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전문]


-모든 역사는 해석된 과거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고대-중세-근대 시대구분도 유용하지 않습니까?

=유용성의 기준이 노예제-봉건제-자본주의가 돼야 하느냐 하는 것은 서양 중심의 지극히 라틴웨스턴 중심 지역적으로 굉장히 한정된 역사의 패턴이고 그런식의 패턴을 밟았냐 하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과거 우리가 왕조사라고 했던 것(통일신라-고려-조선)을 구태의연한 역사라고 하는데 고-중-근보다 훨씬 나은 개념이라는 거예요, 편견 없이 볼 수 있으니까. 우리가 시대구분이라고 얘기하면 되는데 거기에 해석의 문제가 있단 말예요, 이를테면 생활사적으로 담론을 만들어도 되잖아요. 사회계층변동이라고 얘기한다면 부족사회, 호족사회, 귀족사회 해도 되는 거고, 음식별로 해도 되고, 무한한 가능성이 있고…. 그리고 ‘듀레이션’이란 개념도 있듯이 역사라는 게 반드시 단계적으로 변화하지만은 않는 지속성의 측면에서도 역사를 볼 수 있고…. 그런 담론의 해석의 기준이 될 수 있는 패러다임을 고-중-근으로 절대로 부당하다, 거기에 대해서는 양보할 수 없어요. 그런 언어를 안쓰고도 역사를 얼마든지 쓸 수 있고 해석할 수 있다는 거요. 역사학의 과제입니다. 하다못해 왕조사적 시대구분이라 해도 고중근보다는 낫다. 우리가 신라 혹은 조선 왕조라고 할 때 거기에 편견은 안들어가거든요. 어느 왕조가 다른 어느 왕조보다 유치하다는 것 같은 그런 편견….

-신라, 고려, 조선은 단지 개별국가를 지칭하는 고유명사인데, 그렇게 구분하면 역사의 맥락적 특성이 드러나지 않지 않습니까?

=서양사에서 민족(국가) 개념은 19세기 들어서야 나타나므로 왕조사라든가 민족국가 단위의 역사 쓰기가 근원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왕조사가 훨씬 더 의미가 있어요. 왜냐면 고려, 조선왕조도 500년 역사를 지속했고. 서양은 500년 역사도 못씁니다. 말이 안되는 거지. 그래서 그런 얘기도 편견이라고. 왕조사가 우리에겐 훨씬 의미가 있습니다. 세계사상 우리 역사처럼 왕조의 지속력이 긴 유례가 없고 최소한 고중근보다 낫다 이거야. 왕조사가 낫다는 얘기가 아니야. 왕조사 치워버려야죠, 딴 개념이 있으면 더 좋죠. 예를 들면 고려 호족사회, 조선 양반관료사회라고 분류해도 고대-중세-근대 구분보다는 낫다고. 여러가지 기준이 있다는 거지.

-민족주의가 서구에서 부정적인 양태의 국가주의(파시즘)으로 나타났던 경험을 의식하면서 민족주의를 경계하는 경향도 있는데?

=민족과 국가라는 개념이 등치되는 현상도 19세기만 해도 세계사에서 없거든요. 과거 유럽사회에서 국가와 민족 개념은 일치하지 않아요. 민족국가라는 엄밀한 개념에서는, 한국민족도 반만년 유지해왔다는 것도 있을 수 없어. 서양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러나 단군신화 체계의 상징적 의미가 국가 개념이 민족단위로 뚜렷해지면서 그 필요성이 나오기 시작하는 거거든요. 우리는 그런 민족국가 개념의 형성을 고려 말로 본다 하더라도 굉장히 이른 편이라고. 그래서 필연적으로 민족주의적 역사인식이 다른 것보다 더 정당성이 있고 그런 만큼 위험성이 큽니다. 우리나라 역사는 아주 특수한 케이스라고. 그러나 나는 절대로 우리역사를 민족과 국가를 등치시키는 의미에서 내셔널리즘은 생각해 본 적 없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그런 류의 담론은 전부가 일제시대 때 일본 우익을 통해 들어온 거예요. 우리는 그런 생각이 없었어요. 조선 사람들도 우리가 민족국가라는 개념보다 소중화(小中華)라든가 유교적 도덕을 지켜야 한다는 이런 거지, 민족국가를 지킨다는 개념에서 구한말 척양세력들이 외세 배척했던 게 아닙니다. 그니까 지금 아주 쇼비니스틱한(국수주의적인) 근세적 내셔녈리즘은 일본X들이 대동아전쟁을 하기 위해 만든 우익적 근세개념이 우리나라에 전이된 현상이라고. 우리나라 모든 우익은 전부 일본 아류야, 100%. 우리는 그런 식으로 역사를 안봤어요.

-일본에서 우익개념이 들어온 것도 있지만 근대 학문도 일본을 통해 들어왔고….

=(말 끊으면서)Marx도 그래요, 나는 ‘맑스’를 쓴다고. 근데 우리나라에서 마르크스라고 안쓰면 이상하게 생각해. 일본은 ‘ㄹ’‘ㄱ’ 둘을 겹칠 수 있는 발음이 없어요. 그래서 마르크스라고 쓰는데 이건 세계적으로 없어요. 이게 아주 상징적인 이야기라고.

-어쨌든 우익 뿐 아니라 근대학문, 특히 80년대 과학적 사회주의도 상당수가 일본 번역서로 들어왔고, 서구적 역사해석도 일본을 한 번 거쳐 들어온 측면이 있습니다.

=20세기 한국의 진보세력이 전부 레프트를 빌렸단 말야. 좌익적 사고체계를 빌렸다고. 그런 사람들이 역사를 맑시즘 도식으로 봐야 하기 때문에 노예제 봉건제를 가장 철저하게 주장해요. 그게 없으면 정치사를 못쓴다고 생각하니까. 물론 맑시스트 경제사관 논리가 여태까지 사가들이 안봤던 경제사적 하부구조 토대를 밝힌다는 의미에서는 소중해요. 그건 인정해야 됩니다. 근데 그 하부구조 토대를 밝힌다고 하는 면이 왜 반드시 봉건제-자본제의 틀 속에서만 이뤄져야 하느냐, 응? 일본의 왜색좌파들은 역사를 기본적으로 서양의 계몽주의가 인류의 근대를 독점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지금. 그 틀 속에서 맑시즘이란 진보주의도 성립하고 있기 때문에, 맑스도 계몽주의 말단에 불과하단 말야. 이게 우리 국학적 개념에서는 비극이란 말야.(분위기 서서히 달아올라)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이나 내재적 발전론과 같은, 아시아적 특수성을 설명하려는 개념도 있는데요.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든, 엥겔스의 사유재산 논의(엥겔스가 쓴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을 가리키는 듯)까지 다 포괄해서 그런 언어를 가지고 역사를 보지 말자는 거야. 부곡제면 부곡제, 굴품제면 골품제, 그것 같고 얘기하자 이거야. 그게 노예제냐 아니냐 그런 것 가지고 고민하지 말자는 거야. 서구적 담론에 말려들어가지 말고 우리 역사 개념만 갖고 얘기하자고.(말엽적인 얘기로 가면 안된다며 다소 흥분). 왜 우리 역사가 근대를 꼭 필요로 해야만 하고 근대를 거쳐야먄 하느냐, 근대라는 이름 없이도, 예컨대 우리는 과학을 좋아해서 받아들였고. (갑자기 격앙)무슨 아시아적 생산양식, 노예제 이런 것 몰라도 우리 잘 할 수 있잖아, 공부 잘 한다고, 응? 사회과학이고 뭐고 논의가 잘못돼 있다고, 논의할 필요가 없는 것을 자꾸만 논의한단 말예요. 우리가 논의해야 할 것은 서구적 근대의 성과물 중 우리가 건질 수 있는 걸 생각해보자는 거야, 과학이라든가, 자본주의적 부의 증대방식의 효율성이라든가, 의회민주주의라든가. 훌륭한 예술 같은 거, 난 서양의 종교는 배울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근대냐 아니냐”, “근대의 기점이 어디냐” 하는 게 전혀 무의미합니다. 우리 역사 개념은 “주자학이 우리 민족에게, 우리 오늘의 삶에 의미를 줄 수 있는 게 뭐냐” 이런 걸 토론하자는 겁니다. 근대적 체계로 말한다면, 우리가 주자학 도입해서 만들어 놓은 중앙관료체제는 서유럽이 봉건제에서 탈피해서 19세기에서부터나 생각하기 시작한 뷰로크라시와 같아요. 막스 베버가 말하는 뷰로크라시를 이미 우리는 15세기에 충분히 논의했어요. 막스베버의 사회학만이 근대학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런 말 들으면 조금도 얘기 안된다고. “근대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 역사의 유니크한(고유한) 정체성을 서구적 역사패턴의 전제가 없이 봐야하고, 오늘의 우리 현실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성과물을 우리 역사로부터 건져내야 한다는 얘기지.

-엉뚱한 질문일 수 있는데, 흔히 ‘역사가 발전한다’는 말을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 안해요. 근대담론은 역사발전(프로그레스)이라고 하는 진보사관의 오류의 결과입니다. 그 진보사관은 기독교 섭리사관에서 온 겁니다. 프로비던스(providence)라고 하지요? 섭리사관은 쉽게 말하면 창세기와 요한계시록 구조예요. 역사를 직선적으로 미래를 향해서…. 예를 들어 말이죠, 당장 이렇게 생각해보자고. 지금 우리가 서기를 쓰는데 이것만해도 우리에게 엄청나게 불리한 역사죠. 서기로 고침으로 해서 역사가 우리 머리 속에서 주르르륵 일직선으로 나열되는 겁니다. 옛날에 갑자(60년 주기)로만 역사를 계산했던 사람들의 역사의식은 전혀 다를 겁니다. 그니까 역사라는 게 유니크한 패턴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거기에 진보라는 말은 쓸 수 없다고 봐요.

그런데 여기서 궁금할 거예요. 문제가 생긴다고. 그러면 역사라는 게 진보 안하면 무엇 때문에 사는가, 미래가 보장이 안되는데…. 이게 중요한 건데, 진보란 말은 부분적으로 쓸 수 있습니다. 진보라는 말은 명확한 가치기준을 만들어놨을 때, 그 기준 아래에서 일어난 현상들을 묶는 개념으로 쓸 수 있어요, 예를 들면 이 녹음기의 역사, 어떻게 작은 용량에 더 많은 콘텐츠를 담고 에너지 적게 효율적으로 쓰는 그런 기준을 세운다면 녹음기의 역사는 진보가 가능하잖아요.

-‘발달’이나 ‘개선’이란 개념과 ‘진보’라는 개념은 구분돼야 하는 것 아닙니까?

=발달이란 말은 진보란 말은 거의 같은 개념으로 쓰고 있는데, 역사가 반드시 과거보다 더 나아진다는 거야, 가치관적으로. 그런데 녹음기가 발달이 되면 남의 것 청취하고 나쁜 짓 하기 쉬워지고 그걸로 인해 나빠지는 부분이 많이 생긴단 말야 또. 이게 인간세상이란 말예요. 그런데 음양론적, 태극론적 사유 속에서는 전체가 발달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개념이란 말야. 근데 프로그레스란 서양의 개념은 인류 전체가 발달한다는 거야~, 지금. 역사 전체, 인류사 전체가 발달이 된다는 거야. 이런 사기가 어딨냐 이거야. 기술혁명 과정에서 진보란 말 쓸 수 있지요, 근데 인류역사에서 그 말은 없습니다. 그니까 그 기준을 헤겔도 제시했어요, 변증법적 아우프헤벤(지양)이라고 그러죠. 헤겔이 정확하게 <역사철학>에서 정확하게 제시한 게 있어요. 그게 뭐냐면 ‘프라이하이트(자유)의 증대’라고. 인간의 자유가 소수독점 시대에서 다수 공유시대로 나아간다. 그런데 얼핏 보면 그 말이 굉장히 그럴 듯 하지만 나는 “천만에!”라 이거죠. 과거 고대사로 올라가면 자유로운 인간이 지금보다 더 많았을 수도 있다는 얘기지. 지금 우리가 물질적 법적 보장은 나아졌을 수 있지만, 현재 인간이 과연 자유로운 인간이냐….

그러니까 역사라는 걸 그렇게 프로그레스란 개념으로 볼 적에, 이건 넌센스다, 서양사람들이 말하는 진보라는 개념은.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역사를 굉장히 오류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겁니다. 우리 역사가 전체적으로 어떤 목적을 향해 나아가야 되기 때문에 이 역사를 살 가치가 있다기보다는, 역사적 과제라는 것이 우리의 당장의 삶 속에서 주어지는, 내재적으로 주어지는 삶의 이유가 있을 거란 얘기야. 오늘날 우리가 스트러글(투쟁)해야 할 문제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을 오늘 우리 삶 속에서 발견해야지, 역사는 진보하고 있고 그 진보의 기준에 따라 인류의 역사가 가야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담론 자체가 픽션(허구)라는 얘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역사의 각각의 국면에서 주어지는 삶의 이유를 진보사관의 전략과 전술에서 찾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진보사관의 강점이 바로 지금 말한 데 있거든요. 역사를, 사람을 모빌라이징(조직, 동원) 하는데 무한한 좋은 에너지와 구심점을 제공하거든요. 서양사람들이 인류역사를 드라이브(주도)해온 그런 거죠. 그런데 그런 문제와 관련지어서, 뭐냐면 현재 우리가 스트러글하고 있는 문제도 꼭 어떠한 제도적 민주사회가 오고 점점 풀려나가는 것이 좋다는 그런 거는 분명히 있는데, 그런 것도 가치기준을 잘 생각해봐야 한다는 거야. 과연 우리의 미래에서 어떤 틀이 가장 좋을 것이냐는 문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지. 노동계가 주장한다고 해서 진보된 방향으로 가는 거냐, 이건 문제가 있다는 거야. 그런 것보다는, 부패한 정치는 나쁜 거니까 그럼 반부패하자, 이러면 쉽잖아요. 그러니까 나는, 역사라는 것 전체를 묶어낼 수 있는 이상이라든가 모든 사람이 굴복해야 하는 진보의 이상은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 현재도 안나온다는 거야. 나는 역사를 그렇게 드라이브해서 전체를 몰고 가는 것은 다 사기꾼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5일 방송강연에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언급하면서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가장 잘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동학에도 가장 중요한 게 개벽이론, 음양의 세계 이런 게 있다고. 그게 유치한 것처럼 보이지만 서양의 발전도식적 사관보다 훨씬 더 나은 사관이라는거야. 맹자가 일치일란(一治一亂)이라고 그랬어요. 한번 다스렸다가 한번 어지러운 것. 반복적으로 뵈는데 그게 반복의 역사가 아니라는 거죠. 동학에서 개벽이란 개념이라든가, 김일부의 ‘저녁’ 개념 같은 것도 보면, 그 사람들은 이제 그 어둠의 세계가 빛이 되어 온다라든가, 선천개벽세가 지났다가 이제 후천개벽세가 온다, 이제 그러면 다시 개벽이다. 그런 얘기는 역사를 단계적으로 보는 게 아니라 음양론적으로 보는 거예요. 여태까지 우리가, 어두웠던 측면을 떨쳐버리고 밝은 세상을 만들자, 이런 것만 해도 역사의 위대한 비전이 된다는 거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현하느냐 하는 거는, 우리가 우리 민족사를 볼 때 왕정과 민주라는 두 측면만 가지고도 충분히 역사기술이 가능하다 이거야. 고조선에서부터 최근세사까지 기본적으로 왕정 패러다임의 역사다 이거지. 왕정의 패러다임을 민주라는 패러다임으로 바꿔논 게 개벽이예요. 우리 민족이 말하는 개벽론적 개념을 나는 왕정과 민주라는 음양론적 개념으로 쓴다고. 그 왕정적 요소와 민주적 요소는 이게 단계적으로 딱 되는 게 아니예요. 왕정이나 민주는 음양론적 구조로 항상 같이 있는거야. 고조선시대에도 민주가 있었어요. 예를 들면, 활빈당, 임꺽정은 민주에 가까운 걸 꺼라고. 과거는 기본적으로 왕정적 요소가 지배하는 패러다임이 강했던 시대라고. 태극의 마크가 그렇게 생겼듯이 이제는 민주적 패러다임으로 바뀌어가는 거라고, 그러면 개벽이라고 본단 말이야. 그 요소의 많고 적음이라든가 이런 걸로 구분이 되는 거죠. 민주라고 하는 이 패러다임의 변화가 굉장히 본질적인 패러다임의 변화기 때문에 20세기는 거의 완충적인 역할 밖에는 하지 못한 거요. 1945년 이래로 오늘날까지 왕정의 패러다임이 계속돼왔다는 거지, 나는. 그것이 비로소 이제 와서 민주라는 패러다임으로 바뀌는 데 동아시아 역사에서 어느 나라도 그런 근원적인 패러다임의 변화를 동아시아에서 보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 우리가 가장 앞서간다는 거예요.

-진보적 사관은 역사발전을 확신하므로 기본적으로 낙관적 세계관일 수 밖에 없는데, 도올은 진보적 사관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낙관적이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게 중요한 게 뭐냐면, 그 낙관이라는 게 역사의 진보적 비전에 대한 낙관이 아니라 유학의 경우에는 인간은 본성적으로 선한 존재라고 하는, 맹자의 성선설적인 낙관론, 인간은 선한 존재이므로 인간이 만들어가려고 하는 사회는 선한 사회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선해야 한다는 거죠. 그러니까 낙관론이라는 게 굉장히 중요한 건데, 그게 자기 최면일지도 몰라요. 과거로부터 유교교육이라고 하는 게 일종의 자기최면같은 거거든요. 맹자가 이런 말을 했거든요.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이 없다는 거야, 보통사람들은. 돈이 없으면 항상스러운 마음이 없어. 문제는, 지식인은, 최소한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은 항산이 없이도 항심이 있어야만 한다. 돈이 없어도, 배가 고파도 도덕적 양심은 지킬 수 있는 사람이라야만 그 사회의 리더 자격이 있다는 거야.

-그게 지식인, 리더에게 요구되는 덕목일지 모르겠으나, 흔히 얘기할 때 역사는 거시적으로 민중이 이끌어가는 것이라는데….

=민중의 역사는 항산이 보장이 안되면 개똥이라고. 민중의 역사 이런 얘기는 맑시스트들이 막연하게 하는 얘기예요. 서구는 유교처럼 민중에 대한 존중의 역사가 없어요. 그러나 민심이라는 건 굉장히 본능적인 거예요.

-항심은 어떤 덕목이자 ‘당위’입니다. 그러나 ‘당위’를 역사 해석의 도구나 역사의 동력으로 볼 수는 없는 것 아닌가요?

=(다시 약간 격앙)그렇게 들어가면, 논리적으로 비슷한 얘기가 될 수 있는데, 서양의 담론에서 프로그레스도 ‘당위’거든요, ‘사실’이 아니란 말야. 내가 분노하는 것은 사실체계가 아닌 것을 사실체계인 것처럼, 그리고 동양은 도덕적 당위만을 강조하는 엉터리 전근대적 역사인 것처럼, 이게 엉터리란 말야. 똑같은 얘긴데. 걔들은 무슨 객관적인 것 같은 큰 걸개그림 딱 걸어논 것 같은 거고, 우리는 그 걸개그림을 마음 속에 몰래몰래 숨겨둔 것 같은 거고, 이런 느낌이 온단 말야. 그 질문 정확하게 했는데, 어치피 역사라는 게 픽션이란 말야. 미래는 체험된 사태가 아니기 때문에 모든 미래는 ‘구성된 미래’일 수밖에 없단 말예요. “밝은 미래를 향해 나갑시다”, 이게 다 사기라고, 미래란 모르는 건데.

동양적 사유세계에서는 미래를 강조한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우리가 도덕적으로 살고 가장 건강한 사회를 만들려고 하는 도덕적 프로그램이 DNA안에 내재돼 있다는 얘기거든. 그런데 그런 도덕프로그램이 과연 디엔에이에 있는냐, 이게 좀 어려운 얘기에요, 이건 심성론까지 들어가게 되는 건데. 역사라는 게 최소한 ‘인의예지’라고 하는 도덕적 프로그램만을 강조한 역사가 훨씬 더 여러 모로 오류가 적은 역사일 수 있지 않느냐 이거야. 미리 컨디션(조건, 전제)만 말하지 프로그램의 내용을 얘기 안해요. 그래서 오류가 적을 수 있고 항상 플렉시빌리티(탄력성)가 있고 프로그램 자체를 변경하는 게 가능해진단 말야. 역사를 프로그램화하는 것은 ‘역사의 목표를 역사 밖에 둔다’ 는 거거든, 서양의 역사는, 모든 직선 사관은 역사의 목표를 역사 밖에 두는 오류를 범한다구요. 낙관론이라고 하는 것의 가장 기초적인 것은 픽티셔스, 그러니까 가공적인 건데, 그런 미래라고 한다면 최소한 사는 동안에는 낙관적이지 않으면 안되는 의무가 있다는 거야. 그 의무를 저버리면 유자의 자격이 없어요. 맹자의 대장부론이거든. 최소한 대장부는 그러한 역사의 도덕적 낙관적인 믿음을 견지해서 그것을 철저하게 구현해주는 것만으로 밥을 먹고 살아라 이거야, 그 대신 그 사회가 공짜로 먹여준다 이거야. 그게 대장부라고 하는, 맹자의 아주 결정적인 얘기거든. 그런 논리가 나한테는 있는 거죠.

-민주주의 언급과 낙관론 언급을 통합해서 애기해보면….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거 제도가 있느냐 없느냐 이거라고, 그런데 선거제도의 출현이 주로 영국의 의회민주주의 역사를 통해서 7,800년 거쳐서 오늘날까지 온 거 아녜요? 근데 그건 서양 역사에서는 귀족사회의 왕권 견제라고, 조선왕조도 철저하게 양반귀족이 왕권을 제약시켜온 역사라고, 왕권 제약은 왕조사를 보면 아주 치열했어요. 그나마 그런 치열성 때문에 조선 왕조가 500년 유지했다고. 한국 민주주의 근본은, 과거부터 왕권을 제약한다는 것은, 왕이 민심을 듣지 못하면 혁명의 가능성, 그 정당성까지 열어논 역사란 말예요. 정도전의 <경국대전>에 보면 명문화돼있다고. 그니까 우리 민족은 왕조사라 해도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도덕적 기반을 이미 조선 왕조로부터 계승했다는 거예요.

거기에 더해서, 해방 이후 선거제도를 도입한 겁니다. 이 선거제도를 동아시아 역사에서는 가장 빨리 정착을 시켰다고, 우리가. 일본도 우리만한 선거가 이뤄지지 않고 있고. 서양 민주주의 헌정적인 질서감이라는 게 우리는 이미 유교에서부터 몸에 배어 있었고 그것을 제도적으로 정착시키는 것도 가장 선두를 달리고 있다는 거야. 의회민주주의 역사를 본다면 영국이 700년 걸린 것을 우리는 50년만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도 있는 거고. 그렇게 본다면 근대라는 개념이 무의미해진다는 거야. 근대라는 성과는 반드시 그런 제도적 근대가 낳은 산물이 있어야 하는 건데, 우리는 그런 걸 요 몇십년 내에 다 만들었다고 한다면 꼭 조선왕조사에서 근대를 찾아야 할 이유가 있느냐 하는 복잡한 문제가 생긴단 말야. 그런 본질적인 질문을 계속 해보라고, 나도 정리 좀 해보게.(인터뷰가 시작된지 1시간이 넘어섰다. 도올의 얼굴에서 조금 피곤한 기색이 엿보였으나 여전히 정열적인 답변을 이어가고 있었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시비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시각과 반응도 학계에서 조금씩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중국 사람들은 패권주의로 나가고 있습니다. 서구 자본주의 받아들이는 양식이 월드스타예요. 걔들 동북공정은 남북의 통일에 대비하는 방식입니다. 미리 고토 문제에 쐐기를 박으려는 거지요. 그런데 나는, 통일신라 이후에는 비교적 단일국가적 개념의 역사기술방식이 맞아들어가지만, 그 이전 삼국시대는 민족국가 개념으로는 접근이 안되는 역사란 말예요. 토인비가 만든 문화사 개념하고 똑같아요. 삼국시대 이전으로 올라가면 문화사적 접근을 해야 합니다. 요동반도와 일본 큐수지방을 연결하는 하나의 문화권, 또 고구려는 북부-만주로 하는 문화권, 이런 문화권들이 있고 그 안에 또 세부적인 문화권이 또 있단 말예요.

우리도 그런 점에서 역사를 우리민족 단위로만 쓸 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문화사적 개념으로 우리 고대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생각이 나한테는 옛날부터 있었어요. 이런 얘기가 안먹혀들어갔는데. 그거를 빨리 보편적 문화사로 우리 민족이 정리를 해야 한다는 거야. 예컨대, <일본서기>나 중국자료를 우리 고대사 자료로도 쓰잔 말이야. 폭넓은 세계사적 시각에서 우리 고구려사도 다시 써야 한다고 보고, 그러나 그것이 우리 영토의 주장은 아닐꺼고. 문제는 중국이 어떤 주장을 하든지간에 거기에 대해 우리가 제재를 하기는 어렵죠. 그런 역사를 얼마나 폭넓게 보고 빨리 일본 식민사관을 탈피해서 그 경제·지역사회에서 우리역사를 되찾아 놓느냐 하는 것은 시급한 문제죠. 그러나 민족국가로는 아니다 이거야.

-중국은 자국영토 내 역사는 소수민족사도 변방사라고 해서 자국사로 주장하는데, 민족국가 단위로 설명이 되지 않는 공유된 문화가 있다고 하더라도 고구려 역사의 정체성, 우리 역사의 뿌리찾기 문제는 여전히 있는 것 아닙니까?

=그 정체성 자체를 민족국가 개념으로 접근하기는 어려운 거고 , 폭넓은 시각에서 얼마나 정확하게 사료를 동원해서 학생들을 교육시키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영토분쟁은 역사문제는 아니고 다른 차원의 문제고. 과거 식민사관에 얽매여 고구려사를 보던 정통우익사학자들이, 지금 우익들은 만주 찾자고 그러는데, 새로운 자료 무시하다가 이제 와서 난리가 났다 그러는 거란 말이야. <화랑세기>가 위서라는데 그게 어떻게 위서예요. (주류 역사학계가) 좁은 시각에서 역사를 써왔단 말예요. 빨리 국력을 신장하는 방향으로 해야지, 앞으로 다가올 세계에 대한 이해가 없단 말예요.

-고구려사왜곡공대위나 사학계가 이 문제를 영토 문제로 인식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고구려사를 우리의 역사로 폭넓게 우리의 문화로 쓰는 작업이 시급한 문제요. 보다 더 정확한 자료를 수집하고. 광개토대왕비 해석도 우리가 선취해야지, 재일교포 사학자 이진희씨가 광개토왕비를 해석하고 그랬던 건데. 비문을 재해석하든지 간에 확고한 정설로 만들어놓고 접근해 들어가야 하는데 일본사람들이 축소 왜곡시켜 놓은 그 범위, 민족국가 역사 안에서 우리 역사를 보려고 하는 게 문제예요.

-최근 국내에서도 미시사적 접근 방법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것도 주제별로 보는 건데, 그런 것들이 피차간에 거시적 거대담론의 영향이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거대담론의 좋은 영향을 받아야 하고 그것이 반영되고 그러면서 역사가 넓어져야 하는데, 거기에서 제일 먼저 깨져야 하는게 고대-중세-근대 도식이란 말예요. 근대 복식만 좋은 거고 고대 복식 유치한 걸로 보면, 고구려 복식은 고대복식이예요? 그게 어떻게 말이 돼? 원피스 시대, 투피스 시대, 쓰피피스 시대, 뭐 이런 식으로 써야지.(웃음)

-고대-중세-근대 개념이 단순한 시대구분이 아니라 가치가 개입되어 있다는 뜻인가?

=그럼! 개입되지 않을 수 없지. 그런데 불행하게도 모두가 그걸 의식을 못하고 휘말린다는 게 비극이라는 거야. 실학도 마찬가지요. 일본 메이지 유신 만들었던 실학 가지고 우리 경우에도 실학이란 말 쓰지 말고 실사구시학풍 이렇게 쓰면 문제 없잖아요.

-최근 패션쇼 구경하셨던 장면이 인터넷에 돌아다닙니다.(좌중 폭소) 관심이 없으신 분야가 없는데, 지금까지 텔레비전 강연에서 주로 유교사상과 노장사상을 다루다가 이제 (한)국학으로 주제를 돌렸는데 그 배경이나 이유가 있습니까?

=나는 그게 필연이예요, 필연. 원래 대학시절에 의식 있으면 다 좌파거든. 근데 난 좌파를 거부한 거거든. 뭔가 새로운 학문을 해야겠는데, 그러러면 국학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이상은 선생이라고 고려대 철학과에 대단한 석학이 계셨어요. 당시 북경대 철학과에서 최고수재란 말을 들었으니까. 그런 대학자가 국학을 강조하셨다고. 그 때 생각해보니까 국학만 하면 ‘전문가 바보’(한 분야만 좁은 시각으로 통달한 사람을 일컫는 듯)가 된다 이거야. 국학을 하려면 우선 한문을 제대로 읽어야 되니까 중국 고전에 달통하지 않으면 안된다 해서 중국 철학에 들어갔고, 그때 중국철학은 이미 서양철학과 세계적인 교류를 하고 있었단 말이죠. 그래서 서양철학 제대로 안하면 중국철학에서 큰 소리 못친다, 그래서 자꾸 영역을 확대하다보니까 철학에서 과학까지 나오게 됐어요. 그래서 “모든 인간의 삶의 체험은 다 나의 전공이다”, 이래가면서 30년 세월이 흘렀어요. 그런데 나는 원래 국학을 하려고 했어요. 중국철학사를 쓰려고도 했어요. 근데 그거 쓰면 뭐하냐 이거야. 그 여력이 있으면 한국철학사를 써야 된다는 거고.

나는 유불도를 다 전문적으로 봤고, 거기에 더해 서양철학과 서양역사를 봤기 때문에 그거를 가지고 이제 내 남은 인생은 국학 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제 통일담론으로 가는 거란 말야. 통일의 시대에 국체가 서지 않으면 통일을 맞이할 수 없죠, 우리가. 그러니까 앞으로는 온 국민이 국학으로 힘을 모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고 우리 역사의 가치를 알고 우리 역사의 새로운 주체를 세워서 우리 역사의 새로운 헌법질서를 만들어야 한다. 그 헌법은 어떻게 쓰느냐, 한국철학이 없으면 못쓰죠. 국학이 우선 완벽하게 발전해서 콘센서스(사회적 합의)를 이뤄야죠. 이런 것이 거시적인 준비란 말예요.

20세기는 우리가 보편적 가치를 추구했던 시기지만, 21세기는 보편성보다는 주체성·국부성·특수성 이런 거를 더 추구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왜? 우리에게는 보편성 기반이 마련돼 있으므로. 나의 개인적 체험이나 우리 민족의 체험이 비슷해요. 영화도 헐리우드를 이기는 유일한 나라가 되어가도 있고. 그런데 학문도 이겨야 된다. 그러러면 고대-중세-근대가 파기돼야 된다 이거야. 이거 파기하지 않으면 절대 서양 역사 못이깁니다. 한국영화가 뛰어나게 된 이유는 그게 헐리우드 패턴에 안잡혀요, 엉~뚱하다고. 예측불가능하다 이거야. 고대-중세-근대 도식은 헐리우드 영화처럼 빤히 끝이 보인다고. 그게 아직도 역사학의 대 기본가설인 것처럼 생각하는데 너무 익숙해있단 말야.

-학계에서 우리 학문의 대외종속성이 심각하다는 인식이 커지고 있고 자생학문의 움직임들도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한국학이 발전하려면 고전번역에 박사학위를 인정해야 합니다. 각 대학에서 고전번역문을 박사학위 논문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서구 대학은 다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서양에서 나오는 중요 고전번역이 대학교 학위논문입니다. 국학의 기본이 서려면 국학자들이 앞으로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자료로 번역하는 것만도 몇십년이 걸려요. 주역에 대한 논문은 십여편이 있어. 근데 주역사전은 없어. 이건 사기예요. 우리가 한 30년만 고전번역에 매달리면 국학 제대로 될 거야. 북한에서 조선왕조실록 완역한 것은 정말 대단한 작업이예요. 정신문화연구원에서 나온 민족문화대백과, 그거 좀 문제가 있긴 하지만 칭찬해줘야 합니다. 국가가 벤처투자 100분의1만 투자해도 인재들 다 끌어모을 수 있습니다. 그런 문화적 마인드…. 문화는 돈이 안들어요, 안목만 있으면 작은 투자예요, 현대사회에서. 국학자료들이 다 번역되는데 돈이 별로 안들어요, 그런데 국가가 그거 지원 안하잖아요. 대학까지 총동원해서 하면 우리나라의 국학이 섭니다. 그러면 우리나라가 얼마나 스케일이 달라지는데요, 당∼당해지고.

-최근 한국학을 전공하는 한 미국 교수의 논문을 봤습니다. 한국에서 민족(의식)이란 개념이 언제 형성됐는가 하는 건데, 지금 우리학계 통설은 일제 내지는 구한말 계몽기 정도로 잡는데 그 학자는 <임진록> 구전본을 텍스트로 삼아서 한국 민중의 민족의식이 조선시대에도 있었다는 겁니다. 학계통설을 반박하는 건데요, 동의 여부를 떠나서 왜 이런 주장들이 우리 학자들이 아닌 외국학자들에게서 나와야 하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도 어떤 의미로 본다면 외국학자들처럼 역사를 밖에서 보는 데 익숙해진 거야. (외국)언어를 일찍 익히고 이러면서. 평상적인 국사학자들이 자라나온 과정을 나는 전혀 안거친 거거든. 그러니까 항상 자유롭게, 전체적으로 볼 수 있고, 아웃사이더 입장에서 보는 거지. 학풍에 구애받지 않고. 이게 결정적인 거야. 내가 양심선언하고 나왔던 이후에 고려대 다시 돌아간다고 했을 때 나를 받아줬으면 내가 거기 딱 엮이는거야, 그런데 내가 고려대 돌아가고 안돌아가고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학풍이 끊어진 거야. 그러면서 나는 자유로운 사상가가 된 거야. 대학에서는 제자들이 자기 스승을 비판하지 못해요. 누구라도 글 쓰는데 문제가 좀 있는 부분이 있을 수 있거든, 그런 건 고치면 되는데. 그래서 글에 모순이 많으면 과감하게 고치고 뺄 건 빼고, 왜, 역사는 변하는 거니까.

내 글에도 상당히 문제가 있어요. 과거 그 시점에 나의 의식이 강하게 반영됐기 때문에. 지금 <도올문집>을 100권 분량으로 정리하고 있는데, 앞으로 될 수 있는대로 그런 것들도 정비를 하려고 그래요. 앞으로 영구하게 후학들이 전체적 비전 속에서 볼 수 있도록. 그런 면에서 어떻게 정석을 쌓아가느냐 이런 걸 심어주려고 그러거든, 이제는. 큰 시대적 의식이라든가 이런 거는 많은 후학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거고. (기자는 이 대목에서 도올 특유의 당당함과 자신감과의 이면에 숨겨진 어떤 고독감 같은 것이 배어나온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외적 발언이나 투쟁은 전혀 안하겠다는 뜻인가요?

=그게 아니라, 내 소신에 따른 어떤 영구한 초석을, 내 나름대로 시스템을 놓아가야지, 국부적인 문제에 너무 휘말리면 내 인생에 에너지가 낭비되니까. 가급적 마이너한 언어들은 트리밍을 할(다듬을) 필요가 있겟다 하는 생각이 들죠. 그래서 이제 그 방송강의도 고민이 많은데, 한국사회라는 게 엄청난 갈등이 있더라고. 국학에 덤비려고 하니까 문중도 걸리고 종교도 걸리고, 그나마 나 정도의 자유로운 처지가 있기 때문에 하는 거라고.

이제 국학을 총체적으로 각 사상가들의 입장에서 보겠다, 그렇게 하고. 될 수 있는대로 정제된 패러다임을 만들어가야 하는데, 그러면 ‘고대-중세-근대’ 도식을 깨고 나서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 역사를 서술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내 마음속에 뚜렷하게 정해진 건 없어요. 그걸 이제 찾아가는 과정에 있죠. 과연 어떤 방식으로 역사를 보는 게 좋겠느냐, 분류방식이라든가, 기준이라든가, 개념이라든가, 이런 거를 어떻게 새롭게 정립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이제 고민해 들어가야 하는데, 최소한 고대-중세-근대의 역사, 서양에서 제기한 역사학적 개념에 의존하지 않는, 생동하는 역사를 쓸 수 있을 겁니다. 역사라고 하는 거는 현대인들에게 얼마만큼 공감이 될 수 있느냐가 중요하거든요. 서구적 개념을 안쓰더라도 우리 삶의 문제를 중심으로 우리 역사를 기술하면 엄청난 공감대 요소를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새로운 패러다임의 구체적 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원칙이나 방향은 어떤 것입니까?

=지금 현재는 1차 목표로, 조선역사 전체를 쓰기는 버겁고, 정도전을 기점으로 해서 이제마에 이르기까지 조선사상사 하나만이라도 뭔가 아주 색다르게, 유교라고 하는 하나의 주제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중심으로 해서 고-중-근 개념이 배제된, 유교 이념의 역사를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주리론·주기론·당쟁과의 관계, 이런 함수를 다 계산해서 그들의 사상의 내용과 그들의 정치적 현실과 어떻게 교섭해가면서 조선왕조 500년이 지속됐는가, 거기에 대한 결정적 담론을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이번 문화방송 특강에서도 예정하고 있는 것입니까?

=6개월인데 너무 짧으니까, 그나마 이런 게 주어진다는 게 대단한 건데, 또 어떻게 보면 너무 시간이 적단 말야. 이게 비극인데, 시청율 같은 것 의식하지 않고 편안하고 깊이 있게 강의하는 게 소원이고.

그는 이 즈음에서 100권 발간을 예정하고 있다는 <도올문집>을 소개했다.

=첫 권 <청계천 이야기>가 최근 나왔고, 2권 <독기학설> 수정판, 3권 <혜강 최한기와 유교>, 4권 <삼봉 정도전의 건국철학>이 다음 주에 나와요. 이게 나오면 사람들이 감을 잡기 시작할 거야, 나는 상당히 좋은 책이라고 자부합니다. 한 500매 분량인데. 또 5권이 이제만의 <동의수세보원>, 그 다음에 <동경대전>.

-100권에 아우르는 문집들은 모두 한국학입니까?

=그동안 썼던 것들도 있고 또 새로 쓸 것도 있고. 주로 국학분야가 많지. 10년 정도면 충분히 완성돼요, 그러면 <한국철학사> <한국사상사>라는 이름의 책, 세계적인 저술을 하려고 해요. 책임 있는 한국사상사를 완성하는 겁니다. 대개 뭐 철학사라고 하면 이론적인데만 국한되는데 사상사라고 하면 여러 분야를 다 섭렵해 쓴다는 거지.

-그야말로 다방면을 아울렀던 학문과 삶의 여정의 목적지랄까 종착점이 국학으로 모아지는 걸로 봐도 되는 겁니까?

=100프로. 그렇게 봐도 되는 게 아니라 100프로 거기로 가는 거고, 한의학도 내가 그것을 위해 했던 거고. (신중한 분위기, 도올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근데 나는 어떠한 그… (잠시 뜸을 들이다가) 내 나름대로 이론적 패러다임을 만들어보려고 애를 썼는데, 그것이 지금도 포기하고 있지 않지만, (다시 한동안 뜸을 들이다가) 내가 생각하기에는… 사상사적 작업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이론서가 칸트 시대에는 칸트 철학이 대단한 의미를 가졌지만, 앞으로 21세기…, 어떤 특수한 형이상학적 체계가 의미를 갖는 시대가 올까 하는 회의감도 있고…. 여러가지 그런 고민이 있는 거죠. 머리 속에 구상중입니다. 그런데 사상사는 리얼한 거니까. 내 지식의 범위를 넓히고. 사상사적 작업의 성과를 가지고 죽기 전에 기철학을 하나 쓰든가 그런 스타일이 되지 않을까, 내 인생이.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죠. 그러니까는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죠(웃음).

-건강관리는 어떻게? 수련 같은 것 하십니까?

=수련도 하고, 내 기철학적 이론에 따라 만든 수련법도 있고. 사람이 수련 안하면 건강 유지 못하니까. 음식, 사람이 먹는다는 게 제일 중요한 거예요, 먹는 거, 자는거, 그리고 섹스. 그런 식색지성의 문제가 인간에게 중요한 건데…. 서양의 근대담론의 가장 큰 오류 중 하나가 모든 걸 이성 중심으로 생각을 한거예요. 그런데 이성이라고 하는 거는 인간의 총체에서 아주 작은 부분인데, 이것이 근대생활을 하는 데 굉장히 도움을 주는 거였다고. 그런 것에 의해서 근대사회를 편하게 유지하려고 했던 거예요. 지금 현대 동양담론과 서양담론의 가장 큰 차이가 그런 이성주의적 인간, 근대성의 담론에 다 걸려있는 건데, 근대적 인간이라고 하는 서구적, 이성의 주체가 된 인간을 가지고는 사회적 리더도 만들어내기도 어렵고, 한 국가사회를 잘 이끌어가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학계 일부에서는, 단선적 사관에 비약이 있는 것처럼, 우리의 경우 근대도 제대로 완성되지 않았는데 무슨 탈근대냐 하는….

=(말 끊으며)그게 잘못된 말이예요. 우리 역사는 근대/탈근대를 가지고 얘기하면 안되는 역사란 말이예요. 그게 아주 위험한 애기고. 문제는 이성주의적 인간도 훌륭한 면이 있다라는 점에서 근대를 말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성주의를 극복하는 대안으로서 데리다가 어떻고 푸코가 어떻고 이런 얘기 아무리 해봐야, 인간의 언어가 복잡할 게 없어요, 이성을 빼놓으면 뭐가 있냐면 결국 정욕의 문제예요. 동양인들이 생각한 주자학은 이성적 인간을 만들어낸다는 것보다는 -그런 것 필요하죠, 주자학도 이성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이성적 인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어떻게 하면 인간이 자기의 욕망을 절제하느냐, 인간의 감정을 어떻게 다스리느냐, 쉽게 말해서 희로애락의 문제라든가 이런 것이 동양에서는 훨씬 더 중요한 문제란 말이에요.

한국사회도 만나서 얘기하면 서로 이성적이라고 거품을 물어요. 우익이나 좌익이 만나면. 그런데 가장 큰 문제가 감정처리가 안돼. 무조건 남을 증오하고 질시하고, 그러면서 자기 주장만 이성적이라고 주장하거든.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예요. 그러니까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도 이성적으로 보기 전에 감정적으로 본단 말이야. 이런 게 우리사회에서 99%지. 감정순화가 바로 서구학문이 실패하고 있는 부분이야. 이런 문제가 좌파적 논리만으로 안되는 거야. 보다 더 해방된 사회, 더 많은 사람이 자유를 공유하는 사회, 이건 누구나 공감하는 문제에요, 이런 걸 어떻게 구현하느냐에 대한 더 깊은 고민이 있어야지.

학계에도 자이언트(거인)가 있어야 돼. 방대한 자료와 이론을 통합해서 누가봐도 대단하다 할 정도로 해야 하는데 국학의 경우는 지금은 역부족이지. 더 깊게 공부하고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학문을 세워야 해, 누가 봐도 부정할 수 없는 스칼라쉽이 확고하게 있어야 해요.

이야기는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았다. 그만큼 그는 진솔하고 거침없는 특유의 화법으로 2시간 동안의 대화를 이어갔다. 도올은 인터뷰를 마치고 여담을 나누는 동안에도 자신의 편저 <삼국통일과 한국통일>(1994, 통나무)에 “내 인생에 가장 본격적인 인터뷰였던 것 같다, 갑신년 정월초 도올”이라는 소감을 적어 기자에게 주면서 한마디 더 보탰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강렬한 통찰이 있어야 한다는 거야. 내 말이 (학계와 지식인사회에) 충격을 줬으면 좋겠습니다”

글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사진 황석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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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4-01-10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올의 글을 읽을 수 있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월요일마다 잊지 않고 도올 강의 듣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우리를 얕잡아보는 시선들이나, 우리가 우러러보는 시선들이 모두 진실이 아님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정말 비전있는 나라에서 살고 싶네요.

비로그인 2004-01-10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올은 아주 그의 말이나 글을 중요시하는 사람을 팬으로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그를 바보에 가까운 학자라고 취급하는 사람 ... 이렇게 양 극단의 평가를 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있는 것처럼 보여요. 간혹 언론이 그래도 도올을 비춰주면... 전 도올이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지고 호소력을 갖고 있는지, 그의 말이 사람들의 무엇을 울리고 있는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저요?
저는 호감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도올의 영향력에 약간의 관심(?)과 의아함을 갖고 있죠. 간혹 간달프님의 서재를 엿보고 있는데, 이번에는 '헉, 여기도 도올이...'했습니다.

간달프 2004-01-10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올을 어떻게 볼 것인가하는 문제보다는 도올이 무슨 문제를 제기하느냐에 더 관심이 있어요. 위의 인터뷰도 그런 문제제기가 저에게 일부 설득력이 없지 않고, 또 문제제기 자체가 흥미롭기에 옮겨왔습니다. 도올이 약간 과대망상끼가 있고 도무지 적절함이란 걸 모르는 사람같아서 문제지만, (도올에게 위선의 아성으로 지탄받는) 학계의 일원이 아닌 제3자의 눈으로는 솔직히 좀 배설적 쾌감도 없지 않아 있지요. ^^ 하지만 '국학이 우리를 구해줄 거야'라는 식의 생각에는 그다지 찬성하지 않습니다.

비로그인 2004-01-11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멘트 붙이길 잘했군요. 간달프님의 말씀을 읽어보니까, 제가 왜 도올의 강의를 들을 때 무엇이 약간의 호감이고 무엇이 강한 거부감으로 다가오는지 조금 설명할 수 있게 되네요. 저는 도올의 언론을 대하는 태도를 볼 때 저것도 일종의 '노출증'인가보다...란 생각을 조금 합니다.

코스모폴리스 2004-01-30 0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에 언제 실렸던 인터뷰인지 알 수 있을까요?

비로그인 2004-01-30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월 8일자 한겨레 기사입니다.

http://www.hani.co.kr/section-009000000/2004/01/009000000200401082007343.html
 

하버마스와 데리다의 도발적 문제제기

아방가드르적 '유럽'전망 제시 ... 에코, 바티모, 로티 동참

2003년 06월 26일 강진숙 통신원

지난 5월 31일, 유럽 언론에는 예기치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날 유럽 전역의 저명한 지식인들이 사전에 비밀로 부친 채 유럽 각국의 일간지에 자신들의 주장을 일제히 쏟아냈기 때문이다. 이 지식인들의 도발적인 문제제기는 EU가 장차 어떠한 외교정책을 수립, 실행해야 하는가에 맞춰졌다. 그 선두로서 독일의 대사상가로 평가받는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위르겐 하버마스와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독일의 유력한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이하 FAZ)'에 아방가르드적인 핵심유럽의 전망을 제시했다. 이런 지식인 집단의 움직임이 중요한 이유는 우선 이 지식인 집단의 주도층이 이라크전의 발발 전후로 반전과 평화 운동을 주도했던 주체들이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이 반전평화운동을 계기로 유럽 통합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있어 지식인들의 역사적 역할이 얼마나 중요하고, 어떻게 전개되는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유례없는 이 유럽 지식인 운동의 대변자는 위르겐 하버마스다. 지난 5월 31일 FAZ에 게재한 기고문에서 그는 프랑스의 동료 철학자 자크 데리다와 공동으로 유럽의 전망에 대해 논증했다. 그들의 핵심적 문제제기는 유럽 통합(통일)을 시험했던 이라크 전 직후, 세계적으로 유럽의 역할은 왜 새롭게 규정돼야 하는가 라는 점에 있다. 요컨대 유럽인들의 공동의지와 '정체성'에 대해 숙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전쟁이 유럽 지역에서 발발한 것은 아니지만, 전쟁은 유럽을 변화시켰다. EU 내에서 외교정책에 대한 관심이 표출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각각의 일국 차원의 관심사를 벗어나 유럽차원의 사고들로 진전한 것이다.

이에 따라 하버마스는 시민들의 “우리-감정”(일체감)을 이성적 정치의 척도로 만들 방법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하버마스와 데리다의 기고문은 지난 1월 31일 언론을 통해 영국과 스페인의 주도 아래 EU 소속 8개국이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던 ‘8개국의 서신’에 반대 의사를 드러낸 것이다. 이 비판의 출발점은 두 역사적인 날, 즉 전쟁지지와 반전의 입장이 사회적으로 표출된 시점의 비교이다. “하나는 유럽 내 신문들이 아연실색해 있는 독자들에게 ‘부시에 대한 충성의 표명’을 보도한 날이다. 이 날 스페인 총리는 다른 EU 국가들에게는 비밀로 한 채 유럽의 전쟁 지지국들을 향해 부시에 대한 충성을 표명하도록 신문지상을 통해 요청했었다. 또 다른 하나는 지난 2월 15일 시위 대중들이 유럽 전역의 수도들, 예컨대 런던, 로마,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베를린 그리고 파리에서 이러한 교섭행위에 대한 반대를 분출한 날이다.” 두 철학자들은 이 두 날을 망각하지 말 것을 주장하며 유럽의 외교정책 개혁의 필요성을 설파했다. 그들의 논점은 매력적인 문화적 ‘비전’ 없이 개혁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특히 지난 2월 15일에 있었던 대규모 반전시위는 “유럽 공론장의 탄생을 알리는 역사적 신호”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같은 날 일제히 다른 저명한 유럽의 신문들에도 하버마스와 데리다의 공동 기고문에 대한 다른 지식인들의 보충 의견들이 실렸다. 예컨대 파리의 ‘리베라시옹’은 데리다의 요구와 하버마스와 공동으로 작성한 텍스트를 제시했다. 이탈리아의 ‘레푸블리카’에는 움베르토 에코가 표명했고, 스위스의 ‘새로운 취리히 신문’에는 아돌프 무쉬히가, 스페인의 '엘 빠이스'에는 페르난도 사바터, 이탈리아의 ‘라 스탐파’지에는 ‘모더니티의 종언’으로 알려진 지안니 바티모 등이 유럽 유수의 신문들에 각각 의견들을 표명했다. 그리고 신실용주의를 제창한 미국의 철학자 리차드 로티는 하버마스의 의견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을 ‘남독일 신문’에 제시했다.

이 대규모의 지식인 ‘발의’ 운동에 대한 근거에 대해 하버마스와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즉 유럽인들의 연대는 우선 ‘핵심 유럽’ 차원에서 설명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유럽적 가치인 계몽사상을 복원하고, 공동의지로 통합된 유럽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런 요구는 유럽 내의 변화, 즉 2004년도 유럽연합 회원국들의 가입을 목전에 두고 있고, 동시에 터어키의 입회 신청 등에 직면하여 지식인 집단 내에서 폭발력을 갖게 된 것이다. 그들이 핵심유럽의 역할에 대해 주장하는 바, “진전한다는 것은 배제를 뜻하지 않고”, “아방가르드적인 핵심 유럽은 작은 유럽으로 고착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추동력 있는 기관차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하버마스의 주장에는 심도 깊은 고민과 논리적 근거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해명돼야 할 과제가 많다. 예컨대, 약 4억에 달하는 유럽 시민들의 다양한 동기와 서로 다른 요구들을 어떻게 하나의 공동의지로 구축할 것인가. 그리고 어떤 목적을 향한 공동의지인가. 또 한편으로 하버마스가 공동 의지로 구축할 수 있다는 유럽 모델은 시민들의 결속 아래 구축되는 단일 민족국가를 말하는 것인가. 우려되는 점은 경제적, 정치적 역사가 다른 유럽 각국의 정체성에 대한 ‘차이’가 전제되지 않는 한 또 다른 집단주의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하버마스를 위시한 이 유럽 지식인 운동의 전개는 여러 가지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역사를 생성하는 길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우리’라는 감성을 이성적 정치의 척도로 현실화시키는 방법의 모색, 경제적 목적의 블록화가 아니라 반전운동을 계기로 외교정책적 공동 대응을 위한 유럽 통합의 전망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핵심 유럽’의 진취적인 모델을 구상하고 있다는 점 등은 앞으로 새로운 유럽을 추동할 ‘기관차’의 동력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강진숙 독일통신원/라이프치히 대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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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지식인이 할 수 있는 일은 파괴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파괴라고 해서 부정적인 것은 아니고 사람들을 구속하는 사회조건이나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갖가지 전제를 묻고 해석하는 일을 함으로써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무한한 길을 보여주는 일이겠지요. 발터 벤야민의 말을 빌리면, 지식인의 일은 사람들에게 도달해야 할 곳으로 이끌어 줄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길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을 부수는' 작업이겠지요. 장애물을 부순 뒤 어느 길로 갈 것인지는 사람들이 결정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애물을 부수는' 작업에는 지금까지 닫힌 집단을 만들어 온 사람들에게 이제까지와는 다른 집단이나 사회관계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일을 포함합니다.  [...]  "여기저기에 길이 보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은 언제나 기로에 서 있다. 어떤 순간일지라도 다음 순간을 모른다. 인간은 기존의 것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지만, 목적은 잿더미가 아니라 잿더미 속을 누비고 다니는 일이다." ("파괴적 성격", <폭력비판론>)

 사까이 나오끼, <국민주의의 포이에시스> (창작과비평,2003) 중 대담 부분에서 p.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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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 : 근대형성기에 대한 미시적 접근의 한계

빈약한 실증 빈곤한 해설...구성주의에 포획된 과거

2003년 11월 13일   강성민 기자

근대 형성에 관한 미시적 탐구들이 젊은 국문학자를 중심으로 활발하다. 권보드래 서울대 강사가 펴낸 '연애의 시대'(현실문화연구 刊)는 1920년대 초반 이 땅을 물들인 연애사건들을 추적했으며, '국민국가의 정치적 상상력'(소명출판 刊)은 애국계몽기 지식인들이 새로운 국가에 무엇을 채울 지 상상하고 실천했던 모습을 주목했다.

'연애의 시대'는 올초에 출간된 '모던뽀이 경성을 거닐다'(신명직 지음) 및 김진송 씨의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이상 현실문화연구 刊)의 계보를 잇는다. 이 책들의 공통점은 몸과 욕망의 근대를 끌어당긴다는 데 있다. 신문잡지의 잡스러운 사건사고와 정제되지 않은 표현들을 통해 당시 대중의 삶을 날 것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앎을 보충하자는 취지를 갖고 있다.

지난 1999년 '딴스홀…'의 이런 시도는 신선했고, 그 안에 담은 근대의 실물들 또한 '근대적 자기인식'의 다른 측면에 대한 충분한 응답이 돼줬다.

 *1928년 조선일보에 실린 '모던걸의 장신운동'이란 삽화. 여성들의 몸치장을 과장해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올해의 두 책은 물음표를 찍지 않을 수 없다. '연애의 시대'는 '戀愛'라는 박래품이 조선반도에 불어닥친 과정을 따라가고 있지만, 자료확보의 미흡과 그에 따른 해석의 빈곤을 초래하고 있다. 저자가 특히 추적하는 것은 기생과 여학생, 가정부인들의 삶에 나타난 변화다. 3·1운동 이후 급격히 늘어난 교육열풍으로 거리를 온통 여자들이 메우기 시작했다. 신문에는 이들 '신여성'에 대한 당혹스러운 관람기가 실리기 시작하더니, 신여성과 서울로 유학온 유부남과의 불륜이 대대적으로 퍼지면서 조선반도는 연애의 열풍에 휩싸이게 된다.

연애편지라는 새로운 소통방식, 독서를 통한 연애의 내면화, 비극자살로 인한 삶과 죽음의 관념에 나타난 변화는 이 지점에서 던져볼 수 있는 질문들이고 저자 또한 챙기고 있는 주제들이다.

식민지 근대를 읽어내는 편향성

하지만 이 책엔 중요한 게 하나 빠져있다. '재미'가 없는 것이다. 이런 류의 책이 줄 수 있는 재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연애의 치마밑을 긴장되게 엿보고 조선팔도 구석구석을 헤집는 博覽의 교차점에서 생길 만한 것이다.

이 책은 근대에 '연애'라는 근사한 거푸집을 덮어 씌울뿐 전혀 잘 빠진 결론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신문 사회면의 표면을 계속 미끄러져나가면서, 어디서 한번 본듯한 이야기들을 열거하고 이미 일본에서 수없이 다뤄온 연애개념의 수용경로를 모방적으로 재구성한다는 느낌이다.

이것은 신문읽기의 한계가 아닐까. 로버트 단턴의 '고양이 대학살'(문학과지성사 刊)이 '文化史' 서적으로서 자신의 경쟁력을 온갖 공문서, 비밀문서, 증언 등을 통해 확보한 점은 유명하다. 과거나 지금이나 신문'만' 읽고 쓰는 글은 결코 풍부해질 수 없는 것이다. 

3편의 중편논문을 모아 낸 '국민국가의 정치적 상상력'에 오면 부작용이 더하다. '위생담론과 신체에 대한 인식틀의 변환', '전쟁서사와 국민국가의 프로젝트', '꿈-서사의 민족담론과 계몽의 수사학' 등 그 동안 잘 다루지 않았던 참신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처럼 제목을 달았다.

하지만 국민국가의 프로젝트라는 문제설정부터 문제다. 일본이라면 이런 문제설정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국민국가를 통해 동아시아 제국으로 성장하고 서구와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는 야심을 세웠고 실천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한국은 고작 10여년의 애국계몽기 동안 그런 소망을 품어봤고, 이후는 식민지의 길을 걸었다. 이 책은 그런 역사적 맥락과 전혀 상반되는 건국의 흥분감을 내내 연출한다. 안해도 되는 연구를 한다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저자들이 계몽지식인들의 국가기획이, 해방 이후의 건국기획과 맺는 연관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왜 이 시점에서 국민국가 프로젝트를 살펴야 하는가. 다만 당시 지식인들이 그렇게 근대를 내면화했고, 그게 지식인 주체구성의 한 형식이었다고 말하면 충분한가. 당시 지식인들은 과연 그토록 치밀하게 지도를 그리듯 근대를 준비했을까. 근대적 매체의 마술에 의해 계몽된 건 지식인이었을까, 대중이었을까.

이 책의 첫번째 글은 신체를 위생적으로 관리해 국가에 적합한 국민을 생산키 위한 계몽의 실천과 그에 따른 여러 인식의 변화를 추적한다. 소제목은 '질병의 발견, 위생의 정치학', '구습의 타자화, 서구적 매너의 형성', '욕망포획과 정절의 내면화', '훈육되는 신체와 정신' 등으로 흘러간다.

또 하나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건 과도한 구성주의적 용어들이다. 로고스 패러다임을 깨려고 후기 구조주의자들이 어렵게 발명해낸 그 전략적 용어들이 여기선 거의 자동녹음기처럼 연발되고 있어서 낯이 뜨거울 정도다. 특히 국가 안에 국민을 '배치'한다는 식의 용어들은 그 뒤에 무슨 말이 나올 지도 대충 짐작이 갈 만큼 식상함을 준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그냥 넘어갈 수 있다.

무비판적 同人主義 문제

또 다시 문제가 되는 것은 글의 전반에 등장하는 주체와 타자,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구별이 전혀 현실 고려적이지 못하다는 점이다. 가령 신체를 통제하는 생체권력의 형성을 말하는 부분은 전근대와의 단절을 강조하고 있다. 근대적 교육, 인구조사 등을 통해 파놉티콘이 형성된다는 식의 주장을 한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도 유교적 신체규율이 엄연히 있었다. 최소한 그 두개의 규율을 다른 것으로 보려면 서로 치밀하게 비교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런 것은 가볍게 생략될 뿐이다.

治道(깨끗한 거리)를 위생적 신체와 일치시키는 은유적 논의전개 방식은 글을 흐름화하지 못하고, 끝없이 분절시키고 있다. 이것은 근대성 연구의 후발주자로서 외국의 선행연구자들의 관점을 일종의 '선입견'으로 갖고 연역적으로 연구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인 것 같다.

그러니 강박이 생긴다. 앞의 글들에서 공통적인 것은 "삶은 기획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근대에서 서구이성에 포섭되지 않는 미적 주체의 기획논리를 발견하자는 과도한 의욕 말이다. 물론 그런 식의 기획이 전혀 없진 않았지만 과연 그게 우리 삶의 본질이었을까.

이들 연구자들이 수시로 참조하는 일본 근대의 탈전통과 문명의 재배치는 국가권력의 구체적 실천과 당대 지식인들의 긴밀하고도 거대한 연계 아래서 이뤄졌던 것이다. 한국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이런 중요한 차이는 왜 무시되는 것일까.

결과적으로 볼 때 최근 근대에 대한 미시적 탐구서들은 구체성을 잃고 수입개념에 갇혀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근대성 연구의 '同人主義'에서 그 원인을 어느 정도 찾을 수 있을 듯하다.

현재 국민국가, 계몽근대에 대한 연구자 집단은 상호간의 비평적 거리를 확보하고 있지 못하다. 상호인용은 충분히 하지만 서로의 견해에 대한 메타견해나 비판은 전혀 제시되지 않는다. 마치 일심동체인 것처럼 똑같은 주제와 소재, 관점과 기술법으로 앞으로 밀고 나가기만 한다. 과연 이런 식의 학문접근이 성찰성과 객관성을 지속적으로 확보해나갈 수 있을 지 의문이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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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서 교수와 나카자와 신이치 교수의 만남

신화의 興起, 인류의식의 패러다임 변화 의미
 
                                                 2003년 12월 31일   정리 강성민 기자

 

신화가 문화적 기득권을 쌓아감에 따라 그것의 본질적인 의미와 부정적 기능에 대한  논의의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교수신문은 신년을 맞아 비판적 신화논의의 새로운 담론의 장을 여는 의미에서 ‘한일석학 E-메일 신화대담’을 준비했다.일본의 대표적 종교철학자인 나카자와 신이치 교수와 정재서 이화여대 교수가 대화를 나눴다. 두번에 걸친 대담은  이번에 첫번째를 싣고, 다음호에 나머지를 선보일 예정이다. 신화의 본질과 역사, 동양에서의 신화논의의 방향 등 주요한 화두들이 제시됐다.[편집자주]


나카자와 신이치 : 현대일본의 대표적 철학자이자 종교학자로 탁월한 인문학 저술가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다. 도쿄대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1979년 네팔에서 전승밀교를 연구하고 수행했다. 1982년 일본으로 돌아와 '티베트와 모차르트'를 써서 산토리 학예상을 수상했다. 현재 中央大學 교수로 재직중이다. 저서로는 '무지개의 논리', '악당적 사고', '숲의 바로크', '불교가 좋다' 등이 있다.

 

정재서 : 서울대 중문과에서 '신선설화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 옌칭 연구소, 국제일본문화연구소 객원교수 역임했고 현재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저서로는 한국출판문화상 저작상을 수상한 '不死의 신화와 사상'을 비롯해 '山海經譯註', '동양적인 것의 슬픔', '道敎와 문학 그리고 상상력' 등이 있다.

 

정재서 :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이메일로나마 만나뵙게 돼 반갑습니다. 이른바 신화의 귀환이 운위될 만큼 오늘날 신화에 대한 관심과 인식이 보편화되고 있습니다. 근대 이후로는 아마 낭만주의 시대의 신화에 대한 열기를 재현한 것과 같은 그러한 현상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가령 한국의 경우를 예로 든다면 최근 그리스 로마 신화를 중심으로 한 신화서가 출판시장에서 크게 호황을 누렸고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 시리즈'와 같은 판타지 문학이 대중적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아마 전세계적 현상의 일환이라 할 것 같은데 이제 대중적 열풍을 잠시 뒤로하고 신화의 본질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카자와 선생님의 저작 '신화, 인류 最古의 철학'은 시의적절한 책이었습니다.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신화의 의미와 가치를 잘 각인시킨 훌륭한 신화입문서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저자인 나카자와 선생님과 함께 인류 공통의 관심사인 신화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을 무척 기쁘게 생각합니다.

나카자와 신이치(이하 나카자와) : 저의 책 '카이에 소바주' 시리즈 제1권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의 한국어판이 출판돼 다행히 많은 독자의 호응을 얻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매우 기뻤습니다. 일본열도의 최초의 국가가 이미 고도로 발달된 상태였던 한반도 문화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탄생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또한 초기의 국가가 편집한 '古事記'나 '일본서기'와 같은 신화집의 소재 대부분이 한반도 사람들 사이에서 전승되던 신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신화집의 편찬과정에도 한반도 출신의 지식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 역시 역사학에 의해 입증된 바 있습니다.
  우리 일본인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신화를 통해 한반도 사람들과 깊이 연결돼 있었던 셈입니다. 따라서 오늘 이렇게 신화를 화제로 정 선생님 같은 한국의 대표적 학자와 대담하게 돼 감회가 깊습니다. 왜냐하면 과거에 신화를 정치적으로 왜곡시켜 이용하려 했던 이데올로기로 인해, 양국의 국민 사이에 형성돼야 할 우애가 오랜 기간에 걸쳐 깊은 상처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순수한 마음으로 신화를 대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화를 무조건 부정해온 근대의 사고법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신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해졌습니다. 신화에는 '현대란 무엇인가'라는 의문과도 직결된 매우 중요한 문제가 내포돼 있습니다.

용은 동양신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서양에서 용은 악의 힘으로 여겨지는 반면, 동양에서는 공정하고, 인정 많고 길조를 나타내는 동물로 통한다. ©

 

정재서 : 작금의 신화 열기(중국의 학계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정말 神話熱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가 과연 어떤 원인에서 생겨났으며 이것이 과거 사조에 대한 반동으로 반짝 일어난 현상인지, 아니면 지속적으로 우리의 삶에 중요한 작용을 미칠 사안인지 한번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일단 저는 신화의 興起가 이른바 문명의 전환기라 할 현 시점에서 인류 의식의 패러다임의 변혁과 긴밀히 상관된 현상이라고 생각하고 일시적 반동 현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물론 근대 이래의 과학적, 기계적 사고에 대한 반동으로 신화적 감수성이 반사적으로 필요해진 측면도 없지 않으나 그것은 문제를 너무 피상적으로 보는 것이죠. 저는 두 가지 측면에서 신화의 도래가 필연적이었고 앞으로도 불가결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첫째는 앞으로 인류의 의식이 보다 통합적이고 전일적인 사고를 지향할 것이라는 예측에서이고 다른 하나는 향후 인류를 둘러싼 매체 환경이 신화적 상상력의 활발한 작동에  온상을 제공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입니다. 다시 말해 정신적, 물질적 양 차원에서 신화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호황(?)을 누릴 근거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여기에서입니다. 신화가 이미 기득권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할 때 차제에 필요한 것은 신화에 대한 예찬이 아니라 냉철한 검증과 비판이 아닌가 합니다. 이러한 자세만이 향후 신화의 범람으로부터 불가피하게 빚어질 오용과 남용을 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최근의 신화에 대한 대중적 열기에는 어딘지 냉정한 인식이 결여된 것 같아 아쉽습니다.

나카자와 : 중국의 최근의 출판현황을 보면, '神話考古'라는 제목이 붙은 책이 많이 눈에 띄게 됐습니다. 그리고 쓰촨(四川)성이나 칭하이(靑海)성과 같은 지방의 출판물에서는 도교나 라마교 등에 대한 뜨거운 '종교열기'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저는 문화대혁명 당시의 중국을 여행한 적이 있는데, 그 당시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변화입니다.
  일본에서 그와 유사한 '신화열기'가 일어난 것은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진행중이던 때였습니다. 당시의 진취적인 일본의 대학생들의 머릿속에서는, 비합리적이고 반동적이라며 평가 절하해왔던 신화나 민속문화에 대해 열광적인 관심을 갖는 것과, 근대의 상식에 반항하는(듯이 보였던) 중국의 젊은이들의 정치운동이 하나로 연결돼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겠지요.
  당시의 젊은이들은 대규모의 자연파괴를 수반한 일본열도의 도시화와 공업화에 대한 일종의 저항으로서 신화나 민속문화에 대해 열광적인 관심을 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70년대 후반에 들어서자, 경제의 고도성장과 정치운동의 수많은 좌절에 의해, 이런 '신화열기'는 문화의 표면에서는 냉각되어 점차로 내면화돼 갔습니다. 그런 정열은 정치로부터 멀어져서 '정신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바뀌어가고, 표현영역도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같은 서브컬처로 옮겨가게 됐습니다. 그리고 애니메이션 영역에서 되살아난 신화적 사고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여러 뛰어난 작품을 탄생시키면서, 동시에 환상에 사로잡힌 채 개인의 밀실 속에 갇혀 지내는 많은 어린이들을 위험한 정신상태로 몰아넣었습니다.

뇌공도 ©

그렇기 때문에 정 선생님이 지적하신 바와 같이, 현대의 우리 사회도 신화적 사고를 추구하고자 하는 깊은 충동을 느끼면서, 그런 충동의 발산으로 야기되는 정신적 황폐를 지켜보며 신화가 갖는 의미에 대해 계속 생각해가야 합니다. 과연 현대의 우리들은 신화에 대한 관심을 통해 무엇을 회복하고자 하는 걸까요. 저는 그게 '대칭성의 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최근에 한국어로 번역된 '카이에 소바주' 시리즈의 제2권 '곰에서 왕으로'와 현재 집필 중인 제5권 '형이상학혁명'에서 상세히 논했으므로, 여기서는 요점만을 간단히 소개하기로 하겠습니다.
신화는 레비-스트로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항대립 논리의 조합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이를테면 조리한 것과 날 것, 연속적인 것과 비연속적인 것 사이에 발견되는 차이를 이용해서, 이것을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의미가치를 갖는 이항대립으로 만들어, 우주의 의미를 둘러싼 복잡한 사고를 전개하려 한 것이 신화입니다. 이런 점에서는 신화의 사고와 오늘날의 컴퓨터로 대표되는 과학의 사고는 동일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신화에는 과학과는 이질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이항대립의 논리를 사용하면서, 신화는 과학에서는 절대로 거론하지 않는 것을 거론한다는 점입니다. 과학은 이 세계가 비대칭적으로 이뤄져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과학은 인간과 곰 같은 동물을 이질적인 존재로 취급합니다. 그러나 신화에서는 이런 비대칭적인 상황이 뒤집혀, 곰과 인간의 동질성을 주장합니다. 신화의 시대에는 곰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말을 했으며, 인간도 원하면 동물로 변할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신화에서는 인간과 동물 사이에 대칭적인 관계가 성립돼, 그런 대칭성을 근거로 한 논리에 의해 사람들은 현실 세계로부터 보이지 않게 된 진리에 대해 생각하려 했던 셈입니다.
이런 '대칭성의 논리'는 우리 현생인류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무의식'이 밤낮으로 쉬지 않고 우리 마음속에서 활동하게끔 하는 '무의식의 논리'를 의미합니다. 무의식이 억압을 받거나 부분적으로 개조된 부분에 의식이 탄생하게 됩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신화열기'를 통해 표면화되고 있는 신화적 사고에 대한 관심의 저변에는, 생명활동에 직결된 무의식의 활동 사이에 막혀 있던 회로를 부활시키고자 하는 충동이 숨겨져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무의식은 반성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 점이 '신화에 대한 대중적 열기'가 내포하고 있는 위험성의 원천입니다.

정재서 : 다음으로 신화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리스 초기에 뮈토스는 진리에 가까운 이야기였고 로고스는 허구성을 띤 이야기였습니다. 이 관계가 정반대로 역전되는 것은 플라톤 이후입니다. 인문주의의 시대로 진입하면서 신화는 허구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죠. 이후 신화는 寓意說 등에 의해 겨우 존재를 유지해오다가 근대 이후 셸링, 카시러 등에 의해 내재적 가치를 인정받고 레비-스트로스에 이르러 自明性을 획득하게 됩니다. 선생님은 특히 레비-스트로스에 주목해 구조주의의 길을 따라 신화적 논리가 갖는 힘을 잘 설명하셨습니다. 신데렐라 민담을 통해 양극적인 것들을 매개, 결합시키는 신화적 논리의 특성을 웅변한 것은 정말 압권입니다. 신화적 논리가 갖는 통합적인 힘, 그것은 선생님의 말씀대로 세계를 조화롭게 만들고자 하는 원시 인류의 지혜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신화적 사고가 초래할 집단주의, 전체주의의 위험도 간과할 수 없지 않나 합니다. 우리에게는 나치와 一國主義의 광기에 대한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한 광기가 신화적 사고의 오용에서 비롯됐음은 이미 많이 지적된 바 있습니다. 저는 신화가 인류의 집단무의식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종족의 서사이기도 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이 점은 신화가 보편성을 지니고 있지만 언제라도 편파성으로 치달을 소지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신화의 양면성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신화의 본질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아닌가 합니다.

인간의 몸통에 뱀 꼬리를 단 여왜와 복희가 별의 무리 속에 서로 엉켜 있다. 손에 쥔 컴퍼스와 삼각자는 둥근 하늘과 사각형의 땅을 상징한다. ©
나카자와 : 신화의 사고가 무의식의 영역에 직결된 논리과정의 표현이라고 한다면, 그 사고는 '種' 내지는 '계급'은 인식할 수 있어도, '個'를 인식할 수는 없습니다. 종은 대립하는 힘들이 서로 싸우는 여러 종류의 多樣體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 안으로부터 '개'가 탄생하게 되는데, '종의 논리'(이 표현을 최초로 사용한 것은 니시다 기타로와 동시대인이었던 다나베 하지메라는 교토대의 철학자였습니다)인 무의식의 사고로는 '개'의 의미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신화가 근대정치에 이용됐을 때 발생하게 될 엄청난 참화가 예상됐습니다. 실제로 그것은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파시즘과 파시즘의 현실화에 대성공을 거둔 독일의 나치즘에 의해 역사적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개'를 인식하지 않는 무의식적인 '종'의 사고의 횡포로 인해 비참한 상황이 초래됐습니다. 이처럼 신화적 사고에는 인류의 희망인 '대칭성의 논리'와 표리관계에 있으면서, 엄청난 참화를 초래할 가능성이라는 마이너스적인 측면이 잠재돼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이런 양면성에 대한 인식이 결여된 채로 21세기의 신화연구를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본래 희망은 위험과 이웃하고 있게 마련입니다. 하이데거가 말한 바와 같이,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머뭇거려서는 안 됩니다. 신화는 양날의 칼입니다. 함부로 다루면 인류는 또다시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지도 모릅니다.

정재서 : 앞에서 신화가 갖는 국한성에 대해 말했는데 이와 관련해 저는 신화 담론 곧 신화학의 국한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싶습니다. 세계 각국에 있는 개별 신화의 가치는 평등하다 하겠으나 사실 신화학의 세계는 평등하지가 않습니다. 근대 이후의 신화학은 인도 유러피언 민족의 기원을 탐색하고 문화적 우월성을 보증하기 위한 의도와 긴밀히 상관돼왔습니다. 신화의 개념, 분류 등 신화일반론은 그리스 로마 신화를 표준으로 결정됐으며 이 잣대는 세계 모든 지역의 신화에 일률적으로 적용돼왔습니다. 그런데 사실 다른 지역의 신화에 비해 그리스 로마 신화는 일찍부터 원시성을 상실하고 훨씬 인문화되고 문학화 돼 있습니다. 문제는 특정한 지역의 신화에서 도출된 코드로 타문화를 해석할 때 생겨납니다. 가령 오이디푸스 유형은 인도 유러피언 민족 이외의 종족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지역적 국한성을 지닌 신화입니다. 그러나 이 신화에서 도출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코드로 우리는 모든 문화를 다 읽어낼 수 있는 것으로 상상해왔습니다. 마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도 같은 이러한 일방적인 잣대에 의해 비서구 문화의 특성은 捨象될 수밖에 없습니다. 근대 초기에 중국은 서구 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신화부재론'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중국에는 서구처럼 서사체계가 완전하고 창조적 의미가 풍부한 신화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편견이었는데 사실 오늘날의 중국신화학에서도 서구 신화학의 정의나 분류법이 과연 중국에 들어맞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습니다. 상술한 이러한 문제들을 신화학자 혹은 문화연구가로서 선생님은 어떻게 다루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나카자와 : 그것은 아시아인으로서 신화를 연구하는 연구자 모두가 느끼는 어려움에 대한 것입니다. 오이디푸스 신화를 예로 들어 이 문제를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레비-스트로스는 오이디푸스 신화를 "대지로부터 탄생한 존재인 인류가 안고 있는 최대의 모순"에 대한 하나의 해답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해왔습니다. 다리를 끌며 걷는 오이디푸스 일족은 대지에서 탄생한 인류에 대한 기억을 계속 간직해 왔습니다. 게다가 모든 인류가 동일한 '대지의 어머니'로부터 탄생한 존재라면, 모든 여자는 자신의 어머니며, 모든 남자는 여자들의 아들이 되는 셈이죠(이것이 앞에서 서술한 '대칭성의 논리'의 超논리적인 귀결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결혼, 모든 성의 결합은 '근친상간'이 되는 셈입니다.
  현생인류가 구석기를 사용한 시대부터 이미 이런 식의 사고를 한 흔적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모성을 지닌 '대지'에 대한 사고가 존재하는 한, 인류는 大地性으로부터의 완전한 이탈의 불가능과, 근친상간으로서의 결혼의 모순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인의 오이디푸스 신화는 이런 모순에 대한 일종의 재치 있는 신화적 해결인 셈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능한 여러 해결책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서 일본에서 전승돼 온 '道祖神'의 기원설화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도조신은 도로에 서 있는 신인데, 그 신에 대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형과 여동생이 있었는데, 둘 다 결혼상대를 찾아 멀리 길을 떠났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에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둘은 다시 만나는데, 서로 오누이 사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채 관계를 갖게 됩니다. 무척 기뻐하며 둘은 서로의 고향으로 향하게 되는데, 고향이 서로 같고 헤어진 오누이라는 걸 알게 되자 절망해서 자살하고 맙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마을사람이 세운 것이 지금 '도조신'이라고 불리는 도로의 신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오이디푸스 신화를 "대지로부터 탄생한 존재인 인류가 안고 있는 최대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는 신화로서 이해한다면, 이 '도조신 신화'는 오이디푸스 신화의 변형으로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방향으로 신화연구를 해나갈 수 있다면, 우리는 근대에 분에 넘치는 권세를 부려온 서구형 신화들을 제자리로 돌려보낼 수 있게 될지도 모릅니다.

은으로 물결 무늬를 상감한 이 청동 괴물은, 악을 압도하는 것으로 믿어지던 중국신화 속의 날개달린 고양이과 동물이다. ©
정재서 : 저의 일본문화에 대한 소감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일본은 신화가 살아있는 나라다"라는 말입니다. 지난 일년간 일본에 가있으면서 줄곧 느낀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아울러 일본이 전통적인 상상력과 이미지의 유산을 바탕으로 오늘날 애니메이션, 영화 등 문화산업을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이룩한 것은 진정 부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문화산업에서의 신화 수용을 환각제에 비유하면서 진정한 신화의 힘과는 거리가 먼 유사 신화적 행위로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신화적 상상력의 무대가 되고 있는 사이버 공간은 가상현실의 공간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펼쳐지는 신화적 상상력도 유사 신화로서의 작용밖에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상현실은 향후 싫든 좋든 우리의 삶의 중요한 토대가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현실 위에서 진정한 신화의 힘을 체득하는 방안은 무엇일까요. 다시 말해 가상현실 속에서의 재신화화(Remythologization)는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그 방안을 듣고 싶습니다.

나카자와 : 지적하신 부분은 현대문화의 본질에 관한 중요한 문제입니다. 앞에서 제시했던 제 개념을 사용한다면, 경제원리에 심각한 영향을 받고 있는 현대의 문화는 '비대칭성의 논리'에 의해 구석구석까지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신화적 사고나, 혹은 그와 동일한 장소로부터 발생하는 경제원리와는 이질적인 '증여의 논리' 등은 전부 '대칭성의 논리'로부터 탄생합니다. 오늘날 '가상현실'로 불리는 감각과 사고의 영역은 원래 이 '대칭성의 논리'가 작용하고 있는 무의식의 영역에 발생하는 것이므로, 그곳이 신화적 사고의 활동에 적합한 무대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거기에 지금은 '비대칭성'을 원리로 하는 경제원리가 작용함으로써, 오늘날 거대한 애니메이션과 게임산업이 형성된 것이야말로 위험한 일입니다.
  레비-스트로스가 '문자를 갖지 않은 사회'라고 하고, 제가 '국가를 갖지 않은 사회'라고 했던 사회에서는 현실과 신화, '비대칭성의 논리'와 '대칭성의 논리' 사이에 언제나 타협이나 균형을 유지하고자 하는 신중한 배려를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균형이 생명과 사고와의 모순 사이에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윤추구를 제1원리로 삼는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새로운 개척자로서 무의식의 영역을 발견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선발대로서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산업이 발달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윤추구형 자본주의는 신화를 이야기하던 사회처럼, 균형이나 공생을 배려하지 않은 채 무의식 영역의 개발(착취)을 촉진시켜 가겠지요. 신화학자는 그 점에 대해 경고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학기술이 실현시켜가고 있는 '가상현실'을 통해서, 아마도 인류는 신화가 이미 알고 있던 무의식 영역과의 감동적인 재회를 해가게 되겠지요. 그것을 건전한 형태로 실현시키기 위해서도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자본주의는 근본적인 원리부터 다시 만들어가야 합니다. 저는 제 자신이 하고 있는 연구의 의미를 그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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