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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성개선론

                   스피노자, 대양서적, 1981년.

 

 

 

 

 

그의 철학의 서론격인 이 책에서 그는 그의 탐구의 배경과 방향을 밝힌다. 인생이 허망함을 알았기에 궁극적 행복을 지속적으로 줄 무언가를 찾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그 방법으로 그는 1. 사물의 제1원인 찾기, 2. 수동감정의 극복과 조절, 3. 신체적 단련을 목표로 한다.(신학정치학) 이 일에 가장 선행하는 것은 그에게 지성의 개선이다. 1.허위를 감별하고 2. 탐구의 법칙을 정하고 3. 질서를 유지해가며 4. 완전관념으로 정진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1과 2에서 이 글을 멈추고 말았다. 3이야 그의 [생활수칙]대로 1. 속인에게 맞추어 이야기하기 2. 건강유지할 정도의 쾌락즐기기 3. 관습존중할 정도의 돈과 기타물건 추구로 이해하면 되지만 4에 대한 언급없이 이 글은 남았다. 혹자는 공통통념의 발견이 더 이상 스피노자로 하여금 [지성개선론]의 기하학적 존재의 관념에 머무를 필요가 없게 되어 [지성개선론]을 새로 써야했기 때문이라하고,  다른 사람들은 서론의 역할인 이 글이 [에티카]로 발전되어 갔으므로 구체적 언급은 필요없었다고 하기도 한다. 어찌되었든 그의 철학의 목표와 방법론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책은 [에티카]의 이해에 꼭 필요한 책이다.

에티카든 지성개선론이든 그는 그의 이성으로 신을 이해하리라 믿었다. 데카르트보다 한걸음 더 나아갔고, 철학의 위안이 궁극적 위안이 될 수 있으리라는 점에서는 보에티우스보다 또 한걸음 더 나아갔다. 그에 대한 혹독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신흥계급은 그의 이런 추구를 지지했고 한편으론 이용했다. 유태인으로 그를 이해하는 것도 17세기 사상흐름의 한 지식인으로 이해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는 위로를 자기 안에서 찾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인정받고자 했던 처절한 투쟁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찾을 수 없었던 것 같아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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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bertas 2004-11-25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피노자는 결코 자신안에서 위로를 찾는 자기 위안자는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카를님은 자기의식에 대한 집착이 강한것 처럼 보이는군요. 스피노자에게서 자기의식에 대한 관념은 상당히 미미하게 보이거든요. 제 생각에는 그는 자의식을 하나의 상상으로 생각했든 것 같습니다.


자기의식은 데카르트의 징표이지요. 스피노자가 데카르트의 영향하에 있었다는 건 부정하기 힘들지만 놀랍게도 그는 자기의식의 함정에 빠지지는 않았든것 같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그는 反데카르트적인 사유를 할수 있었을겁니다. 그게 그의 장점이기도 하구요. 한편으로는 헤겔이 스피노자에 대해 가진 양가적 평가의 원인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전 스피노자의 삶에서 별로 슬퍼보이는 점이 없거든요. 상식과는 달리 스피노자은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별로 주저함이 없었고 고립되어 있지도 않았거든요. 세계와의 고립, 이건 솔직히 스피노자와는 별로 연결이 안되는 신화이지요. 스피노자는 세상과 교통하기를 멈추지 않았고 그가 거주하든 모든 곳에서 결코 소외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가 다락방에 쳐박혀 있었다면 그건 자의에 의한 것으로 스스로 고독을 원했기 때문일겁니다. 그건 카를님도 종종 원하고 바랬든 그런 상황이겠지요. 스피노자의 삶을 보면 전 별로 측은하지 않습니다. 그는 항상 행복했을거 같으며 누군가 그에게 붙여준 '聖 스피노자'란 칭호에 걸맞는 삶을 누렸다고 생각합니다.


지성개선론에 관해서 말하자면 전 그의 청년기의 모습을 보는 듯 합니다. 글의 첫 부분은 상당히 인상적인 자서전적 서술로 시작합니다. 그것에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마세요. 그건 데카르트의 글도 대개는 그렇듯 자서전적인 서술로 시작합니다. 즉 새로운 철학을 하고자 했든 그 시대 문체의 한 특성이라고 생각하세요. 물론 보여지는 금욕적 문맥이 감동적이기는 하지만, 스피노자는 결코 금욕주의자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보기엔 상당한 금욕주의자로 보이지만, 스피노자 자신은 자신을 결코 금욕주의자로 생각하지는 않았을걸로 생각됩니다.


지성개선론이 개진하는 철학적 의미는 결국 에티카와 연결되고 복잡한 논의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이런 글에서 더 이야기 하는건 별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에티카에 대한 카를님의 서평에 댓글을 달았다가 이렇게 여기까지 오게 되어 간단한 글을 남기고 갑니다. 그럼...^^



건데 절 아시나요? 제 변변찮은 댓글에 지성개선론에 대한 평까지 부탁하셔서 조금은 당황스러워서요...^^

카를 2004-11-25 0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긴 덧글 감사합니다
 


 

 

 

 

 

 

 

 

1671년 집필시작-1689년 통치론과 함께 출간

I. 날때부터의 관념이란 없다
 
II. 관념
관념-단순관념
        복잡관념-관계
                     양상- 단순,혼합
                     실체- 단순, 집합
 
III. 관념의 기호인 언어는 한계를 갖는다.
언어의 명료화는 정의보다 감관으로 가능하다
언어가 명료화되면 도의의 논증까지 가능하다
 
IV. Knowledge란 관념간의 일치, 불일치 여부에 대한 지각(직관적,논증적,감각적)
Real knowledge란 관념과 사물이 일치할 경우
Truth란 기호와 사물의 일치, 불일치
Opinion이란 probability를 가진 명제에 대한 마음가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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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함과 행함

자크 엘룰 지음, 양명수 옮김 / 전망사
상품평점 ★★★★★ 

 

[To Will and To Do: An Ethical Research for Christians]라는 제목으로 1964년  출간된 이 책은, 국내에는 1990년 번역되었다가 절판되었다. 1964년은 기술의 역사 (The technological society)가 영문으로 번역될 무렵으로, 이 책은 현대사회의 기술지배하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대안이라 할 수 있는  윤리의 올바른 접근에 대해 바르트의 신학적 입장을 적용한 것이다.

엘룰은 먼저 윤리의 기원이 인간의 타락에 있음을 지적한다. 선과 악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자기의 기준을 제시하는 순간 타락은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제시하는 인간적 이성에 의한 선과 악의 구분은 결국 심판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이런 윤리의 결과는 자기정당성의 주장과 다른 사람에 대한 정죄이다. 에덴에서 그러했듯이... 더군다나 선과 악을 알기는 하나 스스로 그 기준을 충족시킬 능력은 없다.

선악의 기준인 윤리는 결국 타락의 질서이다. 계시가 아닌 인간규범내의 질서, 그리고 동시에 필연성의 질서이다. 필요한 것이 선이 된다. 선들은 새로 만들어지고 우선순위를 달리한다. 이것은 변화하는 가치에의 충성을 의미한다. 윤리란 항상 변하며 이것은 결국 불변하는 것과는 충돌할 수 밖에 없다. 이 두가지의 가치를 가진 자는 이 충돌을 경험한다. 그리스도인 안에서의 갈등이다. 인간의 윤리(그것이 그리스도교 윤리라 할지라도)와 하나님의 계시 사이의 충돌이다.

도덕은 그것이 특정 윤리이론에 근거를 둔 이론도덕이든(공자, 모세, 스토아, 아퀴나스, 칸트, 니체, 마르크스, 사르트르), 사회의 영향을 받은 체험적 도덕이든(그리스도교 사회, 공산주의 사회,부르조아 사회) 인간을 자기 뜻대로 자유롭거나 해방되게 하기보다 이론 자체나 사회의 틀속에 인간을 소외시킨다. 비도덕은 그렇다고 대안인가? 도덕의 탈피는 다른 도덕으로 인도하고, 결국 인간을 서로 자기정당화로 분리시키고 서로를 은폐시키기는 마찬가지다.  

지금의 현대사회는 부르조와윤리로 시작된 기술윤리가 지배하고 있다. 그 특징은 [행위에만 관심]을 갖는다는 것과(의도나 동기는 중요치 않다), 그 기준이 정상(normal)이냐, 다수에 속하느냐에 있다. 그래서  성공은 선이 되고 실패는 악이다. 이 시대는 [적응이 최대의 미덕]이며 덕은 노동과 훈련, 인내와 극기이다. 기술노동에 필요한 구조적 선이 윤리적 선의 자리를 차지한 셈이다.

엘룰은 따라서 그리스도교 윤리란 불가능하다고 한다. 결정된(defined) 선이란 존재하지 않는 그리스도인과 윤리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럼에도 윤리는 필요하다고 한다. 이는 신앙을 상황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이다. 이럴 때 윤리는 권고이어야 한다. 최소한의 요구이다. 또한 판단을 내세우지 않는 선한 행동이다. 이 윤리는 하나님의 뜻과 세상윤리 사이의 대립을 보여주는, 사람들 속에 나타남이다. 아무 자격이 없지만, 그리스도로 이 땅에 남겨진 사람은 사람들 속에 살며 그들을 위해 살아야하고 말해야하고 구부려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 수많은 선과 악의 기준 속에 살고 있다. 좌와 우, 노와 소, 빈과 부, 민족, 출신, 학식, 수입, 예의, 종교, 유대인인가, 흑인인가, 아랍인인가 수많은 철조망들이 바리새인과 같은 엄격한 이론으로 무장한 우리안에 살벌한  경계선을 드리우고 있다. 사랑하게 하려고, 서로 섬기게 하려고, 도와주게 하려고, 대접하게 하려고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하시고, 구하여 새사람 삼으셨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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