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와인을 좋아한다. 와인의 맛을 알지 못하고 마시기 시작한지 오래되지도 않아, 한 입 입에 물고 호로록 굴리면서, 으음, 뜨거운 태양의 냄새와 껍질의 맛..음, 바닐라가 섞여있고 코르크 향이 나는군...같은 건 할 수도 없을 뿐더러 맛을 구별하지도 못하지만, 그간 마신 경험만으로 '까베르네쇼비뇽'과 '말벡'이 내 입맛에 좋다, 정도까지의 취향이 생겼다. 이렇게 뭐 자세히 맛을 구별하지도 못하고 그저 와인을 마시면서 온 몸에 도는 열기와 취기를 좋아하는터라, 굳이 비싼 와인을 마실 필요는 없다. 사실 비싼 와인 마실 돈도 없고. 와인은 가뜩이나 소주나 맥주보다 비싼데, 어떻게 비싼 걸 마셔... 여튼 그래서 내가 애용하는 와인은 마트에 갔을 때 '이만원에 세 병'하는 와인이다. 이만원에 세 병하는 와인을 사서 마시고 가끔 만원 안팎의 와인을 사마시기도 하는데, 사치한답시고 월급날 2만원이나 3만원짜리 와인을 사 마신 적도 있다. 그런 비싼 와인을 마신 건 다섯손가락 안에 꼽지만... 뭐, 그렇다는 거다. 


















어제 영화 [데미지]를 봤다. 1991년에 개봉한 영화던데, 지금에야 봤다. 엄청나게 재미있고 야한 영화를 보고 싶어 추천을 바란다고 트윗을 작성했는데 그 때 추천받은 영화중 하나이다. 다른 하나는 일본 영화인데 내가 일본 영화는 좀 별로이고 다른 하나는 벨기에 영화인데 굿 다운로더가 없다. 그런데 이 [데미지]는 <무삭제완역판>으로 굿 다운로더 단돈 1,000원!!!


내용은 대충 알고 있었다. 여자가 자신의 시아버지 될 사람과 사랑에 빠진다는 파격적인 스토리. 줄리엣 비노쉬가 야하면 얼마나 야할까 약간 의심했는데, 이 영화는 내가 원하는만큼 야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재미있었다. 무엇보다 나이 많은 남자, 즉 시아버지가 될 사람인 '제레미 아이언스' 가 겁나 멋진 거다. 이 남자는 영화속에서 인정받는 정치인이며 앞으로 더 커나갈 가능성도 품고 있는 남자다. 지위와 명성을 가지고 있고 인기도 있는 사람. 이미 가진게 많은 사람인 그가, 아들의 여자친구를 보고 폭풍같은 열정에 휩싸인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라 그로서도 당황스럽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른다. 오죽하면 이 나이든 남자는, '그녀를 너무 갖고 싶어' 침대에 누워 울기까지 한다. 만나서도 어쩌지를 못하고 어디를 만져야할지, 어디에 입을 맞춰야할지 안절부절 전전긍긍, 만나지 않을 때는 보고싶어서 돌아버릴라고 하고. 그런 그가 유럽 정상들이 모이는 회의에 참가하고자 브뤼셀로 날아간다. 긴 회의후 주어진 열두시간의 휴식시간, 그는 그녀가 있는 프랑스 파리로 열차를 타고 간다. 그리고 아침 일찍 그녀를 잠깐 만나고는 호텔에 체크인을 한다. 크로아상과 베이컨이었나, 암튼 이것저것 프런트에서 아침 메뉴를 주문한 뒤에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아, 그리고 좋은 레드와인 한 병도요.



아.............저건 뭐지...묻지도 않고 '좋은 레드와인'을 주문할 수 있는 저 여유........부럽다. 엄청나게 부럽다. 내게도 저런 날이 올까? 근사한 호텔에 들어가 룸서비스를 시키면서 얼마인지 가격표를 보지도 않고 그저 '좋은 레드와인 한 병요' 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내게도 올까? 지금의 나는 간혹 친구들과 레스토랑에 가 와인을 주문할 때, 가장 저렴한 걸로 시킨다. 맨 위, 가장 저렴한 와인을 손으로 콕 짚어서는 '이거 주세요' 하는 것이다. 너무 비싼 레스토랑에 가면 차마 와인을 병으로 시키지도 못하고 글라스로 주문하면서 '많이 주세요' 같은 찌질한 멘트만 날리는데.... 씨양. 좋은 레드와인 한병, 이라니. 가격표를 보지도 않고 주문할 수 있는 그 여유는 어디서 오는거냐. 네 돈에서 오는 거냐. 지위, 명예? 레드와인에 쓰는 돈 쯤은 사실 별 거 아닌, 뭐 그런 거? 하아- 배아퍼 배아퍼 부러워 부러워 나도 저거 해보고 싶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하아- 저렇게 주문할 수 있는 사람들은 체크아웃 했을 때 혹은 레스토랑에서 계산하고나서 계산서 확인 안하겠지? 고깃집에서 계산하고 영수증 주세요, 한 다음에 고기 3인분에 36,000원 소주 세 병에 12,000원 공기밥 1,000원 맥주 두 병 10,000원 그러니까 59,000원 맞나, 하고 들여다보며 계산하는 거...안하겠지? 그러다 계산서보고 나갔다 다시 들어와 '저희 소주 두 병이었는데 왜 세 병 계산하셨어요?' 이런거 따지고 그러지 않겠지? 



아, 좋은 와인 사가지고 이런거 해보고 싶다.





두번째 사진처럼 피크닉 가서 하면 분위기도 좋고 신날 것 같은데 화장실...은 어쩌지? 풀밭에서 해결해야 하나? 암튼 이 두 사진은 내가 진짜 좋아하는 스틸컷인데, 지금 올리면서 이렇게 넷이 가면 참 좋겠다, 생각하다가 나랑 내 애인이랑 한 커플 그러면 또 한 커플은 누구와 함께해야 하지? 생각하다가 갑자기 미숙이 생각이 났다. 내 친구 미숙이. 미숙이랑 미숙이 애인이랑 이렇게 넷이 가서 와인 취할때까지 먹으면 좋겠다. 아니면 나랑 내 썸남, 미숙이랑 미숙이 썸남..뭐 이렇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뭔가 꼭 사진처럼 두 커플이어야만 할 것 같아... 상상의 나래.... 안주는 육덕육덕하고...신선한 것도 물론! 치즈도 있어야 돼. 아 이따 집에 갈때 치즈 사가서 먹어야징. 아 집에 가고 싶다 ㅠㅠ 와인 마시러 가고 싶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 뭔가 드러누워 뒹굴면서 칭얼대고 싶다. 피크닉 가자가자 아 몰라 가자가자 와인 먹자먹자 아 몰라 먹어먹어 그러면서 사지를 흔들며 칭얼대고 싶어...

(첫번째 사진이 제일 좋다, 나는)



아, 암튼간에, 수트 입은 제레미 아이언스는 진짜 근사했다. 어쩜 저렇게 멋질까 싶을 정도로..그런데 스틸컷 찾으려니 괜찮은 게 없더라. 그러니까 패쓰. 줄리엣 비노쉬도 예뻤는데, 크- 이 숏컷 보면서 또 누가 좋아하겠군, 하는 생각도 했다. 의외의 장면에서 내가 좀 꽂혔는데, 이건 비밀이고. 여튼 내게도 이 영화를 보고 작은 목표가 생겨났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자신의 소설 [올리브 키터리지]에서 이런 말을 했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올리브는 침대에 누우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외로움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걸, 여러가지 방식으로 사람을 죽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올리브는 생이 그녀가 '큰 기쁨'과 '작은 기쁨' 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큰 기쁨은 결혼이나 아이처럼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삶을 지탱하게 해 주는 일이지만 여기에는 위험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해류가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작은 기쁨도 필요한 것이다. 브래들리스의 친절한 점원이나, 내 커피 취향을 알고 있는 던킨 도너츠의 여종업원처럼. 정말 어려운 게 삶이다. (p.124)







기쁨과 마찬가지로 목표 역시 그렇지 않을까 싶다.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디디며 걷기 위해서는 큰 목표와 작은 목표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삶은 그렇게 구성되는 게 아닐까. 그런 면에서 보면 '언젠가 타임지에 실릴만한 대단한 작가가 되겠다' 같은 건 큰 목표에 해당하는 것일테고, 아이패드를 사겠다 같은 건 작은 목표가 되겠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를 보다가 불쑥, 내게 작은 목표 하나가 추가되었다. 이것은 은밀하고 내밀하며 갑작스럽게 찾아왔으므로 빔!일! 작은 목표가 하나 생겼네, 라고 생각하다가 아..졸 큰 목푠가...싶기도 한 것이.... 여튼, 목표가 생겼다! 목표가 생기고 그걸 이루기 위해 뭔가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간다면, 삶이 또 내가 그린대로 형태를 갖추는 게 아닐까. 




어제 출근길, 평소 나오던 출구로 나와 회사를 향해 열심히 걷고 있다가 문득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똭- 임원을 마주쳤다. 나는 마치 못봤다는 듯 다시 고개를 돌려 열심히 앞을 향해 걸었다. 난 못봤어, 난 못본거야...그런데 뒤에서 내게 말을 걸더라. 하아- 제기랄. 나는 돌아서서 햇빛을 가리기 위해 썼던 선글라스를 빼며 '어머, 안녕하세요, 왜 거기서 오세요?' 라며 천연덕스럽게 인사를 했는데, 아마도 그 임원은 나의 가식..을 다 눈치챘을 것이다. 지하철이 편해서 차 안끌고 지하철 타고 다니고 계신다더라. 양재역에서 항상 걸어오신다고...하아- 그렇다면 늘 이 길로 다니는 것인가, 그러면 나는 또 마주칠 수 있는건가, 나는 출근길에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 퇴근길에도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 특히나 임원이라면 더더더더더더더더더더더더더 만나고 싶지 않아,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버스를 타고 가나, 아니야 나는 다이어트 중이니까(응?) 걸어가는 게 맞아, 그렇다면 다른 출구를 이용해야 하나, 아아, 나는 또 어디로 가야하는지 누구도 내게 일러주질 않았네......라며 오늘 평소처럼 그 길로 왔는데 오늘은 만나지 않았다. 이것은 삶의 작은 기쁨에 해당한다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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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5-05-29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고보면 그 임원님도 알라디너?? 호호호

다락방 2015-05-29 11:18   좋아요 0 | URL
아....그러면 어쩌죠? (쫄아있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레와 2015-05-29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하하 이번 주말에 데미지 꼭 봐야겠다!!!

오늘 저녁엔 와인 한잔해야지. 메뉴가 와인과 어울릴거임.ㅋㅋ 인증샷 날릴게요~

다락방 2015-05-29 11:45   좋아요 0 | URL
나도 지금 와인 할 생각에 들떴음. 집에 가고 싶어 미치겠는데 오늘 일이 많아요 ㅠㅠ
인증샷 기다리고 있을게요.
치즈치즈치즈치즈 치즈를 잊지말고 사가야할텐데 치즈치즈치즈치즈

레와 2015-05-29 12:37   좋아요 0 | URL
다락방. 치즈치즈치즈치즈 잊을리가 없잖아!! ㅋㅋㅋ

다락방 2015-05-29 14:33   좋아요 0 | URL
오늘 일 많아서 들어가다가 잊을 지도 몰라 ㅠㅠ

춤추는인생. 2015-05-29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럽에서는 와인가격이 매우 싸고 잔디밭에서도 편히 마셔요 다락방님.
마치 콜라처럼~ 매끼 식사에 한잔의 와인은 필수같이 느껴져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와인이 무슨 고가사치품으로 변신해서 샤또팔머네 로마네꽁티네 이런식으로 비싼와인을 마시는것이 하나의 유행이거나. 아님 그반대로 저가와인인데, 가성비가 떨어지는게 많은것 같아요. 어서 빨리 우리나라도 동네 슈퍼에서 제발 아무간섭도 없이 와인을 마음껏 집어들수있는 나라이기를 바래봅니다. 치즈도 마찬가지구요 !!!
저도 까쇼 말벡 아주 좋아해요. 히히 불금 와인과 함께 달콤한 밤 보내세요 ~~~^^

다락방 2015-05-29 14:35   좋아요 0 | URL
네, 춤인생님. 외국 영화 보면서 제일 부러웠던 게 그냥 아무 까페나 이런 데 들어가서 와인 한 잔 시켜서 마시더라고요. 부담없이 그냥 시켜마실 수 있게 됐으면 좋겠어요. 저 양재동에서 한 잔에 15,000원 하는 데도 가봤어요. 너무 겁나서 딱 한 잔만 마시고 안주도 안시키고 그냥 나왔답니다. ㅠㅠ

얼른 집에 가서 와인 마시고 싶네요. 엉엉 ㅠㅠ

2015-05-29 1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5-05-29 14:35   좋아요 0 | URL
그런 날이 올까요? ㅎㅎ

프레이야 2015-05-29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와인 ㅠ 저 요새 한약 먹느라 못 마시고 있는데 훅‥
화장,에서 김규리가 회식 2차 자리에서 ˝여기 지공다스 주세요˝ 그래요. 그거 마셔봐야지,하고 있답니다. 원작에는 없는 게 이 와인 관련 장면들인데 상징적으로 배치한 와인과 와인색‥ 암튼 임감독의 와인 초이스, 궁금하기도 하고요. 그나저나 저는 데미지,의 제레미 아이언스보다 더 매력적인 중년은 보기 어렵지않을까 해요. 롤리타,에서보다 더. 마지막장면 슬리퍼인가 쪼리인가 그런거 신고 베이지색 헐렁한 옷에 골목길을 털레털레‥

다락방 2015-06-01 09:06   좋아요 0 | URL
저 프레이야님의 이 댓글 읽고 지금 지공다스 검색해봤어요. 그러다 이걸 마셔봤다는 블로거의 글을 읽게 됐는데 3만원 좀 넘게 주고 샀다고 하네요? 만약 제가 이걸 마시게 된다면, 제 돈주고 산 가장 비싼 와인이 될 것 같아요. ㅎㅎ 아 이번달 월급 타면 마트나 백화점으로 달려가서 지공다스 한 병 사 마셔봐야겠어요. 크- 기대돼요! >.<

말씀하신 마지막 장면에서 제레미 아이언스가 치즈를 자르잖아요. 그래서 저도 마트 달려가서 치즈 샀답니다. 꼭 그렇게 잘라먹는 치즈를 먹고 싶더라고요. 결국 저는 금요일에 치즈를 사가서 와인을 마셨어요. 물론 다른 안주들도 함께요.

한약 다 드시고 와인 맛있게 드세요, 프레이야님! 참았던 만큼 더 만족감이 느껴질 것 같아요.
:)

Juni 2015-05-29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한때 와인전문점에서 사온 4만원정도의 와인을 가장즐겼는데 요즘은 못먹어서 힘듭니다 ㅎㅎ

다락방 2015-06-01 09:07   좋아요 0 | URL
요즘은 왜 못드세요, 쭌천사님?
4만원정도의 와인은 제가 한 번도 사 본 적이 없는데, 혹시라도 연봉이 오른다면 한 번 사봐야겠어요. ㅋㅋㅋㅋㅋ

에이바 2015-05-29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이드웨이닷!! 사진보고 환호하면서 들어왔어요. 나파 밸리의 와인이 얼마나 우수한지에 대한 영화(?)죠ㅋㅋ 다락방님 다음에 분위기 있게 캘리포니아산 와인 한병... 데미지 보면서요. 독서 공감 5만부 달성이 성사되었더라면!! ㅠㅠ 마트 와인이면 어떤가요 이런게 일상의 작은 기쁨 아닌가요ㅎㅎ

다락방 2015-06-01 09:07   좋아요 0 | URL
사이드웨이 다시 봐야겠어요. 늘상 다시봐야지 생각만 하면서 못보고 있어요. dvd 도 사놨는데 말이지요.

네, 마트 와인으로 누리는 일상의 작은 기쁨, 저도 만족합니다.
그나저나 사이드웨이 좋아하는 에이바님이라니, 반갑습니다! >.< 저 이 영화 진짜 좋아해요. 엉엉 ㅠㅠ

hellas 2015-05-30 0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레드와인 한병만 주세요;ㅅ; 멋들어지네요 ㅋㅋㅋㅋ

다락방 2015-06-01 09:07   좋아요 0 | URL
제가 살면서 이런 말을 할 날이 올까요? ㅜㅜ

transient-guest 2015-05-30 0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ideways를 보면 늘 와인 한 잔 때리고 싶죠.ㅎㅎ 제가 저 영화에 나온데서 3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살았었는데도 못 가봤어요.ㅎㅎ 솔뱅과 산타바바라의 와인컨트리는 참 이쁘다고 하데요. 그나저나 저 사진에서 파티의 끝은 결혼앞둔 총각과의 광란, 배신, 그리고 구타였죠??ㅎㅎㅎ 참 잘 만든 영화라서 요즘도 가끔씩 봅니다..

다락방 2015-06-01 09:09   좋아요 0 | URL
저는 마일스가 61년산 슈발블랑 마시던 장면이 아주 좋았어요. 아주 기억에 남는 장면입니다. 명장면이에요 명장면.

그걸 어떻게 마시지 않을 수가 있죠?
특별한 순간에 마시려고요.
당신이 그걸 마시는 순간이 특별한 순간이에요.

마야와 이 대화끝에 결국 그는 가장 비참할 수 있었던 순간을 특별한 순간으로 바꿔버리잖아요. 크-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moonnight 2015-05-31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 줄리엣 비노쉬 안 좋아했는데 데미지 보고 정말 싫어하게 됐지요. 영화에 너무 빠져든건지@_@;; 저도 비싼 와인 안 마셔요. 구별도 못하는데-_- 뭔가 손해보는 느낌;;

다락방 2015-06-01 09:10   좋아요 0 | URL
오, 저는 저 영화 보고 줄리엣 비노쉬 되게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렇게 숏컷을 잘 소화해내다니, 하면서 예쁘다..감탄도 하고요. 그런데 영화속에서 줄리엣 비노쉬의 마음을 제가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할 것 같아요..

one fine day 2015-06-01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미지를 본 것이 벌써 20년이 넘었다니 정말 믿어지지 않아요. `상처받은 사람은 위험하다`와 `그녀가 다른 사람과 구별되지 않았다`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대사입니다. 천명 사이에 있어도 만명 사이에 있어도 그 사람만이 보이는 것. 그것이 사랑의 본질이 아닐지. 더 이상 다른 사람과 달라보이지 않는다는 그 말에 내 사랑도 저리되겠지 싶어 어찌나 슬프던지 한참을 울다 나왔던 기억이 나네요.

다락방 2015-06-02 10:09   좋아요 0 | URL
저는 그저 파격적인 내용의 영화일줄로만 알았는데 재미있었어요. 마지막 아들이 그 장면을 본 장면, 그 장면도 인상적이었고요. 무엇보다 제레미 아이언스가 안정적인 생활을 해나가다가 이 여자를 만나 어쩌지를 못하는 것도...오, 그런건 대체 뭘까요?

마지막에 여행하면서 툴레툴레 걷던 장면이요, 그때 제레미 아이언스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 일, 그러니까 아들의 애인을 만나 사랑하는 일이 없었다면 그런 여행은 없었을 것이고 또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겠지만, 이미 일어나 모든 걸 버리고 혼자 떠나야 했던 지금의 순간을, 그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거요. 재미있게 봤어요.

어느 멋진 날 님의 사랑은 그 뒤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도 궁금하네요.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 모두다 칭찬을 해서, 오 진정 레알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려나 싶어 세 시간이나 되는 영화를 예매했다. 터키 영화라는 것도 내게는 신선했고. 그렇지만 사람들이 칭송하던 그 우아함이 내겐 좀 지루하게 느껴졌다. 반팔을 입었고 극장안은 추웠다. 세시간 십오분을 고스란히 떨고 있자니 영화가 빨리 끝나기만 바라게 되더라.


영화속에서는 이렇다할 어떤 커다란 사건이 발생하진 않는다. 그러나 저마다의 입장에서 자신이 가진 평소의 생각과 신념을 아주 장황하게 풀어놓는다.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 너의 행동은 옳지 못해.'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이들은, 그게 누가됐든, 상대의 말을 들으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 말만 블라블라블라블라~

그 말들에는 어김없이 상대로부터 반박당할 논리들이 숨어있지만,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려 들질 않는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받아들이며 인정한다는 것은,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말(혹은 글)이 '부드럽고 자상하게 말한다고' 해서 용서된다고 혹은 받아들여진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거칠게 말하는 태도의 폭력이 있다면 부드럽고 아름다운 단어들을 나열해가면서 폭력적인 말들도 분명 존재하니까. 내용의 폭력을 저지르는 사람은 자신의 태도가 부드러웠다는 것만을 자랑삼지, 자신의 내용을 고칠 생각은 하질 않는다. 윈터슬립 에서도 겸손한 태도를 유지한채 상대의 기분을 건드리는 장면들이 종종 나온다. 말을 하는 사람이 됐든 듣는 사람이 됐든, 그들중 누구도 자신의 생각이나 신념을 바꿀 생각은 없다. 그러면서 계속 '내가 옳다'고 생각한다.


'지옥으로 가는 문은 선의로 덮여있다'는 말이 영화속에서 인용되는데, 크, 나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좋은 뜻으로' 했다는 건 얼마나 좋은 핑계가 되는가. 그러나 그 좋은 뜻은, 대체 누구에게 선의로 작용하는가. 사람들이 '선의'를 베풀었다고 했을 때, 그 선의는 대부분 상대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선의일 때가 많다. '선의를 베푸는 나'를 보여주고 싶은 경우일 때가 많다. 영화속 '니할'의 경우도 그런 경우였는데, 그녀는 '자선을 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찾게 됐다'고 했지만, '안락한 생활'을 유지하는 그녀에게 가난한 사람들의 자존심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너 돈 없지? 내가 돈이 많으니까 너 이 돈 써, 라고 하는 순간, 그녀의 자선은 구역질 나는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녀가 품고 있는 선의는, 그녀 자신에게 향한 것이다. 



영화속 호텔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무슨 절벽 같은데 한참 올라가야 나오는 호텔이며 동굴처럼 되어 있는데, 아니 저기까지 가려면 차가 있어야 하겠다 싶더라. 버스가 다닐 것 같지 않은 곳이랄까. 버스가 다녀도 하루에 한 두대쯤 다닐 것 같은 외진 곳. 풍경은 멋지겠지만, 뭔가 마트나 편의점이 보이지도 않는 곳이라, 아, 저런 데서 한 번 묵어보고 싶지만 길게는 묵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서울여자..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도 생각나고.. 세상으로부터 꼭꼭 숨어 밀월여행을 즐기고 싶다면 바로 여기여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커다란, 객실이 있는 동굴 같은 데서 나와 좀 걸어가면 작은 동굴이 나오는데, 거기는 남자 주인공의 서재이다. 오.. 되게 근사하더라. 저런 서재 하나 있으면 정말 딱 좋겠다는. 영화와는 별개로, 서재에서 남자가 작업하는데 남자의 여동생이 간혹 들어와서 뒤쪽 소파에 앉아 잡지를 읽거나 하는데, 내가 만약 저런 서재를 갖게 된다면, 저 소파에 앉는 것이 허락되는 사람이 누구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막 다 들어와 저기 앉는건 좀 싫을 것 같다...




아, 나도 이런 서재 갖고 싶다. 어쩐지 글도 막 잘 써질 것 같고 책도 막 잘 읽힐 것 같아... 그리고 정말 좋은 사람이 찾아온다면, 함께 앉아 술을 마셔도 좋겠다. 기승전술...


이 영화를 함께 본 친구와 나는, 다 보고나서 '우리에겐 이 영화보다 [위아영]이 더 나을 것 같다' 고 얘기했다.






크- 그리고 이거슨, 크- 어마어마하게 근사한 영화다. 엄청 멋지다!!! 대박이다!!!! 와,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는 액션의 초절정 재미를 가지고 있으며 스토리와 캐릭터까지 완벽하다! 남자주인공은 그저 거들 뿐, 이 영화속에서 짱멋진건 샤를리즈 테론이 다했다. 아, 이 언니는 진짜 캡멋져! 원래도 참 멋지다고 생각했지만, 그녀가 매드맥스에서 멋진 전사의 역할을 한 것은 정말이지, 그녀의 이력에 대단한 한 줄을 추가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샤를리즈 테론 뿐만이 아니다. 이 영화는 영화 자체로 정말 좋은데, 스쿠터를 타는 아주머니들이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감동해서 목이 메이더라. 몇 번이나 영화를 보다가 눈물을 글썽였는데, 주연부터 조연들까지, 자신의 커리어에 이 영화가 있다면, 그것만으로 빛나는 업적을 쌓은 것 같단 생각이 들더라. 나도 나의 커리어에 이 영화를 넣고 싶은데, 정말이지, 스쿠터 타고 헬맷을 벗는, 씨앗을 가지고 다니는 나이 든 여자사람 2 의 역할을 하고 싶었다. 씨앗은 결국 다른 사람에게 넘겨진다. 희망은, 그렇게 전해지고 또 전해지는 것. 


그리고 조연이지만, 크- 로지 헌팅턴 휘틀리도 멋졌다. 예...예......예뻐...멋져!!!!!!!!




맨 오른쪽의 여자가 '로지'인데, 나는 최근에 로지의 인스타그램을 팔로잉해서 종종 그녀가 올리는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다. 제일 처음, [트랜스포머3] 으로 그녀를 알게 됐을때만 해도 '예쁘고 몸매도 멋진 여자' 가 그녀를 향한 나의 생각의 전부였는데, 요즘의 그녀는 '완전 멋진 여자' 라는 생각을 주더라. 


오래전에 트레이너였나, 몸이 엄청 근육으로 다져져서 우락부락한 남자가, 역시 몸짱인 여자와 데이트 하는 장면, 일상을 같이 보내는 장면이 텔레비젼에 나온 적이 있었다. 설정이 섞여있었겠지만, 크림소스스파게티를 먹고 싶어하는 여자에게 남자가, 그거 먹고 운동 얼마나 해야 하는지 아냐, 칼로리 신경 안쓰이면 먹어라, 하면서 구박을 하고, 각자 운동화를 챙겨와서는 데이트랍시고 남산의 계단을 올라가는데..그들은 그게 서로에게 맞고 좋아하니까 연인이 된 것이지, 나는 저렇게 하자는 남자와는 이별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시당초 그런 남자가 나를 좋아할 리도 없겠지만. 여튼, 몸몸몸몸 근육근육근육근육 다이어트다이어트다이어트다이어트 라는 생각을 하는 남자와는 사귀고 싶지도 않고 딱히 막 알고 지내면서 까르르 웃고 싶지도 않은데, 며칠전 인스타에서 로지가 운동하는 짧은 동영상을 봤다. 하아-


그걸 동료 직원과 들여다보며, 이렇게 아름다운 몸매를 가진 여자가 이렇게 운동을 열심히 한다, 라는 얘기를 했다. 로지도 운동을 하는데 우리가 뭐라고 운동을 안하고 쳐묵쳐묵하기만 하는가...하는 반성의 시간을 누룽지통닭을 시켜 앞에 두고 했다. 





그녀는, 알다시피 내가 좋아하는 1순위 남자배우 '제이슨 스타뎀'의 연인이다. 이 연인은 현재 5년 이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연인들의 관계는 그들만의 내밀한 것이니, 그들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갈지 또 어떤 것들로 인해 서로에게 강하게 끌림을 느끼고 싫증을 느끼기도 하는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이토록 잘나가는, 스스로 잘나있는 남자와 여자가 오랜 시간 연인 관계를 유지한다는 게 내게는 경이롭게 느껴진다.



자막 때문에 시끄러워졌지만 어쨌든 제이슨 스타뎀은 최근에 [스파이]라는 재미있(다)는 영화에 출연했고 뭔가 점점 더 나은 필모그라피를 만들고 있는 것 같으며 로지 역시 [매드 맥스]에서 가장 아름답고 현명한 여자를 연기해 그녀의 이력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이들은 계속해서 운동하고 자기들을 가꾼다. 사실 나는 '자기 관리' 이런말 별로 좋아하진 않는데(싫어.....), 이들이 한결같은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또 단단한 이력을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걸 보면서, 아, 이들은 자기들이 건강하기 때문에 관계 역시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는 거겠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거다. 


일전에 [마녀사냥] 에 '한고은'이 게스트로 나왔을 때, '남자친구가 취직만 하면 자꾸 때려친다, 집에 있는 돈만 믿는 것 같다'는 사연을 읽어준 적이 있다. 그런 남자는 나도 싫다, 고 나 역시 생각했고 패널들도 역시 그런 식으로 말하거나 했는데, 한고은은 그때 '한 사람과 오랫동안 연인관계를 유지한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신뢰가 있는 것 아닌가요?' 라는 말을 하더라. 그때 아! 했다. 제이슨 스타뎀(이라고 인터넷에 나오던데 나는 아직도 '재이슨 스태덤'이 더 편하다)과 로지는, 현재의 내가 보기에 가장 이상적인 연인의 형태를 띠고 있다. 원래 좋아했던 배우였는데 크, 역시 내 눈은 틀림이 없어. 멋져! ♡



나보다 이 영화를 먼저 본 친구와 이 영화에 대한 극찬을 나누었다. 뭐하나 버릴 장면이 없다, 진짜 최고였다, 하면서. 





덕분에 '이브 엔슬러'의 책들을 보관함에 넣었다. 오늘 아침에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든다]에 대한 정성스런 리뷰로부터 알게된 '레베카 솔닛'의 다른 책도 함께 보관함에 넣었다.

















영화를 보면서도 나는 어쨌든 단 한명이라도 희망을 품고 있다면 세상이 쉽게 멸종하진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고, 또한 이렇게 영화로 또 책으로 누군가 어딘가에서 자꾸 말을 해준다면, 그 말이 자꾸자꾸 퍼지게 될테니 역시 희망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제는 트윗에서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든다]의 아주 괜찮은 감상을 읽었는데, 오늘은 알라딘에서 정성스런 리뷰를 읽었다. 매드 맥스의 각본가들은 이브 엔슬러에게 자문을 구했다고 하고, 그 점에 대해 로지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점점 더 나아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나는 들었다.




토요일에는 친구들과 '수리산'에 갔다. '축령산'을 예정해두고 갔었는데, 축령산은 경사가 가파르고 험하다고 해서 그보다 완만하다는 수리산으로 급변경. 어차피 입구는 같고 갈림길에서 오른쪽이냐 왼쪽이냐만 선택하면 된다. 걸으면서 계속계속 언덕이 나와 당황했다. 둘레길 혹은 산책코스를 기대하고 간 터라, 우리 일행은 모두 운동화를 신고 있었고, 이렇게 빡센 시작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해서. 우리 옆을 지나가던 무리들중 1인은 '길이 서있어' 라고 말하더라. 말그대로 서있었다 진짜. ㅠㅠ 어쨌든 다른 산에 비하면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아 조용한 길을, 우리는 계속 걸었다. 열심히 걸었다.




한시간 여를 걸어서 울창한 숲이 나오고, 산림욕이 가능하다는 그곳에 들어가 우리는 준비해온 김밥과 빈대떡을 풀었다. 원래 김밥 한줄씩만 먹으려고 했는데, 입구에서 빈대떡을 팔고 있더라. 아- 막 부쳐내는 그 냄새가, 도저히 그냥 가지 못하게 해. 게다가 옆에 있던 아저씨가 '이걸 산에 가서 먹으면 더 맛있지' 하는 바람에, 아아, 몰라몰라, 사, 사, 해서 사가지고 간 것.




아아, 맛있게 먹었고, 정말 이때만 해도 좋았다. 일단 먹고나서는 전망대에 올라 바라보니, 전망이 진짜 크-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던 것이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철쭉동산을 지나치며 밑으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리산 정상을 거쳐야했고, 아아, 산은 산이었다, 남아있는 코스들이 완전 험난한 코스. 밧줄을 잡고 바위위를 걸어 올라가야 했는데, 중간에 멈춰서서 나는 밧줄 없는 저 언덕을 어떻게 올라야할지 도무지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는 거다. 친구 둘은 나보다 약간 밑에 자리한 상황, 나는 그들보다 약간 앞서서 저 길을 어떻게 올라가나, 한 걸음만 더 디디면 미끄러져 구를 것 같은데, 하고 벌벌 떨고 다리 후달려가며 납작 엎드려있는데, 위에서 내려오시던 아저씨가 '일어나요 일어나, 일어나야 돼요' 하는 게 아닌가. 일어나야 넘어지지 않는다는 거였다. 억지로 다리를 폈는데 도무지 발이 움직이질 않는 터, 그 아저씨는 자리에서 멈추더니 본인의 등산지팡이를 내게 내밀었고, 나는 고맙습니다, 라고 말하며 그 지팡이를 잡고서는 걸음을 뗄 수 있었다. 아저씨가 지팡이로 나를 끌어주셨어.. ㅠㅠ


그 순간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하고자 한다면, 그래서 내가 최대한 노력을 하면, 누군가 결정적인 순간에 나를 이렇게 도와주는구나! 아아, 이런거였어. 

막 이렇게 감동하고 있는데, 그 다음엔 밧줄도 없는 서있는 흙길이 나와...하아- 우리 셋은 진짜 벌벌 떨고 소리를 지르며 서로서로 손을 잡고 막 그러면서 그런 코스들을 이동해 간신히 정상을 찍었다. 하아- 잘했어, 수고했어, 하면서, 그치만 만약 내려가는 길이 이 길이라면 못내려갈 것 같아, 경사가 너무 심해, 운동화라 미끄러워, 이런 대화를 하면서 잠시 쉬다가 반대쪽에서 올라온 사람들을 마주쳤다. 나는 그쪽길도 경사가 가파르냐 물었고, 그분은 '아니'라고 대답하셨다. 그래, 다행이야, 우리는 역경을 이겨냈어! 하며 내려가기 시작했다. 철쭉동산은 산그늘이 좋았고 아아, 잘왔어 잘왔어, 하고 좋다좋다 감탄하며 내려갔다. 그러나 철쭉동산을 지나고나니 내리막길이 나오고, 경사가 심했다. 아 씨발. 우린 이제 어쩌지...


하아...


미끄러지고 소리지르면서, 어떤 길은 밧줄을 잡고 어떤 길은 나무를 잡고 어떤 길은 커다란 바위를 잡으면서 내려오는데, 와, 너무 무서워서 신경이 뽝- 집중됐다. 어느 순간 갑자기 어깨가 확 뭉치더라. 어쨌든 우리는 오랜 시간이 걸려 산길을 내려왔고, 내려오고 나서는 서로를 부둥켜 안았으며 ㅠㅠ 고생했다고 서로가 서로에게 말해줬다. 그리고는 휘청이는 다리로 걸어내려가 가장 먼저 만난(그러나 산입구의 유일한) 구멍가게에 들러 맥주를 한캔씩 사들고 나왔다. 버스가 도착하기 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흑흑 ㅠㅠ 우리 몸살나겠다 ㅠㅠ 이런 말들을 주고 받으며 도착한 버스를 타고 마석역에 내려 후다다닥 서둘러 경춘선 지하철을 타고 상봉역에 내렸다. 우리는 고기고기한 식사를 하자고 입을 모았다. 그리고 고깃집에선, 레어템이라는 순하리를 만났다.



고기와 순하리의 아름다운 하모니-



그러나 순하리는 내 입엔 별로여서 한 잔을 마신 후로는 그냥 처음처럼 달라고 해서 그냥 소주를 마셨다. 나한테는 역시 쓴 술이 최고인것 같다. 달짝지근 맛있는 술은 역시 나는..아닌 것 같아..... 뭐랄까, 단 술, 맛있는 술을 마실거면 술을 왜마시지? 하는 느낌이 내게는 좀 있달까. 술은 써야 돼!! 그래서 마시고나서는 크- 해야한단 말이야!!!!!!!!!!!!!!!!!!!




어제는 저녁에 남동생과 오리고기에 맥주(호가든호가든!!!!!!!!!)를 마시면서 우리가 술을 얼마나 좋아하는가에 대해 말했다. 남동생은, '나 알콜의존증인가봐 술이 너무 좋아' 했고, 나는 '야 장난 아냐, 나는 진짜 술 너무 좋아. 고기도 좋고. 나는 앞으로도 고기랑 술 나처럼 좋아하는 남자 만나서 같이 고기랑 술 즐기면서 행복하게 살고 싶어' 라고 하자 남동생이 말했다. '고기랑 술, 누나는 지금도 충분히 먹고 있잖아..'


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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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5-05-26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빈대떡, 사, 사, 사에서 막 웃다가, 등산지팡이에서 어머! 하다가, 남동생분 이야기로 마무리했어요.
다락방님의 이런 재미있는 페이퍼를 읽어야 월요일이예요. 아니다, 오늘은 화요일이죠.
네, 즐거운 화요일이에요^^

제이슨 스타뎀 여자친구, 완전 이쁘네요. 운동도 열심이라니. 참... 세상은 불공평해요.
운동 동영상 좀 찾아봐야겠어요. 나도 운동..

다락방 2015-05-26 15:25   좋아요 1 | URL
예쁜 여자들은 운동하는 모습도 예쁜것 같아요. 제가 운동하는 거 거울 보면..참...하아- 뭐라 더 할말이 없는..orz
암튼 본격 다이어트를 해야할텐데,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게 다이어트가 아닌가 싶습니다. 특히나 저처럼 먹는 거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더더욱요. ㅠㅠㅠ

밥 너무 좋고
고기 너무 좋고
술 너무 좋고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무스탕 2015-05-27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드맥스 안보려다 보고 완전 뻑- 간 영화. 전 영화 보면서 어쩐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가 생각났었어요.
순하리는 술 못 먹는 제 입에도 별로..

벌써 막 더운데 잘 지내고 계시죠? :D

다락방 2015-05-27 10:36   좋아요 0 | URL
맞죠맞죠그쵸그쵸 완전 뻑-갔죠!!
제 남동생은 제가 충동질해서 저랑 같이 보러간건데 첫번째 액션이 끝나자마자 제게 속삭였어요.

이거 장난아니다..

히히히히히. 암튼 어마어마하게 재미있는 그리고 좋은 영화였어요. 제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를 본 게 없어서....제가 애니를 잘 안봐서.......최근에 초콜릿과 선거와 교복이었나..뭐 그런 제목의 애니를 한 번 볼까 생각을 잠깐 해보았지만, 여주인공들이 말도 안되게 가슴이 커서.....앗 댓글이 산으로 가요! >.<

전 잘지내고 있습니다, 무스탕님.
무스탕님도 잘 지내고 계신가요?
어제 <버자이너 모놀로그> 떠올리면서 무스탕님 생각했어요. 그때 제 옆자리에 무스탕님 계셨는데, 하면서요.
:)

2015-05-27 14: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28 08: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28 08: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28 09: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27 16: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28 08: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nomadology 2015-05-27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드맥스 재미있게 봤습니다. 후속편도 얼른 더 나왔으면 좋겠네요. 요즘은 말만 영화지, 사실은 CG 애니메이션인 영화들이 많쟎아요. 어쨌든 노장의 일관된 근성이라 생각하니, 뭔가 부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여러가지 생각이 들더라구요.

다락방 2015-05-28 08:38   좋아요 0 | URL
네. 재미있다는 말을 듣고 기대했는데 와 진짜 완전 엄청 재미있더라고요. 액션이면 액션 스토리면 스토리 캐릭터면 캐릭터..하아- 정말 좋은 영화였습니다. 무척 재미있게 봤어요. 이 영화를 두 번 세 번 보는 사람들이 많다는데, 왜그러는지 알겠더라고요. 저는 두 번 보진 않을거지만.. 하핫.
후속편도 얼른 보고 싶어요, 저도!! >.<

레와 2015-05-28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또 보고 싶어. 와놔. 이 아침에 또 생각났음. ㅎㅎㅎㅎㅎ

다락방 2015-05-28 08:59   좋아요 0 | URL
멋진 영화다!!
나는 또 보진 않을것 같은데 여튼 겁나 좋은 영화였음!! ㅎㅎ
샤를리즈 테론 짱!!

transient-guest 2015-05-29 0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사다망하신 시간이었네요.ㅎㅎ 저도 매드맥스는 무척 기대하고 있습니다. 샤를리즈 테론을 첨에 That Thing You Do에서 주인공을 두고서 치과의사와 바람나는 여친으로 나온걸 첨 볼 때 이 아지메가 이렇게 유명해질 줄은 몰랐어요.ㅎㅎ 윈터슬립의 저 아늑한 서재는 저도 참 맘에 드네요. 보고만 있어도 따뜻합니다. 위의 눈보라치는 성과 어울려요.ㅎㅎ 카파도키아를 카르파티아의 성으로 바꾸면 조금 으스스해지겠네요.ㅎ

다락방 2015-05-29 11:17   좋아요 0 | URL
오오. 저 댓씽유두 두 번이나 봤는데 거기에 샤를리즈 테론이 나왔었나요? 리브 타일러 밖에 생각이 안나네요, 등장하는 여자로는요. ㅎㅎ 그 영화 엄청 재미있게 봤었어요. 대학시절 겁나 우울했는데 비됴방가서 그냥 이거나 보자, 하고 아무 정보 없이 봤다가 급유쾌해져서 비됴방을 나왔었죠. 후훗.

언젠가는 저런 아늑한 서재를 제 것으로 갖게 될 날이 올까요? 그러기를 바라봅니다. 친근한 사람들은 가끔 서재로 초대해도 좋을 것 같아요.
:)

transient-guest 2015-05-30 07:24   좋아요 0 | URL
서재에서 아늑하게 불 키고 와인과 안주를 즐기면서 책 이야기를 하면 참 좋겠어요..ㅎ

다락방 2015-06-01 09:11   좋아요 0 | URL
크- 책 이야기가 아니어도 좋을 것 같은데요? 히히히
 

핑-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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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날 이후에도 너는 사랑받는 아이야.
    from 마지막 키스 2015-05-21 17:56 
    그날 이후아빠 미안2킬로그램 조금 넘게, 너무 조그맣게 태어나서 미안스무살도 못 되게, 너무 조금 곁에 머물러서 미안엄마 미안밤에 학원 갈 때 행드폰 충전 안해놓고 걱정시켜 미안이번에 배에서 돌아올 때도 일주일이나 연락 못해서 미안할머니, 지나간 세월의 눈물을 합한 것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리게 해서 미안할머니랑 함께 부침개를 부치며나의 삶이 노릇노릇 따듯하고 부드럽게 익어가는 걸 보여주지 못해서 미안아빠 엄마 미안아빠의 지친 머리 위로 비가 눈물처럼
 
 
 

사람에게는 이후의 삶이 있는데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 괴물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 같다, 는 식의 얘기를 친구와 하던 어제. 우연히도 나는 같은 뉘앙스로 말을 하는 황정은의 소설을 읽었다.
















금붕어를 괴롭히던 '나나'를 '나기'가 때리는 장면이었다.



오라버니는 그것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다가 등을 펴고 나나와 마주 선 뒤, 손바닥을 활짝 펴서 나나의 뺨을 때렸습니다. 한대만으로 그치지 않고 몇번이나 힘껏, 힘껏.

아파?

오라버니는 물었습니다.

나나는 얼떨떨하게 정신이 나간 채로 오라버니를 바라보았습니다.

아프냐고 재차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런데 나는 아프지 않아, 오라버니는 팔을 늘어뜨리고 서서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를 때렸으니까 너는 아파. 그런데 나는 조금도 아프지 않아.

전혀 아프지 않은 채로 너를 보고 잇어. 그럼 이렇게 되는 건가? 내가 아프지 않으니까 너도 아프지 않은 건가?

대답을 기다리는 듯 바라보는데도 대꾸하지 못하고 얼얼한 뺨에 손을 대고 눈을 깜빡이며 마주 보았습니다. 오라버니는 새까만 눈으로 나나를 보며 물었습니다.

하지만 너는 아프지, 그렇지?

압도된 채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금붕어를 건드릴 때, 너는 아팠어?

고개를 저었습니다.

같은 거야, 라고 오라버니는 말했습니다.

너하고 저것하고, 같은 거야.


아파?

오라버니는 물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자 기억해둬, 라고 오라버니는 말했습니다.

이걸 잊어버리면 남의 고통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는 괴물이 되는 거야. (p.129-131)



가난하고, 힘이 없고, 빽도 없는 등장인물들이 황정은의 소설 속에서는 자기자리에서 희망을 찾는다. 누가봐도 약자인 그들이, 삶을 고민하고 진지하게 바라보며 서로에게 힘이 되어준다. 어쩌면 욕과 폭력과 고통과 괴로움이 나오는 중에도 황정은이 옆에 있는 사람을 잊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황정은을 계속해서 보게 되는게 아닌가 싶다. 나는 인간에게 인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니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 이라는 말은, 전체를 놓고봐서도 참일거라고 짐작하지만, 글쎄 확신할 수는 없다. 다만, 나는 사회적 동물이다. 나에 대해서라면 그 말은 참이다.


엊그제는 남자사람1과 여자사람1, 나 이렇게 셋이 을지로에서 술을 마셨다. 골뱅이와 계란말이, 노가리와 쥐포등을 시켜놓고 우리는 자꾸만 맥주를 더 시켰다. 여자사람1은 나보다 나이가 많았는데, 그날 감성열매를 주렁주렁 달고와서는, 나를 폭풍칭찬 해주었다. 계속되는 칭찬의 말에 엄청나게 기분이 좋아진 나는, 아, 나는 이런게 필요해,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의 칭찬을 해줄 수도 없고 나를 좋아할 수도 없다. 어딘가의 누군가는 특별히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고 눈엣 가시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을 것이고. 그렇지만 아주 적은 소수가, 이렇게 만나서 '너를 알게 되어 정말 너무 좋다', 라는 걸 말해주면, 아, 이런 걸 먹고 사람은 자랄 수 있는 거야, 싶어지는 거다. 

나는 사회적 동물이다!!



나기는 나나를 사랑한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그런 사랑, 이 아니라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람으로서 사랑하는 그런 사랑. 그런데 나나의 뺨을 때리고는 남의 고통을 생각하지 않는 괴물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뺨을 때리는 건, 훅- 하고 내게 좀 거부감이 들긴 했지만, 흠씬 바깥에서 두들겨맞은 나기가 '맞는 데서 오는 고통', '괴롭힘을 당하는 데서 오는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터, 나나에게 확실히 인식시키는 방법은 그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도 뭔가 좀...어..좀...다른 식으로 알려줄 순 없었나? 라고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게되지만. (잘 생각나지 않는다.)




나도 한입 먹자, 하며 그녀는 뜨거운 떡을 아무렇지도 않게 손으로 덥석 떼어 입에 넣었다. 나는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다. 쉰 것을 먹고 있었다는 것을 들켰다는 게 부끄러웠고, 괜찮지? 하고 물어가며 동생에게 그걸 먹이고 있었다는 게 부끄러웠고, 지금 이 집에 어른이 없다는 게 이상하게 부끄러웠다. 실은 어느 것을 가장 부끄럽게 여겼는지 지금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꼭 다문 입속에 떡이 뜨겁게 엉겨 있었는데 삼킬 생각도 하지 못하고 다만 주눅이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쉰 떡을 입에 넣었으니 곧 뱉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나기네 어머니는 떡을 우물우물 먹으며 살풍경한 부엌을 둘러보고, 설탕을 입에 묻히고 있는 나나와 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끝까지 떡을 뱉지 않고 삼킨 뒤, 이 떡의 맛이 좋으니 자기네 밥이랑 바꿔 먹자며 나나와 나를 벽 건너편으로 데려갔다. (p.40)



인간은 사회적 동물, 이라고 이 부분을 읽다가 또 생각했다. 쉰 떡 대신 자기네 밥을 덜어줄 수 있는 나기 엄마 때문에. 나기 엄마도 가진 게 별로 없는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쉰 떡을 먹는 어린 아이들에게 밥을 덜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이 사람 때문에, 나나와 소라는 하루 더, 한달 더, 그리고 어른이 될 때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거다. 바깥으로 나가서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추종하는 게 아니어도, 내 옆에 네가, 네 옆에 내가, 우리에게 서로가 있어서 우리는 인류의 멸종을 조금 더 늦출 수 있는 게 아닌가.


'존 카첸바크' 작가의 [어느 미친 사내의 고백]도 떠올랐다. 음식에도 치유의 힘이 있으니, 너의 괴로움에 우리의 음식을 나누어주겠다고 하는 옆집 남자가 나오는 소설. 예전에 썼던 페이퍼에서 그 부분을 가져오겠다.



이 책의 주인공은 수없이 많은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래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이야기는 정신병원에 머무를 당시와 현재, 그 20년 사이를 오락가락 하는데, 현재의 그에게 다시 목소리가 들리고 그래서 괴로워하는 순간, 그의 앞집에 사는 남자가 그의 집 문을 두드린다. 당신 괜찮냐고 물으면서. 그리고 그에게 자신의 아내가 만든 음식을 나누어준다. 

"로지." 재촉하듯 말했지만 화난 목소리는 아니었다. "우리 저녁거리인 쌀과 닭고기 요리를 종이 접시에 담아 페트럴 씨한테 드려. 제대로 된 식사를 하셔야 할 것 같아."
나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게 수줍은 미소를 살짝 건네고 집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산티아고 씨, 정말 친절한 말씀이지만 그럴 필요는...."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페트럴 씨. '아로스 콘 폴로'라고 하죠. 제 고향에서는 그게 모든 문제를 고쳐준답니다. 아플 때는 쌀과 닭을 먹죠. 직장에서 해고됐습니까? 쌀과 닭을 드세요. 마음에 상처를 입었습니까?"
"......쌀과 닭을 먹어야겠죠." 내가 그의 말을 대신 끝맺어주었다.
"백 퍼센트 맞는 말입니다." 우리는 함께 빙그레 웃었다.
 (pp.201-202) 



그리고 사랑.

나 역시 '너무 깊이' 사랑하는 걸 경계하는 사람이고, 상대에게 얽매이는 기분을 줘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너무 깊이 사랑하는 건, 상대를  또 나를 수렁에 빠뜨릴 수가 있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전심전력'이 나로서도 경계되는 까닭이다. 



사랑에 관해서라면 그 정도의 감정이 적당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윽고 괜찮아지는 정도. 헤어지도라도 배신을 당하더라도 어느 한쪽이 불시에 사라지더라도 이윽고 괜찮아, 라고 할 수 있는 정도. 그 정도가 좋습니다. 아기가 생기더라도 아기에게든 모세씨에게든 사랑의 정도는 그 정도, 라고 결심해두었습니다.

애자와 같은 형태의 전심전력, 그것을 나나는 경계하고 있습니다. (p.104)



그러나 전심전력, 이것이 경계한다고 해서 언제나 잘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랑 앞에서는 '헤어지더라도, 배신을 당하더라도, 어느 한쪽이 불시에 사라지더라도' 이윽고 괜찮아, 할 수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려고 했지만, 무릎이 꺾이고 곧 땅바닥에 쿵-찧게 되는 상태가 될 수도 있다. 무너질 수도 있다. 휘청일 수도 있다. '이윽고' 괜찮아지기 몹시 힘들 수 있다. 전심전력, 그것을 경계하지만 그 경계선은 어느 한순간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고, 조금씩 천천히 허물어질 수도 있다. 




나나는 모세씨와 결혼하기로 한다. 그리고 모세씨의 집에 찾아간다. 모세씨의 집엔 화장실이 두 칸이나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실에 빈 요강이 있었다. 그 요강의 쓰임새가 무엇이냐 모세씨에게 물으니 아버지가 밤에 쓰시는 거란다. 화장실에 갈 수 없는 몸 상태인 것도 아니고, 심지어 지척에 화장실이 두 칸이나 되는데 그 요강을 쓰다니. 그렇다면 그 요강을 누가 비우냐 물어보니 그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엄마' 라고 하는 것이다. 



요강요. 모세씨의 어머니가 그것에 관해 좋다거나 싫다거나 말한 적은 없었나요, 라고 묻자 모세씨는 달걀노른자 부스러기가 달라붙은 입을 우물거리며 한동안 나나를 바라보았습니다.

없어요.

없어요?

네.

없어요, 라고 말하는 모세씨에게 모세씨는 궁금한 적 없었나요, 라고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왜 요강을 남의 손으로 비울까, 어머니는 왜 남의 요강을 비울까, 그런 걸 묻고 대답을 듣고 싶었던 적이‥‥‥거기까지 말했을 때, 남이라뇨, 하고 모세씨가 말했습니다. 

남이라고 할 수 있나.

남이 아니에요?

어떻게 남이죠?

남인데.

가족인데.

가족은 남이 아닌가요?

남이 아니죠. 

.

.

.

.

그러면 모세씨는요? 모세씨도 가족인데, 모세씨도 요강을 비워본 적 있나요.

‥‥‥왜 그런 걸 자꾸 물어요?

궁금해서요.

모세씨는 한숨을 쉬면서, 등받이 쪽으로 푹 꺼지듯 기대앉더니 부부잖아요, 라고 말했습니다. 두사람은 부부잖아요, 부부 사이에 그 정도는 있을 수 있는 일 아닌가? 그런 말을 끝으로 이제 이 이야기는 끝, 이라는 듯 탁자 쪽으로 몸을 당기고 왕성하고도 완강하게, 샐러드를 먹었습니다. (p.147-148)



가족이라서 멀쩡한 아버지의 요강을 어머니가 비운다는 말, 그러나 가족인데도 요강을 비우지 않는 아들. 이 집은 대체 어떤 집인가. 나는 다른 사람들의 사랑에 혹은 연애에 혹은 결혼에 '난 반댈세'를 외치고 싶지는 않다. 다 저마다의 사연과 사정이, 외부에서 보았을 때는 절대 알 수 없는 아주 많은 것들이 거기 숨어있다고 생각하므로. 그렇지만 평생 아버지의 요강을 비워온 어머니와, 그 상황에 대해 한 점의 의심이나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 이 가족 구성원들을 보노라니, 나나에게 '이 결혼 반댈세'를 외치고 싶어졌다. '부부'여서 왜 아내가 남편의 요강을 비워야하는가. 왜 남편은 일어나서 화장실에 가지 않는가. 뭐 이런 개같은 경우가 다있는가. 지랄맞은 경우가 아닌가.


사람이 다른 사람과 관계를 유지하는 건, 사소하지만 어떤 한 가지 때문일 것이다. 당신을 내 옆에 두고 혹은 당신을 내 옆에서 밀어내게 하는 사소한 한가지. 마스다 미리는 자신의 만화에서 '음식점에서 무조건 종업원에게 반말하는'애인을 보며 이 남자랑 계속하는 게 옳은가를 고민하는 여자를 보여주는데, 황정은은 멀쩡한 남자가 쓴 요강을 아내가 비워주는 데 아무런 문제의식을 갖지 않은 이 남자, 에 대해 고민하는 나나를 보여준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한가지가 있다면, 아무리 '그럼에도불구하고' 계속가려고 해도 자꾸 그게 눈에 걸린다면, 돌아서야 하지 않을까. 내가 눈 딱 감고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나나는, 요강에 대한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모세를 받아들일 수 없다. 나도 그런 모세를 받아들일 수 없다. 나는, '그런' 모세를 결국은 받아들이지 않는 나나를 응원한다. 



아기는 괜찮아. 이모가 있으니까, 괜찮아. (p.152)



아기는 괜찮다. 이모가 있으니까. 이모가 있다. 괜찮다. 내가 이모여서 잘 안다. 괜찮다. 





도무지 좁혀지지 않는 의견차이-한쪽은 문제가 존재한다고 말하고 다른 한쪽은 니가 문제를 일으키는 거라고 말한다- 때문에, '케스린 스토킷'의 [헬프]에서, 여자는 청혼하는 남자에게 이렇게 말하며 결혼하지 않기로 한다.



"내 생각에 우리는 그 문제를 바로잡으면서 남은 나날을 보내게 될 거야." (2권, p.241) 





아기는 괜찮다. 이모가 있으니까. 그리고 나기 삼촌도 있고. 





어제는 집에 돌아가 혼자 밥을 먹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삼겹살이나 갈비를 먹고 싶었지만, 상추를 사서 씻고 마늘을 까서 썰고 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지나치게 번거로워 포기했다. 누군가 한 명만 내 옆에 있었어도 삼겹살집이나 갈빗집으로 들어가 맛있게 고기를 먹을 수 있었을텐데.

그렇다면 배달해서 치킨을 먹을까, 도 생각했지만 혼자서 도무지 한 마리를 다 먹을 수가 없을텐데. 시켜서 남길까, 그냥? 생각하다 이내 관뒀다. 결국 집에 돌아가 냉장고를 열고 이것저것 꺼내 이렇게 저렇게 밥을 먹었는데, 

아, 이래서 사람이 다른 사람들하고 같이 사는구나 싶었다.


치킨 한 마리 시켜 남기지 않고 먹기 위해,

피자 한 판 시켜 남기지 않고 먹기 위해,

삼겹살집에 거침없이 들어가기 위해.


이래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네가 필요해, 치킨 한마리 먹자. 당신도 내가 필요하지? 피자 한 판 주문하자.



내 옆에 당신이 있으니 괜찮고, 

당신 옆에 내가 있어서 다행인 날들을 우리가 보냈으면 좋겠다.

서로가 서로에게 있어서 충분한 날들.

그렇다면 우리는 인간의 멸종을 최대한 뒤로 미룰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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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 2015-05-20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굿애프터눈입니다. `요강`으로 상징되는 미래의 골칫거리들, 나나가 무사히 피했길 바랍니다. 그건 그렇고 말이에요. 다락방님 1인 1닭이 불가하신가요?! ㅠㅠ 먹는 걸 나누는 건요, 단순한 행위가 아니에요. 맞아요. 내 피와 살이 될 것을 나눈다는 건 그 이상의 것이에요. 관심과 사랑, 이렇다 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지만- 나기네 어머니와 카첸바크의 글에 나오는 이웃집 사내는 그 순간 외로움을 나누고, 인간에게 기대해도 좋을 가장 좋은 것을 나눈게 아닐까요. 영혼의 음식을 나누는 이 페이퍼 참 좋아요.

다락방 2015-05-21 12:39   좋아요 0 | URL
굿애프터눈, 에이바님. 히히.
작은 닭이라면 1인1닭 가능하겠지만 작은닭은 배달을 안해주고 사러 나가야 해서요..배달해주는 닭들은 대체적으로 큰 닭들..1마리에 15,000원 이상..그러면 1인1닭이 불가할것 같다고, 시도해보지 않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시도해보면..성공할 수도 있다는...생각도 드네요. 엣헴.

저렇게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당연히 엄마가 아빠의 요강을 비워야한다고 생각하는 모세씨라면, 나중에 결혼해서 나나에게도 야, 울엄마는 별말없이 했는데? 하며 자연스레 시킬 수도 있겠죠. 너무 끔찍해요. 그리고 가족이라면서 왜 자기는 안하는지..어제도 이 요강 얘기 하면서 친구랑 족발 먹으며 엄청 씹었어요. ㅎㅎ

네, 먹을 것을 나누는 것, 좋죠. 카첸바크의 글 저부분, 읽으면서 뭉클 했었어요. 아 좋아, 했답니다.
저야 늘 에이바님의 명품 페이퍼 보는 재미로 요즘 지내고 있으니, 이정도 페이퍼는 에이바님 페이퍼에 비하면 닭 반마리 쯤인거죠. 으흐흐.

moonnight 2015-05-20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은 목소리로) 고모가 있어도 (나름) 괜찮아요..

저도 카첸바크의 책에서 저 대목 참 뭉클했어요. 쌀과 닭을 먹고 싶은 저녁이네요. ^^

다락방 2015-05-21 12:40   좋아요 0 | URL
문나잇님! 고모가 있어도 당연히 괜찮죠! 게다가 문나잇님 같은 고모라뇨! 행운이죠! >.<

쌀과 닭, 듣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져오죠? 카첸바크 저 소설, 좋았어요. 그냥 카첸바크가 세상을 보는 시선이 저는 좋은 것 같아요.

단발머리 2015-05-20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단에서 뭉클하네요.
다락방님 바로 옆은 아니지만, 다락방님이 거기 있어서, 좋은 이모고, 좋은 상사고, 좋은 누나고, 좋은 사람이라서... 나도 좋아요. 다락방님이 행복해서 나도 좋아요.
인간 멸종 전까지 행복하게 살아요, 우리~~~*^^*

다락방 2015-05-21 12:40   좋아요 1 | URL
제가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은 아니겠지만, 단발머리님께 좋은 사람이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참 잘 사는 삶일 것 같아요. 히히. 우리 즐겁게 잘 지내요, 단발머리님. 맛있는 것 먹고 건강을 유지하면서, 그리고 좋은 책 많이많이 읽으면서 말예요!

아애 2015-05-30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쭈욱 읽어가다가 마지막 구절이 좋아 다시 읽고 다시 읽고 다시 누군가와 같이 읽습니다.

다락방 2015-06-02 17:13   좋아요 0 | URL
같이 읽는 분도 좋아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이 책은 헌사부터 아름답다.



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아주 소중한 존재들이 이 헌사 안에 다 들어가있다. 특히나 나는 '이해하는 남자들'을 빼놓지 않은 것이 너무나 좋다. 이 책을 사게 만든, 그리고 작가로 하여금 글을 쓰게 만든 '가르치려 드는' 남자들이 분명 세상엔 많이 존재하지만, 한쪽 성, 혹은 차별받아왔던 성이 느끼는 부조리함을 '이해하는 남자들'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으므로, 그 존재들을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을 명시하는 건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따금 불쑥 아무 상관없는 일들이나 음모론을 늘어놓는 사람 중에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지만, 내 경험상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자신감이 넘쳐서 정면 대결을 일삼는 사람은 유독 한쪽 성에 많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그리고 다른 여자들을 가르치려 든다.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든 모르든. 어떤 남자들은 그렇다.

여자라면 누구나 내 말을 이해할 것이다. 이런 현상 때문에 여자들은 어느 분야에서든 종종 괴로움을 겪는다. 이런 현상 때문에 여자들은 나서서 말하기를 주저하고, 용감하게 나서서 말하더라도 경청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길거리 성희롱과 마찬가지로 젊은 여자들에게 이 세상은 당신들의 것이 아님을 넌지시 암시함으로써 여자들을 침묵으로 몰아넣는다. 이런 현상 때문에 여자들은 자기불신과 자기절제를 익히게 되는 데 비해 남자들은 근거 없는 과잉 확신을 키운다. (p.15)




이 책에서 말하는 '가르치려는 남자들'은 당연히 '상대가 모르는 것을' 가르쳐주는 친절한 남자들과는 다르다. 나는 상대가 어떤 성을 가지고 있든 대화중에 내가 모르는 것이 나오면 물어보고, 또 상대가 거기에 대해서 설명하면 듣고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또한 내 말에 무언가 잘못된 게 있다고 지적하면 아 그런가? 내가 뭘 잘못 알고 있나? 하고 생각해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자꾸 나를 가르치려는 남자들'은 내가 더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어리석은 듯, 자신의 지식에는 훨씬 미치지 못하며 자신의 생각만큼 깊지 못함을 넌지시 암시하며 얘기하는 남자들을 말한다. 이런 남자들은 도처에 널려있는데, 그러다보니 재작년이었나, 남자사람 L 과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난다. 책에 대한 대화중이었는데, 자세한 얘기는 패스하고, 주변에서 이 분 책 좋아하고 많이 읽으세요, 라고 나를 가리키는데 그의 양어깨에는 거만함이 묵직하게 깔려 있었다. 책이란 무엇이고 문학이란 무엇인지 얘기하는 그에게 나의 의견을 얘기해봤자 귀에 닿지 않았다. 얘기하다 진이 빠져서, 야 이자식아, 내가 책을 읽고 쓴 책도 있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하지 않았다. 나, 다락방이야, 새꺄!




'어떤' 남자들에게는 여자들은 여전히 남성들에 비해 열등하다는, 남성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지기는 힘들다는 생각이 장착되어 있는 것 같다. 본인들이 잘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여성' 앞에서는 죽어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 부류의 남자들. 자신이 뭔가 가르쳐줘야 비로소 여자들이 알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하는 남자들. 이 책을 쓴 저자, '리베카 솔닛'은 바로 그런 경험을 했고, 이 경험들이 자신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많은 여자들이 너무나 많이 겪었던 경험이란 것 때문에 이 책을 쓰게 됐다. 



"자자, 책을 두어권 쓰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나는 대답했다. "사실은 그보단 더 많이 썼습니다."

그는 친구의 일곱살 난 아이에게 플루트를 얼마나 배웠는지 이야기해보라고 구슬리는 사람처럼 물었다. "그래서, 어떤 내용들입니까?"

그때까지 내가 쓴 예닐곱권의 책들이 다룬 주제는 상당히 다채로웠지만, 나는 2003년 그해 여름에 나온 최신작에 관해서만 이야기했다. 『그림자의 강: 에드워드 마이브리지와 기술의 서부시대』(River of Shadows" Edward Muybridge and the Technological Wild West) 라는 책으로, 시공간의 소멸과 일상의 산업화를 다룬 내용이었다.

내가 마이브리지를 언급하자마자 그가 내 말을 잘랐다.

"올해 마이브리지에 관해서 아주 중요한 책이 나왔다는 거 압니까?"

나는 내게 할당된 배역, 순진한 아가씨라는 배역에 워낙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공교롭게도 같은 주제에 관한 다른 책이 동시에 출간되었는데 어째서인지 내가 그걸 놓쳤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기꺼이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었다. 그는 벌써 그 아주 중요한 책에 대해서 떠들기 시작했다. 장광설을 펼치는 남자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거만한 표정으로, 자기 자신의 권위라는 저 멀고 흐릿한 지평선에 지그시 시선을 고정한 얼굴로. 

이 대목에서 잠깐, 내 인생에는 사랑스러운 남자들도 잔뜩 있다는 말을 하고 넘어가야겠다. 내가 지금보다 젊었을 때부터 내 말을 들어주고 나를 격려하고 내 글을 발표해준 일련의 수많은 편집자들, 한량없이 너그러운 남동생, 그리고-펠렌 선생님의 초서(Geoffery Chaucer) 수업에서 배웠던 것이 여태 기억나는 『캔터베리 이야기』속 대학셍에 관한 묘사처럼-"그는 기꺼이 배우고 기꺼이 가르쳤다"라고 표현할 만한 멋진 남자 친구들. 그래도 세상에는 다른 남자들도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 아주 중요한 남자분은 내가 처음부터 그 정체를 알아차렸어야 마땅한 책에 대해서 거만하게 떠들었고, 보다 못한 쌜리가 끼어들어 "그게 바로 이 친구 책입니다" 라고 말했다. 아니, 끼어들려고 시도는 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말을 계속할 뿐이었다. 쌜리가 "그게 바로 이 친구 책이라고요"를 세번인가 네번쯤 말한 뒤에야 그는 말귀를 알아들었고, 그 즉시 꼭 19세기 소설에 나오는 사람처럼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알고 보니 그가 직접 읽은 것은 아니고 몇 달 전에 『뉴욕 타임스 북리뷰』에서 서평만 읽었을 뿐인 그 아주 중요한 책의 저자가 나란 사실은 깔끔한 범주들로 분류되는 그의 세상을 몹시 교란하는 것이었기에, 그는 놀라서 할 말을 잃었다. 여자인 우리는 조신하게도 우리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곳까지 벗어난 뒤에야 웃음을 터뜨렸고, 한번 터진 웃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나는 이런 종류의 사건을 좋아한다. 평소에는 은밀하고 모호한 힘들이 풀밭에서 스르르 기어나와, 소를 삼킨 아나콘다나 카펫에 떨어진 코끼리 똥처럼 우리 눈에 뻔히 들어오고야 마는 순간을. (p.13-14)




이 책을 읽은 누군가가 이 책의 1장이 교과서에 실렸으면 좋겠다고 한 트윗을 봤다. 이 책을 다 읽은 나는 이 책의 1장을 고스란히 이곳에다 옮기고 싶어졌다. 오래전부터 학습되어온, 배경으로 깔려온 '여성의 열등함'은, 애초에 여성에겐 대부분의 기회를 주지 않았던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닌가. 끊임없이 여자들은 그것을 남성들과 공평하게 받아야 한다고 말해왔고, 그래서 여기까지 이르게 된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 있는 것들이 세다. 그것이 남자는 과잉 잘난척을 하게 만들고 여자는 자기 절제를 하게 만든다. 9.11 테러전에 여성 FBI 요원이 수상한 사람의 수색을 요청했지만 상부의 승인을 얻지 못했고, 결국 그가 테러가담자였음이 테러 후에 드러난 사실까지 드러내며,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말한 이런 증후군은 거의 모든 여자들이 매일 치르고 있는 전쟁이며 여성 내면에서도 벌어지는 전쟁이다. 자신이 잉여라는 생각과의 전쟁이고, 침묵하라는 종용과의 전쟁이다. 작가로서 썩 괜찮은 경력을 쌓은 나조차도 (더구나 나는 많은 조사를 통해서 정확하게 바로잡은 사실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전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진 못했다. 인정하건대, 내게도 그 아주 중요한 남자분의 거만한 확신이 그보다 덜 굳건했던 내 자신감을 자빠뜨리도록 허락한 순간이 있지 않은가. (p.16-17)



내가 잘못됐다는 지적을 듣고 '어, 이러면 안되는건가?'라고 돌이켜 보는 것이 확실히 내가 속한 성에서 더 많이 일어나는 것 같다. 그것은 자기 불신과는 다르다. 내가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내가 모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 그것이야말로 앞으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게 아닌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나는 다른 여성들에 비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발언할 권리를 훨씬 많이 인정받아온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나는 약간의 자기불신은 잘못된 사실을 바로잡고 이해하고 귀담아듣고 발전하는 데 좋은 도구라는 사실도 안다-지나친 자기불신은 사람을 마비시키고 철저한 자기확신은 교만한 멍청이를 낳겠지만 말이다. 남성과 여성은 그런 양 극단으로 각각 밀어붙여지고 있지만, 사실 그 사이에는 행복한 중간지대가 있으며, 우리는 모두 서로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그 훈훈한 적도대에서 만나야 한다. (p.17)



저자는 끊임없이 언급한다. 모든 남성이 그렇지는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려는' 남자들, '사랑스러운' 남자들, 이 있다는 사실을.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해왔다. 내 주변에 내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남자들은 사랑스럽고 이해하려는 남자들이라고. 그렇지만 최근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다. 내가 좋아하기 때문에 너무 좋은 시선으로만 보려 했을지도 모르겠다고. 분명 나는 이해하려는 남자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과 대화도 해보고 또 글을 읽어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내 주변에 내가 좋아하고 아끼는 모든 남자들이 다 그렇지는 않다는 것도 역시, 안다. 



신뢰성은 생존의 기본 도구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페미니즘이 무엇이고 왜 필요한지 알아가기 시작하던 시절에 사귀던 남자친구에게 핵물리학자 삼촌이 있었다. 어느 크리스마스에 그 삼촌은 우리에게 핵폭탄 연구자들이 사는 교외의 자기 동네에서 한 이웃집 부인이 한밤중에 알몸으로 집을 뛰쳐나와서는 남편이 자기를 죽이려 한다고 비명을 질러댔다는 이야기를-마치 가볍고 재미난 대화 소재인 것처럼-들려주었다. 나는 물었다. 남편이 진짜로 아내를 죽이려 한 게 아니란 걸 어떻게 아셨어요? 그는 내게 참을성 있게 설명했다. 그 사람들은 점잖은 중산층 가정이었다고, 따라서 남편이 아내를 죽이려 했다는 말은 여자가 남편이 자기를 죽이려 한다고 외치면서 집을 뛰쳐나온 데 대한 설명으로서 믿을 만하지 않다고, 오히려 여자가 정신 나간 거라고 ‥‥‥(p.18)



.............빡친다. 단순히 빡침을 넘어 분노를 느낀다. 여자의 말을 그대로 듣지 않으려는 저 자세, 저 마인드가 어쩌면 그날 한 여자를 죽음으로 이르게 했을런지도 모른다. 점잖은 중산층 가정은 대체 뭘 의미하는가. 왜 알몸으로 뛰쳐나온 여자의 발언은 힘이 없는가. 그러므로 '남자들이 자꾸 나를 가르치려 한다'는 것으로 시작해 이야기가 강간과 성폭력에 이르게 되는 이 글이 결코 비약도 아니고 엉뚱한 길로 빠지는 것도 아니다. 결국 여성의 발언에 대한 '신뢰성'의 문제이니까. 



여성도 생명권, 자유권, 문화와 정치에 관여할 권리를 지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식시키려는 싸움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이 싸움은 가끔은 퍽 암울하다. 내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쓰면서 스스로도 놀란 점은, 처음에는 재미난 일화로 시작한 글이 결국에는 강간과 살인을 이야기하면서 끝났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나는 여성이 사회에서 겪는 사소한 괴로움, 폭력으로 강요된 침묵, 그리고 폭력에 의한 죽음이 모두 하나로 이어진 연속선상의 현상들이라는 사실을 똑똑히 깨달았다(그리고 우리가 여성 혐오와 여성에 대한 폭력을 더 잘 이해하려면 힘의 오용을 총체적으로 바라보아야만 한다. 가정폭력을 강간,살인,성희롱,협박과 별개의 문제로 취급하지 말아야 하고, 온라인과 가정과 직장과 거리를 전부 아울러야 한다. 그렇게 전체를 보아야만 패턴이 뚜렷해진다). (p.31)




제2장에서도 '함께 하는 남자들'에 대한 언급을, 저자는 빠뜨리지 않는다.



대체 남성성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사람들이 남성다움을 상상하는 방식, 남성의 어떤 특질을 칭송하고 장려하는 방식, 소년들에게 폭력이 전수되는 방식에는 뭔가 고심해볼 만한 문제가 있다. 물론 세상에는 사랑스럽고 멋진 남다조 많다. 여성에 대한 전쟁의 이번 판에서 그나마 고무적인 점은 이 문제를 이해하고, 이 문제를 자신들의 문제로 여기고, 일상에서나 온라인에서나 올겨울에 뉴델리에서 쌘프란시스코까지 번졌던 가두행진에서 우리를 위해, 우리와 함께 나선 남자들이 아주 많았다는 점이다.

흥미롭게도 남자들은 점점 더 좋은 동맹이 되어가고 있다. 그런 남자들은 과거에도 소수나마 늘 있었다. 다정함과 온화함에는 남녀가 없으며, 감정이입에도 남녀가 없다. 오늘날 가정폭력 건수는 과거 수십년에 비해 현격하게 낮아졌고(지금도 충격적으로 높기는 하지만), 수많은 남자들이 남성성과 힘에 대한 새로운 개념과 이상을 빚어가고 있다. (p.60)



문득 궁금해졌다. 함께 하는 남자들에 대해 여성들이 고마움을 느끼고 사랑스러움을 느낄때, '가르치려는 남자들' 은 그 남자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까? 그들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자세로 대할까? 또한 남성들과 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여자사람들에게는(니가 옷차림을 조심해야지, 남편 밥상을 니가 꼭 챙겨줘야지 등등), 이 모든 여성들또한 남성들의 주장과 운동이 어떻게 보일까? 그들은 역시 여성들이 살기 좋아졌다고 생각할까? 여성 상위 시대가 됐다고?



이 책의 4장은 내가 읽으면서 가장 많은 깨달음을 얻었던 부분이다. <위협을 칭송하며>라는 제목을 달고 있고 '평등결혼의 진정한 의미' 라는 부제를 또한 달고 있다. 동성 결혼에 대한 이야기다.




게이와 레즈비언은 어떤 특질과 역할이 남성적이거나 여성적인가 하는 질문을 진작부터 제기해왔고, 그런 물음은 이성애자에게도 해방적일 수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동성애자가 결혼을 하면 그에 따라 결혼의 의미가 달라진다. 그들의 결합에는 위계의 전통이 깔려 있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이 현상을 기쁘게 환영했다. 동성결혼을 많이 주재한 한 장로교 목사는 내게 말했다. "캘리포니아에서 동성결혼이 합법하된 뒤, 결혼식을 진행하기에 앞서 동성 커플들을 만나면서 이런 깨달음을 얻었지요. 그들의 관계에는 오래된 가부장적 기본 설정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요. 그건 보는 사람에게도 아름다운 일이었습니다." (p.95-96)



아!!!!!!!!!!!!!!!!!!!!!!!!!!!!!!!!!!!!!!!!!!!!!!!!!!

이건, 내가 미처 생각도 못했던 부분이었다. 자식에게 당연히 아버지의 성을 물려주는 것도, 남편의 밥을 차려주고 설거지를 하며 양육을 하는 역할이 자연스레 여성에게 주어지던 것도, 이 동성결혼에서는 없을 수밖에 없잖은가. 그들은 이 모든 것을 '같이' 해야한다. 결혼이 평등해지는 순간이다.'동성애는 아픈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며 관대한 시선을 자랑하던 사람은 이걸 어떻게 볼까. '평등한' 관계가, 어떻게 '아픈'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단 말이냐!! 위 인용문에서 목사가 '보는 사람에게도 아름다운 일' 이라고 했는데 읽는 내게도 아름다운 일로 여겨졌다. '평등한' 결혼이라면, 할만하지 않은가! 


이외에도 밑줄 그은 부분은, 페이퍼가 너무 길어지므로 밑줄긋기로 밑에 추가하겠다.




주말에는 친구와 과천 서울대공원 산림욕장을 찾았다. 걷는 코스가 약 세시간 정도 걸리는 곳이었는데, 쉬엄쉬엄 슬렁슬렁 걸으려다가 처음에 똭- 눈앞에 펼쳐진 오르막길에 당황했다. 오르막길..힘...들잖아? 여튼, 가는 길에 우리는 까페에 들러 차가운 커피를 주문했다. 알라딘 보틀을 내밀고 나는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친구는 아이스캬라멜라떼를 주문했다. 이미 한 까페에서는 병 입구에 들어가지 않는 얼음을 가진 터라 되돌아 나왔다. 이곳의 얼음은 입구에 들어가긴 했는데, 넣을 때 좀 시간이 걸린다. 게다가 어느 정도 넣어야 되는지도 몰라 커피 안의 얼음은 금방 녹아버렸다. 커피를 붓는데도 속시원히 확- 붓는 게 아니라 좀 시간이 걸린다. 뒤에 사람들 줄도 서있는데, 아 나 이거 민폐 아닌가 싶어지더라. 커피를 받으면서, 병이 작아서 좀 불편하셨죠, 라고 까페 직원에게 물으니, 예쁘게 생긴 여자사람 까페 직원은 



"네, 주둥이가 좁아서요."



라더라. 하하하하하하하하. 주둥이, 란 말에 친구랑 나는 빵터졌다. 





병 안의 얼음은 금방 녹아버렸고, 아이스커피는 아이스커피가 아니었...정말 더럽게 맛없었...커피는 뜨겁거나 차갑거나 그래야 하는데 이건 뭐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맛. 환경 생각한다고 병 가지고 왔다가 커피를 다 마시지도 못하고 버렸다. 하아- 이런 무의미한 삽질들...커피를 사는데 이 병은 딱히 쓸모가 없었다. 그냥 텀블러가 낫다. 예뻐서 한 개 더 받으려다가 관뒀다. 



산림욕장을 걷는데, 우와- 초록초록한 게 정말 좋았다.






사춘기 소녀의 심정으로 길이 아니라는 표지판을 봤을 때는 어쩐지 가고 싶어지더라. 나는 반항하는 소녀!




과천 서울대공원 역에서부터 시작하면 총 네시간여를 걸었고, 우리는 지쳤다. 날씨는 좋았고 사갔던 500미리 물은 다 마신 상황. 내려오자마자 편의점에 들러 맥주를 샀고, 우리는 길에서 걸으며 마셨다. 이것은, 어른의 특권!



(어느 손가락이 제 것일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예전에 순천 정원박람회에 갔을 때도 산책 도중 맥주를 사마시며, 아, 나는 내가 맥주를 마실 수 있다는 게 너무 좋다, 는 말을 친구와 나눈 적이 있었다. 이 맛을 모르고 산다는 건 초큼 슬플 것 같아. 나는 내가 술을 마시고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행복하다. 어른이 되어 좋은 게 있다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19금 영화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들어가 볼 수 있고, 19금 책을 살 수 있고,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아무때나 술을 마실 수 있다!!


그래서 맥주를 마시고 또!! 술집엘 갔다. 우리는 많이 걸어 피곤하고 에너지를 소비했으니, 그걸 다시 채워줘야잖은가!



건배!



토요일에 올린 피쏘 사진은 이 일 뒤였다. 그러니까 나는 이날 저녁 어마어마하고 거대한 폭식..을 한 것이다. 폭식에 과음..다음날 일어나니 눈이 개구리 눈이 되어 있었다. 내 다이어트는..어디에???????????????



금요일 오전, 외근 다녀오면서 여섯살 조카와 통화를 했다. 지난 주말 우리집 왔을 때 위 아래로 검정색 옷을 입었던 조카가 무척 예뻤던 것이 불쑥 생각나, 그 얘기를 했다.


타미야, 며칠전에 타미가 이모네 집에 왔을 때, 위 아래로 검정색 옷 입고 왔잖아, 기억나?


타미는 기억난다고 했고, 나는 


그때 타미 너무너무 예뻤어. 그 말을 해주고 싶었어.


라고 했는데, 타미는 '타미는 싫어' 라고 하는 거다. 그날 제 친할아버지 집에 먼저 들렀던 타미는 위에 다른 색 옷을 하나 더 입고 갔었는데, 우리집에 오던 중 더워 입던 옷중 하나를 벗고나니 위아래 다 검정색 티셔츠와 레깅스로 검정색 차림이 된 것. 근데 그 모습을 보고 제부가 자꾸만 '도찐개찐'이라고 놀렸던 거다. '아빠가 자꾸 도찐개찐이라 놀려서 싫어' 라고 하면서 다시는 그렇게 입지 않겠다는 거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타미 아빠도 타미가 너무 예쁘고 귀여워서 그래.


말해놓고 나니 이게 말이야 소야, 되게 멍청한 발언이란 생각이 드는 거다. 이게 뭐야. 허구헌날 어른들이 뻘소리 해대던거, 그거 잘못됐다고 생각하면서 내가 그러고 있잖아! 다시 주워담고 싶은 말이었다. 예쁘고 귀여워서 놀린다니...아뿔싸, 혀를 깨물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에 타미가 말했다.



예쁘면 예쁘다고 해야지!



아! 타미 말이 맞다. 나는 보이지 않는 전화기 너머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 말이 맞다. 맞아. 그래서 타미에게 말했다.



응, 타미 말이 맞아. 예쁘면 놀리는 게 아니라 예쁘면 예쁘다고 해야해. 



나는 이렇게 여섯살 아이에게 또 하나를 배운다. 아이가 커갈수록 아이와 함께 어른도 커가는 것이구나.





읽지 못한 책이 책장에 수두룩하게 쌓였는데도 또 이렇게 책박스를 받아들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제 친구에게 '야, 그 책이 뭐였지?' 하고 또 읽지 않고 사지 않은 책을 사고자 묻는다. 다른 책을 읽고 있다가 빨리 읽고 싶어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든다]를 읽었는데, 이걸 읽으면서도 또 황정은의 책과 수전 손택의 책이 막 읽고 싶어지고, 어휴, 한 번에 하나씩만 읽을 수 있다는 게 되게 불편하다. 눈이 스무개쯤 달렸으면 원하는 만큼 읽을 수 있을까, 싶다가도, 그래봤자 머리가 하나면 별수 없지 않나 싶어, 그렇다면 머리도 열개쯤 되야되나, 하는 생각을 하릴없이 해본다.



실은 요즘엔 예전만큼 책을 많이 읽지 못하고 있다. 딴 데 정신이 팔려 있는 까닭이다. 나로서는 뭐 어찌할 도리가 없다. 끝.



울프는 텍스트를, 상상력을, 소설 속 인물들을 해방시켰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특히 여성들을 위해서도 그런 자유를 요구했다. 바로 이 점이 울프의 핵심이자 내가 최고로 모범적이라고 여기는 특징이다. 그녀가 칭송했던 해방은 공식적,제도적,이성적 해방이 아니라 익숙한 것, 안전한 것, 알려진 것을 넘어서 좀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해방이었다. 그녀가 요구했던 여성해방은 단순히 남자들이 수행하는 제도적 활동의 일부를 여자들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요즘은 여자들도 다 한다), 지리적 차원에서든 상상력의 차원에서든 자유롭게 쏘다닐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실제적인 형태의 자유와 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울프는 잘 알았다. 그녀는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에서 그런 주장을 펼쳤는데, 흔히 여성에게는 자기만의 방과 돈이 필요하다는 주장으로만 기억되는 그 책에는 예의 유명한 극작가의 불운한 여동생 주디스 셰익스피어의 멋지고 비참한 사연을 통해서 여성에게는 또한 대학과 전세계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담겨 있다. (p.143-144)

"그녀는 자신의 재능을 훈련할 수 없었다. 하물며 술집에서 식사를 하거나 한밤중에 거리를 쏘다닐 수 있었겠는가?" 술집에서의 식사, 한밤중의 거리 산책, 도시의 자유로움은 우리의 자유에 결정적인 요소들이다.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정체성을 잃기 위해서다.(p.144)

여자가 무언가 남자를 힐책하는 말을 하면, 특히 그것이 기득권의 핵심에 놓인 남자에 대한 말이라면, 사람들은 그 발언의 진실성을 의심할 뿐 아니라 그녀에게 그렇게 말할 능력이 있는가, 심지어 권리가 있는가 의심하는 반응을 보인다. 이런 일은 전혀 드물지 않게 벌어진다. 그동안 세대를 막론하고 모든 여자는 자신들이 망상적이고, 헷갈려하고, 타인을 조종하려 들고, 사악하고, 음모론적이고, 선천적으로 부정직하다는 비난을 들어왔다. 가끔은 그 모든 표현들을 동시에.
내가 흥미롭게 느끼는 문제는 왜 사람들이 여성의 말을 일축하려는 충동을 느끼는가, 그리고 그런 비난이 왜 그렇게 자주 여성은 대단히 부조리하거나 히스테릭하다는 비난으로 빠지는가 하는 점이다. 부조리와 히스테리는 여성이 일상적으로 받는 비난이다.(p.154)

내가 좋아하는 비유는 따로 있다. 진보가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표현하는 비유이다. 그것은 바로 판도라의 상자다. 취향에 따라서는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호리병 속 지니라고 해도 좋다. 사람들이 판도라 신화에서 보통 강조하는 대목은 단지를-신들이 판도라에게 준 것은 사실 상자가 아니라 단지였다-엶으로써 그 속에 들어 있던 온갖 재앙을 세상에 퍼뜨린 여자의 위험한 호기심이다.
그런가 하면 단지에 끝까지 남은 것, 즉 희망을 강조할 때도 있다. 그러나 지금 내게 흥미로운 대목은, 아랍 설화의 지니들과 마찬가지로, 판도라가 내보낸 힘들이 도로 상자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혜의 나무에서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이브든 두번 다시 무지한 상태로 돌아가지 않았다. (몇몇 고대 문화는 우리에게 온전한 인간성과 의식을 주었다는 점에서 이브에게 고마워한다.) 한 번 벌어진 일을 돌이킬 수는 없다. (p.207-208)

1973년에 로 대 웨이드(Roe v. Wade)재판으로 연방법원이 낙태를 합법화했을 때-정확히 말하자면 여성에게는 자기 몸에 대한 프라이버시를 지킬 권리가 있으며 그 권리에 의거하면 낙태 금지는 불가능하다고 판결했을 때-여성들이 얻은 생식권을 누군가 도로 빼앗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성에게 결코 빼앗을 수 없는 어떤 권리들이 있다는 생각만큼은 그리 쉽게 없앨 수 없을 것이다. (p.208)

아직 갈 길이 머나멀지만,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멀리 걸어왔는지 돌아본다면 힘이 날 것이다. 가정폭력은 몇십년 전에 페미니스트들이 그 현상을 드러내고 규탄하는 영웅적 노력에 나서기 전에는 대체로 드러나지도 처벌되지도 않는 행동이었다. 요즘은 가정폭력이 경찰에 접수되는 신고 중에서 상당한 비율을 차지하지만, 법 집행으느 아직 대부분의 지역에서 미미한 수중니다. 그래도 남편에게 아내를 때릴 권리가 있다거나 그런 일은 사적인 문제라는 생각이 조만간 되살아날 리는 없다. 지니는 호리병으로 도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혁명이 실제 작동하는 방식이다. 모든 혁명은 무엇보다도 생각의 혁명이다. (p.212)

요즘처럼 죽음과 잔혹행위를 고발하는 이메일이 매일같이 답지하고 아마추어들과 전문가들이 전쟁과 위기를 기록한 자료가 넘치는 시대에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은 여전히 많다. 정권들은 갖은 애를 써서 시체와 죄수와 범죄와 부패를 숨긴다. 그럼에도,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신경을 쓸지도 모른다. (p.129-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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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책을 읽는다는 기쁨
    from 마지막 키스 2015-05-20 10:43 
    이 책을 사서 읽을거란 말에 회사동료 e 양이 다 읽고 얘기해달라 했었다. 어제 점심시간, 나는 이 책을 다 읽었다며 이 책에 대한 이야길 해주었다. 애초에 이 책을 왜 쓰게 되었는지, 남자들이 여자들의 말을 귀기울여듣지 않는 사례들을 열거하며. 그러다 결국 중동에선 그게 더 심하게 나타나고, 그것이 강간으로 글을 맺게 했다며 이야기해 주었다. 결국 일상적인 유치한 일 하나가 글을 맺을 때는 강간을 언급하게 돼. 여성의 이런 상황이 좀더 극단적으로 드러
 
 
다다 2015-05-18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왜 한쪽 손톱만 깎고 그러세요? 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손톱만 깎으면 친구 손톱이랑 거의 똑같다고 이야기 하고 싶으신가요?
오 그렇다면 진짜 천생연분인데......아무튼, 예쁘네요. 두 분.
타미한테 배웠어요. 예쁘면 놀리지 말고 예쁘다고 해야한다고요. 흐응.

다락방 2015-05-18 14:32   좋아요 0 | URL
이 댓글 읽고 제 손톱 한 번 보고..
음, 손톱 좀 잘라야겠군
생각했어요. 기네요, 손톱이. 잘라야겠어요.

마노아 2015-05-18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왼손 스퀘어 손톱이요~ ^^

다락방 2015-05-18 14:32   좋아요 0 | URL
딩동댕~ ㅎㅎㅎㅎㅎ

AgalmA 2015-05-18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핵물리학자 삼촌 일화 들으니 그 삼촌께 패디 콘시딘 <디어 한나>와 김태용 <만추> 영화를 좀 권해보고 싶네요. 연구하시느라 영화 잘 안 보실테니 dvd를 갖다 안겨드려야 되려나요;중산층은 그럴 리 없어 처럼 이건 다 영화지 하실까봐 것도 걱정...핵폭탄 연구가들이 사는 마을이라는 게 실제 은유적이기도 하단 생각이 드네요.

다락방 2015-05-18 14:34   좋아요 0 | URL
언급하신 영화 두 편 모두 제가 본 작품들이네요. 디어 한나에서 초반 남자의 폭력성을 제가 굉장히 조마조마해하며 봤던 기억이 나요. 그리고 여자의 남편까지요.
말씀하신대로 그런 영화를 본다고 해도 워낙 확고히 자리잡은 인식이다보니 `이건 다 영화지` 하고 들은 척도 안할 것 같아요. -_-

유부만두 2015-05-18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읽으면서 맞아 맞아, 추임새를 넣게 되네요. ... 다락방님도 다람쥐과 인듯~ 성인 다람쥐 ㅋ (어감이;;;)

다락방 2015-05-18 14:39   좋아요 1 | URL
안그래도 이 책 후기 기다리시는 것 같아서 부랴부랴 올렸어요, 유부만두님.
그런데 다람쥐과의 사람이란..뭔가요? 어떤 사람을 뜻하나요? 인터넷상 용어인가요? 아님 개그프로그램에 나온 캐릭터인가요? 네이버에 다람쥐 검색했더니 그냥 동물 다람쥐만 수두룩하게 나와서... ㅋㅋㅋㅋㅋ


아! 유부만두님 페이퍼에 쓰신 것처럼 책을 막 모아들여서 그렇게 말씀하신 건가요? 이제 이해 되고 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레와 2015-05-18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 보니깐 이번 보틀은 안 갖고 싶네요. ㅎㅎㅎㅎㅎㅎㅎㅎ

`함께하는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나도 동감해요. 그걸 계속 말해준다니 저자에게 고맙네요.


타미는 정말, 예쁘다!

다락방 2015-05-19 09:19   좋아요 0 | URL
제게 이번 보틀은 그다지 쓸모가 없네요. 하나 받아 한 번 써보고 그냥 집에 있어요. 예쁘긴 겁나 예쁜데, 저는 예쁜 것 만으로는 그다지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 ㅎㅎ

타미는 정말, 예쁘죠! 제 이모를 닮았지 뭡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LAYLA 2015-05-19 0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유행하는 유자소주 드셔보셨어요? 그걸 마시고서..날 잡고 이걸로 끝장을 봐야겠구나 싶었거든요. 락방님도 좋아하시지 않을까 싶어요!!

아무개 2015-05-19 08:27   좋아요 0 | URL
유자소주? 어디 어디 팝니까????

^^:::::::

다락방 2015-05-19 09:21   좋아요 0 | URL
아뇨, 유자소주 안마셔봤는데요. 그거 어때요? 전 `맛있는` 술은 별로 안좋아하거든요. 쓴 게 좋음요 ㅋㅋ 근데 궁금하긴 엄청 궁금하네요, 유자소주 ㅋㅋㅋㅋㅋ 조만간 마셔보게 되면 또 후기를 올릴게요. ㅋㅋㅋㅋㅋㅋㅋ

아무개 2015-05-19 08: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부장제가 사라지지 않는한 평등한 결혼생활이란 불가능.
뭐 물론 조금씩 조금씩 `함께하는 남자들`이 늘어날수는 있겠지만요.


다락님이 주신 카뮈보틀을 운동하면서 잘 사용하고 있는지라
이번 보틀이 무시무시하게 이뻐도 꾹 참고 구매 안했는데
잘한듯ㅋㅋㅋ

회사에서 알라딘을 열수 있는 방법을 오늘 아침에 알아냈어요.
아 진짜 좋다.
데이타도 없고 와이파이도 안되고
회사컴으로 알라딘도 안열려서 답답해 죽는줄 알았는데 ^^::::::::

다락방 2015-05-19 09:24   좋아요 1 | URL
책 읽는 건 너무 좋아요, 아무개님.
저는 평등한 결혼이란 게 애초에 되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동성결혼으로 생각해보니 똭- 답이 나오는 거에요. 거기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동성결혼, 그 평등함이라면 `함께 사는 것`이 괜찮을 것 같아요. 좋을것 같기까지 합니다. 집 안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우리가 함께 해나가고 함께 고민하는 거잖아요. 물론 그러면서 자연스레 서로 역할 분담은 되겠지만요. 그러나 그 역할 분담은 너는 남자니까 이거하고 여자니까 이거하고, 이런 식이 되지 않을거라 생각하니, 좋을것 같아요. 이런걸 책을 읽다 알았네요, 제가. 아, 너무 좋아요!


회사에서 알라딘 열 수 있는 방법 알아냈으니 이제 자주 들어오는 겁니까? 네? ㅋㅋㅋㅋㅋ

마태우스 2015-05-19 23: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야말로 요즘 책을 많이 읽지 못하고 있어요. 흑흑. 한달에 한편 독후감 쓰는 것도 뭘로 써야 할지 모르겠다는..ㅠㅠ 삶을 재조정해야 되는데 그게 잘 안됩니다. 그래도 책은 꾸준히 사고 있답니다. 님께서 언급하신 책도 대번에 샀지요. 제가 딱 좋아하는 스타일... 특히 저 대목은 정말 인상적이지요. 여자는 진지한 책의 저자가 될 수 없다는 그런 인식을 가진 남자들이 아주 많지요. 배송이 되고 있을 텐데 오면 잽싸게 그것부터 읽을 생각입니다. 님의 리뷰는 언제나 유쾌하네요^^ 참참, 전 요즘 글이 잘 안써져요. 경향 칼럼도 너무 글을 못쓰는 거 같아 그만둔다고 했답니다. 물론 실패로 끝났지만, 글 때문에 고민하는 게 정말 오랜만이네요. 10년만인 것 같다는.... (이렇게 말하면 재수없으려냐요 ㅠㅠ) 제가 댓글을 잘 못남겨도 제 마음은 아시죠? 님 팬이라는 거.

다락방 2015-05-21 12:56   좋아요 1 | URL
저는 다시 열심히 책을 읽어보자 라고 생각은 하는데 집에 가면 자기 바빠요, 마태우스님 ㅠㅠ

마태우스님이 이 책을 읽고 쓰실 리뷰가 아주 많이 기대돼요. 꼭 리뷰 써주세요, 마태우스님. 어쩌면 이 책을 읽고 떠오르는 생각들이 많아져서 다시 독후감 쓰는데 열정이 발휘될 지도 모르겠어요. 아무쪼록 그렇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글 때문에 고민하는 시간이 찾아왔다면, 그 시간을 보내고 나면 또 더 나은 글쟁이가 되어있지 않을까요, 마태우스님? 마태우스님이라면 충분히 그러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도 님의 팬이고, 님의 글을 좋아합니다. 계속 응원할거에요. 그러니 앞으로도 좋은 글 계속 써주세요, 마태우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