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교수 최후진술 전문



존경하는 재판장님, 국내외의 커다란 관심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항소심을 맡아보신 재판부의 노고에 우선 경의를 표합니다. 이제 항소심의 선고를 앞두고 저의 진솔한 심경을 담은 마지막 진술을 역사 앞에 남기려고 합니다. 작년 9월22일, 3주일을 예견하고 가족과 함께 37년만에 서울 땅을 밟았던 그때로부터 만 9개월이 넘었습니다. 귀국 다음날부터 시작된 <국정원>과 이에 이은 <검찰>의 조사를 거쳐 10월22일 밤늦게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이미 가을, 겨울, 봄을 보내고 여름 장마철을 맞고 있습니다.

“조국은 구두밑창처럼 아무 곳이나 끌고 다닐 수 없다”는 프랑스 혁명의 비극적인 주인공 당통(Danton)의 말이 있습니다만, 저는 그렇게 마음대로 끌고 다닐 수 없는 조국 땅을 37년 만에 찾았다가 지금까지 정말 기막힌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저는 한 평의 공간에 갇혀있으면서 솟구치는 분노와 형용할 수 없는 슬픈 감정을 억누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학술토론회의 주제가 되었더라면 오히려 좋았을 내용이 <국가보안법>의 처벌대상으로서 법정에서 왈가왈부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에서는 민족분단으로 말미암아 일그러진 생활세계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것도 직접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또 “악법도 법이다”라고 소크라테스를 인용하면서 저에게 <국가보안법>을 인정하라고 윽박지르는 이 나라의 이른바 <중견 언론인>의 주장도 저의 귀까지 들렸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든 것은 악법을 법으로서 인정한 패배자의 행위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동시대인에게 진정한 법이 어떤 것이어야만 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성찰(phronesis)케한 분명한 승리자였습니다. <국가보안법>의 존재이유(raison d'tre)에 대해서 조금만 고민한다면 <국가보안법>을 소크라테스의 행위동기에 견강부회(牽强附會)식으로 가져다 부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어떻든 저의 입국 이후로부터 시작된 <국가보안법>을 둘러싼 뜨거운 논쟁을 지켜보면서 이 법이 이 사회에서 어떻게 자기최면제의 기능을 하고 있는지를 저는 직접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 법에 의해서 지켜질 수 있다고 믿는 <자유민주주의>가 바로 이 법에 의하여 무자비하게 훼손되고 있다는 모순조차 바로 보지 못하게 만든다는 뜻에서 자기 최면제입니다.

그러나 이 법을 둘러 싼 건강한 시민사회의 올바른 담론형성은 머지않아 그러한 비정상적인 현실을 반드시 교정할 수 있으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와 동시에 반 유신투쟁, 광주민중항쟁, 87년 6월 항쟁에 뿌리를 둔 이러한 담론 형성에 외국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직접 참여할 수 없었던 제가 어렵사리 37년 만에 귀국, 이 시대가 요구하고 있는 사명을 직접 떠 맞게 된 역설에서도 많은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아울러 89년 가을, 냉전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현장에서 목격하면서 지구상 유일의 분단민족의 운명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없을까 하고 고뇌하면서 쓴 글들의 내용조차 문제 삼고 있는 <국가보안법>을 아직까지도 철폐시키지 못하고 있는 이 사회의 개혁적 역량에 대해서도 가끔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역사의 의미에 대한 회의가 휩쓸고 있는 것이 오늘 날의 시대적 상황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민족의 화해와 통일은 우리 모두의 삶을 지금보다는 더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저는 외국 땅에서도 열심히 그러한 길을 모색해보고, 또 실천의 기회가 조금이라도 주어지면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진정으로 고민해야할 문제는 날로 복잡해지는 국제환경 속에서 우리 민족이 어떻게 하나가 될 것이냐 라는 문제입니다. 이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분단 한반도가 오늘 안고 있는 <중심의 괴로움>을 동북아의 <희망의 중심>으로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하는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동북아의 집>이니 <동북아 허브>와 같은 정치적 또는 경제적 구상도 나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사회-문화적인 통합내용이 빠진 구상들은 많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이나 일본의 <과거청산문제>가 보여주는 것처럼 개별민족의 역사를 현재화하는 갈등이 특히 동북아에 있어서 뿌리가 깊기 때문입니다. 또 다시 강조하지만 복잡하게 얽힌 동북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바로 한반도 통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남북의 상생과 평화를 구현시키는 그러한 아름다운 통일은 동북아의 안정과 번영, 나아가 날로 좁아지는 지구촌의 미래도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논어(論語)>의 <술이편(述而扁)>에는 사각형의 한 모서리의 문제를 풀 수 있는 능력을 키우면 나머지 세모서리의 문제도 자연히 풀 수 있다는 뜻에서 계발(啓發)이라는 성어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번 재판의 결과가 남남갈등, 남북갈등 나아가 동북아 갈등이라는 다른 세 모서리의 문제를 깨우치는 <계발>의 계기가 되었으면 하고 저는 바랍니다.

지난 반세기 넘게 정말로 유치한 상호비방 방송이 휴전선에서 멈춘 것처럼 저는 <국가보안법>도 이번 재판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리라 믿습니다.

이번 항소심의 결론에 국내외에서 특별한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도 같은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저의 무죄와 함께 <국가보안법>의 마지막 시간을 반드시 그리고 분명하게 기록하리라고 믿습니다. 또 내 영혼의 외로움을 달랜 제주의 검푸른 바다와 광주의 뜨거운 대지를 재회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재판부가 보여주신 노고에 거듭 경의를 표시하면서 저의 마지막 진술을 이것으로 간단하게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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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스위지 : 역사와 정면대결한 거목의 위대한 패배   
 
 
홍기빈

폴 스위지(Paul Malor Sweezy)가 지난 2월 27일 영면했다. 향년 93세.
스위지가 경제학자로서, 진보적 사회사상가로서 또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20세기의 미국과 세계에 미친 영향은 대공황, 파시즘, 2차 대전, 냉전과 탈냉전을 거친 그의 인생 여정만큼이나 길게 드리워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영국의 진보매체인 『르몽드』『가디언』 정도를 빼면 이 괄목할 만한 인물의 서거를 추모하는 글이 아직 별로 나오고 있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한국의 지식인들, 특히 1980년대에 한국의 사회현실에 대한 이론적 고민을 시도했던 이들이라면 의식하든 못하든 스위지에게 상당한 ‘정신적 빚’을 지고 있다.

하버드의 마르크스주의자

스위지의 부친은 시티뱅크의 전신인 뉴욕내셔널 뱅크의 고위 임원이었다. 그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뜻이다. 덕분에 스위지는 뉴잉글랜드의 상류층 기숙학교를 거쳐 하버드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처럼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준수한 용모(대학 동창 폴 사무엘슨에 따르면 젊은 시절의 스위지는 대단한 미남이었다고 한다)와 최고의 학력을 갖추었던 전도유망한 청년이 이후 미국 마르크스주의의 ‘괴수’로서 험난한 삶을 살게 된 계기는 1931년의 영국 유학이었다.

당시 경제대공황은 이미 영국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계속 예언했던 바인 ‘자본주의의 최후’로 인식되고 있었다. 특히 스위지가 유학했던 런던정치경제대학에서는 오스카 랑게나 해롤드 라스키 같은 열정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자신의 표현대로 “열정적이지만 무지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 미국으로 돌아온 스위지는 “마르크스주의를 미국의 지적 담론에서 존경받는 전통으로 확립하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그렇게 시작한 하버드대에서의 경제학 박사과정에서 스위지는 보수주의자 조셉 슘페터 교수와 치열하게 논쟁하면서 나름대로의 마르크스주의 경제이론을 발전시켜 간다.

졸업 후 하버드대 경제학과의 조교수로 일하면서 스위지는 대공황의 늪에서 허덕이는 미국 경제의 회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현실에 개입했다. 당시 그는 「미국 민주주의를 위한 경제적 강령」에 저자와 서명인으로 참여하는데, 이 문서는 뉴딜 정책(‘시장에 대한 국가 개입’을 핵심으로 하는)을 케인즈주의적 관점에서 합리화하는데 결정적으로 공헌한 바 있다. 특히 스위지가 「미국 경제의 구조(1939)」(‘미국의 소유집중과 독젼에 대한 유명한 보고서)에 게재한 논문 「미국의 이익 집단」은 주요한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미시경제학이나 경제원론 책에서 과점시장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등장하는 ‘굴절 수요 곡선’은 스위지가 당시의 작업 속에서 이뤄낸 성과의 일부이다.

이렇게 실천적으로, 학문적으로 순탄했던 스위지의 이력은 2차대전 이후 미국의 정치?사회가 냉전에 휘말리면서 커다란 변동을 겪게 된다. 스위지는 자신의 정치?사상적 신념 때문에 하버드대에서 조만간 축출될 것을 감지하고 조교수직을 사임한다. 그리고 반동화에 맞서 1947년 미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당 월레스 후보의 지지운동에 참여하지만, 결과는 아주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루스벨트 사후 미국사회는 그가 대표하던 진보적 뉴딜 노선의 개혁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월스트리트의 금융세력과 강경 군사세력의 주도하에 보수적 사회 질서로 회귀할 것인가의 기로에 서 있었다. 하지만 당시 압도적인 반공주의 열풍에 질린 진보당과 월레스는 그 갈림길에서 진보적 방향으로의 대안을 명확하게 하지 못하고 말을 얼버무렸는데, 스위지는 이를 진정한 패인이라고 봤다. 그의 생각은 미국사회의 진보적 대안으로 사회주의를 뚜렷이 내걸지 못한다면 미국의 양심세력은 수동적인 비판세력으로 머물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매카시즘의 광풍이 한창 몰아치던 1949년, ‘소련에 독립적인 사회주의 잡지’를 표방하는 저널 『먼슬리 리뷰』(Monthly Review)를 리오 휴버맨과 함께 창간한다.

지금까지 수십 년째 유유히 출간되고 있는 이 잡지는 냉전으로 얼어붙은 세계에서 사회주의적 가치야말로 인류의 곤경을 풀어나갈 대안이라고 믿었던 세계적 지식인들(아인슈타인, 러셀, 사르트르, 말콤 엑스 등)이 자신의 신념을 천명하는, 신앙고백의 장인 동시에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불평등과 착취의 현장을 날카롭게 분석하는 짧은 글들로 넘쳐나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1950년대의 미국에서 이토록 ‘간이 부은’ 대담한 반란자들은 그만한 대가를 종종 치러야 했다. 스위지 자신부터 1955년 뉴 햄프셔 법원으로부터 대학 강연 내용을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를 단호히 거부하는 바람에 투옥을 포함해 몇 년 간 다양한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미국의 냉전적 사회구조도 1960년대 들어 심각한 위기를 맞고, 진보적 사회변혁을 향한 움직임이 다시 시작된다. 이 같은 사회 변동의 결과물인 동시에 이를 더욱 가속화시키는 기폭제로 기능했던 책이 바로 스위지와 폴 바란이 함께 저술한 「독점자본」이다.

신고전학파를 기사회생시킨 케인즈의 맹점

「독점 자본」이야말로 경제학자로서 스위지의 업적을 집약하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스위지는 이른바 주류 경제학은 물론 정통파 마르크스 경제학에서도 ‘이단’으로 비난할만한 논리를 전개한다. 그러나 이 「독점 자본」은 경제이론 및 사회운동의 역사에서 결코 무시될 수 없는, 이정표임이 분명하다. 왜 그런지 살펴보기로 하자.

1930년대 대공황이 발생한 상황에서, ‘자유롭게 내버려두면 완전경쟁이 이뤄지는 시장경제는 총수요와 총공급의 일반 균형을 자연스럽게 가져온다’는 신고전파 경제 이론은 두 방향에서 비판을 받고 있었다.

첫째, 영국의 챔벌린이나 조안 로빈슨 등은 완전경쟁시장이 전혀 터무니없는 비현실적 가정이라고 주장한다. 실제의 시장을 지배하는 것은 독점 혹은 과점 기업들이기 때문에 완전경쟁은 공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둘째, 총수요와 총공급이 결국 일치한다는 신고전파의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다. 현실세계에서는 수요의 부족, 투자 부족, 그로 인한 불완전 고용이라는 악순환의 고리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중 첫 번째 관점에서의 이론적 발전은 이후 경제학설사에서 거의 무시되었다. 이른바 케인즈혁명은 이 두 번째 비판에서 뻗어 나온 것이다. 그런데 케인즈혁명은 개별 시장의 구조가 독점 및 과점이라는 현실을 지적한 첫 번째 비판의 문제의식을 거의 무시해 버렸기 때문에 시장경제의 구조에 대한 신고전파의 이론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그 결과 폴 사무엘슨 같은 ‘사생아 케인즈주의자’들은 케인즈 경제학을 ‘거시 경제학’으로 한정, 퇴출되어야 마땅했던 신고전파 이론을 ‘미시경제학’으로 기사회생시키고 만다. 그 대가는 값비싼 것이었다. 1980년대 이후 미국의 경제학계에서 전세가 역전되면서 ‘미시적 이론적 기초가 없는’ 케인즈주의는 거의 축출되고 신고전파가 득세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문제의식을 하나의 체계로 결합시켜 ‘미시적 기초를 갖춘 거시경제학 이론’을 구성하는 작업은 케인즈파가 아닌 다른 이론적 흐름에서 구성되었다. 이것이 바로 칼레츠키, 슈타인들에서 스위지와 바란으로 이어지는 ‘독점 자본’ 학파의 흐름이다. 칼레츠키는 이미 1930년대 초(케인즈의 「일반 이론」은 1936년에 출판된다) 폴란드어로 쓴 그의 저작에서 케인즈의 주요 논지를 포괄하는 이론을 독자적으로 구성한 바 있다. 칼레츠키와 그이 지적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슈타인들이 일관되게 해명하려 했던 것은 다음과 같다.

‘독점도(degree of monopoly)로 표현되는 독점자본의 사회?경제적 지배력이 어떻게 생산 설비에 대한 투자를 낮추고 실업을 증대시키는가, 그리고 그 결과 나타나는 국민소득 분배의 왜곡은 어떻게 장기적인 과소 소비로 이어지는가.’

독점자본은 경제위기를, 경제위기는 전쟁을

스위지도 1942년에 출판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이론서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에서 비슷한 방향의 작업을 시도했다. 자본주의 공황에 대한 정통파 마르크스주의 이론인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대신 장기적인 차원에서의 과소 소비로 인한 ‘(가치)실현 공황’ 이론을 제시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저서에서 모호한 채로 남아있었던 독점과 장기 공황의 관계에 대한 스위지와 바란의 견해는 칼레츠키와 슈타인들의 작업에서 큰 영감을 얻어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맞는다. 동료 폴 바란은 1957년에 나온 「성장의 정치경제학」에서 ‘잠재적 경제 잉여’라는 개념을 창안하고 이에 근거하여 제 3세계의 부가 어떻게 선진국으로 착취되는지 해명한다. 그리고 스위지, 바란 두 사람은 1966년 드디어 「독점 자본」을 출간, 이 같은 전통의 주요한 한 매듭을 짓게 된다.「독점 자본」의 주요 논지는 아주 간략하게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현대의 기업은 폭발적인 기술적 생산력을 기반으로 하여 엄청난 규모의 거대 기업으로 되어가고 있다. 이 거대 기업은 금융이나 시장의 완전경쟁 법칙 따위로 통제할 수 없는, 그야말로 독점 자본이다.

둘째, 이 상황에서는 독점 자본의 압도적 생산성과 대중들의 상대적 빈곤으로 인해, 경제잉여는 계속 증가하는 한편 총 수요는 계속 제약 당한다. 그 결과 만성적인 ‘과잉 생산, 과소 소비’ 상태가 나타난다.

셋째, 이 과잉 생산을 ‘생산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면 다시 과잉 생산이 나타나는 악순환의 고리가 더욱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과잉 생산을 해결하는 방법은 완전히 비생산적인 물품을 생산하는 것이다. 이 완전히 비생산적인 물품엔 물론 광고 산업 따위가 포함되겠지만 가장 주목할 만한 사례는 군수 산업의 확장이다.

넷째, 독점 자본주의의 장기적 추세는 따라서 누적되는 과소 소비로 인한 대중들의 빈곤, 독점 자본의 팽창, 국가의 군국주의화와 끊임없는 침략 전쟁 등이다.

이 저작은 출판 당시 주류 경제학계로부터는 냉소와 무시, 정통파 마르크스주의로부터는 비판과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1970년대로 들어서면서 이 저작의 존재는 무시할 수 없는 것임이 서서히 판명되었다. 당시 세계 자본주의의 장기 불황, 소위 스태그플레이션은 신고전파의 경기변동론이나 케인즈주의적 총수요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 현상이었다.

그래서 전 세계적으로 실업과 빈곤이 증가하지만 소수 독점 자본의 이윤은 오히려 팽창되는 가운데 전 세계가 끝없는 전쟁과 불안정으로 빠져 들어가는 당시의 상황은 실로 스위지와 바란의 진단과 적확히 맞아 떨어지는 것으로 보였다.

「독점 자본」과 미국 신좌파의 부흥

이 저작의 정치-사상적 텍스트로서의 의미는 경제학 저작으로서의 의미를 넘어섰다. 그 정치적 메시지 또한 경제학 이론 이상으로 명쾌하고 날카로운 것이었다. 즉,
‘사회 전체가 도달 가능한 생산력(잠재적 경제 잉여)은 소수 독점 자본의 이윤과 독점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제약당하고, 공장 가동률은 도처에서 50% 에도 못 미치고 있다. 실업과 저소득으로 인해 대중의 빈곤은 늘어만 간다.

사회 전체적으로는 비생산적이기 짝이 없는 무슨 광고 따위의 불필요한 서비스 산업만 팽창해간다. 게다가 군수 자본은 끝도 없이 팽창하면서 전 세계를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이 모든 비합리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독점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변혁해야만 한다.’

1960년대의 미국 젊은이들이 목도했던 미국의 현실을 너무나 명쾌하게 설명해주는 이론이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베트남 전쟁의 엄청난 군사적 물량 공세가 그랬고, 사회 전체에 넘쳐나는 광고와 소비주의가 그랬다. 분명히 1960년대까지 선진국의 고용이나 소득 수준은 일정 수준 이상이었다. 그러나 바란과 스위지는 이에 대해서도 무서운 이야기를 한다.

즉, 선진국 노동자들은 제 3세계를 착취한 잉여로 사육되고 무마되고 있으며, 그래서 제 3 세계에서의 빈곤과 참상은 늘어만 가는 반면 선진국 노동자들은 혁명성을 상실한 대중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것이었다. 1960년대에 줄을 잇던 탈식민 지역의 민족해방운동은 이러한 주장과 정확히 맞아 떨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1970년대 공황이 도래하면서 그 빈곤의 물결은 드디어 선진국까지 덮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다음과 같은 정치적 메시지가 제기된다.

‘제 3세계의 인민들과 미국의 양심적인 세력은 힘을 하나로 뭉쳐 독점자본에 맞선 공동 전선을 펼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 세계적인 고통과 파국(당시의 미소 핵 경쟁을 상기하라)은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1960년대 미국 신좌파 운동의 가장 강력한 지적 원천의 하나가 이 「독점 자본」이었다는 것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스위지와 그가 창간한 『먼슬리 리뷰』는 신좌파운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첫째, 첫째, 미국 ‘급진파 정치경제학 연합’ 등 진보적 학문 그룹의 태동이다. 이 진보적 학자들은 성?인종 차별 등 미국사회에 만연한 각종 모순과 부조리를 자본축적의 흐름에 연결시키며 좀 더 정의롭고 인간적인 정치?경제 체제를 요구하는 집단으로 자리 잡고 있다. 둘째, 종속이론이나 세계 체제론 같은 주변부 정치경제학의 태동이다. 선구적 이론가였던 프랑크를 필두로 종속이론 진영의 이론가들이 『먼슬리 리뷰』 진영과 맺은 긴밀한 관계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냉전의 그늘 아래에서 미국 사회의 절벽까지 떠밀렸던 스위지는 이제 학문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그 누구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로 되살아났다. 스위지와 바란을 그토록 경멸하고 무시하던 주류 경제학계 조차 이렇게 돌변한 사회 상황 속에서 그들에게 일정한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스위지는 1970년대 들어 미국 경제학회의 운영진으로 활동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1971년엔 영국 캠브리지 경제학과의 유서 깊은 마샬 강의도 맡은 바 있다. 스위지가 영국의 경제사 학자 모리스 돕(Maurice Dobb)과 벌였던 자본주의 이행 논쟁은 경제사 연구에서의 고전적인 성과이다. 나아가, 그는 1970년대 이후, 공산주의 국가 내부의 계급 모순을 적나라하게 분석하는 한편 환경 문제에 새롭게 천착하는 등 지적인 영역을 끊임없이 확장해 왔다.

한 때 무슨 빨갱이 삐라 같이 불온 선전물 취급을 당하던 『먼슬리 리뷰』(1950년대에 우편으로 배달할 때에는 꼭 안 보이는 봉투로 싸야했다고 한다)는 이제 미국은 물론 전 세계의 지적 담론장에서 가장 중요한 저널의 하나로 자리 잡았으며, 모든 대학 도서관에서 마땅히 구독해야 할 자료가 되었다. 스위지는 그를 박해했던 미국 사회의 틀을 넘어 유럽은 물론 제 3세계 지식인들 사이에서 깊게 존경받는 존재가 되었다. 1981년 인도의 네루 대학은 그에게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한다.

21세기 : 스위지의 패배?

1980년대 이후의 세상은 스위지와 『먼슬리 리뷰』가 쌓은 성과를 철저하게 무너뜨리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과연 그는 또 다시 패배한 것일까.
스위지의 일생은 다음의 세 가지 측면에서 평가될 필요가 있다. 첫째, 경제학자로서 둘째 사회사상가 및 운동가로서 셋째, ‘독립적’ 지식인의 한 전형으로서…. 그러나 이 세 가지 측면 모두를 그가 잠든 2004년의 시점에서 볼 때 스위지는 철저하게 실패한 것 같다.

첫째, 자본주의의 성격과 발전 방향은 그가 예측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1980년대 이후 인수합병 붐과 함께 터져 나온 세계적인 금융자본주의는 「독점 자본」의 분석과 주장의 상당 부분을 정면으로 논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점은 그가 1991년 12월호 『먼슬리 리뷰』에 기고한 ‘「독점 자본」 : 25년 후의 회고’에서 인정하고 있는 바이다. 그는 자본의 성격과 축적의 논리를 파악함에 있어서 자신이 근거했던 마르크스주의적인 방법이 근본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실토한다. 자본에 대한 분석에서 마르크스주의와 스위지 자신은 ‘실물’ 부문의 역동성에 치우치는 바람에 ‘화폐와 금융’ 부문의 중요성을 놓쳤다는 회고였다. 그로서는 대단히 고통스러운 고백이었을 것이다. 새로운 이론을 수립하려면 가장 핵심적인 개념인 ‘자본’을 다시 정의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는데 스위지 자신은 이미 팔순의 노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둘째, 스위지와 종속이론가들이 내걸었던 주장과 예측 즉 주변부 지역에서 혁명운동의 고조와 자본에 맞선 지구적 연대는 거의 정반대의 상황으로 되어 가고 있다. 선진국의 자본을 착취와 종속의 덫으로 거부하는 흐름은 이제 완전히 옛말이 되었고, 오대양 육대주의 모든 나라들, 심지어 미국 등의 선진국마저 ‘더 많은 자본의 유입만이 살길’이라며 국제자본의 흐름 앞에 거의 모든 것을 내줄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다. 민족해방운동이나 반제국주의 운동은 이미 서구의 ‘좌파’들로부터도 ‘구닥다리’로 취급받고 있다. 급진파들은 이제 ‘사회주의적 세계’ 같은 ‘역사의 구체적인 방향성’이 아니라 기껏해야 ‘억압적 담론구조의 해체’나 가지고 노는, 머리 큰 포스트 모더니즘의 흐름에 휩쓸려 버리고 말았다.

셋째, 스위지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독립적인 지식인’이라는 실천 형태는 현재 세계의 시류 속에서는 실로 우스꽝스러울 정도의 퇴물이 되고 말았다. 이념이 대립하던 ‘극단의 시대’인 20세기가 저물어버린 지금, 세계는 어쩌면 ‘광고의 시대’라고 불러 마땅할 것이다. 이 시대에 최후의 승자로 군림하고 있는 것은 ‘매체’이다. 그리고 그 매체의 힘을 대중적 명성을 얻는 데 이용하려고 하는, 아주 저급한 차원의 ‘인정 투쟁’이 세계 어디에서나 거의 유일한 지식인들의 존재형태가 되고 말았다. 반지구화 운동가도, 해체주의 철학자도, 시민운동가도, 내로라하는 좌파정당 지도자도, 일단 매체에 이름을 내고 얼굴을 내야만 자신의 메시지가 의미 있게 사회적으로 실현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래서 TV 드라마의 카메오 제의에 열심히 줄을 서기도 하고, 유행을 잘 타는 영화감독이 알쏭달쏭한 기법의 카메라를 들이대면 아주 기쁘게 자기 얼굴을 피사체로 바치기도 한다.

이 경박한 광고의 시대, 매체의 시대, 이미지의 시대에, 이제 그 어떤 지식인이 스위지와 같은 존재 형태를 기꺼이 받아들일까.사회 전체에 의해 반사회 분자로 찍히고, 직장에서 쫓겨나고, 친구들에게 버림받고, 걸핏하면 법원으로 불려 다니면서, 기약도 없이 아득하기만 한 그 ‘미러라는 것만을 붙들고 냉전으로 얼어붙은 미국 사회와 ‘맞장’을 뜰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초기의 『먼슬리 리뷰』를 보면 그 초라한 모습에 실로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이다. 필자들은 원고 청탁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가 버리고, 배달할 때에는 무슨 불온문서마냥 안 보이는 봉투에 꼭꼭 싸서 보내야 했던 그 『먼슬리 리뷰』. 이 같은 상황에서 가녀린 목소리나마 빠지지 않고 사회로 내보내기 위해, 매달 거르지 않고 힘든 격무를 해나가는 식의 ‘독립적’ 지식인의 존재 형태가 이제 가능할까. 스위지가 그토록 지키려했던 지식인의 ‘독립성’이 이젠 그 누구도 요구하거나 기대하지 않으며, 부담스럽기조차 한 것으로 여겨지는 세상이 되고 만 것이다.

근본적 비판의 전통 살려야

스위지의 이 ‘세 가지 패배’를 종합해보면 현재 세계의 뚜렷한 흐름이 나온다. 그것은 사회에 대한 비판적 담론의 장에서 언젠가부터 ‘자본’과 이에 종속된 정치-경제 체제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 원천적으로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대신 ‘참신함’ ‘개혁성’ ‘도덕성’ ‘진보’ ‘정의’ 같은 알쏭달쏭하지만 누구나 옳다고 할 수밖에 없는, 김빠진 동어반복이 비판적 담론의 자리를 차지했다.

모두 다 착하고 모두 다 지적이다. 하지만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숨 막히는 경제적-군사적-정치적 폭력 앞에 거꾸러지고 있는데도, 미친 듯이 질주하는 이 지구화의 세계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시원하게 말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 위에서 지구적 자본과 전쟁 세력은 “본업은 이제부터”라며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폴 스위지라는 존재는 1980년대 이후 역사의 흐름에 의해 또 다시 ‘또라이 바보’로 되돌아간 채로 생을 마감한 것일까. 한 때 스위지에게 거의 꼬리가 잡히는 듯 보였던, 자본주의의 역사라는 악동은 이런 식으로 보복을 하는 것일까. 하지만 시시한 소인배들이 아닌 역사와 맞붙어 처절하게 논박 당해본 자는 그리 흔하지 않다.

야곱은 신의 천사와 밤새 씨름한 덕에 ‘신과 싸운 자’라는 이름을 얻었다. 폴 스위지라는 거인의 주검 위에 섣불리 발을 딛고 ‘자본주의의 승리’를 선언하며 조롱을 퍼부으려는 인간들은 뒤로 물러서야 할 것이다. 노신의 말처럼, “쓰러졌어도 영웅은 영웅이요, 아무리 팔팔하게 왱왱거려도 파리 떼는 파리 떼”이기 때문이다.

거목은 이제 편히 몸을 누일 때가 되었다. 젊은 나무들은 힘차게 위로 뻗어 그가 쉴 수 있는 울창한 그늘을 만들어줄 몫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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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꼰대’로부터의 ‘해방’인가  
홍기빈

 해방에 대하여 1  
 
21세기의 진보 이념을 확립하기 위해 길고 꼬불꼬불하고 어두웠던 지난 세기들의 터널을 돌아보는 작업에서 항상 염두에 둬야 할 단어가 또 있다. 바로 ‘해방’이라는 화두이다.
집회장에서 열사들을 추모하며 ‘벗이여 해방이 온다’를 부르면 꾹 감은 눈에 저절로 눈물이 솟아나던 1980년대. 그때를 기억하는 분들이라면 이 ‘해방’이란 단어가 얼마나 숭고한 감정과 의식을 일깨우는 역할을 했는지도 기억하실 것이다. 또 ‘해방’이 완성되는 가상적 시간을 가리키는, ‘그날’이란 단어는 또 얼마나 절실한 감정을 우리 마음 속에서 일으켜 세웠던가.
1980년대 세대는 이 ‘해방’과 ‘그날’을 상상력의 매개로 삼아, 마음 속 깊은 곳에 흐르는 ‘사람사는 세상에 대한 열망’까지 닿는 긴 파이프를 박아낼 수 있었다. 이 파이프 덕분에 척박한 한국 현대사의 지평이 점점 비옥한 대지로 바뀌어 왔으며 또 바뀌어 갈 것이다. 우리에게 이 ‘해방’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강조할 필요 조차 없다.
하지만 ‘해방’은 그 의미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숙고하지 않으면 아주 위험하게 오용될 수도 있는 말이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사람을 움직이는 마력이 담긴 단어이기 때문이다. 우린 이미 지난 세기에 ‘해방’이라는 단어가 걷잡을 수 있는 사회적 파국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그러므로 이 단어의 기원을 한번 차분히 더듬어 보는 것도 이번 세기를 준비하는 데 필요한 일일 것이다.

‘해방’의 악순환
20세기의 이념들은 모두 ‘해방’이라는 이야기틀을 빌어 자신을 정당화해왔다. 개인의 해방, 계급의 해방, 민족의 해방, 무지몽매에서의 해방, 굶주림에서의 해방, 질병에서의 해방, 위협에서의 해방, 성적 억압에서의 해방, 감시에서의 해방…. 결국엔 사르뜨르를 위시한 몇몇 지식인들이 ‘해방으로부터의 해방’이란 말을 완롱(琓弄)하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무수한 작가, 철학자, 요즘 한국에서 유행하는 숱한 ‘논객’들이 이 단어를 이리저리 사용하며 생계와 명성, 남성 또는 여성을 거머쥔 바도 있다. 또 이들과 공생 관계에 있는 잡지, 신문, 출판 등의 매체는 판매 부수와 권력을 늘리면서 그 이상의 혜택을 취해 왔다. 20세기의 담론은, 유럽에서 시작된 ‘결핵균에서의 해방’으로 시작하여 이라크에서 벌어진 ‘세균전에서의 해방’으로 끝났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무리도 아니다. 평범한 정도의 이성과 양심을 갖춘 이들이라면 누구든 이 ‘해방’이라는 이상이 담은 마력에 혹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해방’만 교묘히 사용하면, 그리고 이 단어의 짝인 ‘억압’을 적절히 섞어 제1주제, 제2주제로 소나타를 엮어 놓으면 다수의 사람들을 양떼 몰듯 끌고 다니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이렇게 일정한 수의 사람들을 안정적으로 동원할 수 있게 되면 이를 토대로 상황과 조건에 맞게, 폭력단에서 정당에 이르는 다양한 수준과 모습의 조직을 일구어 낼 수도 있었다. 또 그것을 일정한 안정성을 가진 화폐의 흐름으로 ‘자본화’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여기에 서식하는 장사치들과 정치 모리배들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 단계에 이르면 이전의 ‘해방자’들을 ‘억압’으로 규정하며 새로운 ‘해방’을 외치는 자들이 다시 생겨난다. 이런 과정은 되풀이되고 되풀이된다.

‘해방’은 서양문명의 산물

해방을 갈구하는 이들이 해방을 외치는 이들에게 끌려다니다가 급기야 해방의 적이 되어가는 줄거리이다. 이 같은 아이러니는 인류가 19~20세기에 지겹도록 경험해본 사태이다. 2004년의 한반도 또한 그 악몽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다면 부족하나마 ‘해방’이라는 관념에 대해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서양 언어에서 이 ‘해방’이라는 단어가 쓰여온 계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물론 필자도 21세기의 ‘지구화’되어버린 지식인 담론계에서 자꾸 서양, 동양 나누고 또 ‘서양’이란 것 전체를 묶어서 이야기하다 보면 별의별 딱지가 다 날아올 수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서양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인류에게 해온 몹쓸 짓을 뚜렷이 의식하고 있는 양심적인 진보 지식인들조차 그 악행을 서양 ‘지배 계급’이 아니라 ‘서양 문명 전체’의 차원에서 따지려하면 당장 낮빛을 바꾸고 ‘정치적 관점이 글러먹었다(politically incorrect)’는 딱지를 집어 던지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이 ‘해방’이란 아이러니의 문제를 단지 스탈린, 수카르노, 글래드스턴 같은 역사적 사례들이 아니라, 몇천 년의 시간에 걸쳐 서양인들의 의식 속에 굳어진 ‘해방’이란 단어의 계보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는 이유는 있다. ‘근대’라는 시대와 담론 자체가 서양 문명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근대’가 상상해낼 수 있었던 최고의 이상이 바로 ‘해방’이었으며, 이 같은 이상에 휘말려 전 인류가 일대 북새통을 연출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그 중심부의 인간들은 지금 ‘역사의 종말과 완성’을 외치며 샴페인을 터뜨리고 있다. 자신들 외의 대다수 인류가 (‘해방’ 때문에) 아직도 배고프고 고달프고 두들겨맞고 있는 판국에 말이다. 그렇다면 우린 서양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할 자격과 이유를 가지고 있다.

“당신들이 내건 그 ‘해방’이라는 이상은 과연 얼마나 깊고 풍요로운 상상력의 원천에서 나온 것인가. ‘해방’엔 정말 우리가 대가를 치를 만한 가치가 있기는 한 것인가?”

‘꼰대’와 해방

그런데 서양 언어에 나온 ‘해방’이라는 말의 역사를 통해 그들 상상력의 밑바닥을 힐끗거리다 보면, 풍요로운 상상력은커녕 바닥 모를 허무주의에 소름을 느끼고 만다.
‘해방(解放)’이란 한자어는 19세기 후반 일본인들이 만든 번역어라고 하는데, 이에 해당하는 서양 단어들은 크게 emancipation과 liberation 그리고 불어 affranchissement(이탈리아 어는 affrancamento)의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독일어에서 주로 쓰이는 Befreiung은 독자적인 기원을 가진 말이 아니라 라틴어 liberation을 게르만 어로 옮겨놓은 것 뿐이며, 영어와 불어의 deliverance도 liberation에서 파생된 중세 불어 delivrance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이다. 이 세 단어들의 기원과 사연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라틴어 emancipo는 ‘손목(manu)을 죄고 있는(cip-) 것을 풀어준다(e-)’는 의미이다. 그런데 손목을 죄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엉뚱하게도 ‘아버지’였다.
옛날 로마 시대의 가족은 오늘날의 가족처럼 ‘사랑과 정’을 기본 단위로 조직되는 집단이 아니었다. 로마 시대의 ‘파밀리아(familia)’는 자급자족을 목표로 일정한 크기의 토지, 가축, 농기구, 노예, 처자식, 비축된 양식 등이 안정적으로 조직되어 있는 집단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집단의 우두머리는 나를 낳고 사랑으로 길러준 ‘아버지’라기 보다, 집단 전체를 통솔하고 인적·물적 자원에 통제력을 행사하는 ‘최고 두목’이라는 의미에서의 ‘가부장(pater familias)’이었다(아버지에 대한 비어인 ‘꼰대’와 의미가 통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꼰대’는 세가지 권한을 가진다. 첫째, 그 집단의 모든 소유물에 대한 권한이다. 둘째, 혈연관계의 모든 여자들(아내와 며느리 또 손자 며느리)에 대한 권리(manus)이다. 셋째, 자녀(손자, 손녀 포함)와 노예들에 대한 권리(pater potestas)이다. 그런데 로마법에서 ‘권리’는 ‘자기 멋대로 해도’ 아무 뒷탈이 없는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무제한의 권리를 뜻한다.

세익스피어의 비극에 나오듯이, 로마의 티투스 장군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두 아들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행사하고 있다. 즉, 로마법에서 자녀들은 노예들과 다를 바 없는 가부장의 소유물에 불과한 것이었다.

로마의 아동 및 청소년들의 생활이 과연 그렇게 억압으로 점철된 끔찍한 것이었는지는 제쳐두기로 하자. 지금 중요한 점은, ‘해방’에 대한 상상력을 담은, 서양인들의 가장 중요한 단어인 emancipo가 그 기원에서는 자녀들이 ‘꼰대’ 아버지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을 일컫는 로마법 용어였다는 것이다. 수천년간 서양인들의 사회적 삶을 규정한 주요한 틀인 로마법에서 아버지-자식 관계의 본질은 사실상 지배-소유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식들은 일정한 나이가 차면 가부장에게 자신을 놓아달라고 요구하게 된다. 그리하여 ‘꼰대가 손에 묶어 놓은 차꼬’를 풀어 주면 드디어 자기 마음껏 살아갈 수 있는 삶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서양인들의 ‘해방’에 담긴 상상력의 원관념인 셈이다. 그래서 라틴어-일어 사전에서 명사 emancipatio를 찾아보면 ‘解放(해방)’이라는 말과 함께 ‘獨立宣言(독립선언)’이란 풀이가 나온다. 또 로마인들의 직계 후손인 현대 이탈리아인들의 언어에서 emanzipazione는 가장 일차적으로 ‘자식에 대한 친권(親權)의 해제’를 뜻하는 법률 용어이다.

‘해방’이라는 이상의 허무함

근대 이후 ‘해방’은 ‘정치적·사회적 압제에서의 해방’이란 의미를 얻게 된다. 1832년 제레미 벤담은 ‘정부로부터 해방되거나 스스로를 해방시킨 이들’을 논하고 있으며, 1876년 뉴먼은 드디어 ‘고용주들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킨 노동자들’을 이야기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옥스포드 영어 대사전」의 편집자는 다음과 같은 주의를 달아놓고 있다.

“근대 영어에서는 이 단어의 일차적 의미가 노예해방이 되었다. (친권 해제 등의) 다른 용법들은 오히려 거기(노예해방)에서 파생된 것 같이 느껴지고 있다.”
‘해방’은 ‘억압 일반에 저항하는 자유의 상짱 같은 맑고 밝은 근대 세계의 상식으로 거듭난 셈이다. 이 과정에서 서양 문명의 어둡고 축축한 야만시절의 기억은 지워져 버린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사랑’이라는 원리를 표방하고 조직되는 근대적 가족 제도의 기원이 기껏 17세기의 부르주아들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힘들다는 것은 정설이다. 그러니 기독교의 ‘사랑’ 이데올로기에 흠뻑 젖은 근대인 헤겔이 그의 「역사 철학 강의」에서 자녀와 노예를 똑같은 소유물로 취급하는 로마법의 ‘가부장 소유권’ 개념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하며 악담을 퍼붓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자신들의 역사적 기원을 터무니없이 이상적으로 그려 낭만화시키는 근대 서양 지식인들의 전형적인 자기 도취증이랄까.

이 단어 emancipation에 담겨 있는 의미 중 서양인들의 상상력을 더 뿌리 깊게 규정하고 있는 것은 어느 쪽일까. 2천 년 가까이 서양의 법 개념을 지배한 ‘꼰대로부터의 탈출’인가, 아니면 수천 년 야만 시대의 표피에 얇게 입혀진 근대적 ‘해방’의 금박인가.
그런데 ‘해방’ 개념의 기원이 ‘꼰대로부터의 탈출’이었다는 것은 왜 문제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이 글의 초두에서 던졌던 질문, 즉 “서양인들이 근대세계 최고의 가치로 제시한 ‘해방’의 이상은 과연 인간의 전면적 해방을 담보할만큼 풍요로운 그릇인갚에 비춰보면 바로 드러날 수 있다. 고작 ‘꼰대’에서 풀려나는 것이 우리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란 말인가. ‘꼰대’의 압제에서 풀려나기만 하면, 풍요롭고 가치있는 인간으로 성장하겠다는 우리 인생의 목표는 자동적으로 실현이 보장되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고교 시절, 교실의 ‘꼰대로부터 해방’을 얻기 위해 수업시간 중 학교 담을 넘어본 경험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위 아저씨를 따돌리고 성공적으로 담을 넘은 순간의 안도감이 지나고 난 뒤 찾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갈 곳도 없고 할 일도 없다. 남아도는 시간을 메우기 위해 당구장이나 동시상영 영화관에서 ‘삐대던’ 그 지루한 시간이 과연 ‘해방’이란 이상이란 말인가.

새로운 ‘꼰대’로의 종속

흥미로운 점은, 이 emancipation란 단어가 기묘하게도 여성이나 아이들처럼 ‘연약한’ 존재들의 해방과 더욱 자주 관련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이 단어가 19세기 말 본격적인 정치 용어로 등장하게 되었던 계기는 당시의 ‘부녀 해방 운동’이었다고 한다. 이런 경향은 ‘해방’을 뜻하는 남성 명사인 affranchissement이나 affrancamento가 따로 존재하는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물적 재산도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들과 여자들을 ‘풀어준다’고 해서 그것이 그들의 진정한 ‘해방’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노신(魯迅)이 말한대로, 「인형의 집」의 노라는 집을 나간 뒤 어떻게 되었을까. 매춘부로 전락하든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노예나 농노들을 그저 ‘차꼬만 풀어주는 식’으로 해방시켰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던가.

러시아 알렉산더 2세와 조선말 순조 임금 때 나타났던 경우는 그 ‘해방된’ 노예들이 자기 손으로 자유를 반납하는 것이었다. 미국 북부에서는 ‘해방’ 노예들이 자본과 도시화라는 새로운 주인에게 다시 노예가 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서양인들도, 이러한 ‘차꼬를 풀어주는’ 식의 해방 개념은 충분치 못하다는 것을 자각한 바 있다. 그리하여 19세기 후반 이후 20세기에 들어오면 마르크스주의자들처럼 생산수단으로의 접근을 강조하거나 자유주의 좌파들처럼 사회보장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해방’의 개념이 ‘사회경제적’ 차원이 첨가된 새로운 버전으로 업그레이드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으로 충분한가? 사람이 동물이라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경제사상가 칼 폴라니가 목놓아 호소했던 것처럼, 인간은 삶의 목적과 이상을 가진 상태에 도달하기 전엔 햄릿 왕자처럼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비참한 존재일 뿐이다. 우리가 꿈꾸는 ‘해방’의 이상은 압제로부터의 자유와 물질적인 수단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사는 세상’이란 인간들이 자기 삶의 기쁨과 의의를 발견하면서 다 함께 인생을 풍요롭게 발전시키는 세상을 말한다.

고작 ‘꼰대’로부터의 해방인가
고작 ‘꼰대로부터의 해방’인가. 이것이 서양 문명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이상인가.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스스로 발견하고 또 그것을 성취할 물적 수단에 접근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면, ‘꼰대로부터의 해방’ 은 기껏해야 ‘새로운 꼰대로의 종속’으로 이어질 뿐이다. 서양인들 스스로도 이 점을 무의식적으로 인지하긴 했던 것 같다.

한때 영어 단어 emancipate는 ‘(새로운 주인에게) 노예 상태로의 전락’이란 역설적 어법으로 쓰인 적이 있었다. 1629년 촘리(Cholmley)도 ‘새로운 남편에게 묶인 부녀자(A wiues Emancipating herselfe to another husband)’란 문장에서 같은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20세기에 이어진 ‘해방운동’의 아이러니는 어쩌면 이 어법 안에 고스란히 암시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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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지혜 '모든 가치의 재평가’   

 
 
홍기빈
 
 
 


저번 호의 글들에서 우리는 진보이념의 내용이 될 ‘인간적 가치'의 내용은 우리들의 집단적 실천을 통하여 발견되고 채워져야 한다는 논리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러한 집단적 실천을 시작하기 위해서라도‘초기치’로서 모종의 내용이 다시 필요해진다는 악순환의 딜레마에 부딪혔다. 사실 이 딜레마는 참으로 심각한 것이다. 준거할 만한 거의 모든 가치체계가 무너져버린 폐허에서 무엇을 붙잡고 그 ‘초기치’라는 것을 마련할 것인가.
이집트는 빠져나왔건만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은 도무지 나타나질 않고, 황량하게 펼쳐진 시나이 광야는 막막하기만 하다. 그 아득한 지평선만 멍하니 바라보다가 지쳐버린 히브리 노예들은 아무것이든 신으로 모시고 매달리고 싶은 심정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자기들 손으로 청동 염소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벌이게 된다. 우리도 1990년대에 이런저런 ‘우상의 유혹’이 개인과 집단적 차원 모두에서 삶과 정신을 휩쓸어가는 모습을 목도한 바 있다.
그렇지만 우상은 우상일 뿐이다. 청동 염소를 숭배하는 자는 고작해야 염소가 되고 말 뿐이다. 호랑이를 또 곰을 신으로 숭배하는 짓을 멈추지 않으면 영원히 호랑이, 곰일 뿐 결코 사람다운 사람은 될 수 없다. 개인의 삶이야 호랑이든 염소든 살고 싶은 대로 살다가 그저 무덤가의 핑곗거리나 엮어내고 사라지면 그만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함께 사는 사회를 건설하려는 집단적 실천의 방향 설정에 있어서는 ‘초기치’조차 신중하고 책임있게 설정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개인의 차원에서는 지옥불에 타든 정말 염소, 돼지로 환생을 하든 어차피 그 당사자가 뒤집어쓰게 되어있으니 알 바 아니지만, 집단적 실천의 경우엔 그 초기치 설정이 잘못될 경우 그것을 몸으로 때울 이들이 언제나 우리들 중 제일 힘없고 못 배운 이들이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이 연재는 우리들이 머리를 맞대고 그 ‘초기치’를 신중히 마련할 수 있도록 논의의 의제들을 뽑아보는 작업이며, 이번 호에서는 그 대략의 이야기 틀과 방향을 제시할 차례가 되었다. 그런데 바로 이렇게 사람들이 함께 ‘새로운 가치의 창조’를 시작할 수 있도록 고민의 제목들을 내오는 작업을 오래 전에 시작한 지혜로운 이가 있었다. 그러니 그가 짜놓은 이야기 방식과 고민의 방법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 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19세기 유럽 문명의 허무주의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가 맞닥뜨렸던 19세기 유럽 사회의 모습도 지평선 이외에 아무 것도 없는 ‘시나이 광야’와 닮은꼴이었다. 기독교 시대 이래 다양한 ‘인간적 가치’의 궁극적 근원의 역할을 하면서 유럽 문명을 떠받쳐왔던 것은 ‘신’이었다. 사람들이 ‘신’에 복종하는 한, 그리고 그 ‘신’의 명령을 구체화한 것으로 믿어지는 기독교의 가치체계가 절대적인 힘을 갖는 한, 이런저런 ‘인간적 가치’의 내용을 마련해 오는 일은 조금도 어렵지 않다! 그 전지전능한 ‘신’이라는 인격체의 의지에서 그저 연역해 오기만 하면 되니까. 진리는 신의 말씀이기 때문에 진리이다. 윤리적 당위는 신의 명령이기 때문에 당위이다. 사회 질서와 그 권위는 신의 뜻이기 때문에 현실적 힘을 가진다…등등.
하지만 근대가 시작되면서 신은 서서히 병들어간다. 신이 노쇠해 가고 사람들의 믿음이 흔들리게 되면 이제 어떤 ‘인간적 가치’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신 이외의 다른 근거로 자신을 제시해야 한다.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 이유는 이제 ‘신의 명령’에서 찾아질 수 없고 모종의 ‘합리적 설명’에 호소하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진리도 진리로서 설득되려면 마찬가지로 수학적 방법이나 실험적 방법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아름다움은 이제 우주의 진리나 윤리적 선과 무관한 ‘독자적 가치’로서 딴 살림을 차리게 되었고, 그 결과 보들레르나 말라르메 같은 천하의 ‘악의 꽃’들이 설치게 되었다.
19세기 말에 이르면 그나마 조각조각 흩어진 각각의 ‘가치’들이 더욱 더 파편화되고 아예 산산이 흩어져버려 마침내 ‘허무(nihil)’의 두려운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노쇠한 신 대신 제반의 가치들을 통합하기 위한 절망적 노력으로서 ‘형이상학’이 시도되었으나, 그 거대한 구조물도 마침내 기둥부터 무너지는 증후가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아예 인간은 ‘신의 형상’은 물론 ‘이성적 존재’도 아닌, ‘원숭이의 자손’에 불과하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떠돌기 시작했다. 이제 ‘신’이 죽었다는 소식은 공공연한 진실이 되어버렸다. 모든 인간적 가치를 창조했던 그 거대한 나무가 길게 뻗어 누워버린 이상 이제 유럽 문명의 앞날에 남은 운명은 허무주의라는 독버섯의 창궐뿐이다.
하지만 니체는 허무주의자가 아니었다. 그가 정작 관심을 가졌던 것은 이렇게 모든 가치가 산산조각 나버린 세상에서 어떻게 새로운 인간적 가치를 만들어 나갈 것인가였다. 그렇다면 그도 나름대로의 어떤 ‘대안적인’ 인간적 가치의 틀을 만들어 내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을까. 여기에서 니체에게도 우리가 봉착한 것과 비슷한 딜레마가 나타나게 된다. 지금까지 유럽 문명이 알아왔고 신봉해 온 모든 가치들이 그 근본부터 무너지는 상황에서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하여 그 ‘대안적 가치’의 구조를 건설한다는 말인가. 지축부터 뒤흔드는 지각 변동으로 인해 그 땅 위에 서 있는 모든 건물들은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을’ 정도로 모조리 무너져내리고 있다. 그것을 피해 노천으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에게 ‘대피소’라는 간판을 붙인 또 하나의 ‘건물’을 들이대는 시도가 과연 얼마나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러한 문제점을 간파하지 못할 리 없는 영리한 니체는 그렇게 ‘새로운 가치체계’라는 것에 섣불리 뛰어들 리 없다.
그렇다면 과연 나치즘 신봉자들이 주장했듯, ‘모든 가치를 부정하고 오로지 ‘권력에의 의지’ 하나에 몸을 맡겨 천방지축 날뛰는’ 극단적인 주의주의(voluntarism)가 과연 니체가 선택한 해결책이었던가. 니체 연구자들이 철저하게 밝힌 바 있듯이 그 또한 니체의 뜻과는 전혀 무관하다. 인간보다 우월한 ‘초인(Uebermensch)’은 아리아 핏줄의 외침에 홀려 유태인들이나 학살하는 짐승떼거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


‘모든 가치의 재평가’: 땅이 무너질 때 솟아오르는 법


새로운 인간적 가치를 만들어 내기 위해 니체가 취한 접근법은 ‘모든 가치의 재평가’였다. 지금까지 인간 세계를 지배해 온, 하지만 지금 조각조각 무너지고 있는 그 수많은 가치들을 하나하나 찬찬히 재어보고 이해하여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든가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의미로 바꾸어 버리든가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망치를 휘두르는’철학 작업을 통하여 무너져가는 기존의 가치들을 폐기하고 전복시켜버리는 '이 모든 가치의 재평가’라는 전략이야말로, ‘노예들의 종교’였던 기독교가 로마 문명을 정복해버린 비결이었다고 니체는 본다.
기독교인들이 행했던 이 ‘가치의 전복’의 의의를 음미하기 위해 좀 단순한 예로서 ‘미덕’이라는 가치의 예를 들어보자. 오늘날의 우리에게 내려온 이 ‘미덕(virtue)’이라는 말의 의미는 보통 ‘내면의 강인함(inner strength)’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기독교 전통에서 내려온 ‘신학적 미덕’이라는 관념의 유산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이는 이 말을 ‘구원과 영혼 완성을 이루게 해주는 인간 내면의 성향’이라고 보았고, 그 구체적 요소로서 사도 바울이 말 한 ‘믿음, 사랑, 소망’을 들었다. 요컨대, 이 죄악과 유혹으로 꽉 찬 세상에 물들지 않고 천국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세 가지를 꼭 부여안고 버티는 ‘내면의 강인함’이 필요하다는 말이 되겠다.
그런데 그 말의 어원을 따지고 들어가면 이렇게 윤리적 덕목과 칭칭 엮인 점잖고 성스러운 의미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 나오게 된다. virtue라는 말의 인도 유럽어 어원은 wiros라는 말인데, 이는 ‘남자’ 또 ‘힘있는 자’를 뜻하는 말이었다고 한다. 즉 그 원천에 있어서 이 ‘미덕’이라는 말은 ‘믿음 사랑 소망’ 같은 것 하고는 동떨어진 아주 적나라한 남성의 ‘힘’을 의미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늑대 인간’을 뜻하는 고대 영어인 werwulf 라는 말도 똑같은 어원에서 파생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 ‘미덕’이라는 말의 의미가 ‘늑대 인간의 무지막지한 힘’ 같은 느낌으로 더욱 강하게 다가온다.
이 말 본래의 ‘무지막지한’ 성격은, 기독교인들의 바로 앞 세대인 로마 시대에 쓰였던 virtus라는 말에서 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이 말은 ‘전투장에서의 힘과 용기’를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그 내포적 심상이 남성의 성적 능력과 직결되어 있는 것이었기에 로마인들이 연상하는 이미지는 한마디로 ‘힘차게 일어선! 남근’이었다고 한다. 외적이 쳐들어오거나 자연 재해 등등과 같은 예측불가능의 시련이 닥쳐올 때 남자란 무릇 그 ‘운명이라는 몹쓸 년(fortuna)’의 머리채를 나꾸어채서 고분고분 길을 들일 ‘배짱과 힘’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바로 ‘미덕'이라는 것이다. 즉, ‘말 안듣는 계집년’을 두드려 패주는 남자다운 ‘몽둥이’의 이미지가 그 로마시대의 ‘미덕’이었던 셈이다.


재평가의 힘: 몽둥이를 '믿음 소망 사랑'으로


도대체 어떻게 해서 ‘늑대 인간’의 ‘몽둥이’를 지칭하던 말이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의미로 탈바꿈하는 기막힌 일이 벌어졌을까. 기독교가 퍼져가던 로마 제국 쇠퇴기의 사회적 상황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로마가 아직 이태리 중부의 작은 나라에 불과하던 시절, ‘사람의 간을 산채로 파먹는 괴물’ 한니발 같은 무시무시한 적들이 사방에서 넘실대는 상황에서 ‘싸움터로 나가는 힘과 배짱’은 모든 공화국 시민들에게 요구되는 최상의 ‘미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랜 평화를 지나면서 쇠퇴기에 들어선 로마 제국에서는 어떨까. 군대와 전쟁은 이미 횡재를 노리고 몰려든 잔혹 무도한 불한당 잡놈들의 잔치로 변해가고 있었고, 군인이 아닌 예전의 로마 시민들은 엄청난 재산가가 되었든가 아니면 돈 몇 푼으로 사육되는 인간 쓰레기 ‘프롤레타리(proletarii)’로 전락한지 오래이다. 스키피오나 케사르 같은 이들의 저 고전적인 ‘미덕’의 상징들은 이제 그저 옛날 이야기일 뿐, 그 ‘미덕’이 표상하고 있는 ‘가치’는 이제 사실상 무너져버린 상태이다.
이러한 로마의 전통적인 가치 체계가 위기를 맞게 된 것이 기독교라는 완전히 새로운 가치 체계가 전 유럽 문명을 지배해들어가게 된 배경이라는 사실은 로마사가들이 일찍부터 지적한 바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좀더 주목할만한 점은, 그러한 정복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이 단지 자신들의 새로운 가치 체계를 들이밀어댄 것이 아니라, 니체의 용어를 빌자면 ‘기존의 가치를 재평가’하여 완전히 다른 의미로 바꾸어 놓았다는 점이다.
기원 410년 알러릭 왕이 이끄는 고트 족이 로마를 약탈하고 초토화시키는 사태가 발생하였는데, 이는 로마인들의 전통적인 그 ‘미덕’이라는 가치가 사라졌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동시대인들에게 받아들여졌고, 많은 이들은 저 ‘기독교인들의 평화주의와 전쟁에 대한 무관심’을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성 어거스틴은 이러한 비난을 피해 숨지도 않았지만, 어설프게시리 무슨 ‘예수의 뜻대로 다스려지는 나라를 세우자’라는 신정 통치를 ‘대안’이랍시고 들고 나온 것도 아니었다. 대신 그가 했던 일은 로마의 정치 사상의 초석이었던 키케로의 국가 이론을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완전히 ‘재해석’하여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 험하고 불완전한 사바 세계에서 인간이 인간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간들끼리 모여 공동의 정치 사회(civitas)를 건설하는 수 밖에 없다는 키케로의 주장에 그는 적극 공감하며, 따라서 그러한 관점에 함축되어 있는 로마의 정치 전통의 제반 가치들도 모두 받아들인다. 단 한가지 조건이 있다. 그렇게 모인 정치 사회의 최상의 공동 목표는 더 이상 키케로가 내걸었던 ‘국가의 영광과 물질적 번영’이 아닌 신과 영혼의 구원에 대한 사랑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어거스틴이 모두 ‘받아들인’ 것으로 보였던 로마 정치 전통의 모든 가치는 그 의미가 근본적으로 ‘재평가’될 수밖에 없게 된다.
로마의 번영과 팽창’이라는 키케로식의 가치는 이제 로마인들을 전쟁으로 끌고 나갈 영감의 원천이 되지 못한다. 사치와 안일에 젖어 한 몸뚱아리 사리기 바쁜 족속이 되어버린 로마인들에게 ‘공화국을 위해 몽둥이를 치켜세우자’라는 식의 ‘미덕’은 아무런 호소력도 없다. ‘기독교의 평화주의 때문에 로마가 약골이 된다’? 천만의 말씀. 지금 로마에 ‘죽음을 넘어서는 용기를 가진 인간’들이 ‘십자가를 지키기 위해 웃으며 사자밥이 되는’ 기독교인들 말고 누가 남아 있는가. 그리고 그들의 그 엄청난 헌신과 용기의 원천은 바로 ‘신과 영혼의 구원에 대한 사랑’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제 로마라는 나라가 다시 힘을 차리려면 오히려 모두 떼거리로 ‘신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질 철저한 기독교인으로서 정신 재무장하는 것뿐이 아닌가. 이 논리를 따르게 된다면, 사람들을 싸움터로 나가게 할 용기 즉‘미덕’이라는 전통적인 로마의 가치도 이제는 ‘껄떡대는 몽둥이’ 따위가 아니라 기독교인들의 내면의 힘의 원천인 ‘믿음 소망 사랑’으로 뒤바뀌게 된다.
정말 이 말대로 기독교가 북쪽의 정복자들로부터 로마를 구할 수 있었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러한 식의 ‘가치의 재평가’가 다양하게 행해지면서 로마인들의 정신 세계를 정복해 들어갔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미덕’이라는 말도 그리하여 이후 15세기의 마키아벨리가 로마의 옛 전통을 기억해 낼 때까지 1000년 동안 그 의미는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것으로 완전히 변하게 되었다.


준비 작업으로서의 ‘가치의 재평가’


니체는 19세기 말엽 그렇게 생겨난 기독교적 가치의 유럽 문명도 마침내 그 천년 왕국의 운을 다하고 ‘허무주의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의미심장한 일 하나는, 그 상황에서 새로운 인간적 가치의 창조를 꿈꾸었던 니체가 그 전략으로서, 자신을 ‘적 그리스도’라고 선언하면서 부수려 달려들었던 기독교의 그 ‘모든 가치의 재평가’라는 방법을 집어들었다는 점이리라. 우리의 고민도 ‘진보 이념의 이론적 실천적 논의를 시작할 초기치’를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에서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그 ‘초기치’를 모색하는 준비 작업으로서 기독교와 니체의 본을 따라 ‘기존에 존재해온 여러 가치들의 재평가’라는 방법으로 시작해보는 것이 어떨까.
그 ‘미덕’ 이야기가 나온 김에 좀더 이야기를 뻗어보자. 현재의 ‘미덕’이라는 가치도 이제 정말 ‘재평가’될 때가 오지 않았는가. 로마 시대의 ‘미덕’이라는 가치는 야만적이고 무지막지해보이기도 하지만, ‘공동체에 대한 개인의 책임과 의무’ 즉 시민적 도덕(civic virtue)의 정신이 강하게 깔려있는 것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그 ‘힘과 용기’는 다른 이들이 곤경에 처해 있을 때에 그들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 자기 스스로의 이익과 안녕을 마땅히 포기하고 전쟁터로 나서거나 재산을 헌납할 줄 아는 ‘힘과 용기’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 ‘미덕’이란 결국 다른 공동체 성원들로부터 어느 만큼의 존경과 인정을 받는가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이었다.
기독교 문명이 들어서면서 나타난 이 근대적 의미의 ‘미덕’이 ‘개인의 내면적 정신’의 뜻으로 변하여 아주 고상하고 상큼하게 된 것까지는 좋다고 치자. 그런데 공동체의 이웃은 이제 어디로 갔는가. 한 쪽 구석에서는 집이 없는 가족들이 동반 자살로 또 벼랑 끝에 몰린 노동자 농민들은 할복으로 분신으로 ‘공동체’를 떠나고 있고, 다른 쪽에서는 부동산 투기로 구역질 날만큼 축재한 원정 출산으로 또 그 ‘공동체’를 떠나고 있다. 그 후자의 개개인들을 만나 보라. 대다수가 교회를 사찰을 드나들며 독실하고 모범적으로 살아가는 ‘미덕’의 소유자들이다. 조직적 체계적인 학살을 벌여온 서구의 긴 역사 속에서 콜롬부스에서 부시 럼스펠드에 이르는 그 학살의 주범들은 또 나름대로의 ‘미덕’을 갖춘 이들이 아니었는가. 서구인들 개개인들을 만나보라. 선량하고 나이스하고 친절한, 그야말로 ‘미덕’ 투성이의 사람들이 아직 더 많다. 서구 사회는 그렇게 ‘미덕'투성이 개인들로 범벅이 되어있건만, 어째서 아프리카 사람들은 서구에 대한 빚더미로 인해 질병과 굶주림에 쓰러져가고 있으며 또 다른 쪽에서는 미제 프랑스제 폭탄이 계속 터지고 있는 것인가.
‘공동체 정신’을 빌미로 마초주의 냄새 풀풀 나는 그 야만적인 로마의 ‘미덕’을 부활시키고 싶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미덕’을 개인의 내면의 문제로 한정시켜서 공동체에 대한 연대 의식과 실천력을 마비시켜온 이 근대적인 가치도 더 이상 방치할 수는 없다. ‘대안적 이념과 가치'가 준비 안되었으면 그냥 잠자코 있으라는 식의 윽박지름에도 더 이상 기죽어서는 아니된다. 현존하는 이념과 가치들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또 어떻게 위기에 처하고 있는가를 밝혀 ‘재평가’하는지 시작해보자. 최소한, ‘초기치’를 마련하기 위한 지혜는 분명히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진보적 이념을 건설하기 위한 준비 작업으로 수행해야 할 ‘재평가’ 작업은 어느 현재정도의 시간적 공간적 지평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인가. 이는 21세기 한반도라는 시공간을 어떠한 역사적 시간 지평에서 자리매김할 것인가 라는 문제와 닿아 있다. 다음 호에서부터 이야기해 볼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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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간적 가치’를 창조   
 
 
홍기빈
 
 
 
이 ‘인간적 가치’라는 것은 실로 수만 개의 쟁점과 논쟁이 걸려 있는 지뢰밭 같은 주제이다. 소크라테스에서 니체에 이르기까지, 웅녀 할머니에서 테레사 수녀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전 역사는 어쩌면 그 문제의 답을 찾아 헤맨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 문제를 깊게 파고드는 것은 필자의 알량한 능력을 벗어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 연재의 취지를 어기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 논의의 초점은 분명 진보 진영이 뚜렷한 독자적 정체성과 방향을 가지고 정치·사회 변혁의 주체로 나설 수 있는 것으로서의 ‘이념’이다. 그런데 자칫 길을 ‘삼천포’로 잡았다가는 복잡한 철학 논쟁이나 윤리·도덕의 가치판단 문제로 빠질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의 논의는 항상 구체적인 역사적·사회적 경험과의 연결이라는 맥락에서만 이루어지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연재의 초입인 이번 호와 다음 호까지의 연재에서는 어느 정도 추상적·이론적 논의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 진보 이념의 경계선을 더듬어 본다는 일은 현재 이정표도 길도 확실하지 않은 허허벌판을 걸어나가야 하는 일종의 ‘사유의 모험’인 셈이다. 따라서 어떤 방향과 순서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것인가에 대해서 일정한 확인을 해 두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출발점에 말뚝을 박고 대략의 방향을 잡고 시작해야 도중에 길을 잃고 같은 곳을 빙빙도는 일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며 또 함께 가는 독자 분들도 호흡을 맞출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적 가치’ : 주관주의와 객관주의의 대립

양희은의 노래 가사 중에 “사랑이라 우겼더니 / 사랑이 떠나더라 / 사랑이란 그런 게지 / 마음에만 숨은 게지”란 구절이 있다. 혹시 그 ‘인간적 가치’라는 놈도 그런 게 아닐까. 각자의 마음 속에 있을 때는 적어도 자신에겐 그토록 분명하고 확실한 게 없어 보이는데, 일단 말로든 행동으로든 밖으로 끄집어 내어 다른 사람에게 들이밀게 되면 그 즉시 이상한 것으로 바뀌어버리는 물건이 아닐까.

그런데 그렇게 덧없이 조변석개하는 상태로 그 ‘인간적 가치’란 것을 놓아두면 사회를 구성하는 원리나 원칙의 기초로 쓸 수는 없을 것이다. 사회 구성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시간적 안정성’이니까.

따라서 그 각자의 ‘마음에만 숨은’ 인간적 가치라는 것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진, 선, 미’와 같은 어떤 객관적 개념이나 존재로 대상화시켜 놓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윤리, 도덕, 법률이 생겨나며, 진리의 체계인 ‘도그마’가 생겨나고, 고대 그리스 예술에서의 ‘균형, 균제, 조화’ 등과 같은 미의 객관적 기준이 생겨난다.

각자 마음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가치로 여기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객관적 기준에 합치하는 것은 ‘인간적 가치’요, 그러지 못한 것은 ‘금수’와 같은 것으로 간주되어 사회로부터 내침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생겨난 ‘가치’에서 우리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도출한다. 같은 방식으로 ‘사회가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하는가’의 해답도 자연히 나오게 된다.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그러한 삶을 살도록 최대한 강제하는 것이 사회의 존재 근거이기 때문이다.

인간적 가치를 이렇게 ‘객관적 체계’로 고정하는 것엔 여러 문제점이 따르지만, 가장 주요한 것 중 하나는 그렇게 고정된 ‘객관적 가치의 체계’라는 것은 거의 예외없이 억압적인 틀로 전화해버리며, 지배계급의 이익과 연결되는 경우 - 이는 거의 예외없이 벌어져온 일이다 - 기존 체제를 수호하는 이데올로기로 타락해버린다는 것이다. 대서양 끝의 가톨릭 교회에서 태평양 끝의 조선 성리학까지 구대륙의 역사에서는 그러한 사태의 사례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근대 이후로 이렇게 ‘인간적 가치’를 바깥으로 끄집어내어 ‘객관적 체계’를 만들어 내는 일은 숱한 도전을 받아왔다.

루터, 데카르트, 샤프츠베리를 거쳐 형성되는 근대 시민사회의 정신적 기초는 사실상 이 같은 ‘제도화된 객관적 가치의 강제’라는 전통 사회의 틀을 거부하는 것에 있다. 이 거부는 진리, 윤리, 아름다움을 개개인의 내면에 내재한 이성, 오성, 감성의 확신에 두었던 것으로 어찌 보면 다시 ‘인간적 가치’를 ‘마음에만 숨은’ 것으로 되돌린 셈이다.

그래서 칸트 등은 이 같은 전환이 주관주의의 불확실성과 변덕으로 다시 후퇴하는 것을 막고 최소한의 보편성의 법칙을 부여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렇게 해야만 개인 내면의 자유와 사회 전체의 안정성이 동시에 보호되는 근대 시민사회가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칸트의 시도는 현실적으로는 물론 이론적으로도 그 성공 여부가 상당히 불안한 것이었다. 그가 보편성의 단초로서 부여잡고자 했던 이성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비합리적이고 맹목적인 ‘삶의 의지’의 발현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이미 쇼펜하우어로부터 나오면서 19세기 말 이후의 세상은 주관주의와 비합리주의의 지배로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오히려 주목해야 할 것은 칸트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문제를 풀어간 ‘공리주의’의 방향이다. 사람에게 어느 만큼의 ‘쾌락’이나 ‘효용’을 낳는가, 즉 ‘주관적인 만족을 가져다 주는가’를 인간 사회의 절대지고의 가치로 모시고, 상이하고 무수한 그 가치들을 이 기준에 따라 일괄적으로 재평가한다는 사고방식이다.

니체도 말한 바 있지만, 이러한 공리주의적 사고는 자신 스스로의 중심성과 ‘객관성’을 주장하는 모든 가치 체계에 대한 주관주의적 냉소와 허무주의에 기초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인간 위에 절대적으로 군림하며 인간을 억압하는 어떤 가치 체계도 용납되지 않는다. 인간은 오로지 그의 ‘쾌락’과 ‘효용’에 기여하는 한에서 또 정확히 그만큼 이런저런 가치를 믿기도 하고 따르기도 한다.
앞에서 ‘인간적 가치의 객관적 체계’라는 것이 결국 억압적인 것으로 변해버리기 쉽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젠 ‘공리주의’가 내세우는 주관적 ‘효용’과 ‘쾌락’의 원칙에 근거해 인간사회를 만들어 나간다면 우리는 모든 전통적 형이상학 체계의 억압에서 풀려날 수 있는 것일까. 그래서 각자의 마음 속에 내재한 주관적인 ‘인간적 가치’를 흠뻑 실현하면서 살게 되는 것일까.

철학자로서 보자면 벤담은 칸트와 같은 거인 앞에서 보잘 것 없는 존재일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현대의 시장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는 원리의 기초는 칸트의 고결한 정신보다는 벤담의 속물적 원리에 훨씬 더 크게 힘입은 바 있다. 심지어 민족 국가의 주권조차 금융 시장의 할인율로 ‘재평가’해버리는 이 21세기의 ‘지구적 규모의 시장 사회’야말로 그러한 공리주의적 ‘유토피아’에 가까운 모습이리라. 실제로 제도권의 철학자들, 정치학자들, 경제학자들은 떼거리로 몰려나와 이 지구적 시장 자본주의가 곧 전 인류를 자유롭고 풍요한 약속의 땅으로 데려다 줄 것이며, 이에 ‘역사는 해피엔딩으로 종말’을 고할 것이라고 팡파르를 울린다.


공리주의의 지구적 유토피아?

여기서 묻자. 여기 사는 우리는 지금 ‘인간적 가치’를 실현하며 자유롭게 살고 있는가. 시애틀의 시위대가, 칸쿤에서 할복한 어느 농민이, 몸에 불을 지른 어느 노동자가 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세상에는 ‘화폐적 효용’으로 평가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인간적 가치가 있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것들이 지금 그 ‘화폐적 효용’의 논리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있다는 고발이 아닌가. 이 함성은 관변 지식인들이 장담하듯 시간이 지나고 지구화가 진전되면서 잦아들기는커녕 지난 10년간 가속적으로 커져오고 있지 않은가. 이에 맞선 현 세계의 자본과 권력은 ‘화폐적 효용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은 가치가 아니’라고 강변하며 그 ‘공리주의’의 지구적 유토피아를 오늘도 밀어붙이고 있다.

우리는 지난 역사에서 이 ‘인간적 가치’라는 문제와 관련, ‘객관주의’의 횡포와 ‘주관주의’의 횡포를 한번씩 나란히 겪은 셈이다. 하지만 ‘인간적 가치’의 실현은 요원하고 인류의 문명은 오늘도 그와 빗나간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다는 불안이 팽배하고 있다. 5백 년 전 서양인들이 가톨릭 교회라는 ‘객관주의’의 질곡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도한 몸부림의 출발점은 ‘인간적 가치’를 전면에 세운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었다. 이 지구적 시장이라는 ‘주관주의’의 질곡에서 벗어나기 위한 21세기 인류의 몸부림이 또 다시 ‘인간적 가치’를 앞세우고 터져나오는 것도 그래서 결코 우연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새로운 21세기의 르네상스는 어떤 틀로 이 ‘인간적 가치’를 담아내야 할 것인가. 객관주의와 주관주의라는 두 번의 실험은 이미 큰 대가를 치른 바가 있지 않은가.


변증법적 전통 : 인간적 가치는 우리가 창조하는 것이다

이제 서양 사상에서 인간적 가치를 ‘관념’하는 세 번째 전통인 변증법을 살펴볼 때가 된 것 같다.

변증법이라는 말은 무척 많은 뜻을 가지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인간의 주관적 내면과 객관 세계는 서로 서로를 만들어나간다’는 의미이다. 눈앞에 주어져 있는 세상은 우리의 주관적 내면과 전혀 무관하게 존재하는 ‘객관’ 세계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연은 제쳐놓더라도 최소한 인간 세상은 인간 스스로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눈앞의 ‘객관’ 세계의 이런저런 것들도 옛날 언젠가 우리 선조들이 만들어 낸 것일 터이며, 그 선조들이 그런 것들을 그런 모습으로 만들어낼 때에는 무슨 ‘생각’을 갖고서 그렇게 했을 터이다. 미술품이 화가 마음속의 이미지를 펼쳐낸 것인 것처럼, 이 ‘객관’ 세계라는 것도 결국 그 선조들의 ‘주관’ 세계가 밖으로 실현된 것에 불과한 셈이다.

게다가 우리의 ‘주관’이라는 것도 하늘에서 그냥 뚝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눈앞에 주어져 있는 세상을 들여다보고 겪으면서 머리가 트이고 생각이 생겨난다. 눈앞에 주어져 있는 ‘객관 세계’의 경험이 아니라면, 새로운 창조를 낳을 상상력과 영감이 나올 원천이 없다. 즉, 인간 세상의 주관과 객관은 세상을 관찰하고 또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하는 정신적 능력 그리고 그에 따라 세상을 바꾸어나가는 실천 활동을 ‘매개’로 하여 그야말로 ‘변증법적으로’ 통합되어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 인간적 가치라는 것도 꼭 ‘객관적 체계’로 머물러 있거나 ‘주관의 마음 속에 숨어’ 있거나 해야 할 이유가 없다. ‘객관적 가치체계’는 변화하는 인간 세상과 그것에 끊임없이 직면해야 하는 보통사람들의 삶의 현실에 아랑곳 않는 고정된 도그마로서 군림하면서 억압적인 것으로 변해 간다.

‘인간적 가치’에 대한 극단적인 주관주의와 상대주의는 그것들을 ‘마음에만 숨은’ 것으로 만들어 우리의 현실을 향상시키는 힘을 완전히 거세해버리며, 결국 ‘화폐적 효용’의 전횡을 어쩔 수 없는 것, 심지어 바람직한 것으로 맞아들이고 말았다.

그러나 ‘인간적 가치’에 대한 변증법적인 관점을 취한다면 다른 길이 가능하다. 어제의 선조들이 ‘인간적 가치’라고 만들어 객관세계에 심어놓은 것들에 얽매일 이유가 없다. 일단 나의 ‘주관’이 그것을 이해하게 되면 상상력과 사유를 통해 각자의 변화된 환경과 상황에 맞도록 스스로의 가치로 변형·발전시키는 일은 온전히 개인의 몫이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하여 새로이 변형된 가치들이 그 개개인들의 ‘마음 속에 숨어’ 있기만 하라는 법도 없다. 어제의 선조들이 그러했듯이, 오늘을 사는 우리도 우리가 합의하고 공유하는 가치들에 따라 세상 현실을 새로이 바꾸어 후손들에게 물려주면 된다. 그것을 새로이 바꾸어 가는 것은 또 그들의 몫이며, 이렇게 하여 ‘인간적 가치’의 내용은 그야말로 ‘변증법적’으로 운동·변화한다.

요컨대, 만고불변의 객관적 가치라는 것은 애초부터 없으며, ‘인간적 가치’란 끊임없이 생성하고 소멸하면서 변화해 가는 것이다. 신비한 것도 신성한 것도 아니다. 인간이 현실 세계를 더 이상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활동을 보조하는 ‘설계도’에 불과한 것이다. 또 그것이 ‘설계도’인 이상 개개인의 마음 속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세상을 변화시키면서 현실에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증법적 관점도 멀리는 신약 성서에서 헤겔에 이르기까지 꾸준한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비꼬(Giambattist Vico)와 마르크스가 남긴 커다란 공헌은 한 걸음 나아가 그러한 창조와 실천의 주체가 ‘집단적 인간’이며, 그것도 ‘인류’ 등의 추상적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먹고 살려고 아등바등하면서 몸에 흙을 묻히는 우리 아랫집에 사는 구체적 이웃들을 지목했던 것이다. 그래서 ‘인간적 가치’에 대한 이러한 변증법적 관점이 흔히 민주주의나 사회주의 사상의 기반으로 연결되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것이다. 억압적 가치를 들이대며 봉건적 질서를 강요하는 전통적 지배 계급은 말할 것도 없고, 대안적인 인간적 가치를 사회 전체에 실현하려는 일체의 노력에 대해 주관주의와 상대주의를 앞세워 냉소를 퍼붓고 ‘시장 독재’를 강요하려 했던 부르주아 계급에 대해 맞서야 했던 사회주의 운동과 민주주의 운동은 ‘사람들이 함께 뭉쳐 집단적인 가치를 창출해 내자’는 관점에 기반을 두지 않을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정치 전략으로서의 ‘인간적 가치’ : 헤게모니와 지적·도덕적 개혁

이 ‘인간적 가치’의 문제에 담겨있는 정치적인 함의를 날카롭게 의식하고 발전시킨 사람이 그람시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구체적인 현실의 정치전략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그저 ‘사상’ 수준의 것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탈리아 공산당 당수였던 안토니오 그람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동 계급과 농민들이 정권을 잡는 것은 르네상스 이래 몇백 년간 지체되어 온 이탈리아 사회의 ‘지적·도덕적 개혁’을 그들이 이루어내어 새로운 ‘인간적 가치’를 사회 전체에 제시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고 보았다.

즉, 새로운 ‘인간적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단지 도덕적 당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민중들이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아니 사실상 유일한 방법이라는 전략적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평등하고 윤리적인 인간적 삶을 보장하는 인간적 가치의 창조와 그것을 풍부히 실현하는 공화국의 건설’이라는 것은 실로 마키아벨리 이래 몇백 년에 걸친 이탈리아인들의 염원이었다. 하지만 1860년대 이탈리아 통일과 함께 나타난 부르주아 국가는 그렇게 근본적인 가치의 혁명을 통한 지적·도덕적 개혁은 커녕 타협과 협잡에 의해 유지되는 ‘수동적 혁명’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었다. 결국 노동자 농민이 새로운 ‘헤게모니’ 집단으로서 우뚝 서는 것은 그렇게 부르주아들이 배반해버린 ‘민족적·민중적’ 규모의 지적·도덕적 개혁을 떠맡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람시의 정치철학이 본격적으로 이탈리아 바깥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60년대 말 이후이다. 당시의 그람시 붐에 깔려 있던 문제 의식은 ‘혁명으로 노농 권력 쟁취’라는 교조에 묶여 있던 ‘구좌파’와 절연하고 의회 민주주의가 정착된 서구 국가에 맞는 변혁 전략을 짜야 한다는 선진국 좌파들의 고민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의 의미도 자꾸 ‘담론적 실천을 통한 시민사회에서의 정당성 확보’라는 수준으로 협소하게 이해되어 온 감이 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역사적 맥락에서 보자면 헤게모니의 획득이란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깊이에서 정치·경제·사회 제도는 물론 예술, 문학, 종교, 교육 전반에 걸친 새로운 ‘인간적 가치’의 창출을 뜻하는 것이었다. 감옥 속에서 결핵균에 척추뼈가 썩어들어가던 공산주의 혁명가가 이탈리아 문학사 연구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던 것은 그래서이다.


가치의 창조: 어디서 시작할 것인가

요약하자면, 진보진영의 기치 아래 ‘집단적 실천’을 통해 새로운 ‘인간적 가치’를 창조하는 것만이 ‘객관주의’와 ‘주관주의’의 폐해를 극복하는 길이라는 말이 되겠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풀린 것인가?

지난번에 필자는 ‘진보의 이념’이란 곧 ‘인간적 가치’의 실현이 되어야 한다고 했고 동시에 그 ‘인간적 가치’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찾아나가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 놓고서 ‘함께 뭉쳐서 만들어 나가자’라고 대답한 셈인가. 터놓고 말해서, ‘진보 진영 깃발 아래 함께 모여 이리저리 뭉쳐다니다 보면 다 무언가 내용이 나오게 되어 있다’는 소리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그러나 이 연재의 당초 의도는 1990년대에 걸쳐 진보진영의 깃발과 울타리라는 것 자체가 모호해지면서 ‘집단적 실천’도 답보상태에 빠지는 악순환이 발생했다는 것, 그리고 그 고리를 풀어내기 위해서는 ‘진보 이념의 지평’을 더듬어 보는 노력이 별도로 병행될 필요가 있다는 것 아니었던가.

진보 이념의 구체적 내용은 집단적 차원에서의 이론과 실천의 교호 작용을 통해 채워 나가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출발점에서 이 같은 논리로 답을 회피해서는 아니 되며, 고민이 시작되어야 할 지점을 분명히 제시해야 할 것이다. ‘무에서의 창조’란 없다. 새로운 가치의 창조란 앞에서 본 변증법의 지혜가 가르치듯, ‘현존하는 모든 가치의 재평가’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소렐은 『폭력론』에서 ‘미리 계획된 모든 정치강령을 집어던지고’ 곧바로 총파업과 각종 파괴행위를 벌이는 것만이 좌파 운동이 오염되지 않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주장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현실에 실험되었던 결과는, 아나코 생디칼리즘 운동이 야기한 무수한 희생과 파시즘의 출현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다음 호에서는 이 ‘현존하는 모든 가치의 재평가’란 모험을 어떤 방향과 계획으로 해나갈지에 대해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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