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의 '비극'에 대한 생각은 마르크스나 크립키의 "목숨을 건 도약"이나 "어둠 속의 도약"과 밀접히 연관된다.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그것은 개인적 의도와 사회적 결과의 불일치의 문제일 것이고, "비극적"이라 함은 이런 의도되지 않은 결과에 대해(자기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해) 개인이 온전히 책임을 져야하며,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나 이유에 대해 어느 누구도 어떤 합리적인 설명을 명백히 제시해줄 수 없다는 점이다.

이런 인식을 요즘 현실에 적용해 본다면, 예를 들어 유영철 연쇄 살해사건에 대해서도 전혀 무관한 나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를 죽여없앰으로써 모든 것이 해소될 수 있다고(혹은 보복으로써 죄값을 치르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극적 인식'의 결여의 결과다. 비극적 인식의 결여는 결과적으로 사회의 은폐를 초래하고 범죄자를 희생양 삼아 악한 공동체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것이다.

르네 지라르는 기독교에 대한 나름의 분석에서, 예수란 사건이 있음으로 해서 공동체의 종교였던 유대교가 세계종교인 기독교로 도약했다고 설명한다. 유대교 제의에서 희생양은 공동체의 모순을 대신 뒤짚어쓰는 속죄양인데 공동체 속의 성원들은 공동체의 죄를 모두 희생양에게 지운다. 반면 기독교는 예수라는 희생양이 아무 죄도 없음을 명백히 밝힘으로써 공동체의 자폐적이며 자기만족적이며 동어반복적인 상태를 끝장냄으로써, 공동체의 종교가 아닌, '세계종교'가 된다.

이와 유사한 형식이 박찬욱의 복수극 영화들에서도 보인다. 그의 복수극에서 중요한 것은 타자에게 위해를 가하는 일이 순전히 사적인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고, 따라서 사적 복수로는 모든 모순이 해소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모든 사건들의 배경에는 '사회적인 것'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클라이막스인 복수의 장면은 하나의 희생제의처럼 그려지는데, 복수하는 자는 공동체의 제사장이고 죽임을 당하려는 자는 죄를 뒤짚어쓴 희생양이 된다. 이 희생양에게 죄가 있는가 없는가? 박찬욱의 영화들은 이 점을 아리송하게 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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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magic 2004-08-26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희생양에겐 선택된 죄가 있지요.....ㅎㅎㅎ 그것도 어떨수 없는....
종교는 인류의 죄의식이 만들어낸 희비극의 시작이 아닌가 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인간은 [...] 주로 행동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 그러나 이 행동은 그것이 완료될 때 까지는 일관성을 결여한다. ...... 한마디로 말하면, 그 사람에게 미래가, 예견할 수 없는 요소가 있는 한 그 인간을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그러므로 죽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한 우리에게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 이 죽음이 어느 새 우리 삶의 몽타주를 만들어낸다. 즉 죽음이 진실로 의미있는 순간을 선택하고, 그 순간은 그것과 모순되거나 통일될 수 없는 다른 순간에 의해 조정되지 않는다. 그것을 하나의 시퀀스 안에 위치지으며, 무한하고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 따라서 언어로 묘사할 수 없는 - 현재를 명백하고 안정적이고 틀림없는, 따라서 쉽게 묘사할 수 있는 과거로 변환한다. ...... 우리의 삶이 우리 자신을 표현할 때 유용한 것은 오로지 죽음 뿐이다.

[...]

따라서 편집이 영화의 재료에 대해서 수행하는 작업은 [...] 죽음이 생명에 대해 집행하는 수술에 해당한다.

                                                                   ------ 영화감독 파졸리니의 어느 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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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자는 아직 주둥이가 노란 미숙자이다. 모든 장소를 고향이라고 느낄 수 있는 자는 이미 상당한 힘을 축적한 자이다. 전 세계를 타향이라고 생각하는 자야말로, 완벽한 인간이다. " 
    -12세기 독일 스콜라 철학자 생 빅토르 후고의 <Didascalion>의 말로, 아우엘바하의 <Philologie der weltliteratur>와 Edward Said의 <Orienatalism>에서 재인용되고 있음.

Bourne Identity와 Bourne Supremacy

'Bourn(bourne)'은 '경계', '한계'를 의미하는 古語. 1편은 주인공 본이 처한 상황을 의미하는 제목이었다면, 2편의 제목은 재미있게도  'Bourne is Supremacy' 라는 의미가 된다. Supremacy는 어느 누보다도 많은 힘, 권위 그리고 지위를 누리는 자리라는 의미로 경계 위에 선 '본'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인간"이란 의미도 된다.

그렇지만 영화에는 두 가지 요소가 충돌하고 있는데 원작자의 경계적(무소속의/고향없는) 정체성에 대한 찬양과 감독의 '진실과 화해'를 위한 기억의 책임이란 문제가 공존한다. (감독 폴 그린그라스는 아일랜드판 광주학살을 다룬 <블러디 선데이>의 감독이기도 하다.) 아마도 '보편적 진실'을 추구하는 CIA의 랜디에 대비되는 본의 모습이 부각되려면 감독의 색깔이 좀 죽어줘야 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생 빅토르 후고의 유명한 문장을 영화에 적용해 본다면, 우리는 영화 속에서 세 인물을 골라낼 수 있다. 우선 "주둥이가 노란 미숙자"는 트레드스톤의 전 책임자였던 남자(자칭 애국자)가 되고, "이미 상당한 힘을 축적한 자는 CIA의 랜디 국장이, 본은 "완벽한 인간"이 된다. 자칭 애국자인 남자(배역상 이름을 기억못함^^-이하 애국자)는 미국이 고향/조국인 사람이고 랜디는 진실이 고향/조국인 사람이라면 본은 온 세상이 다 타향/타국인 사람이다.

랜디는 시종일관 보편적 '진실'의 세계 속에 사는 사람이다. 이에 대해 양측에 그런 것 따윈 없다고 주장하는 두 사람(애국자와 본)이 있는 것이고 애국자는 자멸하지만 본은 다시 자기 본디 정체성엔 무심한 채 어디론가 날아간다. 본의 기억상실증은 초반에는 짐이었지만 후반에는 날개같은 것이 된다. 단 기억상실증 속에서 기억해야될 책임이 있는 것을 복구한 후에 그렇게 된다. 여기엔 감독의 주장이 강하게 반영된 것 같다. 여하튼 영화는 주인공의 정체성이 자명하게 밝혀지는 것을 계속 지연시킨다. 영화가 끝나도 관객은 그가 본디 누구였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곤 본의 마지막 대사로 그런 것 따윈 "피곤한" 것이라고 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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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국사’의 굴레를 벗어던져라

[학술- 다시, 동아시아!]

‘역사전쟁’을 재생산하는 동아시아 역사인식의 문제점… 민족주의의 적대적 공생관계

▣ 임지현/ 한양대 교수 · 사학과

1992년 부다페스트의 한 강연에서 20세기를 대표하는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홉스봄(Eric J. Hobsbawm)은 역사학이 핵물리학만큼이나 위험할 수 있다는 뒤늦은 깨달음에 대해서 이야기한 바 있다. 모든 역사가는 예기치 않게 정치가가 되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변이었다. 비단 동아시아의 역사학계뿐만 아니라 권력판과 시민사회를 뜨겁게 달군 동아시아의 역사전쟁이 북한의 핵무장이나 일본의 재무장 못지않게 동아시아의 평화 체제를 위협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 아시안컵 결승전에서 일본에 진 뒤 베이징 거리에 모인 중국 시민들. 과거에 대한 이해를 둘러싼 대립과 갈등의 밑바닥에는 현재의 국가간 대립과 갈등이 숨어 있다.
(사진/ AP연합)

갈등의 촉매제로 작용하는 역사

과거에 대한 이해를 둘러싼 대립과 갈등의 밑바닥에는 사실상 현재의 국가간 대립과 갈등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다이오유·센카쿠 열도를 둘러싼 일본·중국·대만의 갈등, 쿠릴·치시마 열도를 놓고 벌이는 러시아와 일본의 신경전, 독도·죽도를 둘러싼 한국과 일본의 오랜 영토분쟁 등이 역사전쟁의 정치적 배경인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의 ‘새 역사교과서’ 파동에서 시작되어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한층 가열된 동아시아의 ‘역사전쟁’은 과거의 역사적 실체를 사실적으로 구명한다고 해서 해소될 성격의 것은 아니다. 각국은 모두 문제가 되는 영토에 대한 자신들의 영유권을 뒷받침하는 자료들을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논쟁에서 역사는 해결책이 아니라 갈등을 유발하고 증폭하는 촉매의 역할을 한다. 다이오유·센카쿠 열도나 독도·죽도는 열렬한 민족주의자들이 가끔씩 국기를 들고 상륙하는 해프닝을 벌일 뿐, 자연적인 거주민이 없는 무인도이다. 어느 나라도 그 영토에 거주하는 주민들과의 문화적 유대를 주장할 현실적 근거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곳이 ‘우리나라 고유의 영토’라는 각국의 주장은 과거 역사와의 관련 속에서만 정당화될 뿐이다. 이때 역사학은 영토 분쟁의 학문적 첨병으로 복무한다. 유럽의 역사전쟁에서도 잘 드러났듯이, 때때로 고고학의 역할 역시 무시할 수 없다. 많은 경우, ‘역사적 진실’은 역사전쟁의 정치학을 학문의 이름으로 혹은 진실의 이름으로 은폐할 뿐이다.

역사전쟁의 가장 큰 인식론적 특징은 근대 국민국가의 주권 개념이 먼 과거에 개념적으로 개입한다는 점이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를 중국사의 공간적 범주로 규정하는 중국의 공식적 역사인식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한반도 북부에도 일부 걸쳐 있었지만, 만주의 큰 부분을 차지했던 고구려를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하려는 ‘동북공정’의 시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이에 대해 한국의 주류 역사학계는 문화적·형질적 연속성을 근거로 고구려사를 한국사의 일부라고 강하게 반발한다. 한국 역사학계와 시민사회의 주류는 역사적 정통의 계승을 강조하는 ‘역사 주권’의 관점을 취하고 있다. 중국의 ‘국가 주권’적 관점에 비하면 한국의 ‘역사 주권’적 관점은 근대 국민국가의 시각을 먼 과거에 그대로 투영하는 시대착오주의에서 다소 자유로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독도와 센카쿠열도 등의 영유권을 둘러싼 논쟁에서 보듯이, ‘역사 주권’은 이 섬들에 대한 ‘국가 주권’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곧 비약된다. 일부이기는 하지만, ‘고토수복’을 외치며 한국의 주권을 만주 지역까지 넓히자는 일부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의 주장도 따지고 보면 ‘역사 주권’을 근거로 하고 있다. 과거에 대해 ‘국가 주권’을 고집하는 중국이나 이에 맞서 ‘역사 주권’을 주장하는 한국은 모두 근대 국민국가의 ‘국경’ 개념을 역사의 ‘변경’에 뒤집어씌우기는 마찬가지이다.

지도 위에 컴퍼스와 연필로 확실한 선을 그어 결정되는 근대 국민국가의 ‘국경’과는 달리 역사의 ‘변경’은 단일한 선을 가로질러 넘나드는 복수의 점들로 산포되어 있다. 변경은 이질적인 언어와 문화, 풍습 등을 지닌 다양한 종족들이 만나 서로 소통하고 교류하면서 서로 다른 문화의 가교가 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다양한 문화가 혼합된 다이내믹한 독자적 공동체를 형성하는 공간이다. 고구려의 역사가 가지는 의미도 한반도와 만주, 대륙의 서로 다른 문화와 종족 등이 혼합되어 만들어간 다양성과 역동성 그리고 그것이 대륙과 한반도에 미친 영향력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 중국의 역사 왜곡을 규탄하는 집회. 동아시아의 '역사전쟁'은 과거의 역사적 실체를 사실적으로 규명한다고 해서 해소될 성격의 것은 아니다. (사진/ 류우종 기자)

‘국경’에서 ‘변경’을 구출하라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사나 한국사 어느 한쪽에 귀속시킬 것이 아니라, 중국인도 한국인도 아닌 고구려인들을 역사적으로 복권시켜 그들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도쿠카와막부의 가신이자 조선 왕의 신하였던 쓰시마 영주와 그 섬의 과거를 일본사에서 구출하여, 동아시아의 문화를 풍요롭게 했던 ‘변경’의 역사로 복원하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한국사로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오해하지는 마시기를!). 자신에게 익숙한 지역의 과거가 자기 민족만의 독점적 소유물이라고 생각하는 태도야말로 동아시아의 역사인식이 갖는 큰 문제인 것이다. ‘과거는 외국’인 것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새 역사교과서’가 함축하는 그들의 민족주의에 대한 한국의 주류 학계나 시민사회의 대응은 우리의 민족주의였다. 19세기 독일의 문헌학적 전통이나 랑케류의 실증사학이 이미 독일의 역사를 발명하고 모든 나라의 국사를 창조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임에도, 한국의 역사학계가 반론으로 제시한 역사적 실체나 진실은 아무리 객관성이나 과학성으로 포장해도 한국의 민족주의적 역사해석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새 역사교과서’를 지지하는 <산케이신문>이 일본의 우익 수정주의 역사가들에게 한국의 국정 역사교과서를 본받으라는 사설을 게재했을 때, 이미 한국 역사학계의 민족주의적 대응방식은 사실상 전략적 파산을 선고받은 것이었다. 일본의 ‘새 역사교과서’보다 더 강한 민족주의적 색채를 띤 한국 국정교과서의 해석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주장은 국내에서는 통용될지 모르겠지만 대외적으로는 설득력을 지니지 못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동아시아의 민족주의는 서로가 서로를 배제하고 타자화한다는 점에서 현상적으로는 첨예하게 충돌하지만, 사유의 기본적인 틀과 이데올로기적인 전략을 공유하는 것이다. 한반도의 민족주의 혹은 그 역사적 해석에 대한 비판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신민족주의 역사학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이 될 수 있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다.

동아시아의 민족주의가 맺고 있는 적대적 공범 관계의 은폐된 현실을 직시한다면, 한국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이 그들의 민족주의 앞에서 우리의 민족주의를 무장해제시킨다는 단순논리는 더 이상 현실의 비판을 견뎌낼 수 없다. 한국의 ‘국사’를 정사로 놓고, 중국이나 일본의 ‘국사’가 틀렸다는 주장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고구려사에 국한해보자면, ‘국경’에서 ‘변경’을 구출하는 것이야말로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가장 신랄하고 날카로운 비판의 무기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일말의 여지 없이 당연시되는 ‘국사’는 일제의 용어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민족과 국가를 역사의 주체이자 발전의 정점으로 간주함으로써 시민사회의 역사의식을 민족주의적으로 규율하는 효과적인 권력의 기제이다. ‘국사’의 패러다임에 갇혀 있는 한, 동아시아의 역사학은 권력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획일적 ‘국민’ 주체를 만드는 규율 권력의 기제로 작동할 것이다.

국사의 해체와 역사학의 민주화

한국, 북한, 중국, 대만, 일본 등 동아시아 5개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국사’를 해체하고 국가의 멍에로부터 역사학을 민주화할 때, 동아시아 민중연대와 평화체제가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시민사회의 역사의식이 민족주의적으로 규율화되어 있는 한, 역사전쟁은 소재와 형식을 달리하면서 끊임없이 지속되고 그것은 다시 동아시아 민족주의의 적대적 공범 관계를 강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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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달프 2004-08-20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싸우기만 하는 동아시아(한정숙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지난 몇 해 사이 한국의 지식사회에서는 동아시아 공동체 담론이 관심을 끌었다. 분쟁과 갈등의 역사를 극복하고 화해와 공존의 미래로 나아가자는 발상에서 모범 케이스가 된 것은 유럽연합(EU)이다. 그런데 유럽연합과 동아시아 공동체론은 논의의 형성 시기와 성장배경, 관련 국가들의 태도에서 차이가 있다.
유럽연합은 냉전 시기에 태동하여 반소 서방사회에 편입된 나라들을 주축으로 발전했다. 상호갈등과 전쟁의 역사를 극복하겠다는 의지도 의지였거니와, 정치적으로는 ‘공동의 적’에 대응하고 경제적으로는 미국과 일본에 맞서 보겠다는 의지가 유럽인들의 결속을 촉진했다. 미국은 반소 진영에 유럽을 묶어두는 데 관심이 있었으므로 이를 가로막지 않았다. 석탄철강공동체라는 맹아에서 출발하여 마침내 유럽연합이 형성되었을 때에는 이미 냉전이 끝났고, 과거 사회주의 진영에 속했던 나라들까지 차츰 포함되고 있지만 이제는 강력해진 유럽을 막을 세력이 없다.

최근 이라크전을 둘러싸고 미국과 유럽이 대립한 것은 미국으로서는 역사의 아이러니라 여길 법한 일이다. 반면, 동아시아에서는 개별국가들이 대외관계에서 너무나 다른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다. 남한은 당분간은 한-미 동맹을 우선할 것이고, 아시아의 일원으로 머무르는 데 만족지 못하는 일본 또한 미국과의 관계를 최우선으로 삼을 테지만, 중국은 미국과의 패권경쟁도 마다하지 않을 태세이다. 북한과 대만도 고려되어야 할 터인데, 그림이 어떠한가.

그리고 유럽 연합의 구성원들은 국력이 엇비슷하여 유럽연합 가입으로 특정한 패권세력에게 주권을 상실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독일이 패권 추구적 야심을 드러냈지만 혹독한 징벌을 받은 후에는 유럽 내에서의 평화공존이라는 국가적 목표를 바꾼 적이 없다. 주변국들도 독일을 신뢰하게 되었고 독일과 프랑스가 주도한 유럽통합 운동에 동조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는 적어도 자신들 사이에서는 공통의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합의가 형성되었다. 이에는 유럽에서 줄기차게 전개된 평화운동의 역할도 적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동아시아는 어떤가? 중국과 대만 사이의 긴장은 남북한 긴장보다도 더 심하다. 일본은 재무장 논의 때문에 주변국들의 불신을 사고 있는데, 재무장 논의에 빌미를 준 것은 북한의 미사일 실험과 핵무기 보유 논쟁이었다. 그런 일본은 중국이 러시아로부터 무기를 사들여 군비를 증강하고 있다고(그것은 사실이다) 비난하고 있다. 그 가운데 끼인 남한은 아슬아슬한 심정으로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대외정책에서 힘이 없다. 상호군축 문제는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역사 왜곡 문제도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튀어나와 소모적인 국수주의적 논란의 빌미를 제공하곤 하는데, 이번에는 중국이 고구려사와 관련하여 어지러운 행보를 하고 나섰다. 소수민족 통제 차원일 수도 있겠고, 패권주의의 발로일 수도 있겠으나, 역사 해석을 국가기관이 주도하는 관제사학의 풍토 아래서는 시민적 역사연구가 지극히 어렵고, 역사논쟁이 그대로 외교 분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한 예라 하겠다. 덧붙인다면, 남한에서 전개되었던 간도 되찾기 운동을 비롯한 민족주의적 대응도 중국으로서는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는 아직까지 상호불신의 요인들이 너무나 많다. 합리적인 규칙보다 떼쓰기와 호전성 과시가 앞서기도 한다. 동아시아국가들은 한자 문화권에 오랫동안 속해 있었다는 공통성과 지리적 근접성 때문에 인적·문화적 교류를 강화해 왔지만, 국가적 차원에서 진정한 상호존중과 평화공영을 지향한다는 공동선언은 나오지 않았다. 공동체론은 고사하고 최소한 상호불신을 제거하기 위한 논의의 틀부터 마련해야 한다. 아래로부터의 압력이 이를 관철해 내야 한다.
 

[학술] 문제는 ‘관계’로서의 동아시아

[학술- 다시, 동아시아!]

서구에 대비되는 실체로, 민족국가 단위로 규정하다 보면 역사 왜곡이나 통일에 대비할 수 없다

▣ 성근제/ 연세대학교 강사 · 중문학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동아시아’는 누가 뭐래도 꽤 잘나가는 물건 가운데 하나임에 틀림없다. 무엇보다 21세기 ‘뜨는 중국’이 화려한 배경을 받쳐주는 데 힘입어 이른바 ‘동아시아 담론’은 그 논자와 갈래들을 일일이 거론하고 분류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하고 폭넓게 전개됐다. 목하 동아시아는 넘쳐흐르고 있다.


△ 일제의 만주국에 점령당했던 중국 철강도시 안산. 동아시아를 국가단위로 규정할 때 대만이나 만주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사진/ GAMMA)

오도된 오리엔탈리즘의 운명

그러나 동아시아는 여전히 목마르다. 그리고 이 목마름은 다양다기한 분화와 확산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동아시아론들’이 공유하고 있는 몇 가지 공통된 특징과 편향성에서 기인한다.

최근의 동아시아론은 1989년 전후의 극적인 국내외적 변동으로 인한 이데올로기적 지형 변화의 틈새를 파고들며 새로운 ‘대안적’ 담론으로 부상했다. 물론 이러한 대안적 동아시아론이 1990년대에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다. 조금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동아시아론은 20세기 역사의 중요한 고비고비마다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고 또 사라져갔다. 20세기 초반 중국의 동서문화 논전이 그러했고, 1920, 40년대 일본 대동아공영의 논리가 그러했다. 그것은 서구적 모델 혹은 그 세력이 ‘문제’의 원인으로― 혹은 그것의 ‘위기와 한계’가, 혹은 그것의 ‘위협과 적대성’이― 지목될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곤 했다. 90년대 이후의 동아시아론 역시 다를 바 없다. 그것은 89년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이 가져다준 충격으로 인해, 문제의 근원에 대한 관심과 탐색이 정치경제적 체제와 제도로부터 서구적 근대성의 근본적 한계라는 문제로 이동·심화되는 과정에서, 그리고 그와 동시에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라는 이름을 앞세운 새로운 차원의 공세가 본격화되는 조건 속에서 새로운 등장을 위한 조건을 발견했다. 말하자면 동아시아론은 언제나 ‘서구’라는 대립항의 존재와 그것의 위기를 전제로 하여 구성되는 대안담론이자 안티테제였던 셈이다.


△ 중국 동북부 지안에 있는 광개토대왕비.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은 단순히 한국과 중국의 문제가 아니라 중국과 미국, 동북아 전체의 '관계' 문제이기도 하다. (사진/ 오효정 제공)

조악을 감수하고 대별하여 이야기해보자면, 이러한 대안적 동아시아론에는 크게 두 가지 부류가 존재한다. 하나는 동아시아 문명(문화)론이며, 다른 하나는 동아시아 연대론이다. 전자는 자본주의적 근대의 근저에 깔려 있는 서구 문명의 특징들을 위기의 근원으로 지적하며, 동아시아 문명의 부활과 패러다임의 전환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후자는 아시아 사회의 근본 문제를 ‘서세동점’으로 요약할 수 있는 힘의 불균형과 불평등으로 지목하며, (동)아시아의 단결과 연대를 통해 힘의 불균형에 대응할 것을 주문한다. 이처럼 양자 사이에는 문제 설정에서 실천에 이르기까지 적잖은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 두 경우 모두 ‘서구’라는 타자의 존재를 자기 입론을 위한 기본 전제로 요구한다는 점에서 완전히 일치하는데,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이 지점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문제란 바로 거의 모든 동아시아론이 ‘동아시아’라는 개념을 존재론적 실체로 상상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언제나 서구라는 타자와의 대비 속에서 구성되기 때문에, 이른바 ‘서구’가 아시아인들의 눈과 언어에 의해 발견되고 규정되는 수준과 정도에 비례하여 똑같이 실체화되고 규정되며, 따라서 탈역사화될 위험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동아시아를 탈역사화된 존재론적 실체로 상상하는 동아시아론은 동과 서를 이원대립적인 선악 구도 속에서 기술하며, 중요한 사유의 길목마다 양자택일적 선택을 강요하고자 하는 유혹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 그것은 서구에 대한 심각한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오도된 오리엔탈리즘의 운명과 닮아 있다.

역사 왜곡은 중-미 관계에서 시작

대안적 동아시아론에 부가될 수 있는 또 하나의 혐의는 그것이 여전히 민족국가 단위의 사고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경향을 보인다는 점이다. 익숙한 이야기이지만, 동아시아를 이야기할라치면 늘 뒤를 밟아 등장하는 것이 ‘한·중·일’이라는 국가의 명칭이며, 베트남과 동남아시아 그리고 몽골은 왜 빠져 있느냐는 질문이다. 말하자면 동아시아의 범위를 ‘국가’ 단위로 규정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문화주의와 지역주의와 국가주의가 묘하게 결합되어 있는 이러한 관점이야말로 동아시아를 ‘규정’지어 사고하려는 부질없는 노력의 부산물이자, 살아 움직이는 오늘의 동아시아를 올바르게 사유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주요한 걸림돌 가운데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국가 단위의 사고가 지속되는 한 조선족(자치주)와 만주의 문제 그리고 극동러시아와 내외 몽골의 문제, 북한과 대만의 문제 등 동아시아의 핵심적 사안들에 생산적인 논의의 초점이 맞추어질 가능성은 대단히 낮기 때문이다.

8월로 접어들면서 중국의 역사 왜곡 문제가 그야말로 점입가경이다. 혹자는 이를 두고 중국이 역사 문제를 본격적으로 들고 나오는 것이야말로 한반도의 통일 과정이 비로소 제 궤도에 올랐음을 보여주는 증거라면서 짐짓 기대 섞인 반응을 보인다. 이것이 옳은 이야기일지 아닐지 필자로서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어쨌든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오히려 필자는 중국이 얼토당토않은 고구려 역사 문제를 저렇게 본격적으로 들고 나오는 것이야말로 한반도의 향후 통일 과정이 얼마나 고되고 파란만장할지를 암시하는 징조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안타까운 것은 고구려 역사 왜곡 문제에 대한 우리의 대응 방식이다. 정부도 학계도 언론도, 심지어 앞서가는(?) 네티즌들까지도 이 문제를 전적으로 한국과 중국 사이의 문제로‘만’ 파악하고 있으며, 사태의 본질을 중국의 변방국에 대한 패권주의적 의식의 발로로만 해석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문제의 형식적 당사자가 한국과 중국인 것은 사실이며, 중국의 패권주의가 드러난 것이라는 지적도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적어도 중국의 수가 한반도 통일 이후를 염두에 둔 것이라는 지적이 옳다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할 때) 중국이 두고 있는 수는 우리를 향한 것일 뿐만 아니라 미국을 향한 것이며, 때문에 그것은 주변의 작은 나라들에 대한 ‘패권주의’임과 동시에 통일 이후 미국의 동북아 영향력 확대에 대비하기 위한 선수(先手)이기도 하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중국 태도에 대한 옹호가 아니다. 오히려 더욱 우려할 만한 사태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문제의 본질은 한국과 중국의 역사 문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중국과 미국이라는 양대 강국이 다시금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건곤일척의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연구자들은 왜 북한을 모르나

필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우리의 동아시아론이 새롭게 구성되고 더 발전적으로 확산되기를 기대한다.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동아시아라는 존재에 대한 상상이 아니라, 다양한 역관계의 얽힘으로 구성된 동아시아라는 ‘관계장’(關係場)에 대한 현실적이고 역사적인 이해와 관심이다. 20세기의 우리 역사는 식민과 분단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그 두 사건의 주요한 효과 가운데 하나는 바로 남한의 동아시아로부터의 탈각이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분단과 아시아로부터의 탈각이 그러했던 것처럼, 통일과 아시아로의 복귀 역시 전적으로 우리의 의사와 일정에 따라 이루어질 가능성은 매우 낮다. 통일은 도둑같이 올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우리가 ‘동아시아’라는 ‘관계’의 역학적 중심에 자리잡고 있고, 그 관계들을 구성하는 다양한 힘과 역사들을 우리 뜻대로 조절할 수 있는 힘을 현실적으로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느 시점에 그 사건들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우리의 통일 이후에 대한 대비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필자가 현대 중국문학을 공부해오면서 가장 아쉽고 당혹스러웠던 것을 하나 꼽으라면 역시 중국문학 연구자들의 북한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지극히 박약한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제일 먼저 꼽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오로지 중국문학 연구자들의 게으름이나 시야의 협소함 때문이라면 오히려 문제는 단순하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당혹스러운 사실 가운데 하나는 우리 사회의 북한 문학 연구자들 속에서도 중국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축적하고 있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국 문학을 전공하는 국문학도들 역시 상황은 별로 다르지 않다. 중국을 이해할 때에도 북한을 이해할 때에도 그리고 우리를 이해하고자 할 때에도, 중국과 북한 그리고 우리의 역사와 경험에 대한 상호 이해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동아시아론은 넘쳐나지만, 동아시아에 관한 관심은 여전히 지극히 낮다. 이처럼 현실과 유리된 동아시아론을 살아 있는 동아시아에 대한 역사적 관심으로 확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관계로서의 동아시아’라는 화두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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