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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병
키에르 케고르 지음, 최석천 옮김 / 민성사 / 1999년 7월
평점 :
품절
칸트에게 있어 문제의 실마리는 [형이상학의 한계]였다. 의미를 찾고자하는 인간의 갈 수 있는데까지를 가보는거다. 그것은 이성이 도달할 수 있는 경계선의 표시이며 신앙의 시작점을 알려주는 푯말이기도 했다. 헤겔에게 있어서 화두는 [역사의 배후]였다. 그리고 그것은 이성의 자율적 발전과 이성한계의 돌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성은 절대기준과 원동력으로 끝까지 갈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제 인생은 허접하게 느끼든 거룩하게 느끼든 인간이 부여한 의미를 획득케 된다. 쇼펜하우어는 이 모든 논의의 궁극적 실마리가 [고통]이라고 이야기한다. 무의미 속에 던져진 인간의 고통이다. 그는 의지에서 그 절대힘을 발견하며 헤겔처럼 그 힘을 올라타는 것이 아니라 그 힘을 자기 안에서 소멸시키기를 원한다. 의미를 요구하는 인생에 대해 인간의 자기정립을 통한 비웃음으로 무시하는거다. 의미는 소멸되고 인간은 자유로와진다고 믿는다.
그리고 여기 다시 [고통]을 실마리로 하는 한 사람이 있다. 1849년 그의 용어는 [절망]이다. 그는 이 절망을 차근차근 쪼개어가는 방법으로 파고들어간다. 절망하여 자아를 가지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 절망하여 자기자신이려 하지 않는 경우, 절망하여 자기자신이려 하는 경우이다.
가장 흔한 형태는 절망하여 자아를 가지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이성이 아닌 감성적인 것에 지배되는 보편적 인간은 비소크라테스적인 오류 안에(생각없이!) 살기를 즐겨한다. 신 앞에 자기를 개인적 정신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이며, 외관이 찬란하고 행복하고 선하게 살고 타인에게 헌신적이며 보편자를 인정하고 기독교회에 몸담고 있어도 무정신성 안에서 숨을 쉬고 있을 뿐이다. 현대사회의 바쁨과 물질성, 기술문명과 과학주의의 자기 맹목성은 인간을 절망하지 못하게 한다. 필요한 경우에는 쾌락에 마취시켜서라도 절망에 잠들게 한다. 절망이 그를 최후에 집어삼킬 때까지...그가 느끼지 못하는 절망을 산다.
절망을 느끼게 되면 인간은 자기이려하지 않는다. 젊은이는 [이따위로 계속 살진 않을꺼야!] 나이들면 [돌아갈래!] 나같은 30-40대는 그 사이에서 왔다갔다한다. 무엇이든 지금의 자기이고자 하지 않는다. 고상하게 헨리 애덤스처럼 오직 웃옷을 갈아입듯 새로운 자아로 바꿔입길 원하기도 한다. 이런 지상적인 어떤 것에 대한 절망은 지상적인 것 자체에 대한 절망으로 바뀐다. 세상은 다 쓸데없다...운운. 이것은 그래서 영원과 영혼에 대한 절망이기도 하다. 고독만이 친구이며 [아무도 이유를 모르는 자살]만이 출구인 듯도 보인다.
하지만 내가 왜 죽냐? 나는 살고 나를 이렇게 만든 상황을 소멸시키리라(절망하여 자신이려 하는 경우). 이 때 자아는 무한한 자기확대적 과대망상을 필요로 한다. 대단한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 이 가상 속의 자아를 스스로 성취시키거나 스스로 세뇌하여 그렇다고 믿거나 어쨌든 나는 살아야 한다. 능동적일때 역사의 실험자이던 그는 수동적일때는 지상적 고뇌를 제거하지 않고 모두 받아들이는 존재가 된다. 구걸하여 이 고뇌를 제거하느니 차라리 이것을 지닌 채로 자기자신으로 남겠다고 한다. 논리적으로 이렇게 조제한 자아는 현실 앞에 갑작스레 무의지, 무력 혹은 無가 된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런 자아를 반항의 존재로 본다. 고뇌는 받아들여도 구원은 받아들일 수 없는 굴욕으로 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쇼펜하우어가 느끼는 불안과 절망의 고통은 인간 안에 보편적 요소 혹은 구원의 기회로서의 축복이기도 하다. 이것은 우리 삶이 치유받아야 함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우리는 고통 혹은 절망을 통해 치유자에게로 나아갈 필요를 안다. 고통은 자기자신과의 관계에서 온다는 점에서는 쇼펜하우어와 닮았지만 그에게 절망은 구원의 신호탄인 셈이다. 그는 더 나아가 교회안에 숨어 이 절망을 맞닥들이지 않고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조차를 끄집어내어 드러낸다. 그리고 헤겔의 영향에 있던 구원가능성의 부정을 말하는 당시 새로운 신학의 정체까지를 말한다. 절망하나 구원을 거부하거나, 구원은 인정하나 개인으로서의 구원이 아닌 [집단이 담보한 자기들것으로의 구원]을 말하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이는 당시 유럽 기독교사회에서 그리스도를 만남이 아닌, 교회에 소속된 회원이 되는 것으로서의 절망에 대한 도피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 모든 요소는 사실 내 안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며 일어나는 일들이다. 현실에의 매몰, 고통에의 절망, 자아의 과대망상, 싸구려 복음. 오직 기도하고 있을 때, 다만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앞에 무릎 꿇고 있을 때만 나는 절망의 골짜기 속을 지나면서도 희망을 지닌다. 어떻게 이 사망의 골짜기에서 만족하고 살 수 있을까? 신적 부조리를 믿을 수 없다면 그것 밖에는 선택이 남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