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이디스 워턴 지음, 김욱동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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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무튼, 여름>이라는 책을 써보면 어떨까 싶을 정도로 나는 여름을 좋아한다. 어릴 때는 막연하게 내가 태어난 계절이어서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이날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여름이 아닌 다른 계절을 여름보다 더 좋아한 적이 없다. 나는 땀이 많이 나도 여름이 좋다. 낮이 긴 여름이 좋다. 아침에도 환한 여름이 좋고 퇴근 무렵에도 역시 환한 여름이 좋다. 뜨겁고 밝은 여름이 좋다.


여름이 좋아서일까, 여름에 대해 얘기하는 소설도 좋았다. '에쿠니 가오리'는 자신의 소설에서 여름에 떠난 남자를 그리워하기도 했고, 나는 그래서 그 소설을 읽으며 좋아했더랬다. 얼마전에는 사전정보가 전혀 없이 '여름'이 들어간다는 이유만으로 도서관에서 <카티야의 여름>을 빌려와 읽었다. 당연히 <그해, 여름 손님>도 사두었는데, 영화를 보고는 영화(콜 미 바이 유어 네임)가 싫어서 책을 안 읽고 있다. 종이책이면 팔아버리기라도 하겠는데 전자책이라 어쩔 수가 없네. 낭비되는 디지털.. 그렇다. 여름이 들어간다고 다 좋지는 않아서, 김봉곤의 <여름, 스피드>도 별로였지.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도 내가 너무 이해할 수 없는(이해하기 싫은) 남자들의 정서가 꽉꽉 눌러담긴 책이었고. '윌리엄 트레버'의 <여름의 끝>도 읽었는데, 그러고보니 사람들이 '여름'에 대해 얘기할 때면, 뜨겁게 사랑하다 떠나버리는 사람들에 대해 얘기하는 것 같다. 인생에 다시 못올 강렬한 사랑은 다들 여름에 온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 <우부메의 여름>은 강렬한 사랑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지만.



이런 내가 '이디스 워튼'의 《여름》을 읽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이디스 워튼인데, 무려, 여름이라니. 나는 입원한 병실에서 가장 먼저 여름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읽기 시작한다.




'채리티'는 아직 스무살이 채 되지 않았다. 마을의 명망있는 '로열 변호사'는 채리티가 어릴 적에 산으로부터 그녀를 데려와 같이 살았다. 후견인 정도가 될 수 있을텐데, 이 소설 속에서 '산'이라 함은 가난과 위험, 지저분함과 수치스러움의 상징이었다. 채리티가 그런 곳에서 살지 않도록 마을로 데려와 키워준 사람이니 로열 변호사에게 고마워해야 한다고, 사람들은 채리티에게 그렇게 말했다.


로열 변호사의 아내가 죽고, 로열 변호사는 어느날 채리티가 혼자 잠든 방의 문을 열려고 시도한다. 채리티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그녀의 나이 열일곱이었고, 그녀는 로열 변호사가 술을 더 꺼내 마시려고 한다던가 아내가 있다고 착각한 것인줄로만 알았지. 그러나 며칠 후 로열 변호사가 그녀에게 청혼을 하자, 그제야 그 날 밤의 의미를 알게 되는 거다.


교육을 많이 받지 않았던 채리티이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혼자 서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녀는 아버지 같은 로열 변호사가, 노인의 모습을 한 그가 자신에게 청혼하자, 자신을 데려다 키워준 사람이지만, 이렇게 얘기한다.



"저하고 결혼하고 싶다고요? 저하고요?" 그녀는 경멸하는 웃음을 지으며 내뱉었다. "전날 밤 그걸 부탁하려고 찾아온 거였군요? 어떻게 되신 거 아니에요? 거울을 들여다본 지 얼마나 되었나요?" 그녀는 오만하게 자신의 젊음과 힘을 의식하며 몸을 꼿꼿이 폈다. "가정부를 두는 것보단 저하고 결혼하는 게 돈이 덜 든다고 생각한 모양이지요. 이글 군에서 아저씨가 가장 인색한 사람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하지만 아저씨는 두 번씩이나 그런 식으로 공짜 살림을 맡길 순 없을 거예요."

로열 씨는 그녀가 말하는 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잿빛을 띠었고, 검은 눈썹은 마치 그녀가 내뿜는 경멸의 불길 때문에 눈이 먼 듯 떨렸다. (p.39)



나는 채리티가 그 앞에서 바로 경멸을 드러낸 것은 잘했다고 생각하지만, 아직도 로열 변호사가 자신과의 결혼을 원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른다고 생각한다. 너무 순진한거지.. 로열 변호사가 딸뻘되는 채리티에게 결혼하자고 한게 과연 공짜 살림을 맡기기 위함이었을까. 에휴.. 그만하자.



채리티는 돈을 벌어 이 마을을 떠나기 위해서 마을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곳에 이 마을의 청년이 아닌, 낯선 청년 '하니'가 찾아온다. 책도 많이 읽었고 공부도 많이 하고 집안도 좋은 청년. 채리티는 이 여름 이 청년과 사랑에 빠진다. 순간순간 채리티는 자신이 하니에게 부족한 상대라고 생각하지만(그와 책으로 상대할만큼 많은 책을 읽지도 않았다), 그에게 푹 빠져버린다. 그를 사랑한다. 그와의 사랑을 로열 변호사가 질투하며 바라보지만, 그녀는 그 사랑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간혹 마을 처녀들이 결혼 전의 불장난으로 임신을 하고 낙태를 하게 되면 몹쓸 여자가 되어버린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설마.... 숲 속 외진 곳, 아무도 모르는 곳이 그들의 비밀장소. 채리티와 하니는 그곳에서 늘 만나 사랑을 속삭이고 열정을 불태운다. 채리티와 하니가 둘이 다른 마을에 놀러갔다가 로열 변호사에게 들켜 채리티는 '갈보'라는 욕을 들었었는데, 이 외진 곳 역시 로열 변호사에게 들키고 만다. 그러나 로열 변호사는 알고 있었다. 하니가 채리티랑 이렇게 열정을 불태운다고 해서 그녀와 끝까지 함께할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여기가 자네 집인가?" 그가 물었다.

하니가 웃었다. "글쎄요 …… 누구 집도 아니죠. 어쩌다 스케치하러 이곳에 옵니다."

"미스 로열의 방문도 받고 말이지?"

"고맙게도 그녀가 제게 ……"

"이곳이 바로 결혼해서 그녀를 데리고 올 집인가?"

숨 막힐 정도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채리티는 분노로 부르르 몸을 떨면서 갑자기 앞으로 다가갔지만 너무 풀이 죽어 말을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 노인이 뚫어지게 쳐다보자 하니는 두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곧바로 두 눈을 다시 쳐들고 로열 씨를 단호하게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미스 로열은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그녀가 마치 어린아이인 것처럼 말하는 건 좀 우스꽝스럽지 않습니까? 어느 누구에게도 묻지 않고 그녀 마음대로 오고 가고 할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덧붙였다. "그녀가 제게 묻고 싶은 말이 있다면 뭐든지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로열 씨는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렇다면, 그가 언제 결혼해줄지 한번 물어보거라 ……" 또다시 침묵이 흘렀고, 이번에는 로열 씨가 웃었다- 삐꺽거리는 소리가 나는 단속적인 웃음 말이다. "그렇게 못하잖아!" 그는 갑자기 감정을 폭발하며 소리를 질렀다. 채리티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위협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애처롭게 간곡히 타이르기 위해서 오른팔을 쳐들었다.

"넌 그렇게 못하잖니. 넌 그걸 잘 알고 있지 …… 그리고 왜 못하는지도 말이야." 로열 씨는 다시 젊은이를 향해 재빨리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자넨 왜 저애한테 결혼하자고 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어. 왜 그럴 생각이 없는지 말이지. 그건 자네가 그렇게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거든. 어떤 다른 남자도 마찬가지겠지만 말이야." (p.227-228)



그렇다. 채리티는 알고 있었다. 이 여름, 이 청년과 뜨겁게 사랑하지만, 이 청년이 자신의 미래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이 청년은 다른 집안 좋은 여자와 약혼한 사이라는 것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들어 알게되었다. 이 외진 숲속 집으로 자신을 만나기 위해 달려오는 남자지만, 자신에게 결혼하자는 말을 하지는 않는 남자다. 그녀는 그의 달콤한 속삭임을 듣고 그의 몸에 자신의 몸을 던지기는 하지만, 혹여라도 마을에 도는 얘기처럼 자기가 임신을 하고 낙태를 하고 몸을 파는 여자로 되는 건 아닐지 두렵고 무섭다.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미래는 그와 결혼하는 그녀가 아니었다.



채리티는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하니에게 주었다-그러나 삶이 그에게 줄 수 있는 다른 선물과 비교한다면 도대체 그것이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그녀는 이런 일을 겪은 자신과 같은 다른 젊은 여자들의 경우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던 것을 모두 주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그것 가지고는 짧은 순간밖에 살 수 없었던 것이다 …… (p.217)




여름은 지났고 그는 돌아갔다. 자신의 약혼 문제를 정리하고 돌아오겠노라 했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은 하니도 알고 채리티도 알고 로열 변호사도 알고 나도 안다. 그리고 그녀는 임신을 했다. 낙태를 하러 갔지만 낙태를 할만한 충분한 돈도 없다. 그녀는 자신이 그토록이나 경멸했던, 그러나 자신이 태어났던 산으로 가고자 한다. 내가 갈 곳은 거기 뿐이구나, 거기 뿐이야. 더럽고 수치스럽고 가난한 그곳. 그 곳에 가기는 싫었는데, 나는 그곳으로 가야만 하는 거구나.



그렇게 산으로 찾아든 그녀에게 로열 변호사가 찾아온다. 자신보다 나이가 훌쩍 많은 아버지같은 로열 변호사는 그녀에게 다시 결혼을 청하고, 이 인자하고 책임감있고 위엄있는 변호사와 그녀는 결혼한다. 결혼한 후, 하니에게 편지를 보낸다.




저는 로열 씨와 결혼했습니다. 언제나 당신을 기억할 겁니다.(p.316)



어차피 하니는 채리티에게 오지 않았을 것이다. 채리티 역시 그걸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녀가 로열 변호사와 결혼한 건,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니까. 하니가 돌아올거라 확신했다면 그녀는 로열 변호사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이대로 아이를 낳는다면, 자신이 산에서 버려졌던 것처럼, 산에서 아이를 혼자 키우는 여자가 되었을 것이고, 그녀가 낙태를 했다면, 기존에 낙태를 하고 몸을 파는 여자가 되었던 마을 다른 여자처럼 될 것이다. 그녀가 낙태 하기 위해 찾아갔던 의사(?)는 나중에 그 사실을 빌미로 그녀를 협박한다. 그 여름을 뜨겁게 보낸 건 하니와 채리티인데, 비참한 결혼을 하고 낙태로 협박을 당하고 절망에 휩싸이게 된 건 채리티 혼자다. 하니는 약혼을 정리해볼게, 라고 말하고 떠났지만, 과연 그가 그 약혼을 정리하기 위해 얼마만큼의 최선을 다했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말이 왜이러나 싶을만큼 막판에 채리티는 로열 변호사를 굉장히 훌륭한 어른인듯, 그러니까 기존에 자기가 잘못봤던 것처럼 그를 올려친다. 옮긴이는 그걸 채리티의 성장으로 보고 로열 변호사의 성장으로 보지만, 나는 그것을 성장으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채리티의 성장이 아니라 체념이다. 체념. 자신의 젊은 육체를 한껏 뜨겁게 하고 떠나버린 청년, 신분의 차이로 그의 옆에 있을 수 없게 되자 그녀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했던 남자. 그런 남자를 계속해서 싫은 남자로 보기 보다는, 내가 잘못 본걸거라는 자기 최면. 어떻게 자기에게 갈보라고 욕한 남자를 훌륭한 남자라고 좋은 아저씨라고 다시 생각하게 될 수 있나.




나는 이래서 여자 소설가의 번역을 여자 번역가가 해주기를 바란다. 이 옮긴이가 어처구니 없는 건, 뒤의 <작품 해설>에서도 드러나는데, 자, 우리 다같이 빡치며 읽어보자.



편지 끄트머리에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는 채리티'라고 적는 것을 보면 하니에 대한 애정에는 변함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하니가 자신보다는 애너벨을 먼저 알고 있었고, 또한 결혼하기로 약속했다면 채리티는 그를 기꺼이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다. 의무감에서 자신과 결혼하기보다는 약혼자와 결혼하는 쪽이 '옳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채리티가 이 편지에서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말을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이 참으로 놀랍다. 임신한 아이를 볼모로 떠나간 애인을 다시 붙잡으려고 애쓰는 여성을 우리는 현실에서나 소설에서나 심심치 않게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작품해설, p.339)




하아-

처음부터 끝까지 틀렸어.

지금 뭐하는 거야. 저게 말이야 방구야. 두 눈을 비비고 다시 읽어봐도 막말이다. 미쳤나.. 어떻게 '임신한 아이를 볼모로 떠나간 애인을 다시 붙잡으려고 애쓰는 여성' 이라고 여기에 써놓나. 어떻게 이디스 워튼 소설에 .. 지금 무슨 말씀 하시는 거에요.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임신한 아이를 볼모로? 채리티가 하니 붙잡으려고 억지로 임신했냐? 이 남자랑 결혼해서 팔자 고쳐야지 싶어서 부러 임신한거야? 임신은 혼자 하냐? 임신하고 싶다고 채리티가 울고 매달렸나? 그 숲속으로 매일 찾아온 게 하니인데? 지가 좋다고 그 여름에 와서 뜨겁게 안아놓고 떠난 남자인데, 뭐라고? 임신한 아이를 볼모로.. 어쩌고 어째? 하아- 채리티는 마지막에 그를 여전히 사랑한다고 썼지만, 나는 그 사랑안에 이미 하니가 어떤 남자인지 알고 있다는 채리티의 마음이 담겨있다 본다. 그리고 채리티는 알고 있다. 하니가 싸튀충인 것을. 아니, 생각을 좀 해보세요. 임신한 아이를 볼모로 남자를 협박하는 여자들이 많은지 싸튀충이 많은지. 그리고 임신한 아이를 볼모.. 라니. 임신이 여자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좀 하자. 아니 어떻게 저런 말을 쓰지? 어떻게 저런 말을 이디스 워튼의 소설에 해설이라고 떡하니 써놓을 수가 있지? 노어이... 어이가 노합니다.. 어이 이즈 존재 무...


뜨거운 여름을 안겨줬지만 서늘한 소설이잖아, 결말에 대해 너무 아프다고 생각했는데, 옮긴이의 작품해설이 소설을 망쳐버렸다. 옮긴이의 작품해설이 이디스 워튼의 여름을 망쳐버렸어. 한심한 남자가 둘씩이나 나오는 소설에서 '오, 한심한 여자가 아니라니 놀랍잖아?' 하는 해설이라니...



이디스 워튼의 여름이 아쉽다. 아주 많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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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06-25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에 대해 할 말이 많다고 하셔서 무슨 이야기일까 궁금했는데, 김욱동 해설 이야기였군요. 전 이 책 읽을 때 그렇게까지 불쾌했던 기억이 없었는데 ㅋㅋㅋ 다행히 김욱동의 저 해설을 안 읽어서 그랬었나봐요. <여름>보다는 <겨울>이 저는 더 좋았는데, 안타깝게도 그 책도 김욱동이 번역했어요. ㅎㅎㅎ 이디스 워튼 국내 번역작은 그래도 여성 번역가들이 꽤 옮긴 것 같은데, 문학동네 <여름> <겨울>은 왜 하필 ㅋㅋㅋㅋ <겨울>은 <이선 프롬>으로 문예출판사에서도 나와 있으니 (안 읽어보셨다면) 한번 읽어보세요. 특히 겨울에 읽으면 더 좋을 거예요....

잠자냥 2019-06-25 09:56   좋아요 0 | URL
이 댓글 쓰고 나서 문예출판사 <이선 프롬> 찾아보니 다락방 님 글이 여럿 달려 있네요. ㅎㅎ 오래전에 쓰신 글이라 지금 잘 읽어봤습니다...!

다락방 2019-06-25 10:05   좋아요 0 | URL
저 김욱동의 해설 읽다가 너무 빡쳐서 중도에 그만뒀어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건지 원... ‘우왕 채리티 개념있어, 애있다고 남자 발목 안붙잡아~‘ 이러고 있잖아요? 너무 싫음 ㅋㅋㅋ 어떻게 이디스 워튼 책에 저런 해설을 써다 붙였는지 원.

안그래도 겨울도 읽어봐야지 했거든요. 또! 김욱동이더라고요. 저 진심 문동에 다른 번역가로 개정판 내달라고 이메일 보낼까.. 생각도 했어요. 이선프롬 읽은지 오래되어서 겨울 로 다시 읽어볼까 했거든요. 그러면 옛날과 다른 감상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서요. 아아.. 진짜 남자 번역가가 여자 소설 번역하면 뜻을 제대로 파악 못하는 것 같아요. 전 너무 딥빡이 옵니다.. 하아-

syo 2019-06-25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김욱동 검색 때려봄.... 주로 민음사가 밥줄이군요. 저도 몇 개나 읽었구요...

다락방 2019-06-25 15:41   좋아요 0 | URL
이게 2009년의 책인데.. 저때는 저런 해설을 썼어도 지금은 많이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하렵니다. 많이 달라지지 않으면 퇴보하는 거잖아요. 아직까지 저런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건, 설마 아니겠죠... 책도 읽고 번역도 하시는 분이.... 저는 너무나 충격적인 해설을 본 것입니다.... 하아-

뒷북소녀 2019-07-07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겨울의 끝>만 알았는데 <여름>도 있다니. 어쨌든 이 책 읽어보고 싶어요. 이디스 워튼 때문에요.

다락방 2019-07-07 21:01   좋아요 0 | URL
네, 이디스 워튼이라 저도 읽었습니다. :)
 
아무튼, 요가 - 흐름에 몸을 맡기며 오로지 나에게 집중하는 것 아무튼 시리즈 21
박상아 지음 / 위고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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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전 요가를 처음 시작하면서 그것이 단순 스트레칭이 아니라는 사실에 놀라고, 내 몸이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뻣뻣함에 놀랐었다. 처음한 프로그램은 '빈야사' 였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에 근육통이 올 수 있다는 걸, 살면서 처음 경험했다. 요가가 이렇게나 힘든 운동이었다니, 팔과 다리와 배가 모두 운동을 하면서 소리지르는 그런 운동이라니. 맙소사.


다음날의 근육통은 그러나 비크람을 맞이하고 별 게 아니었음이 드러났다. 비크람은 핫요가인데 수련실의 온도와 습도를 높여놓고 26가지의 정해진 시퀀스에 따라 움직이는 요가를 말한다. 온도와 슾도가 높으니만큼 지치기도 쉽고 초보자는 속이 울렁거릴 수도 있다. 선생님은 호흡에 대해 중요하다 말씀하시고, 혹여라도 어지러우면 언제든 쉬어가라 하셨다. 나는 요가에서 호흡의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완전 초보였고, 억지로 억지로 시키는 동작들을 하기 위해 애를 썼는데, 수업을 마친 후의 나는 바로 기절 직전이었고, 내 몸에 손을 댔던 선생님은 몸이 너무나 뜨겁다며 놀라셨다. 게다가 얼굴도 시뻘개졌었어. 나는 이것이 단순히 요가 동작을 따라하는 데서 오는 힘듦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아, 다음날인 토요일,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지를 못했다. 점심무렵까지 침대에 누워 꼼짝도 하지 못했어. 이건 근육을 쓰는 데서 오는 근육통의 수준이 아니었다. 답답하고 불편했다. 몸을 꼼짝할 수가 없었다. 내가 그간 운동부족이어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건가 했는데, 다음 비크람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내게 호흡하라고 옆에서 말씀해 주셨다. 숨쉬라고. 그렇게나 얼굴이 빨개지고 온몸이 뜨거워지는 건 내가 숨을 참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동작이 어려우면 따라하기 위해 나도 몰래 숨을 참게 되는데, 선생님이 '숨 쉬세요!' 하면, '아, 내가 숨을 참고 있었구나' 깨닫게 된 것. 숨, 호흡, 그게 그렇게 중요해? 나는 의식적으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고에 집중했다. 그래도 어느틈에 참게 되는 순간이 있었지만, 의식적으로 숨을 쉬어야한다고 계속 내가 내게 말했어. 덕분에 두번째 비크람은 첫번빼 보다 나았고, 세번째는 두번째 보다 나았다.




"재클린, 나는 수업을 하다가 15분쯤 지나면 속이 너무 안 좋아서 화장실에 뛰어가야 해. 왜 그런 걸까?"

"아, 내가 보니까 넌 숨을 안 쉬어. 숨을 쉬어, 상아!"

그 말을 듣자마자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1년 동안 얘길 안 해준 거야?' 어쨌든 그 때부터 숨 쉬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숨을 쉬어야지'라고 생각하면서 수련을 하니 그동안 내가 정말 숨을 제대로 안 쉬면서 요가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옆사람보다, 앞사람보다, 뒷사람보다 잘해 보이려고 힘든 자세에서 숨을 참으면서 자세를 억지로 만들다 보니 자꾸 숨을 멈추고, 안 그래도 핫요가라서 요가룸이 뜨거운데 숨을 멈추니 호흡이 곤란해져서 토하러 가는 상황이 자꾸 발생했던 것이다. (p.37-38)



이 책의 저자 역시 비크람 수업 시간에 숨을 쉬는 걸 잊어 토하러 가곤 했단다. 아아, 나의 비크람과 겹쳐져 내가 다 고통스러웠어. 내가 다음날 일어나지 못하고 끙끙 앓고 누웠던 것은 호흡을 제대로 하지 못해 나쁜 기운이 바깥으로 나오지를 못하고 내 몸안에 고스란히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게 호흡을 잘하면 순환이 되서 나온다는데, 내가 그걸 못해서 내 안에서 그것들이 그대로 고여있었던 것. 그러니 몸이 아프고 불편하고 답답했던 거다.



아직 나는 요가의 호흡들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들숨과 날숨의 길이가 쉬이 같아지질 않는다. 그래도 계속해서 '호흡해야 한다'는 것만큼은 인지하고 있다. 여전히 놓치기는 하지만, 그래도 처음보다는 많이 의식적으로 호흡, 호흡 하고 있어.


덕분에 비크람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요가가 되었다. 처음엔 끙끙 앓아 눕게 만들었던 요가가 비크람이었는데, 지금은 가장 좋아하는 요가 프로그램이 되어, 매달 나오는 시간표에 비크람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없으면 센터에 건의를 한다. 비크람을 좀 넣어주세요, 하고. 특히나 비크람은 음주 후 다음날에 하면 와- 세상 천국을 보여준다. 몸 안에 고여있던 술이 다음날 온 몸의 땀구멍을 통해 빠져나와, 내 몸은 깨끗해지고 깨끗해지고 깨끗해진다. 만세! 여러분, 어깨에서도 땀이 나는 거 알아요? 어깨와 윗팔에서도 땀이 나는 걸 비크람이 내게 알려줬다. 만세! 내 안의 노폐물이여, 나오너랏!




이 책의 저자는 패션업계에서 일하기 위해 뉴욕을 찾았다. 직장을 얻기 위해서는 영어 점수가 좋아야했는데, 토플 점수가 좀처럼 잘 나오질 않아, 그간 매일 했던 요가 자격증을 좀 따볼까 하는 마음으로 강사 자격증을 딴다. 그러나 언어는 여기에서도 문제라, 처음 시범 수업을 맡게 되었을 때 크게 당황해 예정보다 수업도 일찍 끝내고 그 수업은 실패로 끝난다. 사람들에게 내 말이 잘 전달되지 않는 것 같고 자신 역시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아, 그녀는 요가를 하면서도 공황장애를 앓게 된다. 힘들고 벅찬 가운데에서도 한 번 더 제대로 수업해보고 싶은 마음에 수업을 다시 하게 해달라고 얘기해보지만, 센터에서는 좀처럼 그녀에게 수업을 맡기지 않는다. 그녀의 첫 수업 실패는 너무 혹독했다. 매일 찾아가 센터의 일을 도우면서 어떻게든 기회를 따내보고자 하지만 뜻대로 되질 않는다. 그렇게 힘들면서도 그녀는 여러 프로그램의 강사 자격증을 다 따내게 되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자신이 토플 점수도 예전보다 훨씬 잘 나온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만 이제 패션계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녀는 요가 강사를 자신의 직업으로 택한다.


그녀가 요가를 하는 것은 그저 요가만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다른 문화를 알고 익혀야 했고 다른 언어를 알고 익혀야 했다. 요가에서 되지 않는 동작이 있을 때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하고 넘어지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수련을 했고, 집에서 먼 곳에 있는 곳이라도 수련을 위해서라면 찾아갔다. 그러다보니 어느 틈에 그녀는 자신이 처음 설정한 목표대로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요가를 알려주는 전문적인 요가 강사가 되어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이 사람은 뭘 했어도 성공할 사람'이란 생각을 했다. 이 사람이 선택한 게 요가였지만, 요가가 아니었어도 이 정도의 노력이라면 성공했을 거다.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가르쳐야 하기 때문에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하는 말들을 녹음해 집에 와 반복해 적고 외우는 과정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되지 않는 동작들을 넘어져가며 배우는 그 시간들은 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가. 먼 데까지 강연을 가는 그 시간들은 또 어떻고. 그녀는 요가를 위해 자신이 가진 시간과 에너지를 모두 쏟아붓는다. 그런 그녀가 목표했던 동작들을 해내고 또 목표했던 삶을 살아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아니, 이런 사람이 성공하지 않으면 누가 성공한단 말인가.



그녀가 낯선 언어들 틈에서 간신히 거울로 다른 사람들의 동작을 따라하며 요가를 시작할 때, 어떻게 이런 큰 스트레스를 견디는가 싶었다. 어떻게든 해보고자 선생님의 구령을 녹음하고 따라 풀어 쓰며 외울 때는, 나였으면 결코 이정도까지 할 마음을 먹지도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공황장애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굳이 한걸음 더 나아가는 데에는 말해 뭐해, 나였으면 아마 진작에 포기했을 거다. 게다가 그녀는 더 나은 요가를 위해 채식을 선택한다. 숙련자 과정에서 만난 60대의 여성분이 채식을 한다는 말을 듣고 그녀 역시 채식을 선택하게 되는데, 그러자 그동안보다 더 동작이 깊어지게 된 것. 아아, 역시 내가 따를 수 없는 경지다. 그녀의 최선을 다하는 이 과정들을 보노라니, 그녀의 노력이 여기까지로 그녀를 이끌게 된 건 너무나 당연해 보였고, 그래서 결코 내게는 올 수 없는 일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항상 '2년이나 요가 했는데 여전히 요가를 못해' 라고 해왔던 내가 얼마나 오만한가를 깨달았다. 햇수로 2년이지만, 나는 과연 2년간 어떤 성과를 가질 수 있을만큼의 요가를 했던가? 일주일에 고작 2-3일 나갈 뿐이고, 그마저도 한시간 수업이 전부인데, 그것이 내 요가의 전부인데 내가 2년이나 했는데 여전히 못한다며 징징대는 것은 아아, 얼마나 오만한가. 작가가 오랜 시간 노력해 해온 동작들을 내가 이만큼의 시간과 노력으로 얻는다면 그야말로 말도 안되는 게 아닌가. 나는 노력하지 않았다. 나는 애쓰지 않았다. 그런 내가 요가를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2년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 2년을 온전히 요가에 투자한 것도 아니었어.




크리야(Kriya)란 우리 모두에게 잠재되어 있는 쿤달리니(Kundalini)라 불리는 척추 에너지를 깨우는 수련으로 이 에너지가 깨어나면 전에 없던 지혜와 통찰력, 그리고 창조성 등이 생긴다. (p.121)





결국 이 책의 작가는 쿤달리니를 경험한다. 몸이 떨리고난 후 삶에 있어 자신감이 생기고 두려움이 없어지며 아이디어가 샘솟기 시작한 것. 와. 너무 대단했지만, 내가 결코 이를 수 없는 경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생애 내가 요가를 잘하는 것은 안되겠구나, 나는 바라는 것 조차도 이 경지는 아니었어.




에세이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은 글쓴이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난다는 데 있다. 그말인즉슨, 에세이를 읽으면서 그 글을 쓴 사람에 대해 인간적인 호감이 생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에 대해 호감이나 매력이 생기지는 않았다. 오히려 '와, 나는 이렇게 열심히 살지는 못할거야' 라는 생각이 들어 좀 거리감이 느껴졌달까. 그러나 그녀가 어디에서 무얼하든 성공할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에 이토록이나 시간과 노력을 들여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게 성공은 따라올 수밖에 없어. 결국 그녀는 자신이 10년후의 목표로 잡았던 것을 더 짧은 시간내에 이뤄낸다. 그녀니까, 그렇게나 최선을 다해 요가에 집중한 그녀니까 가능했다.

또한 그녀는 더 성장했다. 자신만 보던 사람이 타인을 볼 수 있게 되었다면 적절한 표현일까. 요가를 받아들임으로써 더 성장하는 그녀가 이 책 안에 있었다. 어떤 사람은 굳이 실수나 실패 없이 깨닫게 되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반드시 실수나 실패 뒤에야 다음부터 이러지 말자, 하게 되는데, 작가는 후자였다. 그 과정에서 상처받거나 기분 나빠했을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러니 그러지 않고 미리부터 알았다면 좋았겠지만, 그러나 그녀가 자신의 잘못을 알고 고치고자 했다는 것은 의미있다.



나는 지금 요가를 쉬고 있다. 병원에서 한 달간은 요가를 쉬는 게 좋을 것 같다해 그렇게 하고 있는데, 요가를 하지 않은 일주일을 보내고나니 너무 요가를 하고 싶어지는 거다. 마침 수업 때 선생님이 '락방씨는 등의 힘을 길러야 해요, 코브라 자세 집에서 연습하세요' 했던 게 떠올라 엊그제 밤에 코브라 자세를 취하는데, 앗, 수술한 부위가 땡기는 거다. 안돼, 아직 안되겠다. 조금 더 있다가 시도하자, 하고 이내 포기했는데,


어제 이 책을 읽으면서 당장 비크람 하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 이 책에는 비크람의 자세들이 소개되는데, 비크람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요가 프로그램이지만 여전히 힘든 동작들이 많은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나도 얼른 비크람 하고 싶다. 나는 강사가 될 수도 없겠지만, 쿤달리니? 와- 그건 감히 꿈도 못꾸겠지만, 그래도 하고 나서의 개운함을 느끼는 정도로 만족하며 건강하게 지내야지. 열심히 요가 하는 사람의 책을 읽고 느끼기엔 적합하지 않은 감상이지만,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지는 말아야지, 생각했다. 그녀가 열심히 해서 성공하는 걸 보는 건 대리만족의 기분도 느껴지지만, 사실 '어휴, 어떻게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지' 하며 내가 대신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다. 너무 열심히 하는 걸 보는 것도 어떤 면에선 스트레스가 와. 나는 이렇게까지 열심히 할 자신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진 말아야지. 다만,



인생에서 요가를 놓지 말자, 는 생각은 하고 있다. 나는 어쩌면 평생 가야 다리 찢기가 안될 지도 모르고, 평생 가도 머리 서기는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계속계속 사지를 쭉쭉 힘주어 뻗는 일만큼은 멈추지 말아야지. 당장 명상도 제대로 못하지만, 더 잘하기 위해 이를 악물거나 하지는 말아야겠다.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하는 건, 이번 생애 요가에 있어서만큼은 난 아니야.. 내 몫이 아니다. 요가를 더 깊이 잘하기 위해 고기를 끊는 것까지는 와- 노노. 나는 그 길로 가지는 못하겠어.



나는 그저 즐겁게 사지를 뻗으며 살겠다. 쭉쭉.





요가에는 잘하고 못하고가 없다. 내가 나의 몸과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또는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도모하기 위해 하는데 왜 잘하고 못하고를 남이 평가하려 드는가? 이것은 마치 내가 건강을 위해 또는 정신수양을 위해 매일 새벽 약수터에 가는데 사람들이 내가 약수터에 잘 가고 못 가고를 참견하는 것과 같다. - P9

어릴 때부터 막연하게 미국에 살고 싶다는 꿈이 있었기에 잘 다니던 일본계 패션 회사를 그만두고 2011년 뉴욕으로 유학을 결심했다. 이미 일본에서 유학에 성공한 경험이 있기에(스물네 살에 120만 원을 들고 일본으로 떠났다. 5년간 알바를 병행하면서 혼자 힘으로 공부를 했고, 스물아홉 살에는 일본계 패션 회사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당연히 뉴욕에서도 잘해낼 줄 알았다. 미국에 가면 얼마 안 돼 언어도, 직장도 다 잡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때 난 내가 일상회화 정도는 되는 영어 실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막상 뉴욕에 와보니 나는 일상회화는커녕 스타벅스에서 커피 하나도 제대로 주문하지 못하는 레벨의 영어를 하고 있었고, 미국 소재의 대학이나 대학원을 나오지 않으면 내가 원하는 외국계 패션 회사에 취업하기가 어렵다는 것, 그리고 막상 취업이 된다해도 취업 비자를 받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P13

영어학원에 가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뉴욕은 내가 감당하기에는 물가가 너무 비싸고 돈이 많이 드는 곳이었다. 시간만 많고 돈이 없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나보다 먼저 뉴욕에 와서 자리를 잡고 살던 친구에게 푸념을 늘어놓았더니 친구는 5불만 내면 되는 요가원이 있으니 한번 가보자고 했다. 그렇게 나는 요가원을 찾아가게 되었다. - P13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2분 샤워는 내 인생을 많이 바꾸어놓았다. 그전까지만 해도 운동 후에는 꼭 깨끗하게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고, 머리를 말리고, 화장을 해야 했기 때문에 운동하는 것보다 이후의 과정이 짐스럽게 느껴져 헬스장을 끊어놓고 한 번 가고 안가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그런데 요가 자체에 재미를 느끼다 보니 어쩔 수 없이 2분 샤워에 맞추게 되고, 그러다 보니 화장도 하지 않게 되고, 머리는 자연 건조로 마르게 그냥 내버려두거나 묶게 됐는데 그게 매우, 꽤 괜찮은 것이다. 샤워에서부터 화장까지 한 시간이 걸리던 일상이 2분으로 줄어들면서 58분이라는 시간 동안 센트럴 파크를 걷거나 브라이언 파크에 샌드위치를 사들고 가서 사람들을 구경하며 느긋한 점심을 먹거나 또는 그냥 요가 매트를 깔고 공원에 누워 하늘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조급해지던 2분 샤워는 오히려 내게 느긋함을 선물해줬다. - P29

하다 보면 늘겠지란 막연한 기대로 하루에 비크람 요가 수련 한 번, 빈야사 요가 수련 두 번, 그렇게 무식하게 몸이 벌벌 떨릴 정도로 수련을 하면서 대충 빈야사 요가가 무엇인지 감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빈야사 요가 수업도 핫요가 때처럼 여기저기 수업들을 찾아다니면서 녹음을 하고, 내가 알아듣고 따라서 말하기 쉬운 선생님들의 구령을 받아 적고 조합해서 외우기 시작했다.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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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ssbaum 2019-06-24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가를 매일 꾸준히 한다는 건 참 어려운 일 ! 열정에 박수를 매우 많이 보냅니다. ^^

다락방 2019-06-24 17:47   좋아요 0 | URL
제가 꾸준히 할 수 있는 건 딱히 열심히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책 읽는데 요가에 대한 저의 게으름이 느껴지면서, 아 못하는 건 너무 당연하구나 징징대지 말아야지, 생각했어요. ㅎㅎ

댓글 적어주신 걸 보니, 이제 자주 오시는겁니까?

Nussbaum 2019-06-24 19:30   좋아요 0 | URL
문득 생각해보니 여러 알라딘 이웃에게 댓글을 못달고 있었네요.

알라딘 들러 그냥 눈팅만 하지 말고 안부 인사도 잊지 않고 남기고 해야겠습니다.

blanca 2019-06-24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크람 요가는 안 해봤는데 이거 당장 해봐야겠네요. 저는 홈트합니다. 홈트 요가 ㅋㅋ 한때 요가의 모든 동작을 정복해보겠다고 물구나무섰다가 무서워서 다리 못 내려 죽는 줄 알았어요. 어, 근데 다락방님 어디 아프신가요? 우리 다 같이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요. 이 책 전자책 다운받아 놓고 읽지 않았는데 님 페이퍼 보니 읽어봐야겠군요! 다락방님 얘기한 그 인문만화고전 있나 싶어 대여점 갔는데 아쉽게도 없더라고요.

다락방 2019-06-25 07:35   좋아요 0 | URL
저희 센터 같은 경우는 기계로 온도랑 습도를 높이거든요. 한여름에는 기계로 높이지 않고 그저 바깥 온도에 의지합니다. 그래도 충분히 비크람 온도가 되기 때문에요. 5-6월에 홍콩이나 베트남에 가면 비크람 하는 그 온도가 바깥 날씨인 것 같아요. 작년 5월에 여동생과 홍콩에 도착해서 ‘핫요가 날씨다!‘ 하고 둘다 좋아했거든요. 여동생도 핫요가(비크람)를 좋아해서요. 제가 동남아를 좋아하는 건 비크람을 알고 나서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ㅋㅋㅋ

블랑카님, 인문만화 고전은 동네 도서관을 들러보세요! 대여점에는 없을 것 같고요, 도서관이라면 있을 겁니다!!

우리 부지런히 요가 하면서 건강하게 오래오래 이곳에서 다정하게 지내요!

단발머리 2019-06-24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글에 요가 배울 때의 경험을 읽다보면, 제가 문화센터에서 받았던 요가 수업은 모습은 요가이되 사실은 맨손 체조였던 것 같아요. 저는 힘들지 않았습니다. 결단코.
저랑 같이 했던 언니는 자세마다 최선을 다하느라, 요가만 끝나면 머리가 아프다고 하소연 하셨거든요. 저는, 구령 하나 늦게 시작해서 하나 먼저 끝내버리는 단발머리 신공으로.... 힘들 틈이 없었습니다.
아!! 허리를 구부리지 못 했던 시간이 기억나기는 하네요.

쿤달리니에 대한 이야기 흥미로워요. 오랜 수련 뒤에 외부의 자극 없이 몸이 흔들렸다는 건데, 그게 너무 신기하네요.
내일부터 요가 매트 펴보렵니다!!
아무튼 내일^^

다락방 2019-06-25 07:39   좋아요 1 | URL
단발머리님, 제가 다니는 센터가, 그러니까 제가 가격 비교 해보고 요기죠기 따져본 게 아니라, 걍 집에서 가까워서 들렀다가 등록 안하고 나오기 거시기해서 너무 비싸다...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등록한 센터거든요. 너무 비싸 3개월만 다니고 다음 일은 다음에 생각하자, 했는데, 너무 좋더라고요. 선생님들 친절하고 한 명 한 명에게 관심 가져주시고 프로그램도 다양하고요. 그래서 걍 2년째 다니고 있어요. 프로그램중에 ‘힐링‘이나 ‘테라피‘라고 그저 스트레칭 위주인 프로그램도 있는데요, 그건 말 그대로 몸을 그냥 기지개 펴듯 뻗어주기만 하는건데, 이것만 해도 너무 힘들더라고요. 빈야사에 비하면 덜힘들지만, 그래도 스트레칭 한시간 만으로도 온 몸이 다 순환되는 기분이에요.

단발머리님이 힘들지 않으셨던 것, 프로그램 자체가 쉽게 구성되어서 였을 수도 있지만, 단발머리 님이 애초에 유연한 몸을 가졌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처음한다고 다들 저처럼 힘들지는 않더라고요. 저는 너무 앉아있는 시간이 길었는지 몸이 썩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지금 쉬고 있으니 다시 썩어들어갈 듯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쿤달리니는 제가 이를 수 없는 경지 같아요. 저 작가의 인스타도 찾아서 들어가봤거든요. 여러가지 이유로 흥미로워서 팔로우도 했어요. 동작 하다가 뭔가 시선이 모이면서.. 저렇게 집중하는건가 싶고...아무튼 이 책은 여러가지로 저에게 인상깊은 책이었어요.


저도 어서빨리 요가 하고 싶네요 ㅠㅠ
 
제가 왜 참아야 하죠? - 참을 만큼 참았으니 이제는 참교육
박신영 지음 / 바틀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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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앞부분 절반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성폭력 사건들에 대해 나온다. 이미 신문기사나 여성학 책들을 통해서 혹은 SNS를 통해서라도 알고 있는 것들이라 새로울 건 없지만, 숱한 성폭력 기록을 읽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다. 제목만 보고 페미니즘 에세이라고 생각했고, 내가 이제 페미니즘 에세이는 좀 건너뛰고 싶은데.. 생각하며 읽었다가 수시로 트리거 눌려서 책장을 덮고 고민했다. 다 읽을까 말까. 묻어두었던 것들을 기어코 꺼내보게 하는 데에서 지쳐버렸달까. 계속 이런 식이라면 내가 이 책을 읽어서 얻는 게 과연 무엇인가.


그러나 2부라도 해도 좋을 뒷부분에서는 저자가 직장내 성폭력을 당하고나서 가해자를 고소한 기록이 나온다. 길고도 힘든 싸움에 지쳤을텐데 끝까지 싸운 기록을 읽노라니, 이 기록 자체가 많은 사람들에게 힘이 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우리가 익히 아는 것처럼 가해자는 자신은 성폭력범이 아닌, 피해자와 사랑하는 사이었음을 핑계로 대고 있고, 피해자가 이 재판을 포기하게끔 협박하기 위해 자기랑 친하다는 조폭 형들까지 부른다. 그런데도 끝까지 싸운다니, 정말 대단하다. 그런 저자가 이 모든 과정을 끝내고 싸움꾼이 된 건 너무 당연한 게 아닐까. 그녀는 이제 마트에서 젊은 여자캐셔에게 시비거는 할아버지에게 으르렁 댈 수 있는 싸움꾼이 되었다.


세상의 모든 버텨준 이들에게, 싸워준 모든 이들에게 고맙다.



이 책은 페미니즘 입문서라고 봐도 좋을텐데, 이미 꼴페미라면 건너 뛰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러나 페미니즘에 대해 얘기할 친구도 별로 없고 페미니즘을 알고 나니 좀 외로워졌다면, 싸움꾼이 되고 싶은데 격려가 필요하다면, 그런 사람들에게는 꽤 도움이 될 것 같다. 아, 그리고 혹여라도 성폭행 가해자 고소를 앞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확실히 도움이 될 것이다.






1993년 유엔이 채택한 ‘여성폭력철폐선언‘을 볼까요. 제1조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을 ‘사적·공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여성에 대한 신체적·성적·심리적 해악과 여성에게 고통을 주거나 위협하는 강제와 자유의 일방적 박탈 등 젠더에 기초한 모든 폭력 행위‘로 정의내리고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육체에 영향을 미쳐야 성폭력인 것은 아닙니다.
여성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심리적 폭력도 성폭력입니다. 여성을 독립된 인권을 지닌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기에 나오는 온갖 언어폭력들도 다 성폭력입니다. 남성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고 외모를 가꿀 것, 남성 밑에 있을 것, 남성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말을 하거나 표정을 짓지 말 것, 남성을 대할 때는 항상 유순한 표정을 지을 것을 강요하는 것도 성폭력입니다. 사회적 통념에서 비롯된 성폭력입니다. - P45

피해망상 남성들이 성폭력 사건 기사에 마치 전통 민요 메들리마냥 꾸준히 되풀이해서 다는 댓글이 있습니다. 꽃뱀 타령과 무고 타령이죠. ‘여자가 지목만 하면 무조건 처벌받아 무고한 한 남자의 일생이 끝장난다‘는 말들, 다 뻥입니다. 일반 범죄 사건의 기소율은 85%인데 성폭력 범죄는 절반 정도밖에 안 됩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아무리 중한 피해를 입어도 증언에 빈틈이 있으면 그 사건은 기소되지 않습니다. 피해 여성의 지목과 증언만으로 남성이 처벌받아 일생을 망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범죄자가 증거 부족으로 기소되지 않고 무혐의를 받는 사례가 훨씬 많습니다. 그런데도 주위에 무고하게 성범죄자로 몰린 남성들이 많다면, 그것은 단지 성범죄자 남성이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이 저지를 범죄를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P210

그런데 이런 무고죄 맞고소는 굉장히 한국적인 현상이라고 합니다. 2018년 3월 12일 루스 핼퍼린-카다리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 부의장이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입니다. 카다리 부의장은 "미투 운동 이후 무고나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움직임이 늘어나는 모습은 한국의 독특한 현상"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례를 본 적이 없고 이게 얼마나 강력한 전략인지 정부가 인식하고 대응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며 한국 정부가 성폭력 실태 개선을 위한 의지를 갖고 있지 않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미투 운동이 일어난 후 현재는 형사 조사와 재판이 끝날 때까지 성폭력 사건에 대한 피의자의 무고죄 접수를 안 받아주도록 정부가 조취를 취했습니다.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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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전적으로 권력에 관한 메리 비어드 선집 2
메리 비어드 지음, 오수원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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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리 제임스가 여성들의 목소리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작가일 줄이야. 데이지 밀러 (아마도) 사뒀는데. 그래도 읽어봐야지.


헨리 제임스가 1880년대에 출간했던 소설 『보스턴 사람들』의 중심 주제 중 하나는 젊은 여권신장 활동가이자 연사인 베레나 태런트를 침묵시키는 것이다. 태런트는 구혼자 바질 랜섬(그는 제임스가 강조하듯 깊고 풍부한 목소리의 소유자다)과 가까워지면서 예전처럼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할 수 없게 되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랜섬은 태런트의 목소리를 사적이고 내밀한 것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그는 베레나가 오직 자신에게만 말을 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린다. '위안을 주는 당신의 말은 나만을 위해서 해줘요.' 이 소설에서 제임스 자신의 입장이 무엇인지 정확히 확정짓기는 어렵다(독자들이 랜섬이라는 인물에게 매력을 느끼지 않는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소설이 아닌 다른 시평에서 제임스는 자신의 입장을 명료히 밝혔다. 여성들의 목소리가 오염성과 전염성이 강하고 사회적으로 파괴적인 효과를 낸다고 주장한 것이다. (p.49-50)



- 최근 읽는 페미니즘 책에서 《허랜드》가 계속 언급되는데, 이 책 역시 나의 '사두고 읽지 않은 책'에 포함되어 있는 바, 속히 읽어야겠다. 허랜드 속편은 국내에 번역되지 않았나 보다.



남성 중심의 전통적 담론의 힘을 숙명론적으로나마 꽤 탁월하게 포착해낸 작가는 파킨스 길먼이다. 『허랜드』의 속편 소설인 『그녀와 함께 아워랜드에서』가 그 사례다. 이 소설에서 반다이크는 아워랜드로 돌아가는 테리를 호위하기로 한다. 반다이크는 아내가 된 허랜드의 여인 엘라도어도 아워랜드로 데려갈 참이다. 실제로 소설 속 아워랜드는 그다지 화려한 과시 대상이 되지 못한다. 엘라도어가 그곳으로 들어가는 시점이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 벌어지던 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머지않아 이 부부는 테리를 내팽개친 다음 허랜드로 다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그즈음 두 사람은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미 간파했지만 이 중편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머지않아 우리는 아들을 낳았다.' 퍼킨스 길먼은 더 이상 속편이 필요하지 않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서구 전통의 논리를 아는 독자라면 그로부터 50년후 허랜드를 책임지게 될 인물이 누가 될지는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을 테니까. 정답은? 바로 그 남자아이다. (p.119-120)




- 저자 '메리 비어드'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고대 로마 문헌을 연구하는 교수라는데, 교수라는 타이틀을 갖기 위해 그리고 유지하기 위해 그녀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읽고 학습하고 노력했을까. 중간중간 삽입된 그림들이 인상적이라, 정말이지 공부란 것은 하면 할수록 더 할 게 많은 것이구나, 했다. 고전의 수많은 사례들을 가져오고 또 그에 해당하는 그림들까지 가져오다니!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읽어야할 게 더 많고 알아야 할 게 더 많다는 것만 새삼 깨닫는다.

그녀는 수많은 인터넷 트롤들로부터 비난과 공격을 받는데 거기에 상처받는 사람이기 보다는 그들을 우스워 하는 쪽이다. 그녀가 강한 건 그녀가 가진 지식의 영향도 있을 터.




- 공부하자!

메두사는 아테나의 신전에서 포세이돈에게 강간당한 미녀로 나온다. 아테나는 메두사가 신성을 모독한데 대한 처벌로 그녀를 재빨리 괴물-보는 사람을 즉시 돌로 변하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괴물-로 둔갑시킨다(여기서 주목할 점은 벌을 받는 존재가 강간을 저지를 포세이돈이 아니라 강간을 당한 여인인 메두사라는 것이다). 훗날 이 여자를 죽이는 것을 페르세우스라는 영웅의 사명이 된다. - P97

(영국 총리 테리사)메이는 또한 대처가 그랬듯 전통적 보수당인 토리당 내 남성 권력이라는 무기고의 아킬레스건을 꽤 능숙하게 활용한다. 그녀가 남성 중심의 사교 클럽에 어울리는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녀가 ‘은밀한 남성 클럽의 구성원‘이 아니라는 사실은 때로 그녀가 독립된 영토를 스스로 개척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결국 메이는 배제로부터 힘과 자유를 얻은 셈이다. 게다가 메이는 ‘맨스플레인(mansplaining, ‘남성‘과 ‘설명하다explain‘라는 단어를 합성하여 만든 신조어로, 주로 남자가 여자에게 훈계하듯 뭔가를 설명하는 일을 가리킨다)‘에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 P109

책을 새롭게 다시 쓸 기회가 있다면 나는 여성들이 틀릴 권리, 최소한 이따금씩이라도 틀릴 권리를 옹호하는 데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할 것이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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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05-30 09: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헨리 제임스 이야기가 나오니까 그의 여동생 앨리스 제임스가 떠오르네요. 수전 손택의 희곡 <앨리스, 깨어나지 않는 영혼(Alice in Bed)>은 헨리 제임스의 여동생 앨리스 제임스의 불행한 삶을 그리고 있는데요, 그에 따르면 작가인 헨리 제임스와 철학자인 윌리엄 제임스를 오빠로 둔 앨리스 제임스는 어릴 때부터 풍요로운 문화와 교육적 환경에서 자라 일찌감치 총명하고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나.......... 19세기에는 그녀의 그런 자질을 받아들여 줄 만한 분위기가 조성되지 못했고, 더구나 가부장적인 집안 분위기로 인해 그녀의 재능은 꽃을 피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평생 자살충동, 우울증 등을 겪다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오래전에 읽으면서 몹시 분노했던 기억이 나네요.

기회가 된다면 이 책도 한번 읽어보세요. <앨리스 깨어나지 않는 영혼>- 다락방 님이 읽고 리뷰 한번 쓰시면 아마 더 많은 분들이 읽을 것 같습니다.

다락방 2019-05-30 11:14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책을 찾아보니 절판이네요. 다행히 저희 동네 도서관에는 있어요. 다음에 도서관 가면 빌려와서 읽어봐야겠어요.
댓글과 추천 감사해요. 아윽 그런데 읽을 책이 쌓이네요. 아직 제가 읽지 않은 이 많은 책들을 대체 언제 다 읽을 수 있을까요 ㅠㅠ

조그만 메모수첩 2019-05-30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헨리 제임스 의외네요. 나사못 회전 같은 데서 여성 인물을 주인공으로 세워...를 생각하니 히스테리컬한 인물로 당대 편견을 많이 안고 있네요 지금 생각해보니. 리뷰 감사합니다.

다락방 2019-05-31 07:36   좋아요 0 | URL
고전을 써낸 유명한 남자 작가들이 여성에 대한 편견을 책 안에서 많이 보여주는 것 같아요. 저는 고전 읽는 것도 좋아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열심히 읽겠지만, 읽을 때마다 거슬리는 것들은 분명히 거슬린다고 얘기해야 겠어요. 이미 작가들은 들을 수 없다 해도 말이죠.

2019-05-30 2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9-05-31 07:36   좋아요 0 | URL
으흐흐흐. 저 이번 달에는 제 쿠폰도 못쓰고 있어요. 그렇지만 감사합니다!

독서괭 2019-05-30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나사의회전 도서관에서 재밌게 읽다가 다 못 읽어서 헨리제임스 단편선집 사려고 했는데.. 그런 작가인 거 염두에 두고 읽어야겠군요.

다락방 2019-05-31 07:37   좋아요 0 | URL
저도 나사의 회전 읽으려고 벼르던 책인데 제가 사뒀는지 아닌지는 기억이 안나네요. 안사뒀으면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야겠어요.
 
여자는 인질이다 열다 페미니즘 총서 3
디 그레이엄.에드나 롤링스.로버타 릭스비 지음, 유혜담 옮김 / 열다북스 / 2019년 3월
평점 :
품절


국민학교 시절, 해마다 과학상상화 그리기 대회가 있었다. 과학 서적 읽고 글쓰는 대회는 고등학교 때까지도 있었고. 나는 과학상상화 그리는 것이 너무 싫었다. 아무것도 상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해가 바뀌어도 내가 그리는 거라고는 하늘을 나는 자동차 뿐이었다. 태양을 그리거나 지구를 그리고 옆에 날개 달린 자동차를 그리는 것. 나는 그것말고 다른 어떤 것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아주 어릴적부터 나는, 스스로 상상력이 아주 부족한, 거의 전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한참 지나 어른이 되었을 때, 그러니까 삼십대 초반이었던 것 같다. 나는 성인이 되어 만난 친구와 같이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서 만났다.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우리는 상상력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학창시절 이야기를 하며 '나에게는 상상력이 전무해' 라고 나는 친구에게 말했다. 친구는 그때 내게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며, 나는 너만큼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 내가, 상상력이라고?


친구의 말은 그랬다. 너처럼 책 한 권을 읽고도 다른 사람의 상황에 대해 그려보려 하고 그 사람을 이해하려는 사람이, 친구의 말을 들으면서도 친구를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이 어떻게 상상력이 없다고 말할 수 있냐.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 다른 상황을 이해하고자 하는 그 노력이야말로 상상력이라고. 나는 그것을 그저 공감능력이라고만 생각했다가, 친구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나에게 상상력이라는 것이 있는거구나, 생각했다. 그간 내가 생각해온 상상력이란 것은, 과학상상화 그리기 대회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었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하고. 나는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 인지하지도 못했으며 심지어 그것이 아예 내게 존재하지도 않는다고만 생각했다. 아, 내게도 상상력이 있는 거였어, 맞아, 그것은 상상력이지! 라고 생각했던 십 년전의 시절이 있었다면, 이 책, '디 그레이엄'의 《여자는 인질이다》를 읽고, 상상력이야말로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새삼 깨닫게 됐다.



여러분, 우리는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의 상황과 '다른' 상황을, '다른' 사람을, '다른' 순간을, '다른' 장소를!




디 그레이엄과 공저자들은 이 책을 통해 우리가 현재 이성애를 대부분 하고 있고, 여성성을 갖추려하고, 남성에게 사랑받으려고 하는 상황들이 건강하거나 안정적인 상황이 아니기 때문임을 반복해 드러내준다. 은행강도였던 인질범과 인질들과의 관계를 통해, 우리가 만약 남자들로부터 생존위협을 당하는 게 아니었다면, 폭력과 강간에 노출되어 있는 게 아니었다면,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래도 우리는 남자를 사랑하고, 아름답기 위해 애를 썼을까? 라는 질문을 반복해 던진다.


물론 지배와 피지배로 이루어지지 않은 수평적 사회라고 해도 우리 여자들은 남자를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위협이 없는 세상에서의 이성애는 그 전의 이성애와는 다를 것이다. 디 그레이엄과 공저자는 여러 연구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펼쳐나가는데, 이 논리적이고 똑똑한 문제 제기 앞에 어느것 하나 허투루 쓰여지질 않았다. 모든 면에서 디 그레이엄이 초기에 경고한 문구는 정확했다. 바로 그대로였다.



이 책을 쓴 공저자로서 나와 내 동료들은 독자들에게 두 가지를 약속한다. 첫 번째로 우리는 여기서 여남 관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것이며, 여러분은 다시는 이전 같은 방식으로 여자, 또는 남자, 또는 여남 관계를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두 번째로 이 책을 읽는 건 감정적으로 힘겨운 여정이 될 것이다. (p.35)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과는 이제 다른 시각을 갖게 됐다. 자기 만족이라며 꾸밈 노동을 열심히 하는 것은 과연 자기 만족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자들이 이념적, 물리적으로 고립되는 것,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 남성과 여성과의 관계에서 지배와 피지배의 현상. 이 모든 심각한 문제들과 원인들에 대해 잔인하게 쑤셔놓고, 그런데 디 그레이엄은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할지에 대한 답으로, 놀랍게도, '페미니즘 SF 소설 읽기'를 방법으로 내놓는다.


뭐라고?

뭐라는거야?

지금 한낱 소설읽기를 대안으로 내놓는거야?



나는 이 생뚱맞은 방법에 대해 당황스러워졌다. 이렇게 논리적이고 똑똑하며 심지어 무섭기까지 한 책에서 갑자기 SF 소설 읽기가 왜나와?


그러나 여기서 바로 '상상력' 이 출현한다.



상상력과 용기는 우리가 절망하지 않고 굳세게 사회적 행동에 나설 수 있도록 해준다. (P.349)



디 그레이엄은 '샬럿 퍼킨스 길먼'의 《허랜드 Herland》와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단편들을 통해 그 안에서 여자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리고 그녀들 스스로를 어떻게 지키는지에 대해 얘기해준다.



루스(팁트리 단편의 주인공)는 남성 폭력을 무시하지도 면죄부를 주지도 않는다. 본인의 인식만을 문제 삼지도 않고, 일이 잘못됐을 때 본인의 행동만을 탓하지도 않는다. 그는 타인도 책임감 있게 생각하고 행동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p.353)



길먼과 티트리의 작품에서 여자 등장인물들은 근거 없이 남자를 깎아 내리지도, 그렇다고 용납해서는 안 되는 남자의 행동을 용납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본인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만큼 다른 이들에게도 행동의 책임을 묻는다. 그렇기에 자신이 남자에게 느끼는 공포를 인정하고 분노하기도 하며, 자아 성찰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세 소설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본인을 믿기에 적절한 순간에 타인을 불신하기로 선택할 수 있다. 이 불신 덕분에 무력하게 변화에 몸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변화에 힘을 보탤 수 있게 된다. (p.354)



이밖에도 다른 소설들을 가져오며 우리가 분노할 수 있어야 하며, 공감하고 모여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언어를 가져야 한다는 것도. 우리가 이런 소설들을 읽음으로써 비로소, 다른 세상을 상상할 수있고, 상상할 수 있어야 거기까지 갈 힘도 생긴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이쯤되면 이것은 허무맹랑한 이야기거나 생뚱맞은 게 아니라, 당연히 밟아나가야 할 수순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SF 소설을 읽고 지금과는 '다른' 것에 대해 상상하는 것만이 이 책의 저자들이 내세우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다. 우리는 여성이 여성의 편이 되어주어야 하고, 자신을 비롯한 여성들의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얘기한다. 비전을 갖고, 여성들끼리 모이고, 그리고 우리 자신을 잘 돌보고 잘 먹고 잘 살라고. 우리는 이미 많은 부분에서 가부장제의 문제점을 알고 인식하고 반항하고 있으니까.



이 책에서 공저자가 내놓는 방법이라는 것은 사실 그동안 페미니스트들이 각자 깨달으며 서로 응원하는 방법들이기도 했다. 자, 우리 이렇게 하자,  이야기했던 방법들이 모두 디 그레이엄의 책 속에 있었다. 이 사회를 어떻게 바꿀까, 나는 어떻게 견뎌내고 또 탈출해야 하는가에 대해 곰곰 생각해보면 결국 이런 방법을 찾게 되는 것이다. 페미니즘 SF 소설 읽기,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책과 이 책에서 언급됐던 《시녀이야기》까지. SNS 를 통해 페미니스트들이 서로에게 추천해주었던 책들의 목록이다.



고립된 상황에서 아직도 모르는 사람들도 허다하겠지만, 아주 많은 여자들이 이제는 알고 있다. 알고 있고, 방법을 찾으려하고, 찾아낸 방법을 공유하고자 한다. 그렇게 앞으로 가고 있다. 더 열심히 읽고 쓰고 더 열심히 잘 먹고 잘 살아서 나 역시 페미니스트들이 앞으로 나아가는 데 힘을 보태야겠다.



오타가 많아 좀 거슬리긴 했다. '있다'를 '없다'로 오타내거나 '인질'을 '인질범'으로 오타를 내는 건 좀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표시를 해두지 않아 페이지를 적을 순 없는데, 이 책은 다시 한번 검토해 오타들을 좀 찾아 수정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책의 내용 자체로는 그동안 여성주의 책 같이 읽기 도서 중 가장 좋았다. 가장 후벼팠으며 가장 냉정하고 또 냉철한 책이었다. 완벽한 책이고, 그래서 모두가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책이다. 스티키 북마크를 엄청 붙였고, 무지개 색연필을 들고 줄을 그어가며 읽었다. 책 한 권에 전부 밑줄 긋고 싶었다. 책장을 덮으며 분노와 의욕을 넘어서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몇 번이나 거듭 다짐하게 되었다.


상상하자.

상상할 수 있어야 행동할 수 있다. 상상할 수 있어야 그곳에 닿을 수 있다.










모든 여자에게는 공동체의 지원이 필요하다. 모든 여자가 단체에 가입해 본인이 겪는 문제를 토로하다가, 그게 본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여자라면 누구나 겪는 문제라는 걸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그걸 깨닫고 나면 왜 모든 여자가 같은 특정 문제를 겪는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고, 우리 문제의 근원인 사회의 여남 구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할 것이다. 여자들끼리의 대화는 이런 식으로 우리를 정치화하며, 우리가 여자의 시각을 개발해 이념적 고립에서 탈피하도록 해준다. 여기서 여자의 시각이란 여자의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여자가 처한 상황의 분석에서 가지를 뻗는 시각이다. 그리고 이 시각이 우리가 ‘페미니즘‘이라고 부르는 이념의 재료다. - P204

여자가 본인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이론이자 사회적 운동인 페미니즘을 모른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의 고립을 증명한다. 우리는 우리를 인질로 삼은 남자들의 시각만 접하도록 구조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여자가 페미니스트라는 꼬리표를 두려워한다는 건 우리의 인권 투쟁을 남자들이 성공적으로 막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여자로서 우리의 권리를 찾기 위해 싸우지 않는다면, 남성 지배에서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P204

여자라는 집단이 처한 상황은 머리에 총구를 겨눈 인질범에게 "도망치려고 하면 죽여버리겠다"는 위협을 받는 인질과 유사하다. 인질에게 어떤 힘이 있다면 그 힘은 인질범을 통해 얻은 힘이다. 대리로 경험하는 힘이자, 인질범이 인질에게 나눠주기로 결정한 힘이다. ("잘만 하면 죽이지는 않겠어." "말을 잘 들으면 오늘 밤엔 의자에 앉아서 자는 대신 바닥에 누워서 자게 해주지.") 이런 상황에서, 여자(인질)가 할 수 있는 제일 나은 선택은 단기적으로 볼 때 남자(인질범)편에 서는 것이다. 그러면 남자(인질범)가 여자(인질)에게 폭력을 가할 가능성이 줄어들 수 있고, 남자(인질범)가 보기에 ‘착한 행동‘을 하면 상을 받기도 한다. - P206

심리 치료사인 캐럴린 코워치Carolyn Kowatch에 따르면 남편이 크로스 드레서나 트랜스섹슈얼인 여자들이 와서 남편은 겁이 없어서 밤에 여자 옷을 입고 나갈 때도 전혀 조심하지 않는다고 호소할 때가 많다고 한다. 즉 남자는 남자로 자라왔기 때문에 여자로 사는 삶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모른다. 그래서 이들은 여자처럼 차려입더라도 겁을 내지도 않고, 밤에 혼자 길거리를 걷지 않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행동을 하지도 않는 것이다. - P223

피해자와 가해자 간의 유대감은 결코 건강한 사랑일 수 없다. 유대감을 조장하는 환경이 건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자가 공포 상황에 부닥쳐 자기 감각을 마비시키려는 환경에서 유대감이 생기는 만큼, 유대감은 중독적인 성격을 띤다. 여자가 절박하게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려고 한다는 말이다. (이 주제는 5장에서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건강한 사랑은 이렇게 절박한 성격을 띠지 않는다. - P239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다‘ 나 ‘사랑 앞에 장사 없다‘ 같이 흔히 쓰이는 말에서는 여자가 무력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통제력을 발휘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엿보인다. 이런 문구를 논리적으로 따져보자. 정말 여자가 사랑과 영향력을 발휘해 남자를 길들일 수 있다면, 어떤 폭력적인 관계라 할지라도 관계에 생기는 모든 문제는 여자의 잘못이 된다. 다 야만적인 파트너를 길들이는 기술이 부족했던 여자의 탓이다. 파트너에게 지속해서 맞고 살아온 여자들의 수기를 볼 때 실제로 많은 사람이 그런 결론에 도달한다. - P241

여자는 화를 내면 개인 간 관계가 망가지거나 파탄날 수 있다고 여기고, 그런 대가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 P255

여자는 절박하다. 남자의 친절을 붙들어 매야만 한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의 ‘머릿속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어떨 때 남자가 행복한지, 슬픈지, 화를 내는지, 우울한지, 만족스러워하는지 알아내고자 한다. 남자의 언어적 ·비언어적 행태에 깃든 뉘앙스 하나하나를 해독하려고 노력한다. 예를 들자면 여자는 남자보다 대화 상대를 바라보는 경향이 강하다. 루빈의 논문은 여자는 상대를 쳐다보면서 "우리가 적절하게 행동하고 있는지 남성 파트너에게서 신호를 감지한다"고 추측한다. 모든 나이대에서 여자가 남자보다 타인의 비언어적 신호를 해독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은 여러 실험 연구를 통해 반복적으로 확인된 바 있다. 여자는 다른 여자의 감정과 생각보다 남장의 감정과 생각에 특히 예민하다. - P263

우리는 남자의 마음을 사기 위해 성격을 바꿀 뿐 아니라 우리의 신체도 바꾼다. 여자가 그나마 인지하고 있는 것도 성격적 변화보다는 신체적 변화일 것이다. 여자가 남자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신체를 얻기 위해 얼마나 수많은 노력을 하는지 한 번 떠올려보라. 우리는 식이를 조절하고, 운동하며, 변비약을 먹어 장을 비운다. 피부를 보기 좋게 태우기 위해 일광욕을 하거나 태닝 부스에 눕고, (항상 성적 흥분 상태인 것처럼 보이도록)화장을 하고, 눈썹을 뽑으며, 머리에 헤어롤을 만 채 잠자리에 든다. 코 수술을 받고, 가슴 확대 기구를 쓰고, 가슴 축소/확대 수술을 하거나 왁싱을 하거나 영구 제모 시술을 받고, 매직이나 파마를 하고, 머리를 고데기로 만다. 향수를 뿌리고, ‘여성청결제‘를 사용한다. 손톱을 칠하고, 젤로 연장하고, 인조손톱을 붙인다. 귀를 뚫고 코에 피어싱을 하며, 안경을 쓰지 않고 렌즈를 낀다. - P264

얼굴에 팩하고, 인조 속눈썹을 붙인다. 보정 속옷과 브래지어를 입고, 장신구를 걸치며, 하이힐을 신고, 갑갑한 옷을 입는다.
남자가 위의 행위를 하는 여자에게 끌리는 이유는, 남자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 우리 몸을 바꾸는 것도 불사하겠다는 여자의 의지를 전달하기 때문이 아닐까? - P264

남자에게 매력적인 여자가 되기 위해 신체 변형까지 감수하는 현상은 네가지 사실을 반영한다. ⑴ 여자는 남자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⑵ 여자는 남자들과의 연결고리를 갖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⑶ 여자는 남자들의 애정과 승인이 꼭 필요하다고 느낀다. ⑷ 여자는 ‘있는 그대로‘로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은 채로는)남자들의 애정과 승인을 받을 수 없다고 느낀다. - P265

여자는 남자보다 능력이 뛰어날 때조차 본인을 낮추고, 남자를 띄워주고, 본인의 성취를 입도 뻥긋하지 않으면서 남자의 기를 세워준다. 위기를 느끼는 남자야말로 여자에겐 위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 P266

여자는 우리와 비슷한 수준으로 성공한 남자보다 우리 자신을 낮게 평가한다. 우리의 성공을 실력이 아닌 운 때문으로 돌리는 경향도 남자보다 강하다. 남자는 좀만 하면 성공하겠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미치도록 노력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P276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여자가 일을 더 잘했는데도, 놀랍게도 본인의 업무 수행에 매긴 점수는 여자나 남자나 비슷했다. 여자의 노동이 남자의 노동보다 가치가 떨어진다는 남성 문화적 시각을 여자가 체화했다고밖에 해석할 수 없는 결과다. 여자의 자존감이 하락한 상태일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 P277

롤런드의 책에 따르면 페미니스트 여자는 페미니즘을 거부하는 여자와는 달리 개인으로서의 삶과 평등이 보장되지 않으면 남자와 관계 맺는 걸 꺼렸다고 한다. 그럼에도 여자는 대부분 남성 파트너가 없는 시기를 지날 때 공허한 감정이 든다고 토로한다. 이 공허함의 깊이가 바로 여자가 자아감을 잃어버린 정도라고도 할 수 있다. - P278

현재 시점에서 심리학이라는 학문은 여남이 평등한 관계를 맺고 여자가 안전한 상황에서의 여성 심리는 전혀 알지 못한다. - P295

남자는 여자와 ‘떡 치는‘ 행위를 여자를 본래 자리로 돌려놓는 행위, 즉 (남자가 생각하는) 여자의 본래 목적에 맞게 여자를 사용하는 행위로 여긴다. ‘떡 쳐진‘ 여자는 ‘값싼‘ 여자가 되어 가치가 떨어지는 반면 남자는 더 마초 같고 강력해진다. 이성애 성관계가 남자를 남자로, 여자를 여자로 만든다고 여겨지는 것도 우연이 아닌 셈이다. 다시 말해 성관계를 정의할 권력도, 실행할 권력도 남자에게 있으며, 그 결과 성관계는 남성 지배와 여성 종속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정의되고 실시된다. 가해자에게 유대감이 샘솟을 가능성이 가장 큰 순간은 여성 종속과 남성 지배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본질적인 순간, 즉 이성애 행위를 할 때라는 것이 공저자로서 우리의 주장이다. - P333

가부장제는 여자가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없도록 남성 폭력이나 경제적 제약 등 장애물을 세워 여자가 의존적이라는 환상을 유지한다. 여자가 원래 의존적으로 태어났다면 우리가 남자에게서 떠나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는 온갖 장애물은 불필요했을 것이다.
여자가 남자를 믿어서는 안 되는 부분은 또 있다. 우리는 남자가 선의를 발휘해 ‘우리에게 권리를 부여해줄‘ 거라는 기대를 버려야 한다. 여자가 자랑스럽게 내 남편은 이런 일(예를 들어 직장 출근)도 하게 해준다고 말하는 건 남편이 본인을 통제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거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남편이 언제든 직장 출근을 그만두게 할 수도 있는 일이다. - P355

피해자가 된 건 우리의 책임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피해자라는 사실을 깨달은 다음, 우리의 억압 상태에 대해 어떤 선택을 내리고 어떤 행동을 할지는 우리의 책임이다. - P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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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05-20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 님 좋은 친구들 두셨네요. ㅎㅎ
이 포스팅 읽으면서 갑자기 이 책이 제시한 책 결말에 저도 ‘응?‘ 스러웠지만 곧 이해가 되는군요. 아, 그럴 수도 있겠다 싶군요.

다락방 2019-05-20 17:58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깜짝 놀라고 당황했었어요. 책의 내용이 어마어마한데 고작 소설읽기다 답이란 말이야? 라고 말이지요.물론 소설읽기만 답으로 내놓은건 아닙니다만. 그러나 읽으면 읽을수록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어요. 갇혀있고 닫혀있어서 상상이 불가하면 한걸음 내딛기도 힘든 게 사실이니까요. 상상할 수 없는 곳에 어떻게 닿을 시도를 하겠습니까. 불끈, 하고 뭔가 의욕이 생기더라고요. 책 더 많이 읽어야겠어요!

단발머리 2019-05-20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저자의 ‘페미니즘 SF 소설 읽기‘라는 해결책 또는 대안에 처음에는 그런가? 했지만,
점점 그 방법, ‘읽기‘라는 혁명적 방법이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82년생 김지영>라는 밋밋한 소설이 우리의 현실과 현재를 강타했던 경험도 생각났구요.
페미니즘 소설 모음집 <혁명하는 여자들>의 ‘늑대여자‘도 새록새록 떠올랐어요.

저도 다락방님책과 비슷한 모습의 책인증샷 얼른 올리고 싶네요.... ㅠㅠ

다락방 2019-05-20 17:59   좋아요 0 | URL
저는 그간 SF 소설을 거의 안읽었거든요. 그점에 있어서 참 부끄러워지더라고요.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책도 sns 를 통해 많이 추천 받았는데 한 권 사두고 안읽었고요. 이 책에서 언급됐던 단편들이 체체파리.. 그 책에 있다니까 그 책도 사서 얼른 읽어야겠다 싶었어요. 너무 멋진거에요. 연구하고 생각하고 논문을 쓰면서 결론으로 책을 읽어라, 여자들아, 하는거요. 그것도 소설! 그런데 그게 생각과 달리 생뚱맞지 않은 합리적 결론이라는 게 너무 좋아요!!

단발머리 님의 책 인증샷 기다리고 있을게요! 울지마세요 ㅠㅠ

블랙겟타 2019-08-07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어쩐지-
여기에 이번에 읽을 책들이 나오더라구요.
저도 앞으로 SF소설을 찾아 읽어보려구요.
아! 일단 시녀이야기 부터 (๑◔‿◔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