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니티 포스트모던 그리고 복음

윌리암 에드가2) 김종철 박진숙 역      from http://www.labri.or.kr/doc/modernity.pdf

"모더니티의 기획(보편성의 실현)은 포기되었거나 잊혀진 것이 아니라 붕괴되었고 파산되었다 이러한 모더니티의 붕괴를 보여주는 여러가지 양식 상징과 이름들이 있지만 아우슈비츠야말로 모더니티의 비극적인 종말에 대한 가장 적절한 이름이다.”3)

이것은 『포스트모던적 조건』4) 이라는 책으로 우리가 포스트모던5) 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분명히 인식시켜 주었던 한 프랑스 철학자의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시대를 포스트모던이라는 말로 특징지우려는 사람은 장 프랑스아 리오타르 뿐만이 아니다. 저마다 조금씩 그 의미를 달리 하고는 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시대를 포스트모던적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사실 포스트모던이라는 말 자체는 어떤 의미에서 볼 때 모순 어법이다. 왜냐하면 포스트 라는 말은 뒤 를 가리키고 모던 이라는 말은 지금 을 뜻하기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적인 용어 사용은 의도적인 것으로 한 시대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파악하여 단어 하나로 규정할 수 있다는 생각을 무너뜨리려는 시도가 깔려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포스트모던 사상을 둘러싼 여러 논의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우리는이러한 논의를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기독교인들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접근해야하는가 소위 포스트모던적 조건 이라고 불리우는 시대 속에서 어떻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것인가?

어떤 면에서 많은 철학자들이 모더니티의 거짓된 주장을 비판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으므로 우리 기독교에게는 환영받을 만한 것일 수도 있다 모더니티에도 긍정적인 측면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모더니티야말로 고도로 세속화된 문화를 생산하고 20세기의 비극과 격변을 안겨준 장본인이 아닌가 ? 많은 신학자들이 모더니티의 환상에서 벗어난 현 시점을긍정적으로 보고 지금이야 말로 복음을 전하기에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다.6) 그러나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포스트모던을 주장하는 자들이 우리에게 아군이라면 어떠한 종류의 아군인가? 모더니티를 극단적으로 거부하고 포스트모던적 조건 을 주장하는 자들은 모더니티와는 다른 새롭고 납득할 만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가? 모던적 기획 7)을 믿는 사람들의 희망과 열정을 앗아가버리려는 그들은 “왜 사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더 나은 대답을 가지고 있는가?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믿어야하는가  ? 포스트모던적 상황은 복음전도를 위한 새로운 기회인가? 아니면 복음에 적대적인 또 하나의 암울한 시기인가 ?

1.모더니티란 무엇인가  ?
모더니티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모더니즘이라는 유사 개념과의 구별이 선행되어야 한다 모더니티가 역사적으로 비교적 최근인 한 시대를 총칭하는 개념인 반면 모더니즘은 신학과 예술에서 나타났던 특정한 운동과 모던의 이념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부언하자면 첫째로 우리는 로이지Alfred Loisy, 티렐 George Tyrrell, 그리고 부오내우티Ernesto Buonaiuti 와 같은 신학자들에 의해 민주주의나 합리적 비평 방법  rational criticism등이 수용된 현대 카톨릭 신학을 그리고 근본주의가 전면전을 선포했던 개신교 내의 자유주의를 모더니즘 라고 부를 수 있다 예술에 있어서 모더니즘은 파리학파 인터내셔날 스타일 12음 기법8) ’ 과 같은 20세기의 다양한 시도들을 지칭한다 두번째로 모더니즘은 단순히 모던 시의 이념이나 확신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렇게 볼 경우 모더니즘은 하나의 철학내지는 교의 라고 까지 말할 수 있으며 분명히 모더니티와 모더니즘 사이에는 그 개념doctrine에 있어상당 부분 중첩되는 것이 사실이다.

모더니티는 모더니즘보다는 더 넓고 포괄적인 개념이다 그 단어의 역사를 살펴 보는 일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몇 가지 점에서 흥미롭다 라틴어 형용사인 모데르누스 ‘ modernus’의 기원은 최소한 AD5 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 단어는 당시 공인된 기독교 시대를 과거 로마의 이교적 시대와 구별하기 위해 사용 되곤 하였다.9) 영어 명사인 모더니티 modernity 는 16세기에 처음 사용되었으나 현재의 의미를 띠게 된 것은 19세기 중반에 들어와서인데 특히 드 고티에 와 보들레르De Gauthier Baudelaire 의 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 모더니티의 핵심은 엄격히 역사적 사회적인 것만도 아니다 그것은 17세기 후반에 유럽에서 시작되어 19,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전세계를 휩쓴 거대한 혁신의 바람을 말하는 문화 양식이다 모더니티는 하나의 이상 ideal  인 동시에 현실이었고 과학 예술 경제 사상 가정 생활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 영향을 끼쳤다 단순화시켜서 표현하자면 모더니티는 전통적인 양식에서 새로운 양식으로의 거대한 전환이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더니티를 살펴보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이념 즉 모더니즘이다.10)

모더니티의 도래에 대한 가장 명쾌한 설명 중에 하나는 프랑스 역사가인 뽈 아자르Paul Hazard 에 의한 것이다 유럽의식의 위기 『The Crisis of the European Consciousness 』라는 책에서 그는 1680년 부터 1715년 사이에 유럽에서 일어난 중대한 변화들을 연구하였다.11) 아자르는 그 변화들의 공통된 특징을 안정에서 동요로 고전에서를 모던으로 정통에서 이단으로 라는 식으로 표현하였다. 이것은 그 시기에 합리주의 기적의 부정 경험주의 같은 생각들이 보편화되었을 뿐 아니라 근본적인 신앙에 있어서도 커다란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아자르가 연구한 사람들은 그 당시 유명한 철학자들이나 과학자였다 그러나 그 연구를 이어 받은 사회학자나 역사학자들은 일상적인 사회 생활의 영역까지 그 연구 범위를 넓혀나간다 그들은 자신들의 연구를 통해서 생활의 사회적 측면의 중요성을 부각시켰고 18세기에살롱에만 묶여있었던 것들이 19세기에 와서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 의해 공유되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그렇다면 아자르가 주목한 모더니티의 정신성 즉 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 모더니즘의 정체에 대해서는 그 동안 많은 분석이 행해져왔다 그 중에서 클리버Lonnie Kliever 는 모더니티의 정신성을 주관성 보편성 편재성 이라는 세 범주를 가지고 설명한다.12) 나는 클리버의 이러한 견해에 동의 하면서도 모더니즘이 가진 이원적(二元的)  인 특징을 강조하고 싶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상을 이원적인 존재로 묘사한다 우상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그 둘은 어떤 경우에는 복합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개별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리차드 카이즈Richard B. Keyes  는 이러한 두 종류의 우상을 근신 과 원신 (近神 , nearby god) (遠神 ,faraway god)으로 표현하였다 사람들이 근신으로 섬기는 우상은 이사야 44장 10-20절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금이나 돌로 만든 상(象 )이고 원신으로 섬기는 우상은 이사야 65장  11 절에서 나타난 행운 운명 과 같은 초월적인 개념들이다.13) 이러한 두 종류의 우상이 함께 등장하는 부분은 사도행전 17장에 기록된 아테네에서의 바울의 설교이다 바울은 금이나 은이나 돌로 새긴 형상으로서의 우상 (근신) 뿐아니라 알지 못하는 신 (원신) 에게 바치는 제단도 있음을 지적한다.14) 개혁주의 기독교 철학 역시 이원론적이고 변증법적인 사고가 인본주의적세계관의 본질적인 특징이라고 말하고 있다.15) 코넬리우스 반틸도 무신론적 사고의 중요한요소 중에 하나로 합리주의와 비합리주의 사이의 긴장을 들었다.16)이처럼 모던적 사고를 떠바치는 하나의 기둥은 합리주의이다 이에 따르면 인간의 이성이 파악할 수 있는 것만이 지식으로 인정받는다 세상에 대한 지식은 모두 인간의 이성에 속하였고 이성만이 지식의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기준이 된다 또한 대부분의 합리주의자들은 인간의 지식을 근본적으로 선하다고 여겨 진보progress  를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즉 이성이 세계를 더 자유롭게 파악하면 할수록 인간이 직면한 문제들은 하나 둘씩 해결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뜻하지 않게 역사주의 17)를 낳고 만다.

첫번째 것과 정반대되는 모던적 사고의 두번째 기둥은 주관적인 자유 (비합리주의) 라고 할수 있다 인간은 과학이 적용되는 현상계phenomenal realm  이외의 또 하나의 영역 즉 종교적 도덕적 영역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객관적인 지식을 판별하는 과학적 기준들은 이러한 본체적인noumenal 영역에 적용될 수 없으므로 인간은 비합리적인 비약을 통해서 이러한 영역에서 의미를 찾으려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로부터 개인주의에 대한 모던의 지나친 강조가 나온다 낭만주의 운동 역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합리성을 포기해야 된다는 이러한 사상에 크게 빚지고 있다 낭만주의에 있어 아름다운 것은 이성이아니라 예술 작품이며 그것은 비록 인간이 만들었지만 만든 자를 초월하여 인류를 진리로 인도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두 기둥은 서로 융합되지 못한 채 함께 묶여져왔다 모더니티의 철학적 기원은 데카르트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위에서 말한 모더니티의 변증법적 특징은 임마뉴엘 칸트에 이르러 가장 뚜렷이 드러난다 보통 칸트를 가리켜 과학을 살린 동시에 종교에 대한 여지를 남겨놓은 자라고 평가한다.18) 먼저 칸트는 자신이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명명한 이론에서 흄에 의해 제기된 과학에 대한 회의를 극복한다 그는 과학을 단지 감각 경험을 통해 얻은 자료들의 합으로 보지 않고 자료들이 선험적인 감성과 오성에 의해 체계화되고 질서지워진 확실한 지식으로 과학을 국한시킨다 이러한 시도는 장차 변할 지도 모르는 개별적인 사건만을 제시하는 감각 경험에 선험적인 기초를 제공해 주기 때문에 계시에 의존하지 않고도 과학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또한 칸트는 종교를19) 도덕을 위해서 반드시 존속되어야만 하는 실천적인 요청으로 봄으로써 아무런 논증도 거치지 않아도 되는 순수한 자유의 영역에 가져다 놓는다 이처럼 그는과학을 살리기 위해서 합리주의를 극단적으로 몰고 가나 종교에 대한 여지를 남기기 위해서는 비합리적인 비약을 하는 것이다.20)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무신론적 사고에 깃든 이러한 변증법적 요소를 끄집어냄으로써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다.21) 따라서 칸트 이론의 핵심을 잘 파악하고 있다면 당신은 이 세대를 향해 해줄 말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칸트에 반대하거나 칸트에 동의하면서 철학을 할 수는 있어도 칸트 없이는 철학 할 수 없다는 말처럼 오늘날의 철학은 칸트에게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합리주의적이고 비합리주의적인 요소를 모두 갖춘 변증법적인 사고는 칸트를 위시하여 가장 최근의 철학자에서까지 발견된다.

어떤 이는 합리주의적인 면에 치중하고 다른 이들은 비합리주의적인 부분을 더 강조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어느 누구도 순전한 합리주의자요 완전한 비합리주의자라고 말할 수 없다 합리주의는 항상 최초의 전제를 논의의 기초로 해야 하며 그 전제 역시 당연히 합리적인 것이어야하나 사실은 비합리적인 신뢰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찬가지로 비합리주의는 논의를 기술하는데 있어서까지도 비합리적인 방법을 따라야 하나 실제로는 자신의 논의를 최대한 합리적으로 기술한다는 점에서 자신의 입장에 일관되지 못함을 보여준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이러한 측면에서 좋은 예가 될 수 있다.그들은 확실하고 명료한 지식에 이르려면 철학적으로 의미 없는 명제들은 추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두 가지 판단 기준 1) 명제를 구성하고 있는 단어의 의미를 통해서 명제의 참거짓이 드러나는 명제 (분석명제)22) 2) 감각 경험에 의해서 그 명제의 참 거짓이 드러나는 명제 (종합명제 )23)를 제시했다 따라서 하나님은 존재하시가? 절대적인 도덕이 가능한가?와 같은 신학적 형이상학적 윤리적 명제들은 그 두 가지 기준 중 어느 것도 충족시키지 못하므로 참도 거짓도 아닌 아무 의미 없는 비합리적인 것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그들이 제시한 철학적으로 의미있는 명제는 분석명제이거나 감각 경험으로 증명되는 종합명제이다 라는 명제는 과연 어떤 종류의 명제인가? 판단 기준으로 제시한 이 명제 역시 분석명제도 증명 가능한 종합명제도 아니어서 아무 의미없는 주절거림일 뿐이다 이처럼 독단적이고 비합리적인 전제를 자신들의 논의의 기초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역사적인 사실이 아닌 형용할 수 없는 체험의 상징으로 보는 현대 개신교 신학자들의 이론에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변증법적 사고는 전문적인 철학자들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우리는 이것을 문화 전반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영화 감독 우디 앨런Woody Allen 의 예를 들어 보자 그의 필름에서는 대부분 두 가지 사실들이 동시에 나타난다 즉 정직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삶의 의미를 찾는 모습과 동시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자 순간적인 쾌락을 즐기고 삶에 대해 진지한 자세를 포기해버리는 모습이 공존한다 한나와 그 자매들 이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은 신이 없다면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사후 세계가 존재하는가 라는 심각한 질문을 해댄다 그는 이런 질문에 무관심한 사람들을 훈계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심각한 질문 일랑은 집어치우고 그냥 코믹영화나 보고 삶을 즐기자라는 식으로 바뀐다.

2. 모더니티의 사회적 측면
모더니티의 정신성 즉 모더니즘만큼 모더니티의 사회적 측면을 살펴보는 것 또한 중요하다 모더니티는 사회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수용되었는데 여러가지 사회 제도나 현상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모더니즘을 반영할 뿐 아니라 촉진시키는 역할을 담당해왔다 나는 그것들 중 다섯 가지를 간략히 언급한 뒤 여섯번째 것은 비교적 상세히 다룰 것이다

1) 첫번째는 자본주의 경제의 발생이다 이것은 개방 시장에서의 자유 경쟁 생산 수단을 소유하는 계층의 확대 사유 재산권의 보장등을 의미한다 2)두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은 기술과 산업의 발달이다 모던적 의미에서 이것은 생산량을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늘릴 수 있는 도구와 기계의 사용을 의미한다  3) 빠른 통신수단의 발달도 들 수 있는데 전보 전화등의 의사 전달 수단과 사람들이 신속하게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매체 등은 과거의 통신 수단과 비교해 볼 때 질적으로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4)이러한 현상들과 아울러 도시화 세계화도 빼놓을 수 없다 최근 2세기 동안의 여러 통계 자료를 볼때 1800년대에 세계 인구의 5% 에 불과하던 도시 인구가 2000년 대에는  55% 까지 증가할 전망이다  5)다섯번째 모던적 현상으로 민주주의의 발달을 들을 수 있다 많은 나라에서 통치 권력은 계승되거나 소수 엘리트에 집중되지 않고 대표자들을 통해 직 간접적으로 국민들에게 주어지게 되었다.

6) 여섯 번째 현상은 세속화 로 약간의 긴 설명이 필요하다 이 세속화secularization 라는 말은 최소한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번째로는 권력과 교회의 분리 혹은 국교폐지와 평신도 계층의 지위 상승이다 세속화의 이러한 측면은 때때로 정교 분리 laicisation라고 불려지곤 하였다 세속화라는 말이 가진 두 번째 의미는 삶에 질서를 부여했던 기독교 세계관의 쇠퇴 혹은 기독교 신앙의 상실을 뜻한다 이러한 개념은 세속주의secularism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며 오늘날 세속화라는 말은 주로 이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는 것 같다 모더니티에있어 종교에 관한 가장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세속화에관한 이야기이다 모던 시대에 세속화는 일반적으로 권력으로부터 교회가 분리되는 현상을 가리키는 정교 분리를 의미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영국 의회의 성립과 같이 비교적 평화롭게 이루지기도 하였으나 프랑스 혁명처럼 폭력을 수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세속화의 첫번째 개념으로부터 논리상 신앙의 쇠퇴라는 결과가 당연히 따라 나오는 것은 아니다 사실 정치적인 연루에서 벗어난 교회는 일반인의 삶에 과거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된 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세속화는 기독교를 모든 권위의 근원이라는 보좌에서 끄집어내려 사회의 제영역(諸領域 ) 중의 하나로 만들어 버렸다 이로 인해 종교는 점점 더 개인적인 문제가 되어버렸고 더 이상 보편적인 진리를 선포할 수 있는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세속화를 이해함에 있어 주의해야 할 두 가지 사실이 있다 첫째 세속화가 언제나 신앙의 쇠퇴를 야기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두 종류의 세속화는 필연적인 관련성이 없다 사람들은 세속화된 사회에서는 모든 종류의 신앙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지라도 반드시 쇠퇴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칼하게도 이 예상은 빗나가고 있다 세속화에 있어 주목할 만한 점은 여러 종류의 신앙이 부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베버 Max. Weber 이후의 사회학자들은 고도로 산업화된 사회는 종교와는 양립할 수 없 .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장 산업화된 나라 중에 하나인 미국의 예를 들자면 1930년대 이후, 현재까지 교회를 다니는 인구수는 미국 전체 인구의 약 42% 로 일정한 비율을 유지하고 있다 . 오늘날 미국 인구 중 94% 가 신을 믿는다고 하였고  84%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사실을 인정하며  34% 이상이 자신은 거듭난 혹은 복음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25) 모던 사회에서는 이방적인 신앙 역시 번창하고 있다 또한 치료술 음식 요법 심령술 뉴에이지와 같은 유사 종교적 프로그램을 동반한 새로운 이단들이 속출하고 있다
어떻게 세속화되어가는 사회에서 종교가 더 부흥하는가? 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두 가지 대답이 가능할것이다 첫째 기술과 산업의 발달이라는 세속적인 흐름은 신비적인 것으로만 채워질 수 있는 영적인 진공 상태를 만들어 놓았다는 설명이다 둘째는 첫번째와는 반대로 기술의 발달이야말로 종교의 부흥에 있어 유일한 촉매제였다는 설명이다 이것은 1970-80년대 근본주의자들이 복음 전도를 위해 TV와 같은 대중 매체를 적극 이용했다는 점을 볼 때 쉽게 이해가 된다. 넓은 의미에서 볼 때 모던 시대의 세속적인 상황에서는 본래적인 의미의 종교 뿐아니라, 사회주의 과학주의 인본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도 종교처럼 신봉되었다는 점에서 종교의 부흥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26)

주의해야 할 두번째 사실은 서구에서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고 있는 나라가 줄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각 나라마다 세속화의 과정은 매우 상이하게 진행되어 왔다는 점이다 영국의 사회학자 데이빗 마틴David Martin 은 27) A General Theology of Secularization에서 세속화 과정의 다양한 모습들을 연구해 놓았다 그는 크게 독점적 다원적 복합적이라는 세 가지 형태의 세속화 과정에 대해 말하고 있다 독점적 형태의 나라는 국가와 하나의 교회 일반적으로 그리이스 정교나 카톨릭 사이의 연합이 이루어진 곳이다 세속화가 닥쳤을 때 기독교에 대한 반대가 너무나 심해서 그 혁명적인 이념과 교회 사이에 충돌이 있었고 전쟁을 치루고 나서야 문제가 해결된 경우이다 스페인이나 프랑스 러시아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다원적인 형태는 어떤 하나의 종교만을 믿을 의무가 없는 나라이다.28) 이러한 곳에서 세속화란 종교 그 자체와는 그리 큰 관련이 없기 때문에 각 종파들과 교단들은 자유롭게 발전하게 된다 미국은 이러한 다원적 형태의 전형이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한 것은 종교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묵시적으로 공인된 종교 (예를 들어 의회 내에서의 기도)가 있으며 이 종교가 문화를 세속화로부터 지키는데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복합적인 형태는 종교가 부분적으로 국가로 부터 국교로 인정을 받으나 부분적으로는 분리되어 있는 나라이다 영국이 이러한 나라이다 영국에서는 공인된 종교인 성공회가 세속화의 흐름을 저지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 형태의 변형으로는 마틴이 복점적 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즉 두 개의 공인된 종교가 존재하는 나라인데 화란과 아일랜드가 좋은 예이다 이 두 나라에 있어서는 작은 교회일수록 더 개혁주의적인 성향을 띄고 있다 .

3.모더니티의 기원
모더니티는 언제 시작되었는가?  우리는 폴 존슨Paul Johnson  의 견해를 따르려고 하는데, 그는 모더니티가 1815년부터 1830년까지 15년동안에 그 구체적인 모습이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29) 이 기간 동안 삶의 여러 측면에서 다양한 변화가 있었다 그 시기는 뉴올린즈에서 앤드류 잭슨이 영국에 대해 승리를 거두었으며, 웰링톤음 나폴레옹에 승리를 함으로써 시작되었고 그 세기의 나머지 기간 동안 빈체제가 유럽을 이끌어 갔다 영국과 프랑스는 자신들의 막강한 산업적 문화적 정치적 힘을 바탕으로 세계를 지배하였으며 미국에서는 서양문명이 틀을 잡아가기시작하였다 이 기간 동안 모더니티는 사회적 철학적 종교적 측면에서 주도권을 잡았던 것이다.

모더니티와 같은 불확실한 개념의 명확한 기원을 찾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는 상이한 입장에서 모더니티의 기원에 접근하려는 논의가 있다 예를 들어 여러 역사가들은 모더니티의 시작을 르네상스나 종교개혁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그들의 주장이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르네상스의 휴머니즘은 문화와 철학에 있어 중세의 신 중심적인 입장으로부터 탈피하여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하였기에 모더니즘 발생에 중요한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학자들은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권위가 개인으로 옮겨졌기 때문에 자본주의 과학 민주주의와 같은 모던적 현상들이 야기되었다고 주장한다.

위와 같은 견해와 맥을 같이하는 입장으로는 종교개혁이 세속화를 가속시켰다는 이론이 있다 이 제 무덤 파는 자 이론에 따르면 종교개혁적 세계관의 세속적인 성격때문에 세상이 급속도로 세속화되었다는 것이다 십계명 중 제 2계명에 대한 엄격한 해석에 때문에 종교 개혁자들은 천상의 것에 대한 어떠한 모형도 이 지상에서는 허용하지 않았고 이러한 입장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 근대 과학의 발달 개인의 자유의 신장 등을 가져왔지만 시간이 갈수록 종교의 자유는 종교로부터의 자유로 근대과학은 과학주의로 개인의 자유는 개인의 자율로 각각 극단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모더니티의 부수적인 조건은 될 수 있을망정 근본적인원인으로 까지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에 있어서도 인간에 대한 강조가 있었으나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아 고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한 결과이지 (특히 종교개혁에 있어서) 신본주의적 세계관을 뒤집어 놓으려는 의도는 없었다 오히려 앞의 제 무덤 파는 자 이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주목해야했을 점은 18 19세기의 사상이 종교개혁과는 달리 근거 없는 이성의 자율성30)을 너무 맹신 했다는 사실이다 종교개혁이 원하던 바는 질서와 권위의 파괴가 아니라 성경적 진리로의 복귀였다 이런의미에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관한 한 종교개혁은 일종의 보수적인 운동이라고까지 말할수 있다.31)

따라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은 모더니티의 간접적인 조건으로 보아야 한다 직접적인 원인은 17 세기 후반에 시작되어  19 세기에 이르러 문화적 사회적 현실이 되어버린 유럽 의식의 위기 였다 모더니티의 중심되는 주제는 초월에서 내재로 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제 삶을 질서 지우는 원칙에 있어 인간적인 것들이 신적인 것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모더니티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겨놓았는가? 모더니티의 미래는 어떠한가? 오늘날 여러 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모더니티에 대한 다양한 평가는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리시대에 어떻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 두 부류를 각각 살펴봄에 따라 . 구체화 될 것이다 모더니티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첫번째 부류의 입장은 오늘날 여러가지 모더니티의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모더니티의 기획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입장이다 두번째는 모더니티는 이제 그 힘이 다했고 모더니티의 기획에 대한 믿음은 산산조각이 난 지 오래되었다는 주장이다 이제 우리는 이 두 부류의 입장을 각각 살펴볼 것이다

4. 모더니티의 기획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오늘날 모더니티에 대해서는 수 많은 평가가 내려지고 있다 오스 기니스는 말하기를 모더니티라는 개념은 너무나 복잡해서 한 권의 책으로 혹은 하나의 관점에서 그 개념이 가진 여러 내적 의미를 완전히 파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지만 이 개념의 복잡성과 그 복잡성으로 인해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모더니티에 관한 논의를 아주 마비시키는 결과를 낳아서는 안 된다 라는 점도 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32) 모더니티를 평가하고 그것이 가진 본질적인 특징과 피상적인 현상을 구별하여 모더니티의 앞날을 예측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필요한 작업이다.

많은 사상가들이 모더니티의 기획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다 그들의 대부분은 모더니티의 구조는 우리 삶에 너무나 깊숙히 뿌리박혀 있어서 쉽사리 뽑히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예를 들어 피터 버거Peter Berger  는 모더니티를 숙명에서 선택으로의 운동 이라는 긍정적인 정의를 내린다 즉 과거의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계층과 전통에 의해 숙명지어졌지만 모던 시대에는 자신이 직접 내린 선택에 의해 삶을 형성해 나간다는 것이다 빠른 통신 수단 교통 수단과 같은 기술 역시 이러한 선택을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이다 버거는 오늘날 인간의 삶에서 기술이 갖는 필요성과 중요성을 감안해 볼 때 이 운동은 쉽사리 반전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한다.

다니엘벨Daniel Bell 과 같은 신보수주의자들은 모더니티가 현재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 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로 경제적 합리성 절제 인내 등의 가치를 기저로하는 자본주의의 논리가 기본적으로 건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현재의 문제점은 여러 문화적 영역에서 비판 정신과 자유가 과도하게 남용되어서 학문이 진보하기보다는 그라마톨로지33)와 해체의 기획에 말려들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34)

앨런 블룸Allen Bloom  은 미국 정신의 종말『The Closing of the American Mind 』 에서 드 수자 Dinesh D'Souza 는 편협한 교육『 illiberal Education 』 에서 좀 완화된 어조이긴 하지만 벨과 마찬가지로 모더니티 구조는 계속해서 존속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이 다루는 주제는 주로 모던적 교육의 문제점에 대한 것이다.35) 블룸은 오늘날의 대학들이 모더니티를 송두리채 부정하고 있는 현재의 기류에 편승하여 서구의 건전한 정신을 팔아먹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계몽주의란 정치적이고 정신적인 삶 모두를 철학과 과학의 후견 아래에 놓으려는 가장 과감한 시도이다 라고 평가하면서 대학이 이러한 시도를 고양시키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따라서 대학들이 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문화적 위기 상황이라는것이다 블룸은 우리 시대가 표현주의와 상상력으로 이성을 대신하고 관능의 힘으로 절제라는 덕을 대치하고 있다고 말한다 드 수자 는 자신의 책에서 현재 미국의 명문 대학에서 유행하고 있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politically correct’ 36)이라는 운동은 합리성에 반할 뿐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와 대학의 존재 목적을 파괴시킬 지도 모를 위협이 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블룸과 드 수자 모두 계몽주의야말로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고의 가치라는 전제 하에 현재의 문화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종말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37)에서 볼 수 있는 후쿠야마의 견해는 한층 더 놀랍다 그는 자신의 견해를 최근 들어와 조금 누그러뜨리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그 이론의 기본적인 틀에는 큰 변함이 없다 1989년에 일어났던 일련의 획기적인 사건들이 의미하는 바는 공산주의가 완전히 몰락했다는 사실 뿐만이 아니라 이제는 인류가 역사의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지탱하고 있는 서구의 자유민주주의는 인간이 고안해 낼 수 있는 최후의 정부 형태이고 온 세계가 이 민주주의를 받아들이게 될 때 우리는 인류의 진화에 있어 마지막 지점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미국적 낙관론과도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었기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38)

모더니티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더욱 체계적이고 설득력 있는 논거를 가지고 펼치는 자들은 비판 이론 학자들이다 하버마스 Jürgen Habermas 아펠Karl Otto Apel 골드버거Paul Goldberger 같은 철학자들은 부분적으로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모더니티의 기획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 여전히 좋은 것들을 캐낼 수 있는 보고(寶庫 )  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베버Max Weber의 논의를 계승하면서 사회적 영역들의 다양한 분화인 합리화 는 인간의 해방과  문화의 발달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또 다른 측면으로는 역설적으로 인간소외 억압 물상화 같은 병리 와 비합리화 를 수반한다고 보았다

그 이유로 그들은 본래적으로 이성은 효과적인 수단의 측량과 함께 목표의 정당성도 따지는 포괄적 이성이었으나 모던의 합리화 과정에서 이성은 그 본질적 포괄성을 상실하고 단지 도구적 이성으로 변질되어 목표에 대한 자기비판과 성찰이라는 고유 임무를 포기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은 또한 이러한 도구적인 이성만의 강조가 공산주의와 나치즘의 전체주의 시대를 배태했다고 보고 이성의 본래적인 지위를 회복하는 것이야 말로 오늘날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임을 강조하면서 이성의 도구적인 측면(과학 기술)과 규범적이고(윤리,그들의 계획에 의하면 정치 까지도) 해방적인 (미학) 측면사이의 결합을 시도한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신보수주의자들의 오류는 자본주의의 선한 면과 자본주의 문화의 악한 면을 분리해서 생각했다는 점이다 특별히 그들은 종교로의 회귀를 통해 문화의 회복을 꾀했다는 점에서 크게 잘못되었고 한다 하버마스는 여러 학자들이 모더니티란 우리 사회의 의사 소통 구조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39) 매우 강력한 힘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이것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모던적 문화에 대한 염려없이 모더니티를 끌어안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버마스는 여전히 모더니티에 머물면서 모더니티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인 자족적인 이성에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그는 해석학(의사 소통적 이성)이 해방적 이성에 의해 올바르게 이끌려 질 때 최고의 사회 비판 방법으로서 사용되어질 수 있다고 한다 참된 인간 해방을 위하여 우리는 해석학을 이용해 단순한 시장 경제와 정치적 통제를 넘어서 더욱 문화적으로 바람직한 사회를 향해 갈 수 있다는 것이다.40) 이처럼 하버마스는 오늘날의 병리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모더니티를 내팽겨치는 것이 아니라 모더니티의 기획을 완성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기술과 같은 모더니티의 중요한 요소는 사회적 합의라는 방법으로 책임있게 사용되는 한 여전히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5.모더니티의 기획은 끝장났다 .
모더니티를 앞의 경우와 다르게 평가하는 부류는 모더니티의 근본적인 명맥이 유지될 수없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모더니티가 품었던 기획은 이제 미궁에 빠져 버렸고 이러한 상황을 가장 잘 묘사해 주는 단어가 바로 포스트모던41)이라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이란 광범위하게는 사상계의 새로운 조류를 총칭하는 말인데 그 중에는 그럴 듯한 주장이 있는가 하면 황당무개한 것도 있다 실상 포스트모더니즘의 주 활동무대가 대학이고 그중에서도 인문과학 분야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원이 철저하게 학문적인 것만도 아니고 포스트모더니즘의 함의 역시 학문적인 것에 국한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앞에서 모더니티와 모더니즘과의 구분을 꾀했던 것처럼 포스트모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구분 역시 가능하다 그렇지만 전자의 경우와는 달리 후자는 단순히 시대와 정신성 (이념)으로 구분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그것 보다는 일반적인 상황 (포스트모던) 과 그런 상황들을 규정지어 놓은 것 (포스트모더니즘) 이라고 구별할 수는 있겠으나 사실 둘 간의 차이는 미미하다 이러한 포스트모던을 정의하는 데에는 몇 가지 아이러니컬한 점들이 뒤따른다 우선 포스트모던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 어법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어떻게 나중과 지금이라는 단어가 성립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런 식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반박할 수 있을 만큼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문제시되는 것은 지금 contemporaneity이 아니라 . 바로 모더니티modernity 이기 때문이다 두번째 아이러니컬한 점은 다음과 같다 어떤 면에서보면 포스트모던이라는 단어는 실존주의 표현주의 등과 같이 논의에 앞서 그 개념을 규정해야만 하는 모호하고 광범위한 용어이므로 모더니즘의 핵심 무정형성 유동성 을 표현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하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그 단어의 모호성은 그것을 일관되게 사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고안된 것이라는 점이다.
 어원적인 분석이 우리에게 포스트모던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제공하지는 않지만 어근으로부터 한 가지 중요한 의미는 도출해 낼 수 있다 즉 모더니티의 기획을 의심하고 비판하는 것이 포스트모던이 가진 최소한의 의미라는 점이다.

포스트모던이라는 용어 역시 모더니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 용어의 기원을 연구해서는 별 다른 수확을 얻기가 힘들 것이다.42) 오히려 포스트모더니즘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그것이 관련된 여러 영역 중에 지표가 되는 두 가지 영역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더욱 유익할 것이다 우리가 살필 첫번째 지표는 건축이다 건축은 여러 예술 분야 중에서 가장 쉽게 일반인의 눈에 드러나는 양식이다 서구 사람들은 모더니티의 경험을 대담하게 건축으로 표현하였는데 1919년에 독일에 설립된 바우하우스 Bauhaus43)를 중심으로 하는 일련의 건축가들의 활동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시각 예술 분야에서 바우하우스가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한 것이었다.

바우하우스 학파의 모더니스트 건축가 중 세 명의 선구자는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앙리 르 꼬르뷔지에 Henri Le Corbusier,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 였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건축은 사용된 재료면에서나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면에서 이전과는 다른 것 이어야만 했다 즉 건축물 자체와 내부 가구들 도색 작업 등이 전통적인 양식과는 달리 실용성이라는 측면이 강조되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르 꼬르뷔지에가 말한 "집은 살기위한 기계이다 Une maison est une machine à habiter”44)에서 우리는 그 당시 건축의 경향 (기능성의 과도한 강조)을 읽을 수 있다 이제 건축의 미는 그 건물의 장식이나 상징적인 형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건물 자체에 있게 되었다 말하자면 엔지니어가 진정한 예술가가 되어버린 셈이다 이러한 모더니스트 건축가들의 주장은 유토피아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발터 그로피우스가 주창한 바우하우스 선언Bauhaus Manifesto 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설파하고 있다 "우리 다같이 새로운 미래의 예술을 바라고 꿈꾸고 창조해 냅시다 그것은 건축과 조각 회화 모두를 하나로 아우를 것이며 훗날 수백만의 사람들의 손에 들려져서 하늘로 올라갈 것입니다.”45)

건축의 영향을 받아 여러 문화 영역에서 기능주의를 주조로 하는 국제주의 양식 International Style’46)이 그 발전 토대를 미국에 내리게 되었다 그 결과 미국의 거대 도시들은 대부분 모더니즘의 양식을 따른 네모반듯한 건물들로 가득차게 되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  가 그러한 철학을 극단화시킨 대표적인 건축가이다 이와 같은 모더니스트 건축의 눈에 띄는 획일성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강력한 반발을 일으키는 빌미가 되었다.

그 반작용 역시 미국을 필두로 해서 일어난다 로버트 벤추리Robert Venturi 한스 홀라인Hans Hollein,찰스 무어Charles Moore 를 비롯한 많은 건축가들은 포스트모던적 입장을 취하 게 되었다 자신의 책 『포스트모더니즘 』에서 스스로를 포스트모던이라는 용어 사용의 선구자라고 지칭47)한 찰스 젠크스의 견해에 따르면 오늘날 중요한 건축물들이 모더니즘에게 작별을 고하고 새로운 방향을 추구하고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인간적인 온기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기능주의적 건물에서 머물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리하여 모더니스트 적 건축은 1968년에 운명을 달리했으며 1972년에는 그 징후로 두 개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건축물이 자연 붕괴와 폭파에 의해 사라져 버렸다 모던적 건물들의 붕괴와 더불어 우리가 당면한 사회 문제들을 테크놀로지가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순진한 기대 역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모더니즘이 떠난 텅빈 자리를 과연 무엇이 채울 수 있단 말인가? 환영 과 무지목매함의 암흑 속에 갇혀 있던 모던 이전 시대로 회귀할 리는 만무했다 찰스 젠크스는 그 자리에 ‘ 이중 코딩- (double-coding)’  을 추천하고 나선다 다시 말해 모더니즘을 뒤이어 등장한 건축양식은 단순히 낡은 것을 새 것으로 대체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았다 실제 그 건물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안락함(편리함)과 유희적(익살스러운) 요소를 동시에 주기 위해서 모더니스트적 건축의 기능성과 그 외의 다른 요소들 예를 들어 고전적인 건축 양식에서 인용해 온 요소들 의 조합을 꾀했다 모더니즘을 떠나 내용면에서나 형식면에서 다원적인 양식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48)

이제 주도적으로 군림하는 건축 유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모던한 건축이 자족성(自足性 ) 을 기본 원리로 해서 일관된 양식을 추구했다면 포스트모더니스트 건축가들은 다양한 의미와 상징들을 건축에 담아 퍼뜨리려고 한다 이것을 가장 잘 드러내 보이는 건물들이 뉴욕에 있는 AT &T 건물과 뉴저지주 프린스톤에 있는 고든 뷔 식당 Gordon Wu Dining Hall49)이다 AT & T건물의 아래 부분은 인터네셔널 스타일인데 반해 지붕은 로코코 양식으로 되어 있고 고든 뷔 식당은 서리아나 Serliana50)양식을 도입하였다.51) 

포스트모더니즘 건축 양식의 가장 탁월한 예로 손꼽히는 건물은 독일의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네우 슈타츠 미술관 Neue Staatsgalerie 이다 이 건축물의 중심부는 18세기적인 석조건물인데 반해 건물의 테두리는 빨간색 철골 구조가 둘러치고 있으며 이 철골 테두리 외에도 코믹한 터치가 두 부분에서 나타나는데 건물 측면의 벽에 마치 이빨이 빠진 것처럼 구멍을 뚫어놓은 것과 건물 외부에 입방형 철골 구조로된 원시오두막 형태의 택시승강장이 그것이다.52)
 어떤 면에서 보면 건축에 있어서 위와 같은 조류는 단순한 절충주의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좀 더 깊게 파고 들어가 보면 위에서 살펴본 이중 코딩 양식은 단일한 의미나 단일한 질서가 가능하다는 모던적 사고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포스트모던적인 모험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사고이다 일관된 진리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모더니즘의 근거 없는 주장들을 거부한 데 대해 찬사를 보내야 한다 모더니스트들이 주장한 순수한 기능성에 기초한 진리는 진리가 아니라 합리주의자들의 기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모더니스트들의 부정적인 것을 쓰레기통에 집어넣으면서 긍정적인 것들까지 통째로 내버렸다는 점이다 결국 그들이 한 것이라고는 차가운 합리주의 대신 낙관적 비합리주의를 취한 것 뿐이었다 이 글의 결론 부분에서 다룰 내용을 약간만 언급해 보자면 포스트모더니스트들도 모더니티가 가진 합리주의 비합리주의 딜레마를 극복해 내지 못했다.

포스트모던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살펴볼 두번째 지표는 이 글의 첫부분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장 프랑스아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의 조건: 정보 사회에서의 지식의 위상』이다 퀘백 정부 산하 대학 정책 자문 위원회의 요청으로 제출한 이 책은 제목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커다란 파급 효과를 끼쳤다 그 이유로 우리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첫째는 이 책이 당시 문화의 주된 흐름에 대해 명확하게 밝혀주고 있음과 동시에 그러한 흐름을 확산시키는 도화선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또 다른 선구자인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 이 앞의 책을 영어로 옮긴 번역본 서문에서 제시한 것으로서 리오타르의 책이 여러 영역에서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 포스트모던 논의의 교차점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리오타르의 책이 미국에 일으킨 반향 역시 그 책에 담긴 논의가 과학 기술 지식의 통제 등 여러 영역을 포괄하고 있었다 점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 책의 논지는 한마디로 우리가 더 이상 거대 이야기 metanarrative(le grand récit)’53)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모던 이전의 사람들은 지식의 정당성을 이야기 를 통해 획득하였다.54) 그러나 지식에 대한 이러한 접근 방식이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한 모던 시대의 사람들은 이야기와 정당화 사이의 관계를 분리시키려는 시도를 하였다 예를 들어 과학적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은 이제 이야기에 호소할 수 없고 자신의 주장을 실험을 통해 객관적으로 증명하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 모던 시대가 자기 정당화라는 원시적이고 권위적인 이야기 구조로부터 탈피해 객관적인 기준들에 의해 지식의 정당성을 확보하였으므로 한층 진보한 것 같았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모던 시대의 지식 역시 이야기 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예를 들어 모던 시대를 탄생시킨 과학적 방법론은 온 우주를 지으신 합리적이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이야기로부터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들은 계몽주의의 이념인 진보 이성의 빛을 통해 모든 억압으로부터 인류의 해방55) 이라는 거대 이야기 속으로 통합되고 체계화 된 것들이었다 그러나 리오타르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몇 년동안 그 진보 라는 모던적 거대 이야기는 신뢰를 상실했다고 한다

사실 역사적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야기들은 힘을 잃어왔고 다른 새로운 이야기들에 의해 계속해서 교체되어 왔기 때문에 모던 사회를 정당화 시켜온 거대 이야기가 이제 그 힘을 상실하고 다른 거대 이야기에 의해 대체되는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상황은 거대 이야기의 전이轉移 가 아니라 거대 이야기 자체의 몰락沒落 이라는 점에서 과거와는그 성격을 완전히 달리한다 이제 여러 상이한 이야기들을 체계화 시켜주고 통합시켜줄 거대이야기가 없어진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급속도로 진전된 과학의 과도한 분화와 생태학적 문제 의식은 이러한 상황을 알리는 전조였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거대 이야기라는 중심이나 총체성으로 환원되지 않은 채 서로 이질적인 상태로 공존하는 작은 이야기들의 장場에 서 있는 것이다 리오타르는 비트겐슈타인이 사용한 개념을 인용해서 상이한 각각의 이야기들을 언어게임linguistic doing’56)으로 이해한다.57) 다시 말해 우리는 지금 모든 것을 통합해 온 거대이야기의 위엄과 작별하고 분화된 작은 이야기가 자율성을 만끽하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는 것이다.58) 거대 이야기가 사라진 지금 과학 역시 통제되기 어렵게 되었을 뿐 아니라 학술적인 토론 등으로 보편적인 합의에 이르는 것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리오타르는 오히려 현 상황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려 한다 이제 과학은 보편적인 합리성이나 진리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실용성이나 힘의 논리에 의해 조작될 위험에 처해 있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과학은 이제야 비로서 상상력의 자유를 획득했다고도 할 수있다는 것이다 잘못된 사고 양식이라고 알려진 배리성 (背理性 , paralogy)’ 59)을 이용하여 우리는 이성을 전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새로운 탐구의 장을 개척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거대 이야기가 아닌 작은 이야기 를 통해 우리는 전체주의적 지식의 테러 에서 벗어나서 지역적이고 제한된 계약의 한계 내에서 미시적인 언어 게임을 자유롭게 전개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제시한 두 가지 지표 즉 새로운 건축양식과 리오타르의 책은 우리에게 포스트모던의 긍정적인 면 뿐아니라 문제점까지도 제시해 준다 포스트모던이 힘을 얻을 수 있었던 요인은 아무래도 학문적인 연구에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앞에서도 말했듯이 포스트모던이 학문적인 영역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포스트모던은 문화 전반에 영향을 끼쳐왔다 우리는 그 흔적을 다양한 영역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데 우선 포스트모던 록 음악의 등장이그 예이다.60)

또한 심슨네 가족들 The Simpsons 나 비비스와 버트헤드Beavis and Butthead’  같은 TV만화는 포스트모던 건축 양식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중 코딩 요소를 보여준다 포스트모던의 학문적인 내용과 일반문화의 상호 관계는 양면성을 띠고 있다 첫째 그 둘 사이에는 삼투압 현상같은 효과가 있었다 즉 포스트모던 학자들이 강의한 내용은 그 강의를 들은 학생들에 의해 널리 퍼져나가고 유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둘째로 그 둘은 특별한 인과관계 없이 나란히 발전해 나간 경우도 있었다 포스트모던의 학문적인 요소는 일반 문화로서의 포스트모던을 위한 풍향계로 작용했을지는 모르나 양자는 서로 분리된 상태로 각각 발전해 나가기도 했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 사이에서 일어난 학문적인 논의야말로 포스트모던적 상황을 이해하기위한 핵심 요소이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스트들 중 일부는 우리 시대를 가장 암울한 시기라고 평가할만큼 극도로 회의적인 사람들이다 니체와 하이데거의 사상을 이어받은 그들은 오늘날과 같이 파편화된 시대 속에서 우리는 보편적인 진리 대신에 찰나적인 통찰만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리차드 로티Richard Rorty 역시 진리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으로 취할수 있는 것은 실용성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미국 독자들을 매혹시켰던 자끄 데리다Jacques Derrida는 롤랑 바르트 Roland Barthes  의 이론을 받아들여 순간적인 쾌락만이 포스트모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유일한 위안이라고 본다.61) 이와 달리 우리시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포스트모더니스트들도 있다 그들은 포스트모던을 여성이나 소수에게 행해졌던 억압 같은 과거의 폐해를 바로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긴다.62)

많은 신학자들이 포스트모던 이론을 나름대로의 목적에 따라 이용해왔다 마크 테일러Mark Taylor 는 조물주 피조물을 구분하는 전통적인 이원론 을 배격한 무신론적 신학을 주장한다 그는 신학이란 상징적 이해를 통해 드러난 상대적 진리를 기반으로 해야한다고 말한다.63) 존 밀뱅크John Milbank  는 사회비평에 포스트모던과 기독교 모두를 이용하려 든다 .그는 포스트모던 분석은 실증적이고 보편적인 지식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전통 사회학 이론의 오류를 바로 잡는데 유용하다고 보았으며 기독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자기 모순성과 거대이야기의 부정으로 인해 차이 만이 존재하게된 포스트모던 사회의 통합과 조화를 위해 필요하다고 보았다.64)

알렌Diogenes Allen  오든 Thomas Oden 과 같은 신학자나 월쉬 Brian Walsh같은 기독교 철학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복음전도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수용한다 알렌은 흄이나 칸트 같은 모던 시대의 정적 들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 의해 제거되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제사람들은 다른 종교와 세계 전반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이 사실은 그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진리로 받아들이게 하는데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것이다.65)

위에서 언급한 오든은 자유주의적 배경으로부터 복음적인 신앙으로 돌아선 사람이다 그는역사를 모던 이전 시대 정통주의 모던 시대 정통주의로부터 이탈 포스트모던 시대 정통주의의 회복 이라는 식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해석은 모던 시대를 자율적인 이성 세속화 뿐아니라 이와 병행해서 일어난 신학적 오류들 즉 형식뿐인 경건주의 자유주의 신정통주의 탈신화화 등으로 얼룩진 시기로 보는 데서 기인한다.

따라서 오든은 포스트모던 시대야말로 정통주의를 회복하기에 좋은 기회라고 본다.66) 월쉬는 사회과학적인 관점에서 포스트모던 상황이야말로 기독교 세계관을 재조명할 수 있는 좋은 계기라고 생각한다.67)

6. 우리 시대를 위한 복음 전도
모더니티에 대한 상이한 평가들에 직면하여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우기 오늘날 우리에게 닥친 철학적 난제들을 모두 해결할만한 만능열쇠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현 상황의 복잡성을 인식하면서도 우리는 이 시대의 근본적인 문제점들을 관통하는 올바른 지식을 가져야 한다 이제 앞에서 살펴본 모더니티를 바라보는 두 부류의 입장에 대한 기독교적 견해를 각각 살핀 후 새로운 대안을 제시해 보도록하자.

첫째 모더니티의 기획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입장을 취하는 자들의 주장은 많은 부분 설득력이 있다 나 역시 모더니티의 몇몇 특징들은 우리 삶에 너무 깊히 뿌리 박혀있어서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자본주의 기술 빠른 통신 도시화와 같은 사회적 현상들은 그것들이 비록 중립적인 것은 아니지만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혹독한 비난과 모더니티 내에서의 비판적 반성에도 불구하고 쉽게 뒤집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구조적인측면에서 볼 때 모던 사회에 살고 있고 이 사실은 가까운 장래에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68) 그러나 모더니티에 대한 신보수주의자들의 접근은 몇 가지 기본적인 면에 있어서 오류가 있다 우선 그들은 모더니티 내의 다양한 부분들 사이의 구조적인 관련성에 대해서는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다니엘 벨은 특별한 이유 없이 자본주의 사회와 그 문화적 위기를 자꾸 분리해서 생각하려 한다 개인주의 쾌락주의 소비주의 자본주의 인종 차별 등은 계몽주의의 자율적인 철학과 깊숙히 연관되어 있다 그것들은 합리주의라는 우상의 어두운 측면인것이다 예를 들어 아담 스미스에 의해 주창된 자유 시장 기능을 가진 순수한 자본주의는 늘 보아왔던 것처럼 필연적으로 작업 환경 부의 분배 인종적 약자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의 왜곡을 가져온다 하층민이나 가난한 자들은 자본주의의 적자생존원리 속에서는 성공할가치도 없는 자들로 여겨지는 것이다.

앨런 블룸과 드 수자의 대학에 대한 비판에 관해서는 첫째로 그들이 대학의 현 상황을 너무 과장하였고 둘째로 그들이 대안으로 제시한 것 역시 타당하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대학의 퇴조적인 분위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가능한 한 대학의 현 상황을 조심스럽게 살필 필요가 있다 방송국이 마련한 그 유명한 토론회 . PBC에서 토론자들은 두 편 즉 정치적으로 올바른 이라는 운동이 오늘날 대학가에 만연해 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다고 하는 사람들으로 나누어졌다 후자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신보수주의자들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더우기 신보수주의자들은 인권의 신장과 소수 보호라는 측면에서 이루어진 진정한 진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오늘날 대학의 교과과정에서 볼 수 있는 새로운 시각들은 서구 문명의 협소한 경쟁의식을 바로잡는데 기여하고 있다.

신보수주의자들의 오해의 뿌리는 고등 교육에 대한 계몽주의 프로그램을 너무 과신했다는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은 오늘날 모더니티의 이념 중 가장 의심스러운 부분인 인간의 자족적 자율적인 이성 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있다 비판 이론은 신보수주의자들처럼 경제 구조와 문화를 별개로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었다 그 외에도 우리는 그들에게서 몇가지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하버마스는 우리에게 이성과 의사소통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측면을 보게 해 준다 우리가 이 점을 인식할 때 모던적인 생활 양식 특히 모던적 개인주의가 지닌 문제점들을 더 자세히 발견할 수 있다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69)와 함께 시작된 모더니즘은 주체와 도구적이성을 너무 강조한 결과 우리의 생활 세계가 체계에 의해 식민지화70)되어버렸고 언어 행위즉 의사소통은 비특권 계층을 억압하기 위해 체계적으로 왜곡되어져 왔다는 그의 지적은 올바른 것이다 그러나 하버마스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점은 세 가지 유형을 가진 이성의 회복71)을 그 식민지화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로 제시한다는 점이다 그의 이론적 정교함에도 불구하고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의 독단적이고 비합리적인 왜곡을 막을 방도를 찾지못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이성이 올바르게 사용될 수 있을 기초를 발견하기를 원한다면 그는 초월적인 출발점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72) 즉 이성이 사회 비판에 유용하기 위해서는 인간들의 상황을 온전히 알고 계신 분의 말씀 즉 계시에 그 근거를 두고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의 궁극적인 승리와 함께 역사는 그 마지막 단계에 다다를 것이라는 후쿠야마식의 종말론 을 주장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적어도 3가지 측면에서 문제점이 있다 첫째 공산주의라는 표지를 떼버린 전체주의 국가들은 자국내에서 공산화 전부터 있어 왔던 민족들 간의 국지전을 부활시켰다 공산주의 국가의 붕괴는 황금시대로 이어지기는 커녕 거꾸로 빈 협약이전의 시대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둘째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있는 많은 나라 특히 아시아에서 자유 민주주의가 권위주의적인 가치와 결합되고 있다 누가 자유 민주주의가 그러한 통치권의 독단적인 행사와 양립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세째 이 종말론은  역사의 진정한 마지막이 그리스도의 재림 parousia으로 장식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 때  우리 주님께서는 사랑이 식어가는 이 세상에 도적같이 오실 것이다.

모더니티의 기획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여러 학자들은 모더니티가 가진 장점을 잘 지적해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더니티의 치명적인 오류 즉 주관적 자유(비합리주의)와 합리주의의  공존이라는 변증법적 긴장관계를 간과하고 있다 모더니티의 많은 혜택에도 불구하고 이 변증법적 독소는 모든 영역 곳곳에 퍼져있다 기독교적 기반 없이는 모더니티가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신보수주의자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계시에 기초를 둔 정통 기독교가 아닌 자연 신학의 회복을 말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73)

둘째 우리 시대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평가 역시 수긍이 가는 점이 많다 계몽주의는 많은 위험을 내포한 기획이라는 주장은 사실이다 절대적인 가치와 높은 수준을 지향했던 과거에 대한 신보수주의자들의 향수를 이해못할 바 아니지만 우리는 옥석 을 가려내야 한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모더니티가 종교개혁적인 세계관에 의해서 그 영양분을 공급 받았을 때만 하더라도 좋은 열매를 안겨주었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세속화  (두번째 의미의 세속화)가 진행됨에 따라 그 영양 공급은 점점 줄어들게 되었고 합리주의 비합리주의의 변증법적 사고가 흉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아우슈비츠는 계몽주의의 교만함의 산물인 것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문제는 모더니즘을 떠나 새로운 곳을 개척하겠다는 자신들의주장과는 반대로 여전히 모더니즘의 틀 속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모더니티의 특징 중 하나인 자율적인 사유 라는 근거없는 전제가 모더니티를 비판하고 배척하려는 바로 그 시도에서 조차 발견되는 것은 이에 대한 단적인 증거이다.
아무리 극단적이고 회의적인 포스트모더니스트라 할지라도 스스로가 배척한 바로 그 기준들에 무의식적으로 호소하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크리스토퍼 노리스Christopher Norris 는 “이론이란 단지 개인적 선호를 정당화한 것에 불과하다” 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한 스탠리 휫시 Stanely Fish 같은 사람도 그 자신의 개인적 선호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74) 이성과 자유라는 변증법적 구조는 깊은 차원에서의 근본적인 문제제기 없이는 극복하지 못한다 다시 말하건데 초월적인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완전히 합리적이신 분75)이시고 인간의 지식이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변증법적 미궁에 빠지지 않고 세상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철학적 근본 오류는 리오타르의 거대 이야기는 더 이상 가능하지않다 라는 주장에서 잘 드러난다 그의 이론은 사실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계몽주의의 현혹적인 합리주의로부터의 해방 제국주의적 문화의 굴레로부터의 자유 모더니즘의 끈질긴 간섭으로부터의 탈출을 보장하고 있다 이 새로운 세계는 순전한 차이 의 자유를 아무런 제한 없이 구가할 수 있는 그런 곳이다.76) 그러나 이러한 리오타르의 이론은 특히 과학적 측면에서여러 문제들을 야기시킨다 이제까지 과학이 우리 생활의 모든 방면에서 헤게모니를 잡아왔다는 문제제기는 정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거대 이야기의 부정으로 각 과학 이론들은 나름대로의 독특한 언어 놀이 규칙을 가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학술적 토론으로 보편적 합의를 이끌어 내거나 검증 혹은 반증될 수 있는 가능성은 없어졌다.77) 이제는 역설적인 담론이 난무하는 무정부 상태가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독단적인 과학적 보편주의와 무정부 상태 중 양자 택일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인가?

리오타르에 있어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거대 이야기를 부정하려는 자신의 주장 역시 또 하나의 거대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모순은 리오타르가 모던 시대에는 모든 지식이 거대 이야기를 통해 정당화 되었고 인류 를 비극으로 이끈 마르크스주의와 자본주의주의 경제이론도 거대 이야기이다 라고 싸잡아 말한 부분을 볼 때 더욱 분명해 진다.78) 그는 우리는 “전체성과 보편성에 대항해서 싸워야한다” 고 말하지 않았던가 ?  그의 자유로운 언어 게임에는 신보수주의자들의 도덕적 문화적 자유 시장 체제79)로 돌아가려는 숨은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운 것이다.80)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모더니티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공격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모더니티에 대한 비판은 항상 있어왔다.81) 낭만주의 운동도 어떤 의미에서는 반 모던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낭만주의는 산업화와 차가운 이성주의에 대해 전쟁을 수행한 것이었다.82) 니체 역시 반모더니즘의 기수였다 서구의 몰락을 보기위해서 우리는 아우슈비츠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우리는 지금 포스트모던이라는 전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라기 보다 예전부터 존재해 온 회의적인 반 모던적 혹은 초 모던적 사상을 과도하게 경험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게 있어 또 하나의 문제는 그들이 모더니티의 획일성 전체성 을 비판하면서도 되려 자신들은 모더니티를 너무 단순화 시켜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모더니티는 획일적으로 받아들여지거나 또는 거부되어야할 단순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모더니티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심각한 문제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나 긍정적인 측면 또한무시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우리는 옥 과 석 을 조심스레 골라내야 한다 이 글의 앞 부분에서 나열한 모더니티의 여러 사회적인 측면은 혼합된 축복이다 다시 말하면 민주주의 도시화 기술 등은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해주리라 믿었던 기술이 오히려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다 라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주장은 일면 타당하다 그러나 그들에게 모더니티가 만들어낸 민주적 자유 경제 체제 의학 을 모두 다 내버릴 진정한 용기가 있을까? 오히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모던적 가치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개인주의의 남용이 가져 온 폐혜를 올바로 인식해야하지만 동시에 주체와 이성에 대한 강조가 지닌 장점도 파악해야만 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재이기에 천부적인 권리와 책임을 동시에 가진 해방된 존재라는 인간관은 이전 시대의 계급적 계층적인 인간관에 비해서 확실히 발전된 것임에는 틀림없다 이성에 관해서도 우리는 앨런 블룸이 오늘날의 위기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제시하고 있는 루소Rousseau 적 이성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계시에 의존된 올바른 이성의 사용은 우리의 지식의 중요한 원천이라는 점을 알아야한다.83)

오늘날과 같은 포스트모던적 상황에서는 말이 그 권위를 잃고 이미지와 감정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러한 때에 복음을 전하는 일은 쉽지 않다 오늘날 사람들은 중요한 물음 들은 물으려 하지 않고 ’ 오히려 안락함만을 위해 싸구려 철학이나 기복적 종교에 안주하고 있다 이러한 현대인들을 위한 우리의 전도 방법은 참으로 획기적인 것이어야만 한다 그것은 이 시대의 문화적 뿌리를 통찰하고 있는 것이어야 하고 지금 구체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사실들에 대한 세밀한 연구가 뒷받침된 것이어야 한다.

7. 결론
우리는 모더니티를 바라보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들에게 새롭게 기대할 만한 것 이 있는가 모더니티의 기획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제시한 기초위에서는 비록 거기에 합리성과 자유라는 교의doctrine 가 있더라도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진전이란 있을 수 없다 진보와 발전은 튼튼한 기초가 없이는 절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첫째로 진보에 관한 계몽주의의 허구적 전제를 근본적으로 문제삼지 않고 둘째로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자각 없이는 진정한 소망이란 없다 모더니티의 철저한 배격을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우리의 대안이 될 수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도 우리가 새롭게 기대할 만한 것 이란 없다 아니 포스트모더니즘에 따르면 새롭게 기대할 만한 것 이란 그 자체로 거부되어야할 모더니즘의 교의이다 그들에게 새로운 것 기대할 만한 것 이란 있지도 않고 있어서도 안되는 개념이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새롭게 기대할 것 이 없는 상태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좋다 나쁘다라는 것은 초월적인 개념이 아니던가? 어떻게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자신의 틀 속에서 새롭게 기대할 것 이 없는 상태를 좋다고 할 수 있는가? 그들은 자신들이그렇게도 버리기 원했던 바로 그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나는 포스트모던적인 현 상황을 모더니티보다는 기독교 신앙을 전하는데 훨씬 더 좋은 기회라고 여기는 알렌Diogenes Allen 오든Thomas Oden 월쉬Brian Walsh  같은 사람들만큼 낙관적이지 않다 논의를 위해서 모더니티의 시대는 물 건너갔고 자율적인 이성의 시대는 종식됐다고 가정할 지라도 파편화되고 상대주의적인 포스트모던 세계는 계몽주의 만큼이나 복음에 대해서 유익하지 못하다.

모더니스트와 포스트모더니스트 모두에게 우리가 제시해야만 하는 것은 철저하게 성경적인 입장이다 즉 첫번째로 해 아래에는 새로운 것 이란 없다는 사실이다 타락한 세상에서 모더니스트들이 건설하려는 유토피아적 사회와 문화는 그것들을 해체하려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시도만큼이나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할 수 밖에 없다 둘째로 바로 이러한 사실을 직시하는 것이야 말로 소망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대할 만한 것이란 해 아래 있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분 안에서만이 우리는 새롭게 기대할 만한 것 을 찾을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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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쟈크 엘룰 / 대장간 / 199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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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기술의 역사]를 읽고 다시 읽은 이 책은 전에 느끼지 못한 강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사람은 들을 귀가 없을 때는 듣지 못하는 것이 사실인 모양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왜 그토록 기술의 지배에 대해 경고하는지, 결국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자리매김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의 [현대사회의 심각성]을 이해치 못하고 전에는 이 글을 읽었던 셈이다.

먼저 엘룰은 1장에서, 이 땅 가운데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이 그리스도를 보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음을 지적한다. 삶이 변증이다. 특히, 평신도의 역할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한다. 2장은, [사실]에 대한 현대인의 복종과 ,그것을 뒤엎는 혁명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실에 기초한 기술적 방법은 그 굴레에 갇힌 기술자신을 자살에서 구하지 못한다.오직 세상은 끝이 있고 심판이 존재함에 비추어 볼 때에만 [역사는 미친 광란에 불과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일의 실천에 강령과 원리란 없다.현재의 상황에 대해 하나님나라 도래의 확실성만이 잣대가 된다. 

3장은 수단이 목적이 되는 [기술사회]에 대한 이해와, 수단을 목적에 종속시키는 유일한 대안이 [그리스도의 주권]임을 제시한다. 결과는 행동강령의 도출이 아닌, 자신의 모든 상황이 하나님 앞에 노출되어진 삶이다. 말과 습관,그리고 결정에 성령이 표현됨을 의미한다. 코람데오의 삶.

4장에서 그는 그리스도인 지식인의 역할은 무엇인지 보여준다. 지성의 변화를 통해 각자의 영역에서의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하는 삶이다.  현실은 파악이 불가능하게 선전에 둘러쌓여있고, 지성은 기술적 수단이외의 것을 거부하는 상황에서, 서로의 의사소통의 길은 막히고, 사람들은 자포자기의 삶을 선택 할 수 밖에 없다. 파악되지도 않는 세상과 가치의 척도. 맘대로 살자는 결론... 

대안은 세상과 자신의 현실을 자각하고 객관적 현실을 발견하고자 이웃사이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면의 실재를 보아야 한다. 오직 성령의 조명만이 이를 가능케 한다. 그때야 비로서 이웃은 [그리스도가 위해 죽으신 귀한 존재]가 되고,역사는 인류에게 발생한 최초이자 최후의 사건인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사건이 비추어주는 의미있는 것이 된다. 삶에는 거룩한 영역이 존재케 되고 우리를 자살의 길에서 멈추게 할 수 있다.   

5장에서, 이를 위해 먼저 교회는 사람들로 경제적,지적,심리적, 육체적으로 인간을 회복하도록 해야한다고 한다. 그것이 불가능하게 된 사회는 혁명도 필요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세상과 다른 삶의 방식을 창조하는 일이다. 신앙을 삶에 실천하는 것은 결국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게 한다. 반드시 공동체로서 이루어야 할 부분이다.엘룰은 또한 그 원동력이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와야한다고 강조한다.

나는 세상이 좋게 변해야 한다면, 그 일을 위한 마스터플랜과 추진력이 필요하다고 가르치는 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 방법이 틀렸다면 또 다른 철학으로 뒤집어 엎고 시작하면 된다는 꿈을 꾸며 청년의 때를 지나왔다. 얼마나 방법에 의존한 인간의 변화를 위해 살아왔나? 항상 의문은 나를 교육시켰던 사람도, 뒤집어 엎자던 동료도, 그리고 나 자신조차도 좋은 의도로 시작한 일이 처음 뜻과 달리 흐르고 더욱이 나 자신에 의해 깨어졌는가하는 것이었다. 그리그리하다 내리는 결론은, [악하고 세상에 매몰된 나자신이 무슨 선한 것으로 세상에 빛이 되나]하는 것이다.

엘룰은 애시당초 우리에게서 희망을 찾지 않는다. 세상을 사랑하고 아들을 보내시고 역사를 이끄시는 분만이 소경인 우리를 인도하신다. 매일의 묵상의 시간과 기도는 이제 삶의 기준이 되어 나를 뒤집고, 나의 허접한 목표들을 부수고 말것이다. 이것이 차마 세상을 바꿀 힘이 되도록 하신다고 한다. 내 힘이 빠지고 그분을 따를 때... 정말 가능한가요? 나의 한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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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네트시집
셰익스피어 지음, 피천득 옮김 / 샘터사 / 199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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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네트는 셰익스피어가 서른을 바라보던 1593년부터 96년 사이에 대부분 씌여졌다고 한다. 하지만 154편으로 묶어져 출판된 것은 1609년 토마스 쏘오프에 의한 것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출판당시의 시의 순서의 배열은 이 소네트를 셰익스피어 자신의 자서전적 경험으로 보려는 의도로 담고 있다. 하지만, 이 글들이 그의 습작기에 써진 점과, 그의 개인적 경험과 일치되는 증거를 찾을 수 없는 점을 들어 도리어, 작가로서 틀을 잡던 그가 시도한 여러 형태의 시 모음 자체로 보려는 사람들도 있다.

나도 개인적으로, 이 시들을 [이상한 우정]을 나누는 남자친구와, 작가를 버리고 그 친구에게로 변심한 [얼굴 검은 여인] 사이에서 읍소하는 셰익스피어의 넋두리보다는, 개별적 시로 읽는 것이 훨씬 즐거워 그냥 시 한편 한편으로 즐겨읽었다.

비록 이른바 셰익스피리언 소네트라 하는 abab cdcd efef gg의 음율을 원문으로 즐길 수는 없다해도 피천득 시인의 번역은 매끄럽고, 마지막 두 행의 반전을 살려내는 맛이 있었다.(사실 이 번역본의 시 전체가 마지막 두행이 그림이 놓여있고 뒤로 물러나 앉아있다!) 더욱이 셰익스피어가 장중한 맛의 기존 소네트를 비웃으려는 의도로 쓴 것을 드러내듯 번역자는 해학과 장난기를 담아냈다. [내게 필요없는 하나를 더 달고] 나왔다느니 하는 표현은 압권이다. 그리고 후반부의 [윌과 윌의 경쟁]과 [아이버리고 닭 좇아가는 엄마]같은 시는 요절복통감이다.

시란 무엇일까? 개인적으로 시는 함축된 언어의 뒤를 넌지시 비추는 암시라고 생각된다. 다 까고 말하지 않아서 더 멋들어진 무엇. 그러나, 이런 언어를 직설적이고 도구주의적인 현대인은 반기지 않는다. 최근 [시가 내게로 왔다]가 우리에게 어필하는 이유는, 물론 훌륭한 시들의 묶음인 때문도있겠지만, 이 괄시 받는 언어가 가진 함축성을 산문으로 풀어낸 때문은 아닐까?  

시를 좋아할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 있는 세상이면 좋겠다. 우리 선조도 옛 서양인들도 그러했건만, 아이에게 시 한수 외어보라던 스승도 어른도 없는 세상이 되었다. 살기가 힘들어진 때문인가, 아니면 좀머씨처럼 누군가 우릴 좇고 있듯 살기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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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위안
A. 보에티우스 지음, 정의채 옮김 / 열린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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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망일로를 걷기 시작한 서로마는 476년, 게르만계 부족 출신의 용병의  대장인 오도아케르가 황제에 오르면서 막을 내린다. 동로마제국의 황제 제논은 그의 이탈리아 지배를 일단 묵인하였으나, 뒤에 동고트왕 테오도리쿠스에게 오도아케르 토벌을 위탁하였다. 489년 이탈리아에 쳐들어온 테오도리쿠스는 가는 곳마다 오도아케르의 군을 쳐부수고 493년까지 전이탈리아를 지배하에 넣었으며, 라벤나를 수도로 삼아 동고트왕국을 세우고 눌러 앉아버린다.

서로마의 땅을 점령한 동고트왕 테오도리쿠스는 로마 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해 이 책의 저자 보에티우스 등을 등용하여 유화정책을 꾀하였다. 하지만 한편으론, 힘은 없지만 끊임없이 서로마를 회복코자하는 동로마에 대한 경계만은 늦출 수 없었다. 520년 집정관 알비누스가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누스 1세와 내통하였다는 이유로 고발되었는데, 이때 보에티우스는 법정에서 알비누스를 옹호하다 그 역시 반역혐의를 받고, 파비아(Pavia)의 감옥에 갇혔다가 524년에 처형되었다.

이 책은 보에티우스가 사형을 기다리며 파비아에서 쓴 것으로, 그가 당하는 억울함과 고통의 의미를 스스로 묻고 철학의 여신의 입을 빌어 대답하는 형식으로 서술되었다. 중간중간에 삽입되는 시들은 각 진술들을 요약하고 시적 형태로 독자에게 각인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는 보에티우스가 단순히 자신의 처지에 대한 철학적 설명을 위해서뿐 아니라, 유일신 사상에 근간한 그의 종교철학을  알리기 위한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1서는 [고통에는 의미가 있다]는 도입부이다. 2서는 이生의 좋은 것이라 여기는 행운, 권력, 명예, 부의 별볼일 없음을 이야기하고, 3서에서는 결국 [참된 최고선으로서의 신에 대한 추구]를 제시한다. 4서는 다시 이런 최고의 목표에 비해 악인들의 초라한 실체를 설득한다. 5서는 다소 사변적인 장으로, 선의 지배에 수반되는 신의 [절대의지적 섭리의 세계]와 여기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의 가능성]과의 조화를  이야기한다.

어쩌면 전체적 흐름에서 첨언처럼 보이기도 하는 5서의 긴 논변은 [철학의 위안]보다는 논증과 공격에 대한 변론의 성격이 강하다.  그래서 재미있게 읽던 사람들도 5서는 다소 힘겹다. 하지만,  이 글은 앞뒤로 어거스틴과 아퀴나스를 이어주며, 이후 스콜라철학이나 이와 연관된 근세철학의 논변의 뿌리가 되는 부분이므로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런 보에티우스의 위치로 인해 19세기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들은 보에티우스가 실존하는 하나님과의 신앙이 아닌, 그리스로마 철학적 신개념에 의한 사변적 종교를 논한다하여 그를 폄하하기도 한다.

감옥에 갇힌 두사람을 본다. 보에티우스와 바울. 한 사람은 최고집정관 출신의 철학자 그리고 다른 이는 전도유망했던 바리새인 출신의 전도자. 둘은 삶의 진정한 의미가 눈에 보이는 것이라 믿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삶의 해답은 오직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추구하는데에만 있다는걸 알았고 또 그렇게 살았다. 어떤 모양으로나 그리스도만이 높여지길 원했던 옥에 갇힌 바울과, 마지막까지 인생의 파편인 부귀,권력보다는 절대자에게 돌아가기를 권하는 보에티우스. 그들은 옥에 갇히지 않은 나를 향해 지금 무얼 위해 인생을 살고 있는지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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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0-08-02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 리뷰도 있군요! 에코의 에세이 <철학의 위안>을 읽고서 원 저서명인 보에티우스의 이 책을 찾아다녔는데, 아쉽게도 아직도 못구하고 있습니다. 도서관에서 빌려서라도 보고 싶네요~
 

Boethius의 섭리와 자유의지문제

 「철학의 위안(Consolatio philosophiae)」제 5 장

 박상욱 (서양철학 석사과정)

  우리가 말하는 우연이라는 단어의 정의(definition)는 그 지위가 애매모호하다. 우연의 정의는 일상어에서 여러가지 뜻으로 쓰여지고 있으므로, 그 뜻이 부정될 수도 있고 긍정될 수도 있다. 우리가 신의 섭리를 인정한다면 우연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연은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신은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던 것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따라서 우연이 있다는 것은 신의 섭리와 모순되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에 대해 보에티우스는 해답을 찾을려고 노력한다. 

 만약 어떤 것이 아무런 원인 없이 생겨난다면, 그것은 무(無)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무(無)에서는 아무것도 생겨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연에 대한 정확한 정의가 필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식의 설명을 따르면 우연이라는 것은 어떤 일을 어떤 일정한 목적을 위하여 행할 때, 여러 가지 원인 때문에 목적하였던 것과는 다른 결과가 나오게 되는 것을 우연이라고 한다. 우연이란 어떤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고 있는 사물들에 있어서 여러 원인들이 합치되는 데서 생겨나는 뜻하지 않았던 결과를 말하는 것이다. 즉, 어떠한 원인들에 대해서 불가피한 결합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질서인 것이다. 보에티우스는 우연의 올바른 정의를 통해서, 신의 섭리의 세계에서 우연이라는 것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려고 한다.  

  세계는 인과계열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세계는 신의 섭리에 따라서 만들어 졌고 움직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과연? 이러한 '인과계열 속에서 우리의 자유의지가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 보에티우스는 답해야만 한다. 

  어거스틴에게서 보이는 것처럼 보에티우스 또한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유의지가 없는 이성적 본성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성적 존재1)는 사물을 인식할 수 있고 판단능력을 통하여 행동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성이 있는 존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행할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는 자유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자유를 참되게 누리기 위해서는 신의 섭리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앞의 Ⅰ·Ⅱ에서 신의 섭리와 자유라는 두 가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 보에티우스는 이제 새로운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그 문제는 바로 '섭리와 자유가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가?'가이다. 섭리와 자유는 조화되기 어렵다. 왜냐하면 섭리의 입장에서 볼 때, 섭리는 불확실할 수 없고 또, 자유의 입장에서 볼 때 자유는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에 필연성이 없다는 것이다. 제 5 장의 Ⅲ에서 언급될 문제는 앞의 Agustinus의 "자유의지론" 제 3권에서 어거스틴이 답할려고 했던 문제, "신의예지와 자유의지의 양립가능성"이라는 문제와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보에티우스는 자유와 섭리의 양립가능성에 대해 답해야만 한다.    

 신이 모든 것을 미리 아시는데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은 매우 상반되는 것처럼 보인다. "신은 모든 것을 미리 보시며, 또한 신은 절대로 틀릴 수가 없다면, 신의 섭리는 필연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이 인간의 행동뿐만 아니라 생각과 원인을 다 알고 계시니 결코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의견들에 대해서 앞선 이론가들이 말한 것은 "신의 섭리가 미리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었기 때문에 신의 섭리가 그것을 안다는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이것은 '필연성은 신의 섭리의 반대편에 있다.'는 것이다. 즉 예견되는 것이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이루어 질 것이 필연적으로 예견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보에티우스에게 이러한 이론들은 "예지가 장차 이루어질 사물들의 필연성의 원인인지, 혹은 장차 이루어질 사물들의 필연성이 섭리의 원인인지를 설명해주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기에 예견되는 것이고 예견되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은 역시 미래에 있을 것으로서 신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예견되거나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은 신의 섭리와 자유의지를 양립가능하게 하는 논거로써 타당하지 않다. 

따라서 앞선 이론가들의 생각은 완전한 지식이라 할 수 없는 오류를 지니고 있다.

 신의 예견은 인간의 인식처럼 불완전한 것이 아니다. 신이 장차 이루어질 것으로 미리 확고하게 알고 있는 그 사물의 생성은 확실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에는 아무런 자유가 없는 것이다. 만약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가 없다고 가정하면, 악(惡)2)의 원인이 신에게로 그 책임이 돌아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가 아닌 신의 섭리에 따라 질서정연한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존재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가 행한 악은 신이 이미 정해놓은 질서에 의해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모든 과오는 완전한 선(善)인 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것이 되고만다.  

  보에티우스는 앞에서 발생한 두 가지의 난점들을 해결해야만 한다. 첫 번째는 앞선 이론가들의 이론상의 결점을 보완해야 하며, 두 번째로는 악(惡)의 책임이 신에게로 전가되지 않도록 인간의 자유의지를 옹호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이 두 문제는 바로 "신의 섭리와 자유의지를 어떻게 양립가능한가?"라는 끊임없이 되풀이 된 물음이였다.   

 

 신의 예지는 인간의 사유능력을 초월하여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신의 섭리를 다 알수가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신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 사이의 조화'는 보에티우스뿐만 아니라 모든 유신론자들도 대답해야하는 중요한 의무가 된 것이다. 이에 보에티우스는 인간의 추리작용이 신의 예지의 능력에 도달할 수 없다라는 것을 전제로부 논의를 시작해 나간다.

 보에티우스에게 "예견된 것들에는 필연성이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또 만일 필연성이 없으면 절대로 미리 알 수 없다"라는 질문을 한번 던져보자. 이런 질문에 대하여 보에티우스는 '당신의 견해는 잘 못되었오.'라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보에티우스는 "인식되는 모든 것은, 사물 자체의 능력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오히려 인식 주체들의 정신적 기능을 따라 인식되는 것"라고 정의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식의 단계에서, "더 높은 단계의 인식능력은 아래 단계의 인식능력을 내포하는 것이지만, 아래 단계의 것은 윗 단계의 인식능력에 동등하게 자기를 높일 수 없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인식의 사유 능력면에서 본능을 소유한 동물보다는 이성을 가진 인간이, 이성을 사유한 인간보다는 직관인식능력을 가지고 있는 신이, 좀더 완전한 인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도식상에서도 감각보다는 표상, 표상보다는 추리, 추리보다는 이성, 이성보다는 직관이라는 보에티우스의 인식론적 구도가 그려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보에티우스가 예지와 필연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한 대안은 바로 인간의 인식능력의 한계성이다. 사물을 인식함에 있어서 인식되는 사물 자체의 기능에 의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인식 주체가 자기 인식기능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신의 예지와 필연성에 대해서 올바른 정답을 찾아 낼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필연성의 문제는 인간의 인식능력 한계안에서 정의내려지기 때문에 신의 섭리를 유한한 인간은 알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보에티우스는 '어떻게 인간이 신의 섭리를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답해야만 한다. 우리는 인식을 할 때 사물에 대해서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을 사용한다. 우선 감각을 이용할 수 있다. 감각은 인간보다 하등에 있는 동물들도 가지고 있는 인식의 도구이다. 다음으로 표상을 들 수 있다. 표상은 동물들에서도 좀더 높은 단계의 종(種)들만이 가지고 있다. 이성은 오직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다. 동물들에게는 감각과 표상의 능력은 있지만 결코 이성은 없다. 인식의 최고단계인 직관인식능력은 오직 신에게만 있다. 인식의 단계가 올라갈수록 하등의 것보다 인식능력은 더 우월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론적 도식을 통하여 만약 인간이 신의 최고 인식의 높이인 직관인식능력까지 도달 할 수 있다면, Ⅳ에서 우리가 답할려고 했던 문제들에 대해서 해답을 찾게 될 것이다.

 

 "영원한 신의 인식은 그 전체가 동시적인 것이라고 결론한다. 그래서 현존하는 사물들의 인식과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미래 사정들에 대한 신의 예지도 인간의 자유를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한다." 이제 보에티우스는 신의 예지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본격적으로 설명해 내야만 한다. 앞의 Ⅴ에서 알 수 있듯이 "인식되는 사물은 그 본질에서가 아니라 인식하는 주체의 본질을 따라 인식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물의 정확한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서, 신의 지식을 먼저 파악하는 작업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신의 영원성을 알기 위한 시도가 신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시작이기 때문이다. 

 보에티우스에게 '신이 영원하다.'라는 명제는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 영원성을 시간적인 사물과 비교해보자3). 시간안에 살고 있는 현재적 존재는 과거에서 미래로 직선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 현재적 존재에게 과거는 이미 잃어버린 것이고, 미래는 아직 알 수 없는 것이다. 또한 현재의 오늘도 시간의 연속성에서는 지나가는 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시간이라는 제약을 받는 인간은 영원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영원은 무한한 생명의 전(全)충만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소유하며 미래에 이루어질 것은 아무것도 없고, 과거로 흘러 사라지는 것 또한 아무것도 없는 것을 가리켜 말한다." 이런 영원이란 필연적으로 자주적이며 또한 필연적으로 항상 자기에게 대하여 현존으로 존재하며, 또 필연적으로 그것에는 지나가는 시간의 무한성도 현재인 것이다.

 "모든 판단은 정신의 본성을 따라 그에게 주어진 사물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은 항상 영원하고 현존재 상태이며, 그의 지식도 모든 시간적 운동을 초월하고 현재 자기의 단순성 안에 머무르며, 미래와 과거의 무한한 영역을 동시에 내포하며 모든 것이 마치 현재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자기의 단순한 인식 안에서 고찰하는 것이다."

 인간은 시간적 한계성 안에서 사물을 바라보지만, 신은 영원한 현재 안에서 모든 것을 인식하고 있다. 신은 사물의 본성이나 고유성을 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이루어질 사건들을 자기의 현재 안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이러한 신의 인식은 직관이라고 볼 수 있다. "신은 만물을 보기는 하나 절대로 사물의 성질을 혼란시키지는 않는다. 그리고 신에게 있어서는 그 사물들은 현재의 것들이지만 시간적 조건하에서는 미래의 것들이다."

  "신의 직관은 어떠한 미래 사정보다는 선행하는 것이며 모든 것을 자기 고유한 인식의 현재에다 환기시키는 것이다. 신의 직관은 예지를 어떤 때는 이렇게 또 어떤 때는 저렇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는 변화없이 머무르면서 네 변화를 선행하여 일별함으로써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이다.", "신은 모든 것을 동시에 파악하고 또 관조하는 현재성을 미래 사물들의 실현에서 얻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고유한 단순성에서 가지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손상되지 않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필연성에서 해방된 인간의 자유의지 결과물에 대해 상과 벌을 제시하는 것이 정당화 될 것이다. 

 

  제 5 장에서 '신의 섭리와 자유의지의 양립가능성'에 대한 보에티우스의 생각을 집약하여 말한다면, 신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선택된 행위들을 미리 보신다. 하지만 신이 인간의 행위들을 미리 예견했다는 사실이 인간의 행위들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신은 영원하시며, 영원성은 끝없는 생활에 대한 완전한 소유, 즉 완전하고 동시적인 소유다. 그러므로 인간의 시간적 제약 속에서 볼 때 사건에는 과거와 미래가 있지만, 신은 사건에 대하여 가지는 총체적인 시각(視覺) 안에서는 이전 상태와 이후 상태가 없는 것이다. 신은 세계내의 창조된 모든 사물들에 대해서 섭리하신다. 그러므로 신께서는 필연적인 것을 필연적인 것으로, 자유로운 것을 자유로운 것으로 영원히 보신다. 내가 태양이 떠오르고 있는 것을 볼 때에, 내가 태양을 본다는 사실은 태양이 떠오는 것의 원인이 아니다. 내가 사람이 걷고 있는 것을 볼 때, 그 사실이 그 사람으로 걷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이와같은 방식으로 신은 우리의 자발적인 행위에 대하여 가지시는 부동(不動)의 영원한 시각은 인간 행위의 자유를 결코 손상시키지 않는다.  

  '신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가 어떻게 양립되는가?'에 대한 문제는 유신론자들이 꼭 풀어내야만 할 숙제인 것 같다. 왜냐하면 전자와 후자중에서 어떠한 것도 포기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신이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신의 예지능력은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사유할 수 있는 이성의 능력이 분명히 있고, 사유할 수 있는 이성은 선택의 자유가 있기 때문에 예지와 자유는 동시에 성립하기가 어렵다. 우리가 위의 질문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해서 답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위의 질문은 필연성이라는 논리적인 문제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어쩌면 '예지와 자유'라는 논리학의 문제를 어거스틴, 보에티우스를 비롯한 이론가들이 형이상학적 문제로 접근함으로써 추상적이고 더욱더 애매한 상황으로 빠져든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1)  이성적 존재, 즉 인간의 영혼을 계층을 이루고 있다. 영혼의 계층에 의해 자유를 누릴수 있는 권한 또한 차등적으로 적용된다. 최고의 영혼은 신을 인식(혹은 직관)할 수 있으무로 가장 자유스럽다.

2)  유신론자들도 세상에서 악(惡)이 없다고는 주장할 수 없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인간은 악한 행위들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살인, 강간, 도둑질, 거짓말등은 분명히 인간이 저지른 결과물이다.

3)  영원성을 신의 속성으로 시간성을 가진 현재적 존재를 인간으로 이해하면 앞으로의 논의가 쉬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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