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팡세>의 원전에 대해 

근래에 와서 인간 파스칼에 대한 연구 못지 않게 <팡세>의 원전에 대한 연구가 크게 진전을 보여, 파스칼의 자필초고의 해독이나 어구의 교정이 거의 완벽에 가까울 만큼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파스칼을 연구한 사람들을 괴롭혀 온 <팡세>의 편찬방법의  문제에 대해서도 많은 것이 밝혀졌다.


       파스칼이 죽은 직후에 발견된 초고가 단편적이었기 때문에 이것을 한권의 책으로 출판하기 위한 방법에 대해 처음으로 <팡세>를 출판한 포르 르와얄 판 간행 위원회에서 많은 논의를 거듭했지만, 결국 위원회가 채택한 것은, 많은  초고 중에서 비교적 명료하고 완성된 것을 골라 같은 주제에 관한 것을 동일한 제목 아래 정리하고, 그 밖의 별로 명료하지 못하거나 지나치게 미비한 것은 모두 삭제하는 방법이었다.


       그리하여 이 포르 르와얄 판은 1670년 파리에서 간행된 후 1761년 마지막 판에 이르기까지 거의 개정되지 않았다.  18세기 말옆에 와서 포르 르와얄 판의 분류를 무시한 새로운 <팡세>가 몇 가지 나왔으나 편찬 방법에는 다른 면모를 보이지 못했다.  그 후 반 세기가 지나 지금까지 간행된 <팡세>와 파스칼의 자필 초고 사에에 어구상 차이가 있는 것을 지적하고, 원전 비평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후로, 파스칼의 연구가들은 직접 초고 원문의 충실한 재현에 힘써, 1844년부터 1897년 사이에 다섯 종류의 <팡세>가 출판되었다.  또한 이 책 첫머리에도 언급한 바와 같이 1904년에는 브랑슈비크가 19세기에 있었던 운전비평의 성과를 토대로 새로운 <팡세>를 내놓았는데, 그는 초고 원본과 사본에 있는 <팡세>의 단장을 모두 수록했다.  그는 출처가 분명한 단장을 내용에 따라 14개의 주제 아래 정리하여 편찬하는 방법을  채용했다.  이 <팡세>에는 내용적으로 연관성이 있는 단장들이 서로 한군데로 몰려있기 때문에, 20세기 전반에 널리 유포되어 오늘날 <팡세>의 장구를 인용할 때의 번호는 일반적으로 브랑슈비크 판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그 후에도 1925년부터 1947년 사이에 각각 특색있는 몇가지 새로운 <팡세>가 출판되었는데, 주로 제 1일 사본의 분류에 따라 <팡세>의 신판을 편찬하고, 파스칼 자필의 초고에서 지워 버린 곳이나 다시 쓴 것, 또는 가필한 곳을 활자로 구별하고 있다.  그리하여 초고의 해독이 정확하고 교정이 엄정한 점에서 <팡세>의 원전 연구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


       <팡세>의 초고 원본은 파리의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여기 포함되어 있는 초고의 대부분은 물론 파스칼 자신이 직접 쓴 것이지만, 다른 사람의 필적이 약간 섞여 있고, 후에 파스칼 자신이 부분적으로 가필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제 1 사본도 1795년에 파리의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었다.  이 제 1 사본과 초고 원본을 비교해   보면 구성의 순서가 다르고 또 수록한 단장도 모두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이 제 1 사본 이외에 제 2 사본도 파리의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것은 제 1 사본이 작성된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초고에서 배낀 것으로 보인다.  구성순서는 제 1 사본과 다르지만, 단장의 수는 후에 다른 사람이 추가한 것을 제외하면 제 1 사본과 거의 같다.


       그리하여 근래에 와서는 가장 완벽에 가까운 <팡세>를 편찬하기 위해 세가지 원전을 모두 동원하고 있다.  즉 초고 원본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판독한 것을 토대로 하여 제 1 사본의 순서대로 단장을 배열하고, 제 1 사본에 빠진 초고 원본 중의 단장을 거기에 추가하고, 다시 제 2 사본에 따라 단장을 보충하는 방법이 그것이다.

 

출처 http://www.peaceone.net/fram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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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의 삶
 

 

1623년

6월 19일, 프랑스의 오베르뉴 주 클레르몽에서, 세무관리인 아버지 에티엔느 파스칼과 어머니 앙트와네트 베공 사에에서 태어남

1625년  (2 세)

누이동생 자크린느가 출생, 이 밖에도 파스칼에게는 누나 질베르트가 있었음.

1626년  (3 세)

어머니 사망.

1631년  (8 세)

아버지가 세무관리직을 사임하고 파리로 이주.

1635년 (12세)

아카데미 학자들과 대화를 시작.

1639년 (16세)

<원추곡선시론(圓錐曲線試論)> 발표.

1645년 (22세)

3년간의 연구 끝에 계산기를 제작함.

1646년 (23세)

새로이 종교에 눈을 떠 이른바 '제 1의 회심'에 이름.

1647년 (24세)

데카르트의 방문을 받음.  논문 <진공에 관한 새로운 실험>을 발표.

1648년 (25세)

<액체 평형에 관한 실험담> 발표.

1651년 (28세)

아버지 사망.

1652년 (29세)

누이 동생 자크린느가 포르 르와얄 수도원에 들어감.

1653년 (30세)

<유체 균형론>(1663년 출판), <기중론(氣重論)>(1665년에 출판) 두편의 논문 집필.

1654년 (31세)

<산수 삼각론>(1665년에 출판) 집필.  11월 23일 밤 10시 30분과 12시 30분에 성령의 감화를 받음.  이 경험을 기록한 <비망록>을 양피지에 써서 죽을 때까지 옷 속에 꿰매어 간직함.  이것을 파스칼의 '제 2의 회심'이라고 함.

1656년 (33세)

<프로방시알>의 <제서간(諸書簡)> 발표.

1657년 (34세)

<은총론>(1779년 출판) 및 <기하학의 원리> 집필.  <기독교의 변증론> 구상.

1658년 (35세)

<사이클로이드에 관한 회장(回章)> 발표.

1659년 (36세)

건강이 약화되어 휴양.

1660년 (37세)

<기독교의 변증론>, <병의 선용을 기원하는 기도> 및 귀족의 신분에 관한 3개의 논문 집필.

1662년 (39세)

8월 19일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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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성개선론

                   스피노자, 대양서적, 1981년.

 

 

 

 

 

그의 철학의 서론격인 이 책에서 그는 그의 탐구의 배경과 방향을 밝힌다. 인생이 허망함을 알았기에 궁극적 행복을 지속적으로 줄 무언가를 찾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그 방법으로 그는 1. 사물의 제1원인 찾기, 2. 수동감정의 극복과 조절, 3. 신체적 단련을 목표로 한다.(신학정치학) 이 일에 가장 선행하는 것은 그에게 지성의 개선이다. 1.허위를 감별하고 2. 탐구의 법칙을 정하고 3. 질서를 유지해가며 4. 완전관념으로 정진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1과 2에서 이 글을 멈추고 말았다. 3이야 그의 [생활수칙]대로 1. 속인에게 맞추어 이야기하기 2. 건강유지할 정도의 쾌락즐기기 3. 관습존중할 정도의 돈과 기타물건 추구로 이해하면 되지만 4에 대한 언급없이 이 글은 남았다. 혹자는 공통통념의 발견이 더 이상 스피노자로 하여금 [지성개선론]의 기하학적 존재의 관념에 머무를 필요가 없게 되어 [지성개선론]을 새로 써야했기 때문이라하고,  다른 사람들은 서론의 역할인 이 글이 [에티카]로 발전되어 갔으므로 구체적 언급은 필요없었다고 하기도 한다. 어찌되었든 그의 철학의 목표와 방법론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책은 [에티카]의 이해에 꼭 필요한 책이다.

에티카든 지성개선론이든 그는 그의 이성으로 신을 이해하리라 믿었다. 데카르트보다 한걸음 더 나아갔고, 철학의 위안이 궁극적 위안이 될 수 있으리라는 점에서는 보에티우스보다 또 한걸음 더 나아갔다. 그에 대한 혹독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신흥계급은 그의 이런 추구를 지지했고 한편으론 이용했다. 유태인으로 그를 이해하는 것도 17세기 사상흐름의 한 지식인으로 이해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는 위로를 자기 안에서 찾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인정받고자 했던 처절한 투쟁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찾을 수 없었던 것 같아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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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bertas 2004-11-25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피노자는 결코 자신안에서 위로를 찾는 자기 위안자는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카를님은 자기의식에 대한 집착이 강한것 처럼 보이는군요. 스피노자에게서 자기의식에 대한 관념은 상당히 미미하게 보이거든요. 제 생각에는 그는 자의식을 하나의 상상으로 생각했든 것 같습니다.


자기의식은 데카르트의 징표이지요. 스피노자가 데카르트의 영향하에 있었다는 건 부정하기 힘들지만 놀랍게도 그는 자기의식의 함정에 빠지지는 않았든것 같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그는 反데카르트적인 사유를 할수 있었을겁니다. 그게 그의 장점이기도 하구요. 한편으로는 헤겔이 스피노자에 대해 가진 양가적 평가의 원인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전 스피노자의 삶에서 별로 슬퍼보이는 점이 없거든요. 상식과는 달리 스피노자은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별로 주저함이 없었고 고립되어 있지도 않았거든요. 세계와의 고립, 이건 솔직히 스피노자와는 별로 연결이 안되는 신화이지요. 스피노자는 세상과 교통하기를 멈추지 않았고 그가 거주하든 모든 곳에서 결코 소외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가 다락방에 쳐박혀 있었다면 그건 자의에 의한 것으로 스스로 고독을 원했기 때문일겁니다. 그건 카를님도 종종 원하고 바랬든 그런 상황이겠지요. 스피노자의 삶을 보면 전 별로 측은하지 않습니다. 그는 항상 행복했을거 같으며 누군가 그에게 붙여준 '聖 스피노자'란 칭호에 걸맞는 삶을 누렸다고 생각합니다.


지성개선론에 관해서 말하자면 전 그의 청년기의 모습을 보는 듯 합니다. 글의 첫 부분은 상당히 인상적인 자서전적 서술로 시작합니다. 그것에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마세요. 그건 데카르트의 글도 대개는 그렇듯 자서전적인 서술로 시작합니다. 즉 새로운 철학을 하고자 했든 그 시대 문체의 한 특성이라고 생각하세요. 물론 보여지는 금욕적 문맥이 감동적이기는 하지만, 스피노자는 결코 금욕주의자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보기엔 상당한 금욕주의자로 보이지만, 스피노자 자신은 자신을 결코 금욕주의자로 생각하지는 않았을걸로 생각됩니다.


지성개선론이 개진하는 철학적 의미는 결국 에티카와 연결되고 복잡한 논의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이런 글에서 더 이야기 하는건 별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에티카에 대한 카를님의 서평에 댓글을 달았다가 이렇게 여기까지 오게 되어 간단한 글을 남기고 갑니다. 그럼...^^



건데 절 아시나요? 제 변변찮은 댓글에 지성개선론에 대한 평까지 부탁하셔서 조금은 당황스러워서요...^^

카를 2004-11-25 0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긴 덧글 감사합니다
 
탈무드 - 종교신서 2
마빈 토케이어 / 지성문화사 / 198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일본에서 랍비로 일하고 있는 마빈 토케이어가 발췌한 탈무드의 몇 이야기들을 탈무드의 마음, 귀, 눈, 머리, 손, 발이라는 큰 제목하에 일본어로 출간되었던 것을 번역한 것이다. 이 책 이외에도 대부분 그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탈무드가 이 일본어판이다.

이 책에는 그외에도 [續 탈무드]라고 하여 구약성서에 대한 유태인의 관점을 소개하는 성서의 빛, 맛, 향기, 영향이 같이 포함되어있다. 탈무드와 함께 유태인의 사고의 축을 개괄하기에는 좋은 묶음인듯 하다.

유태인의 현실적 사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 그들의 자부심과 피해의식이 그대로 곳곳에 묻어나오는 책이다. 이 책으로 탈무드나 구약성서를 모두 이해하리라는 것은 지나친 기대이다. 이윤기의 그리스로마신화처럼 유태인을 이해하는 서론이나 실마리(clue)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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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4-08-20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춘기 때 한번 읽은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하나도 기억에 없네요. ㅜ.ㅜ
 

스피노자의 진화 (≪지성개선론≫의 미완성에 관하여)

  

 아베나리우스는 세가지 국면들을 구별하면서 스피노자의 진화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소론≫의 자연주의, ≪형이상학적 사유들≫의 데카르트적 이신론, 그리고 ≪에티카≫의 기하학적 범신론(주1). 데카르트적 시기와 이신론적 시기가 존재했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맨 처음의 자연주의와 최후의 범신론 사이에는 주목할만한 강조점의 차이가 있다. 이 문제로 돌아가면서 마르샬 게루(Martial Gueroult)는 ≪소론≫이 신=자연이라는 등식에 기반하고 있는 반면에 ≪에티카≫는 신=실체라는 등식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론≫의 일차적 테마는 모든 실체들이 하나의 똑같은 자연에 속한다는 것인데 반해, ≪에티카≫의 일차적 테마는 모든 자연들이 하나의 똑같은 실체에 속한다는 것이다. ≪소론≫에서, 사실 신=자연이라는 등식은 신이 그 자체로 실체인 것이 아니라 모든 실체들을 표현하고 통일시키는 "존재"라는 것을 함축한다. 대조적으로, ≪에티카≫에서 신과 실체의 동일성은 속성들이나 성질이 부여된 실체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것, 그리고 항상 자기-원인화의 특성(property)을 즐긴다는 것을 수반한다. 자연주의는 의심할 여지 없이 강력하긴 하지만, 그러나 ≪소론≫에서 그것은 속성들에 기반한 자연과 신간의 '상응(coincidence)'인 반면, ≪에티카≫는 실체들의 일자성(oneness) (범신론)에 기반하여 실체적 동일성을 증명한다(주2). ≪에티카≫에서는 자연의 대치가 있다. 즉 자연과 신의 동일성은 능산적인 것(the naturata)의 내재성과 소산적인 것(the maturans)의 내재성을 더욱 잘 표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정교화되어야만 한다.


이처럼 범신론의 절정 단계에서 우리는 철학이 스스로 신 안에 즉각적으로 거주하고 있으며 신과 더불어 시작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해서, 이것은 합당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소론≫의 진실이다 : ≪소론≫은 신과 더불어, 신의 존재와 더불어 시작한다 ― 단지 그 결과, 즉 첫째 장과 두번째 장 사이의 진보에 있는 단절을 겪기 위해서. 그러나 ≪에티카≫에서, 혹은 이미 ≪지성개선론≫에서, 즉 스피노자가 자신의 배열에 따라 연속적인 발전의 방법을 취했을 때, 그는 신과 더불어 시작하는 것을 사려깊게 피하고 있다. ≪에티카≫에서 그는 모든 속성들에 의해서 구성된 실체로서의 신에 도달하기 위해서 주어진 실체적 속성들로부터 출발한다. 따라서 그는 여전히 아홉가지 정리들을 요구하는 이런 지름길을 스스로 발명하면서 가능한 한 빨리 신에 도달한다. 그리고 ≪지성개선론≫에서 그는 "가능한 한 빨리" 신의 관념에 도달하기 위해서 주어진 참된 관념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스피노자가 신과 더불어 시작했어야 했다고 믿곤 하기 때문에 최고의 주석가들도 ≪지성개선론≫이라는 텍스트의 차이들과 스피노자의 사유에 있어서의 비정구성들을 추측한다(주3). 사실, 가능한 한 재빠르게 신에 도달하는 것, 그러나 즉각적으로 신에 도달하지는 않는 것은 ≪지성개선론≫과 ≪에티카≫ 모두에 있어서 스피노자의 정의적 방법의 부분이다.


우리는 ≪에티카≫의 발전에 있어서 빠름, 느림, 머뭇거림의 이러한 물음들의 일반적인 중요성을 기억하고 있다. 커다란 상대적 빠름은 처음에는 실체로서의 신의 관념에 도달하기 위해서 필요하게 된다. 그리고 나서 모든 것은, 항상 필수적인 계기들에서 새로운 가속이 생산될 때까지 확장되고 느려진다(주4). ≪에티카≫는 때로는 빠르게 흐르고 때로는 느리게 흐르는 하나의 강이다.


스피노자의 방법이 종합적이고 구성적이며 진보적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은 원인들에서 효과들로 나아간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마치 마술에 의한 것처럼 스스로를 원인에 정립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고유한 질서'는 원인에서 효과들로 나아가지만 그러나 우리는 고유한 질서를 즉각 따라갈 수는 없다(주5). 종합적으로는 물론이고 분석적으로도, 우리는 명백하게 효과 혹은 적어도 '주어진' 효과의 지식과 더불어 출발한다. 그러나 분석적 방법이 단순히 사물의 조건으로서의 원인을 추구한다면, 종합적 방법은 조건화(conditioning)가 아니라 오히려 발생을, 즉 우리에게 다른 사물을 알게끔 해주는 충족이성을 추구한다. 이런 의미에서, 원인의 지식은 완전하다고 말해질 수 있으며, 그것은 가능한 한 빠르게 원인에서 효과들로 나아간다. 처음에는 종합은 가속화된 분석적 과정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 분석적 과정은 종합적 질서의 원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만 사용된다. 플라톤이 말했듯이, 우리는 '가설'로부터 출발해서 결과들이나 조건들을 향해서가 아니라, 이로부터 모든 결과들과 조건들이 뒤따라 나오는 '비가설적(anhypothetical)' 원리를 향해 나아간다(주6).


그러므로 ≪지성개선론≫에서 우리는 이로부터 모든 관념들이 뒤따라 나오는 신의 관념에 도달하기 위해서 '주어진' 참된 관념, 즉 모든 참된 관념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에티카≫에서 우리는 실체에 도달하기 위해서 모든 속성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로부터 모든 사물들이 뒤따라 나오는 실체적 속성으로부터 출발한다. 문제는 이러한 두가지 출발점들을 면밀히 주시하고 ≪에티카≫와 ≪지성개선론≫의 차이의 정확한 본성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제 ≪지성개선론≫는 이러한 관점에서 꽤 분명해진다. 우리가 가정을 경유해서 이로부터 출발하게 되는 주어진 참된 관념은 기하학적 존재자의 관념인데, 정확하게 말해서 그러한 존재자들은 단지 우리의 사유에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 거기로부터 출발하면서 우리는 발생적 요소에 도달하는데, 이 발생적 요소로부터 출발하는 특성만이 아니라 모든 다른 특성들도 뒤따라 나온다 : 즉, 우리는 원의 종합적 정의에 도달한다("한 점은 고정되어 있고 나머지 부분들은 움직일 수 있는 것의 선이라고 기술된 모습"; 선과 운동의 결합속에 존재하는 종합은 우리 자신의 사유역량보다 더 우월한 사고역량으로서의 신을 지시한다)(주7). ≪에티카≫가 어떻게 나아가는지를 보도록 하자. 우리가 가정을 경유해서 이로부터 출발하는 속성, 혹은 성질이 부여된(qualified) 주어진 실체는 공통 통념에서 파악되며, 거기로부터 우리는 충분한 종합적 설명, 즉 하나의(single) 실체 혹은 신의 관념이 모든 속성들을 파악하며 이로부터 모든 사물들이 뒤따라 나온다는 설명에 도달한다(주8). 그러므로 문제는 이러한 두가지 출발점들, 즉 기하학적 존재의 관념과 속성의 공통 통념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아는 것이다.


사실 공통 통념은 ≪에티카≫의 특별한 기여인 것처럼 보인다. 이것들은 이전 저작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문제는 이러한 새로움이 단지 말만의 새로움인지, 혹은 결과를 수반하는 개념의 새로움인지를 아는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모든 존재하는 사물은 본질을 가지지만, 그러나 그것은 또한 특징적 관계들도 가지고 있는 바, 이러한 관계들을 통해서 그것은 존재에 있어서 다른 사물들과의 구성에 들어가거나 다른 사물들 속에서 분해된다. 공통 통념은 정확하게 여러가지 사물들 사이의 관계들의 구성의 관념이다. '연장'의 속성을 생각해 보자. 그것은 그 자체의 본질을 가졌지만 그러나 그것이 공통 통념의 대상이라는 의미에서 그런 것은 아니다. 연장 속의 신체들은 또한 그 자신들이 본질들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공통 통념의 대상이라는 의미에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연장의 속성은 또한 이것이 그 본질을 구성하는 실체에 공통된 형태이며, 또한 이것이 그 본질들을 포함하는 모든 가능한 신체들이다. 공통 통념으로서의 연장의 속성은 어떤 본질과도 혼동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신체들의 구성의 통일을 고안한다; 모든 신체들은 연장 속에 있다. ... 똑같은 추론이 보다 제한된 조건들을 유지한다: 어떤 주어진 신체는 어떤 다른 신체와의 구성으로 들어가며, 구성적 관계 혹은 두 신체들의 구성의 통일은 부분들의 본질로도 전체의 본질로도 환원될 수 없는 공통 통념을 정의한다 ; 예를 들어, 나의 신체와 특별한 음식 사이에는 무언가 공통이 있다. 그래서 공통 통념은 두가지 문턱들, 즉 모든 신체들에 공통되는 최대치의 문턱 그리고 적어도 두가지 신체들, 즉 나의 신체와 또 다른 신체에 공통된 최소치의 문턱 사이에서 진동한다. 바로 이 때문에 스피노자는 가장 보편적인 공통 통념과 가장 덜 보편적인 공통 통념을 구별한다(주9). 그리고 ≪에티카≫에서 자연이 획득하고 있는 특권적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 관계들의 이러한 구성 혹은 구성의 이러한 통일은 모든 신체들 사이에, 어떤 특정한 수의 혹은 어떤 특정한 유형의 신체들 사이에, 특별한 신체와 어떤 다른 신체 사이에 공통된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줄 것이다. ... 공통 통념은 항상 그것의 관념인데, 이 속에서 신체들은 다른 신체들에 동의한다; 신체들은 이런 혹은 저런 관계들 하에서 동의하는데, 이러 저러한 관계들은 신체들의 변양하는 수들 사이에서 정립된다. 이런 의미에서 정말로 자연의 질서가 있는 것인데, 이는 단지 모든 관계들이 다른 관계와의 구성에 들어가기 때문만은 아니다 : 즉 가장 보편적인 통념들에서 가장 덜 보편적인 통념들로 나아가며 또 그 역도 성립하는 관계들의 구성의 질서가 있다.


≪에티카≫의 공통 통념의 이러한 이런은 적어도 네가지 관점에서 볼 때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그 대상이 존재하는 신체들 간의 관계의 구성인 공통 통념은 기하학적 개념들을 여전히 방해하는 모호성들을 제거한다. 사실, 공통 통념은 기하학적인 이데아라기 보다는 물리-화학적 혹은 생물학적인 이데아이다 : 공통 통념은 그 다양한 측면들에서 자연의 구성의 통일을 표현한다. 만일 공통 통념이 기하학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실재적, 물리적, 존재하는 존재들 사이의 실재적 관계이다. 이와는 달리 기하학적인 존재에 관계하는 이전의 저작들에서는 많은 모호성이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후자는 추상적, 혹은 허구적인 것으로 남았다...(주10). 그러나 일단 스피노자가 공통 통념의 지위를 정의하자마자 이러한 모호성들이 설명된다. 기하학적 개념은 추상적 관념이거나 이성의 존재자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한 공통 통념의 추상적 관념이기에, 따라서 이러한 공통 통념을 묘사함으로써 우리는 또한 그것[기하학적 개념]을 추상화를 통해 작동하도록 만듬으로써 기하학적 개념에 영향을 주는 제한으로부터 기하학적 방법을 자유롭게 한다(주11). 공통 통념 덕분에 기하학적 방법은 무한한 것에 적합하게 되며, 실재적이거나 물리적인 존재자들에 적합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성개선론≫과 ≪에티카≫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자는 남아 있는 모호성들과 더불어서 기학학적 개념들에 의존하는 반면, 후자는 새롭게 고립된 공통 통념에 의존한다.


또한 지식의 종류들의 분류화와 관련되는 커다란 차이가 결과한다. ≪에티카≫에서 공통 통념은 이차적 종류의 지식을 정의하는 적합한 관념이다. 대조적으로 ≪소론≫에서 혹은 여진히 ≪지성개선론≫에서도 지식에 있어서의 이러한 두번째 종류의 것에 상응하는 것은 올바른 믿음으로서 혹은 명료하지만 적합한 지식은 아닌 것으로서 정의되며, 그것은 추상화를 경유해서 나아가는 추론이나 연역으로 이루어진다. 결과적으로, 최고의 혹은 세번째 종류의 지식의 갑작스런 출현은 ≪소론≫과 심지어 ≪지성개선론≫에서도 신비에 가리워져 있다. 이와 반대로 ≪에티카≫에서 공통 통념의 엄격한 적구성은 두번째 종류의 정구성만이 아니라 세번째로의 이동의 필연성을 보증한다. 두번째 종류의 지식의 이러한 새로운 지위는 ≪에티카≫ 전체를 통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것은 이전의 저작과 비교해 볼 때 가장 실체적인 변양화이다. ≪에티카≫에서 말해진 두번째 종류는 매우 다양하고 심지어 예측불가능한 절차들을 합병하는 것(incorporate)을 멈추지 않는다. 관계들의 구성의 영역에서, 이성은 단순히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 물리-화학적이고 생물학적인 실험(experiments)의 프로그래밍의 모든 자원이다. (예를 들어, 동물들 사이에서 동물들의 구성의 통일에 관계하는 탐구)(주12) 이제 이것이 일어났을 때, 즉 ≪에티카≫가 공통 통념이론을 해명할 때, 공통통념 이론은 절차들의 다양성을 고려하지 않는 두번째 종류의 지식의 정구성과 적구성을 보증한다. 왜냐햐면 어떤 경우에서도 우리는 "실재적 존재자에서 또 다른 실재적 존재자"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번째 종류에서 세번째 종류로 나아가는 방식을 고려해 보자. ≪에티카≫에서 이 점과 관해서는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두번째 종류의 지식과 세번째 종류의 지식은 적합한 관념의 체계이지만 그러나 이것들은 서로와 매우 다르다. 세번째 종류의 관념은 본질의 관념, 속성들에 의해서 구성된 실체의 내적 본질의 관념이며, 속성들에 개입된 양태들의 특이한(singular) 본질이다; 그리고 세번째 종류의 관념은 본질에서 본질로 나아간다. 그러나 두번째 종류의 관념이 관계들의 관념, 즉 존재하는 속성과 그 무한한 양태에 의해 형성된 가장 보편적인 관계이자 속성에서 존재하는 이러저러한 양태에 의해서 형성된 가장 덜 보편적인 관계들이다. 그러므로, 속성이 공통통념으로서 봉사할 때, 공통 통념으로서 이해된 것은 그 본질에 있어서는 물론이고 그것이 적용된 양태의 본질들에 있어서도 이해되지 않으며, 단지 그것이 그 본질을 구성하는 존재하는 실체들에 공통된 형태로서만, 그리고 그것이 그 본질들을 포함하는 존재하는 양태들에 공통된 형태로서 이해된다. 그러므로 본질들의 어떤 것도 알지 못함에도 공통 통념으로부터 출발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공통 통념으로서의 속성으로부터 출발하며, 우리는 필연적으로 본질들의 지식으로 나아간다. 그 방식은 다음과 같다. 적합한 존재자(비록 이것은 그 자체로 어떤 본질도 구성하지 않지만), 공통 통념은 필연적으로 우리를 신의 관념으로 끌고 간다. 이제 신의 관념은 공통 통념 자체가 아니다. 비록 그것이 필연적으로 공통 통념에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관계들의 구성이 아니라 구성으로 들어간 모든 관계들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신의 관념은 우리로 하여금 두번째 종류에서 세번째 종류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일면적으로 대면한 공통 통념과 일면적으로 대면한 본질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주13).


그러므로 우리가 공통 통념을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모든 것이 명확해진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즉각적인 경험이 우리에게 이런 신체나 저런 신체의 효과를 부여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신체들을 구성하는 관계들을 부여하기 때문에, 어떻게 우리는 공통 통념 그 자체를 형성할 수 있는가? 설명은 ≪에티카≫에서 늦어진다. 우리가 경험 속에서 우리의 것에 동의하지 않는 신체와 마주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슬픔(우리의 행위의 역량의 감소)을 촉발시키는 효과를 가진다. 이 경우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공통 통념을 형성하도록 하지는 못하는데, 이것은 두 신체들이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지 그것들이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우리가 우리의 신체에 동의하는 신체와 마주친다면, 그리고 우리에게 즐거움을 촉발시키는 효과를 가진 신체와 마주친다면, 이러한 즐거움(우리의 행위 역량의 증대)는 이러한 두가지 신체들의 공통 통념을 형성하게끔, 즉 그것들의 관계들을 이루며 그것들의 구성의 통일을 인식하라고 설득할 것이다(주14). 이제 우리가 충분한 즐거움을 가지고 선택했다고 생각해 보자. 공통 통념의 우리의 기술(art)은 그러한 것, 즉 심지어 불일치의 경우에도, 우리는 신체들 사이에 공통된 것이 무엇인가를, 구성의 충분히 넓은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예를 들어 모든 가능한 신체들의 공통 통념으로서의 연장의 속성)(주15). 이런 방식으로, 공통 통념의 실천적 형성체의 질서는 가장 덜 보편적인 것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반면에, 그것들의 이론적 설명의 질서는 오히려 가장 보편적인 것에서 가장 덜 보편적인 것으로 나아간다. 이제, 왜 ≪에티카≫에서는 이러한 설명이 그렇게 늦게 나타났는가를 우리가 묻는다면, 그 이유는 제 2부의 설명(exposition)이 여전히 공통 통념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데 있어서 이론적인 것이기 떄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실천적 상황에서, 그리고 그 기능에 있어서 공통 통념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가에 관해서 우리는 제 4부의 후반부에까지도, 그리고 그 축약된 형태에 도달하기 까지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공통 통념이 우리의 역량과 관련한 실천적 이데아라는 것은 분명해진다. 단지 관념과만 관계하는 그것의 설명(exposition)의 질서와는 달리 그것들의 형성의 질서는 어떻게 정신이 '그 정서들을 질서화할 수 있고 그것들을 함께 연결시킬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정서와 관계한다. 공통 통념은 예술(Art)이며, ≪에티카≫ 자체의 예술이다. 선과의 만남을 조직하고, 현실적 관계들을 구성하며, 역량을 형성하고 실험한다.


그러므로 공통 통념은 철학의 시작과 관련해서, 기하학적 방법의 범위에 관련해서, ≪에티카≫의 실천적 기능 등등과 관련해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그리고 공통 통념은 ≪에티카≫ 이전에는 결코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스피노자의 최종적 진화를 기록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며, 동시에 왜 ≪지성개선론≫이 미완성된 채로 남아있는가를 결정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렇게 멀리까지 요청된 이유는 자의적인 것 (시간의 부족?)인가 아니면 모순적인 것(그 실행이나 적용으로부터 분리된 방법의 유용성? 그러나 ≪지성개선론≫ 자체는 그렇게 추상적인 어떤 것도 시도하지 않았다)인가? 현실적으로,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지성개선론≫의 비완성에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공통 통념을 발견하고 발명했을 때 스피노자는 ≪지성개선론≫의 입장이 여러가지 측면에서 부적절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전체 저작이 수정되거나 개작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지성개선론≫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 점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다른, 미래의 논고를 선언하고 있다(주16).


그리고 이러한 가설을 그럴듯하게 만드는 것은, ≪지성개선론≫ 자체에서, 스피노자가 존재하는 텍스트의 말미를 향해가면서 공통 통념의 명확한 암시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스피노자가 본질들과 혼동되는 것이 아니라 법칙들을 포함하고 있는 "고정되고 영원한 사물들의 계열들"에 대해서 말하는 유명하고도 난해한 구절은 존재하는 존재자들에게 적용되며, 후자의 지식을 구성한다. 이제 공통 통념만이 영원한 존재의, 그리고 '계열들'을 형성하는 이러한 이중적 성격을 가지는데, 왜냐하면 여기에는 관계들의 구성의 질서가 있기 때문이다(주17). 우리는 그러므로 공통 통념의 발견이 ≪지성개선론≫의 편집판의 말미에 출현하며, ≪에티카≫의 시작 부분에서 나타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약 1661-1662년 경에. 그러나 왜 이러한 발견이 스피노자로 하여금 ≪지성개선론≫의 이미 존재하는 견해를 포기하도록 만들었던 것일까? 이에 대한 설명은 공통 통념이 그 기능들을 충족시킬 수 없거나 그 결과들을 발전시킬 수 없을 때에 출현한다는 것이다. 공통 통념은 ≪지성개선론≫의 텍스트에는 상대적으로 너무 늦게 발견된다. 공통 통념은 철학을 위한 새로운 출발점을 정립한다. 그러나 출발점은 이미 기하학적 관념에 장착되었다. 공통 통념은 존재하는 것의 지식의 적합한 양식을 결정하며, 어떻게 우리가 이러한 지식의 양태에서 궁극적인 양태, 즉 본질들의 지식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러나 지식의 양식들은 이미 ≪지성개선론≫에서 규정되었기에 공통 통념이나 고정되고 영원한 사물들의 계열들이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며, 따라서 이러한 것들은 본질들의 지식과 더불어 지식의 궁극적 양식으로 넘겨지게 된다(주18). 간단히 말해서, 공통 관념들에게 그들의 자리와 기능을 부여하기 위해서, 스피노자는 ≪지성개선론≫ 전체를 필연적으로 다시 써야만 했다. 그것은 단지 완성된 부분을 무효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변양시키는 것이었다. 스피노자는 공통 통념의 관점에서 ≪에티카≫를 다시 쓰고 싶어했다. 비록 그것이 ≪에티카≫에서는 상응하는 실험과 더불어 기원, 형성체, 이런 공통 통념의 계열들에 관계하여 윤곽만 묘사된 실천적 문제들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논고를 연기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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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Avenarius, Uber die beiden ersten Phasen des Spinozische Pantheismus..., Leipzig, 1868.

≪소론≫ 2장의 전체 운동은 자연과 신간의 상응의 발견을 내포한다. (그리고 부록은 또 다시 이러한 '상응'에 호소한다. 정리 4, 보충을 참조). ≪에티카≫에서는 이러한 관계들은 하나의(single) 실체로부터 파생된 증면된 동일성이다: Ⅰ, 14("이로부터 뒤따라 나오는 것은 ... 자연 안에는 오직 하나의 실체만이 있다는 것이며, 그것은 절대적으로 무한하다는 것이다"). ≪소론≫과 ≪에티카≫간의 이러한 차이에 관해서는 Gueroult, Spinoza, Aubier, Ⅰ, 특히 부록 6을 참조하라. 게루가 지적하듯이, 스피노자의 자연주의를 표현하는 구절은 ≪에티카≫라는 텍스트의 Ⅳ부, 머리말에 실린 '신 즉 자연(Deus sive Nature)'에서 나타날 뿐이다.

≪지성개선론≫의 다음 부분을 참조하라. "그러므로 처음에 우리는 가능한 한 빨리 가장 완전한 존재의 지식에 도달할 때 최대한의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49). "그러나 만일 우리가 가능한 한 곧 제일 원리로부터, 즉 자연의 원천과 기원으로부터 시작한다면, 우리는 모든 기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된다"(75). "가능한 한, 어떤 특정한 존재가 존재하는지를 우리는 물으며, 존재하는 어떤 종류의 존재가 모든 사물들의 원인이 되는가를 요구하며 또한 이성은 이것을 묻는다"(99). 이 마지막 문장은 일반적으로 번역자들에 의해 왜곡되어 왔다. 그리고 빈틈이 46에서 상상되었다. Vrin edition, pp. 104-105에서 Koyr 가 시작한 주장을 참조하라. 그러나 ≪지성개선론≫은 물론이고 ≪에티카≫는 절대적인 것에 도달하기 이전에 최소한의 시간의 필연성을 강조한다. 확실히 우리는 ≪에티카≫의 출발점 역할을 하는 실체들 혹은 실체적 속성들이 이미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것에 대해서 반대할 수 있다. 그러나, 첫번째로 우리는 아직 이것을 알지 못하며 단지 정리 10에서만 그것을 배울 뿐이다. 두번째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에티카≫의 시작부분은 속성들의 그것들의 본질(세번째 종류의 지식)에서 파악하지 못하며 이것들을 단지 '공통통념들'(두번째 종류의 지식)으로서만 고려한다. Ⅴ, 36, 주석에서 스피노자의 주장을 참조하라.... 우리는 ≪신학정치학논고≫에서 다음의 주장을 볼 수 있다: '신의 존재가 자명하지 않다면, 그것은 그렇게 확고하고 반박불가능하게 참인 관념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추론되어야만 한다. ...'. 이것은 엄격하게 말해서 ≪에티카≫와 일치하고 있다.

예를 들어 4부는 증명의 가속화된 혹은 재촉된 운동으로서 나타난다. 우리는 4부가 단지 개요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상은 그 증명들이 이전의 부(part)와 동일한 리듬을 갖지 않고 있으며, 이것들은 응축과 분출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사실, 4부는 지식의 세번째 종류, 일종의 폭발(fulguration)을 끌어들인다. 여기에서 그것은 마치 ≪에티카≫의 시작부분에서 그러하듯이 가장 커다란 상대적 빠름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세번째 종류의 지식에 상응하는 절대적인 속도의 문제이다.

이것은 스피노자가 ≪지성개선론≫, 46에서 말한 것으로, 여기에서 빈틈이 있다고 추정할 근거는 하나도 없다.

플라톤, ≪국가≫, Ⅵ. 510과 이후를 참조하라. 피히테에 관한 책에서 게루는 종합적 방법이 그 자체로 하나하나의 요점에 대해 분석적 방법에 반대하기 위해 제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석적 방법을 그 자신의 목적에 종속시키면서 분석적 방법을 통합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지적한다(L'Evolution et la structure de la doctrine de la science chez Fichte, Les Belles Lettres, vol. Ⅰ, p. 174). 우리는 피히테의 심오한 스피노자주의를 상기시킬 것이다.

≪지성개선론≫, 72-73, 95-96.

≪에티카≫, Ⅴ, 36, 주석을 참조.

≪신학정치학 논고≫, 7장. ≪에티카≫에서는 Ⅱ, 37-38 (가장 보편적인 것)과 39 (가장 덜 보편적인 것)에서 공통 통념에 관한 설명을 발견할 수 있다.

기하학적 존재자들(entities)의 모호한 본성에 관해서는 게루, Spinoza, vol Ⅰ, 부록 11을 참조하라.

Tschirnhaus에게 보내는 편지 83은 기하학적 방법의 한계가 방법 자체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고려하는 사물의 추상적 성격 때문에 생긴다고 긍정한다. 그리고 ≪지성개선론≫은 이미 시정의 진실한 진보를 방해하는 기하학적이고 논리적인 개념의 자리에 '물리적 사물들 혹은 실재적 존재들'을 집어넣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표현하고 있다(99).

심지어 단순한 내적 본질들과는 달리 이것은 세번재 종류의 직관을 지칭하며, 구성할 수 있거나 분해할 수 있는 관계들은 모든 유형의 과정들(두번째 종류의 지식)을 지칭한다. 우리는 구성의 관계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아프리오리한 지식도 갖고 있지 않다. 이 관계들은 실험을 요구한다. 만일 우리가 스피노자의 계승자를 찾아헤맨다고 한다면 우리는 Geoffroy-Saint-Hilaire, 혹은 더 완화된 기반 위에서는 괴테를 포함시켜야만 할 것이다. 이들은 '연결관계의 원리'에 의해 알려진 구성에 관한 자연의 통일(Nature's unity of composition)과 관계하는 탐구에 착수했다. 이제 이러한 탐구는 상상적인 것들을 포함하여 모든 종류의 실험과 변이들을 내포한다. 예를 들어 '주름'이라는 것에 의해 우리는 하나의 동물에서 다른 동물(aminal)로 넘어가며 동물적 존재의 각 유형들은 동물(Aminal) 그 자체의 실현이거나 혹은 이러저러한 관계 하에서 동물의 실현이다. 오늘날 분자생물학은 해부학적인 수준에서는 물론이고 이미 미립자(particles)적 수준에서 Geoffroy에 의해 제기된 (그리고 '가장 단순한 신체들'의 수준에서 스피노자에 의해 제기된) 구성의 통일성이라는 이러한 실험적 문제를 떠맡았다. 스피노자에게 실험은 ≪에티카≫에서는 물론이고 ≪지성개선론≫의 마지막 부분에서 출현하고 있는 예감(presentiment)의 형태에서도 매우 특수한 역할을 맡는다. 즉 간단하지만 강렬하게 실험을 요구한다(103). Jules Lagneau는 스피노자가 ≪지성개선론≫을 끝맺지 못한 이유는 '그가 실험적 방법을 응용하고 시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C l bres le ons et fragments, P.U.F., 2nd edition, p. 52). ≪에티카≫에서 나타나는 실험이라는 프로그램은 또한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이 공통통념들의 발견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공통통념들은 우리에게 신의 관념을 부여한다: Ⅱ, 45-46. 그러나 신의 관념은 그 자체로 공통통념들과 구별된다: Ⅱ, 47. 그러므로 신의 관념은 두가지 측면들을 가질 것인데, 이것은 5부에 표현되어 있다(두번째 종류의 냉정한impassive 신, 세번째 종류의 사랑하는 신).

≪에티카≫의 대부분은 공통통념들과 두번째 종류의 지식의 관점에서 쓰여졌다. 스피노자는 이를 Ⅴ, 36, 주석과 41, 증명에서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세번째 종류의 지식은 단지 5부에서만 나타나는데, 이것은 세번째 종류의 지식의 상이한 리듬과 운동을 설명하고 있다. 게다가 그것은 단지 Ⅴ, 21과 더불어서만 표현되고 있다. 이제 신의 관념이 우리에게 세번째 종류의 지식으로 넘어가게끔 하는 것이며, 혹은 그 '기초'로서 작동하는 것이다(Ⅴ, 20, 주석).

≪에티카≫, Ⅴ, 10, 증명.

≪에티카≫, Ⅴ, 10, 주석(과 6, 주석).

≪에티카≫, Ⅱ, 40, 주석 1을 참조. 스피노자는 공통통념들에 관해 일군의 논리적이고 방법론적인 문제들을 요약하면서 그가 이전에 했던 것을 분명하게 배제한다. 그러나 그는 또한 미래의 논고를 언급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Tschirnhaus에게 보낸 편지 60에서 스피노자는 ≪지성개선론≫의 몇몇 주제들을 상기시키면서 시작하는데, 이것에 다음을 덧붙인다: "운동과 방법에 관련되는 당신의 다른 질문들에 관해서는, 이것들에 관한 나의 고찰은 아직 마땅한 질서로 쓰여지지 못했으며, 그래서 저는 다른 때로 그것을 유보하고 싶습니다."

≪지성개선론≫, 99-101을 참고. 이러한 "고정되고 영원한 사물들"은 스피노자가 공통 통념이라고 부른 것과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속성들 그리고 무한양태들과 동일시되어서는 안된다. 그러한 해석은 동시에 너무 광범위한 것이자 너무 협소한 것이기도 하다. 속성들과 무한양태들이 여기서 단지 정확한 의미에서 (가변적인 특이한singular 사물들에의 적용, 즉 공통 통념으로서의 그것의 사용) 개입하기 때문에 너무도 넓다. 그것의 "계열"에 있어 공통 통념은 또한 단지 두 가지 신체들에게만 공통되는 것의 관념을 포함하기 때문에 너무도 협소하다.

현실적으로, 스피노자는 고정되고 영원한 사물들이 우리에게 사물들의 내적인 본질들의 지식을 부여한다고 말하는 동시에 또한 그것들은 가변적으로 존재하는 존재들과의 관계에서만 의미를 가진다고 주장한다(≪지성개선론≫, 101). 이런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여기에서는 ≪에티카≫에서 두번째 종류의 지식과 세번째 종류의 지식으로 구별하고 있는 것을 혼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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