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보슬비 > [퍼온글] 벨라스케스2 <라스 메니나스(시녀들)>


벨라스케스의 가장 유명한 그림.

이 그림에는 유독 수수께끼 같은 점이 많아 더욱 유명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림의 주체는 화가인가 시녀인가 공주인가 왕인가
미셸푸코는 왕과 왕비를 그리는 자리에 모여든 화가, 공주, 궁녀들을 보여줌으로써, 그림의 주체는 사라져 버리고 상황만 남은 것을 보여주는 그림이라고 한다.
또 곰브리치는 "벨라스케스는 카메라가 발명되기 이전에 이미 현실의 한순간을 담았다"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클림트는 "세상엔 두명의 화가가 있는데.그것은 바로.벨라스케스와 나다." 라고 했다.

  당시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와 마리아 사이에 난 어린 마르가리타 공주는, 가는 허리에 넓게 퍼진 푸른 스커트로 치장하고, 어딘가에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녀 옆에서 시녀는 무릎을 꿇고 먹을 것을 권하고 있지만 거절당한다. 그녀들 앞에는 두 난쟁이가 개를 발로 건드려보고 있으며, 그 중 하나는 그림의 정면을 묵묵하게 쳐다보고 있다. 다른 인물들은 바라보는 곳이 정확한 반면 마르가리타의 시선은 명확하지 않다. 그녀 뒤에 좀 떨어져 벽에 걸려 있는 거울을 보면 그녀 부모의 얼굴이 비치는데, 공주는 이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미술사가들의 공통된 결론이다.

  거울 속에 국왕 부처의 모습이 비치는데, 이는 원근법적으로 어색한 모양이라고 한다.(때문에 거울이 아니라, 국왕부처의 초상화라는 무리한 설도 나왔다.)  또한 벨라스케스가 지금 국왕부처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고 보기에는 캔버스가 이상할 정도로 크고, 긴장을 풀고 잡담하고 있는 수녀와 경호원이나, 놀란 듯 일어나 인사하고 있는 시녀의 모습도 맞지 않는다.  결국 명확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피카소의 <라스 메니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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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보슬비 > [퍼온글] 피테르 브뤼겔 <네덜란드 속담>



 
    귀족출신이면서 서민층의 생활을 즐겨 화폭에 담았던 브뤼겔의 유명한 작품입니다.
처음에는 정통파 풍경화가로 수련하다가 후에 풍경과 설화적 요소의 결합이라는 독특한 그림들로 후세에 유명해진 화가입니다.
    이 그림은 제목 그대로 네덜란드의 속담들을 묘사한 일종의 설화적 풍속화입니다.
.   총 85가지에 달하는 속담들을 화면 곳곳에 배치했는데 완벽한 구도미로 유명한 브뤼겔인만큼 , 이 그림 역시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는데도 조금의 혼란스러움이나 흐트러짐도 없습니다. 이는 풍경화로 다년간 수련된 그의 원숙한 기량 덕분일 것입니다.

 


한 부분만 나눠서 볼까요?  전부 다 보시고 싶으시면

http://www.nelepets.com/art/pictures/bruegel/map.html 로 가시면 됩니다.

 왼쪽 최 상단부 중 알 수 있는 것들만.

1. There the roof is tiled with tarts
타르트는 일종의 파이류인데 당시 대중적인 음식 중 하나였습니다. 
재료로 무엇이 들어가느냐에 따라 맛과 품격에 큰 차이가 있는데 서민층의 타르트라야 뻔한 것입니다. 게다가 브뤼겔의 다른 그림인 농부들의 결혼식에도 등장하는 이 과자는 일상적인 음식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음식이 지붕까지 덮혀 있다는 것은  일종의 풍족한 살림이나 지나친 탐식, 쾌락 등을 의미합니다.


2
.To marry over the broomstick
 
     동화에 나오는 마녀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유럽에서 빗자루는 일종의 악귀(evil spirit)에 감응하기 쉬운 흉물로 생각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부정한 여자'를 상징하는 물건이었으며. 요크셔에서 처녀가 빗자루 위를 뛰어 넘는 것은 미혼모가 될 것임을 의미했다고 합니다. 부정한 관계를 뜻하는 섹슈얼한 상징물로 여겨지기도 했으니, 아무튼 흉물스러운 존재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빗자루 위를 넘는 것은 네덜란드에서는 일반적인 혼례관습이었습니다. 신랑과 신부는 빗자루를 건너 뜀으로써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들에게 그들이 관습법으로 인정된 부부임을 알렸다고 합니다. 이는 집시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인데 신랑이 신부를 안고 문지방을 건너는 서양의 관습은 아마 이에서 유례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뜨겁게 키스하고 있는 둘을 보더라도 이는 막 결혼한 신혼부부를 뜻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비슷한 표현으로 jump the besom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3.
To stick out the broom

의미는 the masters are not at home : When the cat’s away, the mice will play라는군요
빗자루가 두가지 다른 속담에 연동되어 사용됐는데 저 부부가 하인들이라고 생각하면 재미있는 상황이 연상됩니다 


4.
He looks through his fingers

he can afford to be indulgent because he is sure of his profit 뭔지 잘 모르겠네요.

5. There hangs the knife
유명한 표현으로 적극적인 복수를 의미합니다.
슬픔에 젖은 눈을 돌렸더니 벽에 걸린 한자루의 칼이 눈에 들어오더라는 식이죠

6. There stand the wooden shoes 헛되이 기다리다 라는 뜻이라네요.

7.They lead each other by the nose  : they are tricking each other라는 뜻. 서로 코를 잡고 이끌다 --- > 서로 서로 속이다.

8. The die is cast  : 주사위는 던져졌다.  즉, it is decided 이건 많이 쓰는 표현이구요.

9.Fools get the best cards

11. He shits on the world : 세상을 경멸하다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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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 다른 곳에서 찾은 것들을 보면..

-기둥을 무는 사람.....광적인 신앙심의 사람..위선자를 말한다  (왼쪽 하단부의 푸른옷)

-한 손에는 물을, 다른 한 손에는 불을 나른다...... 자신의 속마음을 감춘다 (바로 그 옆의 흰 머릿수건을 쓴 여인)

-악마를 묶는 사람.......강한 여자를 뜻한다.  (그 옆의 빨간 웃옷을 입은 여인) 

  네덜란드 속담 중에는 여성에 대한 속담도 많다.  "여성이 한 명이면 큰 소음을 일으키고, 두 명이면 엄청남 혼란을 야기 시키고, 여섯이면 악마도 대항할 무기가 없다"가 그 중 하나다.  

-벽에 머리를 박는다........불가능한 일에 대한 도전 (왼쪽 하단부에 있죠?)

-한 사람은 양, 한사람은 돼지털을 깎는다.....같은 행위지만 한 사람은 이롭고, 한사람은 이롭지 않은 일을 한다. (벽에 머리 박는 사람 옆, 담벼락 앞의 두 사람. 왼쪽은 양털을, 오른쪽은 돼지털을 깎고 있습니다.)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위험한 계획에 착수한다. (담 위쪽을 보면 갑옷같은 걸 입은 사람이 냥이 목에 방울을 달고 있습니다.)  이건 잘 알려진 것.

-암탉 뒷 꽁무니 만진다......아직 낳지도 않은 알을 기대하는 김칫국부터 마시는 사람.( 갑옷 오른쪽 창문에서 몸을 내밀고 있는 남자)

-하루하루를 바구니만 들고 다닌다...... 시간낭비 (아래 중간에 문에서 바구니 들고 나오는 사람)

-한 명은 실을 풀고 한 명은 실을 감는다........악의에 찬 소문. (바구니 왼편에 앉아 있는 두 여인)

-남편에게 푸른 외투 입히기.....푸른 외투는 어리석음을 의미하므로,  남편을 교묘히 속이는 교활한 아내를 뜻한다. (중앙에 푸른 외투를 씌우는 붉은 옷의 여인)

-악마에게 촛불 바치기 .......신용할 수 없는 자(혹은 적)에게 부탁을 늘어 놓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뜻한다. (바구니 오른쪽에 푸른 옷, 붉은 모자.  벽 구멍안에 악마가 있다)

-악마에게 고백을 한다........적에게 비밀을 누설한다 (촛불 바치는 사람 오른쪽, 푸른 지붕아래 무릎 꿇은 사람)

-학과 여우의 식사.......이솝우화의 그 이야기, 손님을 초대해 놓고 빈 접시로 대접한다. (악마에게 고백하는 사람 오른쪽, 하얀 식탁보 보이시죠?)

-밥알 붙은 가마솥 주걱......남의 덕에 입에 풀칠한다. 흥부가 생각나네요. (이건 잘 안보이실 거에요. 식탁에 앉은 여우 꼬리 오른쪽에 뭔가 있죠? 그겁니다.)  

-물고기를 구을 때는 물을 발라야 한다.......불도 중요하지만, 물도 가끔 발라야 물고기를 잘 구울 수 있다. 일이 제대로 성사되려면 공을 들여야 한다. (주걱 오른쪽에 노란 윗옷의 남자 둘이 불을 피워놓고 뭔가 하고 있죠. 손에 물고기가 들려 있습니다.)

-맨손으로 물고기를 잡는다......주변머리 좋은 사람은 굶지 않는다는 뜻(역시 그 사람들인데, 왼쪽의 남자가 맨손으로 물고기를 잡아서 주면, 물을 발라 굽지요. )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먹는다 ... (그 남자 오른편 물속) 무슨 뜻일까? ㅡ.ㅡ;;

-남이 쳐논 그물 뒤에서 그물질한다......늘 남의 뒷북만 쳐서 기회를 놓친다(푸른 지붕의 바로 오른쪽, 두 팔 뻗은 남자)

-돼지 배에 칼을 찌른다.....되돌릴 수 없는 일을 한다 (돼지 저금통 배 가르는 거랑 비슷한가? ^^;; 학과 두루미 앞, 검은 개 왼쪽) 

-돼지에게 장미 뿌린다.....돼지 목에 진주. (푸른 외투 입은 남편 오른쪽, 돼지 떼와 돼지에게 장미를 뿌리는 남자) 

-소 빠진 후 구멍 메우기.........송아지 잃고 외양간 고치기 (그 남자 앞에 흰 옷 입고 삽 든 남자)

-엎은 밀가루 반죽 주워 담기.....쏟아진 물 주워 담기. (이건 오른쪽 하단 부 바퀴 바로 오른쪽, 하얀 뭔가를 쏟은 남자)

-안 닿는 음식에  손 뻗기...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뜻. ( 제일 오른쪽 하단부, 길다란 식탁 위에서 두 팔 쫙 뻗은 사람) 

-그리스도에게 수염 붙이는 수도사.....그리스도에게 아마로 된 가짜 수염을 붙이는 수도사, 위선을 말한다 (장미 뿌리는 사람 오른쪽 , 풀나무 옆에 무릎꿇고 수염 붙이는 수도사와 빨간 의자에 앉은 그리스도)

-달걀 잡느라 오리알 놓친다......할머니가 달걀을 잡고 있고, 그 앞을 발 달린 오리알이 달아나고 있다. 소탐대실하는 사람. (맨 오른쪽 중간쯤, 노란 짚으로 된 지붕 바로 밑)

-뱀꼬리 잡기.......무익한 노력 (노란 지붕 바로 위 푸른 옷을 입고 까만 실같은 거 잡고 있는 사람)

-불난 집에서 불 쬐기......기회주의자는 불 타는 집에서도 불을 쬔다 (중간에서 약간 오른쪽 윗부분에 흰 새 보이시나요? 그 바로 오른쪽이 불그스름한 불이 있고 그 앞에 사람이 있어요) 

-돼지가 밭에 들어갔는데 참새를 쫓는다......애써 모은 재산를 탕진한다(중간에서 약간 왼쪽 위 타르트가 있는 지붕 오른쪽으로 밭이 있지요. 그 곳에 돼지랑 남자가 있습니다.) 

-지팡이에 의지해 곰춤을 본다.....너무 허기져 헛것이 보인다.(맨 오른쪽 맨 위 푸른 바다 바로 아래쪽, 뭔가 까만 것 두개가 곰이구요 그 왼쪽에 남자가 지팡이에 두손을 올려 짚고 서 있습니다.)

http://www.nelepets.com/art/pictures/bruegel/map.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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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와 마녀와 옷장 나니아 나라 이야기 (네버랜드 클래식) 2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폴린 베인즈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시공주니어 / 200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나니아 이야기 중 가장 먼저 쓰여졌다. 이 책을 쓴 후, 그 앞 줄거리로 루이스가 나중에 쓴 책이 1권에 해당하는 [마법사의 조카]이다. 조지 맥도날드의 [공주와 고블린]처럼 기존의 북유럽 신화와 접목된 기독교적 색채의 동화이다.

[공주와 고블린]에서 공주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되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오해받는 미지 세계의 첫 탐험자는 여자아이 루시다. 루시가 설명해도 아무도 믿지 못하던 세계를 나중에는 모두가 체험하게 된다. 그러나 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 모두가 사자 아슬란의 선한 편을 든 것은 아니다. 그 중 하나인 에드먼드는 하얀 마녀의 속임에 넘어가 터키젤리에 영혼을 판다. 그것이 에드먼드를 대신해 아슬란이 죽어야 하는 이유가 된다. 또한 에드먼드도 죽음의 은혜를 체험하는 계기가 되어 다시 아슬란과 아이들에게 돌아오게 된다. 이 과정에서 옷장과 관련된 모든 걸 미리 알고 있는 듯한 디고리 커크 교수. 스토리로는 앞서 있고 출판은 나중에 된 [마법사의 조카]의 주인고이 될 인물이다. 이미 [1권의 디고리]가 이 책을 쓸 당시부터 루이스의 마음에 들어있었던 것 같다.

이 이야기는 사실, 강력한 예수 그리스도 구원사역과 사탄에 대한 승리의 유비이다. 악한 자의 멸망과 사랑으로 대신 죽음으로 완성되는 승리. [공주와 고블린]이 현재인 중간시대에서의 성령에 의한 승리의 비유라면, 루이스의 이 책은 역사 속의 성자 하나님이 이루신 일의 의미와 그로 인해 약속된 궁극적 승리를 보여준다. 하지만, 기독교적 의미를 생각지 않는다해도, 참사랑의 힘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동화로서, 재미와 교훈을 아울러 갖춘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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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2004-06-13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니아 이야기를 시리즈로 다 올리셨군요!
 

출처: Gerald Corey의 상담과 심리치료의 이론과 실제(Theory and Practice of Counseling  and Psychotherapy) 를 발췌하여 편집하여 요약 한 것

 

실존치료이론 

 

Victor Frankl(1905- )

 

   프랭클은 비엔나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1930년에 M.D를 그리고 1949년에 비엔나 대학에서 Ph.D를 받았다. 1928년에 그는 비엔나에 「the Youth Advisement Centers」를 세워 1938년까지 그것을 운영하였다. 그는 또 여러 군데의 임상실과 병원에서 일했다.

 

1942년에서 1945년까지 그는 독일의 아우슈비츠와 다하에 있는 포로수용소에 갇혔엇는데 이곳에서 그의 부모와 형제 그리고 부인이 죽었다. 1947년 이후 비엔나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였다. 후에 그는 캘리포니아 샌디애고에 있는 미국 국제대학의 교수로 초빙되었다. 그는 하버드, 스탠퍼드, 그리고 남부 신학대학 등에서 초청받았다.


나치의죽음의수용소에서 투옥되기 전에 실존적 접근법을 연구했지만 수용소의 경험들이 그의 관점을 확고히 해주었다. 수용소에서 그는 실존철학자들과 학자들에 의해 표현된 진리를 관찰했고 개인적으로 체험했다. 그런 진리 중의 하나로 사랑은 궁극적이며 인간이 존중해야 할 가장 높은 목표이다. 그는 인간의 구제는 사랑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확신하였다. 일상의 상황에서 우리가 선택하는 것은 수용소에서 그가 경험에 의해 확신한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는 어떤 최악의 상황에서도 인간은 정신적 자유와 마음의 독립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모든 것은 단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인간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체험으로 배웠다. 그 한가지는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자유는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 자신만의 길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는 인간존재의 본질은 의미와 목표를 추구하는것이라고 보았다. 우리는 가치(사랑이라든가 과업의 성취와 같은)를 추구함으로써, 그리고 고통을 체험함으로써 의미를 배울 수 있다.


그의 연구는 세계 각국에 번역되었고 실존치료의 발달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의 탁월한 저서<<의미에의 추구>>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이다. 실존적 접근법에는 어떤 하나의 이론설립자가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다양한 운동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프랭클을 택한 이유는 삶의 비극에 의해 그의 이론이 검증되었다는 극적인 것 때문이다.

 

1. 서 문

  실존치료는 치료의 실제에서 볼 때 지적인 접근법이며 치료자가 갖는 철학이다. 이것은 분리된 하나의 학파나 특수 기법을 가진 세련된 모형이 아니다. 이 장에서는 실존치료자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실존적 개념과 논제들을 중심으로 다루고자 한다.


  실존적 접근법은 서로 다른 두 기법 즉 정신분석치료와 행동주의치료에 대한 반동에서 발달하였다. 실존치료는 인간본질의 결정론적 ·생산적·기계론적 관점에 반대한다. 이것은 인간은 자유롭다는 가정에 기초한다. 반면에 정신분석적 관점에서는 인간은 무의식적인 힘, 비합리적인 동기 그리고 과거의 사건에 의해 인가의 자유가 제한을 받고 있다고 본다. 실존적 관점은 성장에 기초한 모형이며 병보다는 건강을 개념화하고 있다. 

 

1) 철학적 배경
  실존치료에는 많은 지류가 있다. 이 치료법은 어떤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에 의해 정립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철학의주요 성향에서 도출된 것으로 1940년대와 1950년대의 유럽의다양한 철학과 심리학, 그리고 정신의학에서 자생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고독과 소외와 무의미함 같은 삶의딜레마에 직면하도록 돕는 것이다. 치료의 기법을 발달시키는 대신에 인간의 깊은 경험을 이해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May & Yalom, 1984).


  실존적 심리학자와 정신의학자들은 19세기 초엽까지 되돌아가서 여러 철학자와 작가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실종치료의 철학적 불꽃을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도스토예프스키(Dostoevski)와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 니체(Nietzsche), 하이데거(Heidegger), 사르트르(Sartre), 그리고 부버(Buber)의 존재를 인식해야 한다.

 

 (1)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
  이 위대한 러시아의 문호는 인간은 가장 쾌락을 준다고 믿는 것에 따라 행동한다는 정교한 신념을 깨뜨렸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소심하다고 자처하는 남자와 이 세상의 성공적인 어떤 사람보다 양심적이라고 믿는 남자는 일시적인 기분에 따라 행동하거나 단지 쾌락보다 선행하는 충동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에 대해 논쟁하였다. 우리는 "가장 이익이 되는 것"에 대항해서 결정하거나 행동하기도 한다. 양심은 고통스럽고 우리를 망설이게 하지만 결국 우리의 삶에 위대한 자유를 준다.

 

(2) 키에르케고르(1812-1855)
  덴마크의 학자인 그는 불안(angst)에 대해 특히 관심을 갖고 있었다. 불안이란 덴마크어와 독일어로서 영어의 두려움(dread)와 불안(anxiety)에 해당되는 개념이다. 불안의 경험이 없으면 우리는 그저 몽유병환자처럼 삶을 살다 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 대다수 특히 청소년은 극도의 불안에 의해 참된 삶을 각성한다. 삶은 연속적인 우연이며 죽음의 확실성 외에는 어떤 보장도 없다. 삶은 결코 편안한 상태가 아니지만 인간조건에 필수적인 것이다. 인간은 던져진(projected)존재이다.

 

(3) 니체(1844-1900)
  독일의 철학자인 그는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이다라는 고대의 정의는 잘못된 것이라고 증명하였다. 우리는 합리적인 지능을 가진 존재라기보다 의지의 창조물이다. 그러나 사회는 도덕, 종교, 정치 등을 주입시킴으로써 우리를 무력하게 만든다. 만약 양떼처럼 "집단도덕성"(herd morality)을 묵인한다면 우리는 단지 어리석은 군중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권력에 대한 우리의 의지의 고삐를 풀어 놓음으로써 우리를 해방시킨다면 우리는 창조성과 공성을 가진 우리의 잠재력에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지도자 즉 "초인"(superman)이 되는 길이다.

 

(4) 하이데거(1889-1976)
  도스토예프스키, 키에르케고르, 그리고 니체에 의해 극적으로 표현된 인간존재의 주관적 경험은 20세기에 들어 현상학이라는 경험적 연구방법으로 발달하였다. 하이데거의 현상학은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우리는 세상에서 분리되어 던져진 존재가 아니다. 매일매일을 피상적인 대화와 타성으로 채우기 때문에 나날을 낭비하면서 영원히 살아가는 것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불안을 포함한 기분과 느낌들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신뢰로운 삶을 살아가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기대에 좇아 신뢰롭지 못하게 살아가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모호한 느낌을 명확히 인식한다면 우리는 살아가고자 하는 방식에 따라 삶의 문제를 보다 잘 해결하게 될 것이다.

 

(5) 사르트르(1905-1980)
  철학자이며 소설가인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위험스런 저항의 시기의 영향으로 인해 과거의 실존주의자들보다 더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을 확신하였다. "무(nothingness)라는 시존적 공간은 우리로 하여금 과거와 현재에 우리가 하려는 것을 선택할 자유를 준다. 그러나 이 자유는 직면하기 어려워 "나는 이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어. 왜냐하면 잘못된 궤도에서 태어났으니까"라든가 "나는 내 과거의 조건 때문에 변화할 수 없어"라는 식의 변명을 하게 된다. 사르트르는 이 변명들을 "잘못된 신념"(bad faith)이라고 불렀다. 내 과거가 어땠건 나는 내 의지대로 선택할 수 있으며 그래서 지금과는 아주 다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선택은 위임될 것이다. 이것이 자유의 다른 측면인 책임성이다.

 

(6) 부버(1878-1965)
  독일을 떠나 이스라엘에서 산 이 사상가는 다른 실존주의 학자들보다 덜 개인적인 관점을 갖고 있다. 그는 인간을 중간적 존재(etweenness)라고 보았다. 즉 바로 나일 뿐만 아니라 언제나 남이기도 한 존재이다. "나"란 대리인으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그것"도 되고 "당신"도 된다. 그러나 때로 나는 다른 사람을 단지 대상으로 격하시키는 실수를 범한다. 이런 경우 나는 그/그녀를 교묘히 다루고, 나처럼 자발적인 존재로서의 그/그녀의 반응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과 관계할 때 서로의 역할이나 권위의 정도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로저스와의 유명한 대화에서 부버는 치료자와 결코 같은 보조로 나아가서는 안된다고 논쟁하였다. 왜냐하면 치료자는 내담자를 돕는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관계가 충분히 성숙하면 우리는 "대화적인" 인간조건을 갖게 된다.

 

2) 세 명의 유럽의 실존적 정신의학자들
  빈스방거(Binswanger), 보스(Boss), 그리고 프랭클은 정신의학에 실존요법을 적용한 학자들이다. 비록 그들은 어떤 이념적인 응집력 있는 학파를 형성한 것은 아니지만 치료자는 선입견을 갖지 않고 실존적인 이해를 통해 내담자의 주관적인 세계에 들어가야 한다고 믿었다. 빈스방거와 보스는 하이데거의 생산적인 연구 [존재와 시간(Being and Time]의 사고에 영향을 받았다. 이것은 그들이 개인을 이해하는 데 있어 보다 폭넓은 기초를 제고해 주었다. (May, 1958).

  

 빈스방거(1975)는 치료에서의 위기는 내담자를 위한 치료법의 선택에 있다고 보았다. 처음에 그는 정신분석이 정신병환자에게 빛을 주는 이론이라는 관점을 가졌었지만 차차 실존적 관점으로 옮아갔다. 이 관점은 그로 하여금 치료자로서의 경험과 행동에 그의 관점을 지나치게 부과하는 것과는 반대로 내담자의 행동의 의미와 직접적 경험 그리고 세계관을 이해하도록 해주었다.

 

  보스(1963)도 같은 길을 걸었다. 그는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에 깊이 영향을 받았었으나 후에 하이데거에게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치료자로서의 그의 주요관심사는 하이데거의 철학적 개념을 치료에 적용하는 것이었으며 그의 책 <<현존재분석과 정신분석(Daseinanalysis and Psyhoanalysis)>>에서 보여 준 것처럼 프로이드의 방법과 하이데거의 개념을 통합시키는 것이었다.

 

  프랭클(1963, 1965, 1969, 1978)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언급한 것을 가지고 실존분석(로고테라피)이라는 그 자신의 이론을 체계화시킨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치료관점이 진공에서 발달된 것은 아니며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는 프로이드의 제자로서 정신분석적인 정신의학자로 출발하였다. 후에 그는 실존철학자들의 이론에 영향을 받아 그 자신의 실존적 철학과 심리치료를 발전시켜 나갔다. 그는 도스토예프스키, 니체, 사르트르, 하이데거를 참고하고 있다. 예를 들면 그는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단 하나이다. 나의 고통이 가치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1963)

 

  프랭클은 프로이드의 결정론적인 개념에 반대하여 자유, 책임성, 삶의 의미 그리고 가치추구와 같은 기본 개념으로 심리치료의 이론과 시제를 정립하였다. 그는 "의미를 통한 치료"를 뜻하는 로고테라피(logotherapy)를 발달시켰다. 그가 발전시킨 주제는 "의미에의 의지"(will to meaning)이다. 프랭클에 의하면 현대인은 가끔 무엇을 위해 사는지 모르는 채 그의 삶을 산다고 한다.우리 시대의 비극은 일상사에서 그리 바쁘지 않을 때 경험하는 무의미함과 "실존적 공허"(existential vacuum)이다. 치료과정은 개인으로 하여금 사람 속에서 살고, 고통을 받고, 사랑하면서 그런 것들을 통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도록 도전하는 것이다.(Frankl, 1965).

 

3) 미국에서의 실존치료
  미국에서 실존적 접근법을 주장하는 가장 탁월한 대변자는 메이(May)와 얄롬(Yalom)인데 이들의 사상이 이 장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이 나라에 실존치료를 최초로 소개한 것은 "실존 : 정신의학과 심리학의 새로운 영역"(May, Angel & Ellenberger, 1958)이었다.
  

 메이는 유럽의 실존주의를 미국의 심리치료의 이론과 실제의 주류에 옮겨 놓은 심리학자이다. 그는 시존적 관점을 발달시킬 때 영향을 주었던 철학자들의 관점을 많이 인용하였다. 특히 그는 현대의 실존적 사고의 기수인 하이데거를 신뢰하였는데 그는 실존적 정신의학자들에게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는 깊고 폭넓은 관점을 제시해 주었다.(1958). 메이는 또한 빈스방거와 보스가 실존치료에 기여한 점을 인식하였으며 특히 내담자를 대상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개인적 세계를 가진 존재로 보는 관점에 영향을 받았다. 그의 저술은 치료의 주관적 영역을 강조하는 이런 점을 반영하고 있다. 이 운동의 역사적 개관을 보다 세부적으로 아고 싶은 사람은 메이(1958)와 상의할 수 있다.
  

 보다 최근에 얄롬의 포괄적인 교과서인 <<실존적 심리치료>>(1980)는 획기적인 업적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는 여러 소설가와 철학자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였다. 그는 그의 채에서 앞서 논의된 철학자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주제를 도출하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로부터 : 창조성, 무의미성, 죽음
·키에르케고르로부터 : 창조적 불안, 절망, 두려움과 죽은, 죄의식, 무.
·니체로부터 : 죽음, 자사, 의지
·하이데거로부터 : 신뢰로운 존재, 돌봄, 죽은, 죄의식, 개인적 책임성, 고립.
·사르트르로부터 : 무의미, 책임성, 선택
·부버로부터 : 인간관계, 치료에서의 나 /당신의 관계, 자기초월(self-transcendence).

 

  그러나 얄롬은 빈스방거나 보스로부터는 별로 인용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그들의 저술이 너무 심원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의 생각이 미국의 실용주의적인 치료의 전통에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얄롬은 프랭클을 그의 저술과 임상에 영향을 준 가장 뛰어난 실용주의적 사고가라고 생각하였다.


  심리학은 오랜 동안 인간행동을 연구하는 경험적 접근법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 북미의 많은 학자들은 조작적 정의, 검증할 수 있는 가설, 경험적 데이터만이 인간행동에 대한 정보를 탐색하는 데 타당하다고 생각해 왔다. 이런 전통 속에서 엄격한 통계적 수치를 갖추지 않은 철학적 접근법은 별로 주의를 끌지 못하였다. 결과적으로 실존치료는 학문집단에서 큰 호응을 받지 못하였다. 얄롬은 실존분석을 "보다 좋은 학문적인 세계로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는 집없는 방랑자"(1980)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그는 경험이 많은 숙련된 치료자들은 그들의 이론적 태도에 관계없이 실존적 개념과 통찰을 치료에서 사용하고 있다고 보았다. 실존분석에 대한 방어에서 얄롬은 실존분석을 "이것은 역동적 접근법이다......개인의 실존에 관심을 두는"(1980)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죽음, 자유, 고립, 그리고 무의미성은 실존적 정신역동성의 핵심을 이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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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4-06-02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좋은 페이퍼를 올리셨네요. 저도 한때는 빅터 플랑클을 좋아했었죠. ^^
 

2, 주요 개념들

 1) 인간본성에 대한 관점
  심리치료에서 실존치료의 결정적 중요성은 이것이 기법으로 치료를 하려는 경향에 대한 반동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존재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데 치료의 기초를 두는 치료이다. 실존치료는 인간을 존중하는 관점에 입각해 있다. 또한 인간행동의 새론운 면을 탐색하고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다양한 새로운 방법을 탐색한다. 이것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가정에 기초된 치료로서 여러 가지 접근법을 사용한다.


  인간본질에 대한 실존적 관점은 우리의 실존이 갖는 중요한 의미는 영원히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생각에 기초해 왔다. 오히려 우리는 자신의 설계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재창조한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우리의 실존을 인식하고 만들어가는 과정인 것이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자신과 다른 사람과 세계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한다. 우리가 제기하는 특수한 질문들이 각 발달단계에 따라 다양하지만 기본 주제는 그리 다양하지 않다. 우리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나는 어디로 가는 있는가"와 같은 의문을 제기한다. 먼저 존재했던 것도 없고 주어진 의미나 부과된 의미도 없으며 이 세상에는 어떤 목적도 없다(Fischer & Fischer, 1983).


  실존적 접근법에 의하면 인간조건의 기본 영역은 즉 ① 자기인식의 능력, ② 자유와 책임,  ③ 자신의 정체감의 발견과 다른 사람과의 의미있는 관계의 정립 ④ 의미·목적·가치·목표의 추구, ⑤ 삶의 조건으로서의 불안, ⑥ 죽음과 무의식등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2) 전제 1 : 자기인식의 능력
   인간존재로서 우리는 자기인식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반성할 수 있고 선택을 할 수 있다. 인식이 넓어질수록 자유의 가능성도 커진다.  그래서 인식을 넓히는 것은 삶을 완벽하게 사는 능력을 성장시키는 것이다. 인간실존의 핵심이 되는 인식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들을 자각하게 해준다.

 

·우리는 유한하며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한다.


·우리는 어떤 행동을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을 잠재적 능력을 갖고 있다. 행동을 취하는 것은 하나의 결정이다.


·우리는 자신의 행동을 선택한다. 그럼으로써 우리 자신의 운명을 부분적으로 창조할 수 있다.


·의미는 자동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이 추구한 산물이며 독특한 목적을 창조하는 것이다.


·실존적 불안은 근본적으로 우리 자신이 자유를 가졌다는 자각이며 삶의 본질적 부분이다. 유용한 선택에 대한 자각이 늘수록 이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감도 는다.


·우리는 고독과 무의미와 공허감, 죄의식 그리고 고립감을 경험하도록 운명지워져 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혼자이다. 그러나 다른 존재와 관계할 기회를 갖고 있다. 

 

3) 전제 2 : 자유와 책임
  우리는 본질적으로 자유로우므로 삶을 이끌어 갈 책임을 수락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이 사실을 피하려 할 것이다. 사르트르(1971)가 말했듯이 우리는 끊임없이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선택의 문제에 직면하며, 실존한다는 것은 이같은 선택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사르트르는 우리가 선택하는 것을 "관여"(commitment)라고 했는데 실존적 죄의식은 관여를 회피하거나 선택하지 않아야 할 것을 선택한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선택이다."(We are our choices)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에서 자유라는 것과 인간존재는 그 의미가 같다. 사르트르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자유롭도록 운명지워진 존재이다. 인간은 자신의 생애와 생활 그리고 실패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갖고 있다. 자유와 책임은 병행한다.이런 관념을 언급하면서 러셀(1978)은 책임의  정의는" 작자"의 개념을 포함한다고 하였다. 우리는 자신의 운명과 삶의 상황과 문제를 스스로 결정한다는 의미에서 삶의 제작자이다. 다른 삼을 계속 비난함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수용하지 않는 내담자는 치료에서 효과를 얻을 수 없다. 책임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변화의 기본조건이다.(Yalom, 1980).


  프랭클(1978)도 역시 자유와 책임의 관련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the Statue of Liberty on the East Coast"는 "the Statue of Responsibility on the West Coast"로 대치되어야 한다고 익살스럽게 시사하였다. 프랭클의 기본전제는 자유는 어떤 제한에 의해 묶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조건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자유는 그런 제한에 저항한다. 궁극적으로 이들 조건은 우리의 결정에 달려있다. 우리에게는 책임이 있다.

 

4) 전제 3 : 정체감의 추구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사람은 그들의 고유성과 중심성을 유지하는데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사람이나 자연과 관계를 갖고 싶어한다. 우리 각자는 자기를 발견하려 한다. 즉 자기의 정체감을 발견하려고 한다. 이것은 자동적인 과정이 아니며 용기가 필요한 과정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주어야 하며 그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많은 실존작가들이 고독, 뿌리가 뽑혀 나간 것같은 허탈감, 소외 등을 논의하는데 이런 것들은 다른 사람이나 자연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데 실패한 결과이다. 이런 실패는 산업화와 도시화 사회에서 개인에게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으며 고독에서 도피하려는 절망적인 몸부림으로 개인은 고독한 군중 속에서 타자지향적인 사람이 되어 간다(Riesman, Reuel & Glazer, 1950). 내적 공허감과 텅빈 느낌, 존재에 대한 자기인식의 결여의 결과로 개인은 익명의 군중 속으로 자신을 가라앉히려고 한다.
  

 우리의 대부분이 겪는 고통은 외계의 중요한 타인으로부터 지시와 대답과 가치, 신념을 추구하는 데 있다. 우리 내부에서 스스로 자신을 찾으려는 믿음이나 삶의 길에서 대답을 찾으려는 믿음보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됨으로서 우리를 팔아버린다. 우리의 존재는 그들의 존재에 뿌리를 두게 되므로 우리는 더욱 자신에게 낯설게된다.

 

(1) 존재하고자 하는 용기
  우리의 존재의 핵심을 발견하거나 내면으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배우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Tillich, 1952). 우리는 존재의 내부 깊숙이 있는 핵심을 발견하고 창조하고 유지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내담자의 가장 큰 두려움은 그가 자신에게 핵심이 없고 자기가 없으며 실체감이 없고 단지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그대하는 것을 반영하는 존재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내담자는 "내 두려움은 내가 아무것도 아니고 내게는 정말 아무것도 없으며 자기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거예요. 나는 빈 조개껍데기, 내부가 텅빈 공허, 그리고 만약 나의 가면을 벗긴다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라고 말할 것이다.


  실존적 치료자들은 내담자들에게 자신들을 다른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의 총체에 불과하다고 느끼는지 또는 그저 단지 부모의 투사물이나 대체물로 느끼는지를 명확히 인식하도록 하기 위해 질문을 시작할 것이다. 그들은 지금 어떻게 느끼는가? 이런 식으로 영원히 머물러야 될 운명인가? 출구가 있는가? 그들은 만약 자신이 진정한 자기가 아니었다는 것을 발견한다면 자기를 창조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은 어디로 갈 수 있는가? 일단 내담자가 이 두려움을 인식할 용기를 보이면 그것을 언어화하고 치료자와 공유하려고 한다. 나는 그들이 자신의 바깥에서 살았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중심으로부터 길을 탐색하도록 이끄는 것이 치료의 시작에서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2) 외로움의 경험
  실존철학자들은 외로움을 경험하는 것은 인간존재의 한 부분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자신을 들여다 보고 고독감과 분리감을 느껴 보는 경험에서 힘을 끌어낼 수 있다고 강조한다. 분리의 감각은 자신 외에는 아무에게도 의존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 할 때 생겨난다. 즉 혼자서 자신의 삶에 의미감을 부여해야 하며 어떻게 상아야 하는 가를 결정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혼자일 때 스스로 견뎌낼 수 없다면 어떻게 타인들에게 친구가 되어 누군가를 풍요롭게 해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과 어떤 견고한 관계를 갖기 전에 먼저 자신과 견고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자신에게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곁에 서기 전에 먼저 홀로 설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홀로인 동시에 다른 사람과도 관계되어 있다는 명제는 본질적으로 역설이다. 우리가 인간조건을 고칠 수 있다든가 그것이 고쳐져야 한다든가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혼자이다.

 

(3) 관계의 경험
  인간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의지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세계에서 의미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하며 다른 사람의 존재가 우리의 세계에 중요하다고 느끼고 싶어한다. 혼자 설 수 있을 때, 자신의 힘으로 깊숙이 침잠할 수 있을 때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우리의 내부에 자리를 잡으며 박탈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개인적으로 박탈감을 느낀다면 다른 사람에게 매달리는 기생적이며 공생적인 관계밖에는 기대할 수 없다.


  치료의 기능의 하나는 내담자가 다른 사람에게 신경증적이고 의존적인 애착과, 치료자와 내담자 양쪽 모두가 고양되는 치료관계와를 구별하도록 돕는 것이다. 치료자는 내담자가 그들의 관계에서 무엇을 얻는지, 친숙한 접촉을 어떻게 회피하는지, 동등한 관계를 어떻게 방해하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치료적이고 건강하며 성숙한 인간관계를 맺는지 검토하도록 내담자에게 촉구할 수 있다.

 

5) 전제 4 : 의미의 추구
  인간의 특성 중 가장 뚜렷한 것의 하나는 삶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삶의 목적을 위해 힘쓰는 것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의미와 개인적 주체성을 추구한다. 
나의 경험으로 보면 치료자와 치료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의 근본적인 갈등은 "내가 왜 여기에 있는가? 내가 나의 인생에서 얻으려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인생에 의미를 주는 것은 무엇인가? 인생에서 의미의 근원은 무엇인가?"와 같은 실존적 문제로 집약될 것이다.


  실존치료는 치료자가 내담자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짐으로써 내담자가 자신의 인생의 의미에 도전하도록 돕는 개념적 체계를 제공할 수 있다. "당신의 삶의 방향을 좋아하는가? 현재의 당신과 형성되어 가고 있는 당신에 대해 만족하는가? 이상적 자아에 더 가까워지기 위해 어떻게 하고 있는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는가? 만약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에 대해 혼동하고 있다면 분명한 해답을 하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

 

(1) 인습적인 가치관을 버리는 문제
  치료상의 문제들 중의 하나는 대체시킬 다른 절절한 가치관을 발견하지 못한 채 전통적인 가치관, 자기에게 부과된 가치관을 버리는 것이다. 내담자가 실제로 도전받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내면화 할 수 도 없었던 가치관을 버리고 이제 공허해 한다면 치료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내담자는 자신을 "키"없는 배와 같다고 느끼면서 자신의 새로운 측면에 적합한 새로운 지침과 가치관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당분간은 그것들 없이 지내게 될 것이다. 이런 경우 치료과정에서의 과업은 아마도 내담자의 존재방식과 일치하는 생활방식에 기초한 가치체계를 창조하도록 내담자를 돕는 데 있을 것이다.


  치료자의 역할은 의미있는 삶을 제공해 줄 수 있는 가치체계를 내담자 스스로 그의 내부에서 찾아낼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내담자는 확실한 가치관이 없기 때문에 괴로워할 것이며 불안스러워할 것이다. 내담자에 대한 치료자의 신뢰는 새로운 가치의 근원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을 내담자가 갖고 있다고 내담자 스스로 확신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2) 무의미성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끼면 내담자는 어려운 투쟁을 계속하는 것이 가치있는지 심지어는 사는 일이 가치있는지까지도 회의하게 된다. 죽음에 직면할 때 우리는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걸까, 결국 죽어야 할 것이 아닌가? 일단 내가 죽으면서 내가 한 모든 것들은 잊혀질 것이 아닌가? 죽음이  확실히 주어졌다면 왜 나는 하찮은 일들로 바빠야 하는가?"와 같이 스스로 묻는다. 우리 집단 중의 한 남자는 인간 개인의 존엄성을 간명하게 파악하고 있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내 자신이 마치 급히 넘겨진 책 속의 한 페이지 같다고 느꼈어요. 그리고 아무도 그 페이지를 힘들여 읽으려 하지 않았어요."그런 무의미성을 프랭클(1978)은 현대의 삶에 잇는 실존적 신경증이라고 보았다.

 

(3)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기
  로고테라피는 시람들이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을 도와주도록 고안되었다. 삶의 의미성에 도전하다는 것은 인간존재의 표지이다. "의미에의 의지"(the will to meaning)는 개인의 기본적인 추구이다. 삶이란 그 자체로 의미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의미를 발견하고 창조하여야 한다.(Frankle, 1978). 우리 자신의 의미를 창조하는 과제는 삶이 게속되는 한 결코 끝낼 수 없다.


  치료자의 기능은 내담자에게 그들의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내담자가 고난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발견 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해 주는 것이다.(Frankle, 1978). 이 견해는 실존주의 철학은 염세적 경향을 지니지 않았으며 고난에 직면한다 할지라도 개인이 취하는 자세에 따라 삶의 고난(삶의 비극적이며 부정적인 측면)은 성취로 변형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프랭클은 인간은 고통, 죄의식, 저망, 죽음에 직면할 수 있으며 일단 그것에 직면하면 그 절망에 도전하여 승리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의미란 우리가 직접 찾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성적으로 그것을 찾으면 찾을수록 우리는 더욱 그것을 잃는다. 얄롬(1980)과 프랭클은 쾌락처럼 의미도 완곡하게 추구되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참여"(engagement)의 부산물인데 그 참여란 창조하고 사랑하고 일하며 삶을 정립해 가는 것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6) 전제 5 : 삶의 조건으로서의 불안
  생존하고 유지하며 자신을 주장하기 위한 개인적 열망이 일어날 때 우리는 인간조건의 필수적 부분으로 불안에 직면하게 된다. 실존치료자들은 정상적 불안과 신경증적 불안을 구분하는데 그들은 불안을 성장의 잠재적 근원으로 본다. 정상적 불안은 직면한 사건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다. 나아가 이런 종류의 불안은 억압되어서는 안되며 변화의 동기로 사용되어야 한다. 이것은 보통 의식되지 않으며 개인을 활성화시켜 준다. 왜냐하면 우리는 불안이 전혀 없으면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상적 불안을 제거하는 것은 치료과제가 아니다. 불안이 없다면 삶은 영위될 수 없으며 죽음 또한 직면될 수 없다.


  어떤 종류의 정상적 불안, 실존적 불안의 구조적 형태는 우리가 점차 자유를 인식해가고 그 자유를 선택하거나 거부했을 때 생기는 결과를 인식해 가는 것 같은 인간 성장을 위한 자극제가 된다. 사실 우리가 자신을 재구성하겠다는 결정을 하면, 이때 수반되는 불안은 변화의 준비가 되었다는 지표이다 그 신호는 건설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것이 잘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그런 신호의 미묘한 내용을 들을 수 있다면 우리는 감히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을 것이다.


  상담을 원하는 내담자의 대다수는 불안을 근절시킬 해결첵을 원한다. 환상을 만들어 불안에서 도피해 보려고 하지만 우리가 환상을 만들어 불안에서 도피해 보려고 하지만 우리가 확고한 안전성을 찾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우리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삶을 구축함으로써 불안을 줄이고 선택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를 연다는 것은 불안이 열리는 것을 의미하며 간헐적 불안에 과도한 대가를 치르기도 한다.


  자신에 직면하려는 용기를 가진 사람도 때로는 당황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불안을 기꺼이 가지려는 사람은 개인치료에서 좋은 결과를 얻는다고 확신한다. 너무 빨리 편안해지려는 사람은 잠시의 휴식을 가질 수는 있지만 결국은 옛날 방식에 고착되어 좌절을 경험한다.


  메이(1981)에 의하면 자유와 불안은 같은 동전의 양면이다. 불안은 새로운 생각이 떠오를 때 수반되는 흥분과 비슷한다. 그래서 우리는 잘 아는 영역에서 나와 미지의 영역으로 들어갈 때 불안을 느낀다. 불안에서 도피하기 위해 우리 대부분은 미지의 세계로의 도약을 회피한다. 메이는 이것을 " 우리는 모험을 하지 않으면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즉 자유를 묶음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어떤 생각이 의식수준에 도달하기 전에 불안 때문에 그들의 영감을 잠가 버리기 때문에 가장 창조적인 생각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고 표현하였다.(1981). 

 

7) 전제 6 : 죽음과 무에 대한 인식
  실존주의자들은 죽음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인간조건으로서 삶에 의미를 주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인간존재의 특성은 미래의 실재성과 죽음의 불가피성을 파악하는 능력에 있다. 만약 삶을 의미있다고 생각한다면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만약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실재에 대항해 방어한다면 삶은 어리석고 무의미해진다. 그러나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인식하면 우리의 과제를 완성하는 데 영원한 시간이 주어진 것이 아니므로 따라서 현재의 순간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죽음에 대한 인식은 삶에 향기와 맛과 창조성을 제공하는 근원이 된다. 죽음과 삶은 상호의존적이며 비록 육체적 죽음이 우리를 파괴한다 하더라도 죽음의 관념은 우리를 구제한다.(Yalom, 1980)


  죽음에 대한 인식은 심리치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기가 없는 삶의 유형을 보다 신뢰로운 삶으로 옮겨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Yalom,1980). 그래서 실존치료에서는 내담자가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하는 정도를 탐색하는 데 중점을 둔다. 죽음이 주는 과거와 현재의 위협에 대한 고정관념이 없어지면 죽음에 대한 인식을 할 때 자신이 어떻게 잘 살았으며 삶에서 무엇을 변화시키고 싶어했는지를 평가해보는 건강한 감각으로 무를 수용할 수 있게 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삶에 대한 두려움은 상호관련적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두팔을 벌려 삶을 완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불안스럽게 다가온다. 그러나 만일 가능한 한 최대로 현재의 삶을 긍정하며 살아가도록 노력한다면 삶의 종말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삶도 두려워한다. 결코 참된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에 직면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무로 된다는 사실을 부정하려고 한다. 그러나 무와 직면하는 데서 도피하려고 하면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 메이는 이것을 "죽음을 부정하는 데 대해 치루어야 하는 대가는 막연한 불안과 자기소외이다."라고 말하였다.(May,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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