는 것 같다. 정신 똑바로 차려 새끼들아...




하, 진짜 어이없네. 그렇게 몰래 들어가서 흉측하게 꾸미고 일방적으로 사랑 고백을 해놓고 두려워하는 여자에게 추한 남자들의 복수를 하기 위해 더럽게 유혹하겠다!! 이러고 있네. 진짜 새로운 형태의 또라이..인가 했더니 뭐 사실 새롭진 않고 걍 유럽 또라이인걸로...



그런데 이게 60쪽 남짓의 이야기이고, 이 책은 640페이지이며 심지어 이런 게 2권으로 한 권 더있다.. 아마도 남은 부분들에서는 정말로 더럽게 유혹하고 더럽게 사랑에 빠지는 게 나오는것이겠지.. 이 유럽 또라이의 이야기를 내가 읽어야 하는가.. 아.. 진짜 어처구니가 없네.



어쨌든 이것은 사랑 이야기이겠지만, 이 시작이 너무나 싫다.. 그래서 이 사랑을 내가 좋은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처음 읽는 순간부터 범죄다,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있는 상태로 나는 아리안의 사랑에 쏠랄의 사랑에 나를 던질 수 있을 것인가... 범죄도 뛰어넘는 세기의 로맨스...이런거 될 것인가......

역시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가 짱이야.. 히융-




토요일에는 엄마랑 둘이 오랜만에 일자산을 찾았다. 코로나 때문에 일자산에 안가게된지 오래인데 이 좋은 가을날을 그냥 보낼 수가 없더라. 그렇게 마스크를 쓰고 산을 걷는데, 와, 가을 산은 역시 너무 좋았다. 아직 단풍이 지기전이어서 초록이 절정을 이뤘다. 초록초록한 산을 보는게 왜이렇게 좋은건지!









마지막 사진 빨간 자켓은 우리 엄마 *^^*



산에서 돌아와 엄마와 함께 열라면에 순두부 넣어 끓여 먹었고, 책을 좀 읽었고, 낮잠을 잤고, 일어나서는 갈비를 먹으러 갔다. 엄마가 갈비 사준다고 해서 그래 그러면 나는 양꼬치 사줄게, 약속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2차로 와인을 꺼내서 홀짝 홀짝 먹었는데 너무 많이 마셔가지고 다음날 일어나서 겁나게 후회했다. 다시는 이러지말자, 다시는, 다시는.......




그렇게 주말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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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10-19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하 <주군의 여인> 시작 부분 정말 빡치네요.... 휴 내내 저런 내용이면 진짜 빡치는데... 흠. 근데 *한강* 열라면 순두부 사진 여기에는 올라올까 했더니 아니군요. ㅋㅋㅋㅋ

다락방 2020-10-19 09:51   좋아요 1 | URL
저 뒤에 어떤 사랑을 하게될지 너무 빡이쳐가지고 책장을 넘기지를 못하겠어요. 하아-

제가 웬만하면 사진 찍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한강 열라면은 ㅋㅋㅋㅋㅋㅋㅋㅋㅋ너무 부끄러워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두부는 수천개로 조각나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사진을 못찍겠더라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바람돌이 2020-10-19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라면 이쯤에서 그냥 던지겠습니다. 무슨 말도 안되는... 설정도 왠만해야죠. ㅎㅎ 그보다 어머님 뒷모습이 아름답습니다. ^^

다락방 2020-10-19 17:01   좋아요 0 | URL
저는 끝까지 읽는 걸 시도해보겠습니다. 시도는 하겠으나 잘 될지는 모르겠네요. 하하하하하.

저희 엄마는 저랑 다니는 걸 너무 좋아하셔요 .. 복합적인 감정이 듭니다. 흑흑 ㅠㅠ

syo 2020-10-20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쏠랄.... 이름부터 겁나 놀리고 싶게 생겨가지고 참기 힘든데 하는 짓도!

다락방 2020-10-20 09:53   좋아요 0 | URL
아 미치겠다요 쇼님..
쏠랄의 저부분 다음 장에서 남편 얘기 나오는데 남편이 세상 한심한 공무원이야..공무원임을 너무 뿌듯해하는 공무원... 자기 독백 엄청 이어지는데 너무 재밌어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 환장하겠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 너무 재밌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