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치료의 과정 

1)치료목표
  치료체계의 기본목표는 개인으로 하여금 자유가 두렵다는 것과 행동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을 수용하고 행동하게 돕는 것이다. 실존치료는 인간은 자유로부터 도피 할 수 없으며 그 자유는 책임과 관련되어 있다는 전제에 근거하고 있다. 그래서 실존치료는 엄격한 생활궤도에서 벗어나서 그들의 자유를 막아 버리는 편협하고 충동적인 성향에 도전하도록 한다. 비록 이 과정은 개인에에게 해방감과 자발성을 주지만 새로운 자유는 불안을 야기한다. 자유는 새로운 길로 가는 모험이며 거기에는 우리를 안내할 어떤 확실성도 없다. 이런 "현기증"(dizziness)과 자유에 대한 공포는 성장하려면 반드시 직면해야 한다.(May, 1981). 자신이 현재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장차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에 대해 책임을 느끼는 사람은 두려움을 지닌다. 그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 친근한 것에 매달려야 하는지 아니면 확실하지 않은 보다 도전적인 삶을 열기 위한 모험을 감행해야 하는지에 대해 선택을 해야 한다. 삶에는 아무런 보증이 없다는 것에서 불안이 야기된다. 그래서 실존치료는 내담자가 자신은 단지 외계의 어떤 결정적인 힘의 희생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수용하고 선탱에 따른 불안을 수용하도록 돕는 데 그 목적을 둔다.


  메이에 의하면 내담자들은 내적으로 구속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치료자)가 자유롭게 해주기를 기대하는 자기봉사적(self-serving)인 환상을 갖고 치료를 받으러 온다고한다. 그래서 그는 "심리치료의 목적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내담자의 '치료'에 있지 않으며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그리고 삶에서의 그런 희생적 역할 속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를 자각하도옥 돕는 데 있다."(1981)고 기술하고 있다. 러셀은 이것을 "치료를 통해 사람들은 전에 손해를 입고 고통을 당했던 사건에 책임을 느끼고 적극적으로 책임을 수용하게 된다. 치료과정은 개인으로 하여금 전에 '우연히 일어났던'( happening)것으로 간주하던 것을 자신이 스스로 '행한 것으로서'(as doing)자각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표현하였다.

  다음의 편지는 나의 옛날 내담자가 쓴 것으로 그녀의 동의를 얻어 여기에 실었다. 그녀의 글은 그녀가 원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삶을 끌어 나가기 위해 매일매일 결심을 하면서 느꼈던 인식, 자유, 책임 그리고 불안과의 싸움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때때로 나는 한 인간으로서의 실제의 나와 내가 느끼는 나라는 존재가 마음 깊숙한 곳에서 서로 투쟁하는 것을 느낀다. 감정은 지금까지도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사랑과 미움을 느낀다는 것은 매우 새롭고 두려운 일이다.나는 가끔 좋아하는 사람들을 그러워하지만 다음 순간 그들이 떠나버렸으면 하고 바라는 자신에 대해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이와 같은 비일관성과 의존성-독립성의 싸움은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나는 가끔 정상적으로 죽었던 과거상태로 남았더라면 더 나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때의 나는 이렇게 고통스럽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때 내가 완전히 살아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오늘 한 남자가 나를 포옹하였는데 잠시동안 매우 포근하고 마음이 놓이는 걸 느꼈다. 나는 그런 느낌을 좋아하면서도 두려워한다. 그것은 나와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사람을 신뢰하고 싶지만 아직은 그렇게 하기 어렵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아마 어떤 관계에서든 항상 위험스런 요소가 수반되기 때문일 것이고 나는 것을 수용하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의 고통과 좌절을 모두 이겨낼 수 있을지, 오늘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가끔 자신이 혼자라는 것을 느끼고 어찌해야 할지 모를 때 만약 내가 상담을 받지 않았더라면 만약 지금같이 자아통찰을 할 수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상상해 보려고 노력한다. 또는 만약 내가 마술을 써서 불안을 덜 느꼈던 정서적인 성장의 초기단계로 되돌아 간다면 그래서 거기 머무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도 상상해 본다. 그때는 이 세상에서 아무런 아름다움도 못느끼고 성취감도 없었으며 마음의 평화도 몰랐으나 그때가 더 안전한 것 같았다고 느꼈다. 그때는 내가 지금 처해 있는 것 같은 곤경도 없었고 단순하고 도전이 별로 없었던 안전한 세월이었다. 그러나 만일 마술로써 되돌아 갈 능력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결코 되돌아 가지 않을 것이다. 요즘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지금껏 어떻게 지내왔는지 알기 때문에 결코 과거로 돌아가지는 않겠다. 되돌아 가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그러나 아직도 때때로 이 모든 고통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의문을 느끼기도 한다.

 

2) 치료자의 기능과 역할
  실존치료자들은 원래 내담자가 새로운 이해와 선택을 하도록 돕기 위해 내담자의 주관적인 세계를 이해하려고 한다. 내담자의 현재 상황에 중점을 두며 과거를 회상시키는 데 중점을 두지 않는다(May & Yalom,1984). 전형적으로 실존치료자들은 다양한 기법을 사용한다. 그들은 한 내담자에게서 다른 내담자에게로 변화를 주기도 하고 때로는 한 내담자를 치료과정의 다른 국면에 처하도록 하게도 한다. 한편으로는 체계적 둔감법, 자유연상, 인지 재구조화의 기법을 쓰기도 하고 다른 학파의 치료자들에게서 통찰을 끌어내기도 한다.(Fischer & Fischer, 1983).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실존치료자들은 엄격하고 상식적이며 조작적이라고 생각하며 기법을 혐오한다. 치료과정에서 기법은 치료자로하여금 내담자를 이해하고 효과적으로 도전하게 하는 치료관계를 형성하는 것보다 중요하지 않다.

 

 실존치료자들은 특히 내담자가 책임을 회피하는 데 대해 관심을 갖는다. 그들은 내담자가 책임을 수용하도록 조언한다. 가령 내담자가 "나는 할 수 없어요."라고 하면 그들은 내담자의 말을 "나는 하고 싶지 않아요"라고 대치하도록 권한다. 만약 내담자가 궁지에 빠져 다른 사람을 비난하면 치료자는 내담자가 어떻게 지금의 상황을 만들었는지를 묻는다. 이런 관점에서 얄롬(1980)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치료자는 내담자가 자신이 처한 곤경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 지 결정하게 한다. 그리고 내담자에게 이런 통찰을 이야기해 줄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내담자 스스로 곤란을 만들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면 변화의 계기는 있을 수 없다".


  실존치료자들은 소위 "제한된 실존"(restricted existence)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을 상대한다. 이런 상담자들은 자신에 대해 제한된 인식을 하며 때로는 문제의 본질도 잘 모른다. 만일 삶의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되면 그들은 함정에 빠진 느낌을 갖거나 무기력해 한다. 이런 경우 치료자의 주요 임무는 내담자로 하여금 제한된 실존의 현장에 직면하도록 하며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이 자신들이었다는 것을 자각하도록 돕는 것이다.말하자면 치료자는 내담자가 점차적으로 자기직면을 하도록 거울을 들고 있는 셈이다.

 

 이런 식으로 해서 내담자는 자신이 지금껏 어떻게 존재해 왔으며 앞으로의 삶을 확장시킬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있게 된다. 과거의 요인들과 현재의 숨막히는 생활유형을 인식함으로써 내담자는 자신이 지금껏 어떻게 존재해 왔으며 앞으로의 삶을 확장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있게 된다. 과거의 요인들과 현재의 숨막히는 생활유형을 인식함으로써 내담자는 자신의 미래를 바꾸는 책임을 수용하게 된다. 치료과정에서 실존치료자가 실제로 해야 하는 치료의 예로서 다시 나의 옛 내담자의 편지를 참고하기 바란다. 만약 내담자가 치료기간 중에 자기의 느낌을 표현한다면 치료자는 다음과 같이 해야 할 것이다. 

 

·내담자가 말하는 것과 관련해서 그의 반응을 공유한다.


·내담자의 경험에 유사한 적절하고 타당한 경험을 드러내도록 돕는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선택해야 하는 그녀의 고뇌를 표현하도록 한다.


·그녀가 결정을 회패해 온 방법들을 직면하게 하고 이런 회피에 대해 판단하도록 촉구한다.


·그녀에게 "만일 당신이 기억하는 치료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 갈 수 있는 신통한 길이 있다면 지금 되돌아 가기를 원하는가?"라고 질문하여 치료 전의 당시의 생활과정을 점검하도록 격려한다.

 

·그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인간존재의 특질이라는 사실을 배우는 것임을 함께 공유한다. 즉 그는 혼자이며 스스로가 결정해야 하고 자신의 결정에 확신이 없는 것에 대해 불안해해야 하며 그리고 때로 무의미하게 보이는 세계에서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노력해야한다는 것을 지금 배우고 있다는 것을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

 

 3) 치료에서의 내담자의 경험
  실존치료에서의 내담자는 자신의 주관적인 경험의 세계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도록 격려받는다. 그들의 세계에서 어떻게 "지금"과 같은 선택을 하였는지 책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효율적인 치료는 이런 인식을 머추지 않는다. 왜냐하면 치료자는 내담자가 치료과정을 통해 이런 통찰에 기초해서 행동하도록 격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담자는 자신의 세계속으로 들어가 어떻게 다르게 살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나아가 그들은 치료과정에서 적극적이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두려움, 죄의식, 불안을 어떻게 탐색해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심리치료만 받으려는 경우도 앞의 기록에서와 같이 그 자체가 때로는 두려울 수 있다. 내담자가 안일함을 떠나 자신을 탐색하기 시작했을 때 경험하게 될 불안감을 잠작해 보자.

 

 나는 오늘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엇이 두려운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안다. 나는 무엇보다 제리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는 나를 변화시킬 힘을 같고 있다. 내가 그에게 그런 힘을 주었으며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나를 당황케 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 결코 되돌아 갈 수 없다. 모든 것이 달라졌다....... 나는 아직 나 자신을 모르며 단지 모든 것이 달라졌다는 것만 안다. 나는 이것이 슬프고 겁이 난다. 나는 나의 삶으로부터 안전한 영역을 폐기시켰으며 장차 어떻게 되어갈지 두렵다. 과거로 되돌아 갈 수 없는 것이 슬프다. 나는 자신에게 솔직해졌고 내 속에서 새로운 나와 싸우고 있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또한 사람들을 다른 각도에서 보고 다르게 관계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 나는 모든 것에 불안을 느끼며 특히 나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요컨대 실존치료에서는 내담자는 자신을 개방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데 이런 경험은 때로 두렵기도 하고 흥분되기도 하며 즐겁기도 하고 우울하기도 한 경험이며 또한 이 모든 느낌들의 혼합이기도 한다. 내담자가 잠긴 문을 힘겹게 열 때 그는 자신을 심리적으로 묶고 있던 결정론의 사슬을 풀기 시작하게 된다. 점차로 지금까지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지금은 어떤 사람인지를 자각하게 되며 이를 통해 보다 나은 장래를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치료과정을 통해 그들의 비전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탐색할 수 있게 된다. 


  내담자가 자신의 무기력을 호소해 올 때 또는 힘이 없음을 확신하려 할 때 메이(1981)는 자유를 향한 그들의 여행은 한 발을 그의 도착점에 이르는 다른 앞면에 놓고 시작할 것을 상기시키고 있다. 선택의 폭이 점점 좁아질수록 그들은 기본적인 보폭을 취함으로써 자신이 가야 할 영역을 구축할 수 있게 된다.


  실존치료에서 내담자가 경험하는 또 다른 것은 당면한 문제에 대처하는 것보다는 궁극적인 관심사에 직면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메이는 "출생, 죽음, 사랑, 불안, 죄의식 등과 같은 주요 경험은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직면되고 인식되어야 할 패러독스(역설)이다. 그래서 치료에서 우리는 삶의 이런 역설이 나타내는 의미를 분명히 하는 방법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도록 조언해야 한다"(1981)라고 기술하였다. 치료기간 동안의 주요 주제는 불안, 자유, 책임, 고립, 소외, 죽음 등과 그것들이 삶에 주는 의미 그리고 의를 향한 끊임없는 추구 등이다.

 

4) 치료자와 내담자 간의 관계
  실존치료자들은 내담자와의 관계에 치료의 중심을 둔다. 관계는 그 자체로 중요한데 그것이 전이를 촉진하기 때문은 아니다. 치료상황에서의 이런 인간 대 인간의 질(quality)은 긍정적 변화의 자극제가 된다. 치료자는 내담자쪽으로 향해 있어야 하며 내담자를 솔직하고 통합적이며 용기있는 존재로 지각해야 한다. 치료관계는 함께 하는 여행이다. 부버(1970)의 "나/당신"관계의 개념은 여기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내담자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변화하는 존재로 인식된다. 공감의 과정을 통해 치료자는 치료관계를 깊게 하는 방법의 하나로서 내담자의 반응을 공유한다.


  피셔와 피셔(1983)에 의하면 치료관계의 핵심은 존중(respect)이다. 실존치료에서 존중이란 내담자가 그들의 문제를 자발적으로 처리할 능력을 갖고 있으며 선택 가능한 대안을 탐색할 능력을 갖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치료자는 내담자가 어떻게 자신의 환경을 만들어 왔는지 어떻게 제한된 실존을 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다. 치료자와의 관계를 통해 내담자는 그들이 가져야 할 자유를 직면하고 선택할 능력을 갖게 된다.


  치료상의 관계를 서술하면서 죠라드(Jourard, 1971)는 내담자가 진지하고 솔직하게 자기를 드러내는 행동을 통해 진실된 삶을 살도록 인도할 수 있는 치료자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는 또 치료자는 내담자에게 나와 너의 관계를 형서하도록 도와야 하며 그런 관계에서 치료자의 자발적인 자기노출은 내담자의 성장과 진실성을 키워 준다고 보았다. 그는 "조작은 역조작을 낳고 자기노출은 또 다른 자기노출을 생기게 한다."고 하였으며 치료관계는 내담자를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치료자도 변화시킨다고 지적하였다.


"이것은 자신의 존재와 성장을 시도하지 않은 채 버려두는 사람은 치료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그는 역설하였다.


  치료자는 내담자가 자발적인 행동을 조형하도록 돕는다. 관계가 적절하면 이것은 더욱 명료해질 수 있으며 치료자의 인간됨은 내담자가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자극이 된다. 그는 만약 치료자가 치료기간 중에 자신을 숨기거나 또는 내담자에게서 야기된 증상과 같은 비자발적인 행동에 참여하면 내담자는 자신을 방어하고 비자발적인 행동방식을 고집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치료자는 적절한 때에 자신을 적절히 개방시킴으로써 내담자가 이방인이 되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 물론 이것은 내담자의 떠도는 모든 느낌이나 생각을 제어하지 않고 다 수용하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끊임없이 내담자의 반응을 공유하는 즐거움을 의미하며 특히 이런 공유가 촉진적인 효과를 가져올 때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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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적용 : 치료기법과 절차

   앞에서 살펴본 봐와 같이 실존적 접근법은 다른 접근법과 달라서 잘 정련된 기법을 갖지 않고 있다. 이 접근법은 부겐탈(Bugental, 1978, 1981)이 지적한 것처럼 정신분석의 개념과 기법을 몸에 걸친 포괄적인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인지적이고 행동적인 접근법에서 사용하는 기법을 통합시킨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여기서 사용하는 기법들은 내담자가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이라는 개인적 장에 수반하는 책임을 수용하도록 돕는 도구이다. 이 부분에서 나는 이 장의 앞부분에서 기술한 실존적 접근법의 여섯 가지 명제의 치료적 의미를 기술하고자 한다.

 

 1) 자기인식의 능력 : 상담에 주는 의미
  인식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개념화 될 수 있다. 양쪽에 많은 문이 있는 긴 복도를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당신이 그 문을 활짝 열거나 조금 열거나 또는 갇힌 채로 둘 수 있는 선택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만약 그 중 한 문을 열었을 때 당신이 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다. 아마도 그것이 두렵고 추한 것으로 가득 찼기 때문에, 그러나 반대로 당신은 어쩌면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 찬 방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당신은 방문을 닫은 채로 둘 것인지 아니면 방문을 열고 들여다 볼 것인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물을 것이다.


  나는 우리가 우리의 인식을 제한하거나 또는 확대시키거나 하는 데 있어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거의 모든 상담상황에서 대립되는 욕구 사이의 투쟁을 보았다. 자기인식의 개념은 인간능력의 기본이므로 자기인식을 넓히려는 결심은 인간성장에서 기본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은 개인이 개인상담이나 집단상담에서 경험하는 자기 인식의 시초가 되는 목록들이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사랑받으려고만 노력하므로 실제로는 사랑받고 있다는 감정을 경험할 기회를 잃는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택할 때 느끼는 불안감을 의존성이 주는 안전감과 바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자신 속의 비일관성을 부인하려고 시도하며 수용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수용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감이 다른 사람들이 평가하는 정의에 매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여러 면에서 자신이 과거의 경험과 결정의 노예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에게 내재해 있는 숱한 단면들을 발견하고 존재의 한 면을 억제 할 때 다른 면도 억제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를 들면 만약 비참함을 억압한다면 기쁨도 닫혀 버린다. 만약 그들이 증오를 부정한다면 역시 사랑하는 능력도 부정된다. 만약 그들이 악귀를 쫓아낸다면 천사도 쫓겨난다.


·그들은 자신의 미래가 과거처럼 운명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들은 과거로부터 배울 수 있고 과거를 바르게 이해하기 때문에 미래를 재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죽음과 무에 대해 너무 몰두하기 때문에 삶의 가치를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함을 깨닫게 된다.


·그들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자신을 가치있는 존재라고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치있는 존재이기 위해 완전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과거에 몰두하거나 미래를 계획함에 있어 한번에 너무 많은 것을 시도함으로 인해 현재의 삶이 실패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참된 의미에서 다른 대안들에 대한 자각, 동기의 자각, 인격형성의 요인들에 대한 자각, 개인의 목표에 대한 자각을 포함하는 자기자각의 증진이 상담의 목표이다. 그러나 나는 치료자의 임무가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내고, 또 그들에게 자기자각을 넓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일러주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런 사람들은 만족하여 의식의 앙양에는 추호의 관심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치료를 받으러 오거나 집단상담을 원한다면 이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나는 또한 상담자의 임무는 자각을 증진시키려면 어떤 대가를 치뤄야 한다는 것을 내담자에게 알려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자기자각이 늘수록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 더욱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의 상황에 대한 무지는 부분적인 죽음의 느낌과 더불어 만족을 가져다 줄 수도 있지만 사람이 자신의 문을 엶에 따라 그는 완성에 대한 가능성뿐만 아니라 더 많은 투쟁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2) 자유와 책임 : 상담에 주는 의미
  책임성을 작가정신(자신의 삶을 고안하는 사람)에 연결시키는 실존적 접근법이 상담에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실존치료자들은 늘 내담자는 자신의 상황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들은 내담자가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그의 문제를 유전의 탓으로 돌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만약 내담자가 자신의 상황에 대한 책임성을 인식하고 수용하지 않으면 그는 개인적인 변화를 할 수 있는 계기를 갖지 못하게 된다(May & Yalom,1984).


  실존치료자는 각 개인이 소유한 자유와 책임을 인지시키는 데에 상담과 심리치료의 근거를 둔다. 치료자는 내담자가 어떻게 자유를 회피하는가를 발견하여 그것을 사용하는 모험을 하도록 격려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담자는 무능력해지고 신경증적으로 치료자에게 매달리게 된다. 치료자는 내담자가 선택을 회피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스스로 선택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수용하도록 가르칠 필요가 있다.


  상담자나 치료자에게 오는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 자신의 삶을 통제할 힘을 상실했다고 느끼기 때문에 도움을 청하러 온다. 그들은 치료자가 그들에게 지시하고, 마술적인 치료를 해주기를 기대한다. 치료자의 두 가지 임무는 내담자가 스스로 선택한 삶이 어떻게 실패했는며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선택을 의뢰했는지를 자각하게 하여 자립성을 향해 한 단계 발전하도록 돕는 것이다. 내담자가 현재의 제한된 실존방식보다 충일한 실존방식을 탐색하도록 하게 하기 위해 피셔(1983)는 치료자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즉 "다른 사람들이 당신이고 당신이 그들이라면 당신은 지금의 관계에서 현재 가진 개념들을 기꺼이 사용할 수 있는가? 당신은 다른 사람과 관계하거나 또는 다른 방법으로 자신을 경험하는 일에 당신의 자유를 기꺼이 사용할 것인가? " 

 

3) 정체감의 추구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 : 상담에 주는 의미
  치료를 원하는 사람 중에는 자주 자기상실감으로 고통을 받거나 그들 자신이 이방인처럼 느껴지는 고통을 받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내부지향적인 감각을 상실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사람이 기대하는 대로 살거나 다른 사람이 고안한 삶을 살아 왔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승인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중에 그들은 가끔 자신이 인정도 못받고 자시수용감도 느낄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무스타카스(Moustakas, 1975)는 자기로부터 소외의 조건을 기술하였다. 그는 소외를 "자신의 내적 경험에 기초되는 삶보다 다른 사람에 의해 윤곽이 그려지고 결정되는 삶이 발달하는 것"이라고 기술하였다.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에 따라 정체감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에게 이방인이 되어간다. 이것은 때로는 "비자발적 실존"(inauhtentic existence)이라고도 불리는 것으로 다른 사람들이 기대하는 대로 "팔아 버리는"(selling out)삶으로 구성된다. 비자발적 실존은 생의 업적에 대해 박수갈채를 받기 위한 지위추구 게임이다. 많은 내담자들을 이한 중요한 교훈은 그들이 이런 칭찬을 받기 위해 너무도 엄청난 대가를 치뤄왔다는 것이다. 즉 자신과의 접촉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긴밀하고 만족스런 관계를 발전시키는 의미있는 삶의 기초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궁극적인 고독을 인식하는 것 - 죽음이나 자유를 인식하는 것처럼 - 은 두려움이 될 수도 있다. 모험의 두려움 때문에 자유와 책임을 수용하는 데 망설이는 것처럼 우리들은 자신의 고독과 소외를 수용하는 것을 회피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인간경험(고독)의 반이 제거된다면 다른 반의 경험(친근감)도 제거될 것이다.


  치료적 여행의 일부는 내담자가 잃었던 정체감을 다시 시험해 보게 하는 것으로 특히 내담자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고안하도록 맡겨 두는 것이다. 내담자는 자신의 자유가 다른 사람들에게 지배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거나 치료관계에서 그들의 자유를 다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자각하게 될 때 두려워질 것이다. 쉬운 결정이나 대답을 거절함으로써 치료자는 내담자가 자신의 답을 혼자 찾아야 하다는 현실에서 직면하게 한다.

 

4) 의미의 추구 : 상담에 주는 의미
  실존치료자는 치료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을 환자나 정신장애자라기보다 제한된 실존이라는 용어로 생각하려고 한다. 제한된 삶을 사는 사람들은 단지 제한된 자기자각만 갖는다. 그들은 자신의 잠재력의 대부분을 폐쇄하고, 인생은 지루하고 무의미하며 만약 이것이 삶의 전부라면 산다는 게 무얼까 하고 의심한다. 삶의 무의미성은 공허감과 텅빈 느낌, 또는 프랭클이 말한 실존적 공허로 이끈다. 때때로 자신의 삶이 공허의 늪에 빠져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목표를 갖고 삶을 창조하는 투쟁에서 물러난다. 이것이 상담에서 도전되어야 할 영역이다. 


  관련되는 개념으로 실존치료자들이 실존적 죄의식이라고 부는 것이다. 이것은 불완전하다는 느낌이나 자신이 마땅히 했어야 할 것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서 생기는 조건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잠재적 능력을 무시한다면 그는 실존적 죄의식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 죄의식은 "신경증적"인 것도 아니고 치료되어야 할 증상도 아니다. 그 대신에 치료자는 내담자가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어떻게 학습해 가는가를 알기 위해 이것을 탐색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삶의 의미와 방향에 도전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다.

 

5) 삶의 조건으로서의 불안 : 상담에 주는 의미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울증 때문에 전문적인 조력을 구한다. 많은 내담자들은 그들의 고통을 제거해 주거나 적어도 그들의 불안을 줄이는 어떤 처방이라도 내려주기를 기대하면서 상담소에 찾아온다. 그러나 실존적 상담자는 단지 증상을 제거하거나 불안 그 자체를 감소시키는 데 시간을 보내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내담자로 하여금 불안이 단계적으로 증진되는 것을 경험하도록 작업을 한다. 이때 제기 될 수 있는 몇 가지 질문이 있다. 즉 내담자는 불안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불안이 성장의 기능인가? 아니면 신경증적 행동에 고착하려는 기능인가? 불안은 내담자의 안녕을 위협하는 것인가? 내담자는 미지의 것에 대한 불안을 경험하려는 용기를 보이는가? 등.


  불안은 개인이나 집단상담의 치료기간을 효과적으로 만드는 좋은 소재이다. 만약 내담자가 아무런 불안도 경험하지 않는다면 변화하려는 동기도 저하될 것이다. 불안은 새로운 행동을 실험해 보려는 위험을 참고 견디게 해 주는 에너지로 변형 될 수 있다. 이라하여 실존적 치료자는 삶의 모호성과 불확실성을 어떻게 수용하며, 도와 주는 사람이 없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를 배우는 것이 종속된 삶에서 자율적인 삶으로 되는 여정에 필요하다는 것을 내담자가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와 줄 수 있다. 치료자와 내담자가 무능한 행동양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양식을 건설하는 것은 당분간은 불안스럽겠지만 불안은 곧 사라질 것이다. 내담자가 자신가을 갖게 됨에 따라 파멸할지도 모른다는 예상으로 인한 불안은 차차 감소된다. 

 

6) 죽음과 무에 대한 인식 : 상담에 주는 의미
  나는 죽음과 삶은 대칭적인 위치에 있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성장하기 위해 우리는 과거의 어떤 것을 기꺼이 포기해야 한다. 만약 우리 존재에 새로운 어떤 영역이 나타나려면 우리의 어떤 부분은 죽어야 한다. 과거의 신경증적인 면에서 집착하면서 동시에 좀 더 창의적인 면이 발달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나는 어떤 그룹에 내가 유용하다고 생각한 집단기법을 사용했는데 그 기법은 그 집단 구성원들에게 10년 후의 자신을 상상하도록 한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자신이 결심한 것을 완수하지 못했으며, 변화하고자 원하는 방식대로 자신을 변화시킬 시회를 놓쳤다고 상상하여 말하게 하였다. 그리고 두려워하는 자신의 어떤 부분에 직면하지 않았고 미해결의 무제를 그대로 남겼으며, 계획을 실행하지 않았다고 상상하여 말하게 했다. 그리고 모험을 하기보다는 현재의 자기 그대로 남기를 선택했다고 상상하게 하였다. 그런 다음 나는 그들이 마치 죽어가고 있는 것을 아는 것처럼 생각하게 하고 자신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게 하였다. 이 훈련은 내담자가 자기의 시간을 진지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하며, 보다 완전한 삶을 향해 마법의 힘으로 다시 살아난 실존을 수용하도록 자극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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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요약 및 평가

1) 요 약
  실존주의의 관점에 의하면 인간으로서 우리는 자기인식의 능력을 갖고 있다. 자기인식이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반성하고 스스로 결정하게 하는 탁월한 능력이다. 자유와 책임에 대한 인식은 인간의 또 다른 기본 특성인 실존적 불안을 야기시킨다. 우리가 그것을 좋아하지 않거나 또는 이런 자유에 대한 반성을 아무리 피해 보려고 하지만 우리는 자유롭다. 비록 그 결과가 불확실하더라도 선택을 하여야만 한다는 인식은 우리를 불안으로 이끈다. 이 불안은 우리가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에 직면할 때 가장 고조된다. 그러나 죽음은 피하지 못할 숙명이라는 사실에 직면함으로써 우리는 현재의 순간이 의미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과제를 수행할 시간을 결코 영원히 가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기 때문이다.우리의 과제는 의미있고 목적있는 삶을 창조하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참신한 목표를 추구하고 삶에 의미를 주는 가치를 추구할 때 고유하다.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은 무엇이든지 불확실성에 직면하여 선택을 해야만 하는 자유와 헌신을 통해 발달된다.


  실존치료는 인간관계에 중점을 둔다. 이것은 내담자의 성장은 순수한 관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보며 여러 가지 다른 치료법에서 빌려 온 기법이 아니라 숨겨져 있는 내담자와 치료자의 관계의  질(quality)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접근법은 기본적으로 치료의 목표, 인간존재의 기본 조건 그리고 내담자와 치료자가 함께 하는 여행으로서의 치료 등에 관심을 갖기 때문에 치료자는 특수한 기법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접근법에서 기법을 빌려 올 수 있다. 

 

2) 실존적 접근법의 공헌
  실존적 접근법은 인간에 초점을 두며 최고의 수준에서 인간을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형성해 가는 존재이며 끊임없이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고 성취시켜 가는 존재임을 보여 준다. 실존적 접근법은 인간실존, 즉 자기인식과 자유에 초점을 둔다. 실존주의 학자들은 죽음을 두려운 운명적 전망이 아닌 긍정적 전망으로 제시하였다. 왜냐하면 죽음은 삶에 의미를 주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들은 불안, 죄의식, 좌절, 고독, 그리고 소외를 이해하는 데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주었다.


  나의 판단으로는 실존적 접근법의 중요한 기여의 하나는 치료관계에서 인간관계의 질을 강조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이 접근법은 심리치료를 기계적 과정으로 만듦으로써 심리치료를 비인간화시키는 기회를 줄이게 했다. 또한 나는 실존요법에 내재한 철학이 매우 흥미로움믈 알게 되었다. 나는 특히 자각을 통해 자신의 삶을 재구성하는 개인의 자유와 책임과 능력을 강조한 점에 마음이 끌린다. 내 관점으로는 이런 전망은 심리치료의 실제에 개별적이고 독특한 유형을 만드는 심원한 철학적 기저를 제공해 준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 자체가 현대인의 핵심적 갈등을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존적 신념은 임상가들에게 그들의 이론적 성향에 관계없이 무언가를 준다. "실존적 접근법은 치료자에게 훈련되지 못한 쓸모없는 허가증을 주는" 이론이라는 생각을 불식시키기 위해 얄롬은 "'실존적 접근법은 다른 접근법만큼 합리적이고 일관적이며 체계적인 것으로 가치이고 효율적인 심리치료의 틀(paradigm)이다."라고 결론짓고 있다. 나아가 그는 실존적 접근법은 치료자에게 일련의 임상적 통계자료들을 설명하는 체계를 제공해 주고 체계과정의 체계적 전략을 구성하는 체계를 제공해 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이 모형이 다음과 같은 이점을 갖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 이론은 알뜰하고(극히 기본적인 가정만 설정하고 있음)접근하기 쉽다(이 가정들은 개인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 할 수 있는 자료에 기초하기 때문에). 그리고 인간적인 것을 바탕으로 하는 모형이다. 그러나 얄롬은 이것을 확고한 이론적 틀(the paradigm)로 보기보다 그냥 하나의 이론적 틀(a paradigm)로 간주하고 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전부 유용한 것이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유용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치료자들이 성공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부의 치료자들이 성공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이론적 틀이다. 나는 그의 관점에 동의한다. 왜냐하면 인간존재는 너무 복합적이어서 하나의 방법을 통해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존적 접근법을 갖고 활동하는 학자이면서 임상가인 부겐탈(Bugental, 1978)은 이접근법이 효과가 좋은 유일한 접근법은 아니지만 유용한 접근법이라고 보고 있다.

 

  사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다 적용할 수 있는 어떤 유일한 접근법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 는다. 보편성을 주장하는 것은 거짓이거나 순진하게 느껴진다. 많은 이론적 체계들은 유용하지만 인간존재는 너무 다양하고 복합적이고 알 수 없기 때문에 궁극적인 심리치료법이 제시될 수 없다. 아니 존재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


  실존적 접근법에 가장 적합한 문제는 무엇인가?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이 치료에 가장 적합한가? 가장 좋은 경우는 인간의 성장을 향한 유용한 선택과 통로에 초점을 두는 경우이다. 아주 짧은 상담에서도 실존치료는 내담자가 개인적 책임을 가정하고,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일을 하며, 현재의 상황에 대한 자각을 확대하도록 하는 일에 초점을 둔다. 발달적 위기와 싸우는 내담자에게 실존치료는 특히 유용하다(May & Yalom, 1984).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넘어가는 결정적 전환점의 예로 청소년의 자아정체감확립을 위한 투쟁이 있다. 중년기의 실의와 싸우는 몸부림이 있다. 집을 더나 적용하려는 아동의 투쟁도 있고 직업과 결혼에서의 실패에 대처하려는 성인 초기의 몸부림도 있다. 그리고 나이가 듦에 따라 나타나는 신체적 과점은 개인이나 집단상담에 적절히 적용할수 있으며 이 기본 개념은 다른 치료로부터 빌려온 기본의도는 이 기본 개념과 주제를 모든 학파의 치료기법과 통합시키는 것이다. 그들은 이런 통합이 분명히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3)실존적 접근법의 한계와 평가
  이 접근법에 대한 중요한 평가는 이 접근법이 심리치료의 원리와 실제에서 체계적 전술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방법론에서 엄격함을 결여한 점과 신비적인 언어와 개념들을 사용한 점이 비판받고 있으며, 과학적 접근법에 대한 반동에 기초한 일시적 변덕이라는 비판도 있다. 실증적인 연구에 기초한 상담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치료의 개념들이 실증적이어야 하고 정의가 조작적이어야 하며 가설은 검증될 수 있어야 하고 치료의 실제는 치료의 과정이나 실제 모두에서 연구결과에 의해 뒷받침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메이(1958)는 정신의학과 심리학에서의 실존주의적 운동은 보다 경험적인 실행에서 나온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통적인 과학적 방법은 통계자료를 정당화하려는 것 뿐만 아니라 내담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드러내려고 하기보다는 감추려고 하였다. 실존적 접근법은 선입견으로 내담자를 보거나 또는 좋아하는 이미지로 만들려는 경향에 반대하는 운동이다. 이런 점에서 이 접근법은 넓은 의미에서 과학적 전통의 입장에 선다.


  실존적 태도를 견지하는 일부 치료자들은 그들의 치료유형을 자기실현(self-actualization), 대화적 만남(dialogic encounter), 자발성(authenicity), 그리고 세계 내의 존재(being in the world)라는 모호하고 일반적인 용어로 기술한다. 이런 식의 명확성의 결여로 때로는 혼동이 생기고 실조치료의 과정이나 결과에 대한 연구를 하기가 어렵게 된다.


  또 다른 기본적인 한계는 이 접근법의 용어의 대부분이 너무 추상적이어서 실제 치료에 적용시키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 니체, 하이데거, 사르트르 등의 실존주의 이론가들은 상담자나 치료자를 위해 그들의 이론을 만든 것이 아니다. 철학적인 성향이 없는 초심자나 발전도상에 있는 치료자들은 실존적 개념들의 대부분이 공허하고 교묘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런 철학에 익숙한 상담자들도 때로는 이것을 치료에 적용할 때 당황해 한다. 이미 살펴온 바와 같이 이 접근법은 내담자를 먼저 이해하고 거기에 따라 기법을 적용해야 함을 강조한다. 실존적 접근법 본래의 기법이 없다는 사실은 치료자가 자신의 창조적인 치료절차를 발달시키거나 다른 학파의 기법을 빌어다 쓰도록 만들었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 접근법은 인간을 사회적, 심리적으로 높은 수준에서 기능하는 사람에게는 효과가 있지만, 낮은 수준에 있는 사람이나 위기에 있는 사람 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비판되고 있다. 자유와 책임에 대해 실존주의자들의 강조는 무감각하거나 미숙할 수 있다. 또한 철학적 통찰도 어떤 내담자들에게는 그들의 능력을 넘어선 것이다. 따라서 실존적 접근법은 장애가 심한 사람에게는 부적절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라잉(Laing, 195)은 실존적 관점이 정신병환자에게 성공적으로 사용되어 왔다고 지적하였다. 라잉의 긍정적 결과는 실존적 성향을 지닌 치료자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과 잘지낼 수 있다는 것과, 내담자의 고유한 성격에 맞는 능동적이고 지시적인 중재방법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다.

 

6. 반성과 논의를 위한 질문들

(1) 개인적인 자유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재의 당신은 선택의 결과라고 믿는가 아니면 환경의 산물이라고 믿는가?


(2) 당신의 삶에서 결정적 전환점들을 생각해 볼 때 무엇이 현재의 발전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나타나는가?


(3) 자유를 인정하고 스스로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가? 자유와 책임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하는가? 다른 사람의 도움에 의해 안일하게 지내기 위해 지율성을 포기하려고 하는가?


(4) 근본적으로 모든 사람들은 각기 혼자라는 데 동의하는가?  그런 사실이 상담에 어떤 의미를 주는 가? 어떤 방법으로 혼자라는 경험을 회피하였는가?


(5) 불안의 경험은 어떤 것이었는가? 그 불안은 자신이 선택해야만 한다는 생각, 혼자라는 인식, 죽어야 할 운명이라는 사실의 자각, 그리고 삶에서 자신의 의미와 목적을 창조해야 한다는 자각의 결과에서 온 것은 아닌가? 자신의 삶에서 불안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6) 만일 죽음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삶은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7) 삶에서 가장 가치있게 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들이 없으면 삶은 어떻게 되겠는가? 삶에 의미와 목적을 주는 것을 무엇인가?


(8) "실존적 공허"(existnetial vacuum)를 경험한 적이 있는가? 때로 삶이 실체, 깊이 그리고 의미가 없음을 경험하는가? 이러 허무감을 경험하는 것은 무엇과 같으며 어떻게 거기에 대처하는가?


(9) 내담자와 치료자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실존적 관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느 정도까지 내담자와 미지의 영역으로 치료여행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어느 정도까지 자신의 삶에 도전하고 삶을 변화시키려고 하는가?

 

7. 읽을 만한 보충교재들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저술들은 대부분 너무 기교적이고 모호해서 상당한 철학적 배경이 없으면 읽기 어렵다. 그러나 이 깊이 있는 사상가들의 글은 이 방면에 흥미를 갖고 있는 학생들에게는 아주 훌륭한 명문들이다. 이런 명문 중 두 가지는 "도스토에프스키에서 사르트르까지의 실존주의"(Kaufmann, 1975)와 "실존주의"(Solomon, 1974)이다.


  내가 실존적 심리치료의 근원으로 추천하고 싶은 글은 "실존적 심리치료"(Yalom, 1980)이다. 이 책은 실존적 정신의학에 대한 최초의 포괄적인 교과서이다. 작가는 자신의 임상경험과 문헌에서 인간존재의 네 가지 관심사에 초점을 둔 역동적 치료법을 만들었다. 네 가지 관심사인 죽음, 자유, 고립 그리고 무의미성이 많은 임상사례를 통해 입증되고 있다.


  실존적 관점을 미국사회에 도입한 주요 인물의 하나는 메이(May)이다. 그의 최근의 저서 <<자유와 운명>>(1981)에서 그는 선택, 운명, 자유와 불안, 죽음과 삶의 의미, 삶의 소생, 절망과 기쁨등과 같은 인간사로부터 심리치료의 실행을 위한 의미를 발전시키고 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책이며 우리의 삶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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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il and Sin in Dante's Inferno and Goethe's Faust: A Symbolic Comparison

By Chris Warner, Student

Dante and Goethe have vastly differing opinions of the nature of life, yet they agree on some important things.

Both Faust and Inferno contain extensive references to Christianity, and both are concerned with the destiny of the human spirit. Although they are seemingly similar works, and at face value it seems that they say the same thing, Goethe and Dante have very differing views concerning the philosophies of good and evil.

The landscape of Inferno consists of the world, divided into two halves: A hemisphere of water and a hemisphere of land. At the center of the hemisphere of land lies Jerusalem, beneath which lies the inferno. The inferno is best described as a large funnel which begins just underground, and whose focal point resides at the center of gravity. The funnel has grooves around it, in each of these the sinners guilty of a particular sin are punished together, at the bottom rests Satan. Past the center of gravity a tunnel connects to the other side of the world surfacing at the foot of Mount Purgatory, which rests in the center of the hemisphere of water as the only land. Mount Purgatory is composed of several steps, on each of these is punished the repentant souls guilty of one of the seven deadly sins. At the peak of Mount Purgatory is Eden, the terrestrial paradise. Above the world are the spheres of heaven, each containing a specific type of soul that has attained salvation. He says that when Satan fell from Heaven (Which he did in a quite literal way in the Inferno) that the Earth was so horrified at the sight of him that it hid itself behind the ocean, creating the two hemispheres. Then, to escape contact with the lord of corruption, the Earth was hollowed out, creating the pit of Hell. The earth thus moved now constitutes the bulk of Mount Purgatory .
Christian doctrine is followed to the letter in all of Dante’s ideas. Although it may seem that he digresses from that doctrine in the order of his fictional universe one must remember that the Inferno is intended to be taken symbolically, and the literal meanings are not the intended ones. Any judgments passed on the souls residing in the Inferno are taken directly from classic Christian doctrine. Dante’s universe is constructed on several texts from the Bible taken literally. It contains Purgatory, a concept found in the Catholic religion of his day, as well as Eden, the terrestrial paradise, residing on top of Mount Purgatory. It portrays Hell as a real place, although it’s structure is fashioned to represent the nature of sin, rather than the actual destiny of the sinners.

Dante uses mythological references in his work. This adds a surrealistic sense and was possibly intended to help the reader interpret the poem symbolically. It also ties the poem to other works and ideas which previously existed and allows it to immediately strike a chord in the minds of the reading audience. Dante uses mythological characters as symbols for sin itself, and uses the punishments as symbolic of the mindset of the sinner. In the third circle of the Inferno sinners guilty of Gluttony are punished in a constant deluge of rain, mud, and general filth representative of their own corrupted spirits. Those souls are eternally tormented by Cerberus, the guardian of the underworld in Greek mythology, whom Dante has reassigned meaning to. Dante makes Cerberus the eidolon of gluttony by virtue of his three heads and ferocity. This demonstrates Dante’s use of mythological characters as a tool. He has no real reverence for them, except perhaps secondarily through his respect of Vergil.

The basic philosophical implications of the Inferno are that Satan, representing evil, is the center of gravity, and because of this all humans are naturally drawn to him. God, representing perfect salvation, resides beyond the highest sphere of heaven in the Empyrean, and is the most difficult thing in the universe to reach. The three beasts eternally block the right path: The leopard of treachery, the lion of violence, and the she-wolf of incontinence. These creatures represent their respective sins, and that they block the right path for all souls residing on the earth. The fact that the right path is vacant tells us that no man is capable of right living, and so the journey through the inferno is necessary.


Faust is the story, written in dialogue, of the legendary Doctor Faustus, who makes a deal with the Devil. It is loosely based on previous works concerning the Doctor, who may have been a real person, including Dr. Faustus, by Christopher Marlowe. Goethe relates the story of the Doctor who, having studied and searched in every field looking for enlightenment, has now become desperate. Seeing this opportunity, as is related in the “Prologue in Heaven”, Mephistopheles asks The Lord’s permission to tempt Faust. The Lord agrees rather amiably and the action of the play begins. Mephistopheles makes a pact with Faust and they agree that Mephistopheles will be Faust’s servant and will show him everything there is to see. The wager is if Faust is contented by Mephistopheles’ antics so that he finds true happiness in luxury, he will lose his immortal soul. The play concerns Mephistopheles’ attempts to corrupt Faust so that he may find pleasure in worldly things, which the Devil can offer.

Goethe uses Christian references as a background for the story. He is not entirely faithful to the doctrines of the church. Cottrell, in his “Seven Essays” on Faust, has this to say:

At the end of the eighteenth century[…] faith in Christian doctrine was waning and knowledge of the natural sciences rising[…] Faust explores the radical changes demanded by the new orientation[…] Most of Goethe’s references to the Bible are used incorrectly and in a blasphemous way. Goethe portrays Christianity as another set of myths to allude to.”



Goethe uses mythological references (other than Christian ones) for more than one reason. At times, he uses them to display that Faust is no longer following Christianity and is instead delving into heathen lore in search of truth. The dropping of the name Helena is a mythological, but perhaps also classical, reference that is used to portray an idea. When Mephistopheles says that Faust will “see a Helena in every girl he meets”, we know from past readings of Homer that Helen is the most beautiful woman in the world, and so we understand what the potion Faust is about to drink will do. Just like Dante, Goethe uses mythological references simply because they are well known. The introduction of several such characters at the Walpurgisnight in the second part of Faust works primarily to show examples of what sin can do.

The symbolism in Faust is very intricate, and only sometimes stoops to the level of simple allegory. The Prologue in Heaven is a comical device and an introduction, which follows closely with the Stage Managers Prelude on the stage. The real action begins with the first act, as could be expected of a play. In the opening scene, appropriately title “Night”, we find Faust in his study lamenting his place in life:

FAUST. I’ve studied now Philosophy
And Jurisprudence, Medicine,
And even, alas! Theology
All through and through with ardour keen!
Here I stand, poor fool, and see
I’m just as wise as formerly.



Faust is representative not of mankind in general, but of mankind ideally. His quest for wisdom through normal means is futile, but he is still trying to gain wisdom. This suggests that, although the best of us will thirst for knowledge, it is a difficult task to undertake. As Faust begins to despair, his self-control and sanity in general begin to lose their power. This allows Mephistopheles, representing Faust’s primitive soul, a chance to appear. The incident with the pentagram restricting Mephistopheles’ movement is a demonstration that Faust is still in control, but when Mephistopheles’ put Faust to sleep and escapes, we know that Faust has now given in to his own chaotic nature. Once the pact is made, Mephistopheles stands in for Faust in dealing with a student, the scene that follows is a foreshadowing event that closely parallels the use of “The Dumb Show” in Rosencrantz and Guildenstern are Dead (Stoppard, NY, 1991). The remainder of Part One deals with the life and times of one whom the Devil is trying to corrupt. Each scene follows sporadically, illustrating various ways in which Mephistopheles tries to tempt Faust to decadence, but always Faust keeps to his higher goal of obtaining experience, and narrowly evades corruption.

While The Divine Comedy was written in a time when the church had much power and an absolute following; Faust was written in a time when faith in church dogma was decreasing and knowledge of the natural sciences was increasing. Each work portrays the aura of its own time, and both depart from the generally accepted conventions in a way that betrays the authors own personal beliefs, as well as their personal vendettas. The Divine Comedy strives to adequately represent the truths of human nature and spirituality. At times it manages to fulfill the question of “Why” something is bad with a more satisfactory response than “Because God said so.” Faust achieves the same purpose, not to justify religion, but to belittle it.

In The Divine Comedy salvation is symbolic of divine grace, and is in fact very nearly meant literally. Salvation is based on repentance and faith in Christ as a savior, however Dante does not let souls off that easily. Souls must first examine their own state of sin, and then they must repent and atone for their sins. Those who commit no blatant sins, but do no considerable good either are destined for the vestibule of Hell. This is where those souls without infamy or fame reside for the rest of eternity chasing the shifting banner. This is the punishment Dante allots to those who live without purpose or goal, and they will not be resurrected at the time of the apocalypse. This scene is mirrored in a far less grotesque manner in Beckett’s Waiting for Godot, and it seems Dante had a strong aversion to the absurd, preferring to think that everything has a reason. Minos, who tells in which circle they will spend eternity, then judges damned souls. Souls who are saved are not punished for minor sins, and need not even atone for them. They are simply filed away into their appropriate heavens. Those without God’s grace will be eternally punished for any sin, no matter how small, that they once indulged in. Those who die before they are able to atone must do so in Purgatory before they can reach Paradise or the Empyrean. Furthermore, souls in Hell are incapable of repentance because it is a divine grace that is not present in Hell, where not even the name of God or Jesus may be spoken.

 

In Faust, salvation is an indicator of whether or not a person has lived well or had the right priorities in Goethe’s eyes, and therefore some people are saved in ways that the Bible does not condone. Each individual is either good or bad, but few individuals are perfect. Any individual who is imperfect can be swayed by Mephistopheles’ (Primitive thought) power. Those whose goals are righteous will invariably be saved, regardless of their stance on religion, and those who succumb to primal urges will fall. Gretchen is saved despite her fall from grace in a very deus ex machina style turn of events, but this is not very strange when you consider that once Gretchen fell, she was able to see how arrogant and condescending she was as a sinless person. Faust is saved at the end in another deus ex machina turn of events because, unbeknownst to Mephistopheles, he repents. This is not consistent with the rest of the poem because Mephistopheles is part of Faust’s lower nature, and Faust cannot escape him.

In Dante’s Time, evil was considered to be an outside force. All that we call sin, destruction, or evil, was thought to be the work of Satan. Satan is blamed for illness, corruption, and for tempting men to sin. Evil is a thing to which men are subjected, and the trial is whether or not they can withstand its corrupting touch. Satan is seen as a universal force striving to defile and claim part of God’s perfect creation, tempting men to sin for no reason other than to spite God. This is demonstrated symbolically in The Divine Comedy by the fact that man inhabits the Earth, which is at the point of equilibrium between Heaven and Hell. Man then must work to fight the gravitational forces pulling him toward Satan to avoid damnation, and must exert much effort to scale Mount Purgatory and reach the Heavens. In Dante’s world evil is inescapable, and it is necessary to face it. This is why it is only by climbing on Satan’s hair that Virgil is able to extricate Dante from the inferno and take him on the path of repentance.

In Faust no such implications are present. Man is born into an ever-changing world with the capacity for righteousness or decadence. It is through experience, knowledge, or self-control that man overcomes his primitive and base nature to achieve salvation, but he is not necessarily damned at the start. Some are not easily swayed by their chaotic natures, and some seem destined to brutishness. The only universal that is mentioned is mankind’s arrogance which is presented in this quote from the “Prologue in Heaven”, wherein Mephistopheles makes a case against mankind. The entire thing seems to be more of a shot against religious doctrines than an observation of mankind itself:

Mephistopheles. […]
Of suns and worlds I’ve naught to say worth mention.
How men torment them claims my whole attention.
Earth’s little god retains his same old stamp and ways
And is as singular as on the first of days.
A little better would he live, poor wight,
Had you not given him that gleam of heavenly light.
He calls it Reason, only to pollute
Its use by being brutaler than any brute.



It shows that the fault of evil lies on man himself, because even a devil is angered by man’s abuse of Gods gifts. It is then left to each human individually to make the most of what they have, and the next level above righteousness is godliness. This is what Faust strives for; he is willing to entertain the devil to get the opportunity to experience all things.

Despite the fact that evil is interpreted as an outside force in Inferno it's presence is considered absolute and inescapable. This is in alignment with the concept that salvation can only be achieved through faith in Christ. The implication of this is that it must be impossible to avoid sin; else it would be possible to enter Heaven without Christ. This is demonstrated in the first Canto of The Divine Comedy when the beasts, representing sin, block Dante’s way to the right path. Then he notes that no man walks upon that path. This is also shown by the fact that only God, his angels, and the Saints are capable of reaching the Empyrean. All other saved souls are sent to one of the imperfect heavens for those repentant, but still guilty of, various sins, or for those who committed sins in the name of their God, and are therefore denied perfect oneness with God.

In Faust it is said that evil is an internal thing, and yet it is portrayed by the wholly independent character of Mephistopheles. This seems to indicate that, although the primitive spirit is part of us all, it is not in any way connected to who we really are. It simply lurks in the background, awaiting its opportunity to sow discord. The lower spirit in Goethe’s world is a dormant quality that exists within each human being, which is not the cause of temptation, but is awakened by it. In Goethe’s world, all sin is comparable to Dante’s “Sins of incontinence”, and the notion of true evil is a concept born of narrow perspective and is a caricature more befitting a devil than an actual person. Goethe’s view of the world is by no means black-and-white, and in fact may not contain any of either. It would be folly to describe Goethe’s perspective as one of shades of gray, though, it would be more fitting to say that it is green. Faust is green with the infinite diversity of an organic world, devoid of set rules or boundaries. Life is only what you make of it, or rather, what you make of yourself.

Again we find that Dante seems to be contradicting himself by placing Satan, the source of all evil and the universal tempter, in a place devoid of power or influence. One must remember that in this case Satan is representative of sin itself, and more specifically, the sin of betrayal against almighty God. Satan is at the center of the earth in the frozen pool of Cocytus, farthest removed from God’s light of all things in creation. It would seem that such a position would leave him powerless over man, and indeed it does, but man is not unaffected by his presence. It is important to remember that the Devil is in the details. Satan’s position at the center of the world also places him at the center of gravity, and because the Earth was thought to be the center of the universe at this time he is said to be the point towards which all things are drawn, excepting the immobile empyrean. Thus the pull of Satan is as inescapable as gravity itself. All things in the universe: All objects, all souls, all points, all possible things, therefore, are drawn inexplicably and consistently toward the source of evil. Thus Satan’s is similar to a black hole sapping the universe of it’s strength, the place into which all things forgotten will fall, the source of all entropy, and the ultimate cause of the world’s destruction.

In Faust evil plays a very different role. Mephistopheles is not ever-present in reiteration of the fact that the concept of pure evil is flawed. The fact that Mephistopheles does not appear as a black fiend with glowing eyes and an overbearing presence shows that this evil is not elemental (In Marlowe’s Dr. Faustus, the devils do appear in such a way). Mephistophelean evil is the disruption of the rhythm of life. To even be susceptible to Mephistopheles’ works, one must have already abandoned much in the way of reason of their own volition. Once this has occurred, Mephistopheles’ goal is to corrupt one of the basic tenets of life: either the need for love, or the need for sustenance. For example: Jay Gatsby, a character in The Great Gatsby by F. Scott Fitzgerald, lives his life desperate for Daisy. Such an occurrence would qualify one for Faustian Hell. In part one of Faust, this is exactly what Mephistopheles attempts to do with Faust. He first takes him to the tavern, but finds that Faust has no natural affinity to gluttony and indecency, and so he decides to appeal to Faust’s more civilized side. He has the witch brew a potion that will make Faust “see a Helena in every girl he meets.” Rather than fall for a random girl on the street, which is where Mephistopheles has taken him immediately after taking the draught, he instead falls for a well-mannered girl who is devoid of sin. He falls in love, rather than lust. So in Goethe’s view evil works within the confines of our own wants and needs, and is the fault of no outside force. It is the result of wanting too much, or mistaking want for need, or need for want. It is the misunderstanding of the very fabric of our own lives, but as such it is also conquerable of our own accord. There is no need for divine aid in the world of Faust, because it will surely come to those who help themselves. To borrow a line from Shakespeare’s alleged work Julius Caesar: “The fault, dear Brutus, is not in our stars, but in ourselves.”

The image of good and evil is one of mankind confronting their own imperfections. Dante’s view is that the imperfections are inflicted upon men by the will of God and the presence of Satan. Goethe sees God and the Devil as constructs of man’s imperfection, and that, in the end, souls judge themsel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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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 8. 28 프랑크푸르트암마인~1832. 3. 22 작센바이마르 바이마르.

독일의 시인·비평가·언론인·화가·무대연출가·정치가·교육가·과학자.

세계 문학사의 거인으로 널리 인정되는 독일 문호로 유럽인으로서는 마지막으로 르네상스 거장다운 다재다능함과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과학에 관한 저서만도 14권에 이를 정도로 그가 쓴 방대한 량의 저술과 그 다양성은 놀랄 만하다. 서정성 짙은 작품들에서는 다양한 주제와 문체를 능숙하게 구사했고 허구에서는 정신분석학자들의 기초자료로 사용된 동화로부터 시적으로 정제된 단편 및 중편소설(novella)들, 〈빌헬름 마이스터 Wilhelm Meister〉의 '개방된' 상징형식에 이르기까지 폭넓음을 보여준다. 희곡에서도 산문체의 역사극·정치극·심리극으로부터 무운시(無韻詩 blank verse) 형식을 취한 근대문학의 걸작 중 하나인 〈파우스트 Faust〉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는 82년간의 생애를 통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신적 경지의 예지를 터득했으면서도 사랑이나 슬픔에 기꺼이 그의 존재를 내맡기곤 했다. 내적 혼돈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일상적인 생활 규율을 엄수하면서도 삶·사랑·사색의 신비가 투명할 정도로 정제되어 있는 마술적 서정시들을 창조하는 힘을 잃지 않았다.

마침내 그에게 원하는 대로 창조력을 샘솟게 하는, 자신조차도 신비스럽게 여긴 재능이 생겨나 60년 가까이 노력해온 작품을 완성하게 되었다. 죽기 불과 몇 달 전에 완성한 〈파우스트〉 전편은 괴테의 반어적인 체념이 덧붙여져 후세 비평가들에게 전해졌는데 이 작품의 마지막 2행연구(二行聯句 couplet) "영원히 여성적인 것은 우리를 끌어올린다"는 말은 인간 존재의 양극성(兩極性)에 대한 괴테 자신의 감성을 요약한다. 여성은 그에게 남성의 영원한 인도자요 창조적 삶의 원천인 동시에, 정신과 영혼의 가장 숭고한 노력의 구심점이었다.

괴테에게는 상호 배타적인 삶의 양극을 오가는 자연스러운 능력과 변화 및 생성에 대한 천부적 자질이 있었다. 삶이란 그에게 상반된 경향들을 자연스럽게 조화시키는 가운데 타고난 재능을 실현해가는 성숙의 과정이었다.

유년시절

괴테는 그가 항상 가장 훌륭한 문화의 토양이라고 찬양하던 중산층 출신이었다. 북독일 혈통의 부친 요한 카스파르 괴테는 은퇴한 법률가로서 교양있고 여유있는 생활을 누렸다. 요한은 이탈리아 여행도 다녔고 운치있게 꾸며진 집에는 자료가 풍부한 서재와 화랑을 갖추었다. 프랑크푸르트 시장의 딸이었던 모친 카타리네 엘리자베트 텍스토는 자유도시 프랑크푸르트의 귀족계급과의 귀한 교분을 아들에게 터주었다. 즉 괴테는 자신의 혈통에서 이미 북독일의 지적이고 도덕적인 엄격성과 남독일의 자유분방한 예술적 감수성이라는 상반되는 경향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8명의 형제 가운데서 맏이인 그와 누이동생 코르넬리아만이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괴테는 자서전인 〈시와 진실 Dichtung und Wahrheit〉에서 행복했던 어린시절의 기억들을 회상했다. 여기에는 하나뿐인 여동생 코르넬리아와의 사이에 일어났던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들이 날카로운 심리적 통찰력으로 그려져 있으며, 그밖에도 술집처녀 그레트헨과의 열렬한 사랑과 그후의 도피, 7년전쟁(1756~63) 때 프랑스의 점령으로 인한 삶에 대한 시야의 확대, 요제프 2세의 대관식, 경건파의 열렬한 종교적 활동의 체험이 실려 있다. 특히 그는 경건파 신앙의 체험으로 사순절 의식에서 F.G. 클롭슈토크의 〈메시아 Messias〉를 낭송하게 되었으며, 요제프에 관한 서사시적 산문과 그리스도의 지옥강림에 관한 시를 쓰기도 했다.

한편 프랑스군이 본토극단을 데려와 공연을 하자 일찍이 할머니가 선물한 인형극 세트로 인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연극에 대한 열정이 불붙었고, 프랑스 극작가 라신에 대한 지속적인 열광이 싹텄다. 괴테가 영국풍을 좋아하게 된 것은 리즈 출신의 젊은 의류상인과의 우정에서 시작된 것인데, 그의 누이동생 코르넬리아는 그 상인과 열렬한 사랑에 빠졌다. 이에 대한 괴테의 반응은 4명의 형제가 각기 다른 언어로 주고받는 편지 형식의 소설에 잘 나타나 있다.

괴테 자신은 영국의 영향이 지배적이었던 괴팅겐대학에서 고전을 읽기 원했으나 1765년 10월에 부친의 모교인 라이프치히대학으로 보내져 법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후에 〈파우스트〉에서 '작은 파리'라고 부른 라이프치히의 우아한 사교계에서 시골뜨기 괴테는 물을 떠난 물고기와도 같았다. 당시의 연극계는 평론가 J.C. 고체트의 프랑스풍 영향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우화와 송가의 작가 C.F. 겔러트는 에드워드 영, 로렌스 스턴, 새뮤얼 리처드슨 등의 새로운 감각을 소개했다. 괴테는 겔러트의 강의를 '독일 도덕문화의 토대'라고 극찬했고 그에게서 서한문체와 사회규범에 관한 귀중한 지식을 얻었다. 겔러트의 문학적 영향은 C.M. 빌란트의 소설·서사시 등에 나타난 강건한 우아함과 풍자적인 명철함으로 더욱 심화되었다. 괴테에게 빌란트의 작품을 소개한 사람은 유럽의 예술양식에 깊은 영향을 끼친 예술사가 J. J. 빙켈만의 친구이자 스승인 A.F. 외저였다. 외저를 통해 괴테는 그리스 예술에 대한 애정을 갖게 되었으며 일생 동안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던 2가지, 즉 자신의 눈을 사용하는 것과 자신이 하고자 하는 어떤 일에서건 본질을 터득하는 것을 배웠다. 또한 시인이자 비평가인 J.G. 헤르더가 '북독일의 피렌체'라 칭송했던 드레스덴을 여행한 후 괴테는 고대 조각 및 로코코 건축양식의 장려함에 대한 시야를 넓히게 되었다. 한편 음악에 대한 수업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작곡가 J.A. 힐러의 지휘로 새로운 18세기 협주곡의 훌륭한 공연들이 행해졌는데 이것이 바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게반트하우스 콘서트가 되었다.

라이프치히 시기의 괴테의 문학적 수확은 당시 유행하는 로코코풍의 노래책으로서 여기에는 그리스 시인 아나크레온 시풍(詩風)으로 사랑과 술을 찬미한 노래들이 실려 있다. 〈라이프치히 가곡집 Das Leipziger Liederbuch〉이라는 제목의 이 노래책은 괴테가 점심을 먹던 한 선술집주인의 딸에게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아네테 시집 Das Buch Annette〉(1766~67)과 〈신시집 Neue Lieder〉도 진정한 열정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모든 문학소품들에 관해 괴테는 그 자신의 모든 작품들은 '위대한 고백의 단편들'이라고 하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런 시작(詩作)에서와 같은 음조가 알렉산더격(프랑스의 알렉상드랭을 본뜬 12음절 시행)의 시 작품 〈애인의 변덕 Laune des Verliebten〉과 좀더 우울한 소극(笑劇) 〈공범들 Die Mitschuldigen〉에서도 드러난다. 이때부터 로코코풍은 괴테 작품세계의 한 요소가 되어 필요한 경우 언제라도 쓰여졌다. 그것은 〈토르크바토 타소 Torqvato Tasso〉와 〈친화력 Die Wahlverwandtschaften〉의 배경에서도 나타나는데, 괴테는 〈아나크레온의 무덤 Anakreons Grab〉(1806)에서 이 로코코풍의 매력에 대단한 찬사를 보낸 데 이어 〈서동시집 Westostlicher Divan〉에서는 이 양식을 동방의 요소와 융합시켰다.

질풍노도기의 작품

라이프치히에서 괴테는 중병을 얻어 학업도 끝마치지 못한 1768년 가을(19세)에 귀향하게 되었다. 긴 회복기 동안 자아성찰과 종교적 신비주의에 몰두했고, 연금술·점성술·신비철학에 도취했는데, 이 모든 것은 〈파우스트〉에 그 자취를 남기게 된다. 건강이 회복되자 스트라스부르에서 법학 공부를 계속하기로 결정했고, 그후에는 파리에 가서 세계일주(실현되지는 못했지만)를 할 예정이었다. 스트라스부르 체류는 그의 삶과 작품에 있어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프랑스 지방의 독일 중심지이던 이곳에서 괴테는 라이프치히의 세계주의적 분위기에 대한 반동을 경험했으며, 대성당의 영향으로 고딕풍의 독일적 이상으로 전향하게 되었다.

이때 그곳에서 눈을 치료하기 위해 1770~71년의 겨울을 보내고 있던 J.G. 헤르더는 괴테에게 매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를 통해 괴테는 정신을 고양시키는 데 있어 촉각의 역할, 감정을 표현하는 형식을 창출하는 창조자로서의 새로운 예술가상, 인간의 가장 독창적이고 생명력있는 언어로서의 새 시론(詩論), 새로운 문체 및 성서나 호메로스의 서사시, 3세기 켈트 족이 쓴 〈오시안〉 등에 간직되어온 '원시'종족들의 시와 민요(Volkslied)가 지닌 가치를 터득하게 되었다. 이러한 그의 변모는 초기 연인 중의 하나인 프리데리케 브리온(제젠하임의 목사 딸)에게 바친 〈제젠하임 시가집 Sesenheimer Lieder〉(1770~71)에 잘 나타난다. 이 시집의 시들은 독일 서정시의 새로운 장을 여는 것이었다. 〈5월의 노래 Mailied〉와 〈환영과 이별 Willkommen und Abschied〉 등은 그의 〈시가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가장 인기있는 작품들이다. 특히 1790년에 개작된 〈환영과 이별〉은 괴테 자신이 프리데리케를 버린 후 느꼈던 죄의식을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시와 진실〉에서 다시 회고되는 이 사랑이야기는 인간성숙의 잠재적인 요소로 바라본 삶과 문학의 합일을 보여준다.

만일 헤르더의 말대로 시가 생명력의 표현이고 연극이 정열의 표현이라면 〈철수(鐵手) 고트프리트 폰 베를리힝겐의 역사극 Geschichte Gottfriedens von Berlichingen mit der eisernen Hand dramatisiert〉(1771)의 거창한 인물은 정열 그 자체의 표현일 것이다. 이 작품에서 괴테는 의식적으로 셰익스피어와 겨루고 있다. 셰익스피어 탄생 2년 전에 죽은 실존인물 괴츠는 괴테 시대의 엄격한 허식과는 현격하게 대조되는 떠들썩한 16세기의 원시적 생명력을 표현하는 데 시기적으로 근접해 있었기 때문이다. 1773년 〈괴츠 폰 베를리힝겐 Gotz von Berlichingen〉의 개작출판과 더불어 셰익스피어 숭배가 시작되었으며, 괴테의 이 작품은 질풍노도운동의 첫 봉화라 할 수 있다. 괴테의 열정적인 〈셰익스피어의 날에 붙여 Rede zum Shakespeares Tag〉에서 예고된 이 운동의 선언문은 그가 1771년 8월 프랑크푸르트에 귀향한 후에 발표되었다. 또 이른바 〈독일 예술과 미술에 관하여 Von deutscher Art und Kunst〉에는 역사가 J.M. 뫼저의 독일민족 옹호의 글과 〈오시안〉과 셰익스피어를 찬양한 헤르더의 논설 2편, 그리고 괴테 자신이 쓴 고딕 건축양식에 대한 랩소디가 실렸다.

표면적으로는 변호사로서 활동을 하고 있었지만, 젊은 시인 괴테는 〈프랑크푸르트 학자보 Frankfurter Gelehrte Anzeigen〉의 편집을 도와주면서 문학과 사회의 의무감 사이에서 표류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1772년 왕국의 고등법원이 있는 베츨러로 떠났으나 거기서도 법률보다는 문학에 대한 욕구가 솟구쳤다. 자유시행으로 쓴 자조적 송시(頌詩) 〈방랑자의 폭풍의 노래 Wandrers Sturmlied〉는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서정시인 핀다로스에 대한 새로운 찬미와 뒷날 그 자신도 위대한 시인이 되리라는 불투명한 자신감을 동시에 보여준다. 베츨러에서도 새로운 사랑을 체험하였는데, 상대는 이미 약혼자가 있는 샤를로테 부프라는 처녀로서, 이 연애사건은 〈젊은 베르터의 슬픔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으로 주목을 끌게 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베츨러에서의 체험 외에도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괴테가 절제력이 부족한 것에 대한 헤르더의 날카로운 비판의 말, 예술창작에 관한 신플라톤주의적 학설에 대한 G.E. 레싱의 고발서, 독일 소설가 조피 폰 라 로슈의 딸 막시밀리아네에 대한 일시적인 연정(작품의 여주인공이 검은 눈의 소유자로 묘사된 것은 그녀 때문임) 등이 그것이다. 특히 베츨러에서 들려온, 실연으로 자살한 친구의 소식은 이 작품의 구성을 결정적으로 급변시켰다. 〈젊은 베르터의 슬픔〉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면, 이것은 토머스 칼라일의 지적대로 '동시대인들이 겪었던 이름 붙일 수 없는 불안과 동경에 찬 불만'을 표출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첫 소설작품은 결코 감상적인 소설이 아니며 실연이 본래의 주제도 아니다. 오히려 그 주제는 18세기가 '열정'이라고 부르던 것으로서 이것은 그 당시 사랑·예술·사회·사고의 모든 영역에까지 널리 퍼져 있던, 절대적인 것을 추구하다 맞이하게 되는 치명적인 결과다.

1771~75년에는 이밖에도 핀다로스나 셰익스피어로부터 영향을 받아 서정적이거나 극적인 훌륭한 찬가들이 쏟아져 나왔다. 〈카이사르 Casar〉·〈마호메트 찬가 Mahomets Gesang〉·〈영원한 유대인 Der Ewige Jud〉·〈프로메테우스 Prometheus〉·〈소크라테스 Sokrates〉·〈사티로스 Satyros〉·〈나그네 Der Wandrer〉 등이 그것이다. 〈에그몬트 Egmont〉와 〈초고 파우스트 Urfaust〉(이 작품은 1887년 우연히 발견되었음)도 이 기간에 완성되었다. 또한 프랑스 극작가 보마르셰의 주제에서 착안한 좀더 일반적인 형식의 희곡 〈클라비고 Clavigo〉와 3인의 결혼이라는 중재형식의 결말로 끝나는 비극 〈슈텔라 Stella〉(1775)도 완성했다. 오페레타 〈에르빈과 엘미레 Erwin und Elmire〉와 〈클라우디네 폰 빌라 벨라 Claudine von Villa Bella〉에는 부유한 은행가의 딸 릴리 쇠네만과의 약혼으로 고취된 전아(典雅)한 로코코풍이 다시 드러나고 있다. 릴리는 상류사교계와 어울렸는데, 그러한 사교계는 당시 이 질풍노도의 젊은 시인에게는 참을 수 없는 구속이 되곤 했다. 이 사랑의 갈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괴테는 자주 자연에서 도피처를 구했다. 그리하여 취리히 호수에서 쓴 〈호수에서 Auf dem See〉를 비롯하여, 밝고 소박한 언어에 심오한 의미가 담긴 많은 단편 서정시들을 발표했다. 1775년 11월 괴테는 바이마르로 가게 되었고, 약혼은 깨졌다.

바이마르 성숙기

바이마르 여행은 괴테의 삶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바이마르 영주 카를 아우구스트 공(公)의 초청으로 그곳에 가서, 1832년 3월 22일 생을 마칠 때까지 살았다. 이때부터는 삶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그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으며, 이를 위해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Wilhelm Meisters Lehrjahre〉(1824)에는 오랜 숙련기간이 묘사되어 있다. 또한 아우구스트 공의 요청으로 많은 공직을 수행하면서 신임을 얻었고, 마침내 소공국의 없어서는 안될 각료로서 광산 검열, 관개시설 감독, 심지어 군대제복지급안을 계획하는 일까지도 도맡아 했다.

괴테는 또한 궁정 관리의 부인 샤를로테 폰 슈타인을 만나 정열적 헌신을 통해서 성숙해갔다. 그녀는 지적 차원에서 그가 만난 최초의 여성으로 괴테의 삶에 미친 지대한 영향은 그녀에게 보낸 1,500통 이상의 편지에서 파악할 수 있다. 그녀는 괴테의 삶을 인도하는 기둥이 되어 그에게 사회생활의 미덕을 가르쳤고, 세세한 일상생활에까지 자극을 주었으며, 그의 상상력과 소망을 사로잡았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예절과 관습적인 미덕에 의해 지배되는 관계를 견지했다. 그에게 누이 이상은 결코 되지 않으려 했고 그녀가 괴테에게 요구한 승화의 감정은 "왜 당신은 우리에게 그윽한 눈길을 던집니까?"(Warum gabst du uns die tiefen Blicke?)라는 정신분석적인 탐색의 말에서부터 오레스테스의 고통 및 이피게니에에 의한 위안 등의 통찰을 가능하게 했다. 이밖에도 이러한 통찰 속에서 씌어진 작품이 바로 단막극 〈남매 Die Geschwister〉(1776)이다. 〈달에게 An den Mond〉·〈잔 Der Becher〉·〈사냥꾼의 저녁노래 Jagers Abendlied〉·〈바다여행 Seefahrt〉 등 유명하고 사랑받는 서정시들을 비롯해서 2편의 〈나그네의 밤노래 Wandrers Nachtlieder〉와 같은 뛰어난 작품들은 모두 슈타인 부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 시들과 이 시기의 다른 시들 〈인간성의 한계 Grenzen der Menschheit〉·〈물 위의 정령들의 합창 Gesang der Geister uber den Wassern〉·〈신적인 것 Das Gottliche〉·〈겨울 하르츠 기행 Harzreise im Winter〉·〈일메나우 Ilmenau〉 등에서 자연은 더이상 인간정신의 단순한 반영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무엇, 인간에게 무관심하며 거의 적대적이기까지 한 한 개념 내지 힘의 응결로 나타난다. 이 새로운 '객관성'에 관한 인식은 괴테로 하여금 더욱 과학에 몰두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워낙 다면적인 그는 원하기만 하면 〈툴레의 왕 Der Konig in Thule〉(1774)의 기분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고, 무의식적인 힘의 투영으로서의 자연을 그린 〈마왕 Erlkonig〉이나 〈어부 Der Fischer〉 같은 발라드를 쓰고 많은 종류의 징슈필(Singspiele)과 뮤지컬을 만들어서 이것들로 궁정에서 여흥을 베풀기도 했다. 〈감상주의의 승리 Der Triumph der Empfindsamkeit〉라는 논문에서는 바로 자신이 쓴 〈젊은 베르터의 슬픔〉이 주는 감수성을 풍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바이마르에서의 공직 참여나 슈타인 부인과의 사랑이 〈에그몬트〉·〈파우스트〉·〈타소〉·〈이피게니에 Iphigenie〉 등의 대작을 완성하기 위해 필요한 정신적 안정과 휴식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1786년 9월 남몰래 쫓기듯 서둘러 오랫동안 미루어온 이탈리아 여행에 나섰다. 이 도피는 죽음인 동시에 재탄생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인간과 예술가로서 새로운 부활을 모색하며 의도적으로 자신의 감성적·문학적·문화적 과거로부터 스스로를 차단했다. 한때 찬사를 보낸 고딕 양식의 우매함을 조소했고, 베로나에서는 줄리엣의 무덤보다는 박물관에 있는 그리스 묘석에 더욱 애착을 보였으며,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이나 총독의 궁전보다는 팔라디오가 지은 교회들을 찬양했다. 아시시에서는 미네르바 신전에 대한 관심으로 중세적 번영을 완전히 무시했으며, 고대세계의 수도 로마에 도착하기를 고대하였으나, 그것조차도 대그리스(Magna Graecia)와 파이스툼의 사원들의 서막으로 간주하였다. 마찬가지로 그는 시칠리아 섬의 고전적 장려함도 호메로스 세계의 서막으로 간주하여, 마침내 이 고대세계를 빼어난 단편극 〈나우시카 Nausikaa〉(1789)에서 그려냈다. 그는 그리스의 고대양식에서 인간의 원형을 모색하고 발견했듯이 이 풍경들 속에서 그러한 개념을 식물에까지 넓게 조명했다. 이러한 추구는 그의 문학작품에서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유형을 드러내는 인물들의 창조보편적이고 초시간적이면서도 극히 개별적인 방식으로 다루어지는 주제, 엄격히 규제되면서도 개인적 정열의 울림을 싣고 있는 운문들로 이어졌다.

형식에 대한 이 새로운 개념은 이탈리아에서 개작한 4편의 희곡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1790년에 출판된 〈단편 파우스트 Faust, Ein Fragment〉는 〈초고 파우스트〉의 개별적인 에피소드들을 극적인 단일성을 위해 결합하려는 시도라기보다는 작품이 궁극적으로 취하게 될 거대한 문화적 상징에의 진일보이다. 〈에그몬트〉는 실제로 운문작품은 아니지만, 밀도있는 언어의 짜임새 때문에 시극(詩劇)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마침내 그것이 음악으로 작곡되는 것은 점진적인 수렴과 주제들의 집약이 가져온 불가피한 결과라 하겠다. 이 작품에서는 개인적·정치적 문제들이 서로 혼합되어 있다. 괴테가 창조한 가장 사랑스러운 인물들인 에그몬트와 애인 클레르헨은 네덜란드 사람들의 순박한 독립심이 고양된 형태인 내적 자유를 구현한 인물들이다. 그리하여 마성적인 한 인간의 극적 묘사로 시작한 이 작품은 자유라는 이념 자체의 비극, 즉 타산이나 간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물과 사건들의 예기치 못한 연계에 의해 다스려지는 자유의 숙명에 관한 비극이 된다.

〈토르크바토 타소〉에서는 운문에서나 가능할 정도로 밀도있는 언어들이 계속 이어진다. 괴테 자신도 이 작품에 지나칠 정도로 신경을 썼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시인, 즉 인간들의 평범한 의사소통수단을 매체로 하는 예술가에 관한 희곡으로는 걸맞는 양식이다. 여기서는 비극적 갈등 자체가 다양한 언어 양태에 대한 오해로부터 비롯되며, 여기서 벌어지는 감정적 충돌도 그러한 언어의 갈등에 의한 부수적인 것으로서 제시된다. 이 작품에서 외적 행동의 빈약함은 비판을 받았지만, 이는 "사소한 고민거리도 5분이 지나면 소포클레스에 필적할 만한 주제로 만들어버린다"는 '시적 특성'을 고려할 때 정당화될 수 있다. 타소를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이기보다는 그와 그의 작품을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사회에 둠으로써, 괴테는 시인과 세계 사이의 치유할 수 없는 '간극'을 한층 날카롭게 부각시켰다. 극도의 고통마저 불멸의 시로 바꿀 수 있다는 시인 타소의 새로운 인식조차도 그러한 균열을 메꾸지는 못했다.

그리스 로마의 고대세계에 접하면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타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 Iphigenie auf Tauris〉(1787)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놀라울 정도로 근대적이고 비(非)그리스적'이라는 실러의 평은 옳았다. 〈토르크바토 타소〉와 마찬가지로 작품도 의사소통의 문제, 즉 발설한 말의 예기치 못한 위력, 나타내는 것 만큼 감추는 언어의 이중적 양태, 진실의 반대가 명백한 거짓이라기보다는 자기 은닉이 되는 점 등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또한 이 작품은 자기 자신에 대한 신화를 자신의 무의식의 반영으로 인식함으로써 그 신화로부터 벗어나려는 인간의 노력을 다루며, 시야를 새로이 조정함으로써 현재의 인간을 구속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의 연쇄를 파기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본래 그리스 비극작가 에우리피데스는 아테네 여신을 갑자기 출현시켜 작품의 결말을 이끌지만 괴테는 새로운 시각으로 화해로운 결론을 맺고 있다. 즉 그는 신탁의 말을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이 희곡은 그리스적 가치관과 그리스도교적 가치관을 종합한 것으로서 이피게니에와 디아나 여신을 동일시하여 육체적인 것을 정신적인 것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18세기 인문주의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이탈리아 기행을 통한 서정시의 가장 큰 수확은 〈로마의 비가 Romische Elegien〉(1788~89)이다. 조형적 아름다움과 대담한 관능을 표현하고 문화 유산에 대한 고양된 의식과 애욕적인 부드러움을 결합해 낸 점에서 이 이교도적이고 고도로 세련된 시들은 어떤 현대언어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다. 만일 이 시들이 바이런의 〈돈 주안 Don Juan〉의 운율로 씌어졌더라면, 아주 저속한 것들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전적 이행연구는 이 시에 감추는 듯하면서도 드러내는 심미적 거리의 베일을 씌운다. 이 비가를 탄생시킨 장본인은 하급 공무원의 딸 크리스티아네 불피우스이다. 괴테는 그녀에게 매혹되어, 결국 1788년 4월 바이마르로 돌아온 뒤 곧 동거하게 되었고 아이까지 몇 명 낳았다. 그러나 비순응주의자인 그가 사회관습인 결혼에 순응하게 된 것은 프랑스군의 침입으로 생명과 재산이 위협받던 1806년에 이르러서였다. 결혼식은 전쟁이 끝난 지 4년 뒤 바이마르 궁정에서 거행되었다.

첫번째 이탈리아 여행의 결과 괴테는 관심과 재능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화가는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꼈다. 로마의 화가 친구들과 함께 열심히 연습했으나, 그림을 통해서는 자신의 심오한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경지에 이를 수 없었고, 드문 경우를 빼고 많은 소묘들은 감수성있는 아마추어가 줄 수 있는 매력 이상의 것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시각예술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는 과학저서뿐만 아니라 문학작품에도 지울 수 없는 자취를 남겼고, 많은 미학에 관한 글과 평론을 더욱 정확하게 만들었다. 그가 마침내 모든 공직을 포기하고 자신의 재능을 문학과 과학에 바치기로 결심한 것도 이 여행에서였다.

그러나 1790년의 2번째 이탈리아 방문은 실망만을 안겨주었고, 외부세계의 혁명적 사건들로 인한 불안감은 계속 깊어졌다. 〈베네치아의 경구 Epigramme Venedig〉(1790)는 이러한 불만을 반영하고 있다. 1792년 괴테는 아우구스트 공의 불운한 프랑스 원정 때 그를 수행했는데, 이때의 체험을 〈프랑스 종군기 Campagne in Frankreich〉(1792)와 〈마인츠 공방전 Belagerung von Mainz〉으로 남겼다. 그의 자유주의적 보수주의의 입장은 저지(低地) 독일어로 쓴 풍자시를 개작한 〈여우 라이네케 Reinecke Fuchs〉와 〈독일 피난민들의 대화 Unterhaltungen deutscher Ausgewanderten〉 및 희곡작품 〈대(大) 코프타 Der Gross-Cophta〉·〈흥분한 사람들 Die Aufgeregten〉·〈시민장군 Der Burgergeneral〉에 나타난다. 이 3편의 희곡들은 예술적 가치보다는 독일 시인이 거의 쓰지 않는 정치문학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운 작품들이다. 그러나 괴테가 프랑스 혁명이라는 엄청난 현실을 불멸의 시로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혁명이 퇴조할 무렵에 이르러서였다. 프랑스 혁명은 피난민 문제를 호메로스풍으로 다룬 〈헤르만과 도로테아 Hermann und Dorothea〉의 배경이 되며, 〈서출(庶出)의 딸 Die Naturliche Tochter〉(1804)의 전체 구성을 지배한다. 3부작으로 계획되었으나 끝내 완성하지 못한 〈서출의 딸〉은 당대 최대 사건인 프랑스 혁명에 대한 괴테의 마지막 결산이었다. 그 형식적 완전함의 저변에는 혁명적 현상을 비롯해 자연적인 삶뿐 아니라 사회적·문화적 삶을 영속하는 데 있어 죽음과 파괴의 부정적 역할에 대한 깊은 우려가 깔려 있다.

실러와 고전주의 이상

괴테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뒤에 느낀 인간적·정신적 고독감은 뜻밖에도 실러를 만나면서 완화되었다. 괴테가 새로운 잡지 〈호렌 Die Horen〉(1795~97)에 기고를 요청하는 공식 청탁을 받아들인 데에 답하여, 실러는 오늘날 유명해진 1794년 8월 23일자 편지에서 놀라운 통찰력으로 괴테의 삶 전체를 요약하고 있다. 실러가 보기에 괴테는 순박한 시인의 화신이었으나 그 순박함이란 의식적인 것이었다. 감정이 성찰로 이행되고 그 성찰이 다시 감정으로 환원되는, 즉 정신의 개념이 다시금 오관의 지각으로 바꾸어지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고방식에 대한 의식적 동조는 실러의 보다 추상적인 성찰방법과는 다른 것으로, 그러한 차이야말로 그들의 풍부하고 생산적인 교류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특히 서로 끊임없이 주고받은 편지들은 독일문학의 가장 위대한 시기의 이상과 업적에 관한 귀중한 논평일 뿐 아니라 예술적 창조의 과정에 대한 놀랄 만한 통찰력을 보여준다. 이후 몇 년 동안 괴테가 쓴 작품들은 그들의 고전적 이상을 구체화하고 있다. 가장 애호되는 작품들 가운데 하나인 〈헤르만과 도로테아〉는 '내면에서부터 그리스인을 창작하려는' 그의 시도이며, 여기에서 그는 불순물이 제거된 순수한 인간성을 창조했다고 주장하였다. 등장인물들은 남녀 주인공들을 제외하고는(그들의 이름조차도 상징적이다) 자신의 고유한 이름이 없는 유형적 인물들로서, 평화와 가정과 가정적 미덕들을 수호한다. 그러나 괴테의 작품들에서 항상 그러하듯, 그들은 항상 확고한 존재들이 아니라 인간적·인도적 노력을 통해 끊임없이 발전할 필요가 있는 자들로 묘사된다. 파우스트와 트로이의 헬레나의 결합을 이교도와 그리스도교, 그리스와 독일의 융합으로 부각시킨 〈파우스트 2부 Faust Der Tragodie Zweiter Teil〉의 헬레나 막(幕)에서 괴테는 그리스 정신을 너무나도 성공적으로 그려낸 나머지, 비평가들은 만일 고전 그리스어로 번역된다면 그것은 아테네 희곡의 잃어버렸던 한 단편이라 해도 좋을 정도라고 했다.

완성 서사시 〈아킬레스 Achilleis〉는 '자기 식으로 그리스인이 되려는' 그의 마지막 시도이다. 이 시기의 다른 작품들은, 점차 자연주의적이고 경향적인 것을 요구하는 세계에서, 문학의 유일한 희망은 상징적인 방책들의 도입으로 시적 세계를 밀봉하는 데 있다는 실러의 확신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1910년에 초판본이 발견된 〈빌헬름 마이스터의 연극적 사명 Wilhelm Meisters Theatralische Sendung〉(이 작품의 사본은 1910년에야 발견되었음)은 그 주제가 삶에 대한 소명으로까지 확대된다. 예술이 진실이나 도덕성의 시녀는 아닐지라도 더 나은 인간과 더 나은 시민으로 개선시키는 데에 특별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허구적인 사실주의는 이제 추상과 융합되어, 등장인물들의 성격묘사는 심리적으로 날카롭지만 전체적인 시적 의미에 종속되어 있다. 당대 사회를 그린 소설 속에 하프 연주자나 미뇽 같은 신비롭고 매혹적인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은 자신의 소설이 '철저히 상징적'이라고 한 괴테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듯하다.

한편 실러는 괴테가 〈파우스트〉를 계속 집필하도록 권유하였으며, 이 '이방인적 작품'을 고전주의 이상과 조화시키는 데 있어서의 난점, 즉 '이념'의 중요성을 미래 예술의 선행요건인 '극'의 요소와 결합시키는 데서 생기는 어려움을 분명히 인식했다. 그러한 문제점을 강조함으로써 실러는 〈파우스트〉에서 '천상의 서곡'의 철학적인 구조뿐만 아니라 '무대 전곡(前曲)'의 허구적 구조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한 의도를 나타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파우스트 제1부 Faust, Erster Teil〉(1808)를 연애소설로 보고 그 작가를 낭만주의자로 단정하는 것은, 그 단계에서는 아직 그레트헨 비극에 나타나는 참을 수 없는 비감이 서구인의 보다 광범한 비극 속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괴테와 실러는 그들의 예술과 문학의 이상을 전달하려고 한 잡지들(괴테의 〈프로필렌 Propylaen〉지는 실러의 〈호렌〉지를 본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의 실패를 교양없는 대중들의 무관심 탓으로 돌리고는, 로마 시인 마르티알리스풍(風)으로 쓴 400여 행의 신랄한 2행연구로 된 시 〈크세니엔 Xenien〉에서 실망을 나타냈다. 그들은 비방자에 대한 보다 더 적극적인 대응으로서 뛰어난 담시들을 썼다. 이렇게 쓴 〈보물파는 자 Der Schatzgraber〉·〈코린트의 신부(新婦) Die Braut von Korinth〉·〈마법사의 제자 Der Zauberlehrling〉는 자연이 아닌 인간이 부각되었다는 점에서 초기 시들과 다르다. 또한 성찰을 위한 '해롭지 않은' 마술이 의식적·역설적으로까지 도입되었다. 괴테는 서정적·서사적·극적 요소들이 혼합된 담시에서 그가 식물세계에서 발견한 식물의 원형(Urpflanze)과 유사한 시의 원형질(Urei)을 인식하게 되었다.

낭만파와의 관계

1805년 실러가 죽자 괴테는 '자신의 존재의 반'을 잃었다고 슬퍼했으며 이 위대한 친구를 위해 〈실러의 조종(弔鐘)에 대한 발문 Epilog zu Schillers Glocke〉이라는 조사(弔詞)를 썼다. 당시의 정신적 고독감은 예나에서 번영한 낭만파와의 접촉으로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 . 사실 이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꽤 있었다. 그리스 문화를 찬양하는 책을 씀으로써 문필생활을 시작한 프리드리히 폰 슐레겔은 나아가 동양을 낭만주의 사상과 문학의 극치로 찬미했다. 한편 그의 형 빌헬름 슐레겔의 형식과 운율에 대한 깊은 관심도 괴테의 마음을 끌었다. 그러므로 괴테는, 〈빌헬름 마이스터〉에 대한 그들의 열광적인 찬사나 자신을 '이 세상 시의 부집정관'이라고 평한 노발리스의 극찬에 대해 무관심할 수 없었다. 또한 괴테는 옛 애인 막시밀리아네의 딸 베티나 브렌타노에게서도 자신의 천재성과 인본주의에 관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래서 베티나의 〈괴테와 한 소녀의 서한집 Briefwechsel Goethes mit einem Kinde〉(1835)은 그 진실성에 대한 의문은 차치하고라도, 독일문학의 애독서로 남아 있다. 괴테는 낭만파들을 형식의 미덕을 망각한 '억지 재간꾼'으로 비난했으며, 그들의 가톨릭적 경향, 맹목적인 중세찬미, 문학 장르의 구별을 모호하게 하고 예술과 삶의 경계를 혼동하려는 시도를 개탄했으나, 그는 그들이 열광한 것들을 많이 받아들였고 심지어 고딕 건축양식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심을 보였다. 그리하여 〈친화력〉에서는 '자연의 어두운 측면', 즉 화학적 세계에서 원소들이 서로 이끌려 화합물이 되듯 인간을 서로에게로 끌어당기게 하는 동물적·자기적(磁氣的) 친화력에 대한 그들의 몰두를 주제로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자연적·초자연적 힘에 대한 미신적인 맹종이나, 도덕적 책임감에 대한 비인간적 포기를 변호하지는 않는다. 징후와 예감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 후에는 가차없는 파멸이 오며, 여주인공은 성인(聖人)에 가까운 체념의 길을 선택한다. 그는 냉혹한 사실주의에 입각하여 결혼을 '불가능성의 결합'으로 그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은 '문화의 시초이자 종말'로 존재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낭만파들은 사회적 행위와 예술형식에 대한 교훈을 얻었다. 서술자는 침착한 객관성으로 작품을 이끌어 나가고 있으며, 조형미·절제·균형 등의 고전적 가치들이 터무니없을 만큼 파격적인 주제를 뒷받침해 준다.

"낭만주의는 번역이다"라는 클레멘스 브렌타노의 선언대로, 낭만파들은 세계의 훌륭한 문학적 작품들을 번역·소개하기 시작했고, 세계문학(Weltliteratur)이란 괴테가 가장 중시하는 개념 중의 하나가 되었다. 괴테의 말을 빌자면 이 세계문학의 목표는 상호이해와 존중을 바탕으로 문화를 진보시키는 것으로서, 이는 번역이나 비평(괴테가 세르비아 시를 독일인들에게 이해시키고자 한 것은 이 후자의 탁월한 예이다) 또는 상이한 문학적 전통들의 융합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뛰어난 2편의 담시 〈신(神)과 인도의 무희 Der Gott und die Bajadere〉·〈천민 Paria〉과 2편의 절묘한 연작시집 〈서동시집〉(1819)·〈중국·독일의 계절과 시간 Chinesisch Deutsche Jahres und Tageszeiten〉(1830) 등은 동서양을 결합시키려는 탁월한 시도이다. 특히 〈서동시집〉은 부드럽고 유희적·관능적·냉소적이며, 지혜롭고 변덕스러운 사랑의 모든 측면을 다루고 있는데, 그 모든 것은 그가 페르시아 시의 '지배적 정열'이라고 일컬었던 지성·영혼·위트 등 정신적 자질에 의해 빛난다. 이 당시 그의 영감의 원천이 된 여성은 친구 폰 빌레머의 부인 마리안네로서, 아마도 그가 사랑했던 모든 여성들 중 가장 만족감을 주었던 그녀는 그와 정신적으로 깊이 공감한 나머지 〈서동시집〉의 시들 중 몇 편을 직접 창작하기도 했다.

마지막 10년

노시인의 세계에 관한 통찰력은 과거에 대한 조용한 성찰로만 나타나지는 않았다. 만년에 그는 세계적인 인물이 되어 그가 살던 작은 도시 바이마르는 신·구 대륙으로부터의 순례자들의 끊임없는 행렬이 쇄도하는 성지가 되었다. 당시 방문객들은 그에게서 완고함이나 절제심보다는 오히려 부드러움, 이해심, 외부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 현재와 미래에 대한 개방된 마음가짐을 많이 엿볼 수 있었다. 이것은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 Wilhelm Meisters Wanderjahre〉(1821~29)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 소설에서는 사회적·기술적 진보에 관한 관심과, 옛 인문주의적 교양보다는 전문화된 현대에 좀더 부합되는 교육형태 및 이제는 더이상 유럽을 중심으로 하지 않는 세계에 대한 관심이 드러나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의 구성에 나타난 복잡한 주제는 미래의 나라인 아메리카로 이주하는 사람들에 대한 신식민지 계획이다("아메리카여! 그대는 더욱 풍요롭구나!"). 빌헬름 마이스터는 삶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수업시대'를 거친 후에 주어지지 않고 목표가 과정이 되고 과정이 목표가 되는 끊임없는 편력 끝에 온다는 진리를 강조하고 있다.

얼핏 보면 부제 〈체념의 사람들 Die Entsagenden〉은 기이하게도 그러한 의도적 편력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괴테에게 있어 체념은 단순히 현상에 대한 수동적 단념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삶 자체에 의해 부과된 한계, 즉 시간과 공간의 본질 및 이해관계와 잠재성의 갈등으로부터 오는 한계를 점차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이 소설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무정형성(無定形性)은 소설 제목의 2중성을 반영하고 있다. 이 작품은 두서없이 전개되며 이야기 사이사이에 끼어 있는 설화·일화·삽화·경구 등은 줄거리와는 거의 무관하나, 형식적인 시적 의미와 연관을 맺고 있다. 갈수록 상징화되어 가는 등장인물들처럼 이러한 잡다한 요소의 삽입은 인간의 체념상태의 모든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는 각각의 개인이 아니라 수많은 등장인물의 집단이 이 '총체적 인간'을 나타내며, 따라서 작품의 원칙은 시간적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기보다 공간적으로 배열되는 것이다.

〈파우스트〉도 비정형적이라는 비판을 받긴 하나 오늘날의 비평 경향은 주로 작품의 '법칙성'의 발견에 집중되고 있다. 이 작품에는 서정적·서사적·극적·오페라적·발레적 요소들이 들어 있고, 테르차 리마(terza rima 三韻句法)를 거쳐 6음보3보격(六音步三步格) 시행에 이르기까지 알려진 거의 모든 율격들이 사용되며, 그리스 비극에서부터 중세의 신비극, 바로크적 알레고리극, 르네상스의 가면극, 코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와 '영국 무대의 무모함'을 거쳐 현대적 레뷰(revue:시사풍자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체들을 보여준다. 이 모든 것은 괴테가 일관된 형식을 창조하는 데 실패해서가 아니라 이 여러 형식들을 문화적 논평의 전달수단으로 만들기 위해 사려깊게 시도했다는 점을 암시하며 그가 이러한 형식에 부여한 내용도 그 점을 입증하고 있다. 〈파우스트〉의 1부는 사실적이고, 2부(1832년 괴테 사후에 처음 출판)는 상징적인데 모두 매우 다양한 문화요소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고전적·낭만적 몽환경'(이 장면의 1827년 초판본에서 인용한 듯)에서 헬레나에 대한 파우스트의 구혼이 그녀에게 압운시(押韻詩)의 생소한 매력을 가르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가 그레트헨을 유혹하는 것은 솔로몬의 노래로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에로틱한 신비주의의 옛 전통에 바탕을 둔 것이다. 여기에서 파우스트 신화는 역사적인 가장행렬이 아니라 문화적 유산에 대한 진지하나 매우 역설적인 논평을 전달하는 매체이다. 16~18세기에서 시작되어 중세, 고대 그리스·로마를 거쳐 생명의 기원과 또 그 너머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의 영원한 원천인 '모체'(母體)에 이르기까지 파우스트의 '진행과정'은 역사적 시대의 순서를 무화시키면서, 서구문명에 공존하는 다양한 잠재적 가능성을 보여주는 드라마로써 제시된다.

파우스트는 괴테와는 달리 서로 상충되는 두 영혼과 끊임없이 탐구하는 정신을 지닌 서구인의 전형이다. 19세기에 파우스트의 끈질긴 분투는 그 자체로서도 훌륭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진보와 행동의 가치에 문득 회의하기 시작한 세대에게는 '온 인류의 행복과 재난'을 경험하려는 그의 노력에 따른 불운한 결과들이 어떤 대사의 인용할 만한 '메시지'보다도 더 크게 부각되며, 따라서 그의 궁극적인 '구원'은 의심스러워지게 된다. 그의 시선을 '더 높은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사랑조차도 그의 유한한 인간으로서의 지고의 노력이 맞이하는 역설적인 패배를 완화시키지는 못하는 것이다. 파우스트를 유혹하려는 메피스토의 갖은 노력을 물리친 그의 영혼을 높이 산다 하더라도 그가 빠져들었던 악은 용서될 수 없다. 이 '동요하는' 영혼의 방황에 동정적인 판결이 내려지기에 앞서 인간의 지혜와 고통, 인간의 순수와 경험이 결합된 중재가 필요하다. 사실 〈이피게니에〉를 빼고는 괴테의 거의 모든 작품들에서 화해로운 결말은 비극의 고통을 완전히 해소하고 있지 못하다. 비평가들은 괴테 자신의 '화해적 성격'을 언급함으로써 이러한 성격의 결말들을 변론하거나 비판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 3부작 및 4부작 형식에 대한 괴테의 애착을 비롯하여 극 자체의 구조 속에 '화해'에 상응하는 요소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는 관객에게만 유발되는 효과라고 하는 그의 비정통적 해석 역시 그러한 결말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음악의 카타르시스적 효과에 대한 괴테의 관심도 과소평가할 수 없다. 음악은 '우주의 열쇠'라고 한 낭만파 시인 노발리스와는 달리, 괴테는 음악의 이원적인 성격을 인식하였고 그 방탕한 힘에 대해서는 플라톤 만큼이나 회의적이었다. 그는 모든 예술에서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아폴로적인 것으로 순화시키려고 했다. 1828년의 〈노벨레 Novelle〉에서 아이의 피리소리로 사자를 길들이는 것은(이 주제는 이미 1797년에 실러와 함께 의논한 것이었다) 이러한 노력을 가장 감동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괴테는 자신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점차 더 음악에 몰두했다. 〈열정의 3부작 Trilogie der Leidenschaft〉(1823~27)은 18세 소녀에 대한 노인의 고통에 찬 사랑을 표현한 서정적 산물인 동시에 위안을 주고 삶을 부활시키는 '천상의 예술'인 음악의 카타르시스적 효과에 대한 찬사이기도 하다. 〈마술 피리 2부 Zauberflote, Zweiter Teil〉는 모차르트의 〈마술 피리 Die Zauberflote〉를 찬양한 작품이다. 괴테는 모차르트가 〈파우스트〉의 이상적인 작곡가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의 만년에 얻은 위안 중 하나는 작곡가 K.F. 첼터와의 깊은 우정이었으며, 첼터의 수제자 청년 멘델스존은 괴테에게 음악에 대한 즐거움과 이해를 고취시켰다.

한때 괴테는 자신의 모든 문학작품보다 과학에 관한 저술을 더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색채론 Farbenlehre〉(1805~10)에 대한 그의 애착은 부모가 문제아 자녀를 사랑하는 것과도 같은 데가 있었다. 뉴턴이 틀렸음을 입증하려는 그의 체계적인 시도에서 흠을 찾거나, 자신이 수학적으로 역부족이라고 믿는 고집이라든지, 빛은 하나이고 불가분이며 어떤 입자이론으로도 설명될 수 없다고 하는 주장에 신경질적으로 집착하는 이유를 설명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반면, 심리학적 생리학 부문의 유용성은 연구서 〈안구에 맺힌 상(像) Entoptische Farben〉과 더불어 일반적으로 인정받았으며, 역사부문은 과학사 저술에서 선구적인 작업이었다. 식물학과 생물학에 관한 그의 연구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 않다. 〈식물변태론 Metamorphose der Pflanzen〉(1790)은 모범적인 저술로, 거기 들어 있는 삽화들은 매우 훌륭하다. 식물의 모든 부분이 원형잎이 변형되어 형성된 것이라는 그의 주요명제는, 뿌리를 그의 범주 속에 넣지 않았기 때문에 연계가능영역을 비과학적으로 무시한 것으로 간주되고는 있으나,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아 왔다. 반면 원형식물에 대한 그의 가설은 오늘날 정통 식물학자들 사이에서 더이상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괴테가 처음은 아니라 해도 독자적으로 연구하여 영장류에 있는 간악골(間顎骨)을 발견(1784)한 것은 자연의 통일성과 연속성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한 성과이며, 이로 인해 후에 다윈은 그를 선구자라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과학 연구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뒷받침한 것은 발견 자체가 아니라 그 발견에 이르는 방법에 대한 통찰이었다. 괴테는 자연현상의 연구에 있어서의 정신적 과정을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단순한 관찰에서 이론의 형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단계에서 과학자가 처하게 되는 위태로운 요소들에 그처럼 생생하게 대처하거나, 가장 간단한 지각행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비의도적인 이론형성에도 그처럼 자기 인식이 가능한 사람은 드물었다. 그리고 그는 관찰현상에 대한 관찰자의 이러한 불가피한 개입에 대처하는 유일한 방법은 '세계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자아인식'을 계발하는 데에 있다는 사실을 설득력있게 말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정신작용에 대한 이처럼 철저한 인식은 그가 직접 기초를 세우고 이름붙인 학문인 형태학(形態學)에서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는 형태학을 암석·구름·색채·동물·식물 내지는 인간사회의 문화적 현상에 있어서의 형성과 변형에 대한 체계적 연구라고 정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학 연구가 결코 일반적으로 형태를 분석한 다음 수학적 용어로 전환시킴으로써 예측과 제어에 대한 측정치를 얻는 물량적 과학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일반적인 견해와는 반대로 괴테는 분석에 반대하지 않았으며, 그가 좋아하는 격언의 하나는 분석과 종합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듯이 자연스럽게 교체되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물리학에 대해 반대한 전적인 이유는 이 학문이 과학에서 절대적인 주도권을 독점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그가 지향하는 목표는 자연의 모든 질적 현상을 정립하는 데 있어 자연을 이해하고 인간적으로 보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모든 학문의 화합을, 모든 유형의 방법과 정신을 조화시키는 것을 진정으로 원했다.

전문화의 불가피한 결과인 학문의 배타적 경향에 대해 미적인 동시에 과학적인 타개책을 찾으려는 이러한 노력은 식물과 동물의 변태에 관한 2편의 비가에서 명백히 나타난다. 여기에서 괴테는 정신이 인식한 것을 상상력과 감정에 도입하려 했다. 이 비가들은 결국 철학적 연작시 〈신과 세계 Gott und Welt〉로 연결되었다. 괴테는 정통 그리스도교도는 아니었지만, 19세기 비평가들의 생각처럼 완전한 이교도도 아니었다. 세계를 창조한 후 신은 더이상 세계운행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이신론적(理神論的) 개념을 거부하였고, 오히려 스피노자의 범신론(汎神論)에 공감을 가졌다. 그러나 그의 언어가 부단히 나타내고 있듯이 그는 성서에 뿌리를 둔 그리스도교 전통의 계승자로 남았다.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중심으로부터 그는 모든 타종교들에 대해 공감어린 이해를 가지고 그것들의 개별적인 우수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공통된 근본이념을 추구했으며, 그것들을 원형종교의 다양한 표상으로 간주함으로써,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형태론적인 그의 정신적 기질을 나타내고 있다. 만유재신설(萬有在神說 Panentheism)은 내재적인 동시에 초월적인 신성(神性)에 대한 괴테의 믿음을 나타내는 정확한 용어일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어느 한 가지 사고방식에 가두기를 거부하여, 시인으로서는 다신론자이고 과학자로서는 범신론자라고 말했고, 도덕적 존재로서의 자신이 개인적인 신을 필요로 할 때는 "그 점도 역시 고려되었다"라고 하였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라는 성서 구절을 그는 그렇게 해석한 것이다.

 

평가

칼라일은 R.W. 에머슨에게 보낸 편지에서, "명랑하게 보이는 고상한 괴테가 자신의 내부에는 단테처럼 예언자적인 깊은 슬픔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괴테의 이미지를 평온한 낙천주의자에서 고통에 찬 회의주의자로 바꾸려는 많은 시도들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 쪽도 괴테를 정당하게 평가하기에는 부적절하며, 괴테는 시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현인이라고 한 T.S. 엘리엇의 결론도 그리 적절하지 않다. 이처럼 괴테를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것은, 그가 언어구사에 통달했기에 산문에서조차도 범인이 쉽게 통찰할 수 없는 이념을 표현하여 그의 글을 번역한다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의 베르터조차도 삶의 현실은 양자택일로는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를 회의주의자라고 본다 하더라도 낙관적인 회의주의자였다. 한없이 깊은 심연을 응시하면서도 생명과 빛을 의식적으로 강조했다. 그는 모든 면에서 최대한의 삶을 살면서도 교양있는 미덕을 손상시키지는 않았다. 무의식적인 정신의 풍부함을 만끽하면서도 그 자발성을 파괴하지 않고 거기에 성찰의 빛을 부여하였다. 계몽주의의 아들답게 과학의 모험에 투신하면서도, 우주의 신비 앞에서는 언제나 경외심과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괴테는 어디에서도 자신의 사고체계를 형식화하지 않았다. 칸트를 비롯한 많은 철학자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하였으나, 형이상학의 과도함과 논리학적 장광설의 무익함에 대해서는 거부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또한 그는 획일적인 입장을 취하지는 않았다. 괴테는 진실은 타협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을 포용하는 데에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대화 Gesprache〉와 더불어 그의 지혜의 총결산이라고 할 수 있는 〈경구 Maximen〉의 형식으로 나타나는데, 그 가운데에는 항상 반대되는 것을 보완할 수 있는 '짝'이 들어 있다. 그것들은 속담의 평범성과도 비슷한 무엇을 지니고 있으나, 그의 생각이 실제로 살면서 느낀 것이라는 점에서 그 평범성이란 앙드레 지드의 말대로 '비범한 평범성'이다. 그리고 실제로 괴테의 삶에는, 그의 모든 특별한 재능들에도 불구하고 비범한 평범성이 들어 있었다. 그 자신이 그 점을 '상징적'이라고 느끼고 일련의 자서전적 저서들을 통해 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오만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누구보다도 범인(凡人)이며 따라서 자신에게서 범인들이 그들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괴테는 금욕주의자도 신비주의자도 아니고, 성인이나 은자도 아니며, 돈 후안과 같은 호색한도 아니고 시인 중의 시인도 아니다. 다만 그는 '절제된 감성적 인간'의 지고한 단계에 이르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며 분투했던 것이다. 그것이 아마도 나폴레옹이 에르푸르트에서 그를 만난 뒤 "여기 인간다운 인간이 있다"라는 유명한 말을 하며 느낀 감정일 것이다. E. M. Wilkinson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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