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 모예스의 《미 비포 유》를 천천히 읽고 있기 때문인지 윌에게 정이 너무 들어버렸다. 이번주 분량에서는 '루'가 '윌'로 하여금 살고 싶은 의지가 생기게끔, 안락사에 대한 결심을 바꿀 수 있게끔 무언가 해보고자 하는 생각과 의욕으로 가득차 있어서 실행에 옮긴다. 경마장에 데려가지만 일은 루의 예정대로 진행되지 않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윌은 '왜 나의 의견을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느냐'고 서운해한다. 나는 말도 싫고 경마도 싫단 말이야, 그런데 넌 내게 묻지 않고 그것이 내게 좋을 거라고 네 마음대로 생각했지. 늘 생각하고 얘기하는 것이지만 나의 선의가 언제나 선한 결과를 불러오는 것도 아니고 나의 선의가 상대에게도 선의일 수는 없다.
그리고 클래식 콘서트. 윌의 친구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데 그 친구의 공연이 윌의 동네에서 열린다고 한다. 친구는 윌에게 초대권을 보내줬다고 윌은 클라크에게 그걸 네게 줄테니 어머니랑 다녀오렴, 이라고 말한다. 클래식 공연에 한 번도 가본 적도 없으면서 루는 자신은 클래식 연주를 즐기지 못한다, 좋아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거절한다. 그때 윌은 루이자에게 지독하게 속물이라고 표현한다.
"당신만큼 지독한 속물은 처음 봤어요, 클라크"
"뭐예요? 내가?"
"혼자서 '난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고 정해놓고 온갖 경험들을 아예 막아놓고 있잖아요."
"하지만 진짜 아닌 걸요."
"어떻게 알아요? 아무것도 안 해보고, 아무 데도 안 가봤는데.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알 길이 없었는데?" -책속에서
번역본으로 먼저 읽었던 터라 '속물'이라는 단어가 귀에 꽂혔다. 이럴 때 쓰는 단어가 속물인건가?
'You're the most terrible snob, Clark.'
'What? Me?'
'You cut yourself off from all sorts of experiences because you tell yourself you are "not that sort of person".'
'But, I'm not.'
'How do you know? You've done nothing, been nowhere. How do you have the faintest idea what kind of person you are?' -p.205-206
snob 을 사전에서 찾아보닌 '고상한 체하는 사람', '속물' 이라고 되어있긴 하네.
그런데 정말 저런 사람을 일상에서 자주 마주하게 된다. 해본 적 없으면서 그것을 단정하는 사람. 일전에 최재천교수가 공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면서 '알면 사랑하게 된다, 미워할 수 없게 된다'고 했는데. 나 역시 그 말에 동의한다. 경험하지 않고 모르는 채로는 싫다고 말하기도 쉽고 욕하기도 쉽다. 그러나 경험해보면 내가 단순히 가정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지곤 하는 거다. 간혹 '나는 그거 싫어'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해봤냐'고 물으면 '아니'라고 하는 경우를 마주하게 되는데 '안해보고 어떻게 알아?' 라고 되물으면 '내가 그걸 좋아할 리 없어'라고 하는 거다. 글쎄. 그럴까? 나는 사실 실생활에서 루이자처럼 말하는 사람에게 좀 짜증이 나고, 실생활에서는 이 책에서의 윌과 가까운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안해보고 어떻게 알아?
클래식은 이런 대화 혹은 경험의 대표적인 클리셰다. 미 비포 유에서도 클라크는 결국 윌에게 '너가 함께 간다면 내가 한 번 가보마' 하게 되어 생애 처음 클래식 공연에 가게 되고 감동에 젖어 어쩔 줄을 모른다. 아주 오래된 영화 <프리티 우먼>에서도 길거리에서 성을 팔던 여자 '줄리아 로버츠'는 재벌인 남자 '리처드 기어'가 데려간 오페라 공연에서 감동받아 눈물을 흘린다. 미 비포 유 에서도 언급되지만 피그말리온. 돈 많고 경험 많았던 남자들이 여자로 하여금 경험하게 해주고 새로운 감동에 눈을 뜨게 해준다. 식상하고 전형적이고 그야말로 클리셰이지만, 그런데 나는 이런 거 좋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어릴 때부터 모든걸 경험하며 살아갈 순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그 첫 스타트를 끊어 줘야 한다. 윌은 부유한 집에서 자랐고 모든 경험에 열려 있었다. 그러나 루이자에게는 한정된 공간이 주어졌고 또한 일찍부터 노동을 해야만 했다. 스무살 시절, 해외여행을 다녀온 뒤 뭔가 달라졌던 동창을 보고 루이자 역시 해외 여행을 계획해 비행기 티켓까지 끊었었지만, 그러니까 그 경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자신에게도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관찰해보고 싶었지만, 그러나 그 여행을 가기 전, 루이자는 타인에 의해 추락한다. 차츰 그 일이 언급되면서 루이자가 다른 사람의 몸을 기피하고 자신을 세상에 내놓지 않으려하고, 남자들에게 성희롱 당하지 않게끔 괴상한 옷으로 자신을 무장하려는 이유들이 나온다. 그러니까 지금의 루이자가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단정하게 된 이유는 남들보다 경험이 적어서이며 제한되기도 해서이지만, 또 일어나지 않아도 좋았을 일이 그녀에게 일어났었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들과 즐거이 어울려 놀다가 자신이 성폭력의 피해자가 되었던 경험은 루이자를 한 곳에 머무르게 만들었다.
루이자에게 뭐가 더 나은지는 루이자 자신이 판단할 수 있을 테지만 가끔은 다른 사람들의 진심 어린 관심이 도움이 된다. 윌은 아직 그런 루이자의 트라우마를 알지 못한 채로 너 안해보고 어떻게 알어, 해봐, 라면서 권유해주고 루이자는 서서히 바뀐다. 이건 가족도 그리고 남자친구도 루이자에게 해주지 못했던 일이었다. 어쩌면 같은 제안을 다른 사람이 했다면 또다른 결과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합'이라는 건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루이자에게 끊임없이 운동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또 제안하기도 하는 남자친구가 있지만 그러나 루이자는 함께 운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윌과 함께 클래식 공연에 처음 가게 되고 거기에서 마음이 크게 움직이는 거다. 아, 프랑스 영화를 처음 본 것도 이십대 중반, 윌과 함께였다. 난 그런 영화 내 취향이 아니야, 라고 했다가 윌이 세상에, 한 번도 안봤다고? 하며 함께 보자고 했다가 너무 재미있게 보는 루이자를 마주하게 된 것. 어쩌면 클래식이어서 외국 영화여서 그랬을 수도 있고 어쩌면 윌이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어쩌면 '윌과 클래식'이어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루이자는 자신에게 자신이 쳐놨던 어떤 경계들을 이제 슬쩍슬쩍 넘는다. 어떤 사람들은 인생의 어떤 시기에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서 예상치 못하게 나의 회복 혹은 치유를 돕는다.
나에게도 물론 상처가 있고 트라우마가 있다. 그것은 여전히 나를 괴롭히고, 내 평생 이것이 완전히 치유될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말하지 않으면서도 다만 사람들이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 때 나를 이해해주길 바랐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생각도 가지고 있다. 내가 이런걸 알잖아, 내가 이런말을 할 때 나를 좀 이해해주며 안돼? 라는 생각을 때로는 속으로 한다. 내 상처는 어른이 되고난 후에 어떤 반응으로 내게 작동했고, 그것은 나를 오래 지배했다. 나는 어떤 걸 할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그런데 한 친구를 만났다. 어쩌다보니 나는 나에게 일어난 일을 그 친구에게 말하고 있었고, 친구는 내 말을 듣고 내게 한 마디 말을 해주었다. 그 말에 나는 엉엉 울었고, 그 후에 나는 나를 억압하던 어떤 것에서 자유로워졌다. 친구의 그 말을 듣기전보다 인생을 좀 더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내게 아무도 해주지 않았던 말이었지만 내가 누구에게도 그 일에 대해 말한 적 없기 때문에 들을 수 없는 것 역시 당연한 거였다. 그러나 그 뒤로 그 일에 대해 언급했을 때 그 친구처럼 말해준 사람이 없기도 했다. 그 친구여서 그리고 그 말이어서 내가 좀 자유로워진 건 분명하다. 나는 그 점에 대해 친구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네 덕분이라고.
미 비포 유에서 하필이면 남자 윌이 여자 루이자에게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해주고 자신을 둘러싼 경계를 허물게 해주지만, 그것이 반드시 이성 사이에서 그리고 연인(이 될 가능성을 품은) 사이에서 일어나는 건 아니다. 내게 일어났던 것처럼 동성의 친구로부터도 가능해지고 또 동성의 선후배에게서도 가능하다. 그리고 연인의 가능성이 없는 이성 사이에서도 물론 가능하다. 내가 인생에서 큰 축으로 변했다고 생각하는 그 말을, 나는 나와 같은 성별의 그러나 나보다 나이는 어린 친구로부터 들었다. 그 친구는 내가 잘못생각하고 내가 어린 나를 원망하며 살았다는 걸 알려주었고, 화나거나 슬픈 상황에서 웃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려주었다. 내 인생의 그 시점에서 그 친구를 만나 그 말을 들었기 때문에 나는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 안에는 하나의 그러나 그 사람만의 커다란 세계가 있다. 바깥에서 보기에 그것이 닫혀있고 좁은 것으로 보여도(내가 루이자를 그렇게 봤듯이) 그 안에는 무수히 많은 것들이 쌓여 견고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루이자에게 그 일이 있었고 그 일은 루이자를 그런 사람이 되게끔 했다. 그리고 인생의 이 시점에 윌이라는 사람을 만나 인생의 축과 방향이 달라지게 된다. 그건 윌에게도 마찬가지. 윌이 바라보는 방향은 '이것은 내 삶이 아니고 나는 살지 않는 걸 택할 것이다' 였고 그 방향이 변한 건 아니지만, 그러나 그가 죽음으로 가기 전에 그는 루이자를 부르고 루이자를 웃게 해주고 루이자라는 사람을 만나 그 시간들을 풍요롭게 보낼 수 있었다. 사람들은 타인을 만나 저마다의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고 그것은 반드시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사람들은 특별히 더 누구에게 필요했던 것 같다. 내가 필요한지도 모르는채로 필요했던 바로 그 사람이기도 하다. 그 사람은 가족일 수도 친구일 수도 연인일 수도 그리고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일 수도 있다. 인생에 있어서 그런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큰 축복일 것이다. 그래서,
윌 때문에 더 미치겠다. 그러니까 윌의 선택은 윌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함에는 변함이 없는데, 나는 이제 윌을 아끼는 사람1이 되어버린 거다. 다른 한 사람-애정을 품게된-과 농담을 하고, 네 안에 다른 네가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했던 윌. 그런 윌 때문에 내 세계가 달라져버린 루이자. 그걸 알기 때문에 미치겠다. 콘서트에 다녀온 후 차에서 내리기 전, 잠시만 이대로 있자, 빨간 드레스를 입고 함께 콘서트에 다녀온 남자로 잠깐만 있고 싶어, 라고 말하는 윌이라서 보내기가 너무 힘이 든다. 나는 이 영화를 두 번 보았고 책도 두번째 읽는데, 이만큼의 가슴 아픔은 원서와 함께 읽는 지금이 처음이다. 슬픔의 크기가 너무 달라졌다. 어제 문득 영화를 다시 보고 싶어졌는데 넷플릭스에 없는 거다. 유튜브로 들어가 콘서트신을 검색해 보았다. 연관되어 나오는 윌의 마지막 장면도 보았다. 루이자와 삶에서 나누는 마지막 대화 신에서 미칠듯한 기분이 되었다. 윌의 선택을 존중한다고,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머릿속으로 생각했건만, 영상을 보는 나는 '어떻게 보내, 못 보내, 보낼 수 없어' 라고 울부짖고 싶은 심정이 되는 거다. 아 안돼, 안된다, 안돼! 벌써부터 이 책을 완독할 시점 펑펑 울 내가 그려진다.
살아달라고 말하고 싶다. 살아달라고. 그리고 살아줬으면 좋겠다.
어제 알라딘에서 이메일을 받았다. 드디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신간이 번역되어 나왔다는 것. 오, 윌리엄!!
원서를 가진 지는 오래되었는데 아직 읽지 못했다. 번역본 나오면 읽어야지 생각하며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제 나왔어. 만세!!
오늘 아침 출근길에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도서인 포르노랜드를 읽으면서 왔는데, 플레이보이를 창간한 '휴 헤프너'의 이야기가 계속됐다. 그가 소위 '바니걸'이라고 불리는 젊은 여성들과 그의 큰 저택에서 함께 사는게 텔레비젼에서 리얼리티 쇼? 뭐 이런걸로 보여지기도 했다는데, 그 바니걸 중 한 명, 플레이보이 맨션에 살았던 여성의 책이 있다고 하더라.
헤프너의 전 '걸프렌즈'였던 이자벨라 세인트제임스는 자신의 저서 『버니 이야기Bunny Tales』를 통해 실제 플레이보이 맨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언급했다. 헤프너는 피임 없이 수많은 여성과 돌아가며 섹스하려 했지만, 아무리 많은 여자에게 삽입한다 한들 포르노를 보면서 자위해야만 오르가슴에 도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세인트제임스는 헤프너와 섹스하기를 원치 않는 여자들이 많았지만, "그건 암묵적인 규칙의 일부였고, 흡사 우리가 누린 모든 것의 대가처럼 느껴졌다"고 밝혔다. 물론 이런 장면에 쇼에 나올 리가 없었다. -《포르노랜드》, 게일 다인스, p.89
나는 이자벨라 세인트제임스의 책을 검색해보았다. 그럴 줄 알았지만 역시나 번역본은 없었고 원서만 검색되더라.
전자책을 다운 받아 앞에 프롤로그만 살짝 읽어봤다. 세인트제임스는 프롤로그에서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를 밝히고 있었다.
어느날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다가 자신을 쳐다보는 유명한 남자 배우와 눈이 마주쳤고, 그는 그녀를 줄곧 보고 있었다며 다음날 초대한거다. 그렇게 그 유명한 남자 배우와 대화를 나누고 즐거운 시간을 가졌는데, 그녀가 플레이보이 맨션에서 살았다는 걸 알고는 그가 분노했다는 거다. 세인트제임스는 이 점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이 자유로운 나라의 대통령 클린턴은 인턴 직원과 업무장소에서 부적절한 일을 저질렀고, 유명한 배우 휴 그랜트는 매춘을 하다 발각되었는데 사람들은 그냥 다 넘겼다. 그런데 왜 플레이보이 맨션에서 살았었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판단하냐,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왜 그것만으로 판단하냐, 안되겠다 책을 써야겠다 생각한 것. 그러자 그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 남자배우는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말했다고 한다. 세인트제임스는 아니 쓸거야, 그리고 그녀는 말하고 있다. 자신에 대한 판단은 이 책을 읽는 여러분이 직접 하라고.
Did I really ruin my life? You be the judge. -《Bunny Tales: Behind Closed Doors at the Playboy Mansion》, Izabella St. James, p.13
이번호 시사인 장정일의 독서일기 에서는 세 명의 철학자에 대한 얘기가 실렸다. 하나는 최근에 알라딘에서도 엄청 핫했던 한나 아렌트의 평전이었고 다른 하나는 하버마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키르케고르 평전이었다.
나는 장정일의 글을 읽다가 특히 키르케고르의 평전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클레어 칼라일의 <마음의 철학자키르케고르 평전>(사월의책, 2022)을 보면 키르케고르로 하여금 종교적으로 산다는 것을 평생의 문제로 씨름하게 만든 것은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어느 이야기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외동아들 이삭을 바칠 것을 요구했고 아브라함은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올라갔다. 키르케고르는이 이야기에서 엄청난 철학적 교훈을 이끌어냈으며 "아브라함의 칠흑 같은수수께끼에 매혹되었다". 키르케고르는 저 일화를 이성에 대한 신앙의 우위로 해석하는 목사들이나, 아브라함의 행위를 도덕 법칙에 반하는 것으로 보고 이삭을 희생시키라는 목소리를 악마의 속임수거나 미망으로 추론해야 한다는칸트를 함께 물리쳐야 했다. 그는, 도덕법칙은 시민적 제도를 대표할 뿐이며 칸트는 신을 도덕적 삶으로 축소시켰다고 말한다(실제로 교회나 절이 뭐 필요하냐면서 "선하게 살면 그게 종교다"라고 믿는 모범적인 시민이 있다).
목사들이 저 일화에서 신에 대한 인간의 무조건적인 굴복을 읽어낸 것과 달리, 키르케고르는 공포를 강조한다. 신앙은 나의 실존을 파괴할 수도 있고 범죄자로 만들 수도 있다. 신앙은 이성적이고 윤리적인 세속의 휴머니즘과 공포 사이의 도약에 의해서만 얻어진다. -<시사인 제788호>, 장정일의 독서일기 中, p.66
아마 기독교가 아닌 사람도 그리고 성경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도 아버지가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던 저 얘기를 다들 알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 따른 각자의 생각이나 느낌이 있을 것이고. 저 이야기는 분명 강렬하고 이승우도 자신의 책을 통해 저 이야기를 자신의 시각으로 해석해 쓰기도 했다. 나에게도 아주 흥미로운 부분인데 나는 제물로 바쳐질 아들의 입장에 대해 자꾸 생각해보게 되는거다. 내 아버지가 나를 제물로 바친다는 것에 대해 나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그런 참에 키르케고르가 저 부분에 대해 얘기한다고 하니 너무 궁금해지는 거다. 사야겠다.
그런 한편 하버마스 평전에 대해서는 하버마스 평전을 사고 싶은게 아니라 칸트가 더 궁금해졌다. 그러니까, 이런 부분이 장정일의 독서일기에 실려있다.
하버마스가 제시하는 것은 의사소통적 합리성이다. 서구 철학은 시작부터 이분법적이고 위계적(플라톤)이면서 주관성(데카르트)과 자기동일성(헤겔)을 받들었다. 근대적 도덕 이론을 정초한 칸트의 정언명령 제1정식은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여겨질 수 있도록 행위하라"인데, 하버마스는 칸트가 선험적인 선(善) 논리로부터 도덕을 구출하고, 이를 규범 검사 절차로 재구상한 점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저 정식에는 고독한 개인과 독백적 절차밖에 없다고 비판한다. -<시사인 제788호>, 장정일의 독서일기 中, p.67
아니, 칸트가 맞는말 했구먼 왜... 라고 반응함과 동시에 나는 '저 정식에는 고독한 개인과 독백적 절차밖에 없다'는 문장에 끌렸다. 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그래서 나의 외로움과 고독을 깊이 깊이 받아들이고 있다. 아, 칸트여..
트윗을 통해서는 이 책을 알게 됐다.
아... 사실 이 페이퍼가 이렇게나 길어지게 된 건 다 이 책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책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면서 '아니 박테리아에서 바흐라니' 라고 놀라웠던 거다. 박테리아랑 바흐랑 무슨 상관이 있길래 박테리아랑 바흐를 언급하면서 무려 마음에 대해 얘기한다는 걸까. 나는 궁금해서 이 책을 장바구니에 넣었고, 그러다 바흐.. 나는 클래식을 모르는데.. 생각하게 되었고, 클래식, 이라고 하니까 어제 읽었던 미 비포 유의 클래식 장면이 생각난 거였는데, 페이퍼를 작성하려고 똭- 글쓰기 페이지를 열었던 시점에서 바로 그 생각이 주루룩 저기 맨 위에 쏟아져 나온 것이다. 이 페이퍼의 원래 목적은 사고 싶은 책 언급하는 거였는데, 윌 살아주길 바라... 가 되어버리게 된 것. 흐미......... 삶은,
뭘까?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