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착오적 역사해석에서 탈피하라"

이슈 : 역사전쟁 부르는 '韓中 고구려사 논쟁'에 부쳐

나는 최근 한국과 중국 사이의 고구려를 둘러싼 '역사전쟁'의 일촉즉발의 위기를 지켜보면서, 역사는 과연 인간의 삶을 위해 유용한가 유해한가를 물었던 니체의 문제제기를 다시 생각해 본다. 이렇게 내가 반시대적 고찰을 하는 이유는 네티즌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역사 찾기 운동'에 학계와 정치계가 가세하여 범국민적 운동으로 발전하는 것이 과연 문제해결의 올바른 방향인가에 대해 회의하기 때문이다.

고구려라는 과거가 현재의 우리와 중국에게 왜 중요한가. 고구려 역사를 둘러 싼 한국과 중국 사이의 역사논쟁의 진의는 과거의 인식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위한 권력투쟁이다. 우리는 이 싸움에서 과연 승리할 수 있는가. 결론적으로 말해, 나는 이 물음을 역사적 패배주의가 아니라 역사전쟁으로 치닫고 있는 현 사태의 위기를 성찰해 볼 목적으로 제기한다.

지정학적으로 중국과 일본 사이에 위치해 있는 한국의 역사는 중국사와 일본사와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졌다. 한국사에서 근대의 기점은 한국사의 결정적인 영향력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바뀌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런 한국사의 구조가 얼마 전 일어났던 일본 새 역사교과서 파동의 근본원인이다. 이번의 고구려사를 둘러싼 중국과의 역사분쟁 역시 근대이전 한국사에서 중국이라는 뇌관을 드러내는 예정된 문제라 할 수 있다. 역사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한 전자보다는 후자의 문제가 훨씬 더 복잡하고 심각하다.

역사에 대한 반시대적 고찰

일본과의 역사청산은 피해의 당사자가 생존해 있는 현재의 문제이지만, 고구려사는 까마득한 고대의 문제다. 따라서 우리는 고구려를 중국사에 귀속시키려는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에 대한 대응을 일본 새 역사교과서와 같은 방식으로 하는 것은 별 효과가 없다. 요컨대 민족이 형성되기 이전의 역사를 민족사의 관점에서 중국학계에 반격을 가하는 것은 결론 없는 소모전으로 끝날 가능성이 많다.

물론 이러한 소모전의 부수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는 있다. 정치계는 일본 새 역사교과서 파동 때처럼 국민통합의 계기로 삼을 수 있고, 한국사학계는 침체된 고구려사를 일으키는 효과를 바란다. 하지만 중국과 전면적인 역사전쟁을 벌일 때 발생하는 손실은 없는가. 정부는 겉으로는 중국에 강력 대응한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중국 정부를 자극하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중국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중국과의 역사전쟁에서 우위를 점하겠다는 모순적인 생각으로 정부가 중국정부와 한국국민에게 이중적인 태도를 취한다면 궁극적으로 누가 피해의 당사자가 될 것인가.

우리는 중국과의 전면적인 역사전쟁을 벌이기에 앞서 손익계산부터 해봐야 한다.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불리하다. 첫째는 고구려 대부분의 유적이 현재 중국 영토 내에 있다는 것이고, 둘째 남한에게는 북한이라는 또 다른 한국사의 주체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남한 사학계에서 고구려사 연구가 침체된 주 요인은 연구대상의 현장이 북한이고, 또 고구려사는 북한정권의 정통성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에 연구가 기피되었다는 점이다. 국제적인 현실정치에서 북한이 중국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에서 고구려사 문제로 남북이 공조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연구 인력과 재정에 있어서도 우리는 중국에 비해 열세다.

그렇다면 우리는 중국의 주장을 그냥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나는 우리의 현실적인 대응전략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한국사가 일본사와 중국사와 충돌하는 것은 한국사를 한민족의 역사로 보는 기존 한국사의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했다고 본다. 따라서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역사를 '국사'로 보는 민족주의 역사학의 해체이지, 그것의 강화는 아니다. 우리는 지금의 '국사'의 위기를 한국사를 재구성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한국사를 한민족의 역사로 선험적으로 설정하는 '국사'의 해체가 요청된다.

필자가 아는 한, '국사'로 씌어진 종래의 한국사는 근대 이전 한국사에서 중국이란 무엇이며 근대 이후 일본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민족을 코드로 해서 과거의 기억과 망각을 결정하는 역사서술이 이런 '국사'를 낳음으로써, 고구려사를 고구려사 자체로 인식하는 것 대신에 한국사인가 중국사인가의 역사주권 싸움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현사태를 초래했다. 물론 현사태 발생의 직접적인 책임은 전근대적인 중화사상을 근대적인 중화민족주의로 변용시키는 데 복무하는 중국 역사학에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서양의 고대와 중세에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가 아닌 로마제국과 프랑크 왕국이 있었던 것처럼, 고구려의 역사무대는 오늘날의 용어로 동아시아이다. 만약 역사적 비교가 가능하다면, 서양사에서 전근대의 동아시아에 해당하는 것이 유럽이다. 유럽은 오래전부터 있었던 '실체'가 아니라 필요에 의해 발명된 상상의 공동체이다. 헤로도토스에게 유럽은 단순한 지리적 명칭이었으며, 보편적 제국으로서 로마의 멸망 이후 유럽이란 그것을 대신하는 기독교세계였다.

17-18세기 구체제 시대에서 유럽은 세력균형의 원리로 묶어지는 왕국들의 총체였으며, 19세기 민족주의 시대에는 국민국가들의 집합체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그러다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유럽은 민족주의로 고양된 국민국가들 간의 전쟁터였다가, 제 2차 세계대전 종식 이후에는 그에 대한 반성으로 국민국가적 틀을 넘어서는 유럽공동체의 이념이 재발견됐다. 특히 독일통일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이후 유럽은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미래의 프로젝트로 추진되고 있으며, 이 같은 맥락에서 유럽 각국의 역사학은 '국사' 위주의 근대 역사학을 지양하는 유럽사를 공동으로 기획하고 있다.

민족이라는 기원의 망상에서 탈피해야

서양 중세에서 유럽이 기독교를 토대로 한 보편제국이었다면, 근대 이전 동양의 보편질서는 '중화'이다. 동양 고대에서 고구려 대 수·당의 전쟁은 이러한 중화질서 성립과정의 일환였다. 고구려 멸망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전쟁들은 동북아 일대에서 독자적 생존권을 보전하고 패권을 추구했던 고구려의 대륙정책과 중국 중심의 일원적 질서로 주변의 세력들을 포섭하고자 했던 수· 당의 세계정책의 충돌로 일어났던 동아시아 전쟁이었지, 결코 민족간의 전쟁이 아녔다. 7세기 나당 연합군에게 고구려가 패배했던 것의 결과로 중화질서가 성립했으며, 근대에서 한·중·일의 국민국가의 형성은 이러한 중화질서의 해체를 전제로 했다.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가 한국 언론에 알려지면서 네티즌을 중심으로 "제 2 나당 전쟁, 중국과의 역사전쟁이 이제부터 시작이다"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담론에서 신라는 한국인가 중국인가. 이렇게 근대의 민족 중심의 역사관에 의거해서 전근대 과거의 기억과 망각을 자의적으로 재단하는 것은 시대착오다. 우리 삶의 현실은 날로 세계화로 나가고 있는데, 역사를 보는 눈은 아직 민족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의 책임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오늘의 한국사 연구자들에게 그 책임은 없는가.

이제는 민족이라는 기원의 망상에서 탈피해 세계 속의 한국사의 시각을 가져야 한다. 이 같은 관점에서 동아시아 관점에서의 한국사 재구성이 필요하며, 고구려사를 둘러싼 중국과의 역사논쟁이 '국사'의 위기가 아니라 한국사와 세계사를 통합하는 역사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김기봉 / 경기대, 서양사 (교수신문, 2003/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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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달프 2003-12-19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것은 학문이 아니다. 두 개의 정치가 충돌하는 것이다. 모름지기 학자라면 하나의 정치가 도전해 올 때 또 다른 정치로 맞짱을 뜨도록 부추켜서는 안된다.

부빠기 2004-01-05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거 퍼가도 될까요??
 


Mystic River

 

방향은 이미 정해져 있고, 그 일방통행로 속에서 인간은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한다. 이런 인간에게 남는 인생이란 결국 자기 합리화와 회피적 망각 뿐이다. 똑같은 상황이 끊임없이 돌아오고, 그 앞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은 스스로 무뎌져야 한다.

여기서 人間史는 성숙이나 자각이 아니라 억압된 회한과 무감각의 무한 축적으로 귀결된다. 삶은 상표만 달리 한 채, 끝도 없이 동일한 폐기물로 쌓이기만 하는, 쓰레기 하치장의 산과 같다. 난지도 위에 꽃길과 공원을 만들듯이 우리는 단지 포장만 바꿈으로써 인생을 그야말로 '견딘다.' 그리고 이 영화는 이렇게 잘 견딘다는 사실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마지막 퍼레이드 장면에서 보여준다. 견디는 일을 퍼레이드로 바꿀 수 있는 능력, 악몽을 길몽으로 변화시키는 이 놀라운 능력 덕에 인간은 공룡 이후 지구에서 가장 번창하는 종이 되었다.

영화의 핵심은 세 명 중 한 명에 의해 차의 빈 자리는 꼭 채워져야 되고, 그 한 명은 자기 이름을 다 쓸 수 없게 되어 있다는 (일종의 섭리와 같은) 구도인 듯 하다. 그 구도에 인간이 손을 댈 구석은 어디에도 없다. 영화에는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차원이 밑에서부터 발목을 부여잡고 있고, 위로부터 어깨를 내리누르고 있다. 그리고 데이브가 죽기 전에 남긴 마지막 말처럼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채 삶은 중단된다. 그가 죽은 후에도 어느 누구에게도  開明은 뒤따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나 어렴풋이 알지만 스스로 무시할 뿐이다. 아내의 품에 안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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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달프 2003-12-18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찬욱의 '올드보이'든, 이스트우드의 '미스틱리버'든 모두 호흐의 <어머니와 아이들>이란 그림 속에서 창밖을 응시한 채 뒤돌아선 아이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소위 걸작이라고 뇌까려지는 것들은 대개 안보이게 초월적이다. 현실을 맹렬하게든, 나태하게든 어떤 방식으로 살아도 그걸 극한으로 몰아붙이면 끝이 보이고 결국 낭떠러지 앞에서 망연자실해진다. 이런 태도를 '종교적' 태도라고 봐야 할까? 아마도 종교적인 것이란 스파크처럼 번쩍하다 사라지는 것이리라. 사람이 손대면 개구리가 된다.???

간달프 2003-12-18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에서 한 남자는 범죄자로, 다른 한 사람은 형사로 나온다. 마치 <반지의 제왕>에서 인간 세계를 의미하는 Middle Earth가 천사와 악마가 공존하는 공간이듯 그 둘은 서로를 적대적 보충물로 삼는 하나의 (온전해 보이는) 세계, 즉 인간의 세계다. 그런데 그 세계엔 구멍이 있다. <반지의 제왕>에서는 그것이 '절대반지'로, <미스틱 리버>에서는 야구공을 삼킨 하수구 구멍으로 보인다. 이 구멍은 세상의 온전함을 위협하는 외부로부터의 침입이다.

간달프 2003-12-18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식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미국의 역사에 대한 비극적 알레고리같은 것으로? 제 이름을 다 쓰지 못하고 잊혀진 미국 역사 속의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로... 공동체적 봉합(surture) 행사로서의 퍼레이드, 데이브를 납치한 '헨리'와 '조지'라는 이름이 주는 능글맞음, 범죄와 정부(형사)의 공모적 뉘앙스, 모든 죄악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주는, 징그러운 family value... 가히 "국가의 탄생" 수준이다...
 

이렇게 네덜란드 회화에서 위상의 전복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그 전복을 야기한 당사자들도 아마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 같다. [...] 붓의 힘 덕택에 그들은 사물들이 미학적 찬미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윤리적 찬미의 대상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었다. 일상생활의 재현을 가능케 했던 애초의 도덕적 명분은 이제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일상적 미덕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화가들은 이제 그 미덕을 규정하는 입법자가 된다. 회화는 이제 아름다움을 반영하는 거울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환히 드러내주는 빛의 원천이 된 것이다.

 츠베탕 토도로프, <일상 예찬>, 이은진 역 (뿌리와이파리,2003),  p.167

이렇게 네델란드 일상생활의 회화를 일정한 시기 속에 가두어 살펴보는 것은 그 회화를 평가절하하기는커녕 오히려 무언가 예외적인 것이 특정한 시기에 일어났다는 것과 그 현상을 우리가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인간에 의한 창작의 역사, 즉 예술, 문학 또는 사상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유난히 축복하고  싶어지는 순간들이 있다. 그런 순간에 인류는 자신에 대한 새로운 비전으로 더욱 풍요로워지고, 이어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다. 이런 유형의 순간들을 외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표시는, 평균적인 재능을 가진 화가들마저 걸작을 만들어내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와 프랑스 인상주의 회화가 그 두 가지 예고, 17세기 네델란드 회화가 또 다른 예다. 이 시기에 역사적, 지리적 상황과 거기서 생겨나는 창작물간에 완벽한 등식이 이루어지고 형태와 의미 간에 완벽한 등식이 이루어진다. 화가들은 이 사실을 모르는 채 이런 등식을 활용하게 된다.(그리고 이 등식은 또, 나타날 때만큼이나 묘연하게 사라져버린다.) 그저 배우기만 하면 얻어지는 순수한 기교나 비결이 문제가 아니라, 이런 시기에는 무언가 좀더 본질적인 것, 세계와 삶에 대한 해석 자체와 연관이 있는 그 어떤 것이 작용한다. 이 현상은 거장다운 예술적 솜씨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적 지혜의 문제다. 비록 인간적 지혜가 예술적 형태를 통해서만 표현된다고 할지라도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그림이 전하는 메시지를 해독하거나 적어도 그 비밀을 건드려보기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축복받은 순간들은 언제나 인류에게 소중하기 때문이다.

 같은 책,  p.215-216

 Hooch,Pieter de <어머니와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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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달프 2004-01-10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도로프가 17세기 네덜란드 장르화를 "예외적인" "순간"으로 명명하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에게 그것은 일관된 발전 과정의 한 단계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순간적인 각성이 아닐까? 그것은 영구적 완성이 아니라 이행의 순간이다. 시대와 인간과 예술이 한 데 모여 순간 스파크를 일으키고 사라진다. 눈 뜬 자 볼 것이고 눈 감은 자 지나칠 뿐이다.
 


올드보이

 

우진(유지태 분)이 오대수(최민식 분)에게 궁극적으로 일깨우고자 했던 것은 오대수가 자신의 일을 '기억조차 못한다'는 사실, '인지 불가능한 상태', '무지'였다. 왜 기억하지 못했을까? 왜 그리 무감각했을까? 이유는 그가 그의 혀를 놀렸을때 그는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자리를 대신 채운 것은 (질서와 안녕을 보지하려는) 익명적이고 폭력적인 '사회'였다. 대수가 평범한 소시민으로 그려지는 것은 그런 이유때문일 것이다. 평범할수록 진부할수록 '사회'의 무의식적 대리자(편재하는 경찰관)가 된다. 그리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타자에게 가공할 상처를 입힌다.

따라서 우진은 그에게 처방을 내린다. 1단계는 대수를 치명적인 사회의 오염으로부터 격리시키는 것, 2단계는 사회에 의해 오염된 대수의 머릿 속을 복수심으로 말끔히 청소하게 하는 것(그래서 감금되기 전의 대수와 감금 후의 대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순수한 복수심의 화신이자 사회의 그물망 밖의 존재...) 3단계는 그를 다시 사회("더 넓은 감옥")로 돌려보낸 후 우진과 유사한 경험(근친상간)을 겪어보게 한다. 4단계는 자신의 과거를 '정말로' 자각하고 스스로 혀를 자르고 자기 딸을 애인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일이다.

혀를 자르는 부분은 외디푸스 신화를 연상시키지만 방향은 정반대다. 외디푸스는 자기 눈을 찌르고 어머니-아내를 떠나지만, 오대수는 자기 혀를 자르고 딸-아내에게로 돌아간다. 외디푸스 신화는 아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사회/가족제는 보호된 후 모두가 불행해지지만, <올드보이>에서는 복수가 완료되면서 사회/가족제는 파괴된 후 모두가 행복해진다.

르네 지라르의 개념틀을 빌자면, <올드보이>에는 두 가지 폭력이 있다. 순수한 폭력과 불순한 폭력... 오대수의 혀는 순수한 폭력이다. 이 폭력은 사회를 보호하는 폭력으로 사회 구성원의 '무지', '인지불능'을 조건으로 행해진다. 부주의함은 이 폭력의 핵심적 성격이다. 물론 당하는 놈에게는 그냥 말 그대로 '폭력'이다. 우진의 누나가 죽어야 했던 것처럼... 우진이 대수에게 가하는 폭력은 불순한 폭력이다. 순수한 폭력은 무지의 상태에서, 사회(질서)의 정당화를 통해 익명적으로 행해진다. 반면 불순한 폭력은 주인이 확실하며 사회/질서에 대해 위협적이다.

복수심은 불순한 폭력이다. 그것은 법이나 공권력과 같은 것에 의존해서 해소되지 않는다. 그것은 대수가 산낙지를 질겅질겅 씹는 일, 우진의 뼈와 살을 아작아작 씹어먹어 버리겠다는 충동에 가깝다. 복수심으로 이빠이 충전된 생명력...  여기서 왠지 모를 희열을 느끼는 나는 변태일까? 복수가 완수되면 생명력도 고갈되고 삶도 지속될 수 없다. 우진은 자살한다. 대신, 죽으면서 자신을 닮은 種을 하나 복제하고 떠난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대수에게 우진은 은인이다. 진부하고 흐리멍텅하며 미분화된 상태의 대수라는 '인간'을, 눈을 부라리며 생명력으로 가득찬 '야수'로 업그레이드시킨다. 퇴화를 통한 진화일까? 혹시 이 영화 해피엔딩일까?

 


고야, <1808년 5월 3일>, "총을 쏘는 프랑스군의 뒷모습에는 얼굴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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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달프 2003-12-01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민의 무기는 익명적 다수성이고 귀족의 무기는 동원적 전능성이다. 평민은 다수의 그림자 속으로 자기 얼굴을 숨기고, 귀족은 자기 얼굴에 잔인함과 자애함의 이중가면을 씌운다. 귀족의 도덕은 폐쇄적이고 근친적이다. 반면 평민의 도덕은 번식적이다. 평민의 힘은 번식과 확대를 통해 강화되지만, 귀족의 힘은 독점과 집중을 통해 강화된다. 대수와 우진의 싸움은 평민의 도덕과 귀족의 도덕 사이의 싸움이기도 하다.

간달프 2004-01-10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찬욱 영화에는 공통적으로 염세적이다. 인간은 본디 착한데 사회는 인간을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사회가 만악의 근원이다. 그리고 그 만악의 근원을 파괴하려는 자 조차도 그 악에 발목이 잡혀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착하든 악하든 무슨 짓을 하든 숙명적으로 자멸한다. 여기서 박찬욱의 위치는? 혹시 스스로 선지자연하는 것인가? 말세를 전파한 요한 흉내내기인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통해 어떻게 해서 다음과 같은 일이 생기는지 이제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즉 우리가 비록 의무라는 개념 아래서 법칙에 굴종하는 것을 생각하기는 하지만, 동시에 그 의무라는 개념 때문에 자기의 의무를 완수하는 인격에 대해 어떤 숭고함과 존엄성을 생각하게 되는 이유를 말이다. 인격이 도덕법칙에 종속되어 있는 한 인격에 아무런 숭고함이 없지만, 동시에 인격이 바로 그 '법칙을 주고' 있으며 오직 그 때문에[스스로 법칙을 주고 있기 때문에] 법칙에 종속되어 있는 한 분명 숭고함이 있는 것이다. 또한 앞에서 보여주었듯이, 공포나 경향성이 아니라 오직 법칙에 대한 존경심만이 행위의 도덕적인 가치를 줄 수 있는 동기이다. 우리 자신의 의지가 자기의 준칙에 의해 가능한 보편적인 법칙을 주어야 한다는 조건을 지킬 때에만, 우리에게 이념으로서 가능한 의지가 존경심의 원래 대상이다. 그래서 인간의 존엄성은 보편적으로 법칙을 줄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다만 그 자신도 그 '법칙주기'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

 임마뉴엘 칸트,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놓기> 이원봉 옮김(책세상, 2002)  p.10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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