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 뉴욕 - 뉴요커 63인이 바라보는 다채로운 풍경
마테오 페리콜리 지음, 이용재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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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끝에 가능한 모든 각도와 시각에서 경치 사진을 찍기로 마음 먹었다. 하지만 경치를 사진에 담으려면 결국 창틀도 담아야 했다. 창틀 없이는 '창밖 풍경' 또한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벽의 특정한 위치에 달린 특정한 크기의 창문이며 창틀의 개구부는 바닥으로부터 특정 높이까지 솟아오른, 얽히고설킨 비계飛階에 매달린 암상자camera obscura 처럼 단 하나뿐인 뉴욕의 풍경을 담아내고 있었다. 결국 그리지 않고는 모든 각도에서 바라본 경치를 하나로 모아 담을 수 없었다. (p.146 후일담中)



그러니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여하튼 사진으로는 안되니까 스케치로 담았다는 말인 것 같다. 매우매우 아쉬웠다. 63명의 뉴요커들이 바라보는 창밖을 나도 본래의 색깔 그대로 바라보고 싶었으니까. 스케치도 멋있긴했지만, 낭만적인 감정을 느끼긴 했지만, 내게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어쩌면 나는 화려한 걸 좋아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크고 높은 빌딩들을 그 빌딩 본연의 색으로, 뉴욕의 그 멋스럽다는 가을에 대해서도 그 가을 본연의 색으로 보고 싶었으니까.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알지만 자꾸만 언급되는 크라이슬러 빌딩은 대체 어떤건지, 센트럴 파크는 알지만 자꾸만 뉴요커들이 얘기하는 허드슨강은 대체 어떤건지 나는 생생하게 보고 싶었으니까. 결국 인터넷 으로 검색해가며 그것들을 보긴 했다. 그러나 이 글들과 함께 그 사진들을 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도시를 사랑한다. 지금 내가 사는 도시는 물론이고 도시 자체를 사랑한다. 그런데 그 도시가 뉴욕이라면 아마 내 사랑은 극에 달할 것 같다. 내 생의 한 부분쯤은 뉴욕에서 보내고 싶다. 1월부터 12월까지 모두를 뉴욕에서 경험하고 싶다. 겨울이면 센트럴 파크 연못의 오리는 어디에 가는거냐고 묻던 홀든 생각을 하면서 겨울의 센트럴 파크를 보고 싶다. 대체 뉴욕의 가을이 어떻다는건지  허드슨강에서 느껴보고 싶다. 아니 그것은 빌딩숲에서 느껴도 좋겠다. 모두에게 허드슨강과 크라이슬러 빌딩을 보여주기 위해 이미지를 가져올까 했지만 출처표기의 귀찮음으로 생략한다. 



이 책에 내가 아는 사람들이 등장한다는 사실에 무척 반가웠다. 물론 그 몇몇 아는 사람들을 빼놓고는-아, 물론 그들도 나를 안다는 건 아니다- 죄다 모르는 사람들 뿐이었지만. 


요즘 내가 그녀의 작품을 두 개나 봤는데. 그래, 노라 애프런이다. 가장 처음 뉴욕에 대한 언급은 노라 애프런이 한다. 가슴이 몰랑몰랑해진다. 뉴욕으로 가고 싶다.


"사무실의 아름다운 줄리엣 윈도 너머로 크라이슬러 빌딩이 보인다.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며, 내가 뉴욕에 품었던 반짝이는 꿈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래도 글을 쓸 때는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볼 수 있어 다행이다. 아니면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으니까." (p.18, 노라 애프런)


내가 뉴욕에 대해 품었던 꿈의 상징은 엠파이어 스테이트와 센트럴 파크인데!! 하아- 내 꿈의 상징을 가끔 창 밖으로 바라보며 일을 한다는 건 대체 어떤걸까.



"새벽에는 흉내지빠귀 소리가, 아침에는 짐 부리는 트럭의 통통거리는 엔진 소리가, 정오에는 아래층의 텔레비전 소리가 들린다. 오후에는 옆집 아이들이 놀면서 지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고, 해 질 녘에는 자동차 알람이, 저녁에는 경철차 사이렌이 들린다. 그러고는 정적이 찾아온다." (p.32 데릭 버멜)


뒤에 실린 뉴요커들 소개를 보면 '데릭 버멜'은 작곡가이자 클라리넷 연주자라고 하는데, 그래서일까, 그는 뉴욕을 소리로 표현했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듯한 느낌이다.



"책상에 앉으면 하늘을 잘 느낄 수 있다. 34층에 올라앉아 있으면 땅의 교통은 듣지 못해도 하늘의 교통은 볼 수 있다. 동쪽 창은 내가 매주 비행기로 들락거리는 라구아디아 공항과 케네디 공항 쪽으로 나 있다. 하늘은 베를린, 카이로, 프리타운을 비롯한 세상으로 연결해준다. 일할 때면 마음이 그 하늘에 가 있다." (p.38 캐롤 보거트)


캐롤 보거트는 인권운동가라고 하는데 하늘을 느낄 수 있다고 하는걸 가만히 읽노라니 며칠전에 읽은 책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이 떠오른다. 그 영화속에서 여자주인공 '티파니'는 남자주인공 '팻'에게 구름 사진첩을 선물해준다. '당신 뛸 때 하늘을 자주 보잖아요' 하면서. 하늘을 자주 보는 것도 좋지만, 하늘을 자주 본다는 사실을 누군가가 알고 있다는 게 더 좋다. 나는 하늘을 자주 봐, 라고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는 그 사실이. 나조차도 몰랐을지도 모를 내 습관을 누군가가 내게 일깨워줬다는 사실이. 아, 이런.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지는구나. 다시.



물론, 모든 뉴요커들이 뉴욕을 사랑하는 건 아니다. 당연히 모든 뉴요커들이 뉴욕에 대해 낭만적인 느낌을 갖는것도 아니고 그곳을 꿈의 상징이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뉴욕을 보며 끔찍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분명 존재한다.


"내 스튜디오는 창문 없는 전기통신 탑 바로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다. 게다가 건물 꼭대기는 초단파 발신기로 가득 차 있어서 창밖 경치를 떠올리면 그저 암이 연상될 뿐이다. 그래서 웬만하면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p.50 스티븐 콜베어)



스티븐 콜베어는 코메디언이며 TV 진행자라고 한다. 암이 연상된다는 끔찍한 말에 웃어버리고 말았는데, 아, 그가 코메디언이었구나!




오, 그리고!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을 여기에서 만난다. 그녀가 뉴요커였어? 그렇다면 그의 남편도 뉴요커인거야?


"아들 방에서 브루클린 윤리학 센터가 내다보인다. 여름 내내 윤리학자들이 정원을 빌려 결혼식을 치렀다. 관악 밴드며 취중 건배, 앰프에서 나오는 되먹임 소리, <Can you feel the love tonight> <That's Amore> <Unchained Melody> 같은 노래가 아들의 잠결에 스며들었다. 사랑의 진부함에 대한 조기교육이랄까." (p.54 니콜 크라우스)



윤리학 센터와 니콜 크라우스라니 엄청 잘 어울린다. 이 부분을 읽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같은 공간에 살아도 사람은 자기 방식대로 생각하기 마련이라고. 이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과는 좀 다르다. 니콜 크라우스가 아니라 나였다면, 윤리학 센터에 대한 언급 대신 아마도 다른 이야기를 했을것이다. 내가 그곳에 있질 않으니 다른 뭐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또한 '사랑의 진부함에 대한 조기교육' 같은건 아마 생각도 못했을거야. 그나저나 사랑의 진부함에 대한 조기교육을 받고 포어를 아버지로 둔, 크라우스를 어머니로 둔 그들의 아들은 자라서 어떤 어른이 될까? 




"십 년째 같은 브루클린 아파트를 빌려 집 겸 사무실로 쓰고 있다.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는 기록이다. 그림은 책상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담배 피울 때 기대는 창문이기도 하다. 블라인드를 내린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여름에는 나무가 사생활을 보장해주지만 겨울이면 그나마도 사라진다." (p.56 맷 델린저)



맷 델린저는 저술가이자 기자란다. 무엇보다 '담배 피울 때 기대는 창문' 이란 표현 때문에 나는 낭만에 젖어든다. 근사하다. 담배를 피고 싶다. 담배를 필 때는 반드시 창문에 기대고 싶다. 아..뭔가 고독이 빠져나갈 것 같아.



주노 디아스는 뉴욕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가보다. 놀랍진 않다. (근데 이창이 뭐지?)


"건축학적 또는 인간적인 화려함 한 조각 없는 <이창> 이라니, 창이 아니라 엿보기 구멍 같다." (p.58 주노 디아스)



티베르 라마 라는 '겔렉 린포체'도 뉴욕을 끔찍하게 여기는 듯하다. 그러고보니 나 역시 오래전에 맨하튼을 돌아다니면서 퀴퀴한 냄새에 코를 찡그렸던 기억이 있는데. (그런데 어쩐지 표현은 '라마' 답지 못한듯하다. 이것은 나의 편견인가.)


"쓰레기차가 매일 새벽 세시 반이나 네 시면 어김없이 온다. 창문을 열면 쓰레기 냄새가 정말 웩(!)이다. 뉴욕의 쓰레기 같은 진면모다." (p.68 겔렉 린포체)





아, 그리고 이름을 발견하고 무척이나 반가웠던(니콜 크라우스보다 훨씬 반가웠다) 엘리자베스 스타라우트!! 오, 당신도 뉴요커였습니까.



"해가 지고 하늘이 어두워지면 마법과도 같은 바다가 펼쳐진다. 물이거나 빛이거나 상관없다. 아름답게 반짝이는 별이 담긴 바다다. 또 각각의 별은 사람이기도 하다.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p.128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흐음, 환상쪽으로 치우친것 같지만, 낭만이 좀 지나친 것 같지만(응?) 뜻하지 않은 곳에서 만나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라니! 




처음에 언급한 후일담을 마지막으로 또다시 언급하자면, 이 책 저자의 방문 요청을 거절한 사람들의 거절 이유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사생활을 언급했는데, 몇몇 경우 응낙보다 더 마음에 드는 거절의 답을 전해주었다. 대부분 "미안하지만 삶의 개인적인 부분은 나누고 싶지 않습니다" 같은 식이었다. 완벽히 이해할 수 있을뿐더러 옳은 대답 같기도 하다. 결국, 이 얇은 유리를 끼운 창문 너머의 풍경은 바깥세상이 아닌 우리 내면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p.148 후일담中)



만약 내가 뉴욕에 살고, 내가 나의 창밖을 사랑해서 간혹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본다면, 나 역시도 이 요청을 수락했을 것 같지가 않다. 나는 아마 집에 사람을 들이는 일도 별로 없을텐데, 혹여라도 사람들이 내 집을 방문한다면 창밖을 내다보라 권하지 않을것 같다. 그 자리는 내가 서있어야 할 자리니까. 그러나 아주 소수의 사람들에 대해서라면, 나는 그들의 손을 잡고 창가로 데리고 가 그 자리에 서서 내가 보는 풍경을 바라보게 할 것 같다. 나는 가끔 이곳에 서있어. 이 시간대의 창밖을 바라보는 걸 좋아하지, 라고 말해주면서. 그들중 일부는 자신의 공간으로 들어가 그 시간즈음이 되면 자신들의 창밖을 내다보았으면 좋겠다. 지금쯤 그 친구는 창밖을 내다보고 있겠구나, 하고. 물론 나는 수시로 내다보고 싶겠지만. 빛이 좋은 날은 그런 날대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걸 보면서.



아, 그런데 내가 지금 왜 여기에 있는걸까. 저기, 뉴욕이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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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13-02-20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젯밤 잠들기 전까지 무한도전 '뉴욕 타임스퀘어' 공연준비를 봤는데...ㅎ
어릴때 우상 MC해머를 만난 유재석, 유재석이 그렇게 흥분한 건 처음 본거 같았어.

다락방 2013-02-20 13:48   좋아요 0 | URL
나도 그래서 그 편이 엄청 좋았어요. 어릴적의 우상을 실제 만난다는 그 흥분과 떨림이 뭔지 너무 알겠더라고!! 그래서 막 내가 좋아가지고 그 에피소드가 엄청 좋더라고요. 왜, 살다보면, 내게 이런일이 설마 생기겠어, 하는 엄청난 희망사항이 실현되는 순간이 올 때가 있잖아요. 그런 순간을 경험하는 것 같았어요, 그 때의 유재석은.

dreamout 2013-02-20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의 어두운 뒷편에 난 작은 창. 같은 거라고 하더라구요. 엿보는 창. 같은거요.
저도 이 책 볼 때 조회해 봤는데, 유명 스릴러 감독의 영화 한 편이 이창.으로 번역되었더라구요. ㅎ

다락방 2013-02-20 13:49   좋아요 0 | URL
아! 검색해볼까 하다가 허드슨 강이랑 크라이슬러 빌딩 검색하는데 에어지를 다 써버려서 안했는데 드림아웃님이 해주셨네요. 희희.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영화 제목이었군요.

그나저나 드림아웃님, 뉴욕 안가십니까? 우리 뉴욕에서 만납시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전망대 어때요? ㅎㅎ

dreamout 2013-02-20 23:57   좋아요 0 | URL
휴가기간에 며칠 가 보는거 말고.. 한 2주 둘러봤음 좋겠어요. 정말...
게으름만 아니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 말이죠. ㅜㅜ

다락방 2013-02-22 08:38   좋아요 0 | URL
저는 2-3년정도 머물고 싶어요. 며칠 가보는거 말고 정말 거기서 '살아'보고 싶어요. 후아-

아무개 2013-02-20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주말엔 숲으로>에 나오는 하야카와 같은 친구가 되고 싶어요.
도시속 보다는 도시와 시골의 중간 그 어디쯤.....하긴 지금 그런곳에 살고 있네요ㅋㅋㅋ
뉴욕같은 대도시는 왠지 겁난달까요~

다락방 2013-02-22 08:41   좋아요 0 | URL
저는 도시에서만 살아서 그런지 시골이 겁나요. 사람이 별로 없는것도 겁나고 조용한 것도 겁나고..너무 도시에 길들여졌는가봐요;;

자하(紫霞) 2013-02-21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읽고 나니 갑자기 뉴욕에 집 있다는 송혜교가 부러워졌어요.하아~

다락방 2013-02-22 08:41   좋아요 0 | URL
헐. 송혜교는 뉴욕에 집이 있답니까? 헐헐헐헐. 초절정 부러움이 쓰나미로 몰려오네요. ㅠㅠ
 
[100자평] 아빠를 키우는 아이
아빠를 키우는 아이 - 아빠 육아, 이 커다란 행운
박찬희 지음 / 소나무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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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동생이 처음 아이를 낳고 힘들어했을 때 여동생을 둘러싼 주변 어른들은 '옛날 사람들은 열명을 낳고도 잘 살았는데 너는 유독 왜그러냐'라는 반응을 보였다. 세상에 이렇게 폭력적인 말이 어딨을까. 누군가가 힘들게 잘 견뎌왔다면 나 역시 묵묵하게 그 일을 견뎌야 하는걸까. 힘들다는 말을 입밖으로 내고 도와달라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위기의 상황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 놀랍게도 그건 나이든 어른들만의 반응은 아니었다. 여성과의 차별을 없애야 한다고, 약자를 도와야 한다고 말하는 젊은 남자들조차도 양육이란 이름 앞에서는 엄마의 '희생'을, '모성'이란 것을 당연시 받아들이는 것을 주변에서 자주 목격했다. 아니, 다른 남자들이야 그런다고 해도 저 남자는 저렇게 반응하면 안되는 거 아닌가, 싶은 남자들조차도 예외없이 아이에게 붙들려서 자신을 포기한 엄마를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가 다치거나 울게 됐을 때 '애 엄마는 뭐하고'가 먼저 나왔다. 아이 엄마는 아이를 두고 여행을 가서도 안되고, 퇴근후에 약속을 잡아서도 안된다고 생각하는 젊은 아빠들이 이 세상에 너무나 많다는 걸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한 순간 이 세상은 아이들 엄마에게 지옥 같았다.


이 책에서의 아빠는 아이를 본인이 직접 키우기로 한다. 아빠로서 딸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고자 한다. 엄마가 직장에 나가 일을 하는 사이 아빠는 아이에게 밥을 먹이고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놀이터를 함께 가고 박물관을 함께 간다. 그리고 그런 그의 눈앞에 그동안 그가 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이 보인다. 유모차를 밀고 들어갈 수 있도록 버스의 낮은턱이 눈에 띄고, 남자 화장실의 기저귀 갈아주는 시설이 눈에 띈다. 그가 아이를 키우는 것을 직접 해보지 않았다면 보이지 않았을 것들이었다. 물론 그는 사회적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당장 그의 부모로부터도 또 아내의 부모로부터도 게다가 동네 아주머니들로부터도 불편하고 딱한 눈빛을 받아내야 했다. 내 스스로 당당하다고 생각하려해도 그런 시선들을 견뎌내는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바라보는 내 관점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다른 사람의 시선은 단지 그 사람의 관점일 뿐이다. 지지하는 시선, 낮추어보는 시선, 관심 없는 시선, 호기심어린 시선등 다양한 시선이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이자. 왜 그동안 우호적인 시선만을 기대하고 있었을까. 좋은 말만 기다리다 보니 다른 말을 들으면 불편했다. (p.45)



그는 아이를 키우면서 비로소 아이와 함께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는 화장실가는 것조차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의 시간을 아이를 위해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게 된다. 아이를 낳으면 이 모든것들이 엄마들에게 당연하게 돌아간다는 것도 그는 깨닫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빠들은 실질적으로 수혜자가 된다는 사실도.



슈퍼맘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슈퍼맘 신화는 엄마의 책임감을 더욱 가중시키고 육아문제를 엄마 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겼다. 슈퍼맘이 될 수 없는 엄마들은 아이에 대한 죄의식을 강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죄의식을 보상하기 위해 아이들에게 값비싼 물건을 안겨주려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죄의식의 최대 수혜자는 누구일까. 엄마들의 책임이 늘면 상대적으로 책임이 줄어드는 사람들. 안타깝게도 엄마와 가장 가까운 사람 남편이다. 만약 토요일에 아내가 서령이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밖에 나가지 않는다면 나로서는 편안하고 좋은 일이다. 서령이가 엄마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할 테고 나는 그 틈에 여유로운 토요일을 보내겠지. 하지만 아내는 자신만을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이 훌쩍 날아가는 셈이다. (p.270)



언어는 단지 문장 그 자체의 사전적인 의미로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아이에게 말을 할 때 취했던 행동과 마음속으로 가졌던 감정까지 함께 전해진다. (p.175) 고 말하는 그를 보면서 단순히 아빠가 아이를 키우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걸 새삼 깨달았다. 그래, 아빠는 아이를 키우면서 세상을 다른 시선으로 볼 줄 알게 되었고 세상의 엄마들을 이해할 수도 있게 되었다. 힘들겠지, 하고 막연히 추측하는게 아니라 무엇이 힘든지를 알게 되었다. 아이의 몸이 자라는 순간순간 아빠의 생각 역시 자라고 있었다. 성장은 아이만 하는게 아니었다. 아이와 함께 있는 아빠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 책의 제목은 얼마나 적절한가. 



대체적으로 이 책을 좋은 마음으로 읽어내기는 했지만, 육아에 대해서만큼은 정답이 없는거겠지, 나는 몇몇 부분들이 불편했다. 그 중 가장 불편한 부분은 이 부분이었다.


때로는 선생님처럼 우리들을 혼내기도 한다. 건조대에 널브러진 서령이 손수건을 보고 아내가 "널려면 잘 널어야지"라며 내게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서령이는 엄마를 바라보며 "엄마, 아빠한테 화내지마!"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엄마 혼내줄거야"라며 엄마 손을 잡고 안방으로 들어가더니 "엄마 혼자 여기있어" 라면서 엄마를 방에 혼자 두었다. (p.165)


이 아이는 어린이집에 다니고있고 고작 네 살이다. 그런데 혼낸다며 방 안에 '혼자두는'것을 알고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에서는 아이를 혼낼 때 방 안에 그 아이를 혼자 두는걸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 불편했다. 그건 어쩐지 아닌것 같았다. 불편했다. 이 얘기를 여동생에게 했더니 아이들을 교육할 때 '생각의자' 라는게 있어서 거기에 앉아 잘못한게 무언지 생각하게 하는 과정이 있다는 말을 해주었다. 그런데 자기도 배운지 오래되어서 그게 몇 살부터 적용이 되는지는 모르겠다고. 그래서 나는 여동생에게 나도 그런 방법이 있다는 걸 어느 책에서 봐서 알긴 아는데, 그 어린 아기를 혼자 두는 방법으로 혼낸다는게 도무지 받아들여지지가 않는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책에 써두는 이 아빠를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방법도 효과가 있는 방법(?) 이라는 걸까?  다른 부모(어른)들에게는 이게 별로 안불편한가? 나는 아직 아이를 잘 모르기 때문에 불편한건가? 그렇지만 이 방법은 나는 어른에게도 사용하기 좀 꺼려지는 방법인 것 같은데? 



여동생은 육아를 하면서 '자신의 행복'을 강조했다. 신랑에게도 '내가 행복해야 내 아이도 그리고 당신도 행복해질 수 있어' 라고 말했고, 그래서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운동을 다니고, 친정에 아이를 맡기고 외박을 하기도 한다. 아직 그런 여동생을 보는 우리 아빠의 시선도 곱지 못하고(애 엄마가 어떻게 애를 두고 외박을 하냐!), 제부도 백프로 수용하는건 아닌듯 하지만, 옆에서 엄마와 내가 끊임없이 여동생도 즐겁게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는 게 필요하다고 얘기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에서도 그걸 말해준다.


내가 행복하지 않은데 어찌 세상이 행복할 수 있겠는가. 너의 행복을 위해서 내가 희생했다는 말처럼 모순인 말도 없다. 미래의 행복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늘 미래를 말하지만 지금 행복하지 않은데 내일이라고 해서 행복할까. (p.230)



아빠가 육아를 함께한다면 이 세상은 분명 지금보다 살기 좋아질 것이다. 여자들이 그리고 엄마들이 어떤점이 힘든지 몸소 깨닫고 나면 이 책속의 아빠처럼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질 것이고, 그 시선이 달라진다면 이 사회가 좀 더 엄마들이 편한쪽으로 바뀌는것도 쉬워질테니까. 아이를 키우면서 아빠들이 성장한다면, 이 사회가 성장하는 것도 무리가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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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3-02-13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축물을 설계할 때 예전과 다른 점 중에 하나가 공용 화장실에 기저기 거치대가 남,녀 화장실에 꼭 설치해야 한다는
것이라죠.(물론 일정규모와 용도의 건축물의 경우에 한하여..)

다락방 2013-02-13 12:59   좋아요 0 | URL
아, 안그래도 기저귀 거치대가 남자화장실에 더 많이 설치되어야 할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설계되는 건축물들은 그렇군요! 다행한 일이네요.

점심은 맛있게 드셨습니까, 메피스토님. 전 돈까스 먹었는데 완전 느끼했어요. 하아- 싫어요. ㅠㅠ

마노아 2013-02-13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크게 공감이 가요. 다락방님은 타미의 이모가 되면서 이미 성장하신 것 같아요. 좋은 이모예요. 좋은 어른이구요.

저는 점심으로 짜장면 먹었어요. 많아 보여서 옆사람 덜어줬는데 정작 저는 좀 모자란 감이 있고, 덜어받은 사람은 다 남겼어요...;;;;;

다락방 2013-02-13 14:36   좋아요 0 | URL
마노아님, 저 역시도 이모가 되어보지 못했다면 무조건 엄마에게 희생과 모성을 강요하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제게 조카가 생긴게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요. 생각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되는것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게되서 말이지요.

앗. 짜장면..먹고싶네요? ㅋㅋ 아니, 그러게 왜 덜어줬습니까. 사람이 자기 몫에 충실해야지요.(응?)
조만간 봅시다. 치킨에 소주 일병 해야지요. ㅎㅎ

2013-02-13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태그에 있는 '박찬일' 씨...
궁금합니다. (저자와) 어떤 관계이신지...
제가 좋아하는 분이라서요. :)

다락방 2013-02-13 14:33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아 완전 죄송해요. 제가 실수했어요. 말씀 안하셨으면 계속 그대로 둘 뻔했네요. 저자 이름 쓴다는게 박찬일이라고 써버렸어요. 아 완전 빵터졌네요. ㅎㅎㅎㅎㅎ
박찬일은 오타였으며 그러니 당연히 박찬일과 저자는 관계가 있을리가 없고 저 역시도 박찬일과 관계 없으며 이 책의 저자와도 관계 없습니다.

moonnight 2013-02-13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 너무 좋아요. 맞아요. 아이란 존재는 부모도 키우고 고모도 이모도 더 성장하게 만들죠. ^^

다락방 2013-02-14 16:23   좋아요 0 | URL
어쩌면 그래서 아이들이 태어나는건지도 모르겠어요. 어른들 좀 더 성장하라고. 확실히 저는 조카가 생기기전보다 지금 좀 더 나은 인간이 된 것 같아요. 어떤면에 있어서는요.

2013-02-13 2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14 16: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3-02-14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유명한 말이 생각나네요. 아프리카 속담이던가.

"아이 하나를 키우기 위해선 온 마을이 필요하다." ㅋㅎㅎ

고모도,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다 필요하지만, 제일 필요한 건 역시!!! 이모!!!

다락방 2013-02-14 17:39   좋아요 0 | URL
저희 집에 조카가 와있을 때면 할아버지 할머니 이모 삼촌 모두 다 있는데도 조카를 보기에 부족하다고 느껴져요. 제 여동생은 집에서 조카와 둘이 있을 때 대체 얼마만큼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걸까요?

제가 제 조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건데, 이모는 단발머리님 말씀대로 가장 필요한 존재인듯 합니다. ㅎㅎ

감은빛 2013-02-14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최근에는 분위기가 바뀌어가고 있는 느낌이예요.
제 주위에는 아빠들이 육아와 가사일을 분담하는 걸 종종 보거든요.
물론 더 많이 바뀌어야 하겠지요.

큰 애가 어렸을 때, 한 6~7년 전쯤에 육아휴직을 하고,
제가 아이을 돌보았거든요.
그때 전 백화점이나 마트 같은 곳에 유모차 끌고 다니는 거 재밌었어요.
주위 사람들의 다양한 시선을 즐기는 게 더욱 재밌더라구요.

다락방 2013-02-14 17:40   좋아요 0 | URL
제 주변엔 아직 육아와 가사를 분담하는걸로 보이는 아빠들이 없어요. 그래서 제게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만 느껴졌었거든요. 그런데 이 책을 읽고나니 이런 아빠가 좀 더 있을거란 생각이 들고, 그렇다면 차츰 바뀌어갈 수도 있는게 아닐까 하는 희망이 생기더라고요.

감은빛님! 감은빛님도 생각하셨던것처럼 아빠 육아 책 내세요, 얼른요!!

BRINY 2013-02-14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기가 태어나면 엄마, 아빠가 교대로 1년씩 육아휴직해야한다고 법적의무를 지우지 않는 한은 힘들 거 같아요...
그리고 '이모'는 아가에게도, 아가 엄마에게도 정말 필요한 존재인 거 같아요. 외동딸인 후배나 주위 사람들 보니 그렇더라구요.

다락방 2013-02-15 09:32   좋아요 0 | URL
육아를 하는 엄마에게 가장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같은 입장에서 바라봐줄 수 있는 사람인 것 같아요. 그래서 아마도 친정엄마와 이모가 필요한 존재가 되는것 같아요. 친정 엄마야 이미 자식을 키워본 경험이 있는 분이셔서 능숙하게 상황에 대처하실 수 있지만, 저 같은 경우에는 어린 아이와 있어본 적이 없었던 사람인지라, 조카 덕에 제가 많이 배우기도 하고 다른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해요. 아이가 자라는 걸 보면서 저도 자라고 있는것 같아요, BRINY 님.
 
일반적이지 않은 독자
앨런 베넷 지음, 조동섭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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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여왕은 어떤 책을 읽으면 그 책이 길잡이가 되어 다른 책으로 이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문들이 계속 열렸고, 바라는 만큼 책을 읽기에는 하루가 너무 짧았다. (p.28)


내가 책을 읽으면서 그 책 속의 책 때문에 다른 책을 읽고 싶다고 생각했던건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처음이었다. 당연히 책을 읽다가 서점에 가서 『위대한 개츠비』를 달라고 말했고. 그때가 이십대 초반이었는데, 그 일은 내게 몹시도 신선하고 새로웠으며 즐거운 경험이었다. 당시에 읽었을 때 위대한 개츠비는 내게 재미있게 읽히지 않았고, 나는 내가 무언가 이해를 잘 못하고 있는것 같다며 그 책을 친구에게 빌려줬다. 친구는 다 읽고 재미있다며 돌려줬다. 나는 이 책이 대체 왜 재미있다는걸까 싶어서 다시 읽었지만, 두번째 읽었을 때도 역시 위대한 개츠비는 재미 없었다. 그리고 이십대 후반에 다시 한 번 위대한 개츠비를 읽었는데, 책은 만나야 할 때가 있는 것일까. 그때는 그 책에 엄청 빠져버리고 말았다. 이건 잠시후 다시 얘기하기로 하고.


책에서 또 다른 책을 만나게 된 경우는 그 뒤로 여러차례 생겼지만, 또 한 번의 인상깊은 경험은 작년에(아니, 재작년인가..) 있었다. '필립 로스'의 『울분』을 읽다가 '버트런트 러셀'이 궁금해졌던 것. 러셀의 이름을 들어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나에게 그는 그저 무심한 존재였다. 관심의 대상이 전혀 될 수 없는 존재. 그러나 필립 로스가 나로 하여금 러셀을 찾아 읽게 했고, 그렇게 만난 러셀은 정말 엄청나게 멋졌다!! 차근차근 러셀의 책을 죄다 읽어보겠다고 생각해서 여태 두 권의 책을 읽었고, 세번째 책을 사두었지만 아직 읽지는 않았다.


책이 가진 미덕은 여러가지가 있다. 내가 처음 책을 읽기 시작한건 한글을 깨치자마자였는데, 만화책이든 신문이든 나는 그저 마냥 글자를 읽는게 신기했고, 그것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는게 재미있었다. 가끔 동네 어른들은 너가 정말 책을 읽기는 하는거냐며 신기해하고 내게 글자를 읽어보라 했고, 나는 내가 정말로 책을 '읽고 있음'을 드러내 보여주기도 했다. 그래, 나는 '재미있어서' 책을 읽었다. 그 뿐이었다, 그 때는. 그러나 재미로 읽기 시작한 책읽기가 감동을 주기도 했고 지식을 주기도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지혜로 연결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가보지 않은 길을 가게 해주고 내가 경험해보지 않은 일들에 대해 경험하게 해준다. 내가 지금과는 다른 곳에서 다른 사람이 되어 다른 삶을 살아보는 것이 책 속에서 가능해진다. 



몇 년 전만 해도 여왕은 노먼이 어떤지, 아니, 어느 누가 어떤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제 여왕이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면, 그것은 여왕이 전보다 사람의 감정을 더 많이 알게 되었기 때문이며 자신과 다른 사람의 입장을 바꾸어 생각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p.122)



영국의 여왕이 오십년간 여왕 자리에 있었으면서 뒤늦게 책읽기의 재미를 알게 된다. 이제 여왕은 책을 손에서 놓는 일이 없다. 책읽기에 푹 빠진 여왕은,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다른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해볼 수 있게 된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더 많이 알게되고 그 사람을 배려하게 되는일, 여왕에게 이것은 책읽기가 선물한 것이다. 그래, 책읽기의 유용함은 또있었다. 공감능력을 불어넣어 주는일.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행복해도 해보고 슬퍼하기도 해보는 것, 상실감에 눈물 흘리고 짜릿함에 소름이 돋는것, 이 모두를 책읽기가 가능하게 해준다. 


그래서 나는 어릴때부터 어린아이 스스로 책을 읽는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책이 아이에게 보여줄 수 있는 세계는 무한하고, 그 아이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보게 하는 일은 그 아이의 '앞으로 만나게 될 사람과 맺게 될 관계'들에 있어서 중요하고 단단한 기반이 될 것이다. 물론, 그 책이 그 아이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아이 스스로 책을 찾아 읽고 스스로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책을 읽는건 좋으니까 읽어!' 라는 강제성은 오히려 책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것임이 틀림없다. 강제해서 잘 되는 꼴을 못봤다, 나는. 그게 뭐든.



책읽기가 즐거워지면서 좋아하는 작가가 생기게 된다. 모르는 작가의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그리고 그 책이 몹시 좋았을 때, 그 즐거움을 온 몸으로 흡수하며 그 작가의 또다른 책을 찾아보게 되지 않는가. 게다가 그 작가의 책이 아직 많이 남아있고, 심지어 생존해 있다면, 또 나오기를 기대할 수 있지 않은가. 이 모든 것들이 짜릿한 기대가 아닌가. 여왕은 책읽기에 몰입하게 되면서, 이제 이런 기분도 느끼게 된다.


"책을 읽고 마음에 든 작가가 생겼는데, 그 작가가 쓴 책이 그 한 권만 있는 게 아니라, 알고 보니 적어도 열 권은 넘게 있는 거예요. 이보다 더 즐거운 일이 있을까요?' (p.79)



위에 언급했던 『위대한 개츠비』얘기로 돌아가자면, 조금 더 나이 들어서 읽는 위대한 개츠비는 처음 읽을 때와 달랐다. 도스트예프스키의 『죄와 벌』도 마찬가지. 고등학생때 나는 그 책을 읽기를 수차례 시도했으나 열장도 넘기질 못하고 다시 꽂아두어야 했다. 그러나 이십대 중반에 다시 읽는 죄와벌은 달랐다. 어떤 책을 언제 만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그 책을 '다시' 만나기까지 읽었던 다른 책들이 나로 하여금 그 책을 읽게 도와준것일런지도 모른다.



여왕은 브론테 자매에 관한 책에서 자매의 힘겨운 어린 시절 부분을 읽고 있었다. 그 책을 읽어도 다시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다른 책을 찾던 중, 오래전 이동도서관에서 빌렸다가 허칭스에게 받았던 아이비 콤프턴버넷의 책이 서가 구석에 꽂혀 있는 것을 보았다. 당시 그 책의 책장을 쉬이 넘기지 못하고 잠들뻔했던 것을 떠올리며, 다시 그럴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전에는 느리다고 생각했던 그 소설이 이제 가슴 시원할 만큼 활기차게 느껴졌고, 여전히 건조하기는 하지만 신랄하게 건조했다. 아이비 경의 담백한 문체와 여왕 자신의 문체가 비슷해서 여왕은 자기 글에 자심감을 얻기도 했다. 그러자 여왕은 생각하게 되었다(그리고 이튿날 공책에 적었다). 독서는 근육과 같고, 자신은 그 근육을 발달시킨 것 같다고. (pp.115-116)



아, 진짜 근사하다! 나는 지금도 소설이 아닌 책을 거의 읽지 않고, 그것은 사실 내게 약간의 컴플렉스를 가져다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다 한 권씩 읽을 수 있는건 다 그동안 소설을 읽어왔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내가 소설을 읽지 않은채로 지내왔다면, 아마 비소설류의 책도 읽을 수 없었을 것이다. 




책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을 하게 하고 느끼게 한다. 울게 하고 웃게 한다. 더 나은 삶과 더 나은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더 나은 환경과 더 나은 사회를 꿈꾸게 한다. 그리고 책이 하는 역할은 여기까지다. 그 다음, 그 모든 것들을 실천해서 한 걸음 내딛게 하는건 책이 아니라 '책을 읽은 내'가 하는 일이다.



"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열성적인 독자가 되었습니다. 책 덕분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인생이 풍부해졌습니다. 그러나 책은 거기까지만 짐을 이끌 뿐이었죠. 그래서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는 사람에서 글을 쓰는, 아니 쓰려고 애쓰는 사람이 될 때가 말이죠." (p.128)




나야말로 이 책덕에 즐거운 책읽기를 할 수 있었다. 아는 작가의 이름이 언급될 때는 어찌나 기쁘고 흐뭇하던지. 게다가 나는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도 읽은터라, 이 책에서 언급되는 '해비셤 부인과 핍'에 대한 부분에서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이쓰! 


책을 읽고 또 좋아하는 사람에게 즐거운 책읽기를 선사할 수 있는 책이다. 얇고 사랑스럽다. 처음부터 끝까지의 내용이 짐작한대로 특별할 것 없이 흘러가지만, 뭐, 그런들 어떠한가. 짐작한대로 흘러가지 않는 건 추리소설에서 해주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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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3-01-23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주잔 받으려고 바로 어제밤에 신용으로 결제를 했는데
아니 이건 또 무슨 달콤한 유혹이랍니까. 우선은 장바구니로 휘리릭~

그런데 다락방님 저기요......
저도 <상실의 시대>부터 였던거 같아요. 그리고 위대한 캐츠비는 지금도 전 재미없습니다만,
책과 사람은 만나야 하는 때가 따로 있는건 맞는거 같아요.
고딩때 친구가 권해줫던 데미안이 제겐 너무 어려웠거든요.
나중에 어느순간 그 책을 다시 꺼내 읽었을때
책 속으로 확~ 빨려들어가는 느낌. 아직도 생생합니다.
책이 책을 부른다. 그죠?

다락방 2013-01-24 18:35   좋아요 0 | URL
저는 머그컵은 갖고 싶었지만 소주잔에 대해서는 갖고 싶다는 생각 전혀 없어서, 거기에 있어서는 자유로웠지롱요. 부럽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물론 그거랑 상관없이 1월달에 산 책만 27권가량 되는것 같아요. 더되면 더됐지 덜되진 않는다능..orz

저는 데미안도 이십대 중반에 읽었는데, 그때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나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내용도 기억 안나지만 뭐가 좋았던건지도 기억이 안나서 조만간 데미안에 다시 한번 도전해보리라, 생각만 하고 있어요. ㅎㅎ


책이 책을 부르는건 참 즐겁지 않나요, 마중물님? 으흣.

레와 2013-01-23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는 마치 '지금 읽고 있는책이 재미 없더라도 중고책으로 팔지 말고 책장에 꽂아두라. 아직 때가 안 되었느니..' 라는 계시가 담신 페이퍼 같소만. ㅋㅋㅋㅋㅋㅋ


이번에 [레미제라블]을 읽으면서 깊이 후회가 되었던게, '나는 왜 이렇게 책 읽는걸 늦게 시작한 걸까'였어요.
빅또르 위고가 책에서 언급한 모든걸 이해하고 싶었어요. (나 반도 이해 못한거 같아.)
그리고 쟌느님이 리뷰나 페이퍼에서 이야기하는 것들도 모두다 이해하고 공감하고 싶어요.
어제 올린 [무도회가 끝난 뒤] 리뷰는 정말 박수가 나오더만.

무튼, 책읽기의 즐거움은 빨리 알면 알 수록 인생이 즐거워지는데, 나는 늦게 깨달아 속상합니다.

다락방 2013-01-24 18:37   좋아요 0 | URL
중고샵에 팔아도 됩니다, 레와님. 읽고 싶어지면 다시 사서 읽으면 되니까요. 너무 연연해하지 맙시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리뷰를 쓰는것도 읽는것도 책을 읽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가진 지식이 더 많다면 더 잘 읽을 수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지만 가장 좋은건, 그런 전반적 지식 없이도 잘 읽히면서 오히려 지식을 전달하는 글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몰라도 읽을 수 있지만, 읽고 나니까 뭔가를 알게 되더라, 라는 글이요. 전 그런 글이 더 좋아요, 레와님. ㅎㅎ

늦지 않았어요, 레와님. 지금부터 부지런히 읽어요. 오십년은 더 읽을 수 있잖아요!!

heima 2013-01-23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셨군요 다락방님!! ^ ^ 같은 책을 읽고 이렇게 다른 멋진 리뷰를...!!

저는 아직 위대한 유산을 못 읽었는데, 이 책을 읽는 내내 꼭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런 의미에서 해비셤 부인과 핍을 알아들으신 다락방님은 행운아- :)

다락방 2013-01-24 18:38   좋아요 0 | URL
아니, 헤이마님. 저로 하여금 눈물 흘리게 만든 그 위대한 유산을 아직도 안읽으셨단 말입니까? 당장 읽으세요, 당장요. 정말 재미있습니다. ㅎㅎ 후회하지 않으실 거에요. 얼른 읽으세요!!

헤이마님 덕에 즐거운 소설 읽었어요.
:)

단발머리 2013-01-24 0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서재에 이 책이 꽂혀 있어서 나도 내 서재에 꽂아두었는데, 벌써 리뷰를 남기셨군요~~~ 부지런하셔라~ㅋㅎㅎ 책을 만나는 때가 있단 말씀엔 100% 공감이예요. 저도 <상실의 시대> 땜시 <위대한 게츠비> 도전했다가 두 번이나 실패했더랬죠. 대학가서 다시 읽어도 큰 재미를 못 느꼈다지요. 그렇다면, 혹시! Tonight???

다락방 2013-01-24 18:39   좋아요 0 | URL
이 책은요 단발머리님, 일단 손에 쥐면 후딱 읽게 되요. 술렁술렁 잘도 넘어가지만 일단 분량 자체도 얇아서 말이지요.

이제 다시 한번 위대한 개츠비를 읽어보시라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단발머리님. 물론 저는 피츠제럴드라면 위대한 개츠비보다 단편을 훨씬 훠어어어어어어어얼씬 더 사랑하지만요. 훗.
 
알리와 니노
쿠르반 사이드 지음, 이상원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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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슬람교 남자와 기독교 여자를 만나게 하다니, 바쿠의 남자와 그루지야 여자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다니, 유럽을 꿈꾸는 여자와 아시아를 사랑하는 남자 사이로 안착하다니, 사랑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걸까. 그래, 나는 사랑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이 책에 대해서 무슨말을 더 해야할지도 잘 모르겠다. 심지어는 별을 셋을 줘야할지 넷을 줘야할지도 판단이 안돼. 가끔은 별점이 방해가 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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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3-01-22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면 락방님은 이미 연예박사~!

다락방 2013-01-24 10:01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 연애박사보다는 연애쟁이가 훨씬 매력적이죠? ㅋㅋㅋㅋㅋ
 
유럽, 빵의 위로
구현정 지음 / 예담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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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주전에 여동생과 나란히 앉아 토요일 아침의 『걸어서 세계속으로』를 보고 있었다. 그날따라 유독 재미가 없었다. 지루했다. 나는 내가 무슨말을 하는지도 모른채로, 아이씨, 왜 뭐 먹는지 안나와! 라고 말했고 옆에 있던 여동생은 언니는 뭐 먹나 궁금해서 저거 보는거냐고 물었다. 그러고보니 그랬다. 나는 다른 지역에선 무얼 먹나, 그게 궁금해서 그 프로를 시청했던 것 같다. 그 프로를 보고 무얼 보고 싶다거나 무얼 경험해보고 싶다거나 한 적은 없는걸 보면. 난 항상 뭔가 먹어보고 싶어서 거길 가보고 싶었던거다. 


여행기를 읽는것도 마찬가지. 내게 여행기는 그동안 재미없는 책이었는데 간혹 신나게 만드는 여행기가 있다. 그런 경우엔 내 흥미를 끄는 음식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얼마전에 읽은 체코 여행기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성당을 조용히 관람한것만 나와서 읽자마자 팔아버렸다. 왜 무얼 먹는지를 말해주지 않는거야, 왜, 대체 왜! 


그런참에 이 책 『유럽, 빵의 위로』란 책을 보니 얼마나 반갑던지. 빵이다, 빵! 그것도 유럽의 빵!!






























내가 이 책에 기대한 건, 빵 사진이 전부이다. 어디에서 어떤 빵을 먹는지, 그 빵들은 어떤 느낌을 주는지만 알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거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글솜씨도 있었다. 저자가 새로운 빵을 먹기전에 기대하고 또 먹으면서 느끼는 충만함에 대해 얘기할 때, 나에게 그 느낌은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브레첼은 짭짤한 맛과 쫀득쫀득한 식감 때문에 맥주와 더없이 잘 어울린다. 특히 독일 남부에서 날씨 좋은 날 비어가르텐에 앉아 맥주 한 잔과 거대한 브레첼 하나를 즐기는 이들을 보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표정들이다. (p.21)


그중에서도 바게트가 가장 맛있는 순간은 살라미 한 조각을 올리거나 마음에 드는 치즈를 두껍게 바를 때가 아닌가 싶다. 가끔 햇살이 좋은 날에는 발코니에 앉아 살라미와 바게트 그리고 화이트와인 한 잔을 곁들인다. (p.39)


내 꿈이 살아나던 그 순간에 우리 테이블 위에는 거품이 싱그럽게 올라온 카푸치노가 있었고, 하얀 접시에는 아펠 슈트루델(Apfel Strudel)이 담겨 있었다.

얇은 빵 안쪽으로 익힌 사과 조각들이 시나몬과 버무려져 포근하게 안겨있고, 그 주위를 바닐라 소스가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다. 처음 보는 것이었고 이국적인 느낌이었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향기들이 모두 모여 있다니 ‥‥‥사과향, 계피향, 바닐라향. 그것은 코끝으로 느끼는 회복의 환희였다. (p.48)



빵은 비극일 수도 있다. 빵이 그려내는 장면은 굶주림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밥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빵을 먹는 일들도 있다는 것을 나는 물론 알고 있다(이 점은 나중에 저자도 언급한다). 그래서일까, 나는 읽다가 자꾸만 내 자신이 삐딱하게 나가려는 것도 같았다. 흥, 잘먹고 잘 사는 사람이군, 하는 생각이 들었단 말이다. 이건 빵에 대해 말하는 책의 저자에게 가져야할 바람직한 태도는 아닐텐데, 나는 찌질하게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순간의 시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결국은 저자가 느끼고 묘사하는 장면들에 대해 황홀경에 빠진것도 사실이다. 아, 이 여유로운듯한 일상이라니. 빵과 맥주라니, 빵과 와인이라니. 물론 나는 살라미와 치즈에 더 반하기는 했지만, 나른한 오후와 게으른 아침이 연상되면서 행복한 장면이 그려지는거다. 





















































가장 놀랐던 건, 이 책 안에서 다른 책들을 만나볼 수 있다는거다. 빵에 대한 이야기말고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던 내게, 저자는 자신의 독서 내공을 보여준다. 책을 읽다가 메모를 해둔 것일지, 혹은 빵을 대하면서 예전에 읽었던 책들을 떠올리게 된 것인지, 거기까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책안에서 알랭 드 보통을 만나고 무라카미 하루키를 만난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다른 작가들도 가끔.



크루아상에 대한 부분에서는 알랭 드 보통의 글을 떠올린다.


프루스트는 아침식사로 무엇을 먹었을까? 그의 병이 너무 심해지기 전에는 카페오레 두 잔이 그의 이름의 머리글자가 새겨진 은주전자에 담겨 나왔다 ‥‥‥(중략) 제대로 바삭바삭하고 고소하게 구울 줄 아는 빵집에서 하녀가 가져온 크루아상을 커피에 찍어 먹었다. - 알랭 드 보통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중에서 (p.57)


프린츠레겐텐 토르테에 대해서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떠올린다.


PRINZREGENTENTORTE‥‥‥라는 식의 음식 이름을 일일이 수첩에 메모하면서 어떻게 밥을 맛있게 먹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못한다. 대학 1학년 때의 독일어 강의가 생각나서 속이 거북해진다. -무라카미 하루키 <먼 북소리> 중에서 (pp.252-253)



나는 위의 두 책을 모두 읽었다. 그러나 저자가 언급한 부분들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결코 생각나지 않는다. 대체 이걸 어떻게 알고 인용한걸까? 놀랍다.





나는 대부분의 육중한 사람이 그러하듯이 빵을 좋아한다. 떡은 잘 먹질 않지만 빵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러나 밥보다 빵을 좋아하진 않는다. 끼니는 무조건 밥이어야 하고, 끼니와 끼니 사이의 허기짐에 대응해서라면 빵을 선택하는 것이 무척 행복하다. 생크림이 들어간 빵도 좋고 아몬드가 박혀 있어도 좋다. 단팥이 들어가있어도 좋고 딸기쨈만 발라 먹는것도 좋다. 물론 햄과 치즈가 가득 들어가있는 빵이라면 더할나위 없이 좋고.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빵은 나를 유럽으로 데려가지 못했다. 나로 하여금 이 빵들을 먹기 위해 유럽으로 날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하지는 못했다. 빵이라면 대한민국 서울 강동구 천호동에서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으니까. 게다가 빵은 내가 간식으로서 만나는 음식이 아닌가. 간식을 위해서 저 멀리로 다녀오고 싶다는 생각은 들질 않는다. 물론 내가 낯선곳을 방문했을 때, 그곳의 빵을 죄다 먹어보고 싶은건 사실이다. 나는 아주 맛있게, 여유를 즐기면서, 그러니까 저자가 언급했던 맥주나 와인들을 한 손에 들고 그 빵들을 음미하고 싶다. 내가 아주 먼 곳에 갔을 때, 낯선곳에 들렀을 때 빵을 즐기고 느끼고 싶은건 분명 사실이지만, 그것들을 즐기기 위한 여행을 작정하게 되지는 않는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부러워했던 건 유럽의 어느 나라도 저자가 거주하는 독일에서 자동차로 여행이 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몇 시간만 달리면 오스트리아로 갈 수 있고 좀 더 긴 시간을 달리면 이탈리아를 갈 수도 있다. 자동차로.


까르멜로와 루칠라의 결혼식은 그들의 고향인 이탈리아 페루자에서 열렸다. 독일맥주가 그립다는 까르멜로의 얘기에 우리는 자동차에 그가 좋아하는 에르딩어 맥주를 가득 싣고 독일 베를린에서 장장 15시간을 운전하여 페루자에 도착했다. (p.220)


아, 부럽다. 나도 15시간을 운전하여 포르투갈에 닿았으면 좋겠다, 21시간을 운전하여 뉴욕에 닿았으면 좋겠다. 12시간을 운전하여 호주에 닿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나는 각 나라에 머물고 있는 나의 친구들에게 전화해서 그들이 먹고 싶다는 한국 음식을 트렁크에 넣고 갈 수도 있을텐데. 중간중간에 휴게소에서 쉬면서 우동을 먹을수도 있을테고, 몇 시간 눈을 감고 지친 몸을 쉬기 위해 길 한 복판의 호텔에 들를 수도 있을텐데. 쓰읍-





그러나 이 책의 부작용은 이런 부러움이 아니다. 읽을 당시에 느껴지는 빵에 대한 허기짐이다. 엊그제 퇴근 시간 지하철에서 이 책을 읽기 보기 시작했는데 정말 미치겠는거다. 책의 절반도 채 읽지 못했는데도 나는 집 근처 빵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빵집을  털었다. 집에 갈 때까지 나는 무겁다고 중얼거렸다. 세상에, 빵을 '무거울만큼' 사다니. 식구들은 무슨 빵을 이렇게나 많이 사왔냐고 내게 물었고, 나는 차마 빵 책을 읽어서라고는 대답하지 못했다.






















































오늘 아침까지도 내가 사온 빵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내가 그 순간 정신줄을 놓았음을 겸허한 마음으로 인정한다. 배고플 때는 이 책을 보지 말자. 더불어 배고플 때는 빵집에 들어가지도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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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3-01-18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빵, 너무 맛있어 보여요.
다락방님 오랜만이에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늦었지만 ㅎㅎ)
저도 맛있는 것들 나오는 거 좋아해요. 글구 실제로 그거 먹고 싶어서 막 난리를 쳐요.ㅎㅎ
어느새 점심시간이네요. 점심 맛있게 드세요.^^

다락방 2013-01-18 12:27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책 읽으면서 얼마나 많은 충동이 들었는지 몰라요. 저 별 모양 빵도 크루아상도 케익도 얼마나 먹고 싶던지요. 결국 빵집에서 빵을 엄청나게 사가지고 집에 돌아갔지만 만족감을 주는 빵은 없더라구요. 사람은 역시 먹고 싶은 걸 먹고 살아야 해요. 흑흑.

꿈꾸는 섬님도 점심 맛있게 드세요. 그리고 해피 뉴 이어! :)

2013-01-18 1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18 1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무개 2013-01-18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ZEIN-1BEE-B2BC

저는 아직도 소보로빵이 최고 ^^::::::::::
어제 저녁대신 소보로빵한개와 오렌지 쥬스를 마셨어요. 전 몸이 안 좋을때만 꼭 빵이 먹고 싶더라구요.

다락방 2013-01-18 13:22   좋아요 0 | URL
아우. 점심에 쏘이까르보나라떡볶이 라는걸 먹었는데 느끼함 쩔어요. --;;
지금 그래서 자리에 앉아 귤 까먹고 있습니다. 다시는 시키지 않으리라 결심했어요.

쿠폰은 고맙습니다. 지금 막 등록했어요. 희희. 위의 비밀님까지 두개를 주셔서 현재 필요한 수량 모두 득템. ㅋㅋㅋㅋ

제 책상에는 아침에 제가 가져와서 조금 뜯어먹은 모카빵이 있습니다. 빵빵빵빵빵~

아무개 2013-01-18 14:00   좋아요 0 | URL
쏘이까르보나라떡볶이는 이름만으로도 느끼뤼합니다. 느끼느끼~

주말에 무슨 영화 보시려구요? 전 영화 보는대신 다락방님 페이퍼로 대리 만족하고 있으니
엄청나게 재미있는 페이퍼 기대합니다.^^

두시간 후면 퇴근...고양이 에방접종하러 가야해요.

다락방 2013-01-19 10:02   좋아요 0 | URL
[신의 소녀들]을 보고 싶은데 상영관이 없고 ㅠㅠ 그래서 [이 남자가 사랑하는 법]을 볼 예정입니다. 므흣므흣. 주말을 보내고 나서 재미있는 페이퍼를 쓰려면 제가 재미있는 일을 겪어야 하겠지요. 재미있는 일상을 보내야 하겠지요. 저도 그럴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뭔가 기대되는데요. ㅋㅋㅋㅋㅋ

moonnight 2013-01-18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예전에 빵순이라고 불렸던 시절도 있었지만 -_- 나이 들면서 식성이 바뀌었는지 이젠 빵을 거의 안 먹게 되었어요. 누가 주면 맛이나 볼까. 정도예요. 어쩐지 슬퍼져요. ㅠ_ㅠ 빵집을 털어서 무거울 정도로 빵을 사셨단 대목에서 막 부러워지는 달밤입니다. ^^

그나저나, 저역시 내가 모르는 도시에 대해 얘기할 때, 음식 얘기가 빠지면 바로 흥미를 잃습니다. ^^;;;

다락방 2013-01-19 09:56   좋아요 0 | URL
저도 제가 '맛이나 볼까' 하는 정도의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런 마음으로 모든 음식을 대하고 싶어요. 그런데 언제나 엄청나게 많이 먹자 모드로 음식을 대하기 때문에 지금의 육체를 (ㅠㅠ) 이룩하게 된 것 같습니다. ㅠㅠ

아, 그나저나 문나잇님. 이렇게 먹을걸 좋아하는 저에게 다이어트는..아주 먼 일이겠지요? ㅠㅠ

관찰자 2013-01-18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매장 바로 맞은편이 수제 빵집인데요.
지금 그 빵집 사장님이 저희 가게 오셔서 커피를 드시고 계세요.
그런데 다락방 님은 빵 얘기를 이렇게 먹고 싶게 하시면서,
배가 고플때는 빵집에 가지 말자니요.ㅠㅠ

우리 빵집 사장님께 이 글을 보여 드려야 되겠어요.ㅋㅋ
빵집 사장님. 좌절하시겠네요.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빵이 많다는 데서 한번,
배고플때는 빵집에 가지 말자에서 또 한번.ㅋㅋ

다락방 2013-01-19 09:55   좋아요 0 | URL
배가 고플때 빵집에 가면 정신줄 놓고 한아름 사잖아요. 다 먹지도 못할 만큼의 양을 말이지요. 그러니 배고플 때는 빵집에 가면 안돼요. 배고플 때는 시장에 가도 안되고 마트에 가도 안돼요. ㅠㅠ

비로그인 2013-01-18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마 빵책을 읽어서라고는..에서 빵! 터졌어요!!!!!!!
그리고...왠지 그 곳에선 엄청난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 것만 같은~ 강동구 천호동!!!

다락방 2013-01-19 09:54   좋아요 0 | URL
강동구 천호동에서 무슨 엄청난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ㅎㅎㅎ 그저 제가 많이 먹는 일..만 일어납니다. 흐흣

노이에자이트 2013-01-18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시다 기쿠지로 <양과자 세계사>라는 책이 있는데 아이스크림 크루와상까지 다루고 있어요.추천!

다락방 2013-01-19 09:53   좋아요 0 | URL
오, 그렇군요. 방금 검색해봤는데 미리보기가 안되네요. 표지만으로는 안땡기는데..

dreamout 2013-01-18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 앤 폴리나. 버터 브레첼 강추! ㅋㅋㅋ

다락방 2013-01-19 09:52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저는 드림아웃님이 책 말씀하시는 줄 알고 알라딘에 폴앤폴리나 넣고 검색했는데 안뜨는 거에요. 그래서 띄어쓰기 해야하나? 하고 갸웃하다가, 뒤에 버터 브레첼 때문에 혹시나 싶어 구글에 넣었더니 빵집..이 뜨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버터 브레첼이 뭔지도 확인 했습니다!! 여기가 드림아웃님 단골집이에요? 홍대라서 제가 갈 일은 거의 없어 보이네요. 음..역시 빵은 저를 움직이지 못하네요. 하하하하하
나중에 버터 브레첼 드시면서 제 생각 나시면 택배로 쏴주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

건조기후 2013-01-19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여행 프로그램에 먹는 게 안 나오다니 정말 화나는 프로네요. 뭐하자는 거야 ㅋㅋㅋ

예전에 집이랑 가까웠던 빵집에 햄치즈 잔뜩 들어간 고로케.. 비스무리한 빵이 있었는데 완전 좋아했었어요. 근데 이사온 이후로는 멀어서 잘 못 가요 ㅜ 그거 말고 제일 좋아하는 건 역시 바게트 ㅎㅎ 그리고 막 구워낸 식빵 덩어리 째 사와서 뜯어 먹기. ㅋ

다락방 2013-01-21 16:57   좋아요 0 | URL
먹는거에 치중하지 않는 여행 프로그램은 싫어요. ㅋㅋㅋ 스치듯 잠깐 언급만 하는건 정말이지 참된 여행인의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햄치즈..잔뜩 들어간, 이라뇨. 아아아아 배고파 미치겠어요. 샌드위치가 눈 앞에 있다면 숨도 안 쉬고 씹어 먹을것 같아요. 아아- 먹고싶다 ㅠㅠ 저도 엊그제는 모카빵 가져와서 뜯어 먹었어요. 손으로 뜯어 먹다가 안되겠다 싶어서 입으로 뜯어먹었어요. 곰처럼...사자처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13-01-19 1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3-01-21 16:58   좋아요 0 | URL
땡스얼랏!

프레이야 2013-01-19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흑 빵순이가 제 별명인데ㅜ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유혹이ㅎㅎ 저 지금당장 빵 사러 나갈래요. 이런 책이 다 있다니 ᆢ

다락방 2013-01-21 16:58   좋아요 0 | URL
ㅎㅎ 빵 사가지고 오셨습니까, 프레이야님. 어떤 빵을 좋아하세요? 전 샌드위치가 참 좋아요. 햄과 치즈가 들어간 샌드위치요. 빵은 그 다음이에요. ㅎㅎ

프레이야 2013-01-21 23:07   좋아요 0 | URL
빵은 다 좋아해요. 방금도 한 개 먹었어요. 만쥬 종류로요.ㅎㅎ

노이에자이트 2013-01-19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내용엔 사진이 많아서 도움이 많이 됩니다.저자가 이야기 솜씨가 좋더군요.아무래도 지루하면 읽기 싫잖아요?

다락방 2013-01-21 16:59   좋아요 0 | URL
아, 사진도 많군요. 미리보기가 되면 좋았을텐데. 잘 알겠습니다.

Kir 2013-01-21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밥보다 빵이 좋은 사람이라 놓칠 수 없다며 찜해두었는데, 다락방님은 벌써 보셨군요^^
전 커다랗고 담백한 빵을 따끈할 때 손으로 뚝뚝 잘라 먹는 게 좋아요~

다락방 2013-01-21 16:59   좋아요 0 | URL
저는 밥을 더 좋아하면서도 빵도 좋아하니까 또 먹는걸 좋아하니까 이런 책이 있단걸 알게 되자마자 급결제를 ㅋㅋㅋㅋㅋㅋㅋㅋ먹는것에 있어서는 엄청나게 열정적이에요. ㅎㅎㅎㅎㅎ
전 햄이 겹겹이 들어간 샌드위치 먹고 싶어요. ㅠㅠ

2013-01-21 17: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21 2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22 1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22 1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27 0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