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James의 컴백

마틴 스콜세지는 미국과 미국 문화의 기원을 탐색하는 그의 여정에서 '블루스'를 선택했다. 빔 벤더스의 이 영화에는 미국 대중 문화의 핵심요소가 모두 압축되어 있다고 해도 좋다. 그걸 간단히 세 명의 사라진 블루스 가수를 다룸으로써 전달한다. 눈 먼 윌리 존슨, 스킵 제임스 그리고 J.B. Renoir... 이들은 각각 공유점과 차이점이 있다. 공유점은 '너머'이고 차이점은 각각 '너머', '견딤', '넘어'다. 견디거나 넘어서는 것은 결국 너머의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종착된다. 스킵 제임스의 노래는 자신의, 혹은 흑인이나 고통받는 자들의 삶을 노래로 지어부름으로써 이 세상에서 삶을 미소지으며 '견디게' 하는(혹은 Skip하게하는) 방법이다. 반면 J.B.Renoir의 노래는 동정도 정의도 없는 세상에 대한 즐거우면서도 격렬한 외침이면서 그런 세상을 '넘어'서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자기/요나를 삼킨 고래는 그를 다시 토해낼 수 밖에 없다고 그는 노래 부른다.) 그러나 이 두 명은 모두 눈 먼 윌리 존슨과 마찬가지로 저 '너머'에 대한 동경을 공유한다. 스킵 제임스는 불뚝거리는 삶을 노래하다가 어느 순간 사라져 영가 가수가 되고 르느와르는 시키지도 않은 영가를 부르면서 좌중을 썰렁하게 한다. 빔 벤더스는 블루스의 뿌리가 바로 눈 먼 윌리 존슨이 추구했던 '너머'의 세계에 대한 동경에 있음을 거의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으며, 그것은 영화의 처음과 끝을 광대한 우주와 보이저호로 도장을 찍어놓는다. 그들의 노래는 보이저호에 실려서 그들이 예상하지 못해던 방식이긴 하나, 지구 너머의 세계로 지금도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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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6-12 20: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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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증인’ 앞에서 부끄럽다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 혁명가들보다 더 비타협적으로 군대를 거부했던 그들의 정신 덕분에 결국…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2004년 5월21일 서울남부지방법원 이정렬 판사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이유로 기소된 여호와의 증인 신자 4명 중 3명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정부 수립 이래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1만여명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감옥에 보낸 끝에 나온 새로운 판결이다. 획기적인 판결이란 바로 이런 때 쓰는 말인가 보다. 이번 판결은 1심 판결로 아직도 항소심과 대법원의 최종 판결을 거쳐야 하지만,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의 해결이 더 이상 미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 1976년 3월19일 39사단 헌병대 입창 중 구타로 인한 비장파열로 사망한 이춘길(위 가운데). 군 당국의 조치는 그의 장례에 부대장 명의 부의로 1만원을 보낸 것이 전부였다.

‘오욕’의 사법부 역사를 떠올리다

나는 이번 판결을 보면서 1971년 사법파동 이래 한국의 사법부가 걸어야 했던 ‘오욕’- 전두환 시절 대법원장을 지낸 이영섭씨가 퇴임사에서 한 표현- 의 역사가 떠올랐다. 한국의 사법부는 사법부가 인권의 최후의 보루여야 한다는 시민들의 여망에 부응하지 못한 채 오욕의 길을 걸어왔고, 안팎에서 사법 개혁을 촉구하는 소리는 “법관은 판결로 말한다”는 말만 할 뿐 제대로 응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 젊은 법관이 진짜로 판결로 말해버렸다. 시민들의 신뢰를 받지 못했던 사법부가 이제 인권의 최후 보루로 거듭나려 한다고!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입을 모아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분단 상황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양심의 자유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한국의 정황상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50여년간 진행된 재판에서도 번번이 이런 정황 논리로 헌법적 권리인 양심의 자유가 무시돼왔다. 이번 판결은 정황 논리 이외에 변변한 헌법적 근거 없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을 인정하지 않았던 대법원의 판례를 깨고, 헌법상 양심의 자유에 기초하여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헌법이 장식품처럼 듣기 좋은 말만 나열해놓은 사문서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을 규정하는 권리장전임을 일깨워준 명판결이다. 아마도 한국 사법 사상 이번 판결보다 더 적극적으로 인권을 옹호하고 신장하는 데 기여한 판결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국의 남성 판사들은 대개 법조인으로서 첫발을 군법무관으로 내딛게 된다. 군법무관이 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집총거부자들을 항명죄로 처벌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간단한 사건도 공소장이 한 페이지는 된다지만, 집총거부자들의 공소장은 다섯줄 정도였다고 한다. 한 사람을 3년 정도 감옥에 처넣는 판결을 내리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단 3분여. 누구에게나 돌이켜보면 부끄러운 일이 있게 마련이지만, 아마도 한국의 법관들 대부분에게 군법무관 시절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너무 쉽게 처벌한 것은 쉽게 잊어버릴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양심의 자유의 너무도 명백한 헌법적 근거와 아울러, 아마도 이 점이 보수적인 법원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관한 한 사회 일반에 비해 좀더 열려 있는 입장을 보여오게 한 것은 아닐까?


△ 군 당국의 사망진단서.

이 땅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지는 60년이 넘지만, 이 문제가 사회적으로 공론화된 것은 불과 3년여에 지나지 않는다. 2001년 2월 <한겨레21> 345호에서 약 1600명의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투옥돼 있다는 기사가 보도되기까지, 한국 사회는 이 문제에 대해 완벽하게 무지했다. 이 기사를 보고 많은 인권운동가들이나 진보적 지식인들이 부끄러워했다. 사실 여호와의 증인들이 집총을 거부해서 감옥에 간다는 거야 누구나 다 아는 일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우리는 이 때문에 감옥에 가는 사람들이 몇명이나 되는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1990년대의 인권운동에서 가장 상징적인 해결과제는 비전향 장기수였다. 비전향 장기수가 누구인가? 그들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배척받는 ‘빨갱이’가 아니었던가? 비전향 장기수 문제가 한국의 인권운동에서 당면 핵심과제로 떠오른 것은 ‘빨갱이’에게도 인권이 있다는 인권의 보편성에 대한 자각이 뒤늦게나마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인권의 보편성이 적용돼간 과정을 보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로 인해 징역을 살아야 했던 여호와의 증인들은 ‘빨갱이’보다도 더 못한 처지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2000년 6월15일 남북정상회담으로 비전향 장기수 문제가 대부분 해결된 다음에야 여호와의 증인을 중심으로 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문제가 인권 현안으로 등장한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국가주의·군사주의·권위주의가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그야말로 ‘왕따’를 당해왔다. 그들은 묵묵히 자신들의 내면의 명령에 따라 온갖 박해를 무릅쓰고 집총을 거부해왔다. 친일파들이 경영자로 등장한 대한민국에서 사상이니 양심이니 하는 것은 차라리 경멸의 대상이거나 위험물이었다. 비단 친일파들만이 아니었다. 양심과는 거리가 먼 비도덕적인 자들과의 싸움에 익숙해져 있는 탓인지, 학생운동이나 민주화운동을 하던 사람들도 너무 일찍 ‘전술’에 눈을 뜨며 약아져갔다. 그 시절 사람들은 경찰에 잡혀가면 대부분 별다른 양심의 가책 없이 반성문이나 각서 쓰고 ‘훈방’되는 데 익숙했다. 그런 우리에게 전향서라는 ‘그까짓 종이 한장’ 쓰지 않고 수십년 감옥에 앉아 있는 비전향 장기수들이나, 눈 딱 감고 4주 군사훈련 받으면 병역특례로 빠지는 길이 널려 있는 한국에서 3년의 징역을 택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존재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여호와의 증인, 1930년대부터 시련

일본 제국주의가 만주를 군사적으로 강점한 1930년대부터 여호와의 증인들은 탄압받기 시작했다. 1939년 1월 일본에서 두명의 여호와의 증인 청년들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선언하여 투옥됐다. 전쟁을 준비하는 자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광적인 평화론자’로 몰아붙였다. 1939년 6월 일제는 일본, 대만에 이어 조선에서도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를 단행했다. 조선에서 체포된 여호와의 증인은 38명이었는데, 당시 교세가 미약했던 여호와의 증인 거의 전원이 체포됐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중 5명은 옥사했고, 해방이 되어서야 옥문을 나선 사람은 33명이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지만, 많은 민족주의자들이나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일제의 탄압 아래 무릎을 꿇었고, 또 신사참배 강요로 인해 좋은 목사님들도 믿음에 상처를 입었다. 해방 당시 전국의 교도소에서 비전향을 견지하고 있다가 옥문을 나선 사회주의 혁명가는 20여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여호와의 증인들은 33명이 비전향으로 옥문을 나섰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평신도들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여호와의 증인들이 일제의 전쟁 수행에 협력하지 않고 총을 들기를 거부하여 옥고를 치른 것이 이른바 등대사(燈臺社) 사건이다. 이 일을 두고 여호와의 증인들은 종교적 믿음을 지키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라 말하지만, 정부가 편찬한 독립운동사 서적에는 등대사 사건이 항일운동의 하나로 기록돼 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펴낸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의 별집은 일제강점기에 투옥된 독립운동가들의 신상기록카드를 모아놓았는데, 여기에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투옥된 여호와의 증인들의 사진이 첨부된 신상기록카드가 여러 장 수록됐다.


△ 일제강점기에 여호와의 증인들이 일제의 전쟁 수행 협력을 거부해 옥고를 치른 등대사(燈臺社)사건은 독립운동사 서적에 ‘항일운동’으로 기록돼 있다. 사진은 이 사건을 기록한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의 ‘사상휘보’ 자료.

여호와의 증인들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는 일제강점기나 대한민국정부 수립 뒤나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똑같은 행동을 했을 뿐이다. 똑같은 행동을 했는데, 일제강점기에 한 행동은 독립운동으로 찬양받고, 군사독재 시절에 한 행동은 반국가사범으로 처벌받는다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나치는 여호와의 증인들 수천명을 강제수용소에 감금하고 “국법을 준수하고 손에 무기를 들고 조국을 방어”한다는 내용의 선언문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다. 서명 강요라는 형식은 없었다 뿐이지 박정희도, 전두환도, 김영삼도, 김대중도 그리고 노무현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똑같은 논리를 강요하며 처벌하고 있다. 그래서 똑같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하고 할아버지는 일제의 감옥에 갔고, 아버지는 군사독재의 감옥에 갔고, 그리고 민주화가 되었다는 마당에 아들은 ‘민주화된’ 감옥에 여전히 간다. 남부지법의 판결이 있던 2004년 5월21일까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에게는 여전히 일제강점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헌병대 입창중 맞아죽은 청년

일본의 극우파들이 ‘대일본제국의 마지막 군인’이라 찬양한 박정희가 다스리는 병영국가에서 군인이 되기를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철저한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병역기피율 0% 프로젝트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은 최고의 걸림돌이었다. 1975년 2월18일 병무청장은 대통령 박정희에게 “종교적인 양심을 이유로 병역의무를 거부하는 일부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을 계몽 선도하기 위하여 그들 대표자와의 간담회를 개최”했다면서, 여호와의 증인 신도 대표들이 “일부 신도의 병역기피 행위는 그릇된 소행”임을 인정했고, “병역기피 방조 등을 하지 않고 병역의무자의 의무 이행을 권유”하기로 했다고 보고했다. 한마디로 이 보고는 허위였다. 2001년까지 아무런 소리소문 없이 매년 수백명씩 감옥에 끌려가면서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견지해온 여호와의 증인들이 병역거부가 “그릇된 소행”이라고 인정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런 허위보고를 올린 병무청이나 군당국은 이를 실현하기 위해 무리수를 두지 않을 수 없었다. 병역기피율 0%를 달성하기 위해 징역을 살고 나오는 사람들- 1970년대에는 지금과는 달리 징역을 살고 나와도 영장이 계속 발부됐다- 이 채 교도소 문을 나서기 전에 병무청 직원들은 이들을 입영통지서도 없이 다시 잡아가 총을 주고 다시 거부하면 재판에 회부하는 악랄한 방식을 사용했다. 아무리 흉악범이라 해도 형기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을 교도소 문 앞에서 가족이 기다리는데 손 한번 잡아볼 시간도 주지 않고 다시 잡아가야 할 절박한 사연은 어디에 있었을까?

이런 분위기에서 맞아 죽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경남 거제 출신의 이춘길이라는 청년은 1976년 3월19일 39사단 헌병대에 입창 중에 구타로 인한 비장 파열로 사망했다. 군 당국이 취한 조치는 그의 장례에 부대장 명의로 부조금 1만원을 보낸 것이 전부였다. 살벌했던 유신시대에 생때같은 아들을 잃은 홀어머니는 진상조사니 배상청구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김종식이라는 청년도 집총을 거부하다가 논산훈련소에서 맞아 죽었다. 군복무만 위험한 것은 아니었다. 병역거부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은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일부에서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병역기피 수단으로 악용될 것을 우려한다. 병무청에서는 “양심적 병역기피”라는 희한한 말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한다. 또 일부에서는 여호와의 증인 신자가 급격히 늘 것을 걱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복무 판정 절차를 잘 세운다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이 병역기피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길은 얼마든지 있다. 여호와의 증인이 늘어날 것에 대한 걱정은 정말 기우이다.

병역기피 악용, 걱정 안해도 된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운동이 시작되면서 여호와의 증인이 아닌 사람들 중에서도 2001년 12월 이래 불교신자이자 평화운동가인 오태양씨에서부터 아이들에게 평화를 가르치던 사람이 총을 들 수는 없다고 선언한 초등학교 교사인 최진씨에 이르기까지 모두 14명의 병역거부자가 나오게 되었다. 그들 중 한명은 어려서부터 여호와의 증인이었던 청년이다. 그에게 왜 여호와의 증인을 포기했으며, 그런데도 감옥에 가야 하는 병역거부는 하려고 하는가를 물었다. 그는 수줍어하면서, 20대 청년으로서 좀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은데, 여호와의 증인으로 살자니 지켜야 할 것이 너무 많아 도저히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만은 어릴 때부터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고 평화 신념만은 지키고 살아야 하겠기에 감옥을 가더라도 병역거부는 해야겠다는 것이다. 병역기피를 목적으로 여호와의 증인이 되려는 사람들은 답답할 정도로 규율이 엄격한 여호와의 증인쪽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니,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

과연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위한 대체복무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시기상조일까? 대한민국은 이미 50년에 걸쳐서 1만명을 감옥에 보내왔다. 이미 남북간의 국력과 군사력 격차는 벌어질 대로 벌어진 지 오래이다. 3대에 걸쳐 감옥에 가야 했던 50년이 시기상조라면 얼마나 더 긴 세월이 흘러 저들의 증손자, 고손자까지 감옥에 보내야 대체복무제 도입을 고려해볼 수 있단 말인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위한 대체복무제도 도입을 꺼리는 사람들은 이 제도를 도입하면 안보가 불안해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이미 지난 30년간 많게는 15만명, 적게는 7만여명을 방위, 공익근무요원, 전문연구요원, 산업체 특례요원 등 각종 명목으로 대체복무제도를 실시해왔다. 내가 말석을 차지하고 있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라는 조금 긴 이름을 가진 단체가 대체복무제도의 ‘도입’ 대신 ‘개선’이란 단어를 택한 것도 그 때문이다. 만일 대체복무제도를 실시하면 안보가 불안해진다든가, 병력자원이 부족해서 대체복무제도를 실시할 수 없다면 지난 30여년간 수만명씩 대체복무제도는 어떻게 운영해왔단 말인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포함하는 대체복무제도의 실시- 기존의 대체복무제도와의 차이는 4주간의 군사훈련 대신 4∼6개월 복무기간을 연장하는 것- 는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다. 의지의 문제일 뿐이다. 세계 10위 수준의 경제력을 자랑하는 한국이, 이북의 국가예산보다 많은 돈을 국방비에 쏟아붓는 한국이 돈이 없어서 육군사병들에게 똑같은 전투복 팔 접어 입다가 펴서 입게 하면서 사계절을 보내게 하였겠는가? 대체복무제를 도입함으로써 입영 대상자들에게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군 당국은 우수한 인력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여태까지의 말도 안 되는 복무 여건을 신속히 개선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서울남부지법의 판결이 갖는 또 하나의 중요한 부분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의 문제를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특정 종교의 신앙의 자유 차원이 아니라, 평화주의자들까지를 포괄하는 일반적인 양심의 자유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해석했다는 점이다. 사실 이 문제로 토론회에 여러 번 나가봤지만, “그럼 저 사람들을 계속 감옥에 보내자는 말이냐”고 물어보면, 어떤 식으로든 대책이 필요하다는 점을 부인하는 토론자들도 없었다. 이제 많이 처벌했으니 “봐줄 때도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판결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이 기분에 따라 봐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의 핵심적인 요소에 해당한다는 점을 명백히 했다는 것이 큰 특징이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은 우리 사회에서 아직도 낯선 권리이다.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상세히 논하도록 하겠지만, 지금 한 가지 지적해두고 싶은 것은 오늘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일상생활의 많은 부분들은 지금부터 100여년 전만 해도 다 금지된 것들이었다. 요즘 우리가 많이 살고 있는 아파트만 하더라도 어디 감히 대궐보다 높이 집 지을 궁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낡은 기준으로 본다면 우리는 어쩌면 숨쉬는 것만 빼고는 모두 범법 행위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

100년전엔 ‘아파트’도 금기였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을 인정하는 것은 시기상조가 아니라 너무 늦은 것이다. 세계 200여 국가 중에서 아직 30여 나라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하지만, 한국만큼 많은 사람을 가혹하게 처벌하는 나라는 찾을 수 없다. 병역거부권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 중에서도 실제로 병역거부자를 처벌하는 나라는 한국을 제외하고는 5개국에 불과하고, 수감자 수도 다 합쳐야 70여명에 불과하다. 우리는 처음 문제제기될 때에 비해 3분의 1로 줄었다 하지만, 아직도 세계의 모든 양심적 병역거부로 인한 수감자를 합친 것의 7배가 넘는 사람들을 가둬두고 있다.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그렇게 두려운 일인가? 남을 죽이는 일에 동참을 거부하는 행위가 그렇게 위험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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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은 단지 오성, 즉 "스스로 생각하기"(Selbstdenken)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행하기"(<논쟁> A 32), 즉 결단, 스스로 책임지기, 모험심, 용기의 문제라는 점이다. 계몽은 그저 지성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성격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것은 스스로 일어서려하고, 또 자신이 자연적인 성숙이나 법률적인 성숙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자기 자신의 사고와 결단으로 실제로 실현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 개개인에 달려 있다. 계몽은 그러므로 지배적인 편견, 시대의 유행들, 불확실한 여론들, 선전 문구의 암시적인 힘, 이데올로기의 흡인력 등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이 조장하는 비겁함과 안락함에 의해서도 위태롭게 된다. 계몽은 외부적 요인들보다 앞서서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그것들과 동시적으로는 내부적 요인으로 인해 위태롭게 된다. 계몽은 모험을 감행하지 않으려는 인간들의 성향에 의해 위협받는 것이다. 칸트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행한 인간학 강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누군가가 아주 안락한 삶을 원한다면 그는 자신으 대신해서 기억해줄 어떤 사람을 가져야만 할 것이고, 또 자신을 대신하여 지성을 사용해줄 또 다른 사람을 가져야만 하며, 자신을 대신하여 판단해줄 또 어떤 다른 사람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스페인 펠리페 4세의 경우-펌주) 그러나 결국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성숙해지도록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며, 자신의 모든 의무를 혼자 힘으로 행할 것을 시도해야 한다는 점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타인의 이성에 기댈 필요가 없어야 한다는 사실이다."(<인간탐구> p.223)  

                             노베르트 힌스케, <현대에 도전하는 칸트>, 이엽 김수배 역(이학사,2004) p.88-89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도덕적인 것 안에서 자신에게 고유한 새로운 차원의 실존을 발견하게 된다. 즉, 자신이 오로지 제약들과 우연들로 점철된 세계 속에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절대적인 것과 무제약적인 것과도 대면하고 있으며, 또 그가 어떻게든 선택할 수 있는 많은 가능성들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그래야만 하고 그렇지 않을 수는 없다는 것을 그가 무제약적으로 보증해야만 하는 그러한 어떤 것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발견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인간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되며, 한갓 가능성들(확률들-펌주)의 노리개이기를 멈추고, 그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하게 된다. 

                                                                                         노베르트 힌스케, 같은 책 p.140

도덕적 혹은 윤리적 차원에서는 양상이 전혀 다르다. 모든 진정한 도덕적 통찰은, 개인 스스로가 무제약적이고 정언적인 요구에 직면하고 있음을 아는 데에서 성립한다. 어떠한 전문가도 그로부터 이러한 통찰을 빼앗아 갈 수 없으며, 또한 이 통찰은 변화하는 여론 추세에 따른 타협을 허락하지도 않는다. 이 통찰은 논증을 통해 수정되거나 더 나은 도덕적 통찰에 의해 대체될 수 있지만, 특정한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문제가 되어서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처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행위자는 도덕적인 것의 차원 안에서 스스로 자기 자신을 돌보아야만 하며, 비로소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을, 그리고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 그러나 도덕적 차원 안에서야 비로소 정치적 행위자가 반격을 견뎌내고 패배를 감수하며, 역경 속에서도 자신의 일을 위해 책임을 다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현대의 작가들 중에서 이러한 문제를 또렸하게 인식한 사람으로 알렉산더 솔제니친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작품 <굴락 군도>에서 왜 저 저명한 공산주의자들이 스탈린 시대의 공개재판에서 그토록 철저하게 파멸하고 말았는지, 또 그들이 "수수께기같은 판결에 복종"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하는 물음을 집요하게 던지고 있다. 솔제니친은 그 가장 결정적인 이유를 도덕적인 통찰에 의해 비로소 눈뜨게 되는, 앞에서 말한 정체성의 결여에서 찾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부카린은 무엇을 가장 두려워했는가? 신뢰할 만한 소문에 의하면, 그는 당에서 축출당할까 봐, 즉 당을 잃게 될까 봐, 그러니까 목숨을 유지하되 국외자로 남게 될까 봐 두려워했다!" "부카린(뿐만 아니라 그들 모두!)은 독자적 관점을 갖고 있지 못하였다. 그들에게는 진정한 의미의 반대 이데올로기, 그러니까 그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신들을 분리시켜 스스로를 확립시킬 수 있는 그러한 것이 없었다. 그들 모두에게는 투쟁을 위한 도덕적 뒷받침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노베르트 힌스케, 같은 책 p.145-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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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달프 2004-06-01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에게선 약간 강고한 보수-자유주의의 뉘앙스가 풍기지만, 그가 칸트에게서 인용한 대로 "총체적 오류의 불가능성"을 고려하면, 그의 복지국가 비판에도 진리의 일면이 있다고 봐야 한다. 복지 국가가 국민을 "탈성숙화"(p.92)시킨다는 그의 주장은 일면 옳으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복지국가가 가부장적 국가가 되지 않도록 복지정책에 대한 방법적 고려가 필요할 것이다.

sweetmagic 2004-06-02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간달프님 ....정체가 뭡니까 ?

간달프 2004-06-14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장주의가 자유로울까 아니면 복지국가가 자유로울까? 현재 잠정적인 나의 대답은 시장주의는 자유와 상관 없지만 복지국가는 상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현재 유행하는 고전적 시장주의는 자신을 '자연'으로 참칭하며 개인들에게 일률적 적응, 충성을 강요한다. 그리고 개인이 사회/시장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자연에 대한 도전(일종의 신성모독)으로 취급한다. 이것은 결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 자유의 상실은 사고의 실패/포기와 연관된다. 주어진 것을 자연적이고 당연한 것으로 강요하는 일은 지배적 권력의 습관적 술수였다. 자본의 시장주의라고 다를 바 있으랴? 그런데 시장주의는 계산을 사고와 혼동하는 듯 하다. 계산은 자유없는 두뇌 작동의 대표다.
 

 

Kant로 버무려서 본 영화 <트로이>


<현대에 도전하는 칸트>라는 책을 보다가 ‘실천의 근본형식들’이란 장을 읽었는데 기가 막히게 도 어제 본 영화 <트로이>의 인물들의 구도와 들어맞는 것 같다.


" 칸트의 실천철학은 그 출발에 있어서 기술적 기량, (행복을 추구하는) 실용적 수완 그리고 도덕적 행위가 인간 삶에서 궁극적으로는 결코 부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양될 수 없는 서로 간의 긴장 관계 속에 서 있다는 근본 신념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 인간 행위가 전혀 상이하고 서로 경쟁 관계에 있는 근본 원칙들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은 [...] 인간 삶의 실제 상황이다."


" 칸트 사상이 지향하는 바는, 행복과 성공만으로는 인간 실존의 크기를 채울 수 없다는 데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만약에 우리가 스스로의 요구에 견뎌낼 수 있으려면, 이것들만으로는 부족하다. 이것들은 결코 충분한 확보가 아니다. 이것들은 부족함, 즉 칸트의 <세계 시민적 관점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에서의 표현을 빌리면 "공허함"(A 393)을 남겨두고 있다. 이러한 공허함은 보다 높은 차원의 행위 영역에서 채워질 수 있다. 단순한 전략가 또는 실용주의자의 행위가 최후에는 피할 수 있는 그 어떤 실패에서 좌절하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는 인간 행위의 온 의미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단순한 실용적 행위에서는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할지라도, 결국에는 그의 정체성을 발견하지 못한다." 


"기술적인 것의 차원은 결코 자체 목적이 아니며, 항상 단지 수단으로서의 기능만을 갖는다. 그것은 일단 행위를 가능하도록 만들지만 아직 그 행위를 의미있는 것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 기량의 명법들은 단지 가언적으로만 명령한다. 수단의 사용이 갖는 필연성은 언제나 목적이라는 조건하에 제약된 것이기 때문이다. [...] 실천철학은 기량의 규칙들이 아니라 수완의 규칙과 도덕성의 규칙을 포함한다. [...] 이제 여기서는 일차적으로 인간의 임의적인, 관심의 전면에 놓여있는 의도보다는, 이른바 모든 의도들의 의도, 즉 행복이 문제시된다. [...] 수완의 명법들은 ..... 개연적인 조건하에서가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실연적이고, 보편적이며 필연적인 조건하에서, [...] 임의적 목적들이 아니라 사실적으로 주어져 있는 부과된 목적들에 관계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들은 행복해지고자 한다. 이는 행위의 기본 전제로서 주어져 있다. 그러나 칸트는 분명히 강조한다. "나는 '네가 마땅히 행복해야만 한다'라고 말하지 않는다.나는 '네가 행복하기를 의욕하기 때문에 이러저러한 것을 행해야만 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모든 실용적 명법들은 가언적으로 강요하지 절대적으로 강요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도덕성의 도덕적 규칙은 어떤 가능한 (개연적) 의도들이나 실제로 주어져 있는 (실연적) 의도들의 전제하에서 타당할 뿐 아니라 "정언적이고 단적으로 명령한다." 그것은 기술적이거나 실용적인 고려는 도달할 수 없는 무조건적인 엄숙함을 인간 행위 안으로 가져오며, 그 행위에 "직접적이며 내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한다. 그러면 "그 행위는 마치 천상에서 이뤄지는 것같이 그렇게 순수하다."


 

위의 인용문을 나름대로 모식화해 보았다.


<----------------A/a의 공허------------------------>


<---------B/b의 공허------------->


 

         X절대적/필연적 

 

    B실연적

 

   A개연/임의적

     x지혜/도덕적 명법 

 

 

    b수완의 명법

   a기량의 명법

 

 


<--------------------------------------------------------------------->

                          완전한 의미  (“인간 행위의 온 의미의 충족”)


A/a와 B/b는 각각 실존을 다 커버하지 못하는 “공허”를 수반한다.



아가멤논, 오딧세우스, 아킬레우스 비교해 보기


아가멤논은 기량의 명법에 충실하고 임의적 목적에 좌우된다. 그는 무도덕과 변덕스런 탐욕의 전형으로 그의 아비부터 자식들까지 모두 임의적 목적에 의해 변덕스레 휩쓸려 초래된 파국으로 고통받는다. 아킬레우스는 자기 준칙이 절대적 규칙이 되게 하고자 한다. 그는 자신의 행위 기준을 절대자, 즉 신에게 맞추고 신과 경쟁한다. 그는 절대적이고 단적인 목적에 충실하다. 실존의 온 의미를 충족시키고자 하며 이로써 자기 정체성 발견에 이른다. 오디세우스는 주어진 목적(실연적 목적)에 충실하다. 그는 이타카 약소국 출신으로 주어진 상황에 적절히 대응하여 효과를 보고자 한다. 그러나 인용문에도 보듯, 주어진 의도는 그 자체로 마땅한 것은 아니다. 그는 주어진 상황에서 수완을 발휘해 트로이 원정에 결정적 승리를 공헌했으나 자기 실존의 온 의미는 모르며 자기 정체성 발견에도 이르지 못한다. 따라서 그는 트로이 전쟁이 끝난 후에도 (호메로스의 서사시 속에서) 풍랑 속의 바다와 섬들 사이에서 난파당하여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떠돈다. 자궁같은 칼립소에 잠겨있다가 거기서 탈출하고, 사이렌의 자아를 삼키는 유혹을 극복하는 과정은 자기 의식으로 한 단계 씩 전진하는 모습일런지 모른다.


자기만의 욕동의 좁은 세계에서 나온 임의적(개연적) 목적에 휩쓸린 아가멤논은 짐승처럼 사라진다. A/a너머에는 그것보다 월등히 드넓은 ‘공허’가 펼쳐지나 아가멤논은 그 공허를 자각할 만큼 나아가지 못하고 사라진다. 반면 오딧세우스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얻어진 세계(주어진 세계)에서 나온 실연적 목적에 충실한다. 그는 아가멤논이 요구한 출병을 거부하지 못하고 그리스 연합군의 트로이 원정에 참가한다. 그것은 조국 이타카와 자신의 행복을 위한 선택이었으나 절대적이고 필연적인 선택은 아니었다. 아마 세상 사람들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런 오딧세우스의 부류일 것이다. 그들은 트로이를 정복해도 정처없는 항해를 멈출 수 없다. 트로이를 정복해서 배의 창고를 채워넣지만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는다. 반면 아킬레우스는 신과 대면한다. 신은 절대고 신은 모든 것이다. 절대는 바깥이 없는 것이고 단적인 것이다. 따라서 공허도 없다. 신과 대면하고 신과 씨름하는 일을 칸트는 도덕적인 명령과 연관시켜서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니체는 그걸 예술적 유희와 연관시켰다. 아가멤논과 프리아모스의 신은 give-and-take의 신이다. 보통 인간과 별다를 것이 없다. 헥토르의 신은 변덕스런 신이다. 그에게 신이란 인간과 주고받는 사이가 아니다. 헥토르의 신은 마치 유대교의 신과 유사하다. 그래서 그런지 헥토르는 겸손함과 경건함의 모범이다. 아킬레우스의 신은 질투의 대상이고 경쟁의 대상이다. 아가멤논의 신은 신의 인간화를 통해 인간과 유사해진다면 아킬레우스의 신은 인간의 神化를 통해 인간과 유사해진다.  

 

 

 

우리가 일리아스나 그 밖의 대부분의 그리스 문학에서 듣는 비극적 음조는 이 두 가지 힘, 즉 인생에 대한 정열적인 희열과 변경할 수 없는 인생의 테두리에 대한 명확한 이해 사이의 긴장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은 나뭇잎의 생명과도 같다. 바람은 나뭇잎을 대지에 뿌린다. 생명력이 넘치는 숲은 다른 나뭇잎을 품게 되어 봄이 되면 새싹이 돋아난다. 그와 같이 인간의 세대는 나타나고 사라진다.

 

이와같은 사상과 이미지는 호메로스에게만 있는 독자적인 것이 아니다. 그 독특한 심각성은 그 내용에 있으며, 또한 그 내용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이다. 장려한 헤브라이의 유사물에서는 이러한 심각성을 찾아볼 수 없다.

 

  인간에 대해서는, 그 나날은 풀잎과도 같다. 들꽃과도 같이 사람은 인생을 보낸다. 바람이 불면 생명은 사라지고, 꽃이 핀 장소는 이제 그 꽃을 알지 못한다.

 

이 시의 색조는 비하와 체념의 색조이다. 즉 인간은 신에 비할 떄 풀잎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호메로스의 이미지는 영웅의 행동이나 업적에서 볼 때 전혀 다른 색조를 띠고 있다. 인간은 無比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고귀한 소질과 찬란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무수한 구별이 없는 나뭇잎과 마찬가지로 같은 법칙을 따라야 한다. 거기에는 어떠한 로맨틱한 항의도 있을 수 없으며 - 왜냐하면 우리의 존재를 제약하는 제일의 법칙에 대해 어떻게 항의를 할 수 있을 것인가 - 또한 우리가 중국인에게 보는 바와 같은, 개인은 숲 속의 나뭇잎을 구성해가는 先祖에 불과하다는 체념적인 수용도 없다. 그 대신 비극의 정신인 열정적인 긴장이 있는 것이다.

 

[...] 비극적 긴장을 설명해 줄 것이다. 생명의 위험이 처했을 때만이 가장 가치있는 것을 갖게 된다는 것은 인생의 유한성, 또는 인생 모순의 특징이기도 하다. 영웅은 아마도 죽음에 직면해서만이 용기를 입증하며, 자기의 영광을 획득하는 것이다. 美는 그 이웃으로 위험과 죽음을 가지고 있다.

 

[...] 美는 영광과 같이, 설혹 그 대상이 눈물과 파멸일지라도 추구되어야만 한다. 트로이아 전쟁의 모든 이야기의 중심은 바로 이 생각이 아니었던가. 왜냐하면 그리스 기사도의 완성자인 영웅 아킬레우스는 이 선택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신은 그에게 평범한 생활의 장수와 영광스러운 요절의 양자택일을 주었던 것이다. 이 신화를 처음 만든 자가 누구이든 간에 그는 거기에서 그리스 사상뿐만 아니라, 그리스사의 본질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스 문화사-문화와 역사와 삶, H.D.키토, 김진경역 (탐구당, 2004) 107-109 

 

[...]중국 주자학과 일본 주자학을 함께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중국의 경우, 예를 들어 주자 같은 사람들은 과거에 의해 관직에 오른 사람들입니다. 과거라는 것은 중국의 고등문관시험같은 것으로, 당나라시대부터 시작되어 20세기까지 기본적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과거에서는 어쨌든 능력만 있으면 어떤 계급출신자라도 상급관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사대부 등으로 부르는 사람들은 이른바 독서인이자 문인으로, 정치가로서 새로운 계급을 형성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계급을 뛰어넘었기 때문에, 그들은 인간에게도 똑같이 신이 내재해 있다고 생각해도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언어와 비극, 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역 (도서출판b,2004)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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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magic 2004-06-01 0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제가 훨 어설프지만 엇비슷한 생각을 한 건 분명한데.. 제 생각은 머리 속에서만 요리조리 맴돌다..." 아 몰라... 브래드 피드가 멋지다 "란 표현 밖에 못하는 데, 님의 글은 ......흐흑
" 아킬레우스는 신과 대면한다. 신은 절대고 신은 모든 것이다. 절대는 바깥이 없는 것이고 단적인 것이다. 따라서 공허도 없다"....." 니체는 그걸 예술적 유희와 연관시켰다."...이래서 제가 저 두 존재를 사랑한다는 거 아닙니까 !!!
아킬레우스의 신은 인간의 神化를 통해 인간과 유사해진다~~ !!! 제가 생각한 게 그거 라니깐요 ....

sunnyside 2004-06-01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트로이] 보고 와서 다시 읽겠습니다~ (본다고 이해할 수 있을랑가는 또 다른 문제이건만. -.- ^^; )

짜우 2004-06-01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트로이는 신과 영웅들의 이야기이지만, 신도 영웅도 인간덕목의 전형을 보여주는 느낌이 든다. 애국심과 건실한 덕목에 충실한 헥토르, 명예심에 휩싸인 아킬레스,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아는 패리스와 여인들, 그리고 인간의 탐욕과 공명심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아가멤논과 그의 형, 내가 그속에 투영될 수 있다면 아가멤논 적이겠지만, 헥토르처럼 살고 싶어할 것 같다. 글구 아킬레스가 마지막 사랑을 찾아 떠남은 좀 짜증났다. 너무 완벽한 전형을 하나 만들어가게 되었기때문에....." 조금씩은 아쉬움이 남는 모델들이 많이 보여서 하나의 영웅이 아니라 모든 영웅들이 만들어졌음 좋겠다.
 


이상하게도 아킬레우스나 헥토르는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제외하고는 그들의 존재를 증명하는 문헌이나 전승은 없다고 한다. 도리아인의 침입으로 에게해가 암흑시대로 접어들고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준비되면서 창작되거나 과대포장된 인물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단지 이름과 영광만 있는, 어쩌면 '암시'에 더 큰 기능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두 인물들은 여타 인물들의 비루함에 대비되며, '탁월함(아레테)'으로 변별된다. 아가멤논은 권력욕에 눈이 멀었고 프리아모스는 자만과 자기도취에 빠졌으며 파리스는 여색에 무너졌다. 그런 모든 불완전한 인간들에 대해, 호메로스는 '탁월한', '완벽한', '신이 질투할 만한' 인물들을 의도적으로 쑤셔넣은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수백년간의 암흑기 이후 그리스인들에게 처세술이자 윤리교과서처럼 암송되어졌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사실상 당시 판도의 중심인물은 아가멤논이다. 아가멤논을 중심으로 놓고 수많은 왕과 왕비, 왕자와 공주, 영웅들이 사방으로 연결된다. 그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재배치하면 세상은 황량하고 무의미하며 쓸쓸해 보일 것이다. 우선 그의 아버지 이야기부터가 아주 잔혹하다 .그의 아버지 아트레우스와  티에스테스의 살벌한 복수극(세네카의 <티에스테스>)은 아마 박찬욱의 <올드보이>에 영감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아가멤논과 클리타임네스트라, 오레스테스, 엘렉트라의 이야기(아이퀼로스의 <오레스테스 3부작>)도 끔찍스런 이야기다. 모두가 인간의 무절제한 탐욕과 욕정에 휘둘려 초래된 잔혹스런 결과에 대한 이야기다.

아킬레우스를 다른 인물들과 결정적으로 변별시켜 주는 것은 그의 초월에의 의지다. 그는 불멸의 신과 필멸의 인간을 비교했고 인간의 유한성을 초월하고 신을 능가하길 원했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만의 준칙'이 되었다. 다른 인물들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자신을 그려냈다면 아킬레우스는 위를 꼬나보면서 자신을 그려냈다. 그는 신을 질투했고 업신여겼다. 신은 영생을 누리지만 그로인해 권태에 갇혀있다. 인간은 모두 죽지만 이름을 남길 수 있으며, 매순간 마지막 삶을 살기에 권태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영화 속 아킬레우스의 행위의 준칙이다.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에게 사촌이 아니라 전우였다. 아마도 헥토르-파리스에 대응하는  형제애를 만들어 극적 대칭 구도를 만들 요량으로 그렇게 바꾼 모양이다. 그 덕에 아킬레우스는 무지막지한 전쟁기계에서 좀 더 인간 쪽으로 움직였다. 거기다가 브리세이스까지 넣었고, '죽음을 초월하는 명예'이 아니라 '죽음을 초월하는 사랑'으로 결말을 잡아서 뭇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했다. 개인적으로는 가슴을 찌른 창을 뽑을 때 그 창에 횡경막과 영혼이 함께 걸려나오는 식의, 내면적 세계와는 전혀 인연없는 호메로스 시대의 거친 인간을 보고 싶었지만 너무도 인간적인(?) 헐리우드 영화에 그런 그로테스크한 요구는 과욕이겠지. 대신 이런 군상은 박찬욱의 <올드보이>나 강제규의 <태극기휘날리며>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삼천포로 빠지지만, 아무래도 한국인들은 도시인보다는 들판의 인간 쪽에 더 익숙한 모양이다. 한국의 근대사야말로 황량하고 쓸쓸한 들판의 역사였으니... 내면적 세계는 사치였을런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럴까? 우리는 '양심'을 모르고 '양심적' 병역거부도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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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magic 2004-05-30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트로이를 그렇게 보셨군요...은근히 님 리뷰를 기다렸습니다. ^^;;

간달프 2004-05-31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