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순수이성비판-형이상학의 기초

순수실천이성비판-도덕형이상학의 기초


1 도덕에 대한 평범한 이성 인식에서 철학적 이성 인식으로 넘어감

-인간은 도덕이성을 갖고 있다

 행복은 본능이 가장 안다

 행복보다 가치있는 다른 의도가 있다는 이념이 감추어져 있다.

 이성의 진정한 사명은  자체로 선한 의지를 만들어내는

 의무란 법칙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어떤 행위를 밖에 없는

 실천적 판단능력은 평범한 인간이성안에서도 훌륭히 일을 수행한다.

 경향성과 이성 사이에서 자연의 변증법이 생겨 경향성을 옹호한다

 이것에서 지키기 위해 실천철학을 필요로 한다

2 대중적인 도덕 철학에서 도덕 형이상학으로 넘어감

-의무의 근거는 자율성에서 나온 정언명령
 

[의무이기에 한다] 것은 경험되어지느냐가 아니라 이런 명령이 존재한다는 것이 중요

 의무의 지시를 내리는 근거는 순수하게 이성에 바탕을 선험적인 도덕 형이상학이어야

 의지(실천적 이성) 원칙에 따라 행위하는 능력

 의지가 객관적 이성에 따르도록 강제하는 것이 명령법이다.

 정언적(무조건적) 명령법은 의도를 고려하지 않는 객관적 필연에 의한 명령  

 *숙달의 규칙-skill,뚜렷한 목적 아래 방법론

 *영리함의 충고-처세술,목적이 주관적이어서 권고적임, 자체로는 방법론

 *도덕의 명령-당위, 선험적 필연성

 정언적 명령은 [보편적 자연법칙으로 삼으려고 있는 그런 준칙에 따라 행위하라]

 

 최소한의 의무(사소하고 불가피한 예외를 인정한다는 )라는 개념은 정언적 명령을 인정

 정언명령의 기초는 인간본성에서 찾을 없음-순수 실천이성이 필요

 의지는 목적을 따른다. 인간은 목적 그자체로 존재하는 것이지 의지의 수단으로가 아니다

 인간이 목적 그자체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객관적이면서도 최상의 실천의 근거이다

 *자살하지 않으려면(자기자신에 대해)

 *거짓 약속의 비난이유(타인에 대해)

 *자기계발의 필요성(우연히 칭찬받을 의무, 인간성(목적) 향상)

 *기부행위(타인의 인간성을 위한 적극적 노력

 

 보편적 법칙을 주는 의지는 이성적인 존재 각각의 의지

 (자기자신에게서 나온 법칙 cf.루소의 사회계약론)

 목적의 나라와 조화

 *목적의 나라- 자기자신이 주는 보편적 법칙 아래 결합(자율성)

                     동인은 도덕성() 요구하는 존엄성(가격에 대비하여) 때문

자율성의 법칙과 일치하는 의지는 선한 절대의지(신의 의지)이다

선하지 않은 의지가 자율성의 원칙에 의지하는 -구속력

구속력 때문에 어떤 행위를 해야하는 객관적 필요성-의무

 

*도덕성의 최상 원칙인 의지의 자율성

  자율성의 명령->정언적 명령법-> 도덕성의 원칙

*도덕성에 대한 모든 사이비 원칙은 의지의 타율성에서 생긴다

  다른 어떤 것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어떤 것을 해야한다면 가언적 명련
*
타율성을 근본 개념으로 받아들이면 나올 있는 도덕성의 모든 원칙을 분류

  경험론-행복을 위한 경험에서 나온 도덕적 감정을 기초로함

  합리론-완전성을 위한 합리적으로 도출된 자랍하는 완전성(신의 의지) 기초로

자율성 도덕성의 정당성은 선험적 필연적이라는데 있다-> 순수실천이성비판

3 도덕 형이상학에서 순수 실천이성 비판으로 넘어감(이성-자유-도덕)
1.
자유라는 개념은 의지의 자율성 설명하는 열쇠이다

  의지가 모든 행위에 있어 스스로 법칙이 (자유-도덕)
2.
자유는 모든 이성적인 존재의 의지가 갖는 속성으로서 전제되어야 한다

  이성은 바깥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기의 원칙을 창시하는 ]

  이성-자유
3.
도덕성이라는 이념에 붙어 있는 관심에 대하여

  자유는 인간의 본성안에서 찾을  없다

  도덕-관심-감성과 오성을 전제하게 -이성의 자기발견

  결정되어 있는 감성계의 원인에서 독립된 자유가 존재한다 

4. 정언적 명령법은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

   지성계에 속하는 작용원인-의지

   감성계(해야하는 ) 속해도 지성계(하려하는 ) 복종함

5. 모든 실천 철학의 한계에 대하여

   자유와 자연의 모순 해결

   사물은 법칙에 복종하나 물자체는 법칙에 독립한다

   실천이성은 지성계에 의지의 대상까지를 끌어들일 없다.

   지성계는 관점일 뿐이다. 형식의 조건 의지의 자유를 따른다

   도덕적 감정(관심) 이성의 법칙이 의지에 작용한 것이지 결코 도덕 판단의 근거가 아니다

   법칙은 우리 의지에서 생겼으므로 우리에게 적용됨

   자유의 가능성과 도덕적 관심으로의 전환은 설명할 없다 (주어졌다)

   정언적 명령은 필연적인 것임을 개념으로 파악할 없다.

  

맺는
정언적 명령은 자유를 의도할 필연적 결론이다.

하지만,이성으로는 인간이 도덕적으로 살아야만 한다(정언적 명령) 이유(필연성) 찾을순 없다.

해제-자유로운 인간을 위한 도덕
1.
칸트의 철학과 '기초 놓기'
2.
칸트의 철학이 노리고 있는

3.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놓기> 대하여
(1)
머리말
(2)
1 도덕에 대한 평범한 이성 인식에서 철학적 이성 인식으로 넘어감
(3)
2 대중적인 도덕 철학에서 도덕 형이상학으로 넘어감
. 보편적인 법칙
. 목적으로서의 인간성
. 자율성과 '목적의 나라'
(4)
3 도덕 형이상학에서 순수 실천이성 비판으로 넘어감

4.
칸트의 도덕 철학이 갖는 현대적 의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서론
    기독교는 무정부적이다
 
1부 기독교적 관점에서 본 무정부
1. 어떤 무정부인가
   기독교는 권력의 거부 및 권력에 대한 싸움을 의미한다
   투표는 잘못된 민주정치 조직에 참여하는 것
   세금,예방주사,의무교육을 반대한다
   오늘날의 적은 중앙집권국가가 아닌 행정의 전능성과 편재성
   무정부사회를 위한 투쟁은 필수적이나 무정부사회는 실현이 불가능하다
   인간은 탐심과 권력욕이 없고 사회만이 부패했다는 근거에서 생긴 사상
   새 모델은 기층민중으로부터의 새로운 제도
   기술적 사회제도가 권력과 사회통제를 강화하므로 무정부만이 현재의 가장 유일한 수단이다.
   무정부는 권력 재강화의 회귀가능성이 없다.
2. 기독교에 대한 무정부의 공격
   기독교의 불관용이 전쟁을 야기한다
   기독교는 국가와 결탁되어 있었다
   지배자를 원치않는다-사랑이시다
   섭리위에 인간자유의 가능성이 사라진다-해방자이시다
   악이 존재한다.그러므로 신은 선하지 않거나 전능하지 않다-악은 우리의 결정이며 현재는 악에도 불구하고 보존되어 있을뿐이다.
 
2부 무정부의 근거로서의 성경
1. 히브리성경
   왕정에 대해 적대적이며 전혀 가치를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여김
2. 예수
    권력에 대한 경멸감과 철저한 무시
    국가는 마귀에게 속해있다
    가이사의 것 제한적임,생명 등 거의 모든 것 하나님의 것
    통치자는 종이 되어야함. 비정치화
    세금을 징수하는 권력을 조롱함
    국가는 칼로 망한다. 칼로 대항치 말라
    재판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에 악이 있다-침묵의 조롱, 권세에 대한 비난, 권위에 대한 자극
3. 요한 계시록
    짐승이 국가, 두번째 짐승은 선전, 정치세력이 인간에 대한 모든 권력 소유
4. 베드로 전서
    왕에게 순복-로마에는 왕이 없슴; 좀 엘룰이 무리하는군
5. 바울
    위에 있는 권세에 굴복-모든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원수도 사랑하므로 권세에 존경표시,그들을 위해 기도
    공중권세-예수의 순종에 의해 권력에 승리하심
 
부록
롬13:1-2에 대한 칼 바르트와 알퐁스 마이오의 해석
1. 칼 바르트
   기존질서의 모든 인간적인 적(혁명가)를 거부함
   진정한 혁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옴
2. 알퐁스 마이오
   정치구조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방해할 수 없다
   인간역사의 국가조직 또한 하나님의 계획을 위해 쓰여질 수 있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
   2세기 셀수스: 기독교인은 팍스로마나의 적
   기독교인의 의무불이행
   강제징집과 군복무거절, 그리고 사형
   공직수행중 교회에 들어가지 못함
   314년 콘스탄틴의 아를르 종교회의로 종말을 고함 
증거: 사제와 무정부주의자(아드리앙 듀쇼잘)
    모든 계급체계를 거부함
    하나님과 인간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임
    하나님께선 지배하지 않고 생명을 주신다
    철학과 신학은 스스로의 함정일 뿐이다
    참된 혁명은 계급체계의 거부와 타인에 대한 공포의 정신을 제거하는데 있다
    폭력에 대한 공포는 적에 대한 대면도 추종자에 대한 자유권도 허용하지 않는다
 
결론
기독교의 순응적 적응주의의 견제역할
우파나 좌파가 아닌 완충물
국가의 지배기준과 다른 사회에 대한 시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정신현상학 쉽게 읽는 철학 3
랄프 루드비히 지음, 이동희 옮김 / 이학사 / 2002년 6월
평점 :
절판


헤겔의 [역사속의 이성]을 읽고자 먼저 잡은 책이 이 책이다. 심지어 어떤 이는 그의 역사철학, 논리학, 법철학, 종교철학을 [정신현상학]의 발췌에 지나지 않다고 할만큼 그의 모든 사상의 체계와 윤곽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때문이다. 

1806년 멀리 예나의 외곽지역으로부터 나폴레옹 군대의 포성소리가 들려올때, 이 위대한 철학자의 가슴속에는 정신현상의 포성소리, 독일정신을 깨우는 포성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은 그의 신학적 배경으로부터 나온 교회의 표상을 극복코자하는 마음의 기획과, 당시의 프랑스로부터 밀려들어온 새롭게 한 민족의 역사를 쓰는 정신의 만남이었다.

종래의 철학이 절대정신 혹은 이성의 완성을 성부적 절대자에게서 찾았다면, 헤겔에게 있어 절대정신은 이제 육화된 세계정신이었다. 이것은 마치 성육신의 유비이며, 주인으로서의 신이 육화되어 지옥의 끝까지를 온전히 겪은 후 누리는 화해와도 같다. 이 새로운 피조물 즉 부활한 절대정신인 자기의식은 이제 새로운 세계를 보며, 지상의 삶 또한 궁극적 가치로 파악될 수 있게 된다.

프로테스탄트의 기치를 올린 독일민족에게, 루터가 파악한 이 진리는 300년이 지난 후 그 후손에 의해 철학으로 바뀌어진다. 하지만 변증은 원래의 계시 위에 하나님의 무조건적 화해의 규정과 이성에 의한 자기세계 구축이라는 인간적 생산물을 들이댄다.

또한, 정신의 일대혁명과 이를 역사속에 행동으로 구현한 프랑스인들은 이제 코밑에 다다랐다. 그의 육화된 절대정신은 이제 독일민족 안에서의 현실이 되어야 했다..인간이 왜 존재하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의 형이상학적 논의(칸트)가 아닌, [그따위 철학이 무엇에 쓸모있다는 말인가?] 라는 명제에 충실한 현실로의 철학의 전회다. 그는 독일연방의 통일과 국가 이데올로기의 제조에 그리고 단일국가에 익숙치 않은 독일 민족 구성원의 복종에 허다한 말들을 쏟아놓는다. 그래서 결국 강한 종교적 성향의 파편화된 민족을 새로운 탈종교적 삼위일체로 묶어내고자 한다. 어찌보면 abuse of theological concepts for the foundation of profane nation로 볼 수도 있지만 [철학이란 자신의 시대를 사상으로 포착하는 것이다]라는 그의 명제를 따른다면 당연한 운동인지 모른다.

[쉽게 읽는 헤겔]이라 붙힌 제목이 무색하게 몇번을 어려움을 느끼게 한 책이지만, 이 책을 마치고 집어든 [역사속의 이성]이 너무나 재미있고 와닿는 것이 된걸 보면, 분명 [정신현상학]의 원본 읽기 대신 선택한 것이지만 나와 같은 의도를 갖는 독자에겐 좋은 선택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판단력 비판 쉽게 읽는 철학 6
디터 타이헤르트 지음, 조상식 옮김 / 이학사 / 200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793년 칸트 3대 비판서의 마지막으로 저술된 이 책은 그의 비판철학의 마침표이자 오성과 의지, 판단을 엮어내는 인간 이해의 칸트적 완성본이다. 이런 그의 책을 일반인도 접근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이 책은 쉽게 칸트의 생각을 조망할 수 있도록 하는 미덕을 갖고 있다.

이 책은 원전의 순서대로 미적 판단력,숭고의 분석,목적론적 판단력비판으로 되어있으나 비교적 [아름답다라는 진술]은 무엇인가를 밝히는 취미판단과 압도당하는 느낌인 숭고의 분석에 지면을 많이 할애하고 있다. 칸트에게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주관적이지만 어느 정도의 보편타당성을 갖고 있다. 어느 것이 꼭 옳다라고 말할 수 없지만 말이다. 이 들어맞는다는 느낌(근사하다)이 질료적 경험이 배제된 순수한 의미의  취미판단이다.  숭고는 압도당하는 느낌이다.상상불허의 이 감정은 도리어 우리의 무제한성(이성의 능력과 실천이성의 존재)을 상기시켜 쾌로 이끈다. 

칸트는 이런 보편적 판단의 근저에 순수 미적 판단의 보편성 필연성이 존재함을 보이며 그의 논의를 이끌어간다. (이런 공통감은 인간의 상호이해와 연대감을 가능케 한다. 그래서 미는 철저히 사회에서만 의미가 있다.)  미적 경험은 미적 관점의 세계와 표준적인 방식에서 조화를 이루는 인간지성의 자기반성이다. 미는 오성과 상상력의 조화이고, 실천판단에서는 의지가 보편이성 법칙의 규준에 의거하여 자신과 합치된다. 이런 유사성은 오성과 미적 판단을 묶어준다. 결국 미와 이성과 실천인식간의 이런 통합은 합목적적인 세계현상의 관점아래 주체 인식능력을 강제성 없이 결합한다는 것이다. 분열되지 않는 자기통합이다. 피히테 식으로 말하자면 절대의지의 관점 아래에서, 진정한 인간의 자기통합, 즉 미적 만족, 오성의 질서, 도덕의 유의미적 실천이 가능해진다는 말이다. 칸트는 미적 판단에서 시작한 인간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인간이 인식할 수 밖에 없는 [합목적적 절대의지]를 드러나게 한 것이다.

자연과학에 있어 생물체안의 인과적 메카니즘은 작동의 원리를 설명한다. 그러나 인과적 설명은 有機體에 대한 목적론적 설명 연후에야 가동이 가능하다.  기계론적으로만 설명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그렇게 할 수도 없다는 이율배반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담론적 인간오성이 사물들이 구성주체에 의해 산출되는 인공적 메커니즘인 것처럼 가정하며 사유함으로 해소된다. 누군가 배후에 있다는 설명 이후에 가능한 기계론적 이해라는 것이다.

이 자연의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이다. 인간은 이 자연의 최종목적으로, 합목적적으로 자연의 목적 체계를 만드는 유일한 존재인 셈이다. 자연에 대한 책임을 알고 있다면 그는 자연을 자신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 인간이 최종목적이라는 것은 이런 위계의 질서를 지킬 책임을 알려주는 것이며, 이 책임은 다시 실천이성을 요구하여 절대의지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칸트의 이런 오성과 판단의 전체윤곽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은, 하나의 화살표처럼 인간안에 있는 절대자에 대한 선험적 지각과 인간존재의 의존성을 드러내준다. 미에 대한 판단과 숭고에 대한 경외감,대상에 대한 의미부여,도덕에 대한 의지, 오성의 선험적 틀들은 절대자의 존재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칸트는 여기까지가 인간오성이 자신의 숲길을 헤쳐가야할 마지막 지점이라고 말한다. 그 너머에는 계시만이 가능한 영역이다.그를 따라 다니다보니 계시앞에 더욱 겸손해짐을 깨닫는다.안내자가 겸손한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의 사명
J.G.피히테 지음, 한자경 옮김 / 서광사 / 1996년 8월
평점 :
품절


1792년 프랑스혁명 초기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대프랑스동맹을 결성하여 4월 프랑스를 공격하여 혁명전쟁이 발발한다. 결국 9월 발미전투의 패배로 프랑스의 원한만 산채로 물러난다. 신성로마제국은 결국 1806년 나폴레옹의 침략과 더불어 사라지고 만다. 이 중간기간 결국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서로 우위쟁탈전을 벌이던 시절, 1800년 프로이센의 베를린에서 이 책은 출간되었다.

프랑스의 혁명의 기운이 넘나들고 칸트의 새로운 철학의 영향이 독일전체에 미치고 있었다. 괴테에 의탁하고 있던 헤르더의 역사발전에 대한 믿음 또한 당시의 독일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던 많은 사람에게 깊은 영향을 주고 있었다. 그는 1793년 예나대학 교수시절 분명 칸트 [실천이성비판1788년]의 영향 아래 있었고 그것을 가장 잘 설명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하지만 1799년 베를린으로 옮길 무렵 그의 생각은 종교적 신념이 도덕적 이성을 능가한다는 견해로 옮겨간다. 이 저작의 1,2,3장은 이런 그의 견해의 발전을 잘 보여준다.

-------------------------------

1장은 먼저, 자연결정론 혹은 경험주의적 사고에 대한 불평으로 시작한다. 분명 자연결정론은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나, 자기 결정 능력이 없는 존재로 규정하고 만다는 것이다. 피히테는 이 사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이 슬프다.

2장은 마치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에서 등장하는 철학의 여신과의 대화처럼 지식과의 대화로 이어진다. 그 지리한 논의의 끝은 나의 감각에 의한 사물의 상태와, 직관하는 공간을 엮는 사유의 힘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은 우리자신의 안에서 벌어지는 표상능력의 결과일뿐 사물 자체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말씀. 동굴에 갇혀 밖을 내다보는 사람과 같아서 자기의 한계내에서만 인식하게 될 뿐이라는 것이다. 오성의 한계를 보여준다. 결국 지식에 의해 지식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은 오직 지식일뿐, 그 이상은 지식이 접근할 수 없다.

3장은 그 대안을 제시한다.결국 행위만이 이 순환의 고리와 한계를 끊고 나온다. 그 행위의 기준은 양심에 복종하는 것이다. 인간의 유일한 사명,현존의 전체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다. 마치 이것은 칸트의 정언적 명령을 듣는 기분이다. 곧 그는 이런 행위의 지상적 목적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더 나은 세계이다. 혁명과 인터내셔널까지를 비친다! 이런 지상적 목적의 실현은 초지상적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는 그것 또한 철저히 칸트에게서 가져온다. 자유로운 의지에 따른 양심에 대한 복종. 선한 의지의 비물질적 이성세계가 감성계의 물질적 세계를 규정한다. 비로소 삶의 확고한 출발점을 갖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피히테는 절대일자로의 자기견해를 비친다. 의지의 결과가 보장되려면 법칙이 존재하여야 한다. 그는 이 법칙을 무한의지, 일자, 영원한 절대자에게서 찾는다. 칸트철학의 종교적 비약과 연결이다. 그는 역사의 결말 또한 무한의지의 아래 있으므로 우리 행위와 존재의 의미가 있다고 확신한다.

---------------------------------------

이런 삶의 이유와 방향에 대한 확고부동한 믿음이 있었던 시대의 피히테는 행복하다. 우리의 시대는 다시 자연결정론의 시대이다.  꿈이 없는 경험주의적 삶의 고단함이 21세기 기술사회의 정체이다. 결정론의 총화인 기술문명의 필연성은 어떻게 극복되어질 수 있나, 불가능해 보이는 시대이다. 이성의 의지? 이성의 의지에 현혹된 인간의 좌초를 독일민족의 20세기에서 본다.(본회퍼) 20세기의 잘못된 꿈(모더니즘) 역시 이런 꿈없음보다 나을 것은 없어보이긴 마찬가지다.

21세기 혹은 그 후에 있어도 인간학의 근본주제는 그래서 지성이 단순히 자연-표현에 불과한 것인지에 달려있다는 생각이 든다. 뇌의 화학물질이, 유전적 성향이 결정짓는 인간이라면 이성의 의지란 없다. 그리고 그 판단 수단 역시 자연과학의 손에 들려져 있다. 이런 자연과학의 믿음은 의지에 비우호적이다. 적이 잘 봐주기를 바라는 패잔병과 같다고 할까? 인체의 작동원리라는 것, 정신의 흐름에 있어서 뇌 신경전달 물질의 전달과 시냅스들의 연결이라는 것, 그리고 질병의 발생양상과 그 경과라는 것, 이 모든 것이 사실, 내 인식안에서 다른 인간의 인식의 틀을 빌려 설명하고 있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자연과학자는 정신병리의 일종으로 취급하는 시대이다. 설명되어지지 않는 것을 꿰어맞추는 것은 비단 사이비의학이나 의철학의 문제가 아니라 의학 자체에서도 과학의 인식틀이라는 이름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걸 인정하긴 어렵다. 의학의 객관성도 의심받지 않는다면, 과학의 객관성이란 신성불가침이 아닌가?

자연결정론의 시대에 인문학적 사고를 한다는 것은 인간의 이성을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신의 존재와 신의 형상으로의 인간 창조와 신의 형상의 회복으로서의 의지의 결정의 자유를 전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피히테의 의견은 오늘 어떤 의미를 갖는것일까? 앞으로 더 생각해 보아야 주제이다.

P.S: 왜 독일 개신교에 뿌리를 둔 관념론에는 하나님만 계시고 그리스도는 사라지시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