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

별칭은 로렌초 일 마니피코(Lorenzo il Magnifico)로서 이는 '위대한 로렌초'라는 뜻이다.

피렌체의 통치자로서 로마 시대 이래 유일하게 '국부'라는 존칭을 들은 코시모 데 메디치의 손자이기도 하다. 1449년 1월 1일 피렌체에서 출생한 그는 1469년 아버지 피에로 데 메디치가 죽자 20세의 젊은 나이에 피렌체의 통치자가 되었다.
마키아벨리는 로렌초에 대해 "그는 운명으로부터, 그리고 신으로부터 최대한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다."라고 평했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는 로렌초가 물려받은 것 자체가 다른 사람과 달랐다는 것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1. 증조부, 조부, 부친 3대에 걸쳐서 구축되고 증강된 메디치 집안의 강대한 경제력.
2. 조부와 부친 2대에 걸쳐서 구축되고 증강된 메디치에 대한 피렌체 시민의 좋은 감정.
3. 조부와 부친 2대에 걸쳐서 구축되고 증강된 메디치에 대한 다른 나라 지도자들의 경의에 입각한 신뢰감.
4. 조부와 부친의, 특히 조부 코시모의 주도면밀한 배려로 받게 된 당시 최고의 교육.
5. 어릴 때부터 완벽한 제왕 교육을 받았다.

로렌초의 조부나 부친 모두 공식적으로는 피렌체의 한 시민일 뿐이었지만 대외 관계에 있어서 메디치의 명성과 경제력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때문에 타국의 왕후들이 방문하게 되면 으레 메디치의 저택에서 유숙하였고 연회 또한 메디치 궁에서 열렸다.
대외적으로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의 실질적인 통치자로서 군림하고 있었다.

로렌초가 권좌에 오르고 난 후 로렌초는 피렌체 사람들이 즐길 수 있도록 사육제, 무도회, 마상창 시합 등 화려한 축제를 여러번 개최함으로서 자신의 독재 정치의 분위기를 완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후 1478년까지 대체적으로 평화로운 분위기가 유지되는데 바로 1478년에 이 평화로운 분위기를 깨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것이 파치 가문의 음모이다.
파치 가는 메디치 가문과 같은 피렌체의 은행가 가문으로서 이전까지 메디치 가문이 가지고 있던 교황청과의 사업 거래권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파치가의 음모가 발생하게 된 원인으로는

1. 파치가의 일원이 주장한 유산 상속권을 로렌초 데 메디치가 특별법을 만들어서 기각해버렸기 때문이다.
2. 피렌체 공화국에 사실상 군주로서 군림하는 메디치의 전제에 파치가 반발했기 때문이다.
3. 메디치가 오랫동안 차지해온 교황청의 재무 담당권을 파치가 가로챘기 때문이다.
4. 반메디치파로 알려진 프란체스코 살비아티를 교황 식스투스 4세가 하필이면 피렌체공화국이 병합을 노리는 피사의 대주교에 임명했기 때문이다.
5. 동생 줄리아노를 추기경에 임명해 달라는 로렌초의 부탁을 교황이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표면적으로 드러난 원인이었다.

하지만 교황과 로렌초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틀어지게 된 계기는 이탈리아 통치에 있어서 양자의 견해가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었다.
로렌초는 군사적으로 약체인 피렌체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탈리아 반도의 독립과 자유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 이탈리아 내 각국의 분쟁은 제거되어야 했다.
로렌초는 현상유지를 위해서 당시 이탈리아 각지에 존재하던 소국들을 지원해 세력의 균형을 유지하는 정책을 썼다.
그러나 당시의 교황 식스투스 4세는 못 가진 자로서 태어나 교황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었다.
또한 가톨릭의 총본산인 교황청이 소재하는 이탈리아와 이해가 상반될 때에는 서슴치 않고 이탈리아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식스투스 4세는 빈곤속에서 입신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주위에 수입을 보장해 주어야 하는 친족들이 많이 있었다.
친족들을 추기경에 임명하는 방식으로는 무리가 있었기에 그밖의 사람에게는 땅이라도 마련해 주어야 했다.
하지만 교황의 그 계획은 로렌초에 의해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다.
이에 분노한 교황은 조카 지롤라모 리아리오와 파치 가문과 함께 로렌초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파치가문의 대표격인 인물은 반메디치의 선봉이기도 한 프란체스코 파치였다.
여기에 교황청의 용병대장인 몬테세코와 피사의 대주교인 살비아티가 참여했다.
4월 26일 부활절 미사에서 로렌초와 그의 동생인 줄리아노를 암살하고 그 사이에 살비아티 대주교가 시뇨리아(정부회의)를 장악하기로 했다.
이윽고 계획이 실행되어 줄리아노는 살해당했지만 로렌초는 무사히 살아날 수 있었다.
또한 시뇨리아를 장악하려던 계획도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암살의 공모자들은 분노한 시민들에게 사로잡혀 참살 당하거나 사로잡혀서 고문을 받고 결국 처형되었다.
줄리아노가 살해되고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던 줄리아노가 애인에게서 난 자식이 있다는 것을 안 로렌초는 그 아들을 정식으로 메디치 가문 사람으로 인정한다.
그가 훗날의 클레멘스 7세 이다.

로렌초에 대한 암살이 실패로 돌아가고 주모자들이 참살당하자 교황은 고위성직자인 살비아티 대주교가 죽은 것을 빌미 삼아 로렌초의 추방을 요구했다.
그러나 각국은 이에 대해 로렌초를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당시 각국의 열강들은 로렌초의 세력균형 정책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베네치아 공화국, 밀라노 공국, 페라라 공국, 만토바 후국 그리고 프랑스 왕 루이11세까지 줄리아노의 죽음을 애도하고 로렌초의 생존을 기뻐하며 피렌체 공화국과의 종래의 동맹관계를 재확인했다.

하지만 나폴리 왕 페란테만은 그렇지 않았는데 그것은 피렌체에 대해 전쟁을 일으킬 결심을 한 교황이 자기에게는 강력한 군사력이 없으므로 나폴리 왕의 힘을 업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피렌체가 교황의 요구를 거부하자 교황은 자신을 지지하는 나폴리 왕 페란테와 함께 피렌체를 침공한다.
전쟁은 한참을 끌었고 피렌체는 점점 불리해져 갔다.
이윽고 로렌초는 도박을 하기로 결심하고 나폴리왕 페란테를 만나기 위해 나폴리로 향한다.
결국 이 도박은 성공해서 페란테는 로렌초와 평화 조약을 맺고 군대를 철수시키기로 결정한다.
이 때 나폴리군을 이끌고 있던 페란테 왕의 장남 칼라브리아 공 알폰소는 철수를 주저했으나 이때 로렌초에게는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오스만 투르크 군이 이탈리아 반도 남쪽의 오틀란토에 상륙해 주민을 살육하고 이탈리아 공략을 위한 교두보를 건설하게 된다.
이에 칼라브리아 공은 황급히 군을 이끌고 남하하게 된다.
교황도 피렌체에 대한 적대 행위를 계속 할 때가 아니었다.
이후 투르크 술탄 메메트 2세의 죽음으로 투르크 군의 재침은 없게 되었지만 이 일은 이탈리아 각국에 경각심을 일깨워주게 된다.
결국 피렌체 공화국은 교황에게 한 무례한 행위를 사죄하고 사면을 받게 된다.

이로 인해 로렌초는 그의 위신을 널리 떨치게 되었다.
피렌체를 완전히 장악하게 된 로렌초는 70인 위원회를 만들었다.
위원회의 대부분은 메디치 지지 세력들로 채워졌다.
로렌초는 피렌체의 실질적인 군주와 마찬가지였지만 표면적으로는 일반 시민의 모습을 보였다.
메디치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한 지식인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확실히 그는 전제 군주였다. 그러나 쾌적한 전제 군주였다."

1484년 교황 식스투스 4세가 죽고 인노켄티우스 8세가 새로 교황의 자리에 올랐다.
로렌초는 새 교황의 조카인 프란체스케토 치보를 사위로 삼고 교황청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한다.
이로서 교황청에 대한 메디치의 영향력도 지대해지게 된다.

모든 면에서 로렌초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없는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메디치 재벌의 경제 상태와 더불어 그 자신의 건강 상태가 눈에 띄게 악화되고 있었다.
로렌초의 은행 경영 능력은 결여 되어 있었으나 그 자신은 엄청난 금액을 여기저기에 쓰거나 투자했다.
결국 로렌초 사후 메디치 가문은 7천500피오리노에 이르는 채무를 지게 되고 로렌초가 죽은지 2년 뒤인 1494년 파산하게 된다.
그의 건강 상태 역시 그리 좋지 않았다.
위가 좋지 않았던 로렌초는 죽기 전 몇 해 동안 병에 시달렸다.
결국 그는 1492년 4월 8일 43의 나이로 죽게 된다.

로렌초의 소비는 문화에 있어서 피렌체에 많은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발상지가 되었으며 조금이라도 지적 관심을 가진 유럽인들이라면 다른 어느 곳보다도 동경하는 도시였다.
그는 미켈란젤로가 젊을 때부터 자신의 집에서 성장을 도와줬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는 소개장을 써서 밀라노 공작에게 보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예술 작품을 주문하는데 있어서 가교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거기에다 사재를 털어서 마련해서 누구나 드나들 수 있게 했던 고대 조각을 모은 정원이나, 고대 서적과 문서를 일반에 공개한 도서관 등이 있었다.
그리고 로렌초 스스로도 이탈리아 문학사에 있어서 그 이름을 올리고 있다.
오늘날 그의 전집이 시문, 산문, 평론을 합쳐 세권이나 된다.

로렌초 사후 사보나롤라에 의해 피렌체에는 신정이 성립되고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에서 추방당하게 된다.
훗날 로렌초의 둘째 아들인 조반니가 레오 10세로서 교황의 자리에 오르면서 메디치 가문은 다시 피렌체에 복귀하게 된다.
이후 메디치 가문은 토스카나 공작 가문으로서 피렌체를 수도로 하고 토스카나 지방을 영유하는 전제 군주로서 변모하게 된다.

from  http://blog.naver.com/ellul/20002134416

[image of Lorenzo de' Medici]

워싱턴 D.C national gallery of art에 있는

Andrea del Verrocchio가 만든

Lorenzo de' Medici 의 흉상

 

: 르네상스의 수호가문인 메디치 가(家).

  그 중점에 우뚝 서 있는 인물, 로렌초 데 메디치.

  아이러니하게도 가문의 명성을 최고조로 끌어올림과 동시에,

  가문이 쇠락하는 데에 결정적인 빌미를 제공했다.

  역시 경영자로서의 자격이 부족했던 것일까.

  정치가로서의 로렌초는 초일류급이라 들었건만.

  어쩐히 씁씁한 기분을 안겨주는 인물이다. 

 

    [image of Giuliano de' Medici]

 

Andrea del Verrocchio가 만든Giuliano de' Medici 의 흉상

Lorenzo de' Medici 흉상과 같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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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곡〉의 구성은 단순하다. 일반적으로 단테 자신으로 추정되는 한 인간이 기적적으로 저승세계로 여행 할 수 있게 되어 지옥·연옥·천국에 사는 영혼들을 찾아가게 된다. 그에게는 안내자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지옥'과 '연옥'을 안내하는 베르길리우스이고 또 하나는 '천국'을 소개하는 베아트리체이다. 1300년 부활제인 성(聖)금요일 저녁부터 부활절(일요일)을 약간 넘긴 시간에 일어난 이 허구의 만남을 통하여 단테는 추방이 그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물론 실제로 이 글을 쓰고 있을 때 그는 이미 추방된 몸이었음). 이런 식의 구상을 통해 단테는 망명 중에 겪게 될 이야기를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자신의 재난에 어떤 식으로 대처하는지를 설명하고 이탈리아가 처한 난관의 해결책까지도 제시할 수 있었다.

이처럼 한 개인의 유랑은 한 나라의 제반문제를 포괄하는 소(小)우주가 되면서 아울러 인간의 타락상을 나타내게 된다. 단테의 이야기는 이처럼 역사적 특수성과 전형성을 지닌다. 〈신곡〉의 구조를 이루는 기본 구성 요소는 곡(曲 canto)이다. 이 시는 100개의 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은 크게 〈지옥편〉·〈연옥편〉·〈천국편〉의 3편으로 나뉘어져 기법상 각 부마다 33개의 곡이 있다. 그러나 〈지옥편〉에는 시 전체의 서문 역할을 하는 곡이 하나 더 있다. 대부분의 곡은 136~151행 정도의 길이이며, 시의 운율체계는 3운구법(韻句法:aba bcb cdc 등)이다. 이처럼 이 시기에는 신성한 숫자인 3이라는 숫자가 이 작품의 어디서나 나타난다.
 
단테의 〈지옥편〉은 위치상으로나 목적상으로 볼 때 그보다 앞선 위대한 고전들과는 다르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Odyssey〉(7권)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Aeneid〉(6권)에서는 저승세계의 방문이 이 중간에 나온다. 왜냐하면 이 책의 중간 부분에서 인생의 본질적인 가치들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테는 전통을 따르되 실제로는 저승세계를 방문하는 것으로 여행을 시작하게 함으로써 전통을 변형시켰다. 그 이유는 그의 시의 정신적 유형이 고전적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적이기 때문이다. 단테의 지옥으로의 여행은 세상을 떠나는 영혼의 행동을 나타내며, 또한 이것은 우연히도 그리스도 자신이 죽은 계절과 일치하고 있다(이런 점에서 단테의 방법은, 찬란하나 결함있는 반역 천사장 루시퍼를 비롯하여 그의 타락한 천사들이 맨 먼저 모습을 나타내는 밀턴의 〈실락원 Paradise Lost)과 유사함). 〈지옥편〉은 잘못된 출발을 나타내는데, 이곳에서 주인공 단테는 타락한 세계에서 빠져나오는 데 다소 방해가 되었던 해로운 가치들을 깨달았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지옥편〉의 복귀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단테가 지옥에 떨어진 망자들의 명부를 보는 것이 이 시에서 가장 기억할 만한 장면 가운데 하나이다.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았던 중립자들, 지체 높은 이단자들,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 필리포 아르젠티, 파리나타 델리 우베르티, 피에로 델레 비녜, 브루네토 라티니, 성직 매매 교황들, 오디세우스, 우골리노 등은 엄청난 힘으로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지옥의 방문은, 베르길리우스와 후에 베아트리체가 설명하듯이, 진정한 회개를 시작할 수 있기 전에 거쳐야 할 극단적인 방법, 즉 고통스럽지만 꼭 겪어야만 할 일이다. 이것은 〈지옥편〉이 미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왜 불완전한지를 설명해 준다. 예를 들어 독자들은 흔히 34곡에서 마지막으로 사탄과 만나는 장면이 극적 혹은 감정적 힘이 부족하여 실망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옥으로의 여행은 주로 이별의 과정을 의미하며 따라서 더욱 완전한 발전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독특한 반(反)클라이맥스로 끝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면에서 그런 끝맺음이 불가피한 이유는 사탄의 마지막 등장이 어떤 새로운 것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사탄이 인간 역사에 존재함으로써 생긴 슬픈 결과들은 이미 지옥을 통과하면서 명백해졌기 때문이다.
 
〈연옥편〉에서는 주인공의 영혼이 갱생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 시작된다. 사실상 이 부분의 여행을 이 시가 제시하는 진실한 도덕적 출발점으로 여겨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 순례자 단테는 연옥으로 올라가기 위하여 자신의 개성을 억누른다. 단테가 물리칠 필요가 있는 본보기들과 대면하게 되는 〈지옥편〉과는 대조적으로 〈연옥편〉에서는 본보기로 나타나는 인물이 거의 없다. 회개자들 모두가 인생의 길을 따라 순례하는 순례자들이다. 단테는 소외된 관찰자로서 공포감을 느끼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그들에게 가담한다. 〈지옥편〉에서 본의 아닌 소외감에 대한 시가(詩歌)로서 거기서 단테가 자신이 예전 주장했던 것이 얼마나 유해한 것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면 〈연옥편〉에서는 이상적인 그리스도교적 심상의 생활을 순례행각과 가장 어울리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당당한 모습으로 지상의 낙원에 다시 찾아 베아트리체가 단테에게 현세의 기만적인 약속들을 거절하는 법을 배워야 함을 상기시켜 준다.
 
엄격한 제도에도 불구하고 연옥은 영혼의 서광이 비치기 시작하는 곳으로 좀더 넓은 시각으로 즐길수 있다. 〈지옥편〉(7곡)에서는 운명의 여신 포르투나에 관한 토론이 나오는 한 곡(曲)에서만 철학을 암시하지만, 〈연옥편〉에서는 역사·정치·도덕 분야의 모든 관점들이 개방되어 있다. 더욱이 〈연옥편〉은 시와 예술의 곡(曲)이기도 하다. 단테가 황량한 지옥세계를 지난 뒤에 "여기서는 죽은 자들로부터 시가 되살아나리니"하고 외쳤을 때 그것은 글자 그대로의 진의(眞意)였다. 지옥에 배정된 시인은 하나뿐이며 천국에 마땅한 시인은 둘을 넘지 않지만, 연옥에서는 독자들이 음악가 카셀라와 벨라쿠아, 시인 소르델로를 만나고 2명의 구이도, 즉 구이니첼리와 카발칸티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화가 치마부에와 조토를 비롯하여 여러 세밀화가들의 이야기도 듣게 된다. 연옥의 상단부분에서 독자들은 단테가 그의 고전적 전통을 재건하는 모습을 보게 되며, 다음으로 그가 포레세 도나티를 만났을 때 고전적 전통보다 더 고양된, 조국의 위대한 전통에 훨씬 가까이 가게 된다. 보나준타 다 루카와 만나면서 '청신체'의 진정한 원천에 관한 설명을 듣고, 구이도 구이니첼리를 만나서는 기교라든가 시적 제어력 등의 부분에서 그가 당시 세력을 떨치던 지방 시인 구이토네 다레초를 어떻게 능가했는지를 듣는다. 이 곡(曲)들은 〈지옥편〉(4곡)에 나타난 생각, 즉 단테가 지체높은 이단자들 사이에서 자신의 서사시에 관한 계획을 알려주며 자기의 위치가 고전작가들과 나란히 "6번째"에 속함을 다시 알리는 내용이다. 〈연옥편〉에서 단테는 그 전통을 확장하여 스타티우스(그의 〈테바이드 Thebaid〉는 사실 지옥 밑바닥에 있는 더 음산한 현상들을 제공함)까지 포함시키지만 또한 그의 더 근대적인 전통이 구이니첼리에게서 시작된 것임을 보여준다. 구이니첼리와 만난 다음 단테는 바로 지상 낙원에서 오래도록 기다린 베아트리체와 재회하게 된다. 이와 같이 단테는 고전에서 그의 도덕적·정치적 이해뿐만 아니라 서사시의 개념, 즉 당대의 가장 중요한 쟁점들을 충분히 포함할 만큼 큰 범위를 지닌 이야기라는 개념을 끌어낸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 그리스도교적 소재를 이루고 있는 사랑의 철학을 배운 것은 바로 조국의 전통에서였다.
 
이것은 물론 단테의 안내자인 베르길리우스가 다른 안내자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극(劇)이 존재하지 않는 노래 속에서 베르길리우스를 거부함으로써 유일한 극적 사건이 이루어진다. 단테가 베르길리우스를 안내자로 등장시킨 것은 문학사상 가장 풍부한 문화적 전유(專有) 가운데 하나였다. 우선 단테의 시에서 베르길리우스는 고전적 이성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또한 그는 역사적 인물로서 〈지옥편〉(1곡)에서 이렇게 소개된다. "사람은 아니나 옛날엔 사람이었다. 나의 어버이는 둘다 만토바 출생의 롬바르디아 사람들이었고 나는 뒤늦게나마 율리오 치하에서 태어나 그릇되고 거짓투성이인 제신들의 로마에서 살았다." 더욱이 베르길리우스는 단테의 고향 (당대의 이탈리아 지역)과 연관이 있으며 그의 배경은 전부 로마제국이다(베르길리우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시대에 태어나 아우구스티누스 대제를 찬양했음). 그는 시인으로 나타나며 그의 위대한 서사시의 주제는 단테의 시의 주제와 매우 비슷해 보인다. "나는 시인이었고 자랑스런 일리온이 타버린 뒤 트로이에서 온 안키세스의 정의로운 아들에 대해 노래했었다." 단테 역시 부당하게 쫓겨난 피렌체의 정의로운 아들을 노래했는데, 아이네아스가 더 나은 도시를 찾아야 했듯이 그의 경우는 천상의 도시를 찾아야 했다.
 
베르길리우스는 단테가 주의깊게 연구한 시인이며 그로부터 얻어낸 시적 양식은 그 아름다움으로 단테에게 많은 영예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단테는 수년간 베르길리우스를 생각하지 않았으며 베르길리우스의 정신이 되돌아왔을 때는 오랫동안 침묵한 나머지 미약해보였다. 그러나 베르길리우스는 한 사람의 명문가를 넘어선 로마 제국의 시인이자 단테에게 대단히 중요한 주제이며 현자(saggio), 혹은 도덕적 스승이었다.
 
베르길리우스는 이성을 대표하는 인물이긴 하나 신의 은총을 받은 특사로서, 그가 돌아온 것은 일찍이 단테의 베아트리체에 대한 믿음과 연결된 더 소박했던 신앙들이 소생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물론 베르길리우스 혼자로는 충분치 못했다. 그러나 단테가 베르길리우스를 거부했다고는 말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는 슬프게도 베르길리우스의 작품, 즉 그의 의식 어디에서도 역사의 지배 과정으로부터 개인적인 자유를 얻으려는 생각이 보이지 않음을 발견했다. 베르길리우스는 단테에게 추방객으로서 생존하기 위한 도덕적 교훈을 베풀어주었으며, 그것이야말로 그 자신의 시의 주제이자 단테의 시의 주제였다. 그러나 베르길리우스는 역사의 과정에 대한 믿음을 고수했으며 로마제국에서 정점을 이루었던 역사의 과정은 그에게 깊은 위안이 되었다. 반면 단테는 역사를 초월하는 인물로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역사가 그에게는 악몽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천국편〉에서는 진정한 영웅적 실현이 이루어진다. 단테의 시는 죽음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는 과거의 인물들을 묘사한다. 그들의 역사적 영향은 계속되어 그들의 모든 행위는 추종자들에게 경이감과 동화(同化)의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고조부 카차구이다, 성 프란키스쿠스, 성 도미니쿠스, 성 베르나르두스 같은 인물들을 만나면서 단테는 자신을 승화시키게 된다. 따라서 〈천국편〉은 실현과 완성의 시이다. 그것은 앞의 2편에 이미 묘사되었던 것을 실현하고 있으며, 미학적으로는 기대와 회고로 이루어진 정교한 시체계를 완성하고 있다.
 
평가와 영향
 
단테의 〈신곡〉은 마땅히 받아야 할 인정과 영예를 얻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400년까지 이 작품이 지닌 의미를 상세히 설명하기 위해 12개 이상의 주석이 나왔다. 조반니 보카치오는 이 시인의 일생에 대해 글을 쓴 뒤 1373~74년에 〈신곡〉에 관해 처음으로 공개강연을 했다(이것은 단테가 고대고전들과 함께 대학교과과정에서 채택된 첫번째 근대작가였음을 뜻함). 단테는 '시성'(詩聖 divino poeta)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1555년 베네치아에서 그의 위대한 시의 제목에 '성스러운'이라는 형용사를 덧붙인 훌륭한 책이 출판됨으로써 그의 시는 단순한 〈희극〉이 아닌 〈신곡〉이 되었다.
 
서사시가 호소력을 잃고 다른 예술 형식(주로 소설과 드라마)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을 때도 단테의 명성은 계속되었다. 사실 그의 위대한 시에서 독자들은 고전작품 특유의 힘을 즐길 수 있다. 후세대도 자신의 지적인 관심사가 단테의 시에 반영되어 있음을 찾아낼 수 있었다. 나폴레옹의 시대에 이어 19세기에도 독자들은 〈지옥편〉에 등장하는, 힘세고 연민을 느끼게 하는 불운한 인물들과 자신을 동일시했고 20세기초의 독자들도 이 시가, 그 구조와 논지와는 무관하며 때로는 그것들과 대조를 이루기조차 하는 미학적인 언어표현력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했다. 후대의 독자들은 이 시가 강한 건축물처럼 각각의 여러 부분들이 반영되고 조화되기도 하면서 잘 통합되어, 아주 복합적인 음향을 지닌 걸작임을 증명하는 데 열중했다. 단테는 생생한 묘사를 통해 뛰어난 전형들의 작품목록을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예시(豫示)와 대응면에서 위대한 문장가적 재능을 갖춘 시를 창조했다. 더욱이 그는 중요한 정치적·철학적·신학적 주제들을 모두 조화시켜 작품을 쓰는 한편 도덕적 지혜와 고양된 윤리적 안목을 보여주기도 했다.
 
단테의 〈신곡〉은 650여 년 동안 인기를 누려온 시이다. 놀랍고도 상상력이 풍부한 착상이 주는 소박한 힘으로 끊임없이 여러 세대에 걸친 독자들을 놀라게 했다. 이 작품은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서구세계의 모든 고등교육에서 주요 교과목으로 쓰였으며 계속하여 현대에 와서도 중요한 시인들에게 지침이 되었고 자양분을 제공해주었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는 단테를 "그리스도교적인 최고의 상상력"이라 불렀으며 T.S. 엘리엇은 "근대세계는 셰익스피어와 단테가 나눠 가졌다. 제3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함으로써 근대에서 단테에 필적할 만한 사람은 윌리엄 셰익스피어밖에 없다고 하여 그를 발군의 작가로 높이 평가했다. 사실상 근대사상과 관련을 맺으며 세계에 등장시킨 전형들을 창조하는 데 두 사람은 쌍벽을 이룬다. 단테는 셰익스피어처럼 역사적인 인물들로부터 보편적 전형을 창조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현대신화의 보고(寶庫)를 더욱 풍부하게 했다. R.J. Quinones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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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13세기는 황제파(기벨린 당)과 교황파(겔프당)사이의 오랜 대립의 역사였다. 그들의 대립관계는 잔인하고 치명적이었다. 두 파는 번갈아가며 우선권을 획득했는데 그때마다 상대에게 무서운 형벌을 가했고 유형을 내렸다. 1260년, 얼마동안 지배권을 쥐고 있던 겔프당이 몬타페르티 전투에서 패했으나, 1266년에는 교황과 프랑스 군대의 지원을 받아 베네벤토에서 기벨린당을 물리치고 그들을 영원히 피렌체에서 쫓아버릴 수 있었다. 1265년 태어난 단테는 전후(戰後)의 긍지와 영토 확장주의의 분위기로 가득찬 도시 피렌체에서 성장했다. 당시 피렌체는 정치력 뿐 아니라 지적인 영향력도 가지고 있었다.

 

피렌체의 지적 우월권을 확보하는 데 지도적인 인물은 망명에서 돌아온 브루네토 라티니였다. 라티니는 젊은 세대 가운데 구이도 카발칸티, 포레세 도나티, 단테를 포함한 우수한 인재들에게 새로운 민중 의식을 일깨워주었고, 그들의 지식과 작가로서의 역량을 조국 피렌체를 위해 쓰라고 격려했다. 당대의 역사가 조반니 빌라니는 라티니를 [피렌체인들을 순화시키고 그들에게 좋은 화술(話術)을 가르치고 우리 공화국을 정치 철학, 즉 정치론(la politica)에 따라 지도하는 법을 가르치는 선도자이자 스승]이라고 불렀다. 라티니의 가장 중요한 저서 [보전(寶典) Les Livres du Tresor](1262~66)은 라티니가 망명시절을 프랑스에서 보냈기에 프랑스어로 씌어졌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고전 인용문의 보고였으며, 이 저서 제2권의 첫 부분에는 일찍이 라틴어가 아닌 근대 유럽 속어로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의 일부가 실려 있다. 라티니는 철학·윤리학·정치학 분야의 거의 모든 논제나 주제를 다루는 데 키케로와 세네카의 작품을 자유롭게 인용하였고, 통치 문제를 다룰 때는 자주 구약성서의 잠언을 인용했는데, 라티니의 저서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성서,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세네카의 글들이 초년의 단테에게 문화적 지주가 되었다. 단테의 교양 가운데 중요한 부분이 된 라티니의 유산에서 또 하나의 로마적 요소는 영광에 대한 사랑, 즉 전력을 다해 남보다 뛰어나려는 노력을 하면서 명성을 추구하는 일이었다. 

  

1289년, 교황파(겔프)와 황제파(기벨린)가 싸울 때 24세의 단테는 기병대의 일원으로 캄파르디노전투에 참가했다. 이윽고 피렌체의 시정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1295년 11월에 귀족출신인 단테는 정치활동 필요상 의약업종조합(醫藥業種組合)에 가입하였으며, 포폴로(popolo)선출위원으로 가담, 12월에는 사비(원로)의 한 사람이 되었고 이듬해인 96년에는 시뇨리아 직속의 100인 위원회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그 무렵 피렌체시의 행정은 교황파중에서도 공화국의 자립정책을 내세우는 백당(白黨)과 상업상 이익에서 교황과 강하게 결탁한 흑당(黑黨)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단테는 35세인 1300년에 교황파의 동맹을 위해 사자(使者)로 산지미냐노에 갔으며 그해 여름에는 프리오레(통령)가 되었다. 그러나 흑백 양당의 싸움이 격화하였으므로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가 조정사절을 파견하여 피렌체의 내정에 간섭하려고 했기 때문에 정권을 쥐고 있었던 백당은 이를 저지할 목적으로 1301년 10월, 단테를 포함한 세 사람을 로마에 사자로 보냈다. 그러나 그 사이에 교황의 사절은 피렌체에 들어갔고, 정변이 일어나 흑당의 천하가 되었기 때문에 1302년 1월, 단테는 고국에 돌아갈 수 없는 채 공금횡령죄로 시외추방과 벌금형을 선고받았으며, 다시 3월에는 벌금을 지불하러 출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구추방의 선고와 함께 체포되면 화형에 처하도록 결정했다. 이때부터 그의 19년의 유랑생활이 시작된다.

 

[신생](1293경)은 단테가 생전에 만든 2권의 시집 가운데 첫번째 것이며, 2번째 작품은 [향연]이다. 둘다 운문과 산문이 혼합된 작품(prosimetrum)인데, 두 작품에서 산문은 약 10년의 기간을 두고 지은 시들을 서로 연결시키기 위한 방책으로 사용되었다. [신생]은 1283년 이전부터 대략 1292~93년에 쓴 시들을 모은 것이고 그보다 더 규모가 크고 야심적인 작품 [향연]에는 1294년 직전부터 [신곡]을 쓸 때까지 쓴 가장 중요한 시들이 실려 있다.

 

초기 망명생활에 단테는 추방된 겔프 백당에 들어가 군사적 탈환을 모색하려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선 듯하다. 그러나 이 노력은 아무 결실을 맺지 못하였음이 드러났다. 분명 단테는 피렌체의 또다른 추방자인 기벨린당원들에게 점차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고, 저술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고 귀환을 보장받기로 결심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것이 [향연](1304~07경)이다.

 

[향연] 제1권은 많은 부분이 감동적이며 체계적으로 속어를 옹호하는 데 씌어졌다. 단테는여기서 당시 지배계층이던 성직자들의 라틴 문화가 황혼기로 접어들고 지방 도시문학의 출현을 예고했다. 단테는 자신이 이 둘 사이에 있으며, 새롭게 참정권을 얻은 민중 독자들을 교육시키는 철학자이자 중개자라고 생각했다. 단테가 공표했던 이탈리아 문학은 곧 주도적인 문학이 되었고 이탈리아어는 유럽의 주도적인 문학어가 되었으며 이러한 위치는 3세기 이상 계속되었다. 이 저서에서 그는 처음으로 제국의 전통, 특히 로마 제국의 전통을 옹호하는 감동적인 글을 썼다. 이 글에서 그는 영혼이 신에게 귀의하게끔 도와주는 인간 고유의 욕구, 즉 '오르메'(horme)라는 중요한 개념을 도입했다. 그러나 그 욕구는 본보기와 교리를 통한 적절한 교육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속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잘못 인도되어 파괴력으로 사회를 분열시키게 된다. 여기에 단테는 정치 사상과 인간의 욕망에 대해 자신이 이해하는 바를 결부시켰다. 즉, 교황이 세속 권력에 대한 욕망을 가진다면 그때는 인간의 욕망을 신에게 향하도록 하는 적절한 정신적 본보기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황제의 권한이 약해진다면 그때는 사람의 의지에 물리적 제한을 가할 만한 법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단테는 이와 같은 요인이 이탈리아가 빠져들었던 혼돈을 설명해준다고 생각했고, 결국 이런 상황을 치유하려는 바램을 품고 [신곡]이라는 서사적 과업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나의 정치적 사건이 일어나 처음에는 엄청난 희망을 품게하다 나중에는 더 큰 실망에 빠져들고 말았다. 1308년 11월 룩셈부르크 백작 하인리히 공(公)이 독일 왕으로 뽑혔고, 보니파키우스의 뒤를 이은 교황 클레멘스 5세가 1309년 7월 하인리히를 로마의 왕으로 선포하고 그를 로마로 초대했다. 하인리히는 로마의 성(聖)베드로 대성당에서 신성로마제국의 왕관을 쓰게 될 예정이었다. 다시 한번 황제의 통치를 기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이탈리아를 흥분시켰으며 단테도 황제 지지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황제의 출현으로 평화가 회복되면서도 황제가 정신적으로는 종교적 권위에 예속할 것을 선언케 되리라는, 오랫동안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이상이 곧 실현되리라고 생각했다. 1310년 이탈리아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인리히 7세의 매력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너무 오랜 시간을 북방에서 허비한 나머지 적들에게 세력을 규합할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결국 클레멘스도 하인리히에게 등을 돌리고 만다. 이런 행동은 단테가 가장 위대한 논쟁서 가운데 하나인 [제정론](1313경)를 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 그는 [향연]에서 다루었던 정치적 논쟁을 확장시켰다. 클레멘스의 속임수에 격분한 분위기 속에서 단테는 그가 지닌 논쟁의 힘을 교황이 정치적 통치자보다 우월하다는 주장, 다시 말해 황권의 정치적 권위가 교황으로부터 나온다는 주장을 반대하는데 쏟았다. 단테가 지녔던 문제는 그가 비유적인 언어와 역사적 예를 들어 이야기했더라면 더 잘 옮길 수 있었을 미묘한 관계를 이론적 언어로 표현해야만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하인리히 7세의 임무 실패에 대해 단테가 실망한 이유는 하인리히의 초기 후원자가 외관상 클레멘스 교황으로 보였고 또 그 같은 상황이 두 최고 권력가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재수립하는 데 이상적으로 보였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이었다.

 

단테의 망명시절은 그 자신도 거듭 되풀이하여 말하듯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어렵게 편력하는 시기였다. 그렇지만 단테는 추방기간 동안 시를 씀으로써 자신을 지탱할 수 있었는데, 이 위대한 서사시 [신곡]은 1308년 이전에 쓰기 시작된 듯하며 죽기 바로 전인 1321년에 끝을 맺었다. 아울러 그는 마지막 몇 년간 북부 이탈리아의 많은 귀족 저택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특히 라벤나에서 유명한 프란체스카의 조카 구이도 노벨로 다 폴렌타의 환대는 가장 두드러진 것이었다. 단테가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을 때 당시 최고의 문필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구이도 자신이 추도사를 진행한 훌륭한 장례식이 치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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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함과 행함

자크 엘룰 지음, 양명수 옮김 / 전망사
상품평점 ★★★★★ 

 

[To Will and To Do: An Ethical Research for Christians]라는 제목으로 1964년  출간된 이 책은, 국내에는 1990년 번역되었다가 절판되었다. 1964년은 기술의 역사 (The technological society)가 영문으로 번역될 무렵으로, 이 책은 현대사회의 기술지배하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대안이라 할 수 있는  윤리의 올바른 접근에 대해 바르트의 신학적 입장을 적용한 것이다.

엘룰은 먼저 윤리의 기원이 인간의 타락에 있음을 지적한다. 선과 악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자기의 기준을 제시하는 순간 타락은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제시하는 인간적 이성에 의한 선과 악의 구분은 결국 심판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이런 윤리의 결과는 자기정당성의 주장과 다른 사람에 대한 정죄이다. 에덴에서 그러했듯이... 더군다나 선과 악을 알기는 하나 스스로 그 기준을 충족시킬 능력은 없다.

선악의 기준인 윤리는 결국 타락의 질서이다. 계시가 아닌 인간규범내의 질서, 그리고 동시에 필연성의 질서이다. 필요한 것이 선이 된다. 선들은 새로 만들어지고 우선순위를 달리한다. 이것은 변화하는 가치에의 충성을 의미한다. 윤리란 항상 변하며 이것은 결국 불변하는 것과는 충돌할 수 밖에 없다. 이 두가지의 가치를 가진 자는 이 충돌을 경험한다. 그리스도인 안에서의 갈등이다. 인간의 윤리(그것이 그리스도교 윤리라 할지라도)와 하나님의 계시 사이의 충돌이다.

도덕은 그것이 특정 윤리이론에 근거를 둔 이론도덕이든(공자, 모세, 스토아, 아퀴나스, 칸트, 니체, 마르크스, 사르트르), 사회의 영향을 받은 체험적 도덕이든(그리스도교 사회, 공산주의 사회,부르조아 사회) 인간을 자기 뜻대로 자유롭거나 해방되게 하기보다 이론 자체나 사회의 틀속에 인간을 소외시킨다. 비도덕은 그렇다고 대안인가? 도덕의 탈피는 다른 도덕으로 인도하고, 결국 인간을 서로 자기정당화로 분리시키고 서로를 은폐시키기는 마찬가지다.  

지금의 현대사회는 부르조와윤리로 시작된 기술윤리가 지배하고 있다. 그 특징은 [행위에만 관심]을 갖는다는 것과(의도나 동기는 중요치 않다), 그 기준이 정상(normal)이냐, 다수에 속하느냐에 있다. 그래서  성공은 선이 되고 실패는 악이다. 이 시대는 [적응이 최대의 미덕]이며 덕은 노동과 훈련, 인내와 극기이다. 기술노동에 필요한 구조적 선이 윤리적 선의 자리를 차지한 셈이다.

엘룰은 따라서 그리스도교 윤리란 불가능하다고 한다. 결정된(defined) 선이란 존재하지 않는 그리스도인과 윤리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럼에도 윤리는 필요하다고 한다. 이는 신앙을 상황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이다. 이럴 때 윤리는 권고이어야 한다. 최소한의 요구이다. 또한 판단을 내세우지 않는 선한 행동이다. 이 윤리는 하나님의 뜻과 세상윤리 사이의 대립을 보여주는, 사람들 속에 나타남이다. 아무 자격이 없지만, 그리스도로 이 땅에 남겨진 사람은 사람들 속에 살며 그들을 위해 살아야하고 말해야하고 구부려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 수많은 선과 악의 기준 속에 살고 있다. 좌와 우, 노와 소, 빈과 부, 민족, 출신, 학식, 수입, 예의, 종교, 유대인인가, 흑인인가, 아랍인인가 수많은 철조망들이 바리새인과 같은 엄격한 이론으로 무장한 우리안에 살벌한  경계선을 드리우고 있다. 사랑하게 하려고, 서로 섬기게 하려고, 도와주게 하려고, 대접하게 하려고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하시고, 구하여 새사람 삼으셨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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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을 위한 변명 한마당 글집 1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조영훈 옮김 / 한마당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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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는 선과 악의 구분에 있어 자본의 소유 유무에 그 기준을 둔다. 자본의 소유는 악이며 타도의 대상이고 그 이면이 까발려져야 할 허위와 착취의 근원이다. 지식 노동자들의 본래 역할이란 기껏 이런 자본의 소유를 두둔하는데 있다. 그래서 사르트르가 말하는 지식인이 회개하는 길은 계급적 전향에 있다. 자본 소유자의 계층에서 태어난 지식인은 무산자의 편에 서야만 선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보편성의 정의는 [계급의 해체]다. 여기서의 계급이란 다만 통칭적 사회계층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자산의 소유의 양에 따른 [실존적 상황으로서의 계급의식]의 반영이다. 그래서 자기 계급을 뛰어넘어 무산자를 향하는 속죄의 길은 훨씬 험난하다. 이것은 진정한 보편성을 추구하는 자산자 출신의 지식인의 운명이다. 끝없는 자신 안의 긴장과 계급의식의 잔재를 송두리째 뽑아내고자 투쟁하는 삶이다.  

과연 무자산은 선일까? 진정한 균형은 소유는 마음대로 하게 두고 가난한 자를 돌보아주는 것인가 아니면 소유 자체를 가능치 않게 하는 모어의 유토피아인가? 이런저런 갈피잡지 못함을 사이에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고통당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라 해도 자산을 소유한 자기계급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동료인간의 실제적 어려움을 못 본체하는 자는 선하지 못하다. 무산자라고 선한 것은 아니라는 논리로 두둔하는 것도 낯부끄럽다. 그렇다고 무산자의 편에 서고 계급이 없어지는 그날까지, 지식인의 자기정체가 붕괴되는 그날까지 자기자신을 불사른다면 비로소 선하다 할 수 있는가? 지난 한세기를 지식인은 우왕좌왕한다. 그래서 아무 일도 하지는 않았다.

지식인 역할의 한몫이 진정 자본에 대한 반작용에만 있다면 우리는 더 실제적이어야 한다. 피라미드의 상층부의 삶과 자본의 이익은 달콤하고 안락하며 요람에서 무덤까지 평안하다. 진정한 적은 중류층 지식인 내부에 있는 상층부에 대한 동경이다. 이 오르지 못할 나무를 앞에 두고 불쌍한 우리 인생은 그 아래를 어슬렁거린다. 허접한 중류 지식인이라도 나누어줄 힘이 있다면 자기가 조금 더 가진 것을 나누는 것으로 비로소 이 일은 시작된다. 남의 것으로 가져다 줄 생각을 말고 자기 것을 나눌 수 없다면 나는 또 다른 덫에 걸린셈이다.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모르는 것만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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