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는 한국.중국과는 별개의 국가였다”


요동사

 

중국의 고구려사 귀속 움직임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해를 넘기며 거세지고 있다. 지난 1월 16~18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세계유산검토위원회가 북한과 중국의 고구려 유적을 세계유산으로 함께 지정하도록 유네스코에 권고하는 결정을 내렸지만, 논란이 그칠 기세가 아니다.

‘고구려를 빼앗길 수 없다’는 감정이 전국민적 규탄 분위기를 북돋우는 배경이다. 대다수 국민은 고구려사가 한국사이지 중국사가 아니며, 고구려사를 중국사라고 인정하는 순간 한국사에서 사라지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현재가 아닌 고대에도 ‘고구려=한민족 국가=한국’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수 있을까. 고구려사는 과연 한국사일까, 혹은 고구려는 과연 한국인가? 동아시아 역사를 전공한 김한규 교수(서강대·동양사)는 이렇게 도발적이고, 지금껏 한국인 대부분이 한 번도 의문을 가져보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김교수는 곧 출간될 <요동사(遼東史)>(문학과지성사)에서, 현재의 고구려사 논쟁을 원점에서부터 뒤엎는 충격적인 역사 해석을 선보이고 있다. 그에 따르면, 고대 동아시아에는 현재의 근대 국민국가적 시각으로 바라본 고대사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그를 만나, <요동사>의 내용 중 고구려사 대목을 정리했다.

요동사란 말 그대로 요동 지역의 역사를 일컫는다. 김한규 교수는, 지금은 독립된 국가로서 존재하지 않는 요동의 역사를 구명하기 위해 ‘국가’와는 다른 ‘역사공동체’ 개념을 사용했다.

현재 요동(랴오둥 遼東)이라고 하면 대체로 랴오허(遼河)를 중심으로 한 랴오닝성(遼寧省) 일대를 말하지만, 김교수가 말하는 요동은 범위가 훨씬 넓다. 완리장청(萬里長城)이 끝나는 산하이관(山海關) 이북에서 시작해서 지금 중국의 랴오닝성과 지린성(吉林省) 일대, 그리고 한반도 북부 일대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한국과 일본에서 만주라 부르고, 중국에서 동북이라 부르는 지역이다(김교수는 중국에서 쓰는 ‘동북’이나 일본이 정치적으로 확산한 ‘만주’라는 말보다 주나라 때부터 문헌에서 써왔던 요동이라는 용어가 이 지역의 정체성을 표현하기 적합한 명칭이라고 주장한다).

청(淸)이 3백 년간 중국을 지배하면서 중국과 융합되기 전까지, 전통 시대 중국인들은 산하이관 장성 북쪽 지역을 중국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한국도 마찬가지.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대동강 이북이나 함경도 등 한반도 북쪽 지역에 대해서는 ‘우리 땅’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요동은 한국의 일부도 아니고 중국의 일부도 아닌, 제3의 영역이었다. 이처럼 고대 이래 동아시아에는 황허(黃河) 유역의 중국 역사공동체나 한반도 중부 이남의 한국 역사공동체와는 다른 제3의 역사공동체가 있었다.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뿐 아니라, 요·금·원(몽골)·청이 이 지역에서 발원한 국가들이다.

이들 나라 중에는 순수한 요동 국가도 있었지만, 요동을 기반으로 성장해서 한반도나 중국 대륙으로 세력을 확산해 통합 국가가 된 나라가 많았다. 이들 국가들은 한국사나 중국사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고, 편입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 한국이나 중국과 다른 역사공동체로서 정체성을 유지했다. 김교수는, 이처럼 중국과 한국의 중간 개념으로서 요동을 설정해야만 고대사가 제대로 보인다고 말한다.
이제 고구려사에 대해 살펴보자. 고구려는 요동 지역에서 출현한 다종족 국가였다. 고대 요동 종족인 예맥족의 한 갈래인 맥족(貊族)이 주축이었다. 예족(濊族) 계열의 여러 종족과 말갈족도 고구려인을 구성한 주요 종족이었다. 평양 천도 이후에는 한족(韓族)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고구려는 한국이나 중국과 다른 독자적인 문화를 가졌다. 초기 고구려의 문화는 중국이나 한국과 명료하게 구별된다.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조’에는 고구려의 자연 지리 환경과 산업, 관제와 국가 조직, 신앙과 법속, 풍습과 의복 등이 중국이나 한국과 다르게 묘사되어 있다. 백제와 신라는 같이 삼한에 뿌리를 두었기 때문에 동일한 계통의 언어를 사용했지만, 고구려의 언어는 두 나라와 달랐다는 연구 성과도 있다.

 

김교수는, 고구려인들은 중국인과 동류 의식을 가질 수 없었으며, 한국인과도 한반도로 천도하기 이전까지는 동류 의식을 갖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구려는 평양 천도 후 요동과 한국을 아우르는 통합 국가로서 한국에 편입되었다. 하지만 신라가 3국을 통일한 이후 고구려는 다시 요동사의 일부로 돌아갔다. 고구려 유민 중 일부가 신라와 당으로 분산되었을 뿐, 대부분은 요동에 그냥 남았다. 고구려의 역사 전통 또한 신라나 당(唐)보다는 발해 등 요동 지역에서 등장한 새로운 국가로 이어졌다. 이처럼 고구려는 한국사나 중국사에서는 주변적 위치만을 차지하는 데 반해 요동 역사에서는 핵심적인 위상을 갖고 있다.

신라가 당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평양의 대동강(당시 ‘패수’)을 양국의 경계로 삼은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그것은 당이 요동을, 신라가 한국을 각각 지배하는 것을 상호 승인하는 일이었다. 김춘추는 삼국 통일 이후 ‘삼한 통일을 완수했다’고 말한다. 흔히 신라의 통일을 불완전한 통일이라고 말하는데, 당시의 시각으로는 그것이 아니었다. 신라 사람들의 생각으로 보면, 대동강 이북은 한족(韓族) 국가가 아니라 별개 세계인 요동이니까 고구려 전체를 통일할 필요가 없었다.

김교수에 따르면, 한국을 형성하는 데 고구려라는 요소가 일정한 역할을 했고, 따라서 고구려사는 한국사의 일부임에 틀림없다. 마찬가지 이유로 고구려사는 중국사의 일부이기도 하다. 하지만 고구려는 한국이나 중국이 아닌 요동 국가였다. 다음은 김교수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고구려사 논란을 어떻게 보나?

나는 언론 보도나 정부의 대응, 민중 정서에 대해서는 논할 생각이 없다. 다만 역사학계의 비학문적인 대응에 대해서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한국 사학계는 고구려사에 대해 거의 아무런 학문적 관심도 보이지 않았고 성과를 쌓지도 못했다. 따라서 현재 중국학계의 역사 ‘왜곡’을 반박하는 국내 학자들의 주장은 정밀한 논거를 갖고 있지 못하다. 최근 정부가 주도해 고구려사 연구센터를 세운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상태에서는 아무리 많은 연구비를 쏟아붓는다 하더라도 같은 내용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연구만 양산할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학자들은 애국주의나 민족주의와 같은 자기중심적인 사고 방식과 비논리적 정서에서 벗어나 학문 본연의 객관적 자세를 가져야 한다. 중국학계는 노골적으로 학문이 정치에 복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한국학계는 이러한 태도를 비난하면서도 대중의 민족주의적 정서에 영합하거나 선동하는 등 학문을 현실에 굴절시키는 경향이 농후하게 나타나고 있다. 지금까지 역사를 보면, 학문을 굴절시키고 역사를 왜곡하면 반드시 그 주체들이 먼저 불행한 결과를 맞이했다. 역사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민족주의 사관이 극복되어야 할 이유는?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받았을 때, 한국의 일부 역사학자들은 복국(復國)을 위한 방법으로 민족주의 관점에서 한국사를 재해석했다. 이러한 노력은 나라를 잃은 특수 상황에서 일정한 효과를 얻었으며, 광복 후에도 식민사관을 바로잡는 데 이바지했다. 하지만 반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민족사관이 식민사관을 극복한다는 명목으로 여전히 기세를 잃지 않는 것은 문제다.


이번 중국의 고구려사 귀속 논란을 일본의 역사 왜곡과 비교하면?

임나일본부는 역사적 사실이나 사료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물론 이 문제에서도 임나일본부가 아예 없었다고 하는 식의 주장은 문제가 있지만, 고구려사 문제와는 별개니까 논외로 치자. 고구려사 논란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역사 해석의 문제이고, 역사 체계의 문제이다. 고구려사는 한국사이기도 하고 중국사이기도 하지만, 고구려는 한국도 아니고 중국도 아닌 요동 국가였다. 국가와 역사공동체 개념을 엄밀하게 구분하면 본질이 명료해지며, 아전인수 격으로 싸우는 일도 없어진다.

ⓒ 연합뉴스

 

학계 일부에서는 중국이 고조선사도 빼앗으려 한다고 보는데.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나는 개인적으로, 고조선도 요동사의 개념에 포함해서 보아야 한다고 본다. 객관적으로 고조선사를 연구해보면 여러 면에서 한국의 역사 전통과 연결하기가 어렵다. 우리의 역사 서술을 보면 고조선 다음에 삼한을 놓는데, 삼한은 100여 개나 되는 성읍 국가들의 공동체였다. 세계 어느 곳에서나 초기 국가 형태로 성읍 국가가 출현한다. 반면 고조선은 한나라와 맞서 1년이나 버틴 강대한 고대국가였다. 강대한 고대국가 뒤에 성읍 국가가 따라붙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가. 통탄할 분들이 많겠지만, 한민족의 역사는 삼한에서 삼국시대로 이어지는 것으로 서술하고, 고조선사는 별개 역사 체계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렇게 서술한다고 해서 고조선이나 고구려·발해가 한국사와 무관해지는 것이 아니다. 내 말은, 이들 국가가 한국을 형성하는 데 한몫 했기 때문에 한국사로 서술될 수는 있지만, 이들은 요동 국가이지 한국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근대 민족주의가 성립하기 훨씬 전부터 고조선사나 단군 설화가 우리 역사 서술에 나타나는데.

실제 확인해 보면 우리 나라 사람들이 고조선을 우리 역사에 포함한 것이 몇백 년이 안 된다. 고려 말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서부터 나오며, 본격적으로 고조선을 우리 역사로 본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부터다. 삼국 시대에는 그런 개념이 전혀 없었다.

김한규 교수는 1999년 <한중관계사1, 2>(아르케)를 펴내고 우여곡절을 겪었다. 대우학술재단 지원으로 완성된 <한중관계사>는 심사위원들의 완강한 출판 반대 의견에 부딪혀 2년이나 지연되다가 간신히 출판되었다. 고구려가 한국사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었다. 지난해에는 이 책이 중국어로 번역되었지만, ‘제국주의 침략에 복무하고 민족분열주의의 주장을 위해 목적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출판 금지 당하기도 했다.

김교수의 논쟁적인 저작 <요동사>는 2월 중 출판될 예정이다. 한·중 양국의 민족주의, 혹은 애국주의 학계로부터 동시에 배척받았던 전작처럼, <요동사> 또한 만만치 않은 논란을 부를 것이 예상된다.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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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은 한국, 중국과 독립된 역사공동체일 수 있는가
본격서평 : 『요동사』(김한규 지음, 문학과지성사 刊, 2004, 742쪽)

2004년 03월 31일   송호정 한국교원대 

 

 

 

 

 

 

 

 

송호정 / 한국교원대·한국사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 등과 이에 맞서는 한국 국민의 내셔널리즘의 부활은 동아시아 사회의 평화 관계에 일정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운데 만주의 고조선·부여사와 고구려사를 두고 한국 역사임을 내세우지 말고 ‘요동사’라는 제3의 역사로 규정해야 한다는 연구서가 발간돼 관심을 끌고 있다. 저자는 이미 '한중관계사'(아르케 刊)라는 책에서 요동지역의 종족과 국가를 중심으로 한국과 중국간에 펼쳐진 역사를 정리한 바 있다.


저자는 ‘요동사’라는 범주를 말하기 위해 先秦 문헌, 중국 25사, 한중 양측의 '실록' 등 현존하는 일차 사료, 한중 양측의 역사 형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여러 민족(종족)의 民族誌(또는 종족지), 한중일 및 러시아의 방대한 논문들을 낱낱이 살피고 해석한 끝에 ‘요동’을 역사상의 ‘한국’과 ‘중국’ 사이에 존재한 제3의 역사공동체로 보고 있다. 책에서는 오늘날 한국인이나 일본인이 ‘만주’라고 부르는 곳, 중국인이 ‘동북지방’이라고 부르는 곳, 전통적으로는 ‘요동’이라고 일컬었던 요하 유역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예맥계의 조선·부여·고구려 등과 숙신계의 말갈·여진·만주, 동호계의 선비·거란·몽골 등 여러 세력이 번갈아 이 지역사의 중심이 돼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 및 요·금·원·청(후금) 등의 여러 나라를 세우고, 명멸한 것으로 파악한다. 특히 ‘요동’을 한반도의 韓人이 주체가 된 신라·백제·고려·조선·대한민국 등 ‘역사상 한국’의 여러 국가들이나 중원에서 출현해 그곳을 중심으로 활동한 漢人이 세운 秦·漢·魏·晉·수·당·송·명·중화인민공화국 등 ‘역사상 중국’의 여러 국가들과는 구별되는 역사공동체로 파악하고, 요동의 독자적인 역사 체계의 위상과 의의를 인정해 그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저자는 ‘요동’을 하나의 역사공동체로 설정함으로써, 그 동안 요동 지역의 역사를 아전인수격으로 다뤄 온 한국과 중국의 민족주의 혹은 애국주의적 아집이 ‘논리적’으로 극복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우리 역사와 관련해 고조선·부여사나 고구려사, 발해사의 경우도 지리적으로 요동에 위치해, 중국이나 한국의 국가들과는 독립된 별개의 국가라고 본다. 이러한 주장은 우리 학계에 만연돼 있는 민족주의적 시각을 극복하고 동북아시아사라는 큰 시각에서 우리 역사를 바라본다는 점에서 진전된 역사 이해라 할 수 있다. 최근 학계 일각에서는 동아시아 공동체 건설을 위해 ‘국사’를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는데, 모두 저자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주장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방대한 자료를 섭렵해 중국 동북지방에서 펼쳐진 기원전 시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장시간의 역사를 정리해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저자 자신도 서문에서 문제 제기했듯이 과연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요동사’라는 개념이 역사공동체로서 설정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책을 덮는 순간에도 독자들에게 계속해서 남아 있다.


저자의 주장을 살펴보려면 먼저 ‘요동’이라는 단어의 개념을 정리해 봐야 한다. 저자는 ‘요동’의 개념을 현재의 遼河 동쪽지역만을 말하는 좁은 의미의 요동과 만주 평원 전체를 말하는 넓은 의미의 요동으로 구분해 볼 것을 제안한다. 그 속에서 넓은 의미의 요동 개념이 중국 역사에서 내내 통용돼 왔다고 보고, 바로 그 지역에서 펼쳐진 종족과 국가의 역사를 ‘요동사’로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과문인지 몰라도 책 내용처럼 폭넓은 해석과 달리 요동은 漢代 이래 주로 요하 동쪽의 지역만을 뜻하는 개념으로 사용돼 왔다. 책에서 ‘요동’이란 말을 중국 동북지방 전체의 개념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제시한 몇몇 사례를 제외하면 수많은 역사적 사건과 내용 서술에서는 요동이 요하의 동쪽 지역을 의미하고 있다. 때문에 ‘요동’ 개념이 중국 동북지방 전체를 의미하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몇 가지 사례만 가지고 하나의 민족공동체를 설정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보인다.


저자는 요동을 별개의 역사공동체라고 보면서 그 공동체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그 지역에서 명멸했던 국가들이 동류의식과 역사의식을 공유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서로 간에 같은 민족이라고 느끼는 자의식은 전근대시기에 하나의 민족공동체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전근대 시기 요동 지역(중국 동북지방)에 존재했던 각 종족 국가 간에 공동의 언어를 사용하고 같은 역사공동체 의식을 가졌을 지는 의문이다. 간단하게 고구려와 새외 유목민족간의 대립과 전쟁 기록만을 보아도 두 집단을 같은 역사공동체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책 속의 요동 개념에는 한반도 서북지방도 포함하고 있고, 자연스레 고조선과 고구려의 역사도 넣고 있다. 그러나 역사상 서북한 지역에 흐르는 청천강이 중국 및 새외 민족과 한민족의 경계로서 역할을 해왔던 점을 고려한다면, 평양에 중심을 뒀던 후기 고조선과 평양 천도(427년) 후의 고구려 역사는 ‘요동사’ 속에서 설명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작은 문제이지만 책에서는 ‘요동’이 중국 동북지방을 부르는 역사적 용어라고 보면서 ‘만주’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의 중국 동북3성(요령성, 길림성, 흑룡강성) 지역을 우리 입장에서 부른다면 오히려 청나라 때 중국에서 정한 ‘만주’라는 명칭이 개념이 모호한 ‘요동’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말하는 ‘요동사’는 漢代 이후 중국의 華夷觀 속에서 보면 東夷의 역사다. 만일 동이 지역의 여러 종족과 국가사를 중국사나 우리 역사와 분리시켜 하나의 역사공동체로 설정하려 한다면 중국사나 한국사와 다른 요동지역만의 독자적 공동체를 설정하기 위한 보다 구체적인 증거가 있어야 할 것이다. 책에서는 ‘중국사’ 속에서 ‘중국’이라는 개념이 중원이라는 특수한 공간에 위치한 특정한 역사공동체를 가리키는 개념이었다고 보고, 그런 면에서 요동사의 개념 설정도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시각의 잣대를 들이대면 어떠한 하나의 넓은 지역에서 존재했던 종족과 국가도 서로 간의 역사 계승 여부에 관계없이 하나의 역사공동체로 설명할 수 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저자의 정리대로라면 예맥계의 국가와 동호계의 국가, 그리고 숙신계의 국가가 명멸한 중국 동북지방에서 시간과 공간의 차이를 어떻게 하나의 역사공동체로 볼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분명 ‘요동’은 ‘중국’이나 ‘한국’과 같은 특정한 역사공동체, 즉 나라의 명칭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 지역 개념을 내포한 말이다. 그곳에는 중국이나 한국과 구별되는 맥·예·거란·여진 등 별개의 역사공동체들이 다수 존재했다. 이 여러 개별 역사공동체들을 요동사라는 하나의 범주로 묶을 수 있을지는 앞으로 역사공동체의 개념에 대한 정의를 포함해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필자는 서울대에서 한국고대사와 역사고고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계절의 '한국생활사박물관' 시리즈 중 '고조선생활관'과 '백제생활관'에서 고대 한국인의 생활상을 복원하는 일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저서로는 '한국 고대사 속의 고조선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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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우 2004-02-07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성시님의 "동아시아의 왕권과 교역" 혹은 "만들어진 고대"를 보면 이와 유사한 관점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특히 만들어진 고대는 당시현재의 관점에서 고대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정치적 의도가 예리하게 쓰여져 있습니다. 열린 시각으로 검토하고 우리 것에 대한 바른 해석을 해보는 자세가 정말 필요할 때라고 생각을 합니다.

부빠기 2004-02-13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긍이 가는 이야기지만, ' 고구려사는 한국사이기도 하고 중국사이기도 하지만, 고구려는 한국도 아니고 중국도 아닌 요동 국가였다. 국가와 역사공동체 개념을 엄밀하게 구분하면 본질이 명료해지며, 아전인수 격으로 싸우는 일도 없어진다.' 이 부분은 약간 이상하군요. 뻔히 그들도 알면서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는 건데...그래야 지금 써먹을 게 많잖아요?

간달프 2004-02-27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뻔히 알면서 (혹은 자기도 모르게)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것은 중국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고구려를 한민족만의 영광의 순간으로 '배타적으로' 기억하려드는 한국이나 고구려를 중국사의 일부로, '배타적으로' 편입하려는 중국이나 마찬가지니까요. 고구려는 그냥 고구려로 보는 것이 옳겠죠. 국가와 역사공동체 개념을 엄밀하게 구분하자는 말은 그 뜻일 겁니다. 그럼 여기서 문제는 '그들이 아전인수격으로 가니까 우리도 아전인수의 방식을 고수해야 하는가' 혹은 '정치적으로 도전해 오는 것을 학문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적절한가' 등과 같은 문제가 남네요. 이에 대해서 본인의 생각은 '특정한 방향의 정치적 도전에 대해서는 더욱 설득력이 있는 또 다른 방향의 정치적 대응으로 가야 한다'입니다. 현재의 고구려를 둘러싼 중국과 한국의 대립은 일란성 쌍둥이 관계라고 봅니다. '배타성의 정치'란 한 알에서 나온 것이지요. 그렇다면 답은 배타성을 타파하는 정치적 비젼에 있겠지요. 그러나 애석하게도 현재 한국은 그런 대안적인 정치적 비젼을 제공할 만한 능력도 의지도 없는 것 같군요.
(사족)저자의 요동국가론은 요동이란 불리우는 지역에 다른 문화와는 차별적인 문화가 존재했다는 증거가 필요한데 이에 대한 논의는 부족하다고 여겨지네요.
 

 

 

 

 

 

‘핵위기’ 어떻게 극복할까  (2003 2 3 한겨레)


아담한 키에 잔잔한 미소가 인상적인 임동원 전 외교안보통일특보를 홍세화 기획위원이 지난달 27일 동교동의 김대중 도서관에서 만났다. 김대중 정부에서 외교안보수석, 국정원장, 2번의 통일원 장관을 지낸 임 전특보는 외교안보통일정책에 관한한 김 전 대통령의 분신과 같은 인물이다.

그는 88년 노태우 대통령의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7·7선언)에서 시작된 남북화해협력의 최일선에 서있었다. 얼마전 한겨레통일문화상 수상 기념강연에서 그는 이 시기를 ‘평화와 통일을 향한 탈냉전의 프로세스’로 불렀다. 그러나 이상하리만큼 그가 언론과 직접 한 인터뷰는 드물다. 무엇이 지난 15년여 그를 한반도 탈냉전 프로세스의 한 가운데 있게 만들었을까. 다시 불거진 핵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현안 말고도, 고희를 넘긴 ‘임동원’에 대한 궁금증도 이번 대담을 기획했던 이유다.

점심시간까지 합해 4시간여 걸쳐 진행된 이번 대담은 안과 바깥의 ‘특별한’ 만남이라 할 만하다. 이북 출신, 육사 13기, 육사 교수, 외교관 생활 등으로 이어지는 그의 경력은 ‘주류’이자 ‘인사이더’다. 한세대 정도의 차가 있지만 홍세화 위원은 남민전 사건에 연루돼 20년간 고국에 돌아올 수 없었던 ‘파리의 택시운전사’다. 한국에 와서도 그는 ‘아웃사이더’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궤적이 다른 만큼 임 전 특보와 홍 위원은 서로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런 어색함은 홍 위원이 자신의 대학시절로 얘기를 꺼내면서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홍세화=개인적으로 만날 약속을 하고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원래 공대에 들어갔다가 외교학과 들어간 것도 분단을 어떻게 극복할까 하는 아주 순진하고 소박한 생각이었습니다. 근데 들어가보니 한국 외교의 총량이란 것이 미국의 동아시아 담당 차관보 한 사람의 역할에도 미치지 못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까지 들더라고요. 그래서인지 공부할 마음도 옅어졌습니다. 그런데 외교일선에 나선 저의 동료나 선후배가 아니라 거꾸로 군인이자 이북 출신으로서 전쟁을 경험했던 임 전 특보가 88년 7·7선언부터 92년 기본합의서, 2000년 남북정상회담 등 큰 일을 했다는 게 착잡하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했습니다.

임동원=제 살아온 인생은 크게 세가지 시기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일제 통치 아래서 소학교 나오고 공산치하에서 중등학교를 나온, 17~18살 때까지가 한 시기죠. 전쟁 중에 단신 월남했는데 오자마자 국민방위군에 들어가게 됐어요. 경상도 시골의 한 과수원 창고에서, 정말 자고 일어나면 옆에 있는 사람이 죽어나가는 생활이었죠. 하루에 주먹밥 2개 받아 연명했는데, 그해 겨울이 얼마나 추웠던지 하늘이 도와 살아남았죠. 전쟁으로부터 국제냉전이 종식되던 80년대말의 약 40여년에 걸친 냉전시대는 군인으로서 28년, 외교관으로 10여년을 보냈습니다. 사실 미군 부대 식당 창고지기로 2년간 일하면서 부산에 있었는데 군대보다는 대학을 가고 싶었어요. 혼자 틈틈이 공부했는데, 학비를 낼 형편이 안됐죠. 근데 교회 갔다 오는 길에 우연히 육사생도 모집 포스터를 봤어요. 4년을 먹고 자고 입혀준다니 들어간 거죠. 두번째 제 인생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냉전은 두가지 형태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이념의 대결이고 다른 한 측면은 군비경쟁이죠. 한반도는 양대 진영의 최전선 기지로 냉전에 희생돼 왔다고 할까, 그런 입장에서 벗! 어날 수 없었던 시기고요. 이런 시기 군인, 외교관으로서 어떻게 하면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는가, 그런 문제에 관심을 갖고 근무했죠. 그 시대의 사람으로 당연한, 명예스런 임무였고, 그런 일을 한 걸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번째 시기가 80년대말 탈냉전 이후 90년대 초 남북협상에 참여해 지금에 이른 시기입니다.

=67년 당시 쓰신 <혁명전쟁과 대공전략>이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됐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사실 그 책이 임동원이란 사람을 있게 해주기도 했습니다. 책을 써서 몇몇 유명 출판사에 내려 했지만 모두 딱지를 맞았어요. 물어물어 아주 작은 출판사에 갔는데, 당시에 1년에 몇권을 내야 하는 규정이 있었나봐요. 그 기준을 맞추기 위해 내주기는 하는데 자비출판을 하라는 거에요. 그래서 그때 아내가 친구로부터 돈을 꿔서 1천부를 찍었어요. 들어간 돈도 회수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중앙정보부(중정)에서 부르는 거에요. 아이고, 걸렸구나. 거기엔 마르크스, 레닌, 모택동 뭐 이런 내용들이 다 인용돼 있었거든요. 그런데 중정쪽에서 자기들도 북한이 이런 게릴라 전략으로 나올 거라고 분석하고 있었다며 교재로 당장 5천부를 구입하겠다는 거에요. 그게 인연이 돼 유명해졌고, 중정은 물론이고 경찰쪽으로부터도 강연과 책을 구입하는 요청이 잇따라 3만부 정도를 찍었습니다.

=그런 역할까지 하셨다면 냉전주의적 사고랄까 반공주의 의식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제가 변한 거죠. 80년대말 국제정세에 지각변동이 일어납니다. 사회주의권의 붕괴 속에 체제전환의 과정이 일어났고, 한편에선 군축협상을 통해 군비감축이 시작됐습니다. 냉전의 외딴 섬으로 남아있던 한반도에서도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한 노력이 시작됐습니다. 80년대말 외교안보연구원장으로 있으면서 군축 탈냉전의 과정에 관심을 갖고 연구했는데 7·7선언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만드는데 관여했고 이를 계기로 남북 고위급회담 대표로, 군사외교 담당으로 나간 게 인연이 됩니다. 제 인생의 세번째 시기인 이 15년은, 한반도의 관점에서 본다면 ‘탈냉전의 전환기’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냉전시대엔 그 시대의 역할을 했지만 시대의 변화와 함께 저도 변한 겁니다. 그래서 전 예비역이나 이북 출신 모임에 가면 외톨이가 되버립니다. 언젠가 제가 성우회에서 강의를 하는데 누가 “교수님, 옛날엔 그렇게 얘기하지 않은 것 아닙니까?” 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두가지 점을 들어 얘기했죠. 세상이 변했는데도 낡은 시대의 사고방식을 고집한다는 것은 새로운 시기에 적응 못하고 발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 또 하나는 90년 남북고위급 회담 때 상당한 충격을 받았는데 우리가 북한을 너무 과대평가했다라고 말했습니다. 군사전략 이런 걸 할 땐 항상 북한이 우리보다 많은 군사력을 가져 위협이 된다는 거였는데 오히려 저쪽은 북침, 흡수통일의 공포증에 시달리고 있더라는 거죠. 남북한 국력의 격차가 이렇게 벌어지고 세상이 변하는데 왜 우리는 와들와들 떠는가, 너무 과대평가한 겁니다. 그렇게 얘기했더니 그 자리에서 반박하는 사람은 없더라고요. 물론 6.25때 북은 240대 탱크에 20만 대군을 몰고 파죽지세로 내려왔는데 우린 탱크는 한대도 없고 병력도 10만명이 채 안됐죠. 그때 사람들은 아직도 탱크만 보면 놀랍니다. 거꾸로 북한은 얼마나 공습에 시달렸는지 자꾸 땅굴만 파는 거에요. 큰 쥐를 보고 놀란 새끼 고양이는 자라서도 쥐를 못잡는다는 말을 누가 합디다. 우리의 안보상의 문제 가운데 하나는 자신감을 못 갖고 있다는 점도 있습니다.

=세번째 시기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게 되셨는데 95년 아태평화재단의 사무총장직을 수락하실때 김 전 대통령의 ‘삼고초려’가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것도 역시 지금 말씀하신 새로운 흐름, 새로운 시대에 적응해가던 하나의 과정으로 볼 수 있을까요?

=90~93년초까지 열렸던 남북고위급 회담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한 사람은 저 혼자인 것 같습니다. 70여회 북한과 협상을 했어요.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통일부 차관을 그만두고 연구소에서 정리도 좀 하면서 글도 쓰고 여생을 보내려 했는데 김대중 당시 아태재단 이사장이 사람을 시켜 연락을 해왔어요. 저는 김 대통령을 잘몰랐고 별로 좋아하는 쪽의 사람이라 할 수도 없었죠. 수십년간 그 분이 평화통일 말하면 빨갱이라 하고, 민주화 말하면 과격분자라 하고, 정치한다 하면 거짓말쟁이로 몰아오지 않았습니까. 저도 그런 걸 계속 들어오며 살았고 정치에는 관심 없어서 그냥 그런 분인가 하고 있었죠. 사람 보내서 같이 통일문제를 얘기해보자고 할 때 깜짝 놀랐습니다. 난 아니다 능력도 없다라고 말을 했는데 이분이 끈질기셔요. 다시 며칠 뒤에 또 사람을 보냈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다고 또 사양했어요. 그런데 또 다시 요청이 왔어요. 마음이 흔들렸죠. 도대체 김대중이라는 분이 어떤 분인가 관심을 갖게 되고 이전에 쓴 통일론을 읽었는데 상당히 괜찮아요. 그리고 외교안보통일분야는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이렇게 통일문! 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정치지도자가 어디 있는가 그런 분을 돕는게 나의 사명 아니겠느냐 싶었죠. 저는 기독교 신자입니다. 열심히 기도하다가 응답을 받은 셈입니다. 그날을 잊을 수 없죠. 지난 1월23일이었으니까 이제 9년을 넘어 10년째 접어듭니다. 이곳 동교동에서 점심식사 하면서 2시간여동안 얘기를 나눴는데 남북문제, 통일문제, 북한 핵문제가 상당히 쟁점이었는데 탁월한 식견을 갖고 계셨어요. 나 역시 전문가라 자처했는데 감명을 받았죠. 그 자리에서 결정했어요. 처음 1년간은 많은 토론을 했습니다. 이분도 확고한 신념, 고집이 있잖아요. 저도 좀 그런 면이 있습니다. 4~6시간씩 자택에서 토론하기도 하고, 어떨 땐 토요일 호텔에 방을 잡아 잠자면서 토론도 했어요. 처음엔 이견도 많았죠. 살아온 길이 워낙 다르잖아요. 전 그래도 국가의 녹을 쭉 먹고 그런 면에선 편하게 지내온 편이죠. 60년대엔 육사교수 생활, 70년대엔 합동참모본부에서 군사전략, 안보정책을 담당하며 율곡사업(한국군 전력증강사업)의 바탕이 된‘율곡계획’을 만들었고 그 이름도 제가 붙였습니다. 김 대통령의 장점이 뭔가 하면 상당히 학구열이 강하고, 탐구심이 ? ?萬? 자기철학이 있고 비전이 있으니까 잘맞지 않는 경우 대화가 열을 띠 죠. 그럼에도 일단 납득이 되면, 바로 받아들이시죠. 저도 그분 생각으로부터 많은 걸 배웠죠. 그런 과정에서 소위 요즘 말로 코드를 맞춰갔습니다. 아태재단에 오자마자 처음 한 것이 김대중의 3단계 통일론을 완성하는 것이었어요. 새시대에 맞는, 김대중의 통일론을 발전적으로 재조명한 거죠. 초안을 만들고 다시 호텔 방을 잡아 김 대통령과 쭉 독회를 했어요. 가만히 들으시다가, 거기는 이렇게 하는게 어떤가라고 의견을 내놓고 그러면 다시 토론을 하고 고치고 했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김 대통령의 3단계 통일론에 구체적이고 정책적인 내용들이 담기도록 노력했습니다. 이것이 뒤에 김대중 정부 대북정책의 ‘바이블’이 된 거죠. 대북정책은 이미 3년 전부터 준비가 돼 있던 셈입니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이 6·15 공동선언문을 서명할 때 배석한 남쪽 인사는 임 전 특보가 유일했다. 앞으로도 걸어가야 할 길이 많지만, 한번 트인 둑에서 물줄기는 계속해서 흐를 것이다. 15년 이상을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그의 경험은 비단 개인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유해야 할 교훈일 것이다. ‘첫째, 둘째식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데 뛰어난 임 전 특보는 손을 꼽아가며 그 경험을 얘기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6·15 공동선언까지 간 걸텐데 지금 되돌아보면 남북정상회담의 의미를 어떻게 정리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사실 김대중 대통령도 취임사에서 말씀하셨지만, “이미 통일의 길은 있다. 남북기본합의서대로 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통일되기 이전에 어떤 관계로 남북이 살아갈 것인가, 그 방향을 정한 게 남북기본합의서죠. 우선 남북이 누군가인가부터 따졌어요. 외국에 대해선 주권국가지만 남북관계는 나라와 나라 사이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로 보자, 결정적으로 중요한 부분이죠. 이 ‘특수관계’를 5가지 분야로 정리했습니다. 먼저 인정하고 서로 존중하면서 화해해나가자, 두번째로 다방면에 걸쳐 교류와 협력해나가자, 세번째로 불가침-전쟁하지 말자, 네번째로 전쟁하지 않기 위해서는 군사적 신뢰조치를 취하면서 군축을 해나가자, 다섯번째로 현 정전협정을 평화체제로 바꿔나가자. 이 5가지입니다. 지금 다시 남북이 모여앉아 협상을 해도 그 이상 나올 수 없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후속조처를 담은 부속합의서를 3개 만들어 실천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김영삼 정부 들어서서 핵문제가 튀어나오자 아까운 시간을 아무 것도 못하고 흘려보내고 말았죠.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은 이미 합의돼 있던 남북기본합의서 내용을 실천한 것이라는 말씀이군요.

=그렇죠. 남북정상회담은 바로 그 내용을 ‘실천하자’는 것을 합의한 겁니다. 6·15 선언은 뭐 심오한 내용이 새로 들어간 게 아니라 ‘실천선언’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의의는 5가지입니다. 우선 긴장을 해소하자, 즉 북한과 남한이 각각 서로에 갖고 있는 공포증을 털어버리자. 두번째는 통일문제를 재검토하자는 겁니다. 북한의 고려민주연방제 통일방안은 남북대표 동수가 만나 민족회의를 열어 우선 연방정부를 만들어 외교 군사는 연방정부하에 두자는 건데 지금 어떻게 즉각 통일이 되겠습니까.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건 냉전시대의 산물’이라고 했습니다. 남한의 연합제 통일방안은 사회문화경제공동체를 구성해서 상호의존도를 높이고 나중에 통일 이룩하자, 서로 오고가며 돕는 ‘디 팩토 유니피케이션’(사실상의 통일)상황을 이루고 나중에 법적으로 통일하자는 기능주의적 접근방안입니다. 김정일 위원장이 그게 좋다는 거에요. 그래서 합의했습니다. 다만 북은 그걸 ‘낮은 단계의 연방제’라 부르겠다는 거였죠. 세번째는 교류협력을 통해서 실천을 통해서 신뢰를 조성해나가자, 다져나가자고 합의서! 에 되어 있어요. 그건 제가 강하게 그 표현을 주장해서 넣은 겁니다. 지금까지 경험을 통해서 보면 남북관계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안되는 문제가 불신입니다. 조금이라도 서로 믿을 수 있으면 진전이 되겠는데. 그러니까 이 불신을 줄여야 하는데, 실천을 통해서 신뢰를 조금씩 다져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인적 교류, 철도 도로가 연결되고 왔다갔다 하면 신뢰가 조성돼요. 지금 사실 남북간 신뢰가 어느정도 쌓이지 않았습니까. 물론 한꺼번에 될 순 없습니다. 네 번째, 중요한 의의는 북한이 드디어 어느정도 안심하고 개방하고 경제개혁에 나서게 됐다는 것입니다. 1년반 전 7·1경제관리개선조처로부터 경제개혁을 시작했습니다. 그전엔 북침위협, 흡수통일 공포 때문에 못하지 않았습니까. 어려움이 많겠지만 그래도 시작한 겁니다. 마지막으로 민족자결의 원칙입니다. 우리 문제를 남북이 마주앉아 해결할 수 있다는 걸 과시한 겁니다. 외세가 개입하고 하면 점점 어려워지는 겁니다. 자주적으로 한다는 것인데, 핵문제도 제발 그렇게 됐으면 좋겠지만 이건 워낙 국제문제라는 측면이 크기 때문에 쉽지가 않습니다. 공식적으로만 70여차례 북한사람? 欲?만났던 임 전 특보에게 북한의 고위인사들에 대한 인상을 물어봤다.

=김대중 전대통령은 2000년 2월 김정일 위원장을 ‘식견있는 인물’이라고 평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2000년 10월 북한을 방문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국무장관은 회고록에서 김대중 대통령 말대로 가서 만나보니 진짜 지적인(식견있는) 인물이란 걸 느꼈고 남의 말을 경청하고 훌륭한 대화의 상대가 될 수 있는 사람, 실용적 사고를 갖고 있고 결단력이 있더라고 썼습니다. 스웨덴의 고란 페르손 총리도 같은 인상을 말했습니다. 제가 추가하자면 나이드신 분들에 대해 예의 바르고 유머감각이 뛰어납니다. 영화 음악 드라마 등 예술에 상당히 관심있고 조예가 깊어요. 남한의 영화, 드라마, 음악을 너무 잘아는 바람에 제가 당황한 적이 많습니다. 특사로 갔을때 저녁식사하며 5시간 동안 얘기했는데 이분이 <춘향뎐> <공동경비구역 JSA> 영화를 얘기하는데 제가 봤어야죠. 나중에 돌아오자마자 비디오를 빌려서 봤습니다. 또 <용의 눈물>을 몇회까지 봤는데 그 다음 얘기가 어떻게 됐냐고 묻는데 그것도 대답 못했죠. 통일부 인터넷 홈페이지에 ‘북한 바로알기’라는 코너가 있는데 ‘그거 좀더 정확히 해야 합니다’면서 은근히 불만을 얘기하기도 하더군요. 그것까지 다 봤다는 겁니다.

=오랜 시간 파트너로 만나왔던 고 김용순 비서에 대해선 기억이 각별할 것 같습니다.

=김용순 비서는 저와 동갑인데 너무 일찍 돌아가신 것에 대해 참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저하곤 남북정상회담 전부터 만나 한 3년간 카운터 파트로 중요한 막후협상을 하고, 논쟁도 많이 벌였습니다. 그 분은 상당히 뛰어난 능력이 있고 순발력과 유머 감각도 있는 재밌는 분이에요. 정상회담 이후 제가 서울로 초청해 추석때 제주도에 가서 밤새껏 얘기했습니다. 다 밝힐 순 없지만, 이 자리에서 하나 얘기하면 제주도에서 김 비서와 국군포로, 납북어부 이분들을 송환하는 문제를 놓고 많은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런데 당시로선 절대로 안된다였죠. 국군포로는 다 송환해 없다는 거고 납북자중 남은 사람은 자기 희망으로 남은 건데 그렇다면 남한에서 석방한 반공포로도 돌려보내라는 입장이었죠. 그래도 생사 확인하고 주소라도 확인하자고 했어요. 인도적 문제인데 이게 안되면 다른 더 어려운 문제는 어떻게 푸느냐고 논쟁을 하다가 암암리에 합의를 했습니다. 시작이라도 하자. 이산가족 상봉때 국군포로, 납북자를 몇명이라도 만나게 해주자는 거였습니다. 정부가 왜 국군포로 납북자 문제를 거론 안하느냐고 비판하는데 얼마나 많이 했는? ?모릅니다. 국군포로나 납북자 문제는 90년 남북고위급회담 때 제가 교류협력분과위원장 지냈는데 그때도 다뤘습니다. 그때부터 쭉 참여했으니 이 문제가 얼마나 풀기 어려운 건지 잘알고 있습니다.

=북쪽과의 협상에 임하는 자세랄까, 어떤 점이 중요한지 들려주십시오.

=북한과 협상을 하면서 참 많은 걸 배웠습니다. 협상기법을 개발, 발전시켰다고나 할까요. 일반적으로 국가간 협상도 그렇지만 남북협상은 서로 기본입장을 내놓고 이를 고수하기 위해 싸우게 됩니다. 적과 적이 마주앉은 개념으로 제로섬 게임을 벌이는 거에요. 그러나 이기고 지는 그런 협상은 잘안됩니다. 공동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어떤 원칙, 어떤 기준 하에서 하는 게 좋겠는가부터 논의해서 그 원칙 하에서 협상을 하는 ‘원칙협상론’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해서 상당히 많은 진전을 봤습니다. 적과 적이 만나는 게 아니라 문제해결사들끼리 만나자, 문제 해결사 입장에서 해결하자는 거죠. 상대방을 이해하고, 자존심 강한 나라니까 자존심 존중해주면서 말입니다. 상대방을 긁기 시작하면 책상 치고 나가버려요. 지금도 남북이 회담하는 데 있어선 적과 적 입장에서 만나지 말고 문제해결사 입장에서 만나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몇십번 하다보니, 그쪽도 사람이에요. 특히 남북이 좋은 게 언어가 같고 역사와 문화가 같고 생각이 비슷해요. 그런 공통점을 활용해야 합니다.

이제 ‘지금’을 이야기 할 때가 됐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뒤 대북송금특검을 둘러싼 논란, 최근의 사면 논란까지 임 전특보는 그 한 가운데 서 있었다. 술술 넘어가던 분위기에서 조금씩 긴장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지난해 결국 대북송금특검이 있었죠. 그때 1억달러가 넘어갔다고 발표되지 않았습니까. 그때 분명히 대가성이 아니라고 말하셨지만, 어쨌든 그것이 국민들에겐 대가성인 양 받아들여진 부분이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 문제는 특검이 발표할 때도 대가성이 아니라고 발표했죠, 재판과정에서도 대가성이 아니라고 판명됐습니다. 그때까진 우리가 본격적인 식량지원 안할 때입니다. 기껏해야 옥수수 5만t 정도 보내주고, 민간차원에서만 보내주던 때거든요. 정상회담 개최가 합의되는 마지막 단계에서 북한주민들의 어려운 사정을 고려해 인도적 차원에서 또 정책적인 차원에서 한 1억달러 상당하는 물자를 제공해줄려고 한 건데, 물자로선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돈으로 준 거지, 정상회담을 돈으로 산 건 아닙니다. 그리고 대통령이 가는데, 비유하자면 못사는 지역의 동생 집에 가는데 어떻게 빈손으로 가느냐는 생각을 했습니다. 뭔가 선물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대통령은 그 내용을 보고 받고 즉각 국민들에게 공개하라, 국민들에게 알려주면 국민들도 좋아할 거라 했습니다. 그런데 참모들이 다 반대했어요. 여소야대의 국내정치도 그렇고 자칫하면 북한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 있었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공개를 안 하니까 어떻게 돈을 확보하느냐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아마 현대쪽에다 대신 지! 불 해달라고 한 것 같아요. 그런데 이번 재판과정에서 새롭게 사실로 밝혀진 게 있습니다. 북한이 당시 현대쪽에 7대 경협사업의 30년간 독점권을 주면서도 통신사업은 제외했는데 현대가 통신사업을 받는 대가로 추가로 1억달러를 줬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현대로선 정부의 부탁으로 1억달러를 준 것이 아니고 나름대로 거래를 했던 겁니다. 어떻든간에 국민들에게 오해를 받게 되고 누를 끼친 것에 대해선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워낙 과거의 총풍이라든지, 남북관계를 국내 전환용으로 이용했던 사례가 있었던지라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괜히 오해받는 결과가 돼버렸죠. 그 뒤 김대중 대통령에게 엄청 혼났습니다. 그때 내 말 안 듣고 공개안하고 고집 피우더니 이게 무슨 일이냐고.

=특검으로 결국 재판정에도 섰는데 소회라고 할까, 어떠셨습니까. 최근 또 사면문제를 둘러싸고 논란도 있었는데요?

=민주화 투쟁하며 고생한 분들에겐 할 말 없지만 70평생 살아오면서 전 ‘찰’자 붙은 데는 불려간 적이 없습니다. 검찰 경찰은 물론이고 재판 구경도 해본 적 없습니다. 이번에 그런 경험도 해야 한다고 하나님이 기회를 주신 것 같습니다. 더 정신차리라고 말입니다. 법정에서도 진술했지만 현대가 송금하는 것 중 2억달러가 정상회담 전에 가야 하는데 환전이 안된다며 국정원에 긴급 도움을 요청해왔습니다. 당시 정상회담이 1주일도 안 남았을 때인데 정식 수속을 밟으면 오래 걸린다고 해서 국정원의 고유업무인 ‘공작적’ 차원에서 편의를 제공해주기로 결정한 겁니다. 저는 그것을 왜 재경부장관의 허가를 받지 않고 했느냐는 것으로 기소됐습니다. 그런데 모든 국가간의 행위엔 크게 3가지 범주가 있습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우선 외교로 해결하려 합니다. 그게 안되면 전쟁까지 가고, 그렇지 않은 제3의 길이 비밀공작입니다. 미국 중앙정보국이나 국정원의 일이라는 게, 국가이익을 위해 외교나 전쟁 아닌 다른 방법 이른바 ‘비밀공작’으로 국가이익을 달성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국제인권규약을 위반하지 않는다면 인정돼 있는! 국제관례입니다. 재경부를 통해서나, 공식적으로 안되는 상황에서 대북송금의 편의를 봐준 겁니다. 그에 대해 사법적 잣대를 들이미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개인비리가 있다면 물론 조사를 해서 처벌해야겠죠. 그러나 고유업무인 공작에 대해선 사법적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법을 적용해야 하는 재판부도 고민은 있었을테고. 그 분들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크게 보면 그런 측면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면 문제는 제가 말할 입장이 아니고 그 질문은 없었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노무현 정권의 대북정책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임 전 특보는 어떻게 볼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노무현 정권의 평화번영정책이 과연 햇볕정책을 계승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말로는 계승한다고 하지만, 이라크 파병을 실질적으론 핵문제나 경협과 연계시키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보입니다. 그런 면에서 전 부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참여정부가 처음에도 햇볕정책을 계승발전시킨다는 말을 했고 요즘엔 더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처음엔 표면상으론 그렇게 하면서도 내막적으론 이전 정부와의 차별화에 더 신경을 썼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까 6·15 남북공동선언을 계속 지켜야 하는데, 의의에 대해서도 별로 말하지 않고 그래서 안 지키려는 것 아닌가라는 오해도 살 수 있었겠죠. 그런데 최근 와서는 다시 분명하게 공개적으로 6.15공동선언을 지켜야 한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동안 조금 차별화에 치중하는 감이 있었지만 지난 1년을 볼 때 참여정부는 햇볕정책의 계승 발전이라는 입장을 유지해왔고 6·15 공동선언을 지켜나가는 입장이었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예전에 중국 쪽에선가 한국의 햇볕정책을 특유의 4자성어로 표현했다는 걸 봤는데, ‘선이후난(先易後難=쉬운 것부터 풀어나감), 선경후정(先經後政=경제가 정치에 우선), 선민후관(先民後官=민간이 정부보다 먼저), 선공후득(先供後得=먼저주고 받자)’ 등으로 정리해 아주 일목요연하게 그 뜻이 들어왔습니다.

=사실 그건 제가 포용(햇볕)정책에 대한 지지를 위해 중국을 방문했을때 중국 전문가들이랑 식사하면서 그들에게 잘 이해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쓴 말입니다. 당시 야당으로부터 퍼주기니 뭐니해서 ‘선공후득’에 대해 많은 공격을 받았습니다. 근데 그게 사실 영어로 하면 ‘기브 앤 테이크’에요. 테이크 앤 기브라는 영어가 없듯이 ‘주고 받는’ 겁니다. 근데 이를 한자로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어렵더군요. 중국 전문가들에게 물어보니 ‘선공후득’이란 거에요. 그 말은 중국분들한테 배운 겁니다. 김대중 정부 출범후 첫 남북회담이 98년 베이징 차관급 회의였습니다. 북한이 이 회담에서 비료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우리는 잘됐다 이산가족 상봉시키자고 했죠. 상호주의 원칙으로 하자고 한 겁니다. 그런데 회담이 결렬됐습니다. 그뒤로 대화가 막혀버렸습니다. 그래서 ‘선공후득’으로 갔습니다. 먼저 주지만 결국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달성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북관계의 발전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걸 퍼주기라며 비난했습니다. 퍼주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동안 대북지원을 보면 1년에 국민 1인당 2500원씩 ‘퍼줬습? 求蔑? 통일부에서 여론조사 해서 당신은 1년에 얼마정도 북한을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어보면 평균 1만원 정도까지는 괜찮다라는 답이 나옵니다.

참여정부의 대북정책을 놓고 홍 위원은 비판의 날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임 전 특보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행간을 보면 아쉬움이 배어 있는 걸 느낄 수는 있다.

=제가 어떤 글에서 수구언론들이 왜 북한 ‘퍼주기’는 아우성 치면서 미국의 일방적 요구를 무조건 들어주는 ‘바치기’에 대해선 아무말 안 하는가 한 적 있습니다만…. 지금 노무현 정부는 북핵위기 속에서 북미관계 개선을 위해선 이라크 파병이 필요하다며 연계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전혀 별개문제로 봅니다. 특히 부시 행정부에 대해선 더더욱 파병을 해선 안되는 일입니다.

=(파병문제는 언급하지 않은채) 핵문제는 해결의 방법이 없어서 문제가 되는 건 아닙니다. 미국과 북한 지도자의 해결의지가 있는가, 특히 부시 대통령이 해결할 의지가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건 부시 대통령입니다. 의지만 있으면 내일이라도 곧 길이 열릴 수 있습니다. 외교협상론을 보면 협상을 경마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장애물을 높이면 말이 뛰어넘기를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협상에서도 문턱을 자꾸 높이면 못 들어오죠. 그래서 협상 결렬의 책임을 상대방에 떠넘깁니다. 그러니까 해결의 방법이 문제가 아니라 해결의 의지가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이렇게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부시가 왜 북핵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없는가. 북핵문제를 지렛대로 해서 중국견제를 하기 위해서 또 거기에 미사일방어(엠디)시스템과도 연결시켜 북한이 핵문제를 오히려 해결하지 않는 편이 부시나 신보수주의자(네오콘)들의 이익에 맞기 때문 아니냐는 겁니다. 그럴 때에 노무현 정부로선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할까, 핵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개선의 ‘병행’이란 것도 그 자체로 한계가 있는 것 아니냐는 판단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는 우리의 땅이고, 우리 삶의 터전이고, 한반도의 주인공은 우리입니다. 확실한 주인의식을 갖고 북핵 위기는 한반도의 위기이기에 주인으로서 발언권을 갖고 할말 다 하고 설득할 것은 해야 합니다. 98년 김대중 정부 초기에도 문제는 복잡하고 심각했습니다. 금창리 지하 핵시설 건설 의혹이 제기됐고 북한이 대포동 1호 미사일을 발사했습니다. 미국 강경파들은 북한에 대한 정밀공격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게다가 그해 11월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승리해 상하 양원을 지배하게 됩니다. 결국 클린턴 대통령은 대북정책을 전면검토하라는 압력을 받아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을 대북정책조정관으로 임명했습니다. 페리는 94년 당시에 북한을 치려 했던 국방장관 아닙니까. 우리로선 위기에 봉착했죠. 제가 그때 페리 팀을 만나 8번에 걸쳐 협상을 玖庸?설득했습니다. 미국을 설득해서 정책에 보조를 맞춰나가도록 했더니 북한도 큰 무리없이 협력하는 자세를 보였습니다. 부시 행정부와 네오콘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다는 걸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럼에도 우리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국민들을 설득해서 그 힘을 바탕으로 미국을 설득해야 합니다. 국민들이 힘을 모으면 미국은 국민들의 의사를 존중하는 나라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대미관계에서 참여정부는 역사적 소명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촛불시위 등의 국민의 대미의식이 정권출범에 바탕이 됐고, 노 대통령을 뽑은 국민의 뜻엔 분명 미국과 관계가 수직적 종속적인게 아니라 좀더 수평적 관계가 되기를 바랬던 열망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여정부 출범 뒤 오히려 대미 자주의 노선을 보여줘야 하는 역사적 소명이나 바램을 저버린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듭니다. 실기했다고 할까요, 기회를 잃어버리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참여정부가 그런 방향으로 노력하려 했다는 건 읽을 수 있습니다. 참 어려운 상대를 만나 어려운 환경에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국민들도 좀더 뒷받침을 많이 해줬어야 하지 않았나는 생각입니다.

=이라크 파병이 결국 부시의 당선을 돕는 행위가 될 수도 있잖습니까. 국내적으로 봤을 때도 수평적 관계를 원했던 국민의 바램을 저버리는 것이 되고. 그런 면에서 보면 정말 노무현 정부의 이라크 추가파병, 전투병 파병만은 어떻게든 막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게 우리 국민의 의무라 생각합니다.

=다음 국회로 넘어갔죠? 우리 국회의원들이 현명한 분들이 많으니까 국민의 뜻을 잘 반영하겠지요.


미군이전 문제 등에 이르자, 홍 위원은 한미관계가 수직적 종속적인 불평등한 관계라며 끈질기게 문제를 제기했다.

=요즘 용산기지 문제나 평택으로의 주한미군 재배치 문제가 논의되고 있습니다. 국내의 수구 보수언론들은 주한미군의 성격이 동북아 지역군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이라는 데 주목하기 보다 자주파와 동맹파의 대립, 이런 맥락에서만 보고 있습니다. 결국은 특보 말대로 국민이 얼마만큼 의식이 깨 있느냐가 관건인 것 같습니다.

=용산기지 이전문제도 그래요. 벌써 노태우 대통령 때인 10여년 전부터 제기된 문제잖습니까. 이번엔 차원이 다르죠.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이 전세계에 배치된 미군 기지들을 조정해 지상군 구조를 대폭 바꿔나가는, 즉 한반도에 고착시키는 군이 아니라 긴급대응군형태로 바꿔나가는 개혁과정에 있습니다. 럼스펠드 장관은 ‘군사혁명’이라고까지 했습니다. 용산기지는, 그게 서울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남쪽으로 이전한다고 해서 안보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수도 서울의 도심 한복판에 있는 건 말이 안됩니다. 이번 기회에 옮겨가야는데 미군 스스로의 기지이전 계획에 우리가 부담을 해야 하느냐, 이건 슬기롭게 해야겠죠. 어느 당 어떤 사람들은 수도권 방위가 어려워진다는 데 그건 넌센스입니다. 자주-동맹 논란은 언론에서 불필요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고 봅니다. 이건 대립 모순되는 개념 아니라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는 개념입니다. 제가 2002년 4월 특사로 평양을 방문했을 때 북한이 갑자기 민족공조냐, 외세공조냐 선택하라 해서 김용순 비서와 2시간 동안 논쟁한 적 있습니다. 외세공조와 민족공조는 대립되는 ! 개념 아니다, 한반도 문제는 민족내부이자 국제문제라는 이중적 성격을 띄고 있기 때문에 민족공조를 잘하기 위해서 국제공조를 활성화해야 한다고 얘기했습니다. 폐쇄적 배타적 자주이어서는 안된다. 열린 자주여야 한다고 말했죠. 옛날엔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로 말미암아 고래등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새우 멘탈리티’를 가졌는제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고래 사이 낀 건 맞지 않느냐? 살기 위해선 고래는 아니더라도 돌고래 정도는 돼야 한다고 했습니다. 돌고래는 슬기롭고 덩치도 어느 정도 크고. 북쪽도 일리가 있다며 받아들였다고 생각합니다.

=지정학적 위치를 얘기했는데 반도가 갖고 있는 의미는 해양이면서 대륙이잖습니까.어떻게 보면 분단이란 게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에 의한 분단이고. 두 세력의 찢어짐이 우리 분단으로 나타난다고 볼 때 좀더 거시적으로 해양세력이면서 대륙세력일 수 있는 반도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전 결국 북핵문제도 남북철도라든지, 좀더 가시적으로 ‘선이후난’ 논리로 풀어가면서 냉전의 구조자체를 해체시켜야 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선 역시 노무현 정부가 부족한 점이 많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한반도 냉전구조의 해체, 이건 남북간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남북이 풀려야 적대관계가 사라지고. 북한과 미국이 관계를 개선해야 하는데 이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북한은 어떻게하든 미국이?해야 살 수 있다 생각하고 있는데 북한 핵문제보다 이게 더 어려운 일입니다. 북핵 문제의 실마리가 풀리면 화생방무기, 재래식 무기, 인권문제 들고 나올 거고. 그 다음에 남북 군사력 너무 많은데 감축해 나가야 하거든요. 적절한 수준으로 군사력 균형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정전협정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꿀 수 있는 겁니다. 이를 당장에 바꾸자고 하는 얘기는 맞지 않습니다. 평화하자고 약속하는 건 이미 기본합의서에서 했습니다. 김대중 정부에서 한반도의 냉전구조를 해체하는 시동을 걸어논 것입니다. 계속 움직여서 속도를 내도록 해야 합니다. 국민들이 밀어줘야 합니다 .

=그렇게 밀고나가야 하는 게 노무현 정부의 역할이 아니었나 생각하는데 과연 그랬는지 의문입니다. 예컨대 자주국방 얘기하는데 지금 전시작전지휘권을 미국이 갖고 있는 상황에서 계속 무기 사들이고 첨단장비 갖추는 게 과연 우리 자주국방 능력입니까. 그런데 국방 라인에선 계속 국방비 증액해서 사들이는 데 관심있지, 체제의 문제, 어찌보면 미군에 편입돼 있는, 종속된 편제 속에 있는 구조적인 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부족합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외교 안보 국방에서 어떤 마스터플랜이 있는가 의심이 들게 됩니다.

=그래도 그런 방향으로 70년대 중반부터 노력해왔죠. 율곡사업 등 통해 군 구조도 바꿔나가고. 70년대 중반에 비한다면 엄청나게 발전했습니다.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미국과의 관계에 있어선 많은 문제가 물론 남아있어요. 참여정부가 말하는 자주국방은 그런 측면이 아닌가 싶은데, 이건 쉽지 않습니다. 혼자 할 수는 없고, 미국과의 관계가 있으니까요.

=사실 북한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습니다. 군비 감축 같은 문제엔 북한이 응하지 않는 한 진전을 보기 어려운데. 그들이 왜 남북 군사당국자 회담에 응하지 않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북한은 예전부터 군축을 원하고 있었지요. 작년 6월인가 외무성이 핵억제력에 대해 언급하면서 재래식 무기는 돈이 많이 들어서다라고 한 적이 있는데 진심일 겁니다. 핵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군비 감축이 이뤄져야 할 겁니다. 다행인 것은 정상회담 이후 군사 실무회담이 계속 되고 있고 국방장관 회담을 한번이라도 해서 출발은 해둔 상태라는 겁니다.

=결국은 미국과의 관계가 문제 아닙니까. 과연 한국의 파워엘리트에게서 미국으로부터 벗어나야 된다거나 미국과 대등한 관계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기대할 수 있는지 회의적입니다. 그런 시각은 커녕 세계관이나 가치관은 물론이고 한반도를 바라보는 시각까지 종속적인 시각을 내면화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외교 안보 통일분야의 엘리트들은 미국의 자장 속에서 커온 사람들입니다. 남북간의 긴장이 그들의 힘의 원천이라는 거죠. 미국 네오콘 얘기를 하지만 국내에도 그러한 세력이 분명히 자리잡고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여기에 수구언론이 같이 연동되고요.

=현실적으로 미국은 우리나라에 굉장히 중요한 나라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유일강대국이라서가 아니라 지정학적 위치로 볼 때라도 러시아, 중국, 일본에 둘러싸여 있는데 멀리 있는 미국이 가운데 있어서 균형 잡아주는 게 우리의 생존과 번영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과 우리는 경제적으로도 의존성이 높고,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대주의적 사고를 갖고 굴욕적인 입장에 서는 건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대등한 입장에서 파트너로서 이 지역의 평화 유지하고 경제적 공동이익 추구하는 관계가 돼야 합니다. 또 탈냉전의 과정에서 우리 지위가 상대적으로 많이 올라간 건 사실입니다. 물론 아직 많은 문제들이 남아았지만. 좀더 자주적인 입장에서 국가와 민족의 입장을 생각하면 미국과 좋은 관계로 발전하는 게 가능하다고 봅니다.

임 전 특보를 보면 ‘외유내강’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부드러운 듯 하지만, 자신의 원칙에 대해선 흔들림이 없었다. 고집도 있어 보였다. 15년간 한반도 평화의 길을 이끌어온 힘이었을 것이다. 그는 정치에 관심이 없다. 김대중 대통령과 수많은 토론을 했지만 “물어봐도 내가 워낙 문외한이니까”라며 단 한번도 정치 이야기는 한 적이 없다고 했다. 국정원장으로 재임하면서 2000년 총선을 치뤘다. 그는 한나라당의 한 의원이 국회정보위에서 “사설탐정까지 고용해서 알아봤는데도 이번 국정원은 정말 총선에 개입을 안했다”라는 말을 했는데 여당의원들은 언짢은 표정이더라며 웃었다.

정리 김영희 기자 dora@hani.co.kr, 사진 황석주 기자 stonepo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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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우 2004-02-04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괜찮은 대담을 읽었습니다. 퍼가고 싶네요. 저는 되도록 저의 글로써 꾸밀 생각이라서 남의 글을 잘 안퍼오는데... 다시 한번 읽어가면서 나라와 민족 그리고 국제문제에 대한 시각도 다시 정립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재반론 : 총체적 역사이해가 중요
주익종 교수의 반론에 답한다

2004년 01월 30일   김인호 경성대

▲근대한국의 공업화는 식민지라는 건축물 위에서 진행됐다. 사진은 경성방직 모습. ©
본 서평이 호리 가즈오 교수의 연구에서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이 빠져있어서 의미없다고 반대한 글일까. 아니면 일방적인 수탈론을 옹위하고자 호리 교수의 연구를 매도하려는 음모일까? 결론적으로 말해 주교수의 반비판문은 대단히 경솔하다. 서평자의 32매에 달하는 서평에서 일부가 신문사에서 논점중심의 논의로 편집되어 자칫 호리교수의 연구성과 중 긍정적 부분이 제대로 소개되지 못한 것은 실로 유감이다.

하지만 서평의 골자는 실증의 문제보다는 호리 교수의 동아시아 담론이 또 다른 형태의 식민지 공업화 찬양이나 그동안 일본측이 자행했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무책임성을 합리화할 가능성이 높은 연구라는 점에 대한 우려가 담긴 것이다. 

왜 하필 동아시아 담론인지 굳이 묻지 않아도, 한국사가 분명 세계사적 피조물임에는 틀림없으나 왜 유독 동북아의 발전에 시각이 경도되어 동아 삼국간의 민족적 국가적 모순구조가 사장되고 수탈적 제 관계가 화려한 성장기조 속에서 방치되어야 하는지 그것에 관한 저자의 저의를 의심하는 것은 역사학자의 기본 도리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을 위한 연구인지도 물어야 한다.  

그렇다면 저자가 일본인이 자행했던 식민지배의 긍정적 측면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려했는지 아니면 현 동북아 경제 발전의 원형을 식민지 지배관계에서 확인했다는 사실을 전도하기 위한 것인지 확실하게 답변을 줄 필요가 있다.

만일 서평자가 실증적 연구성과를 무시하는 논지로 일관했다면 일본에서 많은 사실탐구에 나서고 있는 한국학자들을 매도하는 말이기도 하다. 일본인 학자의 우수한 성취는 많은 감화를 동반하며 그런 연구성과는 우리가 충분히 섭취하고 경의를 표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한 실증과 화려한 자료복원에 현혹되어서 역사의 본질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제약을 받을 수는 없다. 물론 오렌지 이야기를 하고 있기에 나는 오렌지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글은 단순한 동호회 잡지가 아니며 경제학자를 위한 경제론만이 아니라 식민지 역사라는 타이틀에서 존재하는 나름의 역사서이다. 그리고 역사라는 이름을 단 이상에 역사적 각도에서 비판될 이유가 있다. 나아가 역사서는 시대적 과제 혹은 사회적 당위성과 긴밀히 호흡을 같이 해야 하며 과학적 역사의식이 연구의 밑바탕에 은근히 깔려서 연구되고 작성되어야 한다.

바른 역사 저술은 시대적 과제와 불가분 연관할 수밖에 없고, 바른 역사의식을 배제하고 존재할 수 없다. 이병도류의 역사연구가 욕먹는 이유는 실증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시대적 의미를 외면한 연구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널리 불리는 대중가요 노래 한 꼭지도 지금은 인기순위로 그것을 평가하지만 언젠간 역사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순간이 올 것이다. 마찬가지로 경제는 경제, 정치는 정치로 파편화된 역사는 제대로 된 역사가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총체적으로 바라보길 원한다. 그러므로 섣부른 동북아 담론은 나름의 진척과정에서 주변의 학문성과를 참고하면서 자신의 길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호리 교수의 연구에 대한 역사학적 평가는 기본적으로 그의 대단한 실증에 대한 것이 아니라 역사의식에 대한 것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물론 글에 따라서 민족이 빠지고, 역사의식이 빠진 글도 존재할 수 있고, 특별한 실증만을 담은 연구도 있을 수 있다. 우리는 그러한 글을 모두 서평의 대상으로 보진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은 분명한 서술 의도를 밝히고 작성된 논문이며, 그에 대한 역사적 관점에서의 평가는 정당하다.

서평자가 저자의 역사의식을 문제 삼는 것은 바로 저자가 결국 말하고자 하는 귀결을 추적한 결과이다. 분명히 호리 교수는 동북아 담론의 원형을 제공하고, 지역사 일국사의 탈구성과 모순을 동아시아적 틀 속에서 용해하여 한반도의 20세기 왜곡된 역사를 희석화시키려는 연구로 귀결되고 있다. 화려한 실증의 용광로 속에 우리 학자들이 하지 못한 치밀함이 비록 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면죄부는 될 수 없다.

열린 마음 그리고 차이를 차별로 보지 않는다는 정신은 필요하다. 앞으로도 일본에서의 연구성과 또한 차분하고 겸손하게 그 수준 높은 실증성에서 얻을 것은 얻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역사는 종합적 학문이며 경제적 측면의 식민지사의 일부분에 대한 집착이 다른 모든 총체적 역사의 잘못된 이해를 동반할 가능성도 한국의 역사학자라면 같이 고민해야 한다.

주 교수가 진정 역사란 무엇인가를 좀더 깊이 있게 생각하는 학자라면, 서평자를 천박, 자질, 공연한 트집 등으로 매도할 것이 아니라, 서평의 내용에 대하여 구석구석 조목조목 비판하는 것이 보다 생산적임을 알아주길 바란다. 나아가 저작의 어떤 특정한 장점만을 이해해 달라는 태도는 대단히 소아적이다.

그리고 출판된 저작의 역자 서문에서도 역자 자신의 논지를 보다 분명히 말해주는 친절도 있어야 한다. 오로지 자신의 이해를 뒷받침하는 일본인학자에 대한 동경과 벅찬 희열로 글이 옮겨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도대체 역사학자라는 사람이 무엇을 위한 연구를 하는지 되묻고 싶다.

마지막으로 역자는 호리 교수의 연구에서 어떤 감화 받은 것 같은데 마치 100년전 나라 판 친일파가 했던 행실과 어찌 그리 닮았는지 놀랍기조차 하다. 왜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학자는 자신의 논리를 설파하는데 늘 일본학자들의 응원을 받아야 힘이 나는지 모르겠다. 진정한 역사학자는 그 저의를 알고 있기에 늘 그들의 혀가 두려울 뿐이다.

김인호 / 경성대,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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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 : 제국주의 비판 빠질 수 있다
김인호 교수의 서평(교수신문 296호)을 읽고

2004년 01월 30일   주익종 숙명여대 

필자가 번역한 교토대 호리 가즈오 교수의 저작, '한국 근대의 공업화'(전통과현대 刊)에 대한 경성대 김인호 교수의 교수신문 서평(2003년 12월 15일자)을 접하고, 필자는 서평이 갖추어야 할 기본 덕목, 한 연구자가 다른 연구자의 연구성과에 대해 가져야 할 태도가 무엇인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김 교수의 서평이 연구서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 전달보다는 주관적이며 부당한 폄훼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학술연구자도 궁극적으로는 입신양명을 목표로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학술연구란 그 이전의 선배들이 쌓아올린 지혜의 건축물에 새로운 벽돌 한 장을 더하겠다는 소박한 마음가짐에서 출발한다. 여러 해 동안 연구자가 열의와 정성을 갖고서 수백, 수천 조각의 이론과 사실의 편린들을 모으고 짜 맞추는 노력을 통해서만 하나의 제대로 된 연구서가 나올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세상에 태어난 모든 진지한 학술연구에는 동학들이 배워야 할 것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그러한 저작물을 소개하는 서평이란 그 책의 연구사적 가치(그 벽돌이 건축물의 어디쯤 있으며 그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를 보여주고, 또한 향후의 계승 혹은 극복의 과제(새 벽돌을 어디쯤, 어떻게 얹을 것인지)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이번의 호리 가즈오 교수의 저작도 마찬가지이다. 이 책은 그가 근대 한국의 공업화라는 큰 주제에 관해 1980년대 초부터 1990년대 전반까지의 10여년간 기울인 땀과 정성의 결정체다.  식민지기의 공업화에 관한 종래의 연구가 일본제국주의를 비판하겠다는 목표 한 가지에만 몰두하여 심층적인 분석 및 함의의 도출에까지 나아가지 못했던 반면(단적으로, 번듯한 연구서 한 권 없다), 이 책은 20세기의 세계사에서 두드러졌던 동아시아 역사의 역동성에 주목하여,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단순히 한국을 수탈하고 파탄시킨 것은 아니잖은가 라는 문제의식에서 치열한 실증작업을 통해 탄탄한 성과물을 내놓았다.

"치밀한 실증분석 작업을 매도해서야..."

그의 주장의 요점은 일제하 한국이 급성장하는 일본 경제권 안에서 그 영향을 받아 상품화 및 시장경제화, 근대 기술 및 지식, 제도의 도입을 경험하면서 사회 근저에서부터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성장이 진행되었으며, 현대 한국의 공업화 및 경제발전도 그 큰 흐름 속에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만 본다면, 어느 연구자의 표현대로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의 이러한 주장이 일찍이 전례 없는 방대한 자료조사 작업과 치밀한 실증분석 및 탄탄한 논리 종합 작업을 거친 것임을 확인한 후에는 일단 고개가 끄덕여질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의 연구에 대한 국내 학계, 특히 한국사 학계의 평가는 ‘식민지근대화론’이라는 딱지 붙이기 식의 매도 일변도이다. 많은 한국사 연구자들이 어찌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미화할 수 있는가라는 원초적 물음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채, 이런 연구를 읽어볼 가치조차 없는 것으로 본다. 이런 태도에서는 본격적인 검토 작업도, 그를 극복하려는 노력도 필요 없기 때문에, 자신들의 연구도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는 점에서 매우 자기파괴적이다.


이번 교수신문의 서평은 전형적으로 그러한 경우이다. 교수신문사는 호리 교수의 금번 저서가 ‘최근 경제사분야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국내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강력한 해외 원군’이라 소개했으며, 김 교수는 본문에서 이 책이 ‘식민지근대화론의 최신 논의를 집약한 저작’으로서, ‘기왕의 근대화론에서 보이는 성장론을 재탕’한 것이며 ‘식민지성이 거세된 식민지연구’에 불과하다고 평했다.


우선, 기본적인 정보 전달부터 제대로 하자. 이 책은 ‘식민지근대화론의 최신 논의’를 집약한 것이 아니라, 그 원조에 해당한다. 이 책은 20년 전에 시작되어 10년쯤 전에 완성되어 출간된 저서이다. 연구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참신성이 없는 저작을 본인이 굳이 번역한 것은, 이 책이 이제는 역사 전공의 학부생, 전문적 연구자들, 그리고 한국경제의 역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반드시 거쳐 가야 할 일종의 ‘고전’이 되었기 때문이다.

식민지지배 미화하려는 '악의' 없다

따라서 이 책은 경제성장사의 시각에서 한국근대경제사를 완전히 새로 재구성한 최초의 연구서이지, 단순한 ‘재탕’이 아니다. 연구사의 흐름을 제대로 짚고 평하는 것이 필요한 대목이다.


아울러 호리 교수가 식민지 경제내의 구조적 모순 및 기형적 생산관계, 식민지사회경제의 파탄을 외면했으며 식민지연구에서 식민지성을 배제했다는 지적도 부당하다. 이런 지적은 마치 오렌지에서 왜 사과 맛은 안 나느냐고 시비 거는 것과 같다. 모든 연구는 결국 한 가지 초점에 맞출 수밖에 없으며, 그밖의 다른 측면들은 무시되거나 경시될 수밖에 없다. 호리 교수는 급성장하는 일본 경제와 얽혀 들어간 식민지 한국경제가 대량의 무역거래 및 투자활동에 따라 시장경제화, 기업설립, 도농간 노동력이동 등에서 심대한 변화를 겪었음을 보이려 한 것이다. 그는 당시의 한국경제가 자립적이었다거나, 구조적 모순이 없었다거나, ‘내실을 갖춘’, 항구적으로 ‘지속가능한’ 것임을 주장한 바도 없거니와, 굳이 그런 함의를 내비치지도 않았다. 이 점들은 그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었을 뿐인데, 그것을 논하지 않았다고 공박하는 것은 공연한 트집이라 할 수밖에 없다.


식민지연구에서 왜 제국주의비판이 빠져 있는가라는 지적은 그 자체가 정당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러한 지적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해롭다. 자신과 입장이 다른 연구자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본래부터 식민지지배를 미화하려는 ‘악의’를 갖고서 연구를 행하지 않은 이상, 그의 입장에 최종적으로 동의하지 않으면 그만이지, 그의 연구 성과 일체를 무시해 버릴 일이 아니다. 속칭 수탈론과 식민지근대화론의 논쟁이 불모적인 것이 되어 버린 까닭은 타인의 연구 성과 일체를 무시해버리는 천박한 태도 때문이었다. 한국 공업화의 역사에 대한 열린 시각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연구자들도 이제 열린 마음을 가질 때가 되지 않았는가?

주익종/ 숙명여대 강사, 경제학

필자는 서울대에서 ‘일제하 평양의 메리야스공업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제시대 한국인 공업 발달사, 기업사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근래에는 경성방직에 관한 논문들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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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성 삭제된 식민지연구...기존 성장론 재탕 수준
본격서평 : 『한국 근대의 공업화』(호리 가즈오 지음, 주익종 옮김, 전통과현대 刊, 374쪽)

2003년 12월 12일   김인호 경성대 

김인호/ 경성대·한국사

최근의 식민지근대화론은 근대화의 내발적 요소에 대한 고민을 교묘하게 흡수론적 관점으로 변용해 식민지 이해의 속류화를 부채질하고 있다. 이른바 일국사적 관심을 배제하려는 원축론, 조선내 시장 확대를 매개로 한 사회적 분업론, 조선인 구매력 확대론, 맨 파워론, 흡수이론 등 식민지 지배에서 파생된 부차적인 영역 그리고 '비자율적인 내발요소'의 주연급 상승을 도모하면서 일제에 의해 왜곡된 식민지상을 그래도 꿋꿋했던 조선인의 모습의 연대기로 대체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그래도 일본의 지배는 남긴 게 있다'는 오도된 식민지상을 창출하는 데 큰공을 세운다. 호리 가즈오 쿄토대 교수의 '한국근대의 공업화'는 이런 식민지근대화론의 최신 논의를 집약한 저작이다.


저자는 분단 아래서도 높은 경제발전을 보인 남한자본주의의 역사적 조건에 대한 몇 가지 의미 있는 지적을 하고 있다. 그는 기왕의 군수공업화론, 생산력확충동인론을 전면 비판하면서 조선내 자생적 소비시장 확대와 사회적 분업 확산을 매개로 공업화의 조건이 확충돼간다는 이른바 분업론적 관점(역내 분업, 사회적 분업)을 공업화 연구에 투영했다. 나아가 이를 기반으로 '제국=지배와 억압, 자기완결', '식민지=수탈, 종속과 파행'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을 비판했다.


또한 일제 지배정책사 중심의 역사인식이나 일국사적 자본주의 발전론이 갖는 문제를 지적하고, 조선의 독자적인 본원적 축적 형태를 상정함으로써 국적자본주의도 아닌 이식자본주의도 아닌 '동북아자본주의의 원형'을 그리고자 했다. 저자의 관심은 이것에 국한되지 않고 세계사적 이해의 투영과 비서구형 자본주의 발전사의 존재를 강조하면서 특별히 동북아 지역 자본주의의 독자적 개성과 그 비교연구를 축적함으로써 이 지역 자본주의 형성에서의 구체성을 확인하고자 했다.


저자의 고민이 어떻게 우리 근현대사 연구에 각인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경제사적 이해만으로 본다면 높은 성취다. 하지만 역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단순한 한국의 준선진자본주의화 라는 문구 옆의 느낌표를 찍을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고도화 속에서 배태된 우리 사회의 왜곡과 역사적 굴절에 대한 물음표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특별히 일제하 조선의 자본주의화라는 미사여구에서 감춰지는 식민지성 문제는 일부 근대화론자들이 아무리 일국사적 틀을 버리고 정책사 중심 연구를 해체하면서 지역사라는 또 다른 설명을 가한다고 해도 사라질 수 없는 그 자체로 세계사이고 보편사의 일부다. 그렇기에 식민지연구는 식민지성의 이해를 기반으로 할 때 보다 보편적일 것이다.


그런데 저자의 식민지성에 대한 인식은 황홀한 경제성장의 현재형에 압도돼 속류화된 채 기왕의 근대화론자의 출발점에서 함께 하고 있다. 서문에서 식민지를 경험했음에도 왜 구미지역이 아닌 일본의 식민지 지역에서 특히 한국만이 자본주의화에 성공해 오늘날 준선진국 진영에 다다를 수 있었는가에 대한 경이감을 드러내고 있다. 쉽게 말해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아시아의 네 마리 룡' 가운데 하나에 대한 역사적 조건을 알고 싶었던 것이고, 종래의 일국사 차원이 아닌 동북아 지역사 차원에서 자본주의 형성사를 보고자 했다. 나아가 한국사회가 왜 식민지시대에 본원적 축적의 진행을 수반해 불가역적으로 자본주의가 강하게 규정하는 사회가 됐는지 실증적으로 밝히고자 했다.


저작 곳곳에서 그러한 역사적 '조건'에 대한 탐구열이 돋보였다. 무역과 생산과의 역학관계에서 기왕의 상품시장화론에 반대하면서 조선내 시장의 확대와 사회적 분업의 확산으로 오히려 역으로 일본과의 무역이 강화되고 무역량이 증가했다고 파악한 점은 새롭다. 그러면서 이러한 공업화의 내적 요소는 일본본토공장의 침투나 혹은 무역관계를 통하여 다양하게 조성된다는 입장이다.


일단 이러한 저자의 논의에 대해 몇 가지 생각할 문제를 보자. 우선 저자는 동북아 지역내 분업 확충과 조선내의 사회적 분업의 확대를 중요한 자본주의화의 단서로 포착하고, 시장적 요소를 원축의 중요한 토대로 파악했다. 이는 종래의 비지론이나 이식자본주의론 등의 이중구조론에 대한 비판적 탐구의 결과였다. 아울러 당시 공업화는 생산재와 중간재 그리고 소비재의 흐름에서 포착할 수 있는 조선내 사회분업의 확산과 관련이 있으며 식민지 구매력의 확대라는 측면이 존재한다.


하지만 저자의 논의는 (1)식민지 경제의 파행을 역내분업이라는 틀 속에서  (2)식민지 사회의 파탄을 동북아 지역사라는 범주에서 (3)조선내 기형적 생산관계의 창출을 이른바 사회적 분업의 확산이라는 논리를 통해 희석시키고 있다. 이는 식민지경제의 전반적 왜곡과 파행을 동북아경제 발전의 효율적 토대로 바꿔서 설명하려는 의도이자, 일본과의 연관에 의해서 조선경제가 존립할 수밖에 없는 실상을 조일공생론으로 치환하려는 것이다.


공업화 과정에서 그러한 조선의 요구('개성')가 존재하고 일본과 공존하려는 지지 세력이 시장을 매개로 존재한다고 해도 이미 그것은 오늘날 가격차나 기술수준 등의 비교우위에 기초한 역내분업론과는 전혀 의미가 다른 대단히 부차적이고 비자율적인 내발요소다. 국민경제의 기반이 존재하지 않은 상황, 기본적인 수급법칙마저도 본토의 영향에서 자유롭기 어려웠던 역사적 조건에서 특별히 경제라고 해서 별다른 독자개성을 발휘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요컨대 저자의 분업론은 또 다른 식민지 종속성의 표현일 뿐이다.


두 번째, 저자의 기왕 연구에 대한 비판적 관점에서 두드러지는 탈이중구조론 문제다. 그런데 이중구조론적 인식이 저자가 말하는 자본주의적 토양과 한반도 지역의 '개성' 있는 자본주의화 가능성이라는 원래의 의지와 어떠한 상호관련이 있는가를 해명할 필요가 있다. 역내분업의 확충에서 빚어진 조선경제의 파탄은 수량적으로만 환산할 문제도 아닐 것이다. 기왕의 논의에서도 보편사적인 영역에서 이탈한 특수한 식민지의 특성만을 밝히려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식민지성이 보편적 역사발전 법칙의 일부이기에 그런 것이다. 이는 저자가 동북아 단위의 자본주의 구성과 진화를 언급하려는 근본적인 취지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그는 한국의 자본주의화를 가져온 역사적 조건에는 일정한 관심이 있지만, 왜 하필 식민지이며, 침략이었는지, 왜 자생적인 동북아 자본주의를 비서구 지역에서 일본이 주도했는지 탐구가 없다. 결국 동북아의 경제적 성공이 지역사적 토양에서 발아했다는 이해 이외 역내분업관계의 왜곡이나 구조적 모순에 대한 총체적 분석이 결여되고, 오히려 분업에서 파생된 자본주의적 긍정적 요소에 대해 斷章取義해 우상화하고 있다. 자칫 일제의 대동북아 경영이 적어도 효율성은 있었다는 논의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세 번째, 자본주의화와 동북아 경제연관 문제에 지극히 관심을 보이다보니 자연히 기왕의 근대화론에서 보이는 성장론을 재탕하거나 양적, 외형적 근대화의 모습에 대한 기대가 가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공업화가 철저히 일본본토 의존으로 진행되면서 그때 형성된 일부의 공업시설도 해방 후에는 무용지물로 변하는 경우가 허다했고, 대규모 공장이라고 하더라도 조선인이 운영하거나 조선인의 자체적인 경영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것은 무척 적었다. 뿐만 아니라 기업운영에 절대 필요한 자금을 대는 은행도 모두 총독부가 지정하는 곳으로만 지원하게 돼 많은 부채를 지고 있는 조선인 자본은 일본인 기업에 비해 열악한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즉 당시 조선공업은 양적으로 팽창했지만 '내실있는 발전'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그것은 저자가 조선에서 내적 분업구조 혹은 순환구조가 존재했느냐 아니냐의 문제로 해결될 소지가 아니었다.


저자의 말대로 제국주의 일본과 식민지 조선간의 지배 수탈 일변도의 획일적인 역사인식은 많은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놓칠 수 있다. 그리고 동북아 지역의 이후 역사가 한반도-중국-일본 등 세 지역의 연대에 의해 더욱 차원 높게 발전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기대한다. 하지만 적어도 일국사적 관심과 이론을 해체하고 동북아 차원의 논의로 진행하는 것을 통해 단순한 자본주의화와 준선진국화의 환상을 심어주는 것에 그칠 경우 그러한 인식은 올바로 현재라는 역사 속에 뿌리내릴 수 없고, 식민지에 이어 또 한번 한반도 역사 앞에 죄를 짓는 일이 될 것이다. 식민지성이 거세된 식민지 연구는 마치 스스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환자를 형색만 보고 정상이라 판정하는 것과 같다.


필자는 고려대에서 '일제의 조선공업정책과 조선인자본의 동향(1936-1945)'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40년대 경제사를 전공하면서 경제사상과 문화사도 함께 연구하고 있다. '식민지조선경제의 종말' 등을 저술했으며, 주요 논문으로 '일제말 조선총독부의 중소공업육성정책과 그 성격'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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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경제학 뒤에 숨겨진 ‘위선’- 미국식 아닌 ‘한국식 경제모델’을 추구해야
인터뷰/ ‘뮈르달 상’ 수상한 장하준 캠브리지대 교수

 

이종태 jtlee@digitalmal.com

 

미국은 철저한 보호무역국가였다

   

-『사다리 걷어차기』는 그동안 경제학자들이 주장해 온 것, 즉 세계경제는 자유로운 시장 덕분에 발전해 왔다는 주장을 뒤집어 놓은 책인 것 같다. 세계경제사에 대한 재해석이랄까.
“현재의 세계화론을 보면 이상으로 삼는 게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까지의 고전적 자유경제시대다.그러나 사실 당시의 자유란 것은 결국 선진국의, 그것도 가진 자의 자유였을 뿐이다. 전반적으로 엄청나게 폭압적인 시대였다. 이 책에서 나는 이 같은 시대를 미화하는 부분을 지적하려고 했다. 주류 경제학에서는 절대 그 시대가 잘못된 역사라는 것을 얘기하지 않는다. 선진국이 발전한 이유가 자유무역 때문이라는 이데올로기를 깨보려는 것이 집필의도였다.”
-책을 보면 공식적 역사 속에 숨겨진 역사, 또는 숨겨진 학자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런 부분을 재발굴한 이유는 무엇인가.
“미국 초대 재무장관인 알렉산더 해밀턴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우리가 흔히 독일에서 발명한 것으로 아는 ‘유치산업 이론’(후진국 정부는 관세?보조금?쿼터 등으로 선진국에 비해 ‘유캄한 자국의 신흥산업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처음 학문적으로 정형화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미국인들도 잘 모른다. 10달러 지폐에서 매일 보는 사람인데 말이다. 해밀턴은 미국의 발전기에 당시 선진국인 영국 경제를 추격하는 시스템을 고안한 사람이다. 이밖에도 미국의 경우 19세기 유명한 경제학자들은 거의 다 보호무역주의자이고 제도경제학자였다. 그러나 현재 주류경제학계에서 이들의 역사는 언급도 되지 않는다.”
-나온 김에 미국 얘기를 좀더 해보자. 책 내용을 보면 남북전쟁부터 2차세계대전 까지는 미국이 가장 강한 보호무역주의국가였다고 나와있다.
“미국은 당시 공산품 관세율이 세계에서 제일 높았다. 그때 아담 스미스, 장 바티스트 세이 등 유럽의 주류 경제학자들이 전부 ‘땅 넓고 농업자원 풍부하니까 미국은 농업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요즘 선진국들이 후진국들한테 하는 소리와 흡사하다. 그런데 해밀턴이 등장해서 ‘미국은 자유무역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강변했다. 해밀턴은 생전에 자신의 주장이 완전히 관철되는 것을 못 봤지만, 결국 미국은 1830년대부터 완전히 그의 정책기조로 나갔다. 링컨도 당시에 가장 열렬하게 유치산업 보호론을 주장한 정치인 중 하나였다. 그가 대통령이 되면서 관세를 종전의 두 배로 올려버렸다. 링컨의 경제보좌관 중 하나인 헨리 캐리는 당시 미국에서 제일 유명한 경제학자였지만 지금 헨리 캐리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주류경제학자들이 미국 보호무역의 역사를 ‘어두운 과거’라고 묻어버렸기 때문에 해밀턴과 더불어 캐리 역시 잊혀져버린 것이다. 미국 시민전쟁(남북전쟁)은 두 가지 문제, 즉 노예와 관세 때문에 터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관세문제가 더 직접적인 원인이다.”

   
발전기에 자유무역 거부한 국가만 성공

-영국은 어땠나. 처음부터 자유무역으로 발전한 나라였나.
“전혀 그렇지 않다. 어찌보면 미국보다 더한 역사왜곡이 거기 숨어 있다. 영국이야말로 보호무역의 원조격이다. 14, 15세기 무렵 유럽의 산업중심지는 네덜란드, 벨기에, 플랑드르 지방이었고, 영국은 유럽의 변두리였다. 그 당시 소위 ‘하이테크산업’은 모직공업이었다. 영국은 양 키워서 양털을 수출하는 원료수출국이었다. 에드워드 3세, 헨리 7세 등 영국 왕들은 원료공급국의 위치를 벗어나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직물 분야를 장려하기 위해 보호관세를 매기고 외국에서 기술자를 정부 돈 주고 초빙하는 등의 정책을 폈다. 특히 1721년엔 영국 최초의 수상이라는 로버트 월폴이 무역정책을 개혁했는데 그것은 1960~1970년대의 한국이나 일본이 썼던 정책과 상당히 비슷하다. 우리나라가 수출장려를 위해서 많이 쓰던 제도 중 하나가 수출원료관세환급이라는 제도였다. 원료를 수입하면 관세가 붙는데, 그 원료로 제품을 만들어 다시 수출하면 처음에 냈던 관세를 돌려주는 거다. 물론 국내시장에 제품을 팔면 그 돈을 돌려주지 않는다. 이렇게 수출을 장려한 것이다. 나는 처음에 이 제도를 일본이 만든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이미 17, 18세기에 영국에서 월폴이 그 제도를 본격적으로 시행했던 것이다.”
-결국 지금 말씀하신 게 책의 내용이라면 이른바 자유시장이 경제질서의 시금석처럼 된 ‘지금, 여기’에 대한 비판인 셈이다.
“그렇다. 말하자면 자유시장이라는 게 선진국들의 이데올로기다. 그것을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인 나라는 발전을 못하고, 미국이나 독일처럼 무조건적인 자유무역을 강력히 거부한 나라는 성공했다.”
-개발도상국들이 자유무역으로 훨씬 불리해졌다는 것을 실증할 수 있는가.
“경제성장률을 봐도 후진국들은 1960~1980년대에 보호무역을 주된 무기로 산업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신자유주의가 득세, 각종 투자협정, WTO, 지역 FTA 등이 등장하면서 자국 경제를 보호할 만한 수단이 줄어들었다. 시장자유주의자들은 ‘옛날의 수입대체공업화’가 실패했기 때문에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편집자 주 : 수입대체공업화란 수입품을 대체하는 산업을 국내에 육성해서 공업화를 달성하려는 개발도상국의 경제개발 전략으로 수입품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는 수단 등을 통해 국내 공산품 기업을 보호하는 것이 일반적.) 그러나 실제로 경제성장률을 보면 당시 후진국 평균성장률은 3%대였다. 이 후진국들이 1980년대 이후엔 규제를 풀고 개방을 하게 되는데, 평균성장률을 보면 1.5% 정도밖에 안 된다. 그것도 인도나 중국같이 완전히 시장개방하지 않은 나라들이 ‘선방’해서 그 정도다. 예를 들어 남미를 봐라. 수입대체공업화가 실패했다면서 자유화하고 개방?탈규제했지만, 지난 20년 동안 평균 경제성장률이 0.6%에 불과하다. 남미는 과거에 3%씩 성장했는데 말이다.”


한국은 아직 완전자유시장 도입하기 일러


-한국도 수입대체공업화를 했다고 할 수 있겠다.
“한국이야말로 영국, 미국 등 유치산업보호국가의 법통을 잇는 나라다. 사실 독일은 1830년대에 관세동맹을 했지만 통일된 나라가 아니었고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군수산업으로 산업화가 왜곡되기도 했다. 영국, 미국처럼 깔끔하게 유치산업보호론으로 산업화된 나라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영국, 미국 이후에 일본, 한국인 것이다. 한국이 처음에 포항제철 지으려고 돈 꾸러 다니니까 세계은행에서 미쳤다고 욕했다. 그리고 자동차 한다고 그러니까 세계에서 ‘돌았다’고 그랬다. 조선산업도 마찬가지다. 당시로 보면 말도 안되는 산업들만 한 것이다. 그리고 성공했다. 물론 국민들의 피땀이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어쨌든 한국은 유치산업보호론을 통한 발전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대체적인 경제발전 패턴이 발전기에는 보호주의를 채택하다가 일정 수준이 되면 자유주의를 채택하는 것 같다. 한국의 경우는 옛날의 보호주의를 벗어 던지고 이제 자유주의로 가야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어떻게 보나. 한국이 자유주의해도 계속해서 발전할 수 있는 위치에 왔다고 보는가.
“나는 아직 그 위치까지 왔다고는 보지 않는다. 겨우 진입하려고 하는 상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일본과 자유무역협정해서 이득을 볼 수 있는 나라인가. 우리나라는 일본에 적게는 20년, 크게는 40년 뒤져 있다. 물론 반도체처럼 1등하는 것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선진국은 아직 멀었다.”
-그렇다면 한국의 경제발전 과정을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일까.
“1960년대 초에 아프리카 가나가 우리보다 1인당 소득이 50%나 높았다. 그때 가나가 1백28달러고 우리나라가 82달러였다. 미국의 해밀턴이 그랬듯이 그런 나라를 현재처럼 바꿀 수 있는 시스템을 짠 게 박정희 정권이라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물론 인권탄압 등 나쁜 짓도 무수히 했다. 내 이야기는 다른 나라들은 성장도 못하고 인권도 보장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나라들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한국이 낫다는 것이다. 그러나 흔히 보는 박정희 찬양론과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그런 주장들은 사실 역사의식을 아예 가지고 있지 않다. 예컨대 이탈리아의 할아버지들이 기차가 늦게 오면 ‘무솔리니 때는 기차가 딱딱 정시에 왔다’고 불평하는 것과 같다(웃음). 지금 박정희의 샴쌍둥이를 찾는다면 ‘옛날 것을 싹 쓸어버리고 소위 글로벌 스탠더드를 도입해서 우리도 미국식 자본주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또한 역사의식 부족에서 나온 것이다.”


글로벌 스탠더드는 ‘빛 좋은 개살구’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지구적 규범)는 무역과 자본을 가리지 않는 자유화라고 볼 수 있다. ‘글로벌’엔 지구적, 세계적이란 뜻이 있는데, 과연 그만큼 보편적인가.
“그게 중요한 문제다. 실제로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내세워지는 것들 중엔 영미식, 특히 미국식 제도가 많다. 미국에서 시행하는 제도니까, 그게 마치 선진국의 전부인 것처럼 받아들인다. 예를 들어 (글로벌 스탠더드로 따지면) 한국 기업들은 (1997년 이전엔) 부채가 많다고 공격받았지만, 선진국들도 마찬가지였다. 1980년대 기준이지만,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모두 다 우리보다 기업 부채비율이 높았고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은 우리나라랑 비슷했다. 부채비율 낮은 게 좋다면, 멕시코, 브라질은 미국보다 낮다. 그렇다고 해서 이 나라들이 선진국인가. 공기업 민영화만 해도 그렇다. 오스트리아, 프랑스에는 공기업들이 수두룩하다. 노르웨이, 핀란드도 나라마다 차이는 있지만 마찬가지다. 삼성 자동차가 르노에 팔린 것이 ‘시장주의의 승리’라며 좋아한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르노라는 회사는 1996년까지 완전 공기업이었고 삼성을 살 때까지만 해도 주식의 44%를 정부가 갖고 있는 사실상 공기업이었다. 따라서 삼성을 르노한테 팔면 그건 민영화가 아니라 ‘국영화’다. 다른 나라 국영화라서 그렇지(웃음).”
-미국의 경제규범을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하는 셈인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인가.
“미국의 경우 연방정부가 상대적으로 산업정책을 만들지 않으니까 정부개입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주정부들은 사실 상당히 개입하고 있다. 연방정부도 연구개발지원(R&D)에서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개입주의적이다. 전체 R&D 비용의 60~70%를 연방정부에서 낸다. 국가 주도 경제라는 일본이나 한국도 20% 정도에 머무는 것을 볼 때 엄청난 규모다. 그런데 미국은 밖에 나가서 ‘이건 산업정책이 아니라 그냥 연구개발지원이다’라고 말한다. 그걸 우리나라는 순진하게 믿는 거다. 미국이 말하는 것을 글자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한국은 미국식 자본주의로 가자면서 미국도 제대로 못 배우고 있다. 미국식이냐 북유럽식이냐 혹은 보호주의냐 자유주의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한국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그에 맞는 모델을 만드는 게 먼저다.”


국민과 재벌 간의 ‘대타협’이 필요하다


-요즘 한국 경제가 매우 어렵다. 그런데 일부 대기업은 오히려 수익률이 상당히 높아졌다. 모두 ‘경기가 좋지 않아 죽겠다’고 하고, 실업난은 개선 기미가 없고, 금융시장마저 흔들리는 상황에서 기업 수익률만 괜찮다는 것은 참 이상하다. 이 같은 현상은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와도 관련되어 있는가.
“많은 기업들이 망했고 반면 살아남은 기업들은 예전보다 이윤을 많이 내는데 그게 국민경제에 도움이 안 되고 있는 것이다. 기업들은 투자를 하지 않고 경영권이 불안하니까 그걸 방어하느라 급급하다. 외국인 주주비율 높아지면서 배당요구가 높아지는 것도 상당한 압력이다. 물론 그 외국인들이 나빠서가 아니다. (외국인 주주들이 사는) 나라들은 고령화 사회이기 때문에 금융투자를 해서 고배당을 받아내는 게 적합한 방식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아직도 투자하고 성장해야 하는 나라인데, 그 배당에 맞추려다 보니까 배당액은 옛날보다 3, 4배 늘어났다. 투자는 옛날의 1/3밖에 안 되고. 그러니까 일자리는 안 생기고 청년 실업문제가 터지는 것이다. 지금 잘나가는 기업들은 투자는 않고 금융에만 열을 올린다.”
-최근 엘지카드 사태로 보면 책임에서 대안에 이르기까지 논란이 많다. 어떻게 보나.
“엘지의 경우 오너측에게 ‘주식으로 담보로 잡고 출자를 더 하라’고 했지만 사실 그건 주주자본주의원리에 맞는 것도 아니다. 주주자본주의는 유한책임제니까 회사가 잘못되면 자기가 잃은 돈만 털고 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재벌들은 ‘우리가 왜 그렇게까지 해야되냐’고 반발한다. 기본적으로 영미식 시스템으로 가면서 경제활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그런 고육지책으로 갔다. 그러나 그동안 한국의 금융정책은 장기적으로 지탱될 수 없는 정책이다.”
-선생님께서는 언젠가 하나의 대안으로 ‘대타협’을 말한 적이 있다 올들어 한국에서는 노동자를 비롯해서 굉장히 많은 이익집단들이 나섰고 충돌도 많았다. 만일 국민과 재벌들이 대타협을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정치적인 타협이 필요하다. 재벌을 통제하겠다는 과정에서 생각해낸 방법이 주식시장을 통해서 해결하자는 발상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경제단계에 맞지 않는 배당정책, 투자정책을 써야 했다. 그 상황을 풀어줘야 하는데, 그동안 국민들의 희생으로 성장한 재벌들이 거만하게 굴어왔기 때문에 국민감정상 용서가 안 된다는 것이 문제다. 그러나 재벌이 고사하면 가장 큰 피해는 국민이 본다. 지금은 거꾸로 가서 기업들 법인세를 깎아준다고 하는데 그보다는 북유럽처럼 기업들에게 세금을 많이 내게 해서 복지정책을 확대시키고 노조도 확실히 인정하게 만들어야 한다. 대신 국민들은 재벌들의 경영권을 보장해 주는 식으로 타협할 수 있다.”


대안적 세계화를 고민하자


-대안적인 세계화포럼을 만드신다고 들었는데 여기에 대해 말해 달라.
“아직은 가칭인데 ‘세계화와 개발 포럼(globalization & development forum)'이 그 명칭이다. 세계화 속에서 후진국 문제를 바라보자는 포럼이다. 현재 세계화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아젠다를 짜보자는 것이다. 인도 델리대학 디팍 나이야 총장과 내가 공동의장이다. 우리는 다보스 포럼이나 세계사회포럼처럼 끼리끼리 모이는 게 아니라 기업인, NGO, 정부, 노동계, 학계 등 여러 다른 그룹의 사람들을 모아보려 한다. 처음에는 소규모로 출발해서 한해 한해 유기적으로 키워나갈 생각이다. 현재 내락받은 참여인사들 중에는 전 아일랜드 대통령인 메리 로빈슨 여사 등이 있고 스티글리츠 교수와도 대화를 나누고 있다.”
-끝으로 세계화와 관련해서 우리가 가야 될 방향을 제시한다면.
“1964년 일본이 OECD가입하면서 자본시장을 개방하게 됐다. 당시에 미국 제네럴모터스 자동차회사 하나가 일본의 10개 자동차회사 모두 합친 것보다 규모가 컸다. 그래서 ‘열면 다 잡아먹힌다’는 위기의식이 일본 내에 팽배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관련기업들이 서로 우호지분을 확보해 줬다. 주거래은행이 3% 정도 사주고, 보험회사가 2% 사주고 하는 식으로 각 기업들이 50% 내지 60% 정도의 우호지분을 확보한 것이다. 그래서 막상 자본시장이 열린 뒤 미국이 이걸 다 잡아먹어야겠다고 들어왔지만 아무리 사모아도 일본기업들을 인수할 수가 없었다. 적게는 50% 많게는 70%의 주식이 살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회사금고에 주식을 넣고 잠가버렸으니까 당연한 일이지만…. 요즘에야 다른 방어기제가 많지만 개방 초기에는 이 방법이 없었으면 도저히 방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기존의 틀 속에서도 뜻이 있으면 돌파할 방법을 찾을 수 있다. 하루라도 빨리 지금의 경제시스템을 한국적 상황에 맞게 교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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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이종태 기자 jtlee@digitalmal.com
정리 박권일 기자 kipark@digitalm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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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슈레이가 헤겔과 스피노자를 대립시키고 후자의 손을 들어준 것, 신중형이 파노프스키가 뒤러를 통해 유럽 르네상스를 축으로 하는 유럽중심주의를 구축하는 과정을 비판한 것, 츠베탕 토도로프가 그의 <일상 예찬>에서 17세기 네델란드 장르화에서 발견한 (나의 개인적인 造語지만) '비연속적이면서 순간적인 영혼의 도약' 등은 뭔가 공유하는 바가 있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그의 '까이에 쇼비지' 시리즈 중 <곰에서 왕으로>편에서, 대칭성 사회와 비대칭성 사회를 대립시킨다. 문화와 자연의 구도가 문명과 야만의 구도로 바뀌는 과정을 설명한다. 그리고 여기서 불교가 차지하는 독특한 위상에 주목한다. 불교는 비대칭성 사회 속에 자연의 힘(空)을 다시 끌어들여 문명과 야만의 구도를 해체하고 문화와 자연의 구도를 회복시키고자 한다.

비대칭성 사회는 외부성(자연)을 내부성(사회)으로 끌어낸(테크네) 사회다. 대칭성 사회에서 자연은 인간을 위협하면서 동시에 인간에게 베푸는(포이에시스) 존재이고, 곰(혹은 범고래, 표범, 연어 등)은 인간(특히 샤먼이나 전사)과 자연이 제한적으로 교류하는 신비한 존재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비밀스런 어떤 것을 끌어내어(테크네) 그것을 자기들 사회 속으로 가져온다. '검'이나 '불과 물을 다루는 능력' 등이다. 자연의 비밀을 가진 곰(곰의 비밀)이 인간 세계로 끌어들여와지고 곰은 곧 왕이 된다. 자연의 비밀을 획득한 왕은 절대자가 되고 인간 세계는 그 절대자를 중심으로 서열화되며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이전의 대칭성을 상실한다. (반지의 제왕에서 원정대는 사우론이란 악 자체를 제거하기 보다는 반지를 파괴한다. 왜 그렇게 번거롭게? 위의 설명에 따른다면 반지는 자연에서 추출된 검으로 대칭성을 파괴한다. 따라서 사우론이 아닌 반지가 파괴되어야 하는 것이다) 

비대칭성 사회에 외부는 없다. 자연마저도 이제는 내부의 일종으로 분석,해체,재조립되는 것이 된다. 헤겔식으로 보자면 인간의 안티테제였던 자연과의 대립이 지양되어 인간 세계 속으로 '발전적으로' 흡수되는 것이다. 대립, 지양, 발전이란 구도는 서양에서 좌파든 우파든 공유했던 모델로 그들이 외부로 팽창할 때마다 대립된 외부는 지양되어야 할 자연이 된다. '동양'도 그런 자연이었다. 이 과정을 통해 빠져나갈 수 없는 거대한 우리(cage)가 완성된다. 공간적 팽창과 함께 과거와 미래도 함락된다. 네버네버 랜드의 동물원의 일원으로 태어나 우리는 거기서 나고 크고 죽는다. 우리의 존재는 네버네버 랜드의 위대함을 장식하는 존재로 머문다. 스피노자식으로 말한다면 우리는 '코나투스'를 상실한다. 그러나 그런 우리가 순간 외부를 발견하는 순간이 있다. 불교는 그 외부를 재빠르게 포착하게 해주는 신념체계인지도 모른다. 외부를 발견하는 순간 거대한 우리(cage, we)는 공허한 것이 된다. 우리는 각자 훨훨 날아갈 수 있다. 츠베탕 토도로프의 <일상예찬>에서 예찬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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