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 획일을 강요하는 자본의 몬스터
인권 특강은 국가인권위가 직원들을 대상으로 매월 실시하는 특강으로, 박 교수의 강의는 지난 7월 6일 진행됐다. 박노자 교수는 오슬로 국립대 한국학 교수를 맡고 있으며, <당신들의 대한민국> 등의 저서를 낸 바 있다.

정리: 월간 <인권> 편집부

▲ 강의하는 박노자 교수
ⓒ2004 인권위 김윤섭
먼저 제가 왜 스칸디나비아에서의 집단 따돌림이라는 주제를 택했는가에 대한 ‘변명’의 성격이 짙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소련이 망할 때까지 소련 사회의 가장 큰 인권 문제로 생각한 것이 이른바 양심수였습니다. 그런데 사회주의 체제가 망하고 나서, 옐친 체제로 접어든 후 체첸 독립운동 투사를 잡아 둔 것을 제외하고는 공식적인 양심수는 거의 없어지게 된 겁니다.

러시아 사회의 일상적 인권 유린

그런데도 시민들이 몸으로 겪는 인권 상황은 대단히 악화되었습니다. 사회가 빈곤해지는 과정에서 과거의 중산층 대부분이 빈곤층으로 추락하고, 인간 존엄성이 무참히 짓밟혔기 때문입니다. 즉, 연금 생활자들이 연금으로는 연명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집에 있던 책이나 잡동사니를 지하철역에서 파는 그런 광경을 흔하게 볼 수 있는 게 현재 러시아의 상황입니다.

노점상들은 경찰한테도 괴롭힘을 당하고, 뒷골목 깡패들에게도 갈취를 당합니다. 자릿세를 내지 않으면 모욕을 당하고 심지어 죽음을 당하기까지 합니다.

또한 기업 입사 과정에서는 여성이 입사를 원하는 경우, 이른바 성상납은 불문율입니다. 대다수의 여성들이 취업을 못하고 있기 때문에 성상납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는 현실인데, 언론에서 이를 다룰 때는 일종의 낭만적인 에피소드로 거론하지 인권 침해 문제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러시아 사회가 폭력화되면서 가장 나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중산층 가정의 아동과 청소년들입니다. 집단싸움이 일반화되었고, 빈민 거주지역의 공교육 기관들은 집단싸움과 마약밀매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러시아에도 국가적 인권 보호 기관이 존재하지만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하등의 관심을 갖지 않고 실제로는 사회의 극단적인 폭력화를 방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국가에 의한 인권 탄압을 지적해도, 국가의 경제실책이나 언론의 오도(誤導)로 인해 황폐화된 사회의 인권 유린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국제 인권단체들도 잘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 대단히 아쉽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일반인에 의한 인권 유린의 한 형태를 말씀드리면 어떨까 하는 마음에 스칸디나비아에서의 집단 따돌림이란 주제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매우 길어진 변명이지만 이제 조금씩 본론으로 들어갈까 합니다.

한국에서 집단 따돌림을 다루는 석·박사 논문들이 꽤 있는데, 대개는 집단 따돌림 현상을 개인적인 문제로 다루려는 분위기가 강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경향이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문제를 더욱 더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혐의를 갖고 있습니다.

1998년에 교육개발연구원에서 학생들에게 집단 따돌림당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87%가 “튀는 행동을 해서 그렇다”고 답변했습니다. 이것은 어떤 얘기입니까. 똑똑한 척한다, 남보다 아는 척한다 등을 지목한 것 같은데, 남과 다르게 행동한다면 집단 따돌림당하기 쉽다는 얘기입니다. 최근엔 직장인들의 집단 따돌림 현상에 대한 여론조사도 있었는데, 역시 튀는 행동이 집단 따돌림의 한 원인이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집단 따돌림당하는 이유가 이와 같다면, 집단 따돌림은 사회문제라는 견해를 지울 수 없습니다. 한국의 집단 문화를 문제삼아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한국의 집단 문화는 남과 다른 행동, 남과 다른 외모까지도 포용하지 않습니다. 집단 차원에서 상처를 주는 폭력이라는 것이 군사주의적인 집단 문화와 상당한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제 한국에서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근대 지상주의적 집단 통합의식에서 파생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근대 지상주의란 ‘서구 표준’과 다른 모든 것에 대한 불인정, 괄시를 말합니다.

한국 사회, ‘서구 표준’과 다른 것을 불인정

예를 들면 한국 직장인 가운데 턱수염이나 콧수염을 기르는 사람을 거의 볼 수 없습니다. 한국에서 면도 문화가 생긴 개화기 초에는 면도를 한 사람은 근대적인 문명인이었고 수염을 기르는 사람을 전근대적인 야만인으로 취급했습니다.

지금도 수염을 기른다는 게 너무 ‘튀는 행동’이라고 취급되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비교적 자율적이라는 교수집단에서도, 한복을 입거나 수염 기른 사람을 이상하게 대한다는 것이 제가 감지한 분위기였습니다.

결국 ‘다름’에 대한 근대 지상주의적인, 군사주의적인 불인정 등이 아이들에게 그대로 반영돼 집단 따돌림 현상을 유발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겁니다.

한국은 그렇다 치고, 군사주의·집단주의가 만연되지 않은 유럽에서 집단 따돌림은 어떤 요인으로 발생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 볼 수 있습니다.

유럽에서 집단 따돌림은 가장 잘 알려진 사회문제 중 하나입니다. 유럽 역시 한국과 같은 정도로 집단 따돌림이 만연되었고, 구타 등은 한국보다 더 심각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영국에서 집단 따돌림을 경험한 사람이 40%에 이르고, 피해를 많이 보는 학생들이 거의 20%에 달해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높은 편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노르웨이에서 폭력 문제가 가장 심각한 곳이 학교입니다. 학교에 이른바 모빙(mobbing) 문화라는 게 있는데 모빙은 원래 무리로 하는 악행으로 지금은 주로 왕따 현상을 의미합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불링(bullying)인데 이는 학교 안에서의 이른바 왕따 현상, 특히 집단구타와 같은 형태를 지칭합니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스칸디나비아에서 집단 따돌림이 시작되는 곳은 유치원입니다. 대개 15~25%가 상습 피해자로 나오고, 20~25%의 학생들이 상습적인 가해자로 나타납니다. 유치원에서의 집단 따돌림은 무척 가혹해졌고, 이때 고립된 아이들은 심각한 성장 장해를 갖게 돼 문제가 큽니다.

특히 중학교에서는 피해 형태들이 고약하고 악질적이며, 한국보다 구타의 비율이 약간 높습니다. 한국은 주로 학생을 고립시키는 방식인데, 스칸디나비아는 인격 모독이 주를 이뤄 침 뱉기, 분비물 가방에 넣기, 이름 대신 좋지 않은 별명 부르기 등입니다. 이로 인해 학교마다 1년에 적어도 거의 한두 명씩 전학을 갑니다.

따돌림 방지는 ‘국가적 과업’

▲ 박노자 교수가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특강을 하고 있다
ⓒ2004 인권위 김윤섭
조사 결과 스칸디나비아의 집단 따돌림은 신자유주의 분위기가 한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노르웨이는 납세자의 납세액에 대한 정보가 인터넷으로 공개됩니다. 부동산을 많이 보유한 사람들이 납세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주민들이 확인하는 것입니다.

사민주의 국가는 세금 징수에 완전히 의존하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는 동네 학교에서 학생들이 쉬는 시간에 인터넷에 접속해 학부모들의 납세액이 얼마인지를 조사해, 납세액이 가장 적은 10%의 부모 아이들을 따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심각한 문제인 집단 따돌림을 예방·근절하기 위해서 노르웨이 등의 스칸디나비아 국가에서 국가·지자체·개별 학교 등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국가 차원에서 따돌림으로 인한 피해에 대한 책임을 해당 학교의 교장 및 담임들에게 묻는 등 따돌림 방지를 의무화시키고 폭력방지요원(대개 대체복무를 하는 병역 거부자들)을 학교마다 상주시켜 가해자·피해자들의 상담, 갈등 조절 등을 하게 합니다.

교육부 당국자들이 관련 연구자와 협력하여 따돌림 현황에 대한 전국적인 조사를 벌이고 피해가 가장 심각한 학교에서 특수 프로그램을 운영케 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따돌림 근절에 실적이 가장 우수한 학교를 국무총리가 직접 방문해 그 성과를 축하하는 등 따돌림 방지는 ‘국가적 과업’의 위상을 가집니다.

중앙·지역 일간지에서 피해자의 편지들을 공개하여 그들의 고통에 대한 사회적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가해자 및 그 부모들의 양심에 호소하기도 합니다. 사실, 많은 일간지들이 따돌림 근절의 당위성에 대한 의식이 높아 피해 사례가 있으면 꼭 편지로 써 달라고 공고하기도 합니다.

학교에서는 따돌림 방지 차원에서 역극극(role-play)을 진행해 피해자가 느끼는 고통의 일단이라도 ‘놀이’를 통해서 맛보게 합니다. 그리고 많은 학교들이 따돌림 방지 웹사이트를 운영하면서 피해자·가해자의 고백을 인터넷으로 공개합니다.

피해자의 솔직한 심정이 만인에게 알려지면 그 피해자를 보는 가해자의 눈은 달라지게 돼 있습니다. 이와 같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한국의 관련 기관들도 참고해 볼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일중독’에 빠진 부모들

그러나 이와 같은 전 사회적인 노력과 일련의 국지적 성공들에도 불구하고, 따돌림이 근절되기는커녕 오히려 피해 건수가 증가하고 그 수법들이 더 악질적이 되고 있습니다. 즉, 각종 방지 프로그램들이 그 확산을 어느 정도 견제하는지 모르지만 병근(病根) 제거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집단 따돌림을 유발시키는 사회·문화적 심층적 요인들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근본적으로 제거될 수 없다는 것이 원인인 듯합니다.

예컨대 많은 학생들이 저지르는 가해 행각의 직접적인 원인이 부모로부터의 애정 결핍, 가정에서 느끼는 소외감, 부모의 무관심 등으로 밝혀져 있는데, ‘일중독’과 ‘소비중독’에 빠져 아이를 ‘2순위’로 인식하는 상당수 부모들의 사유 형태는, 생산·소비를 물신화시키는 자본주의적 체제가 근본적으로 변혁되지 않는 한 바뀔 것 같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가혹 행위의 당위성을 가르쳐 주는 것은 텔레비전에서 매일같이 보는 싸움·죽임의 장면인데, 역시 이윤 추구적 대중문화는 폭력이라는 ‘눈요기’의 주된 요소를 폐기 처분할 것 같지 않습니다.

심지어 한두 살 된 아이들이 하루에 두세 시간씩 텔레비전으로 보는 만화에서마저도 추격·충돌·격투 등의 이미지들이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폭력을 당연지사로 여기게 되는 것이 어찌 놀라운 일이겠습니까?

‘현실’과 ‘연출’을 구별할 능력이 없는 아이들이 연출된 영상물에서 본 폭력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본받으려 한다는 것은 이미 많은 연구자들이 입증한 결과인데, 이윤 추구에 몰두하는 대중문화 생산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신문에서 텔레비전까지 모든 매체들이 늘 주목해 부각시키는 것은 프로 스포츠나 연예계 소식 등인데, 의식·무의식적으로 남학생들이 강인하고 자신만만해 보이는 스포츠 스타들을, 여학생들이 요즘 시쳇말로 ‘몸짱’·‘얼짱’으로 인식되는 연예계 스타들을 인간의 ‘표준 모델’로 각각 삼게 돼 있습니다.

그 ‘표준 모델’의 틀에 맞지 않은 - 즉, 허약해 보이거나 사교 능력이 없어 보이거나 너무 ‘빈티’ 나거나 ‘외모에 문제가 있는’ - 남녀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왕따 후보’가 되고 맙니다.

‘자유’를 표방하는 자본주의는 놀라울 정도의 일상적 사고의 획일화를 가져다 주는데, 그 획일적인 규범에 맞지 않은 자는 곧잘 일상적인 폭력에 시달리게 됩니다. 인권 이상(理想)에 완전히 상반되는 현실이지요.

그러나 이윤 추구적 시스템이 이 지구를 계속 괴롭히는 이상 이 시스템이 고쳐질 것 같지도 않고 인권의 이념이 제대로 실현될 것 같지 않습니다. 결국 인권 신장을 위한 투쟁은 바로 반(反)자본주의적 투쟁과 둘이 아닌 하나라고 봐야 할 듯합니다.

긴 시간 동안 부족한 제 이야기를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박노자 기자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간하는 월간 <인권> 8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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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magic 2004-09-16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정말 너무하네요..............

Fithele 2004-09-16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관심을 끄는 부분들이 있어 퍼갈게요

간달프 2004-09-16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에게서 자유를 앗아가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그것은 국가나 권력 따위가 아니라 자기 내부의 불안과 불만이 아닐까? 그런데 자본주의 혹은 자유경쟁체제는 바로 그 내면의 불안, 불만을 통해 지탱되는 체제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평등과 자유를 조화시키는 것은 기회의 평등이 아니라, 결과의 평등이 아닐까?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여유없이 자유없다.

sweetmagic 2004-09-16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그 여유를 만들어 내는 요인들이 문제예요 ........................


으앙~~!! ㅠ.ㅠ;;;

간달프 2004-09-16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유 만들기 (1) 결과의 평등 -> 국가의 일 (2) 가치의 평등 -> 문화(사회)의 일

갈대 2004-09-17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든지 '튀는 것'을 싫어하고 비난하는 성향은 인간의 본성인 것 같습니다. 집단에서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표준을 위험하게 만들고 깨뜨리려는 자는 흔히 처벌을 받습니다. 자본주의와 한 사회의 특수한 문화가 집단 따돌림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더 심화시킬 수는 있겠습니다만). 하워드 블룸은 <집단정신의 진화>에서 동조를 강요하는 집단의 성향을 '동조집행자'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간달프 2004-09-17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단 따돌림'을 자연적으로 정당화하고자 하시는 것인지요? (하워드 불룸은 접하지 못했습니다만) 집단 따돌림을 일종의 '집단적 지혜'(혹은 networked intelligence)라고 보시는 것인지요? 하지만 집단 동조적인 성향만으로 이루어진 집단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만일 이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튀는 것'과 '튀는 것을 배척하는 집단적 동조 성향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 마저도 본성(?)이 아닐까요?

간달프 2004-09-17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본주의(혹은 특정 문화)가 근본적인 원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성향을 증폭시키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성향을 단순히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윤리적 판단을 중지한다면(윤리의 은폐) 일종의 범주 오류는 아닐런지요?

갈대 2004-09-17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단 따돌림'을 정당화 하려는 건 결코 아닙니다. '집단 따돌림'은 집단의 단결을 해치는 위험요소를 제거하려는 행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모방과 동조가 인간 집단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요인임은 분명합니다. 분열된 집단보다는 단결된 집단이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에 이런 본능이 길러진 게 아닌가 합니다. '튀는 것', 즉 다양성을 생성하는 것이 집단에 이익을 줄 경우에는 큰 보상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엔 위험이 뒤따르죠. 결국 튀는 것도 위험을 감수한 본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하워드 블룸은 이런 성향을 '다양성 생성자'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해서 모방과 다양성은 적당한 균형을 이루게 되는 것이지요. 여기까지가 진화론을 근거로 한 하워드 블룸의 인간 집단에 대한 설명입니다.

갈대 2004-09-17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 이런 설명을 가지고 '집단 따돌림'을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정당화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집단 따돌림'의 원인에 대해서 훌륭한 통찰을 제공해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문제의 원인을 아는 것과 그 문제를 판단, 해결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지만 원인을 알면 해결에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있을 테지요. 개인적으로는 다양성이 보장받을 수 있는 집단이 더 건강한 집단이라 여기기에 집단 따돌림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동조 집행자'가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인간의 야만성을 억누르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집단 구성원을 집단에 적응하도록 하는 것도 모두 '동조 집행자'의 작용으로 볼 수 있으니까요.

간달프 2004-09-18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덕분에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미심적은 부분도 있습니다. (쓰신 글로만 보아 판단하건데) 인간의 야만성을 억누르고 사회질서를 유지한다고 하셨는데 만일 사회질서(혹은 집단) 자체가 야만적일 경우에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물론 여기선 야만성에 대한 고찰이 먼저 필요하겠지만... 하워드 불룸의 논리는 혹시 개인의 실천에 대해 집단의 실천(혹은 생존)을 선험적으로 우위에 놓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요. 혹시 파시즘의 뉘앙스가 깔려 있는 것은 아닌지요?

간달프 2004-09-18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또 하나는, 왕따 현상의 근본적 원인이 자본주의(혹은 특정문화)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왕따현상을 그 특정문화가 교정할 수 있느냐의 문제에 촛점이 맞춰져야 하지 않을까 하네요. 그러니까 왕따현상와 특정문화의 관계를 '문화적 실천'의 차원에서 봐야지 인과관계가 있느냐 없느냐로만 파악해서는 안되지 않을까요? 물론 불룸의 진화행동학적(?) 통찰이 그 문화적 실천에 긴요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엔 동감합니다.

갈대 2004-09-18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질문을 던지셨군요. 우선 하워드 블룸은 생물학적 결정론자가 아니며(오히려 그 반대입장에 서 있다고 볼 수 있죠. 물론 인간의 본성을 인정하지만요) 파시즘 뉘앙스를 깔고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그는 <집단정신의 진화>에서 진화의 핵심은 신다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유전자의 이기성 때문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네트워크'(공존)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관심은 네트워크를 통한 '집단정신'이 어떻게 형성, 발전하는가에 쏠려 있습니다. 그의 이론에 비추어 보면 파시즘이 발생하는 원인은 집단 구성원들의 무비판적이고 그릇된 동조 때문입니다. 이러한 동조가 가능했던 이유는 집단을 위협하는 강력한 외부요인(위기에 처했다고 느낄 때 인간의 이성은 객관적인 판단력을 상실하기 쉽죠)과 그런 외부요인을 이용해 자신들의 야망을 실현하려는 몇몇 선동가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파시즘의 경우엔 외부요인의 위협은 분명 부풀려진 것이고 또 외부요인에 대응하는 방법 역시 다른 집단 모두를 적으로 만들면서 스스로 고립상태에 빠뜨리는 것이었으므로 잘못된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벌어졌던 비인륜적, 우생학적 행위들 역시 용서받을 수 없는 것들임은 말할 필요도 없겠죠.

갈대 2004-09-18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만성은 말씀하신 대로 고찰이 먼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가령 아직도 원시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부족들의 잔인한 행위를(문명인의 관점에서 보기에) 야만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런 행위들이 집단의 지속적인 생존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으니까요. 개인의 실천과 집단의 실천을 놓고 봤을 때는 둘 중 어느 하나가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개인의 실천은 집단의 실천에 영향을 미치고 또 그 반대과정도 성립하니까요. 또 무조건 개인에게 집단을 위해 희생하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구요.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집단의 실천이 우선적으로 작용하는 듯 합니다. 하워드 블룸은 책의 말미에서 집단 전체의 지속적인 생존(공존)을 강조하고 극단주의를 경계할 것을 역설합니다. 파시즘(집단주의)은 집단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인을 강조한다는 점만 봐도 배척함이 마땅하고 자본주의는 말씀하신 대로 개인의 마음에 불안을 심어줌으로써 소수의 사람들이 다수의 사람들을 착취하는 체제이고 장기적으로 집단 전체의 생존에 위협이 되므로 역시 경계해야 합니다. 왕따문제는 당연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므로 해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옳겠지요. 너무 횡설수설한 것 같습니다. 아는 것 없는 저보다는 책과 얘기를 나누시는 편이 유익하겠네요^^;

간달프 2004-09-19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찮은 의문에 이렇게 긴 응대를 해주시니 오히려 제가 더 고맙습니다. 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불룸의 책을 선입견없이 읽어보아야 겠다는 의욕이 생기는 군요. 거듭 감사드립니다.
 

베니스에서 지오반니 벨리니의 초상화를 벽에 걸거나 도금시대(Giled Age)의 보스턴이나 뉴욕에서 존 사전트나 윈슬러 호머의 그림 혹은 세인트고든스의 패널을 걸어놓을 정도의 돈 세례를 받으면 윤리와 민주주의의는 일반적으로 더 좋아지기는 커녕 그 기초가 악화된다. (부와 민주주의, 520-521)

오늘 우리 사회의 여러 특징들, 즉 무자비한 경쟁, 맹렬한 소비 제일주의, 더 넓은 지평과 혁신에 대한 끊임없는 욕망은 르네상스 시대에 만들어진 세계다. (상동,521)

17세기 네델란드의 성공은 종교나 근검이나 금욕적인 생활과는 무관하며, 캘빈주의 주연합(Calvinist United Provinces)도 이기주의를 추구한 사적 악덕(private vices)을 공적 덕성(public virtues)으로 변형시켜 건설된 나라였다. (버나드 맨드빌의 <꿀벌 이야기>(1714) 중에서)

1680년대와 1690년대의 영국 신흥 부자들은 경쟁을 중시하고 허영과 야망, 경쟁심을 새로운 시장 동력으로 높이 평가한 경제성장 이론을 도입했다. (역사가 조이스 애플비)

(사회적 다위니즘을 통해) 미국사회는 이빨과 발톱으로 승자를 결정하는 자연 세계의 선택과정에서 바로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했다. (역사가 리처드 호프스태더)

지금 미국에 널리 퍼져 있는 극단적 사업 에너지와 거의 광적인 부에 대한 탐욕은 내가 바라는 결과를 얻기 위해 불가결한, 진보와 개선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이론은 부와 부의 획득을 포함한다. (미국시인, 월터 휘트먼,1817)

평등주의는 부적자 생존(survival of the unfittest)을 주장한 것일 뿐이다.  백만장자는 자연적 선택의 산물이며 이 자연적 선택은 인간 집단 전체에서 특정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 사람들을 골라내는 것이다. [...] 자신의 소유이든 아니든 타인의 위임을 받은 것이든, 부가 백만장자의 손에 모여 있는 것은 자연적으로 선택된 사회의 대표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높은 임금을 받으며 호사스럽게 살고 있지만 이것도 이들 덕분에 사회 전체가 누리는 혜택으로 보면 괜찮은 거래다. (예일대 정치사회학교수 윌리엄 그래이엄 썸너)

가장 성공한 (혹은 가장 탐욕스러운) 사업가들은 학교나 언론이나 심지어는 교회에서도 미국의 위대성을 창출한 전형으로 찬양되고 있다. (사상가 앨버트 제이 녹의 회고) (오오~~ 부흥회의 이명박은 서울을 하느님께 봉헌할 자격이 있다~)

미국이 할 일은 바로 기업이다. (1920년대 미국 캘빈 쿨리지 대통령)

민주주의는 낮은 가격에 소비재를 구입할 수 있는 권리다. (언론인 월터 리프먼)

예수는 세계 최초의 위대한 세일즈맨이다. (전 공화당 하원의원 부르스 바튼)

우리 시대의 낭만적 영웅은 더 이상 기사나 방랑 시인이나 카우보이나 비행사, 혹은 용감한 젊은 검사가 아니라 유리 깔린 책상 위에  <판매촉진 문제의 분석(Analysis of Merchandizing Problems)>라는 책을 펴놓고 수완가(Gogetter)라는 작위를 가진 위대한 세일즈 매니저다. (소설가 싱클레어 루이스)

다른 무엇보다도 나는 미국이 누군가는 부자가 될 수 있는 나라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 (미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탐욕이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있지만 나는 탐욕은 나쁜 것이 아니라 고 말하고 싶다. 우리 체제에서는 누구나 약간의 탐욕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기업 사냥꾼 이반 보에스키)

돈과 권력이 모든 것이며 문제는 이것들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는 점이다. [...] 우리는 (지위와 재산을 중배하는) 속물적 태도나 호화 생활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Vogue'와 'Haper's Bazaar'의 편집장을 역임했고 레이건 대통령 부부의 패션자문가)

중세의 7가지 죄악, 즉 자만, 폭식, 탐욕과 낭비, 나태, 분노, 시기는 모두 르네상스 시기의 주된 가치로 전환되었다. [...] 아마도 나태를 제외하고 사람들이 이러한 가치에 의해 동기를 부여받지 않는다면 근대 경제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SRI International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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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달프 2004-09-14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여튼 미국인 글쟁이들은 남의 글 긁어모으는데는 세계 제일... 미국인답게^^ 탐욕스럽군요..

sunnyside 2004-09-14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이란 나라는 부와 민주주의의 조화가 자연스럽군요... <화씨 911> 중, 부시가 부자들 앞에서 "가진 자들, 그리고 더 가진 자들 - 당신들은 나의 기반입니다"라고 당당히 연설하는거 보고 깜짝 놀랐어요.

간달프 2004-09-15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죠... 그런데 웃기는 건 그런 건 미국 주류 언론엔 거의 노출되지 않지요. 한국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여기선 대통령이 화장실 안에서 중얼거린 말도 일면에 실릴 겁니다.

간달프 2004-09-18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이 <부와 민주주의>란 번역서, 책값에 안 어울리게 번역이 더럽더군요. 화딱지나서 집어던졌어요.
 

"The appearance of closed faciticity that adheres to the philosophical investigation and holds the researcher in its spell disappears to the degree that the object is constructed in historical perspective. The vanishing lines of this perspective converge in our own historical experience. It is thereby that the object constitutes itself as a monad. In the monad everything becomes alive which as facts in a text lay in mythical fixedness." (Susan Buck Moss, The Dialectics of Seeing (MIT Press. 1999) p.292)

위의 원문을 역자는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연구자를 사로잡는 닫힌 사실성은 철학적 탐구와 결부되어 있다. 대상이 역사적 관점에서 구성될수록 이러한 사실성은 사라진다. 이러한 관점의 소실선은 우리 자신의 역사적 경험으로 수렴한다. 그러므로 대상은 단자로 형성된다. 텍스트에서는 신화적 고착의 상태에서 하나의 사실로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단자에서는 살아난다." (수잔 벅 모스, <발터벤야민과 아케이드프로젝트, 김정아 역 (문학동네,2004) p.375)

영 맘에 안드는 번역이라 아래와 같이 고쳐봤다.

"닫힌 사실성은 철학적 탐구와 결부되어 연구자들을 사로잡는데, 닫힌 사실성의 외양은 대상이 역사적 원근법 속에서 구축됨에 따라 사라지며 이 원근법의 소실선들은 우리 자신의 역사적 경험으로 수렴된다. 대상이 그 자체로 하나의 모나드가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신화적 고정성 속에서는 모든 것이 한 텍스트 속의 사실들처럼 배치되지만 모나드에서는 모든 것이 살아난다."

이 부분은 공간축과 시간축이 교차하는 부분에 대한 설명으로, 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교차하는 (어쩌면 모순처럼 뵈는) 부분에 대한 설명이다. (연속성 불연속성에 대한 언급은 역서 p.271에서 "상품 형식의 현상학의 연속성과 변증법적 이미지가 암시하는 불연속성", "역사적 해석축과 형이상학적 해석축의 긴장" 또는 "형이상학적 탐구와 역사적 탐구 사이의 방법론적 관계:스타킹 뒤집기" "이러한 모순적 대립항의 종합은 [...] 두 축의 교점" 등이 있다.)

김정아의 번역에서는 "appearance"를 또 누락했는데, 나는 이 단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라바터의 '본성'과 '표정'의 구분과 겹쳐볼 때 그렇다. "appearance"는 '표정'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이 외양(appearance)가 사라질 때 '대상'은 '모나드'가 된다. (그러나 역자는 'appearance가 사라짐'이 아니라 '닫힌사실성이 사라짐'으로 오역했다)  '닫힌 사실성'이란 얼굴은 본성과 표정을 갖는데, 닫힌 사실성의 '본성'은 역사적 원근법 속에서 대상이 구축됨에 따라 나타난 '모나드'이다. 그리고 모나드에서는 모든 것이 살아난다. 

가라타니 고진이 라이프니쯔의 모나드론을 설명하는 부분을 들어보자. 모나드에서는 모든 것이 살아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라이프니쯔는 무한을 한이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점) 속에서 찾는다. 그리하여 개체 자체 속에서 무한성이 발견되거나 혹은 이러한 개체(모나드)가 발견된다. [...] 접점은 곡선의 무한소로서 자체가 하나(점)이면서도 방향을 내포하며 모든 곡선을 '표출'한다. 무한소의 점은 말하자면 '형이학적인 점'이다. 이는 더 분할할 수도 없고 부분도 없다. 더욱이 이는 전체를 표출하고 있다. 이것이 라이프니쯔가 말하는 모나드이다." (가라타니 고진,<탐구2>,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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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ch fields of the coordinates can then be said to describe one aspect of the physiognomic appearance of the commodity, showing contradictory "faces"; fetish and fossil; wish image and ruin".

역자는 위의 원문을 "좌표의 사분면은 각각 상품의 일면을 보여줌으로써 상품의 모순적 "얼굴"을 드러낸다. 즉 상품은 물신이자 화석이고, 소망 이미지이자 폐허이다."(수잔 벅 모스, <보기의 변증법>, 김정아 역. (문학동네,2004) p.272)라고 해석한다. 역문에서는 "physiognomic appearance"에 해당하는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관상학적 외양의 한 일면'이라고 정확히 변역한 후에, 여기서 "관상학적"이란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려줘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서양 관상학에 관한 책을 찾아보았다. 설혜심님의 <서양의 관상학>이란 휼륭한 책이 있었고, 들췄고, 그리고 거기서 18세기에 맹렬하게 활동하여 큰 영향력을 가졌던 '라바터'라는 관상학자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가 활동하던 당시의 사조는 과학과 유사과학의 경계가 흐려지던 시절로 - 과학적 발견이 모든 것을 커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신비스런 질문은 많았고 명백히 과학적인 해답은 부족했던 시대였다 - 관상학은 사람들의 궁금증에 훌륭한 대답을 해줄 수 있다고 믿어지는 종류의 새로운, 과거로부터 부활한 학문이었다.

라바터의 관상학 방법론 중에 이 구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부분은, 라바터가 관상을 '본성'과 '표정'의 두가지로 구분한다는 점이다. '본성'은 타고난 것(신이 각 개인에게 부여해 준 바)으로 관상학에서 본질적인 부분이고 '표정'은 후천적인 것으로 그의 관상학에서 부차적이거나 제외시킬 부분이다. 그래서 아예 표정을 배제하고자 얼굴의 실루엣만으로 관상을 분석하는 방법까지 고안된다. 라바터의 이러한 구분은 좀 허무맹랑해 뵈지만 당시 역사적 맥락에서 놓고 보면 그렇지도 않다. 당시 궁정문화(신분주의)에 대항하여 개인주의를 드높이는 설정이기 때문이다. 라바터 이전의 궁정문화는 '화장의 시대'라고 할 만큼 의복과 화장 등 후천적 요소에 의해 신분(나아가 인격)을 맹렬하게 구분짓는 요소가 지배했었는데 라바터의 이런 '본성'에 천착한 관상학은 그런 신분주의에 대한 일격이기도 했던 것이다. 실루엣에서는 아무리 용을 써도 화장한 티가 전혀 안나기 때문이다.

본성과 표정의 구분은 벤야민의 '상품의 모순적인 얼굴'에도 적용할 수 있을 듯 하다. 본성은 상품의 원역사(ur-history)에 상응하고, 표정은 상품의 자연사적 측면에 상응한다. 이 두 요소가 서로 해소됨 없이 변증법적 이미지로 대치되는 상태에서 오는 '충격'은 원역사의 actualization, 즉 계급 혁명을 이끈다. 이런 식으로 볼 수 있다면 벤야민의 <파세젠 베르크>는 '상품의 관상학'이라고 불러도 좋을 듯 하다. 단 라바터의 관상학과 분명한 차이점도 있다. 라바터의 관상학이 개인주의와 분석적 관상학이라면 벤야민의 그것은 계급주의와 예언적 관상학이란 점이다. 라바터의 관상학이 구체제인 궁정문화에 대해 개인주의를 내세우는 반면, 벤야민은 부르조아 개인주의 문화에 대항하여 계급주의 혹은 무산계급의 집단적 무의식을 흔들어 깨움을 노린다. 또한 라바터는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본성을 "분석적"으로 추척하는 일을 추구한다면 벤야민은 상품 이미지들 속에서의 변증법적 이미지를 통해 아직 오지 않은 유토피아에 대한 집단적 꿈을 각성시키는 "예언적" 효과를 노린다.  

추신 - 윗글은 전혀 학문적으로 믿을만한 내용이 못되어오니 장난글로 봐주시기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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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9-12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난글이라... 그래도 재밌는 걸요.

sweetmagic 2004-09-12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 ^^

간달프 2004-09-12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를 준다면 장난글의 임무를 잘 완수했네요.^^
 

그가 대마초를 꿈꾸는 이유

이 책의 주장은 상당 부분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만 그건 이에 반대되는 주장 또한 마찬가지다. 믿든 믿지 않든 어디까지 받아들이든지 간에 그건 당신의 자유다. 진위를 판단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 시대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고정관념을 벗어나는 의미에서 귀를 기울일 필요는 있다. 이 책의 저자 유현은 소설가다. '창작과비평'으로 등단했고 아시아 현대사를 소재로 '시하눅빌 스토리'와 '메콩의 슬픈 그림자, 인도차이나' 등을 썼다.

대마초는 담배보다 덜 해롭다.

대마초는 환각물질이 아니다. 기분을 좋게 하는 진정 효과가 있을 뿐이다. 묶어서 대충 마약이라고 부르지만 그래서 대마초는 필로폰이나 코카인 같은 독성 마약과 다르다. 엘에스디나 엑스터시 같은 확각약물과도 다르다. 대마초를 피워도 당신의 감각은 살아있다. 대마초는 중독성이 없다. 줄 담배는 피울 수 있지만 줄 대마초는 피울 수 없다. 대마초는 한 대 말아서 두세 명이 나눠서 피우고도 1시간 이상 효과가 지속된다. 대마초는 담배만큼 자주 피울 수 없고 당연히 담배보다 연기를 훨씬 덜 들이마시게 된다. 독성도 담배보다 낮다. 성인 남자가 담배를 3개비 이상 삼키면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대마는 식용 치료약으로 널리 쓰인다. 대마초의 중독성은 담배보다 훨씬 낫다. 종합해 보면 대마초도 분명히 몸에 해롭긴 하지만 담배보다는 훨씬 덜하다. 그런데도 담배는 허용되고 있고 대마초는 금지돼 있다.

대마초 불법화를 둘러싼 추악한 음모

이 같은 대마초의 억울함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1937년 미국에서 마리화나 세금법이 제정되고 대마초에 대한 대대적 탄압이 시작되었을 때 앞장선 사람은 연방마약관리국의 국장, 헨리 안스링거였다. 헨리 안스링거는 멜론은행의 은행장, 앤드류 맬론과 사돈 사이고 멜론은행의 가장 큰 고객 화학회사 듀폰이었다. 화학섬유를 개발해 재미를 보려던 듀폰에게 최대의 적은 대마였다. 대마는 대량생산이 가능한 유일한 천연섬유였고 나일론과 레이온의 시장 진입을 막는 큰 걸림돌이었다. 이게 엉뚱하게도 대마초가 마약이 되고 대마의 생산과 판매를 대대적으로 억압하게 된 이유였다.

여기에 신문 재벌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오손웰스의 <시민케인>의 주인공의 모델이 된 인물)까지 개입한다. 목재 펄프 사업에 뛰어들었던 허스트는 대마 펄프의 공격적인 시장 확장을 경계했다. 허스트는 모든 언론과 영향력을 총동원하여 대마초의 위험을 과장 선전했다. 특히 허스트는 인종차별주의를 교모하게 끌어들여 대마초를 유색인종이나 찾는 저급한 환각물로 사회에 인식시키는데 성공했다. 결국 대마초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됐고 그 이면에서는 대마산업의 몰락과 함께 화학섬유와 목재 펄프 시장이 급속도로 팽창했다. 당연히 듀폰과 허스트는 떼돈을 벌었다.

최근 공개된 1972년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대마초가 개인이나 사회에 유해하지 않으며 대마초의 생산과 유통을 규제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그해 대마초 흡연 혐의로 무려 42만명을 잡아들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1970년대 이후 30여년 동안 미국에서 대마초 흡연 혐의로 체포돼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모두 1500만명을 넘어선다. 우리나라에서도 2002년을 기준으로 마약 사범은 모두 5594명, 이 가운데 대마 사범이 1302명에 이른다. 우리나라는 다만 미국을 따라 대마초를 금지하고 지금까지 그 법을 그대로 지켜오고 있다.

우려하는 것과 달리 네델란드에서는 76년 대마초 합법화 이후 대마초 흡연 인구가 오히려 크게 줄어들었다는 통계도 있다. 필로폰이나 코카인의 흡연 인구도 줄어들었다. 무조건 처벌과 단속이 능사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2000년대 들어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스위스 등 유럽 국가들이 대마초를 합법화하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유현은 한발 더 나아가 대마초를 합법화해야 필로폰이나 코카인같은 독성마약을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대마초나 필로폰이나 코카인이나 그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다. 대마초가 합법이라면 대마초를 피울 사람들이 필로폰이나 코카인에 손을 대지 않게 된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필로폰이 대마초보다 훨씬 넓게 퍼져있다. 심지어 대마초가 흡연인구와 폐암 사망률을 낮춰줄 수 있다고도 주장한다. 대마초가 담배의 대체제이면서 몸에도 훨씬 덜 해롭고 중독성도 없다는 이야기다. 물론 상용화만 된다면 가격도 훨씬 더 쌀 수 있다.

대마초와 별개로 대마산업을 다시 육성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듀폰과 허스트 때문에 무너졌던 대마 섬유와 대마 펄프가 뒤늦게나마 환경 문제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종이 1톤을 만들려면 30년생 나무 172그루를 잘라내고 다시 30년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대마는 다음해에도 그 다음해에도 똑같이 열매를 맺는다. 1에이커에서 재배된 대마는 2-4 에이커에서 자란 나무를 대체할 수 있다. 게다가 종이의 질도 훨씬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유현은 자본주의가 대마초를 혐오했던 가장 큰 이유가 노동자 계급에게 지나치게 적은 비용으로 큰 기쁨을 줬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대마초와 비교할 때 담배는 현실을 겨우 견뎌낼 만큼의 적당한 기쁨을 준다. 대마초와 대마초가 상징하는 삶의 방식은 금욕적 노동에 기초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반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마도 자본주의는 그래서 노동자 계급에게 대마초를 허락하지 않았고 유현은 거꾸로 그래서 대마초를 꿈꾼다. 금욕을 강요하는 사회가 받아들이기에는 참으로 불온한 상상이다.

이정환/ 월간 '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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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magic 2004-09-12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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