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4세 [ Henry IV , 1366~1413.3.20 ]

 

랭커스터왕가의 시조. 랭커스터공(公) 존 오브 곤트의 맏아들. 에드워드 3세의 손자. 청년시절에 사촌형인 당시의 국왕 리처드 2세에 반항하는 귀족일당에 가담하였으나 뒤에 왕과 화해하고, 1397년 헤리퍼드 공작에 봉작되었다. 그 동안 대륙의 독일기사단의 군대에 참가하여 기사도적 행위에 열중하였으며, 1398년 대역(大逆)을 저지른 혐의로 프랑스에 추방되었다. 이듬해 아버지가 죽자 리처드 2세가 랭커스터 공령(公領)을 몰수하였기 때문에 급히 귀국하여 거병(擧兵), 왕군을 무찌르고 리처드 2세를 체포, 퇴위시킨 뒤 의회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다.

 

그의 치세는 대외적으로는 프랑스·스코틀랜드와의 전쟁, 대내적으로는 웨일스의 반란, 이단(異端) 롤라드파의 봉기 등의 진압에 분망하였고, 많은 어려움과 맞서야 했다. 그러나 의회를 존중하여 어려움을 잘 극복함으로써 의회 발달사상 주목할 만한 획기적인 시기를 구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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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6~1597년에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쓴 역사극이다. 각각 5막으로 된 두 부분 중 첫번째 부분은 1597년에 초연되어 1598년에 출판되었다. 1398년에서 1422년 사이의 역사를 다룬 랭커스터 4부작의 중심을 이루며 《리차드 2세》와 더불어 셰익스피어의 절정기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특히 인물과 장소, 풍부한 언어 표현형식 등의 면에서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작품에서 헨리 4세는 주인공이 아니며 주인공은 오히려 아들인 왕자 할(Hal)이다. 이상적이고 민중과 친숙한 지배자로서 뒤에 헨리 5세가 되는 왕자 할은 이 작품의 중심 테마를 이룬다. 헨리 4세는 1399년 합법적이지만 무능한 지배자 리처드 2세로부터 권력을 빼앗고 그를 살해한다. 이 사건은 성공한 반란으로서 합법화되지만 세익스피어의 역사극과 튜더왕조의 역사에는 왕위 찬탈로 기록된다. 셰익스피어의 역사극은 당시 영국 국민들의 역사책으로 사용되었고 동시에 반란을 일으켜 신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

 

한편 팔스태프(Falstaff)라는 인물은 인물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전통이 결합된 모습을 보여 준다. 특히 그리스희극과 코메디아 델 아르테의 허풍장이 군인과 중세 도덕극의 유혹자 모습을 닮았는데, 팔스태프라는 인물과 분위기를 통해 《헨리 4세》는 희극적인 면과 사실적인 면을 동시에 표현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왕자 할의 영혼에 들어 있는 희극적이고 악마적인 성격과 영웅적인 덕성이 서로 투쟁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즉 할 왕자는 1부 첫부분의 독백을 통해 술주정뱅이와 도둑들의 세계와 거리를 두지만, 다른 한편으로 궁정세계의 의례와 정치적인 간계, 군인의 획일적인 덕성으로 자신의 세계를 가두고 싶어하지 않는다.

 

결국 할 왕자는 자신의 위치가 법과 질서 내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지배자가 되려면 사적인 삶의 형태를 더 이상 계속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지만, 민중들 틈에서 겪은 경험을 토대로 자신이 귀족의 지배자가 아니라 민중의 지배자임을 인식하게 된다.

 

《헨리 4세》의 두 부분이 갖고 있는 내적인 연관관계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오늘날의 셰익스피어 연구에서는 1부의 사건이 2부에서도 연결되어 진행된다는 점에 주목하여, 전체적인 주제와 구조상 두 부분이 처음부터 하나로 구성된 것으로 본다.

 

 

 

 

헨리 5세 [ Henry V , 1387.9~1422.8.31 ]

 

랭커스터왕가 출신. 헨리 4세의 맏아들. 1400∼1408년 웨일스의 반란을 토벌하고, 부왕(父王)의 만년에는 그를 대신하여 정무(政務)를 보았다. 치세 초기에는 롤라드파의 봉기(1414), 요크의 리처드 음모(1415) 등으로 위협을 받았으나 가차없이 진압하였다.

 

선왕시대 내치(內治)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외정(外征)으로 민심을 돌리려고 다년간 휴전 중인 백년전쟁을 재개, 1415년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프랑스에 상륙, 아쟁쿠르전투에서 대승하였다(1415). 1419년 루앙을 점령하고 파리에 육박, 1420년에는 트루아조약으로 프랑스왕 샤를 6세의 딸 카트린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조건으로,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인정하게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다수 귀족들은 이 조약을 인정하지 않고 반항을 계속함으로써 전쟁은 계속되었으며, 그는 남프랑스 뱅센의 진중에서 병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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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쓴 5막극으로 1599년에 초연되었다. 《리차드 2세》 《헨리 4세》와 이른바 랭커스터 4부작(Lancaster-Tetralogie)에 속하며 《요한 8세》 《헨리 8세》 등의 요크 4부작(York-Tetralogie)과 함께 셰익스피어의 역사극을 대표한다. 랭커스터왕가와 요크왕가의 장미전쟁(Rosenkrieg) 시기를 그렸다.

 

헨리 5세는 경제적인 이유를 내세운 신하들의 권유에 의해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하고 직접 전쟁을 지휘한다. 헨리 5세는 아쟁쿠르(Azincourt) 전투에서 승리하여 프랑스 왕 샤를 6세의 딸 카트린과 결혼을 하고 평화를 맺는다.

 

이 작품의 특징으로는 에피스드적 구조와 합창단을 사용하여 통일성을 부여한 점을 들 수 있다. 각 장면에서 헨리 5세는 여러 상이한 기능, 즉 다양한 성격적 특징을 보여 준다. 정의감과 엄격함, 의무감, 개인적인 관심과 인간관계를 판단하는 정치가적 능력, 탁월한 전쟁 수행능력 등이 그것인데, 셰익스피어는 오랫동안 헨리 5세를 이상적인 군주상으로 여겼던 것으로 알려졌다.

 

장미전쟁의 분쟁은 죄와 벌이라는 순환구조의 예로 사용된다. 이 순환구조의 첫 부분은 헨리 5세의 아버지인 헨리 4세에 의한 리차드 2세의 폐위로 시작된다. 헨리 5세의 즉위 시기는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운명적인 복수가 수행되는 시기이다. 이는 헨리 5세의 개인적이고 정치적인 덕성에 의해 비롯되며, 합창단은 왕의 덕성을 찬미하고 사건을 찬미한다.

 

그러나 셰익스피어가 그린 헨리 5세는 보다 세심하며 주인공과 전쟁을 평가하는데 여러 상이한 해석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합창단이 찬미하는 왕의 모습과는 반대로 헨리 5세는 오히려 부정적이고 폭군적인 인물로 그려졌다. 왕의 이상적인 성격은 줄거리가 전개되고 부수적 인물과 비교되면서 아이러니컬하게 상대화된다. 즉 군인들이 나누는 밤의 대화에서는 왕의 권위조차도 의심을 받고, 카트린과 헨리 5세의 결혼을 통한 영국과 프랑스와의 평화적 합일은 헨리 6세의 섭정기에 대한 언급(영국이 백년전쟁에서 패한 내용)으로 평가절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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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역대 왕조 계보

▶ 왕조의 시대 순서

고대 시대 - 중세 시대 - 앵글로. 색슨 7왕국 시대 시작 - 앵글로 색슨 왕조 - 노르만 왕조 - 플랜테지넷 왕조 - 근세 시대 -   랭카스터 . 요크 왕조 - 튜더 왕조 - 스튜어트 왕조 - 하노버 왕조 - 현대 시대 - 윈저 왕조
 
고대 시대
 * 켈트 족 거주, 케사르의 원정(B.C. 55) - 로마의 통치를 받음.

 중세 시대

♣ 앵글로 색슨 왕조

◈ 웨섹스가(Wessex 家) 
 (1) 엑버트(829 ∼ 839) - (2) 에델울프(839 ∼ 858) - (3) 에델볼드(858 ∼ 860) - (4) 에델버트(860 ∼ 866) - (5) 에델레드 1세(866 ∼ 871) - (6) 알프레드 대왕(871 ∼ 899) - 에드워드1세(899 ∼ 924) - (8) 에델스탄(924 ∼ 940) - (9) 에드먼드 1세(940 ∼ 946) - (10) 에드레드(946 ∼ 955) - (11) 에드위(955 ∼ 959) - (12) 에드거(959 ∼ 975) - (13) 에드워드(975 ∼ 978) - (14) 에델레드 2세(978 ∼ 1016) - (15) 에드먼드 2세(1016)    

◈ 댄가(Dane 家)
 (16) 카누트 대왕(1016 ∼ 1035) - (17) 하롤드 1세(1035 ∼ 1040) - (18) 하르디카누트(1040 ∼ 1042) - (19) 에드워드(1042 ∼ 1066) - (20) 하롤드 2세 (1066)
 
♣ 노르만 왕조(1066 ∼ 1154)
   롤로(조대 노르망디 공) - 윌리엄 - 리처드 1세 - 리처드 2세 - 로버트 - (1) 윌리엄 1세 (정복왕 1066 ∼ 1087) - (2) 윌리엄 2세 (1087 ∼ 1100) - (3) 헨리 1세(1100 ∼ 1135) - (4) 스티븐(1135 ∼ 1154)

♣ 플랜테지넷 왕조(1154 ∼ 1399)
  (1) 헨리 2세(1154 ∼ 1189) - (2) 리처드 1세(1189 ∼ 1199) - (3) 존(無領王 1199 ∼ 1216) - (4) 헨리 3세(1216 ∼ 1272) - (5) 에드워드 1세(1272 ∼ 1307) - (6) 에드워드 2세(1307 ∼ 1327) - (7) 에드워드 3세(1327 ∼ 1377) - 에드워드(흑태자 1376 死) - 존(랭카스터 공) - 에드먼드(요크 공) - (8) 리처드 2세(1377 ∼ 1399)

 근세 시대

♣ 랭카스터. 요크 왕조
  ◈ 랭카스터가(Lancaster 家) 
    (1) 헨리 4세(1399 ∼ 1413) - (2) 헨리 5세(1413 ∼ 1422) - 헨리 6세(1422 ∼ 1461)
  ◈ 요크가(York 家)
  - (4) 에드워드 4세(1461 ∼ 1483) - (5) 에드워드 5세(1483) - (6) 리처드 3세(1483 ∼ 1485)
 
♣ 튜더 왕조(1485 ∼ 1603)
   리처드 3세(요크가) = 마거릿(랭카스터가) - (1) 헨리 7세(1485 ∼ 1509) = 엘리자베스(에드워드 4세의 딸) - (2) 헨리 8세(1509 ∼ 1547) - (3) 에드워드 6세(1547 ∼ 1553)(시모어의 아들) - (4) 메리 여왕(1553 ∼ 1558)(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와 결혼)(캐서린의 딸) - (5) 엘리자베스 여왕(1558 ∼ 1603)(앤불린의 딸)

♣ 스튜어트 왕조(1603 ∼ 1714)
  (1) 제임스 1세(1603 ∼ 1625) - (2) 찰스 1세(1625 ∼ 1649) - (청교도 혁명<1649>. 공화정 시대<1649 ∼1660> ) - (왕정복고<1660>) - (3) 찰스 2세(1660 ∼ 1685) - (4) 제임스 2세(1685 ∼ 1688) - (5) 메리 여왕(1688 ∼ 1694)와 윌리엄 3세(1688 ∼ 1702)의 공동 통치 - (6) 앤 여왕(1702 ∼ 1714)

♣ 하노버 왕조(1714 ∼ 1917)
  (1) 조지 1세(1714 ∼ 1727) - (2) 조지 2세(1727 ∼ 1760) - (3) 조지 3세(1760 ∼ 1820) - (4) 조지 4세(1820 ∼ 1830) - (5) 윌리엄 4세(1830 ∼ 1837) - (6) 빅토리아 여왕(1837 ∼ 1901) - (7) 에드워드 7세(1901 ∼ 1910)
 
 현대 시대

♣ 윈저 왕조(1917 ∼  )
  (1) 조지 5세(1910 ∼ 1936) - (2) 에드워드 8세(1936) - (3) 조지 6세(1936 ∼1952) - (4) 엘리자베스 여왕(195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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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역대 왕조의 계보  

프랑크 왕국 3분됨(622) - 베르됭 조약(843) - 메르센 조약(870) - 카페 왕조 - 발루아 왕조 - 부르봉 왕조 - 보나파르트 왕조 - 오를리앙 왕조 - 보나파르트 왕조 - 공화정  

 ▣ 카페 왕조 (987 ∼ 1328) : 봉건 왕조

(1) 위그노 카페(987 ∼ 996) - (2) 로베르 2세(996 ∼ 1031)  - (3) 앙리 1세(1031 ∼ 1060) - (4) 필리프 1세(1060 ∼ 1108) - (5) 루이 6세(1108 ∼ 1137) - (6) 루이 7세(1137 ∼ 1180) - (7) 필리프 2세(1180 ∼ 1223) - (8) 루이 8세(1223 ∼ 1226) - (9) 루이 9세(1226 ∼ 1270) - (10) 필리프 3세(1270 ∼ 1285) - (11) 필리프 4세(美麗王 1285 ∼ 1314) - (12) 루이 10세(1314 ∼ 1316) - (13) 필리프 5세(1316 ∼ 1322) - (14) 샤를 4세(1322 ∼ 1328)

 ▣ 발루아 왕조(1328 ∼ 1593) : 중앙 집권 국가 형성

(1) 필리프 6세(1328 ∼ 1350) - (2) 잔(1350 ∼ 1364) - (3) 샤를 5세(1364 ∼ 1380) - (4) 샤를 6세(1380 ∼ 1422) - (5) 샤를 7세(1422 ∼ 1461) - (6) 루이 11세(1461 ∼ 1483) - (7) 샤를 8세(1483 ∼ 1498) - (8) 루이 12세(1498 ∼ 1515) - (9) 프랑수아 1세(1515 ∼ 1547) - (10) 앙리 2세(1547 ∼1559) - (11) 프랑수아 2세(1559 ∼ 1560) - (12) 샤를 9세(1560 ∼1574) - (13) 앙리 3세(1574 ∼ 1589)

▣ 부르봉 왕조(1589 ∼ 1792) : 절대 왕정

(1) 앙리 4세(1589 ∼ 1610) - (2) 루이 13세(1610 ∼ 1643) - (3) 루이 14세(1643 ∼ 1715) - (4) 루이 15세(1715 ∼ 1774) - (5) 루이 16세(1774 ∼ 1793) - [프랑스 대혁명 (1789 ∼ ). 나폴레옹 시대(1799 ∼1815)] - (6) 루이 18세(1814 ∼ 1815)(1815 ∼1824) - (7) 샤를 10세(1824 ∼ 1830)

▣ 오를리앙 왕조(1830 ∼ 1848)

▣ 보나파르트 왕조(1804 ∼ 1814), (1852 ∼ 1870)  

 (8) 루이 필립 - [제2 공화정] - [제2 제정. 나폴레옹 3세] - [제3 공화정] - [제4 공화정] - 비시괴뢰 정부(페탱장군)(1940 ∼ 1944)   - [제5 공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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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ohn Yoder의 평화주의 인식론의 탈현대적 함의

                                                                                                                                김기현

1. 서론
언제나 기독교 신학은 계시의 빛 아래서 하나님의 피조 세계에 일어나는 현상을 해석하고 실천하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 신학은 우리 자신의 현대적 경험을 기독교의 경험,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해석하고 비판적인 변혁을 도모해야 한다. 지평으로서의 세상과 척도인 기독교의 메시지를 비판적으로 관련시키는 것은 신학의 고유한 과제임에 틀림없다. 지난 20세기는 전쟁과 혁명의 세기였으며 결국 폭력에 기초한 질서들의 충돌의 역사였다. 더군다나 우리의 역사 또한 전쟁과 폭력으로 점철된 역사였다는 점이다. 사회학자 김동춘의 지적처럼 아직도 우리는 한국전쟁이 개시된 날짜를 기억하고 기념하며, 그런 까닭에 전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이 땅에 계속 재연되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 한국 교회와 사회의 긴급한 과제 중의 하나는 가깝게는 이 땅에 다시는 분단된 조국에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멀게는 우리 사회 곳곳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폭력의 메커니즘을 제거하고 성서가 말하는 정의가 살아 있고, 모든 피조물이 서로 화해와 평화를 누리게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런데 전쟁과 폭력의 세계는 전쟁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세계관을 요구하고, 역으로 그 세계관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이 논문의 목적은 근대 철학이 폭력과 억압의 인식론이었음을 설명하고, 다음으로 평화주의는 근대 철학의 문제를 비판하는 또는 극복하는 탈현대적 함의를 지니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이를 평화주의의 인식론(pacifist epistemology)라고 명명할 수 있다. 평화는 단지 사회 정치적인 실천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철학적인 성찰과 신학적인 증언의 주제이다. “폭력이 힘에 관한 윤리학일 뿐만 아니라 어떻게 진리 스스로 말하도록 하는 인식론”의 문제이다. 기독교 평화주의는 사회 정치적 윤리 이론으로만 이해될 수 없고, “특정한 사유 스타일 혹은 담론의 양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기독교 평화주의는 독특한 인식론을 함축한다.”

평화주의의 인식론은 기독교 윤리와 신학을 판단하는 잣대가 될 수 있다. 요더는 전쟁은 근대 기독교 윤리를 평가하는 시금석이라고 말한다. 그의 주장을 조금만 확장하면, 전쟁과 평화의 문제는 근대와 기독교의 인식론을 평가하는 시금석이라는 명제 또한 가능하다. 전쟁에 대한 견해는 단지 윤리학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고 윤리학 전체의 문제이다. 더 나아가 평화주의는 윤리학을 평가하는 시금석일 뿐만 아니라 신학 전체를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따라서 평화주의는 근대와 교회가 전쟁과 폭력에 관해서 모종의 일치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에 대한 반성이자 비판이다. 다시 말해서 평화주의 인식론은 근대의 인식론이 폭력의 인식론이었음을, 교회의 인식론은 전쟁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폭로하고 비판한다.

2. 근대에 대한 탈현대적 비판
탈현대 철학의 지향점에 대한 다양성과 입장에 대한 찬반 여부를 떠나서, 그리고 미래의 전망에 관한 불일치가 있지만, 지난 서구의 근대 자체에 대한 비판적 반성이라는 점에서는 거의 합의를 하는 듯 하다. 강영안에 따르면 탈현대적 경향은 한편으로 과학과 이성의 맹목성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객관주의 비판, 다른 한편으로 주체의 절대화에 대한 해체로서의 주관주의 비판이라는 양면성을 지닌다.

먼저 근대적 사유의 요체는 과학적 합리성에 있다. 확실한 지식은 주관적 느낌이나 관습을 배제하고 실증적으로 탐구를 통해서 획득된다. 이 탐구가 가능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모든 세계를 객관화하여야 한다. 다시 말해 신을 포함하는 모든 사물과 인간 자신을 계량 가능하고 양적 대상으로 환원되어야 한다. ‘사실’이 이론 구성의 최종적 토대가 되기 위해서는 일체의 선입견이나 편견, 세계관으로부터 따로 분리되어야 한다. 사실의 세계에 놓여 있는 것은 별 문제가 없겠지만, 소위 가치의 세계에 있는 것, 예컨대 신과 인간의 내면, 그리고 도덕의 문제는 사실의 언어로 환원되거나 아니면 헛소리로 폄하되기 일쑤였다. 그 결과 모든 존재와 그 의미는 그 고유성을 박탈당하고 필요에 따라 임의로 변경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조작 가능한 한낱 대상으로 전락된다. 기실 근대 신학은 과학적 합리성의 요구에 맞서서 자신의 존재 의의를 방어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하나님을 측정 가능한 물적 대상과 같은 방식으로 설명할 것인가? 아니면 과학적 검침이 불가능한 초월적 대상으로 설명할 것인가?

이러한 객관주의의 이면에는 주체의 지배 욕구가 자리 잡고 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연구한다는 것, 그것은 주체의 관심이나 의욕과 무관하게 대상은 그저 사물로만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인간이 인식하기 위해서는 주체가 능동적으로 개입할 수 밖에 없다. 나와 무관한 대상은 능동적인 주체의 의지에 의해 재구성된다. 이렇듯 대상을 주체와 맞서는 건너편에 두는 것은 대상에 대한 주체의 지배를 성립시킨다. 대상을 주체와 분리할 때에 대상에 대한 주체의 지배가 성립된다. 주체의 지배는 대상을 주체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서 보듯이, 인식하는 주체의 틀과 기준에 맞추어 대상을 재단하는 것이다. 주체의 인식 틀에 담을 수 없는 것은 잘라서, 그리고 작은 것은 우격다짐으로라도 늘려서 집어넣는다. 인식이란 애초부터 인식할 수 있는 것만을 인식할 수 있는데, 인식할 수 없는 것은 인식할 수 있는 기호와 코드로 변경해야만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주체를 하이데거는 ‘권력 이성의 형이상학적 표현’이라고 하였다. “사유는 곧 사물을 움켜쥐고 고문하며 사물의 본질을 ‘수학적으로’ 파악하는 인간 행위는 결국 ‘자기’, ‘자아’ 위에 기초해 있고 이런 의미에서 ‘자아’ 혹은 ‘자기’는 바로 현대적 의미에서 ‘주체’라는 것이 하이데거의 데카르트 해석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하이데거는 “데카르트에서 출발한 근대 철학은 자기 증대에 사로잡힌 주체의 권력 요구의 역사로 일관되게 해석하고” 있다.

물론 우리는 강영안의 주장처럼 데카르트 이후의 철학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탈현대 철학의 주체의 죽음 선언이 말하는 주체의 의미에 대해 의문 부호를 남길 수 있다. 대상을 완전히 독점하고 지배하면서 호령하는 주체에서 타자와의 연대성 속에서 존재하는 올바른 주체 개념을 확고히 하는 것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떤 주체의 죽음이라고 말하든 간에, 현재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주체는 무죄를 결코 주장할 수 없는 유죄이고, 사형 선고가 지나치다 하더라도 상당한 형량이 요하는 잘못을 범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보다 분명한 것은 근대 철학은 타자의 억압과 배제의 인식론에 서 있다는 사실이다.

3. 평화주의의 정의
평화주의의 기초는 기독론에 있다. “우리의 목적은 기독교 평화주의 입장이 실용적이거나 심리학적인 것이 아니라 기독론적 고찰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것에 의해 사회 질서에 부적절하다는 것이 참된 사실인지를 분석하는 것이다.” 아마 존 요더의 평화주의를 가장 잘 정리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에서 밝힌 ‘메시아적 공동체의 평화주의’일 것이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평화주의가 그리스도의 주되심(Lordship)에 근거한다고 명백하게 밝힌다.

“이것이 메시아적 공동체의 평화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라는 신앙고백에 의존한다는 것을 확언하는 것이다. 예수가 메시아라고 말하는 것은 그 안에서 오실 분, 곧 하나님의 뜻이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분에 대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소망을 완성하는 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과 수난 안에서 이 평화주의는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으며, 그의 부활 안에서 그 능력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평화주의는 요더의 평화주의는 “만약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혹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 아니라면 이 메시아적-공동체 입장은 와해되고 만다.” 기독교가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단지 교회 내부만이 아니라 사회 역사의 현장에서도 적용하고 실천 가능한 윤리적 담론이다.

요더가 말하는 그리스도는 기독론 중에서도 십자가를 강조한다. 십자가와 그분의 대속적 죽음은 하나님께서 악을 어떻게 다루셨는가를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기독교 평화주의의 단 하나의 정당한 출발점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선으로 악을 이기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은 전쟁에 참여하는 것과 양립하는가?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주(Lord)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전쟁과 폭력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분의 가르침과 행위를 본받는 삶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4. 실증주의의 거부
기독교 평화주의는 그리스도의 주되심(Lordship)에 기초를 둔다. 이는 평화의 실천은 효율성과 실용성에 근거를 두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성품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안에 신학적 기초를 두고 있는 기독교 평화주의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는 효율성이나 확실성이 아니라 부활을 통하여 온다. 실용성을 거부하고 신앙 고백만을 붙잡는 평화주의의 사회 전략은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고리타분하게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가장 대표적인 신학자가 바로 라인홀드 니버이다. 니버가 보기에 평화주의의 약점은 비효율적인 아가페적 사랑에 기초해서 비현실적인 참여를 한다. 그러나 요더의 대답은 십자가의 수용은 완전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려는 길이다.

이러한 효율성과 실용성의 거부는 더 작은 악의 논리의 거부로 나타난다. 예컨대 더 작은 악이란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가해자에게 구타를 하는 것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 보다는 더 작은 악이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생각이다. 더 큰 악을 피하기 위해서 더 작은 악을 선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더라도 불가피한 결정이라고 본다. 하지만 더 작은 악의 논리적 허점은 그 전제를 검토하면 자명해 진다. 더 작은 악의 가정은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는 것과 악을 측정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더 작은 악을 통해서 벌어지는 결과가 더 선한 결과를 낳고, 또한 그 선한 결과는 악보다 계량적으로 더 크다고 믿는다. 하지만 양자 모두 폭력이라는 점, 그리고 양자의 생명 모두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결과를 전혀 예측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선과 악을 수치화하는 것은 실증주의적 사고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더 작은 악은 전쟁을 방지하기 보다는 전쟁을 옹호하는 군사주의로 함몰된 가능성이 많다.

이 논문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더 작은 악의 논리가 결국 근대의 객관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신원하는 더 작은 악은 낙관론적이고 실증주의적 인식에 기초한다.(67) 더 작은 악의 개념은 “내가 어떤 행동을 하므로 충분히 의도된 결과를 유도할 수 있다라는 인간 중심의 결과론적인 가정과 인간사의 문제를 원인과 결과에 대한 계산에 의해 판단하여 처리해 나갈 수 있다는 낙관론적이고 실증주의적 인식에 기초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인식의 태도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대한 산술적인 계산에 의해 인간 사회를 공학적으로 조성해 나갈 수 있다는 다소 안이한 생각과 연결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런 점에서 실용성에 따른 실천을 거부하는 요더의 평화주의는 탈현대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

5. 평화주의의 다양성
요더에 따르면, 지금까지 도덕적 추론에 관한 학문적 토론은 제1원리를 추구한다. 논의하는 주제의 이면이나 배후에 놓여진 가장 근본적인 첫 번째 원리를 발견하여 문제가 되는 모든 현상을 일거에 설명하려는 것이다. 특히 데카르트 이후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본질은 그 이면에 - 그곳이 개별적 사물 안이거나 밖일 수도 있다, - 존재한다는 생각이 근대인의 사유 구조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생각하는 자아를 통해서 인간의 인식의 의심할 수 없는 확고부동한 토대를 찾으려는 데카르트적 사유에서 기독교 신학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예컨대, 기독교 윤리학의 경우, 공리주의, 상황 윤리,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결정과 행동의 규범을 ‘수’나 ‘상황’ 혹은 ‘중간 공리’에서 찾았다. 그리고 성서 신학에서는 역사적 비평적 방법은 성서 안에서가 아니라, 성서 이면에서 성서의 진실성과 정당성을 찾고자 하였다.

하지만 요더는 단 하나의 동일한 질서 내에 다양한 것을 환원하려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 까닭은 첫째, 인간은 비트겐슈타인의 용어를 빌리자면 가족유사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속성은 일점으로 축소하기에 다양한 내면세계를 품고 있다. 그리고 한 개인 뿐 아니라 사람들 사이 또한 다양하다. 이 다양성을 하나의 개념과 질서로 설명할 수 있다는 확신은 독선이다. 오히려 그 다름을 상호 존중과 대화를 통해서 건강하게 해결하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차이를 가진다는 것이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그러한 차이를 갈등 속에서 힘을 요구하는 것으로 증진되는 것이 아니라 화해케 하는 대화로 건전하게 처리하는 것이다.” 차이를 인정하는 것은 자신의 오류 가능성과 함께 자기 자신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동시에 타인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인내를 요하는 것이다. 인내는 낮은 목소리, 소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며, 폭력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다양한 상황에는 다양한 대답이 필요한데 특정한 한 입장이나 체계적인 대답은 오히려 왜곡의 소지가 많다. 차이를 부정하고 단일한 기초의 추구는 대화의 거부이며 타자의 거부이다.

둘째, 타자의 목소리를 억압하기 때문이다. 보다 높거나 보다 깊은 차원의 토대를 구축하려는 것은 우리 안의 서로 다를 세계를 간과한 것이다. 또한 타인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고, 획일성을 강요하게 된다. 따라서 “결코 동질적인 도덕 언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다른 목소리들이 들리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단 하나의 방법이나 토대에 대한 향수를 포기해야 하며, 더 나아가 타인의 목소리를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평화주의는 타자에 대한 인식론적 폭력을 거부한다.

교회가 상대방에 대한 인식론적 폭력을 거부하는 것은 한편으로 원수 또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내로 경청하고자 하는 타자의 목소리는 원수도 당연히 포함된다. 요더가 말하는 타자는 단지 친구만을 뜻하지 않는다. 원수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격체이므로 우리가 평화로 대우해야 한다. “심지어 억압자도 하나님의 형상의 담지자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담지하는 자가 된 것은 공로가 아니며, 성취도 아니며, 파악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다. 만약 내가 내 이웃, 심지어 내 원수일지라도 동일한 관점으로 바라보는데 실패한다면, 나 스스로 그 은총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진리는 폭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리는 비폭력적이다. Yoder는 Gandhi의 주장, 곧 비폭력은 사회적 갈등을 중지하는 실천 전략이면서도 보다 중요한 것은 대적자도 내가 진리를 발견하는 과정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나는 적대자가 내게 말하는 것을 듣기 위하여 비폭력적으로 행동해야 할 필요가 있을 뿐만 아니라, 나 또한 적대자게 말하기 위해서 비폭력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게다가 우리는 진리를 소유한 자가 아니라 진리를 고백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평화주의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 땅에 평화를 구축하는 것은 어느 특정한 집단만의 일은 아니다. 평화를 이루는 방법상의 차이로 인해 소모적인 논쟁과 비판은 자제하는 것이 마땅하다. 요더는 기독교 평화주의가 단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입장만을 전일적으로 옳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가 생각하는 평화주의는 “다양하며 심지어는 서로 모순되는 관점들의 총체이다.” 그의 분류에 의하면, 평화주의는 28가지나 된다. 여기에 실용적 평화주의와 정당한 전쟁론 마저도 평화주의의 한 부분으로 다루고 있다. 이것은 평화주의가 더 상위의 관점이나 범주이기 때문은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의 경구를 빌리자면, “생각하지 말고 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경구를 빌리자면, 있는 그대로의 정당한 전쟁론도 평화를 만드는 한 방법론임에 틀림없다. 어느 한 입장만이 평화주의를 대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른 평화주의를 무시하거나 배제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삼겹줄로 서로 함께 엮여지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고, 더 효과적이며, 더 실행 가능하다.”

6. 주체의 절대화와 평화주의
위에서 보았듯이 근대는 주체의 절대화를 지향하였다. 근대는 끊임없는 자기 증식의 역사이었다. 이것은 타자에 대한 주체의 인식론적 폭력이다. 주체의 절대화에 대한 반동이 해체주의의 반인간주의이다. 근대가 생각한 것처럼, 인간은 순수한 자아가 아니다. 사회 계급적 눈금으로 세계를 인식하며(마르크스), 그리고 세계를 장악하려는 권력 의지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니체), 성적인 욕구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욕망의 포로(프로이드)에 불과하다. 인간은 세계를 조종하는 신적인 위치에 서 있지 않으며 도리어 언어, 관계 등의 그물망 안의 한 존재에 불과하다.

이러한 탈현대적 요구는 기독교의 신 중심주의와 그리 멀지 않다. 기독교는 언제나 세계와 역사를 인간 자신이 스스로 조종하려는 것을 우상 숭배에 다름 아니라고 늘 비판하였다. 인간은 역사와 세계의 주인이 아니다. 단지 소명을 위임받는 청지기이다. 평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평화는 인간과 인간적인 수단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 받는 선물이며, 하나님 자신이 평화의 보증자이시다. 단적으로 말해서 하나님 자신이 평화이시다. 따라서 우리가 증언하려는 그리스도의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달리 국가의 권력에 의해 보증되거나 사회의 힘에 의해 최종적으로 조정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평화를 위한 실용적 도구로서 폭력에 호소하는 것은 예수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정당한 전쟁론은 전쟁의 규범과 판단 기준을 성서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국가에게서 찾는다. 정당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합법적인 국가 권력에 의한 최후의 수단으로 벌어지는 전쟁을 정당하다고 교회가 승인하는 것은 전쟁의 문제에 있어서 주권을 하나님이 아니라 국가에게 양도하는 것이다. 이는 평화주의의 정의에서 보았듯이 그리스도의 주되심의 왜곡이자 제한이다. 기독교 평화주의는 역사를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조종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새로운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예수는 분명 힘에 의한 승리를 거부하셨다. 군사적 무력이 아니라 죽기까지 고난 받고자 하는 사랑의 힘만이 세상을 변혁하는 교회의 유일한 힘이다.

7. 결론
이상에서 Yoder의 평화주의는 사회 윤리적 실천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인식론적이며, 탈현대적 함의를 지니고 있음을 보았다. 요더의 평화주의 인식론은 근대 철학이 내포한 문제점에 대한 비판이라는 것, 그리고 교회가 추구해야 할 당연한 사명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물론 여기서 탈현대가 늘 안고 있는 상대주의의 위험에 대한 요더의 비판을 검토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인식론적 배경이 될 탈콘스탄틴주의에 대한 설명이 없었던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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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ature of Catherine attributed to Clouet
Victoria and Albert Museum

 

 

 

 

 

 

 

Wedding of  Catherine de Medici

 

G. F. 영은 저서 『메디치』에서 역사상 카트린 드 메디시스만큼 왜곡된 인물도 드물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필자도 근본적으로 이 관점에 동의한다. 비록 그가 애정을 듬뿍 담아 쓴 『메디치』에서 전반적으로 메디치가 인물들에 대한 미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가 그만큼 카트린에 대해 철저히 연구했다는 것 또한 부정될 수 없다.

대부분의 프랑스 사에 관한 글들에서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나오는 부분은 참 애매하기 그지없다.
전반적으로 카트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군데군데 좀 다른 수식어가 사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카트린이 정치력이 없었고 신·구교 융합정책에 대해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이 프랑스를 더 혼란에 빠뜨리기만 했다' 고 쓰면서도 마리 드 메디시스 편에 가서는 '그녀는 카트린같은 정치력을 가지지 못했다.' 라는 말을 한다. 또한 그녀가 사악하고 권력을 잡아 아들들을 제멋대로 휘둘렀다고 하면서도 호위병도 별로 없이 폭동 중인 파리 시내를 가로질렀다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서술한다.
이것은 카트린에 대한 얕은 연구 탓으로, 기본적인 가정으로 깔려있는 그녀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와 약간의 연구를 통한 역사적 사실들이 애매모호 하게 결합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날까지도 카트린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매우 상반된다.

-환영 받지 못한 왕비-

그녀는 1519년 피렌체의 부르주아 출신의 명가 메디치 가에서 태어났다.(아직 귀족은 아니었음. 코시모 1세 때야 토스카나 대공 위를 받음.) 흔히 위대한 자 로렌초(로렌초 일 마니피코)로 일컬어지는 로렌초 데 메디치의 단 하나뿐인 증손녀이자 로렌초 2세의 딸로 국부 코시모로 이어지는 메디치 장자 계열의 유일한, 그리고 마지막 적자손이었다.
하지만 생후 몇 주만에 부모를 여의었고, 1527년 피렌체인들의 폭동으로 메디치 일가가 추방 당했을 때는 볼모로 잡혀 피렌체 인근의 수도원들에서 키워졌다.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된 숙부 줄리오가 로마로 그녀를 불렀을 때 그녀는 마르고 작고 눈만 커다란 14살 짜리 소녀였다.

그러나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는 나타나지 않았었던 국부 코시모와 위대한 자 로렌초의 두드러졌던 모든 특징들이었던 뛰어난 능력과 정렬, 향학열, 예술에 대한 취향, 상식, 사람을 사로잡는 흡인력, 강인함 등이 다시 그녀에게 충분히 나타났다.
카트린은 메디치 가 특유의 고운 눈과 함께 지적인 외모와 우아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친절하고 따뜻하며 쾌활한 성품은 어린 시절 3년간 살았던 무라토리회 수녀원의 수녀들과의 관계에서 잘 나타난다.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으로 유명한 조르조 바사리는 그녀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카트린은 친절하고 붙임성 있는 태도 때문에 우리에게 초상화를 남겨 두었으면 싶은 여성이다. 그 따뜻한 마음은 그림으로 그릴 수 없다. 내 붓으로는 아무 기억도 남길 수 없다.>>

교황은 그녀를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의 차남 앙리와 결혼시켰다. 물론, 정략 결혼이었다.

1533년 10월 28일에 오를레앙 공 앙리와 카트린 데 메디치의 결혼식이 마르세유에서 거행되었다. 교황과 사촌 이폴리토, 고모뻘인 마리아 살비아티와 카테리나 치보가 그녀와 함께 했다. 교황은 카트린에게 알이 굵은 7개의 진주를 선물했는데, 이 진주들은 초상화에서 그녀의 면류관을 장식하고 있다.
카트린은 25년 뒤 이것을 메리 스튜어트에게 주었는데,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가 메리를 처형하고 이 보석들을 가져갔다. 그래서 이 진주들은 영국 왕실 보석이 되었고 1901년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 때 그의 왕관에서 모습을 보이고는 이후 공개석상에서 사라졌다.

카트린이 프랑스로 시집오면서 재미있게도 프랑스의 식문화가 크게 달라졌다. 16세기까지만 해도 프랑스의 식문화는 그리 풍성치 못했다 한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나이프로 요리를 잘라 손으로 집어먹던 장면에 대한 묘사가 흔히 보이는데, 그랬던 프랑스의 식문화가 지금처럼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은 이탈리아에 의해서였다. 그 결정적인 계기가 카트린과 앙리의 결혼이다. 그녀가 가져온 많은 식기와 함께 온 요리사들에 의해 궁정 음식이 변하면서 프랑스의 식문화는 달라졌고, 결국 오늘날 가장 우아한 음식으로 칭송 받는 프랑스 요리는 이탈리아외 여러 나라의 것을 집대성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남편은 스페인서의 오랜 포로생활 때문인지 우울하고 무거우며 무능했으며 카트린을 처음부터 싫어하였다. 아름답다기보다는 지적인 그녀의 외모와 학식도 그를 사로잡지는 못하였다. 그렇기에 카트린에게는 남편 앙리 2세의 무관심이 일생 큰 슬픔이었었다.

궁정에서는 오직 시아버지 프랑수아 1세만이 그녀를 아꼈다. 궁정 여느 귀부인들보다도 재기발랄하고 지적이며 스포츠를 몹시도 좋아하는 며느리가 자신의 르네상스적 취향에 딱 맞았기 때문이었다. 모든 행사에 동행시켰으며 훗날 이혼당할 위기에서도 오직 시아버지만이 그녀를 감싼다. (그러나 이 총애도 귀족들의 질투를 사게 된다.)

프랑스 국민들은 그들 대로 이 이탈리아 여자를 환영하지 않았고, 결혼할 때 사람들은 그녀가 제노바, 밀라노, 나폴리를 가지고 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교황이 프랑스가 이곳을 점령하는 것을 도와주지 않자 모두 교황이 왕을 속였다고 하며 국민적인 증오가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3년 뒤 황태자 프랑수아의 죽음으로 앙리가 왕위 계승자가 되었을 때는 외국 여자가 그들의 왕비가 되리라는 전망에 경악했다.
귀족도 아닌 이탈리아 부르주아 출신의 여자가 프랑스의 왕비가 되다니-!
프랑스 인들은 프랑스의 자존심과 민족의 명예에 커다란 모욕을 끼쳤다고 느꼈다. 이 편견은 점차 이탈리아 여자에 대한 증오로 바뀌어 그녀를 모든 죄악의 주범으로 기록했는데 "그들은 프랑스의 모든 범죄를 카트린 드 메디시스에게 전가하지 않고는 못배겼다." 라고 현대 프랑스 한 작가가 쓸 정도였다고 한다.
그나미 그녀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궁정에서도 그녀의 존재는 아주 미미한 것이었다. 동갑내기 남편에게는 19세나 연상인 정부 디안 드 푸아티에가 있었고, 그녀는 디안의 비위를 맞추어야 할 판이었다.

황태자 앙리 세력을 조종하는 실력자인 매력적인 디안에게 카트린은 매사에 뒤로 밀려나 공개적인 모욕을 받았으며 그에 맞추어 그녀에 대한 남편의 무시도 프랑수아 1세의 분노를 살 만큼 대단했었다.

결혼 9년동안 자녀가 없자 열린 비밀 가족회의에 참석해 그녀를 이혼시켜 쫓아내야 한다는 주장을 한 사람도 디안이었으며 남편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의 특권인 즉위식 때의 특별세도 하사받은 사람도 디안이었다.
그녀는 카트린 대신 대관식의 상석을 차지하였으며 관직, 성직을 모두 참견하고 자신의 신하들인 기즈 가를 주요 관직에 등용하며 국사를 농락했다. 그리고 궁정 사람들과 함께 '이탈리아 여자'를 경멸하고 모욕하는 것을 즐겼으며 '장사꾼의 딸'에 대한 농담을 끊임없이 지어내곤 하였다.

또한 국왕이 부재 시에는 왕비에게 섭정권이 주어지는 것이 관례인데 디안은 그것을 막음으로써 카트린에게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기도 하였는데 카트린은 섭정권을 주지 않는다는 결정권을 공개 낭독하라는 명령에 다만 미소를 지으며 극단적인 자제력으로 참아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을 잘 아는 카트린은 겸손하고 분별력 있게 처신했고 또한 상황은 정이 많고 따뜻한 소녀였던 그녀를 대단히 분별력 있고 차가운 여성으로 만들게 된다.

카트린의 인격에서 끊임없이 언급되는 것 중의 하나인 내색하지 않는 자제력과 분별력으로 그녀는 이런 시련 속에서도 쾌활함을 잃지 않았으며 오직 침묵과 기도하는 마음으로 20 여 년 간의 시련을 견디어낸 것이었다.
하지만 이때 영혼에는 쇠심이 박혔다는 것이 후에 사랑하는 딸에게 보낸 편지 중 오랜 세월 꾹 눌러 참은 슬픔을 얘기한 대목에서 잘 나타난다.

결혼한 지 10년만인 1543년부터 그녀는 거의 매년 출산했고, 1547년에는 프랑수아 1세의 죽음으로 앙리 2세가 왕위에 올랐다. 이태리 출신 왕비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반감은 한층 더해졌고, 왕은 여전히 디안의 수중에 있었지만, 합법적인 왕비의 지위를 디안에게 강탈당한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에게는 나자마자 죽은 3명의 자식 말고도 7명이나 되는 아들딸들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매 순간 자신을 억제하는 것이 그녀의 일이었다. 카트린의 아들 샤를이 났을 때 앙리가 사흘 뒤 그녀의 곁을 떠나 디안과 함께 있기 위해 아네로 갔는데 그것은 왕실과 인간으로서의 예절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기도 하였다. 게다가 자녀를 낳았을 때도 디안이 아이들의 유모장이 되겠다고 고집한 것과 산후조리를 맡는 등으로 궁정과 왕에게 "왕비에게 베푼 선하고 칭찬할 만한 행동" 칭찬을 받으며 막대한 돈을 받아 챙겼다는 것은 그녀에게 커다란 고통을 주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카트린은 왕비로 있던 12년 간 따돌림 속에서 남편과 디안이 화려한 아네와 슈농소서 즐기고 있는 동안 한적한 곳에서 홀로 기거하며 자녀들의 교육에 몰두하였었다.

비록 아들은 불행히도 부친의 무능력을 빼닮아 실망했지만 세 딸과 장래 며느리인 메리 스튜어트도 맡아 왕족으로서 엄격히 가르쳤다. 딸들은 모두 어머니를 경외했으며 그것은 가장 말썽을 피워 카트린에게 매를 맞기도 한 막내딸 마고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메리 스튜어트에게 디안은 카트린을 '장삿꾼의 딸'로서 경멸하도록 가르친다.
그러나 카트린은 메리를 아껴 '우리의 작은 스코틀랜드 여왕이 미소만 지어도 모든 프랑스인들의 마음은 설렙니다.' 라며 그녀를 칭찬한다.

왕이 자리를 비웠을 때 마땅히 왕비가 가져야 할 섭정권조차도 디안 때문에 가지지 못했는데 프랑스에는 불운이, 카트린에게는 행운이라고 할 만한 사건이 일어났다. 1557년 8월, 왕이 샹파뉴에 간 동안 몽모랑시가 지휘하던 프랑스 군이 사보이 공작 에마뉴엘 필리베르트에 의해 생 켕탱 전투에서 대패했다.
프랑스 북부가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되었고 파리 시민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당시 디안은 모든 사람들과 같이 공포에 휩싸여 있었으나 카트린은 의회로 달려가 의원들을 격려하고 국방 예산 지출 승인안을 통과시키라고 촉구했다. 그녀의 용기와 웅변은 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다. 처음으로 파리 시민들은, 앙리 2세는 카트린에게 감사하게 되었다.


-종교전쟁의 와중에서-
1559년 딸 엘리자베스의 결혼식을 위해 열린 마상대회에서 앙리 2세가 장창에 눈을 찔려 사망했다. 카트린은 비록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었지만 그런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매우 슬퍼했고, 이 때부터 항상 상복을 입고 베일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숨어 지내야 했던 시대는 지나갔다. 죵교전쟁이라는 큰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그것이 행운이었는지 불행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15세 난 아들 프랑수아 2세가 왕위에 오르자, 권력은 왕비 메리 스튜어트의 외가인 기즈 일가의 수중에 들어갔다.
앙리 2세의 신교도 탄압 정책은 구교 세력의 주축이던 기즈가의 득세로 한층 더 심해졌고, 신교도들의 저항 역시 도를 더해갔다. 1560년 카트린이 내린 앙부아즈 칙령은 신교도들을 무마하고 평화를 되찾기 위한 일종의 협상안이었지만, 신구 양대 세력은 각기 극단적인 입장을 견지했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해 말 프랑수아 2세 역시 재위 17개월만에 세상을 떠났고, 카트린은 10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샤를 9세의 섭정 직을 맡게 되었다. 마침내 카트린의 시대, 카트린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었다.
신구 양대 세력 간의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대립을 일소하여 평화를 수립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그녀의 의도는 그러나 좀처럼 실현되기 어려웠다. 신구 양대 세력의 주축들인 기즈가와 부르봉가는 그녀의 교묘한 외교에도 불구하고 무력적인 충돌을 거듭했고, 왕마저 신교도인 콜리니 제독에게 설복 당해 막강한 구교 국가인 스페인과 전쟁을 벌이려 하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딸 마르그리트와 부르봉가의 계승자인 앙리 드 나바르를 결혼시킨 것은 신구 양대 세력을 화해시키려는 마지막 시도와도 같은 것이었다.

-성바르톨로뮤의 학살, 그 이후-

애당초 그녀가 제거하고자 했던 것은 콜리니 제독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신교도들의 저항을 선동하고 왕마저 부추겨 전쟁을 일으키려 하는, 그리고 왕에게 섭정이자 모후인 자신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그 한 사람만 사라진다면 사태는 자신의 뜻대로 될 것이 아닌가? 그러나 암살은 실패했고, 뒤따를 파란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음모는 한밤중의 대대적인 학살을 불러오고 말았다. 사건이 그토록 크게 번지리라고는 그녀 자신도 미처 예상치 못한 터였다.

이듬 해에는 샤를 9세도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아끼던 셋째 아들이 앙리 3세로 왕위에 올랐지만, 각별히 사랑했던 이 아들에게 그녀는 거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왕에게 후사가 없는 터에, 하나 남았던 왕제, 그녀의 막내아들마저 세상을 떠나자, 왕위는 앙리 드 기즈 아니면 앙리 드 부르봉(나바르)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유약한 왕과 늙은 모후는 양대 가문의 대립 사이에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할 수 있을 뿐이었다. 분별없는 왕이 사람을 시켜 앙리 드 기즈를 암살한 것을 알게 된 카트린의 놀라움은 절망에 가까웠다. 암살 소식을 들은 지 13일만에 그녀는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 아들 역시 그로부터 반년 뒤에는 그 뒤를 따랐다.  

소문과 진실 

그녀는 대체 어떤 여자였던가? 그녀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고들 한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즘은 시대적인 추세였다. 그녀는 "신구교 어느쪽도 믿지 않을 만큼 신앙심이 없었으며, 노스트라다무스를 추종하는 미신가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비전의 마술에 대한 관심 역시 그 시대의 풍조였다. 그녀가 학살을 주도했던가? 그 점에 대해서는 논란이 끝나지 않았다.
외국 출신 왕비에 대한 반감이 억측과 과장을 불러일으켰으리라는 설도 일리가 있다. 그녀가 신구 양대세력 간의 경쟁을 자극함으로써 종교전쟁을 부추겼던가? 글쎄,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모든 노력은 전쟁을 무마하고 평화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의도가 좌절된 것은 그녀의 능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신구 양대세력 간의 갈등과 대립이 비단 종교나 정치뿐 아니라 사회경제적인 갈등과도 깊이 연관된 나머지 사회 전반에 적대감이 고조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그녀는 대체 어떤 여자였던가? 결혼 이듬해에 클레멘스 7세의 죽음으로 사실상 정치적 이용가치가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시아버지 프랑수아 1세는 영특한 며느리를 무척 아꼈었다. .
그녀는 시아버지로부터 건축에 대한 열정을 물려받아 튈르리 정원, 슈농소 성 등 아름다운 건축물들을 남겼으며, 그녀의 서재는 희귀본들을 많이 소장한 것으로 유명했다. 예술가들을 후원했고, 여성들의 교육을 장려했다고도 전해진다.

게다가 그녀는 적에 대해서도 관대했다. 그것은 메디치 장자 계열의 특색이기도 했다.
1559년 앙리 2세가 누이와 딸의 결혼 축하 행사로 열린 마상 창시합서 사고를 당하고 죽자 이제 섭정 여왕으로 프랑스 최고 권좌에 오르게 된다.
그런데 20년이 넘게 남편을 독차지 했고 권력과 부에 있으면서 자신을 공개적으로 모욕하는게 취미였던, 이제는 권력을 잃은 그 디안 드 푸아티에에게 카트린이 한 보복은 단지 영원한 궁정 출입 금지와 앙리 2세가 준 왕관의 보석을 돌려받은 것, 왕자비 시절 때부터 소유하기를 탐냈지만 앙리가 디안에게 선물로 줌으로써 또 하나의 슬픔을 자아낸, 슈농소 성 압수뿐이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과 그녀에 대한 다음과 같은 통념은 얼마나 거리가 먼가. "그녀는 젊은 시절 프랑스 궁정에서 심한 고통을 받았고, 1560년 어린 아들의 섭정자가 되었을 때는 광적인 권력욕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노쇠했고, 아무런 도덕적인 주저함이 없었다. 그녀는 종교적 분쟁에 시달리고 있는 프랑스를 거의 30년 동안 확고하게 손아귀에 넣었다.


카트린에 대한 중요한 혐의는 몇 가지가 있는데, 샤를 9세의 독살, 잔 달브레의 독살, 콜리니의 저격,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 학살에 관한 것들이다. (그 이외에도 적지 않다) 샤를 9세의 독살은 '핑크빛 양초 독살' 이라고 불리는데, 카트린이 샤를의 동생이자 자신의 아들 앙리를 독살하기 위해 독이 든 양초를 타오르게 하여 방안을 독으로 가득 채우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연히 그 날 동생과 방이 바뀌게 된 샤를이 대신 죽었다는 것이 그 음모설의 줄거리이다.

잔 달브레 독살은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아들의 결혼식 준비를 위해 파리에 와 있던 잔 달브레를 카트린이 향수 상인을 시켜 그녀의 장갑에 독을 바르게 하여 죽였다는 설이다.

콜리니 저격 사건은 샤를 9세가 콜리니를 총애하여 자신이 정치에서 배제된 것에 분개한 카트린이 기즈 가와 합세해 콜리니를 없애려 했다는 것이며,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은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저질렀거나 아니며 미리 오래 전부터 계획되어 왔던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혐의들은 사실 근거가 빈약하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도 하나도 없을뿐더러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카트린이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다. 첫 번째부터 살펴보자. 앙리 3세는 카트린이 자식들 중에서 가장 사랑했던 아들이다. 그를 너무나 사랑하여 그의 부탁은 무엇이든 들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앙리를 독살하려 했다는 것부터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어느 부모가 자식을, 그것도 가장 사랑하는 자식을 죽이려 하겠는가.

잔 달브레의 암살 혐의도 마찬가지다. 잔은 이미 그전부터 건강이 좋지 못했고, 그녀의 두 주치의는 독실한 위그노였지만 독살설을 부인했다. 또한 카트린의 일생의 목표가 프랑스에 종교적 화합을 정착시키는 것이었음을 생각할 때, 잔의 죽음은 카트린에게 이로운 것이 전혀 아니었다. 샤를 9세의 즉위 때 감옥에 갇혀 사형 날을 기다리던 콩데를 풀어주었던 것이 바로 카트린이다. 그런데 그녀가 일부러 잔을 살해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카트린이 독에 정통했다는 것은 그녀가 메디치가 출신이고 점성술을 좋아했다는 데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메디치 가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편견과는 달리 그 가문의 장자 계열은 매우 건강했다.

차자 계열의 코시모가 토스카나 대공이 되면서 여러 가지 어두운 사건이 발생했지만, 국부 코시모로부터 이어져 내려와 로렌초 일 마니피코에 이르기까지 피렌체는 메디치 가가 이끄는 황금기였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적대한 가문에게 피로 복수한 적이 없었고, 암살을 당한 적은 있으되 사주한 적은 없었다. 또한 도서관과 아카데미를 만들어 고전고대를 부활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 가문에는 관용이 있었다. 로렌초 일 마니피코의 사후 가문이 피렌체에서 추방되는 등 어려운 일이 많이 일어났고, 피렌체로 되돌아가기 위해 많은 피를 흘리기는 했지만 카트린 또한 고모인 클라리체 스트로치를 통해 메디치 가의 건강한 가풍을 이어받았고, 또한 일생을 통해 본 성격으로 볼 때 독살 따위를 시도할 인물은 결코 아니다.

필자의 견해로는 로렌초 일 마니피코의 후손들 중 가장 그와 닮은 인물이 바로 카트린이 아닌가 한다. 위그노들이 자신들이 가진 것 중 가장 커다란 대포가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육중하다는 이유로 '왕비마마' 라고 불렀을 때(카트린은 중년 이후 매우 살이 쪘다) 그녀는 전혀 화를 내지 않은 채 한바탕 호탕하게 웃었다고 한다. 만약에 할 수만 있었다면 가장 독살하고 싶은 인물은 아마도 디안 드 푸아티에 였을테지만, 카트린은 그녀에게도 별다른 복수를 하지 않고 단지 궁정출입을 금지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강인하고 관대하며 유쾌한 성격을 지녔던 그녀가 독살을 즐겨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근거가 빈약하다.


콜리니 저격은 어떻게 보면 그럴 듯 하게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특히나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을 카트린이 저질렀다고 생각한다면 더욱더 앞뒤가 맞지 않는다.
만약 가톨릭 편에 서서 학살을 저지르려 했다면 그 전날 그 우두머리 중 하나를 저격할 이유가 없다. 그것은 신교측의 경계심을 키워주게 될 뿐이기 때문이다.(M. 메리메) 또한 앙리 3세가 앙리 드 기즈를 죽였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모든 게 끝났다며 탄식하던 카트린을 생각하면 더욱 신빙성이 없다. 그녀는 암살이 평화를 위한 수단이 될 수 없고 오히려 불길을 키울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 때도 딸의 결혼을 빌미로 신교를 뿌리뽑을 작정이었다면 왜 두말할 필요 없는 위그노의 거두들인 콩데 공, 나바르 왕 앙리, 대법관 미셸 드 로피탈 등을 지켜주었겠는가. 당시 그녀의 보호로 루브르에 숨어 목숨을 건진 프로테스탄트의 수는 적지 않다. 혼란한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정도뿐이었다.

카트린에게 많은 혐의가 씌워진 것은 그녀가 배경 없는 이탈리아 출신 여인이었기 때문이었다.
후에 섭정으로 프롱드의 난을 겪은 안 도트리슈의 경우는 그녀가 젊었을 때부터 모국인 에스파냐와 내통하며 반국가적인 행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에게 미움받지 않았다. 국민들의 미움은 모두 마자랭에게 쏠렸다. 그러나 카트린의 경우는 달랐다. 속된 말로 그녀가 만만해서였을까? 카트린 덕에 종교전쟁 내내 기회를 엿보던 에스파냐, 영국 등의 외세를 많은 부분 막을 수 있었고, 또한 막상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은 그녀가 아닌데도 사람들은 그녀를 미워했다. 그녀의 유화정책을 비난하고 오히려 전화에 몸을 맡겼다. 만약 카트린이 이탈리아 출신 섭정이 아니라 당당한 프랑스 왕으로서 화합을 추진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외국 학자들 사이에서는 카트린에 대해서 여러가지 논의가 오가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그녀에 대해서 자세히 다루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프랑스사의 종교전쟁 부분에 한결같이 나쁜 이미지로 학살 주도, 아님 확실한 역사 책이 아닌 흥미 위주의 책에서 음모와 독을 즐겨 사용한 여인, 이렇게 나올 뿐이다. 연구와 고증, 증거 없이 소문들을 가지고 카트린을 판단하는 것은 좀 잘못된 것이 아닐까.
내용출처: http://myhome.naver.com/loena/frame1.htm, 여자와 닷컴, http://www.yulia0818.com.ne.kr/color.html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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