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하는 여자 - 과학이 외면했던 섹스의 진실
대니얼 버그너 지음, 김학영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13년 12월
장바구니담기


일부일처제는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규범이자 또 가장 확고하게 자리 잡은 이상적인 문화로 간주된다. 과연 일부일처제가 표준인 걸까, 혹시 잘못 판단한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하면서 규범을 고수하지 않으려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전히 대다수의 사람들은 일부일처제를 그저 옳다고 여기며 그것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일부일처제는 우리가 사랑의 목표로 삼아야 할 대상을 지정해줄 뿐만 아니라 이뤄야 할 가족의 형태, 적어도 꿈이라도 꿔야 할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도 정해준다. 좋은 부모란 어떠해야 한다는 우리의 신념도 일부일처제가 만들어준 것이다. 일부일처제는 우리 사회의 이음매가 터지지 않도록 단단히 결속시키는 또는 결속시켜준다고 믿는 매우 촘촘한 바늘땀이다.
흔히 여자는 선천적으로 일부일처제라는 규범에 더 협조적인 지지자이며 생물학적으로도 이 충실함에 더 적합한 성적 자아를 가졌다고 여겨 왔다. 우리는 이 동화 같은 이야기를 여전히 굳게 믿는다.-19쪽

맥클린톡은 수컷을 요리조리 피할 수 있을 만큼 우리가 넓을 경우, 암컷들은 수컷이 삽입한 뒤 펌핑을 하는 중간에도 밀착되었던 몸을 빈번하게 뺀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교미가 너무 빨리 끝나지 않도록 조정한다는 의미였다. 원숭이나 쥐를 비롯한 동물들은 어떤 상황에서든 수컷이 사정할 때까지 밀착과 교미 그리고 분리와 재밀착을 여러 번 반복한다. 따라서 실험이 보여준 것처럼, 교미 과정을 길게 연장하고 싶은 암컷은 다른 방법으로는 수컷의 교미 시간을 늘릴 수 없기 때문에 교미를 중단하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 모든 행동들, 수컷을 유인하고 교미 시간을 연장하기 위한 행동들은 다음의 두 가지를 의미한다. 바로 암컷의 의지와 성욕이다. -83쪽

하지만 한 개체로서의 동물에게 임신은 교미의 동기가 아니다. 이는 맥클린톡과 파우스뿐만 아니라 붉은털원숭이를 관찰한 월렌도 분명히 확인했다.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실이다. 각각의 동물 종들은 자신의 종을 영속하기 위해 번식하도록 진화를 거듭했지만, 개체로서의 동물은 그런 번식의 압박을 받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쥐가 "새끼를 낳고 싶다"는 생각을 할 리가 만무하다는 뜻이다. 그런 계획은 암컷 쥐의 소관이 아니다. 암컷을 움직이는 충동은 즉각적인 보상, 즉 만족감이다. 게다가 이 만족감은 경쟁자나 포식자로부터 위해를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과 만족감을 얻기까지 소모되는 에너지를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아야 한다. 또한 교미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를 덮을 만큼 큰 만족감이어야 한다. 쉽게 말해 섹스의 만족감이 극도로 높아야 한다는 의미이다.-83-84쪽

미나는 무대에서 또 다른 불균형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시버스가 피험자들에게 발기하지 않은 나체의 미소년이 해변에서 돌을 던지는 장면을 보여준 뒤, 혈류측정기를 통해 발견한 것과 일치하는 점을 명료하게 짚어냈다. "여성의 몸은 흥분했을 때나 아닐 때나 똑같이 보이죠. 반면에 발기되지 않은 남근은 곧 성욕이 일지 않았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여성의 몸은 언제나 가능성, 즉 섹스에 대한 의사를 품고 있어요." 그리고 여성이 품고 있는 그 의사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신호를 보낸다는 것이다.-108쪽

미나가 쓰는 기법에도 역시 '분리'의 요령이 들어 있다. 외식을 하기로 했다면 함께 나가는 것이 아니라 약속한 레스토랑에서 만나야 한다. 밤의 데이트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바로 데이트의 의미이기도 하다. 배우자 혹은 파트너를 떨어져서 볼 기회를 반드시 만들어야 한다. "전 커플들에게 할 수만 있다면 서로의 파트너가 자기와 상관 없는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모습을 관찰하라고 말해요. 저도 남편이 문학 강연을 할 때면 강의실 뒤에서 지켜보곤 합니다. 얼마나 매력적인지 몰라요. 강단 위에 서 있는 남편은 저와는 전혀 무관해 보이죠. 남편을 바라보는 제 시선도 낯선 이의 시선이 됩니다."-195-196쪽

1970년에 이르면서 페미니스트 작가인 수전 라이든Susan Lydon이 클리토리스 선언문을 발표했다. 라이든은 "남성은 언제나 여성의 성취향을 가능한 한 남성 편의적으로 정의한다. 여성의 쾌락이 질을 통해 획득된다면, 여성들은 전적으로 발기한 남성의 페니스에만 의존한다는 의미이고‥‥‥, 남성의 쾌락 추구에 동참해야만 여성도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질로 성욕의 표준을 삼는 정의는 달리 말하면 성적,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으로 여성을 종속시키려는 것과 같다." 라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클리토리스에 대한 타당한 극찬과 더불어 "여성은 머지않아 자신의 해방을 위한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 것이고 자신만의 성취향을 뚜렷이 밝히고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210쪽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14-02-04 0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부일처제가 모든 면에서 가장 바람직하다고 확신할 순 없지만 자식을 위해선 가장 좋은 것 같아요.
결혼이란 게 두 사람의 관계만을 위해서가 아닌, 한 가정을 만들어가기 위한 것이라면
일부일처체가 가장 좋지 않을까 생각해요.
일부일처제가 아니라 다른 제도가 생긴다고 해도 그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일이 많이 일어날 듯합니다.

명절 잘 보내셨나요? ^^

다락방 2014-02-04 08:38   좋아요 0 | URL
음, 자식을 위해서도 일부일처제가 가장 좋은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렇다는 확신이 들진 않아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자식이 부모에게 지나치게 절대적인 존재가 된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크거든요. 일부일처제는 남자와 여자를 부부로 묶어놓는 큰 제약이지만 부모와 자식을 묶어놓는 큰 제약이기도 한 것 같아요. 남편만 혹은 아내만 보다가 자식이 태어나면 자식만 바라보고 자식 때문에 살게 되고, 자식은 때로는 지나친 사랑과 기대를 오롯이 받아내야 하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자식은 부모로부터 자유롭기 힘들고요. 결국 일부일처제가 가족이란 끈을 너무 단단하게 묵었놓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단단하게 묶어놓은 끈 때문에 우린 때때로 숨이 막히고요. 남자와 여자 그들이 부부의 관계를 지키는 데에서도, 또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그리고 자식을 위해서도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저는 생각되어지질 않아요. 다른 제도가 생겨도 당연히 완전하지도 완벽하지도 않겠죠. 그것이 이미 '제도'인 이상 말입니다.

어휴, 어제는 연휴 끝나고 출근했더니 하루종일 피곤했어요. 집에 가서도 잠이 안와 계속 뒤척였답니다. 정말로 나 갱년기인건 아닐까, 이런 생각도 했어요. 하아-

페크pek0501 2014-02-04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갱년기는 아닙니다. 제가 보장할 게요. ㅋ
원래 누구나 월요병이 있는 거잖아요. 게다가 명절 후유증이 있기도 하고요.

일부일처제에 대한 님의 생각을 읽으니 저와 반대 의견인데도 긍정의 뜻으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일리 있는 말씀이에요.

아마 저는 우리 딸들에게 절대적인 존재가 되려고 하지도 않고(남에 비해서)
자식을 절대적인 존재로 생각하지도 않고
비교적 자유롭게 키우는 편이라(착각일지 모르겠으나...) 그런가 봐요.
그 제도가 깨져서 만약 여러 부모를 두게 된다면 저는 스트레스를 받게 될 것 같아요.
어떤 엄마가 가장 좋은가, 가장 인기가 있는가, 에서 제가 밀려날 것 같고...
또 (아내가 여럿이라면) 어떤 아내가 가장 좋은가, 에서 밀려날 것 같고... 그래서 생기는 스트레스요.

그래도 일부일처제에선 아이들이 엄마를 최고로 알아 주고, 남편도 (착각일지 모르나) 최고로 알아 주는 게
있잖아요. 가족 내에서도 경쟁을 해야 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
가족 내에선 경쟁하지 않고도 최고로 알아 주는 게 어떤 안정감을 주거든요.
(아무리 못난 엄마라도 아이들은 엄마를 최고로 치면서 크잖아요. 엄마와 떨어지면 울고요.)

어쨌든 다락방 님 덕분에 좋은 의견을 읽고 갑니다.
오늘 하루 즐거운 하루 되세염. ^^


다락방 2014-02-04 10:11   좋아요 0 | URL
일부일처제가 처음 만들어진 의도 자체가 사람에겐 누구나 '첫번째가 되고 싶은 욕망' 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엄마가 많다면, 아내가 많다면 경쟁체제에 들어갈 수도 있겠죠. '내가 일등'이 되고 싶어서 말예요. 그리고 분명 그들중 누군가는 인기가 제일 많을 것이고 누군가는 인기가 없을 것이고..그런 분위기가 형성 될 수도 있을 거고요. 그걸 방지하기 위해 일부일처제라는 제도가 만들어진 게 아닐까 생각해요. 자, 네 아내고 네 남편이고 네 자식이다, 그러니 경쟁하지 말고 이들을 최고로 알아라, 라고 말이지요. 보호의 명목이고 그래서 대체적으로 그것은 그런대로 잘 지켜져오고 있지만, 그 경계선이 사람을 누르는 부분이 분명히 있고요. 저는 경쟁의 스트레스 말고 다른 부분들도 짐작되어 지거든요. 다양한 어른들과 다양한 아이들이 함께 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다양한 의견과 자유스러울 수 있는 면 같은거요. 가족 이라는 단단한 경계선이 그냥 툭- 끊어져 버린다면, 오히려 더 안달하는 마음이 사라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말이지요. 지금은 '내가족' 이란 경계 때문에 오히려 경쟁이 더 심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이 경계가 사라진다면 경쟁 자체도 큰 의미가 없을 것 같은데, 이런 생각 자체는 아직 제가 비혼이기 때문에 드는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들어요.


정말..갱년기가 아닐까요? 저 막 온몸이 뜨거워졌는데요? 전 전기요 깔고 자는것도 아닌데 이불도 막 차버렸다가 옷도 벗어봤다가 한참을 뒤척였어요. 너무 뜨거워서 못자겠는거에요. 갱년기가 되면 몸이 막 뜨거워진다는데, 그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렇지만...정말 갱년기라면...너무 빨리 찾아온....거니까........아니겠죠? 그저 그날 하루의 불면인거겠죠? ㅠㅠ
 
그 여름의 거짓말
주디 블런델 지음, 김안나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절판


"이번 춤은 저와 추시겠습니까?"
"여기에서요?"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 기다려." 그가 다시 앉자 실망감에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이 남자와 함께 춤을 출 생각도 없었으면서. 춤을 춘다면 미친 짓이겠지. 이름도 모르는데. 그는 허리를 숙였고, 나는 그가 구두끈을 끄르는 것을 보았다. 구두를 벗고 나서는 양말도 벗었다. 그의 발이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그 발을 쳐다보는 것은 너무 뻔뻔한 짓 같아서 나는 시선을 돌렸다.
"네 발가락을 부러뜨리고 싶지 않아서 그래." 그가 말했다. "내가 춤을 아주 잘 추지는 못하거든."
-65-6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3년 6월
장바구니담기


구입한 책은 서대문 국제우체국에서 찾아와야 한다. 국제우체국은 책을 전달하는 일 외에 통관 업무를 담당했는데, 이 업무의 마지막 부분이 바로 '미스 아무개'의 소관이었다. 우체국에서 보낸 통지서와 주민등록증을 가로지를 시멘트 대 위에 내밀면, 그녀는 한번 힐끗 얼굴을 들어 거들떠보고는, 마지못한 듯 입을 연다. "이거 서적이지요? 다음 주일에 한번 더 와보세요." 다음 주일이라고 책을 내준다는 확답이 없으니 발길이 더욱 처참하다.
어느 날 나는 그렇게도 읽고 싶은 책을 눈앞에 두고도 읽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조심스럽게 말했더니, 도리어 그쪽에서, 서적 통관이 쉬운지 아느냐, 사회주의를 찬양하는 책이라도 있으면 어쩔거냐고 공격한다. 이 책들은 그런 책하고는 거리가 멀며, 문학에 관한 이론서일 뿐이라는 내 설명을 무지르고 다시 돌아오는 대답이 이렇다. "책 내용을 그렇게 잘 알면서 왜 책은 사세요?" 나는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도 없이 창구의 가로대를 뛰어넘었다. 다행히 그녀의 뒷자리에서 나이든 직원이 달려나와 내 팔을 붙들고는 책 꾸러미를 손에 쥐여주었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면서 밖으로 나왔다. -11쪽

전쟁은 바보짓이다. 분쟁의 해결책 가운데 전쟁보다 더 많은 비용을 치르게 하는 것은 없다. 전쟁은 우리의 삶을 파괴하고 인간을 인간 아닌 것으로 만든다. 어떤 명분도 이 비극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핍박받는 미족의 독립전쟁 같은 것을 거론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핍박하는 일도 실은 전쟁으로부터 시작한다. 전쟁은 단순한 추상명사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포탄이며, 구덩이에 파묻히는 시체 더미이며, 파괴되는 보금자리이며, 생사를 모른 채 흩어지는 가족이다. 이 5월에 강변에서 자전거를 타는 소년들은 어느 골목을 헤맬까. 지금 축제를 벌이는 젊은이들의 소식을 어느 골짜기에서 듣게 될까. 공부하고 일하고 춤추는 아이들은 어디로 갈까. 그들이 훈장을 뽐내며 돌아온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젊은 날의 꿈이 사라진 자리에는 마음의 상처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자신에게서 다른 사람을 볼 것이다. 우리에게 그것은 민족의 절망일 뿐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 능력을 스스로 멸시하고, 우리가 이 민족이었던 것을 저주할 것이다.-48쪽

제값을 받을 수 있을 때까지 나무와 풀과 돌을 그 자리에 놔두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들은 언제나 제값을 한다. 그것들이 없으면 이 나라 땅이 없고, 이 나라 땅이 없으면 이 나라의 삶이 없다. 이런 비유가 어떨지 모르겠으나, 그것들은 황금 알을 낳는 닭과 같다. 황금은 한때의 황금이고 자연은 수수만년 세월의 황금이다.
그래서 나는 구럼비 바위를 폭파하려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그 바위를 깨뜨리지 말라. 내 고향의 순박한 농부와 어부들이 내내 후회하고 있는 일을 지금 당신들은 어마어마한 명분을 내걸고 저지르려 하고 있다. 쳔년 세월을 팔아 한 시절을 살려 하고 있다. 다시 한번 생각하라. 생각하는 척이라도 하라. 나라를 사막으로 만들고 무엇을 지키려는가.-121쪽

사람의 마음속에 세상과 교섭해온 흔적이 남지 않고, 삶이 진정한 기억으로 그 일관성을 얻지 못하면, 이 삶을 왜 사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된다. 삶이 그 내부에서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밖에서 생산된 기호로 그것을 대신할 수밖에 없다. 가지가지 유행이 밖에서 생산된 바로 그 기호다. 밖에서 기호를 구해 의미의 자리를 메울 때 우리느느 항상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아야 한다. 밖의 기호 속에는 스스로 확신할 수 있는 진정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행의 문화는 열등감의 문화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놓인다.-191-192쪽

지금 나이가 마흔이 넘은 사람들은 저 불행한 유신시대에 아침 6시면 확성기를 타고 울리던 새마을 노래를 기억할 것이다. 어느 외진 곳의 수두원에 은둔해 있는 처지가 아니라면 누구도 그 요란한 노래를 피할 길이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침형 인간은 말할 것도 없고 저녁형 인간도 못 되어 심야형 인간으로 살아가는 나 같은 사람이 그 시간을 견디어내야 했던 고통은 형언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하던 일을 접어두고 새벽 잠자리에 기어들어가 설핏 잠이 들만하면 그 '합법적인' 고성방가가 베갯맡을 뒤흔들어놓곤 했다. 나야 생활 습관이 야릇해서 그렇다 치더라도, 교대근무를 마치고 새벽잠을 자야 하는 노동자들이나, 밤새 병마와 싸우다 어렵사리 잠이 든 환자들은 또 어떠했을까. 모든 사람이 한 믿음을 가지고 한가지 형태로 살아야 한다고 믿는 전제주의가 이런 사소한 일에 신경을 써야 할 이유는 없다. 폭력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폭력이 폭력인 줄을 알지 못한다.-231쪽

("바르게 살면 미래가 보인다"는 문장이 새겨진 돌덩이를 보고)설령 그 문장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말이라고 하더라도, 어느 누구에게도 그것을 돌에 새겨 공공장소에 세워둘 권리는 없다. 그 돌이 특정한 장소에 세워져 그 관계자들의 윤리적 실천의지를 다지는 정도에서 이용된다면 결코 시빗거리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같은 설치물이라도 거리 한복판에 군림할 때는 그 앞을 지나가는 모든 사람의 정신을 무차별하게 위압할 수밖에 없기에 문제가 심각하다. 한 단체가 공공장소를 점유하여 자신들의 도덕률을 온 천하에 호령할 수는 없다. 게다가 같은 호령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한 장의 플래카드로 걸려 있을 때와 돌에 새겨져 있을 대는 그 의미의 무게가 다르다. 돌에 새긴 글은 특정한 시기의 특정한 사안을 넘어서서 모든 시대에, 다시 말해서 영원히, 그 진리성을 과시한다. 한 시대에 어떤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덕성과 학식으로 어떤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자기 의견을 공공장소에 영원히, 그것도 토론이 가능하지 않은 형식으로, 내세울 권리는 없다. 겸손하지 않은 도덕은 그 자체가 폭력이다.-232-233쪽

나는 누구나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난 시간을, 다시 말해서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남이 모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식구들에게도 그런 시간을 가지라고 권한다. 애들은 그 시간에 학교 성적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소설이나 만화를 보기도 할 것이며, 내가 알고는 제지하지 않을 수 없는 난잡한 비디오에 빠져 있기도 할 것이다. 어차피 보게 될 것이라면 마음 편하게 보는 편이 낫다고 본다. 아내는 그런 시간에 노래방에 갈 수도 있고, 옛날 남자친구를 만나 낸 흉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늘 되풀이되는 생활에 활력을 얻을 수 있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다. 여름날 왕성한 힘을 자랑하는 호박순도 계속 지켜만 보고 있으면 어느 틈에 자랄 것이며, 폭죽처럼 타오르는 꽃이라 한들 감시하는 시선 앞에서 무슨 흥이 나겠는가. 모든 것이 은밀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281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다 2014-01-29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참 글 잘 쓴다 싶은데, 정이 안가는 느낌적 느낌 ! 다시 손이 안갈 것 같은...ㅎㅎ

다락방 2014-01-29 14:29   좋아요 0 | URL
왜그런지 모르겠어요. 아름다운 문장이고 메세지도 있는데 왜 마음에 쏙 들진 않을까요? 흐음.
 
아름다운 아이 독깨비 (책콩 어린이) 22
R. J. 팔라시오 지음, 천미나 옮김 / 책과콩나무 / 2012년 10월
구판절판


이 우주는 오기 풀먼에게 결코 녹녹치 않다. 그런 형벌을 받아도 좋을 만큼 그 어린아이가 얼마나 대단한 짓을 저지르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 부모가? 아니면 올리비아가? 오기가 지닌 증후군들이 일제히 발생해서 다른 사람에게 오기와 똑같은 얼굴이 나올 확률은 4백만 분의 1이라나. 어떤 의사가 올리비아의 부모님에게 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우주는 거대한 복권 뽑기 기계에 불과하다는 얘기가 아닌가? 우리는 태어날 때 표를 구입한다. 좋은 표를 살지, 나쁜 표를 살지는 모두 무작위로 지정된다. 운에 맡길 뿐이다.
이런 생각에 머리가 빙글빙글 돈다. 그때 문득 기분 좋은 생각이 떠올라 마음을 위로해 준다. 아니야, 아니야, 완전히 무작위는 아니야. 진정 완전히 무작위라면 우주가 우리를 완전히 버리는 셈이지만, 그건 아니다. 우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방법으로 우주의 가장 연약한 창조물들을 보살펴 준다. 맹목적으로 크나큰 사랑을 베푸는 너의 부모님, 평범한 사람이 된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누나. 너의 일로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당하는 걸걸한 목소리의 그 녀석. 그리고 심지어 네 사진을 지갑 속에 지니고 다니는 그 분홍 머리 여자애까지.-312-313쪽

설령 복권 뽑는 기계일지라도 우주는 결국 모든 것을 공평하게 만들어 준다. 우주는 자신의 모든 새를 저버리지 않는다.-313쪽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4-01-22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 2014-01-22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후반에 오거스트와 아빠가 드라이브하며 부르는 노래.

"난 이스트사이드에서 제일 못생긴 남자지만, 나는 차가 있고 너는 드라이브를 하고 싶어 하지. 그럼, 지금 드라이브 나갈까. 그럼 지금 드라이브 나갈까아아아아아아아아." (p.446)

2014-01-22 1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22 1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23 18: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24 08: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4-01-24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바뀐 사진 예뻐요.
뒤에 파란 배경은 웬지 사진관 분위기네요.

사진관에 온 졸리.... ㅋㅎㅎㅎㅎㅎ

다락방 2014-01-24 09:02   좋아요 0 | URL
예쁘죠? 완전 마음에 쏙 들어요. 아우 멋져. 입고 있는 옷도 스타일도 근사해요! ㅋㅋㅋㅋㅋ

나비종 2014-01-25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번트 신드롬을 보면 공평한 것 같기도 하고, 도민준이나 김탄, 아님 정반대로 돈도 없는데 가방도 없는 사람들을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
'새'만 저버리지 않는 걸까요? 나비나 벌은. . ^^;ㅎㅎ

다락방 2014-01-27 10:30   좋아요 0 | URL
사실 대부분의 시간에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죠. 정말 모든 새를 저버리지 않았을까? 대체적으로 저버린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요. '우주는 자신의 모든 새를 저버리지 않는다'는걸 깨우치려면 가만히 앉아서 조용히 생각이란 걸 해봐야 하는것 같아요. 그냥 살아가면서 깨닫기는 힘들죠. 기어코 만들어내야만 되는 걸수도 있단 생각도 들고요. 그러니까 뭐랄까, 살아가기 위해 저버리지 않는다는 확신을 억지로 가져야 하는, 뭐 그런 상황이랄까요.
 
궁극의 아이
장용민 지음 / 엘릭시르 / 2013년 3월
장바구니담기


엘리스, 이제부터 우리는 힘든 길을 걷게 될 거예요. 나는 상관없지만 당신이 겪게 될 힘든 날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져요.-462쪽

운명은 바꿀 수 있어요. 벨몽이 이런 말을 했을 거예요. 운명이란 뽑을 수 없을 만큼 깊숙이 박힌 거대한 뿌리라고. 그 뿌리가 바로 당신이에요. 당신이 바뀌면 뿌리가 바뀌는 거예요. 운명을 바꾸고 싶으면 당신이 바뀌면 돼요.-541-54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