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 비룡소의 그림동화 34
마이클 베다드 글, 바바라 쿠니 그림, 김명수 옮김 / 비룡소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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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뭐예요?"
내가 물었습니다.
아빠는 시든 이파리를 손바닥 위에 놓았습니다.
"엄마가 연주하는 걸 들어 보렴. 엄마는 한 작품을 연습하고 또 연습하는데, 가끔은 요술 같은 일이 일어나서 음악이 살아 숨쉬는 것처럼 느껴진단다. 그게 네 몸을 오싹하게 만들지. 그걸 설명할 수는 없어. 그건 정말, 신비로운 일이거든. 말이 그런 일을 할 때, 그걸 시라고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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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읽었습니다. 2016-06-09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노동문제 관련해서 꼭 등장하시는 은수미 전 의원님. 개인적인 은수미씨가 궁금해서 검색하다 이 블로그 글을 보았어요 ㅎㅎ
인터뷰 내용 중 `삭제`라는 표현과 아름다움에 대한 의견이 와닿아서 몰래 혼자 보려고 공유해 갑니다 :)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권수연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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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누군가가 늘 신경을 써주었으므로 내가 여기에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반드시 그래야했던 것도 아니고, 그들이 그랬을 줄도 몰랐지만, 누군가가 나를 내치지 않았던 시간이 존재했으므로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나도 그럴 것이다.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계속해서 너를 지켜보고

당신이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계속해서 한 방향이며 목적지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너는 길을 잃지 않을 거야, 내가 너의 손을 잡고 있을테니.

당신이 길을 잃을 것 같을 때마다 고개를 들면, 내가 항상 손에 잡힐 거에요.





알지도 못하는 남자가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더라면 다라간은 수첩을 잃어버린 사실도 아예 잊었을 터였다. 수첩에 적힌 이름들을 떠올려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지난주, 다라간은 수첩 내용을 복원하고자 백지에 이름들을 내리 적어보았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종이를 찢어버렸다. 그 이름들 가운데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중요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미 속속들이 외우고 있었으므로, 주소며 전화번호를 적어둘 필요가 없었다. (p.12)

그가 [그 여름의 어둠]을 수배 전단을 작성하는 마음으로 썼다는 걸 왜 그녀에게 털어놓지 않는가? 운이 조금 따라준다면 이 책은 그녀의 눈에 띌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그녀에게서 기별이 올 것이다. 이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것 말고는 없었다.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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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퇴장 주커먼 시리즈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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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들릴까 말까 한 소리로 말했어요. `면도하고 이발하고 싶어. 깨끗해지고 싶어.` 그래서 이발사를 불렀어요. 매니가 머리를 가누지 못해서 이발하는 데 한 시간도 넘게 걸렸죠. 이발이 끝난 뒤 나는 이발사를 문간까지 배웅하고 이십 달러를 줬어요. 침대로 돌아와보니 매니는 숨이 멎어 있었어요. 죽었지만 깨끗해졌죠." 이 말을 하고 난 다음 그녀는 아주 잠깐이긴 했지만 갑자기 이야기를 멈췄고, 나도 어쨌든 할 말이 없었다. 나는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이제 어떻게 죽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와 만난 건 그때 한 번뿐이었지만, 그래도 내게는 충격적이었다. "난 그 시간을 지나왔고, 내가 그랬다는 게 기뻐요. 그 사 년의 시간을요." 그녀가 말했다. "매일 그리고 밤낮으로 말이에요. 나는 그의 벗어진 머리가 독서등 아래서 빛나는 걸 보았죠. 매일 저녁식사가 끝나면 거기 앉아 책을 읽으며 신중하게 밑줄을 긋고 잠시 멈춰 생각에 잠기고 스프링 노트에 문장을 적는 그를 보면서 나는 생각하곤 했어요. 저런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거라고요." (p.201-202)

사 년의 시간을 기억하며 오십 년을 산 여자. 그녀의 전 생애가 그 사 년에 의해 규정되어 있었다. (p.202)

우리가 떠난 후 뒤에 남은 이들이 늘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것이 그리 놀랄 일도 아닌데도 우리는 다시 돌아왔을 때 그들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보고 놀라는 동시에 잠시 감동을 느낀다. 또한 늘 변함없는 좁은 장소에서 평생을 보내면서도 떠나고자 하는 욕망을 느기지 않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p.40-41)

"오힙대 후반에 첫 장편을 쓰다니. 백혈병이 그를 죽이지 않았다면 그 소설이 그를 죽였을 거예요."
"왜요?"
"그 주제 때문에요. 프리모 레비가 자살했을 때 사람들은 모두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었던 후유증 때문이라고들 했어요. 난 아우슈비츠에 대해 글을 써서라고, 마지막 저작에 너무 쏟아부어서라고, 공포감을 명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고민해서라고 생각했죠. 그런 책을 쓰기 위해 매일 아침 눈을 떠야 한다면 누구라도 죽고 말았을 거예요."
그녀는 레비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p.198-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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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6-04-20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제일 사랑하는 바로 그 작품...
아, 나도 다시 읽고 싶어요^^

다락방 2016-04-21 08:18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 페이퍼 보고 이 책을 샀고, 그리고 읽은 거에요. 필립 로스는 원래 호감작가이기도 했고요. 사실 저는 일흔 넘은 노인이 사십살 연하인 여자에게 욕망을 느낀다, 사랑을 느낀다, 는 것에 흥미가 일어 보기 시작했는데 정작 책을 읽고나자 마음을 끄는 부분은 따로 있더라고요. 위에 인용한 것처럼, 나이 많은 작가와 자신의 젊은 시절에 4년을 함께 보낸 여자, 그녀가 그 후로 오십년을 거기에 매어 사는 부분이요. 아니, 그 추억을 곱씹으며, 이미 죽은 남자와 늘 대화한다고 하는 것들이 참 인상깊었어요. 요즘엔 이런 이야기들이 참 눈에 들어오네요. 예전부터 있었는데 제가 잘 몰랐던건지 모르겠지만, 얼마전에 읽은 파스칼 키냐르 작품에서도 너무 사랑한 남자를 평생 그리워하며 계속 걷기만 하는 여자가 나왔는데, 이 책 필립 로스의 책에도 사 년을 함께하고 오십년을 추억하는 여자가 나와요. 저는 [유령퇴장]이 딱히 좋진 않았거든요. 책장이 잘 안넘어가더라고요. 그렇지만 사 년의 시간을 기억하며 오십 년을 산 여자가 참 인상깊어요.

웽스북스 2016-04-21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뭔가 압도적인 한문장이네요

다락방 2016-04-21 10:53   좋아요 0 | URL
그렇지요? (끄덕끄덕)
 
그랜드마더스
도리스 레싱 지음, 강수정 옮김 / 예담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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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상을 떠나기 전 병든 몸으로 들것에 실려 교실에 왔던 날, 선택의 그날, 그녀는 얼마나 상심했을까?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떠올렸던 모습과는 달라졌지만, 그녀의 얼굴이 지금도 기억난다. 여태까지는 그녀가 아팠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상심해서 병이 난 것이기도 하다. 그녀는 베개를 받치고 거기에 누워서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해맑게 자신의 멍청이 아들을, 매력적이고 유쾌하지만 멍청한 아들을 선택하는 걸 지켜봤다. 그리고 이제야 딱딱하게 굳은, 늙고 암울한 그녀의 얼굴이 제대로 보인다. 그녀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았다.

그리고 우리 십이인 위원회가 지금까지 어떤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적절한 이름을 붙여 표현하는 걸 끝끝내 싫어했던 이유도 쉽게 알 수 있었다. 데로드에 대해 불평하고, 그를 두려워하고, 이유를 분석하면서도 우리는 한 번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우리십이인 위원회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에 책임이 있어. 왜냐하면 다른 사람을 뽑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그를 선택했으니까." 우리 중에 누구라도 데로드보다는 잘했을 것이다. 천성이 악한 사람은 아무도 없고, 모두 데스트라를 존경했으며, 그녀가 원한다고 판단되는 일들을 했을 것이다. 굼뜨고 결단력이 없는 나조차 그보다는 더 잘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녀에게 낙담을 안겨줬다. 우리 잘못이었다. 우리 책임이다. 도시들을 위해 노력하느라 늘 분주하고 우리가 이룬 것들을 자랑스러워했던, 이름 높은 십이인 위원회. 도시들이 몰락한 원인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에게 있었다. (그것의 이유, p.258-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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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교사 안은영 오늘의 젊은 작가 9
정세랑 지음 / 민음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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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해야 할 말, 하고 싶은 말을 이렇듯 경쾌하고 다정하게 전하는 사람도 있구나. 나는 좀더 무겁게 해주는 걸 선호하지만, 이렇게 가볍게 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해줘야 세상이 균형을 이루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마음속에서 부실한 선반 같은 것들이 내려앉는 소리가 났다. 어두운 곳에서 낡은 나사에 매달려 있던 것들이 결국에는 내려앉는 그런 소리였다. 여기 계속 있을 수 있을까. 아무렇지도 않게 있을 수도 있을 듯한데,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p.247)




경쾌하다고, 다정하다고, 가볍다고 말해놓고서는 인용문은 이런 것만 가져왔네 ㅠㅠ




조금만 더 있어, 말하고 싶었지만 은영은 칙칙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은영은 웃는 얼굴을 유지하려 애썼는데 잘되지 않았다.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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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07 23: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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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08 08: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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