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는 역사가의 눈이 있다. 여러 문헌이나 미세한 인간관계까지 살피는 주도면밀한 시선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 책에 인용된 히라노 겐(平野謙)처럼 문단사적이고 심리적인 유형의 비평가의 시선과 닮았으면서도 또 다른 무엇이다. 히라노 겐에게 역사는 이론적인 것과는 별개의 곳에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히로마쓰에게는 역사를 넘어선 일반 이론 따위가 없다. 아까 말한 '이론적인' 작업도 그에게는 어떤 의미에서는 역사적인 작업인 셈이다. 따라서 이 책이 문자 그대로 역사적인 책이라고 해도 이론적인 것의 곁가지인, 별도의 작업은 아닌 셈이다. 그것은 그것 자체로 이론적인 작업이다.

예를 들어 근대의 철학은 '근대'라는 역사성 속에 있다. 그것이 초역사적으로 타당성을 갖는다고 착각하는 것이야말로 근대 철학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론적인 비판적 고찰은 그 자체로 역사적인 고찰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이미 헤겔이 인식했던 사실이다. 그러나 그 역사적인 고찰은 즉시 하나의 이론이 된다. 그것을 비판하면, 세계를 파악하는 어떤 이론이나 담론도 여러 관계로 이루어진 역사적 세계에 속하고 그 역사적 세계를 초월하지 못한다고 한 것이 마르크스주의 이론이었다. 하지만 그 이론은 끊임없는 자기 검증을 요구받는다. 세상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기 자신도 그 자기 검증의 대상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히로마쓰가 계속해서 주장한 바는, 마르크스가 그 '근대'적인 사고의 한계를 진정하게 넘어설 수 있는 '지평'을 가져왔다는 것이지만, 그것은 결코 무언가 손쉬운 이론으로서 존재하지는 않는다.

'근대'란 무엇인가? '근대'를 넘어선다는 것은 무엇인가?히로마쓰 와타루의 이 이론적인 책은 계속 그것을 묻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또 하나의 질문을 할 수 밖에 없다. '근대 일본' 혹은 '일본의 근대'란 무엇인가? 이것을 묻지 않는다면, 어떤 이론적 고찰도 추상에 불과하다. 반대로 이론적 고찰이라는 것이 오히려 일본적인 것에 속하게 되고 말리라. 히로마쓰가 태평양 전쟁 전의 '근대의 초극'에 관한 논의를 다룬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근대의 초극에 대하여" 중에서, 히로마쓰 와타루, <근대초극론>(2003, 민음사)  239-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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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magic 2004-08-06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꾸 퍼가기만 해서 죄송합니다 ㅜ.ㅜ;;
 

‘간첩’도 민주주의를 지켰다

 

 

 

 

 

 

 

 

 

 

 

 

 

 

 

 

 

 

 

 

 

 

 

 

 

 

 

 

[한겨레]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죽음으로 저항한 비전향장기수와 그들을 정당하게 평가한 의문사위를 물어뜯는 마녀사냥을 보며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지난 6월 일본의 평화박물관을 둘러보느라고 일본을 다녀왔다. 일본에서 만난 지인들로부터 일본 우익들이 <실미도>에 감동하고, <태극기 휘날리며>의 개봉을 고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씁쓸해했다. 이들 영화가 한국의 자칭 우익들에게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공산 계열의 항일유격대가 즐겨 부르던 <적기가>를 삽입한 <실미도>는 국가보안법의 고무찬양죄 위반으로 우익단체에 의해 검찰에 고발됐다. 16대 국회에서 친일진상규명법안을 기를 쓰고 깔아뭉갠 한 의원은 국회에서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헌병들이 피난온 고등학생을 학도의용군으로 강제로 잡아간다는 허위 내용으로 국군의 합법성과 정통성을 훼손하고 있다”면서 이 영화가 “우리 정부와 국군을 비난하도록 세뇌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을 능가하는 한국의 군사주의
일본의 우익들도 처음 이들 영화가 한국에서 흥행에 성공하자 한국의 반공주의가 약해졌기 때문이라고 세심한 ‘걱정’까지 해주었지만, 정작 영화를 보자 생각이 바뀐 모양이다. 한국에서는 평자에 따라 엇갈리기는 했지만, <태극기 휘날리며>는 감각이 무뎌진 우리에게 전쟁의 참혹함을 일깨워주고 “한국 전쟁 영화를 지배해온 레드콤플렉스, 이른바 <배달의 기수>에 마침표를 찍는 영화”라는 식의 평이 많았다. <실미도>도 한국 현대사의 감추어진 비극을 역사 앞에 드러낸 문제작이란 호평을 받으며 관객 1천만 시대를 열었다.

두 영화가 친일 영화가 아님이야 분명한데, 왜 같은 영화를 보고 한국의 우익은 분노한 반면, 일본의 우익은 전쟁을 찬양한 영화로 보면서 환영했을까? 우리는 일본에서 주기적으로 나오는 정치인들의 망언을 보면서 일본이 과거 청산을 하지 않은 것에 분노한다. 그러나 많은 부분에서 과거 청산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일본 사회가, 한국 사회에 비해 전쟁을 덜 찬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요즘 일본에서 군국주의의 부활 조짐이 심상치 않아 한국 같은 주변국의 우려를 사고 있지만, 정작 한국의 군사주의는 일본 제국주의자들로부터 물려받았음에도 현재의 일본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 <태극기 휘날리며>가 천박한 반공영화의 수준을 뛰어넘음으로써 한국인들에게 전쟁의 참혹함을 다시 생각할 기회를 주었다면, 일본의 우익은 이 영화가 갖는 다른 측면을 보고 이 영화를 반긴 것이다.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본 영화는 아니지만, <태극기 휘날리며> 덕에 현대사 강연을 다닐 때 설명이 쉬워진 부분이 있다. 한국의 참혹한 전향 공작의 잔혹사에서 첫손에 꼽아야 할 보도연맹 사건 이야기를 설명하기가 한결 쉬워진 것이다.

여주인공 영신은 빨갱이가 아니었다. 보리쌀 두 되에 전향서에 도장 찍고 보도연맹원이 된 평범한 여성이었다. 전향서를 쓴다는 것, 보도연맹원이 된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충실한 국민이 되겠다는 것을 서약한 것이고, 국가가 이를 보증한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나자 전향서는 대한민국에서 그들의 생명을 지켜주는 안전보장증이 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전향서를 제출한 자들의 명부는 학살 대상자들의 명부가 되고 말았다. 전향서를 쓰고 대한민국에 충성을 맹세한 대한민국 국민 20여만명이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체계적·조직적으로 학살당한 것이다.

이렇게 전향에 대한 몹시 안 좋은 기억을 갖고 있는 나라에서 강제 전향 공작은 시작됐다(강제 전향의 배경에 대해서는 <한겨레21> 385호, ‘빨갱이에게도 인권이 있다’, 2001년 11월21일치에서 설명한 바 있다). 박정희는 5·16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탈취한 뒤, 전국 각 교도소에 흩어져 있던 비전향 좌익수 800여명을 대전교도소로 집결시켰다. 그 뒤 1968년 1·21 청와대 습격 사건이 일어나자, 정부는 이북 특수부대가 대전교도소를 습격하여 좌익수들을 탈출시킬 것을 우려하여 다시 비전향 좌익수들을 전국 각지의 교도소로 분산 수용했다. 1968년 4월 대구로 90명, 전주로 80명, 광주로 90명, 목포로 90명이 이감되고, 대전에 120~150여명이 잔류했다고 하니 1968년 비전향 좌익수의 규모는 500명이 조금 안 되는 정도였다.

강제전향 공작은 1950년대 후반부터 시작됐지만, 박정희의 유신 쿠데타 이후 1973년 8월2일 법무부 예규로 ‘좌익수형수전향공작전담반운영지침’이 시달되면서 그 이전과는 차원을 달리하면서 중앙정보부의 직접적인 통제 아래 새롭게 시작됐다. 전향전담반은 교도소 내에서 상당한 고위직인 교회관(敎誨官)을 책임자로 여러 명의 교회사와 교회사보를 두었지만, 실제로 전향 공작의 일선에 나선 것은 흔히 ‘떡봉이’라 불린 깡패들이었다. 국가는 깡패 출신 강력범들에서 대상자를 선발하여 ‘떡봉이’라고 쓴 완장을 채워주고, 좌익수들이 수감된 특별사의 청수부로 배치하면서, “나라를 위한 일이니까 잘 되면 법무부에 상신해서 가석방도 될 수 있다”는 말로 이들이 좌익수를 많이 전향시키면 석방해준다고 약속했다. 떡봉이들은 같은 수감자임에도 감옥 내에서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특권을 누렸으며, 비전향 좌익수들이 수감되어 있는 사방 열쇠까지 차고 다녔다. 이들은 시도 때도 없이 비전향수들을 끌어내 자신들의 완장에 쓰인 대로 떡을 만들어버렸다.

그들의 저항이 야만적 공작을 중단시켰다
1973년 8월부터 1년간 대전교도소에서만 전향한 좌익수가 197명이었다. 이번 의문사진상규명위에서 의문사로 인정된 최석기가 떡봉이들에게 맞아 죽던 1974년 4월4일만 해도 모두 10명의 A급 수형자들이 전향을 당했다. 광주에서도 전향 공작이 시작되기 전 64명이던 비전향수는 1년이 지나자 10명 정도만 남았다.

변형만은 청주보안감호소에서 단식투쟁 중 교도소쪽이 왕소금을 잔뜩 푼 소금물을 고무호스를 식도에 집어넣어 강제 급식하는 과정에서 숨을 거두었다. 떡봉이에게 온몸을 바늘로 찔리는 고문을 당하던 박융서는 1974년 7월20일 자신의 동맥을 끊고, 흐르는 피를 찍어 벽에다 “전향 강요 말라”는 혈서를 쓰고는 세상을 등졌다. 전향하지 않은 장기수로서는 최초로 석방되어 인권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연 서준식도 강제전향 공작에 맞서 옥중에서 자살을 기도했었다. 영화 <메멘토>가 나오기 수십년 전, 서준식은 자기 몸에 유리조각으로 수백 글자의 유서를 새기고 동맥을 그었으나 천만다행으로 의식을 잃은 가운데 자연 지혈이 되어 목숨을 건졌다. 이들은 죽음으로서 사상의 자유라는 민주주의의 내재적 가치를 지켰고, 반인권적인 권위주의 정권에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이들의 저항이 있었기에 박정희의 강제전향 공작은 사실상 중단됐다.

이 야만스러운 전향 공작의 희생자들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의문사로 인정하자 난리가 벌어졌다. 일부 언론이나 자칭 보수단체들은 의문사위의 결정을 “남파 간첩과 빨치산을 민주투사로 인정한 것”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더구나 의문사위의 일부 조사관이 과거 군사독재 시절 사노맹이나 간첩 사건에 연루된 것을 갖고 “간첩이 육군대장과 전직 국방장관을 조사하는 나라는 대한민국뿐”이라며, 의문사위에 대한 마녀사냥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들 언론이나 단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남파 간첩과 빨치산 활동을 한 이들에게서 대한민국의 국법을 준수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것이 민주화에 걸림돌이라도 되었다는 뜻인지 묻고 싶다”고 전향 공작 자체를 옹호했다.

강제전향 공작에 대한 항거는 민주주의의 근본인 사상의 자유를 지키는 일이고, 이들은 죽음으로 야만적인 전향 공작에 맞섰다. 전향 공작에 대한 저항이 민주화운동이냐는 논란이 벌어지는 것 자체가 아직 한국 사회가 민주화운동 유공자를 포상할 만큼 민주화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사실 권위주의 시대의 음습한 정보 정치의 상징적인 인물이 의문사위 결정을 놓고 벌어진 TV토론에 나와 의문사위를 비판하는 뻔뻔스러운 세상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들 언론이나 단체가 일부 조사관들의 전력을 문제 삼는 방식을 보면, 이들에게 최소한의 양식을 기대하는 것도 사치스러운 일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간첩으로 몰린 조사관의 경우를 보면, 1990년대 가장 대표적인 조작간첩 사건인 이른바 ‘남매간첩단’ 사건의 당사자이다. 이 사건은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안기부 개혁 요구가 거센 가운데, 안기부가 기획한 사건으로 안기부 공작원 백흥용에 의해 날조됐다. 그를 비롯해서 수구언론이 문제 삼은 사람들은 모두 사면복권되어 공무원 임용에 하자가 없고, 경찰 등 관련 기관의 신원 조회를 거친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수구언론에서도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또 이들이 의문사위에 전력을 숨기고 들어간 것도 아니요, 수구언론도 이미 2002년 1월에 과거 간첩이나 사노맹 같은 지하조직 관련자로 처벌받은 사람이 경찰 등에서 파견나온 수사관과 같이 일한다는 사실을 보도하기도 했다. 자기들도 다 알고 있던 일을 갑자기 “뒤늦게 밝혀졌다”며 들고 나온 것이다.

니들 옷에도 빨간 페인트 묻었네!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에 대해서는 기를 쓰고 ‘과거를 묻지 마세요’를 합창하는 자들이 의문사위 조사관들에 대해서는 눈을 부라리며 전력을 파헤친다. 그러나 이들은 독재 정권에 항거했던 민주인사요, 조작간첩 사건의 피해자이다.

국가기구가 은폐하려는 의문사의 특성상, 죽음의 문턱에 가본 실제 피해자들이 자신의 몸의 기억과 살아남은 사람의 책임을 바탕으로 진상 규명에 더 유리할 수 있다. 사실 이렇게 엉뚱하게 아무데나 전력을 파헤치자고 나온다면 가장 곤란해질 사람은 박정희와 아직도 그를 떠받드는 수구세력일 것이다. 요즘 한창 논란이 되는 친일파 전력은 차치한다 하더라도, 왼쪽으로 보면 남로당 군사부가 유사시에 크게 써먹을 목적으로 군부 내에 깊숙이 침투시킨 최고위 프락치이자 여순반란 사건으로 사형 구형에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화려한 빨갱이 경력이 있고, 오른 편으로 보면 군사반란으로도 모자라 친위 쿠데타(유신)까지 감행하여 민주주의 기본질서를 두번이나 짓밟은 반란범 아닌가? 조작 간첩과 사노맹 출신이 있어 의문사위가 해체해야 한다면, 한나라당도 남아나지 못할 것이다. 무시무시한 남민전과 1980년대의 대표적인 급진조직인 서노련의 주요 인사들이 사무처 요원도 아니고, 당의 간판 중진으로 활동하고 있으니까. 색깔론을 들고 나오려면 적어도 자기가 쓰고 있는 빨간 색안경은 벗어놓고 나와야 하는 것 아닐까? 옛말에 근주자적(近朱者赤)이라 했다. 붉은색 근처에 가면 자기도 빨간 물이 든다는 것이다. 남들에게 빨간 페인트 칠하고서 빨갱이라 몰아치는 짓 자꾸 하다 보면 자기 옷에도 빨간 페인트가 묻는 법이다.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 신뢰 잃었다
의문사위의 결정에 대한 논란에 기름을 부은 것은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가 감호소에서 숨진 남파 공작원 출신 피해자가 민주화운동과는 무관하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물론 국가기관간에 독자적으로 다른 견해를 내놓을 수 있다. 그러나 결정 과정이나 내용을 볼 때 민주화운동보상심위의 결정에는 큰 문제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우선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 산하의 관련자및유족여부심사분과위원회에서는 변영만씨 건의 경우, 신청자가 민주화운동보상법에 신청 자격을 갖는 사람으로 규정된 유족이 아니라 당시의 동료 재소자였다는 점을 근거로 각하 의견을 낸 바 있으나, 위원회는 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 사안을 2년이나 묵혀두었다가 논란이 일자 급히 처리하여 언론플레이를 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이번 결정으로 과거 동의대 사건에 대한 판정 과정에서 수구세력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던 보상심의위는 수구세력으로부터 점수를 딸 수 있었는지는 모르나, 진보적 민주화운동 세력으로부터는 결정적으로 신뢰를 상실했다. 권위주의 정권의 하수인들에게 뺨 한대 맞아본 적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위원회가 죽음으로 민주주의의 가장 기초적인 가치인 사상의 자유를 지킨 사람들을, “전향 강요 말라”라고 문자 그대로 피로 쓴 역사를 과연 심판해도 되는 것일까?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를 비롯해 과거 민주화운동에 몸담았던 사람들 일부에도 민주화운동을 단순히 긴급조치 위반이나 계엄포고령 위반 등 정치 영역의 반독재운동으로 국한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태도를 보면서 생각나는 것은 문민정부 시절 김영삼의 최측근 실력자였던 어떤 장관이 자신이 박정희 정권 시절의 고문 피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간첩은 고문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해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일이다. 이런 태도는 과연 군사독재 시절 우리가 추구했던 민주화된 사회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민주화운동보상법도 그렇고 의문사법도 그렇고, 우선 민주화운동의 규정과 관련하여 대단히 미흡한 점이 많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대한민국이란 국가는 국가의 이름으로 엄청난 폭력을 휘둘렀고, 그 피해자는 너무나 많다. 전쟁을 치르지 않았는데도 한국의 군대는 1980년부터 1995년까지 이라크 전쟁의 미군 사망자 수의 아홉배나 되는 사망자를 내었다. 멀쩡한 목숨이 3년마다 1개 연대씩 전쟁을 치르지도 않고 사라졌다. 허원근 일병 사건처럼 수천건의 죽음이 의문에 싸여 있으나, 의문사위가 다룰 수 있는 ‘의문사’란 오로지 민주화운동 관련 의문사뿐이다. 민주화운동의 근처라도 갔던 사람들에게 정말 물어보아야 한다.

우리가, 당신들이 했던 민주화운동이란 것이 과연 민주화운동 관련자의 죽음과 관련이 없는 죽음을 차별할 만큼 잘난 것이었는가를. 한 인간이 자신의 자존심과 존엄을 지키고자 발버둥치다가 스러져간 그런 죽음 앞에서 좀더 겸허해질 수 없는 것일까? 국민의 정서상 간첩들의 행위를 민주화운동에 포함시킬 수 없다는 사람들이여, 뒤돌아보자. 6월항쟁 같은 정말 짜릿했던 한순간을 빼고, 언제 민주화운동이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은 적이 있는가를.

강제전향이 폐지된 뒤 정부는 한때 준법서약서란 것을 도입했다. 수구언론의 등살 때문이다. 그 당시 최연소 장기수였던 강용주는 이렇게 말했다. “서약서 쓰기를 강요하면서 그것을 거부하면 사면에서 제외할 수밖에 없다고 하고, 그러면서 양심의 자유는 전면적으로 보장됐다고 떠드는 무지하고 야만스런 사회, 양심의 자유는 보장하지만 서약서는 써야 한다는 말이 얼마나 형용모순을 지니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는 천박함이 횡행하는 땅에서 제가 있어야 될 자리는 십오척 담 안일 수밖에 없는 듯합니다.” 그 강용주는 다행히 풀려났지만, 송두율은 전향서를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구세력은 물론이고 국가권력인 검찰에 닦달당하고 있다.

전향 공작 자체가 반헌법적이고 원인무효이기 때문에 비전향과 강제전향에서 차별을 두어선 안 된다. 비전향 장기수가 100명 안팎이었고, 이들 중 63명이 6·15 정상회담의 성과로 2000년 9월 북송됐다. 폭압적인 전향 공작 기간 중에 전향한 좌익수는 400여명, 현재 그들 중 28명이 북송을 원하고 있다. 우리가 정말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자행한 강제전향 공작을 반성한다면 북송을 원하는 강제전향 장기수들을 북으로 보내주어야 한다.

봉원동 산자락에 선 듯한 한국사회
2년 전 1기 의문사위가 남파 간첩을 의문사로 판정했을 때 조용했던 수구언론이 지금 이런 푸닥거리를 하는 것은 탄핵 정국과 총선을 거치면서 과거 청산의 지형이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누더기를 만들었던 친일진상규명법안의 수정안이 제출되고,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에 관한 특별법안도 통과가 유력하고, 조그마한 꽃삽을 갖고 거대한 쓰레기더미를 파헤쳐야 했던 의문사위도 3기가 출범하면 포클레인까지는 안 돼도 곡괭이 하나는 얻어가질 전망이다. 드러나면 곤란한 냄새나는 과거를 가진 사람들은 이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단 한번도 제대로 된 과거 청산을 하지 못한 나라, 그나마 의문사위의 활동으로 우리는 판검사들을 키워내던 서울법대 교수가 어떻게 간첩으로 몰려 죽게 되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지금 한국 사회는 희대의 엽기 연쇄살인범이 피살자들의 주검을 파묻은 봉원동 산자락에 서 있는 형편이다. 덮을 것인가, 땅을 파 주검을 수습할 것인가? 3기 의문사위를 어떻게 만드느냐가 그 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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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되려면 지배해야 하는 아이러니 속에서
홍기빈의 ꡐ진보이념의 새로운 지평을 찾아서ꡑ / 해방에 대하여2

 

편집부 editor@digitalmal.com

 

홍기빈

서양 언어에서 해방의 뜻을 담은 낱말은 어원의 갈래로 볼 때 크게 emancipation, affranchissement, liberalization의 세 가지 계통으로 정리할 수 있다. 지난 호에서는 emancipation에 대해 살펴 보았다. 이번엔 그 두 번째 갈래인 affranchissement의 기원과 이 단어에 담겨 있는, ‘해방에 대한 서양 문명의 상상력’을 음미해 볼 차례이다.

‘해방’에도 암수 구별이 있을까

   
지난 호에서 설명했듯이 emancipation은 여자나 아이들이 절대권력의 ‘꼰대’로부터 풀려나오는 해방을 일컫는 의미이다. 영어 이외의 유럽 언어에서 이 단어는 항상 여성 명사이다. 반면 affranchissement이라는 불어 단어와 이탈리아어의 affrancamento는 모두 남성 명사로 쓰인다. 해방을 나타내는 단어가 이렇게 여성과 남성 명사로 갈라져 있다는 것이 묘한 생각이 들게 한다. 과연 ‘해방’에도 암수가 따로 있는 것일까. 혹시 유럽 문명의 역사에서 ‘여성 및 아이들의 해방’과 ‘남성의 해방’이 다른 의미를 가진 것은 아닐까.

물론 유럽 언어의 명사에 존재하는 남성, 여성 구별을 자연적인 남성, 여성과 연결지어 과대해석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또 현대로 오면서 여성 명사인 emancipation 계통과 남성 명사인 affranchissement 계통은 그 의미가 서로 뒤섞여 오늘날엔 별 차이 없이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단어의 기원과 발전 경로를 따져보는 시도가 그렇게 웃기는 일은 아니다. 17세기 이탈리아 사상가인 비꼬가 강조했듯이 말이란 것은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객관 세계를 주관적으로 체화하면서 생겨나는 것이다. 또 인간은 이렇게 만들어진 말을 통해 세계를 바꾸고 역사를 창조해 나간다. 따라서 단어란 것은 결코 우연하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동시대의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겪어야 하는 당대의 현실, 그리고 이 현실을 당시의 사람들이 이해하던 방식이 함께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다음 세대도 그 단어를 계속 사용하는 한 이전 세대의 현실(그리고 그 현실을 이해하던 방식)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어원을 이해한다고 해서 그 낱말의 본질을 파악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언어의 기원과 변화의 경로를 당대의 역사적,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음미해 보는 것은 그 문명의 심성 깊이 들어가는 중요한 통로임에 분명하다.

‘프랑크인이 되는 것’이 해방?

affranchissement이라는 단어는 afranchir라는 고대 불어에서 나왔다. 그 의미는 ‘프랑크 인으로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어째서 ‘프랑크인이 되는 것’이 ‘해방’의 의미를 갖게 된 갈까.

프랑스 지역의 옛 이름은 ‘갈리아’이다. 이곳에 살던 고대 켈트 족의 분파인 골(Gaul) 족의 이름에서 온 말이었다. 그런데 이 지역은 케사르에게 정복되어 로마 제국의 영토로 편입되면서, 골 사람들과 로마인들이 상당히 동화되어 원주민들의 켈트어 대신 라틴어가 공통의 언어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게르만인들이 밀려들어오게 되면서 이곳의 종족 구성은 다시 복잡해진다. 그 때까지 라인강변에서 멈추는 듯이 보였던 게르만의 일파 프랑크족이 클로비스 왕의 영도하에 5세기 말 부터 본격적으로 라인강 서쪽으로 진출하면서 이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샤를르마뉴 대제의 프랑크 제국이 형성되는 8세기 동안 이 지역은 프랑크 족의 확실한 지배 아래 편입되고, 결국 오늘날 프랑스의 모체가 된다.

그러나 이 프랑크인들이 지배 종족이 된 이유가 전체 프랑스 지역에서 숫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게르마니아 숲속에서 뛰쳐나온 일개 부족에 불과한 프랑크인들이 광활한 갈리아 지역 전체에 뿌리박은 터줏대감이 될 만큼 세를 불릴 수는 없었다. 골-로마 원주민들이 두툼한 피자였다면 프랑크인들은 그 위에 살짝 얹힌 토핑처럼, 적은 인원으로 그나마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그래서 프랑크인이 문화적, 언어적 주도권의 행사로 그들의 게르만어를 공용어로 만들 수 있었던 지역은 지금의 네덜란드 지방 정도였다. 다른 지역에서는 거꾸로 라틴어에 뿌리를 둔 골-로마 원주민들의 로망스어가 주도적 언어로 오늘날 프랑스어의 모태를 이루었다.

숫적으로는 열세였지만 프랑크 인들은 분명히 지배 종족이었다. 걔중에는 물론 귀족들도 있었지만, 보병으로 전쟁에 참여한 평민 프랑크족이 다수였다. 그리고 이 ‘평민 프랑크족’들은 피지배민인 골-로마인과 구별되는 ‘자유민’으로 프랑스 땅에 살고 있었다.

이러한 프랑크인들의 모습이 당시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쳤는지에 대해서는 바로 이 ‘프랑크’에서 파생된 영어 형용사 frank(솔직한)의 의미에서 짚어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우리 말의 ‘솔직함’에 담긴 ‘진실성’ ‘순수함’ 등의 의미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 대신 ‘누구의 눈치에도 구애됨 없이 말을 돌리거나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내뱉는다’는 의미이다. 지금은 없어진 용법이지만, 물질적으로 너그럽다는 뜻도 있었다.

이런 태도들은 정복당한 피지배민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오로지 지배 종족으로서의 프랑크인들만 가질 수 있는 것이었으리라. 이 frank라는 단어가 동사로 쓰이는 모습에서도 고대 프랑크인들이 가졌던 특수 신분의 흔적이 다시 드러난다. 이 말은 어떤 사람이 복잡한 검문검색이나 부당한 통행료를 내는 일 없이 ‘무사통과’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일정하게 배타적인 멤버쉽을 요구하는 ‘사교계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 또한 갖고 있다. 또 그가 보내는 우편물은 그저 서명 한 줄이면 우표를 붙이지 않고도 즉각 배달된다는 의미도 이 frank에 담겨 있다.

지배로서의 자유

중세가 무르익고 장원 제도가 정착된 훗날 이 ‘자유민’(프랑크인)이란 어떤 의미였을까. 프랑스의 자유민(vilain: 영국에서의 vilein은 반대로 농노를 의미)들도 영주의 장원을 구성하는 일원이란 점에서는 농노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그 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다. 그것은 ‘자유민’만이 ‘몸과 소유물의 처분에 있어서 자유’라는 점이었다.

   
중세의 농노들은 기본적으로 ‘몸과 소유물의 처분에 있어서’ 영주의 사유물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고대의 노예들과 달리 몇 가지 중요한 점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인정받기는 했다. 그러나 농노의 권리는 무소불위한 영주의 권리를 일정하게 ‘제한’할 수 있다는 소극적 성격이 더 강했다. 장원이란 기본적으로 영주가 로마법의 ‘절대적 소유권(dominium)’ 같은 것을 휘두를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영주가 인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농노가 자신이 기르던 가축을 매매할 경우 이는 무효이다. 또 다른 장원의 처녀와 결혼하여 애를 낳을 경우, 그 아이들을 두 장원의 영주들이 나누어 가져가는 일은 종종 있었다.

반면 ‘자유민’들은 영주의 ‘절대적 소유권’에 속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래서 ‘지유민’은 마음대로 장원을 떠나거나 영주를 국왕의 법정에 고소할 수도 있었다. 마음에 드는 누구와도 결혼할 수 있었으며 자기 소유의 가축이라면 마음껏 처분할 수도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이 ‘자유민’들은 자신의 몸, 가족, 소유물 등에 대해 ‘절대적 소유권’을 행사할 수 있는 독자적 주체였다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의미에서의 ‘프랑크인을 만들어 주는’ 행위가 바로 affranchissement로서 ‘해방’이었던 셈이다. 이는 그저 ‘손에 묶인 차꼬만을 풀어’주고 차가운 길거리로 내모는 emancipation으로서의 ‘해방’과는 분명히 다르다.(본지 6월호 「고작 ‘꼰대’로부터의 ‘해방’인갯 참조) ‘프랑크인’은 자기 몸의 자유 뿐 아니라 자신의 사유물(토지, 가족 구성원 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의 ‘자유’는 단지 ‘꼰대로부터 풀려난 상태’를 의미하는 공허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자신의 지배 하에 들어 있는 사물과 인간들을 마음대로 처분하고 지배할 수 있다는, 아주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를 가진 자유이다.

중세 후기 이후엔 도시나 길드처럼 일정한 숫자의 인간들이 모여 스스로의 자치 단체(corporation)를 만들어 왕권으로부터 그 법적 존재를 인정받는 일들이 많았다. 이 단체들은 중세의 기독교 유럽을 촘촘히 감싸고 있는 봉건 권력의 그물망에서 독립된 ‘지유민’으로 새로 태어나는 셈이었다. 그런데 이 새롭게 태어난 인간 집단으로 구성된 법인(法人)들은 결코 적수공권으로 세상에 내던져지는 아기들이 아니었다. 아예 태어날 때부터 일정한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권리- 이를테면 런던 지역의 은행권(bank note) 발행을 독점한다든가 -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배타적 영업권을 가진 법인들의 탄생은 그야말로 지배 종족의 한 사람으로서 ‘프랑크인의 탄생’(franchise)에 걸맞는 것이었다.

여성 명사와 남성 명사의 차이

해방을 의미하는 emancipation와 affranchissement의 차이는 여성명사와 남성명사 뿐만이 아니다. 기원의 역사적 맥락이 다른 것이다. 전자는 아이들과 여자들을 ‘수갑을 풀어 꼰대로부터 해방시켜준다’는 의미의 로마법 용어를 기원으로 한다. 그러나 가진 것도 갈 곳도 없이 그저 수갑만 풀어주는 해방의 상태는 결국 새로운 종속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는 아이러니를 필자는 이미 논한 바 있다.

반면 이 남성 명사 affranchissement은 저 광활한 갈리아 땅을 짓밟은 정복민 프랑크인을 기원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의미는 단순히 ‘꼰대에서 풀려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과 재산에 배타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지배 종족의 일원으로 자리잡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이 ‘프랑크 인’의 성별을 따져보고 음미하는 것은 서양 문명의 심성 속에 자리잡은 ‘해방’에 대한 상상력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열쇠 중 하나라고 믿는다. 그 ‘프랑크 인’은 여성인가 남성인가 아니면 어느 쪽도 될 수 있는 중성인가. 아주 최근까지 유럽 역사에서 이렇게 ‘배타적 재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유인’은 오로지 남성에게 부여되었던 권한이었음이 분명하다.

서양의 정치적 전통에서 ‘자유롭다’는 말은 ‘그 누구의 의사에도 종속되지 않는다’는 의미에 바탕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자유로운 자들이 평등한 ‘시민’으로서 공동체 전체의 정치적 의사 결정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누구의 의사에도 종속되지 않는 자율성을 누리려는 사람은 자신의 자유 의지와 생활을 스스로 실현해 나갈 수단(means: 이 말이 ‘재산’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음에 주목하라)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결국 자유로운 자로서의 시민은 스스로의 사유 재산과 가족 구성원에 대한 지배권을 가진, 남자 어른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디드로는 그의 「시민(citoyen)」이라는 글에서 분명히 하고 있다.

따라서 똑같은 남자 어른이라고 해도 자기 재산을 갖지 못한 하인이나 노동자 등이 시민권을 갖는 평등한 ‘프랑크 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논리적 귀결이다. 계몽주의 사상의 완성자이자 근대의 나팔수였던 칸트마저 ‘피고용자들은 참정권을 가진 능동적 시민이 될 수 없다’고 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논리에 기반한 것이었다. 평등, 계몽주의 등 프랑스혁명의 메아리가 울려 퍼졌던 근대 서구에서 여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것은 기껏 20세기에 들어와서이다. 이토록 지연된 이유 중 하나는 수천년간 이 같은 독특한 논리적 구조가 서구 문명의 정치적 전통과 사고 방식을 지배했기 때문일 것이다.

타인을 약탈하기 위한 해방

그렇다면 정말 서구 문명의 ‘해방’엔 암수컷이 따로 있었던 것일까.
어떤 역사적 개념 속에 잠재하는 성적 편향을 짚어내는 것은 단순한 호사가의 관심사를 넘는 중요성을 가진다. 그 개념에 잠재한 문제점과 한계를 남성도 여성도 아닌 온전한 ‘인간’의 관점에서 반성하고 비판하는 작업의 시작이 되기 때문이다. 이 ‘거침없이 활개를 치고 다니며 가족과 재산을 지배하는 프랑크인’이 되는 해방은 과연 우리가 희구하는 인간 해방의 이상을 온전하게 모두 담아낼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 ‘마초’ 냄새가 풀풀나는 이 해방은 또 다른 고통과 모순으로 귀결되고 마는 것일까.

‘지배 종족의 일원’이 되는 것을 ‘해방’으로 정의한다면, 해방은 항상 다른 사물이나 인간에 대한 ‘지배’를 전제해야 성립될 수 있다. 이런 논리를 계속 밀고 가면, 나의 해방은 항상 누군가의 속박을 대가로 가능하다는 결론이 도출되고 만다. 그렇다면 이런 해방을 추구한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인가. 이 지점에서 우리는 자칫 허무주의로 빠질 수 있다. 예컨대 어차피 인간 세상의 진리는 약육강식이며, 우월한 자가 열등한 자를 지배하는 것은 우주 삼라만상을 꿰뚫는 자연의 섭리이다. 지배당하는 것은 어차피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별 걱정 말고 나 혹은 우리들 자신의 ‘해방’에나 골몰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 같은 ‘해방’의 개념이 낳은 끔찍한 사례 하나를 소개한다. 옛날 아테네에서는 노예를 제외한 모든 평민 남성들을 재산의 크기와 무관하게 ‘프랑크 인’으로 만들어 준 적이 있었다. 이것이 오늘날 서양의 자유주의자들이 입만 벌리면 자랑으로 떠벌이는 ‘아테네 민주주의’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아테네 민주주의’가 어떤 재난을 몰고 왔는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무는 듯 하다. 재산이 없거나 빈곤했던 그 빈민들은 명실상부한 ‘프랑크인’이 되기 위해 이웃 도시를 약탈했던 것이다. 이 가난한 ‘프랑크인’들은 틈만 나면 함대를 출정시켜 이웃의 도시 국가를 학살하고 약탈할 계획만 세웠고, 국가는 점차 그러한 계획을 수행하는 해적 본부로 전락했다. 잔인한 학살로 초토화되는 이웃 도시는 계속 늘어갔고 , 나중에는 도시 전체가 타락한 인간의 집단으로 변해 가게 되었다. 이것이 투키디데스, 플라톤, 소크라테스 같은 고귀한 영혼들이 하나같이 아테네의 민주주의에 대해 진저리를 치게 된 원인이었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비슷한 일이 한 번 더 벌어졌다. 19세기 후반 이후 서구 노동 계급은 정치적 권리와 사회경제적 권리를 함께 신장시키게 된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진행된 사태가 유럽 각국의 팽창적 제국주의와 호전적 군국주의였다는 점은 깊이 음미해보아야 한다. 이런 상황과 관련, 레닌은 ‘부르주아지에게 매수된 소수의 상층 노동귀족’에게 책임을 돌렸다. 미심쩍은 주장이다. 왜냐하면 당시 영국, 프랑스, 독일 등에서 실질 소득이 개선된 것은 소수 노동귀족이 아닌 노동계급 전반에 걸친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수한 일반 서민과 노동자들이 ‘징고(Jingo)!’를 외치며 열광적으로 전쟁에 참여했던 것도 이 같은 ‘음모론’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해방과 지배의 아슬아슬한 커플

이렇게 ‘해방’이 ‘지배’와 한쌍이 되는 역설은 민족국가가 성립되는 시대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국제 체제는 동질적인 주권 민족 국가들로 구성된다’고 가르치는 서구의 국제정치학 교과서는 심각한 위선을 내포하고 있다. 이미 19세기 말에 일본의 후쿠자와 유기치가 냉철하게 간파했듯이, 사실상 근대 국제 체제는 소수의 평등한 주권 국가들과 그들이 지배하는 대다수의 식민지 나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리기(Giovani Arrighi)도 지적하고 있지만, 15세기의 스페인과 포르투갈 이래 오늘날까지 근대 민족 국가의 형성에서 식민지의 창출은 사실상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던 것이다. 그래서 ‘민족 해방’을 이루고 국가 창출에 성공한 이탈리아와 독일의 제 2제국이 가장 먼저 착수했던 것은 식민지 경영이었고, 1890년 명치헌법의 반포를 통해 근대 국가의 틀을 완수한 일본이 제일 먼저 시작한 일도 대만과 조선의 합병이 아니었던가. 결국 근대 국가라는 서구 문명의 민족적 삶의 틀은 다른 민족에 대한 수탈과 지배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었던 셈이다.

숱하게 지적된 바이지만, 모든 지구인들에게 남녀노소할 것 없이 저 ‘프랑크인’의 물질적 생활을 하도록 몰고가는 이 지구적 자본주의의 시대에 자연과 인간에 대한 지배가 어떻게 확장되고 있는지도 잊지 말아야 할 점이다.

이렇게 ‘지배’와 한쌍이 되는 ‘해방’의 개념은 과연 인간 해방의 궁극적인 이상이 될 수 있을까. 혹시 파멸적인 종말로 치닫는 것은 아닐까. 아무 대책없이 수갑만 풀어주는 해방인 emancipation이 결국 ‘새로운 꼰대에의 종속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는 아이러니를 우리는 저난 호에서 본 적이 있었다. 아마도 이 affranchissement이라는 해방도 그에 필적하는 아이러니로 충만해 있을 것이다.

‘과연 지배를 언제까지 유지하고 확장할 수 있을까. 그 지배의 대상이 사라질 때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또 나보다 더 강한 자들이 나를 지배하면서 ‘해방’되려고 할 때에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 조건이 하나라도 어긋나는 순간에는 나는 다시 종속 상태로 떨어지게 되지 않을까. 이처럼 위태위태한 것이 해방이란 말인가.’

이 affranchissement는 수의학 용어로 수컷 돼지의 거세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프랑크 남성을 만들어 준다’는 말이 이제 ‘남성성을 제거한다’는 정반대의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지난 호의 emancipation이 ‘새로운 주인에게 예속’이란 뜻으로 변해버린 18세기 영국 영어의 아이러니에 필적하는 역설이라 아니할 수 없다. 모름지기, ‘함부로 휘둘러 대다가 잘리는’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오히려 욕망의 원천을 끊어내어버림으로서 ‘지배’와 ‘해방’의 지겨운 변증법에 시달려온 숫돼지를 편하게 풀어주는 것이 역설적이지만 진정한 해방일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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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7-23 14: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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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기업사회' 넘어 신자유주의 군사대국으로 간다

동북아 / 일본 자본주의의 역사적 맥락과 21세기 아시아의 연대

 

편집부 editor@digitalmal.com

 

                                       - 박철현 『오마이뉴스』 일본지사 대표 기자 -

5월 26일 히토츠바시 대학원 사회학연구과 교수로 있는 와타나베 오사무(57) 교수를 만났다. 각 정당 헌법조사회의 참고인으로 활동중인 와타나베 교수는 전후 일본 국가와 사회의 성격을 '기업에 의한 지배'로 규정하는, '기업사회론'의 대표적 이론가이다. 와타나베 교수와의 대담은 마침 일본에서 연구활동 중인 홍기빈씨(캐나다 요크대학 정치학 박사과정)의 면담요청을 계기로 이루어졌다.

   
▲ 와타나베 오사무 교수
일본은 '기업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

▲홍기빈(이하 홍)  -  "선생님께서는 '기업사회 일본'의 개념을 이미 지난 1980년대에 제시한 바 있습니다. 선생님의 기업사회론을 요약한다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와타나베 오사무(이하 와타) - "저의 기업사회론은 실제로는 아주 간단합니다. 일본은 기업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지요. 보통 현대 국가라면 국가경쟁력을 나타내는 여러 지수들이 있지 않습니까? 군대, 외교력, 경제, 복지, 인권 등인데 이중에서도 군사력과 경제부문이 국력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요소로 나타나지요. 그런데, 일본의 경우 패전 이후 군대보유가 금지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요시다 2차 내각은 공개적으로 경제성장주의 정책을 천명했구요. 이를테면 공공부문의 노조금지, 노동자 탄압 등을 명시한 '경제 9원칙'이 그의 작품이지요. 요시다는 경제성장주의를 채택해야 일본이 (국가로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계산한 것입니다. 군대를 보유하기엔 헌법이 허락치 않고, 복지정책을 펴기엔 생산력이 너무 발달되지 않았지요. 외교에서도 패전국으로서 강대국 지배를 받았아야하니까 '기업이 일본의 중심이다'는 식으로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전후 일본사회의 보이지 않는 규칙이 되어버린 셈이지요."

▲홍 - "'상호주식보유'라고 하는 일본의 독특한 기업 소유구조도 바로 '기업 사회' 형성의 산물로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아이러니입니다만, 미군정이 미쓰이, 쓰미토모, 미쓰비시 등 재벌 일족을 척결한 것은 그 어떤 사회주의 혁명 이상으로 효과적인 자본가 계급의 재편을 가져온 셈입니다. 그후 정계-관계-재계의 이른바 '철의 삼각형'으로 이루어지는 일본 지배블록의 구조는 일본경제 전체를 특정 개개인의 자본가가 아닌 지배계급 전체의 집단적 통제 아래 놓는 형식으로 발전했습니다."

▲와타 - "네. 그렇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지주회사가 가장 많은 주식을 가지고 계열사를 관리하던, 전쟁 이전의 재벌 시스템은 미 점령군의 조치에 따라 사라졌습니다. 당시 '상호주식보유' 방식을 내놓은 것은 정치권이었습니다. 흔히 6대기업집단이라 불리는 구재벌계 3사와 금융계 3사가 서로 다른 회사의 주식을 가지게 된 것이지요. 예를 들어 A라는 회사의 주식은 B가, B의 주식은 C가, 다시 C의 주식은 A가 가지는 형태입니다. 이런 주식은 지주회사나 개인의 소유, 즉 사유재산이 아닙니다. 기업 자체가 다른 기업의 주식을 소유하게 되는, '법인자본주의'라는 변종이 나타난 것이지요.(편집자 주 : 개인 대주주인 재벌이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는 한국과 달리 일본의 대기업엔 개인 대주주가 없다. 와타나베 교수가 이야기한 '상호주식보유'로 이동하는 주식은 개인이 아니라 회사, 즉 법인의 소유가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상호간 주식을 보유한' 기업들은 기업집단을 형성해서 기업지배권을 안정화시키는 한편 기업간 거래관계를 긴밀히 해서 수익창출을 지향한다. 즉 다른 회사의 주식을 취득하는 목적이 주주로서의 권리 향유, 즉 그 주식을 통해 수익을 취하려는 것이 아닌 것이다. 법인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주식을 취득하는 경우엔 나타날 수 없는 현상이다. 이에 따라 일본경제는 한때 '선진자본주의국가에 유례 없이 개인 대주주가 소멸한 것'으로 비쳐지기도 했다. '사적 소유'가 극복된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 이 같은 독특한 소유구조 때문에 일본경제는 '법인자본주의'라고 불렸다.)

칼 맑스는 「자본」에서 '자본가 계급은 노동자의 착취에서 얻어진 잉여가치를 자신의 사유재산 증식과 잉여가치를 다시 창출하기 위한 설비투자에 투입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전후 일본의 자본가 계급, 즉 대표이사나 회장 자리에 앉아있는 대부분의 자본가 계급은 맑스의 자본가 개념으로는 설명이 안됩니다. 바로 법인자본주의 시스템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신의 사유재산 증식을 위해 잉여가치를 유용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는 것이지요.
잉여가치가 (개인 자본가가 아니라) 기업으로 속해지는 것에 더해서, 일본 국가는 그 잉여가 다시 설비투자로 전면 재투입되도록 작동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기업이 이익을 설비투자에 투입할 경우 세금을 면제하는 법률을 제정한 바 있지요. 그 결과 앞서 언급한 6대 기업집단은 자신들의 잉여를 계속 설비투자에 돌리는 경쟁에 돌입하게 됩니다. 이쪽에서 무엇을 만들거나 설립을 하면, 다른 쪽에서도 똑같은 것을 반드시 만듭니다. 그러한 계속적 설비투자와 경쟁이 결국엔 고도성장의 계기가 된 것이지요."

'회사인'으로 전락해버린 일본 노동자계급

▲홍 - "즉, 개인적인 인격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자본가 대신, 정계, 재계, 관계에 퍼진 지배 엘리트 전체가 하나로 뭉쳐서 마르크스가 '오로지 자본의 축적과 재투자 논리만의 인격화'라고 상상했던 '몰인격적 자본 집단'을 형성했다는 말씀이군요. 이는 현대 사회과학에서 통념처럼 되어 있는 '사적 영역'의 자본과 '공적 영역'의 국가라는 구분이 전후 일본사회에서는 무의미하다는 것이 되겠습니다. 일본 고도성장의 역사적 배경과 유래에 대해서 듣고 있으니, 기업 위주로만 일본사회가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만, 그 안에서 노조의 반발이라든가 그런 것들은 없었나요."

▲와타 - "그게 일본 기업들의 놀라운 점입니다. 기업들의 노동자 지배구조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보통 미국이나 유럽을 보시면 노동자 계급 내에서도 교묘한 알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블루컬러 대 화이트 컬러'라는 구분이지요. 노동자 계급은 보통 착취당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화이트 컬러는 그런 인식에서 비교적 자유롭지요. 자신들도 언젠가는 자본가가 될 수 있다는 환상도 가지고 있구요. 그래서 블루컬러들은 자본가 계급에 대한 적대심은 물론이요, 화이트 칼라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동참을 요구하고 분노하면서 자신들의 투쟁심을 높여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그런게 없어요. 1950년대 중반부터 일본기업은 블루컬러와 화이트컬러 노동자들에게 동등한 승진제도등을 보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출발점은 틀리겠지만 블루컬러 노동자도 자신이 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진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중에는 '종신고용제'까지 이어집니다. 아무튼 이 승진제도를 가리켜 당시 언론은 '푸른 창공이 보이는 승진제도'라는 말로 대대적인 홍보를 하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블루컬러라 할지라도 '자신의 능력'에 의해 관리직, 심지어 이사직으로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사례를 제도화시켜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자신의 능력'이란 것의 내용입니다. 미국이나 유럽에도 노동자의 성과나 실적에 따라 승진이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만, 일본의 경우 그 '능력'이란 것은 사실상 회사 조직과 상부에 대한 '충성도'를 의미합니다. 결국, 블루컬러 노동자들은 계급의식으로 뭉치기보다 개인적인 승진의 길을 열망하게 되고, 이를 위해서는 악착 같이 회사와 조직에 충성하는, 저 악명높은 일본의 '회사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1980년대에 문제가 된 과로사 같은 것이야말로 그러한 기업지배 체제가 어디까지 노동자들의 충성심 경쟁을 몰고 갈 수 있는가를 보여준 예라 하겠습니다. 그야말로, '착취와 평등의 교묘한 결합'이라고나 할까요."

1965년!

▲홍 - "그러나, 1960년대 미일안전보장조약의 갱신을 반대하는 '안보투쟁'에서 노조가 큰 활약을 했지요. 당시엔 어느 정도 노동조합의 규제력과 단결력이 있었다고 봅니다만…."

▲와타 - "'안보투쟁'은 당시 내각이 총사퇴하고, 그 이후 들어선 이케다 내각이 개헌을 보류하고 복지국가로 나가겠다는 방향을 설정하면서 진정국면에 들어가게 되지요.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노조의 규제력과 결속력은 대단했습니다. 뒤를 이은 사토 에이사쿠 역시 본성은 우익에 가까운 사람이지만, 이케다 내각의 복지국가론을 이을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정치의 이런 움직임과 맞물리면서 기업과 경제 체제도 본격적으로 재편되기 시작합니다. 그 중요한 기점은 1965년이었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푸른창공이 보이는 승진제도'로 노동자간의 경쟁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이 이 즈음인데요. 이 때 이후로 노동 계급의 지지를 기반으로 한 사회당의 힘이 결정적으로 약화되기 시작합니다. 당시의 통계를 보면, 1965년을 지나면서 민간 기업 노동자들의 사회당 지지율이 절반 가까이 급감합니다."

▲홍-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바로 그 1965년인데요. '상호주식보유'라는 일본식 소유구조가 본격적으로 형성된 것도 1965년이었거든요. 그 결과 일본 경제의 '안정 주주 지분 비율'의 그래프를 그려보면 1965년에 급격히 30%대로 육박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와타-  "재미있군요. 전후 일본이 기업사회로 본격적으로 형성된 시점으로서 1965년의 중요성이 더욱 다가오는군요"

90년대, '기업사회'의 해체와 신자유주의 수용

▲홍-  "1990년대 이야기로 넘어와보지요. 일본경제는 10년을 넘어가는 긴 세월동안 불황의 터널에 빠져 든 바 있습니다.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와타 - "일본기업의 자만이지요. '메이드 인 재팬'이라는 로고가 한때 세계 제 1위의 경쟁력을 지녔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경쟁력은 어디서 왔을까요. 저는 그것이 중소기업 등 장인의식을 지닌 하청회사에서 왔다고 생각합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전세계는 지구화의 모토 아래 해외생산기지를 건설하는 등 생산원가 인하에 나섭니다. 일본은 1985년 부터 그런 움직임에 합류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전세계적 엔고 현상과 시장점유율 저하라는, 수동적 이유 때문이지 적극적으로 전개하려는 마음은 가지지 않았어요. 국내생산 → 해외수출의 패턴을 지키려고 한 것이지요.

그 이유는 앞서 말씀드린 정신적 자만과 함께 일본 특유의 하청회사 구조 때문이었습니다. 보통 4단계까지 하청을 주는데, 해외로 나가려면 그들을 다 데리고 가야 기존의 경쟁력이 갖추어지거든요. 그런데, 하청회사를 모두 데리고 나가기엔 여유가 없었지요. 그러다 보니 망설이게 되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버블경제가 붕괴됐습니다. 그런데 일본 기업인들이 얼마나 자만심에 빠져 있었냐면, 버블이 무너졌을 때 한가하게 이런 얘기를 했어요. '2∼3년이면 회복된다. 이건 일시적이다.' 그러면서 점점 일본의 국가경쟁력이 떨어져 간 것입니다. 얼마전 스위스에서 발표된 국가경쟁력 순위에서 일본이 25위였습니다. 20년전만 하더라도 상상할 수 없었던 결과지요."

▲홍 - "그런 상황을 배경으로 1990년대의 일본 지배블록은 기존의 일본 정칟경제 체계 전체의 재구조화를 적극적으로 들고 나왔습니다. 하시모토 내각이 2개의 큰 주안점으로 내세웠던 국가경영의 기본전략이 '군사대국화'와 '신자유주의'였는데, 이는 사실 전후 일본의 국가 형태를 떠받치는 두 개의 기둥이었던 '탈군사화'와 '기업 사회'라는 구조를 모두 재편하겠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결국 지배블록 내부에서 국가와 지배 체제의 성격에 대한 합의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말이 될 텐데요. 궁금한 것은 그런 변화를 둘러싼 지배블록 내부에서 각 집단의 입장과 움직임입니다. "

▲와타 - "자민당 내부의 보수세력은 이미 1980년대 나까소네 수상 시절부터 군사 대국화와 개헌 등을 꾸준히 꾀해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반 국민들의 평화애호 의지가 항상 일정 정도 존재했기 때문에 강행할 수 없었지요. 1990년대 중반, 하시모토 내각의 시도도 국민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쳤습니다. 한편, 재계는 1980년대 후반 이후 지구화와 다국적화라는 새로운 환경에 처하게 되면서 기존의 '기업 사회' 체제가 가져다주는 경쟁력 제고는 국내적인 환경에서만 가능할 뿐이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특히 버블 붕괴 이후 이들은 기업구조조정의 필요 등에 휘말리면서 정부에 구조개혁과 법인세 인하, 탈규제 등을 강력하게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하시모토는 다 받아 들입니다. 이렇게 무조건적으로 기업의 일방적 요구에 굴복하는 하시모토 내각의 움직임에 대해 많은 반발이 있었어요. 하시모토파는 물론이요, 심지어는 공명당과 그 지지기반인 승가학회, 공산당등 좌우를 초월하는 반발에 직면합니다. 한편, 재계는 탈군사화된 전후 국가의 성격을 넘어 군사화를 선호하기 시작합니다. 1985년의 엔고(高) 이후 동남아시아 등지로 자본 직접투자와 생산기지 확장이 본격화되면서, 정치적으로 그다지 안정되지 않은 이 지역에서 자본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일정한 군사적 영향력을 가져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들이 자민당의 보수세력들과 힘을 합치면서, 결국 신자유주의적 개혁과 군사화라는 두 개의 현상이 동시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일본 신자유주의 개혁의 주체는 재계

▲홍 - "말씀 중에 1980년대부터 이미 나까소네 등이 구조개혁이나 군사대국화를 꾀했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1980년대의 세력과 1990년대의 하시모토 파벌 등의 세력 사이에 어떤 시간적 연속성을 가진 주체적 정치 세력을 상정할 수 있을까요."

▲와타 - "그렇게 보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하시모토 파벌 등 일본 정치세력들은 독자적인 브레인 집단을 갖고 있는 집단이 아닙니다. 필요에 따라 재계 등의 집단으로부터 내용을 공급받는 것에 가깝습니다. 분명히 1980년대 나까소네의 '제2임조' 형성 등에서 신자유주의적인 구조개혁을 지향하는 정책 집단의 원형은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때도 경단련 등의 재계 쪽이 큰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연속성을 담지한 집단은 아무래도 재계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홍 - "고이즈미 정권은 현재 강한 일본을 주장하면서 대미관계 강화를 통한 신자유주의 색채를 분명히 띠고 있고, 또 군사대국화로 가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기존의 기업이나 자민당 등으로 구성된 일본 권력체제를 넘어서는 강력한 힘을 행사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고이즈미 내각의 앞날을 어떻게 보십니까."

▲와타 - "21세기 자본주의의 특징인 신자유주의, 글로벌리즘, 다국적 기업 등은 국가의 파워를 등에 업고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경우엔 그 반대로 기업의 파워가 국가를 상징해왔던 것이지요. 40년동안 말입니다. 그런데, 2001년 집권한 고이즈미 총리의 개인적 스타일에 강한 일본을 요구하는 일본 국민들의 대중적 지지가 결합되면서 정부의 발언권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즉, 과거의 불균형이 서서히 밸런스를 맞추어 나가고 있는 양상을 띠게 된 것이죠. 고이즈미 역시 기업이 1990년대에 요구했던 세금 경감, 규제 완화 등을 충실히 지키면서 군사대국화와 세계화 전략등에 힘을 쏟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업들은 불만도 있지만 일단 따른다는 입장이지요. 불편한 동거처럼 보이지만,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있으니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암묵적 동의 위에 개헌론 등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고이즈미 내각의 우경화는 우려스럽습니다."

▲홍 "마지막으로, 한일 양국의 진보운동이 협력해나가야 할 필요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21세기 현재,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는 군사화와 신자유주의의 방향으로 사회의 재구조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고 보입니다. 양국의 진보세력이 현안으로 걸려 있는 이 두 개의 문제를 중심으로 연대한다면, 자칫 추상적일 수 있는 '동아시아 진보 연대' 같은 움직임에 구체적인 내용을 부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일 시민사회, 신자유주의 문제에 주목해야

▲와타 - "지금 국제적 연대가 가능한 이슈라고 한다면 이라크 파병과 글로벌라이제이션, 신자유주의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회단체들이 이라크 파병에 대해서는 집회를 열고 국제적 연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글로벌라이제이션이나 신자유주의 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 않습니다. 즉, 일국(一國)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겠지요. 그렇지만, 일본의 신자유주의와 글로벌라이제이션, 그리고 그 배후에서 진행되고 있는 군사대국화의 열망등이 결합한다면 이것이 과연 일국차원에서 끝나는 문제일까요? 분명히 한국과 북한, 중국, 타이완등 동아시아의 모든 국가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이런 것에 대해 분명히 반대를 하고 또 연대를 조직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의 지식인, 사회운동단체들 역시 이런 일본의 움직임에 대해 예의 주시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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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

지난주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가 강제전향 공작에 대해 죽음으로 항거한 비전향 장기수들의 행위를 민주호운동으로 규정한 것에 대해 말이 많다.  이 일로 의문사진상규명위는 그야말로 난타를 당했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사상 검증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수구 신문과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세력에 폭력적 응징도 마다 않던 우익 단체들의 공격은 그렇다 치자. 최소한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상 정도는 공유한 걸로 알았던 여당조차 몸을 빼며 잽을 날리는 건 또 뭔가?

내가 놀란 건 의문사진상규명위의 결정이 아니라 그에 대한 우리 사회 주류 집단의 반응이다. 머릿속을 자유민주주의의 신성불가침 영역으로 알고 있는 나조차 이럴 땐 그들 머릿속을 들여다 보고 싶어진다. 도대체 그 안에서 자유민주주의 행세를 하는 이념이 어떤 것인지, 자유민주주의의 근본을 부정하는 그 이상한 자유민주주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추정컨데 아마도 북한을 알리바이 삼아 시작한 오랜 변형 작업의 결과일 것이다. 적과의 대치를 이유로 하나씩 가한 변형이 이젠 자유민주주의의 본과 말이 무엇인지도 모르게 만들어 버렸다. 북한 체제에 반대하기 위해 자유민주주의를 하는 건지,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기 때문에 북한 체제에 반대하는 건지... 단적으로 말해 보자. 공산주의, 아니 그 할아버지 이념과 싸운들 무엇하겠는가. 자유, 민주, 인권을 포기하면 이미 자유민주주의가 아닌데.

이번 일만 봐도 그렇다. 신문들은 간첩을 민주화운동가로 만들었다고 난리다. 그러나 그의 간첩활동은 이미 법으로 처벌을 받았다. 의문사진상규명위가 민주화운동이라고 말한 건 간첩활동이 아니라 '전향거부' 활동이다. 본래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자기 헌법에 명시하고 있다. 누군가의 머릿속을 드러내고 뜯어고치겠다는 발상 자체를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전향 자체가 자유민주주의에 반하는 것인데, 도대체 자유민주주의로 전향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민주화 운동을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가 어떻게 가능한가?

국민의 정부 시절, 전향서를 대체한 준법서약서마저 거부한 강용주씨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양심의 자유는 보장하지만 서약서는 써야한다.'는 말이 얼마나 형용모순인지 깨닫지 못하는 사회에서 제가 있어야 할 곳은 십오 척 담 안일수밖에 없습니다." 그냥 법을 지키며 살겠다는 정도의 서약서를 그는 왜 거부했던가. 법을 어기기 위해서가 아니다. 바로 그 법이 기초하고 있는 자유라는 토대를 지키기 위해서다. "나는 권력앞에서 내 안의 생각을 게워내 심사받아야 한다는 데 동의할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의 형용모순적 성격은 지난해 입국했다 최대 거물 간첩으로 몰린 송두율씨에 대한 재판에서도 드러난다. 그가 북한의 정치국 후보위원인지 아닌지는 차차 밝혀지겠지만, 그의 학술적 저작들을 처벌 근거 중의 하나로 삼은 검찰 기소문은 그 자체로 학문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다. 순수 학문적 동기가 아닌 정치적 동기에서 출발한 학문은 과연 자유를 갖지 못하는가? 세상에 하느님도 알기 힘든 학문의 동기를 따지는 것도 그렇지만, 학술회의가 아닌 재판정에서 연구방법론 논쟁을 하고, 학자가 아닌 검사와 변호사가 그 의미를 다루는 현실은 슬프기 그지 없다.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의 전향, 순수 학문적 동기에서만 학문을 하는 자유, 평화와 인권을 위한 전투병의 파병, 놀라운 건 이런 희한한 말들의 조합이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니는 현실이지, 원리에 충실한 의문사진상규명위의 결정이 아니다. 송두율씨의 표현처럼, 자유민주주의를 무자비하게 훼손하는 국가보안법에 자유민주주의 수호의 임무를 맡기는 우리 사회야말로 자기최면에 걸린 사회, 세계의 뉴스거리가 되는 사회가 아닌가. 분명히 말하건대, 자유의 진정한 적은 내 사상과 다른 사상을 지닌 자도, 내 자유와 다른 자유를 지닌 자도 아니다. 진정한 적은 생각할 자유 자체를 박탈하려는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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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달프 2004-07-13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사회가 반군부독재투쟁을 통해 얻은 것은 '민주주의'라고 하기보다는 '국민주의'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군부독재를 종식시킨 후에 국민으로서의 권리는 되찾았지만 자유민으로서의 권리는 완전히 확보하지 못했다. 현재 보통 한국인들의 마음 속에 그려진 자유민주주의의 상은 불분명하며 민주주의보다는 국민주의적 내용물로 들어차 있다. 한국인들은 국가에 대해 자신을 '국민'으로 대해줄 것을 요구하지 '자유민'으로 대해 줄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국보법에 대한 안이한 사고방식, 전향서약에서 기원한 준법서약서의 존속, 보호감호제의 지속, 주민등록제와 지문날인에 대한 무비판적 태도,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반감 따위가 그 예다. 일부 한국인들이 한국의 강력한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예로 들면서 일본의 연약한 민주주의와 비교하여 우월감을 과시하는데 이는 착시현상이다. 그들이 한국에서 누리고 있는 것은 민주주의라기 보다는 국민주의다. 일본은 비록 (자생적이지 못한) 포고령 민주주의에 기원을 두고 있기는 하나 민주주의의 핵심에 따라 운영되는 사회임이 분명한데 반해 한국의 경우는 자생적이기는 하나 그것의 결과물은 민주주의가 아닌 국민주의였으며, 지금 한국이 처한 상황은 국민주의 상태로 계속 갈 것인지 아니면 진정한 민주주의로 도약할 것인지의 갈림길적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