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troffen" 이 단어는 독일의 보수주의자들이 '보통국가'의 개념을 사용하는 것만큼이나 평화주의자,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이 자주 사용한다. 베트로벤하다는 것은 죄책감, 수치감 또는 당혹감을 함축한다. "

        p.33.  이안 부르마,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 (한겨레신문사, 2000)

그들은(일본의 민족주의자들은) 일본인에게는 천황숭배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아타리마에고토'(당연하다)라는 말과 '시젠'(자연스럽다)라는 말은 그들이 애용하는 단어들이다.

        p.311. 이안 부르마, 같은 책.

 "큰 불이 나서 땅 위에 쓰러졌다. 그런데 누군가가 자기 몸위를 덥쳤다. 정신을 차려보니 불은 꺼졌으나 그 사람은 이미 재가 되어 있고 자신은 그 재의 보호 덕에 살아 있었다." 이 (카토 노리히코의) 알레고리에는 일본인 생존자인 '나'와 '나'를 구하고 죽은 일본군 병사가 있을 뿐이다. 불은 일본이 지른 것이 아니라 마치 '자연발화'한 듯이 그려져 있으며, 이 불의 1차적 피해자인 아시아의 희생자는 빠져있다.

         p.348. 이안 부르마, 같은 책.

(독일의 보수주의자들처럼 그들도 물질주의와 복지가 남긴 정신적 진공상태를 우려한다.) [...] (일본에서) 어쩌면 정신적 진공을 가장 심하게 느끼는 것은 교육받는 과정에서 주입된 종교를 역사에 의해 박탈당한 세대인지도 모른다.

          p.313. 이안 부르마, 같은 책

한 민족은 그 정부 형태에 대해 집단적인 책임을 진다.

          칼 야스퍼스

우리는 이제 정치적으로 해방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도 노예근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책임을 군부와 경찰 또는 관료들에게 미루는 한, 그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우리를 지배하게 하는 한, 우리는 자신의 죄에 대해 심각하게 반성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 민족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을 것이다.

          일본 영화감독 이타미 만사주의 1946년 기고문 중에서 p.316

왜냐하면 '보통' 사회, 과거의 유령이 찾아와 괴롭히지 않는 사회에는 역사를 '정상화'함으로써 또는 십자가와 마늘을 휘두름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반대로 한 사회가 충분히 개방적이고 자유로워져서 희생자나 범죄자의 관점이 아니라 비판자의 관점으로 과거를 돌아볼 수 있게 될 때, 그 때에만 유령들은 무덤으로 들어가 영면하게 될 것이다.

           p.302 -303. 이안 부르마, 같은 책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일본의 문제를 거꾸로 접근했는지도 모른다. 일본은 특히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대한 정치적 책임감 없이는 과거에 대한 성숙한 태도를 발전시킬 수 없다. 먼저 정치적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 심성은 거기에 따를 것이다. 개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정권교체는 개헌만큼 중요하다. 왜냐하면 새로운 정부만이 그 뿌리가 여전히 전시체제에 물들어 있는 전후 질서와 단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빌리 브란트가 바르샤바의 게토에서 무릅을 꿇는 것은 서독에서 민주주의가 확립된 후였지 그 전이 아니었다.

           p.323. 이안 부르마, 같은 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두 개의 기사를 병치시켜 놓고 보니 재미있다.


특집 : 동아시아에서 조선 성리학의 지위
중국이 우러러 본 조선의 理 철학
2004년 04월 17일   이기동 성균관대 

이기동 / 성균관대·동양철학

동아시아 삼국의 문화는 그 특징이 매우 뚜렷하다. 한국의 문화는 형이상학적 성격이 강하고, 일본의 문화는 형이하학적 성격이 강하며, 중국의 문화는 양면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중국, 한국, 일본에 동시에 전개된 불교나 성리학을 비교해보면 확실히 증명이 된다. 중국의 역사가 문관과 무관에 의해, 한국의 역사가 문관에 의해, 일본의 역사가 무관에 의해 주도돼온 것을 보더라도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형이상학은 주로 철학이나 종교의 영역에 속하고 형이하학은 주로 물질과학이나 사회과학의 영역에 속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동아시아 삼국 중에서 종교가 가장 발달하는 나라는 한국일 것이고, 과학이나 경제가 가장 발달하는 나라는 일본일 것이며, 둘 다 적당히 섞여 있는 나라는 중국일 것이다. 오늘날 상황에서 보더라도 교회의 수가 가장 많은 나라는 한국이고 가장 적은 나라는 일본이며 중국이 그 중간이다.

형이상학 성격 강한 조선의 성리학

이러한 구도에서 볼 때 동아시아 사회에서 차지하는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의 위상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의 성리학은 고려말에 중국에서 수입된 송학에서 비롯된다. 송학은 중국 당나라 때 韓愈 등에 의해 주창된 신유학 운동이 북송을 거치면서 발전하다가 남송의 주자에 이르러 완성된 사상체계다. 송학은 송나라 때 완성된 학문체계라는 뜻에서 일컬어진 말인데, 주자에 의해 완성된 것이라 해서 주자학이라고도 하고, 程子와 주자가 중심이라 해서 정주학이라고도 하며, 性과 理가 중심개념이라 해 성리학이라고도 하고, 理가 중시된다고 해서 理學이라고도 하며, 道의 실천을 목적으로 한다고 해서 도학, 聖人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해서 聖學, 새로운 유학이라 신유학이라고도 한다.
한국의 성리학은 송나라 때 바로 수입되지 않고 송나라가 망한 뒤 송을 이어 일어난 원나라에서 수입된다. 고려말 안향에 의해 원나라로부터 수입된 성리학은 순조로운 발전을 거듭하다가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에 이르러 완성을 보게 된다.

중국의 성리학은 형이상학적 성격과 형이하학적 성격이 조화를 이룬다. 한유에 의해 주창된 형이하학적 특징은 歐陽修와 司馬光을 거치며 발전하고, 이고에 의해 주창된 형이상학적 특징은 주돈이, 張載, 정이 등을 거치며 발전한다. 그리고 이 두 계열은 주자에 의해 하나로 통합된다. 그러므로 주자에 의해 통합된 중국의 성리학은 형이상학적 성격과 형이하학적 성격이 통합된 종합적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한국에 수입된 성리학은 이고 계열의 형이상학적 성격의 성리학이 주로 수용되고 한유 계열의 형이하학적 성격의 성리학은 그다지 수용되지 않았다. 이는 한국인의 정서로 볼 때 지극히 당연한 귀결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한국의 성리학은 형이상학적 성격에 치중했기 때문에 그 깊이는 주자의 수준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하버드대 뚜웨이밍 교수는 특히 조선의 퇴계를 주자의 진정한 후계자로 지목한 18세기 일본 지성들의 견해에 동조하면서도 퇴계가 고봉과 벌인 사단칠정론에서 밝혀낸 理 사상은 중국의 유학자들에서 촉발된 것이 아닌 독창적인 것이었음을 밝힌다. 이러한 평가는 퇴계뿐만 아니라 조선 성리학자들의 수준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평가는 당시 명나라에서도 많은 평가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 온 사신이 율곡을 만났을 때 "天道策을 쓴 그 율곡인가?" 하고 물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중국에서 조선 성리학자들의 글들을 읽고 있었으며 조선의 성리학자들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존중은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명나라가 국력을 기울여가면서까지 조선을 돕게 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만약 명나라가 멸망하지 않고 계속 발전했더라면 조선 성리학과 성리학자들의 위상은 중국에서 계속 유지됐을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의 멸망과 함께 형이상학적 성격이 강한 성리학이 쇠퇴하고 실학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자 중국에서는 한국 성리학에 대한 관심이 없어질 수밖에 없었다. 우암 송시열을 비롯한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들이 청조를 거부하고 끝까지 명나라의 연호를 고집했던 이유도 이러한 현상들과 맥락이 통한다. 그러나 청나라에서도 조선 성리학자에 대한 존중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청나라 말기의 대표적 지성인인 양계초는 퇴계를 극찬하면서 '삼백년 내려온 그 명성을 세상의 사람들이 모두 흠모하게 됐다'라고 했다.


한편 조선 성리학의 일본에 대한 영향은 지대했다. 일본에 성리학을 정착시킨 최초의 인물은 후지와라 세이까(藤原惺窩)다. 그는 불교의 승려였으나 조선에서 온 사신 허산전과 만난 후 성리학으로 돌아섰다. 세이까는 조선에서 포로로 잡혀간 姜沆에게 배우면서 영향을 받았지만, 허산전이 퇴계학의 학맥을 잇는 사람이었으므로 세이까가 수용한 성리학은 주로 퇴계학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아베요시오(阿部吉雄)의 '일본 주자학과 조선'이라는 저서에 상세하게 설명돼 있다.

일본에 미친 퇴계학의 강력한 영향

일본 성리학의 완전한 수용기에 이르면 퇴계학의 존숭은 극에 달한다. 일본 성리학의 대가인 야마자끼안사이(山崎闇齋)는 퇴계를 존숭한 나머지 퇴계의 초상을 그려놓고 매일 아침 경배를 드렸다고 한다. 큐우슈의 오오쯔까타이야(大塚退野)는 자신의 호를 퇴계의 退를 따서 타이야(退野)로 정했을 정도였다. 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본 성리학에서의 퇴계의 위상은 조선 성리학에서의 주자의 존재와도 같은 대단한 것이었다. 퇴계 외에도 율곡이나 양촌이 일본에 소개돼 연구됐으나 퇴계만큼의 영향력을 갖지는 못했다.
퇴계학을 중심으로 한 한국 성리학의 일본 수용은 한국 성리학 그 자체가 수용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일본의 정서에 맞게 형이하학적으로 변용된 것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국 성리학의 일본에서의 위상은 대단했다. 이러한 위상으로 말미암아 조선시대의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에게 지극한 환대를 받았다. 일본인들이 조선의 사신을 만나 글씨를 하나 받으면 그것이 그대로 가보가 됐다. 그래서 당시의 일본인들은 조선의 사신을 만나기 위해 조선의 사신이 묵는 여관 앞에 장사진을 쳤다. 이것을 국제적인 망신이라 여긴 일본 정부는 사적으로 조선의 사신을 만나는 것을 금하는 국법을 정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일본인들이 한국인에 대한 열등감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고, 나중에 한국을 식민지로 만드는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이는 경계할 일이다.


필자는 동아시아 전통사상에 대한 비교연구를 많이 해왔다. 논문으로 '일본유학에서 중세적 사유의 형성과 극복', '한국유학과 21세기', '퇴계학과 일본의 주자학' 등이 있고, 저서로 '조선조 성리철학의 구조적 탐구', '도올논어 바로보기' 등이 있다.

--------------------------------------------------

“조선 정통유학이 일왕중심 변질”
 
[한겨레 2004-05-03 21:23]
 
 

[한겨레] ‘황도유교’ 비판 학술발표회
유학의 친일 또는 왜색 문제가 학계의 전면적인 비판대에 올랐다. 비판철학회(회장 양재혁·성균관대)는 지난 1일 이 학교 경영관에서 ‘황도유교(皇道儒敎) 비판’이란 주제의 학술발표회를 열었다. 이날 발표회에서는, 조선의 정통 유학이 일제 식민강점기 시절 일왕의 통치이데올로기를 합리화하는 황도유교로 변질됐으며 해방 이후에도 황도유교의 영향을 받은 학풍이 역대 독재정권의 극우반공 정책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하는 도구로 전락해왔다는 비판들이 쏟아졌다. 유림의 본산이라 할만한 성균관도 신랄한 비판에서 비껴가지 못했다.

황도유교는 1903년 조선 정부 초청으로 한성중학교(현 경기고등학교) 교사로 건너온 다카하시 도오루가 퇴계 성리학을 재구성한 일왕 중심의 유학 체계다. 그 내용은 대강 이렇다. △조선의 유교는 중국의 아류이며,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 건설을 위해 공맹의 정치적 이상인 왕도유교는 일본을 국체로 한 천황 중심의 황도유교로 바뀌어야 한다 △왕도 유교가 ‘충’과 ‘효’를 분리해 ‘효’를 강조한 것이라면, 황도유교는 충효 일치가 기반이다 △중화사상은 주변국을 오랑캐로 간주해 포용력이 없지만 일본은 세계정신으로 황화(皇化)천하를 선포하며, 조선 병합은 포용의 사례다.

다카하시는 1920년대 대구고보(현 경북고) 교사와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 설립 간사 및 교수로서 식민지 조선의 교육방향을 주도했다. 1930년 경학원(구 성균관)을 황국신민 양성을 위한 명륜학원으로 바꾼 뒤, 1940년 11월 내선일체정신을 강조한 ‘왕도유도에서 황도유도로’라는 논문을 발표했으며, 1944년 명륜학원을 명륜연성소로 바꾸고 자신이 소장을 맡았다.

김원열 한국기술교육대 강사는 ‘황도유교의 사유체계와 방법론적 문제점에 대한 비판’에서 “황도유교는 일왕을 정점으로 한 봉건적 위계 구조를 바탕으로 한 전체주의적 지배 이념”이라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다카하시는 ‘조선유학대관’(1923)에서 퇴계 이황을 ‘침잠하는 사색력’을 들어 조선 제일의 학자로 평가했다. 다카하시가 조선 유교사를 정리하면서 노린 것은 “현실의 정치적 권력의 문제를 외면한 채 공허한 논의로 일관하는 것이 일본의 식민지배에 유리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다카하시의 방법론은 자신의 제자이자 서울대 교수와 성균관대 유교대학장을 역임한 박종홍에게로 이어졌다. 김씨는 “박종홍이 대구고보 교사 시절 쓴 ‘퇴계의 교육사상’이란 논문은 일제 식민지 시기 교육현실을 ‘경(敬)의 결여’로 파악하면서 이황의 ‘경 사상’을 추앙했으나 이런 진단은 민족구성원의 독립투쟁을 가로막는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양재혁 교수는 ‘황도유교 비판-유교의 종교화에 대하여’에서 “황도유교가 일본 제국주의 확장을 위한 ‘내선일체, 일시동인(一視同仁)’ 이념을 바탕으로 일왕을 우리 민족의 조상으로 체계화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조선의 정통유학은 정치와 하나였으나 일제의 정-교 분리 정책으로 유교를 이념으로 한 조선조의 실체였던 정치가 파괴되고, 정치의 규범을 담당했던 예(禮)만 종교의 형식으로 남게 됐다고 분석했다. 한국 유교가 황도유교의 국시 아래 종교로 포섭돼 사회과학적 현실정치 문제를 배제했다는 것이다. 현 성균관이 교육인적자원부 산하의 교육기관이 아니라, 문화관광부 산하의 종교분과에 속해 있는 것이 단적인 사례다. 그는 “사회 구성이 예의 체계였던 조선시대와 달리 법과 민주 체제가 정착된 지금도 유교가 신분계급사회였던 조선조 규범인 예를 이상으로 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공맹의 논리가 그 시대의 제왕독재를 비판한 것처럼 오늘의 유교 연구도 현실정치 비판을 통한 구체적 삶을 주제로 선택해야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권인호 대진대 교수는 ‘박종홍의 퇴계철학 비판-황도유교와 국가주의 철학의 원류’에서, 퇴계 철학의 현실과 동떨어진 형이상학적 관념성이 후대에 악용되는 논리구조를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천지·남녀·군신·부자·부부 등을 상호보완적 관계가 아니라 상하질서 관계로 변질시킨 주자의 성리학의 ‘이존기비(理尊氣卑)’론이 이황의 성리학에서 재현됐으며, 다카하시는 이 점을 적절히 포착했다. “퇴계 성리학이 일제 강점기에 유교적 사회질서와 절대권력의 정치지배를 정당화하면서 그것에 기생하는 학문연구 풍토를 조성”했을 뿐 아니라, 이후 ”친일-친미-반공 독재자들의 충효교육 및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이용됐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황도유교의 충효교육 논리가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제국헌법·군인칙유·교육칙어 등과, 한국에서는 박종홍과 박정희의 합작품인 10월 유신과 국민교육헌장, 가정의례준칙과 호주제 등과 사상적 맥락이 닿아있다고 주장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렇다고 해서 이념이 단지 계급의 이익에만 봉사하는 것은 아니다. 이념의 주된 기능은 그런 편협한 사리사욕을 고상하고 폭넓은 사회관에 결부시켜 그 본 모습을 적절히 은폐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찌하여 귀족파의 이념이 오늘날까지도 친숙한 느낌을 주는지를 잘 설명해 준다. 귀족파의 이념은 시대를 통틀어 유산계급의 지배를 미화시키는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다음 네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무엇보다도 과두세력은 특권층인 자기 계급의 이익을 민중의 이익과 같다고 내세운다. 키케로는 후대의 책략가들에게 이런 이론의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그는 공화정 사회 전체의 복지가 소수의 탁월한 지배층의 복지에 달려있고, 소수 지배층은 공적 문제를 현명하고 훌륭하게 관리하며 또 그들의 높은 지위는 그런 탁월한 능력의 당연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둘째, 지배계급의 선전가는 이렇게 경고한다. 무상 양곡 배급, 집세의 한도 설정, 부채 탕감 등의 정책은 수혜자인 가난한 사람들의 도덕적인 해이를 초래할 뿐이다. 그것은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는 사회적 안정 계층을 희생시켜서 가난한 사람들의 낭비적 생활을 연명해주는 미봉적 대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셋째, 지배하는 소수는 재분배 정책이 사회 전체에 과중한 비용을 부담시킨다고 주장한다. 영세 농민에게 땅을 재분배하려 해도 그런 땅이 충분하지 않고, 또 양곡 무상 배급이나 어려운 평민의 고용을 위한 공공사업을 추진하려 해도 자금이 부족하다. 하지만 이런 돈이 없다는 얘기는 구실에 불과하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전쟁 비용으로 들어가는 막대한 자금과, 부유 계층에게 돌아가는 막대한 보조금은 무슨 돈으로 조달하는가.

넷째, 인신공격의 방식이다. 부자들의 지나친 탐욕을 억제하려는 대중적 개혁 정책을 공공연히 비판할 수 없게 되자, 귀족파는 개혁가를 매도하면서 그들의 동기를 불순하다고 비난한다. 대중의 항의는 경제적 불공평에 대한 정당한 저항이라 할 수 없고, '계급투쟁' 즉 자기 지위를 강화하면서 권력을 탐하는, 변덕스럽고도 파렴치한 민중 지도자가 배후에서 조종한 것이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키케로의 논리에 의하면, '민중 지도자는 순진한 군중의 열정에 불을 지르기만 할 뿐' 일반 대중의 진정한 이익은 전혀 안중에도 없다는 것이다.

후대의 많은 역사가들은 예전부터 내려오는 이런 지배계급의 이념을 전적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그들은 카이사르의 암살을 암살자에게 유리한 관점에서 설명한다. 그들은 키케로의 그 밖의 '입헌주의자'들이 사심없는 미덕과 법률 위에 세워진 공화정을 크게 자랑스러워했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이를 역사가는 바로 그 '입헌주의자'들이 그들의 이익을 위해 밥먹듯이 헌정을 중단시킨 사실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는다. 귀족들은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영세 농민에게서 공공 토지를 사취하고, 해적처럼 마을을 약탈하고, 식민지 주민에게 중과세하여 가난으로 내몰고, 도시와 지방의 세입자들에게 지나친 임대료를 부과하고, 폭리의 고리 대금으로 채무자를 괴롭히고, 노예노동을 이용하여 자유노동을 위축시키고, 신탁의 점괘를 조작하여 평민의 의결을 방해하고, 최소한의 미약한 개혁조차 반대하고, 표를 매수하고, 끝없는 뇌물로 법정과 공직자들을 오염시키고,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평민과 그 지도자들을 대량 학살하는 범죄행위에 참여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이 감탄사를 연발하며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았던 결연한 공화주의자들의 참 모습은 이처럼 겉과 속이 달랐던 것이다.

로마 귀족이 생각하는 '공화정의 자유'는 무엇보다도 귀족을 위한 자유였다. 겉보기에만 공공을 위해 헌신적이었고, 실은 귀족계급의 모든 특권을 지키는 자유, 어떤 비용도 부담하지 않고 시민 사회의 모든 특혜를 누리는 자유, 다른 모든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더욱더 부자가 되는 자유, 이런 것들이 소위 그들이 말하는 공화정의 자유었다. 그 어떤 공화정의 겉치레를 달고 있든, 귀족제도의 자유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소수 귀족 중심의 금권 정치였다. 이러한 무자비한 부유충의 자유는 오늘날까지도 온건한 경제적 민주주의를 차갑게 뿌리치고 있다.  

                                                      마이클 파렌티, 카이사르의 죽음, (무우수, 2004) p.200-202

 

 

 

 

 

 

<초점> 美 전성기속 위기론 대두
 
[연합뉴스 2004-06-08 09:57]
(워싱턴=연합뉴스) 윤동영특파원 = 미국은 건국이래 최 전성기인가 아니면 위기인가.

미국이 세계 유일 초강대국으로 최고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가운데 미국의 지성계에서 `미국의 위기'를 주장하는 경보가 잦아지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최근 나오는 위기론은 미국의 교육, 과학 등 분야에서 세계적 경쟁력에 대한 우려에서부터 자유와 인권이라는 `미국적' 가치의 위기는 물론 불평등 심화로 인한 미국 체제 전반의 위기 조짐을 지적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에는 미국 대선을 앞둔 정파적 논란 분위기도 한몫하고 있는 게 사실. 그런가하면 위기론은 실제 위기라기보다는 미국 민주주의의 최대 장점이라는 미국 사회의 자정.교정 기능이 조기 발동하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일각에선 최고 전성기의 미국에서 로마제국의 성쇠를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미국 정치학계의 지도급 학자 15명은 7일 워싱턴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미국 사회 내부의 경제.정치적 불평등이 심화함에 따라 미국 민주주의에 심각한 위협이 제기되고 있다며 `체제 전반의 혼돈'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미국 정치학회가 2년전 시더 스카치폴 전 회장 등 15명으로 구성한 `불평등과 미국 민주주의 특별연구팀'은 2년간의 연구 결과를 집대성한 보고서를 통해 "불평등으로 인해 정치에서 배제된 없는 자의 무력감이 민주주의의 심장 자체를 찢으려 하고 있다"며 "부익부와 빈익빈 심화에 따른 무력감이 깊어질 때 우리에겐 결코 있을 것 같지 않았던 체제 차원의 혼돈도 없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보고서는 경제적 불평등이 빈자의 정치참여를 배제하는 결과를 낳고, 인터넷 같은 기술진보도 정치와 정책결정 과정의 참여 기회를 확대하리라던 당초 예상과 달리 정보 격차로 도리어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가진 자는 공직 선거에 출마를 통해 선출된 뒤 정부 정책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들도록 함으로써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고 보고서는 말했다.

상원의원을 선출하는 투표권에 대한 계량적 분석 결과 명목상은 1인 1표이지만 부자 유권자 표의 힘이 빈자 유권자보다 3배가까이 클 뿐 아니라 선거후 최저임금제, 시민권, 정부 지출 등의 주요 입법 과정에선 이 정치적 불평등이 더욱 커진다고 보고서는 밝혔다. 보고서는 경제와 투표행위, 기타 정치참여 및 정책결정 과정에 대한 분석 결과 ▲미국엔 부자 시민과 빈자 시민 두 계급이 있고 ▲공화, 민주 양대 정당은 기존의 특권층 사이에서만 공직후보를 충원하고 있으며 ▲노동조합원의 감소로 노동자의 정치참여 통로로서 노조의 기능이 쇠락했고 ▲공익 시민단체들의 등장도 체제의 가진자 편향을 별로 바로 잡지 못했다고 말했다.

보고서는 또 "빈곤층 소수만 부의 사닥다리를 오르는 상향 이동만으로는 다수의 경제적 불일치를 상쇄하기엔 역부족"이라며 "경제적 격차는 보통의 화이트.블루 칼라 직장인과 특권적 전문직, 경영자, 사업가들도 갈라놓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보고서 발표에 앞서 6일 뉴욕타임스는 미국 대학의 졸업시즌을 맞아 저명인사들의 졸업식 축사나 기념사에서도 미국 사회의 불평등 심화와 시민 자유와 기본권 위협 등의 현상에 대한 경고가 잇따르고 있다고 보도했다. 암허스트대 앤소니 마르크스 학장은 "미국 인구를 절반으로 나눠, 일류대학 학생가운데 못사는 절반 출신은 10분의 1에 불과하고, 아래로부터 4분의 1에 해당하는 빈곤층 출신 학생은 3%에 지나지 않는다"며 "대공황기 이래 전례없는 불평등 사회로 향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뉴스 해설가 테드 코플은 "미 본토에 대한 생화학 무기 테러 공격이 있을 경우 계엄령이 내려질 가능성이 농후하다"며 "국가안보 위협에 대한 인식과 기본권및 자유의 구속은 직접 상관관계가 있으므로 이 위협의 성격과 범위를 미리 꼼꼼히 따져 둬야 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지난 3,4월 9.11테러 조사위의 조사 활동을 통해 정보기관들의 `정보 실패'론이 집중 조명받을 때, 엄격히 분리된 수사와 정보 업무를 테러 위협에 대한 효율적 대처를 위해 통합해야 하며, 그 일환으로 전 정보기관들을 총괄하는 총수직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이 청문회장과 언론 기고문 등에 분출했었다. 당시 조지 테닛 중앙정보국장은 "후세에 미국이 안보를 위해 인권을 버렸다는 말을 들을 것"이라며 반대 입장을 나타내기도 했으나 이같은 목소리는 희미했다. 영화배우 로버트 레드퍼드도 한 대학 졸업식에서 "워터게이트 사건 때만 해도 작동했던 견제와 균형 시스템이 이제는 미디어 합병, 탐욕, 이념의 제한, 그리고 무엇보다 무관심으로 인해 크게 훼손됐다"고 우려했다.

ydy@yna.co.kr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오시마 나기사, 御法度

 

그렇다면 정 또는 인정이라고 불리는 일본인 특유의 정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그것은 일본을 대표하는 문학작품으로 손꼽히는 [겐지이야기] 속에 잘 드러나 있다. [겐지이야기]는 뛰어난 미모를 지닌 일본 황실의 귀공자 겐지와 그의 아들이 2대에 걸쳐 여성편력을 벌이는 이야기를 감상적인 분위기를 배경으로 아름답게 그려낸 소설이다. 이것이 일본을 대표하는 문학작품으로 손꼽히는 까닭은 겐지 부자의 일대기가 '타고난 자연스러움'에 따르는 일본적인 삶의 전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윤리나 도덕 대신 인정이나 욕망에 몸을 맡기는 삶을 살아가는데, 그것은 이들이 인정이나 욕망이야말로 사람의 자연스런 마음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아씨의 이름은 등호(藤壺)였다. 과연 얼굴이며 자태가 이상하리 만치 죽은 동호와 비슷했다. .... 죽은 동호에 대한 임금의 그리움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 잊을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었지만,  애정은 자연히 등호에게로 옮아가서 각별한 위로를 받았다. 이것도 사람의 자연스런 마음이었다. ( 무라사키 시키부, [겐지 이야기])

주목해야 할 것은 이같은 인욕의 삶에는 반드시 쓸쓸함의 정감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엔카의 애상이나 벗꽃의 허무로 대표되는 일본적 감상주의의 본질이다. [겐지 이야기]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일본인 특유의 정서를 한눈에 보여준다.

  가는 길가에 그 여인의 집이 있었습니다. '거친 매축지(埋築地)의 허물어진 곳에서 달마저 쉬어가는 집에 내가 그냥 지나갈 수는 없지요'라고 하면서 그가 그 집 앞에서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전부터 정을 주고받는 사이여서일까 그 사람은 몹씨 들떠있는 것 같았습니다. 중문 근처의 덧문 밖 툇마루에 앉아서 잠시 동안 달을 쳐다 보더군요. 빛이 바랜 국화가 퍽 아름답게 보이고, 바람에 다투듯 지는 단풍들이 과연 슬픔을 느끼게 하는 정경이었습니다.

이같은 정경 속에 존재하는 사람의 정이나 인정에 다음 장면에서 배어나오는 것 같은 쓸쓸함이나 슬픔이 덧칠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풍경화 속의 인물이 풍경을 닮아가는 것처럼.

  두중장은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겐지가 물었따. "그래서 편지는 무슨 내용이었나요?" 그거요. 별로 중요한 것은 없었습니다. '산에 사는 사람의 집담은 거칠어졌어도 때때로는 정이 담긴 이슬을 뿌려 주세요. 담 위에 피는 패랭이꽃 위에.' 이것을 보고 생각이 나서 여인의 접에 갔는데, 여느 때처럼 맺힌 감정이 없는 태도이긴 했으나, 깊은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거칠어진 집의 뜰 안에 내린 이슬을 보면서 벌레 우는 소리에 지지않으려는 듯 울고 있었습니다. 그 애처러운 모습이 옛이야기에 나오는 사람 같았습니다."

일본 국학의 완성자 가운데 한 사람인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이처럼 정이라고 불리우는 일본인 특유의 정서를 모노노아와레라고 이름 붙였는데, 그가 모노노아와레의 전범으로 내세운 것이 바로 [겐지 이야기]였다. 참고로 덧붙이면 모노노아와레는 마루야마 마사오에 의해 'sadness of things'로 번역되기도 했다.

  다시 말해서 "감동을 받는 것은 바로 사람이 타고난 마고코로(眞心)에 들어맞는 것이며, 감동을 받지 않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은 마치 나무와 돌맹이와도 같다."라고 한 것이야말로 노리나가의 주정주의(主情主義)이며, ... 노리나가의 문학론은 ... 이런 것들은 모두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이므로, 누구나 그런 감정이 일게 될 것이다. 그런 정이 없다면 마치 바위나 나무와도 같은 사람일 것이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그려낼 때, 마치 어린 여자아이처럼 어쩔줄 몰라하며 맹한 부분이 많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여 '마스라오 부리'(호쾌한 남성스러움)의 한층 더 깊은 곳에 있는 심정에서 우타모노가타리의 본질로서의 모노노아와레(sadness of things)를 찾아냈다. ... '노래가 말하고자 하는 것'인 '모노노아와레'는 그대로 신토 그 자체의 본질로까지 오르게 된 것이다.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 정치사상사 연구])

타고난 자연스러움을 따르는 인간의 정이 이처럼 비애의 감정으로 귀결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중국의 작위 대신 일본적 자연을 내세운 국학의 자연주의가 자연의 배후에 존재하는 초인격적인 神을 창조한 사실과 관련이 있다. 타고난 자연스러움을 따르는 일본적인 삶이란 결국 신이 마련한 길(神道)에 순종함으로써 신의 은총을 구하는 삶인 것이다.

[이웃집 토토로]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 같은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정령적인 자연의 세계는 국학적 자연주의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끝없는 감탄사를 자아내게 하는 정령적인 자연은 신의 작위(作爲)를 상징하며,  그 속에서 유영하듯이 살아가는 동심의 인간은 인간의 무작위(無作爲)를 상징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신의 세계에 우연히 발을 들여놓은 인간의 이야기다. 그곳의 음식에 허락없이 손을 대었다가 돼지로 변하는 치히로의 부모는 '저마다의 알맞은 위치'를 지키지 않고 상급의 위계질서에 천방치축 끼여드는 불순종(不順從)으로 인하여 벌을 받으며, 그곳의 위계질서를 지혜롭게 살펴서 적절한 일을 맡는데 성공한 치히로는 '저마다의 알맞은 위치'를 지키는 순종으로 인하여 은총을 받는다.

신이 마련한 길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는 순종을 통해 신의 은총을 구하는 것이랄까. 순종과 은총의 함수관계 속에서 은총을 대가로 순종을 강요당하는 거세된 존재인 일본적  인간상이 그들의 마음에 달콤한 비애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인에게 있어 거세된 순종을 의미하는 無作爲의 자연스러움과 달콤한 비애를 의미하는 모노노아와레는 하나인 것이며, 따라서 조선예술론의 '무작위의 미'와 '비애의 미'도 하나인 것이다. 신을 정점으로 해서 인간 사회의 위계질서로 이어지는 은총과 순종의 함수관계, 이같은 일본 국학의 핵심을 토대로 하여 피어오르는 미가 무작위의 미와 비애의 미인데, 야나가 무네요시는 이같은 위계질서의 끄트머리에 한국인과 한국 예술을 끌어들이고자 한 것이다.

                 금빛 기쁨의 기억 - 한국인의 미의식,  (강영희, 일빛)  p.82-8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송환

김동원의 <송환>은 언뜻 우리 시대의 알레고리처럼 비춰졌다. 우리 시대란 민주화 이후의 시대를 말한다. 우리도, 비전향장기수들도 모두 과거에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나라와 싸워야 했지만, 이제는 스스로 선택한 나라와 싸워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나라와 싸우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다. 왜냐하면 적과 내가 너무 명쾌하게 구분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잔인한 고문을 하고 비인간적인 회유를 했지만 그것이 악랄하면 악랄할수록 나의 의지는 더 강해지고 숭고해졌다. 반면 자신이 선택한 나라와 싸울 때는 - 대개 그 나라와 싸우게 될지 몰랐지만 결국 싸우게 된다 - 적과 나를 구분하는 일이 쉽지 않다.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끼고 그에 저항하지만 헛발질로 끝나기 일수다. 헛발질이 늘어갈수록 스스로 초라해진다. 그래서 더 어렵다. 비전향장기수들이 송환된 이후, 그들의 부고가 심심찮게, 생각보다 빠르게, 많이 전해졌다. 왜일까? 악랄했던 '자유대한'의 억압과 마수도 훌륭히 극복해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빨리 세상을 등졌을까? 헛발질이 너무 많아서? 민주화 이후의 우리는 어떤가? 헛발질을 너무 많이 했다. 헛발질을 너무 한 나머지 민주화 이전의 시대를 흠모하기까지 한다. 헛발질 속에서 잃는 것은 아마 '명징한 의지'일 것이다. 그것이 두려워 어떤 이는 '칼의 끝'이나 '가야금 현의 끝'에서 자명한 숭고함을 찾아헤매기도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