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라신의 페드로
장 라신 지음, 장성중 옮김 / 만남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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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7년 1월1일 한편의 고전비극이 장 라신에 의해 무대에 올랐다. 제목은 [페드르], 에우리피데스의 불후의 명작 [히폴리토스]를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나의 [시학]에 충실한 작품이다.시학에 밝혔듯이 비극이 감동을 가져오려면 [플롯에 내재한 자연스런 반전과 발견]이 있어야 한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우면서도 현실적 설득력을 갖는 줄거리 속에 갑자기 발견되는 급격한 반전과 발견! 페드르는 이런 기본에 충실한 작품이다. 도리어 이런 면에서는 에우리피데스를 뛰어넘는 면도 있다.(물론 라신은 시학을 읽었더구만..)

페드르는 이뿐 아니라 비극의 주인공의 성격으로서도 시학을 따른다. 인간적으로 별 결점이 없으나, 오직 한 가지 약점으로 인해 얽히게 되는 불행, 특히 그 動因이 자기도 어찌 할 수 없는 [한 여인의 사랑의 감정]인 것은 물론 에우리피데스이고... 하지만 [히폴리토스]를 능가하는 그의 인물들의 특징은 자신의 감정을 뛰어넘고자 몸부림치는 갈등의 인물들이라는 사실이다. 내뱉은 말, 꼬이는 사건들, 압도적 감정의 새로운 발생으로 물론 이런 노력은 실패한다.

에우리피데스는 그의 이야기의 주체를 이야기 초반에 등장하는 아프로디테에 둔다. 그리고 이에 저항하지 못하고 끌려다니는 인간군상, 그리고 아프로디테 저주의 실현. 주인공들은 꼭두각시처럼 보이기도 하고, 물론 그런 운명에 끌려다닐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존재가 공감을 자아내어 디오니소스 축연때 극장을 메웠던 만칠천명의 심금을 울렸었다. 라신은 17세기의 사람들에게 어울리게 이런 비너스의 저주를 한갖 소도구나 핑계거리로 사용한다. 그는 어쩔 수 없는 주인공들의 감정에서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와닿는 이야기가 된 것이다.

번역된 이 책은(아리스토텔레스가 한글번역으로 읽었다치자) 130 여 페이지이고 나머지는 라신과 페드로에 대해 100 페이지 정도가 할애되어있다. 번역은 물론 프랑스어의 운율과 [교향곡적 감흥]을 전달할 순 없었다. 하지만 읽기 편하고 어색한 구석이 없는 훌륭한 것임에 틀림없다. 마치 우리사극의 대본을 들여다 보는 느낌을 주듯 입에 달라붙는 문어체에, 세세한 주석(어떤 부분은 번역자의 주관적 평까지)이 돋보이는 책이었다. 이 책 보느라 대장금도 제꼈다. 재방송 보면돼지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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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를 뒤흔든 논쟁 -상
김기현 지음 / 길(도서출판)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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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과 칠정은 [측은,수오,사양,시비]와 [희로애구애오욕]이다. 性과 情의 면에서 볼때 둘은 모두 인의예지와는 달리 이미 發한 것이므로 情에 해당한다. 하지만 사단이 선한 속성인 반면 칠정은 선악의 구분이 없거나 혹은 아름답지 않아질 소지가 많은 감정이다. 기대승은 이것이 두개의 전혀 다른 情을 설명한 것이 아니라 정 가운데 사단은 선한 것만을 [가려내어 말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퇴계는 4단과 7정을 엄밀히 구분하고 4단이 주로 理가 발한 것인 반면, 7정은 氣가 발한 쪽으로 해석한다.

과연 이런 구분이 왜 필요한가?
당시 유교는 조선의 국시이자, 파행과 인간적 욕심으로 얼룩지기 시작한 왕조의 기강에 유일한 해결방안이었다. 온전한 유교정치이념의 실현은 조선 유학자의 꿈이었고 [천명]이었다. 혼란의 원인은 유교적 관념의 교육의 적절한 시행과 그 엄밀화의 부재에 있다는 것이 퇴계의 생각이었다. 인의예지가 발한 사단의 마음이 널리 편만한 세상. 기대승의 생각도 이와 다르지는 않았다. 다만 원전에 충실한 4단7정의 정립이 퇴계에 의해 왜곡된다는 느낌을 받은 것 같다.

퇴계는 왜 다소 독특한 4단7정의 견해를 갖는가?
이는 그가 정립코자한 유교체계의 연장선상에 있다. 우주원리, 인간본성, 예절과 정치, 수행과 善政이 그에게는 하나의 이념안에 있었다. 우주의 원리로 심성의 4단7정은 해석될 수 있고 해석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이기를 성정에 적절히 설명하는 것을 시도한 것이다. 즉 기대승이 결과론적 4단7정, 즉 모양새에 따라 둘을 구분하고(엄밀히 이 개념을 구분치 않았던 중국의 선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정의하려 한 반면 퇴계는 원인론적 입장에서 논리적 귀결로 4단과 7정을 구분 지어 분류하려 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기대승이 4단과 7정은 [서로 선이 다르다]라고 한 반면 퇴계는 [그 선함의 정도는 같다]고 설명한 것이 인식된다. 즉 선악의 결과가 아닌 동일한 선의 정도에 이와 기의 간섭 정도에 따라 둘이 나뉘게 본 점은 이런 유교전체를 아우르고자 했던 전체적 틀 안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결코 이 책이 설명하는 도덕우선주의의 일탈은 아닌 셈이다. 또한 나라의 올바른 운행은 유교의 [기술적 운영의 묘-선악의 정도]에 달린 것이 아니라,하늘의 뜻과 일치되어 백성의 뜻과 선한 군주와 신하의 마음이 만날 때, 하늘의 도움으로 가능하다는 그의 정치론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 나에게 4단7정은 무얼 말하는가?
교육자와 학자로서 나라를 바로 세우려는 열정으로 산 한 사람을 본다. 그는 논변이 자신을 발전시키는 것을 알았고 또한 이것이 올바른 나라의 기틀을 세우는 일이라 믿었다. 영남과 기호의 우세가 아닌, 나라의 헌신된 인재를 키웠고 그 정신을 물려주었다. 공자왈 맹자왈은 그들의 입신출세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었겠지만 결코 그 제자들은 이 스승의 평생의 뜻만은 거스를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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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0-08-03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에, 잠시 덧붙일게요~ 퇴계가 이기호발설을 주장한 이유는 바로 수양론 때문에 그렇습니다. 조선의 이기론 논쟁은 수양론으로 연결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삶이냐..약관의 기대승이 노학자의 이론을 걸구 넘어진건 조선유학사에서 희대의 사건이었습니다만, 퇴계는 기대승의 논리를 인정해 서신으로 답을 해 줍니다. 이것이 7년 서신의 결정체인 사단칠정논쟁입니다. 퇴계는 4단이 이가 발한 것이고 7정이 기가 발한 것이라고 하지만 기대승은 이 논리가 도저히 수긍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만물을 움직이게 하는 동인이지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발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는 발할 수 없고 발한 기 중에서 순선한 면만이 이라는 기대승의 논리가 더 타당합니다. 퇴계도 이 부분을 인정합니다만..퇴계는 수양론 때문에 끝까지 이기양발설을 고수합니다. 4단을 수양하여(발하게 하여) 7정을 다스리게 해야 하기 때문에 무리수를 두게됩니다. 이는 뒤에 율곡이 기대승의 논지를 그대로 계승하여 기중심의 이기철학을 완성하게 됩니다. 쓰신 리뷰 중에서 제가 아는 부분과 좀 다른 면이 있어 주제넘지만 몇 자 남겼습니다~

카를 2010-08-03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좋은 사실을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퇴계선집
이황 지음, 윤사순 옮김 / 현암사 / 199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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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주가 된 1568년, 68세의 노학자 이황은 17세의 어린 왕이었던 선조가 성학의 기본을 쉽게 이해하도록 [성학십도]를 썼다. 이 도표는 정주계의 총결산서로 (1) 태극도 (2) 서명도 (3) 소학도 (4) 대학도 (5) 백록동규도(6) 심통성정도 (7) 인설도 (8) 심학도 (9) 경재잠도 (10) 숙흥야매잠도로 이루어져 있다.

태극도는 우주의 생성원리와 창조를, 서명도는 인간 생성의 원리를, 소학은 인의 시작의 원리로서 개인품행을, 대학은 이에서 발전한 인간관계와 정치를 이야기하고 동규는 이를 위한 가장 근본의 방법인 오륜을 설명한다. 심통성정도는 사단칠정의 요약으로 유교심리학의 원리를, 인설은 유교의 행동과학을,심학도는 이를 위한 심리훈련의 항목을 보인다.경재잠도는 행동훈련의 항목을 상황별로 기술하고, 숙흥야매잠도는 이를 시간별로 보여준다.

성학십도의 근본에는 敬이 있으며 이를 일상생활 가운데 실천하고 훈련함으로 仁의 경지에 이르도록 뒷받침하는 철학적 배경과 방법론을 이야기하고 있다. 철인치자가 아닌 인의치자로서의 유교사상에 뿌리를 둔 왕에 대한 수행지침인 셈이다. 서양정치론이 치자의 독특성과 우월성에 뿌리를 둔 반면 성학십도가 보여주듯 왕이나 백성이나 동일한 [인간됨]을 목표로 하는 인생관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부동심과 천명에 순종하는 마음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플라톤이든, 아우렐리우스 황제든, 바수데바 왕자든 인류의 공통된 희망이었다. 어쩌면 많은 옛사람들에게 너무나 자명했던 이 목표를 잃어버린 것이 우리 삶의 척박함의 이유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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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양 문명사 문명탐험 1
김명섭 지음 / 한길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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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은 [세계는 꽃밭과 같다. 형형색색의 꽃이 있어야 아름답다]고 했지만 지금은 분명 미국과 영국의 장미꽃밭 일색인 세계화의 한가운데 있다. 저자는 미국 주도적 앵글로색슨 표준이 어떻게 대세가 되어오는지 되짚고 있다. 그 이전은 해가 지지 않는 영국이, 또 그 이전은 프랑스가 유럽의 표준을 이끌었다. 이 기준들은 다시 그 이전의 네덜란드, 에스파냐, 포르투갈을 표준을 제압하고 흡수하여 등장한 것들이었다. 물론 더 전에야 지중해 표준의 베네치아나 이슬람적 또는 그리스로마적 표준이 존재해 왔지만 이 책은 현재까지 헤게모니의 중심을 차지한 대서양에 초점을 맞추어 이슬람에서 포르투갈로 즉 대서양 표준의 등장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산업과 금융의 폭발기에 거대한 자원과 자본의 힘으로 경쟁을 불허하는 헤게모니를 미국은 장악했다. 그리고 이만한 자원을 가진 러시아는 스스로 주저앉고 말았고, 중국은 이제 미국의 눈치를 보며 슬슬 몸을 움직여보고 있을 뿐이다. 당분간 이 구도는 지속될 것이고 그래서 이 책이 보여주는 대서양 패권의 역사가 더욱 의미를 갖는다.

우리에게 미국은 어떤 의미인가? 현재의 미국주도의 세계 속에서, 아는 사람들이, 특히 고급인력들이 하나둘 아이들 교육과 삶의 질 혹은 더 나은 임금을 찾아 미국으로 떠난다. 그들은 다시 그 격차를 심화시키는 힘으로 작용한다. 미국은 자국의 기준으로 세계를 조율하면서, 손대지 않고 훈련된 노동력의 이득을 얻고 있는 셈이다. 생산이 줄어들어도, 적자가 나도 자본을 들고 들어오는 이민들은 여전히 이 패권의 원천이 되고 있다. 교육된 고급 두뇌들이 줄서서 그린카드를 기다리고 있으니...저자는 대안으로 [자기표준에 입각한 동심원적 구조의 세계화]를 이야기한다. 이 제안은 확실한 전망이라기보다는 이상에 가까운 희망으로 비칠 정도로 한편으로 이 책이 전해주는 현 미국의 힘은 아득해 보인다. 과연 우리는 독자적으로 그 강력한 힘과 분리된 강소국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그 그늘아래 [조용하고 길게] 사는게 나을까? 미국의 그늘아래 오래 살아온 우리가 지금 직면하는 물음의 핵심이다.

이 책을 읽으며 9.11로 본격화된 미국의 힘 과시로서의 이라크전과, 유로화와 얽힌 프랑스 중심의 유럽과의 갈등이 비로소 선명히 이해가 된다. 끊임없는 패권 싸움의 한 가운데서 견제자가 없어진 저 나라와 어떻게 건강하게 지낼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는 그들과 다투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꽃을 피울 수 있을까? 아니면 장미의 변종으로 만족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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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치유
폴 투르니에 지음, 권달천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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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씌여진 폴 투르니에의 이 책과 1978년 씌여진 스캇펙의 [아직도 가야할 길]은 쌍둥이와도 같은 책이다. 두 책 모두 정신질환이나, 정신적 원인으로 인한 육체적 질병의 원인을 [도피]로 본다. 받아들이고 훈련되어야 할 부분을 회피하려하고 우회하려하며 억압하려하는 과정에서 일은 점점 꼬여들게 된다는 것이다. 이 두 책을 같이 읽어보는 것은 재미있는 경험이 된다.

투르니에는 직면과 고백 후에 시종일관 그 해결책으로 우리를 사랑하고 삶의 목적을 가지신 하나님 안에서 해결책을 찾으라고 한다.스캇펙이 직면과 훈련을 이야기하는 곳에서 그는 기도와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이야기한다. 스캇펙은 그의 책 내내 정신치료를 넘어서는 종교적 무언가를 암시하지만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스캇펙은 [아직도 가야할 길]을 쓴 이후 그 해결방법을 수단적 신앙이 아닌, [주와 함께가는 여행], 인격적 신앙에서 찾게 되었다.

직면하지 않는 이유은 사실이 두렵기 때문이다. 더 큰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인격의 치유]는 우리의 꼬여진 정신의 실타래 밖에 존재한다. 갈등과 분노, 미움과 원망은 손대면 댈수록 점점 꼬인다. 차라리 조용히 문을 닫고 무릎을 꿇는 것만이 해결책인 경우가 더 많았다. 사실 나를 뛰어넘어 상대를 보는 유일한 해결책이기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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