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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방임론자 혹은 리버테리어니즘의 맹점은 인간 사회의 자기조정작용을 오직 시장에만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든 자기조정작용을 "시장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다른 말로하자면 '등가교환'이란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댓가도 없는/바라지 않는 증여나 약탈도 있다. (최근 금융위기 국면에서 이익을 사유화하고 손해는 사회화하는 일련의 정책 과정들을 보면 사실상의 약탈 혹은 증여나 다름없는 일이다) 따라서 모든 조정작용을 등가교환 시장적으로 환원하는 것은 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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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달프 2013-03-05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약탈이나 증여가 교환에 비해서는 예외적인 듯이 보이기 때문에 일반화하기 어려운 것일수도 있다. 그러나 약탈이나 증여가 언제 발생하는가를 따져보면 그렇지도 않다. 인간세계 내의 모순이 비등점에 이르면 그걸 해소하기 위한 뭔가가 초래되게 되고 그것이 약탈이나 증여 같은 것일 수 있다. 평소엔 안 보이지만 항시 잠재적으로 머무는 것으로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필수적인 것이란 것이다. 모순의 폭력적 해소를 피하기 위해 교환시장 외부의 '개입'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 개입의 방법은 과학적 접근과 민주적 참여를 통해 취하는 것이 인간-자연 세계의 자기조정작용에도 부합하는 것일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자신의 全존재를 걸고 한판의 도박을 벌이는 것이다. 이 도박에선 자기만의 승리가 보장되는 자기만의 울타리같은 것이 없다. 오직 이기든지 패하든지 둘 중 하나다. 주인이 되든지 노예가 되든지 둘 중 하나다. 가치가 있든지 없든지 둘 중 하나다. 아름답던지 추하던지 둘 중 하나다. 정의롭던지 부정하던지 둘 중 하나다. 진짜던지 가짜던지 둘 중 하나다. 이 도박판에서 나만의 세계, 울타리, 우물 같은 것은 없다. 그런 세계는 아이들의 세계 또는 중2병의 세계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성향은 바로 중2병 취향에 그럴싸한 말을 입힌 것이다) 어른들의 세상에선 세상 또는 타자와의 정면승부다. 그것에 비스듬히 서는 일은 없다. 비스듬히 서게 되면 외면하고 회피하는 것이다. 자기만의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다. 정면으로 마주칠 용기가 없어서 도망쳐 나왔기 때문에 생긴 열패감을 그는 자기만의 방에 틀어박혀서 자기-우주를 만들어 보상받으려 한다. 아인랜드식 자기탐닉적 사고가 출현하는 순간이다. 중2병이다.

 

진리는 전체집합이다. 총체성없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총체성의 폭력을 말하곤 한다. 이것은 두려움이다. 겁쟁이란 소리를 듣기 싫기 때문에 이들은 총체성과 위계적 이분구조 자체를 탈피한다(내파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위계적 이분법을 탈피하는, 유일하게 실제적인 방법은 이분법 자체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지배적 위계/지위/권력을 파괴하는/무효화하는 것이다. 이런 도전이 전제되지 않은 한 이분구조 자체를 탈피하려한다는 건 결국 문제의 핵심으로부턴 비스듬히 서겠다는 말이다. (나름 위계적 이분법이 통하지 않는) 자기만의 방/세계를 만들고 그 속에서만 놀겠다는 것이다. 

 

전체집합이 아닌 부분집합이다. 부분집합 속에서 왕이 되고 추종자를 거느리는 것이 아인랜드식 방식이다. 명목상 천재-개인과 바보-군중의 이분법이지만 군중과 천재는 이 부분집합으로 맺어져 하나의 갈라파고스섬이 된다. 아인랜드의 자기탐닉적 세계는 일본적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맥락이다. 서브컬쳐 취향 공동체 = 일본 갈라파고스 = 아인랜드의 판타지왕국... 이런 묶음.... 비주류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마치 적극적 선택의 결과인 양 하는 것. 일종의 여우의 신포도. 비주류는 보편성에의 싸움에서 패배한 것이다. 그것은 틀린 것이고 가짜이며 부정하고 추한 것이다. 다만 보편성을 획득하려는 '유효한' 싸움을 계속하는 한 그것은 적어도 보편성의 예비군이다. 하지만 싸움을 회피한 채 정면으로 대하지 않고 비스듬히 선 채 회피한다면 그것은 패배한 것이다. 패배를 승리로 각색하려는 것, 그것이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이었다. 아인랜드는 패배한 것이지만 그것을 마치 승리인 것마냥 뒤집어 각색했다. '정신의 승리'법. 

 

연애도 마찬가지. 전존재를 건 도박이 바로 연애, 사랑이다. 그것에 비스듬히 선 채 연애를 하게 되면 결국 자기만의 방에 갇혀 버린다. 그/그녀와 연애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자기 자신과 연애를 하는 꼴이다.

 

복지국가와 그 불만, 복지국가는 세금을 요구하고 세금은 불만을 초래한다. 레이건과 아인랜드의 사례, 사회민주주의의 대표적 수혜자였던 두 사람은 성인이 된 후 그것을 맹렬히 비난한다. 이 둘 사이에는 묘한 정신병리적 공통점이 있다. 맹렬한 자기애와 끝없는 공허함, 정서적이고 친밀한 관계맺기의 서툶이다. 소시오패스. 얄팍한 인간적 유대를 맹렬한 지위 추구(구별짓기)를 통해 보상받으려는 심리구조? 보수주의는 이 병리적 심성을 보수주의를 낭만화하는데 얼굴로 이용했다. 시민사회의 동료의식으로부터 혜택을 받았지만 그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기 어려웠던 심성은 자기탐닉의 탈출구를 찾게 되고 그 과정에서 개인과 사회를 적대적으로 배치시키는 워프를 경험하게 된다. 레이건과 아인랜드는 복지국가 시민사회 속에서 원만히 녹아들지 못한 대중 심성들을 대표하며 보수주의는 (자신의 권력에 대한 민주주의적 도전을 막아내기 위해) 그런 심성을 통해 대중과 만났다. 포퓰리즘과 보수주의의 접점이 생기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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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달프 2013-03-05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류를 교체하는 것이야말로 역동성을 부르고 실질적인 발전을 낳는다. 주류를 교체할 염두를 못 내면 비주류 마이너로 만족하게 되고 이는 사회 문화 정치적 정체를 초래한다. 주류가 되지 못한 마이너는 정서나 사고구조를 바꾸는 일을 못하고 그저 스타일만 챙기게 된다.

간달프 2013-07-04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중2병이 이른바 포퓰리즘화된 자유지상주의의 심리적 온상이다. 자기만의 영역을 성역으로 삼아 성을 쌓고 군림하거나 불안에 떠는 것... 그게 바로 신경질적으로 "자유"를 외치는 자들의 행태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과학과 타자, 그리고 사회다.
 

      

 

 

 

 

 

 

 

 

 

 

 

 

 



 

 

리들리 스콧의 영화 "에이리언"에서 리플리는 자기도 모르게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 것을 끈질기게 방해한다. 어떤 사태란 괴물과 자본이 교차하는 일이다. 이 둘은 아주 비슷하다. 일단 그 기생성. 그리고 자기운동적인 증식성. 하나는 그걸 구체성의 형태로 다른 하나는 추상성의 형태로 간직하고 있다. 이 둘이 핵융합하게 된다면? 인류는 비키니 섬처럼 되지 않을까? 리플리는 임금 노동자로써 전혀 해병대스럽지 않은 - 해병대는 자유(/본)주의의 수호자 아니던가? - 무기들, 아니 무기라기 보다는 '연장들'을 들고 에이리언과 맞선다. "낫과 망치"를 연상하시면 되겠다. 10월 혁명의 상징이자 소비에트연방의 국기. 그리고 '보리 이삭' 추가요.

봉준호의 "괴물"!  리들리 스콧의 "에이리언"과 겹쳐보면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금방 알게 된다. 한강 다리 위에 서게 되면 안다. 봉준호가 왜 한강이 그렇게 집착할까? 그가 괴물을 봤다는 건 거짓말일 거다. 그가 본래 본 건 이 사회에서 퇴로가 막힌 막장 인생의 自由入水 순간을 포착한 걸게다. 그리곤 관객에게 이렇게 말한다.

"새끼들, 끝까지 둔해빠져가지고서는..."

현서 가족들이 괴물을 보았지만 국가(또는 시스템)는 그걸 못 본다. 이 영화에 먹는 장면, 먹히는 장면, 누군가를 먹여주는 장면, 먹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 등이 넘쳐 난다. 괴물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식욕 덩어리다. 왜 그럴까? "먹고 사는" 문제가 정말 중요하기 때문이다.  (덧붙여 소비에트 연방 상징들에는 태극과 건곤감리나 별들과 줄무늬가 아니라 보리이삭이 있었다는 점 상기해 보자) 그러나 국가(시스템)은 그걸 모른다. 그것은 엉뚱한 창("바이러스"!)으로 세상을 들여다 보고 엉뚱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해결책이 먹혀들지 않게되면 이미 실패한 해결책을 되살리려고 더 얘를 쓴다. 해결책이 뽀록나면 시스템도 뽀록나니까 어쩔 수 없는 게다.

"바이러스는 여기(강두의 뇌수)에 있어야 해!"

현서 가족들은 자본주의 체제의 건조하게 가자면 '주변인', 감정 섞자면 '낙오자들'이다. 각각 우리 사회의 어떤 인물 유형들 중 하나를 대변한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윗세대 인물이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발버둥치며 급행료와 관공서 연줄이 익숙한 세대다. 그는 총을 잘 쏘는데 아마도 그 세대가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배양시켜야 했던 공격성 탓인지도 모른다. 그가 실패했을 때 자포자기하고 아들에게 먼저 가라는 듯한 손짓을 하는 장면은 내겐 이렇게 들렸다.

"우리처럼 살지 말거라~ 우리로 충분한 거야~"

현서의 상실과 함께 모였던 가족은, 현서 할아버지가 사라지자 다시 흩어지고 마지막 현서와의 대면 순간에야 다시 뭉칠 수 있게 된다. 의미있는 배치다. 가족들은 현서를 구하려하는데 그것은 표면 상의 가족의 일원을 구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가치를 되찾거나 발견하려는 몸짓으로 이해해야 될 것 같다.

괴물은 어떻게 잡히나? 리플리가 노동자의 연장으로 괴물을 잡았듯이, "괴물"의 가족들은 양궁(한국에서 스포츠는 돈도 빽도 없는 사람들의 탈출구다. 사실 미국에서도 그렇지 않나?), 신너와 화염병, 그리고 쇠파이프로 잡는다. 이 마지막 장면은 한강 다리에서 투신자살하는 사람의 씬과 함께 대단히 시적인 데, 이 두 장면은 서로 호응하는 것 같다. 죽느니 화염병을 들어라?

괴물은 어디서 왔을까? 사실 독극물 방류라는 사태는 미군 부대의 유지비용을 절감하려는 노력의 소산이다. 외국에 좀 더 싼 값에 주둔하면서 세계 패권도 지키겠다는 발상의 결과아닌가? 주둔 분담금 협상에서 한국정부를 길들이려고 동맹약화니 하면서 대중 불안감을 조성하려는 노련한 미국 협상술. 결국 돈이 문제고 괴물은 돈의 논리가 낳은 결과다.

"에이리언"에서는 리플리라는 노동자 영웅이 괴물과 자본이 만나는 것을 막아내지만, 애석하게도 "괴물"에서는 둘 사이의 교배로 출발하여 현서의 죽음을 초래한다. 그러나 현서의 죽음(즉 한 소년의 구출)은 다른 가능성을 낳는다. "매점 서리"를 하는 길거리 소년은 화폐에는 손대지 않는다. 오직 먹고 살기 위한 것만 취한다. 사실 옛날 농촌에서는 '서리'를 용인하기도 했고 "까치밥"이란 개념도 있었다. 먹고 사는 문제에 돈의 논리를 개입시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생명에 대해 불경한' 짓이다. 현서와 그 서리 소년의 세계는 다른 논리로 작동하는데 현서 자신이 그것을 체현한다. 그리고 그것을 아버지 강두가 이어받는다.

"너~ 현서 아니?"

아버지가 현서가 보살펴 준 아이를 껴안고 하는 말이다. 그래 그 말이다. 우리는 현서를 알까? 아마도 알꺼다. 현서가 어떤 아이인지. 그리고 우리 모두의 내면에 현서와 같은 일부분이 있다는 것도. 그러나 모른 채 하는 거다. 왜 모른 채 할까? 낙오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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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달프 2006-08-13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시스템이 '괴물'을 보지 못하는 건 다 이유가 있다. 그건 바로 자기 체제의 어두운 면이기 때문에 그걸 보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괴물이 한강으로 떨어짐 = 실직자가 한강으로 떨어짐. 연상 이미지... 2)봉준호는 일부러 논리적으로 허술한 구조를 택함으로써 문제의 원인이 개인이나 특정한 행동 하나가 아니라 전체 시스템 자체라는 걸 말하고 있는 것이다.

Mephistopheles 2006-08-11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괴물을 보고 다시 간달프님의 이 페이퍼를 곱씹어서 읽어봐야 겠습니다..^^

가을산 2006-08-11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운 것은 없어도 '서리'를 준수하는 아이들과
"바이러스는 여기(강두의 뇌수)에 있어야 해!" 하는 식자들의 대비가 돋보였어요.

간달프 2006-08-22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성일의 글을 봤는데 수긍이 가는 면도 있네요. 냉소적 좌파의 정치적 영화라고 규정하는 듯 한데... 계급적 연대를 부추키는 측면보다는 정치적 세계 전체를 저 편으로 떼어놓아 버리는 듯한 느낌도 드네요.

sweetmagic 2006-10-03 0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재미있어요, 그런데 아직 영화를 못 봤네요..
영화가 더욱 궁금해 집니다. ~ !!
 

"The appearance of closed faciticity that adheres to the philosophical investigation and holds the researcher in its spell disappears to the degree that the object is constructed in historical perspective. The vanishing lines of this perspective converge in our own historical experience. It is thereby that the object constitutes itself as a monad. In the monad everything becomes alive which as facts in a text lay in mythical fixedness." (Susan Buck Moss, The Dialectics of Seeing (MIT Press. 1999) p.292)

위의 원문을 역자는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연구자를 사로잡는 닫힌 사실성은 철학적 탐구와 결부되어 있다. 대상이 역사적 관점에서 구성될수록 이러한 사실성은 사라진다. 이러한 관점의 소실선은 우리 자신의 역사적 경험으로 수렴한다. 그러므로 대상은 단자로 형성된다. 텍스트에서는 신화적 고착의 상태에서 하나의 사실로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단자에서는 살아난다." (수잔 벅 모스, <발터벤야민과 아케이드프로젝트, 김정아 역 (문학동네,2004) p.375)

영 맘에 안드는 번역이라 아래와 같이 고쳐봤다.

"닫힌 사실성은 철학적 탐구와 결부되어 연구자들을 사로잡는데, 닫힌 사실성의 외양은 대상이 역사적 원근법 속에서 구축됨에 따라 사라지며 이 원근법의 소실선들은 우리 자신의 역사적 경험으로 수렴된다. 대상이 그 자체로 하나의 모나드가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신화적 고정성 속에서는 모든 것이 한 텍스트 속의 사실들처럼 배치되지만 모나드에서는 모든 것이 살아난다."

이 부분은 공간축과 시간축이 교차하는 부분에 대한 설명으로, 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교차하는 (어쩌면 모순처럼 뵈는) 부분에 대한 설명이다. (연속성 불연속성에 대한 언급은 역서 p.271에서 "상품 형식의 현상학의 연속성과 변증법적 이미지가 암시하는 불연속성", "역사적 해석축과 형이상학적 해석축의 긴장" 또는 "형이상학적 탐구와 역사적 탐구 사이의 방법론적 관계:스타킹 뒤집기" "이러한 모순적 대립항의 종합은 [...] 두 축의 교점" 등이 있다.)

김정아의 번역에서는 "appearance"를 또 누락했는데, 나는 이 단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라바터의 '본성'과 '표정'의 구분과 겹쳐볼 때 그렇다. "appearance"는 '표정'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이 외양(appearance)가 사라질 때 '대상'은 '모나드'가 된다. (그러나 역자는 'appearance가 사라짐'이 아니라 '닫힌사실성이 사라짐'으로 오역했다)  '닫힌 사실성'이란 얼굴은 본성과 표정을 갖는데, 닫힌 사실성의 '본성'은 역사적 원근법 속에서 대상이 구축됨에 따라 나타난 '모나드'이다. 그리고 모나드에서는 모든 것이 살아난다. 

가라타니 고진이 라이프니쯔의 모나드론을 설명하는 부분을 들어보자. 모나드에서는 모든 것이 살아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라이프니쯔는 무한을 한이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점) 속에서 찾는다. 그리하여 개체 자체 속에서 무한성이 발견되거나 혹은 이러한 개체(모나드)가 발견된다. [...] 접점은 곡선의 무한소로서 자체가 하나(점)이면서도 방향을 내포하며 모든 곡선을 '표출'한다. 무한소의 점은 말하자면 '형이학적인 점'이다. 이는 더 분할할 수도 없고 부분도 없다. 더욱이 이는 전체를 표출하고 있다. 이것이 라이프니쯔가 말하는 모나드이다." (가라타니 고진,<탐구2>,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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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ch fields of the coordinates can then be said to describe one aspect of the physiognomic appearance of the commodity, showing contradictory "faces"; fetish and fossil; wish image and ruin".

역자는 위의 원문을 "좌표의 사분면은 각각 상품의 일면을 보여줌으로써 상품의 모순적 "얼굴"을 드러낸다. 즉 상품은 물신이자 화석이고, 소망 이미지이자 폐허이다."(수잔 벅 모스, <보기의 변증법>, 김정아 역. (문학동네,2004) p.272)라고 해석한다. 역문에서는 "physiognomic appearance"에 해당하는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관상학적 외양의 한 일면'이라고 정확히 변역한 후에, 여기서 "관상학적"이란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려줘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서양 관상학에 관한 책을 찾아보았다. 설혜심님의 <서양의 관상학>이란 휼륭한 책이 있었고, 들췄고, 그리고 거기서 18세기에 맹렬하게 활동하여 큰 영향력을 가졌던 '라바터'라는 관상학자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가 활동하던 당시의 사조는 과학과 유사과학의 경계가 흐려지던 시절로 - 과학적 발견이 모든 것을 커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신비스런 질문은 많았고 명백히 과학적인 해답은 부족했던 시대였다 - 관상학은 사람들의 궁금증에 훌륭한 대답을 해줄 수 있다고 믿어지는 종류의 새로운, 과거로부터 부활한 학문이었다.

라바터의 관상학 방법론 중에 이 구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부분은, 라바터가 관상을 '본성'과 '표정'의 두가지로 구분한다는 점이다. '본성'은 타고난 것(신이 각 개인에게 부여해 준 바)으로 관상학에서 본질적인 부분이고 '표정'은 후천적인 것으로 그의 관상학에서 부차적이거나 제외시킬 부분이다. 그래서 아예 표정을 배제하고자 얼굴의 실루엣만으로 관상을 분석하는 방법까지 고안된다. 라바터의 이러한 구분은 좀 허무맹랑해 뵈지만 당시 역사적 맥락에서 놓고 보면 그렇지도 않다. 당시 궁정문화(신분주의)에 대항하여 개인주의를 드높이는 설정이기 때문이다. 라바터 이전의 궁정문화는 '화장의 시대'라고 할 만큼 의복과 화장 등 후천적 요소에 의해 신분(나아가 인격)을 맹렬하게 구분짓는 요소가 지배했었는데 라바터의 이런 '본성'에 천착한 관상학은 그런 신분주의에 대한 일격이기도 했던 것이다. 실루엣에서는 아무리 용을 써도 화장한 티가 전혀 안나기 때문이다.

본성과 표정의 구분은 벤야민의 '상품의 모순적인 얼굴'에도 적용할 수 있을 듯 하다. 본성은 상품의 원역사(ur-history)에 상응하고, 표정은 상품의 자연사적 측면에 상응한다. 이 두 요소가 서로 해소됨 없이 변증법적 이미지로 대치되는 상태에서 오는 '충격'은 원역사의 actualization, 즉 계급 혁명을 이끈다. 이런 식으로 볼 수 있다면 벤야민의 <파세젠 베르크>는 '상품의 관상학'이라고 불러도 좋을 듯 하다. 단 라바터의 관상학과 분명한 차이점도 있다. 라바터의 관상학이 개인주의와 분석적 관상학이라면 벤야민의 그것은 계급주의와 예언적 관상학이란 점이다. 라바터의 관상학이 구체제인 궁정문화에 대해 개인주의를 내세우는 반면, 벤야민은 부르조아 개인주의 문화에 대항하여 계급주의 혹은 무산계급의 집단적 무의식을 흔들어 깨움을 노린다. 또한 라바터는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본성을 "분석적"으로 추척하는 일을 추구한다면 벤야민은 상품 이미지들 속에서의 변증법적 이미지를 통해 아직 오지 않은 유토피아에 대한 집단적 꿈을 각성시키는 "예언적" 효과를 노린다.  

추신 - 윗글은 전혀 학문적으로 믿을만한 내용이 못되어오니 장난글로 봐주시기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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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9-12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난글이라... 그래도 재밌는 걸요.

sweetmagic 2004-09-12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 ^^

간달프 2004-09-12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를 준다면 장난글의 임무를 잘 완수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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