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 남성, 여성 그리고 강간의 역사
수전 브라운밀러 지음, 박소영 옮김 / 오월의봄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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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전 브라운밀러는 이 두꺼운 책을 통해 강간의 역사를 드러낸다.


여성 입장에서는 강간을 매우 간단하게 정의할 수 있다. 누군가가 자신의 몸에 강제로 성적으로 침입하는 일이자, 사적이고 개인적인 내부 공간을 동의 없이 침입당하는 일이다. (p.589)



강간이라는 것이 나의 의지에 반해 일어나는 나의 몸에 대한 강제적 침입인만큼, 이토록 긴 강간의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이 책을 우리 모두가 읽고 그간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이 힘든 책을 읽으라고 추천하는 것은 주저하게 된다. 나도 힘들었는데 어떻게 당신까지 힘들게 할까. 그러나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단 문제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것이 문제인지 알아야 그 해결방법을 찾을 수 있다.


수전 브라운밀러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마지막 12장에 다 나와있다. 강간 문화를 바꿀 것, 법과 법 집행자를 바꿀 것, 그리고 여성 자신에 대한 생각과 시선도 바꿀 것. 이는 작년 불용시위에서도 여자들이 줄기차게 외쳐왔던 바고, 또 여성이라면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당연한 결과이며 방법이다. 그러나 그것의 실천은 멀고도 멀어, 수전 브라운밀러조차도 그것이 단시일내에 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전통적으로 여성은 관할 경찰서와 검찰, 배심원단, 판사석에서 상고법원과 대법원에 이르기까지 법이 집행되는 모든 주요한 영역에서 배제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이런 현실은 강간 피해자에게 남성이 고안한 사법 체계 내에서 정의를 추구해야만 한다는 이중의 핸디캡을 부과한다. 그러므로 현실을 반영하도록 바뀌어야 하는 것은 법뿐만이 아니다. 법을 집행하고 정의를 수호할 막대한 책임을 부여받은 사람 역시 바뀌어야만 한다. (p.607)


여성이 완전한 평등을 쟁취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법 집행의 핵심 영역에서 남성과 동등한 지위parity를 획득하는 투쟁에 달려있다. 나는 정말로 그렇게 확신한다. 법 집행enforcement 이란 말 그대로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 강제력force을 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강제력은 초보적인 형태의 탈리오 법칙이 등장한 이래로 남성의 특권이었다. 남성의 몸집과 무게, 힘, 생물학적 구조뿐 아니라 여성의 진출을 차단하면서 의도적으로 남성만 특정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허용해온 법과 관습 덕택에 남성은 독점적으로 법을 집행할 특권을 누려왔다. (p.607)




수전 브라운밀러가 말한 것처럼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경찰, 검사, 판사에 이르러 법을 집행하는 모든 이들이 지금처럼 남성 중심으로 되어있지 않다면, 세상은 분명 지금과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가혹항 성범죄에 '가장이다', '초범이다', '음주였다' 등의 각종 핑계로 감형해주는 일이 지금보다 훨씬 줄었을 것이다. 피해자인 미성년자 아이들에게 비난의 화살이 향하도록 두지 않았을 것이다. 강간과 성폭행 범죄가 일어나면 일단 여자를 꽃뱀으로 의심하는 일부터 시작하는 문화 자체가 바뀌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여자의 말을 의심부터 하는 게 아니라 믿기부터 한다는 걸 많은 사람들이 힘있는 자리에서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간당했다는 걸 알리고나서 그 여자가 받을 이익에는 뭐가 있을까? 그러나 그걸 얘기하는 순간 여자는 꽃뱀이 되고, 한 탕 하려는 여자가 되고, 행실이 바르지 못했을 거라는 의심을 받고, 그러게 왜 그랬느냐는 질책을 받는다. 지난달에 읽었던 《페미사이드》에서도 나왔던 이야기지만, 강간을 신고했을 때 재판은 마치 피해자를 심문하는 것처럼 이루어진다. 너는 정말 순수한 피해자인지, 니가 먼저 꼬리친 것은 아닌지, 니가 남자를 자극하지는 않았는지. 그런 상황에서 여자들은 강간 피해 말하기를 꺼려하게 되고 범죄는 묻혀진다.




여성은 다른 여성의 말을 믿지만, 남성은 그렇지 않다. (p.607)




정치에도 마찬가지. 정치에서 활약하는 여성이 지금보다 더 많아진다면, 최소한 남자들 만큼의 수라도 유지가 된다면 세상은 역시 지금과 달라졌을 것이다. 직장 역시 마찬가지. 여자 상사가 더 많다면 직장 역시 또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법이,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바뀌어야 하고, 강간 문화 자체도 바뀌어야 한다.



과거에는 여성이 남성을 자신의 합법적인 보호자로 인정하고, 입법 과정부터 법의 집행까지 남성들에게 맡겨두는 것 외에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만, 이제는 그런 불균형을 바로잡는 일을 당장 최우선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 (p.607)



그러나 가해자를 보호하는 관대한 법 제도만이 강간 이데올로기를 지원하는 것은 아니다. 남성 강간 이데올로기로 사회를 선동하는 데는 남성이 독점한 법 집행 권력 이상의 힘이 작용했다. 우리 사회 모든 영역에 걸쳐 영속화된 문화적 가치가 남성 강간 이데올로기에 끊임없이 발화성 높은 연료를 제공해왔다. 그러므로 문화적 폭력을 격퇴하는 정면 공격을 감행해야 한다. (p.609)



아마 지금 페미니스트들이라면 다 동의하고 진작에 생각했던 방법인 것이다. 얼마전 박영선 의원이 발의한 여남동수법 지지도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후원을 한 것일테고. 그런데 수전 브라운밀러는, 더 하자고 얘기한다. 바로, 자신의 힘을 기르는 일.



남성은 언제나 강간범을 그들의 일원이 아닌 외부에서 온 늑대로 간주하고, 여성을 제자리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유감스러운 경향이 있는 조심성 없고 멍청한 짐승으로 간주했다. 그 전제 위에서 남성은 여성에게 가능한 한 다른 남성의 눈에 띄지 말고 숨어 있을 것을 열렬히 촉구하고 질책하고 경고했다. 한마디로 남성들은 그들만을 위해 마련된 특권을 여성이 자기 것으로 주장해선 안 된다고 말해온 것이다. 좋은 의도로, 세심한 배려로, 진심 어린 걱정으로 충고를 한다지만, 충고에 담긴 메시지란 실상 평생을 두려움 속에서 살라는 것 이상은 아니다. (p.623)



아 진짜 너무 싫다. 함부로 나서서 니 잣대로 조언하지 마라. 좋은 의도? 세심한 배려. 닥치시지. 부탁하지 않았는데 내뱉는 조언이란 건 쓸데없는 잔소리에 불과하다. 입 다물어라.



자, 우리의 수전 브라운밀러는 말한다. 자신의 힘을 길러야 한다고, 여성들도 승리를 알아야 한다고, 이기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고. 본인이 주짓수와 가라테 배웠던 경험을 얘기해가며, 여자들이 어릴 때부터 스포츠를, 운동을 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여성적이고 얌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아니라, 승리하라, 싸우라, 이기라 같은 것들을 배워야 한다고. 아아, 나는 이 부분이 너무나 당연하지만 그간 무시해왔던 게 아닌가 싶어 심히 죄스러웠다. 지난 주말만 해도 에너지가 넘치는 파워풀한 여자조카에게 가만히 좀 있으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 아이의 그 폭발할듯한 에너지를 좋아하면서도, 내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말 잘들으라고만 했어. 아아, 형편없는 이모였다. 미안하다.. 조카야, 네 안에 있는 그 에너지를 맘껏 분출하렴. 싸우고, 이기고, 승리하라!



여성에게 필요한 것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는 체계적인 자기방어 훈련이며, 그런 훈련을 통해서만 금지에서 유래한 우리 내면의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다. (p.630)



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우는 법을 배웠으며 내가 그런 싸움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p.631)



무엇보다도 스스로 놀라웠던 점은 급반전과 찌르기, 주먹으로 치기 같은 기본 공격 동작들이 숙녀다운 몸가짐의 규범과는 거리가 멀뿐더러, 내 자신에게도 대단히 낯선 동작인 반면, 남자아이들은 누구나 자라면서 그런 동작을 배우고, 통달하면 박수까지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 사회는 남자아이가 그런 동작을 배울 때, 여자아이에게는 하얀 앞치마와 애나멜 메리제인 구두를 입히고는 그것을 더럽히지 말라고 이야기해왔다. 그리고 양육 초기의 그런 차이가 무시무시한 차이를 키웠다! 교습 첫 시간에 내 일본인 지도자는 수업에 들어온 여성 모두에게 차례로 와서 자기 가슴을 마음껏 때려보라고 권했다. 그건 전혀 무모한 권유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첫 시도에서 우리는 아무도 실제로 때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 정도로 우리 내면에는 때리면 안 된다는 금기가 악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가 싸우는 여성이 되는 것을 막는 가장 커다란 장애물은 비참할 만큼 발달되지 않은 우리의 근육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 자리한 때리는 것에 대한 금기였다. (물론 훈련을 받으며 이 두가지 약점을 모두 빠르게 개선할 수 있었다.) (p.631)



더 많은 자리에 더 많은 여성들이 보여야 하는 당연한 방법 말고도 이렇게 여성 스스로 자신의 근육을 발달시키고 무엇보다 나 역시 상대를 공격할 수 있다는 자신의 도덕적 금기를 깨는 것이 방법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또 무척 즐거웠다. 할 수 있을 테니까. 싸우고 이기고 승리하라고 하는 것, 그 경험을 가지고자 노력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처음에는 낯설지만 좀 어렵겠지만 수전 브라운밀러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라고 있는 우리의 아이들에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싸우고 이기고 승리하라고.


살아갈수록 여성이 가장 먼저 버려야할 것은 도덕 코르셋이라는 걸 깨닫는다. 상대에게 상처주지 않기 위해서 얌전히 말하고 기분 나쁘게 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들이 그간 우리에게로 향했던 혐오발언을 키워오기만 한 것 같다. 게다가 혹여라도 분위기 이상해질까봐 참았던 시간들이 강간을 뿌리뽑는 데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다. 우리는 도덕 코르셋을 버려야한다. 다른 사람들 생각해주다가 우리 자신의 인생이 엿된단 말이다.




<옮긴이의 말>에는 브라운밀러가 참여한 성폭력 반대 운동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데, 오, 그것이 바로 미러링 운동이었다!



1968년 브루클린 출신의 프랜신 고트프리드Francine Gottfried가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월스트리트에서 거래 업무를 맡게 되자, 그녀가 출근할 때 수천 명의 남성들이 지하철 출구에 모여들어 고트프리드의 몸매를 품평하고 성희롱을 했다. 이 사건에 자극받은 페미니스트 칼라 제이Karla jay 와 앨릭스 케이츠 슐먼 Alix Kates Shulman은 1970년, 여성이 그간 길거리에서 당해온 성희롱을 남성에게 그대로 '미러링'해서 돌려주는 '월스트리트 추파의 날Ogle-In' 시위를 기획했다. 브라운밀러는 당시 그가 속해 있던 '뉴욕 급진 페미니스트' 집단의 동료들과 함께 거리에 나갔다. 이들은 지나가는 남자들을 노골적으로 음흉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입맛을 다시며, 휘파람을 불고, '엉덩이가 실한데' '너무 작다~' '너무 빈약하네~' '이쁜이, 커피 한 잔 타줄래?' 같은 말을 던졌고, 한 동료는 남자 행인의 바짓가랑이를 움켜쥐기도 했다고 한다. 이 시위는 성공적으로 언론의 주목을 끌면서 세상에 반성폭력 투쟁의 시작을 알렸다. (옮긴이의 말, p.674)




처음엔 힘겨웠지만 마지막으로 갈수록 에너지가 넘치는 책이었다. 게다가 옮긴이의 말을 읽고는 기분이 매우 좋아졌는데, 수전 브라운밀러가 멋지게 살고 계시다는 게 아닌가. 후훗.



이 책의 저자 수전 브라운밀러는 1970년대 미국에서 거침없는 발언과 행동으로 누구보다도 많은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전투적 급진 페미니스트였다. 뉴욕시 20층의 바다가 보이는 자신의 멋진 아파트에서 화단 가꾸는 법에 관한 책을 포함해 여러 권의 저서를 내며 80대인 지금도 멋지게 살고 계시다. (옮긴이의 말, p.683)




나 역시 급진 페미니스트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면서 멋지게 늙어가고 싶다. 80대에도 돈 벌면서 멋지게 늙어가야지. 어리고 젊은 페미니스트들에게 도덕 코르셋을 버리고 네 자신의 힘을 키우라고, 싸워서 이기고 승리하라고, 승리의 기쁨이 뭔지 알라고 말해주는 그런 어른이 되어야지. 근육을 발달시키고 참지 말아야 할 일에 참지 말라고 말하는 어른이 되어야지. 멋지게 늙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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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1-31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래그가 거의 옆구리 색칠 급이네요!!😃

다락방 2019-01-31 10:46   좋아요 0 | URL
그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캘리번과 마녀에도 많이 붙이게 될까요? 후훗

단발머리 2019-02-01 07: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컷이예요. 완독해서 그럴까요?
완독의 위엄!!!

다락방 2019-02-01 07:50   좋아요 0 | URL
완독해놓고 뿌듯하더라고요! 꺅 >.<
자, 저는 2월 도서 시작할 예정입니다. 후훗.

카알벨루치 2019-02-01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명절연휴 잘 보내시고 늘 열정넘치는 에너자이저 응원합니다 ^^

다락방 2019-02-05 12:56   좋아요 1 | URL
으앗 연휴가 끝나가고 있어서 너무나 아쉽습니다. 카알벨루치님도 남은 연휴 잘 보내세요!

카알벨루치 2019-02-05 13:28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빨리 오셔야 또 활동하시죠 다낭에서만 계심 안되죠 ㅋㅋㅋ

공쟝쟝 2019-02-02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게 늙어가는 페미언니! 저도 열심히 늙어..읽어 갈 테야요!! 완독 축하하구 새해복마니 받으셔용🤗

다락방 2019-02-05 12:57   좋아요 1 | URL
쟝쟝님, 여성주의책 같이읽어주어 정말 고마워요. 작년 한 해 그렇게 쟝쟝님과 더 가까워진 것 같아 여러모로 흡족합니다. 우리 같이 계속 공부하고 이야기하고 읽고 싸웁시다. 같이 멋지게 늙어가요!

공쟝쟝 2019-02-05 16:17   좋아요 0 | URL
그래야쥬 ㅎ 멋지게 🏃🏽‍♀️🏃🏽‍♀️🏃🏽‍♀️

공쟝쟝 2019-03-14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락방님 저 방금 책 다 덮고 엄청 신나서 신고 하러 북플 왔다가 이거 다시 읽고 옮긴이의 말 안읽은거 깨닫고 마저 읽으러 갑니다..ㅋㅋㅋㅋㅋ
 
네 이웃의 식탁 오늘의 젊은 작가 19
구병모 지음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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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사랑하는 한 사람을 존중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건 가능할까?

네 가족 공동체에서 여자들은, 다른 남자들의 무신경함을 자연스레 캐치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이렇게 행동하는 남자라면, 자기 아내와 아이들에게 어떤 남자였을지 뻔하달까. 이해하려는 노력은 전혀 없이, 왜 그럴까에 대한 스스로에 대한 질문 없이, '남자는 원래 그러니까 니가 말을 해줘' 라고 해버리는 뻔뻔함.


게다가 신경줄 팽팽하게 만들어버리는 성희롱은 어떻고.

여자로 살면서 누구나 한번 이상씩은 그런 경험들이 있을텐데, '아 여기서 내가 말하면 분위기만 싸해질텐데', '내가 예민한건가', '이정도는 그냥 넘겨야되겠지', '웃지 않으면 까탈스럽다고 하겠지', '나만 이상해지겠지' 같은 것들. 나의 애인이나 남편에게 말하면 오히려 '넌 왜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난리야'를 들을만한 것들.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기는 것들. 나는 카풀하는 차 안에서 여자가 당하는 그 성희롱들에 신경줄이 끊어져버리는 줄 알았다. 하아-




오래전 읽은《위저드 베이커리》의 구병모는 욕심 많은, 의욕이 앞선 작가로 기억되고 있다. 차마 수습하지 못할 이야기들을 욕심이 앞서 한꺼번에 다 넣어버린 것 같았달까. 그러나 《네 이웃의 식탁》의 구병모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할 말을 해내고 있다. 게다가 팽팽한 신경줄에 대한 묘사는 특히 좋아서, 그렇기에 읽는 동안 힘들었다. 내가 같이 터져버릴 것 같아서.


새삼 여자들의 이야기는 여자들이 해내는 게 가장 최선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나 여자 이야기를 잘하는 작가들이 있으니 남자 작가들은 섣불리 아무말 하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 이를테면 젖가슴 같은 자두라든가 말이다. 젖가슴 같은 자두 먹는 얘기 안해도 이야기는 아주, 잘 진행될 수 있고, 팽팽한 신경줄 역시 잘 표현될 수 있다. 그거 없이 글 못쓰겠으면 글 그만 쓰는 걸 고려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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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혜윰 2019-01-11 1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전 읽은 구병모의 소설이 제겐 좀 과해서 그뒤론 안읽게 되던데 좀 다른 느낌인가 보네요^^

다락방 2019-01-11 10:44   좋아요 1 | URL
저도 구병모의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그 과하다는 느낌, 지나치다는 느낌 때문에 안읽게 되었었거든요. 그런데 네 이웃의 식탁은 한결 정리된 느낌이에요. 그리고 할 말을 하고 있고요. 작가는 시간을 보내며 더 다듬어진 것 같습니다.

그렇게혜윰 2019-01-11 10:50   좋아요 0 | URL
전 한번 아니다싶으면 선택안하게 되던데 어떻게 읽을 생각을 하셨을까 그게 궁금하기도 해요^^

다락방 2019-01-11 11:16   좋아요 1 | URL
저도 제가 왜 읽을 생각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ㅎㅎ

그렇게혜윰 2019-01-11 21:50   좋아요 0 | URL
그냥 땡김 ㅋㅋㅋ

건조기후 2019-01-11 1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두 문장에 좋아요 백개 날렸어요💕 보이시죠? ㅎㅎㅎ

다락방 2019-01-11 17:41   좋아요 0 | URL
네, 아주 잘 보입니다! ㅎㅎㅎ
어떻게,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는 잘 읽고 계십니까? 네?
 
페미사이드 - 여성혐오 살해의 모든 것
다이애나 E. H. 러셀.질 래드퍼드 엮음, 전경훈 옮김 / 책세상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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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에 의한 여성살해에 대한 끔찍하고도 오랜 역사가 이 책에 담겨있다. 여러 학자들의 논문이 고루 담겨있는데, 그래서 이 책을 읽는 일은 힘겹고 감히 추천하기가 쉽지 않다. 이 책을 읽는 일이 필요하고 유의미하며 읽는 이를 단단하게 만들어줄 거란 생각은 하지만, 읽는 동안의 그 고통을 다른 사람들에게 경험하라 하는 것이 과연 잘하는 일일까 싶어, '꼭 읽어봐라' 라고 말을 할 수가 없다.


기대했던 것처럼 책 뒤편에는 남성에 의한 여성살해, 그 끔찍한 일들에 대해 역시나 저항했던 여성들의 긴 역사에 대한 글도 있다. 여성들은 끊임없이 그래서는 안된다고, 그러면 안되는거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행동해왔다. 이 책이 쓰여진 것 역시 그 저항중 하나일 것이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알고 있던 것들보다 더한 것들이 책 안에 있었고, 위에 쓴것처럼 그래서 힘들었다. 이걸 다 읽어낼 수 있을까 싶었는데,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때문에 결국 끝까지 읽어낼 수 있었다. 올해 가장 잘한 일이 여성주의 책 같이 읽기였단 내 말은 괜한 게 아니었다.


차별과 억압, 강간과 살해가 계속되는한, 저항 역시 멈추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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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12-31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쩐지 플래그 색깔이, 책 분위기랑 맞춘 것마냥.....

다락방 2019-01-01 00:18   좋아요 0 | URL
붙이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킁킁 ㅋㅋㅋㅋㅋ

공쟝쟝 2019-01-14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정리할 틈이 안생겨서 오늘 겨우 했는데, 정말 이 책은 너무 무서웠어요.... ㅠㅠ 특히 요크셔 리퍼 부분..

다락방 2019-01-14 22:08   좋아요 1 | URL
말 그대로 강간문화가 페미사이드를 불러버린 것 같아요. 읽느라, 이렇게 정리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쟝쟝님. 호흡 좀 고르시고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로 오세요!

공쟝쟝 2019-01-14 22:09   좋아요 0 | URL
10페이지 읽었어요~~ 인제 다시 운동화끈 묶고 고고고~~~

다락방 2019-01-14 22:10   좋아요 1 | URL
저는 133 !! 고고!!
 
달의 영휴
사토 쇼고 지음, 서혜영 옮김 / 해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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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일본이란 나라에 딱히 관심이 있지 않아서, 이름만으로 그 성별을 구분하는 것은 내게는 어렵다. 그러니까 이름이 반드시 남자 이름이라고 해도 여자일 수 있고 여자 이름이라고 해도 남자일 수 있겠지만, 어쨌든 내가 처음 읽는 작가 '사토 쇼고'는 나에게 여성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그건 이름에서 준 건 아니었고, 아마도 '달의 영휴' 라는 제목이라든가, 표지의 단발 소녀, 그리고 '차고 기울다' 라는 부제에서 준 것인가? 어쨌든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머릿속에 '여자 작가'라는 생각을 하게 됐던 것. 그런데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어, 여자가 아닌가?' 하다가, 결정적인 장면에서 '남자 작가다!' 라는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이 책은 남자'만' 쓸 수 있는 책이다. 성별을 확인해보고 싶은데 알라딘에 들어가 작가 소개를 봐도 사진이 없어.. 그래서 사실을 확인할 순 없었지만, 남자 작가다, 이건. 이렇게 징그러운 걸 여자가 쓸 순 없다..



누구하나 공감할만한 인물이 나오질 않아 재미도 없지만, 어쨌든 '루리'라는 27세의 여성이 20세의 '미스미'라는 청년과 사랑에 빠진다. 이 사랑에 빠지는 것부터 좀 어처구니가 없는데, 유부녀 루리는, 고작 27세이면서, 미즈미와 7살 차이밖에 안나면서 자꾸 자기를 늙었다고 자책해... 이봐요, 당신 스물일곱살이야.

아무튼.


그들이 무슨 그렇게 절절한 사랑을 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데, 어쨌든 루리는 '나는 죽는다면 다시 태어나서라도 널 만나러 올거야', 라고 한단 말이야? 여기까지는 어떤 사랑의 간절함을 표현하려고 한 것 같았는데, 어쨌든 루리는 자신이 말한 것처럼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또 '루리'라는 이름으로 살게 되고.  7살을 기점으로 해서 육체가 열병을 앓고나면 전생의 기억들이 확 들이닥쳐서 전생에서 사랑했던 '미스미'를 찾아가려고 하지만, 아무리 자신의 영혼이 성인 루리 라고 해도 몸은 일곱살 아이에게 갇혀 있으니 이동이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 과정에서 자신의 환생을 이해해주는, 전생의 '남편'을 만나게 되는데, 이 남편은 루리가 지금의 꼬마 모습이기 전에 자신의 아내였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녀가 찾으려는 바람핀 애인을 찾는 것을 돕고자 한다. 그러나 차에 그 꼬마를 태워 운전해 가던 도중 사고가 나 죽고 만다. 물론 루리는 또다시 환생해서 7살이 되면 또 성인 루리 전생의 기억이 찾아들고...를 반복하는데,



이 과정에서 그러니까 루리를 차에 태워 가던 성인 남자, 즉, 전생에서의 남편이 아동성애자로 몰리게 되는 거다.



"……범인은 초등학생 여아자이를 차에 태워 데리고 다녔고 여자아이가 자기 아내라고 주장하면서 경찰의 설득에도 응하지 않았던 거고."

"그래요. 자동차 추격전도 했어요."

"자동차 추격전?"

"있잖아요, 오사나이 씨, 알고 있지요? 마사키는 노조미가 자신의 아내라고 주장한 게 아니라 정확히는 자신의 죽은 아내라고 주장했다고요. 이미 알고 있지요? 나도 올해가 돼서 안 이야기지만 8년 전에 텔레비전이나 신문은 마사키를 소아성애 경향을 가진 정신 이상자로 만들었어요. 체포후 마사키가 어떤 인간이었나에 대해 경찰이나 언론에 증언한 사람들도 있었어요. 아이큐가 높은 아이였는데 도박에 빠져 생활 파탄자가 됐다든가,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마사키의 언동이 매우 이상했다든가 등." (p.315)



그러니까 요점은,

초등학생을 데리고 부모의 허락없이 이동해서 아동성애자로 몰렸지만, 그 깊은 속내는 그게 아니다, 그는 소아성애자가 아니라, 그 아이가 환생한 아내였던 거다, 라는 거다. 나는 굳이 왜 이런 부분이 있어야 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누구나 다른 사람의 사정을 알 수 없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사실만으로 판단했다가는 오류를 범하기 십상이다. 그렇지만, 성인 남성이 초등학생을 부모의 허락없이 데리고 갔던 것에 대해서, 우리가, 다른 사람이, 그러니까,


'저건 아동성애가 아니라 전부인이 환생한 일이 그들에게 있었을지도 몰라' .. 같은 생각을 해야 하나? 물론, 그것은 납치도 아니고 유괴도 아니었다. 그리고 실제로 납치도 유괴도 아닌데, 그렇게 몰리는 일이 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사람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되고 멋대로 죄인으로 취급해서도 안된다. 그러나 이 부분이 이런 식으로 들어간 것, 하필이면 아동성애에 대한 것이라니, 나는 작가가 아동 성애에 대한 변을 대신 해주는 것에 찜찜함이 계속 남는거다.



게다가 루리는 자꾸 환생을 반복해서 마지막 일곱살 소녀가 과거의 연인 미스미를 찾아갈 때는 미스키가 60 아저씨다. 보고싶었다고, 드디어 찾았다고 루리는 울음을 터뜨리고 미스미는 올 줄 알았다고 말하는데... 이 지점에서 '아아, 너무나 사랑하면 다시 태어나서라도 반드시 만난다'라는 생각이 드는 게 아니라, 어쩌자고 일곱 살 아이와 할아버지의 만남으로 해놓았는가, 하는 분노와 찜찜함만이 남는 거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전체적으로 아동성애에 대한 변명을 하고자 하는 것 같은 거다. 늬들이 아동성애라고 욕하는 거, 그 안에는 내밀한 속사정이 있을 수도 있어, 라고.



그래서 나는 이 책은 '여자가 쓸 수는 없는' 책이라고 생각했다. 성인 여자의 영혼이 어린 일곱살 아이의 몸에 들어가 있어서, '그 남자 옆에 있고 싶다'같은 눈빛을 갖는다고 책 속에 등장한다. 욕망이 드러나는 눈이었다고. 하아- 진짜 ... 그 안에 성인 여성 갇혀있다는 걸 변명 삼아 일곱살 아이의 '한 남자랑 함께 있고 싶은 눈빛' 같은 걸 합리화 시켜버렸어.

다 읽고나니, 이 책은 그냥 남자가 쓴거구나 싶은 거다. 책 표지의 책 소개를 다시 읽어보는데, 역시 성별은 나와있지 않고, 55년생이라고 되어있다. 55년생 할아버지여.... 일곱살 소녀로 환생한 여인이 등장하는 소설을 쓰셨네요. 대단합니다.




글쎄 모르겠다. 책이 이미 책으로 나온 순간 그 책은 독자의 몫이라고 나는 늘 생각해왔다. 그러니 누군가는 이 책을 읽고 영원불멸의 사랑에서 오는 감동...같은 걸 느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아니다.




방금 일본어 공부중인 친구가 구글에서 작가를 검색해 보내주었다. 작가는 남자였다.

이 책으로 나오키상을 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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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18-12-20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탓다고요?ㅋㅋㅋㅋ 나는 기억가지고 환생하면 더 어리고 젊은 남자 만날거같은뎈ㅋㅋㅋㅋ 왜 육십살전남편을ㅋㅋㅋ 하나도 아름답지않은 사랑이야깈ㅋㅋㅋ

다락방 2018-12-20 17:30   좋아요 0 | URL
만나는 건 남편 아니고 애인인데요. 너무 짜증났어요. 일곱살 아이가 할아버지 만나는 거. 뭐하자는거지 싶어요. 그런데 이 책은 상을 탔다고 합니다. 흐음.......
 
인투 더 워터
폴라 호킨스 지음, 이영아 옮김 / 북폴리오 / 2017년 12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Drowning Pool '익사의 웅덩이'라는 뜻으로, 봉건 시대 스코틀랜드의 법에 따라 여성 범죄자들을 처형하기 위한 목적으로 판 웅덩이나 우물을 가리킨다. 16-17세기 마녀 재판이 횡행하던 시절에는 마녀로 고발당한 여성의 유무죄를 시험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기도 했다. 물에 빠뜨려진 여성은 물속으로 가라앉으면 마녀가 아닌 것으로, 물 위로 뜨면 마녀로 간주되었다. 어느 쪽이든 결국엔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p.7)



마침 페미사이드를 읽던 중에 고른 책은, 첫 페이지부터 '드라우닝 풀'에 대해 나온다. 잘못이 있든 없든 여자를 죽여버리는 웅덩이. 잘못하지 않으면 물에 빠져죽고 잘못했으면 마녀이므로 처형당하는. 이 얼마나 끔찍하고도 오랜, 여성을 죽이는 참혹한 역사인가.



마을에 있는 드라우닝 풀에서 여자가 자살한 사건이 발생한다. 자살한 여자의 딸조차도 '엄마가 뛰어내린 거다'라고 얘기하지만, 그러나, 그녀가 정말 자살한 것일까? 그녀는 자신의 생을 스스로 마감하려 한것일까? 불과 몇 년 전에는 딸의 친구도 드라우닝 풀에서 자살했었다. 이 사건은 그 사건과 같은 것인가? 여자들은 왜 그곳에서 자신의 생을 '스스로' 마감하는가? 내가 '스스로' 그 물속으로 걸어들어갔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정말 내 스스로 선택한 죽음인가?


이 과정에서 '에린'이라는 타지역의 경찰이 와 수사에 협조한다. 마을 사람들은 특히나 경찰이었던 마을의 유지-늙고 권력있는 남자-는 그녀를 배척한다. 그녀가 동성애를 저지르다 좌천되었으므로 마땅히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그 전에 어떤 짓을 저질렀는가?



니키, 마크, 쥴스, 에린, 패트릭, 조시, 리나, 헬런 등등, 많은 사람들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다소 산만하게 느껴진다. 이 사람이 저 사람이구나 라고 고정되어 흐름을 따라가기까지 좀 시간이 걸렸던 터라, 나는 이렇게 여러 사람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별로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딱히 좋지는 않다'고 이 책을 읽어나가다가 책장을 덮게 되면 수많은 생각들이 아주 오래 머릿속에서 섞여든다. 


좋은 사람이란 무엇인가?

마을에서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라고 알려진 사람들, 심지어 존경까지 받는 사람이, 그러나 어떤 생각으로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그 자신을 포함해 다른 몇 명만이 알고 있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비난할 수 있는 시점을 가진 사람 조차도 또 누군가에 대해서는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좋은' 사람은 정말 좋은 사람인가?


미투 폭로를 비롯해 누군가 성폭행했다는 진실이 바깥으로 드러났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럴 사람이 아닌데, '착한 사람인데' 라며 가해자를 두둔하거나 가해자의 편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을 보이곤 한다. 그러나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면을 보여줬던 사람이라고 해서, 그 사람은 그저 '좋기만' 한 사람일까? 

또한, 누군가에게는 좋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겐 강간과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이 된다면, 그렇다면 그 사람은 '왜'그런 일을 하는걸까?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것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변명의 여지가 될까? 

성인 남성이 십대 소녀와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말을 한다. 자신은 미성년자를 성적대상으로 보는 걸 끔찍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평소에 그런 사람들을 욕했지만 (난 그런 사람이 아니야!) 그렇지만 이건 진짜 사랑이었다고. 이것이야말로 진실된 사랑이지만, 세상이 자신을 미성년자 성폭행범으로 몰아갈거고 그렇게 감옥에 가게되면 자신은 끔찍한 취급을 받게 될거라며 두려워한다. 그의 연인이었던 십대 소녀는 자신 역시 그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성인이 되지도 못한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사랑 이란 이름으로 용서할 수 있는 것일까? 자신들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이었다면, 왜 그들은 그 사랑이 세상에 드러날까 두려워 한 쪽의 죽음으로 그 관계를 끝내야 했을까?


강간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페미니즘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강간과 성폭력을 다룬 책들도 많이 읽게 되었는데, 많은 여자들이 자신이 당한 것이 강간인지 인지하지 못하고, 자신의 잘못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주변에서 지인이 자신이 당한 것을 전혀 강간으로 생각하지 않는 걸 보고 나는 너무 화가났었는데, 자신이 강간당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넌 강간당한거야' 라고 말하는 것은, 해도 되는 일인가? 나는 아무 말도 못했지만, 이 일은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다.


"뭐가 복잡해요? 뭐가 그렇게 복잡했는데요?"

"어머니가 언제 돌아가실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 안 그래도 힘든 부모님한테 짐을 더 얹어드리긴 싫었어."

"그래도......강간당했잖아요. 범인은 감옥으로 가야죠."

"그땐 그런 생각도 못했어. 어렸으니까. 지금 너보다 더. 나이뿐만이 아니야, 난 순진했고, 너무 미숙했고, 어리석었어. 요즘 너희들은 합의가 없으면 무조건 강간이라고 말하지만, 그땐 그런 얘기도 잘 안 하던 시절이었어. 그래서 난...."

"그가 그런 짓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아니, 내가 제대로 이해를 못 했던 것 같아. 진짜 무슨 일을 당한건지 몰랐던 거야. 강간이라는 게, 못된 어른이 한밤중에 갑자기 골목길에서 튀어나와서 나를 덮치고 목에다 칼을 대는 건 줄 알았지. 남자애들이 그럴 줄은 몰랐어. 로비처럼 잘생기고, 마을에서 제일 예쁜 여자아이들이랑 어울려 다니는 남학생하고는 상관없는 일인 줄 알았지. 우리 집 거실에서 나한테 그런 짓을 하고는 좋았느냐고 물어보는 게 강간일 줄은 몰랐어. 난 그냥 내가 뭘 잘못했나 보다, 싫다고 확실히 말했어야 하나 보다, 그렇게 생각했지" (p.459-460)





마찬가지로, 강간의 가해자 역시 자신이 강간의 가해자인줄 모르고 살고 있다는 데에 더 끔찍해졌다. 나는 너에게 자비를 베풀었지, 너는 나를 욕망했잖아, 라는 대응은, 평생을 강간의 피해자로 살며 고통스러워 한 여자에게 참담한 고통이었다. 이 새끼, 평생 강간에 대한 죄책감없이 살아왔구나, 나는 이렇게나 괴로웠는데.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자신이 강간의 가해자인줄 모르는 채로 살고 있을까. 



그리고 십대의 여자아이.

결국 해야할 말을 하는 것이 십대의 여자아이라는 것이 상징적이다. 이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들, 벌어졌던 일들. 그리고 차마 말하지 못하고 감추어졌던 것에 대해서 '그러면 안되는 거'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십대의 여자아이라는 것은 좀 희망적이지 않은가.



"이해를 못하겠어요. 항상 여자들만 탓하는 이모 같은 사람들, 정말 이해가 안 돼요. 두 사람이 똑같이 나쁜 짓을 했는데 그 중에 한 명이 여자라면 무조건 그 여자 탓이죠. 그렇죠?"

"아니야, 리나, 그런 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마찬가지로 남편이 바람을 피우면 왜 아내들은 항상 상대 여자를 원망해요? 자기 남편을 원망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자기를 배신한 것도, 평생 사랑하고 지켜주겠다고 맹세한 것도 남편인데, 절벽에서 떠밀어 죽이려면 자기 남편을 죽여야 하지 않아요?"  (p.461)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하다. 내가 아무리 정의롭게 살려고 해도 어딘가에서 나는 치명적인 잘못을 저지르고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줄스가 끝까지 언니를 미워했던 것은, 자신의 강간에 대해 언니가 피해자의 탓을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줄스가 아는 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줄스는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은 채로 언니를 오래 미워했다. 줄스가 미워해야 했던 것은 언니가 아니라, 언니의 남자친구 였는데. 우리는 얼마나 많이, 미움의 상대를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을까. 나 역시, 오래 그랬다.

'대니얼'은, 드라우닝 풀에 대한 역사와 마을이 감춘 비밀을 파헤치고 있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그녀는 입을 막아서도 침묵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성인 남자가 어린 소녀와 '사랑에 빠졌다고 말하면 안되는 거'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이 모든 것들을 '옳은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해서 전적으로 좋기만 한 사람이었을까? 계속해서 자신을 미워하는 동생에게 대화를 시도하려는 사람이긴 했지만,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잘못을 저지르고 살았다.



남자들이 끔찍하게도 여자들을 미워하는 이야기가 책 속에 있다. 전형적으로 여자를 성녀로 만들고 자신의 말을 잘 듣는다면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는 전형적인 늙은 남자. 그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런 여자들에게는 가차없다. 잔인하고 끔찍한 남자. 그러나 그런 남자가 비단 그 하나뿐일까?



결국,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던 세대가 다른 여자들이 연대한다.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희망은, 그런 식으로 찾아오는 게 아닐까. 


작가의 전작, [걸 온 더 트레인] 보다 나는 이 책이 더 좋았다. 이 책 한 권으로 '폴라 호킨스'는 여성작가만이 할 수 있는 말들을 다 해냈다. 가스라이팅, 페미사이드, 성폭력, 연대, 가부장제, 성소수자, 성차별까지. 그리고 어긋난(혹은 지나친) 사랑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게 되는지도. 책장을 덮고나서야 이래서 여성작가의 책을 읽어야 하는 거라고 몇 번이나 생각했다. 툭, 툭, 생각해야 할 것들이 떠오른다. 이 책이 그렇게했다. 다우닝 풀로 몸을 던진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파헤치는 과정에서, 이 모든 이야기들을 작가는 풀어냈다. 



'다이애나 러셀'과 '질 래드퍼드'의 [페미사이드]를 읽다보면 나오는 사례들이 이 책안에 고스란히 들어있다. 실제 바람핀 게 아닌데도 자신의 오해만으로 여자를 죽이는 남자, 사랑했지만 죽이는 남자. 여성을 죽이는 끔찍한 역사는 이토록 오래 반복되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연구하고 책으로 써내는 사람들이 있고, 이야기의 힘을 빌어 그 역사를 다시 꺼내보여주는 사람들이 있다. [페미사이드]의 결론은 어떻게 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인투 더 워터]에서처럼 희망적일 거라고 생각한다. 서로 다른 세대의 여자들이 서로를 이해하며 연대하고, 더이상 침묵하지 않겠다고 발언하면서, 그러면서 세상은 점점 더 나아질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이곳은 수백 년 동안 리비 시턴, 메리 마시, 앤 워드, 지니 토머스, 로런 슬레이터, 케이티 휘태커, 그리고 이르모 얼굴도 알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왜, 어쩌다가 긇게 됐는지, 그리고 그들의 삶과 죽음이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는 게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런 의문을 던지기보다는 입막음하고 침묵시키려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침묵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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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18-12-16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멋진 리뷰 감사합니다. 페미니즘은 아주 사소한(?) 폭력의 레이더를 켜주는 것 같아요..

다락방 2018-12-16 20:35   좋아요 0 | URL
쟝쟝님 1월에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갑시다. 그리고 [혁명의 영점]은 우리 둘이 동시진행 어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압박 맞아요 ㅋㅋㅋㅋㅋ)

공쟝쟝 2018-12-16 20:53   좋아요 0 | URL
그거 천페이지 넘지않아요 ?ㅋㅋㅋ 찌잉..🥺

다락방 2018-12-16 21:03   좋아요 0 | URL
이렇게 말씀드리면 기분이 좀 나아지실지 모르겠지만 696 페이지라고 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18-12-16 23:06   좋아요 0 | URL
크크 고고

공쟝쟝 2018-12-16 23:08   좋아요 0 | URL
혁명의 영점은 2월에...

다락방 2018-12-17 02:48   좋아요 0 | URL
오케!

단발머리 2018-12-19 12:51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동시진행 마구 들이대는 다락방님~~~~
진정시키는 쟝쟝님~~~~~~~~~
멋지십니다, 두 분 다!!!

다락방 2018-12-19 14:31   좋아요 0 | URL
쟝쟝님의 댓글에 힘입어 2월에는 어차피 셋트로 구성되어진 혁명의영점+캘리번과 마녀 를 같이가면 좋을 것 같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욕심욕심)

단발머리 2018-12-19 14:44   좋아요 1 | URL
그것 참 좋은 생각입니다.
세트는 같이 읽어줘야 제 맛이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쟝쟝님 바쁘시겠당!!!

공쟝쟝 2018-12-19 15:38   좋아요 0 | URL
ㅋㅋㅋ 저 가랑이 찢어집니다~||!!

다락방 2018-12-19 15:45   좋아요 1 | URL
쟝쟝님, 아직 2월 안됐으니 좀 기다려봅시다 ㅋㅋㅋ 미래는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 것!

단발머리 2018-12-19 15:47   좋아요 1 | URL
이렇게 쟝쟝님은 또 다시 다락방님의 꾀임에 넣어가게 되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