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든, 위우원삼촌이든, 레이웨이든, 사람이 죽을 때마다 그 사람이 있던 세계가 사라진다. 나는 그들 없이 살아야만 한다. 원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더 애매하고, 차갑고, 무관심을 숨기려 하지 않는 새로운 세계에 내 다리는 얼어붙는다. 따뜻한 외투가 하나씩 벗겨져 알몸이 드러나는 것만 같다.
내 마음은 온기를 원하는데, 그러나 내 영혼은 그렇지 않다. 세월이 흐르면서 내 영혼은 그들과 있음을 느낀다. 그들의 눈으로 매사를 보고, 그들의 귀로 소리를 듣고, 그들의 태도로 영원한 동경을 품는다. 절대 돌아올 수 없는 오랜 세계로 잠겨간다.
내 마음은 그렇게 위로받는다. - P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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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쟁이 2022-10-26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분명 이 책을 읽었습니다만, 왜 이 글귀는 생각나지 않을까요? 그것도 최근에 읽었는데 말입니다.
다락방님이 옮겨 놓으니 좋군요. 좋은데.. 왜 기억이 안나지?
 
















조조 모예스의 《미 비포 유》를 천천히 읽고 있기 때문인지 윌에게 정이 너무 들어버렸다. 이번주 분량에서는 '루'가 '윌'로 하여금 살고 싶은 의지가 생기게끔, 안락사에 대한 결심을 바꿀 수 있게끔 무언가 해보고자 하는 생각과 의욕으로 가득차 있어서 실행에 옮긴다. 경마장에 데려가지만 일은 루의 예정대로 진행되지 않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윌은 '왜 나의 의견을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느냐'고 서운해한다. 나는 말도 싫고 경마도 싫단 말이야, 그런데 넌 내게 묻지 않고 그것이 내게 좋을 거라고 네 마음대로 생각했지. 늘 생각하고 얘기하는 것이지만 나의 선의가 언제나 선한 결과를 불러오는 것도 아니고 나의 선의가 상대에게도 선의일 수는 없다.

그리고 클래식 콘서트. 윌의 친구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데 그 친구의 공연이 윌의 동네에서 열린다고 한다. 친구는 윌에게 초대권을 보내줬다고 윌은 클라크에게 그걸 네게 줄테니 어머니랑 다녀오렴, 이라고 말한다. 클래식 공연에 한 번도 가본 적도 없으면서 루는 자신은 클래식 연주를 즐기지 못한다, 좋아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거절한다. 그때 윌은 루이자에게 지독하게 속물이라고 표현한다.


"당신만큼 지독한 속물은 처음 봤어요, 클라크"

"뭐예요? 내가?"

"혼자서 '난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고 정해놓고 온갖 경험들을 아예 막아놓고 있잖아요."

"하지만 진짜 아닌 걸요."

"어떻게 알아요? 아무것도 안 해보고, 아무 데도 안 가봤는데.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알 길이 없었는데?" -책속에서


번역본으로 먼저 읽었던 터라 '속물'이라는 단어가 귀에 꽂혔다. 이럴 때 쓰는 단어가 속물인건가?



'You're the most terrible snob, Clark.'

'What? Me?'

'You cut yourself off from all sorts of experiences because you tell yourself you are "not that sort of person".'

'But, I'm not.'

'How do you know? You've done nothing, been nowhere. How do you have the faintest idea what kind of person you are?' -p.205-206


snob 을 사전에서 찾아보닌 '고상한 체하는 사람', '속물' 이라고 되어있긴 하네. 


그런데 정말 저런 사람을 일상에서 자주 마주하게 된다. 해본 적 없으면서 그것을 단정하는 사람. 일전에 최재천교수가 공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면서 '알면 사랑하게 된다, 미워할 수 없게 된다'고 했는데. 나 역시 그 말에 동의한다. 경험하지 않고 모르는 채로는 싫다고 말하기도 쉽고 욕하기도 쉽다. 그러나 경험해보면 내가 단순히 가정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지곤 하는 거다. 간혹 '나는 그거 싫어'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해봤냐'고 물으면 '아니'라고 하는 경우를 마주하게 되는데 '안해보고 어떻게 알아?' 라고 되물으면 '내가 그걸 좋아할 리 없어'라고 하는 거다. 글쎄. 그럴까? 나는 사실 실생활에서 루이자처럼 말하는 사람에게 좀 짜증이 나고, 실생활에서는 이 책에서의 윌과 가까운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안해보고 어떻게 알아?


클래식은 이런 대화 혹은 경험의 대표적인 클리셰다. 미 비포 유에서도 클라크는 결국 윌에게 '너가 함께 간다면 내가 한 번 가보마' 하게 되어 생애 처음 클래식 공연에 가게 되고 감동에 젖어 어쩔 줄을 모른다. 아주 오래된 영화 <프리티 우먼>에서도 길거리에서 성을 팔던 여자 '줄리아 로버츠'는 재벌인 남자 '리처드 기어'가 데려간 오페라 공연에서 감동받아 눈물을 흘린다. 미 비포 유 에서도 언급되지만 피그말리온. 돈 많고 경험 많았던 남자들이 여자로 하여금 경험하게 해주고 새로운 감동에 눈을 뜨게 해준다. 식상하고 전형적이고 그야말로 클리셰이지만, 그런데 나는 이런 거 좋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어릴 때부터 모든걸 경험하며 살아갈 순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그 첫 스타트를 끊어 줘야 한다. 윌은 부유한 집에서 자랐고 모든 경험에 열려 있었다. 그러나 루이자에게는 한정된 공간이 주어졌고 또한 일찍부터 노동을 해야만 했다. 스무살 시절, 해외여행을 다녀온 뒤 뭔가 달라졌던 동창을 보고 루이자 역시 해외 여행을 계획해 비행기 티켓까지 끊었었지만, 그러니까 그 경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자신에게도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관찰해보고 싶었지만, 그러나 그 여행을 가기 전, 루이자는 타인에 의해 추락한다. 차츰 그 일이 언급되면서 루이자가 다른 사람의 몸을 기피하고 자신을 세상에 내놓지 않으려하고, 남자들에게 성희롱 당하지 않게끔 괴상한 옷으로 자신을 무장하려는 이유들이 나온다. 그러니까 지금의 루이자가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단정하게 된 이유는 남들보다 경험이 적어서이며 제한되기도 해서이지만, 또 일어나지 않아도 좋았을 일이 그녀에게 일어났었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들과 즐거이 어울려 놀다가 자신이 성폭력의 피해자가 되었던 경험은 루이자를 한 곳에 머무르게 만들었다. 



루이자에게 뭐가 더 나은지는 루이자 자신이 판단할 수 있을 테지만 가끔은 다른 사람들의 진심 어린 관심이 도움이 된다. 윌은 아직 그런 루이자의 트라우마를 알지 못한 채로 너 안해보고 어떻게 알어, 해봐, 라면서 권유해주고 루이자는 서서히 바뀐다. 이건 가족도 그리고 남자친구도 루이자에게 해주지 못했던 일이었다. 어쩌면 같은 제안을 다른 사람이 했다면 또다른 결과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합'이라는 건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루이자에게 끊임없이 운동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또 제안하기도 하는 남자친구가 있지만 그러나 루이자는 함께 운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윌과 함께 클래식 공연에 처음 가게 되고 거기에서 마음이 크게 움직이는 거다. 아, 프랑스 영화를 처음 본 것도 이십대 중반, 윌과 함께였다. 난 그런 영화 내 취향이 아니야, 라고 했다가 윌이 세상에, 한 번도 안봤다고? 하며 함께 보자고 했다가 너무 재미있게 보는 루이자를 마주하게 된 것. 어쩌면 클래식이어서 외국 영화여서 그랬을 수도 있고 어쩌면 윌이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어쩌면 '윌과 클래식'이어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루이자는 자신에게 자신이 쳐놨던 어떤 경계들을 이제 슬쩍슬쩍 넘는다. 어떤 사람들은 인생의 어떤 시기에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서 예상치 못하게 나의 회복 혹은 치유를 돕는다.



나에게도 물론 상처가 있고 트라우마가 있다. 그것은 여전히 나를 괴롭히고, 내 평생 이것이 완전히 치유될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말하지 않으면서도 다만 사람들이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 때 나를 이해해주길 바랐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생각도 가지고 있다. 내가 이런걸 알잖아, 내가 이런말을 할 때 나를 좀 이해해주며 안돼? 라는 생각을 때로는 속으로 한다. 내 상처는 어른이 되고난 후에 어떤 반응으로 내게 작동했고, 그것은 나를 오래 지배했다. 나는 어떤 걸 할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그런데 한 친구를 만났다. 어쩌다보니 나는 나에게 일어난 일을 그 친구에게 말하고 있었고, 친구는 내 말을 듣고 내게 한 마디 말을 해주었다. 그 말에 나는 엉엉 울었고, 그 후에 나는 나를 억압하던 어떤 것에서 자유로워졌다. 친구의 그 말을 듣기전보다 인생을 좀 더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내게 아무도 해주지 않았던 말이었지만 내가 누구에게도 그 일에 대해 말한 적 없기 때문에 들을 수 없는 것 역시 당연한 거였다. 그러나 그 뒤로 그 일에 대해 언급했을 때 그 친구처럼 말해준 사람이 없기도 했다. 그 친구여서 그리고 그 말이어서 내가 좀 자유로워진 건 분명하다. 나는 그 점에 대해 친구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네 덕분이라고.



미 비포 유에서 하필이면 남자 윌이 여자 루이자에게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해주고 자신을 둘러싼 경계를 허물게 해주지만, 그것이 반드시 이성 사이에서 그리고 연인(이 될 가능성을 품은) 사이에서 일어나는 건 아니다. 내게 일어났던 것처럼 동성의 친구로부터도 가능해지고 또 동성의 선후배에게서도 가능하다. 그리고 연인의 가능성이 없는 이성 사이에서도 물론 가능하다. 내가 인생에서 큰 축으로 변했다고 생각하는 그 말을, 나는 나와 같은 성별의 그러나 나보다 나이는 어린 친구로부터 들었다. 그 친구는 내가 잘못생각하고 내가 어린 나를 원망하며 살았다는 걸 알려주었고, 화나거나 슬픈 상황에서 웃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려주었다. 내 인생의 그 시점에서 그 친구를 만나 그 말을 들었기 때문에 나는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 안에는 하나의 그러나 그 사람만의 커다란 세계가 있다. 바깥에서 보기에 그것이 닫혀있고 좁은 것으로 보여도(내가 루이자를 그렇게 봤듯이) 그 안에는 무수히 많은 것들이 쌓여 견고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루이자에게 그 일이 있었고 그 일은 루이자를 그런 사람이 되게끔 했다. 그리고 인생의 이 시점에 윌이라는 사람을 만나 인생의 축과 방향이 달라지게 된다. 그건 윌에게도 마찬가지. 윌이 바라보는 방향은 '이것은 내 삶이 아니고 나는 살지 않는 걸 택할 것이다' 였고 그 방향이 변한 건 아니지만, 그러나 그가 죽음으로 가기 전에 그는 루이자를 부르고 루이자를 웃게 해주고 루이자라는 사람을 만나 그 시간들을 풍요롭게 보낼 수 있었다. 사람들은 타인을 만나 저마다의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고 그것은 반드시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사람들은 특별히 더 누구에게 필요했던 것 같다. 내가 필요한지도 모르는채로 필요했던 바로 그 사람이기도 하다. 그 사람은 가족일 수도 친구일 수도 연인일 수도 그리고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일 수도 있다. 인생에 있어서 그런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큰 축복일 것이다. 그래서,



윌 때문에 더 미치겠다. 그러니까 윌의 선택은 윌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함에는 변함이 없는데, 나는 이제 윌을 아끼는 사람1이 되어버린 거다. 다른 한 사람-애정을 품게된-과 농담을 하고, 네 안에 다른 네가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했던 윌. 그런 윌 때문에 내 세계가 달라져버린 루이자. 그걸 알기 때문에 미치겠다. 콘서트에 다녀온 후 차에서 내리기 전, 잠시만 이대로 있자, 빨간 드레스를 입고 함께 콘서트에 다녀온 남자로 잠깐만 있고 싶어, 라고 말하는 윌이라서 보내기가 너무 힘이 든다. 나는 이 영화를 두 번 보았고 책도 두번째 읽는데, 이만큼의 가슴 아픔은 원서와 함께 읽는 지금이 처음이다. 슬픔의 크기가 너무 달라졌다. 어제 문득 영화를 다시 보고 싶어졌는데 넷플릭스에 없는 거다. 유튜브로 들어가 콘서트신을 검색해 보았다. 연관되어 나오는 윌의 마지막 장면도 보았다. 루이자와 삶에서 나누는 마지막 대화 신에서 미칠듯한 기분이 되었다. 윌의 선택을 존중한다고,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머릿속으로 생각했건만, 영상을 보는 나는 '어떻게 보내, 못 보내, 보낼 수 없어' 라고 울부짖고 싶은 심정이 되는 거다. 아 안돼, 안된다, 안돼! 벌써부터 이 책을 완독할 시점 펑펑 울 내가 그려진다.

살아달라고 말하고 싶다. 살아달라고. 그리고 살아줬으면 좋겠다. 




어제 알라딘에서 이메일을 받았다. 드디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신간이 번역되어 나왔다는 것. 오, 윌리엄!!















원서를 가진 지는 오래되었는데 아직 읽지 못했다. 번역본 나오면 읽어야지 생각하며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제 나왔어. 만세!!



오늘 아침 출근길에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도서인 포르노랜드를 읽으면서 왔는데, 플레이보이를 창간한 '휴 헤프너'의 이야기가 계속됐다. 그가 소위 '바니걸'이라고 불리는 젊은 여성들과 그의 큰 저택에서 함께 사는게 텔레비젼에서 리얼리티 쇼? 뭐 이런걸로 보여지기도 했다는데, 그 바니걸 중 한 명, 플레이보이 맨션에 살았던 여성의 책이 있다고 하더라.



헤프너의 전 '걸프렌즈'였던 이자벨라 세인트제임스는 자신의 저서 『버니 이야기Bunny Tales』를 통해 실제 플레이보이 맨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언급했다. 헤프너는 피임 없이 수많은 여성과 돌아가며 섹스하려 했지만, 아무리 많은 여자에게 삽입한다 한들 포르노를 보면서 자위해야만 오르가슴에 도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세인트제임스는 헤프너와 섹스하기를 원치 않는 여자들이 많았지만, "그건 암묵적인 규칙의 일부였고, 흡사 우리가 누린 모든 것의 대가처럼 느껴졌다"고 밝혔다. 물론 이런 장면에 쇼에 나올 리가 없었다. -《포르노랜드》, 게일 다인스, p.89



나는 이자벨라 세인트제임스의 책을 검색해보았다. 그럴 줄 알았지만 역시나 번역본은 없었고 원서만 검색되더라.
















전자책을 다운 받아 앞에 프롤로그만 살짝 읽어봤다. 세인트제임스는 프롤로그에서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를 밝히고 있었다.


어느날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다가 자신을 쳐다보는 유명한 남자 배우와 눈이 마주쳤고, 그는 그녀를 줄곧 보고 있었다며 다음날 초대한거다. 그렇게 그 유명한 남자 배우와 대화를 나누고 즐거운 시간을 가졌는데, 그녀가 플레이보이 맨션에서 살았다는 걸 알고는 그가 분노했다는 거다. 세인트제임스는 이 점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이 자유로운 나라의 대통령 클린턴은 인턴 직원과 업무장소에서 부적절한 일을 저질렀고, 유명한 배우 휴 그랜트는 매춘을 하다 발각되었는데 사람들은 그냥 다 넘겼다. 그런데 왜 플레이보이 맨션에서 살았었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판단하냐,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왜 그것만으로 판단하냐, 안되겠다 책을 써야겠다 생각한 것. 그러자 그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 남자배우는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말했다고 한다. 세인트제임스는 아니 쓸거야, 그리고 그녀는 말하고 있다. 자신에 대한 판단은 이 책을 읽는 여러분이 직접 하라고. 



Did I really ruin my life? You be the judge. -《Bunny Tales: Behind Closed Doors at the Playboy Mansion》, Izabella St. James, p.13



이번호 시사인 장정일의 독서일기 에서는 세 명의 철학자에 대한 얘기가 실렸다. 하나는 최근에 알라딘에서도 엄청 핫했던 한나 아렌트의 평전이었고 다른 하나는 하버마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키르케고르 평전이었다. 

















나는 장정일의 글을 읽다가 특히 키르케고르의 평전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클레어 칼라일의 <마음의 철학자키르케고르 평전>(사월의책, 2022)을 보면 키르케고르로 하여금 종교적으로 산다는 것을 평생의 문제로 씨름하게 만든 것은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어느 이야기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외동아들 이삭을 바칠 것을 요구했고 아브라함은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올라갔다. 키르케고르는이 이야기에서 엄청난 철학적 교훈을 이끌어냈으며 "아브라함의 칠흑 같은수수께끼에 매혹되었다". 키르케고르는 저 일화를 이성에 대한 신앙의 우위로 해석하는 목사들이나, 아브라함의 행위를 도덕 법칙에 반하는 것으로 보고 이삭을 희생시키라는 목소리를 악마의 속임수거나 미망으로 추론해야 한다는칸트를 함께 물리쳐야 했다. 그는, 도덕법칙은 시민적 제도를 대표할 뿐이며 칸트는 신을 도덕적 삶으로 축소시켰다고 말한다(실제로 교회나 절이 뭐 필요하냐면서 "선하게 살면 그게 종교다"라고 믿는 모범적인 시민이 있다).

목사들이 저 일화에서 신에 대한 인간의 무조건적인 굴복을 읽어낸 것과 달리, 키르케고르는 공포를 강조한다. 신앙은 나의 실존을 파괴할 수도 있고 범죄자로 만들 수도 있다. 신앙은 이성적이고 윤리적인 세속의 휴머니즘과 공포 사이의 도약에 의해서만 얻어진다. -<시사인 제788호>, 장정일의 독서일기 中, p.66


아마 기독교가 아닌 사람도 그리고 성경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도 아버지가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던 저 얘기를 다들 알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 따른 각자의 생각이나 느낌이 있을 것이고. 저 이야기는 분명 강렬하고 이승우도 자신의 책을 통해 저 이야기를 자신의 시각으로 해석해 쓰기도 했다. 나에게도 아주 흥미로운 부분인데 나는 제물로 바쳐질 아들의 입장에 대해 자꾸 생각해보게 되는거다. 내 아버지가 나를 제물로 바친다는 것에 대해 나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그런 참에 키르케고르가 저 부분에 대해 얘기한다고 하니 너무 궁금해지는 거다. 사야겠다.



그런 한편 하버마스 평전에 대해서는 하버마스 평전을 사고 싶은게 아니라 칸트가 더 궁금해졌다. 그러니까, 이런 부분이 장정일의 독서일기에 실려있다.



하버마스가 제시하는 것은 의사소통적 합리성이다. 서구 철학은 시작부터 이분법적이고 위계적(플라톤)이면서 주관성(데카르트)과 자기동일성(헤겔)을 받들었다. 근대적 도덕 이론을 정초한 칸트의 정언명령 제1정식은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여겨질 수 있도록 행위하라"인데, 하버마스는 칸트가 선험적인 선(善) 논리로부터 도덕을 구출하고, 이를 규범 검사 절차로 재구상한 점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저 정식에는 고독한 개인과 독백적 절차밖에 없다고 비판한다. -<시사인 제788호>, 장정일의 독서일기 中, p.67



아니, 칸트가 맞는말 했구먼 왜... 라고 반응함과 동시에 나는 '저 정식에는 고독한 개인과 독백적 절차밖에 없다'는 문장에 끌렸다. 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그래서 나의 외로움과 고독을 깊이 깊이 받아들이고 있다. 아, 칸트여..



트윗을 통해서는 이 책을 알게 됐다.
















아... 사실 이 페이퍼가 이렇게나 길어지게 된 건 다 이 책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책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면서 '아니 박테리아에서 바흐라니' 라고 놀라웠던 거다. 박테리아랑 바흐랑 무슨 상관이 있길래 박테리아랑 바흐를 언급하면서 무려 마음에 대해 얘기한다는 걸까. 나는 궁금해서 이 책을 장바구니에 넣었고, 그러다 바흐.. 나는 클래식을 모르는데.. 생각하게 되었고, 클래식, 이라고 하니까 어제 읽었던 미 비포 유의 클래식 장면이 생각난 거였는데, 페이퍼를 작성하려고 똭- 글쓰기 페이지를 열었던 시점에서 바로 그 생각이 주루룩 저기 맨 위에 쏟아져 나온 것이다. 이 페이퍼의 원래 목적은 사고 싶은 책 언급하는 거였는데, 윌 살아주길 바라... 가 되어버리게 된 것. 흐미......... 삶은, 



뭘까?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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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2-10-20 12: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한무더기 주문하셨다는 거죠? ㅋㅋ 원서도 사셨고요?? ㅋㅋㅋ
누군가는 스타트를 끊어줘야 한다, 는 말씀에 공감이 가네요. 중산층 아이들이 어른을 잘 대할 줄 알고 권한에 대한 감각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아무리 똑똑해도 누리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은 뭔가를 요구하는 걸 잘 못하고요.. 보육원에서 자란 아이들이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습득하는 경제관념이랄까, 돈에 대한 인식을 습득하지 못해서 독립 후 고생한단 얘기도 봤었는데,, 여러가지 문을 열어주는 어른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다락방 2022-10-20 14:48   좋아요 2 | URL
으하하 아직 사지는 않았고요, 다음 구매에 포함할 책들입니다. 다음 구매가 그렇다면 언제이냐? 안알랴줌..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오늘일지 일주일 뒤일지 내년일지...으하하하하하하하하.

저도 문화자본을 엄청나게 갖고 태어난 사람과 같이 여행해본 적이 있는데요 저보다 나이가 훨씬 어린 친구였는데도 저보다 훨씬 아는 것도 많고 즐길줄 아는 것도 많더라고요. 어릴 때 더 많은 것들을 접하면 그만큼 시야가 더 넓어지잖아요. 자라면서 누구나 자연스레 모든걸 경험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요. 저는 제가 너무 많은 것들을 모르는 채로 살아왔다는 걸 알고 그래서 제 스스로가 저에게 해주려고 하는 편입니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열린 마음이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런데 열린 마음이라는 것도 노력해야 가질 수 있는 것 같고요. 많은 경험이 반드시 필요한가 혹은 선인가는 사람들마다 좀 가치관이 다르겠지만, 저는 이왕 태어난 인생 좀 많은 걸 경험하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저 뿐만 아니라 사람들 모두가요. 그런데 저희 아빠는 ‘그걸 왜 꼭 경험해봐야 하냐..‘고 하시는 입장입니다. 하하하하하.

성인이 되어서도 그리고 나이 많은 성인이 되어서도 누군가가 문을 열어줘야만 보게 되는 세상이 있는 것 같아요. 저도 일정 부분 누군가가 문을 열어주었기에 어떤 것들이 가능해졌을 것이고 제가 또 누군가의 문을 열어주기도 하겠죠. 제가 다른 이들에게 문을 열어주기 위해서는 제가 열 수 있는 문이 일단 많아야 하는 것 같아요. 열심히 살겠습니다!!

- 2022-10-20 19: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맙소사!! 방금 뒤메질의 최후를 댓글달고 왔는데 여기서 바흐와 바이러스와 키에르케고르에 관심을 가져하는 악의 게으름 철학자를 만난다.그러니까 막 사제낀거 후회하긴 하는 데, 그래도 살 거라는 거죠? 책?
- 저, 그거 생각났어요. 우리 여행 갔을 때 읽은 책. 만남 이라는 모험. 한 사람을 만나 인연을 이어간다는 것은 그를 구성하고 있는 풍경 총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뭐 어쩌고 저쩌고. 했던.
마음을 열고 사람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그것들을 공유하고... 각자의 방식 대로 성장한다는 거 되게 아름답게 느껴지네요. (그리고 이별까지도요. 아. 이별 알고 있어서 마음이 찢어지지만. 나는 모든 만남의 이별을 아는 그런 으른이다.) 와. 미비포유. 넘나 좋은 책.

다락방 2022-10-21 09:59   좋아요 0 | URL
오늘 아침에 읽은 부분에서는 루이자의 부모님이 윌에게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루이자가 너와 함께하고 나서부터 확실히 변했다 성장했다고요.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나 성장을 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건 너무 좋은 변화잖아요. 결코 쉽지 않은. 이 사람 덕분에 비로소 내가 이만큼까지 올 수 있었다, 더 나아갈 수 있다 라는 자각은 얼마나 근사한지요. 궁극적으로 우리는 그런 관계가 되어주고 또 추구해야 하겠지만, 그러나 살다보면 만나게 되는 많은 사람들이 빡치게 하고 뒤로 돌아가게 만들고 움츠리게 만들곤 하죠. 내 인생의 어느 시점에 누구를 만나느냐는 내 인생에 정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나쁘다는 판단이 든다면 질질 끌지 말고 돌아서야 할 것 같아요. 물귀신처럼 나를 물고 늘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미 비포 유 읽기가 너무 재미있는데 윌에게 너무 정이 들어버려서, 결말을 이미 알고 있는 너는 지금 너무나 슬픕니다. ㅠㅠ

책읽는나무 2022-10-20 20: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젠 책을 살거라고 미리 예고를 하시는군요?ㅋㅋㅋ
그래요!! 그러고보니 오늘은 월요일이 아니잖아요^^
이자벨라 세인트 제임스라는 여자 책이 좀 궁금하긴 합니다. 이미 어떤 내용일지 예상은 됩니다만...ㅜㅜ
<포르노랜드> 읽으면서 어이상실! 정신혼미!
가슴답답! 부들부들!! 온갖 감정들이 밀려왔었네요.
어쨌거나 현재 6장 들어갑니다^^

다락방 2022-10-21 10:00   좋아요 0 | URL
ㅋㅋ 제가 일단 책 구매를 미루고 미루고 미루고 있습니다. 좀 더 미뤄보려고요. 일단 10월은 벗어나자... 생각하고 있는데 잘 되겠죠? ㅋㅋ
이자벨라 세인트제임스 책은 국내에 번역될 가능성이 1도 없을 것 같아요. 저도 궁금한데 말예요. 음, 짐작해보자면 그러나, 제가 생각하는 여성주의 적인 책은 아닐 것 같아요.

6장이라니, 많이 읽으셨네요, 책나무 님! 저는 열심히 달려가야 합니다. 빨리 끝내고 다른 거 읽고 싶어요! ㅠㅠ

mini74 2022-10-20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비포유 영화 봤어요. 원작하고 조금 다르던데요. 울었어요 ㅎㅎ 영화보고 우는 거 오랜만이에요. ~ 하버마스 ㅎㅎ 하면 전 오규원의 시만 동동 떠오르네요 *^^*

다락방 2022-10-21 10:01   좋아요 0 | URL
미 비포 유 를 저는 책으로 먼저 보고 그 다음에 영화를 봤거든요. 남주인공이 영화에서 너무 잘생겨서.. 지금 책을 다시 읽는 시점에서 윌을 주인공의 얼굴 떠올리며 읽게 되더라고요. 문제는... 그래서 더 정이 들어버리는 지도 모르겠다는...하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실제의 얼굴을 대입해버리게 되니까 아주 미칠것 같은 마음이 됩니다. 흑흑 ㅠㅠ

바람돌이 2022-10-20 21: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포르노 랜드 읽기가 점점 두려워지는..... ㅎㅎ 바흐에서 클래식으로 미비포유로 생각의 흐름에 따른 글쓰기 좋아요. ^^
오 윌리엄을 읽기 위해서 저는 루시바턴부터 읽어야겠다는.....
그래도 하버마스와 키에르케고르는 저는 하나도 안 궁금합니다. 계속 안 궁금할테야요. ㅎㅎ


다락방 2022-10-21 10:03   좋아요 1 | URL
바람돌이 님, 포르노랜드 읽다가 여러번 책을 던져버리시게 될지도 모릅니다. 차마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악의 세계가 거기에 있고요, 그런데 그 세계가 바로 우리가 사는 세계라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입니다. 앞으로 읽게될 바람돌이 님을 위해... 화이팅 전합니다.

오 윌리엄 읽을 생각에 너무 신나요!! >.<
 















'게일 다인스'의 《포르노랜드》를 처음 읽었던 건 2020년 이었다. 이번에 읽으면 재독인건데 두 번째 읽는 것이니만큼 나는 내가 덜 힘들거라고 생각했건만, 웬걸, 펼치자마자 수시로 책장을 덮어야했다. 글로 묘사된 것만 읽어도 포르노의 장면장면 들은 역하고 끔찍한데, 그걸 영상으로 보는 남자들은.. 안녕한가? 글로 묘사된 일부만 조금 읽어도 멘탈이 찢어질 것 같은데, 그걸 영상으로 보는 남자들의 멘탈은 정말로, 괜찮은가? 그들의 일부는 분명히 파괴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어쩔 수 없이 들었다. 아니, 나는 결코 파괴되지 않아, 포르노는 판타지야, 그건 우리가 그저 재미삼아 볼 뿐이라는 말들은, 아마도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없기 때문에 들여다볼 수 없기 때문에 하는 말들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얼마나 파괴되어 있는지 혹은 무너져 있는지 모르는 채로 그들은 포르노를 현실에서 답습하고 있으니까. 


우선 게일 다인스는 이 책에서 주로 '곤조 포르노'에 대해 다룬다고 밝히고 시작한다. 잠깐 설명을 보자.



미국 주류 포르노는 크게 두 가지, 장편 포르노와 곤조 포르노로 분류된다. 플롯 중심의 장편과는 달리 곤조는 성행위만 주로 집중해서 보여주며 폭력성이 더 짙다. -p.20


그러나 문제는 대부분의 인터넷 주류 포르노가 곤조 포르노화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들과 기성세대 들은 지금의 포르노가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를 짐작도 못하고 그저 누드인채로 섹스하는 영화이겠지 생각하지만, 아닙니다. 아니다. 나는 SNS에서 뜻하지 않게 무방비상태로 포르노에 노출된 적이 있다. 그러니까 포르노 사이트로 유도하는 광고였던 것 같은데 보자마자 숨이 막혔더랬다. 남자들이 무더기로 여자 한 명을 마치 노예처럼 다루면서 학대하고 있었다. 여자의 얼굴에서는 정액이 흘러내리고 흐느끼고 있었다. 이게 내가 검색해서 본 것도 아니고 부러 찾아본 것도 아니고, 그저 트윗을 보다가 우연히 맞닥뜨리게 된 짧은 영상인데, 이걸 만약 굳이 찾아보고자 한다면, 그래서 검색어로 넣는다면 도대체 어떤 영상들이 얼만큼 펼쳐질까? 물론 게일 다인스는 검색어 하나를 넣었을 때 나오는 포르노 사이트와 그에 대한 설명들 그리고 짧은 예고편들에 대해 이 책에서 처음 상세하게 설명해준다. 아, 물론 일부만. 그것이 아주 일부임에도 그리고 글로만 읽었어도 정말로 온 몸에 힘이 빠진다. 만약 남자들이 그것이 타인과의 교류에 절대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그저 본인의 쾌감을 위해 보는 거라고 말한다면, 그렇다고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그러니까, 쾌감 혹은 쾌락을 위해서 그런 영상을 보는 멘탈은, 괜찮은거야? 치료가 필요해 보인다.




'데릭 젠슨'은 자신의 책 《문명과 혐오》에서 잠깐동안 포르노를 보았던 경험에 대해 적고 있다.





포르노는 나의 무의식적인 공상까지 바꾸어놓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나의 판타지는 대화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즉 어떤 여성을 봤는데 관심이 간다면, 즉시 ‘저 여자에게는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까?‘하고 생각했다. 어떤 창조적이고 열띤 대화를 할 수 있을지를 상상하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포르노를 보았을 뿐인데도, 가끔 여자를 보면 저 여자의 음모는 무슨 색일까, 성기는 어떤 모양일까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런 건 질색이다. 나는 예전 방식으로 돌아가고 싶다. 곧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 《문명과 혐오》, 데릭 젠슨, P179







짧은 시간 동안 본 포르노를 통해서도 여자를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되는 자신을 데릭 젠슨은 마주했다. 그렇다면 수시로 보는 남자들은 여자를 도대체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을까? 데릭 젠슨은 포르노를 보는 남자친구에 대해 얘기했던 한 여성과의 일화도 적어두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어떤 여자가 해준 이야기였다. 자기랑 같이 사는 남자가 자기한테 점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종종 밤에도 침실에 있다 말고 서재로 갔다. 여자는 그가 일을 하러 가나 보다 했는데 어느 날 따라가보니 그가 포르노를 보고 있었다. 화면에 있는 여자는 "나와 비슷해 보였다"고 그 여자는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 여자와 경쟁해서 이길 방법이 없었어. 그 여자는 말을 안 하니까." 여자는 관계를 끝냈다. 관계라 할 만한 것이 남아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 《문명과 혐오》, 데릭 젠슨, P158



게일 다인스는 포르노가 확대되기 전에 '휴 헤프너'의 <플레이보이>가 있었음을 언급한다. 남자들에게 고급진 라이프 스타일을 선택하라고 강요하면서 그러나 그 안에 여성의 누드를 끼워 팔던 잡지. 플레이보이의 메시지는 남자들에게 꽃뱀을 조심하라고, 결혼이라는 족쇄에 매이지 말고 아내 한 명을 거느리는 대신 젊고 아름다운 여자 여러명을 거느리라고 얘기하고 있었다. 1950년대, 가족을 찬양하던 미국에서. 전국적인 메세지는 여자에게 결혼하라고 하고 있었고 가정에 충실하라 하고 있었고 가족이 최고라고 말하고 있었는데, 플레이보이는 남자들아 싱글로 살면서 여러 여자를 거느리렴, 했던 거다. 




이렇듯 대중 심리학자들이 경제계가 미국 남성을 "하찮은 남자"로 전락시켰다며 비판하는 동안,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을 수행한 여자들은 미국의 남성성을 위협하는 근본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에런라이크는 "경제계를 이끄는 자들은 냉전 시대 미국에서 비판의 대사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지목하기 쉽고 받아들일 만한 악역은 여자들이었다고 주장한다. 미국 여성은 욕심 많고, 교활하고, 게으르게 묘사되면서 남자들을 지나치게 길들여 남성성을 거세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P.59



자, 그러니까 우리는 이 흐름을 짐작할 수 있다. 휴 헤프너와 그 이하(든 뭐든)는, 여자들은 남자들 위에 군림하려 하고 세상을 지배하려 하고 돈을 뜯어내려 하고(일하는 건 남잔데!) 남성에게 위협적이야, 그러니까 우리의 남성성을 살리고 남성의 삶을 즐기기 위해서라도 젊고 예쁜 여러 여자들을 거느리라고, 그리고 그녀들 위에 군림하자고! 라고 진행됐던 것. 결국 플레이보이라는 세미 포르노 잡지는 그저 벗은 여자와 그 벗은 여자들과 어떻게 섹스할 것인지만 슬쩍 슬쩍 보여줬다가 지금의 곤조 포르노까지 오게 된것이다. 신체에 훼손이 올 때까지 여자를 성적으로 학대하는 영상이, 여자의 감정이나 기분 혹은 욕망과는 전혀 상관없이 본인의 성기로 무조건 힘차게 박아대기만 하는 영상이. 

자극적인 말과 영상은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생각을 하지 못하는 시간이 쌓이고 길어질수록 생각을 하지 않게 되고 노출되는 매체에 내 몸을 맡기는 일은 자연스레 일어난다. 둠칫 두둠칫. 휴 헤프너의 생각과 시도는 남성들로 하여금 플레이보이를 사게 만들었고 여자들을 무릎 꿇(고 성기를 핥)게 만들었으며 조금 더 심한 영상과 조금 더 심한 자극을 찾도록 했다. 그래서 사고를 멈추면 안된다. 생각을 멈추는 순간 우리는 누군가의 지배하에 들어가기가 쉽다. 휴 헤프너가 지배한 세계에 그리고 포르노가 지배하는 세계는 아주 쉽게 남자들을 점령했다. 그렇다면 남자들만 점령해서 여자들은 자유로워졌냐 하면, 그게 그럴 수가 없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사랑을 받고 또 주고 싶은 동물이다. 그런 과정에서 성인 여성과 성인 남성이 만나 좋은 감정으로 관계를 시작하려고 했고 또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남자가 나에게 원하는 건 날 무릎 꿇게 하고 내 얼굴에 정액을 싸버리는 일이라고 한다. 그런 포르노 영상을 한 번도 본 적 없던 나는 혼란속으로 빠져든다. 이거 기분 나쁜데, 그런데 내버려둬야 하나? 이게 이 사람을 기분 좋게 하나? 이게.. 사랑이라고? 섹스할 때마다 매번 여기까지는, 이만큼은.. 하다가 어느 순간 나는 포르노속 여성들이 처한 상황에 놓이게 되고 포르노는 그대로 현실 세계로 넘어와 내 세계가 된다. 이 책의 제목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적절하다. 내가 포르노를 보지 않아도 내가 이성애 연애를 하고 있다면 나는 포르노 세상을 산다. 아니, 내가 이성애 연애를 하지 않고 있어도 포르노 세상을 산다. 모든 광고와 영상은 포르노속 여성들을 재현하고 재연하고 있으니까. 여자들은 어느틈에 섹시한 것이 최상의 찬사인듯 하며 자신을 꾸민다. 이건 내 자유야, 라며 남성의 자신에 대한 욕망을 욕망하게 된다.



『플레이보이』가 가판대에 등장한 때는 여성을 혐오하고 가족을 찬양하던 바로 이 시기였다. 1950년대의 테마를 취사 선택한 『플레이보이』편집자들은 창간호에서부터 싱글 여자를 『플레이보이』독자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규정했다. 싱글 여자가 남자에게 결혼이라는 족쇄를 채우고 재정적 출혈을 일으킬 기회를 노린다는 이유에서였다. -P.60


잘 차려입고 세련된 이 남자는 "감정적으로 얽히지 않고 여성이 제공해야 하는 모든 쾌락을 즐길"줄 안다. 『플레이보이』는 플레이보이를 꿈꾸는 남자들에게 매뉴얼이 되어 주고자 했는데, 물질적 빈곤(대공황과 2차 대전)과 성보수주의의 시대에 나고 자란 이 남자들이 상품과 여성을 소비하는 씀씀이 큰 고급품 소비자가 되려면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P.62



그러니까 이게 남자들만의 문제가 될 수 없다. 자, 씀씀이 크게 여성을 소비하자는 것이 남자들의 주장이고 그렇게 살기 위해서라면, 소비되는 여성이 있어야 한다. 휴 헤프너와 그의 일당들이 주장했던 바는 남성들만 너무 일한다는 거였고 여자들은 집에 머물면서 돈만 뜯어 먹는다는 거였는데, 그렇다면 그 시절, 왜 그래야 했는데? 여자들에게도 남자들만큼의 일자리가 주어지고 함께 일할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다 괜찮았잖아. 애초에 여자들에게 집에 머물라고 그게 여자들의 할 일이라고 말한게 누군데. 그래놓고서 이제는 여자들이 집에 머문다고 지랄들이야. 자, 여러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내가 얘기해줄게 잘 들어봐요. 1953년 휴 헤프너는 플레이보이를 창간했다. 1963년에는 누가 뭘 썼을까?



베티 프리단이《여성성의 신화》를 썼다!! 소름돋지 않나요? 휴 헤프너가 여자들은 일하지도 않으면서 남자들 돈이나 뜯어 먹는다! 하고 있는데, 베티 프리단은, 집안에 있는 여성들이 이름붙일 수 없는 문제에 휘둘리고 있다고 얘기했다고!!!!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문제를 느낀 여성들은 결혼 생활이나 자기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여성들은 자기 생활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부엌 바닥에 윤을 내면서 불가사의한 성취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도대체 자기는 어떻게 된 여성이란 말인가? 그런 여성은 자기 불만을 인정하는 행동을 너무 부끄러워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같은 불만을 지니고 있는지 결코 알 수 없었다. 남편에게 말해보려고 애썼지만 남편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조차도 정말로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15년 넘게 미국 여성들은 섹스보다 이 문제를 이야기하는 게 훨씬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신과 의사들조차 이런 증상에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많은 여성들이 그랬듯이 정신과 의사에게 도움을 구하러 간 어느 여성은 "무척 수치스러워요" 또는 "전 절망적일 정도로 신경질적이에요"라고 말했다. 교외의 어느 정신과 의사는 불안해하며 말했다. "요새 여자들이 뭐가 문제인지 통 모르겠어요. 우연찮게도 환자가 대부분 여성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알겠어요. 성적인 문제는 아니라는 것도 알겠는데……." 그러나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는 여성들은 대체로 정신과 의사에게 가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계속 되뇌었다. "정말 문제될 게 없어. 아무 문제도 없단 말이야."

1959년 4월의 어느 날 아침, 나는 뉴욕에서 15마일 떨어진 교외의 새 주택가에서 주부 네 명과 커피를 마시다가 아이가 넷 있는 엄마가 절망적인 어조로 조용히 '그 문제'를 언급하는 것을 들었다. 나머지 부인들은 그가 남편이나 아이들 또는 가정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내 알아차렸다. 그 자리에 있던 여성들은 자신들이 모두 똑같은 문제, 설명할 수도 없는 그 문제를 같이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갑작스레 깨달았다. 그들은 주저하면서도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아이들을 보육원에서 데려와서 낮잠을 재운 두 명은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순수한 안도감에 울음을 터뜨렸다. -《여성성의 신화》, 베티 프리단, p.67-68




결혼하고 남편이 돈 벌어오기를 기다리면서 집안일을 하는 것이 여성들에게 정말 끔찍했다고, 그게 여성들을 괴롭혔다고 여자들은 이미 깨닫고 말하고 있었다. 다만 남자들은 그 점에 대해 알려고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을 뿐이지. 



휴 헤프너가 남성들을 자신의 뜻대로 계몽(?)시키기 위해 주장했던 모든 것들은 읽을 때마다 '백래시네' 라고 중얼거리게 만들었다. 여성들을 '소비하기' 위한 백래시, 여성들을 '기죽이기 위한' 백래시. 그러나 그보다 더 크게는, 자신이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한 백래시. 

휴 헤프너는 말했다. 결혼한 남성은 여성에게 종속되는 거라고 여자들에게 돈을 뜯긴다고. 그러니 가정으로 들어가려 하지 말고 젊고 예쁜 여자들을 여럿 거느리는 삶을 살라고.



그리고 아, 우리의 '수전 팔루디'는 휴 헤프너가 주장한 바가 모두 틀렸다는 것을 1991년 《백래시》에서 밝혀주었다.
















미시건 대학교 사회연구소 Institute for Social Research에서 남성의 정신 건강 변화를 추적하는 로널드 케슬러 Ronald Kessler는 이렇게 말한다 "실제로 돌아가는 상황을 들여다보면 싱글 여성으로 지내는 게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 떠들어 대는 모든 활동들은 대단히 황당무계해 보입니다. 여기서 가장 악전고투하는 건 싱글 남성들이에요. 남성이 결혼을 하면 정신 건강이 크게 향상되죠. -《백래시》, 수전 팔루디, p.71


실제 싱글 남성들은 기혼 남성들보다 시무룩하고 소극적이며 혐오증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백래시》, 수전 팔루디, p.71


싱글 남성들은 싱글 여성에 비해 숱한 정신 건강상의 문제로 힘들어할 가능성이 두 배 더 높다. 더 우울해하고, 소극적이며, 신경쇠약을 겪을 가능성이 높고, 기절에서 불면증에 이르기까지 온갖 심리적 고난의 증상에 시달릴 공산이 크다. 한 연구에서는 싱글 남성의 3분의 1이 중증 신경증에서 높은 수치를 기록한 반면, 싱글 여성의 경우는 겨우 4퍼센트 뿐이었다. -《백래시》, 수전 팔루디, p.72


여성의 우울증에 대한 모든 문헌을 검토하고 유전학에서부터 월경 전 증후군, 피임약 등 다양한 요인들을 테스트해 본 저명한 정신 건강 연구자 제럴드 클러먼 Gerald Kleman과 미르나 와이즈먼Myrna Weissman은 여성 우울증에는 두 가지 큰 원인밖에 없음을 확인했다. 그것은 바로 낮은 사회적 지위와 결혼이었다. -《백래시》, 수전 팔루디, p.97


문학 비평가 샌드라 길버트Sandra M. Gilbert와 수전 구바Susan Gubar가 전후 시대에 대해 논평한 것처럼 "뇌를 써서 돈을 버는 여성들이 늘어갈수록 소설, 연극, 시에서 여성을 육체밖에 없는 존재로 재현하는 남성들이 늘어났다." -《백래시》, 수전 팔루디, p.118



휴 헤프너가 한 짓은 휴 헤프너에게 가장 큰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플레이보이 는 날개돋힌 듯 팔렸으니까. 고급진 라이프를 자기것이 될거라 착각했던 남자들은 휴 헤프너에게 재정적 도움을 주었다. 소설 몇 개 끼워 넣으면서 고급 잡지인척, 고급 라이프스타일 파는 척, 그는 여성을 소비하게 만들었다. 지금은 없어진 강간 모의 사이트 소라넷도 성인 소설을 연재했더랬다. 소라넷에 소설을 연재했던 사람들은 '그러나 나는 강간 모의는 하지 않았는 걸' 하고 자유로울까? 휴 헤프너는 『뉴요커New Yorker』편집자였던 콩트 스펙토스키를 고용해 플레이보이의 문학란을 키우고자 했고 콩트 는 그런 능력을 가진 자였지만, 그러나 그는 잡지의 성적인 콘텐츠를 불편해하며 휴 헤프너와 자주 충돌했다. 소라넷에서 소설을 연재하던 남자들은 결국 소라넷의 컨텐츠가 불편했을까? 소라넷에서 소설 연재했던 걸 자랑스런 이력인양 삼는 이도 있던데? 포르노를 야한 동영상이라며 그걸 보는 내가 쿨하고 성에 개방적인 거라고 살다가 멘탈 이미 찢어진 걸 알아차리지 못하는 수가 있다. 대부분 그렇다. 나는 포르노에 뇌가 절여지는 남자들이야말로 악으로 귀결되는 삶을 살게 된다고 생각한다. 생각하지 않음, 애쓰지 않음. 무지와 게으름. 이에 따른 욕망의 실현은 악이다. 



1953년에 휴 헤프너가 플레이보이를 만들어 떼돈을 벌고 1963년 베티 프리단이 여성성의 신화를 쓰고 1991년 수전 팔루디가 백래시를 쓰고 2011년 게일 다인스가 포르노랜드를 써서 휴 헤프너를 꼬집는다. 

이 세상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자, 더 읽어보겠다.

2020년에 포르노랜드 읽고 썼던 글들과 혹은 관련된 글들을 덧붙여둔다.


《포르노랜드》그것이 정말 당신을 위해서인가? 


《포르노랜드》우리가 살고 있는 포르노랜드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아무튼 이런 교감이 미치도록 좋다 


정작 봐야할 놈들은 안보겠지. 


《포르노에 도전한다》only words 


[포르노그래피] 남자들은 그만 말하고 그만 써야 한다. 

폴댄스는 이제 매우 대중적인 스포츠가 되었다. 메릴랜드 대학교 캠퍼스에서는 학생들이 포르노 영화를 상영했고, 인디애나 대학교에서는 포르노 배우이자 감독인 조애나 에인절Joanna Angel을 섹슈얼리티 강의의 연사로 초빙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할 얘기는 많지만, 이들 사례만으로도 포르노가 우리의 일상에 얼마나 깊게 스며들어 있는지, 또 굳이 언급하기도 새삼스러울 만큼 빠른 속도로 우리 삶의 평범한 일부가 되어가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중대한 질문을 하나 던지자면, 이러한 포화 상태가 우리의 문화, 세규얼리티, 성역할에 관한 인식,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아무도 확신할 수 없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현재 대대적인 사회 실험이 진행 중이고, 그 실험실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며, 실험에 참여하겠다고 동의하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그 영향이 미칠 것이다. - P17

나와 대화를 나눈 여자 대학생들은 대부분 곤조 포르노를 본 적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곤조는 점점 더 그들의 섹슈얼리티를 잠식하고 있다. 남자 파트너가 포르노 섹스를 그들의 몸에 시도해 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섹스 파트너가 항문성교를 강요하거나, 얼굴에 사정하고 싶어 하거나, 포르노를 섹스 보조용으로 이용할 때마다, 이 여자들은 포르노 문화의 최전방에 서게 된다. 이들 중 몇몇은 항복하고, 일부는 협상하며, 다수는 자신의 섹스, 데이트, 결혼 상대인 남자가 왜 항상 성적 한계선을 넘어서려고 하는지 혼란스러워한다. - P22

주류 잡지, 포르노 업계, 심지어는 일부 페미니스트조차 이런 변화를 두고 우리 사회가 점점 더 성적으로 자유로워지고 있다는 증거라며 축배를 드는 동안, 나와 대화를 나누는 많은 여학생들은 그 축제를 즐기지 못한다. 그들은 압박받고, 교묘하게 조종당하고, 획일화된 모습을 따르도록 강요받는다고 느낀다. 이들이 만나는 남자는 포르노 섹스를 기대한다. 그것은 유대감도 친밀함도 없이 익명으로 전개되는 섹스이며, 그것을 얻지 못한 남자는 그저 다른 여자를 찾아 나설 뿐이다. 여자가 남자의 기대에 부응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포르노 문화에서는 어떤 여자든 어느 정도까지 통상적인 ‘섹시함‘의 기준을 충족한다면 다른 여자와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 P23

앞서 언급했듯, 남아가 처음 포르노를 접하는 나이는 평균 11세이고, 그때쯤이면 이미 컴퓨터를 꽤 잘 다루기 때문에 이들 중 대부분이 위에서 묘사한 여러 웹사이트에 얼마든지 접근할 수 있게 된다. 포르노 문외한이라면 내가 방금 묘사한 장면들이 이 업계에서 가장 심한 경우에 속하는 특수 사례처럼 보이겠지만, 안타깝게도 이 이미지들은 인터넷과 대량 생산되는 영화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것을 너무나도 잘 대표하고 있다. - P38

남자가 성적 흥분과 오르가슴을 느끼기 위해 포르노를 본다면 남는 것은 단순한 사정 그 이상이다. 포르노의 이야기가 성적 정체성의 핵심에 스며들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섹스를 단순히 생물학적 욕구로만, 현실 세계에서 그것이 구성, 인식, 수행되는 사회적 맥락을 제거하고 바라보는 것이다. 어떠한 생물학적 욕구도 문화적 의미나 표현 없이 순수한 형태로 존재할 수 없으며, 미국 사회에서 포르노는 남자에게 성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는 가장 가시적이고, 접근하기 쉬우며, 알아듣기 좋은 스토리텔러다. - P40

포르노가 유포하는 여성에 관한 메시지는 몇 가지 핵심적인 특성으로 수렴된다. 여자는 언제나 섹스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남자가 원한다면 그 행위가 아무리 고통스럽고, 굴욕적이고, 해롭더라도 뭐든 하려고 안달 나 있다. 포르노 속 여자들의 어휘에 ‘싫어‘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음은 너무나 분명하다. 이 여자들은 부디 자기 몸에 있는 구멍이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호은 그 한계를 넘을 정도로 벌려지기를 바라는 듯 보이며, 그 행위가 더 기괴하고 굴욕적일수록 성적 흥분도 더 많이 느끼는 듯하다. - P41

이 여자들은 박히기를 원하기는 하지만, 하고 싶은 섹스에 대한 자기만의 상상은 없는 듯하다. 이들의 욕구는 언제나 남자의 욕구를 그대로 비춘다. 사실상 그들이 남자에게 요구하는 건 더 세게 박아달라는 것 뿐이다. - P41

야동의 세계에 사는 여자는 자신에게 경멸과 혐오만을 표출하는 남자와의 섹스를 진심으로 즐기는 것처럼 보이며, 대개는 그 모욕이 심하면 심할수록 당사자 모두가 더욱더 황홀한 오르가슴을 느끼는 듯하다. 이곳은 여성에게 동일 임금, 의료 및 보육 서비스, 은퇴 후 계획, 자녀를 위한 양질의 교육, 안전한 주거 환경 같은 건 필요치 않은 단순한 세계다. 이 세계는 일차원적 여성, 구멍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 여자들로 가득하다.
포르노가 전달하는 남자에 관한 메시지는 사실 훨씬 단순하다. 포르노 속 남자는 영혼도, 감정도, 도덕 관념도 없이 발기한 음경만을 위해 존재하는 생명 유지 체계로,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여자를 이용할 권리를 갖는다. 이 남자들은 섹스 상대인 여자가 얼마나 불편해하든, 고통스러워하든 신경 쓰지 않으며 어떠한 공감이나 존중, 애정도 보이지 않는다. 야동의 세계에 사는 남자의 가장 특징적인 요소를 꼽자면 성적 흥분을 표출하는 능력이 없다는 점이다. 물론 음경은 곧추서 있지만 - P42

실제 포르노의 ‘판타지‘ 섹스는 사랑을 나누는 행위보다는 성폭력에 가까워 보인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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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19 11:0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남자들은 그만 말하고 그만 써야 한다! 딩!!동!!!댕!!!!!!! 저도 어제 시작했어요, 부장님!!!
지면 주지마 마이크 주지마. 포르노 없는 감옥에서 뇌좀 헹구고 와!!!

다락방 2022-10-20 09:57   좋아요 2 | URL
휴 헤프너가 플레이보이 만들고 그 뒤로 펜트하우스랑 허슬러 나오면서 여성의 성을 보란듯이 파는게 더 급속화되고 더 극단적이 되고.
어제는 문득 남자들은 문제를 일으키고 여자들은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플레이보이지 만드는 남자가 있는데 여자들의 문제를 지적하는 여성성의 신화가 쓰이고
디지털성폭력 저지르는데 디지털 성폭력 고발하는 박지현이 나오고.

남자들은 진짜 쓸데없네요. 그만 말하고 그만 써야 돼요, 진짜.

단발머리 2022-10-19 11:0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우아! 우리가 읽은 책들을 총망라하는 이런 명품 페이퍼라니요! @@ 휘둥그레! 천천히, 천천히 읽습니다.

이성애 연애를 하지 않아도 우리가 포르노세상을 산다는 걸… 우리는 알죠. 이런 모든 끔찍한 일이 돈과 연결된다는것도 참 안타깝고요. 답을 찾아야할텐데요…. 답을…. 흐미…

잠자냥 2022-10-19 14:14   좋아요 2 | URL
˝우아! 우리가.......... (아니 여러분들이) 읽은 책들을 총망라하는 이런 명품 페이퍼라니요.˝ <- 제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다락방 2022-10-20 09:59   좋아요 2 | URL
베티 프리단이 그리고 수전 팔루디가 또 다른 페미니스트들이 남자들이 틀린 말과 행동을 할 때마다 그걸 지적해주고 밝혀주는 것 같아요. 한쪽은 헛소리하고 한쪽은 그걸 바로잡고자 하고. 역사는 그런식으로 진행되어 오고 있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문제를 일으키고 또 잘못하는 남자들과 함께 사느라 우리 여자들이 참 고생이 많아요 ㅠㅠ

거리의화가 2022-10-19 12: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저는 머리말의 충격이 가장 컸어요! 어찌나 놀랐는지. 재독이시라니 더 힘드실듯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링크해주신 글들도 찬찬히 읽어볼게요^^

다락방 2022-10-20 10:00   좋아요 0 | URL
저는 두번째라 처음이 아니라서 더 괜찮을 줄 알았거든요. 와 너무 힘들더라고요. 세상에, 재독도 힘들다니.
그런 한편 여러분들게 이 책을 같이 읽자고 한게 많이 미안해졌어요. 어휴. 이렇게 힘든 책을 함께 읽자고 했다니. 으, 너무 잔인했다 싶더라고요 ㅠㅠ

잠자냥 2022-10-19 13: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점심 먹으면서 이 글 읽는데도 힘든데(인용 구절마다 왜케 적나라해요;;) 아니 그걸 보고 또 그걸 실제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니... 휴... 인간 대체 무엇.... 곤조 포르노라는 장르(?)가 또 따로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아갑니다....

다락방 2022-10-20 10:01   좋아요 0 | URL
여기 인용된 영상들의 장면들은 아주 진짜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런 영상을 만들어서 돈을 버는 사람들도 있고 보는 사람들도 있는데 웃긴건(안웃김) 그 영상을 보고 후기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어요. 너무.. 악이죠. 그냥 악이죠. 잔혹한 성학대 영상을 보고 후기를 나누는 삶을 사는 자기 자신에 대한 어떤 자각도 없겠죠.

점점 더 자극적이 되어가는 포르노 세계에서 이제는 대부분의 포르노가 곤조 포르노화 되었다고 해요 ㅠㅠ

건수하 2022-10-19 13: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포르노랜드 읽고 요즘 마음이 너무 추워요..

잠자냥 2022-10-19 14:13   좋아요 2 | URL
어휴, 요즘 이거 읽는 분들 대단하십니다요.....;;

다락방 2022-10-20 10:02   좋아요 1 | URL
힘들 줄 알았지만 생각보다 더 힘들어요 ㅠㅠ 여러분에게 같이 읽자고 한 게 미안해질 정도로요 ㅠㅠ

건수하 2022-10-20 17:00   좋아요 2 | URL
/잠자냥님 그래도 읽은 제가 좋습니다! ㅎㅎ

건수하 2022-10-20 17:00   좋아요 1 | URL
/다락방님 아니에요 읽고 나니 읽어서 너무 다행이고 제가 대견하고 (응?) 그렇습니다!

청아 2022-10-19 14: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 글을 프린트해서 정독하고 PC에서도 다시 읽었습니다. 우리가 현재
포르노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말에 아프게 공감합니다. 저는 크롭티가 유행하고
여성들이 자신감있게 노출하는 옷을 입는것에 갈수록 더 당당해지고 있는거라고
1차원적으로 생각했었는데요. 여성들 사이에 유행하는 노출된 스타일이
다름아닌 남성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의도로
만들어졌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더라구요. 그리고 아이돌의
관문과도 같은 교복 스타일도, 아이같은 복장들도요.

다락방 2022-10-20 10:04   좋아요 1 | URL
네, 여성들이 아무리 ‘나는 이렇게 해야 기분이 좋아‘라고 말해봣자, 그건 나를 욕망하는 남성들의 시선을 욕망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크롭티와 노출 풀메이크업이 정말 자신을 행복하게 한다면, 혼자 집에 있을 때에도 그렇게 해야 하지만, 그러지는 않잖아요. 어디까지 타인-특히나 성적대상화 시키는 대상-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이지요. 저는 페미니즘 책을 읽어가면서 점점 더 화장을 안하게 되었고 이제는 노메이크업으로 다니거든요. 머리도 짧고요. 털도 안깎아요 ㅋㅋㅋ 그런데 이렇게 사니까 세상 편해요. 남자들은 처음부터 이렇게 살았다고 하니 어쩐지 억울하고요. 하아-

얄라알라 2022-10-23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번 느끼지만, 정말 좋은 리뷰를 읽어도
본인이 그 책을 직접 읽고 리뷰를 읽는 것과, 서문만 읽었거나 읽다 말고 리뷰를 접하는 건 천지 차이인것 같습니다.

다락방님께서 2020년 저리 촘촘히, 그리고 격렬하게 분노하면 읽으셨던 책을 2022년 다시 읽으시니

중간 중간 따라오라고 징검다리 많이 놔주실 수 있는 거네요.

<포르노랜드>도 덕분에 진짜 신나게 읽었습니다(오해는 마시어요. 이 주제를 생각해보게 되어 쾌속 읽었습니다.)
감사드려요 다락방님,
여러 인용서 중에서 특히
˝부엌 바닥에 윤을 내면서 불가사의한 성취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도대체 자기는 어떻게 된 여성이란 말인가? ˝ 문장을 접하는 순간, 나는 여태 <여성성의 신화>를 다른 분들 리뷰로만 겉핥기 하고 넘어가왔구나, 현타 왔습니다...

계속 징검다리 타고 걸어가보겠습니다!

다락방 2022-10-25 08:44   좋아요 0 | URL
저도 어제 포르노랜드 완독했습니다. 저 역시도 신나게 읽었어요. 어떤 결의 같은게 막 타오르면서 지금 젊은 여성들이 마주한 세상이 어떤건지 알게 되면서 모르는 것보다 확실히 아는게 낫다, 그래야 갈 길을 정할 수 있다 생각하면서 신나게 읽었습니다. 상세한 포르노 묘사들이 너무 힘들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 책을 읽는게 저는 저에게 매우 좋았다고 생각해요. 뭔가 저에게 더 단단한 근육이 생긴 것 같달까요.

함께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얄라알라 님! 그리고 읽느라 고생 하셨고요. 자, 우리는 계속 갑시다!
 

한메일 안되는지 몰랐는데 그래서 메일 알림이 하나도 안오고 있었구나..

가끔 저한테 이메일 보내는 분들 계셔서 피씨로 들어오면 서재 프로필 밑에 이메일 주소 적어두었었는데요, 그게 안되는군요. 제게 이메일 보내실 분들은

fallen7789@naver.com
elbeso77@nate.com

으로 보내시면 됩니다.

인스타 디엠은 확인이 늦습니다.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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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2-10-18 20:1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연예인 같다! 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2-10-18 20:51   좋아요 2 | URL
그걸 노렸습니다! 사실 메일 잘 안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ㅌㅌ

단발머리 2022-10-18 21: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연예인 같다! 2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2-10-18 21:58   좋아요 3 | URL
연예인인척 해봤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책읽는나무 2022-10-18 22: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메일 받아적을 뻔!!!
연예인 메일도 적어본 적 없었는데..ㅋㅋㅋ
연예인들 인스타도 많이 하던데?
인스타까지 하시는군요?^^

다락방 2022-10-19 09:51   좋아요 0 | URL
ㅋㅋ 저 인스타로 디엠 주는 분도 계셨어서 ㅋㅋ 들여다봐야 합니다. 팬레터 절대 사수!! ㅋㅋㅋㅋㅋㅋㅋㅋ

blanca 2022-10-19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오늘 복구되어 들어가보니 죄다 쇼핑몰 광고....우울해지더라고요. 다락방님 메일함은 왠지 로맨틱할 것 같다는 ㅋㅋ

다락방 2022-10-19 09:51   좋아요 1 | URL
저도 봤는데 개인적인 메일 온 게 하나도 없어서 완전 뻘쭘했어요. 쑈했구먼... 하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2022-10-19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휴 깜짝야, 맞다 다락방님 셀럽이여찌 😫 제가 맘모스빵 놀려 죄송해요!

다락방 2022-10-19 10:44   좋아요 0 | URL
쟝님은 맘모스 안줘! 흥!!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2022-10-19 10:45   좋아요 0 | URL
맘모스 말고 크로와상 주세욬ㅋㅋㅋㅋ😛

다락방 2022-10-19 10:46   좋아요 0 | URL
됐어! 얄짤 없다굿!! 흥!!!

- 2022-10-19 10:49   좋아요 0 | URL
아아, 팬이 셀럽에게 감히 맘모스를 바라다니, 지가 잘못했습니다! 부장님은 나의 스타⭐️, 못생긴 맘모스 나눠주지 말고 항성처럼 이자리에 고대로 존재해 주세요!!!
 

• 최 :우리는 잘 모르기 때문에 미워하고, 잘 모르기 때문에 질투하고, 잘 모르기 때문에 따돌리지요. 충분히 아는 사이에선대개 그런 짓을 못 하잖아요.

•안 :알아가면서 오해가 풀리는 경험을 다들 하죠.

•최 :그렇죠. 자연에 대해서도 알아가려고 노력하다 보면, 어느순간에 자연을 도저히 해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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